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7 - ii. 역사서 이해 1. 전기 예언서 혹은 역사서? 개혁교회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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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개론 Historical Literature 이 신 웅 교 수 (Ph, D) 홍콩 생명길 신학교 & 카자흐스탄 알마티 생명길 신학교 ~yhil{a/h' hw"hy>-~ai wyr"x]a; Wkl. l[;B;h;-~aiw> wyr"x]a; Wkl. 2019년 봄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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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역사서...- 7 - II. 역사서 이해 1. 전기 예언서 혹은 역사서? 개혁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정경인 구약(OT, OC)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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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개론Historical Literature

이 신 웅 교 수 (Ph, D)

홍콩 생명길 신학교 &

카자흐스탄 알마티 생명길 신학교

~yhil{a/h' hw"hy>-~ai

wyr"x]a; Wkl.

l[;B;h;-~aiw>

wyr"x]a; Wkl.

2019년 봄학기

Page 2: 역사서...- 7 - II. 역사서 이해 1. 전기 예언서 혹은 역사서? 개혁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정경인 구약(OT, OC)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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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알되 아무것도 맛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보나벤투라 -

“우리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다.오직

하나님이 나 자신에게 말하실 때에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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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개론

Historical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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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 분류 분류항목 세 부 사 항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 역사, 철자법, 어형, 구문, 음운, 어휘, 의미, 맛소라본문

수메르어

역사, 철자법, 어형론, 구문론, 음운론,

어휘론, 의미론, 고대 비문들, 각종 문서들(Text)

우가릿어

아카디아어

고대이집트어

아람어

아랍어

에티오피아어

구약의 역사

고대 근동 수메르, 히타이트, 아카드,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가나안, 블레셋, 모압, 암몬, 아람

고대 이집트 요셉, 모세, 출이집트 시대

고대이스라엘 족장, 출이집트, 가나안, 사사, 왕정, 분열, 포로, 귀환

구약의 문학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바빌로니아, 가나안의 창조신화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창조신화, 건국신화

고대이스라엘 역사, 예언, 시가, 지혜, 묵시, 내러티브(이야기)

구약 비평

본문 비평 본문 역사, 고대역본, BHS 입문, 사해(쿰란)사본

고등 비평 자료, 양식, 전승사, 편집, 정경, 구조, 해체, 구성비평

구약의 종교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가나안

고대이스라엘 제의, 신성과 금기, 관습과 규범, 성상과 상징

구약 신학

구약신학의 방법 교의(훈)적, 기원적, 주제별, 통시적, 변증법적, 정경적

구약신학의 역사 초기, 18C 합리주의, 19C 고등비평, 20C 다양성

구약신학의 접근방식 신학자들의 접근방식을 다룸

신약과의 관련 언약/조약신학의 연결성

구약 분류

오경(토라) 저자, 통일성, 역사적 배경,

기원과 저작연대, 영감론, 정경성, 본문,

문학적 특성, 개요/구조, 내용, 신학, 메시지,

특별한 문제와 쟁점

역사서

시가서

지혜서

예언서

I. 성서 연구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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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 분류 분류항목 세 부 사 항

신약의 언어

헬라어 호머 이전의 헬라어, 고전 헬라어, 코이네 헬라어

코이네 헬라어의 범위, 유형, 고전 헬라어에서의 변화

팔레스타인의 언어환경, 헬라 상황에서의 헬라신약성경

어형론 동사-시상, 태, 법(직설, 가정, 명령, 분사), 부정사, 명사

구문론 단어, 구, 절, 단락, 문장, 문법

의미론 Text Linguistics(본문 언어학)설교/강화 적용

신약의 역사

신약시대개관 구약, 중간사, 국제 정세

예수님의생애 복음의 시작

바울의 생애 복음의 전파

베드로의생애 복음의 전파

신약의 문학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역사서 사도행전

서신문학 로마서 ~ 요한 3서

묵시 / 예언 요한계시록

기타 장르 AD 1C 당시의 문학적인 작품들

신약 비평

본문 비평 신약본문의 역사, 각종 필사본들, 교부들의 인용들, 증거들의 상관성, 본문비평의 중요성(역사, 저자, 석의)

고등 비평 합리주의, 종교사학파, 구성, 전승, 수사, 양식, 편집, 자료, 정경, 구조, 공관복음 문제, Q 문제, 서신서의

문학성 문제, 비평과 영감, 비평과 정경

신약의 문화정치

배경

정치적 배경 황제, 지방행정관, 지방자치, 법, 시민권, 통신

경제적 배경 농업 경제, 화폐의 안전성, 노예제도, 경제구조

사회/문화적 배경

로마, 팔레스타인, 그리스(헬라), 소아시아 등의 정치

구조,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 결혼, 가족구조, 교육, 재산

종교적 배경AD 1C 유대교

바리새파, 사두개파, 서기관, 에세네파, 열심당, 헤롯당, 디아스포라

이방 종교 헬라종교, 로마종교(황제숭배), 신비종교

신약 신학

신약신학의 역사 기원, 목표, 발전 과정

신약신학의 접근방식 설명적, 주제별

신약신학의 내용공관복음서의 신학, 바울신학, 요한신학, 베드로신학,

야고보신학, 유다신학, 히브리서신학, 요한계시록신학

신약 분류

복음서저자, 통일성, 역사적 배경,

기원과 저작연대, 영감론, 정경성, 본문, 문학적 특성, 개요/구조, 내용, 신학,

메시지, 특별한 문제와 쟁점

역사서

서신서

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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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두 도표를 보면 구약과 신약을 연구하려 할 때, 가장 처음에 해야 되는 것이 각각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나서 “구약의 분류”와 “신약의 분류” 위에 있는 언어, 역사, 문학, 비평, 종교, 신학 부분을 철저하게 공부해야지만 비로소 본격적으로 구약의 각권이나 신약의 각권에 들어갈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1) 그러나 많은 이들이 구약과 신약의 언어, 역사, 문학, 비평, 종교, 신학을 성실하게 연구하지 않은 채 곧바로 구약의 각권이나 신약의 각권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성경을 연구하려는 진지하지 않은 자세 때문에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되어 이단으로 빠지게 될 확률이 높다.

위대한 성경 해석자였던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첫 번째 원인은 ‘쓸데없는 호기심’이다”. 이 말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자꾸 알고 싶어 하는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과 관계없는 자의적인 해석의 유혹에 빠지게 될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연구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한 개론적인 면을 숙지하고 각권으로 들어가야 홀로 해매이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지 않게 되며, 신선해 보이는 이단의 주장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1) 초대 기독교와 중세 교회의 관심은 구약에 대한 문예적 관심이나 역사적 관심보다는 신학적 관심에 있었다. 이단들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초대 교회에서는 당연히 신학적 관심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중세에 들어서면서 발생했다. 로마 카톨릭이 교리를 지지하는 근거로 구약을 사용하려는 지나친 변증적 관심 때문에 구약을 종교적 진리나 교리를 담고 있는 신학적 문서로만 본 것이다. 그래서 성경 해석이 매우 자의적이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구약이 히브리어라는 언어로 쓰여진 글이라는 사실이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히브리어라는 원어로 구약을 읽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저자의 의미 보다는 교회(또는 교황)의 전승과 해석이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히브리어와 헬라어라는 원어로 구약과 신약을 읽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성경 본문을 새롭게 번역하여 펴내고, 성경 히브리어 문법과 사전을 편찬함으로서, 이때부터 기독교 해석은 히브리어 본문에 의존하였으며, 기독교 히브리어 학자들은 랍비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들보다 문법과 사전을 펴내는 데 열성을 더하였다. 종교개혁자들도 인문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결과 ‘원천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황이나 교회의 회의가 아닌 텍스트(본문) 그 자체인 성경으로 돌아감을, 다양한 영적 의미에서 “하나의 단순하고 확고한 문자적 의미”로 돌아감을, 성경 원어를 성경 연구의 기초로 삼는 방식으로 돌아감을 의미하였다. 그 후, 18세기에 들어 고고학의 발견과 더불어 고대 근동의 고대 문서들이 해독되면서 구약성경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각종 고대 언어들이 해독되고 문서들이 번역되면서 고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창문이었던 구약은 ‘하나의’ 창문이 되었고, 언어학의 발달로 히브리어가 셈족어에 속하며 셈족어는 동사가 특히 중요한 언어라는 점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어원을 셈족어에서 찾게 하였고, 구약성경 해석의 깊이를 확장해 주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중요한 문법서와 사전이 대량으로 출판된 것이다. 따라서 문법과 의미론과 문체론의 도움을 받아 성서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서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cf. H. C. Schitt, 『구약,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차준희, 김정훈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4),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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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역사서 이해

1. 전기 예언서 혹은 역사서?

개혁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정경인 구약(OT, OC)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를 역사서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교의 정경 타나크(TNK)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왕기상/하를 전기 예언서로 간주하여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의 후기 예언서와 같이 예언서/선지서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책인 룻기,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는 성문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 부분을 전기 예언서로 구분한 중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부분이 “역사서”라는 정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말을 적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혹은 사실을 역사라고 하고 또한 그 사건들의 기록을 역사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그것들의 기록을 연구하는 자체도 역사라는 범위에 넣을 수가 있다. 위의 조건들을 생각할 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왕기상/하 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의 연대기를 단지 중요한 사건만 기록했기 때문에 역사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했던 것이다. 사실, 사사기나 여호수아 그리고 사무엘상/하를 보더라도 어떤 부분은 역사책처럼 상세하게 기록되기도 했으나, 어떤 부분은 기록되어져야 할 부분이 많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이 부분을 역사서로 보려 한다면 예언자들의 관점으로 본 역사서라는 점을 히브리어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과 문학적인 형식이나 내용들을 비교해보면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라고 불리는 책들에는 차이가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전기 예언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초기 왕정시대와 그 이전에 기록 되었다. 그 시기에 예언 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을 ‘선견자’로 불러 후세의 ‘선지자’와는 사역의 내용에 있어서는 비슷하나 명칭에서는 다름을 알 수 있다(삼상 9:9). 후기 예언서에서 선지자라는 용어의 사용은 BC 8세기부터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예언서들은 예언자의 이름을 그 책들의 이름으로 사용하였기에 정경 예언서라고도 부른다.

두 예언서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 내용과 문학적인 형식에 있다. 전기 예언서는 신학적으로 후기 예언서와 유사한 면이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전기 예언서는 가나안 정착으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후 바빌로니아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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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의 시작부터인 BC 587년의 역사적인 사실과 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예언서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예언적인 면이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전기 예언서의 내용 중에서는 나단 선지자와 엘리야의 예언의 말씀을 제외하면 후기 예언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문학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전기 예언서는 그 형식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있으나, 후기 예언서는 많은 부분이 음률에 맞추어진 시 형식의 문체로 되어있다. 그래서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그 신학적인 면이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가 유사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것을 살펴볼 때 전기 예언서가 예언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인 면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기 예언서라고 불리우는 책들을 개혁 교회에서는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다.

2. 저작설

20세기 초반기에 문서비평을 통해 오경의 저자를 분석한 것과 같이 역사서의 저자도 같은 방법을 통해 알아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마틴 노트(Martin Noth)의 역사서 저자에 관한 이론이 큰 힘을 얻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서의 저자는 신명기의 기록자라고 한다. 노트의 이론에 따르면 신명기는 바빌로니아 포로기인 BC 550년경에 기록이 되었는데 내용면에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신명기 1-4장, 29장 그리고 30장을 한 부분으로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신명기 5-26장과 28장으로 구분하였다. 특별히 역사서의 저자를 신명기의 저자로 보는 이유는 신명기 1-4장, 29장 그리고 30장의 내용적인 면이 역사서의 내용과 일치하기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이 부분과 역사서를 합쳐서 그는 “신명기 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라고 불렸다. 이 “신명기 역사서”의 기록은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 시기인 BC 8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요시아의 종교개혁 시기인 7세기 후반기에 주로 기록이 되다가 BC 550년경에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노트(Martin Noth)에 따르면 신명기 역사에 속하는 책들은 내용면에서 볼 때 특별히 역사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이 같다고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조약이 있었기에 그 언약/조약을 실천함과 실천하지 않음의 기록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순종과 복종은 그들 삶에 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고 불순종과 배교는 저주와 벌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인 축복과 저주의 내용이 신명기 28장에서 시작되어 신명기 역사에 속하는 모든 책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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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여호수아부터 열왕기 하까지의 역사서가 신학적인 면에서 신명기의 내용과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같은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이론인 것 같다. 비록 신명기가 후세(바빌로니아 포로기 전후)에 편집이 마무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신명기의 뿌리는 모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하여 신명기 내용이 주장하는 것처럼 넓은 의미에서 모세가 신명기 기록에 책임이 있음을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여전히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왕기상/하의 문학적인 형식을 보면 같은 저자에 의해 이 책들이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여호수아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언약/조약으로 맺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과정과 땅의 분배에 관해 주로 언급하고 있는 반면, 사무엘상/하는 왕정 제도 형성의 배경과 시작에 관한 것을 주로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책들의 내용도 문학적으로 살펴보면, 사건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전개하는 이야기체에 가까운 형식이다. 예를 들어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반역,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회복이라는 내용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열왕기상/하는 왕들의 업적과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들의 행위에 따라 나타나는 야훼의 반응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문학적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는 이야기체보다는 연대기적인 형식을 따라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열거하며 보고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물론 책들의 특성에 따라 형식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 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책들은 신명기와는 별도로 독립적인 저술 과정을 통해 기록되었음을 조심스럽게 결론지을 수가 있다.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 연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보수진영의 학자들은 대체로 통일왕국 초기인 사무엘시대(BC 11세기)로 이해하고 있다. 사무엘상/하는 여호수아와 사사기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인 BC 10세기로 보고 있고 열왕기상/하는 포로기에 마지막으로 편집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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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역사서 소개

1. 여 호 수 아

여호수아(예호슈아)는 문자적으로 “야훼가 구원하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호수아는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후에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정착케 한 구약의 위대한 인물이며 지도자이다. 그가 구약에서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사건은 광야 시절에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지도자로써 전쟁을 이끌었을 때였다(출 17:8-13). 전쟁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종으로써도 모세를 보좌하였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같이 시내산에 있었고(출 32:17),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 사정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열두 명의 정탐꾼 중의 한 명으로 긍정적인 보고를 함으로서 모세의 지도력을 강화시키기도 하였다(민 14:4-9). 그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망 전에 모세의 후계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문제도 책임진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광야 시절 중에 이스라엘 자손들과 아론과 미리암같은 가족들도 모세의 실수와 지도력에 비판하고 반역하였지만 여호수아는 묵묵히 모세를 보좌하고 그의 지도력을 존중했던 점은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저자 및 기록연대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학자들은 여호수아서가 오경의 저자들인 J, E, D, P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여호수아서 1-12장은 주로 J, E, D, P에 의하여 그리고 13-24장은 P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믿어져 왔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20세기 중반으로 들어오면서 마틴 노트(Martin Noth)에 의해 조정이 되었다(앞장을 참조 바람). 노트에 따르면 신명기의 저자가 여호수아서의 기록과 편집에 관계가 깊으며, 신명기와 여호수아서가 요시아 종교개혁 시기인 BC 7세기 후반기에 최초로 기록되었다가 포로기인 BC 6세기 중반에 최종적으로 편집되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노트의 이론이 최근에 큰 호응을 받고 있지만 여호수아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BC 7세기 보다는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들이 있다. 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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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호수아의 소명 1:1-9

Ⅱ. 여리고성의 정탐과 가나안땅의 진입 1:10-5:12

Ⅲ. 가나안 정복 5:13-12:24

Ⅳ. 가나안 정착과 땅의 분할 13:1-22:34

Ⅴ. 여호수아의 권고와 세겜에서의 언약/조약 23:1-24:33

아서 16:10이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여기에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때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않음으로써 에브라임지파 가운데 거하며 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인에 관한 기록이 열왕기상 9:16에서도 나타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집트의 왕 바로가 게셀을 탈취하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인을 죽이고 그 성을 자기의 딸 즉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가 BC 10세기 중반쯤이 되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여호수아서는 적어도 BC 10세기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여호수아서 15:63에서 유다 자손이 여부스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로인해 여부스 사람들이 솔로몬의 시대까지 존재하여 솔로몬의 노예로 지냈음을 열왕기상 9:20에서 말해주고 있다. 이런 증거들로 볼 때 여호수아서가 여호수아에 의해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호수아의 사망 이후의 멀지않은 시간 내에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 요

여호수아서는 비교적 그 내용이 단순하며 조직적으로 구성되어있다. 먼저 여호수아의 소명으로 시작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수 1:10-5:12). 그 후에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정복과 가나안 땅의 지역별 정복 즉 남부와 북부 지역을 어떻게 취하였나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수 5:13-12:24). 여호수아서 13장 이후에는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마지막 장인 23-24장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세겜에서 야훼께 재 헌신의 언약/조약을 맺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여호수아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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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배경 여호수아서의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하나의 주제이다. 출이집트과 가나안 정복의 시기와 점령 방법에 대한 성서적 증거와 성경외적인 증거와의 불일치성으로 인한 논쟁이 그것이다.

출이집트의 시기 출이집트의 시기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 이론이 우세하다. 그 중 하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BC 15세기이고 다른 하나는 늦은 시기인 BC 13세기이다. 이른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성경이 그 사실을 주장하고 있고 늦은 시기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뒷받침하고 있다.

이른 시기인 BC 15세기에 출이집트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본 이유는 구약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인데, 열왕기상 6: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그의 즉위 4년에 시작하였는데 그때가 출이집트 후 480년이었다고 한다. 솔로몬의 즉위 4년을 환산해 보면 BC 966년이 된다.2) 이 계산에 따르면 출이집트은 BC 1446년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 또한 사사기 11장에 보면 사사 입다가 암몬 자손과 이야기하는 중에 이스라엘이 300년 동안 암몬 땅에 거하여도 암몬 자손들이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도로 찾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인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입다의 활동 시기인 약 BC 1100년임을 감안하면 출이집트의 시기는 약 BC 1400년경이 된다.3)

이른 시기의 출이집트에 대한 이론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먼저 왕상 6:1절에 나타나는 480년은 실질적인 것보다도 상징적인 숫자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게 되면 출이집트 사건은 BC 15세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 시기의 출이집트을 반박하는 학자들은 480이란 숫자는 한세대를 40년으로 하여 12세대를 곱하여 계산하면 나오는 상징적인 숫자임을 강조하면서 실질적인 연대와는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구약의 다른 증거를 보더라도 480년과 300년이라는 숫자가 맞지 않다. Kitchen의 계산에 따르면 여호수아, 사사기 그리고 사무엘 상/하 에 나타나는 기간을 전부 합하면 적어도 470년 이상이 되며, 여기에다 광야생활 40년과 다윗의 40년의 생활 등을 합

2) Edwin Thiel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3d ed(Grand Rapids : Zondervan, 1983), pp. 79-81.

3) John Bimson, “The origin of Israel in Canaan : an Examination of Recent Theories,” Themelios 15:1(oct. 1989), pp.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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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면 553년 이상이 된다고 한다.4)

이른 시기의 출이집트에 대한 이론이 구약을 증거물로 채택하여 설명하지만 그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기에 다른 이론들은 성서 외적 증거인 고고학적인 자료로 그 힘을 얻고 있다. BC 13세기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BC 13세기 말엽부터 12세기 초까지 팔레스타인에서 성읍들이 대규모적으로 파괴가 된 것을 그 증거로 하고 있다. 이 성읍들이 파괴된 것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늦은 시기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는 이집트 왕 메르넵타(Mernepta)의 석비이다. 이 석비에는 메르넵타가 점령한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스라엘만 지역명이 아니라 민족으로 표기되어있다. 이 석비가 세워진 시기를 약 BC 1213년으로 잡고 있는데 이때까지도 이스라엘이 국가로써 그 모양을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들의 집단으로만 남아있었던 것이다.5) 이렇게 될 때 BC 15세기 보다는 BC 13세기의 이론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늦은 시기의 이론에도 문제점은 있다. 특별히 여리고 성에 관한 것이 큰 문제점이다. 여리고 성은 중기 청동기 시대인 BC 1560년에 파괴되어 BC 1400년까지 버려져 있었다는 고고학 발굴의 보고서가 있다. 그 후에 여리고 성은 1세기 가량만 성장을 지속하다가 또다시 성읍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했다고 추정하는 BC 13세기 중엽에는 여리고 성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이다.6) 이와 비슷한 증거가 아이 성에서도 나타난다. 아이 성은 BC 2200년에 버려져서 BC 1200년까지 지속되었다.7)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정복을 시작한 시기에는 아이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발굴 보고는 BC 13세기 출이집트의 이론을 부정하거나 여호수아의 내용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위의 두 이론에 대한 결과는 만족치 못하다. 두 이론 모두 강점과 약점을 공유하기에 한쪽 면을 지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두 이론 중에 좀 더 연구가 되어야 하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것이 늦은 시기의 출이집트 이론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고고학적 증거가 이 이론의 중심이 되는데 그 증거마저도 늦은 시기의 이론을 뒷받침해

4) Kenneth Kitchen A, Ancient orient and Old Testament (chicago : Inter Varsity, 1966), pp. 72-73; H. H. Rowley, From Joseph to Joshua : Biblical Traditions in the Ligut og Archaeology (London : Oxford Univ, 1950), pp. 87-88.

5) James B. Pri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pp. 376-378.

6) K. M Kenyon, Digging up Jericho (London : Ernest Benn, 1957), pp. 256-263; , Archaeology in the Holy Land (London : Ernest Benn, 1979), p. 208.

7) J. Marquet-Krause, Les fouilles de Ay (et-Tell) 1933-35 (Paris : Biblio the que Archeologique et Historique,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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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BC 15세기의 이론은 열왕기상 6:1과 사사기 11:26이 확실한 증거로 그 이론을 증명해주고 있다.

가나안 정복의 시기

출이집트의 시기에 대한 문제만큼 계속적으로 논쟁이 되어온 것이 가나안 정복의 방법이다. 전통적으로는 출이집트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무력으로 정복한 것을 인정해 왔지만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별 비교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믿음을 부정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할 시기인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팔레스타인 유적물 문화의 변화를 연구한 결과 이 두 시대 사이의 유적물 문화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8) 그래서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했던 거민들이 동일한 문화를 소유했으며 동일한 민족 혹은 인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의 팔레스타인 정복 방법이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가 이스라엘 자손이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이론과 또 다른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원래 팔레스타인의 거민이었다가 그곳에서 나라를 건설했다는 이론이다. 무력 정복이론(The Conquest Theory)

이 이론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던 것으로 여호수아서가 언급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여기에 올브라이트(W. F. Albrignt)가 베이틴(Beitin)과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을 발굴하고 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BC 13세기에 팔레스타인을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결론을 지었기에 이 이론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무력 정복이론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두 가지 주장으로 나타난다. BC 13세기와 15세기의 정복설이다. 두 이론은 시기적인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외부에서 팔레스타인을 무력으로 정복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민 정착이론(The Settlement Theory)

이 이론은 처음에 알트(Albert Alt)에 의해 정립되었다.9) 이 이론도 무력 정복이론

8) William G. Dever, Recent Archaeological Discoveries and Biblical Research (Seattle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0), pp. 119-166.

9) Albert Alt, “The Settlement of The Israelite in palestine,” Essay Essays on old Testament History and Religion (Wilson oxford : Basil Blackwell, 1966), pp. 135-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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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팔레스타인 외부로부터 들어와 그 땅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두 이론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방법의 차이점이다. 정복이론과는 달리 이민 정착이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팔레스타인 고지대로 들어올 때 짧은 시간에 무력적인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점진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을 통하여 들어옴을 강조한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성경을 그들의 증거 자료로 삼고 있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사사기 시대의 말기까지도 12지파의 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바로 이 사실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정착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전쟁의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곳에 정착한 후에 일으킨 사건들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의 증거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라고 추정되는 중앙 고산 지역과 갈릴리 지역에서 방어벽이 없는 작은 마을들이 발견되었다. 이런 정착 형태는 해변가, 평야지대 그리고 북쪽 계곡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작은 마을들이 고산 지역과 갈릴리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점진적으로 그곳으로 들어와 정착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내부 혁명이론(Interanl Revolt Theory)

이 이론은 처음에 멘덴홀(George E. Mendenhall)에 의해 주창되었다가 후에 갓월드(Norman K. Gottwald)에 의해 다듬어졌다.10)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발생 기원은 팔레스타인 외부에서가 아니고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멘덴홀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형성된 그룹인 아피루(Apiru) 혹은 하피루(Hapiru)들이었다고 한다. 이 집단의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이 봉건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사회를 전복시키고 그들이 그곳에 자기들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게 되었다는 논지이다. 이 가설은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물 문화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나게 되었다. 즉 두 시대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점보다도 연계성이 더 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여호수아서에서 말하는 모습과는 다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 가설의 가장 큰 약점이며 문제점이다.

10) George E. Menden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Biblical Archaeologist, 25, 26-87; Norman 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1250-1050 B. C. E (Maryknoll, N.Y. : Orbis Books, 1979), pp.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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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에서는 정복의 과정과 사실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데에는 고고학적인 증거 자료와의 갈등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선 순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즉 성경이 일차적인 자료가 되어야 하고 다른 것은 보조 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단순 논리이다. 보조 자료들은 성경을 바르게 그리고 조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지 성경 내용의 진위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면 잘못된 접근 방법이 되는 것이다. 또한 고고학적인 증거 자료들은 언제든지 새롭게 해석 되어질 수 있기에 이런 자료들을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단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서의 역할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주요 주제들

여호수아서의 주요 내용들은 정복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것들과 마지막 장의 이스라엘 자손이 세겜에서 야훼께 새로운 헌신의 언약/조약을 맺는 것이다.

정복의 과정과 그 의미 이스라엘 자손의 팔레스타인 정복과 그 과정은 여호수아서 1장-12장에 나타나있다. 정복은 세 단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먼저 첫 번째 단계는 여리고 성과 가나안 중앙고지 지역을 중심으로 정복이 이루어졌다(수 6-9장). 두 번째 정복은 중앙고지를 중심으로 남쪽 고지지역과 남쪽의 언덕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지역들은 막게다, 립나, 라기스, 에글론 그리고 드빌 등이 여기 속한다(수 10장). 마지막 정복은 북쪽 지역의 큰 성읍 하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하솔 왕 야빈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합군을 대파하고 하솔을 점령하여 불살랐다.

전쟁은 이스라엘 자손이 수행했지만 그 전쟁의 주관자는 야훼이심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전쟁 준비의 과정과 실행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전쟁이 야훼 하나님과 관계된 예배 의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는 전쟁의 준비 과정에서부터 나타난다. 여호수아서 3:5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자신들을 성결케 하라고 명하는데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적으로 행해졌던 일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입구인 요단 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언약/조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라고 지시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수 3:14). 요단강을 건넌 후에는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다. 할례의식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조약인데 그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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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조약을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직후에 다시 행했던 것이다(수 5:3-5).

정복의 준비 과정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도 종교적인 의식임을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첫 번째 대상이었던 여리고 성의 경우가 좋은 본보기이다. 야훼께서 여리고 성을 이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정해진 제사장과 군사들만이 매일 성 주위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에 행하라고 하시고 제 칠일에는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나팔을 가지고 언약/조약궤를 메고 성을 일곱 바퀴 돌고난 뒤에 나팔을 불 때에 먼 곳에 떨어져 있던 백성들은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할 때에 성이 무너지는 이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일곱이란 숫자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숫자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때에 나타난 숫자이며 완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약/조약궤는 그 전쟁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양각나팔이 나타나는데 이 나팔은 양 뿔로 만든 나팔로서 특별히 희년에 불게 되었다. 이 양각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정복 과정의 모습을 살펴보더라도 이스라엘 자손의 전쟁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성벽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큰 성읍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힘들이지 않고 정복을 했다. 반면에 작은 성읍인 아이 성은 손쉽게 점령할 것 같았지만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에 아간의 죄가 그들 가운데서 제하여지고 나서는 쉽게 아이 성을 얻게 된다. 이 사실은 전쟁이 그들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성스러운 의식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헤렘(ḥerem)사상도 전쟁이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임을 말해주고 있다. 헤렘을 번역하면 “금지”라는 의미가 되는데 실질적인 뜻은 조금 차이가 있다. 헤렘의 근본 개념은 전쟁에서 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돌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 이루어진다. 전쟁에서 사로잡힌 성읍은 불태워지며 사람과 짐승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수 8:24-29). 이것을 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전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11)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방

11) Herem의 개념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BC 9세기의 모압 왕 메사의 비석문에 보면 Herem의 모습이 나타난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 “그모스(모압의 신)께서 나에게 말하시기를 가서 이스라엘로부터 느보를 취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밤에 가서 아침부터 정오까지 싸워 느보를 취하고 칠천 명의 남자들, 소년들, 여자들, 소녀들 그리고 시녀들까지 모두 죽였다. 그래서 그들을 다 없앰으로써 아사탈 - 그모스에게 바쳤다.” 참고, pri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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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풍속과 종교에 영향을 받은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써 순수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신 9:5).

언약/조약의 땅

이스라엘 자손들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지만 오랜 시간 동안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마침내 가나안 정착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래서 가나안 정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상에게 하셨던 언약/조약의 성취이었던 것이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 ”(수 21: 43).

여호수아서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를 통해 땅은 언약/조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의 순종과 헌신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풍요를 누릴 것이라는 말씀과 약속을 받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땅에서 추방되리라는 많은 메시지가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이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결과라고 예언자들은 선포하고 있다. 반면에 예언자들의 선포에서 땅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가장 큰 소망의 목표를 땅의 회복에 둔 것을 볼 때 그들에게 있어서 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거함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세겜에서의 언약/조약의 갱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그들에게 먼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역사를 말해주고 결단을 내리게 한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5)는 말과 함께 그들의 신앙의 선택을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언약/조약의 성취인 땅을 허락하셨으니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때까지도 온전한 야훼 신앙을 정립하지 못하고 혼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같은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수아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에 “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6)라는 말로 화답하며 야훼께서 그들의 신(神)이심을 다시한번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언약/조약의 갱신은 여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부터 비롯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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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을 위해 언약/조약과 약속을 주셨지만 그의 백성들은 그것을 어김으로 오히려 악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결과는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조약을 갱신하심으로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고 계신다. 메시아(그리스도)를 통하여 마무리가 지어질 때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져온 사건이 언약/조약의 갱신이다. 따라서 이 언약/조약의 갱신이 구약에서 중요하게 이해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 자체가 구속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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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 기

여호수아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만 섬기라는 요구하자 그들은 그 말에 동의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왕정시대까지 약 200년 이상의 공백시대 즉 사사시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경고한 벌을 내리시게 되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조약을 기억하여 그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보내게 되는데 그 구원자가 바로 사사들인 것이다.

사사기의 마지막 형태가 포로기를 시점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사사기 내용의 처음 기록은 상당히 일찍 이루어졌음을 사사기의 내용을 통해 알 수가 있다. 특히 사사기 5장에 나타나는 드보라의 노래는 왕정시대 이전 혹은 초기 왕정시대의 작품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12) 그래서 사사기는 왕정시대를 전후해서 기록되기 시작하여 후세에 완성이 되었음을 결론으로 내릴 수가 있다.

내용과 개요

사사기는 내용적으로 구분이 잘 되어있다. 1:1-2:5은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한 곳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계속하여 정복사업을 이루는 내용이 나타난다. 2:6-16:31은 사사기의 핵심 부분으로 여러 사사들의 활동 사항들이 언급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17-21장은 사사시대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미가의 신상으로 인해 미가와 단 지파의 갈등이 발생한 내용과 일부 기브아 사람들의 성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기브아 사람들이 속한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자손들의 전쟁 때문에 같은 형제를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사사기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12) W. F. Albright, “The Earliest forms of Hebrew Verse,” Journal of the palestine oriental society (1922), pp. 69-96.; R. K. Harri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9), p.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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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호수아의 미 정복지역 1:1-2:5

Ⅱ. 사사들의 활동사항

1. 사사시대의 요약 2:6-3:6

2. 남부 전투 : 옷니엘, 에훗, 삼갈 3:7-313. 북부 전투 : 드보라와 바락,입산, 엘론, 압돈

4:1-5:31, 12:8-15

4. 중부 전투 : 기드온, 아비멜렉, 돌라, 야일 6:1-10:5

5. 동부 전투 : 입다 10:6-12:7

6. 서부 전투 : 삼손 13:1-16:31

Ⅲ. 이스라엘의 타락

1 . 미가의 신상과 단 지파의 타락 17:1-18:31

2. 성적인 타락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내전 19:1-21:25

역사적인 배경

사사기의 시대적인 배경은 크게 두 그룹에 의해 다르게 이해되어지고 있다. BC 13세기의 출이집트과 정복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사사기는 BC 12-11세기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BC 15세기의 출이집트과 정복설의 주장자들은 두 배나 긴 역사를 지닌 BC 14-1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사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압제 당함에서 태평의 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계산해보면 적어도 410년이 된다. 이 숫자는 BC 15세기 출이집트과 정복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큰 증거의 자료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만약에 열왕기상 6:1에 나타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연도가 BC 970년 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480년을 더하면 1440년이 된다. 그러나 사사기의 나타난 410년과 엘리, 사무엘, 사울 그리고 다윗 왕의 연수 100년과 출이집트 후 광야 생활 40년을 합치면 출이집트 후 솔로몬 때까지는 480년이 아니라 적어도 550년이 된다. 550년과 480년 사이에는 70년이란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학자들은 사사기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들도 있어 연대적으로 서로 겹치는 경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사기 3:12-14에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를 말함, 신 34:3, 대하 28:15)을 점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경우는 이스라엘 전 지역이 아니라 일부분만 점령하였기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언급이 되지않아 이 사건 하나만 가지고 전 이스라엘의 시대적인 상황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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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또한 기드온이 미디안과 대적할 때에도 전 이스라엘의 지파가 참석한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지파인 므낫세(삿 6:5)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삿 6:35) 그리고 에브라임(삿 7:24)지파만 동참 하였다. 이 경우도 몇몇 지파들만이 행한 일부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도 취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기에 나타나는 사건들의 기간을 일률적으로 합해서 사사기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사기 시대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대는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변혁기인데 이때에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붕괴가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국가들도 그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중해 연안뿐만 아니라 그 인근지역까지 큰 붕괴가 있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도시국가들의 붕괴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팔레스타인 남서쪽에 하나의 단체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블레셋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뿌리가 “바다 사람들”(Sea People)인데 에게해에서 와서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이집트까지 침입하였다. 그 “바다 사람들”의 일부분이 팔레스타인 남서쪽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블레셋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 변혁기에 팔레스타인 고산지역과 갈릴리 남쪽지역, 네게브 동북지역 그리고 중앙과 남부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새로운 작은 마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마을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형성한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13)

주요 주제들

사사기의 중요 내용은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그들은 그 죄악의 길에서 부르짖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 그들을 압제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사사들

사사들(Sopetim)은 영어로 “Judges”로 번역되는데 현대적 의미의 “Judge”와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스릴 왕이 없었을 때에 일시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외부의 침입과 압제를 당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셔서 그들을 구원케 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군사

13) Robert B. Coote and Keith W. Whitelam, The Emergency of early Israel in Historical perspective (Sheffield, England : The Almond Press, 1987), pp. 1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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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이었다. 사사들은 주로 한 가지 사건의 해결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기에 그의 직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도 않았다.14)

직책 면에서는 영적인 면보다는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그들이 부름을 받았음을 사사기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적인 지도자로써의 모습을 지닌 사사가 드보라였다. 여기에서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그의 영적 지도력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책인 선지자라는 타이들에서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드보라가 여선지자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의 지도력과 태도에서는 영적인 지도자로써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사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영적으로 모범이 되는 모습보다는 흠과 실수가 많은 경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입다는 그의 말의 실수로 자신의 딸을 제사하는 실수를 범하였고(삿 11:30- 40), 삼손은 습관적으로 이방인 여자를 범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등한시하는 범죄를 행하기도 하였다(삿 14-15장). 결론적으로 사사들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사들은 대사사(major Judges)와 소사사(minor Judges)로 나눌 수가 있다. 대사사는 옷니엘(삿 3:7-11), 에훗(삿 3:12-30), 바락(삿 4:1-5:31), 기드온(삿 6:1-8:35), 입다(삿11:1-12:7) 그리고 삼손(삿 13:1-16:31)인데, 이들은 이방인과의 큰 전쟁을 한번 내지는 여러 번에 걸쳐 치룬 군사 지도자이며 그들의 업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된 사람들이다. 반면 소사사는 삼갈(삿 10:3-16), 입산(삿 12:8-10), 엘론(삿 12:11-12) 그리고 압돈(삿12:13-15)으로서, 이들은 주로 한 사건에만 관련되고 그들에 관한 내용이 많이 언급되지 않은 사사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드온을 기점으로 사사들의 영적 신호가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교

사사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배교 행위였다.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정착시켜 그들이 가꾸지도 아니한 식물과 건축하지 않은 건물을 주셨지만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을 떠났고 이방신들을 섬겼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4) 기드온은 큰 업적을 달성함으로 백성으로부터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8:23)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고 아버지의 명성을 등에 업고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다. 그는 다른 사사와 같지 않게 후기에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게 된다(삿 9:50-57). 그래서 아비멜렉은 사사기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된 경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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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때까지도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확실치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실 때 모세는 그를 부르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가 야훼를 전혀 몰랐는지 아니면 야훼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야훼를 많은 신들 중에 한 신으로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유일신으로서의 야훼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볼 때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야훼께서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 사십년 생활을 통해서도 야훼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도 제사한 이중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다. 옛적부터 내려온 종교적인 관습을 일순간에 제할 수 없었던 까닭에 그 행위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 되었던 모습을 사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신들을 따랐던 또 다른 이유는, 가나안 사람들의 우수성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광야에 있을 때 가나안 땅으로 보낸 정탐꾼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가나안 인들의 농산물, 신체조건, 견고한 성읍 그리고 기름진 땅 등에 대한 강한 인상이 있었다.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자신들과 가나안 인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면에서 가나안 인들의 것이 우수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들 문화에 쉽게 동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풍요의 신을 믿게 되면 농사와 자손들의 풍요를 보장받는다는 것 때문에 그 신들을 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배교 행위는 생활과 신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런 배교 행위를 방관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방법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을 교훈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이 배교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그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들을 압제케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악에서 구하게 하신다. 이런 형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주요 내용이 된다. 이런 형태의 좋은 예가 사사기 3:7-11에 나타난다. 먼저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김으로 배교를 하게 된다(삿 3:7). 이로 인해 야훼께서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붙이심으로 이스라엘이 그를 8년간 섬기게 된다(삿 3:8). 그 고통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워 그들을 구원하시게 된다(삿 3:9-10). 이와 같은 내용의 형태들이 사사기 3:12절 이후로도 계속되며 사사기 전체 내용의 주된 흐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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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사자

다른 책들보다 사사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야훼의 사자”(말아크 야훼)이다. 구약에서 총 59번이 나타나는데 사사기에서는 18번이나 언급이 되고 있다(삿 2:1, 4, 5:23, 6:11, 12, 20, 21, 22, 13:3, 13, 16, 16, 18, 20, 21, 21). 뿐만 아니라 동의어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사자”도 3번이나 나타난다(삿 6:20, 13:6, 9). 사자(使者, messenger)는 히브리어로 “malak”인데 우리말로는 천사라고도 번역이 된다. 야훼(하나님)의 사자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정의를 내려왔는데 공통된 의견은 사자(使者, messenger)는 하나님 자신의 대표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왜 사사기에는 “야훼(하나님)의 사자”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사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뜻이다. 그런 이유로 야훼(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경우도 나타난다.15) 사사기에서 사자가 자주 언급된다는 것은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사사시대에 직접 전달된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사사시대의 왕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왕정제도가 생겨난 후에는 야훼(하나님)의 사자가 왕들에게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16) 즉 사사시대는 강력한 지도력이 부재했을 때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반영되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15) 야곱이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과 더불어 씨름하여 이겼는데 그때 그 사람이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야곱이 더불어 씨름 하였던 하나님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16) 왕정시대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 뜻을 전하려고 했을 때에는 주로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졌고(왕하 1:3), 왕들의 능력밖에 있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나타났다(왕하 19:35, 대하 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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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기

전통에 따라 룻기는 구약내에서 순서의 위치가 변하여 왔다. 현재 히브리어 성경에서의 룻기는 성문서 중에서 순서로 네 번째이며 megillot(두루마리들, 오축)중에서는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17) 이 “megilot”이라고 불리는 다섯 권의 책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중요 절기 때에 사용되었던 의례서이다. 그래서 다섯 권의 책들도 절기의 순서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룻기는 오순절에, 전도서는 초막절에, 예레미야 애가는 아브월 구일에 그리고 에스더는 부림절에 각각 읽혀졌다.

절기의 순서에 따르면 아가서(유월절)가 룻기(오순절)보다 먼저 와야 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다. 시편, 욥기, 잠언, 룻기, 그리고 아가서의 순서적인 문제에 관해 Campbell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잠언의 마지막 장(잠 31장)의 마지막 부분이 “현숙한 여자”(’ēšet hayil)에 관해 언급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가족을 위해 일하며 지혜와 인애를 실천하며 특별히 야훼를 경외하는 여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잠언에서는 지혜를 여인으로 인격화하여 어리석고 미련한 여자와 비교하고 있다(잠 8-9장). 그런데 흥미롭게도 잠언에 나타난 현숙한 여인이란 표현을 룻기에 적용 시키고 있다(룻 3:11). 룻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칭찬을 받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언 뒤에 룻기가 위치한 것은 현숙한 여인이 바로 룻이라는 것을 강조하기위한 이유 때문이란 것이다.18)

룻기가 순서적으로 시편 앞에 위치한 때가 있었다. 이 전통은 시편 대부분의 작품이 다윗에 의해 쓰여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룻기의 마지막 부분은 다윗의 뿌리와 출생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다윗의 출생으로 룻기가 그 내용을 마감했기에 다윗의 활동과 업적이 다음 책에 언급되어져야함을 염두에 둔 배치였을 것이다.19)

17) 성문서 안에서는 책들을 두 그룹으로 그리고 개별적인 책들로 분류하고 있다. Emet(Truth)에 속하는 책들은 시편, 욥 그리고 잠언이며 Megillot(Scrolls)은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그리고 에스더서이다. 그 외에 성문서에는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그리고 역대상/하와 같은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18) Edward F. Campbell, Jr. Ruth in Anchor Bible (Garden City, NY.: Double day, 1975), pp. 32-36.

19) Robert L. Hubbard, The Book of Ruth in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 Eerdmens, 1988),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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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엘리멜렉 가족의 비극과 룻의 결심 1:1-22

Ⅱ. 룻과 보아스의 만남 2:1-23

Ⅲ. 나오미의 계획과 성공 3:1-18

Ⅳ. 룻의 상급(보아스와의 결혼과 아들의 출생) 4:1-22

기독교와 로마 카톨릭 성경에서는 룻기를 사사기 뒤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칠십인 역(LXX)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칠십인 역(LXX)에서 사사기와 룻기를 같은 위치에 놓은 이유는 시대적으로 두 권이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칠십인 역은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룻기가 전통과 시대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했던 것은 비록 짧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그 책의 중요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되고 있다.

저자 및 기록연대

룻기의 저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어왔다. 유대교의 전통은 사무엘을 저자로 인정하고 있으나 증거는 없다. 또한 룻기를 신명기-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의 한 부분으로 보아 포로기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룻기에 나타나는 이야기 형식이나 문화적인 배경에 비추어 초창기 작품 즉 솔로몬이나 그 보다 이른 다윗의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업을 무를 자에 대한 제도와 다윗 왕의 선택에 관한 내용들은 초기 전통에서 나타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룻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역사적 배경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은 1:1에 “사사들이 치리하는 때”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룻기의 내용을 통해서는 정확하게 사사시대의 어느 때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룻기의 마지막 부분의 계보를 통해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이기에 사사시대의 후반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보에서 보아스와 다윗 사이에 언급이 되지 않은 조상들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 정확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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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 이해를 위해 언급 되어져야할 부분이 바로 모압 인과 모압 땅에 대한 것이다. 모압에 대한 기원은 창세기 19:30-38에 나타난다. 롯의 딸들은 자기들의 배필이 없음을 한탄하다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아버지와 동침할 계획을 꾸민다. 그들의 의도가 달성되어 작은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는데 그가 바로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큰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그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과 모압 자손은 같은 민족임을 밝혀주고 있다.

모압은 사해 바다 남동쪽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모압 지방에는 큰 도시들 보다는 유목민 위주로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존재했었다. 사사시대에는 모압이 한때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하기도 했다(삿 3:12-14). 이 외에도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이스라엘과 모압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특별히 모압 지방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연결하는 “왕의 대로”가 있어 교통과 무역을 위해서도 중심 역할을 하였다.

주요 주제들

언약/조약의 사랑(Hesed)

하나님께서 언약/조약속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이 헤세드이다.20) 이 낱말은 인자, 인애 그리고 자비로 번역이 된다. 룻기는 총 85구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구절 속에서 적어도 하나님이 23번이나 언급이 된다. 이 사실은 여기서도 그의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조약을 맺은 자가 언약/조약의 길에서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상관없이 그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바로 룻기 내용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또한 그의 백성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 뿐만 아니라 룻도 한번 맺은 언약/조약의 사랑을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나타내주고 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시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20) 룻기에서 Hesed는 1:8, 2:20, 3:10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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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이 나오미와 한평생을 지낸다는 것은 상황적으로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으나 한번 맺은 관계를 결코 파기치 않으려는 룻의 결심이 보인다. 언약/조약을 지키려는 이 결단이 결국은 은혜로 바뀌어서 다윗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룻의 교훈이 큰 감동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의 어떠한 인물보다도 철저히 언약/조약을 지키고 실천했다는 것 때문이다. 룻은 언약/조약을 지킴으로 언약/조약의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조약으로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수혼 법과 기업을 무를자

룻기에 나타나는 수혼 법에 대한 개념은 신명기 25:6-10에 기초하고 있다. 한 남자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으면 그의 아내는 죽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하는 법이다. 룻기의 수혼 법은 신명기에 나타난 그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된 것이다. 원래 수혼 법은 형제 사이에서 적용되는 것이지만 룻기에서는 그 범위가 좀 더 넓어져 친족 사이에서도 그 법의 효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은밀한 의미에서 룻기의 경우를 수혼 법이라고 정의할 수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 개념과의 일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혼 법의 원래 취지는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하고 과부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수혼 법과 관련되는 법이 기업을 무를 자(goel)의 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한 사람의 땅이 팔렸으면 친척 중 가까운 자가 그 땅을 사서 그 족속의 땅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룻에게는 보아스 보다도 우선되는 “기업을 무를 자”가 있었으나 보아스의 아이디어로 말미암아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된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의 기업 무를 자 뿐만 아니라 남편이 된 것이다. 이 법의 근본 취지는 땅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또한 사회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다.

다윗의 계보

룻기는 마지막에 다윗이란 이름을 남겨놓고 내용을 마무리 짓고 있다. 룻기 내용의 절정이 바로 다윗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단적으로 다윗의 선택은 다윗 시대에서가 아니라 훨씬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아래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차후에 일어날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룻기의 내용이 이야기로써 단편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룻기 다음에 나타나는 사무엘서 그리고 열왕기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약에 구약에서 룻기가 빠져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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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다윗의 기원과 선택에 대한 사실이해도는 지금보다도 훨씬 낮았을 것이다. 또한 룻기는 신약에서 메시아로 고백된 예수의 뿌리에 대한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되어 비록 짧은 책이지만 정경으로써 구약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유대인의 아버지와 모압 인의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아들의 핏줄을 이어받은 예수이기에 그 분의 관심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향해있음을 신약 이전에 룻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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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서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의 말엽부터 다윗으로 인해 견고해진 왕정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래는 사무엘서는 한권의 책으로 취급되어 오다가 70인 역(LXX)에서 두 권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칠십인 역(LXX) 번역자들은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합쳐 왕국기라고 하였는데, 사무엘 상/하를 제1, 제2 왕국기로 그리고 열왕기 상/하를 제3, 제4왕국기로 불렀다. 그런 뒤, 사무엘서는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전통에 따라 지금의 명칭으로 나뉘어져 불리게 된 것이다.

저자 및 기록 연대

사무엘서 자체는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탈무드(Baba Bathra 14b)에 따르면 사무엘이 사사기와 룻기 그리고 사무엘서를 기록했다는 다소 억지스런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25:1과 28:3에 사무엘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있음으로 사무엘이 기록했다는 설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한 분열왕국 후에 일어난 사건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사무엘의 죽음 후 오랫동안도 이 책의 기록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참고 삼상 27:6). 이런 이유로 사무엘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사무엘서의 내용이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사무엘서에 나타난 사건을 직접 보고 체험한 이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내 용

사무엘

사무엘서는 사무엘에 관한 내용부터 시작이 된다. 사무엘은 나실인으로써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변혁의 시대에 큰 역할을 감당한 인물로 묘사된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써 그 사명을 감당하다가 이스라엘이 야훼의 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시기에 사사로써의 직무를 마감하게 된다.

사무엘이 사사로써의 사명은 마감했지만 또 다른 그의 직책인 선지자와 제사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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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의 역할은 사무엘상 8장 이후로 계속되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사무엘의 아들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 위에 왕을 세워 주기를 사무엘에게 요구한다. 이때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지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게 된다.21)

사 울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사람이다. 왕이 된 후에 사울은 용사로써 그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암몬의 위협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하는 목적을 충족시켜 주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만심과 판단 착오로 말미암아 사무엘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행위를 보이게 된다. 첫 번째 실수는 사무엘상 13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 직전에 사울이 직접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사건이다. 그 번제는 제사장인 사무엘이 드려야 하지만 이틀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초조해진 사울은 급한 마음에 자신이 제사를 집정하게 된다. 여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기다리던 백성들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가나안 땅의 왕들처럼 왕인 사울이 제사를 행한 것이다. 이 행위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제사장직에 대한 도전과 교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는 큰 책망과 함께 사울이 왕으로써의 기한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또 다른 사울의 실수를 사무엘상 14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 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집착했던 사울은 블레셋에게 승리할 때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금식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 명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꿀을 먹게 된다. 그 결과 요나단은 사울의 명을 어기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 죽음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백성들은 금식으로 인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심히 피곤한 상태가 되었고 급한 나머지 취한 짐승의 고기를 피채로 먹는 범죄를 범하도록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또 다른 사울의 과오는 사무엘상 15장에 나타난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아말렉의 왕인 아각을 사로잡고 그 외의 백성을 진멸하게 하였다. 하지만 가축 중에서는 좋은 것들은 취하고 가치가 낮은 것들만 진멸하는 선택적

21) 왕에 대한 요구에 사무엘은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삼상 8:6). 사무엘은 아마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가장 유력한 왕의 후보자 중의 한 사람이 분명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거절했을 때에 상당히 섭섭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는 말로 위로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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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방법을 취하였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부분으로는 부정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사로잡은 사람과 모든 것은 마땅히 진멸되어져야 하지만 사울은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사울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사역 면에서 조명해보면,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즉 이스라엘 자손을 일시적으로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는 사사와 같은 사명을 담당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울은 실패한 사역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도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울의 실패로 말미암아 다윗이 그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

다윗의 사역은 사울과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사무엘상 16-31장에서는 그들 사이의 갈등은 사울에게는 몰락을, 다윗에게는 힘을 얻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갈등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둘 사이의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갈등의 시작은 다윗이 골리앗을 제압함으로 비롯된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있는 세 형들인 엘리압,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를 면회하러 갔다가 골리앗과 대결하게 된다.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의 형과 사울 심지어 골리앗도 조롱하였지만(삼상 17:28, 33, 43), 다윗은 담대히 맞서 싸워 승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승리가 사울에게는 자기 권력에 대한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귀환 할 때에 여인들이 뛰놀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고 경계하게 된다.

차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는 단계를 넘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로 인해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계획을 꾸미는데 심지어 자신의 딸인 미갈까지도 이용하게 된다.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어 보이게 되는데 이때 요나단의 변호와 미갈의 도움으로 다윗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도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에 대적인 사울의 가족들도 그의 도움이 된 것이다. 사울로부터 피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준비된 사람들과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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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과거의 대적이었던 블레셋을 통해 도움을 얻게 되고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는 사울의 태도와는 반대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기름 부은 자를 해하지 않는 믿음의 용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침내 사무엘의 예언처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 힘의 균형이 다윗에게 넘어오게 된다. 사울의 몰락과 함께 다윗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다 윗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삼하 2:4, 5:3).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전체 지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또한 권력이 그에게로 집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하 9장 이후부터는 다윗의 범죄함으로 초래된 가족끼리의 분쟁으로 인해 그의 통치 세력과 신앙의 강도가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사무엘하 1-8장에서는 다윗이 그의 세력의 기반을 구축해나가고 안정을 이루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높은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다윗은 사울 때부터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해오던 블레셋의 세력을 차례로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방 세력들인 아람, 모압, 암몬 그리고 아말렉 등을 쳐서 자신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게 된다(삼하 8장). 다윗의 세력과 영토 확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는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인 능력도 군사적인 것에 못지않게 뛰어났다. 다윗이 유다에서 왕이 될 쯤에 사울의 군대 장관인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북쪽 지역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해 한 동안 다윗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사이에는 전쟁이 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윗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브넬이 배반을 하여 다윗측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나 아브넬은 요압이라는 다윗의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브넬이 요압의 형제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요압에게 심한 저주를 하게 된다. 또한 진정으로 조의를 표함으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게 된다. 아브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승산이 없음을 알아차린 이스보셋의 장군들인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죽이고 목을 베어 다윗에게 바치게 된다.

이때에도 다윗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기보다는 목을 가져온 두 사람을 헤브론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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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무덤에 장사해 주게 된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은 북쪽 사람들의 인심과 지지를 얻게 되어 마침내 그들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다. 다윗은 힘으로 사울의 집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때를 기다려 평안한 가운데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또한 사울의 손자 즉 요나단의 아들인 절뚝발이 므비보셋에게도 사울이 소유하였던 밭을 다시 돌려주고 다윗과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도록 은총을 베풀게 된다. 이것은 요나단에 대해 은혜를 갚는 것뿐만 아니라 사울의 집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포용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자였지만 그 역시 인간인 까닭에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의 실수는 가족끼리의 분쟁을 불러 심각한 위기에 도달하게 된다. 다윗은 그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여인의 잉태됨을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죽음에 몰아넣게 된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 하리라”(삼하 12:10)는 말로 다윗의 행위에 대해 책망을 하신다. 예언대로 다윗 집에 분쟁이 일어나는데 그 시작은 다윗 자녀안에서 간음사건으로 비롯되었다. 다윗의 아들인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짝사랑하여 그를 간음하고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실행하게 된다. 이 일로 다윗의 책망을 받은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여 대항하게 된다. 압살롬은 주도면밀하여 반역 전에 모든 정세를 파악하고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준비 작업을 마치게 된다. 이런 결과로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가서 스스로 왕이 되어 선포하자 많은 자들이 압살롬에게 돌아와서 다윗을 대적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떠난 것을 인식한 다윗은 후궁 열 명만 남겨놓고 궁에서 도망한다.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압살롬은 심복 아히도벨의 말에 따라 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과 동침하여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심히 미워함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게 된다. 이 행위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1). 다윗이 비밀스럽게 행했던 것(밧세바 사건)을 그의 아들 압살롬은 온 백성이 보는데 행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대해 징벌하신 것이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후새로 하여금 압살롬의 신복 아히도벨이 세운 계략 즉 궁을 점령한 밤에 군사 일만 이천을 택하여 다윗을 뒤쫓아 죽이자는 계획을 무력화시켜 다윗을 도망케 하여 목숨을 보존 시켜주신다. 결국 시간을 얻은 다윗은 그의 군사들을 정비하여 압살롬의 군사들을 물리치게 된다. 이때 압살롬은 다윗의 장군인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비록 군사적인 승리는 쟁취되었지만 다윗은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운 죄의 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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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무엘에 관한 내용 (삼상 1-7장)

1. 사무엘의 탄생, 소명 그리고 초기사역 삼상 1:1-3:21

2. 블레셋의 침입 삼상 4:1-7:17

Ⅱ. 사울에 관한 내용 (삼상 8:1-31:13)

1. 초대 왕 사울 삼상 8:1-12:25

2. 사울의 불순종 삼상 13:1-15:35

3. 사울과 다윗의 갈등 삼상 16:1-28:2

4. 사울의 몰락 삼상 28:3-31:13

Ⅲ. 다윗에 관한 내용 (삼하 1-24장)

1. 다윗의 전성기 삼하 1:1-10:19

2. 다윗의 침체기 삼하 11:1-20:26

3. 다윗의 마지막 때 삼하 21:1-24:25

받게 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사무엘하 21-24장은 다윗이 다시 환궁하는 과정에서 반대에 부딪치는 내용과 그것의 해결 그리고 다윗이 야훼를 향해 부른 구원의 시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과 인구조사에 관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사무엘 상/하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역사적 배경

사무엘서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른 책에 비해 비교적 짧다. 사무엘의 출생(BC 1120년)에서부터 다윗의 통치 말기(BC 970년)까지 약 150년간에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상의 시대 배경은 초기 철기 시대에 속하는데 이때는 가나안 땅 내에서나 외부적으로 큰 변동이 없는 조용한 시기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블레셋인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이었다. 이스라엘이 중앙고지 지역에서 정착하여 저지대로 그 세력을 팽창하려는 노력이 저지대와 언덕지역에 위치한 블레셋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갈등을 이미 사사시대부터 있어왔기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로 인해 왕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울의 중요임무는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블레셋의 세력은 사울시대에도 여전히 그 위세를 떨쳤지만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결정적으로 블레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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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압하게 된다. 그 후부터는 성경 기록상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는 블레셋의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사무엘하의 시대상황은 삼상의 모습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무엘상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왠지 불안한 상태였다고 한다면 사무엘하의 상황은 발전적이고 안정적이다. 사무엘하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는데 특히 주변의 강대국들이 주변 세력보다는 자신들의 나라의 문제에 매달렸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이 되었다. 앗수르(앗시리아)는 다윗 이후 한 세기가 지나기까지 크게 성장했지만 영토 확장보다는 나라의 내실을 다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이집트는 21왕조 시대(BC 1070-930년)에 해양민족(sea people)들의 침입에 의한 영향으로 그 세력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중기와 후기 청동기 시대 때에 큰 세력을 떨쳤던 힛타이트(헷족속) 제국은 초기 철기시대(BC 1200년)에 와서 역시 해양민족들에 의해 붕괴되어 버린 후 조그만한 도시국가로 전락해 버려 주변 국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라가 안팍으로 안정을 이룸으로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열어가는 기초를 다지는 시대가 된다.

중요 주제들

선지자와 선견자 구약에서 선지자(나비)라고 번역되어지는 히브리 단어는 300번 이상 나타나고 있다.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단어는 nabi 인데 일반적으로 선지자로 불리고 있다. 사무엘상 3:20에서 사무엘이 Nabi로 나타나는데 이 낱말도 여기에서 선지자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9:9에서는 사무엘이 선견자로 불리우는데 여기에서는 ro'eh 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여기 기록에 따르면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를 일컬었더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선지자와 선견자의 사명과 기능이 유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용어 자체의 의미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방법에는 조금의 차이점이 있다. nabi(선지자)는 말씀 즉 선지자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가 깊다.

사무엘상 3:19,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또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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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말씀으로 선지자 사무엘에게 전하셨다는 의미인 동시에 받아들인 그 말씀으로 인해 사무엘이 선지자로써의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기에 선지자가 꼭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정체성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선견자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자이다. 선견자라는 용어는 ra'eh 즉 “그가 보았다”라는 낱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현상을 나타내실 때 다른 자들은 인식 못하나 선견자들은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선지자의 초기 명칭이 선견자였다면 하나님께서 예언 역사의 초기에는 주로 현상과 이상을 통해 그분의 뜻을 나타내셨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정경 선지자들 중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상으로 통해 받은 것을 볼 때 선견자의 모습이 후세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22) 또 다른 부류의 선지자가 있는데 “ḥozeh”라는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4:11에서 선지자 갓을 다윗의 선견자로 칭하고 있다. ḥozeh는 “ḥozon”(그가 보았다)이란 동사에서 유래된 분사형태인데, ro'eh처럼 “보는 자” 즉 선견자로 일반적으로 번역이 되고 있다. 이들은 이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에 기능면에서 ro'eh와 큰 차이가 없는 사역자로 인식된다.

사무엘상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예언의 말씀을 받는 과정을 보면 여러 가지 악기들이 사용되고 또한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삼상 10:5-13). 이것은 평범함 보다는 좀 특별한 상황 속에서 예언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개별적으로 뿐만 아니라 무리를 지어 예언활동을 하기도 하였다(삼상 10:5, 19:18-24). 선지자의 집단이 후세에도 계속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의 전통이 조직적으로 교육이 되어 전통으로 내려왔음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야훼의 영-루아흐 야훼

구약에서 “영(Rûaḥ)”란 단어가 수없이 나타나지만 “하나님 혹은 야훼의 영/신”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단지 39번뿐이다. 그 중 사무엘서에서는 15번이

22) 자신의 이름이 성경책의 이름이 되고 있는 선지자를 “정경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상으로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정경 선지자들은 이사야, 에스겔, 아모스, 나훔 그리고 하박국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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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는데 다른 책에 비하여 이 단어가 많이 언급되고 있다. 7번은 “하나님 혹은 야훼의 악신”으로(삼상 16:14, 15, 16, 22(3), 18:10, 19:9), 나머지 8번은 ”하나님 혹은 야훼의 신“으로 번역이 되고 있다(삼상 10:6, 10:10, 11:6, 16:13, 14, 20:20, 23, 삼하 23:2). 악신은 특별히 사울과 관계해서 언급이 되어지는데 사울은 악신으로 인해 번뇌케 되고 또한 힘을 얻어 다윗을 해하려고 한다. 이 악신은 사울을 고통스럽게 하며 상대를 해치도록 하는 말 그대로 악을 가져오는 도구가 되고 있다. 사울의 경우 이외에 악신이 임한 왕이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다(삿 9:23).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형제 70명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도 거절한 왕위에 스스로 오른 불량자였다. 그는 세겜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실 때 세겜 사람들이 오히려 아비멜렉을 대적하여 그를 죽이게 된다.

사울과 아비멜렉의 사건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첫째가 악신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결과이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 역사의 영역에 포함되어 지는 것이다. 둘째는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은 자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절차에 따라 스스로를 높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악신이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삶의 계획과 결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악신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특히, “야훼의 신”은 사무엘하에서 8번이 나타나는데 그중에 5번은 예언과 말을 하는 것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삼상10:16; 10:10; 19:20,23; 삼하23:2). 다른 한 번의 경우는 사울이 암몬 사람과 싸우기 전에 크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어 용사로써의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다(삼상 11:6). 사울의 경우와 비슷하게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그 날 이후로 야훼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크게 감동을 받게 된다(삼상 16:13). 마지막으로 “야훼의 신”이 언급되는 것은 사울로부터 “야훼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하는 부분이다(삼상 16:14).

흥미로운 것은 사울에게 임했던 “야훼의 신”이 떠난 것은 구약에서 특이한 현상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야훼(하나님)의 신”은 특별한 사역과 목적으로 인해 개인에게 임하게 된다. 따라서 한번 개인에게 임한 그 “신”은 계속적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고, 사역과 목적이 마치면 다시 떠나심을 알 수 있다. 즉, 구약에서 “야훼의 영”(루아흐)은 기능적으로 작동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을 때와 삼손의 머리털이 잘렸을 때를 보면 “야훼의 신”과 “야훼”가 떠났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야훼의 신이 계속적으로 임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서는 떠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으나 정확하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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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경우에 “야훼의 신”이 떠나게 되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번 임한 “야훼의 신”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머물러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범죄했다고 영원히 그들 가운데서 ‘야훼의 신“이 떠났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관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되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만 제외하고 하나님의 신은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구약의 곳곳에서 증거로 나타난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하나님(야훼)의 신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계심을 언급하고 있다(사 59:21, 학 2:5). 그러나 “임재”를 뜻하는 “쉐키나”가 내포하는 의미는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떠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구약에서 발견해야 할 “쉐키나”의 진정한 의미는 이스라엘에 임재하신 야훼께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쪽에서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야훼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시기 위해서 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왕정제도와 다윗의 언약/조약/계약

왕정제도는 사무엘서에서 처음 언급되어 출발된 것이 아니다. 이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이다(창 17:6). 또한 신명기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정착 후에 고려할 왕정제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 17:14-17). 그러나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른 열방과 같이 자신들을 위해 왕을 세워달라는 말에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과 함께 섭섭함을 나타내시게 된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택한 왕으로 인해 그들이 고통을 받고 야훼께 부르짖더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단언하시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표현은 마치 왕정제도의 자체를 반대하신 것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왕정제도에 대한 계획을 이미 세워 놓으셨기에 섭섭함을 표현하신 이유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사무엘상은 왕을 요구한 백성들의 동기와 의도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장로들이 왕을 요구할 때 왕의 필요성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었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왕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나아가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삼상 8:20). 즉 용사로써의 왕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런 요구는 왕정제도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음을 신명기 17:15-20에서 밝히고 있다.

신명기 17:15-20에 따르면 왕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며 왕의 주요 사명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율법과 규례에 따라 인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왕이 피해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먼저 말과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 금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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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위해 많이 쌓지 말라고 경고한다. 특별히 이 경고에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즉 군사력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간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왕을 세워 그들의 용사가 되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용사는 하나님이신데 이스라엘이 다른 용사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리는 행위가 된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합당한 왕정제도를 요구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것이기에 기쁨으로 승인하셨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난 의도를 가지고 왕정제도를 요구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정제도를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의 참된 용사는 야훼이심을 곳곳에서 나타내시고 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을 준비할 때 먼저 하나님께 묻게 되는데 그때에 “야훼가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사를 치리라”라고 말씀하신다(삼하 5:24). 이것은 다윗이 왕이지만 이스라엘의 용사가 야훼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사무엘하 7:1에서 다윗의 모든 대적을 야훼께서 다 파하셨다고 했는데 이것도 이스라엘의 진정한 용사와 왕은 야훼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게다가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의도를 가지고 왕정제도를 원했지만 이미 계획하셨던 것이기에 그 제도를 허용하시게 된다. 이미 왕정제도는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된 것이었는데 다윗에 의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나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조약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음을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예수 계보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한 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 언약/조약의 수혜자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처럼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 언약/조약을 주셨는데 그 자세한 내용이 사무엘하 7장에 잘 나타난다.

“야훼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

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

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 ”(삼

하 7:11-14).

위의 내용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를 다윗의 후손을 통해 유지케하며 다윗과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놀라운 언약/조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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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 언약/조약은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특별히 이 언약/조약의 영원함을 사무엘하에서는 일곱 번이나 반복되게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다(삼하 7:13, 16, 24, 25, 26, 29, 23:5). 다윗의 후손들이 실수와 과오를 범하면 징계는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영원히 은총은 빼앗지 않으시겠다는 영원한 축복의 언약/조약인 것이다. 이 언약/조약으로 인해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지만 그의 후손들이 계속적으로 왕위에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따라서 이 언약/조약 역시 다윗보다는 야훼의 약속에 대한 신실성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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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열왕기의 내용은 다윗의 말년에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그의 형 아도니야의 도전을 뿌리치고 왕으로 즉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남유다 왕국 멸망후의 사실들을 언급하면서 마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BC 970년에서 560년까지 약 400년 이상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무엘서처럼 열왕기도 처음에는 한 권의 책으로 취급되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열왕기를 “melakim”(왕들)이라고 칭하면서 한 권의 책으로 인정되다가 후에 편리에 따라 두 권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70인 역(LXX)에서는 열왕기를 제3, 제4 왕국기로 사무엘서를 제1, 제2 왕국기로 구분하였다. 열왕기라는 명칭은 Jerome이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역을 편찬하면서 이 두 권의 책을 제3, 제4 열왕기로 부르게 되면서 부터이다.

저자와 기록 연대

사무엘서와 마찬가지로 열왕기 본서에서도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Baba Bathra 15a)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이 책의 저자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인 52장의 내용과 열왕기하 24:18-25:30의 내용이 상당히 일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두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일치점 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크기에 예레미야의 저작설은 문제가 있다.23) 예레미야의 사역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이루어졌기에 적어도 BC 586년 이전으로 추정하는데 열왕기하의 마지막 내용은 BC 561년을 그 시점으로 하고 있다. 이렇듯 시기적으로 서로 불일치하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열왕기의 저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기록 연대가 BC 561년을 그 시점으로 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열왕기상 8:8에 보면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채(poles)가 “오늘까지”성전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오늘까지”는 이 책을 기록한 시점이 된다. 이 구절에 따르면 기록한 시기가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이기에 성전이 소실된 후인 BC 561년도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열왕기하 13:23에도 앞에 언급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조약한 사실로 인해 “이때까지” 이

23) Burk D. Long, “1 King” in The form of Old Testament Literature (Grand Rapids : Eerdmans, 1984), pp.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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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엘 자손을 쫒아내지 아니하셨다는 내용이다. 즉 기록 시점인 “이때까지”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이다. 이 두 구절은 열왕기의 기록 연대를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전으로 끌어올리고 있으나 열왕기의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은 멸망 후를 그 시점으로 하고 있다. 결국 기록 연대의 문제점처럼 이 책의 저자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열왕기의 저자 혹은 편집자는 신명기 역사서를 기록한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 저자 혹은 편집자의 목적은 남과 북왕국의 멸망은 이스라엘 자손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노트(M. Noth)는 열왕기가 한 사람에 의해 기록 혹은 편집되었음을 밝히면서 다른 저작설 즉 열왕기가 다른 문서(J. E. D. P.)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은 배격하고 있다.24) 최근까지도 노트(M. Noth)의 주장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노트(M. Noth)가 주장하는 한 사람의 저작설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열왕기는 400년 이상의 시대적 기간을 다루고 있기에 한 사람의 저자가 목도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 보다는 편집자로써 구전과 여러 가지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열왕기를 완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25) 내용적으로 볼 때 기록 혹은 편집 연대는 예루살렘 멸망후의 시점임에 분명하다.

내 용

열왕기상의 내용은 사무엘하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이 되고 있다. 다윗의 마지막 때의 내용이 사무엘하의 결론 부분과 열왕기상 1-2장에 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2장부터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어 통치하며 쌓은 업적의 내용과 그의 부족한 점들이 열왕기상 11장까지 나타난다. 다윗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경우도 긍정적인 면에서 기억될만한 점과 반면에 부족한 점을 동시에 찾아볼 수가 있다. 먼저 솔로몬은 지혜자

24) Martin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2d ed. JSOTsup15 (Sheffield : JSOT Press, 1991), pp. 134-145.

25) 열왕기에서는 기록에 사용된 몇 가지 자료들이 언급된다. 그중 하나가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인데 솔로몬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는 왕상 3-11장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이란 책이 나타나는데 열왕기에 18번이나 언급이 되고 있다(왕상 14:19, 15:31, 16:5, 14, 20, 27, 22:39,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세 번째로 “유다 왕 역대지략”이란 책인데 열왕기에서 15번이 언급된다(왕상 14:29, 15:7, 23, 22:46, 왕하 8:23, 12:20, 14:18, 15:6, 36, 16:19, 20:20, 21:17, 25, 23:28, 24:5). 마지막으로 언급된 책은 “노래의 책”(The Book of the song)인데 이 책은 히브리어 Text에는 나타나지 않고 칠십인 역(LXX)의 왕상 8:53절에 언급이 되고 있다. 열왕기의 내용을 보면 앞에서 언급된 자료 외에 더 많은 자료들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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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크게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기브온 산당에서 야훼께 하루 동안에 제물 일천마리를 드리는 제사를 하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구할 것을 물으신다. 솔로몬은 왕으로써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26)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하필이면 솔로몬이 구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아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는 부와 영광도 함께 받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 무한한 신적 지혜가 유한한 죄인에게 주어졌을 때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test)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부 그리고 영광에 관한 것은 열왕기상 3-4장에 잘 설명되어지고 있다.

신적 지혜가 자신에게 들어오자 솔로몬은 고대근동의 일반적인 왕들처럼 건축물을 많이 짓게 했다. 먼저 7년에 걸쳐 “야훼의 집”을 건축하였고 그 후에 “왕의 집”을 13년 동안 건축하여 준공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세웠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하솔, 므깃도, 게셀을 요새화하게 된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기초를 세웠다면 솔로몬은 그 기초위에 골격을 만든 왕이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주변 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나라의 경제를 견고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외부침입을 차단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솔로몬을 언급할 때 그의 지혜와 업적을 강조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것은 오히려 솔로몬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과 범죄 그리고 배신/반역이다. 솔로몬은 여자와 돈을 더 우선시하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아내가 이집트의 공주였다는 사실은 그가 언약/조약 백성의 삶을 포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솔로몬은 이방인 왕들 경우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는 1,000명의 후비와 빈장을 거느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또한 솔로몬은 이방인 후비들에게 각자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용하여 산당을 짓게 했으며, 자기 자신도 이방신들을 섬겨 야훼에게로부터 마음을 돌이키는 배신/반역을 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중개무역을 통해 1년에 금 666달란트를 벌어들여 온갖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그 결과 솔로몬은 그의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와 쌓았던 좋은 관계를 무시하여 자신의 업적을 위해 무리한 세금과 노역을 요구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이념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처음부터 여자와 돈만 아는 죄인이었을 뿐이다.

솔로몬의 의도적인 행위들은 야훼께서는 두 가지 심판을 행하시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심으로 평화가 깨어지는

26) 히브리어 성경에는 “지혜로운 마음”이 leb shome‘a 로 나타나는데, 이 말들을 직역하면 “듣는 마음” 혹은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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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즉 에돔 사람 하닷과 다메섹의 르손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어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외부의 세력에 대하여 견제해야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둘째로는 이스라엘의 내부적인 반란으로 인해 그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는 심판을 맞게 된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서 모셨던 노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생각을 반영시킴으로 유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파들이 반발하여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예루살렘의 북쪽지역을 중심으로 북왕국을 형성하게 된다(왕상 11:14-12:33).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외교면에서 높은 업적을 남겼지만 지혜자로서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말씀 즉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란 말씀을 지키지 못함으로 그의 업적이 “헛되고 헛됨”(전 1:2)으로 변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가 솔로몬을 위대한 왕으로 혹은 지혜자로 기억하는 것은 다분히 유대교와 탈무드의 영향 때문이기에 이제부터라도 그가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알아야 될 것이며, 우리 안에 독버섯처럼 번져있는 유대교와 탈무드의 내용들을 제거해야 될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을 분석해 보면 솔로몬은 그의 인생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야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그의 삶을 볼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 못함으로 인해 다른 풍속과 이방신을 쫒았던 많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왕들과 다름이 없는 왕으로 평가 되어 진다.

초기 분열왕국 열왕기상 12장부터는 분열왕국의 시작과 배경들이 언급이 되고 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아들 르호보암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르호보암에게 그의 부친 솔로몬이 행했던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솔로몬이 요구한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가볍게 하라는 요청이었다. 이 요청에 그와 함께한 소년들의 말에 따라 르호보암은 그의 부친인 솔로몬이 부여하였던 것보다도 더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메게 하겠다고 말함으로 북쪽지역 지파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그들은 르호보암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함을 보고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왕상 12:16)”라는 말로 솔로몬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그 후에 르호보암은 유다지파의 추대로 왕이 되었지만 그 외의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삼게 된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건축하여 수도로 삼고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해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두고 예루살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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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대신할 제사처소로 삼게 한다. 그래서 남왕국과 북왕국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면에서도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유다)왕국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강한 단결을 보이는 반면에 북(이스라엘)왕국은 넓은 지역과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그 기반을 다져나가게 된다.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열왕기상 17장-열왕기하 8장에서는 열왕기 내용 중에서 독특하게 왕들에 대한 내용보다는 두 선지자의 행적과 업적이 강조되고 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의 종교적인 혼탁함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극에 달했다.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국가종교를 야훼종교에서 바알종교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하기 위해 바알의 선지자가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가 400명 곧 850명을 요청하였다. 반면에 이세벨이 야훼의 선지자를 멸할 때 오바댜가 숨긴 선지자의 수는 100명뿐이었으니 결국 이방신의 선지자대 야훼의 선지자 비율은 850대 100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엘리야가 이방신의 선지자와 상대하여 대결을 벌인 것은 야훼와 이방인 신들을 차별화 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 신들 보다는 야훼가 참 신이며 능력의 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 엘리야의 행적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바알은 에블라(Ebla)와 이집트에서 BC 약 2000년 전부터 소개가 되어 왔지만 그가 광범위하고 자세히 소개된 곳은 우가릿 텍스트(Ugarit text)다. 여기에서 소개된 바알은 구약시대에 종교와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역이나 사람 이름에서 바알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을 구약에서 종종 찾아볼 수가 있다. 우가릿 텍스트에서 나타난 바알은 여러 기능과 타이틀이 붙어있지만 그 중에서도 많이 언급되어지는 것이 바알이 폭풍의 신이라는 것이다. 폭풍의 신이 동반하는 것이 천둥과 번개이다. 그러한 모습이 우가릿 텍스트에 잘 표현되어있었던 것이다.27)

바알은 근본적으로 풍요의 신이기 때문에 그의 상징이 폭풍과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를 동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이 바로 우가릿에서 발견된 석비에서 그는 오른손으로 곤봉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은 번개 모양을 한 나무를 들고 서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오른손에 든 곤봉은 천둥을 나타내며 왼손에 잡은 것은 번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상에서도 우가

27) James B.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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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 텍스트에 나타난 바알의 상징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야훼에게도 반영되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알이 참 신아 아니라, 야훼께서 참 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야훼께서는 바알을 상징하는 천둥과 번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심으로서 바알을 무력화시키고 바알은 가짜임을 드러내셨다.

열왕기상 18:24에 보면 엘리야가 이방인 신과 대결할 때 제단의 번제물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천명할 때 백성들이 그 말에 동의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이방인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뛰놀면서 불의 응답을 구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때 엘리야는 저희에게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할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왕상 18:17)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이때 그들은 규례에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며 바알의 응답을 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제단에 네 통씩 세 번의 물을 붓게 하고 그가 야훼께서 응답 하소서 라고 부르짖었을 때에 “이에 야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28)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이방인 선지자들은 바알신이 폭풍과 천둥과 번개를 주관하는 신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바알은 그런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반대로 이스라엘의 신이신 야훼께서 그런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다.

엘리야와 관련된 사건 중에서 불로써 야훼의 능력을 보여주신 부분이 열왕기하 1장에 잘 나타나있다. 아하시아 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 그 상태를 에그론 신인 바알세붑에게 묻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이 일로 인해 엘리야는 왕이 죽겠노라고 천명한다. 이 말을 들은 아하시아 왕이 50부장과 그 수하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냈다. 이때 그들을 엘리야가 징벌하게 되는데 그때의 징벌 도구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었다. 이 불이 내려와 50부장과 50명 모두를 불살랐다. 이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을 주장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엘리야의 퇴장 때에도 불 수레와 불 말이 등장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별히 그를 직접적으로 하늘 쪽으로 올려 이동시킨 것은 회리바람이었는데 여기 나타난 바람이 원래는 바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어졌지만 그 바람조차도 야훼께서 보여주신 초자연적 현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폭풍의 신인 바알과 관련하여 붙여진 다른 명칭은 “구름을 타고 다니는 자”이다. 이 개념은 바알이 구름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들 즉 천둥, 번개, 비를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 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열왕기상 17-20장에서 보면 이렇게 구름과 비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바알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계속 가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간접적으로 바알이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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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비를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의 신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반면에 열왕기상 17:1에 보면 비와 구름을 조정하시는 분이 야훼 하나님이심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엘리야가 기도할 때 수년 동안에 내리지 아니하였던 비가 내림을 보여줌으로써 참 신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광적인 우상숭배로 인하여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타락된 생활 속에 빠졌을 때 엘리야는 단신으로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여 저들과 대결하여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열왕기상 17-20장에서 직접적으로 야훼께서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엘리야가 이방인 선지자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바알에게만 있다고 믿었던 그 능력이 오직 하나님만을 통하여 나타남을 밝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공중으로의 이동 후에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자, 후계자로서 그의 뒤를 이어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엘리사가 열왕기하 2장에서 처음 소개될 때부터 그는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의 스승인 엘리야는 여러 사역지를 옮겨 다니며 옮길 때마다 “여기에 머물라”는 말로 엘리사를 뒤로 하려고 했지만 세 번씩이나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며 끝까지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따랐다(왕하 2:1-11). 엘리사는 그의 의지와 열정으로 말미암아 엘리야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엘리사의 집요함에 엘리야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라는 말을 할 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라고 대답하게 된다. 그의 요청대로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게 된다. 열왕기하 2:19-6:7에서는 그가 행한 이적의 내용들이 언급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엘리야가 사라진 후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가지고 엘리사가 요단강을 치자 물이 갈라져 엘리사가 건너게 된다(왕하 2:12-14). 또한 엘리사가 벧엘로 갔을 때 길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그를 대머리라고 조롱하자 엘리사가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니 암곰 두 마리가 나와 바알 종교의 젊은(나아르) 사제들 중에 42명을 찢어버리는 이적이 나타난다. 이외에도 엘리사는 이적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여러 사람들을 돕는 모습도 보여준다. 선지자 생도의 아내 중 과부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빚으로 인해 채주에게 아들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엘리사가 기적적으로 기름을 공급함으로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아들들을 구하게 된다(왕하 4:1-7). 또한 엘리사는 수넴에서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잉태케 하는 이적을 행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그 아이가 죽어 버렸다. 이에 엘리사는 그 아이를 다시 살리게 됨으로 능력을 보이게 된다(왕하 4:8-37). 길갈에서는 독이 든 국을 해독시키고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들어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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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채소로 100명을 먹이고 남는 이적을 행하게 된다(왕하 4:38-44). 열왕기하 5장에서는 아람 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을 그의 문둥병에서 낫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나아만은 야훼만이 참신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또한 선지자의 생도가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물에 빠뜨렸을 때에 엘리사가 나무 가지를 물에 던져 도끼가 떠오르게 하는 이적도 행하게 된다.

한편 엘리사는 전쟁에서 적들을 물리치는 능력도 보여준다. 열왕기하 3장에서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함으로 이스라엘이 유다와 동맹하여 모압을 쳐서 승리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엘리사는 골짜기에 개천을 파게 하여 물이 넘치도록 하였는데 아침에 이 개천의 물을 바라본 모압 인들은 해가 물에 비치므로 물이 붉어 피와 같이 보여 이스라엘 내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방심한 모압 인들이 이스라엘 진으로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 군대가 그들을 쳐서 물리치게 된다. 열왕기하 6:10-7장에서는 아람 군대들과 이스라엘이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들로 하여금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소리를 듣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도망하여 쉽게 승리를 얻는 이적이 나타난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이었다. 중요한 시기에 이들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 것은 바로 역사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의 기자는 열왕기상 17장에서 열왕기하 8장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 두 선지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남왕국과 북왕국의 왕들

열왕기는 다윗의 죽음에서부터 남왕국 멸망까지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선지자들에 관한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남과 북왕국 왕들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남과 북왕국은 동일하게 20명의 왕들을 보유했다. 그러나 남왕국이 북왕국 보다도 그 운명이 135년이나 길었던 것을 볼 때 북왕국 왕들의 재임기간이 남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사실적으로 이스라엘의 일곱 왕들은 반역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왕위는 암살자들에게 넘겨진 혼란된 역사를 열왕기는 증언하고 있다.28) 대부분의 이스라엘 왕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예후는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노력하였으나 여로보암의 죄인 금송아지 숭배에서는 떠나지 못하였다.

28) 암살 후 왕위에 오른 이스라엘 왕들은 나답, 엘라, 여호람, 스가랴, 살룸, 브가히야 그리고 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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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와 남유다 왕들

이 스 라 엘 유 다

1. 여로보암 1세 930-909 1. 르호보암 930-913

2. 나답 909-908 2. 아비얌 913-910

3. 바아사 908-886 3. 아사 910-869

4. 엘라 886-885

5. 시므리 885

6. 디브니 885-880

7. 오므리29) 885-874

8. 아합 874-853 4. 여호사밧 872-848

9. 아하시야 853-852 5. 여호람 853-841

10. 여호람 852-841 6. 아하시야 841

11. 예후 841-814 7. 아달랴 841-835

12. 여호아하스 814-798 8. 요아스 835-796

13. 요아스 798-782 9. 아마샤 796-767

14. 여로보암 2세 793-753 10. 아사랴 792-740

15. 스가랴 753

16. 살룸 752

17. 므나헴 752-742 11. 요담 750-732

18. 브가히야 742-740

19. 베가 752-732

20. 호세아 732-723/22 12. 아하스 735-715

13. 히스기야 729-686

14. 므낫세 697-642

15. 아몬 642-640

16. 요시아 640-609

17. 여호아하스 609

18. 여호야김 609-598

19. 여호야긴 598-597

20. 시드기야 597-586

남왕국에서는 전통성을 가진 다윗의 자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왕위를 지켜나가게 된다. 북이스라엘 왕들에 비해서 많은 남유다 왕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안정과 전통성이 그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별히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은 이방 신(神)들과 제의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제거함으로 그나마 모범된 왕이라고 열왕기 기자는 기록하지만, 그마저도 결국 죄

29) 북이스라엘 왕국의 제 6, 7대 왕인 디브리와 오므리는 서로 대적관계에 있는 동시대의 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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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으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실패한 왕들인 셈이다.

열왕기에서는 독특한 문장 구조 형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왕의 즉위 연대와 신앙 상태 등에 대한 언급들이다. 북이스라엘 왕과 남유다 왕에 관한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조금의 차이점은 있다. 북이스라엘 왕들에 관한 내용의 예는 다음과 같다.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을 치리하며 야훼 보시기에 악

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좆고 떠나

지 아니하였으므로(왕하 13:1-2)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왕 역대지

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

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13:8-9)

위에 언급된 내용을 살펴보면 왕의 즉위 연도를 당대 유다왕의 연도와 비교하고 있고 또한 통치 기간이 나타나며 그들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업적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열왕기에 언급되지 않은 왕의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음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후에 왕의 죽음에 대한 것과 그 뒤를 잇는 왕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남왕국 왕들에 관한 내용도 북왕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용적으로 매우 유사하나 남왕국의 경우는 한 가지 내용이 더 첨가되어있다. 왕의 모친에 관한 내용 바로 그것이 포함되어있다.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 년에 유다왕 요하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맛단이라 예루살렘 사

람이더라(왕하 14:1-2)

왕의 모친들의 이름들이 언급되어지는 이유에 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유다 왕들이 정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계승이 이루어졌기에 그들의 모친도 권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남왕국과 북왕국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남왕국이 북왕국보다는 왕정계승 면에서 안정되었다는 것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면에서도 좀 더 정통성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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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통일

왕국

시대

1. 다윗의 마지막 때 와 솔로몬의 즉위 왕상 1:1 - 2:46

2. 솔로몬의 지혜와 위대함 왕상 3:1 - 4:34

3.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봉헌 왕상 5:1 - 8:66

4. 솔로몬의 부귀와 몰락 왕상 9:1 - 11:43

Ⅱ.

분열

왕국

시대

1. 왕국의 분열 왕상 12:1 - 20

2. 유다의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상 12:21 - 14:31

3. 유다의 아비얌과 아사 왕상 15:1 - 24

4. 이스라엘의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왕상 15:25 - 16:28

5. 아합과 엘리야 왕상 16:29 - 22:40

6. 유다의 여호사밧 왕상 22:41 - 50

7. 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상22:51-왕하 1:18

8.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사역 왕하 2:1 - 8:15

9. 유다의 여호람과 아하시야 왕하 8:16 - 9:28

10. 이스라엘의 예후 왕하 9 - 10장

11. 유다의 아달라와 요아스 왕하 11:1 - 12:21

12.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왕하 13:1 - 14:16

13. 유다의 아마샤와 아사랴 왕하 14:1-22;15:1-7

14. 여로보암 2세 왕하 14:23 - 29

15. 이스라엘의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왕하 15:23 - 31

16.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 왕하 15:32 - 16:20

17. 이스라엘의 호세아와 이스라엘의 멸망 왕하 17장

Ⅲ.

유다

왕국

1. 히스기야와 산헤립 왕하 18 - 20장

2. 므낫세와 아몬 왕하 21:1 - 26

3. 요시아의 종교개혁 왕하 22:1 - 23:30

4.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하 23:31 - 25:7

5. 예루살렘의 멸망 왕하 25:8 - 21

6. 그달리야의 관할과 여호야긴의 석방 왕하 25:22 - 30장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남왕국도 북왕국에 비해 크게 차이점이 없었기에 결국은 북왕국과 같이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야훼께서 반대하신 왕정제도는 결국은 야훼의 손에 의해 왕정제도가 마무리 되어지는 결론을 맞게 된다. 역사와 권위의 주인이 왕들이 아니라 야훼이심을 열왕기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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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열왕기 내용을 살펴보면 국제적으로 관련된 사건이 많이 나타난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열왕기가 다른 책에 비해 긴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로써 다른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밀접하게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왕기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되어져야 한다. 열왕기에 등장하는 주변국가와 민족들은 블레셋, 모압, 에돔, 아람, 이집트, 앗시리아(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이다. 이 국가들 중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강대국인 이집트, 앗시리아 그리고 바벨론은 열왕기와 관련해서 고려되어져야할 나라들이다.

이집트(Egypt) 이집트는 이스라엘 역사와 민족형성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정국가 시기에는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집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집트가 가장 강성했던 18-19왕조(BC 1550-1200년)시대가 지나고 BC 11세기부터는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인 BC 10세기부터는 이집트가 이전에 가졌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많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음을 열왕기는 증거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솔로몬은 정치적 목적으로 정략적으로 많은 이방인 여인들과 결혼하였는데 그 중에 파라오의 딸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딸을 솔로몬에게 주었던 파라오가 게셀을 탈취하여 자기 딸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고(왕상 9:16), 나아가 파라오 시삭이 남왕국 르호보암 5년에 예루살렘을 치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아 가게 되었다(왕상 14:25-26). 친정 국가인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통째로 헌납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왕이 바로 솔로몬인 것이다.

한편, 북왕국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앗시리아에게 해마다 하던 조공을 바치지 않고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앗시리아에게 큰 노여움을 사게 되어 북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왕하 17:4). 북왕국 뿐만 아니라 남왕국에서도 이집트가 영향을 끼쳤는데 파라오 느고가 앗시리아를 치려고 유브라데 강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요시야 왕이 방어하다가 므깃도에서 파라오 느고에게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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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시리아의 왕들

살만에셀 Ⅲ (Shalmaneser Ⅴ) 858 - 824

샴시-아다드 Ⅴ (Shamshi-Adad Ⅴ) 823 - 811

아다드-니라리 Ⅳ (Adad-Nirari Ⅳ) 810 - 783

살만에셀 Ⅳ (Shalmaneser Ⅳ) 782 - 773

앗슈르-단 Ⅲ (Ashur-Dan Ⅲ) 772 - 755

앗슈르-니라리 Ⅴ (Ashur-Nirari Ⅴ) 754 - 745

디글랏 필레셀 Ⅲ (Tiglath-pileser Ⅲ) 744 - 727

살만에셀 (Shalmaneser) 726 - 722

사르곤 Ⅱ (Sargon Ⅱ) 721 - 705

산헤립 (Sennacherib) 704 - 681

에살핫돈 (Esarhaddon) 680 - 669

앗슈르바니팔 (Assurbanipal) 668 - 627

아슐-에텔-일나니 (Ashur-etel-ilani)

신-슈뮤-니실 (sin-shumu-nishir)

신-샬-이쉬쿤 (sin-shar-ishkun) ? - 612

아슐-우발니트 Ⅱ(Ashur-uballit Ⅱ) 611 - 609

을 당하게 된다(왕하 23:29). 이와 같이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앗시리아(Assyria)

이스라엘 왕국에게 가장 긴 기간 동안 영향력을 미쳤던 나라가 바로 앗시리아이다. BC 9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거의 200년 동안 그 영향력이 지속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게 앗시리아가 처음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던 왕은 살만에셀 Ⅲ세 (Shalmaneser Ⅲ, 재위 BC 858-824년)였다. 그의 영향 하에 있던 서아시아의 왕들은 그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바쳤다. 기록에 따르면 그 왕들 중에는 “다메섹의 하사엘”과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포함된다.30) 특별히 예후가 살만에셀 Ⅲ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살만에셀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앗시리아가 BC 853년에 Qarqar전투(북부 시리아)에서 패배함으로 인해 한동안 그들의 영향력이 약화가 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는 BC 8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여러가지 면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다.

30) Pri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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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 중엽부터 앗시리아는 힘의 회복기로 접어드는데 이 시점에 큰 역할을 담당한 왕들이 디글랏 빌레셋 3세(Tiglath-Pileser Ⅲ, BC 744-727년)와 살만에셀 Ⅴ세(Shalmaneser Ⅴ, BC 726-722년)였다. 디글랏 빌레셋 Ⅲ세는 서아시아를 향한 2번의 큰 군사원정을 행했다. 첫 원정은 BC 742-738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이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므나헴이 조공으로 은 1,000달란트를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게 되었다(왕하 15:19-20). 그의 두 번째 원정은 BC 734-732년에 있었는데 이 원정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 원정의 배경은 이렇다. 아람(다메섹)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남유다 왕 아하스를 침략하자 남유다는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왕하 16:5-9). 이런 행위에 대해 이사야는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는 인간적인 처사라고 말하였다(사 7:1-10:4). 결국 유다의 요청에 의해 앗시리아 왕이 올라와서 아람을 쳐서 취하여 백성을 사로잡고 르신을 죽이게 된다. 베가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된 호세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앗시리아의 영향력이 다메섹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살만에셀 Ⅴ세(BC 726-722년)에 대한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북왕국을 멸망시킨 왕으로서는 기억되고 있다. 열왕기의 기록에 따르면 살만에셀이 북왕국의 호세아 왕 7년에 수도인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는데 결국은 3년 후에 함락이 되었다. 살만에셀 Ⅴ세 이후에는 사르곤 2세(Sargon, BC 721-705년)가 그 뒤를 잇게 되는데 그도 살만에셀 못지않게 여러 번의 원정을 통해 서부지역 쪽으로 그의 위세를 떨쳤다.

사르곤 뒤를 이은 앗시리아 왕은 아들인 산헤립(Sennacherib)이다. 산헤립에 관한 내용은 열왕기하 18-19장에 잘 나타나있다. 성경과 성경외적인 증거에 따르면 산헤립은 유다의 여러 성읍뿐만 아니라 한때에는 예루살렘까지 포위하여 위협을 가했다. 특별히 라기스의 침공 모습이 새겨진 비문이 니느웨에서 발견된 것을 볼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어서 산헤립의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산헤립에 이어 아들인 에살핫돈(Esarhaddon)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BC 671년에는 이집트의 중심지인 멤피스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에살핫돈과 관계해서 나타나는 유다의 왕이 있는데 그가 바로 남왕국의 왕 므낫세이다. 역대하에 따르면 므낫세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앗시리아에 포로가 되었다가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구속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대하 33:10-13). 역대기의 기록과 비슷하게 에살핫돈의 연대기에서도 므낫세가 에살핫돈의 영향력하에 있었음을 증거한다. 즉, 므낫세가 엘살핫돈 속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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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써 건축에 필요한 많은 재료들을 조공으로 니느웨로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31)

므낫세는 에살핫돈의 후계자인 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 왕에게까지 많은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이 있다.32) 앗슈르바니팔 왕도 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이집트의 정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집트의 고대 수도였던 테베(Thebes)까지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영광은 앗슈르바니팔 왕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앗슈르-우발리트Ⅱ세(Ashur-uballit Ⅱ)때에 메데(Media)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BC 612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 바빌로니아(Babylonia)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는 고대 근동지방 전역에 그 세력을 떨쳤다. 결정적으로 근동지방에서 초강대국으로써의 면모를 갖춘 때가 바로 갈그미쉬(Carchemish) 전투 이후부터였다. 이집트 왕(파라오) 느고 Ⅱ(Neco Ⅱ, BC 610-594년)가 앗시리아인 중 남은 자들과 연합해서 바벨론을 대적했지만 역부족으로 패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집트의 세력이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나고 그 지역을 바벨론이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재위 BC 605~562년)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에 대항하여 여호야김은 BC 601년에 바벨론 왕을 배반하기도 한다. 이에 바벨론은 BC 598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점령하게 된다.

이때 바벨론은 성전의 물건들과 많은 보물들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그 후에 여호야긴이 남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3개월 만에 그는 많은 신복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왕하 24:10-16, 대하 36:6-7).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삼았지만 10년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남왕국은 장기간의 포로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 기간은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당하는 BC 539년까지 지속된다. 여호야긴은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에윌-므로닥 왕(Evil-Merodach)의 원년(BC 560년)까지 살아남았다. 비록 여호야긴이 포로 가운데 있었지만 바벨론 왕이 그를 선하게 대우한 모습은 기록으로 남아있다.33)

31) Pri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 291.32) Ibid, p. 294.33) Ibid, p. 308., 왕하 25: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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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벨 론 왕 들

나보폴라잘 (Nabopolassar) 625 - 605

느부갓네살 Ⅱ(Nebuchadnezzar) 604 - 562

에윌므로닥 ( Evil-Merodach) 561 - 560

네리글리살 (Neriglissar) 559 - 556

나바쉬-마르둑 (Labashi-Marduk) 556

나보니두스 (Nabonidus) 555 - 539

중요 주제들

왕정 국가

열왕기의 중심적인 흐름은 어떻게 이스라엘 내에서 왕정 국가가 형성 되었나에서부터 그 운명이 어떻게 다하였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왕정 국가의 시작과 분열 그리고 그 운명을 정치, 경제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면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사람에 의해 세워지고 발전과 변화가 되어온 것 같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국가의 이면에서 주권을 담당하신 하나님이 왕국에서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야훼께서는 이 땅에 자신의 왕국, 곧 “야훼 말쿠트”(야훼 왕국)을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하시고자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셨다. 야훼보다는 인간 이스라엘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그 국가를 이끌어 가기위해 택한 자, 곧 왕적 직분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이 다윗의 왕국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그의 뜻을 왕국에 실현시키시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을 처음에 택하실 때 다윗과 그의 자손들이 영원히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무조건적이면서 조건적인 약속을 주시게 되는데 그 약속의 실현이 열왕기에 잘 반영되어 있다. 비록 왕국이 분열되고 많은 왕들이 살해되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왕정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계승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과 그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시려는 강한 의지이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으로 계승되어온 유다를 상징적인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삼하 7:14). 비록 이방인에 의해 그 왕국이 멸망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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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 후손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됨과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기에 야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왕국의 위임권에 대한 약속은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활동

열왕기에서 왕들에 대한 업적과 활동이 주된 내용으로 나타나지만 예언자들에 관한 내용들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내용이 열왕기상 17장에서 열왕기하 13장에 나타나는데, 이 예언자들의 내용은 열왕기에서 나타나는 어떠한 왕들보다도 자세히 그리고 많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예언자(들)”이란 용어가 적어도 94번, “하나님의 사람”이 60번 이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열왕기에서 예언자들의 활동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특별히 이들(엘리야와 엘리사)이 행한 이적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현상은 구약에서 흔치않은 것이다. 열왕기의 경우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출이집트 시기와 광야 생활에서 보여준 모세를 통한 이적들이었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적의 현상들이 일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구약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두 경우는 유사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둘 다 중요한 시기에 이적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는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는 시작의 시기였다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는 민족으로의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여기서 “바른 정체성”이란 이방인들의 풍속을 쫒아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자세에서 야훼만 섬기는 민족으로써의 국가를 형성하는 야훼 신앙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잘못된 왕들의 신앙형태를 거침없이 비판하며, 그들의 죄를 돌이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열왕기 곳곳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왕의 업적이 결정되어지는 권위를 가짐과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가 되어지는 능력도 부여받게 되는 특권을 지닌 사명자들이었다. 그런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왕들의 신앙형태를 견제함으로 바른 신앙의 국가로 형성하려고 하셨던 모습이 열왕기에서의 또 다른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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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대 기

역대기는 아담으로부터 그 후손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시작하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시대와 유사하다. 계보 이후로 나타나는 내용들은 다윗에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 유다 왕들에 관한 것으로 이어져 포로와 회복의 칙령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은 70인 역(LXX)에서는 헬라어로 “남겨진 것들”(paraleipomenon) 혹은 “빠진 것들”이란 명칭으로 불리었다. 아마도 사무엘서와 열왕기에서 빠졌던 부분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지금의 명칭은 히브리어 “dibre hayyamin”(역대지략)에서 유래되어 제롬이 이 책을 “전적으로 신성한 역대기”(chronicle of the whole of divine history)로 명명한 것을 간략하게 “역대기”(Chronicles)로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도 처음에는 한 권이었지만 70인 역(LXX) 이후부터는 두 권으로 취급되었다.

저자와 기록 연대

구약의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역대기도 저자를 밝히지 않고 있다. 유대교의 정경인 탈무드의 전통(Baba Batha 15a)에 따르면 에스라를 저자로 보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역대기와 에스라 내용의 연계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역대하의 마지막 두 구절(대하 36:22-23)의 내용들이 에스라 1:1-2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가 예루살렘 전을 건축하라는 조서의 내용이다. 역대기에서의 마지막 부분이 에스라의 서두 부분에서 반복되는 것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인임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둘째는 역대기와 에스라 - 느헤미야서의 단어와 문장, 스타일의 유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34) 셋째는 역대기와 에스라 - 느헤미야의 기록 연대 및 배경 그리고 신학적인 관심사가 유사한 점에서 동일한 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들은 포로기 이후의 작품으로 동일한 주제 - 성전 중심의 예배와 족보 및 계보 그리고 레위인과 제사장에 대한 관심 등의 주 제 - 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에스라가 저자임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그 사실에

34) H G. M. Williamson, Israel in the Books of Chronicles (Camdridge: Cambridge Univ., 1977), pp. 7-11, pp.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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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에 대한 기록

1. 이스라엘 열왕기 대상 9:1, 대하 20:34 2. 다윗 왕의 역대 지략 대상 27:24

3.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기 대하 16:11, 25:26, 28:26, 32:32

4. 이스라엘과 유다의 열왕기 대하 27:7, 35:27, 36:8 5. 이스라엘 열왕의 행장 대하 33:18 6. 열왕기 주석 대하 24:27 7. 이스라엘 왕 다윗의 글과 솔로몬의 글 대하 35:4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1. 시므온 자손의 보계 대상 4:33 2. 갓 자손의 족보 대상 5:17 3. 베냐민 자손의 보계 대상 7:9 4. 아셀 자손의 보계 대상 7:40

대한 반박도 만만찮다. 역대기를 에스라 - 느헤미야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일치보다는 불일치되는 면이 많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의 저자가 다르다는 것이다.35)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심지어 역대기의 관심사를 볼 때 저자가 레위인 이거나 아니면 아삽의 음악인 단체 중의 일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36) 그래서 저자에 관한 문제는 확정보다는 추측으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역대기에서 사용된 자료들

열왕기에서 사용된 자료들 - 솔로몬의 행장,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그리고 유다 왕 역대 지략 - 의 숫자를 비교하면 역대기에서 사용된 자료들은 상당한 수에 속한다. 열왕기에서 3개의 자료가 사용된 반면에 역대기에서는 적어도 24개의 다른 자료를 사용되었다. 이 자료들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면 왕들에 대한 기록, 이스라엘 자손들의 족보, 그리고 선지자들의 글로 나눌 수가 있다.37)

다음의 도표를 보라.

35) Williamson이 주장하는 이들 책들에 있어서 내용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혼합 결혼에 관하여 역대기에서는 무반응이나 에스라 - 느헤미야에서는 강하게 비난한다. 2)역사적인 사실을 강조하는 면에서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그의 왕권을, 다른 두 책에서는 모세와 출이집트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3)역대기는 역사적인 사실이 그 중요 내용이지만 특이한 것은 북 왕국의 멸망에 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서(특별히 4장)에서는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4) 죄를 범할 경우 역대기에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징벌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지만 에스라 - 느헤미야에서는 그런 것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5) 역대기에는 선지자와 이적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는 반면에 다른 두 책에서는 그런 내용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Ibid., pp. 60-69.

36) R. K. Harri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9), p. 1154.

37) Jacob Myers, 1 Chronicle (Garden City, N.Y.: Doubleday, 1965), pp. XLVI-XL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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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5. 문지기의 보계 대상 9:22

선지자들의 글

1. 선견자 사무엘의 글 대상 29:29 2. 선지자 나단의 글 대상 29:29, 대하 9:29 3. 선견자 갓의 글 대상 29:29 4.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 대하 9:29 5.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대하 9:29 6. 선견자 스마야의 글 대하 12:15 7. 잇도의 족보 책 대하 12:15 8. 잇도의 주석 책 대하 13:22 9.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글 대하 20:34 10. 이사야가 기록한 웃시아의 행적에 관한 글 대하 26:22 11.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의 묵시 책 대하 32:32 12. 호새(seers)의 사기 대하 33:19

위에 언급한 많은 자료들을 볼 때 역대기는 내용면에서 독립적인 것보다도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은 역대기가 권위있는 책인 것을 나타내는 증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들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역대기에서 많은 자료들이 나타나지만 특별히 중요한 자료는 2개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 지략”과 “유다 왕의 역대 지략”인데, 이 자료들에서 대부분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또한 역대기가 왕의 역대 지략이란 자료가 많이 언급되어지는 열왕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용

역대상 1-9장은 아담에서부터 야곱의 자손들(단과 스불론은 제외)로 이어지는 계보가 열거되어 있다. 이 내용들을 읽기에는 지겹고 의미가 없어 보이나 기록된 분명한 목적이 있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라 정의되는 공동체는 아담에서부터 유래되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이다. 역대상 5:25-26과 9장에 보면 북왕국과 남왕국이 멸망된 뒤에도 그 자손들이 계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계보가 그들의 범죄나 상황에 상관없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계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실을 통해 또한 종말론적인 소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계보의 연계성을 통해 현재의 직책과 직위가 전통성을 바탕으로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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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왕족의 신분과 제사장의 직분과 같은 것은 그 뿌리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땅의 분배, 군사적 책임, 그리고 유산의 문제 등도 계보의 나열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역대상 10장부터 역대하 9장까지는 통일 왕국에 관한 내용들인데 특별히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것이다. 이들의 내용은 사무엘하와 열왕기에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기에 자세한 설명은 피하고 사무엘하와 열왕기의 내용을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점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사무엘하와 열왕기에서는 왕정시대의 시작부터 남왕국의 멸망까지의 역사적인 증거를 간결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빠뜨리지 않고 역사적인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의식적으로 몇 가지 사실들을 빠뜨리고 있다. 특별히 다윗과 솔로몬의 명성에 흠이 될 수 있는 사건과 사실들에 대하여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38) 그 대신 다윗과 솔로몬을 영광스러운 민족의 영웅으로서 온 백성들의 지지와 칭송을 받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역대상 10장부터 역대하 9장에서 나타나는 다른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전 건축과 관련되는 부분이다. 역대상 22-27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이 준비한 여러 가지 사실들이 열거되어 있다. 성전의 위치 선정과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작업에서부터 성전에서 일할 사역자(레위인, 제사장, 찬양하는 자, 문지기)의 직무까지 상세하고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목적도 성전 건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대상 28-29장).39) 그래서 열왕기에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그의 통치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에서는 솔로몬의 지혜는 성전 건축을 위한 것이라고 초점을 맞추고 있다(왕상 3:7-15, 대하 2:12). 이 사실은 솔로몬이 브사렐이 만든 놋단에서 일천 희생 번제를 드렸을 때 지혜를 받은 것에서도 솔로몬의 지혜가 성전 건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출애굽기 31:1-11에 보면 브사렐이 바로 성막을 건축한 사람이었다. 솔로몬의 지혜를 브사렐과 연관시킴으로서 성전 건축이 솔로몬의 지혜로 이루어졌음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8)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역대기에서는 다윗의 이야기 중에서 중요하게 취급이 되는 부분인 다윗의 죄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밧세바와 우리아의 사건은 다윗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임에도 불구하고 언급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반역의 사건도 기록하지 않는다. 역대기에서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사실이 충실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만 솔로몬과 관련되어 설명되어야하는 중요한 부분인 남과 북 왕국이 나누어지게 된 동기에 관한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이것은 솔로몬이 그의 후궁과 빈장들의 우상 숭배를 허용함으로 비롯된 결과인데 이것에 대한 부분을 빼버린 것이다.

39) 반면,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성전을 더럽게 하여 결국 파괴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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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인들은 더 이상 국가 공동체, 즉 왕을 중심으로하는 왕정 체제가 아니라, 원래의 이념처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성전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조금은 옹졸한 생각이기는 해도,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여전히 종교적으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눈에 보이는 성전 중심의 제도적인 신앙 공동체는 그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파괴될 것이다. 성전, 곧 야훼의 집은 인간 편에서 개념을 정리하고 건물을 짓는다고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영속적인 임재속에서만 그 의미가 밝혀지지 때문이다.

역대기의 마지막 부분인 역대하 10-36장은 유다 왕국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가 남왕국의 생존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용 면에서 열왕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열왕기에서 밝히고 있는 강조점 중의 하나는 남왕국과 북왕국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열왕기에서는 대부분의 왕들이 하나님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40) 바알과 아세라 및 다른 우상의 숭배, 산당에서의 제사, 신접한 자와 박수들을 인정하는 등 여러 가지 가증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하여 멸망이라는 심판을 받게 된 점, 곧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훼 하나님과 맺은 언약/조약을 스스로 파기했기 때문에 멸망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대기에서는 이와 달리 유다 왕들의 선한 업적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업적을 다윗과 솔로몬이 행한 업적만큼 크게 칭송을 하고 있다. 왜냐면 이들은 성전의 우상을 제거한 것 외에도 성전 수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열왕기에서의 남왕국의 멸망 원인이 므낫세의 배교였지만, 역대기에서는 므낫세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회개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서 그의 배교를 남왕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강조함으로 역대기는 열왕기에서의 내용과 달리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 비교

필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 분포도의 비교를 통해, 두 책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 다윗을 제외한 솔로몬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분포의 비교를 보자. 아달랴는 열왕기 역대기 모두에서 왕들의 목록에는 첨가하지 않았다. 먼저 열왕기의 분포도이다. 솔로몬이 1/2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40) 비록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칭찬을 받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악한 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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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역대기의 분포도이다. 솔로몬이 1/4을 차지하고 있다. 열왕기에 비해 1/2 가량이 줄어들었다. 대신 아사, 여호사밧의 분량이 많아졌다.

다음은 솔로몬을 제외한 분열 왕국의 왕들의 분포도이다. 열왕기를 보자. 르호보암, 요아스(아달랴 포함), 아마샤, 아하스, 히스기야, 요시야가 비중있는 왕이며, 히스기야가 가장 큰 비중으로 거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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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역대기를 보자. 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가 비중있는 왕임을 알 수 있고,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은 히스기야이다. 하지만 열왕기에 비해 1/2 가량 줄어들었고, 요시야와 아하스도 줄어들었다. 반면, 아사, 여호사밧의 경우는 1/2 가량 늘어났고, 여호람과 아사랴도 늘어났다.

이러한 분포도를 통해 역대기 저자가 왕들을 기록하는 중요도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역대기 저자에게 다윗과 솔로몬 다음으로 중요한 왕은 히스기야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왕은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종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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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족 보

1) 아담에서 야곱까지 1:1-2:22) 남쪽 지파들과 다윗의 자손- 유다 A(2:2-55), 다윗(3:1-24), 유다 B(4:1-23), 시므온(4:24-43)

2:2-4:43

3) 요르단 건너편 지파들- 르우벤(5:1-10), 갓(5:11-17), 지파들의 전쟁 기록(5:18-22), 동 므낫세(5:23-26)

5:1-26

4) 레위 지파 6:1-815) 북쪽 지파- 잇사갈(7:1-5), 베냐민(7:6-12), 납달리(7:13), 동/서 므낫세(7:14-19), 에브라임(7:20-29), 아셀(7:30-40), 베냐민 B(8:1-40; 9:1a)

7:1-9:1a

6) 포로기이후의 예루살렘과 사울의 계보 9:1b-44

II. 다윗에 관하여

1) 사울의 죽음 10:1-142) 다윗의 즉위와 그의 용사들 11:1-12:403) 언약/조약궤의 이전 13:1-16:434) 다윗의 언약/조약 17:1-275) 다윗의 전쟁 18:1-20:86) 인구 조사와 하나님의 심판 21:1-277) 성전 건축의 위치와 건설 준비 21:28-22:198) 이스라엘 사역자들의 조직 23-279) 다윗의 마지막 때와 솔로몬의 즉위 28-29

III. 솔로몬에 관하여

1) 솔로몬의 위대함 1:1-172) 성전 건축과 봉헌 2:1-7:22

3) 솔로몬의 업적과 죽음 8:1-9:31

IV. 유다의 왕들

1) 르호보암의 통치 10-122) 아비야의 통치 13:1-14:13) 아사의 통치 14:2-16:144) 여호사밧의 통치 17:1-21:15) 여호람의 통치 21:2-206) 아하시야의 통치 22:1-97) 아달야의 통치 22:10-23:218) 요아스의 통치 249) 아마샤의 통치 2510) 웃시야의 통치 2611) 요담의 통치 2712) 아하스의 통치 2813) 히스기야의 통치 29-3214) 므낫세의 통치 33:1-2015) 아몬의 통치 33:21-2516) 요시야의 통치 34-3517) 유다 왕국의 마지막 때와 고레스의 귀환 칙령 36:1-23

혁을 시행한 왕들이다.

개 요

역대기 상/하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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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요 주 제

단일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역대기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개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의 신분이나 소속에 구분 없이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자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여러 지파들이 존재하고 나름대로의 독립성과 활동 영역이 보장이 되며 다양한 전통이 존재하지만 역대기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넘어 온 이스라엘이 하나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의 체재 면에서도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어져 정치, 문화, 경제, 그리고 종교 면에서 두 왕국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왕국 또한 합해져 하나의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역대기에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계급이나 소속을 초월하는 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역대기에서도 “온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선조들이 사용했던 언약/조약 백성을 총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국가라기보다는 야훼와 언약/조약을 맺은 신앙/종교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대기도 국가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정체성을 “온 이스라엘”이란 표현을 통해 선조들과 연결시켜 자신들의 시대와 연결시키며 이후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역대기에서 나타나는 “온 이스라엘”이란 용어의 사용 빈도를 구약의 다른 성경과 비교하여 살펴보더라도 역대기에서 공동체의 하나 됨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구약에서 “온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총 105번이 나타나는데 역대기에서만 40번이나 나타나고 있다.41) 다른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역대기에서 이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의 온 회중”,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 “이스라엘의 지파”,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 등등의 유사한 표현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될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나아와 언약/조약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고 역대상 11:1-3에서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대상 12:38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일심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

41) 역대기에서 “온 이스라엘”이란 표현이 나타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상 9:1; 11:1, 4, 10; 12:38; 13:5, 6, 8; 14:8; 15:3, 28; 18:14; 19:17; 21:4, 5; 28:4, 8; 29:21, 23, 25, 26. 대하 1:2a, 2b; 7:6, 8; 9:30; 10:1, 3, 16b, 16a; 11:3, 13; 12:1; 13:4, 15; 29:24a, 24b; 30:1, 31:1;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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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려고 동참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사무엘하 2:1-4에서는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책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역대기의 강조점을 금방 인지할 수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될 때에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들이 일체감을 가지고 함께 참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다윗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하나가 됨을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예를 히스기야의 경우에서 볼 수가 있다. 히스기야가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킬 때에 유다에 속한 지파뿐만 아니라 북 왕국에 속한 지파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동참하도록 권유한 사실이 있었다. 그 소식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역을 넘어 스불론 지역까지 전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몇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다(대하 30:1-12). 이러한 사실은 지역이나 왕국의 소속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자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요시야 왕도 종교 개혁을 실시할 때 그 대상을 유다에 속한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까지 포함한 사실이 역대하 34:1-7에 기록되어 있다. 요시야가 비록 남왕국의 왕이었지만 종교개혁의 대상 안에 북쪽 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그들도 이스라엘이란 공동체 속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 것이다. 언급한 사실들 이외에도 역대기는 곳곳에서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자들이 하나인 것을 일관성 있게 밝히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혈연적으로나 지연적으로나 인간 왕의 통치 제도로 하나되는 공동체가 아니고, 인종과 지역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야훼와 언약/조약/조약을 맺은 신앙/종교 공동체인 것이다.

역대기의 중심인물 : 다윗과 그의 후손

역대기에서 가장 중심되는 인물은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역대기의 내용이 다윗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그의 후손들의 관한 사실로 전개 되는 듯한 느낌을 줄만큼 그들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역대상 1-9장에서 아담에서 시작되는 계보가 나타나는데 이들 중에 가장 부각되는 인물이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다. 뿐만 아니라 역대상 10-29장에서는 다윗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언급되고 있기에 역대상 전체의 내용이 다윗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대하의 첫 부분인 1-9장은 솔로몬에 관련하여 그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역대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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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윗과 함께한 도움자들의 이름 열거 대상 12장

2. 언약/조약궤의 예루살렘 이전에 관한 감사와 찬양의 시 대상 16:4-42

3.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사항들 대상 22장

4.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반열과 직무 분담 대상 23-26장

5. 솔로몬과 백성들에게 향한 다윗의 마지막 성전건축에 대한

부탁의 말대상 28-29장

머지 내용(대상 10-36장)도 다윗의 후손들 즉 남왕국의 왕들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에서는 남왕국뿐만 아니라 북왕국의 왕들을 같이 언급하며 비교하였다면, 역대기에서는 북왕국의 왕들은 제외하고 다윗과 그의 후손들을 중점적으로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대기의 특징이다.

역대기의 내용이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 중심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기에서 다윗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나타나는 언급과 조금은 차이가 있다. 사무엘서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다윗이 권력을 얻게 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삼상 16장-삼하 5장)의 대부분이 역대기에서는 생략이 되어있다. 또한 다윗의 범죄한 사실과 권력의 쇠퇴기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이 빠져있다. 생략된 것들을 분석해 보면 역대기에서 강조하는 점을 추론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대기에서는 다윗의 권력과 명성이 가장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사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과 관련된 내용 중에서 사무엘서와 열왕기에서 언급되어지지 않고 역대기에서만 나타나는 사실들과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위의 도표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성전 건축에 관련된 것인데 이 사실을 통해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하나님이 다윗과 솔로몬의 선택한 이유는 성전 건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대기에서 다윗의 인생의 초기와 말기보다는 중기의 행적을 강조한 것에서도 성전 건축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상과 징계

역대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주제 하나는 보상과 징계에 관한 것이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주었던 마지막 교훈에서 이 개념을 먼저 찾아 볼 수가 있다. “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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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의 죽음은 야훼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신접한 자의 가르침을 받은 범죄로 인함대상 10:13

2. 웃시야가 문둥병이 걸린 것은 교만하여

제사장이 드려야할 향단을 자신이 드리려고 했기 때문에대하 26:16-21

3. 요시야의 죽음은 이집트 왕 느고를 통해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대상 35:20-25

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또한 다윗이 교훈으로 주었던 이런 형태의 표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역하 12:5; 15:2; 24:20). 한편 표현 방법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념이 유사한 것들도 있다(대상 7:13-14; 20:20).

이런 보응의 법칙이 적용되어 심판을 받게 되는 경우가 역대기에서 빈번히 나타나는데 그것의 예는 다음과 같다.

위에 언급한 사실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찾으며 겸손히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하시고 그 땅을 고치시며 기도를 응답하시는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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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와 느헤미야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신앙생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별히 포로기 이후의 선결 과제인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과 흐트러진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포로기 이후에도 여전히 성실하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의 책이었다. BC 15세기 이전의 히브리어 사본들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의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다. 유대인 맛소라 학자들은(Masoretes) 사본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의 성경을 필사한 후에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 책에 나타난 모든 단어의 수를 기입하였다. 그러나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경우는 책의 단어 숫자가 두 책에 따로 따로 기록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에 합해져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곧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에스라-느헤미야서가 한 권의 책으로 취급되었다는 말해주는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가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교부 오리겐(Origen)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후에 제롬(Jerome)이 라틴어 번역인 벌게이트 역(Vulgate)을 편찬하면서 공식적으로 두 권으로 분리한 것이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후 유대인들도 기독교의 전통에 따라 주후 15세기 후반부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두 권의 책으로 분리하였다. 지금 이 두 권의 책의 명칭은 이들 책에서의 중심인물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42)

저자와 기록 연대

에스라-느헤미야의 저작설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탈무드(Baba Bathra 15a)에 따르면 역대기 뿐만 아니라 에스라-느헤미야도 에스라가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견해는 지금까지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에스라-느헤미야와 역대기는 같은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에스라가 저자가 아니라는 견해이

42) D. J. A. Clines, “Ezra, Nehemiah, Esther”,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Grand Rapid: Eerdmans, 1984), p. 2., 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ex.: Word, 1985), xxi-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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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역대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에스라-느헤미야의 저자와 역대기의 저자가 서로 다르다는 의견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난 배경을 여러 가지 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문학적인 특성에서 그 점을 고려할 수가 있다.

먼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저자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에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자신을 “나”라고 표현하는 일인칭 관점에서 기록한 부분이다. 에스라서에서는 7:27-28, 8:1-34, 9:1-15이 그리고 느헤미야서에서는 1:1-7:5; 12:27-43; 13:4-31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부분의 기록에 관해서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책임이 있다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일인칭으로 된 부분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일인칭 관점에서 기록된 것 외에 특징적인 내용은 에스라서 2장과 느헤미야서 7장에 나타나는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명단이다. 이 두 장이 같은 내용이기에 한 저자가 에스라-느헤미야서를 기록하였거나 아니면 기록된 후에 누군가에 의해 편집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래서 윌리암슨(Williamson)은 에스라-느헤미야에서 일인칭의 관점으로 기록된 부분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록한 것으로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이 두 사람 내지는 다른 이들이 저술 혹은 편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43)

기록 연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들이 언급되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에스라서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BC 538년)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레스 왕의 조서 이후에 여러 번의 방해가 있었지만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6년(BC 515년)에 완성된다(스 6:15). 그 이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그때가 아닥사스다 왕 7년인 BC 458년이었고, 그의 사역은 느헤미야 귀환한 시기인 아닥사스다 왕 20년인 BC 445년까지 13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스 7:7-8, 느 2:1).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귀환한 뒤 13년 후인 BC 445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아닥사스다 왕의 32년인 BC 433년까지 12년간 헌신하게 된다(느 5:14). 그래서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내부적인 증거에 따르면 에스라서는 BC 445년 이후에 그리고 느헤미야서는 BC 433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결론지을 수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관점에 관해서 반대되는 의견이 없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43) Williamson, Ezra, Nehemiah, xxxiv-xx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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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적인 학자들도 느헤미야 기록연대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견해에 동의하고 있으나44)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새로운 견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에스라의 사역 기간을 아닥사스다 왕 7년에서부터 아닥사스다 왕 20년까지인 BC 458년에서 BC 445년까지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아닥사스다 왕인데, 전통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학자들은 연대 측정의 기준이 되는 아닥사스다 왕을 “아닥사스다 왕 1세”로 이해하고 있다.45) 아닥사스다 I세를 기준으로 하면 에스라서의 기록 시기는 에스라가 그의 사역을 마감한 BC 445년 이후가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를 부인하는 학자들은 에스라의 활동시기가 아닥사스다 왕 I세 때가 아니라 “아닥사스다 II세”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II세 7년인 BC 39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러 가지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첫째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에 활동했다면 두 사람이 동시에 언급이 되어져야하는 부분이 많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두 번만이 그들 이름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활동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느 8:9; 12:26). 더욱이 이들 이름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부분은 후세에 첨가된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기에 더욱더 앞에서 언급한 것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에스라는 느헤미야 보다는 후세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사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에스라는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면에서 느헤미야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면에서 사역을 담당하였다. 사역의 특성이 달랐기에 두 인물이 동시에 같은 사역에 동참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들 특히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같이 언급되는 경우보다도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동시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같이 언급이 되어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 2세 때 활동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증거는 제사장 요하난에 대한 것이다. 요하난은 느헤미야 12:22-23절에서 언급이

44) 느헤미야서가 BC 433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내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외적인 증거가 그것을 뒤받침 해주고 있다. 발견된 아람어로 된 편지 중 “Yaho 신전의 재건의 허가를 위한 청원서”(Petition for Authorization to Rebuilt the Temple of Yaho)라는 글을 보면 느헤미야의 사역에 큰 해를 주었던 산발랏이란 사람의 이름이 나타난다. 산발랏은 그의 두 아들과 같이 언급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편지가 기록된 시점인 BC 407년에 산발랏이 사마리아에서 총독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느헤미야 기록 연도가 성경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가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학자들은 느헤미야 기록 연대가 BC 433년 이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다. Pric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 492.

45) 바사(페르시아)왕 중에 아닥사스다 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둘이다. 하나는 1세이고 다른 하나는 2세이다. 1세의 재임 기간은 BC 464-423년이고 2세는 BC 423-40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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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BC 407년에 속하는 성경 외적인 자료에서도 요하난이란 이름이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고 있다.46) 동일 이름이 성경과 그 외적인 자료에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며 연대적인 면은 확정할 수도 있을 것이나 두 자료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일치하는 면보다는 차이점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요하난이란 인물이 일반적인 제사장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느헤미야 나타나는 요하난은 엘리아십의 손자이므로 연대적으로 BC 407년 이전의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느 12:10-12).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초로 해보면 에스라-느헤미야 기록은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연대가 (에스라는 445년 이후 느헤미야는 433년 이후)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역사적 배경

에스라-느헤미야 역사적인 배경은 바사(페르시아)제국의 초기 시대와 일치한다. 이들 책들의 1차 배경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BC 538년에서 성전 재건이 완성된 BC 515년까지이고, 2차 배경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BC 458년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BC 433년까지이다. 이 두 책뿐만 아니라 역대기와 에스라서도 페르시아 왕국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에스라-느헤미야에 나타나는 여러 지역 및 사람들에 관한 것 그리고 자료들에 대한 이해가 이들 책의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 페르시아(Persia)(바사)47) 제국

페르시아 인들은 BC 539년에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 때에는 영향력이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인더스(Indus)강까지였으며 북쪽으로는 남부 러시아에서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한 오만 만(Gulf)과 페르시아 만까지 미쳤다. 이 제국은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침입한 BC 330년에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역사는 상대적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넓은 지역과 영향력을 뽐내었던

46) Prichard, ANET, p. 492. 47) 바사(페르시아)의 히브리어는 Paras 인데 그 뜻은 바사에 속한 땅을 지칭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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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원래 인도-유럽인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지금의 이란 땅이 근동지역에서의 생활의 출발지였는데 그곳에 BC 2000년경에 정착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고레스 1세 때만 하더라도 앗시리아나 주변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통제를 받는 상태였다. 그러나 고레스 1세의 손자인 고레스 2세가 BC 559년에 권력을 잡았을 때부터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먼저 메대(메디아)를 굴복시키고 스스로 “메대의 왕”, “엘람의 왕”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후에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아나톨리아(Anatolia)와 리디아(Lydia)까지 점령하면서 큰 세력을 구축한 그는 마침내 그 당시 고대 근동지역의 맹주였던 바벨론을 BC 539년 10월에 멸망시키게 된다.

고레스가 바벨론과 주변 나라를 통합한 제국을 이룬 후에 유화정책으로 내어놓은 것이 바로 성경(대하 36:22-23; 스 1:1-4)에도 나타나는 그 유명한 “고레스 왕 칙령”의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48) 이 칙령은 점령한 주변 민족들을 포용하는 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고레스는 여러 지역을 나누어 총독을 두

I (also) gathered all their(former) inhabitants and returned(to them) their habitations. Furthermore, I resettled upon the command of Marduk, the great lord, all the gods of Sumer and Akkad ...

내가 또한 모든 거주민을 모아 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주 마르둑과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신들의 명령에 따라 이주를 시켰다

48) 역대하 36:22-23과 에스라 1:1-4에서는 고레스가 조서(칙령)를 내린 동기가 하늘의 신이신 야훼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야훼께서 고레스를 감동시켰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성경 외적인 증거인 고레스 왕의 비석문의 내용은 역대하와 에스라에서 밝히고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비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에서는 이주의 동기를 야훼임을 나타내는 반면에 비석문에서는 마르둑(Marduk)과 메소포타미아

의 많은 신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고레스 왕의 정책을 이해하면 차이점이 생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점령한 나라나 민족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 앗시리아가 무력을 바탕으로 한 탄압과 추방정책을 선호했다면 바사(페르시아)는 어느 정도의 수용과 자율을 기초로 한 포용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성경과 비석문의 내용에서 차이점이 생기게 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즉 유화 정책의 방편으로 유대인들에는 그들의 신인 야훼의 명령 때문에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레스 본국인들 에게는 그들의 신들의 명령 때문에 포로들을 귀환시킨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서 바사인들 에게도 그들 신들의 위대성을 표명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Edin M. Yamauchi, “Persians,” in Peoples of the Old Testament World, eds. A. J. Hoerth, G. L. Mattingly, E. M. Yamauchi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94), pp. 107-110., Prichard, ANET, p. 316.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성경 저술의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일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신앙적인 해석이다. 그래서 에스라는 고레스왕이 모든 포로민들에게 반포한 칙령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회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에스라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고레스가 특별한 은총을 내린 것이 아니고, 모든 포로민들에게 베푸는 은총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앙의 눈으로 재해석하니까 고레스도 하나님의 도구로 보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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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총독의 직책은 페르시아인과 메대(메디아)인들에게 맡았고 총독 밑에 각 지역의 본토인들을 공직자로 삼아 효과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 제도는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통치체제 중 하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고레스는 군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서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레스 II세를 이어 BC 529년에 아들인 캠비세스(Cambyses)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주요 업적은 BC 525년에 이집트를 정복한 일이었다. 그 후 4년 뒤 쿠테타의 소식을 듣고 급히 피하다가 사고로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고 이후 3 주 뒤에 죽게 된다.

캠비세스 후에 다리오 I세(Darius I)49)가 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의 업적으로는 선대왕들이 점령한 지역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아몬 신을 위한 신전을 세워주었고 이집트의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일 강과 홍해사이에 운하를 건설하여 교통과 운송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고레스 II세 때에 유대인들은 칙령에 의해 예루살렘에 돌아와 느부갓네살 왕이 파괴한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지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로 말미암아 건축이 15년 동안 중단이 되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의 배려로 말미암아 성전건축이 재개된다(스 6:1-12). 다리오 왕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이 많아 측량법을 표준화하였고 동전도 주조하여 경제적인 측면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50)

49) 여기서 언급이 되는 다리오(스 4-6장)는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메대 사람 다리오(단 5:31; 6:9, 25, 28; 9:1)와는 다른 인물이다. 에스라서의 다리오(BC 522-486년)는 그에 관한 것이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에서도 여러 번 나타나고 있지만 메대 사람 다리오는 성경 외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메대 사람 다리오의 신원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에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 의견이다. 첫 번째 해석은 메대 사람 다리오가 고레스 II세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다니엘 6:28절에 기초한 것인데 이 내용을 보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을 앞에서 해석한데로 하면 메대 사람 다리오와 고레스는 다른 인물로 비쳐지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어질 수가 있다. NIV 에서는 두 가지 해석을 다 수용을 하는데 본문에는 “다리오의 시대와 고레스의 시대”(the reign of Darius and the reign of Cyrus)로 해석하고 있지만 여백에서는 “다리오의 시대 즉 고레스의 시대”(Darius, that is, the reign of Cyrus)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백의 번역에 따르면 다리오와 고레스는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다(참조 D. J. Wiseman, Note on Some Problem in the Book of Daniel (London: Tyndal, 1965) pp. 9-16 ). 메대 사람 다리오에 대한 다른 해석에 따르면 그는 고레스 II 왕의 수하에 있던 구와우바루와(Gaubaruwa)라는 것이다. 구와우바루와는 고레스를 위하여 바벨론을 정복하고 통치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그를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의 모습과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메대 사람 다리오의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는 점이 많기에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다. 참조 W. H. Shea, “Darius the Mede: An Update,”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2 (1982), pp. 229-248.

50) Yamauchi, “Persians”, pp. 1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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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판틴 파피루스 문서(Elephantine Papyrus)

엘레판틴은 나일 강의 작은 섬인데 지금의 아스완(Aswan) 지역으로 이집트 남부 국경선에서 가까운 유대인들의 거주지였다. 그곳은 바사(페르시아)제국의 군사기지로 시작되었지만 후에는 BC 5세기까지는 민간인들도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1893년에 아람어로 기록된 법률과 상업에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좋은 증거 자료가 되고 있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내용은 BC 407년에 그곳에 거주했던 여도니야(Yedonia)라는 사람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유다의 총독 바고아스(Bagoas)에게 보낸 청원서 내용이다. 청원서에는 그들의 하나님 되신 야호(Yaho)51)의 성전이 파괴된 경위와 성전 재건을 간곡히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성전이 재건되면 제사를 드릴 때 총독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도를 할 때에 총독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므로 총독의 허락과 지원을 간곡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아들들인 들라야(Delaiah)와 셀레미야(Shelemiah)에게도 알렸다는 내용도 포함되어있다.52)

Yaho 성전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어져야하는 부분이 바로 유대인들이 엘레판틴에서 행했던 종교의 본질이다. Yaho 성전 재건을 위한 청원서의 내용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와 관련된 다른 글들을 보면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Yaho만 아니라 다른 신을 인정하고 섬겼다는 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 이슘벧엘(Ishumbethel), 아낫벧엘(Anathbethel), 그리고 크눕(Khnub)와 같은 신들의 이름들이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기록한 글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53) 이런 사실을 통해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의 종교는 혼합주의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주된 원인이 혼합주의 때문이라고 한다면 왜 그곳의 유대인들은 그때까지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지역과 환경의 원인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은 할 수 있다.

엘레판틴의 문서들은 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에 필요한 그 당시의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종교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의 이름이 엘레판틴 문서에 나타나므로 이 문서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록 연대를 확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51) Yaho는 YHW의 약자로 아도나이 혹은 야훼를 지칭한다. 52) Prichard, ANET, pp. 491-492.53) Ibid., p.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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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에스라-느헤미야 내용의 구조는 단순하며 명확하다. 세스바살/스룹바벨54)의 활동에 대한 내용만 제외한 나머지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자서전적인 내용이 전체적인 주를 이루고 있다.

에스라 1-6장에는 세스바살/스룹바벨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지대가 BC 536년에 놓였지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성전 재건이 지연된다. 방해 작업은 조직적으로 위협을 가해 일을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아닥사스다 왕에게 글을 올려 건축 후에 있을 여러 가지 부작용들을 고하여 재건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적들은 만약에 성벽이 재건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조공과 잡세와 부가세를 바치지 않고 결국은 왕을 배반할 것이라는 내용을 고소장에 담았다. 이에 아닥사스다 왕은 고소장의 내용을 인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이로 인해 재건이 계속 연기가 되다가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와 총독 닷드내(Tattenai) 등의 청원으로 인해 다리오 왕 2년(BC 520년)에 건축이 재개되어 다리오 왕 6년(BC 516년) 아달월에 재건을 마치게 되는데 전 지대를 놓은 후 20년이 지난 뒤에 완성이 된 것이다.

에스라서의 마지막의 부분인 7-10장과 느헤미야 8-10장에서는 에스라의 행적과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는 제사장의 자손인데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왕의 은혜를 많이 입은 인물이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BC 458년)에 다른 귀환자(남자) 1,773명과 함께 제사와 성전을 위한 필요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에스라의 귀환 목적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가 귀환한 후 곧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큰 문제에 직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인 여인들과의 결혼 문제였다. 이로 인해 에스라는 이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에스라의 회개로 말미암아 많은 무리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때에 이들은 에스라를 도와 이 문제 해결할 것을 맹세하게 된다. 그 후에 에스라는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을 모아 놓고 회개를 촉구하고 회개의

54)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동일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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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으로 이방 여인들을 끊어버리라고 권고하게 된다. 이 말에 소수만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스라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기로 다짐한다. 에스라의 사역은 느헤미야 8-10장에서 계속되는데, 여기에서 그는 율법의 중요성을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새 언약/조약을 확인케 하였다.

느헤미야서는 8, 9, 10장만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느헤미야의 행적과 사역에 관한 내용들이다. 에스라서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해 주로 일인칭적인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 느헤미야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보면 보면 첫째가 예루살렘 성 재건이고 둘째가 종교개혁이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 있을 때에 그는 자신의 본토의 예루살렘 성이 파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게 된다.

이에 왕이 그 이유를 듣고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의 소원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도록 한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상황들을 살펴보며 성의 재건을 시작할 때에 에스라의 경우와 같이 방해세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방해자들은 느헤미야 4:7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의 통치자 산발랏과 그의 종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들의 절반은 수비병으로서 방해를 저지하고 절반은 공사에 동참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성벽 재건 공사를 52일 만에 마치게 된다.

느헤미야 11-13장에는 귀환자들의 명단과 느헤미야에 의한 종교개혁의 내용이 나타난다.

마지막 장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에스라-느헤미야에서 나타나는 모든 종교개혁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먼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작업을 했다. 이방인들을 성전에서 축출하고 출입을 금지시켜 성전을 더럽혔던 행위를 금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전사역을 위해 포로에서 데려온 레위인들이 생계를 위하여 성전을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불러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질책하고 성결하게 그 법을 지킬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방 여인과의 결혼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과거에 이 일로 인해 범죄 한 경우를 상기시키면서 이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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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세스바살/스룹바벨 의 인도하의 귀환 (스 1-2장)

1) 귀환의 배경 에스라 1장

2) 귀환자의 명단 2장

II. 성전재건의 착수와 중건(3-6장)

1) 번제단의 재건 3:1-62) 성전 재건의 착수 3:7-133) 성전 재건에 대한 방해 4장4) 성전 재건의 재개와 중건 5-6장

III. 에스라의 귀환 (7-8장)

1) 귀환의 배경 7장2) 귀환자의 명단 8:1-203) 무사한 귀환을 위한 에스라의 금식 기도 8:21-234) 성전을 위한 예물 수송 관리 8:24-305)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 8:31-36

IV. 에스라의 개혁 (9-10장)

1) 혼합 결혼으로 인한 부패상 9:1-42) 부패상에 대한 회개와 신앙 고백 9:5-153) 개혁의 내용 10장

V. 느헤미야의 귀환 (느 1-2:10)

1) 본국의 소식에 슬퍼하며 기도하는 예레미야 느헤미야 1장2) 느헤미야의 귀환 2장

VI. 성벽 재건 착수와 중건(2:12-7:73)

1) 성전 재건 착수 2:11-3:322) 재건에 대한 방해 4:1-6:143) 재건의 완성 및 인구 조사 6:15-7:73

VII. 유대인들의 부흥 운동(8-13장)

1) 율법의 낭독과 초막절 행사의 재실시 8장2) 백성들의 회개 9:1-373) 새 언약/조약을 받은 사람들 9:38-10:374) 백성들의 재정착 11:1-12:265) 성벽의 봉헌 12:27-476) 개혁의 내용 - 성전 성결, 레위인들의 직분 복귀, 안식일 법 재정, 잡혼 금지. 13장

개 요

중요 주제

두 번째 출이집트으로서의 귀환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하는 모습을 보면 출이집트 당시의 그것과 비교할 때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었다는 것이 출이집트과 포로 귀환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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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다가 결국은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다.55)

또 다른 유사점은 포로에서 나올 때의 주변 사람의 태도가 출이집트 때의 그것과 비교할 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 그 사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값진 물건과 보물을 준 것뿐만 아니라 고레스 왕도 이전에 탈취되었던 야훼 성전의 기명들을 돌려주었다(스 1:5-11). 이와 마찬가지로 출이집트 당시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할 때 그들이 구하는 대로 이집트 인들이 제공하였다. 두 경우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필요한 것을 그들이 나오기 전에 그곳 본토인들에게서 취하게 되었던 그 사실이 매우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예배 처소를 위하여 하나님 자손들이 예물을 바칠 때의 태도가 자발적이었다는 것에서 유사한 점을 찾을 수가 있다. 스룹바벨의 인도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야훼의 성전 터에 도착했을 때에 성전 재건을 위해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역량대로 예물을 드린 모습을 볼 수 있다(스 2:68-69; 느 7:70-72). 귀환자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출이집트 한 이스라엘 자손들도 예배 처소인 성막을 건축할 때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필요한 물질을 드렸다. 예배 처소를 위해 자신들의 소유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기쁨으로 드린 포로 귀환자들과 출이집트 후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 자세는 시간과 환경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의 헌신의 자세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포로 귀환을 두 번째 출이집트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일 공동체

역대기와 마찬가지로 에스라-느헤미야서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단일 공동체라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판의 차원에서 포로 생활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도 포로기 이전의 상태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에스라-느헤미야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공동체가 단절이 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서로가 연결성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런 증거를 에스라 2장과 8장과 그리고 느헤미야 7장과 11장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55) 출이집트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의 학대를 보시고 모세를 통하여 이루신 역사이다(출 3:9-10). 포로 귀환의 경우도 출이집트의 사역과 같이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명하셔서 유대인들을 귀환토록 하였다(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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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포로기 이전에 존재했던 조상들의 명단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것은 귀환자들의 뿌리가 포로 이전의 조상들에게 있음을 밝힘으로서 두 공동체 사이의 연계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포로기 이전과 이후에 존재했던 인물들을 동시에 언급함으로서 열거된 모든 사람들이 단일 공동체의 일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귀환자의 대부분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포로 생활을 하였고 본토가 황무하게 되었지만 귀환자들은 불평하지 않고 재물과 힘을 합쳐 협력하여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과거 조상들과 연계된 단일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토라의 권위

에스라-느헤미야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성전과 성벽의 재건과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 개혁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물론 포로기 이전에도 율법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지만 포로기 이후에 이해된 율법의 권위의 정도와는 차이가 있다. 왕정 시대의 경우 율법은 존재는 했지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은 오직 한 명, 요시야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56). 이와 같이 포로기 이전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지키지를 않았다. 그러나 포로기를 지난 유대인들 사이에는 고통이 율법의 불순종 때문에 비롯된 사실인 것을 깨닫고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느헤미야 8-9장에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였을 때에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에스라가 하나님 야훼를 송축할 때에 백성들이 손을 들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야훼를 경배하였다. 그리고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을 낭독할 때에 백성들이 듣고 모두가 슬퍼하며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반응의 태도는 포로기 이전에는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후 그들은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힘쓰게 된다. 심지어는 말씀을 지키고자하는 열정의 도가 넘쳐 이방인이란 이유 때문에 아내와 그 소생들을 모두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율법의 교훈을 따라 행해졌기에 포로기 이후의 율법의 권위는 그들에게는 절대적이었다.

56) 야훼께 온전히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도 있었지만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행한 자는 기록상으로는 오직 요시야뿐이었다(왕하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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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스 더

에스더서는 포로기에 귀환하지 않고 바사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어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런 위치에 있는 책이지만 정경성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부정적으로 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책이 너무 세속적이란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극단적 민족주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자주 비평의 대상이 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에스더서가 구약과 신약의 어떠한 책에서도 언급이 되어지지 않는 것과 에스더서가 쿰란 사본(Qumran Codex)에는 없는 유일한 구약 성경책이란 사실 때문에 정경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의 모습이 에스라의 전체적인 내용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경 외에 성경의 절기(부림절)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유일한 책이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57) 이 책의 명칭은 중요 인물인 에스더58)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55번이나 나타나지만 에스더서 외의 다른 성경책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서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Ahasuerus) 왕의 왕비가 된 아름답고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용기와 결단력은 성경에 나타나는 어떠한 인물보다도 뛰어나 어려움에 처한 그녀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구하게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라는 각오의 믿음이 민족을 구하고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되는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믿음의 용기가 부족한 세대에게 주는 교훈이 되고 있다.

저자와 기록 연대

에스더서 자체는 저자와 기록 연대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다. 탈무드(Baba Bathra 15a)에서는 에스라 시대에 대회당(Great Synagogue)의 사람들이 에

57) F. B. Huey, "Esther,“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88), p. 784.

58) 에스더의 히브리 이름은 하닷사인데 이 이름은 단 한번 에스더 2:7절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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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더를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요셉푸스(Flavius Josephus)는 모르드개(Mordecai)가 이 책의 저자라고 말한다. 어째든 누가 기록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의 저자는 페르시아의 문화와 지리 그리고 왕궁 생활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기록 연대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의 기록 시기는 아하수에로 왕의 죽은 해인 BC 465년 이후라는 것이다(에 10:2).

역사적 배경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I세(Xerxes I, BC 486-465년)59) 때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왕은 재임 초기만 하더라도 정복한 소아시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지역을 열정과 무자비한 정책을 기반으로 하여 통치하였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BC 481년에는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지만 바로 다음 해인 BC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the Bay of Salamis)에서 패함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기반을 잃어버린 동시에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페르시아 왕국은 아닥사스다 I세(Artaxerxes I, BC 464-423년), 다리우스 2세(Darius II, BC423-403년) 그리고 아닥사스다 Ⅱ세(Artaxerxes Ⅱ, BC 404-359년)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에게 패해 멸망하게 된다.

내 용

에스더서의 내용은 단순하다.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에 의해 양육된 고아였던 에스더가 바사국의 왕비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민족을 구하게 되는 내용이다. 아하수에로의 왕비였던 와스디의 불순종으로 그녀가 폐위를 당한 뒤 에스더가 왕의 총애를 받아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후에 에스더의 보호자인 모르드개가 왕의 내시인 빅단과 데레스가 원한으로 왕을 모살하려는 사실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하여 왕이 위기를 모면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높은 지위에 있는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만이 분노하여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을 다 멸하고자 하는 계획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만은 이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왕에게 어떤 민족이 왕의 법률을 지키지

59) 크세르크세스 왕은 에스더에서 아하수에로 왕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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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왕비가 된 에스더(1-2장)

1. 와스디 왕후의 폐위 1장

2. 에스더의 발탁 2:1-20

3. 왕을 구한 모르드개 2:21-23

II. 유대인들의 위기(3-5장)

1. 유대인을 멸하려는 하만의 음모 3장

2. 에스더에게 음모를 알린 모르드개 4장

3. 에스더의 개입 5장

않는다는 보고를 하여 왕으로부터 그들을 진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이에 하만은 모든 유대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 하고 죽이고 도륙하라는 조서를 각국 각처에 보내게 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알렸을 때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수산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삼 일을 금식하고 자신도 같이 금식한 후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아가겠다고 말을 한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갔을 때에 왕은 에스더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데 이에 에스더는 왕이 하만과 함께 그가 베풀 잔치에 올 것을 요청한다. 하만과 함께 잔치에 참여한 왕은 에스더에게 한 번 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는데 이에 에스더는 내일 다시 잔치에 참여하면 그때에 소원을 말하겠노라고 답을 하게 된다. 왕과 함께 잔치에 동참한 하만은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대궐문에서 모르드개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에도 모르드개가 예의를 표하지 않음을 보고 노하여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그를 달아 죽이기로 하만은 주변사람들과 함께 계획을 세운다.

둘째 날 잔치에서 다시 한 번 더 소원을 물을 때 에스더는 하만이 꾸민 사실을 밝히고 그와 그의 민족의 생명이 보존되기를 간청하니 왕이 모르드개를 목매려고 준비한 장대에 하만을 달게 된다. 하만이 죽고 나서 그 직위를 모르드개가 대신하게 되었지만 하만이 내린 조서는 철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스더가 다시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취소하기를 요청하자 왕이 허락하여 조서가 철회된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미워하여 치려고 했던 자들이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들에게 직면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다. 이 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르드개는 각 도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라고 글을 보내었는데 이날들이 바로 부림절이 되었다.

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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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뒤바뀐 운명 (6:1-9:19)

1. 모르드개에게 부여된 영예 6:1-13

2. 하만의 몰락과 죽음 6:14-7:10

3. 취소된 하만의 조서 8:1-17

4. 대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보복 9:1-19

IV. 부림절의 유래와 모르드개의 영광 9:20-10:3

중 요 주 제

부 림 절

부림절의 기원이 에스더에서 유래되었기에 오경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 유일한 유대인의 절기가 되었다. 이 절기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대학살을 막고 평안과 기쁨을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르드개가 제정하였다. 그래서 외경 마카비 후서 15:36에서는 부림절을 모르드개의 날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절기는 지금까지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즐겁게 지켜지고 있는 민족의 축제가 되고 있다.60)

부림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부르”(pur) 즉 “제비”(lot)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다. 이 유래는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할 때를 정하기위해 제비를 던져 아달월로 확정한데서 비롯되었다. 하만이 유대인을 멸하기로 결정한 그 시대의 아달월은 오히려 하만이 죽임을 당하는 때가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영광 얻은 축제일이 되었던 것이다.

에스더서의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이 부림절의 기원과 제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9:20 이후에 나타나는 내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부림절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모르드개는 부림절을 아달월 14일과 15일에 지키라는 규례를 세운다. 모르드개는 구약의 다른 절기의 경우처럼 부림절도 그 시기를 정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다른 절기들과 마찬가지로 부림절도 권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절기는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당대에서만 아니라 후세에서도 계속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권위

60) Stephen F. Noll, “Esther,”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edited by W.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9), p. 32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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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축제가 된 것이다.

또한 에스더 마지막 장에서는 이 절기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날에 대적의 위험에서 벗어났기에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어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이날에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구제하라는 것은 율법의 교훈이 반영된 종교적인 의미가 강한 축제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셨다는 언급을 에스더서에서는 찾아볼 수는 없지만 부림절의 의미 속에서 에스더와 그의 민족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이 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내용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에스더 4:3과 16절에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만이 내린 조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애통하며 금식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금식은 구약에서 급박한 사정을 하나님께 아뢸 때 행해졌던 것으로 금식의 목적은 하나님 응답에 있었다. 금식은 단순하게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이 금식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극단적인 기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금식으로 말미암아 에스더와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이 해결이 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부림절의 의미를 축제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폭을 넓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에 관심을 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에스더에 기록이 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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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웅 박사 소개

한국국제대학교 관광경영학과 학사(B.T)-1998백석대학교 신학과 학사(B.A)-2001이스라엘 키부츠 울판(2년)-2002-2004대한성서공회 아카드어 입문 과정 수료-2005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 Div)-2005백석대학교 전문대학원 신학 석사(Th. M)-성서고고학-2009백석대학교 전문대학원 철학 박사(Ph. D)-구약학-2015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강의교수-2010~2011(2년)백석문화대학교 외래 교수-2010~2011(2년)백석정신아카데미 개혁주의생명신학 연구원-2010~2011(2년)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2012~2014(3년)스타선교회 소속 해외신학교 전담 구약학 교수(2009년-2019년 현재)백석대학교 기독교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2016년-2019년 현재)그리스도대학교(KT대학교) 일반대학원 강의교수(2018년)생명길신학교 구약학 겸임교수(2019년 현재)

국제총회신학원(대전) 구약학 교수(2009년-2010년)합동개혁 천안총회신학.신대원(천안) 구약학 교수(2009년-2014년)천안총신신학원 구약학 교수(2011년-2013년)도서출판 드보라(서울) 전담 히브리어 교수(2012년-2013년)브니엘 신학교(부산) 구약학 교수(2014년)재건 총회신학원(천안) 구약학 교수(2016년)합동개혁 총회충청신학.신대원(천안) 구약학 교수(2011년-2018년)열방총회신학교(전주) 구약학 교수(2016년-2018년)정통합동 총회신학교(서울, 인천) 구약학 교수(2012년-2019년 현재)천안백석신학교 구약학교수(2017년-2019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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