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변풍경’ 속 청계천Ž˜이지... · 소설 ‘천변풍경’ 속 청계천 ......

5
소설, 천변풍경 이것은 책이라기보다 차라리 영화다. 작가의 눈을 통해서, 때로는 이발소 소년 재봉이의 눈을 통해서, 또 때로는 점룡이 어머니의 눈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공간을 거닌다. 소설임 에도 불구하고 세밀하게 공간을 읽어내는 작가의 카메라 같은 눈과 인물들의 살아있는 감정 묘사 그리고 청계천이라는 공 간에 얽힌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은 한편의 휴먼다큐멘터리 를 보는 듯, 내가 겪어보지 못한 1930년대로 안내한다. 1930년대. 78년에 태어난 나에겐 참 멀고도 낯선 시대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이며, 경제적 번영과 함께 대중문 화의 발전을 체험했고, 지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시대를 살 아내고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이것은 호기심을 넘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이기도 하다. 우 리가 누리고 있는 작금의 혜택들(혜택이 아닌 것도 많지만...) 은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몸부림들이 만들 어낸 시절 위에 쌓아올려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 은 우리가 딛고 서있는 바닥(땅) 아래를 보는 것이기도 하고 동 시에 우리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동시대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사람들과의 소통 역시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러한 소통에 있어서 소설만큼 좋은 것이 없다. 숫자나 문자 로 점철된 사지선다형식 단편적 사실을 배우는 역사교과서보 다도 그 시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엿보는 역사소설이야말 로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여기에 천변풍경이 더욱 특별한 이 유는 청계천이라는 하천공간을 매개로, 공간을 통한 사람들 의 소통 그리고 시간(역사)의 흐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 기 때문이다. 책의 첫 장면은 청계천 빨래터에 모여든 아낙들의 수다로부 터 시작된다. 딸 이쁜이의 결혼을 앞둔 홀어머니의 근심, 허구 언날 윷판에 기웃거리는 아들 점룡이 어머니의 걱정은 오늘날 어머니들이 고민하는 자식사랑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은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속내이다. 세 명 이상이 모였는데 뒷담 화가 빠지면 안되지. 그리고 뒷담화의 주인공 민주사는, 거부 는 아니지만 이 동네서 제법 산다. 중산층 정도 되겠다. 이 민 주사 하는 짓거리를 보면, 뒷담화를 당하고도 남을 만하다. 허 세 가득한 인품도 그렇거니와 첩을 거느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절모는 마스코트와 같으며, 청계천에 자리한 이발 소에서 일하는 소년 재봉이의 소박한 꿈은 그 중절모가 언젠 가 바람에 날려 청계천으로 떠내려 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맨 마지막에 진짜로 재봉이의 소박하디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도 참으로 고소하지 않을 수 소설 ‘천변풍경’ 속 청계천 이 자 영 | 전남발전연구원 ([email protected])

Upload: others

Post on 08-Aug-2020

2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36 37

    소설, 천변풍경

    이것은 책이라기보다 차라리 영화다. 작가의 눈을 통해서,

    때로는 이발소 소년 재봉이의 눈을 통해서, 또 때로는 점룡이

    어머니의 눈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공간을 거닌다. 소설임

    에도 불구하고 세밀하게 공간을 읽어내는 작가의 카메라 같은

    눈과 인물들의 살아있는 감정 묘사 그리고 청계천이라는 공

    간에 얽힌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은 한편의 휴먼다큐멘터리

    를 보는 듯, 내가 겪어보지 못한 1930년대로 안내한다.

    1930년대. 78년에 태어난 나에겐 참 멀고도 낯선 시대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이며, 경제적 번영과 함께 대중문

    화의 발전을 체험했고, 지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시대를 살

    아내고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이것은 호기심을 넘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이기도 하다. 우

    리가 누리고 있는 작금의 혜택들(혜택이 아닌 것도 많지만...)

    은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몸부림들이 만들

    어낸 시절 위에 쌓아올려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

    은 우리가 딛고 서있는 바닥(땅) 아래를 보는 것이기도 하고 동

    시에 우리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동시대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사람들과의 소통 역시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러한 소통에 있어서 소설만큼 좋은 것이 없다. 숫자나 문자

    로 점철된 사지선다형식 단편적 사실을 배우는 역사교과서보

    다도 그 시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엿보는 역사소설이야말

    로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여기에 천변풍경이 더욱 특별한 이

    유는 청계천이라는 하천공간을 매개로, 공간을 통한 사람들

    의 소통 그리고 시간(역사)의 흐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

    기 때문이다.

    책의 첫 장면은 청계천 빨래터에 모여든 아낙들의 수다로부

    터 시작된다. 딸 이쁜이의 결혼을 앞둔 홀어머니의 근심, 허구

    언날 윷판에 기웃거리는 아들 점룡이 어머니의 걱정은 오늘날

    어머니들이 고민하는 자식사랑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은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속내이다. 세 명 이상이 모였는데 뒷담

    화가 빠지면 안되지. 그리고 뒷담화의 주인공 민주사는, 거부

    는 아니지만 이 동네서 제법 산다. 중산층 정도 되겠다. 이 민

    주사 하는 짓거리를 보면, 뒷담화를 당하고도 남을 만하다. 허

    세 가득한 인품도 그렇거니와 첩을 거느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절모는 마스코트와 같으며, 청계천에 자리한 이발

    소에서 일하는 소년 재봉이의 소박한 꿈은 그 중절모가 언젠

    가 바람에 날려 청계천으로 떠내려 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맨 마지막에 진짜로 재봉이의 소박하디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도 참으로 고소하지 않을 수

    소설 ‘천변풍경’ 속 청계천

    이 자 영 | 전남발전연구원([email protected])

  • 하천과 문화 Vol. 11 No.1 ● 겨울36 37

    없다. 다만, 재봉이가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작가는 이렇게 때로는 독자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기도 하고

    낄낄거리며 웃게도 하며, 무려 50명의 등장인물들의 저나름의

    삶의 애환과 소소한 일상 속 기쁨을 묘사한다. 마치 그들의 일

    상을 밀착 취재하듯 그려내고 있기에 나는 마치 할 일 없이 카

    페에 앉아 옆자리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수다를 듣듯이, 알고

    싶지는 않지만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지하철 옆자리 사람의

    통화를 엿듣듯이 모른 척하고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기막힌

    반전이나 가슴벅찬 클라이막스가 있는 기승전결의 구조는 아

    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 시절의 청계천의 풍경과, 삶의 풍경

    을 세세하게 느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책, 천변풍경을 통해 그

    시절 청계천의 풍경을 따라 가보자.

    소설 속에서 팔딱이고 있는 하천의 풍경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EBS 책읽는 라디오의 낭독이었다.

    성우들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약간의 효과음이 더해진다.

    그때 들었던 배경효과 중 청계천 빨래터의 물 흐르는 소리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세탁기로 인해, 강에 모여 빨래를 한다는 게 굉장히 원

    시시대처럼 느껴지면서도, 동네에 모여 수다를 떠는 아낙들

    의 모습이,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나 모바일을 통해 끊임없

    이 대화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내게 또 생경했던 것

    중 하나는, 이 빨래터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막 시골

    에서 올라온 아낙에게 빨래터 주인은 아낙의 세상물정 모름

    을 타박하며 값을 알려주는데, 농촌사회에서 도시로 급변하

    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도시로 떠나며 겪

    는 농민들의 애환을 통해 시대상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처음

    이니까 그냥 공짜로 해주라는 단골 아낙들의 부탁에서 그래

    도 살아있는 이웃 간의 정이 풋풋하게 느껴진다.

    소설에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다양한 삶의 풍경들을 묘

    사하고 있다. 청계천변에 늘어선 상가와 주택가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물론, 다리 밑 거지와 천변 한켠에 벌어지

    는 윷판, 천변과 다리를 바쁘게 오고가는 신사와 멋쟁이 아가

    씨는 물론 가난뱅이들과 꼬마들까지...... 만약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었을까?

    유료 빨래터였던 청계천은 여성들의 소통공간

    누구에게나 힘들었던 시절이었을 테지만, 특히나 여자들이

    견디어내기엔 더욱 가혹했던 시절이었으리라. 가난한 여자라

    면 더욱 더. 조선시대 몹쓸 유교적 관습에 의한 여성억압은 변

    하지 않은 가운데 시절은 하수상하니 말이다. 시어머니의 타

    박, 남편의 외도와 폭력, 가난과의 전쟁, 육아에 대한 책임감,

    불임으로 인한 죄책감 등 여성들의 한(恨)은 나열하기에 한(

    限)이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여성들의 심경을 세심

    하면서 애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여성들에게 하천의 빨래는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육

    체적으로는 중노동이다. 겨울은 더욱 혹독했으리라. 그러면

    서 동시에 빨래터는 수다를 통해, 힘껏 두들겨 패는 방망이질

    을 통해, 깨끗한 물에 더러움을 씻어내는 행위를 통해 스트레

    스를 분산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 38 39

    일제시대 청계천 빨래터의 모습 현재의 청계천 빨래터

    사내 같은 웃음을 웃어도 칠성어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방망이만 놀리고 있었으나,

    “아니 그럼 이거 참 빨래 공짜루 허는 줄 알었습니까?”……

    그밖에는 더 안 되어 보이는 그 여인은, 잠깐 어리둥절하여 빨래터 주인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그러믄, 돈을 내요?”

    어이없이 묻는 양이, 이곳 풍습에는 매우 어두운 듯싶다.김첨지는 그대로 그곳에 서서 줄을 매면서도 더욱 기가 나서,

    “아니, 돈을 내요라니…… 그럼 이건, 누가, 남 자선사업으루 허는 줄 알았습디까?뭐 이래저래 돈 드는 거, 노력 드는 거, 다 그만 두구래두,

    우선 해마다 경성부청에다 갖다 바치는 세금만 해두 수십 환야.이건, 왜, 어림두 없이 이러는 거요?

    흥미로운 것은 청계천 빨래터가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무슨 봉이 김선달같은 소리인가 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정

    말 그러했다.1) 소설 천변풍경에서는 시골에서 막 상경한 아낙

    과 빨래터 주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 당시 상황을 세세하게 전

    해준다.

    그렇다. 청계천 빨래터는 공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로 급변하는 그 당시 사회구조상을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가에서 빨래하는 것도 서러운데, 돈

    까지 내야 한다니, 씁쓸하기도 하다.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활보했던 청계천

    암울함으로 가득했을 것만 같은 1930년대도 변화하는 문명

    의 흐름은 역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모던세대의 등

    장이 이를 대변한다. 서양식 양복을 입은 모던보이, 진한 화장

    과 구두로 한껏 멋부린 모던 걸들의 등장이다.2) 소설 속에서

    도 이런 모던세대들이 등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

    경이 사람구경이 아닐까. 잠시 그때 당시 천변을 거닐었던 사

    람들을 구경해보자.

    1) 청계천(淸溪川)은 일제가 붙인 미명(美名)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렀을까? 그렇지 않

    았다. 태종이 자연하천을 넓혀 판 인공 배수로였기에 ‘개천(開川)’이라 명명했지만,

    만든 직후부터 장마철이면 흙탕물이 집과 사람을 삼키곤 했다. 그럼에도 세종 이

    후 200년간 준설은 없었다. 광교(廣橋) 아래 모든 물길이 메워져 버린 영조 때에야

    천변(川邊)에 석축(石築)을 쌓고 토사를 퍼냈으며, 표석을 세워 준설의 기준점을 세

    웠다. “공경대부와 서민을 막론하고 개천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영

    조의 당부는 1908년까지 지켜졌다. 그러나 일제는 1918년까지 2, 3년 주기로 행해

    진 준천(濬川)을 하지 않았고,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청계천은 시궁창이 되고 말았

    다. 1930년대 청계천 빨래터 모습이 담긴 사진은 역설을 범한다. 물이 깨끗해 보이

    니 말이다. 석축 바로 옆 빨랫돌 사이 물줄기는 하천수가 아닌 땅에서 솟은 샘물이

    었고, 이 샘터는 주인이 있는 유료 빨래터였다.

    2) 개항기開港期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물西洋文物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더욱

    대중화되어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신문물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

    다. 서양식 차림을 한 모던세대가 등장하여 거리를 활보하고, 화장품과 향수, 커피와

    홍차, 맥주와 포도주, 초콜릿, 캐러멜 등의 서양과자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30년대 중반 일반화된 유성기留聲機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람들을 사색思

    索에 잠기게 하고, 때론 춤추게 했다. 이와 같이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서구西歐의 신

    문물은 천변川邊을 근대의 경험이 가득한 근대문명의 경험지로 만들었다.

  • 하천과 문화 Vol. 11 No.1 ● 겨울38 39

    정자옥 양복점 광고(동아일보, 1923년)

    아침에 점에 나왔다가 저녁때 집을 돌아가는 이 신사는 언제고, 골목에서 나와 배다리를 지나 북쪽 천변을 광교에까지 이르는 노차를 택하였다. 까닭에 광교와 배다리 사이 북쪽 천변에 있는 이발소 창으로, 소년은 언제든 그렇게 가까이서 그를 조석으로 대한다. 그리고 대할 때마다 은근한 기쁨을 갖는다. 그 기쁨과 함께 어느 한 포목전 주인에게 갖는 기대라는 것을 아주 이 기회에 말하면, 그것은 신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중산모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소년의 관찰에 의하면, 그의 중산모는 그의 머리 둘레에 비하여 크도 작도 않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신사는, 결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깊이 쓰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그것을 머리 위에 사뿐 얹어놓은 채 걸어 다녔다. 어느 때고 갑자기 바람이라도 세차게 분다면, 그의 모자가 그대로 그곳에 안정되어 있을 수 없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소년은 그것에 적잖이 명랑한 기대를 가졌다. ……그렇게도 그가 벼르고 기다리던 포목전 주인의 중산모가 끝끝내 바람에 날아 떨어진 것이다. 그 불운한 중산모는 하필 고르디 골라, 새벽에 살얼음이 얼었다가 막 풀린 개천물 속에 빠졌다. 상판대기에 불에다 덴 자국이 있는 깍정이 놈이 다리 밑에서

    뛰어나와 얼른 건졌으나, 시꺼먼 똥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코에다 갖다 대보지 않더라도 우선 냄새가 대단할 듯싶다.……

    천변에 구경꾼들은 얼마 동안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중산모를 삐뚜름히 쓴 깍정이 녀석이 바로 흥에 겨워 ‘채풀링’ 흉내를 내고 있는 꼴이 제법 흥미깊었던 까닭이다.

    소설의 내용을 통해 몇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사실은, 청계

    천의 물이 아주 더럽다는 것, 체면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양반

    들처럼 소설 속 신사에게 중산모는 일종의 지위와 권력 내지

    는 부를 상징하는 도구였다는 점, 다리 주변에 하릴없는 사

    람들 또는 거지들이 있었다는 것 등등이다. 또한 이 소설에

    서 작가는 이 시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나 나라의 독립 따

    위는 안중에 없이 자신만의 안위와 세속적 권력만을 추구하

    는 인간들을 조롱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작가의 가치관을 비

    치고 있다.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작가, 구보 박태원

    아버지는 약사, 숙부는 의사였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난 작

    가는 일본에서 유학했을 정도로 그 당시 지성인이자 모던보이

    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약자들의 삶

    을 샅샅이 그려내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의 인류애와 조국애

    의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느껴진다. 추후 월북하여 말년에 실

    명과 전신마비를 당하면서도 구술을 통해 동학농민운동이라

    는 거대한 역사소설을 완성하였다고 하니, 그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영화 ‘괴물’, ‘설국열차’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 그의 외손주이다.

    조금은 코믹한 소설인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자 펼쳤

    던 책, 천변풍경.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

    를 잇는 그 중심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냥 예쁘장하게

    단장된 도심하천이었던 청계천의 물소리가, 이 겨울 스산하게

    나의 가슴을 적신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천변풍경을 읽고 청

  • 40 41

    계천을 거닐어 보자.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이나 청계천박물

    관 등에 천변풍경 속 모습을 재현해놓았다고 하니, 모던보이

    처럼 한껏 멋을 내고 구경하러 가보자. 삶에 지친 그대에게 적

    잖은 위로와 재미가 될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천변풍경이야말로 우리가 키워나가야

    할 문화콘텐츠의 올바른 모델이라는 점이다. 공간을 매개로

    그 당시의 세세한 풍경을 이야기로 전달함으로써 공간은 오

    늘날에도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아, 박물관으로, 사진으로, 조형물로 확대재생산

    되었으며, 회자되고 있다. 또한 선조들이 힘겹게 살아냈던 그

    시절은 잊혀지지 않고 고스란히 흐르게 되었으니, 스토리텔

    링의 힘이란 것이 바로 이렇게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풍경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또 다른 풍경들을 만

    들어낸다.

    자,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계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