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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연구사 고찰 및 皇權運營과의 관계 분석을 중심으로-

    柳 浚 炯 (高麗大)

    Ⅰ. 序 論

    Ⅱ. 唐代 宦官 문제의 연구현황

    1. 宦官의 政治活動

    2. 宦官 關聯 制度

    3. 宦官의 文化: 世家와 生活

    4. 기존 연구의 傾向과 문제점

    Ⅲ. 唐代 宦官 문제 연구의 再分析

    1. 皇權이 發揮되는 구조의 특성

    2. 唐代 皇權의 施行과 宦官 활

    동의 역할

    3. 唐代 宦官의 활동에 대한 再

    解釋

    Ⅳ. 餘論: 唐朝 皇權의 두 層面

    Ⅰ. 서 론

    중국 역사에서 환관의 출현은 殷代에 이미 확인된다.1) 역사 무대에

    서 의미 있는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漢代부터라 할 수 있으며 後漢시

    기에는 외척과 함께 중앙 정치의 중요 역할을 담당했다.2) 이후 唐과

    明시기에 두드러진 활동 모습을 보였다.3)

    이 중 당대 환관들의 활동 양상은 漢, 明과 비교해 사뭇 다른 특징

    1) 중국에서 환관, 즉 閹人의 출현 시기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 은대 갑골문에 포

    로로 잡은 羌人에 대한 宮刑의 결과를 묻는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杜婉言, 中國宦官史 (臺北: 文津出版社, 1996), pp.9-10.

    2) 呂思勉, 秦漢史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3), pp.296-316.3) Mary M. Anderson, Hidden Power-The Palace Eunuchs of Imperial China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0) 참조.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84이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 趙翼은 “東漢과 明시기 환관의 폐해가 심했

    다. 그런데 (이는) 아직 군주의 권세를 훔쳐 천하에 잔학한 행위를 거

    리낌 없이 하는 것들이었다. 당에서는 환관의 권세가 도리어 군주 위

    에 있어 ‘立君’, ‘弑君’, ‘廢君’함에 아이들 장난과 같았으니 실로 古來에

    없던 변고이다. 재앙의 시초를 따져보면, 모든 것이 환관에게 禁兵을

    장악하고 樞密을 담당하게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4)라고 갈파했다. 이

    에 따르면, 조익은 당대 환관들의 권력이 황제보다 우위에 있기도 했

    음을 지적하며 이를 한, 명대의 환관과 구별되는 당대 환관의 특징으

    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 환관들이 권력 주체로 직접 나서는,

    즉 황위에 직접 등극한 적이 없는 이상,5) 실상 당대 환관 권력 또한

    황제의 권력을 ‘훔쳐’ 사용한 여타 시대의 환관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조익이 ‘立君’, ‘弑君’, ‘廢君’이라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상황

    들을 거론하며 당대 환관의 활동을 서술한 것은 의미 있는 지적이다.

    이처럼 당대 환관 활동이 漢, 明시기와 대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 원

    인에 대해 조익은 권력의 大小 혹은 多寡의 問題를 강조했다. 즉, 禁兵

    을 장악하고 樞密의 직무를 수행하는 등 당대 환관들이 多大하게 양적

    으로 팽창된 권력을 장악했음을 말한다. 이는 현재 학계에서도 당대

    환관 권력의 장기간 유지가 가능했던 이유로 폭넓게 인식되고 있다.6)

    조익의 시각과 인식은 당대 환관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압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당대 환관의 증대된 권력

    4) “東漢及前明宦官之禍烈矣, 然猶竊主權以肆虐天下, 至唐則宦官之權反在人主之

    上, 立君, 弑君, 廢君, 有同兒戱, 實古來未有之變也. 推原禍始, 總由於使之掌禁

    兵, 管樞密”(趙翼, 廿二史箚記 卷20, 唐代宦官之禍使 , 北京: 中華書局, 1984年, p.424; 박한제 역주, 이십이사차기 4, 서울: 소명출판, 2009년), p.316).

    5) 敬宗 이후 7명의 황제가 환관에 의해 옹립되는데 이 과정에서 환관들이 직접

    즉위하려 하거나 異姓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환관

    권력의 속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王壽南, 唐代宦官權勢之硏究 (臺北: 正中書局, 1971), pp.19-144. 이 중 병권의 장악, 구체적으로는 護軍中尉와 監軍使를 통한 실무적 병권 행사는 漢代와

    비교해 달리진 현상으로 그 의미가 크다.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85획득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환관의 활동 문제를 분석할 경우, 특정 분

    야의 권력 장악 여부 및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당대 환관의 활동에 대

    한 이해의 주된 방식으로 자리하게 된다. 예컨대 특정한 권력을 탈취

    한 당대 환관이 한, 명시기의 환관과 비교해 극대화된 권력을 독단적

    으로 향유하고 그것이 당대 환관의 특징이 된다는 논리구조가 형성된

    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대 환관의 활동이 보여준 廣範圍함과 권력의

    肥大함, 혹은 극단적 퇴폐성 등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이를 통해 환관

    의 활동이 갖는 위법성, 불합리성 그리고 비도덕성 등이 강조된다.

    이러한 시각에 기초해 환관 권력의 양적 팽창을 분석한 연구가 갖

    는 학술적 의미는 자못 크다. 특히나 당대 환관들의 활동 상황을 구체

    적으로 복원한다는 측면에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환관의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체현하는데

    매우 적합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배경으로 한 연구들에서

    일정한 한계가 감지된다.

    권력의 양적 팽창에 근거해서 환관의 활동에 대한 현상적인 특징을

    다루는 연구는 漢, 明과 비교해 唐 환관들의 권력 탈취 정도를 파악하

    고 그 특징을 지적하기에는 효과적이지만, 환관의 활동이 갖는 구조적

    특징을 파악하는 데는 난점이 있다. 또한 권력 장악 정도의 차이에 대

    한 주관적인 분석은 종종 논란의 여지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연구 방식은 환관의 활동이 어떠한 배경구조에서 비롯되며 이것이 황

    제를 정점으로 하는 전통시기 국가운영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의 문

    제를 설명하는데 불충분한 면이 있다. 즉, 당대 환관의 활동이 유지되

    고 발전할 수 있었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는데 제한적이게 된다.

    이와 더불어, 기존 연구 방식에 기반한 후발 연구가 지속적으로 추

    진되는데 어려움이 따름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환관의 활동이 야기

    한 폐해를 형상화한다는 선명한 목적성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데는 매우 유용했지만, 연구업적의 일정한 축적 이후에는 후속 연구를

    더디게 하는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고정된 시각으로 이루어진 기존 연

    구에 대한 재해석을 힘들게 했다.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86게다가 한정된 사료는 연구대상, 범위에 대한 절대적 제약을 가했다.

    때문에 당대 환관 문제는 일찍부터 전통시기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았

    으며 근대 역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테마로 인식되어 많은 연구가 이루

    어졌지만, 최근에는 ‘진부한 주제’, ‘연구가 끝난 주제’ 등으로 간주되며

    학문적 의의가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일정부분 중국사학의 전통적 연구주제가 마주하게

    된 보편적 현상일 수도 있다.7) 하지만 이로 인해 환관 문제 연구의 가

    치가 일시적으로 퇴색될 수는 있어도 소멸될 수는 없다. 문제는 내재

    된 역사성을 어떻게 다시 발굴하고 분석하는가에 있다.8) 이를 위해서

    는 새로운 시각과 이해 방법이 절실하다. 이와 관련해 당대 환관 문제

    에 대한 조익의 분석 방식, 즉 역사적 현상에 중점을 둔 접근 방법에

    재검토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상에 대한 파악을 넘어 구조적인 분

    석이 본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Ⅱ. 당대 환관 문제의 연구 현황

    당대 환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시각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은

    우선 기존 연구 상황을 정리, 검토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

    다.9) 이를 위해 당대 환관 문제를 정치, 제도, 문화 3가지 분야로 나누

    7) 鄧小南, 走向“活”的制度史 (浙江學刊 2003-3), pp.99-103.8) 이는 공백의 연구영역을 찾아 내용을 증대하는 평면적 확장의 방식으로는 한

    계가 있으며 학술영역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학술인식상의 반성과 이를 통한

    독창성 확보가 필요가 있다. 包偉民, 走向自覺: 關于深入拓展中國古代制度史硏

    究的機個問題 , 宋代制度史硏究百年 (北京: 商務印書館, 2004), p.3.9) 당대 환관 연구에 대해서는 冷冬의 두 편의 글, 建國以來宦官制度硏究綜述

    (中國史硏究動態 1989-9, pp.9-15), 近四十年來港臺地區宦官史硏究綜述 (中國史硏究動態 1990-12, pp.21-29)이 중국어권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冷氏는 2000년에 二十世紀九十年代中國宦官硏究綜述 (史學集刊2000-3, pp.123-132)을 발표해 최근의 동향도 반영하고 있지만 당대 환관 연구

    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이에 대한 보충으로 張國剛 主編의 隋唐五代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87어서 살펴보자.

    1. 환관의 정치활동

    1) 정치활동의 출현과 유지

    환관 정치에 관한 연구는 관련 연구 중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분야이다. 환관의 득세와 전횡이라는 주제가 당대 환관 연구의 골간을

    이루었고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중, 환관 정치

    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여러 학자들의 주된 관심 사항이었다. 대부분

    의 경우, 환관 정치의 출현을 황제권 강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정치적

    산물로 이해했다. 구체적으로는 환관들이 실제적인 제도 담당자로 활

    동할 수 있었고,10) 재상들의 권력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인 활동을 했다

    고 파악했다.11) 70년대에 王壽南은 이를 종합해, 환관들이 황제의 지지

    를 배경으로 병권과 재정권을 직접 장악해서 外朝의 행정에 관여했고

    급기야는 황위쟁탈에도 참여해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황제 개인이 처한 현실 활동에서의 제약과 환관에 대한 依賴도

    환관 정치의 출현에 일조했다고 강조했다.12) 이러한 시각은 이후에 진

    행된 연구의 기본 틀로 자리했다.

    이와 관련해, 환관 정치가 비록 황권 강화 과정에서 출현했지만, 이

    것이 유지되고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대 昏君의 등장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많았다. 당대 환관 정치가 출현한 초기13) 뿐만 아니라 말

    史硏究槪要 (天津: 天津敎育出版社, 1996, pp.97-100)와 胡戟等 主編의 二十世紀唐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2, pp.59-63; pp.65-66; pp.97-98)을참고할 수 있다. 이외에 松本保宣의 思想の動向 唐代宦官論 -近年の中國人硏

    究者の論說を中心に (立命館文學 562, 1999, pp.584-602)는 일본 내의 연구성과를 포함하고 있다.

    10) 矢野主稅, 唐代宦官權勢獲得因由考 (史學雜誌 63-10, 1954).11) 橫山裕男, 唐の官僚制と宦官 , 中國中世史硏究會 編, 中國中世史硏究 -六朝隋唐の社會と文化- (神奈川: 東海大學出版會, 1970), pp.404-442.

    12) 王壽南, 唐代宦官權勢之硏究 (臺北: 正中書局, 1971), pp.53-111.13) 何敦鏵, 略論中唐前期宦官擅政及其禍害 (學術月刊 1981-3), pp.46-51.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88기까지 이어지는 동안 무능한 군주의 출현이 환관정치의 지속을 가능

    하게 했다는 것이다.14) 昏君의 출현은 단순히 개인적인 능력의 부족함

    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결정된 정책의 과오들이 환관정치

    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고 강조되었다.15)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강하게 제기 되었다. 일부는 특정 황제

    가 환관을 중용한 사례를 분석해 그것이 통치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고려였다고 반박했지만,16) 대개의 경우는 황제의

    개인적 문제 혹은 그로 인해 발생한 정책적 실수만을 주된 원인으로

    보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다양하

    게 강조하는 경향이 주된 내용을 이루었는데, 牛志平은 황제와 재상

    사이의 권력 모순을 기본전제17)로 삼은 뒤 중앙집권제의 강화가 진행

    되는 상황, 외족의 침입 그리고 궁정정변 등의 사건들이 환관정치가

    유지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18) 이중 황제의 재상권력에 대한

    견제 시각은 昏君의 출현을 환관 정치 지속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주된 근거가 되었다.19) 더 나아가, 당대 환관 정치가 지속

    되는 것은 황제와 재상이 권력적 대립을 이루는 봉건적 사회 특징 속

    에서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설명까지 제시되었다.20) 이를 통해 환관 정

    14) 齊陳駿, 陸慶夫, 唐代宦官述論 (中國史硏究 1984-1), pp.21-31. 齊陳駿, 陸慶夫는 더 나아가 환관들을 일종의 사회세력(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을 대표

    한다고 규정짓고, 환관들의 권력장악을 庶族地主土地所有制가 世族地主土地所

    有制를 대체하는 과정이 정치상에 반영된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분석하기도 했

    다.

    15) 宋衍申, 唐代的宦官與皇權 -兼論中國封建社會宦官全權的原因 (東北師範大學學報 1985-5), pp.41-45. 宋氏가 황제의 昏弱함을 인정하면서도 황제와 재상이 연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책 착오에 대한 황제의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고 하는 점은 흥미로운 논설이다.

    16) 劉玉峰, 試論唐德宗重用宦官的原因及其他 (晋陽學刊 1997-5), pp.93-97.17) 牛志平, 略論歷代宦官專權的原因 (人文雜志 1985-5), pp.92-95. 그는 이를

    중국 전체 환관 정치가 출현한 근본 원인으로 분석했다.

    18) 牛志平, 略論唐代宦官 -兼與齊陳駿, 陸慶夫同志商榷 (陝西師範大學學報1985-1), pp.94-99.

    19) 程宗才, 論唐前期內朝對相權的分割及影響 (山東社會科學 1992-1), pp.66-75.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89치의 지속 문제를 황제 개인의 입장문제로 치환해서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하려 했다. 전체상황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內政과 外朝가 상호 견제하는 ‘二元體制’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

    다.21)

    이러한 구조적인 상황을 인지하더라도 당대 환관이 권력을 유지하

    는 상황과 그 원인은 여전히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앞서 조익

    이 강조한 바와 같이 환관에 의한 군권 장악은 당대의 특징적 상황이

    었기 때문에 이를 좀더 세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결과,

    환관이 군권을 장악하게 되는 시기를 李輔國이 활약한 玄宗시기로 끌

    어올려 그가 병부상서로 임명되는 것을 기점으로 환관세력은 무력을

    자신의 배후기제로 삼았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다.22) 또 현종시기부터

    환관들이 唐軍의 주력 구성인 기병을 지탱하는 馬政을 장악했다는 점

    도 지적되었다.23) 이와 관련해 樊文禮는 당초 이래로 빈번하게 발생했

    던 궁정정변과 天寶年間의 안사의 난이 환관들의 군권장악을 위한 조

    건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즉, 전자에 의해서 諸王 및 駙馬들이 병권

    을 잃게 되고 후자에 의해서는 文武大臣, 특히 무신들이 군사적 신임

    을 상실했기 때문에 환관들이 군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24) 이처럼

    환관 정치의 유지원인을 군권 장악과 연관지어 사고하고 시기적으로

    현종대를 유의미하게 파악하는 시각은 이후 연구자들에게서 많은 호응

    을 받았다.25)

    20) 黃永年, 唐代的宦官 (文史知識 1987-4), pp.16-22.21) 何燦浩, 試論唐代中後期君主對宦官之策的特點及其原因 (寧波師範學院學報

    1992-1), pp.1-8. 그는 군주의 환관 정책은 사실상 이원체제의 유지를 위한노력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22) 馮輝, 論唐代的宦官政治 (求是學刊 1987-4), pp.79-84.23) 馬俊民, 唐代宦官專權與北軍, 馬政的關係 (河北大學學報 1987-4), pp.115

    -120.

    24) 樊文禮, 唐代宦官典禁軍原因試探 (烟臺師範學院 1987-4), pp.79-84.25) 章翊中, 唐玄宗時期宦官權勢形成原因初探 (南昌職業技術師範學院學報

    1995-2), pp.40-45; 張文斌, 唐代後期宦官攬權幹政之契機探析 (常德師範學院學報 2002-1), pp.78-81.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90이외에도 환관 개인의 정서적인 불완전성과 불우한 가정배경 등을

    분석해 환관 정치의 지속을 신체적 결손을 갖고 있는26) 환관집단의

    변태적 심리상태에 의한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설득력이 약해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27)

    2) 정치활동의 발전 과정

    환관 정치가 출현해 唐末까지 발전해가는 과정은 어떠했는가?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현상적인 이해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으로 관련 연

    구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당 환관 정치 문제가 역사적 상황

    으로 인식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다. 司馬光은 일찍이 “환관의 禍는 현종시기에 시작되어 숙종, 대종시

    기에 성했다가, 덕종시기에 완성되었고, 소종시기에 극에 달했다”28)고

    묘사했다. 이는 당대 환관 정치의 발전 과정을 선명하게 잘 요약한 것

    으로 최근에까지 널리 채택되고 있다.29) 그러나 비록 현종시기가 당

    환관 정치 발전의 중요한 시기라 하더라도 그 이전의 발전 상황이 무

    시될 수는 없다. 때문에 환관 세력의 내재적 발전을 이루는 무측천시

    기가 주목되기도 했다.30)

    26) 당대 환관이 모두 거세당한 남성인가에 대한 의문이 최근에 설득력 있게 제

    기되기도 했다. 嚴輝中, 唐代中後期內侍省官員身分質疑 (史林2004-5),pp.77-81.

    27) 山昌嶺, 張安福, 宦官專權原因的社會心理學分析 (濟寧師專學報2001-2),pp.65-67; 張安福, 張弘, 宦官專權的心理動因初探 (臨沂師範學院學報2004-2), pp.98-101; 顧蓉, 宦官人格及其心理行為結構 (社會科學戰線1992-3), pp.140-148, p94.

    28) “宦官之禍, 始於明皇, 盛於肅代, 成於德宗, 極於昭宗”, 資治通鑑 卷263, 昭宗天複三年, p8598.

    29) 王守棟, 唐代宦官政治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9). 王氏는 전적으로사마광의 시각에 근거해 책을 구성했다. 이는 구성방식의 진부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마광의 견해가 갖는 유용함을 말해준다. Mary M. Anderson

    의 前揭書도 마찬가지이다.

    30) J. K. Rideout, “The Rise of the Eunuchs during the T’ang Dynasty”, AsiaMajor, new series, Vol.Ⅰ, 1949, pp. 53~72; Vol. Ⅲ, 1952, pp. 42~58.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91결국, 각 조대별 환관의 구체적인 활동 모습이 중요하게 되는데, 王

    壽南은 환관의 정치적 활동을 황제의 在位 시대별로 나누어 정리했다.

    그는 태종의 환관 억제책이 보여준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현종

    시기를 환관 정치의 맹아기로 규정했다. 이는 전통적 시각과 크게 다

    르지 않는 수준의 분석이지만, 여기에 당 후기 상황에 대한 검토를 통

    해 환관 정치의 발전 과정을 지방번진의 興衰와 연관짓는 진일보한 설

    명을 첨가했다.31) 王氏의 견해는 큰 비판없이 이후 연구자들에게 받아

    들여졌다. 이에 덧붙여 牛志平은 환관의 種族問題나 反宦官運動 등을

    포함한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구체적인 설명32)을 가했고 馬良懷는 당

    대 환관의 활동에 대한 시대적 구분에 새로운 의미를33) 부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 전체시기를 시야에 둔 고찰은 특정 황제시기나 개별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소략해지는 맹점이 존재한다. 이를 보완할 수 있

    는 연구로, 福澤宗吉은 憲宗시기에 한정지어 환관 정치가 확대되는 양

    상을 분석했다.34) 또 李文才는 會昌 연간의 廢佛事件을 중심으로 武宗

    시기 환관 정치의 발전 모습을 고찰했고35) 凍國棟, 黃樓는 금석문을

    적극 활용해 宣宗시기 환관 정치와 大中政局의 미묘한 변화를 설명했

    다.36)

    환관 정치의 발전 과정을 당 전체 시기 혹은 특정 황제의 시기로

    31) 王壽南, 앞의 책, pp.53-111.

    32) 牛志平, 唐代宦官 (史念海 主編, 唐史論叢 5輯, 西安: 三秦出版社, 1990),pp.50-96.

    33) 馬良懷, 唐代宦官考述 (廈門大學學報 1989-4), pp.37-43. 馬氏는 당 전체를 4단계로 나누어, ①‘宮闈侍從(당초~현종)’단계, ②‘假人主之權(현종~대종)’단

    계, ③‘參軍,參政制度化(덕종~희종)’단계, ④‘衰亡(소종)’단계라고 했다.

    34) 福澤宗吉, 唐代憲宗朝の宦官について (熊本大學敎育學部紀要 6號, 1958),pp.151-160.

    35) 李文才, 簡論會昌時期的宦官 (史學集刊 2002-1), pp.30-34. 李氏는 폐불의성공과 실패가 환관의 태도 변화에 있었다고 지적해 환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36) 凍國棟, 黃樓, 唐宦官集團與大中政局 (武漢大學學報 2005-4), pp.32-37.凍氏 등은 환관 정치의 盛弱은 황제 권력의 공고함에 반비례해 나타난다는 시

    각을 견지해 大中政局을 분석했다.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92나누어 분석하는 것 이외에 특정 제도 혹은 정치권력에 대한 환관 정

    치의 발전 모습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한 차원 발전된 연구도 진행되

    었다. 이것은 주로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방식으로 감찰제도 분야에서

    의 환관 정치의 발전 과정이 거론되었다. 胡滄澤은 환관들이 특정 권

    력을 잠식해 간다는 단선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어사대와 환관과의 권

    력투쟁을 상호간의 부침이 존재하는 입체적인 것으로 규명했다. 이후

    의 연구들이 환관들의 권력탈취37)와 감찰권의 약화38)에만 집중한 것

    에 비해 胡氏의 연구는 보다 객관적이고 복합적인 시각을 견지하려 했

    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관련 연구가 대개 환관의 권력 침탈 문제

    에 초점을 맞춰진 것은 아쉽다. 예를 들어, 張艶雲은 사법 분야에서 환

    관이 大理寺, 御史臺, 刑部의 사법권을 농락하는 과정에 집중해 환관의

    당후기 법률제도의 파괴모습을 지적했다.39) 동일한 시각에서 宰相의

    議政權과 行政權에 대한 환관의 장악이 설명되기도 했다.40) 이외에 黃

    樓는 황위계승권에 대한 환관의 영향력을 시기별로 나누어 분석적으로

    서술했지만 권력침탈이라는 단선적인 시각41)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42)

    특정 제도와 관련해서는 송대에도 출현하는 ‘宮市’문제가 다루어졌다.

    朝官에서 점차 환관으로 관리 주체가 바뀌는43) 궁시는 ‘非官非商’의 특

    수한 기구를 바탕으로 시행되었는데44) 官府의 官用구매량이 증대하면

    서 이를 장악한 환관이 得勢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45)

    37) 劉長江, 中晩唐監察制度與宦官專權 (山東師範大學學報 2002-5), pp.96-108.

    38) 靳陽春, 論唐宦官對監察權力的弱化 (武漢理工大學學報 2005-1), pp.91-94.39) 張艶雲, 論唐中後期的宦官參預司法 (陝西師範大學學報 2001-3), pp.137

    -142.

    40) 王守棟, 王瑞, 論唐代宦官權勢與相權的削長 (德州學院學報 2004-1), pp.74-77.

    41) 張文斌, 唐代後期宦官與皇位繼承權之爭 (湖南大學學報 2002-6), pp.54-59.42) 黃樓, 中晩唐宦官政治硏究 (武漢大學博士學位論文, 2009).43) 李東, 唐代‘宮市’之補證 (安徽史學 1986-3), pp.75-76.44) 張艶雲, 唐代‘宮市’考 (陝西師範大學學報 1989-3), pp.59-62.45) 寧欣, 內廷與市場: 對唐朝‘宮市’的重新審視 (歷史硏究 2004-6), pp.41-53.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93

    3) 환관과 기타 세력들 사이의 관계문제

    앞서 환관 정치의 전개 상황을 살핌에, 그 세부적 양상으로서 특정

    권력 분야 혹은 제도 내 환관의 활동에 대한 분석을 추적해 보았다.

    만약 이것을 특정 권력의 施行者 혹은 제도의 운영자를 기준으로 분류

    해 보면, 곧 환관과 외조 관료 세력 간의 관계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환관과 외조 관료간의 관계문제는 橫山裕男의 경우처럼 황제가 외

    조 관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을 등용했다는 시각을 배경으로 한

    다. 이것은 황제-환관의 관계를 利害가 일치하는 단일한 관계로 전제

    하고,46) 환관과 관료들 간의 대립관계를 전통적 입장에서 파악했다. 한

    편 陳寅恪은 환관과 관료와의 관계문제를 황제와의 관련성에서 물러나

    다소 개별적인 것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외조 관료들의 환관세력에

    대한 의존성을 확인했고, 외조 관료의 당파 문제가 내조 환관 세력들

    의 권력 離合과 同調된다고 지적했다.47) 陳氏의 견해에 대해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가한 비판도 있었지만,48) 王壽南

    등은 크게 긍정했고, 외조 관료들의 ‘南衙’가 환관 ‘北司’에 갖는 依附

    性이 재차 강조되었다.49)

    그러나 陳氏의 지적은 일종의 경향성 혹은 관계 양상을 분석한 것

    으로 구체적인 사실로 접근하면, 실제 다양한 사례들이 포착된다. 이와

    관련해 翰林學士와 환관의 복잡한 관계는 그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袁剛은 한림학사들이 황권을 유지한다는 입장에서 환관 정치의 발전에

    46) 馬良懷, 唐代宦官與皇帝關係考論 (華中師範大學學報 1987-5), pp.61-67.47) 陳寅恪, 唐代政治史述論稿 (北京: 三聯書店, 2001), pp.236-320.48) 馬良懷, 唐代宦官與士大夫之關係 (士人 皇帝 宦官, 長沙: 岳麓書社, 2003),

    pp.260-274. 馬氏는 ①외조 관료의 파벌이 환관 정치가 발생하기 이전에 형성

    되었다는 점, ②환관 집단 내부에서 파벌형성의 필요성이 적었다는 점, ③외조

    관료가 주동적으로 환관과의 유착을 시도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오히려

    사대부의 파벌투쟁이 환관 집단 내부의 분파투쟁을 규정지었다고 주장했다.

    49) 王守棟, 論唐中後期南衙對北司的依附 (哈爾濱學院學報 2003-9), pp.102-105.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94대한 억제태도를 취했다50)고 한 반면, 趙雨樂은 翰林學士院使의 설치

    는 한림학사가 환관들의 통제력이 미치는 범위에 하에 놓였음51)을 보

    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복잡한 관계 문제는 환관과 관료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대

    한 분석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黃永年은 현종시

    기 재상 李林甫, 楊國忠과 환관 高力士와의 정치 투쟁 과정을 복원해

    그들 사이에 형성된 유착관계를 구성해냈다.52) 환관과 재상 사이의 유

    착관계는 종종 특정 관리를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王

    炎平은 李德裕의 예를 들어 긴밀한 관계가 곧바로 從屬을 기반으로 한

    依附關係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53) 蔣凡 역시 유사한

    논리로 韓愈에 대해서 한유가 비록 환관 俱文珍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

    었지만 환관들에게 완전히 결탁된 것이 아니라 反宦官의 태도를 保持

    했다고 설명했다.54) 元稹과 환관 仇士良, 魏弘簡, 崔潭峻 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이 이용되었다.55) 廬向

    前은 李訓, 鄭注와 환관 王守澄, 仇士良 등 다자간에 얽힌 관계에 대한

    50) 袁剛, 唐代翰林學士反對宦官專權的鬪爭 (山東大學學報 1989-2), pp.111-116.

    51) 趙雨樂, 唐代翰林學士院與南北司之爭 (唐都學刊 2001-1), pp.27-33.52) 黃永年, 唐玄宗朝姚宋李楊諸宰相的眞實面貌 -兼論李楊與宦官高力士之爭 (

    中國史硏究 2003-2), pp.79-92. 이중, 馬嵬驛事件의 전개과정에서 고력사가 보여준 충성도 높은 태도는 황권유지를 위한 환관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53) 王炎平, 辨李德裕與宦官之關係 (中國唐史學會 編, 唐史學會論文集, 西安:陝西人民出版社, 1986), pp.176-194. 王氏는 이덕유가 환관 楊欽義를 款待하기

    했지만 이는 당시의 관례에 따른 행위였지 高官을 얻기 위한 부정한 방식이

    아니였고, 정작 이덕유 자신은 환관에 대한 억제책을 줄곧 주장했다고 설명했

    다.

    54) 蔣凡, 韓愈與宦官 -讀‘送汴州監軍俱文珍序’札記 (學術月刊 1980-1),pp.50-54. 蔣氏는 한유가 비록 柳宗元에는 못미치지만 反宦官 정서가 있었으며

    사료를 통해 볼 때, 환관과의 ‘疏附' 관계를 확인하기 힘들다고 했다.

    55) 吳偉斌, 元稹與宦官 (蘇州大學學報 1986-1), pp.50-55. 吳氏의 최근 專著(元稹考論, 鄭州: 河南人民出版社, 2008) 중, 상당 부분(pp.1-132)을 할애해元稹와 宦官의 관계를 같은 시각에서 상세히 검토했다.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95추적을 시도하기도 했다.56) 이러한 사례들은 환관과 재상, 혹은 관료

    사이에 依附關係로 한정되지 않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환관과 외조 관료 사이의 광범위한 관계형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환관과 외조 관료들 사이의 대립적 관계는 ‘甘露之變’을 통해서 극명

    하게 드러났다. 이 사건에 대해 일부에서는 李訓 개인에 초점57)을 맞

    춰 권력욕이 표출된 사건58)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관세

    력 제거를 위해 文宗의 후원을 받은 외조 관료들에 의해 주도된 사건

    으로 파악하고 있다.59) 때문에 이는 南衙와 北司의 장기간 대립60) 속

    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으며,61) 이는 개원 연간

    의 태평성세를 회복하고자 하는 혁신운동으로 간주되었다.62) 그러나

    감로지변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외조 관료들 사이

    의 불화63)를 포함한 전략상의 문제점이 일반적으로 거론되었지만,64)

    56) 廬向前, 李訓鄭注矛盾與甘露之變 -甘露事件硏究之二 (文史 56輯, 2001),pp.91-105. 감로지변이 발발하기 전, 이훈과 정주 사이에 형성된 갈등관계가

    환관 왕수징과의 관계로 격발되고 구사량과의 관계로 화해하게 된다고 지적했

    다.

    57) 董萬斌은 당시 劉禹錫, 白居易, 杜牧 등 조야의 사인들이 李訓, 鄭注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주장했고( 唐人看甘露之變 , 中華文史論叢 1981-1, pp.105-106) 廬向前은 “惜訓惡注”의 현상을 인정하고 이훈과 정주 사이의

    出身, 進仕 등의 차이를 분석했다( “惜訓惡注”與時人心怠 -甘露事件硏究之三 ,

    榮新江 主編, 唐硏究,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0, pp.233-254).58) 賈憲保, “甘露之變”剖析 (史念海 主編, 唐史論叢 3輯, 西安: 陝西人民出版

    社, 1987), pp.138-156.

    59) 衡山欲男, 甘露の變始末 -唐代政治史の一齣 (長崎大學紀要 5號, 1975),pp.89-99; 何燦浩, “甘露之變”性質的探析 (寧波師院學報 1990-1), pp.1-10;田廷柱, 唐文宗謀翦宦官與甘露之變 (遼寧大學學報 1992-4), pp.94-98; 雷巧玲, “甘露之變”發微 (陝西師範大學學報 1995-3), pp.68-73.

    60) 曾我部靜雄, 唐の南衙と北衙の南司と北司への推移 (史林 64-1, 1981),pp.37-58.

    61) 王素, “甘露之變”是怎麽回事 (文史知識 1987-4), pp.116-120.62) 劉運承, “甘露之變”再評價 (史林 1986-1), pp.22-29.63) 胡如雷, 試論唐朝“甘露之變”中文宗和“南衙”朝官失敗的主要原因 (朱雷 主編,

    唐代的歷史與社會, 武漢: 武漢大學出版社, 1997), pp.59-67.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96환관과의 관계에서 외조 관료들이 갖고 있던 공포심 또한 중요한 원인

    이었다65)고 지적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의 관료들 이외에, 앞서 王壽南이 지적한 바 있는 지

    방의 번진세력과 환관의 관계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傅樂成의 연구가 대표적인데, 그는 번진과 환관의 관계를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의 관계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부정했다. 번진은 환관에

    의지해 그 할거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환관은 번진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중앙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고 했

    다.66)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何燦浩는 환관과 번진의 관계 변화에

    주목해 당 말기 환관 세력이 약화되는 것은 번진들의 反宦태도에 기인

    한 것이라고 보충했다.67) 환관과 번진의 관계문제는 중앙과 지방 사이

    에 존재하는 의존과 대립의 문제를 조망하는 하나의 시각으로써도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외조 관료는 아니지만, 당 초기에 엄연히 존재했던 궁정 내 宮

    官세력과 환관 간의 관계 상황이 趙雨樂에 의해 조명되기도 했다.68)

    2. 환관 관련 제도

    64) 湯承業, 論李訓所以敗於仇士良 -甘露之變的檢討 (食貨月刊 3-7, 1973);馬漸軍, 略論甘露之變 (鄭學檬, 冷敏述 主編, 唐文化硏究論文集,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4), pp.475-481.

    65) 王壽南, 唐代人物與政治 (臺北: 文津出版社, 1999), pp.212-235.66) 傅樂成, 唐代宦官與藩鎭之硏究 (大陸雜誌 27-6, 1963), pp.228-234. 傅氏

    는 당 말기의 정치를 환관과 번진의 合作이라고 지적하고 이로 인해 환관과

    번진의 세력이 당 말기로 갈수록 더욱 성했다고 설명했다.

    67) 何燦浩, 唐末政治變化硏究 (北京: 中國文獻出版社, 2001), pp.247-265. 何氏는 光啓 初年부터 번진들의 反宦태도가 표출되어 점차 환관의 지위가 孤立化

    되는 형국이 조성되었고, 이것의 결과로 환관세력이 제거된다고 했다.

    68) 趙雨樂, 從宮官到宦官: 唐前期內廷權力新探 (九州學林, 上海: 復旦大學出版社, 2004), pp.41-73. 趙氏는 武后와 韋后의 등장로 궁관들의 활동이 증가되

    자 환관들과의 대립상황이 초래되었으며, 현종 대에 이르러 ‘中宮政治’가 와해

    된 후 환관의 득세가 시작되었다고 분석했다.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97당대 환관 정치가 출현해서 발전해 가는 과정에 관한 연구 현황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환관(들)과 다른 정치 세력(들) 사이에 다양

    한 관계가 설정되고 또 변화했음을 관련 연구의 지적을 통해 확인했

    다. 이에 대해 좀더 분석적으로 접근해 보면, 과연 당대 환관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어떠한 제도적 뒷받

    침이 이용되었는가 등의 문제가 상정된다. 이것은 환관 정치의 발전

    기제에 관한 물음이기도 한데, 환관에 대한 그리고 환관에 의한 제도

    가 그 핵심이 된다. 이는 구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환관 자신을 대상으로 한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환관

    자신이 담당한 제도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 직무 내용에 따라 다시 內

    諸司使와 여타 관직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환관의 편제기제

    唐은 內侍省을 설치해 황제를 시봉하는 환관제도를 구성했다. 그 세

    부 내용은 新, 舊唐書, 唐六典, 通典, 冊府元龜 등의 직접적인기록이나 이들의 재분석69)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환관이 담당한 관직의 일부와 환관 집단의 편제 및 하부조직에 관한

    내용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각종 사료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室永芳三의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史書에

    散在되어 있던 宦官 ‘高品’, ‘品官’, ‘白身’의 운영 모습을 확인해 내시성

    관직제도와 함께 운영되었던 品階 중심의 편제방식을 복원했다.70) 더

    나아가 正史에서 설명을 찾아 볼 수 없는 환관조직인 ‘內養’의 집단적

    존재를 포착했다. 하지만 사료의 불충분한 수집으로 인해 내양의 운영

    과 성격을 심도있게 규명하지는 못했다.71) 이에 대해 내양을 황제와

    69) 杜文玉은 사서 기록의 재구성을 통해 환관의 봉록 상황을 복원했다. 杜文玉,

    唐代宦官俸祿與食邑 (唐都學刊 1998-2), pp.26-31.70) 室永芳三, 唐代內侍省の宦官組織について -高品層と品官、白身層- (日野開三郞頌壽紀念論集, 中國書店, 1987), pp.339-352.

    71) 室永芳三, 唐末內侍省內養小論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43號,1991), pp.1-9.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298밀접한 관계를 맺는, 충성도 높은 특수 집단으로 파악하고 이들의 활

    동이 황권의 운영에 일부였음이 보충되었다.72) 이외에 室永芳三은 당

    말기 左、右護軍中尉, 樞密使, 宣徽使 등 이른바 ‘四貴’로 지칭되는 고

    위급 환관들이 대부분 ‘知內侍省事’를 帶任한 사실에 근거해, 현종시기

    에 출현하는 ‘知內侍省事’가 이후 환관 관제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했다고 주장했다.73) 비록 이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지만,74) 이제까

    지 간과되던 ‘知內侍省事’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이와 같은 환관 집단 내 새로운 직함과 조직의 출현은 환관의 수량

    증가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환관 규모의 확대 趨向은 자연스레

    집단의 하부조직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지만 관련 사료의 부족으로

    실제 내용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趙雨樂은 金文과 考古學的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이른바 北衙의 세부조직이 藩鎭의 使府와 유사함

    을 밝혀 관련 연구의 부재상황을 개선했다.75)

    2) 환관의 활동기제

    환관의 활동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현종 시기부터이

    다. 당시 唐朝는 무측천 집권시기 이래로 형성된 새로운 제도변화의

    흐름, 즉 使職의 빈번한 출현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환관의 활

    72) 柳浚炯, 試論唐代內養宦官問題 (袁行霈 主編, 國學硏究 26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10), pp.27-43.

    73) 室永芳三, 唐內侍省知內侍省事(上)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38號,1989), pp.1-10; 唐內侍省知內侍省事(中)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39號, 1989), pp.1-10; 唐內侍省知內侍省事(下) (長崎大學敎育學部社會科學論叢 40號, 1989), pp.1-7.

    74) 室永氏는 知內侍省事의 관제적 성격에 집중한 나머지 知內侍省事가 갖고 있

    는 差遣적 성격을 간과해 이를 설치 초기부터 實職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

    하는 誤를 범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知內侍省事의 기능을 직무 분야의 分工

    으로 보는 것은 역사사실에 그릇된 설명이다. 柳浚炯, 唐代‘知內侍省事’考論

    (國際中國學硏究 14號, 2011), pp.121-146.75) 趙雨樂, 唐代宦官機構衙署考 (成功大學中國文學系 主編, 第四届唐代文化學術硏討會論文集, 臺北: 成功大學出版社, 1999), pp.621-635.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299동이 확대되는 것 또한 이러한 제도적 변화의 흐름을 타고 진행되었

    다. 이는 환관의 활동이 사직을 통해서 실현됨을 말하는 것인데, 환관

    에 의해 수행된 사직은 그 직무 내용에 따라 소위 內諸司使와 기타로

    나뉠 수 있다.

    (1) 內諸司使

    내제사사는 관련 사료가 散在해 있다는 특징으로 인해 연구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다가 80년대에 들어 唐長孺의 연구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76) 唐氏는 15개의 환관 사직을 새롭게 발굴해 각각의 운영

    모습을 대략적으로 살폈다. 비록 전체 내제사사의 규모에 비추어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환관사직을 다루었지만, 선구적 연구로 손색이 없다.

    또한 북송 무관의 寄祿官에 대한 연원을 확인했다는 데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唐氏의 연구는 주목받지 못하던 환관의 활동에 내재된 제도적

    기제를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의 관련 연구들이 이를 기초로

    새로운 內諸司使 발굴에 진력했다.

    그중 趙雨樂의 연구가 대표적인데, 총 35개의 내제사사를 찾아내 직

    무의 내용별로 분류하고 그 운영 모습을 분석했다.77) 杜文玉은 당대의

    비문과 記室備要의 내용을 종합해 다시 9개 내제사사의 명목을 추가했다.78) 이처럼 새로운 내제사사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최근까

    지도 꾸준하게 추진되고 있다.79) 확인된 내제사사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이들을 분야별로 나누어 이해하거나80) 궁궐 내부의 특수한 지리

    적 상황을 고려해 특정 사직들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파악하려는 시

    76) 唐長孺, 唐代內諸司使(上) (魏晋南北隋唐史硏究 第5期, 武漢: 武漢大學出版社, 1983), pp.1-11; 唐代內諸司使(下) (魏晋南北隋唐史硏究 第6期, 武漢:武漢大學出版社, 1984), pp.1-9.

    77) 趙雨樂, 唐代における內諸司使の構造 (東洋史硏究 50-4, 1992), pp.116-163.

    78) 杜文玉, 唐代內諸司使考略 (陝西師範大學學報 1999-3), pp.27-35.79) 趙冬梅, 唐宋諸使機構職掌考 (袁行霈 主編, 國學硏究 16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0), pp.275-327.

    80) 賈艶紅, 談論唐中後期的內諸司使 (齊魯學刊 1997-4), pp.103-106.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00도81)들도 이루어졌다. 내제사사는 점차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어 나갔

    고 초보적이나마 이들 사이에 等次秩序도 형성되었다.82)

    내제사사 중 일부는 개별적 사직의 중요성으로 인해 독립적인 연구

    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내제사사라는 범주화된 틀에서 존재의미가 부

    각되었다기보다는 각각의 분야별로 수행하던 역할이 확대됨에 따라 그

    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경제 분야의 內莊宅

    使,83) 종교 분야의 功德使,84) 군사 분야의 閑廐使85) 등이 이에 해당된

    다. 이들 사직이 내제사사 시스템 내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했던 것과

    달리 樞密使와 宣徽使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당 후기 궁궐 내 환

    관 권력의 핵심으로 이해된 추밀사86)는 설치시기의 불명확함87)으로

    인해 초기부터 많은 논쟁이 있었다.88) 御前會議에도 참가했던 추밀

    사89)가 황제의 주변에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최근에는 단순한 문서(王言) 전달에 한정된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상

    반된 견해90)가 제시되었다. 추밀사의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

    81) 王靜, 唐大明宮內侍省及內使諸司的位置與宦官專權 (侯仁之 主編, 燕京學報 16期,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4), pp.89-116.

    82) 柳浚炯, 試論唐五代內職諸使的等級化 (史學集刊 2010-3), pp.107-117.83) 加藤繁, 唐宋時代の莊宅使 (史學雜誌 30卷5期, 1919). 中譯文이 吳傑譯,

    中國經濟史考證 1卷 (北京:商務印書館, 1959), pp.209-225에 수록되어 있다.84) 湯一介, 功德使考 (文獻 1985-2), pp.60-65.85) 寧志新, 唐朝的閑廐使 (中國社會經濟史硏究 1997-3), pp.7-36.86) 李鴻賓, 唐代樞密使考略 (文獻 1991-3), pp.82-91; 戴憲群, 唐代的樞密使

    (中國史硏究 1998-3), pp.82-91.87) 연구 초기에 ‘永泰年間說’과 ‘元化年間說’ 두가지로 나뉘어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袁剛이 樞密職의 출현과 樞密使의 설치를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시

    각을 제기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袁剛, 唐代的樞密使 (山東敎育學院學報1994-3), pp.68-76.

    88) 矢野主稅, 樞密使設置時期について (長崎大學藝學部人文社會科學硏究報告 3號, 1953), pp.27-32; 同氏, 唐代樞密使制の發展 (長崎大學藝學部人文社會科學硏究報告 4號, 1954), pp.41-49; 賈憲保, 唐代樞密使考略 (史念海 主編,唐史論叢 2輯, 西安: 陝西人民出版社, 1987), pp.215-227.

    89) 松本保宣, 唐王朝の宮城と御前會議 (京都: 晃洋書房, 2006), pp.189-191.90) 劉后濱, 唐代中書門下體制硏究 (濟南: 齊魯書社, 2004), pp.296-300; 李全德,

    唐宋變革期樞密院硏究 (北京: 國家圖書館出版社, 2009), pp.78-83.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01진한 부분이 많다. 선휘사는 내제사사 시스템의 관리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추밀사와 함께 황제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면

    서91) 환관 정치의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92)

    (2) 기타 관직: 神策護軍中尉, 監軍使

    앞서 언급한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당대 환관 정치가 발전할 수 있

    었던 결정적 원인 중 하나로 軍權의 장악을 꼽을 수 있다. 군사 분야

    에서 환관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요약되는데 神策軍護軍中

    尉와 監軍使가 그것이다.

    감군사에 대한 초기 연구는 대개 제도의 정치적 평가 문제에 집중

    했다. 즉, 환관의 監軍權 장악이 초래한 위법적 현상과 그로 인한 國政

    의 어려움이 토론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자연스레 환관

    감군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양산했고93) 당의 멸망 원인 중 하나

    로 간주되었다.94) 반면, 矢野主稅는 헌종시기를 예로 들어 감군사의 활

    동이 지방 군사 반란들을 진압하는 등 중앙집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

    었다고 주장했고,95) 동일한 맥락에서 張國剛은 감군사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을 상세히 복원하고 당 후기 중앙과 지방 번진 사이의 연락

    관계가 강화되는데 감군사가 끼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96) 이

    91) 友永植, 唐宋時代の宣徽使について (北大史學 18期, 1978), pp.60-80.92) 王永平, 唐代宣徽使 (中國史硏究 1995-1), pp.73-79.93) 송대 王安石은 환관이 감군을 한다는 것 자체가 唐의 종말적 弊事라고 비판

    했고(續資治通鑑長編 卷273, 熙寧9年2月條, 北京: 中華書局, p.6675), 王夫之또한 환관의 감군은 당의 큰 폐해라고 지적했다(王夫之, 讀通鑑論 卷21, 中宗 , 北京: 中華書局, 1975年, p.732). 趙翼은 환관에 의한 감군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단정지었고(趙翼, 廿二史箚記 卷20, 中使出使及監軍之弊 , 北京:中華書局, 1984, p428), 범문란은 玄宗이 만들어낸 악례라고 강조했다(范文瀾, 中國通史 3冊, 北京: 人民出版社, 1978, p.175). 감군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전통시대부터 등장해 현재에까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王壽南, 唐代宦官權勢之硏究 (臺北: 正中書局, 1971), pp.76-81 참조.

    94) 齊陳駿, 陸慶夫, 唐代宦官述論 (中國史硏究 1984-1), pp.21-31.95) 矢野主稅, 唐代監軍使制の確立について (西日本史學 14號, 1953), pp.16

    -32; 唐末監軍使制について (社會科學論叢 7號, 1957), pp.17-25.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02러한 시각의 연장으로 일부에서는 심지어 감군사 폐해의 책임소재를

    회피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97) 비록 감군사가 수행했던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감군사가 초래한 폐해들이 부

    정되거나 축소될 수는 없다는 의견도 팽팽히 맞섰다.98) 환관 감군사에

    의한 뇌물수수 등의 불법행위와 弄權행위가 당 중후기 정치상황에 끼

    친 해가 막대했기 때문이다.99) 감군사의 평가에 대해서는 향후 다각적

    인 검토가 필요한데, 이중 張氏에 의해 진행된 제도사적 연구는 감군

    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감군사가 지방 군사 분야에서 권한을 행사했던 것과 달리 神策軍護

    軍中尉는 안사의 난 이후 부병제의 와해 속에서 禁軍이자 중앙군의 역

    할을 한 신책군의 권력을 장악했다. 신책군은 일개 지방군으로 설치되

    었다가 대종시기 魚朝恩을 계기로 환관과의 관계가 생겼고 덕종시기에

    左右神策軍護軍中尉가 설치된 후에는 환관에 의한 통제가 제도화되었

    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호군중위에 관한 초기 연구는 神策軍 연구

    의 일부로 시작되었고,100) 관련 연구들은 환관 정치가 시행되는 과정

    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神策軍이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음을

    지적했다.101) 환관들이 護軍中尉를 통해 禁軍을 장악하는 것은 매우

    특수한 현상으로, 이는 당대 황제의 자기부정으로 인식되기도 했지

    만102) 당시 황제가 신뢰하는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의미에서 환관

    96) 張國剛, 唐代監軍制度考論 (中國史硏究 1981-2), pp.120-133.97) 段希祥, 王芬, 試論唐代宦官監軍制度 (臨沂師專學報 1999-10), pp.76-78.98) 張學軍, 張生三, 略論唐代宦官監軍之弊 (南都學壇 1989-3), pp.98-100.99) 何敦鏵, 唐代宦官集團勢力及其在藩鎭監軍的影響 (中國唐史學會 編, 中國唐

    史學會論文集, 西安: 三秦出版社, 1989), pp.58-71.100) 小畑龍雄, 神策軍の成立 (東洋史硏究 18-2, 1959), pp.151-172; 齊勇鐸,說神策軍 (山西師範大學學報 1983-2), pp.94-102.

    101) 王壽南, 같은 책, pp.53-70; 黃修明, 唐代神策中尉考論 (天津師範大學學報 2002-6), pp.29-36; 王守棟, 唐代神策軍中尉考 (德州學院學報 2003-1),pp.65-68.

    102) 巴新生, 唐代禁軍組織的演變與宦官典禁軍制度 (天津師專學報 1984-2),pp.55-61.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03의 호군중위 임명은 再考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103). 한편,

    神策軍은 지방군제도의 변화과정에서 자체적인 발전을 이루며 중요성

    이 제고되었지만,104) 중앙 금군으로 확대되어 막대한 군사력을 영위하

    게 되는 과정에서는 환관 호군중위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음이 지적되

    었다.105) 이것은 宮廷防衛라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환관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조건이 활용되었다고 언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

    다.106) 게다가 唐末 僖宗, 昭宗시기 신책군 조직이 54都로 확대 개편되

    는 것도 宦官 田令孜의 주도하에 추진된다는 사실도 강조되었다.107)

    결국 대개의 경우, 환관은 신책군을 기반으로 군사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신책군은 환관의 관할 하에 제도적 발전과 도약을 이루었

    다는 시각에서 환관과 신책군의 의미를 분석했다.

    3. 환관의 문화: 世家와 生活

    환관의 제도와 관련된 연구가 일정정도 성과를 거둔 후, 근래에는

    환관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다. 이는 환관이 가지고

    있는 관료적 속성108)이 널리 인식되고, 환관 묘지명이 지속적으로 발

    굴되는 최근의 상황과 연관성이 있다.

    환관의 관료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관료시스템 내 환관의 역할을

    公認하는 것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는 관료의 한 부분으로서 환관을

    103) 孫亞平, 論神策軍 (蘭州敎育學院學報 1985-1), pp.65-79.104) 何永成, 唐代神策軍硏究 -兼論神策軍與中晩唐政局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1990).

    105) 賈憲保, 神策中尉與神策軍 (史念海 主編, 唐史論叢 5輯, 1990), pp.130-154.

    106) 趙雨樂, 唐代宮廷防衛與宦官權力淵源 (朱雷 主編, 唐代的歷史與文化, 武漢: 武漢大學出版社, 1997), pp.45-58.

    107) 趙雨樂, 唐末北衙禁軍的權力基礎 -神策五十四都的活動試析 (中國唐代學會

    編輯委員會 編, 第三届中國唐代文化學術硏討會論文集, 臺北: 樂學書局, 1997),pp.523-538.

    108) 余華靑, 中國宦官制度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5), pp.279-280.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04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환관집단에서 외조 관료와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중 대표적인 것으로 환관에게서 관료귀족의 특징

    인 仕宦世家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한 점을 들 수 있다. 陳仲安은 당

    후기 환관 劉行深과 楊欽義를 전형적인 환관세가의 구성원으로 규정하

    고 이들의 仕宦世家 현상을 외조 관료들의 그것과 동질적인 것으로 파

    악했다.109) 이러한 인식은 더욱 많은 사례를 제공하는 연구의 뒷받침

    으로 인해 점점 공인되어 갔다.110) 이와 관련해 杜文玉이 진행한 일련

    의 연구는 그 의미가 자못 크다. 杜氏는 陳仲安의 분석방식을 계승해,

    仇氏, 孫氏, 梁氏, 王氏, 彭氏, 吳氏 환관의 世家를 복원했다.111) 특히,

    楊氏,112) 劉氏,113) 高氏114)에 대해서는 다수의 묘지명을 활용해 독립적

    인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환관세가의 형성은 환관들의 출신지가 다

    양함에도115) 그들의 주택거주지와 분묘지가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발

    견된다는 사실로도 일정부분 확인되었다.116)

    生理的으로 결함이 있는 환관들이 父子관계를 중심으로 한 세가를

    형성하는데는 養子제도가 이용되었다. 당 초기, 엄격하게 제한되어 시

    행되던 환관의 養子제도가 덕종시기에 同姓, 異姓의 구분이 철폐되는

    변화를 겪었음이 지적되었고,117) 僖宗, 昭宗시기에 숫자가 대폭 확대되

    109) 陳仲安, 唐代後期的宦官世家 (中國唐史學會 編, 唐史學會論文集, 西安:陝西人民出版社, 1986), pp.195-224.

    110) 牛志平은 사료상에 출현하는 환관들을 연대기로 묶어 정리했다( 唐代宦官表

    , 史念海 主編, 唐史論叢 2輯, 西安: 陝西人民出版社, 1987, pp.299-356).111) 杜文玉, 唐代宦官世家考述 (陝西師範大學學報1998-2), pp.78-85.112) 杜文玉, 唐代權閹楊氏家族考 (韓金科 主編, 98法門寺唐文化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西安: 陝西人民出版社, 2000), pp.370-377.

    113) 杜文玉, 唐代宦官劉光琦家族考 (陝西師範大學學報 2000-3), pp.28-34.114) 杜文玉, 高力士家族及其源流 (榮新江 主編, 唐硏究 第4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7), pp.175-197.

    115) 환관의 출신지역으로는 福建과 廣東이 주로 거론되지만 실제 사서에 확인되

    는 환관의 출신지역은 관중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 출신이 더 많다. 杜文玉,

    唐代宦官的貫籍分布 (中國歷史地理論叢 1998-1), pp.161-174.116) 杜文玉, 唐代長安的宦官住宅與墳塋分布 (中國歷史地理論叢 1997-4),

    pp.79-95.

    117) 胡如雷, 略談唐代宦官濫收假子的現像 (河北師院學報 1996-2), pp.31-32.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05는 극단적인 발전 모습이 확인되었다.118) 杜文玉은 양자제도를 이용해

    世家를 형성한 환관들이 외조 사대부들의 행위방식을 모방해 다른 환

    관세가와 혼인관계를 맺어119) 당후기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120) 世家연구는 개인의 행적

    에 대한 검토를 기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高力士121)나 李輔國122) 등

    에 대한 개별적 연구도 함께 심화되었다.

    개별적 연구의 진행과정에서 환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이는 환관 개인의 문화적 素養 문제와 연결되기도 했다. 杜文玉은 대

    부분의 환관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갖추었다고 간주하

    고, 일부의 경우는 入宮 이전에 이미 양호한 교육수준을 보이기도 했

    으며 入宮 후에는 內廷 교육기관의 훈도를 받았다고 규명했다.123) 이

    러한 환관들은 자연스럽게 문화적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이중 불교

    행사의 참여는 그 대표적 형태로 파악되었다. 생리적 결함에서 오는

    피해의식과 來世에 대한 집착은 불교에 귀의하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

    게 했기 때문에 환관들은 당대 불교 발전의 중요한 贊助者로서 역할했

    고,124) 특히 현종시기에는 도교와 불교의 종교적 대립과정에서 불교가

    주도권을 잡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강조되었다.125) 이러한 연구들

    118) 張文斌, 唐代宦官養子制度探略 (雲夢學刊 2002-4), pp.42-43.119) 杜文玉, 唐代宦官婚姻及其內部結構 (學術月刊 2000-6), pp.88-95.120) 杜文玉, 宦官世家與唐代政治 (文史知識 2005-2), pp.33-40.121) 牛致功, 有關高力士的幾個問題-讀高力士的神道碑及墓誌銘 (史學月刊

    2003-4), pp.43-47; 朱玉麒, 脫靴的高力士 (榮新江 主編, 唐硏究 第7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1), pp.71-90. 이른 시기부터 고력사의 역사적 평가에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묘지명 등 금문자료를 이용한 객관적 분석은 최근에 비

    로소 시작되었다.

    122) 王守棟, 唐代權閹李輔國考 (德州學院學報 2002-3), pp.66-75; 林培龍,太監宰相李輔國考 (哈爾濱學院學報 2007-2), pp.93-96.

    123) 杜文玉, 唐代宦官的文化素養與思維觀念 (河南師範大學學報 1997-6),pp.40-44.

    124) 孫昌武, 唐代的宦官與佛敎 (袁行霈主編, 國學硏究 第9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0), pp.213-231.

    125) 逄淑, 姜維東, 玄宗朝佛道爭鬪與唐代宦官專權局面的形成 (長春師範學院學報 2000-6), pp.79-81.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06은 기존 연구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했다.

    4. 기존 연구의 경향과 문제점

    앞서 당대 환관 관련 연구들을 분야별로 검토해 연구 상황을 구체

    적으로 확인했다. 이를 연구 경향의 측면에서 분석하면, 기존 연구가

    대개 환관의 비정상적 활동모습에 의해 환기된 관심을 중심으로 환관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음이 포착된다. 이는 환관 문제와 관련해

    부정적인 시각을 고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연구의 주된 관

    심은 환관 정치의 발생과 지속 원인에 집중되었다. 황제와 친밀한 관

    계에 있는 환관이 황제의 권력을 불법적으로 농단해 國政에 막대한 폐

    해를 끼쳤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지속된 작업은 古今의 治史

    者들에게 광범위한 공감대를 이끌어 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역

    사적 의의를 담보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에 기반해 환관의 활동을 歸納化하

    고 그 구체화된 모습을 분석하는 방식은 당대 환관 문제에 내재된 복

    합적인 의미를 소홀히 하는 경향을 나타냈으며, 편향적인 연구결과들

    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다. 이에 대한 극복의 의미에서 대개 부정적 현

    상으로 파악되는 환관의 활동에 대해 또 다른 면모를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는 환관의 활동을 객관화하려는 작업으로 전개되

    었다. 그런데 환관의 활동에 대한 객관화 노력은 기존 인식에 대한 부

    정 혹은 반대의 의미로만 강조될 경우 설득력이 부재한 斷言으로 전락

    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이러한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정치

    사적 입장에서 탈피해 제도사 분야에 천착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제

    도사의 실증적 성격과 도덕적 판단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특징이

    적극 활용되었으며, 특히나 당 제도의 급변시기와 환관 득세의 시기가

    현종대로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 유의미성을 배가시켰다.

    제도를 중심으로 한, 제도의 변화와 보충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한 실

    증적 연구 방법은 매우 유용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환관 정치의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07실질적인 기반이 되는 제도적 장치를 확인하고 그것이 운영되는 모습

    을 규명하는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당대 환관 문제의 연구를 정치사

    적 시각에서 비롯된 善惡의 평가에서 일정 정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제도적 완결성에 대한 강조는 환관의 관련제도가 국가 운영의 한 부분

    으로써 갖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환관 연구를 특정 제

    도에 천착하게 만들어 기존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제도가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발굴과 복원을 통한 제도적 의미의 강조는 편향적

    평가의 지배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객관성을 제고하는 데에는 효과적이

    었지만, 기존의 평가를 再考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분석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다. 內諸司使에 대한 개별적 연구나 봉록

    제도 등에 대한 연구가 갖는 제약이 이를 잘 보여준다. 즉, 환관 사직

    들의 방대한 규모를 확인하고 환관과 관련된 제반제도의 존재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이것이 형성된 이유를 분석하고 그 의

    미를 제시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당대 환관 문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여건들이 조성

    되었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시도는 아직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

    정이다. 이러한 상태의 지속은 앞서 언급한 당대 환관 정치의 문제에

    대한 현상적 연구방법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데 있어 제한적인 성과

    만을 축적할 우려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요구되

    는가? 우선, 기존 연구의 방대함과 사료의 限定性을 인정해야 할 것이

    다. 이는 곧 기존 연구에서 이용되지 않은 새로운 사료의 발굴에 집착

    하거나 未知의 역사 사건을 복원하는데 진력하는 방식에 유연한 태도

    를 가질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아, 현

    상적 연구방법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복원을 뛰어넘는 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석적인 시각을 배경으로 역사적 현상의 의미를 발

    굴하고 재해석할 때 가능할 것이다. 결국 새로운 시각을 통한 문제의

    접근이 긴요할진대 이는 환관 정치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새롭게 하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08는 것으로 일정부분 가능하리라 기대된다.

    Ⅲ. 당대 환관 문제 연구의 재분석

    전통시기 환관 정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배경을 상정해 보면,

    환관의 존재 근거가 황제에게 있음은 명확하다.126) 비록 시대에 따라

    구체적인 형태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환관과 황제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唐朝 역사

    의 진행과정에서 이러한 관계가 수행한 역할과 의미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한과 당 시기의 환관 정치 현상에 대한 주자

    의 논설이 주목을 끈다.127) 주자는 한과 당의 시대상황이 다르다는 점

    을 우선적으로 지적했는데, 漢이 “必亡之勢”에 놓여 있었던 반면에 唐

    은 “尙可爲”, “有餘策”한 상태라고 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君主(皇帝)의 존재여부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주자가 僖宗과 昭宗을 대비시킨 것처럼 당의

    황제 중에서도 역할 정도에 분명한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성인 황제가 출현하는 당의 시

    기가 한의 시기보다 통치의 가능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

    각은 당 환관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른 시기와 구별되는 환관

    정치의 특징들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황권이 발휘되는 구조의 특성

    황제는 天子라고도 칭해지며 전통시대 모든 권력의 근원이자 행사

    126) 徐連達, 朱子彦, 中國皇帝制度 (廣州: 廣州敎育出版社, 1996), pp.395-401.127) [宋]黎靖德編, 王星賢点校, 朱子語類 卷135, 歷代二 (北京: 中華書局,

    1986), p3231.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09자이다. 이는 곧 전제권력이라는 형식으로 유지되었으며 天下 만물을

    권력 행사의 대상으로 삼았다.128) 이러한 황제권력은 중국사의 전개과

    정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奪取 혹은 借用되기는 했지만,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된 적은 익히 없었다.

    이처럼 전통시기 중국에서 황제의 권력이 발휘되는 모든 행위를 황

    제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국가(혹은 천하)의 통치를 목적으

    로 삼고 있다. 그런데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에 관여한다는 것은 현

    실적으로 불가능하다.129) 天下의 廣大함과 四海의 衆大함으로 인해 그

    러했다.130) 이는 결국 황제 통치를 위한 대리적 수단이 필요했음을 의

    미하는데 황제는 官을 두고 職을 나누는 위임정치를 시행했고131), 여

    기에 관료제도라는 기제가 적극 활용되었다.132)

    중국의 관료제도는 막스베버의 이성적인 관료(제)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133) 봉건제적 혹은 가산제적 정치체제와 현대 관료제를 연결

    하는 역사적 관료제국의 구성요소에 해당되며,134) 정부의 권력이 관료

    에게 장악, 이용된다는 관료제의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중국 관료정치의 구성 요소를 관료정치제도, 관료기구의 운영기

    제, 관료 세 가지로 나누어본다면,135)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이상의 구

    128) 王毅는 중국 황제 권력의 전제성이 중국문화시스템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것

    으로 法理의 기초와 사회조직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강조하며 모든 문화적 틀

    의 母本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王毅, 中國皇權制度硏究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7), pp.2-4.

    129) “萬機務綜, 不可徧覽” (通典 卷24, 職官六 , p.667).130) “以天下之廣, 四海之衆, 千端萬緖, 須合變通, 皆委百司商量, 宰相籌畵, 於事穩

    便, 方可奏行. 豈得以一日萬機, 獨斷一人之慮也” (唐]吳兢, 貞觀政要 卷1, 政體 ,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78, p.15).

    131) 雷家驥, 隋唐中央權力結構及其演進 (臺北: 東大圖書公司, 1995), p.360.132) 王亞南, 中國官僚政治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1), p.23.133) 李治安은 중국의 관료 정치는 관료들이 주군을 받들어 민중을 다스리고 政

    事를 처리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정치와 전제군주의 밀접한 관계

    를 강조했다. 더 나아가 ‘君主官僚政治’라 칭하기도 했다. 李治安, 杜家麒, 中國古代官僚政治 (北京: 書目文獻出版社, 1993), pp.1-3.

    134) S. N. Eisenstadt, The Political Systems Of Empires (Free Press ofGlencoe, 1963), pp.22-23.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10성 요소가 변화하여 발전하는 과정을 관료정치의 발전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집단의 팽창, 재상기구의 확대, 행정제도의 전문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를 배경으로 황권과 관료제도의 관계를 검토해 본다면, 관료정치

    의 발전은 곧 황권의 발휘 방식이 변화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深思해야할 것은 비록 관료정치를 관료들에 의한 권력 장악으

    로 이해한다하더라도 전통시대 중국의 관료정치 발전을 황권의 약화와

    등치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관료정치는 皇帝政治體制의 수단 혹은

    보충물이라는 관계에서 보면,136) 관료정치의 발전은 황권이 발현되는

    형태가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권력의

    발휘와 관료정치의 전개를 ‘此强彼弱’이라는 권력의 물리적 배분관계로

    규정하고 대립적인 상호작용으로 설정해서는 그 구조적 특성을 간과하

    기 쉽다.137)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황권의 발휘와 관료정치의 발전은

    모두 황제의 천하통치를 위한 하부구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138)

    135) 吳宗國主編, 中國古代官僚政治制度硏究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4), p.1.136) 王亞南, 앞의 책, p.39. 통치자가 관료에 대해 압제를 전제로 한 지배를 한다

    는 시각에서도 관료가 통치자(황제)의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유용한 수단이

    라는 점은 동일하게 인식된다. S. N. Eisenstadt, The Political Systems OfEmpires (Free Press of Glencoe, 1963), p.279.

    137) 이러한 관계의 성질 문제는 宋代 皇權과 相權의 논쟁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

    능하다. 이 중 張邦煒는 최고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황제이고 재상의 권

    력은 최고 행정권이기 때문에 이 둘은 평행적 권력이 아니고 상권이 황권에

    종속되어 服務하기 때문에 결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없고 상호 의존적

    이라고 지적했다. 張邦煒, 論宋代的皇權和相權 (四川師範大學學報 1994-2),pp.60-68.

    138) 劉篤才는 중국 봉건관료정치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極權’과 ‘特權’이

    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극권이라는 것은 전제군주의 중앙집권제 국가가 경제기

    초 분야에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권력을 과도하게 집중시켜 극단적인 수

    준에까지 다다른 것을 말하고 특권이라는 것은 이익기제에 있어서 직업 관료

    가 사회 잉여 산물을 재분배하는 것 이외에 그 신분에 따라 생기는 관습적 權

    利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국의 관료는 극권의 制約을 받으면서 특권

    에 沉溺하게 되어 중국의 봉건관료정치는 극권체제하의 특권정치라고 설명했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11관료정치의 발전은 황제의 위임정치가 精緻해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이는 곧 권력의 발휘 방식이 명확해지고 고정적인 형태로 구

    체화됨을 뜻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황제권력의 발휘 과정에 대한 규

    범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투명성이 담보된 방식으로 규정된 절차에 따

    라 행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139) 이는 구체적으로 국가의 制度規定,

    政治思想, 禮制 및 輿論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140) 대개 이것을 주도하

    는 것이 관료집단이기 때문에 이를 관료정치의 황제에 대한 制約으로

    간주하려 하지만,141) 이는 단순히 일방적인 의미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관료정치로 인해 초래된 제한은 제도의 안정을 우선

    시하는 것142)으로 기존의 황제 권력 행사를 억제, 축소하는 것이 아니

    라 황제의 자의적, 직접적인 황제 권력의 행사를 일정형태로 거부하는

    데 의미143)가 있기 때문이다.144)

    그렇다면, 여기서 관료들에 의해 유지되는 정치제도와 황제 사이에

    다. 劉篤才, 極權與特權 -中國封建官僚制度解讀 (沈陽: 遼寧大學出版社,1994), p.9.

    139) 관료집단이 황제에 대해 요구한 것은 도덕과 인격을 바탕으로 한 자각[自

    律]적인 행동을 하며, 법률의 준수와 행정제도의 효과적인 시행이었다. 傅紹良,

    唐代諫議制度與文人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11.140) 甘懷眞, 皇權, 禮儀與經典詮釋 -中國古代政治史硏究 (上海: 華東師範大學

    出版社, 2008), pp.381-391.

    141) 余英時, ‘君尊臣卑’下的君權與相權 (歷史與思想, 臺北: 聯經出版事業,1976), p.52.

    142) 전통시기 중국의 사대부들은 ‘亦儒亦吏’적인 존재였다(閻步克, 士大夫政治演生史考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6, p.10). 儒敎的 ‘知識’을 갖춘 이들이 관료가 된 후 황제에 의한 통치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회의한 적은 없다(杜維

    明, 道, 學, 政 -論儒家知識分子,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00, p.28).143) 이와 관련해 王瑞來는 군주의 ‘主觀自律’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이것의 파

    행을 막기 위해 사대부들이 ‘天’, ‘道’, ‘法’을 사상적 무기로 삼고 ‘不文律’, ‘公

    議’, ‘留名의 靑史’를 장벽으로 삼아 황권이 왕조의 장기간 지속을 위한 방향으

    로 행사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王瑞來, 皇權再論 (史學集刊 2010-1),pp.3-25.

    144) 이를 황권의 자의성 문제로 代替해 고려한다면, 人治와 法治의 문제와 연관

    지어 분석할 필요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祝總斌, 試論我國封建君主專制權力

    發展的總趨勢 -附論古代的人治和法治 (北京大學學報 1988-2), pp.1-14 참조.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12존재하는 일정한 간극이 확인되는데 이는 황제가 정치제도의 운영에서

    일부 소외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145) 이것은 일정한 의미에서 황

    권이 人格化에서 非人格化로 변화되는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존

    황권의 威嚴이 保持되고 관료정치의 고도화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전통시대 중국 황제의 절대적 권력이 시종 유지

    되었지만,146) 황제 스스로가 직접적으로 국가제도 운영에 대한 자의적

    인 개입을 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황제가 모든 決策단계의 최상위에

    있으며 정치권력의 근원이라는 상황에 변함이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통시대 중국의 국가제도가 기본적인 완성을 이룬

    다고 평가되는 唐朝147)의 경우, 그 의미가 두드러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황제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를 포기

    하지 않았다.148) 이것은 전통적인 ‘家天下’의 사상배경149) 하에서 포기

    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며, 황제의 존재의미가 축소될 수도 있는 경우

    에는 더욱 그러했다. 당의 황제들은 관료들에 의해 지탱되는 국가 통

    치 제도 하에서 새로운 황권 발휘의 방식을 찾고자 노력했다.

    2. 당대 황권의 시행과 환관 활동의 역할

    당 황제들이 별도의 권력 시행 방식을 모색하고 추진하는 모습은

    145) 이는 황권의 상징화과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王瑞來는 정치제도의 완비를

    중국사에서 황권의 상징화 현상을 초래하는 결정적 요소로 강조하고 이 결과

    로 황제의 실제적인 권력행사가 정부 권력에 의해 흡수, 대체되었다고 설명했

    다. 王瑞來, 宰相故事: 士大夫政治下的權力場 (北京: 中華書局, 2010),pp.371-377.

    146) 劉澤華, 專制權力與中國社會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88), pp.1-24.147) 吳宗國主編, 盛唐政治制度硏究 (上海: 上海辭書出版社, 2003), pp.1-7.148) 이와 관련해 당대 황제들의 ‘批答’에 의한 정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기

    존 문서 행정 중 비답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의례적 목적에서 확대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점도 황제의 직접적인 권력행사를 위한 노력으

    로 확인된다. 葉煒, 唐代‘批答’述論 (北京大學學報 2010-2), pp.87-95 참조.149) 邢義田, 天下一家: 皇帝, 官僚與社會 (北京: 中華書局, 2011), pp.14-18.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13전통시대의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近官’이라 지칭되는 존재

    를 통해서도 일부 확인된다.150) 이들은 기존 국가제도의 유지 상황에

    서 황제와의 개인적인 밀착관계(恩倖)를 기초로 형성된 개별적 부류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데151) 外朝의 제도에 속해 있기도 했지만 외조의

    제도로 규정되는 직무와는 별개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집단이 구성되고 유지되는 목적은 전적으로 황제의 직접

    적인 권력 발휘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 있다. 이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당대 황제는 환관이라는 존재를 적극 활용했다.152)

    여기서 당대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153) 당대 환관은 황제와의 관계에서 私奴的 성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국가 통치 기구의 일부인 內侍省의 직무를 수행하는154)

    국가관료적 성격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 물론 외조 관료와 비교해 모

    든 제도와 형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지만,155) 적어도 구조상으로는

    일치된 형태였다.156) 이는 漢代 환관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가 나타나

    150) 史雲貴, 外朝化, 邊緣化與平民化 -帝制中國‘近官’嬗變硏究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09), pp.19-30.

    151) 이들은 ‘近幸集團’이라 명명하기도 했는데 주로 사회 하층 출신들로 구성되

    었다고 분석된다. 黃樓, 中晩唐宦官政治硏究 (武漢大學博士學位論文, 2009),pp.189-194.

    152) 환관이 갖고 있는 閹人이라는 특징은 다른 近官 혹은 恩倖의 존재와는 큰

    차이를 갖는다. 閹人의 신체적 조건으로 발생된 신분상의 卑賤性은 환관과 외

    조 관료의 연합을 방지할 수 있는 일종의 제어장치 역할을 하기도 했다. Keith

    Hopkins, Conquerors and Slav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참조.

    153)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은 외조관료들과의 관계 설정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吳麗娛, 試析劉晏理財的宮廷背後 —兼論唐後期財政使職與宦

    官關係 (中國史研究 2000-1), pp.68-81.154) [唐]李林甫, 唐六典 卷12, 內侍省 (北京: 中華書局, 1992), pp.355-361.155) 관복의 경우, 散品을 기준으로 한 외조 관료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환관은

    일반적으로 황색의 옷을 입었지만 황제의 ‘賜綠’, ‘賜緋’, ‘賜紫’ 등을 거치면 자

    신의 산관품에 맞는 관복을 입게 됨이 최근에 지적되었다. 陳文龍, 北宋本官形成述論 -唐後期至北宋前期官僚品位結構硏究 (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11),p.75.

    156) 당대 환관들은 品, 階, 勛, 爵의 측면에서 외조 관료와 다름이 없었고 관료

    가 누리는 休沐, 丁憂, 致仕, 追贈官 등의 권리를 향유했다. 또한 관직임명과

  • 中國史硏究 第77輯 (2012. 4)314는 당대 환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57)

    당대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은 황제가 직접적인 권력 발

    휘의 방식을 구축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私奴的 성격은 환관

    이 황제의 근거리에서 처신하며 증대된 접촉 기회를 활용해 황제의 의

    사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수월하게 했다.158) 이러한 특징은 외

    조 사인들에 의해 황제가 경계해야할 상황으로 지적되었지만,159) 황제

    의 의지와 반하는 형태로 억제되지는 못했다.160) 황제에게 있어 이들

    이 가지고 있는 장점161)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환관이 가지

    고 있는 사노적 성격을 근거로 이들에 대해 얼마든지 임의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62)

    관련해 入仕, 解褐 등의 용어를 외조 관료와 통일하게 사용했다. 余華青, 中國宦官制度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5), pp.279-280.

    157) 渡邊義浩는 漢代 환관을 ‘家內奴隸’的 존재로만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

    교관료들의 환관에 대한 부정이 곧 황제권력에 대한 부정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후한 유교관료들이 환관을 반대한 것은 이후 귀족제 형성에 중요한 역

    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渡邊義浩, 後漢國家の支配と儒敎 (雄山閣出版, 1995),pp.327-357.

    158) 이러한 특징은 魏徵이 태종의 환관중용에 대한 반대 의견에서도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魏征進曰: ‘閹豎雖微, 狎近左右, 時有言語, 輕而易信, 浸潤之讒,

    為患特深, 今日之明, 必無此慮, 為子孫教, 不可不杜絕其源’”([唐]吳兢撰, 謝保成

    集校, 貞觀政要集校 卷5, 論誠信 , 北京: 中華書局, 2003, p.291).159) 司馬光은 “甘言卑辭之請有時而從, 浸潤膚受之愬有時而聽. 於是黜陟刑賞之政,

    潛移于近習而不自知, 如飲醇酒, 嗜其味而忘其醉也”라 하여 비유적으로 비판했

    다. 資治通鑑 卷263, 臣光曰條, p.8596.160) 노예는 인격과 명예가 박탈된 대상이기 때문에, 노예성격을 갖는 환관에 대

    한 비판은 곧 그 주인, 즉 황제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환관을 외

    연으로 하는 주체에 대한 부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Orlando

    Patterson, “On Slavery and Slave Formations” (New Left Review, No.117,1979, pp.31-67 참조. 본 논문은 김경현 역, 노예제와 노예제적 구성체들 (사학지 18, 1984), pp.201-253에 번역 게재됨.

    161) 황제에게 있어 환관은 붕당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황제의 令을 시행

    하는 효과적이어서 황제 통치에 도움을 주는 장점을 가진 존재이다. “中人無外

    黨, 精專可信任”(漢書 卷93, 石顯傳 , p.3726); “受命則無違迕之患, 使令則有稱愜之效”(資治通鑑 卷263, 昭宗三年臣光曰條, p.8595); 蓋所以將我腹心之命,達於爪牙之土也([唐]元稹, 元稹集 卷49, 宋常春等內僕局令 , 北京: 中華書局,p.532).

  •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柳浚炯) 315이로 인해 환관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외조 관료들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