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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7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국사학) 성경이 한글로 번역, 최초로 완간된 것이 1911년이다. 이것은 선 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작업하여 이룩한 성과다. 그러나 한글 성경 은 그 전에 이미 해외에서 번역 작업이 이뤄져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따라서 1911년 국내에서 최초로 완간된 성경은 18823월 봉천 문광서원에서 처음 누가복음을 간행한 데서 기산 하면 거의 30년 후의 결실이다. 성경의 한국어 번역 출판은 먼저 외국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한 국에 성경과 기독교가 수용된 과정은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는 차이가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 가서 현지의 언어와 문자를 익힌 후에 성경 번역이 이뤄졌다. 그러 나 한국의 경우는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들어와서 성경 번역을 시 작했거나 성경을 맨 처음으로 출판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가 한국 에 들어오기 전에 외부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 출판된 성 경이 들어와 기독교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성경 번역 작업은 여러 형태로 이뤄졌다. 먼저 만주에서 로 (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德)1870 년대 중반부터 한국인과 함께 진행한 번역 출판 작업은 1882년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출간을 거쳐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약전서)의 간행으로 나타났다. 한편 1884년에는 일본에서 이수정(樹廷)에 의해 한문성서에 이두식 토를 다는 형태로 4복음서와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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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이만열.pdf ·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7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7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국사학)

성경이 한글로 번역, 최초로 완간된 것이 1911년이다. 이것은 선

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작업하여 이룩한 성과다. 그러나 한글 성경

은 그 전에 이미 해외에서 번역 작업이 이뤄져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따라서 1911년 국내에서 최초로 완간된 성경은

1882년 3월 봉천 문광서원에서 처음 누가복음을 간행한 데서 기산

하면 거의 30년 후의 결실이다.

성경의 한국어 번역 출판은 먼저 외국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한

국에 성경과 기독교가 수용된 과정은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는 차이가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

가서 현지의 언어와 문자를 익힌 후에 성경 번역이 이뤄졌다. 그러

나 한국의 경우는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들어와서 성경 번역을 시

작했거나 성경을 맨 처음으로 출판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가 한국

에 들어오기 전에 외부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 출판된 성

경이 들어와 기독교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성경 번역 작업은 여러 형태로 이뤄졌다. 먼저 만주에서 로

스(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德)가 1870

년대 중반부터 한국인과 함께 진행한 번역 출판 작업은 1882년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출간을 거쳐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신

약전서)의 간행으로 나타났다. 한편 1884년에는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에 의해 한문성서에 이두식 토를 다는 형태로 4복음서와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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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행전이 나타났고 1885년에는 역시 이수정에 의해 ‘마가의전한복음

서언해’가 한글과 한문이 병기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이수정과 로스에 의해 번역된 성경은 한국에 먼저 들어온 미국계

선교사들이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수정과 로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성경을 환영하지 않았다. 한국

에 지부를 설치했던 대영성서공회(BFBS)는 미국계 선교사들과 오

랜 동안 토론한 결과 새로운 번역판을 내는 데에 동의했고, 1900년

대에 신약성경이 새로 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인역이 이뤄진

것은 1906년이었다.

한편 구약성경 번역도 1890년대부터 간간히 이뤄졌다. 유태계 미

국인인 피터즈(A. A. Pieters)는 원래 권서(勸書)로 한국에 왔지만

그의 출중한 히브리어 실력이 인정받아 시편 등 구약성경을 조금

씩 번역하여 「조선(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 무

렵 어학에 출중한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널즈(W. D. Reynolds, 李訥瑞)는 그의 어학조사 김정삼(金鼎三)ㆍ이승두(李丞斗) 등과 구약 번

역에 매진한 결과 1910년 그들의 선교구역인 전주에서 구약 번역

완료의 소식을 전보로 보낼 수 있었고, 번역된 원고는 그 이듬해

출판되었다.

이로써 1911년 신구약 성경이 완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번역

성경은 미비점이 많아 신구약 개역위원회를 조직하여 개역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1936년에는 구약성경이 개역 완료되었고

1937년에는 신약성경이 개역 완료되었으며, 1938년에는 현재 사용

하는 개역개정판 성경의 저본에 해당하는 개역성경을 간행하게 되

었다.

성경의 번역 출판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글의 사용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제정된 이후 그 제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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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9

의도와는 달리 많은 수난을 겪었다. 한말에 이르면, 한글의 사용이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민중 속에 파고 들어가 명실공이 우

리말을 문자로서 잡아주고 소통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런 상황에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출판됨으로 한국 민중 속에서

한글이 보편화되는 데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한국이 성경을 접촉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살

피고 이어서 성경의 한글 번역 과정을 되돌아보고, 성경이 간행됨

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도 언급하고자 한

다. 글의 순서는 한글로 번역되기 전에, 성경이 한국인과 접촉하게

된 경위와 성경의 번역 과정 그리고 그것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

향에 대해서 살피는 것으로 하겠다.

1. 한국인이 성경을 접촉하게 된 경위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에도 한국인은 성경을 접촉할 기회

가 여러 번 있었고 그것이 한국어 성경 번역에 크게 영향을 미쳤

다. 한국어 성경 번역 완간에 앞서 이 점을 살펴보려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19세기 초부터 서세동점으로 서양의 선박이 중국을 비롯한 원동

(遠東)에 진출하게 되면서 한국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한국을 방

문한 함선이나 선교사들 중에 한국에 성경을 전한 경우가 있었다.

1816년 9월에 마량진을 방문한 영국 함선에 의해서 영문 성경이

전해진 것을 시작으로 그 뒤 귀츨라프와 토마스 등 선교사들이 성

경을 전했다. 귀츨라프와 토마스가 전한 성경은 한문성경이었는데,

중국에서는 1813년 모리슨이 성경을 처음 중국어로 펴낸 이후 많

은 종류의 한문성경이 번역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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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한편 한국인들이 성경에 접촉하게 된 것은 중국 성경이 전래되거

나 한역 서학서 특히 천주교 교리서들이 한국에 전래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뤄졌다. 천주교 교리서와 간이(簡易) 성경 번역들은 중국

에서 전래되어, 한국어 성경 번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또 한국

천주교회에서 간행한 성경직해나 교리서들도 한국어 성경 번역

에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성경 접촉 경위는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다

음과 같이 살펴보겠다.

가. 마량진에서 영국 군함으로부터 성경을 받음: 한국이 성경을

접하게 된 것은 언제쯤일까. 경교(景敎)와 천주교를 통해서도 접촉

했을 수 있다는 가정을 제외하면, 19세기 초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마량진(馬梁鎭) 앞 갈곶(葛串)에 기착한 영국 군함으로부터 전수받

은 성경이 효시일 것이다.

1816년 9월에 영국의 함선 두 척이 이곳에 기착하게 된 것은 이

렇다. 두 함선은 영국의 알세스트(Alceste, 함장 Murry Maxwell)호와

리라(Lyra, 함장 Basil Hall)호다. 이들은 중국에 파송하는 특명전권

대사인 암허스트(J. Wm. Amherst) 일행을 천진(天津)에까지 호송한

후, 요동만과 직예만, 조선 서해안 탐사에 나섰다가 한반도 근해에

이르렀다. 9월 1일 그들은 대청군도에 접근했고, 9월 4일(음 純祖 16년 7월 18일)에 마량진에 도착, 10여 시간 정박하게 되었는데, 정

박하는 동안 조선 관리들이 두 차례나 문정(問情)했다. 문정관 마량

진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현감 이승열(李升烈)은 두 배에 승

선, 검사하고 모두 세 권의 책을 받았다. 그 중 한 권이 성경이었

다는 것은 뒷날 영국인의 기록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국측의 사건 전말에 대한 보고서는 순조실록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받은 책의 문자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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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11

책 중에 성경이 들어 있다는 것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해

안에 정박하여 한국 관리의 문정을 받는 과정 등 여러 상황에 대

해서는 리라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이 쓴 항해기2)와 알세스

트호에 승선했던 군의관 존 맥레오드(John M'Leod)가 남긴 항해기3)

에 기록되어 있다.

영국 함대에 보관 중인 성경이 한국인에게 전해진 것은 9월 5일

이다. 첫 문정이 있었던 그 이튿날이다. 바실 홀과 맥레오드는 성

경이 9월 5일에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주어졌다고 증언한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9월 5일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비인현감 이승열을 대동하고 리라

호를 방문했다. 이날 현감 이승열은 영국 군의관으로부터 진찰을

받았다. 그 뒤, 먼저 한 권의 책을 선물로 받았고, 얼마 후에 첨사

조대복이 또 한 권의 책을 선물로 전해 받았다. 이런 우호적인 분

위기 때문인지 영국 사람들이 육지로 상륙하려 했지만 조대복의

강경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들은 리라호를 먼저 출발시

켰다. 그러나 곧 출발할 알세스트호에 조대복이 올라 다시 맥스웰

함장을 만났는데 이 때 성경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조대복이 알세

스트호의 서재에 들어가 서가에 꽂혀 있는 많은 책자를 보고 그

중 장정이 유달리 크고 아름다운 책자(성경)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는 좋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조금 전까지 경색되었던 표정을 거두

1) 조선왕조실록(제 48권, 국사편찬위원회) 순조 16(丙子年, 1816년)년 7월 19일 병인(丙寅)조.

2) Basil Hall, An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o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Two Charts (London: John Murray, 1818). Basil Hall은 그 뒤 Voyage to Loo-Choo, and Other Places in the Eastern Seas, in the Year 1816 (Edinburgh: James Ballantyne and Co., 1826)을 남겼다.

3) John M'Leod,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With an Account of the Her Subsequent Shipwreck (London: John Murray,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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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지 않던 그가, 그 책자(성경)를 보고 탄성을 발하자 맥스웰 선장은

배가 떠날 즈음에 이 책을 첨사에게 주었다. 조 첨사는 사양하다가

성경을 받고 기분 좋게 돌아갔다.4) 이 때 받은 책들 중 한권이 성

경이었음이 영국측 기록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 책들은 뒷날 중앙

으로 옮겨졌으나 비변사의 재신들이 모여 보고 나서 각각 몇 장씩

뜯어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뒤에 상고할 수 없게

되었다.5)

조대복에게 전달된 이 성경을 두고 김양선은, “우리나라에 성서

가 전래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 기독교사상에 있어서나 일반 문

화사상에 있어 대서특필해야 할 중대한 일”이며 그 성경이 대형

호화판이라는 것으로 봐서 1611년에 초판된 ‘킹 제임스(King

James) 역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6)

나. 귀츨라프, 토마스 및 윌리엄슨: 마량진 성경 전래에 이어 한

국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한문 성경이 간헐적으로 전해졌다. 귀츨라

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郭實獵, 1803-1851)와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崔蘭軒, 1840-1866) 및 윌리암슨(Alexander

4) Basil Hall,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Two Charts, 41.

5) 정약용, 「雜評, 藍浦의 書契에 대한 평」 『다산시문집 제22권』, (嘉慶 21년(1816) 병자) 에 이 때 받은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있다. “그들이 두

권의 책자와 한 권의 畫冊을 준 것은 필시 그들이 떠나올 때 미리 지나는 길

에 전해 주려고 준비한 것이라고 보아 우연한 일이 아니다. 備局의 여러 宰臣들이 모여 보고 나서 각각 몇 장씩 뜯어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상고할 수 없다. 저들이 저의 나라 土書라고 해서 우리에게 준 것

인데,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자료는 한국학중

앙연구원의 정순우 교수가 교시해 준 것으로 정 교수께 감사한다. 6) 김양선, “Basil Hall과 Murray Maxwell의 한국 래항과 그 종교 및 문화사적 의의”,

한국기독교사연구(서울: 기독교문사, 1971), 296. 김양선의 이런 지적에 대해, 박용규도 그의 논문,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 고증”(자료집), 31-32에서 ‘최초로 전래된 성경’이라는 점을, 19페이지에서는 ‘킹 제임스 역’일 가능성이 분

명히 있음을 들어 둘 다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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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13

Williamson 韋廉臣, 1829-1890)이 성경을 한국에 전해 주는 데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되었다.

귀츨라프7)는 1832년에 서해안 장산곶과 홍주만 고대도에 상륙하

여 성경을 전수했다. 그는 영국인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

의 중국 선교에 영향을 받아 동양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메드허스

트(Walter Henry Medhurst, 麥道思) 등의 권유로 런던선교회 소속으

로 이적한 그는 1832년 동인도회사의 요청으로 1천 톤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에 통역 겸 선의(船醫)로서 동승, 중국과

한국, 오키나와 및 타이완 등을 항해하면서 영국과의 통상에 필요

한 사항들을 조사토록 명령을 받았다.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에 한국 해안에 나타나 장산곶 부근

에 정박하여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했다. 1832년 7월 25일 홍주만

고대도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은 그 이튿날 성경 한 질과 다른

선물들을 국왕에게 예물로 드리도록 관리에게 전했다. 그는 또 8월

11일 고대도를 떠나며 관리와 주민들에게 성경을 건네면서 “조선

을 위하여 좋은 날들이 밝아오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했다.8) 이 때

건넨 성경은 모리슨이 중국에서 1813년에 출판한 성경이다. 모리슨

은 1807년에 중국에 입국, 1813년에 신약성경 2천부를 출판하고,

1819년에는 신구약 전권의 번역을 완료했다. 이어서 1823년에는 그

가 번역한 신천(神天)성경을 간행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건넨

성경은 모리슨이 번역, 출간한 것으로 항해에 앞서 모리슨으로부터

받았다.

7) 귀츨라프에 대해서는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와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이병길, 중국선교의 어제와 오늘(서울: 개혁주

의신행협회, 1987), 이진호, 동양을 섬긴 귀츨라프(서울: 한국감리교사학회 편, 1988) 및 허호익, 귀츨라프의 생애와 조선선교활동(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

소, 2009) 참조.8) 허호익, 귀츨라프의 생애와 조선선교활동, 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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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토마스9)는 중국에 파송된 영국 선교사이며 한국에서 희생된 첫

개신교 선교사다. 1863년에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된 토

마스는 아내의 사망과 선임 선교사와의 불화 등으로 1864년 12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 해관(海關)에 취직했다. 지푸(芝罘)에서

해관 일에 근무하던 그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 주재원인 윌리

엄슨과 가까이 하면서 성서 연구반 운영 등 선교사업도 힘껏 도왔

다. 1865년, 윌리엄슨의 후원으로 9월 초에 한국으로 출발, 그 달

13일에 서해안에 도착, 그곳에서 2개월 반 동안 한국어를 습득하는

한편 윌리엄슨으로부터 받아온 성경을 배포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

는 서울을 향해 떠났다가 태풍으로 목숨을 겨우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는데 이 무렵 런던선교

회는 그를 북경에서 사역토록 했다.

토마스는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동승하여 평양

으로 왔다. 그에 앞서 프랑스 함대가 한국 출동을 계획할 때에 동

승하여 통역으로 오려고 했으나 프랑스 함대가 베트남에 긴급 파

견됨으로 무산되었다. 제너럴셔먼호가 한국인의 완강한 저항에 부

딪쳐 결국 소각되자, 토마스는 이 해 9월 2일, 27세의 나이로 죽임

을 당했다. 그는 죽음에 앞서 성경을 한국인에게 전했던 것으로 보

인다. 뒷날 평양에 선교사로 왔던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은 1893년 11월 학습교인반을 조직할 때에 토마스 목사로부터

중국어 신약성경을 받았던 사람의 후손을 발견했다고 한다.10)

9) 토마스에 대해서는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서울: 기독교문사, 1971)와 백낙

준, 한국개신교사, 민경배, “로버트 토마스: 한국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

서교섭의 문제”, 교회와 민족(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및 이병길, 중국선교의 어제와 오늘 참조.

10) S. A. Moffett, “Early Says in Pyo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21:3 (March 1925), 5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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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15

윌리엄슨11)은 한국에 오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대한 성경 보급과

선교를 지원했던 분이다. 그는 처음에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활약하다가 과로로 2년만에 귀국했고, 1863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 주재 책임자로 다시 부임했다. 그는 토마스에게 다

량의 성경을 주어 한국 방문길에 나서도록 권했다. 그는 만주를 통

해 한국에 선교하려고 노력, 1867년 국경 지역의 개시(開市) 때에는

만주를 방문하여 한국 상인들과 동지사 일행도 만났다.

윌리엄슨은 또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의 의

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가 임오군란 후 한국

을 방문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슨 박사의 요청에 따

라 한국을 방문한 다우드웨이트는 “아주 많은 양의 ‘하나님의 말

씀’을 반포”12)했던 것이다. 다우드웨이트가 1883년 10월 다량의 로

스역 복음서를 가지고 조선을 방문하여 권서사업의 가능성을 타

진13)했는데, 이 때 다우드웨이트로부터 세례를 받은 원세개의 호위

병은 서울에서 성경을 배포하며 가두전도에 나섰다가 어려움에 처

해지기도 했다.14)

윌리엄슨은 성서공회를 활용하여 한국 선교의 길을 모색했다. 그

는 같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로스(John Ross, 羅約翰)

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의 성경사업을 도와, 선교사

가 한국에 이르기 전에 만주에서 성경을 번역토록 하고, 만주에서

번역 출판된 성경을 한국에 들여보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

11) 윌리엄슨에 대해서는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와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이병길, 중국선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편, 한국기독

교의 역사 I(서울: 기독교문사, 1989) 참조.12) China’s Millions 9:103, 25, 98; The Foreign Missionary 43:4 (Sept. 1884), 139;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89.13) 이만열, 한국기독교수용사 연구(서울: 두레시대, 1998), 88.14) C. F. Reid, “Beginning of Christian Work in Korea”, The Gospel in All Lands

(March 1902),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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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는 데에 뒤에서 도왔던 분이다.

다. 중국어(한문)로 번역된 성경: 귀츨라프, 토마스와 윌리엄슨이

한국에 배포했던 성경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성경이다. 로스

역과 이수정 역이 나온 후에도 한문 성경은 한국에서 선호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나는 한문성경과 한문주석서, 한문소책자 및

‘진리이지(眞理易知)’ 등의 책자가 얼마나 요긴한지를 발견했습니

다.”15)고 한 것이나, 아펜젤러가 “아직 한글 성경에 대한 절실한 요

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층은 한문 성경을 선호하기 때문입니

다.”16)라고 한 것은 한문 성경이 한국에서 선호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크랜튼도 뉴욕에 보낸 북감리교 선교보고서에서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

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가

있다.”17)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1890년 초에도 아직 식자층에서는

한문 성경을 선호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

들이 아직 독자적으로 성경을 번역,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

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성경이 번역된 것은 당 태종 정관(貞觀) 9(635)년 대진

국(大秦國)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당 나라에 들어와 진

경(眞經)을 번역한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알로펜의 진경 역

본은 보존된 것이 없으나 돈황(敦皇) 석굴에서 발견된 문헌에는 35

부의 진경 명단이 보인다.18) 그 뒤 천주교 신부들에 의한 성경 번

15) “H. G. 언더우드가 Ellinwood에게 보낸 편지, 1886년 6월 9일”; 옥성득, 이만

열, 대한성서공회사 I(서울: 대한성서공회, 1993), 197에서 재인용. 16) “H. G. 아펜젤러가 Bryant에게 보낸 편지, 1888년 12월 4일”;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 197에서 재인용. 17) The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the U.S.A. for 1891, 274;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 222에서 재인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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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17

역이 있었는데, 1730년대의 파리외방전교회의 바쎄(J. Basset)가 번

역한 신약성경 일부19)가 있었고, 1770년 중국에 예수회 선교사로

들어온 포이로트(P. Louis de Poirot, 賀淸泰)는 고신성경(古新聖經)을 번역하였는데 이는 성경 전권은 아니지만 대부분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 성경 전권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

은 없었다.

경교(景敎)와 천주교의 성경 번역에 이어 중국에서 성경 전권을

번역한 것은 1807년 중국에 도착한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서이다.

모리슨은 1813년에 신약성경 전권을 출판했고, 1819년 11월에는 밀

른(William Milne, 米憐)의 구약 번역 도움을 받아20) 번역을 완성했

고, 1823년에는 구약성경 전권을 출판했다. 모리슨은 천주교의 역

본(譯本)이 자신의 중국어 번역의 원본이라고 말함으로 중국어 성

경 전권 최초역본은 천주교 신부들과 신교의 선교사 모리슨, 밀른

등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21)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마쉬만(馬士曼)

역본도 1822년에 구약까지 완간되었다.

그 뒤에도 역본이 많이 간행되었다.22) 1840년에 간행된 구세주

야소신유조서는 메드허스트(W. Medhurst, 麥道思), 귀츨라프, 브리

지만(E. C. Bridgman, 裨治文), 로버트 모리슨 등 네 사람이 한 조

18) 이병길 편저, 중국의 개신교 첫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서울: 한국기독교역사

연구소, 1994), 162-163.19)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 24.20) 밀른이 번역한 구약은 申命記ᆞ約書亞記(여호수아)ᆞ士師記ᆞ撒母耳記(사무엘)

ᆞ列王記ᆞ歷代志ᆞ以撒拉記(에스라)ᆞ尼希米記(느혜미야)ᆞ約伯記(욥기) 등이

다(이병길 편저, 중국의 개신교 첫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166). 21) Ibid., 167-168.22) 20세기 초까지 간행된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救世主耶蘇新遺詔書(1840

新), 新約代表譯本(1852新), 新約全書文理(1852新), 高德譯本(1853新, 1868舊), 南京國語譯本(1857新), 裨治文譯本(1859新, 1862舊), 北京國語譯本(1872新, 1878舊), 楊格非淺文理譯本(1885新, 1905舊), 施約瑟淺文理譯本(1902新), 淺文理和合譯本(1904新), 文理화합(和合)譯本(1906新,1919舊), 國語和合譯本(1907新, 1919舊)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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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가 되어 완성한 것으로 신약은 메드허스트가, 구약은 귀츨라프가

대부분 번역했다. 1842년 남경조약의 결과 여러 선교부들이 개항장

으로 들어오게 되자, 종래의 중국어 성경을 수정하기 위해 1843년

부터 각국 선교부 대표가 홍콩에 모여 수정위원회를 만들고 원문

에 충실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례’와 ‘침례’, ‘신(神)’과 ‘상

제(上帝)’의 호칭에서 의견이 엇갈려 통일된 역본이 나오지 못하고

1853년과 1862년에 각각 완성 출간되었다. 이를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이라 한다. 1890년에는 상해 선교사대회가 원문에 충실하고

문체가 부드러우며 전국 교회가 공동 사용할 수 있는 번역 성경을

기획하여 1919년에 ‘화합본’을 출간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주

보혜(朱寶惠), 왕선침(王宣枕), 여진중(呂振中) 등 중국인에 의해 신

약전서의 번역이 나오게 되었다.

중국어 성경역본은 문체에 따라 구분된다. 중국 고전의 경서체로

된 문리본(文理本)과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구어체의 백화문본

(白話文本)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문리본은 천주교의 교리서와 함

께 개신교의 초기 성경도 이 문체로 번역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는

좀 더 쉬운 문체가 나오게 되어 이를 천문리(淺文理)라 했는데 이

와 구분하여 전자를 심문리(深文理)라고 했다. 모리슨역을 비롯하여

1860년대까지 이뤄진 번역 성경이 심문리에 속한다면, 1885년에 간

행된 그리피스존 역본 신약전서가 천문리에 속한다. 문리본 성경이

중국의 지식인을 상대로 번역된 것이라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반 민중을 상대로 백화문으로 번역된 성경도 간행되었다. 중국의

고전에 익숙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문리성경이 읽혀졌는데, 한

글 성경 번역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심문리본 성경이었다.23)

23)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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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19

라. 한역서학서와 성경직해: 명말청초(明末淸初)에 이르러서 중

국에 온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인 학자들이 서양의 책을 번역 출판

했는데, 이를 통칭하여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 한다. 이들은

‘동전(東傳)한문서학서’ 혹은 ‘천주교동전문헌’ 혹은 ‘서학서’라고도

했다. 루기에리(Michaelo Ruggieri, 羅明堅)가 1584년에 최초의 한역

서학서인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을 간행하자, 이를 계기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도 1603년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간행하게 되었으며 그 뒤 많은 한역서학서가 출간되었다.

한역서학서에는 서양의 과학ᆞ기술을 소개하기 위해 천문ᆞ역산ᆞ

지리ᆞ과학기술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천주교 선교를 위한 종교ᆞ

윤리서로서 교리ᆞ전례ᆞ기도문ᆞ성인전 및 비교종교, 철학ᆞ윤리 등

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이것들은 뒷날 한국에 소개되어 천주교 수

용의 계기가 되기도 했고, 서양학문을 받아들여 실학의 한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한역서학서 중 한국 천주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

직해(聖經直解), 성경광익(聖經廣益)이다. 성경직해는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Emmanuel Diaz, 陽瑪諾)가 1636년 북경에서 14권으

로 초간한 것이며, 성경광익은 역시 예수회 선교사인 마이야(De

Mailla, 馮秉正)가 1740년에 2권으로 저술한 것이다. 성경직해는

성경 본문이 많이 인용되어 있고, 성경광익도 성경 구절을 인용

하거나 요약한 부분이 들어있어서, 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것은 아

니지만,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구절이 많다. 한국에서는 성경직

해와 성경광익을 합쳐 성경직해광익으로 펴내기도 했다. 1801

년 신해박해 때에 한글본 성경직해 4권, 성경광익 1권, 그리고

성경직해광익 6권이 압수되었는데, 성경직해광익은 1790년경에

역관 최창현이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한글본 성경직해는 앞에서 말한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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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익 두 책에서 당시 한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더 필요하다고 생

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하나로 묶은 것이다. 두 책에서 선택하되,

성경직해에서는 성경의 본문ᆞ주해 및 잠(箴) 부분을, 성경광익에서는 마땅히 힘써야 할 덕목과 기도 부분을 선택 수록하였다.

따라서 성경직해를 성경직해광익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25)

성경직해에 수록된 4복음서의 분량은 복음서 전체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26) 내용만 담고 있어서 4복음서의 완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882년에 심양에서 간행한 개신교의 예수셩교누가복음

젼셔와 함께 한국에서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경직해는 뒷날 개신교의 한글 성경 번역에 도움을 주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2. 한국어 성경 번역ᆞ출판

한국어 성경의 번역ᆞ출판과 반포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

졌고, 또 각론에서 그 완역 과정이 설명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성경의 완역 출판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24) 이 부분의 서술은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885)을 참고하여 서술했다.

25) 조화선, “경직의 연구”,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

레문화(서울: 기독교문사, 1985), 68.26) 복음서 전체는 3,709구절인데, 그 중 1,138절이 수록되어 있어서 30.68%에 해

당된다. 마태복음의 경우 총 1,070절 중 373절이, 마가복음의 경우 680절 중

118절이, 누가복음의 경우 1,080절 중 367절이, 요한복음의 경우 879절 중 280절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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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21

가. 로스와 이수정의 성경 번역과 출판: 한국 그리스도교 선교의

특징은 외국에서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에 해외에서 성경의

일부가 번역 출판되어 그것이 국내에 수용되어 개종의 역사가 일

어났다는 것이다. 선교사들도 처음부터 이런 점을 주목하고 있었

다.

우선 만주에서 로스(John Ross, 羅約翰)와 그의 매제 매킨타이어

(John MacIntyre, 馬勤泰)가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

고 출판한 사실이다. 이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출신의 선교사들

은 종래 그들의 선교지인 산둥반도 지푸(芝罘)에서 만주의 영구(營口)로 옮기고 또 봉천(심양)으로 옮겼다. 그들은 4천만의 만주인 못

지 않게 한반도의 영혼들을 생각,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방

안을 강구했다.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1872년 8월 상해에 도착한 후 그 해 10월에 영구에 도착한 로스

는 겨울 동안 사서삼경 공부에 힘써 그 이듬해 5월 11일에는 중국

어로 첫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어학 실력이 뛰어났

다. 1875년 말에 매킨타이어와 합류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매

킨타이어가 로스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하게 되어 더 돈독하게

공동사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로스는 한국인 이응찬을 만나 한국어

를 배우는 한편 몇 차례에 걸쳐 고려문 등을 돌아보면서 한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표했다. 1877년 로스가 Corean Primer를 간행

한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무렵 서상륜(徐相崙)을 만나 누가복음

과 요한복음의 번역을 시작, 1878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1879년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그러나 지금까지 간과된,

사건이 일어났다.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가 안식년으로 본국에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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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다.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할 겨를이 없다.

다만 이들 중에는 성경 번역과 관련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만 지적하겠다. 이 해에는 또한 로스의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이라는 역사책도 간행되었다.

만주에서 진행된 성경 번역은 먼저 한문 성경에서 시작된다. 이

응찬 서상륜 백홍준 등 6-7명의 한국인이 한문문리성경에서 번역하

기 시작했고 이들 번역을 매킨타이어가 검토하는 과정을 밟았다.

이들 번역에는 중국 고전의 한글 언해본과 188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불자전(韓佛字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은, 1881년 10월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출판하는

과정을 거쳐, 1882년 3월 24일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이어

서 예수셩교요안복음젼셔를 심양 문광서원에서 간행하게 되었

고, 1887년에는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도 간행하게 되었다.

이수정(李樹廷)이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것도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1882년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된 이수정

은 그의 친구 안종수로부터 소개받은 일본의 농학자 츠다센(津田仙)을 찾아가 예수교를 알게 되었고, 그 이듬해 4월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이수정은 미국 선교계에 ‘한국의 첫 개종자’로 소개되었고,

선교잡지를 통해 미국 성도들에게 문안하면서 한국에 대한 선교를

권유하기도 했다. 수세(受洗) 후 이수정은 재일 한국인에게 전도하

고 집회를 인도했으며 성경 번역에 힘을 기울였다. 1883년에 한문

에 이두식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완성

했으며 이듬해 말에는 마가복음을 국한문병용체로 번역, 1885년 2

월에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간행하였다. 1885년 4월 5일 한국

에 도착한 첫 복음선교사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갖고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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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23

나. 초기 번역사업과 신약성경: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성서는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오역은 물론이고 사투리의 문제라든

지, 칭호의 문제, 고유명사 표기의 문제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미

한국에 입국한 입장에서 보면, 만주ㆍ일본의 두 번역을 일관성 있

게 통일하여 정리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성경을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복음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입국한 전

후의 시기에는, 한동안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성경이 한국에 배

포, 사용되었을 것이다.27) 그러나 그 번역 중 이수정이 번역한 마

가복음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이수정의 번역

본을 한국인에게 보이고 평가해보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 번역본

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표현한

점 등 몇 가지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새 번역의 필요성을 제

기했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1887년 2월 7일 서울에서 한국어성경 번역

위원회(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

가 언더우드를 위원장으로 하여 5명으로 구성되고 상임성서위원회

(Permanent Bible Committee) 등 3개 위원회를 두었다. 상임성서위원

회는 성경 및 그 번역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의 위원을 임명하도록 했다.28)

27) 그 증거로, 첫째 1882년 3월 24일에 만주에서 누가복음 3천부가 발간되었는데

그 중 1천부가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일본지부에 보내졌고, 1년 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일본인 매서인 나가사카(長坂)에 의해 부산에 유입되어 국내에 전

파되었다는 것(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그리스도교와 겨

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서울: 기독교문사, 1985], 424), 둘째, 1883년에서 1886년까지 적어도 15,690부의 한글 성서가 매서인 3인에 의해 국

내에 전파되었다는 것(W. D. Reynolds, “Fifty Years of Bible Translation and Revision”, The Korea Mission Field 38, 116 및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431참조) 등을 들 수 있다.28) W. D. Reynolds, “Translation of the Scriptures into Korean”, The Korea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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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6년 이수정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수정, 번역하여 1887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지부의 도움을 받아

요코하마에서 마가의젼한복음셔언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수정의 것을 수정한 것은 언어ㆍ신학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다.29) 1889년 대영성서공회가 아펜젤러, 언더우드에게 로스역 성경

의 수정을 요청하자, 아펜젤러는 누가복음과 로마서를 수정하여

누가복음젼과 보라달로마인셔란 이름으로 1890년 삼문출판소

(Trilingual Press)에서 간행하였다. 이 두 권의 수정ㆍ출판 후에 철

자법과 딱딱한 문체, 불분명한 표현 및 책의 고전적 형태 등의 문

제 때문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중단하고 새로운 한국어역 성서

를 계획하게 되었다.

상임성서위원회는 1890년 6월에 회의를 소집, 2년 내에 신약전서

의 시험본(tentative edition)을 만들도록 계획하고 아펜젤러와 게일(J.

S. Gale)에게 맡겼다.30) 두 선교사는 작업을 분담하여, 1892년 1월

20일에 마태복음을 “이수정역이나 로스역의 수정이 아닌 국내에서

이루어진 순수 번역의 효시”31) 마태복음젼이란 이름으로 출판했

다. 선교사들이 이렇게 성경 번역을 서두른 이면에는 한국인 신자

들의 우리말 번역 성경에 대한 끈질긴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

로 이 점은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

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청은 날이 갈수록 더 증가되었다.

결국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을 서두르게 된 것은 한국인 신자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32)

6, 1906, 166, 172.29)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434. 이 때 간행된 마가복음은

1893년에 다시 간행되었다.30) W. D. Reynolds는 “The Translation of the Scriptures”, The Korean Repository II

(May 1895), 195-197에서, 1891년 2월과 4월에 스크랜턴과 언더우드가 각각 사

임하고, 그 자리에 아펜젤러와 게일이 대신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31)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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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25

성경의 한국어 번역은 1893년 1월, 미국의 남북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고 채택한 10가지 선교정책과의

관련도 주목된다. 선교의 주 대상을 하층민과 부녀자들로 한다는

것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작성한다는 한글전용론, 및 하나님의 말

씀은 그 자체로써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성경을 한

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선교정책이다. 이런 정책들은 중요한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부녀자와 하층민, 한글전용, 그리고 한글 성경

번역, 이것은 초기에 취했던 선교정책의 핵심이면서 한국선교의 가

능성을 보여주었다.

1893년 대영성서공회 만주지부 총무로 활약하던 켄뮤어(Alexander

Kenmure)가 서울을 방문한 후 성경 번역을 중국에서 시행하던 방

법을 채용키로 하고 우선 기구부터 정비했다. 종래의 상임성경위원

회를 대신하여 1893년 5월 상임성경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이하 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 번역자회(Board

of Official Translators-이하 번역자회) 위원을 임명하여, 번역자회가

제출한 원고를 개정ㆍ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실행위원회는 2명씩

의 각 교파 선교부 대표들로 구성되었고,33) 1893년 10월 11일 개최

된 회의에서는 언더우드를 회장으로, 스크랜턴을 서기로 뽑고 번역

방법도 구체적으로 확정하였다.34) 한국인 조사들도 이 회의에 참석

하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32) 1891년 미 북감리교의 연례 선교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C., for 1891, 274.)에는 이러한 강렬한 요구를 이렇게

썼다. “한문 성경을 제외하고는 현재 성경의 적은 부분만 이용할 수 있기 때

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서번역을 서둘러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있다.”33) 북장로교의 언더우드ᆞ게일, 북감리교의 아펜젤러ᆞ스크랜턴 및 일시적이긴

하지만 성공회의 트롤로프(M. N. Trollope)와 1895년에는 남장로교의 레널즈

(W. D. Reynolds)도 추가로 참여했다. 34) W. D. Reynolds, “Bible Translation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3 (1896),

469-474 및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437-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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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번역자회의 토론ㆍ수정을 거친 번역은 실행위원회에 보내지는데,

이를 시험역본(Tentative Edition)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시험역이 나

오기까지는 개인역(Individual version)과, 다른 동료들의 비판과 제

의를 수용한 임시역(Provisional version), 임시역을 검토하여 재작성

된 번역자회역(Board's version)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35) 규정에

따르면, 시험역을 3년간 사용한 후에 공인역(公認譯, Authorized

version)을 내기로 했던 것 같으나, 선교사들의 분주한 일과와 안식

년 귀국, 한국교회의 단권 신약 요구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한국 신자들의 성경에 대한 요구는 당시 간행된 교회신문

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

에도 나타나고 있다.

“평양사 교후 분이 편지엿기로 좌에 긔노라

한문 셩경을 국문으로 번역 일은 엇지나 되엿지 답답옵

이다. 예수를 밋 사의 량식은 셩경이온 한문을 모로 사은 남녀간에 국문으로 번역 셩경 나려 보내시기를 곱은 쟈

의 밥과 목마른 쟈의 물과 치 기다리오니 원컨 목옵셔 평

양 경에 여러 동들을 지극히 랑샤 영원히 썩어지지 안 령혼의 량식을 어셔 속히 나려 보내주시여 여러 동들의 를 부

르게 여 주옵시기를 쳔만 라옵이다 엿더라.”36)

이 밖에도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는 한 서점 주인의 말을 빌려

서, “신약전서를 왼통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37)고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

국인 신자들의 성경 번역에 대한 열망이며, 성경 번역을 재촉하는

여론으로 반영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35) W. D. Reynolds, “Bible Translation in Korea”, 472.36) 「대한크리스도인회보」, 광무 2년(1898) 5월 4일.37) 「대한크리스도인회보」, 광무 2년(1898)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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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27

여기서 성경 번역의 자세한 과정은 생략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

해 1895년에는 아펜젤러 역 마태, 마가복음과 게일 역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간행되었고, 1896년에는 언더우드 역 누가복음도 간행

되었다.38) 이 중 마태복음은 시험역본이었으나 나머지는 개인역 혹

은 임시역이었다. 개인역이나 임시역도 간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선교단체와 한국인 신자들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요구 때문으

로, 이 때 번역자회는 규정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마지못해 양보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번역본은 출판되자 곧 매진되었다.

1900년에는 개인역 혹은 임시역을 신약 단권성서로 묶어 발간하였

고 이를 다시 손질하여 1906년 3월에는 공인역본으로 완성 발간하

게 되었다.

1900년에 단권으로 출판된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로마

서를 제외하고는 시험역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시험역본 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에 주로 참여한 선교사는 아펜젤러, 게일, 레널즈였으나, 1902

년 6월 아펜젤러가 이 번역사업 때문에 목포로 가는 도중 배 충돌

사고로 순직하게 되자, 존스(G. H. Jones)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

었다. 존스 역시 6개월 만에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초기부

터 성경 번역 사업에 참여한 스크랜턴마저 1902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자, 이 사업은 언더우드ㆍ게일ㆍ레널즈 등 장로교 선교

사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세 사람은 1902년 10월부터 1906년 3월까

지 555회의 모임을 가졌고, 교정을 거쳐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공

인역본 신약젼셔가 출간되었는데,39) 이것이 1938년 개역 신약성

38) W. D. Reynolds, “Bible Translation in Korea”, 473.39)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신약성서가 한국 내에서 처음 번역ᆞ발간된 것을 연

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7년: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1898년: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1899년: 에베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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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서가 나오기까지 30여 년간 한국교회에서 사용된 공인역본 신약성

서였다.

다. 구약성경의 번역: 구약 번역에 처음 손댄 사람은 알렌산더

피터스(A. A. Pieters 彼得)이다.40) 그는 1895년 미국성서공회의 권

서 자격으로 와서 1897년부터 시편 번역에 착수, 1898년에 62편의

시편을 번역하여 독자적으로 시편촬요를 발행했다. 그러나 1899

년 대영(영국)성서공회로 옮긴 피터스는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자, 그의 구약 번역 작업은 중단되었다.

1900년 신약 번역 작업이 일단 완료되자, 앞서의 번역자회에서도

구약 번역을 착수하였다. 처음에 아펜젤러가 창세기를, 언더우드가

시편을, 게일이 잠언과 사무엘을, 스크랜턴이 이사야를, 레널즈가

여호수아를 각각 맡았으나, 아펜젤러의 순직(1902)과 선교사들의 안

식년 휴가 등으로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1906년 구약성경

번역을 본격화할 즈음에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전임된 앞서의 북장

로회 피터스(A. A. Pieters)와 남감리교의 크램(W. G. Cram 奇義男)

이 번역자로 추천되었으나 그들도 몇개월 만에 사임하였다.41)

구약성경의 번역이 지지부진하던 1907년 봄, 미국성서공회의 팍

스(Fox) 박사와 대영성서공회의 릿슨(Ritson)이 내한, 성경실행위원

들과 상의한 후 레널즈와 김정삼ㆍ이승두 양씨도 번역자회 위원으

로 구약 번역을 계속케 하였다. 표결에 3표를 요한다는 헌장정신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한국교회의 실력이 신장되었고, 이

1900년: 요한계시록.40) 민휴(Hugh Miller), “조선어성경의 유래”, 유형기 편, 단권성경주석(서울: 신

생사, 1949), 55.41) A. A. Pieters, “Fifty Translations”, The Korea Mission Field 34:5 (May 1938),

93. 시편촬요에 수록된 것은 1-10편과 15016, 18-20, 22-25, 27, 30, 32, 37, 46, 50-51, 62-63, 65, 67, 84, 86, 90-91, 95-98, 100, 103, 105, 107, 110, 113-116, 119, 121, 124, 126-128, 130, 133, 138, 142, 145-146, 148, 150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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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29

와 함께 한국인 번역자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기도’42) 했다. 이러한 조치로 구약성경 번역의 마무리는 이 세

사람에 의해서 이뤄졌다. 번역과 관련, 민휴는 이렇게 썼다.

“1908년 1월에 전주 전킨(Rev. W. M. Junkin) 목사가 서거하매

남장로 선교회에서는 이눌서 박사를 전주로 소환하였으나 그의 시

간은 재경(在京) 시와 마찬가지로 성경 번역에 전념할 것을 조건으

로 하였다. 이 박사와 같이 전주에 가서 구약 번역의 노고를 한가

지로 한 이는 이승두ㆍ김정삼 양씨였다. 구약 중에 이 박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오직 예레미야 한 책 뿐인데 예레미야는 게일 박

사가 번역하고 원두우 박사가 교열하였다. 1910년 4월 2일에 구약

의 끝절을 완료하고, 그들은 성경 번역을 무사히 마쳤다는 감격한

정서와, 방학일을 당한 소학생의 작약(雀躍)적 희열로써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올리고 휴회하였다.”43)

번역 완료에 앞서 8종류의 단편성경이 발간되었다.44) 번역 완료

된 구약성경은 1911년에 단권으로 인쇄ㆍ배포되었고, 그해 5월에는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1년 동안 8천부나 판매되는 ‘놀라운 실적’을

나타냈던 것이다.

라. 성경 개역과 사역(私譯) 성경: 1911년 구약성경이 번역ㆍ발간

된 후 곧 개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문제가 구약에서 먼저

제기된 것은 신약이 이미 여러 과정을 거쳐 번역되었음에 비해서

구약은 레널즈와 김정삼ㆍ이승두 세 사람에 의하여 거의 이루어졌

42) W. D. Reynolds, “Fifty Years of Bible Translation and Revision”, 118;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443-444: 민휴, “조선어성경의 유래”, 55-56.

43) 민휴, “조선어성경의 유래”, 56.44) 1906년에 창세기와 시편이, 1907년에 잠언과 출애굽기 사무엘전후서 말라기

가, 1908년에는 열왕기상하 이사야가 각각 인쇄되었다. 이덕주, “초기 한글 성

경 번역에 관한 연구”,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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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한국 언어의 변화, 고고학 문헌학 등의 주

변 학문의 발달로 성경의 해석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야 했기 때

문이었다.45) 그리하여 1911년 구약개역자회가 구성되고 언더우드,

게일 등 위원들도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개역작업도 위원들의 잦

은 교체와 사망, 거기에다 1916년 회장직을 맡았던 게일이, 성경원

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른 위원들의 견해와는

달리, 한국적 스타일의 문투를 고집하였기 때문에 견해 차이가 심

각하게 되어 번역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구약의 개역작업이 본격화되는 것은, 시편촬요를 낸 바 있는

피터스와 남궁혁(南宮爀)ㆍ김관식(金觀植)ㆍ김인준(金仁俊) 등이 개

역위원으로 추가되는 1926년부터다. 구약개역위원은 추가된 4인과

레널즈ㆍ케이블ㆍ엥겔ㆍ베어드ㆍ하디 등이었다. 그 중 평양 지역에

있던 레널즈ㆍ엥겔ㆍ베어드ㆍ남궁혁ㆍ김관식ㆍ김인준 등은 베어드

와 그의 조사 김인준이 준비한 것을 중심으로 매일 2-4시에 모여

개역작업을 진행하였고, 1931년 11월 베어드가 사망하자 피터스가

적극 참여하였으며, 1935년에는 한국인 이원모가 개역위원으로 보

충되어 개역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6

년 봄에 개역작업을 끝내고 구약젼셔 역이 출판되었다.

한편 1926년에 신약개역자회가 구성되면서46) 본격화된 신약의 개

역작업도 1937년에 완료되었고, 그 이듬해에 신약젼셔를 발행하

였다. 그 이듬해에 먼저 개역ㆍ출판된 구약과 합쳐 개역판 성경젼

셔도 간행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공

45) E. M. Cable, “The Present Version”, The Korea Mission Field 34:5 (May 1938), 98.

46) 처음에 개역위원으로 남감리교의 스톡스(M. B. Stocks, 都瑪連), 남장로교의 윈

(S. D. Winn, 韋仁仕), 호주장로교의 커닝햄(F. W. Cunningham, 枚任咸), 북장로

교의 로스(C. Ross, 盧世永)가 임명되었다가 1928년에 로스 사임 후 베어드 2세(W. M. Baird Jr., 裵義林)가 대신했고, 1930년에는 남장로교의 크레인(J. C. Crane, 具禮仁)과 남궁혁이, 1934년에는 레널즈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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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31

인 성경으로서, 1950년에 새 철자법에 따라 개정되어 1952년에 새

로이 출판되었다.

한편 공인역과는 달리 사역 성경도 간행되었다. 사역 성경은 범

교단적인 공식기구를 통하지 않은 것으로 만주의 로스역이나, 일본

의 이수정역, 피터스의 시편촬요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사역

성경으로 유명한 것은 펜윅(M. C. Fenwick, 片爲益)과 게일의 것을

들 수 있다. 펜윅은 요한복음젼(1891), 신약젼셔(1919)를 간행했

는데, 한문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만큼 한자를 음역하여 사

용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우리의 토박이말도 같이 보인다. 게일의

경우, 초기부터 성경 번역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성경 원어의 문

법적인 구조에 충실하고자 하는 다른 번역자들과의 견해 차이로

1923년에 성경개역위원장직을 사임하고 한국인 조사 이원모 이창

직 이교승의 도움을 받아 신역 신구약전서(기독교창문사, 1925)를

발간하였다. 조선어풍(風)47)의 ‘짧게 줄인 풀이역’인 이 성경은 그

사상을 쉽고도 유창한 조선어로 말하여 의역(意譯)에 가까웠기 때

문에 축자적 번역을 강조하는 선교사들로부터는 ‘자유역’으로 인식

되었다. 게일의 사역 성경은 신구약 전체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조

선어풍을 구사하려는 번역이었다는 점에서 성경 번역사상 높이 평

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관주(串珠ㆍ貫珠) 성경과 성경 번역의 방법 등을 언급

해야 하나 생략하겠다.

47) 게일이 쓴 서문의 일절이다. “本聖經은 朝鮮에 처음으로 잇 新譯本이라. 大抵 飜譯 일에 두가지 原則이 잇스니 著作者의 本을 分明히 아 거시

그 나이오 그 本을 가지고 各其 地方의 語風과 文法을 라가 거시 그

둘이라. 本聖經을 飜譯 에 創世記로 黙示錄지 수 잇 대로 朝鮮語風에 어기지 아니기로 努力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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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3. 성경 번역 ᆞ 출판과 한국 사회

성경의 번역, 출판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전에

도 여러 가지 언문서책이 나와 유동하는 언어를 한글(언문)로 잡

아서 표기화한 사례는 많이 있지만 한 고등종교의 경전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우선 언어상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고 생각된

다. ‘성경 번역’ 운동은 한국의 언어를 한국의 문자로 정착시키는

데에 공헌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이 독일어에 미친

영향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글역 성경은 평민이

사용하는 언(용)어를 평민이 이해하는 문자(한글)로 붙잡았다는 점

에서도 주목된다. 이렇게 언어와 문자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친

한글 성경의 번역 출판은 기독교의 경전이 갖는 무게만큼 한국의

중세봉건적인 사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또 기독교의 수용이나 성경이 보급된 시기가 한말 일제 강점기였

던 만큼 사회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경의

번역 보급 시기가 신문학 운동이 일어날 때였던 만큼 한국의 신문

학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최준에 의하면, “한글로

번역된 성경의 출현은 이처럼 한국의 문화를 대중화시키는 데 절

대적인 길라잡이가 되었다”는 것이다.48) 여기서는 그런 내용을 간

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가. 개종의 역사와 교회의 한글운동49): 1882년 3월과 5월에 심양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된 후, 그 번역 출판된

48) 최준, “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성서와 한국근대문화(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1960), 47.49) 이 부분은 필자의 “기독교의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서울: 지식산업사, 1981)과 “기독교의 한글 연구”, 한국기독교문화

운동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를 참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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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33

복음서는 일본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부를 통해 조선(동래 대

구 원산)에 전래되었고 압록강 북쪽의 한인 마을에는 김청송(金靑松)을 통해, 한반도에는 서상륜(徐相崙) 등에 의해 전파되었다. 동

래 대구 원산 등지에 전래된 복음서가 개종의 역사를 일으켰는가

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지만, 압록강 북쪽과 한반도에서는

복음서의 유포에 의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번역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회심의 역사를 일으킨 것

으로서,50)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자생적 교회공동체’가 세워진 중요

한 사례로도 간주될 수 있다.

기독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과 전도 문서를 읽히기 위한

선교 목적으로 한글배우기 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오후나, 주중 특별한 시간을 정하여 교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경기 남방지방 교회에서는, “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

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되더니 금년부터

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공부를 착실히 한다”는 소식51)을 전했고,

“이 자매 중 60여 명은 도를 믿은 후에 국문을 배워 책 볼 줄을

아는 자라”는 평안도 선천의 보고52)도 있었다. 그 결과 경기남도

죽산 둠벙이에서는 “여인들이 국문을 아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고

혹 국문을 아지 못하는 여인이 있을 것 같으면 그 남편이 가르쳐

주”53)었고, 해주에서는 사경회에 참석한 부인들이 다 국문을 알고

성경을 잘 보고 도리의 말씀을 잘 들었다.54)

기독교 학교에서도 국문 공부는 필수였다. 서울의 장로교 계통

50) 이만열, “1880년대 서간도 한인촌 기독교공동체 연구” 및 “徐相崙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문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서울: 지식산업사, 1991) 및 한국기독교의 역사 I, 150-156참조.

51) 「그리스도신문」 6:21 (1902. 5. 22) 경기 남방지방의 교회통신.52) 「그리스도신문」 5:31 (1901. 8. 1) 평안도 선천의 교회통신.53) 「그리스도신문」 5:52 (1901. 12. 26).54) 「그리스도신문」 6:1 (190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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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의 여학교(정신)의 교과 과정에는, 음식 만드는 일, 바느질 하는

일과 국문ㆍ국문습자ㆍ성경ㆍ음악ㆍ산술ㆍ지리ㆍ역사ㆍ한문ㆍ한문

습자 등이 들어 있었으며, 평양의 예수교 소학교의 경우도 국문은

성경 다음의 필수 과목으로 이수했다.55) 국문을 깨친 그들은 성경

과 여러 서책들을 많이 읽게 되어 개화의 역군으로 등장하게 되었

다. 교회에서는 성경공부 모임, 즉 사경회를 자주 개최하게 되었

고, 이것이 한국 교회의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게 해 주었다. 1907

년 전후한 한국 초대교회의 부흥운동은 결국 성경 번역ㆍ사경회ㆍ

기도회가 3박자로 어울려 이뤄졌던 결과다.

한글운동은 교인과 학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

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발전했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는 ‘행

도부재식’(行道不在食: 도를 행하는 것이 먹는 데 있지 아니 함이

라)이라는 제목 하에 1500자 내지 2000자 내로 3개월 안에 글을

써서 보내라는, 일종의 현상모집을 하고 있다. 잘 지은 글은 출판

에 붙이고 돈 100량으로 감사하겠다는 현상금까지 걸었다. 이는

당시 예수교를 봉행치 않은 사람들이 “예수교가 참 지극히 착한

교로되 다만 봉행키 어려운 일이 있으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

어야 교를 하겠소”라고 하는 데 대해 회보사에서 이들의 변명을

깨뜨리기 위해 글을 현상 모집한 것이다.56) 이에 어떤 이가 한문

으로 응모하자 주최 측이 국문으로 써 보내라고 다시 광고한 것은

이채롭다. 다음의 광고 문안은 국문글짓기가 국문운동의 일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을 국문으로 짓는 일: 우리가 도부식이란 을 누구던지

석달 안으로 지어 보시란 말은 회보에 이왕 죄였거니와

55) 「그리스도신문」 5:36 (1901. 9. 5).56) 「대한크리스도인회보」 2:19 (1898. 5. 11) 글을 지여 외인을 깨닫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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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35

기간에 한문으로 지어 보이가 잇고로 다시 말노니 한문은

아 이가 젹고 국문은 모르 이가 젹은즉 이 은 여러 사람을

위여 보게 이니 죵금 이후로 다들 국문으로 지어 보시기

를 라.57)

기독교회의 한글 가르치기와 글짓기 독려는 효과를 거두고 있었

다. 당시 찬미가는 한국인들이 이미 가사를 지었다. 한 이화학당

여학도는 성탄일을 맞아 찬미가를 짓기도 했다.58) 이 무렵이면

「대한크리스도인회보」나 「그리스도신문」에는 학식 있는 분들과 지

방 여성들도 편지하여 자기들의 의견을 당당히 개진했다. 기독교

회의 한글운동은 당시 민중들의 닫혔던 마음을 열었고 묻혔던 재

주를 발휘토록 하는 데에 큰 자극을 주었다.

성경의 번역과 보급 등 한글운동은 기독교 선교에 큰 성과를 미

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국어학자 이희승은 이렇게 말했다.

“언어를 잘 이용하는 종교일수록 그 전파가 용이하며, 신자의

심령의 창(窓)을 더욱 간곡하게 더욱 심각하게 두드리게 된다. …

그리고 예수교가 오늘의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나 그 교역자들의 각 방언연구에 큰 공적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 언어와 문자를 통한 예수교의 활동이 그 얼마나 한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해교(該敎)의 성황이 결코 우연히 아닌 것

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59)

나. 문자생활에 미친 영향: 일찍이 외솔 최현배(崔鉉培)는 기독교

가 한글에 끼친 업적을 논한 바 있다. 그는 기독교가 ‘배달말과 한

글에 관한 업적’으로서, 성경의 한글 번역, 찬송가 번역, 기독교 문

57) 「대한크리스도인회보」 2:23 (1898. 6. 8). 58) 「대한크리스도인회보」 2:51 (1898. 12. 21), 셩탄일 찬미가.59) 이희승, 朝鮮語學攷; 김우규, “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성서와

한국근대문화(서울: 대한성서공회, 1960), 8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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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학의 번역, 신문내기, 배달말의 연구(말본과 사전), 한글의 연구(로

마자 삼기 Romanization) 등을 들었다. 또 그는 ‘기독교가 한글에

준 공덕’으로서, 한글을 민중 사이에 전파하였고,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목사의 활동에 따라 신도들은 사상 표현의 말씨를 배

우며 글 읽고 글 쓰는 방법까지 깨치게 되었으며, 한글에 대한 존

중심을 일으키고 한글을 지키는 마음을 길렀으며, 한글의 과학스

런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배달의 말글을 널리 세계에 전파하였고,

‘한글만 쓰기’의 기운을 조성했다고 했다.60)

그는 같은 글에서 기독교인들의 한글전용운동과 관련해서도 “기

독교의 신자들은 한글의 덕택으로 인하여 한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었으며, 또 이를 다른 많은 형제 자매에게 전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한글의 절대적 은덕을 입은 기독교 신도로서 동

시에 한자 중독자 노릇은 할 수가 없음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고 숭상하고 이를 발양하는 얼은 기독교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또 기쁨이 아니면 안 된다.”61)고 언급했다. 그는 나

아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기에도 “오직 기독교의 교회에서만은 성

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배달말로 유창하게 흐르고, 찬

송가의 가락이 배달사람들의 정서를 그대로 전파하였으니 우리말

우리글의 수호의 공을 기독교에 인정하여야 마땅하”62)다고 주장했

60) 최현배, “기독교와 한글”, 神學論壇 7 (1962), 51-80.61) Ibid., 80, 외솔은 또 그의 「한글갈」에서 또 이렇게 썼다. “이 한글부흥기 전후

에 있어서, 한글의 부흥, 정리 및 보급에 대하여 막대한 공적을 끼친 것으로, 우리가 예수교의 선교 사업을 들기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교는 원래 만인평

등의 사랑의 종교이요, 항상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무식한 사람에게 무한

한 동정을 가지는 종교이다. 그 조선 선교의 수단으로서 당시 일부 식자계급

에만 전용되던 비대중적인 한자를 버리고, 평이하고 민중적인 한글을 채용하

여, 그 성경을 번역하게 된 것은 당연의 일이라 하겠다.… 조선 사람으로서 이

한글 보급의 기독교의 위대한 공적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가지지 아니할 이

한 이도 없을 것이다.”62) 趙神權, 韓國文學과 基督敎(서울: 연세대출판부, 1983), 66, 주) 117에서 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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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37

다.

한글 성경의 번역 출판이 한국의 문자생활에 끼친 영향을 언급

한 학자들이 많다. 일찍이 주시경의 인격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은 바 있고, 외솔과 함께 국어학자ㆍ교육자로서 활동했던 한결

김윤경(金允經)은 그의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에서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을 이렇게 썼다.

“앞에 소개한 모든 학설은 우리말을 과학적 토대 위에 든든히

뿌리박게 한 것이지마는, 학문의 질곡에서 대중을 해방하여 한글

을 가치 있게 쓰고 배우도록 보급시키고 한글을 구미학계에 소개

한 공적에 대하여는 기독교에 감사드림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

니다. …이같은 기독교의 급속한 발전은 곧 한글 발전에 대한 공

헌이 그만큼 큼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공헌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은 전도하기 위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

하며 우민(愚民) 남녀 노유에게도 그 성경을 읽히기 위하여 한글

을 가르치며 이미 소개함 같이 학교를 처처에 설립하고 (이것이

조선 신교육의 선구가 되고 중추가 되었던 것임) 자녀를 모아 교

육하되 종래 유교 교육과 같이 순 한문으로 하지 않고 순 한글로

하였읍니다. 종래에는 유학에 중독되어 한문이 아니면 문자가 아

니라고 생각하여 한문을 모르면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지마는 한

글을 모름은 태연할 뿐 아니라 도리어 모르는 것을 자긍할 만큼

한글을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나 보배가 언제까지나 묻히어

있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침내 기독교가 그 그릇된 생각을 깨뜨

리고 한글의 가치를 천명하여 광채를 세계적으로 발휘하게 함에

큰 공적을 끼친 것입니다. 교도들은 한글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

다 할만큼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글발전에 대한 공헌이 얼마

나 큰가 헤아릴만한 것입니다.”63)

외솔ㆍ한결 같은 국어학자들뿐 아니라 국문학자들도 기독교의

용.63) 金允經, 朝鮮文字及語學史(서울: 조선기념도서관, 1938), 556-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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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한글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하였다. 조윤제(趙潤濟)ㆍ조연현(趙演鉉)의 경우도 보인다.64)

말과 글은 인간의 사고와 인격 및 그의 행동양식을 규정해 줄

뿐 아니라 그것의 존재 및 활용 여하에 따라 그 사회의 성격 자체

도 규정해 주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의 존재를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성경 번역과 출판은 한글의 민족문자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한글성경 번역을 통해 한자문화ㆍ한

문숭상의 몰주체적(沒主體的) 전통에 짓눌려 천시되어 오던 한글

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그것을 민중의 문자로 만들었고 문맹퇴치율

을 급격하게 줄여 민중들의 인간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데 기여하

였다.

다. 천주교회의 한글 연구: 여기서 한글문화의 전파와 관련하여

환기해야 할 점은 천주교의 선구적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지만, 천주교는 일찍이 성경 및 교리서

등의 번역과 천주가사 등에서 한글문화 건설에 공헌했고 또 천주

교 신부들이 만든 한불자전은 개신교의 한글 성경 번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불자전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성경 번역 때부터 일정하

게 이미 활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에

깊이 관여했던 루미스(Henry Loomis) 목사는 본국 성서공회에 보

낸 편지에서, “조선어 사전 한 권과 (프랑스 말로 된) 문법책 한

권이 1881년 이곳에서 발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문법 체계는 나

름대로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추후에 요코하마에서 이런 일을 하

게 될 때 이것들이 길을 쉽게 열어 줄 것입니다.”라고 썼다.65) 이

64) 김우규, “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87-89. 65) “Henry Loomis’ Letter to Dr. Gilham, Jul. 5. 1883”; 이덕주, “초기 한글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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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39

는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정리된 한불자전등의 한국어 연구가

개신교 성경 번역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뒷날 한국에 온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아펜젤러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한국어 습득과 관

련, “프랑스의 선교사인 리델 주교가 숲 속에 길을 뚫어놓긴 했

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66) 이는 리델(F. C. Ridel) 신부가 만든 한불자전(Dictionaire Coreén-Francais, 1880)과 한어문전(Grammaire

Coreéne, 1881)을 언급한 것이다. 전자는 단어․문법․지명의 세부분으

로 된 한국어 사전인 셈인데, 최현배는 이 사전을 배달말 사전의

효시이며, 배달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언급

했다. 후자는 한국어 문법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든 최초의 것인데,

최현배는 역시 이를 두고 우리가 제 나라 말의 말본을 짓는 첫 영

광마저 다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언더우드

와 게일의 한영자전은 리델 신부의 이같은 업적에 힘입은 바 크

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천주교의 선행적 한글 연구가 개신교의 성경 번역

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개신교 성경

번역 초기에 선교사를 도왔던 분들 중에는 천주교와 관련 깊은 분

들이 있었다. 이수정의 가족과 친지가 천주교 신자로 대원군 시대

에 희생되었다는 지적이 있다.67) 그렇다면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

경을 번역하기에 앞서, 천주교 교리서나 셩경직에 접촉해 있

었을런지도 모른다. 또 아펜젤러의 어학 조사 조한규(조성규)가 천

번역에 관한 연구”, 502에서 재인용.66) Wm. 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186; 이만열 편,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서울: 연세대 출

판부, 1985), 168에서 재인용.67) Henry Loomis, “The First Korean Protestant in Japan”, The Korea Mission Field

33 (July 1937),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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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주교 신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성공회 교인)도 있다.

언더우드의 어학선생 송덕조(宋德祚)의 경우도 그가 천주교 신자

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송덕조는 정약용․이가환․남상규․홍(남)종삼 등이 규정한 ‘국문수용법(國文需用法)’을 채용하여 언더우

드로 하여금 영한자전과 신구약성경 번역에 착수케 하도록 하였

다는 지적이 있다.68) 여기서 송덕조가 남상규 등 천주교인들의 국

문표기법을 채용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천주교에 가까

웠거나, 천주교의 한글 연구에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송덕조의 예에서 보더라도 개신교보다 1백여 년 전에 수용

된 천주교의 한글 연구는 직․간접적으로 개신교의 한글운동에 영

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과 관련, 1900년에 번역․출간

된 신약젼셔가 그 표기 원칙과 방식에서 셩경직와 매우 비

슷하다는 최근의 연구도 있어서 주목된다.69)

라. 기독교계의 한글 연구70): 한글 성경 번역은 한글 연구의 기

운을 불러 일으켰다. 만주의 로스는 자신의 초기 번역이 평안도

사투리에 근거해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서울말을 연구하고 번역

에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뒷날 장로회 공의회에서는 성경 번역과

관련하여 한글에 대한 연구를 촉구한 바도 있는데 뒤에서 언급될

것이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일찍부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기독

교계는 한글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였다.

개신교 선교사가 쓴 한국어에 관한 것으로는 로스(John Ross)의

한국말 첫걸음(Corean Primer, 1877)인데 그 뒤 The Corean

Language (1878),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로

68) 奇一(J. S. Gale), “元收師行狀”, 신학세계 1:4 (1916, 10), 157.69) 서정수, “초기 우리말 성경의 표기법과 대명사에 관하여”, 그리스도교와 겨레

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서울: 기독교문사, 1985), 182.70) 이 부분은 필자의 “기독교의 한글 연구”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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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41

수정하였다. 이 책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방언이 강하게 풍기고 있

다. 로스와 같이 선교하던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도 1879년에

한국말 풀이(Notes on the Korean Language)라는 것을 썼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로서는 언더우드가 1890년에 이

미 한국어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과

한어뎐(A Concise Dictionary of Korean Language) 2권을 간행하

였는데 권1은 한영뎐(Korean-English Dictionary) 권2는 영한뎐(English-Korean Dictionary)이었다. 이러한 한국어 관련 노작들

이 그가 한국에 도착한지 5년 만에 펴냈다는 것은 그의 한국어 학

습 노력의 진지함을 엿보게 한다.

개신교 선교사 중 한국어에 가장 능통했던 분은 게일(J. S. Gale)

이었다. 그는 사과지남(Korean Grammatical Forms, 1893년 초판,

1916년 재판)을 펴냈고, 그 뒤 한국인 어학교사들의 도움을 입어

한영뎐(Korean-English Dictionary, 1879년 초판, 1911년 재판,

1931년 삼판)을 펴냈는데 재판부터는 한영 대뎐이라 하여 매우

무게 있는 사전을 펴냈다. 이 외에도 게일은 한국어의 어려움(Difficulties of Korean, 1897)과 유몽천자(Yumongchunja 4권)를 쓴

바 있고, 한글이 과학적인 훌륭한 문자임을 강조하는 한편 한글을

세계에 널리 소개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헐버트(H. B. Hulbert)는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많이 남겼다.71) 그는 ‘한민족의 기원’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말수ㆍ문법에서 유사성을 들어,

삼한 민족이란 드라비다족이 해로로 북상ㆍ이주한 것이라고 주장

71) 헐버트의 한국어 관련 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민족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People, 1895), 고유의 한국말(Korean Survivals, 1900), 한국어

와 대명사(The Korean Pronoun, 1901), 한국어와 에페엩(Korean and Efate, 1901), 한국어와 대만생번족말(Korean and Formosa, 1903), 한국어와 드라비다

방언과의 비교어법(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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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한글 연구는 성경 번역과 한글 깨치기 운동에 앞

장서는 등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일찍이 기독교인이었던 최광옥과

유길준이 대한문전을 펴낸 것은 이러한 기독교적인 분위기와도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 내의 한글 문법에 관한 논의

와 관련, 모음[ㅏ]와 [ㆍ]의 사용이 난제여서 윤치호 같은 이도 그

사용례를 분명히 하자고 제안했다.72) ‘아’자를 비롯한 국문철자법

에 대한 논의가 1904년 9월 13일부터 서울 구리개(銅峴) 예배당에

서 회집된 야소교 장로회 공의회 석상에서 제기되었는데, 이 모임

에서 한국인 대표였던 김흥경은 ‘국문을 사용하는 데 동일한 규모

를 세우고 지금 작정없이 각인의 마음대로 문란하게 사용하는 것

을 없이하고 어떻게 하던지 용이한 법으로 개정’하도록 촉구하였

다. 이에 따라 게일ㆍ배위량ㆍ왕길지 등의 선교사와 한석진ㆍ김흥

경ㆍ김필수 등을 선정, 연구토록 하여 그 다음해 공의회에 보고토

록 하였다. 그 이듬해 9월 서울 승동 예배당에서 모인 제5차 공의

회에서 국문 교정위원 왕길지 목사는 “작년에 의론하기를 아래아

자만을 폐지하고 그 외에는 그대로 「그리스도신문」 기재하는 데만

1년간 시험하기로” 한 보고를 올렸고, 이 회의에서 보선된 국문

교정위원 유내춘 장로의 “국문 교정하는 일은 전과 같이 옥편과

자전에 있는 대로 시행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접수하고 더 이상

논의치 않게 되었다.73) 아마도 국문교정 문제가 일이년의 비전문

가의 연구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

나 장로교에서 거교단적으로 국문 문제를 거론하여 1년여를 두고

72)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17 (1897. 5. 26). 73) 조선야소교공의회의 한글 문제에 관한 논의는 郭安連ᆞ咸台永 편, 長老敎會

史典彙集(1918년간), 32, 39, 230, 235, 236, 24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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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43

논의를 거듭했다는 것은, 당시 공적 기관으로서는 국문 연구를 추

구하는 어떤 기관도 없었다는 점에서74), 대단히 선진적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 성경의 문체도 한국어 문체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윤경은, “구한국 말기에는 국문에 아무 통일된 문체가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을 번역한 문체가 유일한 표준이 되었다”고

언급하는 한편 “성경 번역본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

교 문체라고 이르는 독특한 한글 맞춤법이 서게 되었었다”고 주장

했다.75) 이는 성경 번역이 한글 문체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 그 위치와 무게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 연구와 관련된 기독교계의 공헌은, 한글 연구에 매진한 근

대의 학자가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과, 그들의

한글 연구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관련시키는 데서 가능하였

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성경을 평민의 문

자인 한글로 번역한 데 있다. 최현배는 한글 연구에 대한 기독교

계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실로, 우리 한글의 중흥조인 한 흰샘 주시경 스승도 기독교

에서 차린 새 교육기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다가 우리말, 우리글

의 가치를 감득하고서 그 연구에 손대어, 평생 일관하게 이에 전

력하여, 한글운동의 앞잡이(先驅者)가 되었으며, 그 밖에 이윤재, 김윤경, 정태진, 정인승, 장지연, 최현배 같은 한글 학자 및 운동자

들도 다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였거나 또는 기독교 학교에 봉직

하면서, 이를 연구하고, 이를 사랑하고, 이를 지키고, 이를 선전하

74) 이와 관련, 주시경이 독립신문사 안에 맞춤법통일(同式)을 위해 국문동식회를

설치한 것이 1896년 5월이고, 지석영이 훈동 의학교 안에 국문 연구회를 설립

한 것이 1907년 1월이며, 정부가 국문 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1907년 7월이고, 주시경이 국어강습소 졸업생들과 국문 연구회를 조직한 것은 1908년 8월이다.

75) 김윤경, “성서가 국어에 미친 영향”, 성서와 한글 근대문화(서울: 대한성서

공회, 1960), 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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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였다. 이윤재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글운동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

였기 때문에, “한글 장로”의 별명이 있었으며, 장로교파 강병주 목

사는 항상 한글운동을 교리 전도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한글 목

사”의 별명을 얻었던 것이다. 또 교회의 모든 기관이 한글 전파에

큰 공이 있음은 앞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특히 각 교파 연합으로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무모한 압제정치동화정책에 항거하여, 국어와 국사를 학생에게 가르치는 나라안 유일의 교육기관이었다. 요컨대, 한글과 배달말의 과학스런 연구, 애족적인 선전, 애국적인

수호에 기독교의 공덕은 영세로 잊지 못할 것이다.“76)

마. 성경이 현대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 성경의 번역은 한국의

개화기 문학과 현대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개화기 문학에서 거론

되는 육당 최남선의 작품에는 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았다. 조신권은

최남선과 이광수 등이 기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초기의 작

품활동에는 기독교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77)

최남선은 어린 시절부터 현대정신을 이해하려고 신약성경과 천로

역정 및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외국 선교사 번역의 예수교 계통의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소년」을 비롯한 여러 잡지를 통해 시도한

육당의 강렬한 국문의식은 그가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구입해

읽었기 때문이며, 육당 스스로도 이를 술회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

의 초기 문학 세계는 물론이고 ‘기독교적 이상주의’를 표방한 천강

안국선의 금수회의록도 당시 번역된 성경 및 기독교와 관련되었

다는 것이다. 또 하몽 이상협의 작품이 ‘가련한 속죄양’을 떠올리는

가 하면, 이상춘의 박연폭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

복음 10:30-37)를 모델로 하여 만든 글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 김우규는 “성서에 의한 영향은 처음 한국문화를 새로운 국

면에로 전회시키는 데 기동적(起動的) 작용력을 가했다”고 주장하

76) 최현배, “기독교와 한글”, 68.77) 趙神權, 韓國文學과 基督敎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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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45

면서 성경이 한국 현대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다음과 같이 설

명하고 있다.78) 그는 성경의 기사를 소재로 하여 다룬 작가로 김동

리를 먼저 들었다.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와 마리아의 회태,

목공 요셉 무녀도 등을 썼는데, 이 중에는 성경의 사실을 소

재로 하여 시적 감정이 깃든 필치로 쓰면서 그의 소설 속에 기독

교적 초자연성을 그대로 도입하여 자연주의적 성향을 극복하고 있

다는 것이다. 강소천의 산양, 박용숙의 부록, 송기동의 회귀

선 등도 성경의 기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또 성경의 정신을 주

제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과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작품 등을 분류

하여 기독교 현대소설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김말봉의 밀림 찔레꽃, 박계주의 순애보 애로역정 진리의 밤 구원의 정화

자나 깨나, 박영준의 사죄, 손창섭의 포말의 의지, 심훈의

상록수, 유재완의 엘리의 후손, 이광수의 재생 흙, 이종환

의 인간보 면도날 사도전서, 임영빈의 난륜(亂倫) 서문학

자 사랑의 모험 민씨와 토요오후 준광인전 계시, 임옥인

의 월남전후, 전영택의 남매 외로움 집 소 아버지와

아들 크리스마스 새벽 등을 들고 있다.

이 중 김말봉은 애정 문제에 항상 기독교적 윤리의 조명을 투영

시키고 있으며, 박계주는 명확한 기독교적 이념을 기조로 하여 애

정문제를 추구하면서 그의 작품의 서두에는 항상 성구나 경구를

내세우고 있다. 박계주의 작품은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투철하

게 탐구함으로써 한국 기독교 소설의 하나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다. 심훈 또한 작품의 정신적 기조를 민족주의적 이상과 함께

기독교 정신에 두고 있으며, 목사이기도 한 전영택은 초기의 초자

연주의적인 점을 벗어나 후기에 가면 기독교적인 인도주의로 전회

78) 이 점에 대해서는 김우규, “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79-155에서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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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하게

성경과의 관련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은, 위와 같이 한국 현대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경

이 문학작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

다. 김윤경이 성경의 문체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문체가

한국 산문문학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지적 또한 없지 않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기독교)은 한국 문학의 영역에 구체적

인 결실로 나타났던 것이다.79)

※ 성경과 한국 사회의 변화(試論): 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여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 성경

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자기시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여 그리스도인들

로 하여금 자기시대와 사회에 대해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

다.

한말 처음으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기다리

고 중요시했는가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

된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얼마 안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

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

(crying need)”80)를 했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1898년경 성경 번

역이 지지부진하자 평양에 사는 어떤 교우는 예수믿는 사람의 양

식은 성경이라고 전제한 후, 그 성경을 지방에 내려 보내주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린다”81)고 했고, 어

79) 김우규, “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154.80) Annual Report of the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C. for 1891,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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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47

느 서점 주인은 “신약전서를 전부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82)고도 했다. 이렇게

성경 번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초대기독교인들의 영적 갈급성

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

도 하다.

필자의 경험이긴 하지만 해방 후 시골 교회에서 구약성경에 나타

난 위인들의 행적을 듣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해방 후에

그랬다면 일제 강점하에서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의 민족적인 사기

를 읽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

지 않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일제의 노예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블레셋을 상대로 한 삼손과,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된 다니엘과 에스겔을 보면서 그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

님 앞에서 민족적 범죄가 갖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되돌

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포로귀환의 때를 주신 하

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꿈꾸었을 것이

다.

성경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시련 앞에서 응답적 삶

을 살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말에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섰던 뜻있

는 젊은 야소교인들을 한국사에서 만난다. 이토오(伊藤博文)를 제거

하려다가 자결의 길을 택했던 정재홍(鄭在洪)은 한말 교육자요 기

독신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한국 외교부의 고문 자격을 가지고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본국에 가서 일제를

81) 「대한크리스도인회보」 2:18 (1898. 5. 4).82) 「대한크리스도인회보」 2:38 (1898.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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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위한 공작을 꾀하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한국인 기독청

년 장인환(張仁煥)에게 피살되었다. 천주교인 안중근(安重根)과 이

토오를 포살하는 데에 동조한 우덕순(禹德淳)은 신앙적인 애국시를

남겼다. ‘야소교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ᆞ이용구를 제거하려는 계획

을 세우고 명동 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완용 제거에 앞장선

이재명(李在明) 역시 기독청년이었다.83)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를 통

해 자기 시대와 민족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응답적 삶은

더 광범하게 나타난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이 거사

참여에 앞서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

민하는 데서는 그들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신 민족을 위해서 순명(殉命)을

각오했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관

여한 이들이나 무장투쟁 혹은 의열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

이들 또한 성경과 기독교적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

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를 강

화하고 조선민족에 대해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인만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신사참배에 저항, 많은 신자

들이 투옥되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를 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84)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한, 선교사들의 표현을 빌

83)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

독교 수용사연구(서울: 두레시대, 1998) 참조.84)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서울: 기독교문사, 1990) 및 필

자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과정”,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서울: 지식

산업사, 198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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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49

면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뒷

날 다시 한국을 찾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매켄지(F. A. McKenzie)

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의 원천이 성경에 있음을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

교했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

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

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

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어느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

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

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85)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신문학 교수였던 최준이 “한글로서의 한국

말 성경이 나타남으로써 한국의 국민대중들은 비로소 자아(自我)를

다시 찾게 되었고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립상을 갖게 되었다”86)고

하는 지적은, 그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계 신문이 한국의 민주주

의 사상을 폈고 자주 독립사상을 앙양했다는 지적87)과 함께 눈여

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항적

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권(독립)수호, 국권(독립)회복에 있었지만,

또 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

국 민족운동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만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

85) F. 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7.

86) 최준, “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47. 87) Ibid., 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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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

로는 그것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에

서 한국의 민주화의 도정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민주화의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인민평등의 실현이다. 한

국이 인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봉건적인 혈통신분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서는 혈통에

의해 크게는 양천(良賤)으로 이분화했는가 하면 좁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분법적 신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명적

으로 주어진 혈통은 곧 신분제라는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이런 신분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교육, 예의, 사상(安分) 및 법

제적 측면에서 자신의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

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혈통신분제는 숙명적이어서 개인적인 힘으

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용은 이런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

를 제시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본래 혈통에 의해 차별화된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과 천민을 구분, 차별화하

는 양천 제도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

의 성경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의하면 혈통신분제는 인간사회, 특

히 지배층이 독점적 지배를 위해 ‘숙명적인 질곡’으로 제도화한 것

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에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이고 반천륜적인 제도다. 노비제도와 양천(良賤)제도

를 정비한 법제적 검토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이뤄졌다 하더

라도 실질적인 인민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과한 후

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이런 혈통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실질적인

인민평등을 촉진한 것은 예수교요 그 기반인 성경이었다. 따라서

한말 성경에 기반한 예수교회에서는 혈통신분제를 극복하는 공동

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 박서양(朴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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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 이만열 51

陽) 부자가 양반 신분 못지 않게 활동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은 혈

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성경과 교회 때문이었다.

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서

서히 군주ᆞ양반 중심의 전제군주적 구왕조(舊王朝) 회복을 의미하

는 복벽(復辟) 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

제도’인 민주공화정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

이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

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

다.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

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의 약법(헌법)은 이를 보증했다. 대한

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기독교인

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조밀

하게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

주화에 이렇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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