청계천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다pdfpress.uos.ac.kr/745/74512.pdf · 2020. 7.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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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공사를 마친 청계천은 도심 을 가로지르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화했 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동아일보 앞 청계광 장에서 용답동 신답철교까지 5.84km에 걸 쳐 진행됐다. 이 공사를 통해 청계천 위를 지나가던 청계고가가 철거되고 공원에 맞춘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됐다. 공사 후 15년이 지난 지금, 여름철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청 계천을 찾아봤다. 청계천 상류, 역사와 전통을 지키다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 중 청계광장부터 하류로 2km는 역사와 문화를 테마로 만들 어졌다. 청계광장부터 광장시장까지의 구 간이 이에 해당한다. 청계천의 처음을 장식 하는 구간은 바로 청계광장이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어 청계천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청계천은 원래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 천이었다. 하지만 복원사업 이후 매일 4만 ㎥의 물을 공급해 현재는 항상 물이 흐르고 있다. 조금 걷다보면 한쪽은 현대식 다리, 다른 한쪽은 옛날 돌다리 모습을 하고 있는 특이 한 다리가 보인다. 바로 광통교다. 이 다리 는 옛날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광통교를 복 원한 것으로 복원 사업 당시 남아있었던 광 통교의 기둥을 이용해 복원했다. 광통교에 서 조금 더 내려가면 역사와 관련된 조형물 을 하나 더 찾을 수 있다. 광교와 삼일교 사 이, 청계천 북쪽 벽에는 정조가 화성으로 행 차할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그려져 있다. 청계천 중류, 현대의 한복판을 거닐다. 조금 더 걷다가 청계4가에 다다르자 풍경 이 조금 바뀌었다. 빌딩 숲에서 벗어나 건물 의 높이가 낮아지더니 청계천 옆으로 시장 이 줄지어 나타났다. 광장시장이 위치한 청 계4가부터 청계8가까지의 테마는 현대와 문화다. 테마에 걸맞게 이 구간에는 1960년 대 우리나라 산업을 주도했던 각종 상점들 과 공장들이 늘어서 있다. 청계천에 있는 다리에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있지만 이름이 두 개 붙어있는 다리가 딱 하나 있다. 바로 평화시장 앞에 있는 버 들다리다. 이 다리에는 ‘전태일 다리’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1970년, 전태일 열사 가 이곳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목 숨을 끊었다. 이 다리 위에는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햇빛이 내리쬐 는 와중에도 그가 일하던 평화시장은 아직 남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계천 하류, 미래와 환경을 향해 나아가다 전태일 다리를 지나 10분 정도 걷자 주변 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제 주변에 는 공장이 아닌 아파트와 주거단지가 보인 다. 이전과 달리 산책로엔 많은 식물들이 눈 에 띄었다. 이 구간의 테마는 미래와 환경이 다. 성북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에는 아무것 도 받치고 있지 않은 다리 기둥 3개가 서 있 다. 바로 옛날 청계고가를 지탱하고 있던 기 둥들이다. 그 밑으로는 식물의 생명력을 보 여주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옛날 판잣집 모양을 재 현해놓은 구조물이 나타났다. 청계천 박물 관 앞에 위치한 이 구조물은 바로 판잣집 체 험 장소다. 비록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로 인해 운영을 잠시 멈췄지만 청계천 박물 관에서는 이전 청계천의 역사와 복원 과정 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백로가 사는 청계천 복원공사 이전 청계천은 고가도로 밑에 가려져 황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원으로 변했다. 물도 맑아져 많은 물 고기와 새들이 찾고 있다.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백로가 물고기를 사냥하는 모습도 발 견할 수 있다. 이번 여름에는 도심 속 공원 인 청계천을 찾아 곳곳의 의미를 되새겨 보 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_ 이정혁 기자 [email protected] 그림_ 이은정 기자 [email protected] 제745호 2020년 7월 14일 화요일 12 문화 청계천의 과거현재를 만나다 최근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 면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청계천을 찾는 시 민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심 속 피서지를 비롯해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로 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청계천은 여 러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또한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청계천은 역 사, 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흐 르던 개천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청계천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조선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개천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개천’이라고 불렸 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립하기 전 까지 청계천은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 구조였던 한양의 지리적 특성상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들은 도성 한 가운데로 모여 동서를 가로지르며 흘렀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수로 조성 과정 없이 청 계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절별 강 수량의 차이가 큰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청계천의 유량은 건기, 우기에 따라 변화가 심했다. 비가 적게 내리는 봄, 가을에는 건 천의 모습이었지만 여름철이면 범람과 홍 수가 잦아 주변 가옥이 침수되거나 익사자 가 발생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이에 조선 초 기 자연 상태였던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태종은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대 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이때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를 지칭했던 ‘개천’이 청계천을 부르는 고유명 사로 쓰이기 시작했다. 세종 때는 수중에 표 석을 세워 수위를 측정하고 사전에 홍수를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기에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돼 하수도의 기능을 하 기도 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정비에도 청계천 부근 의 잦은 침수와 다리 유실 등의 문제는 여전 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조선 중기 두 차례의 전란 이후 한양의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도 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활하수가 늘어났 다. 또한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흘러내리 는 토사까지 더해져 개천이 감당하기 어려 운 수준이 됐다. 이에 영조는 개천 정비와 구휼의 목적으로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의 깊이와 너비를 파서 쳐내는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펼쳤다. 이후 준천은 영조 이후에도 2~3년 주기로 실시되며 한양의 기본 정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청계로가 된 청계천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경 일본은 개천에 ‘맑은 계곡물’을 뜻하는 ‘청계천’이라는 이름 을 붙였다. 조선시대 양반층과 중인층의 거 주지인 북촌과 남촌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인이 거주하 는 종로와 일본인이 모여살던 ‘혼마찌’를 가 르게 됐다. 도시개발도 주로 일본인이 거주 하던 청계천 남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 편 이 시기 오랫동안 방치됐던 청계천은 이 름의 뜻이 무색해질 만큼 오수로 가득해졌 다. 또한 일본은 1920년대 이후 하천을 덮 는 복개계획을 발표하며 서울을 병참기지화 하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다. 8·15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청계 천 주변에는 갈 곳 없는 피난민과 서울로 상 경한 수 많은 빈민들이 모여 판자촌을 이뤘 다. 해방 전후 쌓인 토사와 쓰레기로 가득했 던 청계천은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판짓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로 인해 빠르 게 오염됐다. 결국 천변의 악취를 비롯한 여 러 문제 해결을 위해 공사가 이뤄졌다. 청계 천은 아스팔트로 메워졌고 주변에 가득했던 판잣집들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 를 대신했다. 이후 청계로가 된 청계천에는 평화시장, 세운상가를 비롯한 큰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 산업 의 중심지가 됐다.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었 던 청계천이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된 것 이다. 그러나 청계로의 황금빛 시절도 잠시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청계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낙후되고 생태환경과 역사보존 의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개도로와 고가 도로를 철거하고 그 아래에 덮여있던 청계천 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 에 2002년 서울시장선거의 주된 쟁점으로 청계천 ‘복개(復開)’가 떠올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은 2년 3개월 만에 서 둘러 청계로를 청계천으로 복원시켰다. 신유정 기자 [email protected] 과거: 600년 역사를 품은 청계천 현재: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은 청계천 ▲ 청계8가에 위치한 존치교각들. 청계고가 철거 당시 기둥 일부를 남겨 보존하고 있다. ▲ 청계천 다리의 모습을 상류에서 하류까지 그림으로 모아봤다. ▲ 청계1가에 위치한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타일 옆을 시민들이 걷고 있다. ▲ 여름철 낯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 복원 공사 이후 청계천은 도심의 열을 줄이는 바람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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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다pdfpress.uos.ac.kr/745/74512.pdf · 2020. 7. 14. · 지난 2005년 공사를 마친 청계천은 도심 을 가로지르는 시민들의

지난 2005년 공사를 마친 청계천은 도심

을 가로지르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화했

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동아일보 앞 청계광

장에서 용답동 신답철교까지 5.84km에 걸

쳐 진행됐다. 이 공사를 통해 청계천 위를

지나가던 청계고가가 철거되고 공원에 맞춘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됐다. 공사 후 15년이

지난 지금, 여름철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청

계천을 찾아봤다.

청계천 상류, 역사와 전통을 지키다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 중 청계광장부터

하류로 2km는 역사와 문화를 테마로 만들

어졌다. 청계광장부터 광장시장까지의 구

간이 이에 해당한다. 청계천의 처음을 장식

하는 구간은 바로 청계광장이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어 청계천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청계천은 원래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

천이었다. 하지만 복원사업 이후 매일 4만

㎥의 물을 공급해 현재는 항상 물이 흐르고

있다.

조금 걷다보면 한쪽은 현대식 다리, 다른

한쪽은 옛날 돌다리 모습을 하고 있는 특이

한 다리가 보인다. 바로 광통교다. 이 다리

는 옛날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광통교를 복

원한 것으로 복원 사업 당시 남아있었던 광

통교의 기둥을 이용해 복원했다. 광통교에

서 조금 더 내려가면 역사와 관련된 조형물

을 하나 더 찾을 수 있다. 광교와 삼일교 사

이, 청계천 북쪽 벽에는 정조가 화성으로 행

차할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그려져 있다.

청계천 중류, 현대의 한복판을 거닐다.

조금 더 걷다가 청계4가에 다다르자 풍경

이 조금 바뀌었다. 빌딩 숲에서 벗어나 건물

의 높이가 낮아지더니 청계천 옆으로 시장

이 줄지어 나타났다. 광장시장이 위치한 청

계4가부터 청계8가까지의 테마는 현대와

문화다. 테마에 걸맞게 이 구간에는 1960년

대 우리나라 산업을 주도했던 각종 상점들

과 공장들이 늘어서 있다.

청계천에 있는 다리에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있지만 이름이 두 개 붙어있는 다리가

딱 하나 있다. 바로 평화시장 앞에 있는 버

들다리다. 이 다리에는 ‘전태일 다리’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1970년, 전태일 열사

가 이곳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목

숨을 끊었다. 이 다리 위에는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햇빛이 내리쬐

는 와중에도 그가 일하던 평화시장은 아직

남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계천 하류, 미래와 환경을 향해 나아가다

전태일 다리를 지나 10분 정도 걷자 주변

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제 주변에

는 공장이 아닌 아파트와 주거단지가 보인

다. 이전과 달리 산책로엔 많은 식물들이 눈

에 띄었다. 이 구간의 테마는 미래와 환경이

다.

성북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에는 아무것

도 받치고 있지 않은 다리 기둥 3개가 서 있

다. 바로 옛날 청계고가를 지탱하고 있던 기

둥들이다. 그 밑으로는 식물의 생명력을 보

여주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옛날 판잣집 모양을 재

현해놓은 구조물이 나타났다. 청계천 박물

관 앞에 위치한 이 구조물은 바로 판잣집 체

험 장소다. 비록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로 인해 운영을 잠시 멈췄지만 청계천 박물

관에서는 이전 청계천의 역사와 복원 과정

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백로가 사는 청계천

복원공사 이전 청계천은 고가도로 밑에

가려져 황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원으로 변했다. 물도 맑아져 많은 물

고기와 새들이 찾고 있다.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백로가 물고기를 사냥하는 모습도 발

견할 수 있다. 이번 여름에는 도심 속 공원

인 청계천을 찾아 곳곳의 의미를 되새겨 보

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_ 이정혁 기자 [email protected]

그림_ 이은정 기자 [email protected]

제745호 2020년 7월 14일 화요일

12 문화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다

최근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

면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청계천을 찾는 시

민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심 속

피서지를 비롯해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로

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청계천은 여

러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또한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청계천은 역

사, 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흐

르던 개천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청계천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조선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개천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개천’이라고 불렸

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립하기 전

까지 청계천은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 구조였던 한양의 지리적 특성상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들은 도성 한

가운데로 모여 동서를 가로지르며 흘렀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수로 조성 과정 없이 청

계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절별 강

수량의 차이가 큰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청계천의 유량은 건기, 우기에 따라 변화가

심했다. 비가 적게 내리는 봄, 가을에는 건

천의 모습이었지만 여름철이면 범람과 홍

수가 잦아 주변 가옥이 침수되거나 익사자

가 발생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이에 조선 초

기 자연 상태였던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태종은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대

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이때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를

지칭했던 ‘개천’이 청계천을 부르는 고유명

사로 쓰이기 시작했다. 세종 때는 수중에 표

석을 세워 수위를 측정하고 사전에 홍수를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기에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돼 하수도의 기능을 하

기도 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정비에도 청계천 부근

의 잦은 침수와 다리 유실 등의 문제는 여전

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조선 중기 두 차례의

전란 이후 한양의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도

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활하수가 늘어났

다. 또한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흘러내리

는 토사까지 더해져 개천이 감당하기 어려

운 수준이 됐다. 이에 영조는 개천 정비와

구휼의 목적으로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의

깊이와 너비를 파서 쳐내는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펼쳤다. 이후 준천은 영조 이후에도

2~3년 주기로 실시되며 한양의 기본 정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청계로가 된 청계천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경 일본은 개천에

‘맑은 계곡물’을 뜻하는 ‘청계천’이라는 이름

을 붙였다. 조선시대 양반층과 중인층의 거

주지인 북촌과 남촌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인이 거주하

는 종로와 일본인이 모여살던 ‘혼마찌’를 가

르게 됐다. 도시개발도 주로 일본인이 거주

하던 청계천 남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

편 이 시기 오랫동안 방치됐던 청계천은 이

름의 뜻이 무색해질 만큼 오수로 가득해졌

다. 또한 일본은 1920년대 이후 하천을 덮

는 복개계획을 발표하며 서울을 병참기지화

하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다.

8·15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청계

천 주변에는 갈 곳 없는 피난민과 서울로 상

경한 수 많은 빈민들이 모여 판자촌을 이뤘

다. 해방 전후 쌓인 토사와 쓰레기로 가득했

던 청계천은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판짓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로 인해 빠르

게 오염됐다. 결국 천변의 악취를 비롯한 여

러 문제 해결을 위해 공사가 이뤄졌다. 청계

천은 아스팔트로 메워졌고 주변에 가득했던

판잣집들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

를 대신했다. 이후 청계로가 된 청계천에는

평화시장, 세운상가를 비롯한 큰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 산업

의 중심지가 됐다.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었

던 청계천이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된 것

이다.

그러나 청계로의 황금빛 시절도 잠시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청계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낙후되고 생태환경과 역사보존

의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개도로와 고가

도로를 철거하고 그 아래에 덮여있던 청계천

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

에 2002년 서울시장선거의 주된 쟁점으로

청계천 ‘복개(復開)’가 떠올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은 2년 3개월 만에 서

둘러 청계로를 청계천으로 복원시켰다.

신유정 기자 [email protected]

과거: 600년 역사를 품은 청계천

현재: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은 청계천

▲ 청계8가에 위치한 존치교각들. 청계고가 철거 당시 기둥 일부를 남겨 보존하고 있다.

▲ 청계천 다리의 모습을 상류에서 하류까지 그림으로 모아봤다.

▲ 청계1가에 위치한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타일 옆을 시민들이 걷고 있다.

▲ 여름철 낯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 복원 공사 이후 청계천은 도심의 열을 줄이는 바람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