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10

Upload: others

Post on 02-Jun-2020

1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Page 1: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2

Page 2: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3

영원한신라인

윤경렬

Page 3: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4

“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다.” 윤경렬의 《자서전》에서

1916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태생. 일제 치하에서도 20세까지 여러 곳에서 야학을 보살핌.

1935 인형 만들기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감.

1938 귀국

1941 26세에 결혼

1943 개성에서 고려인형연구소 경영

1949 경주에서 한국풍속인형연구소 고청사 설립

1954 진홍섭 관장과 더불어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 개설, 강의

1955 어린이박물관학교 개교 1주년 기념식에 박물관학교 교가 작사(작곡 윤이상)

1956 신라문화동인회 창립

1980 일본 각지에서 ‘한국의 미’와 ‘경주 남산 불적’, ‘석굴암의 예술’, ‘한국문화와 자연신앙’ 등 강연

1993 《겨레의 땅 부처님 땅》 펴냄.

1997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펴냄.

1999 11월 30일 고청정사에서 영면

윤경렬 연보

Page 4: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5

밝고 맑은 민족

- 우리 풍속 인형을 만들다

일제치하 무분별한 서양문학의 수용 속에서

아름다운 우리 정서를 시로 담아 낸 김소월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일본인의 왜

곡된 시각으로 상품화한 인형이 아닌, 점잖고

도 아름다운 우리 풍속을 담아 낸 흙인형을

탄생시킨 윤경렬이 있었다.

윤경렬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흙인형

(토우)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우

리 땅에 들어와 기념품으로 우리의 풍속을 담

은 흙인형을 제작해 팔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우리의 풍속 인형은 하나같이 우리의 본 모습

이 아니라 가슴을 내놓은 여인의 우스꽝스러

운 모습, 짐을 지고 힘들어 찡그린 얼굴이었다.

호기심과 재미는 달아나고 화가 치밀었다.

‘내가 인형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면 우리의 아름답고 좋은 모습을 담아 낼 텐데ÿÿ. 못할

것도 없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흙인형 만드는 기술을 제대로 배울 곳이 없었다. 윤경렬은 우선 일본

에 가서 흙인형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3년 반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43년 개성에서 고려인형연구소를 열었다. 본격적인 흙인형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 우리

문화를 지키는 선구자이자 당시 개성박물관장이던 고유섭 선생을 만나며 민족문화에 대한

의식을 확고히 하게 된다.

당시는 일제가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박물관의 책임자는

모두 일본인이었는데 개성박물관장만은 우리나라 사람, 고유섭 선생이었다.

고유섭 선생은 윤경렬에게 우리의 불상들을 보여 주었다. “저것이 백제의 불상인데 전라도

사람 닮지 않았는가. 저것은 신라 불상인데 경상도 사람 닮았지. 그곳에서 싹트고 그곳에서 꽃

피우는 것이 참 아름다움일세. 일본에서 보낸 3년의 독소를 빼내고 또 그들의 문화와 잘 비교

흙인형을 빚고 있는 윤경렬.

그는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생각했다.

Page 5: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6

해 가며 우리 것을 찾아내게!” 윤경렬은 일본의 독소를 빼기 위해 우리의 깊은 역사가 서린 곳

으로 삶의 터를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그곳이 고구려, 백제, 가야의 지혜가 모두 모인 통일신

라의 수도 경주였다.

그는 경주에서의 생활을, 한 미술가에게 보낸 편지 내용처럼 이렇게 지키다가 우리 곁을 떠

났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못난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는 미술, 내면을 충실히 하는 데서 따라

오는 내용의 풍부함, 눈속임이 허용되지 않는 미술.’ 그의 인형과 그림은 그래서 단아하고 곱다.

꽃과 나비와 새, 고운 한복 아가씨, 늠름하고 아름다운 화랑, 미소 가득한 신라인의 얼굴ÿÿ.

겨레의 땅 부처님 땅 - 경주 남산에서 부처와 살다

남북이 갈라져 고향에 갈 수 없는 처지. 하지만 윤경렬은 일종의 보험이랄까, 당신의 표현으로

는 비상금 같은 경주가 있어 고마웠다. 어릴 적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펴낸 《어린이》라는 잡지

에 실린 계림의 김알지 탄생 이야기, 나정의 박혁거세 탄생 이야기 등 경주를 무대로 한 역사

이야기를 읽으며 경주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신라인의 얼굴 표정과 모습을 배우기 위해 경주 주민들과 교류하며 신라인들이 바위에 표현

해 놓은 경주 남산의 불상들을 찾았다. 천 년이 갈무리되어 있는 전설과 혼을 대하는 시간이

었다.

남산 불상들에서 가식과 불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조들의 바위 같고 순수한 마음이 불

상의 미소로 나타나 있었다. 단단한 화강암 바위를 한 알 한 알 쪼아 바위 속 숨은 부처를 찾

아 낸 신라의 예술가들. 예술에 지름길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여름과 겨울이 있기에 가

을과 봄이 있음과 같았다. 사람들은 윤경렬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청(윤경렬)이 남산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인지, 남산 부처님이 고청을 닮아가는 것인지 모

르겠네 그려.”

2000년 경주 남산을 중심으로 경주 시내 일부가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

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 시민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계 문화계가 기뻐하고 자랑스

러워했다. 윤경렬이 타계한 바로 다음 해다. 이 또한 그의 공적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25년 넘게 남산을 온 마음으로 다녔다. 어느덧 나이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점령한 지 16년 만인 1926년에 《남산의 불적》이란 책을 남겼다. 나

Page 6: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7

라를 되찾은 지 이미 3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내놓을 만한 남산 책 한 권이 없다. 외국인이나

우리 학생들이 손바닥만 한 어설픈 지도를 들고 남산 유적을 찾아다닌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도 남산 이야기를 실을 때면 일본인이 만든 일본 책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남산과 함께 살

아가는 우리 경주 사람들이 남산에 관한 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윤경렬은 그간의 경험과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남산 동네 어른들에게서 살아 있는 이야기

를 모았다. 지금껏 고향에 있는 산처럼 다니던 가벼운 마음의 남산과는 달리 새삼 옷깃을 여

몄다. 그리고 남산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마음 여리고 하는 일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윤경렬이 먼먼 길을 돌아 천 년의 부르심에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번 책 내는 일은 저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오니 부디 살피시어

누가 됨이 없게 하소서.’

남산 원고가 정리된 것은 책을 내기로 마음먹은 지 2년 반이 지나서였다. 드디어 우리에 의

한 남산 책이 태어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 사이 환갑도 지나 62세가 되었다. 1979년 《경주

남산 고적 순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남산에 관한 책이 출판되었다. 신라 건국의 터전이자

월지에서 아이들에게 임해전과 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윤경렬

Page 7: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8

신라인들의 신앙의 중심이자 신라의 천 년 역사와 함께 어깨동무한 남산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천수백 년 전 신라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남산을 찾게

하는 디딤돌을 놓아 준 것이다.

우리 문화의 내일 - 어린이박물관학교와 그 제자들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 맑고 푸른 하늘에 뻗쳐라 높이, 꽃피울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아~ 우리 어린이 박물관 학교”

윤경렬이 짓고 윤이상이 곡을 붙인 경주박물관학교 교가의 일부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

기 전 1954년 10월 10일. 하늘과 땅을 교실로 삼아 ‘경주박물관학교’가 첫 문을 열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학교. 어떠한 명목으로도 학생들에게 돈을 받는 일은 없다. 입학과 퇴학

은 학생들 자유이니 결석하더라도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는 학교이다. 시험은 더더구나 없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존대를 하며 고운 말을 쓴다.

변변한 학교 교육조차 어려운 시기에 시작된 우리나라 사회 교육의 선구였다. 지금까지 여

기를 거쳐 간 학생은 5천 명을 헤아린다. 국립박물관 관장, 중앙박물관 실장, 금속공예 명장,

화가, 조각가, 시인, 학교 교사, 교수, 고고학과 역사학자, 문화운동가 ÿÿ. 현재 박물관 학교

출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자신을 위한 삶은 그 자신으로 끝이 나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그 향기가 길이길이 전

하다.’던 말씀이 참으로 진실임을 알고도 남는다.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비극으로 강토와 국민이 아픔을 겪고 있던 1954년, 네 사람이 목요일

이면 어김없이 모였다. ‘목요회’라 이름 했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인 진홍섭, 경주박물관

박일훈 사무관, 문화고등학교 이승을 교감, 그리고 윤경렬.

“한국의 자랑이자 유적의 보고인 경주가 그 역사를 훼손하고 잃어버리고 위락시설이 들어

서 판을 치는 일개 관광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주 시민 모두가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목책이나 철책 없이도 잘 보존될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들 형편이 어려우니

어른들을 가르치기에는 무리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새싹들을 가

르칩시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봅시다.”며

결의했다. 교실은 박물관장실로 하고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라 이름 했다.

포스터를 그린다, 출석부를 만든다, 일지를 만든다, 학생들 앉을 의자를 만든다, 곳곳에 포

Page 8: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49

스터를 붙인다. 더없는 열악함 속에서도 힘을

모아 첫 수업을 맞았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

가 없는 ‘어린이박물관학교’였다.

어린이박물관학교가 문을 연 지 4년째를 맞

아 보다 활발한 학교 운영을 모색할 때 진홍섭

관장은 우리 문화재의 미국 순회 전시 책임자

로 미국으로 떠나고 새 분관장이 왔다. 그리고

일요일.

박물관학교 교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

끄럽고 귀찮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나가

라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에게는 다음 포스터

가 붙을 때까지 휴교하자고 달랬다. 풀이 죽어

고개 숙이며 돌아가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솟

았다. 다음 일요일.

박물관은 조용했지만 윤경렬의 집은 시끌벅

적했다. 어린이들이 집으로 몰려와 능으로, 탑으로, 불상으로 현장에 가서 수업을 하자는 것이

었다. 아이들과 함께 문화재 실측도 하고 껴안아도 보고 유물의 그늘에 기대도 보니, 그야말로

교가의 내용처럼 ‘하늘도 땅도 내 교실’이었다.

“한 번은 눈보라 치고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너무나 추운 날, 누가 왔으려니 하며 좀 늦게

아이들과 약속된 장소로 가니, 어린이 서넛이서 담에 기대 조막손 호호 불며 오들오들 떨면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적이 없다네. 빠질 수가 없었다네.”

윤경렬은 박물관학교 개교 이래 45년의 세월을 그렇게 지켜 왔다. 까만 머리가 백발이 되어

도 어린이와 함께 했다. “그것은 오직 박물관학교 덕이었다. 참으로 감사드린다.”고 어린이들에

게 인사했다.

경주박물관에서 시작하여 하늘과 들로, 시립도서관으로 교실을 옮겨 다니다가 1975년 지금

의 박물관이 크게 세워지며 한병삼 관장이 부임했다. “문화재 교육은 박물관이 좋겠다.”며 박

물관 강당을 기꺼이 내주었다. 어린이들은 20년 만에 다시 문화재 옆에서 유물과 함께 호흡하

경주 배리의 삼존석불입상을 살펴보는 윤경렬, 1966년의 모습이다.

Page 9: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50

며 수업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세월은 흘러 박물관학교 개교 50주년도 벌써 한참이 지났다. 숨바꼭질하며 미끄럼 타던 무

덤, 석빙고, 첨성대, 안압지 등 우리들의 놀이터가 어느 날부터 배움터가 되고, 깨어져 손톱만

한 토기 조각, 기와 조각에도 선조들의 얼이 깃들었음을 느끼게 됐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여전히 강의하시던 음성이 성덕대왕신종 소리와 함께 울린다. 경주의 아

이들과 함께 웃고 흥겨워하고 땀으로, 눈물로, 정성으로, 사랑으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은 국

립경주박물관 동편 해 오르는 곳에 비석이 되어 오늘도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을 맞고 있다.

또 다른 고청을 기다리며…

경주의 역사와 문화재에 애착을 가진 어른들을 모았다. 버려진 절터, 깨진 기와, 실체를 모르

는 흙무더기를 어울려 찾아다녔다. 어린이박물관학교가 개교되고 2년 뒤인 1956년 ‘신라문화

동인회’를 창립, 50년을 넘게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역사로 이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

화 유적을 답사하고 조사하는 일반인들의 모임으로는 효시였다.

스승의 발자취와 가르침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선생님은 스스로 학자가 아니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냥 아버지 또는 선생님이라 했다. 따뜻했고 너그러우셨

다. 뿌리 깊은 역사와 값진 문화재를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 진실의 위대함,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하나 됨을 몸소 보이셨다.

아마 지금쯤 하늘에서 교실을 열고는 이 땅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며 문화를 온몸으로 열

강하고 계시겠지.

손수협

생각거리

윤경렬이 45년간 지켜온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는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가?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우리 문화재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윤경렬과 지인들은 유적지의 보고인 경주의 역

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열악한 조건에서도 ‘황폐해진

우리 땅과 정신을 살리는 새로운 희망’인 ‘박물관학교’를 열었다.

Page 10: 영원한 신라인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박물관학교 수업에 빠진

151151

어린이박물관학교

국립경주박물관 내에는 윤경렬이 처음 문

을 연 어린이박물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어느덧 개교 60주년을 앞둔 어린이박물관

학교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문화의 소중함

을 길러주고자 하는 개교 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어린이박물관학교 수업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주로 1년에 30회의 수

업을 진행한다. 수강생은 100여 명이며, 3월

에 개강하여 매주 토요일에 수업한다. 단 8

월 한 달은 여름방학 기간이다. 우리 문화재

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고 시청각 교육과 현

장 답사 등의 수업이 있고, 모든 수업은 무

료다.

고청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5분 거리에는 윤경렬

의 옛집인 고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윤경렬

이 1999년 별세할 때까지 머물렀던 그의 옛

집은 어린이박물관학교 운영과 신라문화

연구에 힘을 쏟던 곳이다. 앞으로 2013년까

지 전시공간과 체험장 등이 있는 기념관으

로 건립될 예정이다.

윤경렬이 사랑한 땅 경주 체험학습 추천 코스

국립경주박물관

딩~~~딩~~~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된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비천상

과 연꽃 문양 띠가 새겨진 모습

도 화려하지만 긴 여운의 종소

리가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난

종이다. 신라 천 년의 문화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곳으로 40여

개의 국보와 보물을 전시하고

있다.

대릉원

신라의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

릉원은 우뚝 솟은 고분들 풍경

으로 경주만의 독특한 여행을

선사한다. 초록 잔디로 덮인 고

분들이 산처럼 높고, 나무들은

우거져 기분 좋은 그늘을 드리

운다. 대릉원 안쪽에는 무덤의

내부를 공개한 천마총이 자리

잡고 있다.

월지

월지는 흔히 안압지로 부른다.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안압

지라는 이름은 없다. ‘월지’라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어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연못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연

못을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느끼게 한 신라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남산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말하지 마라.”고 한다. 노천박

물관이라 불리며 2000년에 세

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산을

올라보자. 골골마다 다양한 모

습의 부처님이 찾는 이를 반기

고, 불쑥 탑이 나타난다.

국립경주박물관

남산

월지

윤경렬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

대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