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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ussia & R ussian F ederation 계간 2014년 겨울호 발행인·김현택 발행처·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러시아연구소 2014년 12월 1일 발행 Vol.5, No.4 통권 제20호 December 2014 Russia & Russian Federation Russia & Russian Federation ISSN 2093-3789 4 0 No. December 2014 | Vol. 5 특집기사 :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러시아의 세 번째 수도, 카잔 라마 강의 연수육지, 볼로콜람스크 특별기고 : 러시아 홍길동 연구노트 : 러시아연방 인문공간 연구 러시아 중앙연방관구 경제지도 러시아 석유·가스 채굴지 주민의 삶의 질 러시아 역사교과서 논쟁 : 자긍심 고취 vs. 역사적 진실 추구 러시아 파워 엘리트 연구 극동·시베리아 개발의 젊은 기수,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인간과 문학 미하일 레르몬토프, 그의 시대적 ‘상념’에 관하여 스크린 속의 러시아 영웅의 귀환 : 『가가린, 최초의 우주인』 러시아 민족 이야기 우랄 동쪽의 순록 사육자, 만시인 명화 속에 그려진 삶 러시아 풍속화가 열전(列傳) 바실리 페로프와 <무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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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ol.5,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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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r 2014

    449-791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외대로 81 TEL.031-330-4852 FAX.031-330-4851

    81, Oedae-ro, Mohyeon-myeon, Cheoin-gu, Yongin-si, Gyeonggi-do 449-791, Korea http://www.r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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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ussia & Russian FederationVol.5, No.4 December 2014

    Russia & Russian FederationISSN 2093-3789 40No.December 2014 | Vol. 5

    특집기사 :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러시아의 세 번째 수도, 카잔

    라마 강의 연수육지, 볼로콜람스크

    특별기고 : 러시아 홍길동

    연구노트 : 러시아연방 인문공간 연구

    러시아 중앙연방관구 경제지도

    러시아 석유·가스 채굴지 주민의 삶의 질

    러시아 역사교과서 논쟁 : 자긍심 고취 vs. 역사적 진실 추구

    러시아 파워 엘리트 연구

    극동·시베리아 개발의 젊은 기수,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인간과 문학

    미하일 레르몬토프, 그의 시대적 ‘상념’에 관하여

    스크린 속의 러시아

    영웅의 귀환 : 『가가린, 최초의 우주인』

    러시아 민족 이야기

    우랄 동쪽의 순록 사육자, 만시인

    명화 속에 그려진 삶

    러시아 풍속화가 열전(列傳) 바실리 페로프와

  • T h e M a g a z i n e o f R u s s i a & R u s s i a n f e d e R a T i o n

    042 0 1 4Vol.5 No.4

    Russia & Russian Federation

    contents

    Russia & Russian Federation 겨울호(계간)통권 제20호 2014년 12월 1일 발행

    발행인 / 김현택(한국외대)

    편집인 / 황성우(한국외대)

    편집위원 / 김민수(한국외대)

    김선래(한국외대)

    김준석(한국외대)

    김혜진(한국외대)

    라승도(한국외대)

    송준서(한국외대)

    이지연(한국외대)

    장세호(한국외대)

    최우익(한국외대)

    발행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러시아연구소

    주 소 / 449-791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외대로 81

    전 화 / 031-330-4852

    팩 스 / 031-330-4851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rus.or.kr

    디자인·편집 / (주)이환디앤비(02-2254-4301)

    인쇄인 / 송용수

    인쇄처 / (주)이환디앤비

    ISSN 2093-3789

    비매품

    ※ 본 잡지의 내용을 허가없이 무단전재하거나

    재배포하는 행위를 금합니다.

    T h e M a g a z i n e o f R u s s i a & R u s s i a n f e d e R a T i o n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가 인문한국(HK)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하는 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 시사성 있는 주제를 분석

    하고, 러시아 지역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지향하는 종합

    지역정보지입니다.

    1. 학술마당

    기획특집 :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러시아의 세 번째 수도, 카잔 / 김혜진(한국외대) | 2

    라마 강의 연수육지, 볼로콜람스크 / 황성우(한국외대) | 10

    특별기고

    러시아 홍길동 / 알렉산드르 강(고려인 작가) | 15

    연구노트 : 러시아연방 인문공간 연구

    러시아 중앙연방관구 경제지도 / 김선래(한국외대) | 27

    러시아 석유·가스 채굴지 주민의 삶의 질 / 최우익(한국외대) | 32

    러시아 역사교과서 논쟁 : 자긍심 고취 vs. 역사적 진실 추구 / 송준서(한국외대) | 38

    러시아 파워 엘리트 연구

    극동·시베리아 개발의 젊은 기수,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 장세호(한국외대) | 44

    인간과 문학

    미하일 레르몬토프, 그의 시대적 ‘상념’에 관하여 / 김준석(한국외대) | 50

    스크린 속의 러시아

    영웅의 귀환 : 『가가린, 최초의 우주인』 / 라승도(한국외대) | 55

    러시아 민족 이야기

    우랄 동쪽의 순록 사육자, 만시인 / 김혜진(한국외대) | 59

    명화 속에 그려진 삶

    러시아 풍속화가 열전(列傳) 바실리 페로프와 / 이지연(한국외대) | 66

    2. 정보마당

    러시아어 Tips - 러시아어 동사 유의어(6) / 김민수(한국외대) | 72

    3. 알림마당

    러시아 지방 학술대회 안내 | 80

    신간서적 | 82

    러시아연구소 후원자 모집 | 84

    Russia · CIS Focus 투고 안내 | 86

    영문학술지 REGION | 87

    논문투고 안내

    안녕하십니까?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에서 『슬라브硏究』논문투고에 대해 안내

    말씀 올립니다.

    『슬라브硏究』는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서 연 4회(3월 30일, 6월 30일,

    9월 30일, 12월 30일)발간되고 있고, 동유럽과 러시아 및 CIS지역의 어학, 문학,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분야에 관한 깊이있고 참신한 연구논문을 싣고

    있습니다.

    『슬라브硏究』에 기고를 원하시는 동학제현께서는 논문 제출기한에 맞춰

    본 연구소 이메일 주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논문투고 요령과 심사

    규정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고, 기고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

    든지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투고 시 필수기재사항

    1) 논문 영어 제목 및 초록

    2) 논문키워드(국문 5개, 영문 5개)

    3) 관심분야 3가지(국문)

    •홈페이지 : www.rus.or.kr

    •e-mail : [email protected]

    •Tel : 031-330-4895

    항상 왕성한 학문적 성취를 기원드리며 소중한 옥고 기다리겠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硏究』 편집위원회 드림.

    ·『슬라브硏究』발간일 : 2015년 3월 30일 (제31권 제1호)

    · 논문투고 마감일 : 2015년 1월 20일

  • 학술마당1기획특집 :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특별기고 : 러시아 홍길동

    연구노트 : 러시아연방 인문공간연구

    러시아 파워엘리트 연구

    인간과 문학

    스크린 속의 러시아

    러시아 민족 이야기

    명화 속에 그려진 삶

    R u s s i a &

    R u s s i a n

    F e d e r a t i o n

  •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 카잔은 정치·경제 중심지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역사

    가 깊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러시아인들은 카잔을 ‘러시아의 세 번째 수도’라고

    부른다. 올여름 필자는 타타르스탄의 카잔을 여행하게 됐다. 이 글을 통해 카잔에 대해 소개하고 짧게

    나마 이 도시를 돌아보면서 느낀 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천년고도, 카잔

    러시아에서 천년고도를 꼽으라면, 일반적으로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한 노브고로드나 프스코프를 떠

    올린다. 그러나 카잔 역시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2005년 카잔은 도시 건립 천 년을 맞이

    했다.

    카잔은 볼가 불가르(Волжская Булгария)의 북쪽 국경을 수비하는 요새로 건설됐다. 1438년 카잔은

    킵차크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카잔한국의 수도로 성장하게 된다. 카잔은 카잔카(Казанка)라는 강을

    옆에 두고 있으며, 이 강은 볼가 강으로 이어진다. 가죽제품, 도자기, 무기 등을 생산했던 카잔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크림, 터키 등 여러 지역과 교역관계를 맺으며 일찍부터 동과 서를

    김 혜 진 (한국외대 HK연구교수)

    러시아의 세 번째 수도, 카잔

    기획특집 1 _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이번 특집기사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에서는 러시아연구소 HK연구인력들이 수행한 2014년 여름 러시아 현지조사 탐방기 2편의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지역을 알리고 러시아 지방연구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이는 차원에서 유익한 코너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다음 호까지 연재).

    2 기획특집

  • 잇는 교역 중심지가 됐다.

    모스크바 공국이 성장하면서 카잔한국은 여러

    차례 모스크바의 공격을 받게 된다. 결국 1552년

    폭군 이반이라고도 불렸던 이반 4세는 카잔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사원이 이반 4세의 카잔 정복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카잔 정복을 기념하는 성당을 만들 정도였으니,

    카잔과의 전쟁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는지 가

    늠해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후, 타타르인들은 현

    재 타타르스탄의 북서쪽에 위치한 카반 호수 근

    처로 이주됐고, 카잔 가까이 거주하는 것이 금지

    됐다. 이들은 옛 카잔의 특징이 살아있는 ‘스타로-

    타타르 슬라보다’(Старо-Татарская слобода, 옛

    타타르촌)를 만들어 모여 살았다.

    모스크바 공국에 복속된 이후 카잔은 새로운

    발전 단계에 접어들게 됐다. 1556년 이반 4세의

    명령으로 기존 크레믈린이 석조 건물로 개조되

    기 시작했고, 러시아 여러 도시에서 수천 명의 러

    시아인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제정러시아

    시기를 맞아 이곳에 인쇄소와 각종 공장이 일찍

    부터 생겨나면서 카잔은 볼가 연안의 새로운 경

    제·문화 중심지로 성장하게 됐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카잔은 혁명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카잔의 대규모 공장들이

    전선에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며 중요한 역할

    을 했다. 전쟁 후 카잔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

    하여, 1979년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1990년 카잔은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가 됐

    으며, 오늘날 글로벌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끓는 솥”, 카잔

    카잔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기원했는지에 대해

    서는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모든 전설은 고

    그림1. 천년 공원에 있는 “끓는 솥” 분수(출처: http://www.pokazuha.ru)

    3기획특집

  • 대 불가르어에서 기원한 ‘카잔’(Казан)이라는 단

    어와 관련 있다. 고대 불가르어로 카잔은 “솥”을

    뜻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세 가지 전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볼가 불가르의 한(Хан)은 도시를

    건설하기 전, 지혜로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언

    을 구했다. 한 노인(마법사라는 설도 있음)이 예언

    하길, “큰 솥에 물을 길어 수레에 올려놓고 그 아

    래로는 불을 때우시오. 그리고 말들이 그 수레를

    전속력으로 끌게 하시오. 솥이 펄펄 끓기 시작하

    면 그곳에 도시를 지으시오.” 한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했으며, 솥이 끓는 곳에 도시를 짓고,

    카잔(Казан)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카잔 천년광

    장에는 “끓는 솥”(Кипящий казан)이라는 이름

    의 분수가 있다.

    두 번째 전설은 몽골 제국의 침입과 관련 있다.

    몽골 한인 한티메르가 볼가 불가르의 수도 불가

    르(Булгар)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용맹스러운 남

    성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성들은 포로로 잡

    혔다. 지혜로운 노파인 투이비카는 살아남은 자

    들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들을 배에 태우

    고 어느 깊은 밤에 볼가 강을 따라 도망쳤다. 투

    이비카는 부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큰 솥만

    챙기고 길을 떠났는데, 그 솥은 어마어마하게 컸

    고 매우 무거웠다. 투이비카와 도망 나온 사람들

    은 마침내 한 기슭에 다다르게 된다. 그들은 아

    름다운 그곳이 마음에 들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

    기로 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곳에서 행복하게 오

    래 살려면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바쳐야

    했다. 투이비카는 결국 자신이 아끼던 솥을 내놓

    았다. 이들은 솥을 땅 깊숙이 파묻고, 새 도시를

    지어 ‘카잔’이라 불렀다.

    또 다른 전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불가

    르 왕국의 마지막 한인 가브둘라의 아들은 물을

    뜨기 위해 동으로 만든 큰 솥을 강가로 가지고

    갔다. 강기슭의 경사가 꽤 급한 탓에 무거운 솥을

    들고 있던 왕자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그만

    솥을 놓쳐 버렸다. 솥은 데굴데굴 굴러 강에 빠져

    버렸고, 물살이 빠른 강은 솥을 이내 삼켜 버렸

    다. 이후 이 강을 카잔-수(Казан-су, 솥-강) 또는

    카잔카라 불렀다. 그리고 그 강가에 세워진 도시

    를 ‘카잔’이라 불렀다.

    타타르인의 땅

    타타르스탄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타타르인들의 땅이지만, 애초 타타르의

    독특한 민족색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기대와는 달리 첫 인상은 러시아의 대도시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러시아인이 공화국 전체 인

    그림2. 크레믈룝스카야(Кремлевская) 지하철 역 내부 모습 (필자 촬영)

    4 기획특집

  • 구의 48% 이상이고 타타르인이 47% 정도인 민

    족 비율 탓인지 다소 밋밋한(?) 도시 풍경에 실망

    하던 차에, 그나마 타타르스탄에 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건, 카잔 크레믈린에 있는 ‘쿨 샤리프

    사원’과 지하철 내부 모습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봐야 하는

    곳이 크레믈린과 붉은 광장의 바실리 사원이라

    면, 카잔을 방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

    도 카잔 크레믈린과 그곳에 있는 푸른 색 모스

    크이다. 카잔 크레믈린이 언제 생겼는지, 크레믈

    린의 옛 타타르 이름인 케르만(Керман, 키르멘

    Кирмэн)의 어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료는 존재

    하지 않는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10세기

    경 목조 크레믈린이 처음 생겼을 거라고 보고 있

    다. 카잔이 모스크바에 함락된 후 이반 4세의 명

    령에 따라 프스코프 건축가들이 흰색 석조 크레

    믈린으로 변모시키면서, 그 면적도 넓어졌다.

    오늘날 총 1,500㎡의 카잔 크레믈린에는 큰 규

    모만큼이나 볼거리가 풍성하다. 가장 먼저 방문

    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크레믈린 서쪽에 위치

    한 ‘쿨 샤리프 사원’(Мечеть Кул-Шариф)이다. 이

    사원은 본래 카잔한국의 주요 사원이자 중부 볼

    가 연안의 종교학문 중심지였으나, 1552년 이반

    4세의 군대에 의해 붕괴됐다. 카잔의 지도자이자

    사령관이었던 쿨 샤리프의 이름을 따른 이 사원

    은 1996년 복원에 착수하여, 카잔 건립 천 년을

    기해 2005년 공개됐다. 이 사원은 우랄 산맥에서

    공수해온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천오백 명이 수용 가능하다는 내부는 이란에서

    선물 받은 양탄자로 꾸며져 있다. 4개의 첨탑과

    청명한 하늘같은 푸른색이 돋보이는 이 사원은 2

    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슬람 역사박물관과 이

    맘(Имам, 이슬람 지도자)의 서재도 함께 있다.

    크레믈린 어디서도 볼 수 있는 첨탑은 슈윰비

    케 탑(башня Сююмбике)이다. 카잔한국의 슈움

    비케 여왕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

    져 있는 이 탑은 총 58m의 7층 석탑이다. 1730

    년 이 탑의 꼭대기에는 쌍두독수리 문장이 걸려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 후 초승달로 바뀌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의 반종교정책에 따라 이슬람

    그림3. 카잔 크레믈린 안에 있는 쿨-샤리프 사원(필자 촬영, ▲)그림4. 쿨-샤리프 사원의 내부 모습(필자 촬영, ▼)

    5기획특집

  • 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없어졌다가, 1980년대 말

    타타르 사회의 요청으로 도금한 초승달이 다시

    등장했다. 탑이 높기 때문에, 탑의 맨 위층에서는

    카잔카 강과 볼가 강, 그리고 도시 전경을 볼 수

    있어, 과거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했다. 슈움비케 탑 뒤로는 대통령 관저가 있으며,

    탑 근처에는 불가르 한들을 묻은 묘의 잔재들도

    유리벽으로 보존되어 있다.

    크레믈린 안에는 성 수태고지 성당(블라고베셴

    스키 성당, 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도 있다. 이 사

    원은 카잔이 모스크바 공국에 함락된 후 바로 목

    조 건물로 만들어졌다가, 그 후 1556년에 석조

    사원으로 바뀌게 됐다.

    크레믈린을 거닐다 보면 성 수태고지 성당 남

    쪽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정원 안에는 두 사

    람의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이 기념비의 이름은

    ‘카잔 크레믈린의 건축가들’(памятник Зочим

    Казанского Кремля)로, 2003년 11월 공개됐다.

    카잔한국 시기 카잔 크레믈린은 유명한 타타르

    건축가들의 힘으로 건설됐으며, 러시아로의 편

    입 후에는 뛰어난 러시아 건축가들의 기술로 더

    욱 아름다워졌다. 덕분에 카잔 크레믈린은 2000

    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이

    후 다양한 시기에 크레믈린에서 일했던 다양한

    민족의 건축가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만들

    어졌다. 기념비는 두 명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데, 종이 두루마리 도안을 들고 있는 사람은 타

    타르 궁정 건축가를 표현한 것이고, 스파스크 탑

    그림5. 슈윰비케 탑의 모습(필자 촬영)

    6 기획특집

  • (Спасская башня)의 도안을 들고 있는 사람은

    러시아 건축가이다. 기념비의 댓돌은 두 개의 줄

    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또한 타타르와 러시아의

    문화적 조화를 상징한 것이다.

    지성의 요람에서 스포츠와 관광의 중심지로

    1758년 카잔에는 러시아의 지방으로는 처음

    으로 김나지움이 설립됐으며, 1771년에는 최초

    의 이슬람 신학교들이, 1791년에는 극장이 생겨

    났다. 1804년에는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대학이

    설립되는데, 바로 ‘카잔 대학’이다. 이로써 카잔은

    러시아에서도 인정받는 학문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카잔 대학은 위대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

    지만, 오히려 졸업을 채 하지 못한 재학생들이 더

    유명하다. 대문호 톨스토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

    끈 레닌, 시인이면서 미래파를 창시했던 흘레브

    니코프, ‘러시아 5인조’의 수장으로 19세기 러시

    아 음악을 발전시켰던 발라키레프 등 러시아 예

    술과 문화를 이끈 사람들이 이곳에서 공부한 바

    있다.

    특히 레닌은 짧은 시기였지만 청년 시기를 보

    낸 곳이 이곳이었기에, 카잔에는 레닌에 대한 장

    소가 많다. 1887년 여름 레닌의 가족은 18년간

    살았던 심비르스크(오늘날 울리야놉스크)를 떠나

    카잔으로 온다. 이들이 카잔에서 처음 자리를 잡

    았던 페르바야 고라 거리(ул. Первая гора)는 오

    늘날 레닌의 본래 성을 따서 울리야노비흐 거리

    그림6. ‘카잔 크레믈린의 건축가들’ 기념비(필자 촬영)

    7기획특집

  • (ул. Ульяновых)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후 이

    들이 가장 오래 묵었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 레

    닌은 1887년 가을 카잔 황실대의 법학부에 입학

    하게 된다. 비록 불법 집회 참여로 인해 퇴학을

    당하게 됐지만, 대학 시절을 카잔에서 보낸 이유

    에서인지, 카잔에는 러시아 전 지역을 통틀어 유

    일하게 청년의 모습을 한 레닌 상이 있다. 1888-

    1889년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체스 클럽 역시 지

    금은 일반 아파트로 변했지만, 동판으로 이 사실

    을 명시하고 있다.

    카잔 대학은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알렉

    산드르 1세에 의해 설립됐던 당시에는 ‘황실 카

    잔 대학’, 혁명 후에는 ‘카잔 국립대’, 레닌의 사망

    후 1924년부터 2010년까지 그의 이름을 따랐다.

    2009년에는 러시아에 연방대가 도입되면서 ‘카

    잔 볼가 연방대’로 변경됐다.

    최근 카잔은 러시아 스포츠 중심지로도 부

    상하고 있다. 2011년 유럽역도선수권대회를 개

    최한 이래, 2013년에는 17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2014년에는 세계펜싱선수권대회를 치렀

    으며, 2015년에는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그리고

    2017년에는 2018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진행

    되는 컨페더레이션스컵 경기가 열리기로 되어

    있다.

    세계적인 큰 행사를 치루고, 또 앞두고 있어서

    인지 도시 전체는 현대 도시로 완전히 새 단장을

    마친 모습이었다. 도시 중심부에서는 러시아 지

    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건물들을 거의 볼

    그림7. 청년 레닌상(필자 촬영, ▲)그림8. 1888-1889년 레닌이 자주 들렸던 체스 클럽(필자 촬영, ▼)

    그림9. 볼가연방대(필자 촬영)

    8 기획특집

  • 수 없었는데, 그나마 미처 손보지 못한 건물들도

    공사판으로 가린 채 한창 재건축 중이었다. 카잔

    의 도시 단장은 90년대 후반부터 도시 건립 천

    년을 준비하며 시작됐지만, 2000년까지만 하더

    라도 손대지 않은 18-19세기 역사적인 건물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대부분의 노후한

    건물들은 허물어졌으며, 그 자리에는 한 눈에 보

    기에도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모

    스크바의 정복 이후 타타르인들이 모여 살던 옛

    타타르 마을이나, 톨스토이가 살던 집도 역사 속

    으로 사라졌다.

    도시 재건과 각종 세계대회의 유치는 카잔을 러

    시아의 새로운 관광지로 발전시키려는 공화국 정

    부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인지 도

    시 곳곳에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많이

    있었다. 최근 러시아 공항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

    습으로 바뀐 것처럼, 카잔 공항 역시 리모델링을

    마쳤으며,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공항철도도 생

    겼다. 카잔의 중심지인 크레믈린 부근에서는 시

    내를 돌면서 오디오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이층

    관광버스를 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구경할 수 있도록 무인자전거 대여소도 곳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보면서 또 하나 눈

    에 띄었던 것은 유적지마다 붙어 있는 QR코드였

    다. 유명 유적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유

    명인의 저택, 사원 등에 대해서도 QR코드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 때문인지 매년 카잔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는 백만 명 이상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던 도시에서 오늘날 새로운 스포츠 중심지로,

    그리고 색다른 관광지로 변모해 가고 있는 카잔

    은 앞으로 글로벌 도시로서의 모습을 기대하게

    한다.

    그림10. 2013년 하계유니버시아드 홍보 판넬(필자 촬영)

    그림11. 슈움비케 탑에 있는 QR 코드

    9기획특집

  • 이 글은 2014년 8월 러시아 중앙연방관구 내

    여러 지역을 현지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호와 다음호 두 번에 걸쳐 중앙연방관구 지

    역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중심

    으로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볼로콜람스크(Волоколамск)는 모스크바 주

    (Московская область)에 속한 볼로콜람스크 군

    (Волоколамский район)의 행정 중심지이다. 수

    도인 모스크바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30km 떨

    어져 있으며, 2014년 기준으로 볼로콜람스크 군

    전체로는 약 46,750명, 우리네 군청 소재지와 같

    은 볼로콜람스크 시에는 약 21,7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소비에트 시기 조금씩 증가 추세를 보이던

    인구는 2000년 이후 군 전체 인구와 군청 소재지

    볼로콜람스크 도시의 인구 모두 과거 10년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

    주변에 라마 강이 흘러가고 있으며, 예로부터 발

    트 해와 볼가 강, 카스피 해를 잇는 수로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발트 해로부터 흑해

    로 이르는 교역로 중간에 위치한 스몰렌스크에서

    황 성 우 (한국외대 HK교수)

    라마 강의 연수육지,볼로콜람스크

    기획특집 2 _ 러시아 현지조사 기행문

    그림1. 볼로콜람스크 중심지의 크레믈린(필자 촬영) 그림2. 볼로콜람스크 크레믈린 모형 (볼로콜람스크 역사박물관 소재, 필자 촬영)

    10 기획특집

  • 교역로가 갈라져 다시 라마 강을 거쳐 볼가 강과

    카스피 해로 연결되는데, 이 라마 강을 통한 교역

    로에 볼로콜람스크가 위치해 있다. 그런 까닭에 볼

    로콜람스크라는 지명 역시 ‘라마 강에 위치한 연

    수육지’(волок, переволок)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볼로콜람스크가 연대기에 기록돼 러시아 역사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1135년이다. 발

    트 해로부터 흑해와 카스피 해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을 위한 수로체계를 건설했던 러시아인, 특

    히 노브고로드의 상인들이 모스크바와 랴잔 지

    역을 잇는 연수육지로서 볼로콜람스크의 중요성

    을 발견하고 이곳에 목조요새를 건설하면서 도

    시의 역사가 시작됐다. 노브고로드 상인들의 영

    향력이 강했던 이곳은 14세기말까지도 노브고

    로드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가, 몽골의 지배

    하에서 점차 성장해가던 모스크바가 주변의 지

    역들을 병합하던 초기 시기, 즉 모스크바의 공후

    바실리 1세(1389~1425) 시절에 모스크바 공국으

    로 편입됐다. 이후 제정러시아 시기를 거쳐 소비

    에트 시기 대조국전쟁(1941~1945) 동안에는 잠시

    독일 군대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그런 까닭에

    이곳은 당시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1941년 11월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28명으로 구성된 소

    련군 특공대가 독일군 탱크 18대를 파괴해 독일

    군의 진격을 늦추기도 했다.

    먼저 볼로콜람스크 도시 중심에 위치한 크레

    믈린을 들러본 후, 그 다음으로 제일 먼저 찾

    아가본 곳은 볼로콜람스크 역사박물관이다.

    작은 도시라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

    와 달리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볼로콜

    람스크 지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잘

    정리돼 있었다. 고대 원시시대의 삶을 이해하

    기 쉽게 재현한 공간이나 고대인들의 생활 도

    구를 잘 구비해 놓은 곳 등 전시 공간은 제법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관심분야 혹은 과거

    에 이와 관련해 글을 쓴 기억 때문인지 박물관

    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볼

    로콜람스크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연수육

    지로서 도시가 가지고 있던 과거 역사의 현장

    을 재현한 조형물이었다. 연수육지는 말 그대

    로 강과 강을 연결해주는 육지를 말한다. 영어

    ‘portage’에 상응하는 러시아어 ‘볼로크’(волок)

    는 ‘portage’가 가지는 ‘운반하다’는 의미보다는

    ‘두 강 사이에 놓여있는 장소’라는 의미와 러시아

    어 동사 ‘переволакивать,’ ‘перетаскивать’에

    서 알 수 있듯이, ‘배를 바닥으로 질질 끌고 당기

    는 수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배를 끌고

    그림3. 11세기~13세기 연수육지로서 볼로콜람스크(필자 촬영)

    그림4. 소련군과 독일군의 볼로콜람스크 전투(1941) 재현 장면(필자 촬영)

    11기획특집

  • 육지로 갈 경우에는 직접 들거나 무거울 경우, 바

    닥에 통나무를 대고 끌고 갔다. 이곳 전시공간에

    는 과거에 연수육지를 거쳐 다른 강으로 연결해

    갈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물론

    관련서적이나 사진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었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물을 통해 본 것

    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책을 보다가 배에

    사람이 탔을 경우에도 배를 들고 이동했다는 내

    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당시의 배 크기가 겨우 사람 5~6명

    만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배라는 것을 알고는 수

    긍할 수 있었다.

    또한 앞서 말한 독일군 탱크를 격퇴한 대조국

    전쟁 시기 전투 현장 역시 당시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재현한 모형물로 만들어

    져 있어 눈에 금방 들어왔다. 러시아 전역을 여행

    하면서 늘상 느끼는 바지만, 지나칠 정도로 많이

    세워진 전쟁 관련 유적지들을 보며 러시아 사람

    들이 전쟁의 아픈 기억과 함께 승리에 대한 자부

    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

    날에는 새롭게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관광상품으로 연결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역사박물관을 나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볼

    로콜람스크 군에 소재한 야로폴레츠(Ярополец)

    마을이다. 이곳을 찾아간 이유는 이곳에 소

    련 최초의 수력발전소(ГЭС)가 건설됐기 때문

    이다. 레닌과 그의 부인 크룹스카야가 머물기

    도 했던 이곳은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소비에

    트 권력과 전력화이다’(Советская власть плюс

    Электрификация)는 레닌의 구호에서 알 수 있

    듯이, 전력화의 상징이 된 곳이다. 물론 과거와 같

    이 전력을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관리인 한 명

    이 근무하고 있었다.

    낯선 동양인들의 방문에 문조차 열어주지 않

    던 그는 계속된 노크와 열어달라는 소리에 지쳤

    는지 문을 열고 오히려 우리의 방문을 반겨줬다.

    내부에는 시간이 멈춘 듯 소비에트 시절의 모습

    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TV, 라디오, 냉장고

    그림5. 소련 최초의 수력발전소 댐, 야로폴레츠 소재(필자 촬영)그림6. 소련 최초의 수력발전소, 야로폴레츠 소재(필자 촬영)

    그림7. 소련 최초의 수력발전소(내부), 야로폴레츠 소재 (필자 촬영)

    12 기획특집

  • 등 갖가지 가전제품은 소비에트 시절에 생산된

    제품 그대로였다. 처음에 사소한 질문에도 냉담

    하던 우리네 시골 아저씨 인상의 관리인은 낯선

    타자에 대한 의심의 경계가 풀린 듯, 마지막에는

    덮개로 쌓여 있던 레닌의 기념물마저 먼저 보여

    주며 사진 촬영까지 허락해주는 관용(?)을 베풀

    기도 했다. 친해지면 마음을 여는 러시아인의 심

    성을 오랜만에 보는 듯해 뿌듯한 마음으로 발전

    소를 떠났다.

    푸쉬킨의 처갓집을 가려고 이동하는 중 길거리

    에서 우연한 동상을 볼 수 있었다. 1920년 11월

    14일에 건립된 이 조형물은 소련 시절에는 흔하

    게 볼 수 있는 동상이었겠지만, 요즘 들어 볼 기

    회가 전혀 없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참에 사진이

    나 찍을 겸 레닌과 그의 부인 크룹스카야가 함께

    나란히 있는 동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 사람들

    의 말로는 러시아 전역을 통틀어 레닌과 크룹스

    카야가 함께 있는 이런 류의 동상은 이 곳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사실

    여부를 따지고 싶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

    실 소련이 해체되고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이야 여러 번 봤지만, 러시아 지방에는 아직도 레

    닌 동상이 건재한 곳도 많아 그의 말을 믿을 수 그림9. 푸쉬킨 박물관(부인 콘차로바의 집) 전경, 야로폴레츠 소재(필자 촬영)

    그림8. 레닌과 크룹스카야 동상, 야로폴레츠 소재(필자 촬영)

    13기획특집

  • 없었다. 단지 레닌과 그의 부인이 함께 있는 동상

    은 그곳밖에 없다는 말을 믿기로 하고 예정된 푸

    쉬킨 박물관(부인 곤차로바의 집)으로 향했다.

    솔직히 전공이 다르다는 이유로 푸쉬킨에 대해

    그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느끼는 바지만 러시아 어디를 가

    더라도 푸쉬킨에 대해 러시아 국민이 느끼고 있

    는 애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야로폴레츠

    에 있는 푸쉬킨 박물관의 경우를 보더라도 푸쉬

    킨은 생전에 이 곳을 두 번 찾았다고 한다. 1833

    년 8월과 1834년 10월 두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

    지만, 도시의 다른 곳에 비해 내부와 외부 모두

    아주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말 그대로 박물관

    이 시민들의 삶의 휴식처이자 정신적 안식처 역

    할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의 삶의 궤적

    을 찾아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그와 관련된 기념비를 세우고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우리네 모습과 비교해보면 한 없이 부럽

    지 않을 수 없었다.

    푸쉬킨 박물관을 떠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데,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황새 부부를 보게

    됐다. 흔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멸종위기에 처해 천연기념물 제199호로 지정될

    정도로 보기 힘든 황새인데, 한 마리도 아니고 부

    부 두 마리를 동시에 볼 수 있었으니 여간 기쁘지

    아니했다. 남은 러시아 현지조사 일정이 순조롭

    게 풀릴 징조라 생각하고 다음 도착 예정 마을인

    스타리차(Старица)로 이동했다. 원래 보리스 고

    두노프의 친구이자 1589년 1월 26일 러시아 최

    초로 총대주교가 된 욥(Иов)이 묻혀 있는 수도원

    을 가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지만, 수도원 전경을

    담아낼 수 있는 멋진 장소가 그 앞에 있다는 소

    식을 듣고 한번이라도 꼭 찾아가고 싶었기 때문

    이다. (다음호에 계속)

    그림10. 푸쉬킨 박물관 내부, 야로폴레츠 소재(필자 촬영) 그림11. 길에서 우연히 만난 황새 한 쌍(필자 촬영)

    14 기획특집

  • 알렉산드르 강 (고려인 작가)

    러시아 홍길동(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가는 CIS 고려인 문학)

    1. 글을 시작하며

    존경하는 동료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다음과 같이 외치며 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

    다. «우리의 수호천사, 이야기여 영원하라!» 소비

    에트 고려인이었던 저는, 역사적 조국에 대해 알

    고 싶은 마음에 어릴 적부터 한국의 이야기를 읽

    곤 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북한 잡지를 제외하

    면 남한과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

    로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게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것은 의적 홍길동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저는 노비의 몸

    에서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홍길동이 고향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우연한 기회로 도적 무리에

    섞이게 되고, 부당하게 부를 축재한 이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고, 결국 조국을 떠나

    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습니다. 자신의 의

    지와 가치를 실현하고자 홍길동은 이상세계 율

    도국에 정착하게 되고 생이 다할 때까지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립니다.

    이 고전이 하나의 메타포가 되어 저는 한국을

    떠나 사는 모든 고려인들이 홍길동처럼 서자의

    신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의 고려인들도 정당한 자기 권리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들처럼 별다른 문제

    없이 평탄한 삶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중학교, 고

    등학교를 지나 대학교 그리고 취업까지... 우연한

    기회로 소설과 단편을 쓰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제 안의 저항과 주위 현실에 대한 모순감은 물리

    학 학위를 받은 저를 창작의 테이블로 이끌었고,

    창작활동을 통해 자유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

    게 했습니다. 다른 동료 작가들과 교류하며 저는

    모든 고려인 작가와 그들의 주인공이 마치 홍길

    동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특별기고

    이 글은 작가 알렉산드르 강이 2014년 7월 16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콜로키움 주제로 발표한 “러시아 홍길동”의 원문으로서 카자흐스탄에서 발표한 그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15특별기고

  • 도 이념과 시간,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며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만의 율도국을 만들었기 때문입니

    다. 그렇게 ‘홍길동’이라는 마법 같은 이야기는 마

    치 수호천사처럼 우리의 뿌리를 찾게 해주었습니

    다. 이제 본격적인 발표로 들어가 소비에트와 포

    스트 소비에트 고려인 작가 문학과 오늘날까지의

    발전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대별로 우리의 러

    시아 홍길동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됐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벽의 틈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절정에 이를 무렵 모

    스크바의 출판사는 극동지역

    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운 고려인 공산당

    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학은 둥지를 떠난다»라

    는 드미트리 리의 소설을 출판했습니다. «카자흐

    스탄 소비에트 고려인»(1992) 인명사전에는 이 소

    설이 동 주제로 쓰인 첫 번째 역사소설이라고 기

    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1991년에

    소련이 붕괴했기 때문에, 이 작품이 공산주의 소

    비에트 고려인들을 다룬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것의 시작은

    어디였을까요? 고려인 문학의 역사를 한 번 들여

    다봅시다. 소비에트 고려인 문학의 선구자는 산

    문가이자 시인이며 사회평론가였던 조명희(1894-

    1938) 선생입니다. 그는 조국에서 일본의 압제에

    대항해 싸웠으며, 이후 러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문학 활동을 전개합니다. «짓밟힌 고

    려», «시월의 노래», «볼셰비키의 봄» 등의 작품에

    서 그는 자유 공산주의 고려인의 이상을 노래합

    니다. 그러나 1937년, 조명희는 여느 민족해방 운

    동가들이 그러했듯 일본의 간첩활동과 친일행위

    라는 죄목으로 소련 KGB에 체포됐습니다. 놀라

    운 사실은 아직도 고려인 선구자 조명희 선생의

    유해가 묻힌 곳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

    실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던 시기, 조명

    희 작가가 묻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하바로프

    스크 시립 공동묘지에서 시체발굴 작업이 시도됐

    는데, 얼마 뒤 모두를 경악하게 하는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시체를 매장한 땅 위에 또 다른 공동묘

    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결론을 내

    봅시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소비에트 고

    려인 문학의 탄생을 1923년 3월 1일 러시아 극

    동지역에서 고려인 민족 신문인 «선봉» (현재 «고

    려일보»의 전신)의 창간으로 본다면 드미트리 리

    의 소설이 출간된 1987년까지 60여 년 동안 고려

    인 작가들은 공산주의 이념전파의 도구로써 소

    비에트 정권을 끊임없이 선전했습니다. 소비에

    트 체제 아래서 고려인들의 진정한 열망이 담긴

    «진짜 문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

    었겠습니까? 그러나 억압받고 상처받은 당시의 문

    학을 자세히 분석하며, 저는 전체주의 이념의 압

    박에도 우리의 진정한 영웅 ‘러시아 홍길동’의 지

    적 경향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한 작가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 카

    자흐스탄의 드라마 작가 한진 선생(1931–1993)을

    들 수 있습니다. 소설 «용병의 운명»에서 주인공

    철수는 한국군에 강제 징집되고 난 뒤 고향을 그

    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방천지가 온통 벽뿐이

    구나. 온통 저주받을 벽뿐이야! 하늘마저도 천장

    으로 변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 누구도 여기서

    1) 이번 발표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CIS 지역에서 배출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려인 작가들의 1970년에서 2010년까지의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16 특별기고

  • 탈출할 순 없어....» 이때 그의 동료가 벽의 틈을 발

    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벽에도 틈

    이 나 있다는 건 우리한테도 희망이 있다는 거 아

    니겠어.» 바로 이 틈을 통해 주인공은 자유로운 세

    상을 볼 수 있었고, 작가는 이 좁은 세계를 남베트

    남으로 보내진 철수의 입을 통해 은유적으로 이

    용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벽의 틈이 작가에 의해

    자유를 향한 상징적인 출구로 변하게 된 것입니

    다. 저는 평범해 보이는 이 형태가 소비에트 고려

    인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고

    려인 작가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선전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마치 감옥에 갇힌 듯 남모르게 괴로

    워했고, 실제로도 애타게 출구를 찾았습니다. 그

    것이 비록 한 모금의 자유를 마시기 위한 벽의 좁

    은 틈이라도 말입니다. 조명희 선생의 친구이자 전

    우였으며 스탈린 체제하에서 14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시인 강태수(1908 – ?) 선생 역시 «고려인 작

    가의 창조활동은 언제가 될지라도 반드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내용의 시를 한 편 저술한

    바 있습니다. 이 시를 통해 후대 고려인 작가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그 시의

    한 구절을 옮겨보겠습니다. «죽음이 나를 아홉 번

    찾아온다 해도. 죽음이여, 나를 데려가는 일은 쉽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날 데려가게 된다면

    – 떠나며, 나는 푸른 하늘 한 조각을 눈꺼풀 속에

    숨길 것이니, 죽음이여, 그런 뒤 나를 데려가라. 죽

    음이 나를 아홉 번이나 찾아온다고 해도. 나는 열

    번째 다시 부활할 것이다!»

    3. 유령 학교

    소비에트 고려인 작가들이 대부분 큰 저항 없

    이 국가의 선전도구로 이용되긴 했지만, 이 같

    은 경향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작가도 있었

    습니다. 바로 로만 김(1899-1967) 선생이 그렇습

    니다. 그는 모험류나 형사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

    였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

    이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유령학교»라는 소설

    을 접하지 않았다면 그 의견에 동의했을지도 모

    릅니다. 이 작품은 정보보안학교에 입학한 젊

    은 청년이 자신의 상관에게 보고서를 제출하

    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세계적인 정

    보보안 전문가들이 자신과 동급생들에게 가르

    치는 수업의 내용과 세미나, 실용과제들을 매

    우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보안학교의 교장은 학

    생들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

    이지 않는 일을 하는 기사단이자 보통 사람들

    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유령 계급이다. 우리는

    진정한 슈퍼맨이며 모든 사람의 삶과 일에 영

    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역사의 가운데서 그것

    을 움직인다... . 그 어떤 감상주의도, 감정도, 이

    념도, 애국심도, 원칙이나 도덕률도 모두 쓸데

    없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

    직 사명, 즉 우리의 가치를 위해 반드시 승리해

    야 하는 적과의 전쟁이 있을 뿐이다.» 소설의 후

    반부, 주인공은 상관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

    은 단지 간첩소설을 쓰고 싶어 호기심에 이곳

    에 입학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기사단»이 저지르는 더

    러운 일에 관해 반드시 세상에 알리겠다고 말합

    니다. 주목할 것은 이 겁 없는 청년의 고백이 바

    로 작가의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스

    탈린의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작가이자 통역가,

    동방학자였던 로만 김 선생 역시 자신의 날카로

    운 장르 문학을 통해 관찰력 있는 독자들에게 귀

    중한 메타포를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

    17특별기고

  • 국가의 모든 국민들은 붉은 군대 병사, 스파이,

    이념지도자, 탐정소설 작가 등의 흉내를 내는 유

    령이거나 유령 학교(여기에서 학교는 국가 자체를

    나타낸다.)의 일원에 불과하며 언젠가 사람이 되

    길 꿈꾼다.»는 것입니다.

    4. 도깨비

    소비에트와 포스트 소비에트 고려인 작가 중

    에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

    로 교훈을 남긴 작가들이 있습니다. 아나톨리 김

    (1939년생) 선생이 바로 그런 작가입니다. 그는 모

    든 작가와 독자들에게 얼마나 완벽하게 문학적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줬습니다.

    달리 보자면, 어떻게 고려인이었던 그가 과연 그

    것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김 작가의 창작활동은 단계별로 이야기할 수 있

    을 것입니다. 먼저 수많은 비평 연구에서도 드러

    나듯이 1975년에서 1985년 사이는 김 작가의 작

    품이 고려인의 세계관과 생활양식, 민속문화와

    회화적 형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김 작가는 극동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

    의 삶을 그렸는데, 당시 고려인 세계는 러시아 사

    회와 교통하지 않는 닫힌 사회였으며, 자신의 전

    통에 따라 삶을 영위했던 시기입니다. 그의 작품

    속 고려인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소비에트 사회

    의 변방인들입니다. 그들은 해초를 캐거나(«해초

    캐는 사람들») 양파나 수박을 키우는(«양파 밭»)

    등 단순한 1차 산업에 종사했습니다. 즉 농사일

    을 하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야망에 찬 작가에게 이 단일민

    족사회는 너무나 협소했고, 때문에 작가가 돌연

    자신의 닫힌 세계관을 개방하려고 시도한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람쥐»(1984)라는 소설에서 변

    형 혹은 변신이라는 자신만의 창작 기법을 발표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설명하겠습니

    다. «이는 곧 변형 혹은 변신을 말하는 것이다. 나

    는 순간적으로 다람쥐로 변할 수 있고 반대로 어

    떤 강한 영감 혹은 경탄의 특별한 순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나의 영혼은 다양한

    사람에게 자리잡을 수 있고, 때때로 나비나 벌

    등에도 들어갈 수 있다. 이는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 새로운 기법은 작가를 보다 보

    편적인 이야기꾼으로 만들었고 인종이라는 장벽

    을 넘어 다양한 인간과 동물이 될 수 있게 했습

    니다. 자신의 창작 기법을 선언하고 그것을 소설

    «다람쥐»에 활용한 뒤, 작가는 «아버지 숲»(1989)

    이라는 작품을 통해 100% 순수 러시아 소설을

    쓰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주인공이 러시

    아인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와 운명을 정

    면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

    찌 됐든 고려인인 그에게 러시아는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과

    거»(1998)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목

    표는 사물의 전형적인 반영이 아닌 독특한 표현

    방식이었다. 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그저 자기

    자신일 뿐, 어떠한 집합의 일부거나 전형적인 상

    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인간

    고유의 개성을 강조하는 작가이다. 미학적인 관

    점에서 볼 때 나를 매혹하는 것은 영원을 상징하

    는 명확한 무언가가 아니라 찰나의 떨리는 뉘앙

    스이다.» 그러나 같은 페이지에서 작가는 세계관

    의 비논리적인 전환을 시도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나는 인류에게 있어 단 하나의 민

    18 특별기고

  • 족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인간»이라고 불린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민족의

    작가가 되었다» 즉, 김 작가는 자신이 공개한 미

    적 표현방식, 다시 말해 각개의 사물이 가진 (개인

    적, 인종적, 민족적) 독특성으로부터 세계와 민족

    을 초월하는 영원의 가설적 높이로의 도약을 시

    도한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자아발

    견의 가능성도 스스로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이

    러한 경향은 이후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

    은 자신의 인종적, 민족적 특성이 흐려지고, 상황

    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소설 «켄타우르스 부락»의 켄타우르

    스를 통해 작가는 전혀 다른 두 세계 간의 갈등

    에 관해 풍자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즉, 눈에 보이

    고 공허하며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켄타우르스,

    말, 아마존 여인)와 전지전능하고 보이지 않으며

    저열한 동물의 세계를 심판하는 미지의 존재들

    의 세계를 말입니다.

    또는 «요나의 섬»(2002)이라는 소설에서 작가

    는 선지자 요나와 성경 속의 고래, 루마니아 왕자,

    미국 퀘이커 교도 및 작가 자신의 alter ego가 절

    대적 진리를 찾고자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한 여

    행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결국, 비평가들

    은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판타지 장르의 궤도에

    올라탔다고 평가하게 됩니다. 이처럼 김 작가는

    여러 단계에 걸친 작품활동 속에서 믿기 어려운

    궤도를 구축하게 됩니다. 즉, 민족적 산문에서 시

    작해 동화 장르의 문학, 이후 모방의 단계를 거쳐

    «인류에게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

    한다»는 판타지 문학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에

    서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와 같은 문학적 변형이 진행되는 동안, 작가에게

    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자유자

    재의 변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을 사람

    과 비교한 김 작가의 소설 «다람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선한 사람

    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존재의 근원에는 타

    인과 나 자신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한 신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기적

    따위도 믿지 못하는, 그래서 믿음을 가질 수조차

    없는 나는, 실수로 빈 항아리 바닥에 떨어진 거

    미가 어둠 속에서 검은 눈을 크게 뜨고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수 없이 많은 밤 홀로

    몸을 웅크린다.» 과연 여기에 다른 코멘트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5. 기억이여 말하라!

    곧이어 잘 알려진 대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

    트로이카가 시작됐습니다. 소비에트 전 국민들

    은 일제히 무언가를 회상하고 참회하거나 폭로

    하고 스탈린과 소비에트 시절의 악몽을 저주하

    기 시작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폭로성 다큐

    멘터리 문학의 비명 속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고

    려인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용한

    순수예술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

    인 작품이 바로 작가 호진(1928 ~1997) 선생의 단

    편 «물망초»로 번역가 미하일 박 선생은 한국어

    로 씌여진 원작을 러시아어로 훌륭하게 재탄생시

    켰습니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시기, 즉 7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타쉬켄트의 작은 부락에 찾아

    든 세묜 김이라는 바이올린 장인. 그는 콜호즈 대

    표에게 자신을 고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를 미

    심쩍어하던 대표는 곧 열리게 될 공산당 총회 때

    그의 기술을 이용해 만든 바이올린을 선사하기

    19특별기고

  • 로 마음먹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묜은 뜨거운 타쉬켄트에 잠시 휴식을 취

    하고 햇살이나 즐기기 위해 온 것일 뿐이었습니

    다. 시장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가슴 아픈 기억으

    로 남아있는 한 여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이윽고 무엇에 홀린 듯 그녀의 뒤를 쫓게 된 세묜

    은 어느새 콜호즈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는 그녀

    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의 이름이 옐레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세묜은 과거 극동 러시

    아에서 자신은 상철이었고, 그녀는 혜옥으로 불

    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

    린 시절 자신은 아버지와, 혜옥은 그녀의 부모님

    과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바이올린 장인이었던 혜옥의 아버지는 어린 소년

    이었던 그에게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에 대한 동

    경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옥수수 밭을 노닐고 있을 때, 소련 공산당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누군가가 찾아와 아무런 설명

    도 없이 혜옥의 부모님을 잡아가게 됩니다. 이후

    혜옥은 상철의 집에 맡겨졌고, 소년은 그녀의 비

    극에도 혜옥을 매일 본다는 것에 그저 행복해 합

    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러던 중 그녀는 병이 들었고, 상철의 아버지는 약

    을 얻기 위해 아들을 이웃마을로 보냅니다. 그러

    나 상철이 돌아왔을 땐 이미 혜옥의 숙모가 그녀

    를 데려간 후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혜

    옥의 숙모를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말로 상철을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러시

    아 극동에서의 이야기는 시간과 함께 흘러갔습

    니다. 세묜은 옐레나, 즉 혜옥에게 과거 극동지역

    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익숙

    한 멜로디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줍니다. «물망

    초»라는 이름의 그 멜로디는 혜옥의 아버지가 딸

    을 위해 연주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혜옥의

    부모님이 자신의 딸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애칭으

    로 부르곤 했던 것입니다. 옐레나는 깜짝 놀라 유

    년시절의 가슴 아픈 과거를 기억해내려 노력하지

    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작지만 동일한 과거

    의 조각을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연민과 끌림을

    느끼던 두 남녀에게 예상치 못한 이별이 찾아오

    게 됩니다. 콜호즈 대표는 세묜을 무례하게 대하

    며, 당 총회를 위한 바이올린 제작이나 서두르고

    옐레나와는 만나지 말라고 모욕적으로 명령했

    기 때문입니다. 세묜은 심한 굴욕감을 느꼈고 크

    게 상심한 나머지 바이올린 제작을 마친 뒤 아무

    도 모르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옐레나는 큰 충격

    을 받고, 자신의 기억을 깨우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그녀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됩니다. 언뜻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예상치 않게 고

    려인이 가진 근원적인 문제를 파헤칩니다. 즉, 강

    제이주 –기분 나쁜 기차의 쇠 바퀴에 극동지역의

    고려인을 실어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보내버린 이

    사건은 극동지역에서의 삶, 아니 모든 고려인의

    과거를 이후의 역사로부터 단절시켜버립니다. 비

    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고려인이 절단된 사지

    를 경악스레 바라보는 장애인 꼴이 돼버린 것입

    니다. 그것을 자신의 현재에 연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잊어버리지도 못하며 어찌할 바

    를 몰라 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 소설의 예상치

    못한 결말도 바로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6. 태어나지 못한 자의 꿈

    날카로운 고백과 폭로의 파도가 잠잠해진 뒤,

    과거를 이해하려는 문학 장르가 시작됐습니다.

    이는 시기적으로 강제이주자의 후손들이 성장하

    20 특별기고

  • 면서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완벽히 단절된 과

    거와 현재의 우리를 연결시키는 끈이었던 우리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슬픔 어

    린 회상을 통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

    까요? 작가 블라지미르 김의 소설 «거울»에서 젊

    은 주인공 비카는 그의 길지 않은 삶 속에서 그

    를 그리도 힘겹게 했던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비카는 날카롭

    게 소리칩니다. 그는 자기 집에 놀러 온 동급생

    들이 부모가 말하는 한국어를 듣지 못하게 하려

    고 자신이 얼마나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또 서둘

    러 고려인 잡지를 감췄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부

    끄러웠었는지를 기억해 냅니다. 사실 이것은 의

    미 없고 보기 흉한, 생각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의 친구들은 모두 그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 고려

    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과장되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

    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곤 했던 것입니다. 작가의

    지적은 정확했습니다. 바로 그 부끄러움이 과거

    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고통과 눈물로 기

    억하는 부모를 둔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우리가

    그 시절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외모

    상으론 고려인이지만 모국어를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그들의 이념적 확신을 의심치 못할 만큼

    분명한 러시아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

    로 고려인이었습니다. 악쨔브리나(10월 혁명을 의

    미), 빌롄(레닌의 성과 이름을 붙여 부른 것), 라브롄

    찌(스탈린 시대의 악명 높은 KGB 단원의 이름) 등

    이 바로 그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제 어머님의 이

    름도 이스크라(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인데, 그녀의

    부모님, 즉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신념이 강

    한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

    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아이들은 저를 이름 대

    신 ‘고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아마도

    당시 제가 살던 알마티에 고려인의 수가 매우 적

    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 별명 때문

    에 무척이나 시달렸고, 매일 밤 잠자리에서 불면

    증에 시달리며 ‘왜 나는 고려인일까?’라는 비굴한

    질문으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부끄러움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고 우리는 아

    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994년 저는

    «태어나지 못한 자의 꿈»이라는 소설을 썼습니

    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의 이야기로 아버지와 어

    머니, 딸 그리고 긴 방랑에서 돌아온 방탕한 아

    들이 거친 세상에 맞서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

    과 지지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

    다.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

    지 않는다면, 아들과 딸이 일치와 결합을 시도합

    니다. 바로 근친 상간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신의

    확고한 논리, 즉 만일 그들이 오빠와 동생으로 다

    투게 되면 금지된 관계가 그들을 지탱하게 되고,

    반대로 남자와 여자로서 헤어지게 된다면 절대

    끊어질 수 없는 오빠와 동생의 관계가 이를 지속

    시킨다 것을 신뢰한 것입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

    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제 소

    설 속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가족 내부의 관계를

    단결시킵니다. 제가 이 소설의 제목에서 특히 강

    조했던 것은 이 작품이 세상을 향해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모든 세상사는 실

    상 태어나지 않은 자의 꿈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완전하고 겁과 절망에 빠진 연약한 영혼의 인

    간들은 꿈에서나 갈망할 수 있는 진정 멋진 삶

    을 위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영혼이기 때문이

    다.» 이 메타포는 낯선 땅에 살며 낯선 언어로 글

    을 쓰고 낯선 세계를 갈망하는 작가들이 과거와

    21특별기고

  • 현재 만들어가고 있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

    는 고려인 문학과 특히 관련이 있습니다. 수십 년

    이 지났지만 로만 김 선생의 예언적인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역사

    적 상황은 변하지만 우리 고려사람은 예나 지금

    이나 유령으로 남아있다.»

    7. 저주받은 고려인 문제

    이렇듯 다소 실망스런 결과를 가지고 우리는

    20세기를 마무리했고 새로운 21세기가 도래했습

    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고려인 문학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고려인 문

    학에는 분명하게 두 가지 경향이 이어져 오고 있

    습니다.

    첫째, 폭넓은 동화과정을 통해 러시아 문학으

    로 뛰어들고 있다. 둘째, 마치 은신처에 있는 것처

    럼 «안전하게» 민족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

    동화 문학의 대표 주자로 사마라의 여류시인

    지아나 강 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전시에서 스스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합

    니다. «나는 러시아의 변방 사람이다. 인간과 신

    앞에서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다. 촌 사람의 순진

    한 가슴으로 조국을 그린다. 조국에 대한 나의 사

    랑은 선천적이다. 겨울에 쏟아지는 6월의 뇌우처

    럼 러시아인의 눈이 아닌 동양인의 실눈으로 평

    생을 살아온 내가 그 누군가에게 특이해 보인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녀가 자신의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세계

    와 맞선 조국, 러시아였을 것입니다. «적들이 떼

    를 지어 달려들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아깝지 않다. 미국도 유럽도 너를 정복할 수는 없

    을 것이니!» 또는 «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의 뒤에는 러시아가 있다! 불명료한 메시아는 길

    을 비켜라. 말의 고삐를 잡아라(난 아무래도 상관

    이 없으니!) 불의 말은 제어할 수 없다». 동시에 서

    정적인 주인공으로서의 시인은 스스로 러시아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

    라봅니다. 전형적인 러시아식 자기비하를 통해서

    말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도 이렇게

    성장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번듯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아직도 신기한 노릇이다! 나는 성내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살지도 않았다. 또한, 방탕하

    게 굴지도 않았다. – 신이시여! – 일견 근사해 보

    이는 쓰레기들이 조국을 비웃으며 조롱할 때 말

    이다!». 그녀는 또한 아시아의 거대한 이미지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가슴속에 구름이 잠

    자는 동안은 나는 이 땅 위에 영원히 서 있을 것

    이다. 내가 만리장성이 되어 조국을 지킬 것임을

    그가 알게 하라!» 당시 시인은 양측 모두로부터

    민족적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과 러시아인이여, 나를 노려보지 마시오! 타타

    르인과 위구르인이여, 나에게 아첨하지 마시오!

    러시아를 향한 나의 시선이 너무나 좁다고 말이

    요. 나는 어릴 적부터 실눈이었소. 그러나 나는

    차갑고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안다오. 마치 고대의

    타타르인들이 하늘이 누워있는 북쪽의 다이아몬

    드-루시를 바라보았듯.» 이처럼 우리가 앞부분에

    서도 언급했던 ‘찢어진 눈을 가진 동양인’이라는

    러시아식 자기비하는 고차원적인 다른 시에서도

    애국심과 함께 시인의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습

    니다. 그러나 모든 인종대립에서 그 모든 강 시인

    의 요구는 알마티의 시인 스타니슬라브 리가 고

    려인의 비참한 운명을 끊임없이 한탄하는 시들

    22 특별기고

  • 고 침체된 시적 푸념과 비교할 때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양파밭- 하루만큼 길다. 양

    파 밭- 여러 해만큼 넓다. 우리 삶이 양파밭 같다

    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또는 «우리의 춤은

    슬프고 더디다, 우리의 노래는 끊임없이 이어지

    는 간청이다. 나는 신에게 왜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답은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여기

    에서 또 하나의 상징적인 문학 현상을 살펴볼 필

    요가 있습니다. 저는 소비에트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러시아로 출발을 감행한 고려인 공산당원에

    관한 드미트리 리의 소설을 되짚으며 발표를 시

    작했습니다. 바로 그 출발이 우즈벡 작가 블라지

    미르 김의 «김가»(2003)라는 작품에서도 묘사되

    고 있습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병

    합됩니다. 작가는 고종 황제의 궁전 호위대 간부

    의 아들인 강철이라는 이름의 남자에 대해 이야

    기합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일본군과 싸우고 수 차례에 걸친 접전 끝에 러시

    아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정착하고 러시

    아어를 배운 그는 소비에트 적군에 가입하고 나

    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군에서도

    경력을 쌓아 결국 소비에트 관리가 됩니다. 그러

    나 고려인 인사들이 늘 그랬듯 러시아 공산당 내

    부인민위원회에 의해 체포돼 죽임을 당하게 됩니

    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드미트리 리의 작품과 어

    떤 점에서 구별되는 것일까요? 이 둘은 원칙적으

    로 다릅니다. 만일 «이»의 소설이 단순히 공산주

    의적 가치를 선전하려는 것이었다면 «김»은 포스

    트 소비에트 시절 전설적인 극동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영웅을 녹여

    내고 그의 모험을 만들어 냅니다. 즉, 고려인 역

    사와 관련하여, 그리고 고려인 역사에서 가장 재

    미있는 시기와 관련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유희

    를 거쳐 결국 과거 혁명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춤

    을 추는 오락장르 문학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결론을 지어봅시다. 보이는 것처럼 우리

    가 다룬 어떤 작가도 고려인 현실에만 안주하기

    를 원치 않았으며 앞으로 그런 경향은 더욱 도드

    라질 것입니다. 근본적이고, 저주받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고려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

    다. «왜 아무도 현대를 사는 고려인의 운명에 대

    해 고민하고 글을 쓰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서

    저는 다시 과거의 모든 것이 세 가지 시기로 나눠

    질 수 있으며, 각각의 것은 서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한국-극동, 고려인의 출발점, 주된 등장

    인물-처음에는 조국 해방 투사, 이후에는 격분

    한 적군의 모습. 둘째, 극동- 중앙아시아, 강제이

    주, 새로운 소비에트 시민이 되는 고려인, 1949년

    시민 자격을 얻게 됨. 셋째, 소련-CIS, 다시 단절,

    제국의 붕괴와 공허함. 만일 우리 모두가 이전에

    소비에트 고려인이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누구인

    가? 만일 앞서 언급한 지나치게 사실적인 비유를

    다시금 사용한다면 고려인은 일반 장애인이 아니

    라 중증 장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제야 왜 작가나 철학자 중 누구도 이런 «장애인»

    의 문제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지 이해하게 됩니

    다. 실질적으로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현

    대 작가들의 모티브가 이해되는 것과 같은 과정

    이라고 봅니다. 스타니슬라브 리와 같은 작가들

    은 되돌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단절

    된 과거를 끊임없이 한탄하고 슬퍼합니다. 한편

    블라지미르 김과 같은 작가들은 비교적 가볍게

    과거의 조각들을 이야기합니다. 셋째로 드미트리

    강의 경우 가장 유연하게 오래 전부터 새로운 의

    족을 달고 힘 없는 걸음으로라도 러시아의 미래

    23특별기고

  • 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8. 되찾은 과거

    이제는 구조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살펴봅시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과거의 조각들을 꿰맬 수 있

    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지목한 예들을 따라갈 수

    는 없으니까요. 또한 온전하게 현재와 미래를 살

    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요? 저주받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우리는 먼

    저 근본적인 문제들에 답해야 합니다. «고려인 과

    거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아마도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빌

    리는 것보다 이 문제에 답하는 데 수월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저의 과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

    의 아버지는 북한 태생으로 흐루시쵸프의 «해빙

    기» 때 레닌그라드에서 공부할 당시 소비에트 고

    려인이었던 저의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졸업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평양으로 데려가 저를 낳으

    셨습니다. 이후 제가 한 살이 되던 해 북한 내에

    서 고려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고, 스탈린을 찬

    양했단 이유로 어머니는 저를 다시 소련으로 데

    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없이 남겨

    졌고, 그런 이유로 오랜 기간 매우 힘겹게 생활했

    습니다. 개인적인 제 창작활동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상실감이요, 창작활동을 통해 꿰매고자

    했던 것이 아버지를 대신한 이 구멍이었습니다.

    2004년 저는 «하현달의 골렘»이라는 소설을 썼

    습니다. 이 소설의 예술적 과제 중 하나가 절망적

    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 주인공이 마

    치 저처럼 헤어졌던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 삶과

    소설에서 오랫동안 부재했었기 때문에, 저는 그

    만남을 위해 어떤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공간

    을 상상해냈습니다. 아버지와 만나는 동안 아들

    은 아버지 앞에서 뉘우치며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떠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결국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게 저는 주인공인 아버지

    와 아들을 통해 회개와 용서라는 기독교적인 비

    밀을 거행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과거와 현재 저

    에게 있어 한국의 상징이었으므로 그 앞에서 뉘

    우치는 것은 저, 즉 저의 주인공이 모든 고려인의

    운명적인 실수에 대해 한국 앞에서 용서를 비는

    것이었습니다. 즉 생각 없이 «적군»이 되었던 것

    에 대하여, 우둔하게 복종하고 소비에트 시민으

    로 유화된 것에 대하여, 또한 부끄러움과 모방, 고

    려인이 되기를 거부했던 것과 그 밖에 많은 죄와

    연약함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려인 과거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매우 분명해집니다. 그의 의미는 한

    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그

    의 경계 밖에 있었지만 가장 힘든 시기, 우리는 구

    체적인 형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구

    원자로서의 한국을 생각했습니다. 마치 제가 누

    렇게 빛바랜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을 간직한 채 아

    버지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단절된, 그러나 이미 의미를 가지게

    된 과거가 소중한 통일성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러시아 홍길동은 제 작품 속 주인공의 말

    을 통해 세계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

    는 나의 육체와 정신의 지하실에서 세상과 태양

    을 향해 나왔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당신, 지상인

    에게 나를 유령으로, 도깨비로, 골렘으로 만든 당

    신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용서한다고 말

    하겠다. 왜냐하면, 그 자체도 절대 완전한 것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희망이 없고 어둡고

    24 특별기고

  • 절망으로 가득 찬 수많은 시간을 지나 내 삶을

    어디에 바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의 모든 영혼과 정신의 힘을 모아 나와 당신, 우리

    의 세상이 조금 더 선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게 하

    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려인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 왔고 또 앞으로도 만들어 갈 이상세계 율

    도국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곳

    에는 이미 다음의 것들이 존재합니다. 작가 조명

    희가 말했던 평등한 세계에 관한 무너뜨릴 수 없

    는 꿈. 강태수가 말했던 가슴 속의 영원한 구름.

    한진이 말한 도덕적인 규율과 책임 그리고 명예.

    로만 김이 말한 전체주의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

    의 저주받은 운명의 극복. 아나톨리 김이 말한 러

    시아 세계 속에서 고려인이 당한 굴욕감의 극복.

    호진과 미하일 박의 기억의 창조. 제가 앞서 말씀

    드린 되찾은 과거와 그 밖의 많은 것들이 말입니

    다. 그렇다면, 러시아 홍길동이 된다는 것은 과

    연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스스로 무엇을 나타

    내고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러시아 홍길동은

    우리가 러시아 땅에 살게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150여 년에 걸쳐 분명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그와 선조에게 일어

    났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의 빛나는 미

    래를 만들고자 과거의 가슴 아픈 경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영웅은 자기 민족이 행

    했던 모든 행동과 그 자신이 행한 행동에 강한 책

    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셋째, 우리의 영웅은 끝

    없이 길었던 굴욕적인 지하에서의 생존을 경험하

    고 나서 오직 창작에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우

    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겪은 오랜 공포와 고난

    의 시간은 그에게 강한 의지와 성격을 단련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끝으로 우리의 영웅도

    어쨌든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그 때문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혼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선조로부터 이어진

    그 깊은 슬픔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그

    는 진정 전장에 홀로 남은 병사인 것입니다.

    9. 결 론

    이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볼 시

    간입니다. 고려인 문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

    가 혹은 무엇이 그것에 영향을 미칠까요?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

    라고 배워온, 우리의 영웅이 살아있는 이야기 만

    세!» 그러나 우리가 러시아 세계에 살았고, 러시

    아어로 생각하고 글을 써온 만큼 우리의 문학은

    일차적으로 러시아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기반

    으로 형성됐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굴욕적이고 모욕적인 우주와 함께입니다. 체홉

    과 그의 현실과는 다른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피

    할 수 없는 애수,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위대하

    게 묘사한 전체주의 국가 안에서의 영혼의 부패

    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가이토 가즈다

    노프가 예술적인 언어를 이용한 시에서 조국을

    발견한 비극적인 이주 경험입니다. «모스크바-수

    탉»이라는 불멸의 시에서 불합리한 소비에트 감

    독 시대에서 러시아인의 무한한 폭음의 바다로

    구원된 비밀스러운 사람을 노래한 베네딕트 에로

    페예프. 끝으로 사샤 소콜로프와 실제로는 선하

    고 현명하나 어른들의 잔인한 공간에서 존재하기

    를 원치 않는 정신지체아를 묘사한 그의 천재적

    소설 «바보들의 학교»까지. 물론 이 작가들은 높

    은 수준의 모더니즘 세계와 세계적인 문학인인

    프란츠 카프카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독일어로 글을 쓴 이 프라하의 유대인은 오스트

    25특별기고

  • 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에 영원한 외국인으로서

    비현실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저주받은 질문을

    자신의 문학에 던졌습니다. 물론 그는 20세기 그

    리고 21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길에 관한 고찰»

    에 제시된 예순 두 번째 격언은 모든 러시아 홍길

    동들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정신적인 세계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서 희망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에

    게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한다.» 만일 고려인 문학

    이 형식적으로 과거와 현재에 민족적인 어떤 것

    으로 여겨졌다면 그의 방식이나 수준과는 관계

    없이 모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존재에 대

    한 방향성에 따라 그의 창작물은 가장 자연스러

    운 형태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소수문

    학, 즉 세계관적 의미의 디아스포라로 흡수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민족적 경계를 떠났

    습니다. 이는 곧 기반이 없는 우리의 문학이 자유

    로운 형태로 발전을 시작한 첫 순간부터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실존에 관한 문제들을 해

    결해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자신

    의 삶을 창작에 바치기로 한 모든 작가들에게 높

    은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더 명확

    한 전달을 위해 여러분에게 우리 영웅의 시적 모

    델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고려인 작가

    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노벨상 수상 작가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를 인용하고자 합니

    다. 자신의 대작 시에서 시인은 독자들과 함께 폭

    넓게 디아스포라 문학의 핵심을 정의하는 중요

    한 단어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굴

    하지 않고 자신만의 의지와 자립을 위해 싸웠던

    러시아 홍길동이 항상 추구했던 «부분에 대한

    찬양», 즉 개인에 대한 찬양을 말입니다.

    오직 재만이 남김없이 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 또한 근시안으로나마

    앞을 내다보며 말하겠다.

    바람이 모든 것을 실어 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없다.

    마당을 널찍이 쓸어도,

    다 쓸려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짓밟힌 꽁초와

    가래침으로 남겨질 것이다.

    벤치 아래,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구석에서

    더러운 것을 껴안고 날을 세며 던져져 있자

    부식토와 침전물과 토양층에서.

    작은 삽을 더럽혀, 고고학자가

    표토층을 찾았을 때

    설사 가래침을 뱉어버린다 해도

    어쨌든 그의 발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