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의 재인식 역사전략적관점€¦ · 넷째, 한국적 관점, 한일관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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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대마도의 재인식역사전략적관점. 윤명철 동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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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와 대마도의 재인식—역사전략적관점.

    윤명철 동국대학교 교수

  • Page 2

    역사학은 미래학 – 가치

    – 해양문화의 의미와 가치

    – * 문명성

    – 만남의 문명 개방의 문명

    – *영토 및 영역

    – *항로사용 및 자원

    문화는 環流

    국제성 개방성 평등성 탈중심성

    1. 서언

  • Page 3

    1. 서언

    울릉도 독도 및 대마도의 역사상 규명

    역사전략적인 위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관점

  • Page 4

    2 동아시아의 해양문제

    동아시아의 발전

    – 동아시아 공동체의 필요성

    –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신민족주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상황—해양이 중요

    해양력의 대결 불가피. 항로의 ‘배타적 관리권’

    북방 4개도서인 남쿠릴열도

    독도 문제.

    북한과 러시아-두만강 하구의 鹿屯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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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 간의 센카쿠(尖角)제도(중국에서는 釣魚島) 분쟁

    중국과 동남아 국가 간의 남사군도, 서사군도분쟁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

    ‘제 2차南海大戰’이라는 가상 시나리오

    이어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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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한국

    마라도로부터 남서쪽으로 149㎞(80마일)에 위치한 이어도에 종합과학기지를 설치.

    중국 외교부는 “양국 배타적경제구역(EEZ)이 겹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EEZ 중첩 지역에서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2012년 3월 중국의 국가해양국장

    "이어도가 중국관할해역에 있고 감시선과 항공기를 통한 정기순찰 범위에 포함돼 있다"고 발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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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g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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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독도의 이해

    1) 독도 문제의 현재적 의미

    식민질서의 완전한 극복

    영토 고수, EEZ문제

    **어업직선기선문제

    일본-38만 평방km에서 43만km로 영토확대

    중국-95년 5월 15일 제8차 인민대표자 회의에서 직선기선 발표

    해양의 중요성 확인

    환동해권 설정의 상징 겸 실제

    해양영토 분쟁의 대응 자세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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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와 독도 의 관계

    첫째, 울릉도와 독도는 하나의 섬 시스템 속에서 파악

    둘째, 역사적인 접근

    셋째, 해양문화의 메카니즘을 적용

    넷째, 한국적 관점, 한일관계적 관점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관계라는 관점에서 파악

    다섯째, 구체적으로 현재 및 미래적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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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울릉도 및 독도의 역사적 이해

    (1) 명칭

    한국

    ∘우산도(于山島)

    -512년(신라지증왕 13년. 삼국사기)

    ․신라는 우산국을 정복함

    ․우산국: 독도, 울릉도(무릉도)

    -1425년(세종실록): 우산무릉등처안무사 임명

    -1432년(세종실록지리지): 우산무릉2도(강원도 울진현)

    -1451(고려사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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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연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우산도와 울릉도 두섬은 울진현의 정동에 있다.”

    동국지도 ( 세종연간인 1462년 제작)와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동람도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별개의 섬으로 그려짐.

    1822년의 해좌전국. 1846년 김대건이 제작한 조선전도-우산도가 鬱陵島 동쪽.

    **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사건

    伯耆州(시마네현)태수와 담판. 울릉도는 일본것이 아니라는 서계받음.

    ***숙종실록

    “안용복이 우산도는 역시 조선의 영토다 하면 일본인을 물리침.

    “ 조선에서 하루거리인데 일본은 닷새거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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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도(蓼島)---성종실록에 무릉도 북쪽의 “요 도”라는 기록이 있음

    ∘가지도(可支島)---정조실록에 나타남

    -당시 물개를 가제라고 부른 데 서 연유한 듯

    ∘일설 --우산무릉 2도(강원도 울진현)

    ∘자산도(子山島)---숙종실록에 나타남-于山島의 오기일 가능성,

    또는 울릉도의 속도라는 개념으로 子山島 호칭 가능성

    삼봉도(三峰島)

    -성종실록에 나타남

    -독도가 3개의 봉우리로 보인다 는 사실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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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는 돌섬에서 유래.

    1881년 공도정책으로 인한 일본인의 산림도벌. 조사단 파견.

    이규원—

    1900년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 독도(獨島)

    -1900. 10. 25(대한제국정부 칙 령 제41호)

    : 울릉군의 관할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로 명시

    -1904: 일본군함 니이다까호의 항해일지에 “독도”표기

    -1906: 울릉군수의 조정보고 내 용중 “독도”(우리나라 기록 중

    처음)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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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개관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산 42번지에서 75번지.

    화산암--

    독도--동경 131도 52분. 북위 37도 14분.

    동도 해발 90,7미터. 서도--167,9미터. 60개의 섬 .

    전체 5만평.( 동도 2만평 서도 2만 8천평)

    60여종의 식물

    괭이 갈매기 바다제비. 해조류 명태 정어리 강치 ( 바다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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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측

    마쓰시마(松島)

    -1667,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 記)에 최초기록

    ․울릉도: 죽도(竹島)

    ․독도: 송도(松島)

    1697년 2월.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면서, 불법월경을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옴.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에 조선은 황색,일본은 녹색으로 표기

    1869년의 총회도 역시 조선을 황색. 두 섬을 조선의 것으로.

    1870년 외무성관리보고—’울릉도 독도가 조선부속이 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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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치정부도 마찬가지--

    ,일본외교문서.제 3권 6항--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령인 것을 밝힐 것을 지령.

    1877년 , 태정관의 지시 ‘울릉도 독도는 일본영토와는 무관계함을 명심할 것’

    ※일본은 과거에 독도를 송도(마쓰시마)로 일관되게 표기하여 왔음

    ∘1904년 울릉도에 망루 설치

    다께시마(竹島)

    해군성과 외무성은 시마네현 어부인 나카이 요사부로의 독도어업 독점 출원을 계기로 내각회의 하고 영토편입.

    -1905. 2. 22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제40호 로 편입시부터 독도를 죽도(다께시마)로 공식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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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서양

    18세기 이후 서양선박 출몰.

    1787년 프랑스. 페르주가 울릉도에 옴. 다줄레 섬.

    ∘부솔(Boussole)도

    -1787 프랑스 군함 부솔호가 명 명

    ∘리앙꾸르암(Liancourt Rk)

    -1849(헌종 5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꾸르호가 발견후 명명

    ∘미넬라이․올리브챠암(Minelai and Olivutsa Rk)

    -1854. 4. 6 러시아 함대중 올리 브챠호가 발견하여 동도는 미넬라이, 서도를 올리브챠로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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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넷섬(Hornnet Is.)

    1855(철종 6년): 영국군함 호넷 호가 발견 측량후 명명

    ∘다줄레암(Dagelet Rk)

    -1857. 미국 포경선 플로리다호 가 발견후 명명

    -

    1867~1906 사이에 제작된 일 본의 여러지도에서 표기

    ∘올리브챠와 미넬라이島

    -1867~1897 사이에 일본 지도 에서 표기

    **** 한국 해양연구원 자료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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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울릉도 및 독도의 역사

    삼국사기는 지증왕 13년 조에 ‘지경(地境)의 면적은 100리인데, 지세가 험하고 ---

    武陵, 羽陵,芋(于)陵島),羽陵島, 羽陵城, 독섬

    萬機要覽이나 增補文獻備考 등 조선의 인식-‘鬱陵과 于山은 모두 于山國의 땅’

    둘을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 영토로 규정.

    울릉도와 생활공동체

    생산활동의 영역, 항해민들에게는 避港 항로관측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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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기 전반 삼국지 동이전의 동도—울릉도 사도섬 사할린설

    우산국 타타르 해협, 일본북부해안, 연해주일대와 교류 가능성

    고구려의 남진정책 신라의 북진정책

    항로 거점

    505년 삼척에 悉直州. 512년에 伊湌인 김이사부 河瑟羅州 軍主. 우산국 정벌

    신라의 해륙정책

    우산국과 대마국의 갈등

    (울릉문화원,『울릉문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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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상 고구려군의 渡倭 가능성

    장수왕 69년(481년)에 興海까지 진출.

    계타이(繼體)천황 10년, 흠메이(欽明)천황 원년-고구려 사신 파견.

    越國에 도착--동해항로 사용.

    흠메이 ==고구려 사신과 道君이라는 지방호족이 밀무역

    발해 –34차례 사신교류

    대마도 제주도 강릉 등과 연결

    고려 태조 – 공물받침, 고려의 직위 받음

    현종(11세기) –여진해적의 침입

    고려에 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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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울릉도 독도의 해양전략적 가치

    **울릉도

    울진 후포항에서 울릉도까지는 98마일

    강릉 주문진에서 울릉도까지 111마일,

    삼척지역에서 78마일.

    동해항로상의 중간 거점 및 피항지 역할

    **독도

    울릉도와 독도 87.807㎞,

    울진(죽변)에서 독도 217.216㎞.

    오끼(隱岐)도에서 독도 157.266㎞,

    시마네(島近)현에서 독도 210.83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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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 여지승람

    팔도총도

    대조선전국도

    김대건의 조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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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항로상에서 필수적인 위치

    동해는 망망대해—원양항해 및 천문항법 구역

    항해상의 물표역할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항해할 때는 주로 겨울에 북서풍 활용

    피항지

    식수 및 땔감 보급

    조선의 적합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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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거리 방식

    K(해리) = 2.078(√H +√h )

    **H = 목표물의 최고 높이

    h = 관측자의 眼高(1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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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로

    동해북부 항로

    – 횡단항로와 사단항로 종단항로를 포함,

    총체적으로 동해북부 항로라고 명명

    – 동해북부 해양은 고구려 옥저(남 북 동옥저)

    읍루 숙신 발해인 그리고 후대에 여진 들이

    사용한 곳.

    – 동해종단항로

    – 발해인들 사용 기타 여진 등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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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근대 이후 독도 근대 이후 동해의 가치부상

    수산자원의 생산지. 목재 등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만주에 대한 영향력 강화, 군사적인 우월성 확보의 수단 또는 매개지.

    러시아

    -1860년 북경조약 체결.연해주 획득.

    동해의 전략적 이용.

    울릉도 독도 대마도 오끼나와 대만을 연결

    일본의 반발과 러․일 전쟁-동해의 전장화.

    1905년에 러․일 전쟁 울릉도 도동 앞바다 5월

    독도 쟁점화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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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의 북망루는 1905년 7월 16일 준공

    울릉도와 독도를 연결하는 해저전선은 10월 8일 부설.

    독도와 시마네(島根)현의 마쯔에항(松江港)을 연결하는 일본해군의 해저 통신선과 감시망루가 완성.

    사까모도 료마의 울릉도 개척 주장(?)

    ‘일본해문화권’ 설정

    松尾小三郞 1924년 ‘일본해 중심론’과 ‘두만강 경략론’ 자유항 구상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질서, 동해의 군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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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으로 한일 간에 독도영유권 문제가 시작.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일 정부의 견해표명

    1953년 7월 13일 일본측이 송부, 한국측에서 반론하는 형식.

    1962년까지 일본이 4회 한국이 3회 표명.

    1965년 한일정상회담.

    한국정부는 1965년 12월 17일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우리 영토이다. 한일간에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구술서를 보낸 이후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논의를 일체 배제하고 있다.

    1996년에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를 선포하였고, 1997년 1월 1일에는 어업 직선기선제도를 시행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98년에 ‘신한일어업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연계시키고자 하였으며, 그때 맺은 협정 내용 때문에 아직도 몇 가지 예민한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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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말

    **일본

    ‘아시아 태평양경제’

    동남아 포함한 엔화경제권의 구축—대동아 공영권의 계승

    1988년 환일본해(동해)경제권 주장.-남북한과 일본, 중국의 동북부, 극동 러시아(연해주)를 하나의 경제권.

    니이가타(新潟) 도야마(富山) 등 도시들, 남북한의 도시들,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시들과 경제협력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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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유엔 해양법발효-해양영토개념,

    1996년 배타적 경제수역(EEZ) 선포, 1997년 1월 1일 직선기선제도의 시행.

    북방 4개 도서-러시아와 영토분쟁

    한국과 독도 문제 야기.

    중국과 센카쿠(조어도) 영토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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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경제특구 등 경제권 적극적 추진. 대부분 바다와 관련한 정책.

    동해의 문제

    ‘대중화경제권’, ‘중화연방론’, ‘신중화제국주의

    연해주 1860년도에 러시아에 빼앗김.

    만주의 출해구-두만강 하구 수용과 연해주 수복이 필수--동북공정의 한 배경

    2006년 4월--북한과 나진 선봉(나선시)를 50년 동안 공동관리 계획 발표.

    현재—진행됨

    동해진출 가능 (군사.경제)

    서해의 내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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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1991년 불라디보스톡 연설, 1992년 1,1 개방.

    환동해경제권에 참여.

    동북아지역협력프로젝트 참여. 크라스키노 등 핫산(KHASAN)지구. 중국의 훈춘. 북한의 나진·선봉 등 두만강 하구 지역을 자유무역경제지구로 선정한 것임.

    2000년 푸틴(Vladimir Putin)정부

    ‘강력한 러시아 재건’ 표방.-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역의 부상.

    시베리아의 가스관 통과

    TSR(시베리아 횡단열도)과 TKR(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 일본열도와 연속.

    중국과 한시적인 동반자 관계. 각종 정책 들

    원성리간 도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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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동해 중부의 도시들과 일본의 혼슈 중부인 쓰루가, 니이가타 등을 연결하는 동해경제권 등 이론구상.

    러시와와 여객항로개설

    북한

    1991, 12월 나진·선봉 자유무역경제지구 선포, 1993년 자유경제 무역지대법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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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의 구도

    해양력 대결 불가피. 항로의 ‘배타적 관리권’

    북방 4개도서인 남쿠릴열도

    독도 문제.

    북한과 러시아 정부-두만강 하구의 鹿屯島

    중일 간- 센카쿠(尖角)제도(중국의 釣魚島) 분쟁

    중국과 동남아 국가 간-남사군도 및 서사군도분쟁

    ‘제 2차南海大戰’이라는 가상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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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中聯合艦隊’의 결성 시나리오

    러시아정부와는 두만강 하구의 鹿屯島

    중일 간의 센카쿠(尖角)제도(중국에서는 釣魚島)의 영유권

    일본의 해군력은 2위, 해양영토는 5위.

    중국 해군비 증액. 2013년 항공모함 취역

    중국 동해로 진출. 러시아의 극동정책 본격화

    이러한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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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가치--독도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해양영토의 깃점으로서 의미.

    군사적 가치 --한국은 독도에 고성능방공레이더기지를 구축하여 전략적 기지로 관리,

    관측소에서 러시아의 태평양함대와 일본 및 북한의 해․공군의 이동상황을 손쉽게 파악, 국가안보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

    동북공정 이후에 중국이 동해로 진출하는 상황에서 동해의 해양력과 독도의 중요성은 군사적으로 중요.

    지경학적 가치

    수산자원의 문제

    자원의 문제.--독도 남서쪽 약 90km 울릉분지에서 메탄수화물(Gas-Hydrate)로 추정되는 퇴적층 발견(‘97~’01).

    정체성의 문제

    정체성의 상실은 집단의 생존과 직결될 뿐 아니라 집단구성원들의 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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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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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문제의 역사적 이해와 현재적 가치

    대마도

    크기가 남북이 72km,동서가 16km, 면적이 714 평방km

    일본에서는 3번째로 큰 섬, 제주도의 3분의 1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 쓰시마(ツシマ)

    우리말 ‘두섬’이 변하여 됐다는 주장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對馬國 나온다.

    대마도의 생성은 약 1 만년 전

    洪績世 시대—연륙. 야마네고(산고양이)

    沖積世--수면이 약 150m 가량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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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환경

    부산에서 55km 떨어진 섬.

    한.일 양 지역--직선거리로 약 150여Km 정도.

    대마도 남단 쓰쓰에서 이끼섬--53km

    이끼섬에서 큐우슈우 북부의 가라쯔까지 약 20여 km 정도.

    지문항법 가능

    쿠로시오

    조류

    계절풍 등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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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의 역사

    덧무늬(隆起文) 토기

    1932년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이후 쓰시마 및 큐우슈우 지역

    1960년대--동삼동 패총에서는 죠오몽시대 전기의 도도로키식(轟式) 토기 등과 이마리산 흑요석 석기 출토

    조도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 죠오몽 토기 발견.

    한국의 융기문 토기--주로 경상남도 해안 도서지역

    쓰시마 중부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융기문 토기 6860+120 BP, 6590+160 BP

    기원전 3000년 경 전후에 성립--소바타식 토기

    한륙도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아 성립.

    빗살무늬 토기의 영향은 일본 서부 고또 (五島)열도, 오끼나와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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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요이(彌生) 시대(bc 3c~ ad 3)

    의 자루식 마제석검, 철도 등 철체품들이 출토.

    청동제품, 농사기구들도 한반도

    농경문화—적미 .

    **역사시대 이후

    토광묘, 석관묘 등 고분군들과 함께, 김해식 신라식 토기 등이 대마도 전 지역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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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설화

    시다루(志多留) 뒷편의 神山.

    17세기에 편찬된 對州神社志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커다란 항아리가 흘러왔다.---’

    이나자끼(伊奈崎)

    靈石을 싣고 도착한 궤짝설화.

    우나쯔라(女連)

    한국의 여왕이 속이 텅 빈 배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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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

    대마국 (삼국사기), 津島(고사기), 韓鄕之島(일본서기),

    일기국

    **우산국과 대마국의 갈등 및 혼인동맹

    우해왕 시대 왜구가 침범

    우산국은 대마도 정벌. 공주인 풍미녀와 혼인

    왕후의 사치-결국 신라에게 멸망

    두 해양 소국의 갈등

    그 외 다른 해양소국들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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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세력들이 이용했을 가능성

    일본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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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지중해 국제대전

    598년 부터 671년 . 70년 전쟁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이후 왜국의 참전

    663년 백강(백촌강) 전투

    망백제유민들의 대 신라및 당 방어체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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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4년 對馬島와 이끼(壹岐)에 防人과 熢燧를, 큐우슈우 북쪽에 산성을 쌓고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 구축.

    다자이후(大宰府)에 미즈끼(水城)라는 방어진지 구축,

    665년 오오노죠(大野城), 키이죠(椽)성 등을 축성.

    金田城 - 667년 백제의 달솔인 토훈슌쇼< 答발春初>가 유민들을 지휘하여 쌍은 백제식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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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는 일본적 질서 속으로 편입.

    독특한 생성배경과 자연적 조건--양 지역의 중간에 위치 반독립적인 역사

    리아스식 해안

    원시림

    농토부족

    한반도와 가까운 거리

    ??? 왜 한국 질서 속으로 편입못시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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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 시대

    신라와 일본 사이에서 중간역할을 담당.

    헌덕왕 3년인 811년 12월. 신라 배 20여 척이 대마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서 횃불을 사용하여 연락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사살되었다.

    큐슈 북부지역에 사는 사람이 신라인과 함께 신라로 가서 兵弩器械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대마도를 점령하고자 하는 모의를 했었다는 보고가 올라옴.

    894년에 신라해적이 대마도를 봄과 가을에 걸쳐 두 번 습격.

    발해인

    일본국에 사신선 34차례 파견.

    776년 사도몽 "오수불에게 들은 대로 쓰시마 방면으로 향했지만 뜻하지 않게 금지된 땅에 도착했다"라고 하였다. 대일본 항로상의 한 거점으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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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2년에는 남원부사와 김해부사가 대마도에 갔다

    -- 997년 고려는 일본에 3통의 서신을 보냈다.

    대마도와 큐슈지역의 방비 강화. 이때 고려는 큐슈지역을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큐슈의 대재부는 고려의 병선 500척이 침공하려는 정보가 있다면서 조정에 급보를 올렸다.

    왜구가 창궐

    공민왕 때에는 무려 100회에 걸쳐 전 해안은 물론 내륙까지 침략.

    1223 년부터 1392까지 529회 칩입

    1392년 부터 1443년까지 155회 침입

    **대마왜구

    수직왜인—관직을 받은 왜인

    고려 공민왕때—만호의 직위

    대주편년략 –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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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1389년에는 朴威,

    조선--태조 때 金士衡과 세종 때 李從武가 대마도 정벌.

    1419년6월 17일 조선의 대함대가 대마도 상륙. 선박들 129척 소각, 해안가의 집들도 1939호 소각.

    태종

    대마도주에게 사신을 보내 대마도가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한 조선의 영토라고 하면서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라고 하였다. 댓가를 약속하면서.

    대마도주는 사신을 보내 왜인들을 거제도에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형식을 취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실리 외교.

    조선이 요구수용—대마도는 형식상으로 경상도에 속하고,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조선의 영토.

    조선은 도주에게 ‘도선증명서’를 발급해주어 무역의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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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최첨봉 역할.

    부산에 왜관 설치-무역 등 편의.

    조선통신사

    1604년부터 1624년까지는 ‘탐적사’ 또는 ‘회답겸 쇄환사’라는 이름,

    1636년 이후부터 1811년 까지 9회는 통신사라는 이름,

    대마도까지 가는 문위행은 1637년부터 1860년까지 무려 53회 파견

    통신사는 보통 400~500명이 참여, 대마도의 특별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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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마도의 교훈

    15세기 초 權近이 제작한 세계지도--대마도가 釜山과 가깝게 표현.

    申叔舟가 편찬한 海東諸國記나 李重煥의 擇里志 경상도 편에 보면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

    姜沆이 지은 看羊錄에는 거주하는 사람의 다수가 조선의 의복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

    1590년 김성일의 보고서- “--땅으로 말하면 조선에 부속된 섬이다.”

    동국여지승람—’대마도는 – 옛날 계림에 속했다. ---’

    대마도 는 조선에 번신의 관계

    신유한의 해유록 ---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7세기 이후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보면 대마도는 일본과 더 밀접

    해양의 중요성을 경시 , 영토의 중요성 경시한 과거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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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21세기 해양의 세기

    동아지중해

    해양적 이익의 충돌

    항로확보 및 해양영토 갈등 불가피

    독도는 다양한 의미

    독도의 역사적 위상 및 전략적 가치를 연구 홍보하는 작업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