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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예 술 담 론 계 간 지

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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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문화융성시대, 대

구의 길을 찾다 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목차

conten

ts비평 & 리뷰

대구예술의 힘

문화이슈

사람들

문화공감

대구문화재단

캐리커처 에세이_작곡가 금호 박태준_남세진

기획특집을 준비하며

문화도시 대구가 가야 할 길_이효수

새로운 대구문화예술 정책을 기대하며_오동욱

이제는 문화예술인도 바뀌어야 한다_이상규

5주년 맞은 대구문화재단이 가야할 길_노병수

새로운 대구 지방정부에 바란다

차기 대구시장에 바란다_류형우

한 그루 사과나무_리우

속물주의에 맞서_신재기

낙숫물 문화예술정책을 기대하며_조두진

영상_대구 사진의 선각자 구왕삼_김태욱

건축_대구 건축의 거목 후랑 김인호_장석하

미술_김호득의 작품세계_장미진

무용_장유경 무용단 ‘푸너리 1.5’_김예림

문학_박정남 시집 ‘꽃을 물었다’_변학수

음악_음악, 그 영성에 관하여_정은신

영화_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_이진이

인터뷰_대구시향 상임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_박철하

대구, 지금 여기_미리 본 대구 문학관_임언미

시_시가 있는 풍경 - 도광의

연재_김종욱의 권번의 예인(藝人) 이야기

신간_대구 예술인의 신간 2권_신상조

대구문화재단 책의 날

대구-항주 예술교류를 시작하며

대구의 신진예술가 날개를 달다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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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작곡가

금호 박태준1900 ~ 1986

글_소운 남세진성악가·교수

캐리커처_이일남화가

박태준 선생과의 만남

내 어릴적 아련한 기억속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포항

두호동의 집은 나에게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나

의 선친은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셔서 곧잘 바이올린을 우

리에게 들려주시곤 하셨다. 가끔 박태준 선생의 ‘사우’와 ‘물

새 발자욱’을 들려 주셨는데, 누나와 난 흥얼거리며 따라 부

르곤 했었다.

그 바닷가를 거닐면서 작은 파도와 모래가 부딪치는 소

리를 듣는 게 나에겐 작은 즐거움이었고, 그 바닷가를 산책

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캐리커처 에세이

대구 예술인을 찾아서

6.25사변 후 피난갔다 다시 찾은 그 행복한 집은 더 이

상 나의 기억속의 집이 아니었다. 깊이 숨겨두었던 바이올

린은 두 동강이 난 채 마당에 뒹굴고 있었고, 레코드판들은

산산히 부서진 채 흩어져 있었다. 그 이후 다시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고 아

까운 일이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포항 제일교회에 아주 귀한 손님

이 오셨다. 바로 그 분이 음악가 박태준 선생이셨다. 그 당

시 박태준 선생은 주한 미공보원장으로 부임하셨는데, 가끔

미공보원에서 음악감상회를 열어서 직접 해설도 하셨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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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성가대도 지도해주셨다. 중학교 5학년의 난 그 음

악감상회에 꼭 참석하여 음악에 대한 목마름을 달랬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난 박태준 기념사업회의 초대회장

을 맡으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음악과 예술세계를 만날 기회

가 있었다. 기념음악회를 준비하며 그의 음악에 다시 한 번

심취하였고, 가곡뿐만 아니라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사

랑하는 마음으로 동요까지 작곡하셨던 박태준 선생의 작품

들을 들을 수 있게 음반과 악보집을 제작하였다.

박태준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도 한국인의 혼을

잃지 않은 작곡가였으며, 민족정신이 투철한 음악가였다.

1922년 마산 창신학교의 22세 교사 박태준과 19세의 이은상

이 어스름한 달빛아래 바닷가에서 조우하였다. 그 날, 박태

준 선생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첫사랑’을 이은상에게

털어 놓았다.

박태준 선생이 대구 계성학교를 다닐 무렵 현 대구 중

구 동산동 계명대 동산의료원과 신명학교 사이의 동산에 위

치한, 담쟁이 넝쿨이 휘감고 있는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

들이 있는 청라언덕에서 등교길에서 만난 신명학교에 다니

던 한 여학생을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이 여학생은 백옥과

도 같은 흰 피부를 지닌 미인으로 마치 한 송이 백합화를 보

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유학을 떠

났다. 그녀가 떠난 후 청년 박태준은 그날 밤 숙소에 돌아가

서 그녀를 생각하며 곡을 썼다. 이런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

은상은 박태준의 곡에 봄, 여름, 가을, 겨울 4장의 가사를 붙

여 우리나라 최초의 4절 유절형식의 가곡인 ‘동무생각’을 탄

생시켰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지 요즘 출판되는 가곡집에

는 3장의 시가 빠지고 1, 2, 4절만으로 실리고 있다.

이 곡은 처음 마산에서 불리기 시작하여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북한에서도 ‘동무생각’이 뮤직비

디오로 제작되었고, 동요곡 ‘오빠생각’이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6월에 ‘동무생각’의 노래비가

그가 그의 사랑을 만난 동산언덕에 세워져 있다.

난 대구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인 박

태준 선생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그가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인 대구의 또 다른 자랑으로 재탄생되길 바라며, 그의

주옥같은 동요와 가곡들이 더욱 애창되길 기원하며 노래비

의 글귀로 이글을 마무리한다.

청라언덕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박태준 1901-1986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 ‘동무생

각思友’이다. 바로 이곳이 푸른靑 담쟁이蘿 넝쿨이

휘감겨 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

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란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

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랫 소리가 울려퍼지길

기원하면서…

금호 박

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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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 Ⅱ

새 대구정부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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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을 준비하며 김선굉

‘대문’ 편집위원장

세월호는 창이다. 희생자들, 특히 꽃다운 시절을

곱게 피워보지도 못 한 채 우리 곁을 떠나간 젊은 학

생들이 목숨으로 빚어 우리에게 건네 준 너무나도

소중하고 값진 상징의 창이다. 우리는 지금 그 창을

통해 우리의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부끄러워

하고 있다. 이 창은 때로는 현미경으로 우리 사회의

추악한 집단 무의식을 클로즈 업시키기도 하고, 때

로는 신비한 스팩트럼으로 정글이 되어버린 우리 사

회의 구조적 모순을 환하게 들추어 내고 있다.

심보선 시인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누구

나 잘 안다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노래했다. 어린이를 유난히 좋아

했던 미국의 화가 키스 해링은 <세상의 모든 일들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고 가슴 아픈 창을 통해, 세월

호를 둘러싼 추악한 조직과 그 조직과 연결된 더 추

악한 먹이 사슬을 들여다보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아, 세월호는 그렇게 가라앉게 되어 있었구나. 우리

가 절망하고 있는 것은 청해진해운을 떠나, 세모를

떠나, 관피아를 떠나, 무능한 정부를 떠나, 누구도

세월호의 공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십 여 년 전 이성복 시인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쓴 「그날」이 지금까지 우

리가 살아온 나날이었으며, 세월호의 침몰은 그러한

나날이 쌓여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참회의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가 던진 엄청난 충격은 걷잡을 수 없는 쓰나

미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다. 희생자들

은, 특히 어린 학생들의 영혼은 지금 우리 모두를 향

해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준엄하게 묻고 있으며,

이렇게 살다가는 나라 전체가 거대한 세월호가 되어

역사의 바다 속으로 침몰할 수도 있다는 값진 교훈

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앞으로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은 세월

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로 나누어질 가능성이 있다.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며, 그 방향은 정의롭고 아름

다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희생이 우리 사

회의 집단 외상성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우리 모두의

어두운 내면을 환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창으로 되살

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특집이 6월 4일

지방 선거를 통해 태어나게 될 새 대구정부에 거는

기대와 제안을 무겁게 담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새 대구정부가 6월 4일 이전이 아니라 세월호 이전

과 달라져야 할 역사적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대문』 여름호가 아픔과 절망을 넘어

서는 문화 예술의 다리를 놓는 심정으로 봄호에 이

어 『문화 융성 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 2-대구 문화

예술의 미래 비전』을 제안하는 이유다. <그래도 지

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그래도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

며, 그래도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다시 힘을

내야 한다. 『대문』은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한 인

문학이 그 미래를 향한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이 특집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아주

조그마한 기원이자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구의 대답

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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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왜 문화도시이어야 하는가? 문화도시 대구! 그것이 바로 품격 높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문화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평화, 사랑과 관용, 조화와 공생의 미학을 가르쳐주고, 과거, 현재, 미

래를 이어준다. 그림과 사진을 보며 조화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시를 감상하며 사랑과 관용의 심성을 깨우친다. 춤과

노래로 슬픔과 기쁨을 녹인다. 문화재를 둘러보며 과거로 돌아갈 수 있

고, 공상과학 소설을 읽으며 미래를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 문화는

사람과 자연, 너와 내가 왜 함께 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문화는 머

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흐르며 동감의 물결을 일으킨다.

도시의 문화는 문화예술인만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 말과 행동,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할 줄 안다면 그것이 바로 품격이

요, 그러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유형, 무형의 아름다움이 품격 높은 도

시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문화도시, 문화시민의 자존심과 자긍심이다.

왜 문화도시이어야 하는가? 문화의 꽃밭에서 경제가 살아나고 있

다. 문화는 이제 가슴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흐르면서 순수

를 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을 넘어

우리에게 먹거리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는 세계로부터 사람

을 불러들여, 관광, 음식, 숙박, 관광의료, 교통, 교육, 국제회의, 컨벤

션, 전시산업 등 전통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문화는 또한 21세기에 들어오면서 ICT기술과 만나 영화, 게임, 앱

문화도시 대구가

가 야 할 길

이효수

전 영남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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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많은 창조산업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선진 각국들은 새로

운 성장 동력으로 문화기반 창조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창조도시를 경쟁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문화도시가 바로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길이

다. 어떤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인가? 안미풍安美豊

의 도시, 안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가 살

기 좋은 도시이다. 문화는 안전과 아름다움을 추구

하고, 창조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니, 문화

도시는 ‘안미풍’이 갖추어진 살기 좋은 도시다.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순수예술이 꽃

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 순수예술의 꽃밭에는 끝

없는 상상의 날개 짓이 있고, 밝고, 맑고, 따뜻한 마

음이 흐르고, 생명을 소생시키는 치유의 길이 있다.

우리는 압축 성장 시대를 살아오면서 조급증에 걸렸

고,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있다. 인문학과 문화예술

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순수문화예술의 가치를 모

른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실용 과학기술을

강조하면서 기초학문이 무너지고 이론교육을 소홀

히 한다. 순수문화예술이 문화 창조산업의 씨앗이

고, 기초과학이 기술의 씨앗이다. 씨앗이 있어야 꽃

을 피울 수 있는데, 우리는 씨앗을 만들지 말고 꽃을

피우는데 집중하라 한다. 좋은 씨앗을 만들어야 건

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창조경제를 위해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 창의

적 인재가 누구인가?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인

재이다. 어떻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를 수 있을까?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대구

의 모든 초중고등 학교에서 매일 한 편의 시를 낭송

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사람과 자연

을 사랑하고 깊은 관심을 갖는 따뜻한 심성이 길러

져야 그 속에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란다.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문화와 삶이 함

께 하는 도시를 만들자. 문화는 삶 속에 녹아 있어야

생명력이 있고, 삶은 문화 속에 있어야 풍요로워진

다. 문화가 삶과 유리되어 있고, 문화예술인이 일반

시민과 거리를 두고 있는 곳에 문화가 꽃피기 어렵

다. 세계적인 문화도시를 가보라. 박물관과 미술관

이 도시의 중심에 있지 않은가? 대구처럼 한적한 곳

에 있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매일 같이 시민과 함께하

는 새로운 액티비티가 활성화 될 수 있다.

광장문화, 길거리문화를 만들자. 시민과 관광객이

‘빼앗긴 들

에도 봄

은 오

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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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언제나 쉽게 다가가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광장문화,

길거리문화가 도시의 매력을 발산시킨다. 젊은이들이

끼를 발산할 수 있는 놀이터가 있어야 한다. 시가 흐

르는 카페문화가 있는 카페거리를 만들자. 매일 시인

이 직접 시를 낭송하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카

페, 문화가 녹아 있는 독특한 카페들을 만들자.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걸작과 명물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문화도시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건축물이 있다. 대구는 수백 년의 역사가 묻어나는

건축물이 없다. 물론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지금 만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상상을 초

월하는 디자인으로 사람을 끄는 걸작 현대건축물들

이 있다. 스페인의 쇠락한 철강도시 빌바오는 1997

년에 문을 연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으로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 한 이 아름다운 유선형의

독특한 미술관 건물은 전시 미술품보다 더 관심을

끌면서 한 해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을 이 도시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 독창적인 건물은 뛰어난 상상

력과 창의적 아이디어, 과학적 사고의 결정체로 단

순히 관광객을 불러들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

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불어 넣어

구겐하임 빌

바오 미

술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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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화도시 대구가 가야 할 길

문화는 자유와 개성, 개방성과 다양성, 인정과 존중, 괴상함과 독창성을 먹고 자란다.

우리가 문화도시를 만들고 싶다면 닫힌 문화, 끼리끼리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주고 빌바오 시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철학과 꿈이 있

는 글로컬 이니셔티브Glocal Initiative 리더십이 필요하

다. 글로컬 이니셔티브가 무엇인가? 글로벌과 로컬

즉 지역에 뿌리를 딛고 세계의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철학과 꿈, 비전과 안목, 전략과 실행력을 지

닌 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당시 빌바오의 지도자들이 문화에 대한 투자가

곧 경제에 대한 투자라는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면,

스페인을 넘어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게 미래를 맡기

는 안목과 담대함이 없었다면, 실업률이 30%에 육

박하는 경제난 속에서 당장의 먹거리가 필요하다는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담아낼 수 있는 리더십이

없었다면, 오늘의 빌바오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빌바오에는 당시에 스페인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

으로 유명한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과 미국 건축가

의 디자인을 끌어들이는 글로컬 이니셔티브 리더십

이 있었다.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대구시 전체를

시민중심의 문화도시로 설계하고 하나하나씩 추진

하자. 문화도시가 되려면 문화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한다.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 마크가 필요하지만, 하

나의 랜드 마크로 문화도시를 만들 수 없다. 문화도

시 대구의 철학과 꿈을 담은 가칭 “문화대구 21”과 같

은 마스터 플랜을 수립하여 문화생태계를 조성하자.

공공디자인이 세련된 도시를 만든다. 공공디자

인으로 도시의 색깔을 입히자. 자연을 사랑하는 자

연 친화적인 공공디자인, 안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친

화적인 공공디자인, 시간을 담아 역사로 이어질 공

공디자인으로 안미풍安美豊의 도시를 만들자.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문화는 자유와

개성, 개방성과 다양성, 인정과 존중, 괴상함과 독

창성을 먹고 자란다. 우리가 문화도시를 만들고 싶

다면 닫힌 문화, 끼리끼리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

야 개성이 살아난다.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고, 튀는 행동을 하면 비

난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에서 창의적 문화가 꽃 필

수 있을까? 통념적 가치관이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

고, 끼리끼리 문화가 개방성과 다양성을 죽인다. 마

음이 열려 있어야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고, 다양

성을 융합하고 괴상한 발상을 할 수 있어야 독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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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이 살아난다. 호남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

럽인들이 대구에서 평안함을 느낄 때 도시의 개방성

과 다양성이 살아날 수 있다.

개방적 문화를 창출하는 것은 도시의 행정력이

나 정책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현장에

서 개방성과 다양성의 가치, 상호존중의 문화를 가

르치고 실천토록 하자. 시민 모두가 참여하고 실행

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하자.

문화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창조도시를 만

들자. 문화, 과학, 비즈니스를 융합해 문화 창조산

업을 일으키자. 문화는 창조경제와 경험경제의 원천

적 자산이다. 창조경제는 문화적 창의성에 의해 피

어나고, 경험경제는 전통문화, 전통음식, 흘러간 놀

이문화의 환생 속에서 자란다. 전통적인 문화예술과

미디어, IT를 기반으로 문화콘텐츠 산업을 육성하

자. 문화 창조산업은 전통 산업에 비해 성장률과 일

자리 창출율이 높다. 대구 경북은 풍부한 문화유산

을 갖고 있고, IT산업이 발달되어 있어 디자인, 문화

콘텐츠 산업 등을 발달시킬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갖고 있다.

문제는 창조산업 생태계이고 이를 조성할 수 있

창조경제는 문화적 창의성에 의해 피어나고, 경험경제는 전통문화, 전통음식, 흘러간 놀이문화의

환생 속에서 자란다.

Page 15: 대문 - dgfc.or.kr˜¸_2014여름.pdf · 상 나의 기억속의 집이 아니었다. 깊이 숨겨두었던 바이올 린은 두 동강이 난 채 마당에 뒹굴고 있었고,

11문화도시 대구가 가야 할 길

는 리더십이다. 창조산업 생태계는 자연스럽게 형성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획적으로 조성해

야 한다. 창조산업도시를 계획적으로 조성하려면,

철학, 비전, 전략을 가진 리더십, 지역 거버넌스, ‘글

로컬 선도대학Glocal Initiative University: GIU’이 있어야 한다.

창조산업은 문화예술, 과학, 비즈니스의 교차로

에서 피어난다. 문화예술, 과학, 비즈니스는 각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 과학, 비

즈니스의 융합에 의한 문화 창조산업은 21세기에 들

어와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왜 ‘글로컬 선도대학GIU’이 필요하고, 어떻게 육

성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은 지식

을 전달하는 수준의 대학이고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XXerox형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연구 및 교육과정에

서 융합은 고사하고 기본적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후발산업국가의 대학패러다임이다. 이

러한 대학은 창조산업에 필요한 지식과 인재를 생산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학으로 창조산업,

창조도시를 육성하기 어렵다.

지식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지식을 생

산할 수 있고,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X형인재가 아

‘컬러풀대구 페

스티벌’

Page 16: 대문 - dgfc.or.kr˜¸_2014여름.pdf · 상 나의 기억속의 집이 아니었다. 깊이 숨겨두었던 바이올 린은 두 동강이 난 채 마당에 뒹굴고 있었고,

12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니라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YYield형 인재를

생산하여,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선도할 수 있

는 ‘글로컬 선도대학GIU’이 필요하다. 창조산업은 지

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므로, 글로벌 마켓에서 새로운 지식과 가치창출을

선도할 수 있는 지식과 인재를 공급할 수 있는 ‘글로

컬 선도대학GIU’이 반드시 필요하다.

‘글로컬 선도대학GIU’은 이처럼 단순히 전통적 의

미의 명문대학이 아니라, 21세기 지식경제, 창조경

제를 선도할 새로운 대학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전

환기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한 자가 역사의 주

인공이 된다. 그렇지만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하려

면 시스템과 문화를 함께 바꾸어야 하므로 담대한

비전, 담대한 도전, 담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

서 총장 재임시절 대학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글로

컬 선도대학GIU’ 육성 전략을 수립, 추진하면서 담대

한 변화를 강조했다.

그 일환으로 문화가치창출Culture Value Creation: CVC

을 위한 융합연구 및 인재육성을 위한 ‘문화가치창

출 플랜CVC Plan’을 수립 추진했다. 인문학, 예술, 과

학, 비즈니스를 융합하는 연구방법과 교육프로그램

을 개발하고, 융합역량을 가진 인재를 육성하기 위

‘서정시 읽

는 도

시-대구’

범어 아

트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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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문화도시 대구가 가야 할 길

해서다. 이 과정에서 영남권 최초의 융합디자인 거

점대학, 다문화 연구교육 거점대학이 선정되어 국비

지원을 받았다.

나는 총장 재임시 문화가치창출분야, 의·생명

분야,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그린에너지분야

등 3대 융·복합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영역과 인재

육성프로그램을 개발해 창조산업을 선도하고, 박정

희 스쿨을 설립하여 130개 개도국의 지도자 양성을

통해 세계빈곤퇴치운동을 선도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나는 이 계획이 온전하게 추진

되면, ‘글로컬 선도대학GIU’이 어떻게 창조산업과 좋

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적인 창조도시를 육성하

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실천적 모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 지역에서 영남대학만이 ‘글로컬 선도대

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남대학이

적어도 4년간 글로컬 선도대학의 기반을 조성해 왔

기 때문에 그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글로컬 선도대

학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 일관되고 지

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므로 영남대학이 글로컬 선도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대구가 세계적인 문화 창조도시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느 대학이든 반드시 ‘글로

컬 선도대학’ 즉 ‘글로컬 이니셔티브 유니버시티GIU’

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로컬 선도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 일관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므로 영남대학이 글로컬 선도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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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문화가 있는 삶

지식정보화 사회를 넘어 문화와 창의성 중심의 패러다임 변화에 발

맞추어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저마다의 문화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정

부에서도 ‘창조경제’와 함께 국가 운영의 핵심적 정책기조로서 ‘문화융

성’ 정책을 지속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융성위원회’ 설립·운영,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 제정, ‘문화가 있는 날’ 시행, ‘예술인복

지법’ 개정 등이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문화예술계의 숙원

이던 지역문화진흥법이 금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이 법

은 지역문화진흥에 관한 종합적·기본적 법률이다. 지역별로 특색 있

는 고유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풀뿌리 문

화자치의 근간이 된다. 이는 일상적 문화복지 정책으로 ‘문화가 있는

삶’을 구현하겠다는 정부정책의 추진방향 및 의지와 잘 부합한다. 또한

문화예술 발전과 시민의 문화향수권 신장을 목표로 문화도시를 지향하

는 대구시의 주요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새로운 지역문화정책의 방향성

정부의 문화융성 기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대구시 차원의 문화

도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화적 공공성과 다양성을 확

대하고 자생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보완하고 확대 실시해야 할 것이다.

새 로 운

대 구 문 화 예 술

정 책 을 기 대 하 며

오동욱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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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의 특수성은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는 지역주민에게 자긍심과 통합의식을

유발하고, 자발성과 참여의식, 창의성과 자주성을

함양시켜 지역사회 발전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지

역의 문화적 정체성은 주민 스스로 참여하여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일 때 참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주

민이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문화공동체를 조성, 주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를 향유할 필요가 있다. 지

역문화의 기초단위는 지역공동체이고 지역문화정책

과 행정도 이러한 작은 문화단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비로소 주민들의 문화수요에 부응하고, 문화의 다양

성과 다원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문화공

동체 활동은 주민들이 문화예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가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주민들 스스로 지역과 사업에 대한 고

민을 시작하고,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

기가 된다.

둘째, 문화적 「다양성」 확보가 중요하다.

다채로운 문화풍토 조성을 위해서는 지역밀착형

‘문화 커뮤니티’ 형성과 운영이 필수요소가 된다. 문

화 커뮤니티는 주민의 문화여가 참여 및 생활문화예

술 참여의 접근성을 제고하고 공존과 소통의 기회를

첫째, 문화적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

먼저 문화적 공공성 확대를 위해 시민의 문화역

량 강화를 위한 풀뿌리 문화활동인 ‘생활문화동호

회’ 양성정책이 필요하다. 지역문화진흥법은 생활문

화 활성화를 특히 강조하면서 주민들이 만든 문화예

술단체 또는 동호회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고 제

시한다. 이를 통해 전문적인 문화예술인이 아닌 일

반시민들에 대한 문화적 지원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문화동호회는 지역 문화생태계의 기저에서 자생하

는 동호회이다. 일반시민이나 문화예술 향유자 중심

의 자율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풀뿌리 모임으로, 작

은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는 야생화로 비유할 수 있

다. 하지만 민간 문화활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상

시적인 공공지원시스템이기보다는 단기적이고, 사

업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시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시민들에 의한 정책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

다. 따라서 문화동호회를 시민주체 창조모델로 발전

시킬 필요가 있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도 생활 속 문

화활동이 문화예술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고 강조하면서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지역문화공동체’ 형성기반 강화이다.

대구문화도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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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제공할 수 있다. 지역밀착형 문화 커뮤니티 운영으

로 주민의 일상생활 및 지역 이슈와 연계된 생활밀

착형·체험형 프로그램이 시행되어야 한다.

지역문화정책에 대한 소통창구 기능을 위해 ‘문

화계 타운미팅’도 좋은 대안이다. 실제 시민의 지혜

와 힘을 모을 수 있는 창구는 매우 부족하다. 타운미

팅은 시민을 비롯한 모든 주체가 한자리에 모여 지

역 현안과 정책을 논하는 소통창구이다. 타운미팅을

통해 행정 주체와 시민 간 새로운 차원의 민관교류

를 실천하고, 이슈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미국은 정책을 결정하는 자치기구로, 일본은

시민의견 수렴 수단으로 타운미팅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취약계층의 ‘문화안전망’ 구축에 대한 지원정

책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시민 모두가 문화를 향유하

고 문화를 통해 함께 소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

회적 취약계층의 문화향유 기회 확대사업에도 초점

을 맞추어야 한다. 문화안전망을 구축해 소외계층이

없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전국 최고의 수준을 갖춘

문화인프라의 활용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역문화의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

를 창조적으로 융화해 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옛 것

타운미팅을 통해 행정 주체와 시민 간

새로운 차원의 민관교류를 실천하고,

이슈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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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 현대사회는

지역문화의 훌륭한 전통과 맥을 실용적으로 창조해

야 한다. 옛 것과 새 것, 전통과 현대 등 서로 상반

되는 범주의 것을 끌어안을 때 더욱 강해지는 것이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셋째, 문화적 「자생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역문화 자생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행정·문화

재단·의회·예술단체·예술가·시민이 적극 참여

하는 ‘양성적 거버넌스’를 구축·운영하여야 한다.

지역문화정책은 다양한 섹터가 맞물려 있다. 이들

간의 갈등이 지역문화정책 수립 및 실행에 있어 걸

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역문화정책

수립에 있어 섹터끼리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파급력도 더욱 커질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중

요한 것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이들은 명예와 함께

강한 책임의식을 가진 이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개방적이고 소신 있으면서도 책임감이 부여되는 거

버넌스가 필요하다. 스페인의 빌바오나 영국의 세필

드를 침체된 도시에서 문화창조도시로 거듭나게 한

주요요인도 공공과 민간의 파트너십에 의한 거버넌

스의 성공적 운영이었다. 도시의 미래 비전에 대한

새로운 대구문화예술정책을 기대하며

문화바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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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공감대를 형성하고, 다양한 주체가 자발적으로 참여

하여 10여 년 이상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심혈을 기

울인 덕이다.

또한 문화적 일상을 꿈꾸는 민간 ‘문화기획가’

를 양성하는 정책도 확대해야 한다. 최근 문화현

장에서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과 융합 등의 환경변

화로 문화예술 직업의 세분화와 함께 직능 고도

화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

공의 문화정책가나 문화행정가는 물론 생활 속 깊

이 발 딛고 활동하는 문화기획가를 양성할 필요성

이 커지고 있다. 이 분야는 전문인을 배출하는 학

제 구조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장 메커니

즘에 의해서는 필요한 인력공급이 힘들다는 특징

이 있다. 생활 속 문화기획가는 지역의 문화자원

을 매개로 하여 주민들과 함께 문화행위를 기획·

실천하는 이들이다.

비록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지역

의 풀뿌리문화를 융성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다. 아울러 문화기획가들이 문화예술계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재교육 공간과 프로그램이 절실하

다. 이를 통해 문화기획가들이 ‘일상적 문화’를 ‘문

화적 일상’으로 재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

문화기획가들이 문화예술계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재교육 공간과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이를 통해 문화기획가들이

‘일상적 문화’를 ‘문화적 일상’으로

재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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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대구문화기관운영협의체’를 설립하여 대구 공

립 문화시설·단체들 간 긴밀한 협력을 이끌어낼 필

요가 있다. 문화적 네트워크 구축은 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진화된 문화정책의 실현 조건

민선6기를 맞아 이제 지역문화정책은 창의적으

로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문화정책이 시민의

일상적 삶에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창의로운 문화서

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진화된 문화정책을 선도하여

시민에게 ‘문화가 있는 삶’을 앞당기는 모델도시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역 ‘문화담당 기관·조직의 자율성’이 보

다 확대되어야 한다. 지역문화정책 개발 및 시행 과

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은 문화재단과

문화예술회관 등이다. 이들 기관은 기본적으로 지

자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고유업무 추진을

위해서는 자율성과 독립성 확대가 요구된다. 이를

통해 전문 문화경영시스템이 체계화될 것이다.

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일상적 삶이 문화적으로 공

유되고 소통되게 할 뿐만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을

증진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

끌어 가는 실핏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인프라 간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

축과 독자적 활동이 필요하다. 최근 5년 간 대구시

는 (재)대구문화재단, 대구미술관, 대구예술발전소,

(재)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시민회관 등 지역문화

창달을 위한 기반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였다. 기존

7개 구·군 문화예술회관을 포함하면 문화인프라는

많이 구축된 셈이다. 대구의 문화시설·단체들은 공

간적으로 분산·배치되어 시민 문화교류의 장소로

서 지역발전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재원과 전문인력 부족

등으로 지역문화 활성화라는 취지에 다소 미흡하다

는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이러한 시설·단체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연계·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문

화시설·단체 상호 간의 역할 조정과 협력, 이해공

유를 강화함으로써 관련 하드웨어를 내실화해 나가

야 한다. 문화시설·단체가 보유한 운영경험을 공

유하고, 프로그램 교류협력을 내실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구문화예술정책을 기대하며

컬러풀 퍼

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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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또 한 가지는 신규 문화사업 기획 시, 사회적 ‘공

감대 형성을 위한 소통과정’ 마련이 우선되어야 한

다. 지역만의 특화되고 고유한 사업모델을 제시하

고 추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 신규 사업모

델 추진 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 모델이 지속가능

하고 대구의 매력을 높이기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심층적 고민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

성하는 충분한 소통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장기적 비전 수립을 통한 일관된 문

화행정’을 실행해야 한다. 종합적인 계획으로 단

기처방 중심의 사업 추진에서 한층 진화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풋Input 대비 아웃풋Output의 빠

른 성과 창출에 길들여져 있으나 문화도시의 격조

와 품위는 쉽게 제고되지 않으며, 가시적 효과가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 즉 문화에 대한 투자는 그

회임기간이 길고 성과가 느리게 나타난다. 그러므

로 근시안적·단편적 효과보다도, 장기적인 안목

에서 기반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문화력, 즉 문화의 힘은

지역 경쟁력의 중요한 잣대이다.

이는 문화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사회를

지탱하고 살찌운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음을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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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성숙된 시민의식이 중요

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즐거움과 심미성을 찾을 수 없

고, 문화의식 수준이 낮은 도시는 지식자본이나 창의

인재의 관심대상이 될 수 없다.

요약컨대 대구가 문화로 창의롭고, 문화로 소통

하고, 문화로 컬러풀할 수 있는 옹근 문화도시가 되

기 위해서 지자체와 실행기구 등 비전 프로바이더VP

들은 문화적 리더십을 통하여 철저한 정책적 준비,

프로그램 마련, 네트워크 구축에 힘써야 한다. 여기

에 더해 시민의 문화의식과 창의력을 도출해야만 성

공적인 결과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

옹근 문화도시 대구를 위해

이른바 문화도시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시민

에게 매력Charming, 느낌Feeling, 즐거움Enjoying을 제공

할 수 있는 콘텐츠가 풍부한 도시일 것이다. 시민의

삶의 질로 이어져야 하며, 문화에 대한 추억을 만들

수 있어야 진정한 문화도시가 가능하다. 대구가 진

정한 문화도시가 되려면 복합적인 측면에서 옹골진

Well-filled 문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옹골진

문화는 다부지면서 실속 있는, 속이 꽉 찬 문화를 의

미한다. 단순히 인프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

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체들의 내재적 역할과 프로그

램, 문화의식 등 모든 면에서 옹골진 도시이다.

문화력, 즉 문화의 힘은 지역 경쟁력의 중요한 잣

대이다. 이는 문화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사회를 지탱

하고 살찌운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음

을 의미한다. 문화도시는 문화인프라 확충만으로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자

원을 보전하고 소프트파워를 진작시켜온 도시가 하드

웨어에만 집중 투자하는 도시보다 더 높은 문화적 자

부심을 가진다. 때문에 문화를 발산하는 힘문화생산력과

문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힘문화소비력의 총체인 문화

력을 증강해야 한다. 옹근 도시의 시민들도 문화력 증

새로운 대구문화예술정책을 기대하며

무지개다리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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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시인이 죽은 사회

인류 역사상 문화예술이 일상 삶의 영역에 출현한 것은 아마 고대사

회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들소>나 우

리나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청동기나 신석기 이전의 문화 예술

의 흔적이 인간들의 삶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다. 인간 혼이 빚어낸 문화예술은 인간의 일상성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또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염원을 하늘에 비는 제의적 감성을 자극하

는 촉매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화 예술

의 모습은 역동적인 다양한 모습의 얼굴로 비춰지기도 하였지만 인간

과 하늘의 원융圓融 의식의 일부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문화예술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삶의 영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음

으로서 그 존재 가치도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Culture

와 예술Arts의 개념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마 창의성이나 일상

성이라는 잣대나 산업화의 영역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더 광의의 개

념으로 문화가 있고 보다 더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작가를 존중하는 예

술의 영역이 양립하면서 상호 포섭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흔

히들 문화예술인이라는 통칭으로 이들 사이를 구별하지 않지만 엄격하

게는 이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문화예술인들이 최근 들어 숫자가 급

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예술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어 대칭균형이 이미 일그러져 있다.

이 제 는

문 화 예 술 인 도

바 뀌 어 야 한 다

이상규

시인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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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사례로 2013년 대구예총 산하기관

회원 현황은 아래와 같다.

대구경북건축가협회 : 184명, 대구국악협회 : 641명, 대구

무용협회 : 267명, 대구문인협회 : 895명, 대구미술협회

: 1,819명, 대구사진작가협 회: 890명, 대구연극협회 : 232

명, 대구연예예술인협회 : 1,532명, 대구경북영화인협회

: 230명, 대구음악협회 : 1,485명, 합계 8,175명(2013년

현재 통계자료)

우리가 아티스트Artist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민예

총 회원과 합치면 만 명을 훨씬 넘어 선 숫자이다.

전문가이든 아마추어이든 대구의 문화예술영역에

활동하는 이들의 숫자는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20

여 년 전에 비하면 무려 70%이상의 숫자가 늘어난

결과이다. 여기에서 실제 문화예술 산업 전문 인력

과 합치면 수백만 명이 될 것이다. 문화예술의 수요

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

니라 문화예술의 운용 방식의 변화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곧 문화예술의 운영 방식이 보다 과학적으

로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사이의 영역에 활동하는

전문가가 늘어난 이유 때문에 그 숫자가 늘어난 것

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무대예술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예술경영에서부터 공연을 담당하는 예술

인과 교육자, 무대 구성 설계 구성 및 시공, 오디오,

비디오 등 음향 담당자 등을 합치면 거대한 팀을 구

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상설로나 혹은 지

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은 그리 녹록

하지 않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대구 시향을 비롯한

민간단체의 악단만 하더라도 상설 공연을 할 수 있

는 충분한 재정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창

의적인 창작 활동은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서 생겨나는 불균형의 문제가 현재 우리가 안고 있

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사례로 70년대 대구지역의 시인의 숫자

가 70여명이었다. 그래도 대구가 전국적인 시향詩鄕

이라 불렸는데 현재 대구 지역 시인의 숫자가 8백

여 명이라고 한다. 시인이 그만큼 늘어났으니 대구

의 문화적 품격이 그만큼 향상되었는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60년대 대구의 자유시 동인들의 결렬과 함께 대구

의 시단은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무슨 무슨 동인, 신

인학교 등 직업적 수단으로 시인을 길러낸 결과 시

인의 숫자가 그렇게 급속하게 늘어났다. 시인이 되

고자 하는 이들의 꿈을 돈으로 교환하다가 급기야

대학의 평생교육원까지 여기에 가담하여 시인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그 결과는 누구누구의 문하생이

문화예술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삶의 영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 존재 가치도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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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라 하여 문단파벌이 심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

수적으로 늘어난 시인들 가운데에는 저급한 문인들

도 배출되는 기이한 상황에 도달하였다.

근래 문인 집단이 이념으로 패를 가른 날 선 언어

로, 혹은 일상인 보다 더 천박한 시어로 시를 꾸미며,

때로는 조직화하여 조폭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시는 정서 수련의 일부로 인간적인 삶으

로 되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문화특권층인

듯한 착각에 빠진 작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제정

로마 시대나 러시아 말엽처럼, 문화가 지나치게 독버

섯 마냥 창궐하면 한 시대의 역사가 기울어져 가는 것

을 예언한다고 하듯이 오늘날 우리가 그런 상황에나

처해져 있지나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 시인은 최소한 문이도文以道를 실천하는

문학정신이 올곧아야 한다. 언어는 주술이자 마법

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의 언어에는 정령이

깃들어져 있어 비옥한 토양처럼 풍성한 영양분을 줄

수도 있지만 비수같이 독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풍

년이 들기를, 하늘의 재앙과 재해가 줄어들기를, 아

픈 자식이 회복되기를 비는 주술이며, 그 속에는 영

기가 담겨 있다. 마치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처

럼 말을 주술적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시이다. 일

시는 일상의 언어로 아무렇게 짜여 진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시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교섭하는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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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덕목인지 깨달아야 한다.

현재 대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더 이상 번창하여 불순해진다면 이미 이 사회나 나

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해져가는 징후임을 우리는 알

아야 한다. 그 증거로는 시인들은 늘어났지만 SNS

를 통해 피를 흘리는 언어, 청소년들의 언어폭력은

도리어 지난 시대를 능가하고 있다.

시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필자는 “시는 주

술이다.”, “시는 마력이다.”라는 시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고 싶지만 대구는 이미 “시인이 죽은 사

회”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대자연 속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인간 존재를 현현해주는 시는 일상의

언어로 아무렇게 짜여진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시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교섭

하는 창문이다. 그 창문이 흐리고 얼룩졌다면 세상

과 사람의 본래의 모습을 관찰할 수 없듯이 깨끗한

창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맑은 정신으로 얼룩을

지우고 올바른 도로서 흐려진 창을 닦아야 한다.

시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무심으로 되돌아가 온갖

사물의 모습과 그 이면에 있는 정경과 배경을 상상

상 소통을 위한 문자와 문학어로서의 언어는 본질적

으로 차이가 있다. 일상의 언어를 시적 언어로 결코

쓸 수 없다. 시는 주술의 언어이기 때문에 시는 정령

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가 모든 예술의 장르 가운

데 높은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

로 가장 고급의 정서를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들 패거리끼리 만든 동인지를 통해

데뷔한 대구시인 패밀리로 결속하여 문협, 예총 선

거나 심지어 지방선거나 대통령 선거에까지 그들의

집단적 문화 권력의 조직적인 힘을 과시하는 동안

시작의 질은 저급한 바닥을 헤매게 된다. 7~80년대

민주화를 거치는 동안 예총이나 문단마저도 두 갈래

로 갈라졌다. 그런데 겉으로는 민족의 이름이나 인

권을 입에 담으며 내적으로는 개인적 윤리가 파탄

이 난 불륜의 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들의 개인

적 윤리와 도덕마저 붕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

인 삶의 불륜을 예술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대구

지역의 몇몇 시인들의 저질적인 행실을 보노라면 얼

굴이 뜨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낯 뜨거운

지 모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이들은 혹시 없는

가?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야 한다. 언어를 피곤하

게 만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시인들에게 얼마나

이제는 문화예술인도 바뀌어야 한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공

연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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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하는 시간은 무척 짧지만 가장 창의적인 시간이 된

다. 그래서 시가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는 웃

음이, 눈물이, 사랑이, 죽음이, 하늘이, 바람이, 가

을비가 되는 역동성을 만나게 된다. 내 몸은 여기에

서 있지만 여진의 나라로, 몽골로, 티벳트로 어디

쏘다니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신석기 시대와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할아버지와도 만날 수 있다. 무한의

자유와 상상을 풀어내는 언어 주술이자 정령을 지닌

주술사이자 곡예사가 된다.

대구, 오페라의 도시

수년전 대구시 문화예술담당 공무원과 함께 술

자리를 하다가 느닷없이 대구 오페라하우스 운영과

관련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전 세계적인 오페

라 중심도시로 발돋움한다는 그의 자랑스러운 이야

기를 들었다. 나는 사실 당시 왜 대구가 오페라의 도

시가 대구의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더니, “이 교수님 그

것도 모르십니까?”, “이태리와 같은 대구 섬유 도시

에 가장 컬러풀하게 어울릴 수 있는 이태리의 오페

라가 아입니꺼?” 처음에는 유모어를 섞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색을 하며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이어갔

다. 대구에는 아직 고급한 살롱문화가 정착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 예술은 쪽박 채워놓

고 자본 중심의 서구적 장르를 끌어들이는 것이 너

무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닌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병행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나의 이야기는 들어 설

자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뒤 필자는 2003년 세계 대구하계 U

대회 이념제정위원이 되어 <Dream for Unity>라는

이념을 만든 후, 대회 공식문화 행사로 대구 두류공

원 야외공연장에 중국의 “투란도트” 공연 개막 때

초청을 받았다. 시장을 비롯하여 대구문화예술계 많

은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기 전부터

가졌던 의문, 왜 우리 전통의 러브스토리도 많은데

하필 중국 오페라냐는 의문을 시장에게 직접 물었

다. 시장은 곧바로 중국이 전 세계의 시장을 점유하

고 있으며 우리와의 직접적인 물류 교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장이냐, 그리고 중국 칭타오시와 자매결연

도시가 대구란다. 앞에서 시 문화예술 담당 공무원

이 말한 “이태리-섬유, 오페라”와 “대구-섬유, 오

페라”의 등식과 큰 차이가 없는 대답이었다.

경상감영공원 국

악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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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문화예술을 우리가 잘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것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대구가 아닌가?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한

가지 더 들어 보자. 2000년 대구를 상징하는 시인 이상

화 고택 보존을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이상화와 관련하여 현재 대구시의 지원 사업으로

이상화고택기념사업회에서 행사를 하고 있고 또 수성

구청에서 수성구문화원을 통해 8회째 이상화문학축

제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상화 문학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변변한 평론집 한권 만들지 못하고 있

다. 그런데 이처럼 두 집단에서 경쟁하듯 소비적인 행

사를 하고 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왜 이러한 것 하

나 제대로 통합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지?

대구가 세계적인 오페라의 도시이고 교육 문화

의 도시라고들 자랑하지만 이 도시에 살아 있는 변

변한 시립역사박물관 하나 없는 삭막한 도시이다.

유기박물관을 가보라. 그리고 근현대역사박물관을

가보라. 부끄럽다. 대구가 낳은 근현대의 역사적 인

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배우

마를린 먼로 사진이 1층 로비를 지키고 있다.

대구 문화의 융성

대구의 문화융성은 첫째, 대구 문화예술인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잡된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가장

개인적인 인간의 삶에 천착하여 고민하고 새로운 가

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가 없

이 대구지방정부의 재정 지원이나 문화예술 행정의

정책적 부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먼

저 변화해야 할 것이다. 예술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

는 예술 지상주의적 생각만으로는 현실에서 밀려나

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구 문화예술인들의 성

숙함을 길러야 한다.

둘째, 시정을 담당하는 시장으로부터 대구시의

문화예술 정책 일선 담당자까지 인식 전환이 필요하

다. 문화예술에 대한 예산의 확보와 지원 방식에 대

한 전면적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대구문화재

단을 통해 문화예술 단체나 개인에게 지원하고 있는

이제는 문화예술인도 바뀌어야 한다

대구가 세계적인 오페라의 도시이고 교육 문화의 도시라고들 자랑하지만

이 도시에 살아 있는 변변한 시립역사박물관 하나 없는 삭막한 도시이다.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총액 3,889 5,340 8,781 13,977 14,446 14,123

사업비 2,991 4,365 7,690 12,623 12,712 12,632

대구문화재단 연도별 예산 총액단위: 백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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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예산이 대구시정 규모에 비하면 너무나 적다.

대구문화재단의 연도별 예산 총액을 보면 타 시

도에 비해 너무나 열악하다. 2014년에는 도리어 예

산이 줄어들었다. 운영비를 제외한 순수 사업비만

비교해보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장기

적인 프로젝트는 엄두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

원 프로젝트별 지원 금액이 2~5백만원 정도여서 성

과를 높이기는커녕 지원 흉내만 내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청회

를 통해 대구시민들의 동의를 받아 대구문화예술기

금마련을 위한 한시적 조례 제정을 통해 십시일반으

로 기금을 모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획을 할 필요

가 있다.

셋째, 지방정부의 재정지원이 예술가의 창의성

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소비를 지원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예술 지원

예산을 전폭적으로 늘려야 할 것이다.

넷째, 현재 문화예술 지원 시설이 너무나 부족하

며 지역별로 편중되어 있다. 대구시는 중앙정부 부

속 기관이 전무한 상황이다. 예를 들면 국립 중앙도

서관, 국립 청소년 도서관, 국립국악원, 고전번역

2013년

‘돈 지

오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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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문화콘텐츠연구원 등 중앙 정부의 부설 기관 유

치에 힘을 쏟아야 한다. 앞으로 대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대구 달성군지역에는 이러한 문화 시설이

전무한 상황이다. 따라서 군구청별 문화예술지원 시

설의 균형적 배치 문제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대구지역의 시립 박물관 설립은 문화예

술 정책의 최우선 순위 사업으로 즉각 시행될 필요

가 있다.

여섯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화예술 지원

이 단순한 제도적 지원이 아니라 창의적인 아이디어

가 직접 문화 산업에 응용될 수 있도록 연계하여 지

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대구시의 문화예술정

책적 배려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인 스스로의 협력

기반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지원 이후 충분한 활용과 문화예술 산업화와 연계함

으로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쪽으로

치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현재 대구예술발전소를 전적으로 대구

시정부의 지원과 문화예술인 혹은 문화예술산업 전

문가의 운영 방식으로 전환하여 경쟁력 있는 구조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지방정부가 문화예술

전문가와 이를 경영하는 전문인의 삼위일체가 되어

상호 신뢰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여덟째, 문화융성의 시대 대구 문화 예술발전을

위한 정책적 컨트롤타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단

순한 자문이 아니라 정책 입안에서 시행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자율성이 주어지는 대구시문화예술융성

위원회 설립을 강조해 둔다.

끝으로 문화 융성의 시대는 정부의 지원 확충이

라는 일향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인

들의 새로운 창의적인 힘을 정부의 지원과 결속하여

상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발전시켜야 한

다. 그 이유는 문화예술은 동일 공동체를 하나로 묶

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융성은 사

회 통합으로 이어지는 내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젠 대구가 교육문화의 도시라고 자부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예술의 융성기반을 공공으로 만들어낼

의지를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제는 문화예술인도 바뀌어야 한다

아하! 오

페라 - 잔

니 스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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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대구문화재단이 5주년을 맞이했다. ‘벌써’라는 말이 어울려야 하지만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대구문화재단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역할을 해왔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나쁘지 않다. 대구

문화재단이 ‘문화 거버넌스’라는 시대적 조류에 맞춰, 충실하게 자리매

김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대구문화재단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9년 7월

현판제막식을 가졌다. 이후 짧은 기간에 자리를 잡고, 대구의 문화예술

창달은 물론 그 다양성 향상에 기여해왔다.

그것은 대구문화재단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실시하는 문화예

술진흥사업 평가에서 2011년과 2012년 2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것

으로도 증명이 된다. 185억원에 불과한 기본재산으로 출발한 대구문화

재단이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 인천, 경기를 제치고 최고 점수를 받은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그것도 출범 4년 만에 최고등급 3회, 우

수등급 1회를 받았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성과는 흔히 기업조직에서 볼 수 있는 ‘리더’ 한 사람의 능력

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대구문

화재단의 성과는 그 반대의 경우에 가깝다. 전 조직원이 벌떼처럼 뭉쳐

이루어낸 성과다. 그 과정에서 전략적인 핵심 사업은 없이, 너무 잘게

나누어 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그렇거나 말거나, 대구문화재단은 그동안 많은 일을 한 것이 사실이

5 주 년 맞 은

대 구 문 화 재 단 이

가 야 할 길

노 병 수

대구동구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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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는 것 같고 정책연구 전담조직도 꾸리겠다는

각오가 6대 이행과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문화정책의 개발과 연구 분야에 아주 손을 놓아버리

고 그 역할과 책임을 대구경북연구원에 완전히 미뤄

버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살펴볼 때, 현재 대

구문화재단의 실상은 밤늦게 불을 밝히고 야근에 매

달리는 구성원들의 열성과 노력 덕분에 타 시도의

광역문화재단과 비교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일차적인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 편을 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구문화재단이 5대 전략목표도 좋고 6대

이행과제도 좋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진정한 대구

문화예술의 요람으로 ‘테이크 오프’하기 위해서는 기

금 등 예산 형편이나 조직 면에서 근본적으로 주어

진 조건이 너무나 열악하다. 그러다 보니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며 임시방편으로 구색 맞추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나아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평가지

표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다소 가

혹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이는 어리고 몸체는 보잘 것 없지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가장’ 같은 대구문화

재단이 가야할 길은 뭘까.

며, 분야별로 구색도 어느 정도 갖춘 것 같다.

먼저 ‘예술가에 대한 지원’ 분야를 살펴보자. 꼭

지가 하도 많아 전체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

만, 차세대 공연 및 전시기획자 집중양성과정을 운

영했던 일이나 예술인커리어 개발지원사업 같은 것

은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창작

스튜디오의 활성화나, 약간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상주단체 지원사업의 성과도 좋다. 그밖에 지역 예

술인의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 같은 것들은 이제

시작 단계니까 장차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다음은 ‘예술교육’ 분야다. 일찌감치 대구문화예

술교육지원센터를 운영함으로써 이 분야에서도 성

과가 크다. 부르디외Bourdieu는 사람들이 ‘문화자본

cultural capital’이라고 부르는 문화와 관련된 자산을 얻

기 위해서는 ‘탄생의 특권’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

해서 후천적으로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버몰

Baumol과 보웬Bowen 같은 사람들도 역시 ‘어린 시절에

예술적 경험에 노출되지 못한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너무 늦다’고 주장했다. 예술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문화정책’ 분야는 아직까지 성과가 미미하다. 그

러나 지역문화예술의 지표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

‘예술가에 대한 지원’ 분야를 살펴보자. 꼭지가 하도 많아 전체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차세대 공연 및 전시기획자 집중양성과정을 운영했던 일이나 예술인커리어 개발지원사업 같은 것

은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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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가장 먼저 대구시와 유기적인 협력관계는 유지하

되 그 간섭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

은 매우 어려운 일로 전국의 문화재단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숙명 같은 문제다.

현재 대구문화재단의 이사회가 열리면, 재단의

대표가 아주 어정쩡한 위치에 책상을 놓고 앉아있

다. 그는 이사회에서 발언권도 없다. 이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에게서 이사 자격을 박탈한 곳은 대

구문화재단밖에 없다. 원래 이렇게 기형적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이사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표에게 이사 자격을 박탈한 뒤로도 이

사들의 권한이 커진 것은 하나도 없다. 대구시가

아니고 시의회에서 조례를 바꿔 그렇게 만들었다

고 하지만 대구시나 시의회나 오십보백보다. 자기

들이 출자를 한 기관이니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

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돈값’을

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문화재단이 생겨났지

만, 제대로 된 운영 매뉴얼이 없다. 그래서 대표의

명칭도 상임이사, 대표이사, 사장, 관장 등등 갖가

실제로 문화 사업을 통해 문화정책적인

실천방안이 도출되기도 하므로 사업의

시행 또한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 .

청년합창의 도

시 -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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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불린다. 명칭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문제는 출

자자인 공무원이 상전노릇을 하는 것이다. 돈에 시

달리고, 권력에 시달리면 문화재단의 역할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둘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구문화재단이 문화

정책의 진정한 싱크탱크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기초이론과 정책연구의 중

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대구문화재단은 문화 분야의 민간전문가들이 모

인 기관이다. 따라서 문화정책과 관련된 전문적인

자문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할 역량을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역할을 할 여력이 없다. 대

구시가 발의한 사업을 수행하는 용역업체의 역할로

도 버거울 지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화 사업을

통해 문화정책적인 실천방안이 도출되기도 하므로

사업의 시행 또한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업집행에 압도되어 대구문화재단이 문

화정책의 큰 흐름과 관련된 고민을 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용역수행기관으로 입지를 좁히는 불행한 결

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언젠가 대구시 문화체육국의 한 공무원이 ‘문화

정책은 대구경북연구원에서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재단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문화재단은 반드시 스스로 문화정책이나 기초학

술과 관련된 연구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것을 토

대로 사업의 방식이나 분야를 선정하고, 예술가들이

나 예술행정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을 개발

하는 동시에 사업의 시행을 통한 환류를 정책에 다

시 반영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정책이나 예술경영 같은 학문

분야는 아직 많은 업적이 축적된 분야가 아니다. 따

라서 연구자들에게는 연구과제가 산재해 있는 소위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대구문화재단이 문화정책에 대한 연

구를 소홀히 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문화의 전문

적인 지원이나 예술의 매개자로서 기능도 제대로 수

행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문화정책 개발과 관련된 분

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지원

기관이 아닌 문화 분야를 선도하는 싱크탱크가 되어

야 한다는 것이다.

5주년 맞은 대구문화재단이 가야할 길

대구문화도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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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획특집 _ 문화융성시대, 대구의 길을 찾다Ⅱ 대구 문화예술의 미래비전

셋째로 대구문화재단은 실험적이고 논쟁적인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새롭게 개척하는 실험적인 예술에 대한 지원은

납세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공자치단체에 비해

민간재단이 더 자유로울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문

화재단은 이러한 실험예술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보다 효과적이며 나은 지원을 할 수 있다.

정치는 보수가 더 나을지 몰라도 예술은 진보에

의해서 발전을 한다. 실험예술은 인기가 없을 수가

있다. 그러나 실험예술의 핵심에는 창조성이 내재되

어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오늘날의 비일상적이며

실험적인 아이디어는 언젠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

며 주류예술로 진입할 수가 있다. 위대한 인상파 화

가 세잔느가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를 오픈했을 때

르몽드는 ‘위대한 파리시민들이여, 안광에 이상을

일으킨 작가의 전시회에 절대 가지 말라’고 외쳤다.

불행하게도 자치단체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책임

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실험예술

에 대한 지원을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체로 기

존의 주류예술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 기업들도 효

과적인 마케팅 증진을 위해 기존의 패턴을 따른다.

이러한 실험예술에 대한 지원은 뜻밖의 종자돈

seed money의 역할을 제공하기도 한다. 위험부담이 있

는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성공을 하면 새로운 문화콘

텐츠를 만들어낼 수가 있고, 나중에 보다 공공의 영

역에서 본격적인 지원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 대산

문화재단이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작업을 지원하

여 성공을 하자, 정부에서 유사한 지원 사업을 본격

적으로 시작한 일이 좋은 예가 된다.

넷째로 대구문화재단은 대구의 정체성과 지역성

을 대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축제를 기획할 수 있어

야 한다. 지금까지 대구의 축제는 늘 방황 그 자체였

다. 종래의 무색무취한 ‘달구벌축제’에 색깔을 넣어

‘컬러풀축제’로 변신을 하다가 2010년부터 ‘도심축

제’로 비교적 성공적인 변신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

히 대구의 정체성과 지역성을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수성구의 ‘폭염축제’나 동구의 ‘평생학습축제’가

나름 개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먹고 마시는 수

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최근 들어 ‘치맥축제’가

관객동원의 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어 눈길을 끌

대구문화도시운동

대구문화재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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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대구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모름지기 대구의 정체성과 지역성을 충분히 반

영해서 세계적인 명물축제로 키워나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 있는 축제는 요원한 것일까. 오페라와 뮤지

컬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밖에도 주절주절 대구문화재단에 바라는 것들

은 많다. 이사회 십여 명이 훌쩍 넘는 이사 가운데

여성이 단 한 명밖에 없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재

단은 이사회 구성원들을 다양하게 하여 편파적이지

않아야 한다. 명망가 중심의 이사회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도록 대표성을 높여 나

가야 한다.

차제에 기금도 좀 더 확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 문제는 대구문화재단만의 책임이 아니다. 대구문

화의 수혜자인 대구시와 그 금고를 책임지는 은행,

상공회의소 등 모든 시민이 나서서 1천억 원은 모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최종 책임은 신임 대구시장에게

있다. 최근 들어 문화예술 분야 국정의 새로운 화두

로 떠오르고 있는 ‘동네문화’나 ‘골목문화’에 대한 관

심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문화예술 전문가들의 영

영도 소중하지만 보다 모두가 참여하는 보다 대중적

5주년 맞은 대구문화재단이 가야할 길

대구문화재단이 문화정책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문화의 전문적인 지원이나 예술의 매개자로서 기능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

다. 시민의 문화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엄청나게 높

은 대구의 실정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 지역에 활동

터전을 두고 있는 예술인이나 단체의 장점과 특성을

잘 파악하여 문화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보다

심층적인 지역문화예술 지표조사도 시급하다.

결론적으로 어려운 여건 아래서 대구의 문화예

술 창달을 위해 애쓰는 대구문화재단이 새롭게 도약

하기 위해서는 자기주도적인 모습의 ‘독자적 경영’과

‘10%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조례

를 재개정해서 대표를 이사회에 다시 복귀시키고,

그 대표를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이 뭉쳐 사고의 틀

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래야 대구문화재단이 진정한 대구 문화예술의

요람이 되어 ‘예술로 행복한 시민, 존중받는 문화예

술인, 사랑받는 대구문화’의 핵심가치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창조의 새 창도 활짝 열어갈 수

있고, 양복바지도 벗겨 대구문화에 청바지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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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의 핵심 국정기조가 창조경제이고, 그 중심에 문화융성

이 있다.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문화교류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최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한류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한류에 편승한 문화교류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외교적으로도 국격이 올라가고, 우리의 국가 브랜드 가치도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런데 대구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구시는 문화예술도시를 표방하면서 최근에 대구미술관, 대구예

술발전소, 시민회관 재개관 등 문화예술 공간을 많이 갖추게 되었다.

특히 1,000석 이상의 공연장이 9개로 서울 다음으로 많다. 그만큼 예술

인들이 창작하고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

간만 늘어났을 뿐 공간을 채우기 위한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에 대한 지

원이나 그 공간을 특화시켜 나가려는 노력은 너무나 부족한 현실이다.

지금이 바로 예술단체의 활성화와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예산의

대폭 증액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차기 대구광역시장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대구문화예

술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더구나 관주도형 예술행정

을 벗어나서 예술인들에게 간섭을 지양하는 그래서 본연의 임무인 지

원에 충실하면서 창의적인 비전과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

차기 대 구 시 장에

바 란 다

류형우

대구 예총 회장

기획특집 _ 새 대구지방정부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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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화예술에 대한 감각과 중요성을 잘 알

면서 예술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전임시장 재임 시 문

화예술 분야 인프라 즉, 대구의 기초체력과 인프라

를 많이 다진 점에는 틀림이 없지만 대구문화예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공간으로 시급히 시립

박물관이나 국악당, 대구사진영상박물관을 건립해

야 한다.

시립박물관은 서울을 비롯해서 6대 광역시 가운

데 유일하게 대구에만 없다. 더구나 향토역사관 근

대역사관 방짜유기박물관 등으로 소규모로 분산되

어 있다 보니까 대구만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미흡하다. 국악전용

극장 건립으로 국악공연을 상설화하는 것과 더불어

시립박물관 건립으로 기존의 박물관 기능뿐만 아니

라 그 속에 다양한 미래지향적인 콘텐츠를 담는 그

릇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대구의 품격을 높이고

이미지 변화를 통해서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대구만

의 브랜드로 문화산업을 개발하고 특히 관광산업과

연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대구문화재단 대구문화예술회관을 비롯

해서 구군에는 문화재단, 문예회관이 있는데 이들

간에 행사기획 조정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서 대구 전체의 문화예술 행사나 축제들의 중복이나

불필요한 경쟁 비효율성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하

여 대구시내 각종 문화예술 행사들의 정보를 공유함

으로서 의료관광을 포함한 관광사업과 연계할 수 있

는 가칭 대구문화예술 컨트롤타워본부가 필요하다.

셋째로 이제는 ‘글로벌 도시 대구’를 위한 국제적

문화행사를 개최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인색

해서는 안 된다. 21세기는 문화예술경쟁이 국가 간이

아니라 도시 간 경쟁이고 이젠 made in daegu 문화예술

상품이 나와야 할 때이다. 올해 12회를 맞는 대구국제

오페라축제나 8회가 되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창작오페라, 뮤지컬 한편 제작비도 안 되는 15억 내지

20억 정도의 예산을 가지고 축제를 치르다 보니까 국

제행사로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매년 비슷비슷한 축제

규모로서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부산 서울이 오페

라하우스를 짓는다든지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이야기

를 듣게 되면 결국 축제를 다른 도시에 빼앗기지는 않

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제는 과감한 예산을 배

정해서 축제 규모를 확대하든지 아니면 선택과 집중

을 하든지 결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2011년

새 봄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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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

겠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지구의 종말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단순한 의지의 표현일까? 혹시 무한한 신적 존

재는 자연과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과나무를 택한 것은 아닐까?

우주에 가득한 신, 절체절명의 순간 찾게 되는 신이 스피노자에게는 자

연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범신론자 이니까 인격화된 신이 아닌 우주

와 대자연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자연을 신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왜 하필 사과나무일까? 밤나무, 느티나무, 바오밥 나무

도 있는데... 나는 이 사과나무가 에덴동산에 서 있던 바로 그 사과나무

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에덴의 동쪽, 그 언덕위의 빛나는 사과나무. 금

단의 열매, 따 먹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탐스러운 열매.

감각과 호기심의 경계선을 먼저 넘은 것은 이브였다. 그 탐스러운

사과를 베어 문 순간 인간은 쾌락과 감각에 눈 뜨게 되고, 나신裸身의 부

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당하

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단한 생을 이어가게 된다. 열린 감각과 쾌

락, 몸과 이성에 눈 뜬 댓가였다. 그러나 사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진정 인간다워지고, 고통의 그림자를 끌고 다닐지라도 온몸으로 아름

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인류역사의 여명기부터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가 해결되면 반드시 예술을 했다. 그것은

한 그루 사과나무

리우

미디어설치 작가

기획특집 _ 새 대구지방정부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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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가치였기 때문이

다. 스피노자는 한 그루 사과나무에서 신과 예술을

발견하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온 몸으로

신과 예술을 찬미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신과 인간, 예술이 어우러진 한 그루 사

과나무를 심고자 한 것이다. 디지털 신화로 세계를

놀라게 한 스티브 잡스의 애플 로고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모양인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대구시의 문화 예술정책에 대해 지역의 젊은 예

술가들을 대신해 하고 싶은 말은 내일 대구의 종말

이 온다 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었으면 하는 것

이다. 단기간의 성과나 행정위주의 형식에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물론 요즈음 대구시의

문화 예술에 관한 여러 가지 시도와 성과들이 부족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형식과 지원들이 젊

은 예술가들의 창조적 몸부림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모두가 알다시피 젊은 예술가들에게사실 예술가들

은 다 젊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첫째, 국제적 교류를 통한

시야의 확장. 둘째, 지역간, 장르간 협업을 통한 창

조적 소통. 셋째, 대구지역만의 특성화된 문화의 장

마련 등이다. 물론 이런 지원들은 시 문화행정의 시

스템 차원이고, 작가들을 사회로 끌어내기 위한 형

식이다.

더불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정이 창조

적 아이디어들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경로를 적극

적으로 열어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경직되고 제도화된 틀로 예술

을 운용할 수는 없다. 또, 예술가를 경제적 가치로

재단하지 않고 오래 기다리고 참아줄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예술가는 굶을 수는 있으나 굴욕을 당

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열거들이 무리한 요구인

지는 나도 안다. 아무리 대구가 사과의 고장이라

고는 하지만, 지구의 종말 앞에서 사과나무를 심

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길을 가면서 경

제적 어려움과 자신만의 사과나무를 심는 이중고를

강단 있게 버텨내야 한다. 자신의 사과나무에 열매

가 열릴 때, 예술정책이라는 통로를 따라 탐스러운

사과를 나눌 수 있도록.

범어 아

트스트리트

가창 창

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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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기획특집 _ 새 대구지방정부에 바란다

대구문화재단이 2009년에 창립되었으니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을 다

졌다고 생각한다. 창의적인 사업을 통해 대구시민의 문화 활동을 다양

하게 지원하는 등 지역 문화 창달에 이바지해 왔다. 물리적인 여건의

한계 속에서도 우리 고장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지니는 정신

적인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파고들

어 가 조목조목 따져보면 개선, 보완되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여기

서 필자는 대구문화재단의 주요 사업의 하나인 문화 활동 지원 사업 문

학 부문 심사자로 참여한 바 있고, 타 지자체 문화재단에서도 같은 일

을 맡은 경험을 되살려 몇 가지 의견을 제안하고자 한다. 전문지식과

정확한 자료에 바탕을 둔 의견이라기보다는 경험을 통해 느낀 주관적

인 소회 차원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각종 장르별 문학 단체가 많이 있다. 연륜이 오래된 단체도 있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문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생긴 것도 많다. 문

예창작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진 대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학 단체 활

동이 매우 활발한 편이다. 시, 시조, 아동문학, 수필 등 전 장르를 망라

해서 다양한 문학 단체와 모임이 제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활동한다.

대구문화재단은 시민의 창조적 문화 활동을 지원한다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이들 단체에 일정 금액의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주로 그것은

대개 일 년마다 한 번씩 간행하는 동인지 출판비 명목으로 지원된다.

동인지 발간이 문학단체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일인 만큼, 이 지원사

업의 필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고 그 지

원금도 늘려가야 할 것이다.

속물주의에 맞 서

신재기

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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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원 단체 선정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

원받을 만한 단체가 지원을 받고 있느냐 하는 점이

다. 그 단체가 얼마만큼 내실 있는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심사를 제대로 해서 우수 단체를 지

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사나 선정 절차는 아주 합

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나눠주기식, 온정주의, 행정편

의주의, 부적합한 심사자 선정 및 겉핥기식 심사 과

정 등 문제가 적지 않다. 지역 문단에 대한 사전 지

식이 전혀 없는 사람을 심사자로 초빙한다든가 발간

된 동인지를 검토하지 않고 제 단체들이 직접 작성

한 서류를 중심으로 심사하는 일은 개선되어야 한

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고 오늘이다. 오래되

었다는 이유나 과거 명성이 오늘의 부실을 덮는 일

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 정책이 한두 사람보다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펼쳐져야 함은 당연하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문예활동을 하는 단

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예활동은 집단의 운동이기 전에

개인의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하는 행위다. 창작 활

동의 출발은 개인이다. 우수한 예술가 한 사람의 역

량과 영향은 많은 사람이 모인 단체를 능가할 수 있

다. 단체는 전체의 방향과 이념을 지향하기 때문에

개인의 창의성 발휘를 저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재

단의 문예창작 지원이 단체 중심으로만 이루어져서

는 곤란하다. 단체 중심의 지원이 공정하고 합리적

인 것으로 비칠 수 있으나 개인의 창조적 역량이 위

대한 문화예술을 견인한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오늘과 같은 디지털 시대 문화예술은 전통적인

가치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인간 삶의 양식이고 정

신의 표출인 문화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어

쩔 수 없다 하더라도, 존중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치

는 지켜야 한다. 세계는 신자유주와 더불어 더욱 물

신주의에 빠져들었다. 우리도 IMF 이후 경박한 속

물주의가 문화예술 분야에 만연되고 있다. 문화예술

의 대중화와 문화 민주화는 바람직한 변화이지만,

그렇다고 키치와 속물주의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

다. 문화예술은 태생적으로 진정성에서 추구한다.

인간 삶을 황폐화하고 인간 존재의 품격을 훼손하는

것에 맞서 진정성을 지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

화 활동이 가야 할 방향이다. 대구문화재단이 벌이

는 많은 사업이 이러한 대원칙 안에서 벗어나지 않

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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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공연문화중심도시를 표방하며, 국제오페라축제, 국제뮤지

컬페스티벌, 연극제, 호러공연예술제, 컬러풀축제 등 다양한 공연 축제

를 펼쳐왔다. 짧게는 10년이 조금 안된 것도 있고, 길게는 30년이 넘은

것도 있다. 45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공연장이 있고, 전문가를 길러내는

대학들도 많다.

이처럼 축제가 많고, 공연예술 전문가도 많지만 ‘대구하면 딱 떠오

르는 작품’이 없다. 매년 창작공연작품을 공모하고, 시상하고, 무대공

연도 펼치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품은 커녕 국내에서도 이렇다하게

주목을 받는 작품은 없는 것이다.

뮤지컬이든 오페라든 연극이든 어떤 작품이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

를 갖추고, 명성을 얻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많은 작품들도 초창기에는 모

두 그렇고 그런 작품이었다. 오랜 세월 거듭되는 공연과 수정작업을 통

해 오늘날의 훌륭한 작품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대구에서 열리는 창작공연은 한두 해 공연으로 수명을 다

하기 일쑤다. ‘괜찮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은 적어도 5,6년 이상 지

속적으로 공연을 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는 데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 햇빛과 시간, 농

부의 보살핌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우리 공연문화계에서는 이 과정을

모두 배제하고, 처음부터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기대한다.

낙숫물 문 화 예 술

정책을 기 대 하 며

조두진

매일신문 문화부 기자

기획특집 _ 새 대구지방정부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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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지원도 마찬가지다. 현재 대구에서 오페

라나 뮤지컬 창작 혹은 제작에 지원하는 금액은 1,2

천만 원부터 많아야 5천만 원∼1억원 정도다. 1억

원 이상을 지원받는 작품은 한 해 1개 작품을 찾기

도 어렵다. 냉정하게 말해 1억 원으로는 관객을 만

족시키는 오페라 작품, 뮤지컬 작품을 제작할 수 없

다. 재원이 부족하니 어설프게 만들 수밖에 없고,

‘촌스럽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은 조성하지 않고 ‘역시 안된다’고 깎아

내리는 것이다.

공연계만 일회성 지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2011년 개관한 대구미술관은 전국 미술관 중 시설

과 규모 면에서 5,6위로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

러나 알맹이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세계적으로 통

할만한 소장품은 5,6점에 불과하다. 한국 3대 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구미술관은 2013년 쿠사

마 야요이 전시, 애니마믹 비엔날레 등 기획전시에

의존하고 있다. 미술관은 잘 지어놓았는데 소장품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기획전, 특별전으로 관람객을

끄는 것이다.

기획전시는 필요하다. 그러나 대구미술관처럼

큰 미술관이 늘 기획전시, 특별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중 훌륭한 전시를 계속하는 것이 시민과 미술 애

호가들에 대한 도리고, 넓고 아름답게 지어놓은 미

술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이 와중에 대구시는 ‘이우환과 그 친구들’이라

는 새로운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기본

설계를 마쳤고, 곧 착공할 태세다. ‘이우환과 그 친

구들’ 미술관 건립에는 약 3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다. 이후 더 많은 운영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지어놓은 대구미술관을 가꾸는 대신 또 새로운 미술

관을 짓겠다는 것은 한 우물을 파는 대신 또 다른 우

물을 파는 격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에 큰 구멍을

뚫는다. 월드 스포츠 스타, 위대한 발명가, 음악가,

화가, 기업가 등 성공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

에 선 것은 아니다. 재능과 더불어 낙숫물이 떨어지

듯 그들 모두는 오랜 세월 자신을 갈고 닦았다. 이것

저것 조금씩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갖고 오

랜 세월 스스로를 단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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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는 데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 햇빛과 시간,

농부의 보살핌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우리

공연문화계에서는 이 과정을 모두 배제

하고, 처음부터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기대한다.

해마다 새로운 공연작품을 창작하는 일은 가치

있다. 대구에 대형 미술관을 또 하나 건립하는 것 역

시 가치 있다. 그러나 될성부른 작품을 발굴해서 세

계적으로 키워 나가는 것, 이미 잘 지어놓은 대구미

술관을 대한민국 대표도시 대구의 위상에 걸맞게 가

꾸고 키우는 일은 더 가치 있다.

이제 6.4지방 선거로 대구시를 이끌 리더십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문화예술정책을 주문하고 싶다. 그래서 대구에는 축

제가 많고, 대형 미술관이 2개나 있다는 ‘위안’으로

마음을 달래는 대신 ‘OOO는 대구가 만든 오페라

작품이다, 대구미술관에 가면 세계적인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다’는 ‘자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획특집 _ 새 대구지방정부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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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힘

영상_대구 사진의 선각자 구왕삼

건축_대구건축의 거목, 후당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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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왕삼의 작품세계와 사진론

대구 사진의 선각자구왕삼

김태욱

대구사진문화연구소 소장

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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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진은 조선말엽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토대를 다지기 시작하였

다. 광복과 함께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한국사진계는 새롭게 기지개를 펼쳐 나갈 동력이 필요한 시기였으

며, 한국전쟁을 맞이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진 경향을 추구하게 된다.

구왕삼은 1905년 경상남도 김해 출생으로, 1930년대 찬송가 번역과 음악 평론을 통해 당대 문화계에

서 활동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최초 결성된 건국사진문화연맹에서 주최한 사진전에

서 <군동群童>이 특선에 당선되면서 그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1947년 5월 25일 영남일

보에 게재한 「대구사진계를 논함」이란 글을 필두로 하여, 194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까지 동아일보, 조

선일보, 영남일보, 매일신문, 대구일보 등의 일간 신문과 전문잡지인 『사진문화』 등에 사진이론과 비평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한국 사진계에서 독보적으로 사진 비평 분야를 개척하였다.

1. 구왕삼의 작품 세계作品世界

구왕삼의 집안은 무역업을 하였던 부친이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가 그의 진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

인다. 장녀인 구명순은 서울 정신여학교, 차남 구왕도는 평양신학교 출신인 것으로 보아 구왕삼도 기독교

계통 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파악된다. 1920년대 말에 김해 지역의 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장로교 교육부 간사 및 신편찬송가 편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용으

로 사용할 『신편찬송가』1935 자료 수집을 위해 1934년 일본을 방문한 구왕삼은 그곳에서 카메라를 구입하

고 사진술을 습득하여 돌아와 음악활동과 함께 <대구아마추어사우회>에서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동시에

한 것으로 파악된다. 어떤 계기를 통해 사진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

의 사진들은 대체로 정물과 아이들을 소재로 한 사진들, 당대의 사회적 성격을 냉철하게 인식한 사진들로

크게 구분할 수가 있다. 구왕삼의 사진은 기본적으로 사진이 갖고 있는 그대로의 기록성과 재현성을 충실

구왕삼 선

생의 생

전 모

제목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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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따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 사진계의 주된 특성인 회화적 경향의 사진 제작 방식과는 다르게, 구

왕삼의 작업은 피사체나 사물에 대한 직접적 접근 방식에서 사진의 프레임 안에 담긴 장면의 진실성과 이

면裏面의 정수까지도 내포하여야 함을 사진의 가장 핵심적인 축으로 두고 있다.

구왕삼의 남겨진 작품 사진을 보면 첫째, 정물 사진들은 탁자 위에 컵을 올려놓고 그 안에 물을 채워

무궁화 등의 꽃을 찍은 사진과 사발로 된 밥 그릇, 완두콩, 석류, 콩나물로 구성된 사진들이 있다. 이 중에

서 1947년 발표된 <콩나물>이란 제목을 가진 작품은 복福자를 새긴 사기 밥그릇과 뚜껑, 분리된 완두콩, 콩

나물을 이용해 제작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뛰어난 점은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는 식食에 대한 것을 간

단한 세 가지 사물을 이용해 표현한 것이다. 복福자가 새겨진 밥그릇에서 뚜껑을 들어내 걸치게 하고, 분리

된 완두콩 껍질을 마주보게 하여 각각 두 개의 완두콩을 놓고, 두 개의 콩나물을 젓가락처럼 밥그릇에 걸

쳐 서로 대비되도록 하여 강렬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삶에서 먹거리가 가지는 의미,

1970년대 산업화로 보릿고개를 넘어설 때까지 많은 한국인이 굶주림에 허덕였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광복을 전후한 한국 식문화食文化에의 은유적隱喩的 표현이라고 하겠다.

둘째, 당대를 보는 그의 날카로운 시각으로 1940년대 중반 제작된 사진은 그가 당시 한국이 처한 정

치·사회적 현실을 냉철하게 보는 작품이다. 마룻바닥 위에 장판을 깔고 한반도 모형을 제작해 얹은 다음

한반도의 허리에 쇠사슬을 양쪽에 못으로 고정을 시키고, 쇠사슬 위에 작은 물고기를 얹은 다음 위쪽은 낚

시 줄과 바늘에 별 모양을 연결시켰고 남쪽으로는 동일한 방식으로 엽전을 연결시켜 놓았다. 이 작품은 무

엇보다도 구왕삼의 시대를 읽는 눈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해방 후 강대국들에 의한 분단과 함께 한반도라

는 먹이를 두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이 다투는 격동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광복에서부터 오늘

까지 이어지는 이 상황이 진행형임을 볼 때, 그가 시대를 품어보는 안목은 당대 사진가들 중에서 최정점에

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진과 연관해 1945년 10월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독립만세>가 있다.

옛 조선총독부 앞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연합군이 주둔한 건물과 국기들을 배경으로 하고 정문 앞에서 서

성이는 군인들과 정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조선독립만세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들이 근

대구예술의 힘

한반도

콩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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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 사진이 흥미로움을 주는 것은 프레임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

총독부 건물은 기울어져 있는데, 현수막은 수평으로 프레임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연합군에 의한 한반도

상황이 평탄하지 않음을 인식한 작품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촬영된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

렷하게 나타난다. 이들 사진이 연합군 주둔과 환영이라는 새로운 현실이 드러나게 사진의 프레임을 구성

하고 있다면, 구왕삼의 사진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직접적이면서도 이면에 가려진 당시 상황을 보려한 내

용의 차이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왕삼의 이 작품들은 광복에서부터 숨차게 진행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직시直視한 사진들이라 하겠다.

셋째, 1945년 발표한 <군동>을 필두로 해서 구왕삼의 사진작업에는 아동들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그

가 당대에 대한 확고한 시대의식과 비판 정신을 시각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일면으로는 밝고 희

망적인 면을 보는데 그 대상은 아이들이다. 피사체로서 아이들은 밝고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간혹

반대의 경우에는 철저히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물을 사진의 배경에 병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인간

에 대한 박애정신의 한 부분으로 아이들의 순수함을 극대화시키는 것으로 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1967

년 3월과 5월에 열린 <구왕삼 시사詩寫전> 팸플릿pamphlet은 그의 사진작업에 대한 전체적인 단초를 제공한

다. “사진寫眞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寫眞”이란 명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진을 시

와 관련한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한다. 시는 언어로 구성되어 만들어진 이미지이고, 사진은 이미지로 읽어

내는 하나의 시다. 시를 읽고 하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려내듯 사진이미지를 보고 하나의 시를 생각

하게 하는 것이 그가 사진이란 도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미지가 갖는 힘을 인

식하고, 언어를 통해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감성과 시대의 상象을 이미지로 전환한 은유이다. 이처럼 구왕

삼의 사진이 보여 주는 주제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통찰이면서, 인물들의 현장감 있는 삶과 해석을 통

해서 인간 존재의 깊이를 추구한 ‘시詩적 은유隱喩’이다.

대구사진의 선각자 구왕삼

조선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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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왕삼의 리얼리즘 사진미학

한국사진계는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사회현실을 겪게 된다. 36년간의 식민통

치를 받으며 일제에 의해 예속되었던 자주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게 된 해방공간에서의 한국사진계는 물리

적 강압과 차별 없이 동포들이 기쁨의 순간들을 만끽하는 감격의 현장을 사진으로 고스란히 담을 수 있

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진예술의 형식은 정치적·사회적 현상과 무관하게 일제 강점기 당시 형성되어 고

착화된 ‘회화적 서정성이 가미된 공모전 위주의 자연관조적 살롱사진’이 여전히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

존의 모든 것을 파괴한 한국전쟁은 사진예술 분야에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게 되고, 구왕삼은 20세기 전반

한국 사진예술을 지배했던 사진형식과 내용에 정면으로 맞선다.

한국전쟁이후 구왕삼은 회화·문학·음악 등의 예술분야에서 나타나는 일반원칙에 입각한 과거의 예

술사를 참조할 때, 사진적 리얼리즘은 종래의 예술 관념과 개념으로 논의할 수 없는 새로운 스타일이어서

새로운 각도로 사진 본래에 대한 문제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우선 “사진의 본질은 『메커니즘』의 예술이므로 사진술의 발달은 그 전부가 현대광학 연구의 성

과에 의하여 좌우되며 발전함으로 사진예술의 완성의 길은 과학발달과 함께 영원한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고 본다. 그리하여 사진예술의 특수성도 광학기구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의 시각한계를 새롭게 확대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영원히 새롭고 젊은 예술이다. 즉 사진예술의 본질은 과학성에 기초를 두고 발달하는 징

두징미徵頭徵尾 『메커니즘』의 예술이다”라고 적시摘示한다.

그러면서 문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표현방법, 형이상학적 심리추구를 할 수 있는데 반

해, 사진은 단면에 불과한 제한된 인화지위에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사상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사진은 외적外的인 자연세계 중에서 미美와 진실眞實이 내재하고 있는 현실現實과 인

간생활을 정확히 묘사하는 표현형식을 빌어 작품으로 완성된 기본적인 조형기록이라고 보았다. 둘째, 이

대구예술의 힘

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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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사진의 기본 성질에서 리얼리즘적인 창작 문제는 모티브motive의 취급 방법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모

티브의 취급의도를 중요하게 보았는데, 취급의도에 따라 표현형식도 다르다고 정의한다. 그는 모티브를

크게 자연, 인물, 현실 문제의 세 가지로 나눈다. 그는 “「리얼리즘」 사진이란 무엇인가? 일관一貫으로 요약

要約하면 인간人間의 본질本質에 대對한 진실眞實하고 열정적熱情的인 탐구探究와 생동적生動的인 역사적歷史的

현실現實을 「카메라」로 형상화形象化하는 사진寫眞”이라고 했다. 또한 “진정한 예술이란 작품의 이면에 작가

가 있고 시대가 있고 역사가 있고 사상이 있어야 한다. …리얼리즘의 사진은 시각생리의 새로운 변혁인 동

시에 고도한 사색과 기술적 처리가 필요하다.

…리얼리즘 작가는 사회비판가인 동시에 사회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이며 사진문화전사이다.” 나아가

현실의 반영인 사진예술의 본질은 당대의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재현再現하는 것인데, 그 바탕인 ‘기록’에

서 성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회화, 문학, 음악과는 다른 사진만의 고유한 표현방법, 사진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사진예술의 길을 가야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리얼리즘의 표현방법으로 스냅snap사진술을 제시한다. 절대 비연출에 의

한 절대 스냅의 사진형식을 회화적 사진술의 대척점으로 내세우는데, “이제는 작가作家의 주관主觀의 표현

表現이 직결直結된 사상성思想性 내지乃至 심리표현心理表現의 사진寫眞이 되어야 하고 작가作家의 체질體質에서

울어나온 즙액汁液같은 독창성獨創性이 풍기는 사진寫眞을 요구要求하는 시대時代…”라고 하였다.

외부세계소재의 조형적 미美나 아름다운 순간만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외면의 세계가 어우러져

만나서 나오는 ‘의미’의 세계를 포착해 표현한 것이 진정한 사진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존의 회

화적 사진이 보여준 수많은 연출사진과 의도된 사진형식과는 반대로 사진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절제한

사진만이 진정한 리얼리즘 사진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을 그는 논하고 있다.

대구사진의 선각자 구왕삼

제목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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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간략히 살펴본 구왕삼의 ‘리얼리즘 사진론’은 고도高度의 지적성찰을 갖추고 있기에, 당대 사진

계 현실에서 수용이 쉽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이런 사진 논리로 무장한 그가 과거에 갇혀 발전된 이념이

나 개념을 스스로의 동력으로 끌어낼 여건도 마련하지 못하던 한국사진계를 향해 쏟아낸 비평들은 지금

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날이 선 것들이었다. 또한 그가 주장했던 사진 이론은 주된 활동지역인 대구 경

북의 사진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사진론과 비평에 맞서고자 회화적 전통을 계승한 진

영은 그들 나름의 치열한 사진작업과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으로 1950-60년대 대구지역의 사진

계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들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

는 것이다. 그렇게 양대 진영을 갖춘 대구사진계가 서울을 포함한 타 지역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지속적인 성장을 통하여 1960년대의 황금기를 이끌어낸 초석이 바로 그의 리얼리즘 사진론에 있다.

3. 나가는 글

1930년대에서 한국전쟁까지 대구사진계는 ‘사진공모전’을 매개체로 하여 발전을 하여 왔다. 일제日帝

하에서 개최된 사진공모전을 통해 대구사진계는 근대 사진예술의 토대를 구축하면서 전국에서 그 명성을

확고히 하였고, 광복이후의 사진공모전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짙은 그

늘도 있었는데, 1950년대 중반 구왕삼의 이론과 비평은 일제강점기부터 지역 사진계에 고착화되어 있던

회화적 형식의 사진을 청산해 나가는 과정이면서, 한국전쟁이후 새로운 사회적 현실에의 인식으로부터 나

온 사진이론 전개이고, 영남지방에서 발현되었던 민족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가능성을 풀어놓았

던 한국 근대사진의 한 축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과 사진미학은 해방 전후의 사회적 현실에 초점을 맞춘 사진과 한국적 사진미학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당대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 그것의 반영을 통한 새로움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사

대구예술의 힘

제목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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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가 자신이 처한 당대에 무엇을 보고 사진이미지로 담을 것인가 하는 사진가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고스

란히 드러나 스타일화된 것이고, 영남지역의 전통적 맥락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사진작업과 이론에 내

재된 ‘자주적인 시대정신’은 그만큼 드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사진의 선각자 구왕삼

배추고방

참고문헌

김태욱, 「1930-50년대 대구·경북 사진의 특성」, 한국컨텐츠학회

논문지 제12권 제7호, 한국컨텐츠학회, 2012.

-----, 「대구 근대사진의 형성과 전개-사진공모전과 이론적 비

평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제49집,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12.

김은하, 「음악평론가 구왕삼에 대한 연구」, 이화음악논집 제14집

제2호,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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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현대건축을 풍미한 대구건축의 거목, 후당 김인호

대구건축의 자긍심을 심은 사람

장석하

경일대학교 교수

대구예술의 힘

경북실내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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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건축역사를 조금이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당 김인호을 거명하지 않고 대구 건축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들 한다.

후당선생은 1932년 4월 경북 금릉군 개령면 서부동에서 출생하였고 김천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의대와

건축과 두가지 진로에 망설이다가 5촌 외숙의 영향으로 건축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당시 지방에

처음으로 설립된 청구대학 건축과에 입학하여 후당의 건축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스승 정경운교수와

만나게 된다. 그 후 59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27세 나이로 청구대학 건축공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

면서 본격적인 건축활동이 시작되었으나, 1967년 당시로서는 매우 큰 사건인 청구대학 본관 붕괴사고로 35

세 젊은 나이에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건축가로서 후당의 건축활동에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학교 재직 시 스승과 현대건축활동도 많이 하였지만 특히 한국전통건축에 관한 연구활동이 바탕이 되

어 그 후 후당의 건축작품 설계 모티프로 한국전통건축이 매우 많이 차용되었다.

경북실내체육관은 신라인의 투구형상, 서울잠실야구장은 장고, 대구시민회관은 한국의 처마선, 대구

문화예술회관은 갑사고깔, 아리랑 곡선 등 후당만의 한국적 이미지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온화하고 과묵하면서도 탐구적이고 창의적 기질은 주변사람들에게 선생의 색깔을 더욱 각인시켜주기

도 하였지만, 그의 박식함과 불교철학에 바탕을 둔 그의 언행은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였다.

이전 후당이 참여한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진실로 세상에 건축가 김인호를 알려주는 첫 작품으로

는 아직도 우리 곁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1966년 현상공모당선작 경북실내체육관이다. 이 작품으로 인하

여 1971년 제1회 건축제전 문화분야 건축대상을 수상하여 선생의 명성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강원,

춘천, 대전 충무체육관 등 당시 전국의 주요 실내체육관은 대부분 선생의 설계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러한

축적된 경험들이 서울 잠실야구장설계로 결실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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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사무실 명칭 <대아>는 1969년 사일동 누비다방 4층으로 건축설

계연구소를 내면서 비로서 독자적인 활동의 근거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5년 한국예총 대구지

회장에 선출되면서 그전까지 예술장르에서 도외시 되던 건축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본격

적인 예술분야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후당의 꿈은 자신이 구축한 건축이상을

아무런 간섭 없이 마음껏 펼쳐보고 싶어 진취적이고 낭만적인 성품은 그의 행동 곳곳에서 살필 수 있다.

사무실에서 항상 향을 피우고 묵상이나 독서에 빠져 들었고, 설계시 절대 앉지 않고 꼿꼿이 외다리로 서서

설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기도 하였다.

평소 술을 좋아해서 국세청 뒷골목, 시청 주변 소주집에 자주 들렸다. 그러나 술보다는 술자리를 통해

지인들과 제자와의 대화 창구로 술집을 자주 이용하였고, 때로는 돈으로 인해 본인과 제자들 모두가 힘들

었던 추억들도 남아있다.

후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많은 애착과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진행 중인 작품구상에 몰두하

였고 심지어 담배갑에 즉흥적으로 스케치나 메모를 하여 작품에 반영토록 하였다. 스케치는 때로 건축법

규와는 무관하였지만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멋을 담으려는 시도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1979년 판문점에 높

이 300m에 달하는 민족통일기원탑의 전통양식 건립안을 계획하기도 하여 때로는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

우치기도 하였다.

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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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건축의 역사

한국건축역사에서 근대건축이 시작된 후 6.25전쟁이 끝난 후까지 대구사람들에 의한 대구건축은 없

었다고 함이 옳을지 모른다. 이전의 근대건축물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나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는 당시에 건축설계 및 시공기술을 가진 한국인이 없었고 자본 역시 부족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후 철도청 직원들 관사였던 연립주택형식의 풍악장아파트를 설계한 이 성해씨중앙건축사사무소, 경북 건축

사 1호이며 대구백화점 본점건물을 설계한 고만권씨대구건축사무소, 경북도청사를 설계하고 청구대학 교수

를 지낸 정경운씨 등이 대구건축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건축의 불모지인 대구에 기초를 닦은 분들이며, 이

런 선구자들이 길러낸 제자들이 중심이 된 대구건축 2세대 중 한 분이며 대구건축을 전국에 알린 분이 후

당 김 인호선생님이다.

2. 김인호의 내력

1932년 4월 21일 경북 금릉군 개령면 서부동 324번지에서 어머니의 백일기도로 태어났다 한다. 16세

때 부친이 돌아가셨고 넉넉지 않는 가세로 김천농림을 졸업한 후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이사를 했고, 의과

대학 진학에 뜻이 있었으나 가정 형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1952년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건축과가 개

설된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건축과 야간부에 진학하게 되면서 선생님의 건축인생이 출발을 알렸다. 뿐만 아

니라 학과에 입학하여 평생 건축의 스승이며 대구건축의 1세대로 일컬어지는 정경운교수와 조우하게 된

다. 정교수는 52년 청구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되면서 청구대학 건설은 물론 구 대구대학 본관현 영남대학교 의

과대학 부지, 경북도청, 구 대구은행본점, 영남대학교 마스터플랜,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등 당시 대구의 최

고 건축물들을 남긴 바 있다.

대구건축의 자긍심을 심은 사람, 김인호

대구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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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대구예술의 힘

당시 정교수님이 설계에 자주 차용한 모티프인 보를 외관으로 돌출시킨 수법은 전통건축 목구조의 외

관을 변용한 것이라 하였으며, 당시 그가 설계한 건축물을 코리아니즘건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김선생님건축사전공은 졸업과 동시에 동기생이었던 김현산구조전공과 함께 청구대학 건축공학과 연구조

교가 되어 정교수의 설계일을 도우면서 세사람의 인연은 1967년 청구대학 신축 본관 붕괴사고를 전후한

시기까지 이어졌고 김현산교수님과는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3. 삶의 과정

3년간 연구조교를 거친 뒤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20대 후반 나이로 1959년 김현산씨와 함께 청구

대학 건축공학과 전임강사로 학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학교 재직시절 한국전통건축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

으나 당시 한국전통건축을 지도해 주는 사람 없이 대부분 독학으로 연구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

심이 그를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 설계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콘크리트로 전통건축을 시

공한 경주 <화랑의 집>, <영주 부석사 복원설계>, <영남제일관문> 등 전통건축부분에도 많은 작품을 남기

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재직시 <해인사 조영계획에 관한 고찰>, <동화사 조영계획에 관한 고찰>, <황룡사지

에 관한 고찰>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황룡사 9층탑 복원계획안>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학교

를 떠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전통건축에 관한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음은 자명할 것으로 추측된

다. 또한 1956년 제1회 건축사시험 집단거부사건에 김현산과 함께 청구대학교 출신대표로 참여하면서 건축

사법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개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의욕적

활동은 1967년 6월 자신이 설계한 청구대학 본관 신축건물이 6층 시공 도중 도괴되는 사고를 맞이하면서

학교를 떠나게 되고 건축사시험 거부로 면허도 없이 건축계에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

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후당 김

인호 가

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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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떠난 후 북성로 동해반점 옆 조그만하게 1966년 개소한 <동방건축설계연구소>로 돌아왔고 최

성덕과 함께 제자 권태식합동건축, 이현동작고, 김화자세명건축, 현 대구시 의원, 이성현 성건축 등과 함께 일을 시작

했고 설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거부했던 면허시험도 응시하여 1969년 면허를 받게 된다. 이는 건축현장에

당당하게 참여함을 의미하고 자신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개인적 의미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진실로 건축가 김인호라는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출발점은 1971년 제1회 건축제전 문

화분야 건축대상을 수상한 <경북실내체육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계기로 강원, 춘천, 대전 등 당

시 한국의 대부분 실내체육관은 선생님의 손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러한 체육시설설계경험이 <서울 잠실

야구장설계>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1969년 사일동 누비다방 4층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대아건축설계연구소>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

었으며, <대아>라는 명칭이 그 후에 김인호선생의 대명사로 함께 따라다니게 되었다. 사무실은 그 후에도

여러 번 옮기게 되었고 후반기 활동은 중구 공평동 25시 다방 2층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권태식, 김무권, 김충삼, 이성, 서정남, 서

보광 등 대구건축계를 이끌 수 있는 풍부한 인재를 배출하였고, 이들이 대구건축을 견인하는 동량으로 자

존심 높은 대구건축의 위상을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님의 인품과 성격으로 보아 감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으나 경륜과 경험은 그를 가만히 사무실

에만 있게 하지 않고 사회활동에도 참여토록 종용하였다. 선생님은 대구, 경북의 여러 심의위원을 역임하

였고 한국건축가협회 대구, 경북지부장을 2차례나 역임하기도 하였다. 1985년 한국예총 대구지회장에 피

선된 것은 당시 문인협회, 미술협회, 사진협회가 주도하던 분위기에서 예술영역에서 변방으로 취급되었던

건축의 입지로 볼 때 매우 획기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예총활동으로 인해 예술계 전반에는 건축

단체의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이미지가 제고되었고 선생님의 뒤를 이어 계명대학교 건축과 교수이신 이중

대구건축의 자긍심을 심은 사람, 김인호

영남대 건

축사 연

구회 강

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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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구예술의 힘

영남제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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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 당선되면서 예총활동에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생님의 꿈은 아무런 간섭없이 자신만의 건축세

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런 학교생활 마감 후 사회로 내몰린 선생님은 작은 일감보다

는 큰 일감에 욕심이 많았고 돌아온 보상은 사회 경험이 미약한 선생님을 이용하는 주변사람들에 의해 많

은 돈과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평소 술을 좋아해서 국세청 뒷걸목, 시청 주변 소주집에 자주 들렸다. 그러

나 술보다는 술자리를 통해 지인들과 제자와의 대화 창구로 술집을 자주 이용하였고, 때로는 돈으로 인해

본인과 제자들 모두가 힘들었던 추억들도 남아있다. 설계에서는 용의주도함과 자존심이 가득하였으나 설

계 이외 맥반석사업, 온천사업, 한려관광개발사업 등 그가 펼친 사업들은 설계에 집중하였던 성격과는 달

리 때로는 무능하기까지 하였다고 주변사람들은 이야기들 한다. 이는 진취적이고 낭만적인 성품과 이재에

다소 용의주도치 못한 선생님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4. 그의 색깔

공평동 사무실에 작업할 당시의 사정도 비슷하였다. 사무실 경리를 보는 여직원이 출근하면 가장 먼

저 하는 일이 선생님 방에 향을 피우는 것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방은 당시 일조,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사무실 내에 골동품들이 가득하여 실내에서 묵은 냄새가 많이 났다.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향을 피우기도 하였지만 불교와의 연은 항상 곁에 머물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선생님

을 공평동 사무실에서 약 6년간 모신 적이 있어 방에 혼자 향을 피워 놓고 책을 읽으시는 모습이 외로워

보이기도 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78년도 년말 사무실에서 제자들에게 줄 월급이 없어 미안하였던지 회식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간 후 주변을 살피니 선배 몇 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중 선생님이 먼저 이성선배님에게 술을

한잔 주시면서 그 유명한 “따귀” 한 대를 때렸다. 그 순간 말로만 듣던 따귀가 이것인가 싶었는데, 이래서

대구건축의 자긍심을 심은 사람, 김인호

예총지부장 행

사중

잠실 야

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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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2대구예술의 힘

선배들은 자리를 먼저 피하는 구나라고 느낀 순간 바로 나를 부르고 술을 준 후 덤으로 한쪽 뺨이 얼얼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왈 “나에게 따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성공한다. 이래서 아무나 빰을 때리지

않는다고”, 이것이 선생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성 싶다.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하신 말씀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인간이 태어나면 산다는 자체가 죄악이

니, 생을 살아가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업보소멸의 기회로 여기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인

격을 갖춘, 그야말로 인간적인 사람만이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 “늘 작은 부분에 치중하다보면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작은 것에 소홀해서도 안 된다”. “구조설계자는 항상 디자이너와 함

께 하여야 하고, 과감한 디자인 수법을 소화할 수 있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한 자루의 연필로 여섯 종

류 굵기의 선을 그을 줄 알아야 비로소 도면을 제대로 작도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금쪽같은 말씀이나 당시에는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제자들이 부끄러울 따름

이다. 후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많은 애착과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진행 중인 작품구상에 몰두

하였고 심지어 담배갑에 즉흥적으로 스케치나 메모를 하여 작품에 반영토록 하였다. 스케치는 때로 건축

법규와는 무관하였지만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멋을 담으려는 시도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1979년 판문점에

높이 300m에 달하는 민족통일기원탑의 전통양식 건립안을 계획하기도 하여 때로는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치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작품성을 논하기가 너무나 조심스럽고 몇 마디로 함축하기에는 그 뜻을 왜곡시키지나 않을

지 조심스러우나, 살아온 인생 여정과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와 해

방 후 혼란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집착하였고, 또한 70년대 모더니즘과 절충하여 한국적 이미지의 형상화

를 위한 요소를 가미하거나 80년대 전후하여서는 포스트모던적 시각으로 상징적 전통성을 해석하고자 노

력하던 과정에서 그의 건축세계의 일면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예로 경북실내체육관은 신라인

의 투구, 대구예술문화회관의 갑사꼬깔, 아리랑 곡선, 서울 잠실야구장은 장고의 옆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화랑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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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씀하였다. 작품초기부터 개념설정이 있었는지, 설계과정 중 표현된 어휘구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작

품의 상징성을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여 성숙된 조형감각으로 승화시킨 선생님의 건축색깔은 아직도 빛을

발하고 후학들에게 대구건축의 색깔을 제시해 주는 듯하다.

5. 되돌아 볼 기억들

현재 선생님의 스케치는 한 장도 보존된 것이 없다. 무소유의 철학이라 하였던가? 후당 자신이 가진

흔적조차 현재는 찾을 수 없으나, 때로는 자조적이고 한스러움이 숨어있고 또 현실을 초월하려는 의지로

보이는 어귀가 있는 돌아가시기 5년 전 1983년 여름에 쓴 시조 한 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 돌았구나 돌았도다/ 몇바퀴나 돌았는고/육도윤회 돌고 돌아/ 오만 고통 다 받았소/ 이제사 철

이 들어/ 진면목을 갖추우니/ 오늘도 극락이요/ 내일도 극락이네/ 불쌍한 이 중생아/ 내 뒤를 따라오소

후당 선생님은 자신만의 한국적 건축언어를 창출하여 한국건축의 전통성 확립에 노력하였고 현대건

축과 전통건축의 접목에도 노력한 대구가 낳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라 감히 말 할 수 있다. 과거의 화

려했던 대구건축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대구에서 잊혀져가는 거목, 새로운 세계로의 끝없는 도

전을 꿈꾸던 건축가 후당을 다시 곱씹어 봄이 어떨지?

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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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시공갤러리 포럼2000년에서 91년부터 2000년까

지의 작업 흐름을 조망하면서 김호득의 예술세계를 ‘한국의

예술사적 사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

관의 미술저널 작가론에서 그의 작업의 아이콘을 언급하며

요약한 바 있고, 전국 주요 전시에서의 수많은 작품들을 유

심히 보아온지 14년이 또 흘렀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역시 이

작가는 하나로서 전체를 꿰뚫어 가고 있

고, 이제는 ‘수묵의 경계를 관통하여 수묵

을 넘어서는’ 경지에 진입, 그의 창조적 진

화는 현재진행형이다.

1. 필묵筆墨에서 필과 묵으로 : 수묵화

그리기로부터 수묵에 ‘대한’ 사유로

동양의 전통 화론에서 필과 묵은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전일체全一體이다. 바탕 화지와 필묵과 정신의 만남의

자리가 곧 형形과 상象이 투영되는 자리이고, 정신의 흔적으

로 묻어나는 필묵의 자취를 따라 형상이 드러나게 된다. 그

러므로 필은 묵을 통해서만 그 잠세태가 현실화되고, 묵 역

시 필을 통해서만 그 현색玄色이 품고 있는 창조적 에네르기

가 화지 위에 현재화된다.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장미진

미술평론가

REV

IEW

ART

비평 & 리뷰 _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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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경계를 드러내는 정신세계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

이다. 그는 전통 화법과 필묵법의 현대적 해석을 통한 다양

한 구사, 이를테면 단일 시점과 사선의 강한 운동감을 고려

한 공간운용이라든가 생략법과 절제로 농밀한 심상공간의

밀도를 우려내는 것 뿐 아니라, 농묵과 담묵의 발묵법을 넘

어 갈필과 평붓, 뿌리기 등의 다양한 필묵 운용을 통해 격식

에 매이지 않는 ‘파격의 미’를 구현해 보여주었다. 특히 먹의

한 점 한 획이 우주적 에네르기의 분출이 되고 화면의 물리

적 공간이 우주와 자아의 투기의 장場이 되는 것을 넘어 작

가자신의 손과 붓을 자연이 ‘자연’으로 드러나는 통로로 삼

음으로써 흑과 백, 색과 공空의 동양적 심상공간을 극대화한

점은 이 작가의 지향점을 엿보게 한다.

이같은 김호득의 작가인식과 실천을 바탕으로하여 볼

때, 90년대작가의 대구시대 시작들어 최근까지의 작품들은 그의

그동안 김호득은 이러한 필묵의 세계를 집요하고 일관

되게 탐색하고, 또한 작업으로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삶이

다원화되어가고 미술언어도 그만큼 분방해지고 있는 오늘

날, 한편에서 한국화가들은 전통매체의 한계와 표현 어법의

진부함을 거론하며 소재나 기법의 적당한 변용이나, 현대미

술의 어설픈 차용으로 비켜가기와 건너뛰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호득은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종이와 필묵과

의 정직한 대결을 통해 전통 매체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

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해왔다. 그만큼 그는 동양예술사유

의 심연을 관통하며 당당하게 우리 앞에 그 결과물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90년대 이전 작품들은 전통의 필법을 익히고 자연

대상의 에이도스eidos와 기氣의 흐름을 읽어 그 엑기스를 필

묵에 실어내는 사의화寫意畵의 진면목에 접근해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작업에 있어 겸재와 단원, 소정, 그리고 제백석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잭슨 폴록

이나 안젤름 키퍼의 예술사유를 수용, 그만의 개성있는 작

품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전통을 양식적 기반으로 하되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데

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방향으로의 모색과 동양적 정신으로

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추상표현주의나 신표

현주의 대가들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태도와 ‘리얼리티’의

화가 김

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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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정에서 역사적 필연성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필

묵의 운용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조율을 극대화하여온 그가

필과 묵의 세계를 따로 떼어놓고 보기시작했다는 점, 그것

은 한국화단에 일어난 일종의 ‘예술사적 사건’이지만 이 작

가의 정신편력에서는 일련의 필연성을 지니는 노정이 아닐

수 없다. 금호미술관과 아트스페이스서울, 학고재에서 동시

에 개최된 초대전1997. 9.24-10.12에서 보여준 그의 작품들은

이미 가시적 현상 너머의 우주적 본질에 바짝 접근하고 있

어 필묵의 흔적으로써 뿐 아니라 손가락 그림으로까지 대자

연의 상리常理, 즉 변화무변함 속에서의 변하지 않는 이치를

포착하여 밀도 있게 화포 위에 투영해내고 있다.

손가락에 안료를 묻혀 작업하는 일은 이전에도 행해졌

었지만, 붓 대신 손가락을 수단으로 한다거나 먹 대신 검은

색 아크릴 칼라나 콘테, 혹은 다른 공업용 안료를 쓰기 시작

한 것은 그가 이제 필과 묵의 관계를 또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음을 예고하고 방증하는 것이다. 필묵으로 자연의 가장

깊은 본질을 추상해냄으로써 흑과 백, 실實과 허虛의 시ㆍ공

간적 변주와 그 울림을 체득한 그가 다음 단계에서 붓 없

이 먹을 보고, 또는 먹을 넘어 흑백의 사유공간을 극대화하

는 시도는 자연스런 추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부단히 필

묵의 내재적 성질을 극대화해온 그가 또다시 그 경계를 뛰

어넘어 ‘경계선 너머의 또다른 세계’에 육박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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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갤러리의 초대전1998. 9.1-9.30에 선보인 작업은 수묵

화 그리기로부터 수묵에 대한 사유로의 변화를 여실하게 보

여준다. 즉 필묵의 붓질이나 붓길의 흔적에 정신을 실어내

는 대신, 재생된 포장지 위에 검은 공업용 안료 가루를 뿌

려 손가락으로 문질러놓은 드로잉식의 ‘바람’ 연작, 수많은

묵획의 층차로 만들어낸 흑색의 한지와 아예 붓질을 배제

한 백색의 얇은 종이 여러 장을 상하 수직으로 천정에서부

터 늘어뜨리고 바닥에는 검은 종이 덩어리들을 점점이 깔아

놓은 설치작업 등이 그것이다. 설치작업 또한 ‘바람-설치’라

는 제목을 통해 암시하고 있듯이 서구미술의 공간확장 개념

으로만은 볼 수 없고, 동양적 예술사유에서 그 문맥을 읽어

야 한다. 이제 이 작가는 붓과 먹으로 자연의 본질을 그려내

려 하는 데서 나아가 자연이 그 스스로 본질을 드러내는 장

치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부려왔던 매체를 떼어놓고 보면서 다분히 이지

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화단의 일각에서 ‘그

림에 대한 그림’으로 사유의 차원을 형상화했던 것과도 또

다른 ‘사건’이다. 오히려 동양의 비평론에서처럼 “그림을 얻

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

의 설치 의도에 부합한다. 그 이유를 다음 항에서 좀더 살펴

보기로 한다.

2. 수묵설치작업: 무묵구염無墨求染,

필진여의筆盡餘意의 경계

그의 작업 ‘바람-설치’는 먹의 현색과 백색의 조율을 위

해 최소한의 장치를 도모한 듯 하지만, 필묵으로는 온전히

가시화할 수 없는 바람의 우주적 기氣와 그 호흡의 자리를

면밀주도하게 상정해놓고 있다고 할만하다. 상하 1m 80㎝

의 백과 흑의 공간은 서로 상충되지만 또한 서로 스며들고

혼융하면서 열림과 닫힘, 빔과 채움, 허와 실, 공과 색, 양과

음, 빛의 총합과 색의 총합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욱이 종이

와 종이 사이, 바닥과 천장 사이의 공간 설정 자체가 바람의

길을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또한 감상하는 관중들의 움직

임과 호흡조차 미세하게 빛 속에 흔들리는 얇은 종이의 바

람결에 가세하기도 한다. 그는 바람을 그리는 것을 넘어 바

람 자체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설치

installation란 양식이나 장르 개념이기보다 예술의지 구현을

위한 표현의 한 양태일 뿐이다. 그의 수묵설치 작업은 외형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흔들림, 문

득, 198x135cm

, 한지에 수

묵 2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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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는 조형을 최소화해가는 미니멀한 구조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의 전작업의 문맥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동양적 심

상의 극대화를 추구한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수묵설치작업

이라고 할 만하다.

동양의 예술사유에서 볼 때, 백색 화포는 천天의 공간이

다. 자연의 여러 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허공이며, 화가

의 붓길로 흔적지워지는 자취들은 무한한 ‘비어있음’에 ‘몸

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삶과 감성의 갖가지 결들을 고스란

히 흡수하고 그 층위를 예민하게 뱉아놓는 수묵의 자취는

그러므로 동양예술가들에게는 지고의 매체일 수 밖에 없다.

모든 빛을 합하면 백색이 되고 모든 색을 합하면 흑색이 된

다는 것은 상식이다. 또한 백색은 백색대로 수많은 층차를

지니고 있고 흑색 또한 그렇다. 작가는 백과 흑이라는 두

개의 상충된 공간을 설정, 감상자가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

고 나오면서 전체공간이 하나의 유기체적 공간으로 살아움

직이는 것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그에게 있어 흑과 백은 삶의 모든 물질적 조건을 하나

의 원형질 덩어리로 환원시킨 최소의 단위이고, 또한 최대

의 단위이다. 중국 송대 화론에는 ‘무묵구염’이라는 가치개

념이 있다. 곧 묵이 없는 곳에서 색을 구한다는 뜻으로 필묵

이 없는 곳에도 여전히 형상이 있다는 미적 인식이다. 필묵

이 없는 곳은 백지가 아니라 허虛로써 실實을 대신하고 백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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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폭포의 굉음이 들리는 듯하고, 또 여러 층의 종이 사이

로 반사되고 투영되는 빛의 파노라마는 폭포의 이미지를 오

히려 더욱 강하게 부각시킨다. 흔히 그의 작품경향이 점점

추상화되어간다고 지적하지만, 그것은 현상을 넘어 대자연

의 내재적 본질과 ‘날것의 리얼리티’ 에 육박해가는 이 작가

의 예술의지의 방향성에서 가늠되어야 할 사항이다.

으로써 흑黑을 감당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뜻이 붓

보다 먼저 있고 그림이 다해도 뜻이 남아있다意在筆先 筆盡意

在”는 당唐대의 화론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만큼 여백과

침묵의 울림을 중시했고, 예술가의 언어와 뜻과의 관계에서

여의餘意와 행간의 말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문맥에서 볼 때, 김호득의 설치작업은 물리적 공

간의 확장이나 매체 및 형식실험에 전도된 것이 아니라 동

양적 이념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구현된 표현의 한

방향성의 변화인 것이다. 문화예술회관에서의 설치작업패

러다임 쉬후트전, 2000. 5.9-5.14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

다. 역시 흑백의 심상공간을 전시장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

부시킴으로써 드러나는 것을 감추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는 여백의 운용과 함께 ‘조형적 시간’의 변주를 도모한다. 모

든 ‘공간의 반란’은 곧 ‘시간의 반란’ 이기도 하지만, 특히 김

호득의 수묵세계에 있어서는 허공 속에 또다른 여백의 존재

를 가시화함으로써 물리적 시간을 넘어 관조적ㆍ미적 시간

으로의 정신적 집주集注를 꾀하고 있다.

〈설치-폭포 이미지〉의 표제를 달고 있는 그의 작업은 평

붓과 갈필의 붓자국으로 내리꽂히듯 강렬하게 다가오던 이

전의 폭포 작업과는 다르게 얼핏 담담하게 느껴지지만, 일

정 시간을 소요하며 천정의 조명과 벽면 사이에 줄지어 내

려와 있는 5m가 넘는 흑백의 종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거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흔들림, 문

득-사이, 296x184cm

, 한지에 수

묵 20

03

아크릴 대

형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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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색玄色의 획과 점

설치작업으로의 추이와 함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

항은 한국화에 있어서의 점ㆍ선ㆍ면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

각과 촉각의 공감각성을 극대화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

안 전통 필법을 넘어 온몸으로 쏟아내놓는 듯 먹의 파토스

를 현실화했던 그는 이후 수없는 점찍기의 반복을 통해 오

히려 먹의 에토스를 감각화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끝내 목

표를 정할 수 없는 예술의 세계에서 그는 짐짓 원점으로 돌

아온 듯 화지 위에 한 점씩 먹점을 찍고, 마치 하루하루 일

기쓰듯 점을 겹쳐가는 일을 통해 모든 감정과 기억들을 점

에 이입시킨다. 그러므로 수없이 반복한 작업이지만 작품들

을 열어볼 때마다 자신은 각 시기의 마음의 변화과정을 감

득할 수 있다고 한다. 화포 가득 혹은 몇 점만 점점이 떠 있

는 점획들은 현상계의 형태 너머 ‘우주의 창조적 혼돈’의 소

용돌이 속에 부유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직은 현실화되지 않

은 어떤 형상의 단초를 보여주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의 작업 문맥에서 볼 때, 이러한 일련의 작

품들은 무엇보다 감각과 정신의 조율과 그 밀도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할 듯 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하학에서의 점

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물질

적으로 생각할 때 점은 제로와 같다. 그러나 이 제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최소한의 존재로서 제로 속에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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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안미술관에서 여러 작품을 선보였듯이 수묵을

오브제화한 작업의 편린도 주목할 만하다. 흰색 검은 색의

종이반죽을 나무 상자에 붙여 공간을 밀고 나오도록 장치

한 것이라든가, 수묵의 종이뭉치를 널어말릴 때 생긴 흔적

과 함께 벽면이나 천정에 부착한 작업 등은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성을 극대화한 것으로 그동안 붓과 먹을 천착해온 이

작가의 또다른 경계를 엿보게 한다. 돌아보면, 이 작가는 전

통의 부드러운 붓 보다는 값싸고 갈라지는 붓과 빗자루처

럼 스스로 매어쓰는 붓을 더 선호했고, 전통 고급 한지보다

입자가 성글고 팍팍한 광목이나 포장지, 혹은 싸구려 재생

간적인’ 서로 상이한 속성들이 숨겨져 있어 다양한 말을 건

넨다. 이처럼 기하학적인 점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최고로,

그리고 가장 개별적으로 침묵과 언어를 잇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점의 연속이 선이 되고 선의 연속이 면과 형태로 되듯,

점의 내재적 고유성은 예술학적으로 보면 모든 형상의 단초

이면서 상징이 된다. 특히 동양의 예술사유에서 한 획은 가

장 단순한 점이고 선이며 면이지만, 삼라만상의 근원을 모

두 품고 있다一劃者 萬像之根 萬有之本는 미적인식으로 용인된

다. 이러한 점들을 한국화가 김호득은 묵필로, 혹은 손가락

이나 주먹을 쥔 손등으로 반복해 찍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 번의 스트로크가 합쳐 한 점을 이루도록 하는

가운데 점과 점의 층위를 통해 붓과 먹의 프로세스가 그대

로 드러나도록 한다. 경기도의 창고 갤러리에서 열린 기획

전‘역류’에 선보인 〈흔들림-문득〉이라는 작업은 수많은 점이

찍힌 종이를 벽면과 떨어지게 장치하여, 가벼운 충격에도

종이의 진동과 점의 진동이 서로 파장을 일으켜 공간 전체

로 퍼져나가도록 설치하였다. 그는 점들의 언어를 역시 염

두에 둔 것이고, 한편 묵점들이 자연 속에서 드러내는 그 프

로세스 자체를 관중 앞에 제시한다. 요컨데 그의 작품에서

한 점은 바로 자신의 삶의 질료를 드러내는 행위의 흔적이

고, 또한 자연으로 회향하는 붓과 먹의 질료마티에르 그 자체

이기도 하다.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한지설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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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등도 다양하게 활용해왔다. 먹 대신 검은 가루를 손가락

으로 문질러 부려놓는 작품이나 화포의 마티에르에 대한 관

심, 종이반죽과 오브제의 등장은 그가 다분히 머리로의 사

고만이 아닌 ‘손과 몸의 사유’를 중시해왔음을 방증한다. 전

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늘 ‘파격의 작가’로 불리웠던

그의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로

김호득의 작품세계는 자연의 외적인 형태를 넘어 상像

을 더듬어가는 노정의 흔적들이다. ‘보는 것을 그린다’는 말

속에는 무엇을 보고, 또 어떻게 그리느냐는 매우 복잡하고

도 미묘한 방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시지각은 그 자

체가 선택적이고 해석적이고 구성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린다’는 행위도 너무나 포괄적인 언표이다. 이 작가의 초

창기 작품들에는 갈대숲과 새도 등장하고 나무와 숲, 산과

돌들, 그리고 폭포 등의 실재 정경들이 그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온 감각으로 느끼고 더듬어가는 ‘실재’란 어

느 지점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에 당도하

면, 그 ‘리얼리티’의 토포스topos, 장소는 이내 흔들리기 시작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적인 물리적 자연의 이면에는

어떠한 비가시적인 작용인作用因이 작동하여 끊임없이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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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수많은 작업

들은 모두 일관된 화두의 점철로서 일정한 정신적 필연성을

보인다. 그의 문제의식과 표현의 노정을 ‘그리기 이전의 회

화 및 그리기 이후의 회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해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문득 : 김호득은 먹으로 순간의 영원성을 드러낸다. 문득

지나가는 바람결과 물보라의 기운, 햇살을 떨게 하는 공기

의 진동, 사물의 세포들 사이를 지나가는 압도적인 고요, 그

리고 썰물과 밀물같은 감정의 파도들까지도 그의 묵필 끝에

건져올려진다. 그러므로 그의 묵필은 사라지고 말 세상의

순간들을 건져올리는 미세한 그물망이고 낚싯대이다. 마음

은 형성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했으며, 서양에서는 그것을

나투라타Naturata, 물리적인 자연와는 달리 나투란스Naturans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있듯이 동양에서는 서양

보다 훨씬 앞서 대자연의 순환을 이理와 기氣, 도道, 음양오

행의 정체공능整體功能으로 인식함으로써 그림의 사의성寫意

性을 강조해왔다.

한국화가로서 이 작가의 관심은 자연히 모든 형태의 이

전과 그 너머의 세계로 향하였으며, 그의 조형작품들은 비

가시적인 리얼리티를 탐색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노정으

로 점철된다. 특히 동양의 전통매체인 수묵과 한지는 찰라

와 ‘사이’의 느낌을 일회적인 필치로 표출할 수 있는 많은

장점을 지닌다. 그는 다매체시대의 어떠한 매체보다도 수묵

의 깊이를 통찰하고 그 장점과 가능성을 철저히 관철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 동안의 작업들을 돌아보면, 소나무를 그

리기 보다는 소나무를 있게 하는 바람의 기운과 흔들림과

허공의 느낌을 표현했고, 폭포를 그릴 때도 그 소리와 물의

기운을 그리고자 했으며, 그 결과 한지나 광목 위에 먹물이

튀고, 혹은 글씨로 그 기세를 표현하거나, 나아가 다양한 설

치작업을 통해 종이와 먹이 품고 있는 외재적 기운을 내재

적인 기운으로 치환함으로써 공간 개념을 직관적인 언어로

확장해왔다.

얼핏 보면 예술매체의 변화나 전시형태의 변화 등으로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한지설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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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손과 화지가 만나는 그의 묵필 끝에서 모든 찰나들은 영

원을 마셔버린다. 흑 백의 색만으로도 만상의 근원과 만물

의 본질이 관통되는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원

형상原形象을 떠올리는 그림 이전의 그림이면서 또한그림 이

후의 그림이기도 하다.

콤마(,) : 그의 작업 모티브 속에는 언제나 콤마가 등장

한다. 흔들림과 문득 사이에도 콤마가 찍히고, 또 때로는 <

김호득, 사이>라는 개인전 타이틀처럼 자신의 이름과 작품

사이도 콤마로 가른다. 이 기호는 한 호흡의 숨이기도 하고,

세상은 결국 아무리 말하려해도 마저 말해지지 못할 깊은

침묵이 있음을 암시하는 암호이기도 하다. 그는 콤마를 쳐

놓고 묵필획을 겹쳐 온통 검은 색이 된 종이들을 천정에 매

달거나 구겨서 바닥에 던져놓으며, 때로는 갤러리 흰 벽면

을 그대로 보여주고 먹물을 풀어낸 거대한 수조 위에 한 호

흡의 필흔들이 일렁이며 비치게 하기도 한다.

흔들림 : 미세한 바람결이나 호흡에도 얇은 한지는 흔들

린다. 작가는 수없이 반복된 붓질로 검게된 한지나 혹은 아

무런 손도 대지 않은 백색 한지를 일정하게 걸어놓고 그 겹

들의 사이에 흔들리는 공무의 세계를 음미케 한다. 물론 공

간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미결未決의 리얼리티

에 대한 감각적 언변이기도 하다. 이미 수없이 흔들려온 마

음의 파장이 실려있는 종이들이 또다시 흔들린다.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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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겹, 사이 - 통감각通感覺과 현玄

특히 이 번 분도갤러리의 전시 제목은 <겹-사이>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들이 한 통속이지만, 전시 공간의 변

모에 따라 예민한 공간해석이 이루어지고, 작업은 창조적

진화를 거듭해간다. 이전 지하공간으로 내려가던 서울의 학

고재에서는 기운생동하는 일 획의 수묵 캘리그라피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영천의 시안과 부산의 갤러리 604에서는 먹

물 수조 속에 비치는 흑백의 일루전으로 흔들림을 극대화하

더니, 이제 3층으로 확장된 분도의 공간에서는 흑색 아크릴

릭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촉각적인 공간연출과 함께 한

지의 겹 공간을 새롭게 해석한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60평 남짓한 1층의 전시공간은 그동안의 수묵 작업 중

획의 기운과 발묵의 분방함, 그리고 대자연의 내재율을 흑

백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40평

의 2층 공간에 들어서면 손을 이용하여 아크릴릭으로 수많

갤러리 공간이나 야외 공간이든 그의 감각의 그물망에 걸리

면 그 자체가 우주공간이 되고 그 속에 무상한 시간이 가로

질러 흐른다. 낙동강 강정 프로젝트에서 샛강물 위에 몇 폭

의 광목천들을 걸어 바람과 물살의 흔적들을 보게한 작업이

나 그 흔적들이 품고 있는 시간성을 또다른 공간감각으로

시각화해 보여준 금호미술관의 작업, 그리고 이 번 분도갤

러리의 한지의 겹 작품 등은 공간과 공-간空-間, 순간과 영

원이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계속 흘러들고 흘러나가는 것을

온 몸으로 감지하게 한다.

사이 : 결국 이 작가는 흑과 백 사이, 말과 침묵 사이, 안

과 밖 사이, 순간과 영원 사이, 격정과 침잠 사이, 그리고 묵

墨과 무묵無墨 사이에 서서, 그 ‘사이’를 온 몸으로 증언하려

한다. 실은 하나인 것이지만, 또 다른 두 개의 세상 사이에

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 심연의 태허太虛가 리얼리티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그 자리를 작가는 ‘보고’ 있고 그것을 시

각화, 촉각화하기 위해 수묵을 관통하고 또 수묵을 넘어 다

른 매체와의 외도外道도 불사한다. 오늘날 서양의 이론가들

이 말하는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어지는 것 사이’의 심연, 그

래서 영원히 미완未完인 예술의 숙명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겹, 사

이-획, 162x130

cm, 한

지에 수

묵 2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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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획을 겹치고 물감 덩어리로 또다른 획을 입체화한 작품

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흑과 백 사이 회색 톤을 병치한 구성

물과 함께 코너 벽면 바닥쪽으로도 흑백과 회색의 무채색으

로 서로 비치고 침투하는 공간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뒤

편의 창가, 자연광이 들어오는 벽면에는 생성의 과정에 있

는듯한 거대한 한 획의 평면 작품이 걸려 있다. 역시 40평

크기의 3층 공간에는 병풍 형식과 격자 창호를 절충한 양식

의 한지 수묵 작품이 설치되어 자연광과 함께 갤러리 공간

을 새로운 공간으로 심화하고 있으며, 광목 위에 수묵과 아

크릴릭을 함께 사용하여 두 획의 파장을 극대화한 작품, 그

리고 한지 위에 필묵의 묵흔을 바탕으로 흑백을 조율하여

현玄과 태허太虛의 세계를 감지케하는 54장의 종이 작업이

왼쪽 벽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 공간의 바닥에는 2미터

남짓한 사각나무틀 4개에 10센티 간격으로 수많은 한지를

겹으로 걸어, 그 종이들이 양쪽의 작은 창에서 불어오는 바

람결에 미세하게 흔들리며 바닥에 반사되는 설치작업을 보

여준다.

1층에서 3층으로, 다시 3층에서 1층으로 작품들을 음미

하다보면 마치 우주 한가운데 만다라 속에 들어와 거니는듯

한 느낌을 받는다. ‘겹-사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예술의도를

암시하듯이, 작가는 아크릴릭 물감 입자와 먹 입자들의 겹

이나 한지의 겹, 흑백의 겹이나 백과 백의 겹과 그 사이라는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태현太玄의 세계가 품고 있는 겹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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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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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적하지만, 실은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외적형식이 비

슷하다고 하여 함께 놓고 비교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예술의지의 방향과 작업의 전체 문맥을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가는 동양

예술사유의 깊은 맥에 닿아 있고, 그런 점에서 검은 색으로

표현되는 현玄의 우주적 시공간 표현의 또다른 해석으로 읽

혀져야 한다. 이를테면 순수 조형적인 요소로 환원해온 서

구 모더니즘에서의 구성이나 미니멀이 아니라, ‘눈으로 만

지는’ 공무空無 세계의 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흑과 백,

존재와 비존재, 채워져 있음과 비워져 있음, 물질과 정신, 정

지와 움직임 등, 이 모든 것들은 작가가 건져올린 공무空無

의 흔적들 속에서 모두 불이不二의 경계로 수렴된다자세한 논

의는 필자의 한국 미학 예술학회 논문 <동양의 예술사유와 포스트모더니즘>

참조.

깊이와 광대함을 전제로 그 ‘사이’ 힐끗힐끗 내비치는 공무

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촉각화하고, 또한 청각화하고자 한

듯하다. 인간의 감각은 원래 통감각적이므로 보면서 눈으로

만지고, 듣고 맛본다. 모든 창조와 형상의 근원이기도 한 카

오스chaos로서의 어둠은 이미 수많은 빛을 품고 있고, 흑이

백을 드러내며 백이 흑을 암시하고, 아무것도 없음이 있음

의 바탕이 된다. 붓 한 자루로, 또는 온 몸으로 그 흔적들을

건져올려 대면케 하려는 이 작가의 자맥질이 관중으로서는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 안쓰럽다. 예술의 숙명에서 보면, 공

무나 태현의 세계는 결국 어떠한 물감이나 형식, 방법으로

예술가가 애쓰더라도 늘 한 번도 건드린 바 없는 날것생것으

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바로 이처

럼 예술이 지니는 미완未完과 미결未決의 속성 때문에 오히

려 예술에게 갉아먹히면서도 부단히 작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 번 분도갤러리의 전시에 대해 “바람 좀

피웠다”고 얘기한다. 필자는 “이런 바람같으면 좀 더 피워도

된다”고 답했다. 물론 수묵 매체는 이 작가에게 있어 조강

지처와 같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한

뜻인데, 그리고 문맥이 한 문맥인데, 외도라고도 할 수 없다.

아크릴릭 매체의 물성을 극대화한 작품들과 다분히 흑백의

구성적인 화면으로 변한 작품들을 보고, 어떤이들은 서구의

모더니즘 계열 화풍과 미니멀리즘으로의 방향 전환이 아닌

그리기의 사유(思惟)로부터 ‘그리기 이후’의 회화 및 설치로-김호득의 작품세계

화가 김

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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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경 무용단의 <푸너리 1.5>가 지난 4월 10일 수성아트

피아 용지홀에서 공연되었다. <푸너리 1.5>는 수성아트피아

가 ‘아티스트 인 대구’의 첫 공연에 선정한 작품으로, ‘2013

한국무용 창작산실지원사업’ 심사에서 최고 작품으로 선정

되어 전국 8개 도시 순회공연 기회 및 공연 지원을 받고 있

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구문화재단,

수성아트피아의 후원으로 공연된 <푸너리

1.5>는 ‘2013 창작산실 한국무용 우수작품

전’ 공연인 지난 1월 서울의 아르코예술극

장 초연 후 두 번째 공연이자 대구에서는

첫 선을 보이는 작품이다. 계명대학 장유경

교수의 안무와 조주현의 대본, 연출이 만난

또 하나의 걸작으로 이 둘의 조합 외에도

장유경 교수의 작업에 오랜 시간 동참해온

의상디자이너 민천홍, 무대디자인 구동수,

음악감독 이상만과 심현주, 편봉화, 임차영, 김현태, 김정미,

서상재, 박민우, 최형준, 김경동, 강정환, 이수민 등의 무용수

가 함께 하여 장유경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색을 강렬

히 드러낸 무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이 된 ‘창작산실’은 공연예술 창작

단계별지원을 통한 창작의욕 고취와 자생력 제고를 위해

2008년 신설된 지원 프로그램으로 원래 명칭이었던 ‘창작

팩토리’가 2013년 ‘창작 산실’로 바뀐 것이다. 무용 분야는

장유경 무용단

<푸너리 1.5>

김예림

무용평론가

비평 & 리뷰 _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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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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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발레를 시작으로 지원되었으며 장르의 확대를 시작

한 후 2013년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분야가 신설되었다. 첫

해인만큼 경쟁도 치열했던 지난 해 한국무용 분야(전통공연

예술진흥재단의 주관)는 1차 서류심사와 2차 시범공연 심사

를 거쳐 최종 3개 작품이 선정우수작품으로 공연되었고 그

3작품은 강미리 할무용단의 <관關, 상생과 소통의 합설>, 장

유경 무용단의 <푸너리 1.5>, 프로젝트 수手&안팍ANN-PARK

의 <포구 ROCK>이었다. 이 중 장유경 무용단의 <푸너리

1.5>는 관객과 전문 평가단에게 가장 좋은 평을 받았고, 재

공연을 통해 레퍼토리화 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

되었다. 장르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으나 타 장르의 큰

편차에 비해 한국무용 세 작품의 고른 수준과 높은 완성도

는 기대 이상이었고 그 중 <푸너리 1.5>는 이 사업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푸너리 1.5>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해안 별신굿의 푸

너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풀어낸다’는 뜻의 푸너리는 마

을 단위의 축제이면서 무속적 예능을 동시에 보여주는 종합

예술로 볼 수 있다. 푸너리는 별신굿에서 가장 대표적인 춤

이며 민중이 즐기는 축제와 무속 예능의 특성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러한 소재를 담고 있는 <푸너리 1.5>에서 1.5는 무

엇을 뜻할까. 안무자 장유경은 “1은 삶, 2는 죽음. 그 가운데

있는 1.5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입니다. 즉 얽히고 묶인 것

을 풀어내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가장 평범하면

서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철학적 내용을

추상적 춤으로 풀었지만 어려운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간과하고 지내는 삶 주변의 이야기라는 친근함과 탐

미적 관점의 춤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작품설명에서도 “늘 우리는 경계선에 한 발

올려놓은 채 살아간다. 내 발밑에 놓인 경계선은 내 의지이

기도 하고, 때론 내 의지와 상관없는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매 순간은 경계이고 중간이며 ‘푸너리

1.5’였던 셈이다. 살고 죽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기 위해 가파

른 경계선에 서 있으니 말이다”라고 밝혔다.

무용가 장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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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푸너리 1.5>를 만난 관객 중에는 푸너리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굿에 ‘푸너리

춤’이라 불리는 춤이 있기 때문이다. 굿의 거리마다 처음에

푸너리장단에 맞춰 즉흥적으로 추는 춤을 말하는데 동해안

별신굿은 굿이 행해지는 지역에 따라 굿거리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사흘에 걸쳐 12거리의 굿을 하지만 부

산 지역에서는 내당과 외당으로 나뉘어 24거리의 굿을 행

하는데 푸너리춤은 이러한 굿의 거리마다 처음에 추는 춤이

다. 무녀가 부채와 수건을 양손에 들고 푸너리장단에 맞춰

거의 즉흥적으로 추는데 특징적인 춤 동작은 없으며, 좌우

팔을 흔들며 추는 평범한 동작으로 이뤄져 있다. 푸너리춤

에는 ‘문을 열어주십시오’라는 뜻이 있다. 장유경의 <푸너리

1.5>는 전통 굿의 푸너리 춤이 갖는 의미를 확장시켜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았다.

이번 작품에서 음악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6명의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라이브 연주는 입체적 사운드로 춤에

생기를 더했다. 원래 푸너리장단은 각종 굿의 본풀이를 하

기 전에 굿의 시작을 알리고 신을 청해 모시는 전주前奏 기

능을 하는데 장단은 세 개 장으로 나뉘어 있다. 진도씻김굿에도

푸너리 장단이 있지만 이 작품에는 동해안별신 굿의 것을 사용했다. 음악

감독 이상만은 푸너리 장단의 기본 위에 다양한 변주를 입

혀 50여 분간 극적 고저를 만들어냈다.

비평 & 리뷰 _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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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있어서는 푸너리 가락에 맞추어 반복과 교

차를 강조한 움직임을 의도했으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장대는 다양한 활용으로 신체를 넘어

선 대형들을 보여주었다. 나무 장대는 위태로이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테를 둘러 공간을 나누

는 표시가 되기도 하며, 수백 개의 더미를 통해 이승의 무거

운 업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장대를 이용해 묘

기에 가까운 춤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여러 개의

장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강조하는 도구였다. 이 작품에

서 강조된 ‘경계’는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기쁨과 슬픔 등

의 경계이며 곧 매순간의 삶이기도 하다. <푸너리 1.5>는 경

계(현재)를 인식하는 것으로 그 안팎에 놓인 것들을 순응한

다는 결론을 담고 있다. 이번 작품에 강조된 안무 특성인 소

도구의 활용은 작품의 중반까지 이어지며 참신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는데, 장대를 이용한 춤도 좋은 그림을 만들어냈지

만 목마를 탄 여인이 몸에서 부채를 하나씩 꺼내 던지는 장

면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공중에서 펼쳐진 부채가 부메랑처

럼 날아가며 만드는 포물선은 지면에 닿아있는 신체 움직임

의 한계를 확장하는 공간 활용이자 춤에 있어서 고정적이었

던 부채사용방법의 신선한 변형이기도 했다. 심플한 드레스

차람의 안무자 장유경은 많은 춤 없이도 공간의 역할을 이

용해 큰 존재감을 보여주었는데 무대 위에서는 이승의 행보

를, 무대 끝에서는 경계선의 위태로움을, 그 끝에서 오케스

트라 피트 아래로 낙하하는 것은 죽음으로 상징했다. 후반

의 군무는 우리의 장례문화 굿에서와 죽음을 축제로 풀어

내듯 화려해진다. 클라이맥스의 극적 고조도 작품의 완성도

를 높이는 요소였는데, 뒷벽에 세워져있던 수백 개의 장대

를 쓰러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업으로부터 해방, 자유

를 나타내는 결말을 만들었다.

이 작품이 현대적 인상을 풍기는 요인인 무대미술 가운

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민천홍의 의상이다. 초대형 고

깔이 어깨를 덮은 모습은 왜곡된 인체의 신비스러움뿐 아니

라 한국 전통 복식이 오뜨 꾸뛰르 이상의 감각적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극히 전통적이면서 외계 생명

체 같은 판타지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흥미로웠

장유경 무용단 <푸너리 1.5>

푸너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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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현대미술 전시장에 내놓아도 될 만한 세련된 아이디어

였다. 무대미술과 음악, 춤의 구성과 무용수들의 집중력까

지 <푸너리 1.5>는 근래 한국 창작춤에서 보기 드문 완성도

를 보여주었다. 안무자 장유경에게는 2012년 서울무용제에

서 우수상을 수상한 <쪽, 네 개의 시선> 이후 발표한 대작이

자 창작산실의 첫 수혜자로 받는 무용계의 관심이 부담스러

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담대하게 자신의 작품색을 고집하

고 동반자와도 같은 스텝, 무용수들의 능력을 끌어낸 장유

경은 <쪽, 네 개의 시선>을 뛰어 넘는 수작을 만들어 냈다.

한국무용가 장유경이 생각하는 한국춤은 무엇일까? 언

젠가 그가 이렇게 말 한 적이 있다. “한국 춤은 ‘자연’입니다.

한국 춤을 잘 추는 것은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

게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어릴 적부터 도

사리지 못하는 점 때문에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롱아일랜드

유니버시티에 1년간 가 있은 후 10년간 미국을 오가며 자연

스러움을 추구해왔습니다. 그 후에 전통 춤사위가 더욱 가

슴에 와 닿고 다시 매진하게 되더군요.”

한국무용가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창작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는 동시대적인 즉 컨템포러리 무용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20년 째 퀄리티 높은 전통춤 공연을 해

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컨템포러리 작업에

있어서 서구 현대무용의 동경이나 모방이 아닌 뿌리 깊은

비평 & 리뷰 _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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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족적足

跡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전통춤 가운데 기방妓房이나 토

속신앙 등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와 표현

기법, 다시 말해 한국사람의 몸에서 몸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우리 몸짓을 근간으로 현

시대의 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솟대나 무구

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민속적 라이

브 연주에 공을 들이는 음악적 특색에서도 이와 같은 작품

특성이 읽혀진다.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사고는 물론 가

족,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를 다루는 주제 또한 지극히 한국

적 관점에 있다. 특히 ‘현대춤 작가 12인전’을 통해 발표한 <

그곳에 가면>2004, <멈추어 숨>2007, <움. 두즈믄 열둘>2012은

가족과 어머니, 존재의 발생에 대한 소박한 표현 기저基底에

뿌리 깊은 춤저력을 담고 있는 수작들이었다. 이번 <푸너리

1.5> 역시 전통적 소재와 관점, 전통적 춤호흡을 기반으로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현대적 연출과 미술요소들을 조화시

켜 빈틈없는 논리와 구성의 밀도를 보여주었다. 과감한 시

도와 낯선 장식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단한 초석의 한국춤

을 가진 장유경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문득 몇 해 전 “춤은 당신에게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해준 그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입

니다. 때때로 나는 왜 사는가? 내가 춤을 추지 않았다면 무

엇이 되었을까? 자문해봅니다. 나는 돈을 벌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려고 사는 것도 아닌 것 같

습니다.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왜 춤을 추는가

에 대해서는 알 것 같아요. 춤을 추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춤은 인생이고 저 자신입니다.” 도사

릴 필요 없이 진솔한 춤으로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장유

경의 춤은 고요한 대지의 힘을 가졌다. 그의 순수한 춤열정

에 박수를 보낸다.

장유경 무용단 <푸너리 1.5>

푸너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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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

ATURE 독자들에게 박정남의 시집을 권한다. 제목은 꽃을 물었

다. 그런데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꽃을 입에 물었

다는 뜻인가? 아니면 꽃에 대해 물었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꽃을 말하자면 짐승처럼 물었다는 뜻인가? 그러나 아무

리 시집을 뒤져도 이런 제목을 가진 시는 없었고 그 뜻도 다

가오질 않았다. 여러 곳에 꽃이라는 소재로 지어진 시는 많

았다. 그러면 시인은 무슨 뜻에서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단 것일까?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

움과 희망, 때로는 비애와 결부된 여성적

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시인이 쓴 시들 중

에도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들이 눈

에 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들은 그런 꽃

의 이미지와는 별 관련성이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그 꽃이라는 가면 뒤의 무의식과

충동 때로는 죽음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먼저 감지된다. 그

러니까 난 그의 시집 제목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액센트

를 두고 읽으라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었다”의 다양

한 의미를, 다양한 무의미를 체험할 수 있으면 좋을 듯하다.

박정남 시인의 시적 태도는 언 듯 보기에 그의 삶의 연

장선상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아주 감성적이고 꽃같이 부드

럽고, 누구한테나 예의바른 자세로 만나는 그의 이미지만큼

이나 그의 시들도 여성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시를

원시적 욕동의 제전또는 박정남의 시집 『꽃을 물었다』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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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강물을 두 쪽으로 연신 나누며 치솟았던 고래”는 삶의

욕구와 욕망 Libido들을 가리키는 메타포일진대, 그것은 왜

“바라나시 가트 장엄한 의식”이라는 죽음 충동 Thanatos에

동행하는 것일까? 그것이 시인이 묻고 있는 첫 번 째 삶의

아포리아다. 갠지스에 간 주체는 분명 더 많은 것을 보고자

욕망했으며 “히말라야 계곡을” “치솟아 올라가 거기 등 푸

른 나뭇가지라도” 얻어올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갠지

스의 죽음의 제전에 참석하는 일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

다. 하지만 시인의 미덕은 결국 이런 진리를 깨우치는 철학

적 설득에 있질 않는 듯하다. 이 시가 가지는 큰 미덕은 시

인이 시의 주체로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진정한

작품에서는 주체가 작품 전체에서 침묵을 한다 — 주체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자연/본능“고래”는 자신의 다른 자아, 즉 alter

ego를 말하는 것이리라이 지닌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욕동을 자연의 모방을 통해 성취하고

있는 이 시는 “소문 듣고 죽으러 올라오는” “고래”의 확정된

불확정성을 그려놓음으로써 우리를 자발적으로 숭고하고

장엄한 가트 의식에 참여하게 한다. 시인이 제시한 두 번째

삶의 욕동은 자연/본성 지배에서 비롯된 듯하다. 억누른 본

능이라고도 할 합리성의 자연지배는 우리의 일상에 궁극적

한 편 읽자마자 나는 그의 가면 뒤에 많은 원시적 욕동들이

숨겨져 있고 또한 그것을 언어 이전의 언어로 체화하고 있

다는 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하나의 시를 읽을 때 스스로 반

응하는 경계너머의 계시들이 그의 시에 꿈틀거린다.

갠지스에 배 타고 나갔을 때, 슬며시 어둠 속에서

나타나 동행했던 등 푸른 민물고래, 강물을 두 쪽으

로 연신 나누며 치솟았던 고래는 히말라야 깊은 계

곡 굵은 나무둥치 콸콸 흐르는 물관 속으로까지 치

솟아 올라가 거기 등 푸른 나뭇가지라도 하나 얻어

그도 소문 듣고 죽으러 올라오는 길이었는데, 죽음의

길이 바라나시 가트 장엄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

어서, 그의 거대한 몸 또한 장엄한 의식 그 자체여

서, 몸 닿는 데까지 헐떡이며 올라가 보는 것은 아니었

을까

— 「고래와의 동행」 전문

발레리에 의하면 “미美는 사물들 가운데 규정 불가능한

것을 충실히 모방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박정남의 시

에서 규정 불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삶에

감춰진 무수한 원시적 욕동들의 실체일 것이다. 원시적 욕

동? 그것은 아마도 삶에서 길이 없는 것, 방도가 없는 것,

로고스라는 길의 끝 — 아마도 삶의 아포리아 자체일 것이

박정남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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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만들어버렸

는데 이것 또한 사라지지 않고 늘 존재라는 삶의 아포리아

일 것이다. 자연/본성 지배는 지배받는 것들에 대한 동경을

생산해낸다. 때로는 소리치고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데 시인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죽음과

유사하게 보인다. 그의 시는 이러한 미 외적인 것의 죽음을

통해 미적인 화해를 이루고 있다.

만 마리의 물고기가 불법을 들으려

이 골짝으로 모여들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수만 마리의

머리가 유독 큰 물고기들,

문득 깨달아 거기 눌어붙은 고기부처들,

그 고기들이 벗어놓은 신발,

골짝에 신발들이 즐비하다

법당에 들지 못한 신발들이 귀를 열고 있다

빗소리를 듣고 있다

우당탕 우당탕 당당당 당당당 댕댕댕

양철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가 들린다

신발들이 아득히 마음을 비우고 독경소리를 듣고 있다

독경 소리를 제 마음에 가득 담고 있는

지느러미를 단 물고기들이 만어사 골짜기를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만어사 골짜기를 저 동해바다로 옮겨가고 있다

비평 & 리뷰 _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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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

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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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의 길목이 순간순간 스쳐지나가는 것 같다. 그리하

여 이 시는 결국 전설로 내려오는 만어석을 매개로 하여 법

당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소리를 훔쳐듣는 분위기를 만들

어낸다. 음악적 정서를 모방하는 의성어들과 세속적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리고 장소의 순간이동을 통해 전설이 만들

어낸 삶의 욕동들이를테면 왜 이렇게 많은 고기들이 여기로 오게 되었

는지를 시적 언어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축제의 진설陳設이

라는 맥락에서 박정남의 시는 어떤 마법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그림에서 우리는 다음의 시도 같이 읽을 수

있다. 어떤 특별한 리듬을 타고 말이다.

하늘에는 달

길에는 똬리 튼 뱀

하늘에는 밝은 달

길에는 똬리 튼 검은 뱀

하늘의 달은 내려올 수 있어도

가장 낮은 곳 물속에까지

내려올 수 있어도

저를 빠뜨릴 수 있어도

길에 누운 검은 뱀

곤히 잠든 검은 뱀

꼼짝하지 않는 검은 뱀

저 달이 없으면 더욱 검은 뱀

[…]

깨달은 발바닥을 옮기는,

물이 가득 담긴 신발 속에서 종소리가 난다

새까만 발바닥들을 씻어주면서

울리는 종소리

— 「만어의 신발」 전문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에서는 신발을 여성의 상징으로 본

다. 만어사 앞의 돌무덤은 장관이다. 그러나 일상의 경험을

시인은 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들은 지난 시대 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동질성을 연상케 한다. 그런 시인의 상상 공간 역시 꿈틀거

리는 고기들의 모습 대신 고기들이 신고 온 “신발”에 이른

다. 아, 이 얼마나 정겨운 모습인가! “문득 깨달아 거기 눌어

붙은 고기부처들, /그 고기들이 벗어놓은 신발” 신발은 여성

일 뿐 아니라 세속이자 욕동들의 다른 모습이다.

세속에 이미 도가 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고기가 민담에서 전하는 형식이라면 그 형식 속에서 시인은

현재하고 있는 삶의 모습을 신발이라는 이미지로 재현한다.

또한 “물이 가득 담긴 신발 속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표현

에서는 종소리라는 상징 속에 모든 불편한 삶의 진실을 숨

기고 있다. 이 종소리는 판 겐넵이 말한 통과의례의 순간이

자 누미노사성스러움의 순간이다. 삶이라는 닳아버린 신발들

이 진리를 계시하는 순간이고 보면 박정남 시인이 바라보는

원시적 욕동의 제전 또는 박정남의 시집 『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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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가장 낮은 곳에

저를 비추는 물이 있고

물속에 달이 잠시 빠져 있을 동안

하늘로 올라간 뱀이

번쩍이는 달이 되었다

오늘밤 검은 뱀이 황금빛으로 풀려

장엄하게 탄다

— 「달과 뱀」 부분

이 시에서 우리는 어떤 주술사가 있어 반복적으로 주문

을 외우자 뱀은 “하늘로 올라가고” 그 올라가는 방식 또한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주술처럼 이 시는 운율의 반복을 통해 어떤 특정한 신비를

마련하고 있다. “달”과 “뱀”은 교차되어 반복되며 그 상징은

또한 남성과 여성을 함의하고 있다. 아이헨도르프라는 독일

시인이 “하늘이 땅에 입 맞추면 땅은 하늘을 꿈꾸겠지”라는

시 구절을 연상하게 할 만큼 자연스럽게 달과 뱀은 우주의

조응, 욕동의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시의 형식 또한 알레고

리처럼 되어 있어 마치 유희처럼 읽기가 편하다. 하지만 그

의 달이라는 이미지는 아래 시에서 낭만적 시어로서의 달은

이제 더 이상 주술이나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름달을 잘 들여다보면

어머니의 거친 자갈돌 같은 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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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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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

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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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이 주체는 구체적인 장소

도, 이름도 없는 존재론적 주체로서 시를 읽는 누구나가 체

험할 수 있고 자기 것으로 점유專有할 수 있는 주체를 말한

다. 시인은 여기서 마술을 부리는데 마치 신이 계시를 하는

듯한 말을 함으로써 “빠져 나오던 날”과 “나는 태어나자마

자” 사이에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을 만들어 놓고 있다. 시인

의 얌전한 꽃잎 뒤에 숨기고 있는 욕동의 이미지가 시집 제

목의 “물었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평론가로서 오랫동안 박정남의 시를 관찰해보았지만

이번만큼 특별한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아마 선입견과 아

둔함으로 뭉쳐진 필자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시

인의 이런 혁신적인 시쓰기는 그의 시력詩歷을 초월하고 그

의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로 보인다. 그의 시에 대한 글을 마

치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해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말로 표현되지 않고 표현된 것에 함의되어 있

다.” 그렇다. 분명 그의 시에 대해 우리는 다 말할 수가 없

다. 왜냐하면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거나 보거나 감촉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 찬바람 소리도 들려온다

푸른 달빛 밤새 흘러나오는

다 닳아서 깊은

그곳은

물이 흥건히 고여있다

세찬 폭포수 쏟아지듯

어머니의 양수를 따라

피묻은 달 하나가

풀어헤친 검은머리를 빠져오던 날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손을 놓고 말았다

— 「달의 집」 전문

달은 겨울 찬바람 같은 거칠음, 조야함, 생명력의 기원이

라고 말하는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적 자아가 분열하는 것

을 볼 수 있다. “보름달을 잘 들여다보면”의 주체가 되는 자

아와 “나는 태어나자마자/어머니의 손을 놓고 말았다”의 주

체는 다른 주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

런 경우는 「만어의 신발」에서나 「고래와의 동행」에서도 마

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주체는 그 두 편

의 시에서보다 더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보름달을 들여다보는” 주체가 어

린 시절로 되돌아가 “어머니의 손을 놓은” 주체, 즉 상상속

원시적 욕동의 제전 또는 박정남의 시집 『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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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생명으로 만개하는 봄은 유난히 종교계가 기

뻐하는 계절이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예수부활의 메시지가,

불교인들에게는 석가탄생의 메시지가 있었다. 물론 이에 기

뻐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픈 ‘세월호’ 침몰사고가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 특히나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을 황망하게 떠나보내야 했고 그 슬픔은

아직도 우리 모두의 시간을 멈추어버린

것만 같다. 음악가들은 온 사회가 이러한

아픔 속에 잠겨있을 때 도대체 어떠한 노

래로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를 달래야 하

는 것일까. 이럴 땐 오히려 침묵이 그 어떤

곡조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랜 옛날 처음으로 노래를 하고 북을

치며 피리를 불던 인류에게 음악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언

제 사나운 야생의 짐승과 맞닥뜨릴지 또 언제 이웃의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던 인간에게 음악은 생명의 안전을 바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공동체의 죽음 앞에서 음악은 말 없는 위

로였을 것이고 전쟁 앞에서는 위협의 두려움을 떨쳐낼 용기

였을 것이다. 사냥과 수확의 뿌듯함을 두고 음악은 신바람

나는 축제였을 터이고 탄생과 혼인의 기쁨에 있어서는 사랑

과 행복의 노래였을 것이다.

음악,

그 영성에 관하여

정은신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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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비평 & 리뷰 _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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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속에서 내가 바라본 인간의 모습은 이렇듯

약하고 의존적인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인간

은 늘 기원해야 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고 행복이 다시

찾아올 때면 또 노래하고 춤추고 그 가운데 내면에 존재하

는 신에게 갈구해야 했다. 이 행복이 영원하게 해달라고.

음악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나는, 뭔가 다른 일

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음악이 세상의 어떠한 일을 이

룰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 속상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음악의 그 ‘무용성’덕에 그 누군

가의 이득을 가로채거나 또한 그를 공격하지 못했음에 안도

하곤 한다.

그러나 음악의 장에서도 때로 인간사회의 반목이 일어

난다. 이것이 음악으로 인한 갈등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음

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보니 다른 세상사

에서처럼 마음이 어긋난다. 일전에 대구 시립합창단이 연주

회 선곡을 특정 종교를 연상시키는 음악으로 한 것에 대해

불교계는 ‘종교 편향적’ 공연이라며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에

지휘자와 단무장이 징계를 받았다. 또한 대구시는 향후 종

교 편향적 공연이 재발할 경우 해임 또는 파면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합창단은 모든 시민의

마음을 아우를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를 중심으로 하는 성부

의 구조를 보더라도 대구시립 합창단이 국악이 아니라 서양

음악의 전통 위에 세워졌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

들이 유럽 합창음악의 핵심에 있는 르네상스의 카톨릭 전례

음악모테트, 미사 등을 피해가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더구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그 중요성이 부각된 신교의 음

악, 코랄은 유럽의 종교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성

악에서 시작된 코랄은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기악음악에까

지 그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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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작곡한 아름다운 코랄들, 교향곡의 영역에까지

코랄을 등장시킨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Choral’등 많은

작곡가들은 새로이 등장한 종교음악인 코랄에서 창작의 영

감을 가져왔다. 그것은 가사 없는 기도이고 외침이었다. 그

런가하면 신대륙으로 잡혀온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의 애환

을 담은 영가는 또 어떠한가? 백인사회가 흑인노예들을 인

간으로 대접하지 않을 때에, 노예들은 그들의 비통함을 아

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 영가로 승화시켰다.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이나 흑인 영가는 실로 인간 정체성과 자유에 대

한 갈망의 음악적 결정체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제 오늘 만들어진 곡들이 아니라 인

류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선별되어 불리면서

시간의 풍파를 견뎌내고 이미 전통으로 자리 잡은 음악들이

다. 그래서 이러한 음악들은 전통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며 시대를 초월한 그 보편성을 존중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 음악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오

랜 독일 유학기간동안 내가 유럽인들에게서 가장 부러워했

던 것은 그들의 코가 높고 얼굴이 희어서도 아니고 멋진 성

城과 성당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가진 아름다운

음악의 유산이 실로 샘이 날만큼 부럽고 또 부러웠다.

유학시절, 길을 가다 들려오는 성당의 파이프오르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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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리뷰 _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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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곳에 들어가 꿈속인 양 울려

퍼지는 오르간 선율에 종종 심취했던 적이 있다. 그 선율에

빠져 있노라면 세상 모든 걱정과 고민 따위가 부질없어 보

이고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것은 나에게 종교음악이

아닌 그저 ‘아름다운’ 음악이고 휴식이었다.

최근 들어 나는 가끔 산에 오르곤 하는데, 얼마 전 자주

오르는 국립공원의 사찰 옆을 지나는데 때마침 타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는 참으로 깊고 맑았다. 나는 산을 내려오

다 말고 한참을 그 사찰 앞에 서서 종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

고 서 있었다. 연이어 다른 등산객들도 나와 같이 그 소리를

들으려 발걸음을 멈추는 게 아닌가. 왜 종을 치는지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저 종소리에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할 따

름이었다.

다시 음악회로 돌아가서,

불교계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서양합창음악이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넓은 ‘영성

음악’ 즉, ‘sacred music’ 혹은 ‘spiritual music’의 범주에서

품어주기를,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또한 불교음악에도 아름다운 합창곡들이 많이 생겨나 그 연

주를 들을 날이 더욱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유럽 합

창음악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쓰이지 않았듯이, 그러기 위해

서는 우리도 예술적 자질을 갖춘 훌륭한 작곡가들이 더욱

많이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연주회의 선곡을 담당하

는 음악인들은 작품의 예술성에 근거해 더욱 공정하고 엄격

한 잣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음악이 음악으로 존

재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 그 영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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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평생에 걸쳐 바흐의 음악을 연구한 알베르트 슈바

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생각난다. 슈바이처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바흐 연구가, 오르가니스트 이외에도 신학

자, 철학자, 사상가, 사회운동가, 의사 등 다양하다.

20대에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당대의 바흐 연주와

연구에 정평이 난 오르가니스트였고 대학강단의 신학교수

였다. 그러나 30대부터는 말이 아니라 몸을 사용해 남을 위

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소명에 따라 서른의 나

이로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7년 후 의사자격을 취득한 뒤 38

세에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그곳에서도 바흐 음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슈바이처

는 아프리카 원시 밀림에서 살아가는 자에게는 오히려 정신

적인 교양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 그는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틈을 내어 바흐의 건반악기 곡을 연주

하고 주석을 달곤 했다. 그 가운데 그는 커다란 우주의 섭리

와 만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가사가 없는 건반악기 곡에서 오히려 그 어떤 미사곡보

다도 더 깊은 영성이 느껴진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

을 할 수 있을까. 바흐의 건반악기 곡들은 신의 존재를 언급

하는 단 한마디의 언어도 없이 어떻게 우주적인 깊이에까지

도달하는 것일까. 어쩌면 음악의 영성은 모든 예술이 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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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리뷰 _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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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도달하고 싶어 하는 ‘추상성’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

르겠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을 깊이 있게 들어본 사람에게는 슈

바이처의 이러한 경험담이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슈바이처의 음악에 대한 기록들은 나로 하여금 음

악의 ‘spirituality’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나도

그 깊은 세계에 도달하고 싶다.

사랑하려고 하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저

절로 존재하고 빛나는 것이다. 음악으로 사상을 전하려고

하면 사상은 왜곡되고 그 음악은 빛을 잃는다. 음악은 ‘사

상’ 그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악 속에서도 특정종교

를 찾지 않고 더 큰 내면의 ‘영성’에 도달할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 언제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려는

가. 심지어 음악에서조차 정작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것들이거늘…

음악, 그 영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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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리뷰 _ 영화

2013년 부산영화제에 공식초정된 지아 장커 감독의 <천

주정>은 돈에 의해 폭력이 일상화되어가는 중국사회를 해부

한 영화이다. 올 봄에 소위 ‘다양성 영화’ 중 한편으로 개봉

해, 관객들로부터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이 영화가 중국 사회의 오늘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의

민낯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서일 것

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와 배금

주의가 나날이 팽창해가는 한국사회는 그

돈 때문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

몰고, 치열한 경쟁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

을 양산해낸다.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은 그

폭력에 의해 다치고 죽고 상처입는다. 세월

호 참사를 보라. 인간은 없고 돈만 있는 나쁜 자본주의가 만

든 괴물들이 이처럼 참혹한 비극을 만든 것이다.

지아 장커는 1997년에 16mm장편 극영화 <소무>로 데뷔

했다. 이후 <플랫폼> <세계> <스틸라이프> 등으로 작품을 발

표했고, 그의 작품은 세계가 주목하는 문제작이 되었다. 중

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는 중국영화 6세대로 불

리는 ‘지하전영’地下電影의 대표 감독으로, 세계 유수 영화제

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진이

방송작가

계명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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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도 그는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청

부살인업자가 되어 중국 전역을 떠돌고 있다.

퇴폐 안마시술소에서 카운터로 일하고 있는 샤오이는 유

부남과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헤어

지기로 결심하고, 그런 와중에 그녀는 별 이유없이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들의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

의 주요 상을 휩쓸고 있으며,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시네아스트로 꼽히고 있다.

지아 장커의 작품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융탄 폭격 아래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과 인간의 도덕적 타락, 일상화된 폭력

등을 돌직구 던지듯 다루고 있다. <천주정> 역시 그러한 작품

세계가 잘 반영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골광부, 청부살인업자, 안마시술소 접수원, 공장

노동자가 그들인데, 이들의 이야기가 독립된 에피소드처럼

등장한다.

중국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따하이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다. 하지만 그는 마을의 탄광 개발

을 둘러싸고 이권을 나눠갖지 못한 게 늘 불만이다. 영리한

친구 녀석이 이권을 챙겨 졸부가 되었고, 촌장과 그 하수인

들도 한몫씩 챙겼는데, 자신의 삶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돈

과 권리만 챙겨간 게 아니라, 사람마저 무시하고 짓밟으려

한다. 따하이는 이 모욕을 참을 수가 없어 스스로 이를 응징

하러 나선다.

시골 출신의 조우산은 고향에 가족이 있으면 그곳에 머

물지 못하고 전국을 떠돈다. 그가 하는 일은 청부살인, 쥐도

새도 모르게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처치한다. 아이러니

‘천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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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어린 샤오후이는 시골 출신으로 도시에 나와 돈

벌이를 하고 있다. 온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공장과 롤플

레이 섹스샵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

다. 그는 끝까지 자존감을 지키려했지만, 이 거대한 자본의

물결 앞에 그는 무력하기만 하다.

따하이, 조우산, 샤오이, 샤오후이의 이야기는 별개의 것

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두 얼굴을 한 자본의 힘에 의해

점점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해가는 지금의 중국 사회가

있다. 악마 같은 자본의 힘과 그로 인해 갈수록 폭력이 일상

화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의 초상을 통해 지금 중국

은 어디에 서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한

존중 따윈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폭력이 난무

하는 모습은 오늘날 중국만의 모습만은 아니다. 21세기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여전히 지난 역사와 투쟁 중이

고, 밀려드는 자본의 힘에 억눌린 채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

상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이기

도 하다.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단 한명의 소녀도 구할 수 없

는 우리 사회가 과연 인간이 살아갈만한 곳인가를 되묻는 영

화이다. 열일곱의 한공주는 한 소도시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

생이다. 가난한 사람에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아버지는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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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리뷰 _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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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상처를 참아내고 치유하고 극복하는지, 그 과정에 집

중하고 있다. 세상이 그녀에게 너무나도 잔인했음에도 불구

하고, 소녀는 살아갈 방도를 모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가 속해있는 사회는 그녀를 받아들이지도 도와주지도

못한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잘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녀를 안아줄

수 없다 말하니, 소녀가 갈 곳은 없다.

이수진 감독은 이 영화로 신인감독에게는 최고의 영예

로 통하는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세계 각

종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이수진 감독은 실화

노동판을 전전하지만, 한공주는 자기에게 주어진 불행을 크

게 탓하지 않고 살아왔다.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편의점에

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할 수 있는 날

을 꿈꾸며 산다. 하지만 평범하고 평온했던 공주의 일상은

어느날 무너진다. 단짝친구의 남자친구를 괴롭히던 또래 남

자아이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짐승들의 우악스

러운 힘에 눌려 공주는 몸과 마음이 모두 유린당하고, 그 폭

력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된다. 그러다 공주에게 가해진 이 끔

찍한 폭력이 세상에 알려진다. 하지만 피해자인 공주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없다. 부모는 외면하고, 학교는 사건을 덮고

싶어하고, 가해자들의 부모는 공주를 이런 일을 자초한 마녀

로 몰고 싶어한다.

<한공주>는 2003년에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사건 이후 공주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면서부터 시작한

다. 피해자인 공주가 오히려 고향에서 쫓겨나고, 아무런 연

고가 없는 새로운 학교와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 새 학교에

서 새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의 어머니 집에 얹혀살면서 그

럭저럭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지만, 그것은 매우 일시적이고

불안한 평온에 불과하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공주를 보호

하지도 돕지도 못한다.

영화는 끔찍했던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 이후 소녀가

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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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이 흔히 걷는 방식들, 공분과 복수라

는 주제를 걷어내고, 대신 공감을 선택했다. 폭력에 의해 희

생된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려는 과정에 대한 공감 말

이다. 감독은 공감을 확장하기 위해서 매우 절제되고 섬세한

연출을 구사한다. 독특한 미장센과 이미지의 은유를 통해 영

화 미학 수준을 드높였다. 그 결과 영화 첫 장면과 마지막 장

면은 두고두고 오래 기억될 씬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한공주>는 영화적으로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도

성찰하게 한다. 이유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그 폭력에

희생된 개인, 참된 공동체의 붕괴와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된

한국인의 이중성 등등. 이러한 문제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

롯된 것일까? 단언컨대 이는 돈을 맹목적으로 쫓고, 효율성

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된 경쟁사회에서 일상이 돼버린 물신

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인간은 없고, 물질만 남은 자본

의 못된 얼굴 말이다.

영화는 그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인간은 없고 물

질만 남은 자본의 못된 얼굴을 추적해왔다. 비판하고 경계해

왔다. 진지한 고민을 권유하는 영화들이 점점 극장에서 사라

져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영화들이 발표되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작가들 역시

자본의 힘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25시>의 작가

REV

IEW

MOVIE

비평 & 리뷰 _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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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규는 작가는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토끼는 인간보다 공기에 더 민감해, 잠수함 내부의 산소가

부족할 때에 가장 먼저 호흡 곤란을 느낀다. 그처럼 사회에

여러 불행한 징후들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채고

이를 경고하는 이가 작가와 예술가들이다. 지금 우리의 영화

는 잠수함의 토끼 역할을 얼마나 잘 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우리 사회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천주정>과 <한공주>

는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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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e a g u

박철하

클터 예술문화

연구소장,

작곡가

사람들 _ 인터뷰

박 소피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자그레브 교향악단, 트리에스테의 베르디

오페라극장 등의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고, 이탈리아 루카의 질

리오 오페라극장과 그 외의 수많은 세계적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줄리안 코바체프 선생님께서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새 상

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지난 4월 11일 대구시향의 제402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했습니다. 지휘자로서 첫 연주회를 마치신 소감 한 말씀을 부탁

합니다.

코 대구시향과의 첫 만남이었는데요, 좋은 연주자와 청중, 훌륭한 연

주회장 등 모든 것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진지한 태도로 연습과 연주에 임하는 단원들의 자세를 보고, "나

와 단원들이 여기에서 좋은 발전을 이룰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m u s i c a l

I d e n t i t y

" 대 구 시 향 만 의

정 체 성 을 찾 겠 다 . "

음 악 적

줄리안 코바체브Julian Kovatchev 대구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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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한국에는 이미 여러번 서울을 방문하여 KBS교향

악단의 연주회와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공연을 객원

지휘하셨는데요, 작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

>를 지휘하셨습니다. 저는 유튜브를 통하여 당시의 공연

을 볼 수 있었는데요, 이제 이렇게 대구시향의 상임지휘자

로서 직접 만나뵙게되어 반갑고, 많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대구의 음악문화에 대하여서 들어보신 바가 있으신지 대구에

는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

동안 상임지휘자로서 역할하실 것인지도 말씀해 주세요!

코 대구는 오페라하우스도 있고, 대구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 오페

라 축제는 이미 해외에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 청중의 수준도 상당

히 높다고 들었습니다. 대구에 와서 보니 사람들도 좋고 도시의 느낌

도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 시향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할 시간이 기대

됩니다. 우선은 앞으로 2년 동안 상임지휘자로서 활동할 것입니다. 저의

바램은 그것이 계속이어져서 더 오랜 기간 동안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입

니다. 단원들과 교감을 이루고 발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겠지요!

박 잘츠부르크의 모짜르테움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베를린에서 지

휘 공부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코 예, 우리 가족은 제가 어렸을 적에 불가리아에서 남부독일로 이주하였습니다. 잘

츠부르크 근처에 살면서 모짜테움 음악원에 다녔고, 프란츠 자모힐이라는 좋은 바이올

줄리안 코

바체브 상

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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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u l i a n K o v a t c h e v

사람들 _ 인터뷰

린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졸업한 뒤에 베를린의 카

라얀재단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베를린으로 옮겨갔구요,

거에기서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관현악단 활동을 하면서 지

휘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 알렌도르프 교수님

과 당시의 베를린 필하모니 상임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

얀 선생님께 지휘를 배웠습니다.

박 베를린 필하모니의 단원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 경험

은 당신의 지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 같은데요?

코 그렇습니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나는 연주자로서 다 년간 활동한 경험이 있기 때문

에 연주자들의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이 지휘자로서의 삶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박 뿐만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보잉이나 호흡 등을 더 잘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코 현악기의 보잉과 프레이징 뿐만 아니라 관악기도 호흡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연주자로서의 경험이 기술적으로, 음

악적으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박 전설적인 지휘자 카라얀 선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어떻

습니까?

대구시립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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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지난번 연주회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으로만 꾸며졌습

니다. 다음 연주회에는 어떤 음악을 선곡하였나요?

코 연주회의 전반부는 19세기 독일의 낭만음악, 그리고 후

반부는 20세기 러시아의 프로코피에프 교향곡을 준비했어

요. 첫 곡으로 브람스의 장송음악 <내니에Nänie, Op.82>를 대

구시립합창단과 협연하고, 이어서 멘델스존의 피아노협주

곡 1번을 젊은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협연합니다. 교향곡으

로는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5번을 선곡하였습니다. 브람스

의 합창곡 <내니에>는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만든

같은 제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서 브람스의 친구였던

화가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작곡된 곡입니다. 최근에 한국에 있었던 세월호 사고의 희

생자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연주할 것입니다.

박 오페라 지휘자로서 <베로나 원형극장 오페라 축제>에

서의 활동, 독일 드레스덴의 유명한 오페라극장인 젬퍼오

퍼에서의 지휘활동, 이탈리아 루카의 질리오 극장의 음악

감독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오페라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코 우리 집안은 음악가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

주자로서 오페라 극장에서 연주하셨구요, 어머니는 피아니

스트였습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페라 극

코 음악을 대할 때에는 정확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

고, 연주와 연습이 끝나면 모든 단원들의 삶을 걱정하고 챙

겨주는 따뜻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원들은 충실

히 지휘자의 리더십을 따르고, 지휘자는 단원을 배려하던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생각하진 않던 시기였습니

다. 카라얀 선생께서는 내게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고 수 많

은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영향을 많이 받으셨던 카라얀과 같은 지휘

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력으로 교향악단을 이끌었

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코바체프 선생님 본인은 지휘자로

서 어떠한 리더십을 선호하십니까?

코 나는 오히려 신뢰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방식을 더욱 선

호합니다. 물론 정확하고 충실한 연주가 전제되어야 하겠지

만 일방적으로 끌고가는 식의 리더십 보다는 단원 전체가

함께하는 소통의 방식을 좋아합니다.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단원들 스스로가 음

악적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물론 보기

에 따라서는, 이러한 민주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

의 모험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

하여 발전하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 단원들과 함께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줄리안 코바체브 신임 대구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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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u l i a n K o v a t c h e v

사람들 _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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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예, 반드시 체험해보고싶은 생각이 듭니다. 매년 50만

명 정도의 청중이 그 축제를 찾는다고 하는데 저도 꼭 한

번 가 보고 싶습니다. <베로나 원형극장 오페라 축제> 이

외에도 많은 국제적 지휘활동이 계획되어 있으시리라 생

각되는데, 어떠한 연주가 있으신지 조금 소개해 주세요!

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공연이 미국의 시애틀,

독일의 드레스덴, 이탈리아의 카루, 사르디니아 섬의 칼리

아리 등 여러 곳에서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제가 대구

시향의 상임지휘자로 새로 취임하였기 때문에 다른 공연들

을 좀 줄이더라도 대구시향에 더 많은 힘을 쏟을 것 입니다.

박 그렇다면 앞으로 대구시향과 함께 이루고 싶은 특별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코 우선 저의 목표는 대구시향만의 음악적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화음 한 부분만 들어도

“저것은 대구시향의 소리다”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음

향과 표현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박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지금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점은 무엇입니까?

코 우리 시향의 연주자들은 모두 좋은 음악성과 연주 능력

장에 갔었는데요, 그 때의 그 체험은 나의 인생

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오페라 극장의 불빛과 건

물, 분위기, 음악 등은 어린 저를 매료시켰고, 저

는 자연스럽게 오페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박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로나 원형극장 오페라 축

제' Arena di Verona Opera Festival에 초청되어

매년 세계적인 솔리스트들과 함께 공연하면서 지휘하

고 계시는데, 올해도 오페라 카르멘과 아이다 등을 지

휘하신다고 알고있습니다. 2000년 전에 지어진 고대 원

형극장에서 대규모 야외공연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

인지 궁금합니다.

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입니다. 2만명 정도의 청중을

수용하는 큰 규모의 야외극장인데요, 음향이 아주 좋게 건

축되어서 마이크와 전자음향의 도움 없이도 소리가 잘 전달

됩니다. 제가 오케스트라의 지휘단에 오를 때에는 웅성거리

는 청중들의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튜닝소리 등 상당히 시끄

러운 소음 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단에 오르고

지휘봉을 들면 일제히 조용해져서 소리의 무중력 상태와 같

은 고요한 순간이 생깁니다. 오페라가 시작하기 직전의 그

순간은 굉장한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공연장에 오셔서 체험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줄리안 코바체브 신임 대구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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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 번의 연주회를 통하

여 충분히 그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좀

더 요구하는 점은 연주자 각자가 더욱 자존감을 가지고 개

성있는 소리를 내어달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서 튀어나오지 않으려는 마음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음색으로 통일되게 연주하여야 한다는 생각도

좋지 않습니다. 각각의 연주자가 마치 실내악을 연주하듯이

자신의 소리를 충실히 연주하여야 합니다. 모두가 개성있는

충실한 소리를 낼 때에 내가 지휘자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좀 거친 부분은 다듬을 수 있고, 각자가

연주하는 음향을 섞어서 찬란한 소리를 만들수 있습니다.

지난번 연주회에서는 연주자의 좌석을 높여 좀 더 적극적인

연주자의 참여를 독려하였구요, 앞으로는 연주자들이 앉는

자리의 배치도 계속해서 바꾸면서 연주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의 맨 마지막 자리에 앉은

사람이 다음 연주회에서는 수석 연주자의 바로 뒷 자리에서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연주자들이 중

요하게 여겨질 것이며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연주에 참

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 한 동안 단원으로서

바이올린 연주를 함께 하였던 베를린 필하모니의 경우엔 항

상 유동적인 자리배치를 기본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

에 제일 구석에 앉은 연주자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연주합니다.

J u l i a n K o v a t c h e v

사람들 _ 인터뷰

연주자들이 스스로 느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 몸의 동작은 자연스럽게 동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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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악기와 몸은 일제히 위로 치켜져 올

라갔습니다. 중국 연주자들은 우리가 과감하게 몸을 움직이

는 것을 보고 눈만 크게 뜨고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

서 우리 베를린 단원들은 다음의 연주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몸을 움직이며 표현했습니다. 중국 단원들의 경직된 태도에

자극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경험입니다만,

이것이 아시아의 연주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라

고 생각합니다.

박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종종 연주자들이 특정 부분에

많이 움직일 것을 지시하십니까?

코 그렇진 않습니다. 몸의 움직임은 인위적으로 억지로 움

직이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연주자들이 스스로

느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 몸의 동작은 자연스럽

게 동반하게 됩니다.

박 앞으로 연주할 프로그램에는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

로에> 모음곡, 볼레로 등 재미있는 곡목들도 있지만, 특

히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과 같은 특별

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

알프스 교향곡>을 선곡하고자 하셨을 때에 12명이나 되

는 호른 연주자를 동원해야하는 등 연주상의 어려움을 걱

박 우리 연주자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있는 표현을

해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지나친 겸손과 배려심이 오히

려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군요!

코 예, 그렇습니다. 내가 자주 만나는 이탈리아의 연주자들

과 비교해 보면, 대구시향의 단원들은 훨씬 진지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깊이 있는 음악을 추구할 수 있는 잠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의 적극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의 연주자들이 너무 가볍고 개인주의적

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의 연주자들은 개인적인 표

현에 대한 적극성이 너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한 음악평론가는 지난번 연주회를 평하면서 대구시향

단원들의 몸짓에서 발견한 율동감을 좋게 평가했습니다.

연주자들이 몸을 많이 움직이면서 연주하는 것에 대하여

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 연주자는 당연히 몸을 움직이며 연주해야 합니다. 그것

을 통하여 최대한 표현력을 끌어내어야 합니다. 내가 예전

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중국 연주에 참가했을 때가 기억나

는군요! 우리는 중국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단원과 우리 베를린 단원들이 나란히 옆에 앉아서 한

관현악단으로서 음악을 같이 연주하였습니다. 연습을 하던

중에 고음으로 올라가며 절정에 달하는 선율이 나오자 우리

줄리안 코바체브 신임 대구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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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는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면서

확신에 찬 결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코피에프와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 대구에서 체험하기 힘들었던 연

주곡목들을 무대에 올려주신다니 많이 기대되고 감사합

니다. 특별히 선호하는 작곡가나 작품이 있나요?

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오페라 작곡

가 푸니치 외에도,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말러 등 후기낭만

작곡가와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을 좋아합

니다.

박 주로 고전 낭만 음악만을 연주하던 좁은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서 요즈음의 연주회에서는 20세기 음악이 많이 연

주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연주문화에서는 이미 현대음악

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요, 위촉작품 즉, 창작곡

의 초연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코 음악문화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창작음악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이 무엇을

작곡하였는지 스스로 알면서 작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하며, 자신의 음악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좋은 작곡가가 있

다면 같이 작업하고 싶습니다.

박 해외에서 많은 오페라 공연을 지휘하고 계신데요,

사람들 _ 인터뷰

J u l i a n K o v a t c h e v

관현악단 지휘자로서 단원들과

호흡하면서 대구시향의정체성을 찾고, 그 위상

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해서 시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감동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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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박 대구시향이 새로운 지휘자를 모시고 크게 발전하여 우

리 시민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코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대구시향과 함께하는 나의

음악활동을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한 경험으로 대구의 오페라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관현악 연주회와 오페라의 지휘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우선 관현악단 지

휘자로서 단원들과 호흡하면서 대구시향의 정체성을 찾고,

그 위상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해서 시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감동을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대

구를 벗어나서 대구시향단원들과 함께하는 대외적인 연주

활동도 계획 중 입니다. 그러한 목표가 달성되면 오페라 무

대를 통해서도 관객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가지 계

획 중에 오페라에 대한 계획도 협의 중에 있습니다. 또한 나

는 해외의 활동에서도 대구시향의 음악감독임을 잊지않고

대구시향과 대구의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모습

줄리안 코바체브 신임 대구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대구시립교향악단 단

원들과 기

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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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대구,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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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살아온 예술인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공간은 그곳

을 찾는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의 정거장 같은 곳

이다. 최근 우리 지역에서는 대구가 가진 수많은 문화 예술 자원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향토 문인들의 발자취를 담

은 공간, 대구문학관이 한국전쟁기 5월 말 준공을 마치고 개관을 앞두

고 있다.

오랜 세월 우리 지역 문인들은 대구 문학의 역사성을 담는 공간으로

서의 대구문학관 건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대구시는 대

구 중구 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대구문학

관으로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대구문인협회는 2008년 6월1차과 2009년 11월2차 대구문학관 건립포

럼을 시작으로 2010년 3월 추진위원회공동추진위원장 구석본·이태수·이하석·정

훈를 출범시켰으며, 여러 차례의 추진위원회를 거쳐 대구문학관 건립안

을 확정했다.

대구문학관이 들어설 옛 상업은행 건물은 부지 1,302.1㎡, 건물

3,348.78㎡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다. 대구문학관은 건물의 3층과 4

층에 조성되고 1층과 2층에는 중구청이 운영하는 향촌문화관이 꾸며진

다. 지하 1층에는 수장고와 음악감상실 ‘녹향’이 자리한다.

문화이슈 쫓기 - 미리 본 대구문학관

임언미‘대구문화’ 편집장

대구문학, 그 시간 여행의 정거장- 대구문학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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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학관이 대구 피란문학의 본거지이자 도심 한 중간인 향촌동

내에 자리하게 된 것은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고 중구 근대 골목과 함께

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구시는 2010년 중구청과 대구문학관·향촌문화관 추진 업무협약

을 체결했고 같은 해 공유 재산 관리 계획을 승인 받았다. 대구문학관

은 2012년 실시 설계를 마쳤고 8월부터 콘텐츠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2013년 1월 공사 착공, 2014년 2월 운영조례안과 민간위탁 동의안이

시의회 임시회를 통과했다.

어떤 콘텐츠들이 수집되었나

대구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문학운동이 태동되었다. 1917년 동인

지 『거화』가 발간되었고, 해방 직후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등이 서울

을 오가면서 향토 문학의 명맥을 유지했다. 20세기 초반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들에는 목우 백기만, 이상화, 고월 이장희, 빙허 현진건,

이응창 등이 있다. 또 한국 전쟁기에는 대구는 피란으로 인해 전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의 집결지가 되면서 이들의 주요한 활동 무대가 되었

다. 이 시기 중앙 문인들과 지역 문인들이 활발히 교류하면서 작품 생

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 문인들의 활동을

증빙하는 콘텐츠 자료 수집은 큰 의미를 가진다.

대구, 지금 여기

전체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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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소

장자료

또 국내 아동문학의 여명기를 밝혔던 윤복진의

‘물새발자옥’이 수록된 악보집은 그 자체로 희귀하

지만, 표지 판화를 화가 이인성이 그려 더욱 소장

가치가 높다. 또 대구출신 시인 이설주의 시집 『미

륵』1952에는 구상, 박목월, 신석정 등 당대를 주름잡

던 문인들의 친필 서명이 빼곡하다. 이밖에 당시 문

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육필 자료로 이상화가 부

인에게 보낸 서간문 4쪽과 백기만이 이상화 집안에

보낸 엽서 2점, 이호우의 육필원고 ‘달밤’ 등이 모였

다. 유치환의 『청마시초』1939·처액지사, 이육사의 『육

사시집』1946·서울출판사,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1948·행

문사 등도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초판 시집들이

다. 수집된 자료는 대구문학관자료실 홈페이지www.

modl.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대구문학관

국내외 문학관을 살펴보면 특정 작가나 작품을

기념하는 기념관, 종합적인 문학 활동을 전시하고

지원하는 종합문화공간으로 나뉜다. 대구문학관은

후자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잇다. 대구경북연구원 김

성애 박사는 「대구문학관 건립 기초조사 연구」대구경북

대구문학관 콘텐츠 구축 사업은 2012년 8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진행됐고 (재)대구문화재단이 주

관했다. 대구문화재단은 콘텐츠구축사업기획위원회

를 조직해서 구축 대상 작품의 시기와 대상 등을 결

정하는 한편 전시관에 전시될 목록과 수장고에 보관

할 목록을 정리했다.

대구문학관에 처음 자료를 기증한 사람은 아동문

학가 하청호 씨와 경북대 국문과 이상규 교수이다.

하청호 씨는 대구아동문학회 동인지 1~3집을, 이상

규 교수는 상화시집을 기증했다. 이들의 기증을 시

작으로 기증자들이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수집된 자

료는 총 1만4천907점이다. 문예지를 비롯한 서적류

가 1만1천331권이 모였고, 육필원고와 소장품 등이

3천 576점 수집됐다.

1926년 6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가 발표된 문예지 『개벽70호』개벽사, 41년 현진건의

‘무영탑’박문서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가 수록

된 『금성 3호』1925.5, 한국 최초의 창작 시조집인 최남

선의 『백팔번뇌』1926·동광사, 최초 현대시집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4·조선도서대표이사도 눈에 띄는 성과물

이다.

대구문학, 그 시간 여행의 정거장 - 대구문학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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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구, 지금 여기

연구원, 2010에서 대구문학관이 “창의적 순수와 대중적 공감을 아우르는 대

구문학의 중심거점”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작가의 삶과 창작의 기억,

자취를 간직 보존하는 곳 혹은 문학을 창작하기 위한 집필실의 개념에

서 더 나아가 총체적 문화 활동에 큰 비중을 둔 형태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 문학자원 개발과 수집을 바탕으로 하여 체

계적이고 통합적인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시켜 문학관으로서의 전

문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기본이다. 그 외에 문학과 다른 문화자원공연 예술

간의 연계와 교류, 전시와 정보, 출판, 교육을 연계시켜 지역민의 문화

예술적 욕구에 기여하는 교육기관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인 이하석대구문학관 건립 추진위원 씨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학관 개관

이 늦은 감은 있지만 입지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대구문학관은 문인들에게는 창작에 자극을 받

을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들과 학생들은 지역 문화의 뿌리와 명암을

조망하고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곳으로 자리하게 되기를 기대

한다.”라고 말했다.

대구문학관 제1호 자료 기증자이자 대구문학관 콘텐츠 구축사업

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아동문학가 하청호 씨는 “미술관에서 소장

품들의 교체 전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대구문학관에서도 기획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 또한 기증받은 자료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유족들에게 인세를 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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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극장으로 이전했었고 인근의 향촌동 지역을 중심으

로 수많은 피란 예술인들이 대구 예술인들과 교류

했다. 그런 점에서 향촌동에 대구문학관과 같은 건

물에 조성되는 ‘향촌문화간’은 큰 의미를 가지는 공

간이다.

준비 단계에서는 전후문화체험관으로 불리다가

최근 공식 명칭이 ‘향촌문화관’으로 확정됐다. 이곳

전시의 기본 키워드는 ‘가까운 과거, 20세기의 역사,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1층은 편년 방식으로 사건과 기록이 중심 된

생활사 위주로, 2층은 테마, 장소, 생애사가 중심이

된 문화예술사를 전시한다.

1층은 ‘역사와 생활 이야기’, 2층은 ‘문화와 예술

이야기’로 꾸며진다. 1층 ‘향촌동 속으로’에는 1900

년대 대구 읍성이 사라진 근대 도시의 모습, 1920년

대 대구의 새 도심으로 자리한 향촌동, 해방 정국의

대구, 한국전쟁기 임시 수도 33일의 모습 등을 담는

다. ‘20세기 대구의 중심’은 대구의 자화상을 보여주

는 공간이다. 살아 있는 거리 중앙로, 산업의 기반

북성로 공구골목, 전국을 잇는 교통 중심 대구역,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라며 진정한 자료의 가치는

‘적절한 활용’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대구문학관에는 대구문학 아카이브, 명예의 전당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의 방, 영상관, 체험관, 문학서재, 동

화감상방, 동화구연방, 기획전시실, 세미나실 등이

들어선다. 주요 문인들의 작품을 소장할 수장고는

지하에 마련된다. 대구시는 지난 5월 대구문화재단

과 대구문학관 위탁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대구문화

재단에 대구문학관 운영 전반을 맡겼다. 대구문화재

단은 대구문학관의 주요 사업으로 대구문학 아카이

브 구축 사업, 기획전시, 교육프로그램 운영, 명사

초청 특강, 스토리텔링 교실 운영, 찾아가는 시낭송

회 개최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향촌문화관

대구 지역의 예술사를 정리할 때 한국전쟁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대구

가 유일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었고

피란을 내려온 수많은 예술인들이 대구에서 예술 활

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국립극장도 키네마극장현, 한

대구문학, 그 시간 여행의 정거장 - 대구문학관 개관

대구문학관은 문인들에게는 창작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들과 학생들은 지역 문화의 뿌리와 명암을 조망하고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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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1층은 편년 방식으로 사건과 기록이 중심 된 생활사 위주로, 2층은 테마, 장소, 생애사가 중심이 된 문화예술사를 전시한다.

대구,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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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음악 감상실 ‘녹향’

대구문학관 지하 1층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

전 음악 감상실 ‘녹향’이 자리 잡는다. 녹향 음악 감

상실은 1946년 해방 이후 문을 연 곳으로 화가 이

중섭, 시인 양명문, 시인 구상, 시인 신동집, 소설

가 최정희 등의 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우

리 지역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대구로 자

리를 옮겨 활동한 수많은 예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쟁 통에 피란 온 문인과 음악

인들이 지친 심신을 달래는 안식처로 녹향을 선택했

다. 그렇지만 녹향도 세월이 흐르면서 음악 감상실

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운영이 힘들

게 되었다. 일평생 녹향을 지켜온 이창수 옹은 지난

2011년 타계했다. 대구시와 중구청은 녹향을 역사

적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다는 민의를 받아들여 녹향

을 전후문화재현관 지하 1층으로 옮겨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녹향의 자료와 시설들을 고스란히 옮겨올

예정이다.

피난민의 터 교동시장 등을 살펴본다.

‘대구 얼라이브alive’는 ‘도심은 살아있다’라는 주제

로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옛 대구 사람들의 삶의 현

장에 헌정하는 미디어 영상 쇼를 연출한다. 또 은행

금고와 응접실로 사용했던 곳을 ‘비밀의 방’으로 개

조해서 다양한 테마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

도록 한다.

2층 공간은 ‘낭만이 넘치는 향촌동’과 ‘소중한 과

거, 꿈꾸는 미래’를 주제로 공간을 구성한다. ‘낭만

이 넘치는 향촌동’은 대구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대중문화의 요람이었던 1950년대 낭만

의 향촌동 시절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다. 다방, 주점, 골목, 극장, 레코드사 등 주요 장소

별 공간을 다양한 영상과 트릭아트 등 복합 매체를

활용해 연출한다. 또 향촌동의 시대별 변천을 지도

로 연출하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문화 담론을 나눴

던 장소를 재현해본다. ‘소중한 과거, 꿈꾸는 미래’

에서는 향촌동의 현재와 생애사 구술사업 진행 과

정을 소개한다. 또 향촌동의 연표에 관람객이 직접

‘나’의 일대기를 공유해서 지속적으로 역사를 창출하

는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활용한다.

대구문학, 그 시간 여행의 정거장 - 대구문학관 개관

‘녹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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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시가 있는 풍경 - 도광의

연재·김종욱의 ‘권번의 예인(藝人) 이야기’

대구 예술인의 신간

문화공감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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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 感共感02

02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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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도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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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래와 까치

여름 한 철 사는 쓰르라미 가여워 보이지만,

세로로 난 작은 이마 무늬로 날도래 더 가여워 보인다

이마 무늬로 가여워 보이는 날도래는,

자갈 모래 나뭇잎 꽃대궁 엮어 바람 통하고 물 흐르는 개울에서

타원형 실고치 집 짓고 산다

배 어깨 희고 검은 머리 검은 등이 광택 나는 까치는,

지상 높이에서 차경借景 좋은 데 골라 마을 가까운 나무에 둥지 틀고 사는 까치는,

설 쇠고 둥지 수리하느라 쉴 틈 없고 짝짓기 하느라 분답다

외로움 달래며 우는 쓰르라미보다

반가운 손님 온다고 우는 까치보다

추우면 타원형 실고치 집 이끌고 이사 다니는

달빛에 얼음 반짝이는 개울에서 설쇠는 날도래는

세로로 난 작은 이마 무늬로 더 가여워 보인다

도광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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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김종욱의 ‘권번의

예인(藝人) 이야기’- 근대교육의 선각자 김울산

02

문화공감 _ 연재

김울산金蔚山, 1858-1944은 권번 출신 기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적을 더듬어 살펴보면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통학교와 유치원을 설

립하였을 뿐 아니라 도로를 닦을 때 많은 땅을 기부하였다.

그와 함께 홍수나 가뭄 등으로 인한 이재민 구호에 앞장섰

으며, 특히 1936년의 흉년에는 많은 구호사업을 하였다. 그

밖에 적십자 운동을 비롯한 지역의 사회사업에도 헌신적으

로 앞장섰다.

대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교육을 이끈 사람들 대다

수가 서양의 선교사 또는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 같은 상황

에 비추어 볼 때 대구의 여성으로서 자력으로 교육 사업을

통한 계몽 가치의 실현에 앞장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본판 『경북대감』에는 김울산을 ‘1915년에 일

본적십자사 특별사원이 되었고, 1916년 2월에는 대구부가

도로를 닦을 때 많은 땅을 기부하는 등 사회사업과 봉사에

귀감이 될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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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울산 여

사의 생

전 모

습, 매

일신문

또한 어떤 연유에선지는 모르지만, 1909년 순종황제가

대구를 순행할 때 그녀에게 하사금을 전달한 뒤부터 육영사

업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흥선대원군과 가깝

게 지내면서 하사받은 땅이 상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사女史’ 또는 ‘부인夫人’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을 뿐 아니라 ‘기생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서

사라졌다.

아미산峨嵋山 자락, 지금의 동부교육지원청 부근에 명신

여학교明信女學校가 있었다. 이 학교는 기와로 된 2층집이었

는데, 1910년 순종황제의 하사금으로 개교하였다. 1911년 경

영권이 천도교로 이관되었고, 1916년 사립 달서여학교로 거

듭났으나 운영난에 빠져 여러 차례 경영권이 바뀌는 우여곡

절을 겪었다. 1925년 김울산이 경영권을 인수하여 이듬해에

사립 복명여자보통학교私立復明女子普通學校로 교명을 바꾸는

한편, 일찍부터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복명학교에

유치원 2개 반을 설립하여 ‘금강조’와 ‘백두조’라는 이름을

붙여서 대구의 초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그 뒤 1927년 8월

에 남자부를 설치하여 복명보통학교復明普通學校로 교명을

바꾸었고, 조국 광복을 맞을 때까지 1,990명의 졸업생을 배

출하였다.

그녀는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명신학교를 인

수하여 복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복명학교에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그 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대구 최초의 보통학교인 희

도학교를 세우는 데 1천 원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대남학교

부속유치원을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에 기부금을 희사하였

다. 그와 함께 자신의 이름도 조국 광복의 염원을 담아 ‘복

명復明’으로 고쳤다.

그녀의 출생이나 살아온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고, 조선 말기에 통정

대부정3품 벼슬였던 아버지 철보哲甫와 어머니 이봉순李奉

順 사이의 두 자매 가운데 장녀였다.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

를 여의었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으며,

대구로 이주한 것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가

대구 사람과 혼인하였으나 열아홉에 사별하였다. 그 같은

기구한 운명으로 해서 ‘향이’라는 예명의 관기가 되었고, 그

뒤 정미소와 술집을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고 전해지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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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문화공감 _ 연재

그때 내놓은 재산이 8만 원. 쌀로 환산하면 4천 섬 정도

이었으며, 1927년 교사를 신축한 뒤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그 뒤로도 해마다 학교 운영비로 3천 원을 내놓는 등 학교

를 위해 기부한 돈이 20만 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 요즈음의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이 훨씬 넘는 거액

이다.

대구의 근대교육사를 살펴보면, 1900년 4월에 학부대신

의 허가를 받아 야소예배당오늘날 제일교회의 전신 한쪽에

소학교를 개설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남자를 가르치는 대

남소학교大南小學校, 2년 뒤 부르앤 선교사의 부인 마르타는

여자를 가르치는 신명학교信明學校를 설립하였다. 대구 최초

의 소학교였다. 그리고 학교의 명칭도 처음에는 ‘소학교’로

부르다가 ‘보통학교 1906년’, ‘국민학교 1941년’, ‘초등학교

1996년’로 바뀌었다.

1914년 대남소학교는 희원학교喜瑗學校로, 신명학교는 순

도학교順道學校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까닭은 서희원徐喜瑗

과 박순도朴順道가 300원이라는 거금을 희사하였으므로 그

들의 이름을 따서 바꾸게 된 것이다. 그 뒤 1926년 두 학교

를 병합해서 희도보통학교熙道普通學校, 오늘날 종로초등학교

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때 김울산이 1천 원을 기부하였으며,

지금의 희도맨션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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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일제강점기 복

명학교와 김

울산 여

(맨 앞

줄 가

운데 흰

옷 입

은 사

람)

김종욱의 ‘권번의 예인(藝人) 이야기’

그런가 하면 근대 인문잡지 <별건곤>에는 ‘대구가 자랑

하는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김울산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때 그 시절 <별건곤>이란 잡지는 오늘날 <신동아>나

<월간조선> 같은 잡지에 해당하는데, 우리 고장 대구와 대

구 사람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

오대五代를 내려오며 대구의 바람을 마시고, 대구의 샘물

을 먹게 됨에 대구가 가진 허물은 될 수 있으면 덮어 주지

않을 수 없으며, 숨은 사랑을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줄로 안다. 그러나 아무리 그 허물을 가리려 하

여도 사실이 엄연히 있음에 양심이 감추기를 허락하지 않으

며, 자랑하고 싶어 견디지 못한다 하더라도 근거가 박약해서

는 남의 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적을 때

몇 번이나 주저했지만, 언약을 저버리기 어려워 생각나는 대

로 두서없이 기록하였으며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 (중략) …

자랑 셋째, 아미산峨嵋山이면 대구읍성 바깥이다. 옛날에

달밤에 소년들의 장치는 노름을 노인 네 분이 그 위에서 즐

겨 구경하던 자그마한 구릉이다. 그러나 성城이 없어지고 오

래된 오늘에 와서는 시가의 복판이라 할만치 남쪽으로 많은

부락이 들어섰다. 그 구릉에 연와煉瓦로 이층집이 힘차게 앉

그녀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크게 보도하였다. 먼저 ≪동아일보≫에서 ‘金蔚山 女史의

特志, 大邱府私立喜瑗學校及 大邱消防組合에 寄附金 희

사코 赤貧者에게 錢穀 捐出’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또한 ≪시대일보≫는 ‘필사적 노력하기로 결심 - 金蔚山 女

史 史談’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나는 금년에 칠십 늙은이올시다. 이와 같이 늙은 사람이

그와 같이 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나의 한 힘으로는 부족할

점이 많이 있으니까 일반사회에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는

지식도 천박할 뿐 아니라 경험도 없는데 교주라는 이름도

매우 외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구하고 천하고

박한 뜻이나마 필사적으로 힘닿는 대로 결심하고 학교를 위

하여 희생하겠습니다. 금후 학교의 운명 성쇠는 사회의 여

러 선생의 많은 ○○에 있을 줄 알겠으며 ○○○○해와 후

원을 간절히 ○○○니다.

* 옛 말투를 현대어로 고쳤으며, ○○은 기사 원본에서 알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김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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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문화공감 _ 연재

은 것이 사립 복명보통학교私立復明普通學校와 복명유치원復明

幼稚園이다. 학교가 부족한 대구에서 여간 큰 공적을 끼치지

않는다.

학교 설립자 김울산은 노인이다. 검소하기 짝이 없다. 누

가 보더라도 남의 심부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질 의복을 입고 다니는 부인이다. 10만 원의 사재 전부를 아

낌없이 내어놓고 육영사업에 한없는 재미를 붙여 이따금 학

교에 나와서는 손자 나이 된 학생들의 장난하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본시 말하기 쉬운 것이 남의 말이라. 세상 사람은 ‘자식

이 없으니 그 나이에 그 재산 두었다가 가지고 갈 것인가.

그런 일하기 잘한 생각이지.’라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

다. 그러나 이런 뜻을 가지고 이런 일을 실행하는 것이 어디

쉬우랴. 더구나 젊어서부터 못 당할 곤욕을 당해가며 분분

전전分分錢錢이 모은 여자의 마음으로.

설립자 김 여사에게는 출가시킨 여식이 있다. 그리고 외

손이 난 지 오래라 한다. 재산을 자기 혈육에 전할 생각이

있으면 남녀에 그리 차별이 있으랴. 여식에게도 얼마든지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사업

을 위해 제공한 그 자선심을 대구부민은 칭송하고 축하하여

김울산 여

사의 상

참고문헌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 기생』, 계명대학교, 2011

<별건곤> 제33호(1930. 10. 1)

김종욱, 『대구 이야기』, 북랜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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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울산 여

사의 흉

상, 영

남일보

을 기리기 위해 1936년 청동靑銅으로 된 좌상을 세웠는데,

그마저도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전쟁물자로 공출供出해

가버렸고, 그 뒤 돌로 작은 흉상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그

런 가운데 조국의 광복을 보지도 못한 채 1944년 3월 13일

여든일곱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1945년 마침내 광복이 되었다. 그녀가 아미산峨嵋山 자락

에 세운 복명학교는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 뒤 그 자리에는

대구시 동부교육지원청이 새로운 건물을 지어서 들어앉았

다. 그리고 1999년 수성구 범물동에 신설한 초등학교의 교

명을 복명학교로 정하여 그녀의 높은 뜻을 계승하여 기리고

있다. 그와 함께 교정 화단에 돌로 만든 흉상을, 본관 입구

에 옛 복명학교 관련 사진이며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이 없는 탓으로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

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북구 조야동에 있는 묘소는 봉분이 훼

손되어 폐허처럼 되었고, 소작인들이 설치했다는 비석과 송

덕비도 방치돼 허물어져 가고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

은 최근 대구시교육청에서 대구의 교육에 대한 ‘기부문화의

사표師表’로 삼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아무튼 교육에 대한 그녀의 선각자다운 정신을 기리

고 계승함으로써 대구의 교육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 단

계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2014

야 할 것이다. 600명 남녀 재학생과 300명 졸업생과 한 가

지로.

- <별건곤> 제33호1930. 10. 1 ‘자랑과 허물’, 대구 천수.

조선조 말부터 1900년 초반까지 이 땅 여성들의 지위나

역할을 살펴보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들앉아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 살

림이나 알뜰히 하는 것을 최상의 덕목으로 여겼다. 이른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

러니 글을 배운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심지어 ‘여

자가 글을 배우면 팔자가 세진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은 성만 있었지 이름도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김울산은 이 같은 사회적 인식과 시대상황을 뛰어넘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니, 가히 선각자다운 생각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이랴. 어려움을 딛고 일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선행은 더욱 빛났다. 그 같은 헌

신적인 행적에 대해 찬사와 신문보도가 꼬리를 물었다. 아

울러 지역에서는 석재 서병오를 비롯한 유지들이 그녀의 뜻

김종욱의 ‘권번의 예인(藝人)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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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인의

신간

03

문화공감 _ 신간

김기연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기차는 올까』를 펴냈다. ‘올까?’라는 고개 갸웃한 의문형

서술어에서 여린 마음 한 자락이 풀려나온다. 그런 맥락에서, 일차적으로 시인 내면의 발

화를 목적으로 하는, 즉 일반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시집의 정조를 한마디로 표현

하라면 ‘젖다’라는 서술어가 적당할 것이다. 혹은 ‘그리움’이라는 명사도 덧붙일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움’과 ‘기다림’은 결코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움’을 ‘기다림’

으로 바꿔치기해도 무방하리라. 결국 이 시집은 ‘기다림으로 아득하게 젖어있는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울음처럼’, ‘잘못 든 손님처럼’ 와서 기어이 툇마루를 적시고 마는 소설素雪. 이처럼 김

기연 시인의 시에서 그리움으로 ‘번지는’ 심미적 풍경은 종종 젖은 사물로 드러나거나,

“시선 자주 역사 밖 철로를 서성이는”「기차는 올까」 등의 행위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 형

상화의 주된 요소로 주목할 부분이 화자의 시선에 비친 ‘풍경’이다.

근대를 지나오면서 문학과 인문학에서의 ‘풍경’은 ‘내적 인간’에 의해 발견된 인식의

틀가라타니 고진, 혹은 유동적이고 비규칙적인 현대사회의 다양한 양상아파두라이을 의미한

다. 짐작하듯, 『기차는 올까』에서 그려지는 풍경이 대부분 전자에 속함은 자명하다. 그것

은 이 시집의 속성이 사회적 관심과는 거리가 멀고, 궁극적으로 항상 시인 자신에게로 회

귀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기차는 올까』에 수록된 시편들이 자

기애에 충실한 시인의 심미적 욕망만으로 가득하다고 섣불리 추측하지는 말 일이다. 거기

다 더해 추신처럼 따르는 정서적 감각이 우리네 불모화된 내면의 황폐함을 위무한다면,

그건 이 시집의 형식이 건네주는 또 하나의 소중한 덤이리라.

신상조시인

기차는 올까

김기연 지음 | 작가세계 펴냄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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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

김청수 지음 | 시와사람 펴냄 | 2014

꽃분홍색 표지는 어딘가 남자를 홀리는 여자의 입술연

지 색을 닮았다. 더불어, 시집의 제목부터가 사뭇 범상치 않

다.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이라니. 일찍이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 그들의

은밀한 부분을 가렸거니와, 대중가요에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몰래한 사랑>라는 노랫말로 등장하

듯, 달달하고도 애절한 분위기의 나무가 바로 무화과나무이

다. 게다가 그 나무가 있는 ‘여관’이 다름 아닌 시의 배경이

란다. ‘돈을 받고 손님을 묵게 하는 집’의 뜻을 가진 ‘여관’의

사전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낯 뜨거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장소가 또한 ‘여관’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 수상쩍은 어휘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제목

에 값할 만큼 시집은 과연 에로틱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

을 것인가? 미안한 말씀이지만 김청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은 그런 것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

다. “마땅히 가야할 곳도 없는 나는/눅눅한 여관에 앉아/잘

익은 무화과 몇 개를 따/주린 배를 채운 적이 있었다”「무화과

나무가 있는 여관」란 표제시에 담긴 서사가 그러하듯, 시집에는

다만 시인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가난과 쓰라림, 그리고 그

궁핍한 시대를 건너온 자에게 남겨진 흔적과 그리움이 오롯

할 따름이다. 그리고 더하여, “날마다 시로써 일어나고 시로

써 눕는” 시인으로서의 정성스럽고 참된 노정이 견고하게

수놓아져있다.

무엇보다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은 난해하지 않고 잘

읽힌다. 시집을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성실한

시인이기 이전에 착한 사람이다. “겨울비 내리는 창가에 앉

아/잘 기억나지 않는 잘못에 대하여/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

하여 기도”「기도」 드리는 둥글고 부드러운 심성의 소유자다.

어쨌거나 그런 그가 시집을 세 권이나 낼 동안 “詩 한 편 팔

아본 일 없”다는 것은 세상이 그의 시를 한 번도 사주지 않

았다는 말이고, 그런 야멸치고 인색한 세상에 대해 나는 ‘詩

팔, 詩 팔’ 자꾸 욕이 나온다. 어쩌겠는가. 나란 인간은 이 시

인만큼 약한 듯 강하지 못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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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대구문화재단 _ 문화가 있는 날

대구문화재단

'세계 책의 날' 행사

- 출근 직원에게 대표가 책과 장미꽃 ‘깜짝’선물

- 직원들도 ‘책 나눔 행사’로 책의 중요성 공감

지난 4월 23일 (재)대구문화재단대표 문무학 직원들은 아

침에 출근하면서 깜짝 놀랐다. 문무학 대표가 직접 1층 현관

에서 책과 장미꽃을 선물하며 영접(?)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매달 책 선물을 받았지만 이 날은 특별한 날이

었다. 바로 ‘세계 책의 날’4월 23일이기 때문이다. ‘세계 책의

날’은 독서 출판을 장려하고 저작권 제도를 통해 지적 소유

권을 보호하는 취지로 1995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날이다.

4월 23일로 결정된 것은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

하는 스페인 카탈루니아 지방 축제일인 ‘세인트 조지의 날

St. George's Day’에서 유래됐으며, 이날은 대문호 셰익스피어

와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디지털정보의 확산으로 책에 대한 비중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 추세여서 더욱 의미 있는 날이다.

이날 오후 재단 직원들은 자신이 읽은 책을 서로 나누는

‘책 나눔 행사’도 가졌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서로 나누며

경험과 감동을 공유하는 반짝 북 카페가 열렸다. 특히, 기증

하는 도서에 대한 자신의 소감과 의미를 기록하여 전달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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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책이 가진 의미와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되새기

게 하였다.

문무학 대구문화재단 대표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

서 책 읽는 인구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지만 책은 인류

문화의 핵심이자 발전의 근원이었다.”며 “문화행정에

필요한 소양과 전문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도 독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대구문화재단은 독서

문화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책의 중요성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행사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문무학 대구문화재단 대표는 “문화융성과 창조도

시 대구의 선결과제는 문화가 있어 행복한 삶”이라며

“대구시민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있는

날’을 위해 재단이 앞장서 범시민문화운동으로 확산시

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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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대구문화재단 _ 향주 창작단지 소개

대구-항주

예술교류를

시작하며

권오준대구문화재단

지난 4월 말 중국 항주에서 한국 작가 2명이 작업하고

있는 스튜디오의 현판식을 하러 갔다 온지 10일정도가 지났

다. 대구문화재단은 지난해 연말부터 중국과 예술교류를 하

기 위해 방법과 루트, 교류기관 등을 물색하였다. 우선 북경

다산쯔와 항주에 있는 중국미술학원국가대학과기창의원에

문을 두드렸다. 북경과 항주는 중국 최고의 미술대학이 있

는 곳으로 다산쯔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어 상호교

류 가능성은 있는지 또 실효가 무엇인지 검토가 필요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미술학원국가대학과기창의원과 교

류가 성사된 셈이다.

이곳은 원래 ‘지강문화창의센터’로 중국 정부가 순수예

술을 산업화시키기 위해 조성한 대규모 창조단지 중 첫 번

째로 과거 시멘트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시설이다.이하

부터는 편의상 항주창조단지라 하겠다. 재단은 중국과의 교류를 위

해 지난해 12월에 항주창조단지를 방문하여 교류를 위한 협

의를 하고, 올해 1월 15일 중국 현지에서 협약을 체결하였

다. 협약은 항주창조단지와 홍예문화 그리고 재단이 국제문

화교류회의를 구성하고 상호 작가파견에 합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양국 기관의 협약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이 일정

한 기간 동안 양국에 머물며 이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교류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대구와 항주 간 문화교류의 축을 구축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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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이나 예술지원정책 중에

는 국제교류나 해외레지던스 참가 등 이른바 국제화를

위한 사업들이 비중있게 추진되고 있는 추세이다. 한

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국제교류관련 사업은 민간국제예

술교류지원, 해외레지던스프로그램참가지원, ARKO-

PAMS협력사업지원, 노마딕레지던스참가지원, 국제교

류중기기획프로젝트지원 등이 있고 예술경영지원센

터에서도 공연분야의 국제교류를 위해 공연예술글로

벌역량강화사업을 비중있게 추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작가를 선발하여 해외 창작스튜디오의 레지던스프로

그램 참가를 지원하는 미술관도 다수이다.

각기 저마다 소소한 목적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은 국제화, 다양성의 수용과 전이, 한국예술의 세계

화 등으로 설명될 것이다. 대구문화재단이 올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해외레지던스프로그램파견사업도 국제

적인 예술감각을 익혀 작가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작가지

원이 첫째이고 중앙으로 집중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시선을

해외로 돌려 지역 예술가를 국제화시키기 위함을 둘째로 둘

수 있겠다. 파견이라고 하지만 상호주의에 입각한 작가교류

로 물꼬를 터서 향후 기관교류, 도시교류가 될 수 있도록 하

자는 서로간의 생각도 확인했다.

항주 창조단지는 중국미술학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가 기관의 명칭을 명하는 방식으로는 다소 생소하겠지

만 정식 명칭은 <중국미술학원국가대학과기창의원>National

University Technology(Creative) Park of China Academy of Art이다. 중

국미술학원은 중국문화부소속의 국립고등미술학원으로

1928년에 창건된 국립예술원이 전신이며 중국에서 가장 전

통있고 권위있는 미술대학이고, 항주 창조단지는 중국 정부

가 순수 예술을 응용하여 미래의 문화산업콘텐츠를 개발하

기 위해 정책적으로 설립한 국가기관이다.

항주의 창조단지는 중국 유일의 예술과학 단지로 조성

되어 7개의 창작단지를 운영하고 있어 일단 규모면에서도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다르다. 1958년에 지어진 시멘트공장

과 채석장을 개조하여 2008년부터 문화산업단지로 조성 운

영하고 있는데 국가 차원의 문화창조시범단지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곳에는 영상, 영화, 공예, 도예, 판화, 음악, 제품디

자인, 패션디자인, 건축디자인, 애니매이션, 미디어 등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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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 장르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순수예술을 문화산

업화하기 위해 관련업체를 입주시켜 지원을 하고 여

기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많은 수의 아카

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창조단지의 아침은 작은 캠퍼

스같은 분위기이다. 아카데미 수강생들이 버스로 연

이어 들어오고 곳곳에서 강의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산업화 단계의 인력과 프로그램

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국미술학원의 교수들과 학생

대학원생들, 그리고 작가들이 그룹을 지어 스튜디오를

쓰기도 하고 개별 스튜디오에서 창작활동에 매진하

는 작가들도 있다. 창조단지는 아직도 많은 잉여 공간

들이 있어 무엇이든 수용할게 많아 보인다. 항주창조

단지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는 정책적으로 중국문화를

국제화하는데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중국미술학원

역시 오래전부터 외국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정책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항주는 중국 역사를 보더라도 일찍이 예술수준이 매우

높은 도시였다. 송宋대에는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문인화라

는 새로운 화풍이 일어나 꽃을 피운 시기였고, 인쇄술에 있

어서도 송조체宋朝體는 활자체의 절정으로 꼽힌다. 뿐만 아

니라 청말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전각가들이 서호

에 있는 서령인사 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오늘날

항주는 관광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는 듯 하지만 역사적으

로는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중국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

은 10대 산업 중 애니매이션 산업을 이끌어갈 거점도시로

항주가 선정되면서 10년간 정책적인 지원이 집중되고 있

는데 항주의 역사성이나 물리적인 환경을 보면 이상한 일

이 아니다.

대구와 항주 양국의 기관이 추진하는 예술교류의 내용

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작가파견부터 시작된다. 양국의 기

관은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서로간 당장 수용할 수 있는 규

모로 물꼬를 텃다.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가창창작스튜디오

에 중국작가가 입주하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고 한국작

가는 항주창조단지에 입주하여 특별히 마련해준 스튜디오

에서 작업을 한다. 말그대로 항주창조단지에서 내어준 스튜

디오는 특별하다. 대규모 단지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방으

로 2명이 50여 평 정도의 스튜디오를 사용하는데 따로 간단

하게 내부공사를 해주었다. 스튜디오 외에 호텔형으로 운영

되고 있는 숙소도 별도로 내주었으니 그들의 말대로 배려가

대구문화재단 _ 향주 창작단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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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다. 파견된 한국작가들은 중국미술학원의 왕효명(王

曉明) 교수를 축으로 현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전

시 참여도 왕교수가 직접 서포트해주고 있다. 중국작가들도

가창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여 한국 입주작가들과 똑같은

지원을 받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작가파견은 2명씩

3개월간 상호간에 기간을 맞추어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어

지고 4월부터 시작되었다. 양 기관은 서로의 작가를 잘 지

원해 달라는 부탁과 약속을 했다. 4월 현판식에 참석차 항

주창조단지를 방문했을 때 한국작가의 만족도가 높고 사용

하고 있는 스튜디오와 숙소를 둘러본 후 파트너쉽은 더 돈

독해졌다. 항주창조단지측의 배려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

이다.

대구문화재단의 해외레지던스프로그램파견사업은 3개

월간 현지 스튜디오에 입주해 창작활동과 교류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정주형 해외레지던시이며 일회성이 아니라

릴레이로 지속된다. 또한 민간이 운영하는 시설에 단순히

지역작가를 상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대규모 창조단지에 입주하여 거기서 운영되고 있는 교

육, 전시, 세미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연수

식 레지던스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

원효과가 기대되며, 한편으로는 최근 중국 미술시장에서 한

국의 현대미술품의 판매가 늘어나는 추세에서 지역작가들

이 실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덤으로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양 기관은 이러한 교류를 시작으로 점차적으로 더욱

확대되기를 희망한다. 이 문제를 상호간에 어떻게 생

각하는지는 현지에서 작가들에게 대한 지원과 배려를

통해 충분히 확인하였다.

양국의 기관이 신의와 존중을 바탕으로 예술교

류를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이다. 그것은 사업

을 추진함에 있어 행정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함까지

도 감내하게 한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기대로 첫 물

꼬가 트인 셈이다. 예술가에게는 사명같은 것이 있다

고 한다. 예술행정에 종사하는 자들도 사명인지는 몰

라도 적어도 거기에 준하는 무엇을 가지고 일한다. 양

기관의 예술행정인(?)은 참여한 예술가의 표정과 만

족도로 첫 성과를 가늠하고 있다. 향후 양국의 도시에

서 아름다운 예술 활동들이 이어지길 모두는 기대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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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신진예술가

날개를 달다

대구문화재단 _ 신진예술가 지원사업

(재)대구문화재단은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높이

고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지역에 거주하는 35세 미만의 촉

망받는 신진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신진예술가지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은 단발적인 공연, 전시에 지원하던 기

존 문화예술진흥공모사업과 달리 문화도시의 청사진을 만

들기 위해서는 ‘미래를 보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고민에

서 2012년에 시작되었다. 일회성 지원에서 벗어난 지속적인

재정 지원과 관심으로 신진예술가의 창작욕을 고취하고, 지

역예술계의 역동적 분위기 조성 및 예술현장의 창작 저변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선정방법

신진예술가로서 사업 목적에 부합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개인을 선정하기위해 6개 장르별무용, 연극, 음악, 전통, 시

각, 연출/극작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2012년엔 14명, 2014년엔

15명이 선발되었다. 최근 활동실적과 수상경력을 바탕으로

한 1차 서류심사를 거쳐 활동계획의 실현 가능성, 향후 성장

가능성을 판단하는 2차 면접심사, 예술적 재능과 역량여부

를 최종 판단하는 3차 실기심사로 진행되었으며, 심사위원

으로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유명 예술인 및 교수들로 위촉하

여 심사의 공정성과 전문성을 높였다.

지원내용

1. 재정지원

안정적 창작활동을 위한 상금 분할지급

- 매월 활동계획서에 의한 사업계획을 제출함에 따라

상금 분할지급매월 80만원

- 1년간 재단의 활동 필수 조건 수행을 전제로 지급하되,

별도의 정산은 없음

박주현대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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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한 평가를 받은 신진예술가는 최대 2년간

지속 지원

2. 활동지원

멘토의 활동 컨설팅 및 모니터링

- 각 분야별 멘토 1명이 신진예술가의 활동계획과 내용을

관리·평가하며 조력자 역할

- 멘토를 통한 지역문화예술계 진입에 실질적 조언 및

도움 지원

- 워크숍, 교육 및 기수별 친목활동을 통해 장르 간 또는

타장르 간의 교류 지원

- 현장평가를 통한 활동 컨설팅 및 모니터링 이행

3. 홍보지원

체계적인 홍보전략 수립 및 지원

- 언론 홍보 및 대외 홍보자료 제작·배포

- 워크숍 및 분야별 교육프로그램 추진

4. 교류확대

상호평가, 지피지기 프로그램 추진

- 타 장르를 이해하고 상호간 활동에 시너지를 얻음

- 상호간 활동내용 공유 및 신진예술가간 콜라보레이션

협력프로그램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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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대구문화재단 _ 신진예술가 지원사업

사업성과

지역에서 최초로 실시된 ‘신진예술가지원사업’은 지역

예술인과 관련기관 및 언론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신진예술

가들의 왕성한 활동, 재단의 지속적인 지원, 멘토의 애정어린

관심으로 신진예술인들이 지역에서 그들만의 예술토대를 마

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2012년에 선정된 14명의 신진 예술가들은 지역의 공연

및 전시에 참여하고 개인전 및 독주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개인별로 워크숍, 해외단체공연, 국내·외 오디션 참여 등

활발한 자기개발 활동에 주력하여 예술가로서의 활동기반

을 확대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특히 무용분야의 이상훈씨

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메인공연에 무용수로 초청되어

대구의 공연 예술을 유럽과 아시아에 전파하였고, 스페인

부르고스 인 뉴욕 RCH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올

해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AYAF 2014 공연예술분야 창작

자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연극분야의 조성찬씨는 멘토

의 주선으로 밀양 연희단거리패대표 이윤택에 합류하여 1달간

연기, 신체훈련 등의 과정을 거쳐 연희단거리패와 수성아트

피아가 공동 제작하는 일본극단의 ‘코마치 후마덴’에 출연

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미술분야에서는 정재훈씨가

2013 대구미술관 기획 ‘Y-artist project’에 선정되었고, 장하

윤씨는 2013대구문화예술회관 올해의 청년작가선정 및 초

대전을 개최하였다.

대구문화재단에서도 활발한 지역활동을 지원하고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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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대표 축제인 ‘컬러풀대구페스티벌’에 신진예술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재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범어아

트스트리트 전시공간에 시각분야 예술가 3인이 공동 기획

하여 전시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끊임없는 활동과 지속적이

고 다각적인 지원 및 관심 속에서 2012년에 선정된 14인의

예술가가 2013년에도 지속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고, 지역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활동영역을 넓히며 예술인으로서 꾸

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2014년 신진예술가지원사업은 장르 확대를 위해 연출/극

작 분야를 신설했고 서류심사보다 인터뷰 심사를 중점으로

하여 역량있는 신진예술가를 선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필수 활동이행조건을 낮춰 활동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올해

는 특히 분야별로 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하여 지식의 다양성

을 키우고 신진예술가 간의 상호 협력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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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대구는 문화예술계 인재를 배출하는 영남 최대

의 교육메카였지만 문화예술이 산업화되면서 지역대학

의 기초예술전공자의 배출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정작 문

화시설에서는 전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등 수급 불

균형 문제가 상존한다. 대구의 우수한 문화예술 인프라

를 바탕으로 주요 전략산업인 문화산업이 경쟁력을 갖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문분야 인력양성

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차세대기획자양성과정, 무엇인가?

(재)대구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는 작년 4월

부터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을 2년째 운영하

고 있다. 이 과정은 양질의 문화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

는 공연·전시기획 전문 인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시작한

사업이다.주최: 대구광역시, 주관: 대구문화재단

이러한 교육과정을 개설함으로서 장기적 관점에서

효과적인 교육체계를 수립하고 문화예술전문 인력양성

의 거점지역으로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대구

의 우수한 공연인프라를 활용한 구체적인 프로그램 마

련과 실무경험이 풍부한 국내 정상급 교수진 위촉을 통

해 질 높은 문화예술교육 기회 제공 및 문화전문인 양성

열정 가득,

꿈 가득!

예비 공연·전시

기획자를 만나다!

대구문화재단_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

김미선대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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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지역 문화예술 교육 저변 확대 및 기관·인력

간 네트워크 구축 및 활성화에 사업의 근본취지가

있다.

어떻게 추진되는가?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 은 교육생

모집에서부터 선발심사, 워크숍, 강의, 세미나, 현장

실습, 해외연수의 단계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추진

된다. 모집을 통해 공연기획·전시기획 각 10명씩

총 20명의 교육생을 선발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3: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는데 이는 그만큼 본 사업

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뜨겁다는 반증이다. 교육대

상자들은 공통과목 60시간과 전공과목 100시간을

이수함으로써 분야별 160시간의 교육과정을 마쳐야

한다.

강의 커리큘럼은 예술행정, 전기기획, 공연기획

3파트로 나누어져 진행된다. <최신트렌트분석>, <문

화예술통계분석>, <문화예술 관련법체계>를 다루는

공통과목, <공연제작을 위한 저작권>, <국제공연계

약>, <기획서작성법> 등으로 구성된 공연기획 과목,

그리고 <큐레이터 입문>, <국내미술시장 분석>, <작

품설치와 공간의 이해> 등을 다루는 전시기획 과목

으로 분야별 160시간, 총 260시간의 교육과정으로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를 꿈꾸는 수강생들이 문화

예술 분야 현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맞춤형 강좌

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강사진은 강준혁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원장,

김희철충무아트홀 공연기획본부장, 하선규홍익대학교 미학과 교

수, 이용관대전예술의 전당 관장 등 국내 정상급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수업이 될 예

정이다. 대구문화재단은 또한 분야별로 지도교수를

배치해 교육생들의 프로젝트 지도 및 예술적 네트

워크 형성에 도움을 주게 된다

강의수료 후 관련 예술기관·단체들과 협력하

여 현장실습을 통한 실무교육10~11월을 이어갈 예정

이며, 교육과정 및 현장실습 평가에 따라 성적 우수

자 10명에게는 예술기관 인턴채용지원 및 해외연수

의 특전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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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의 중요성!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 이라는 사

업의 추진에 있어 문화기획의 중요성은 백번을 말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첫 강좌를 연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강준혁

원장은 “문화기획자는 문화를 통해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자신의

이익보다 문화 자체를 생각하며 일해야 하는 것”이

라며 기획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질을 역설하기

도 했다.

또한 공연기획팀 지도교수 최현묵 연출가는

“단순히 문화예술을 매개자로서 대상화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순수예술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대중

화의 길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대구문화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차세대 문

화기획자 양성과정은 참으로 중요하고, 시기적으로

도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의 예술이 산업

화와 대중화의 물결 속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이 시

기에, 전문적이고 심도있는 교육을 통하여 육성된

문화기획자들이 나아갈 바, 이정표를 정확하게 설정하여

지역 예술가와 지역민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문화기획의 중요성을 언급

했다.

사업성과?

교육생 선발을 통해 예술전문인력을 희망하는 관련

졸업예정자 및 미취업자들에게 질 높은 교육기회를 제공

함으로써 예비기획자 발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하

였고 교육수료를 통해 대구문화예술 경쟁력을 향상시킬

핵심인력을 양성하였으며 현장실습을 통해 이론보다는

현장중심의 실무교육을 겸비하게 하였으며 해외연수를

통해 문화강국인 영국의 문화시설 투어 등 새로운 예술

대구문화재단_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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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접함으로써 기획자로서의 지식과 시야를 넓히고

문화예술 기획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턴채

용을 통해 교육과정을 통해 배웠던 내용을 실현할 수 있

는 장이 마련되었다.

현재 이 과정을 통해 선발된 20명의 교육생 중 4명

이 대구문화재단의 인턴으로 채용되어 실전업무를 진행

중에 있다. 이렇듯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 양성과정’을

통해 문화예술 전문 인력양성에 대한 관심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잠재되어 있는 교육생 선발, 강의, 실습 등 다양

한 과정을 통해 예비기획자 발굴 및 그 가능성을 확인하

는 계기가 되었다.

2014년에는?

금년도 사업의 특징은 전년도에 비해 지원 자격에

변화를 주어 ‘차세대’ 라는 사업 타이틀에 부합하는 대상

이 교육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선발하였다. 이로 인해

교육생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팀워크를 높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대구문화재단은 교육생들의 평가 및 만족도조

사를 반영한 커리큘럼의 구성, 현장실습기관의 연장1개

월-> 2개월 등 내실 있는 사업 운영을 위해 전년도 내

용을 보완·수정하여 업그레이드된 차세대기획자

과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과정을 수료한 교

육생들의 열정과 노력이 계속되어 지역예술발전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선발된 교육생 외에도 대구문화재단은

본 교육과정에 대해 관심 있는 일반을 대상으로 사

전신청에 의한 청강을 허용하며, 이와 관련한 자세

한 사항은 문화사업부 053)422-1246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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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287-1047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로 260 TEL 053-422-1201 홈페이지 www.dgf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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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로 260 TEL 053-422-1201 홈페이지 www.dgfc.or.kr ISSN 2287-1047

대구문화재단은

고품격 문화도시-대구를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