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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2.0/kr/legalcode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2.0/kr/

  • - 1 -

    국문초록

    왕의 문화적 재현의 형성과 변형:단종과 세조를 다룬 식민지시기

    역사소설들을 중심으로

    이 연구는 공화주의 하에서의 문화적 재현 공간(TV 드라마,영화,

    소설 등)에서 왜 여전히 왕이 활발하게 재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

    문에서 출발한다.이 의문의 해답을 푸는 열쇠 중의 하나로 최근까

    지도 문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반복적으로 포착된 조선시대의 왕이

    자 거의 모든 왕의 재현의 원형을 이루는 단종과 세조에 관심을 가

    지고 이 두 왕이 재현된 양상과 그 방식의 기원으로 식민지시기 역

    사소설인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에 주목한

    다.동시에 본고는 왕이 재현되는 방식의 원류를 추적함과 동시에

    그 원류가 왜 하필 그 시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등장했는가의 문제

    에도 주목한다.즉 단종과 세조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수반하고 있

    는 1920년대 후반에 발표된 『단종애사』와 1940년대 초반에 발표

    된 『대수양』이 당시의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배경과의 관련 속

    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동시에 제기하고

    자 하는 것이다.특히 이는 같은 식민지시기로 인식되지만,담론 지

    형이 크게 변별되는 문화통치기와 전시동원기의 정치적 무의식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다.

    Ⅱ장에서는 두 근대적 텍스트에서 이루어진 왕의 이미지 재현이

    전통적 텍스트에서의 왕의 이미지 재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밝히려

    고 한다.단종과 세조의 재현과 해석의 대립은 세조 집권기 단종복

    위운동의 주역들을 왕도(王道)의 화신인 사육신으로 상징화하고,세

    조를 패도로 비판하며 당시의 정권을 비판하려 했던 사림들과 세조

    의 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공신세력들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한

    유구한 기억투쟁의 과정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조선시대에서의

    기억대립은 현실에서의 정치적인 갈등과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다.

  • - 2 -

    이는 역사의 시비를 밝혀내는 문제를 넘어서 정치집단의 생사를 결

    정지었던 민감했던 문제였다.결과적으로는 사림들의 주장대로 국가

    의 공식적인 행사들 속에서 사육신과 단종은 복권되지만,왕들이 사

    육신과 단종을 왕권 강화의 기호로 전유하면서,세조에 대한 비판은

    약화되고,여전히 단종,세조,사육신 등을 둘러싼 해석의 갈등은 잔

    존하게 된다.

    Ⅲ장에서는 Ⅱ장에서 밝혔던 전통적인 기억대립과의 관계와 더불

    어 담론들이 발표되었던 당대의 담론장과의 관계 속에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나타난 왕의 재현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를 탐구

    한다.거칠게 요약하자면 1928년~1929년 사이 발표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된 비극적 왕의 최후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문학적 장례를 환유하는 측면을 가진다.조

    선의 마지막 왕으로 인식되었던 순종이 승하한 식민지에서 『단종

    애사』는 단종과 사육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세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전통적인 사림의 서사들의 내용을 차용함과 동시에 이러

    한 계승을 통해 조선 최후의 왕의 장례를 문학적으로 치러낸 것이

    다.특히 이는 전통적인 담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단종의 슬픔을

    극대화하면서 왕을 애처롭게 만들어내고,그 왕을 떠나보내는 장면

    의 비장미를 살리면서 이루어진다.이는 나라를 잃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려는 민족주의적 전략으로 볼 수도 있지만,이광수가 왕정복

    고주의자가 아닌 공화주의자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의미를 한

    층 복합적이다.즉 이는 왕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통해 전제 왕정을

    공화정으로 대체하려는 정치적 무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다.그러나 왕을 주체적으로 처형하지 못 하고 타자에게 잃은 식민

    지 조선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의 죽음을 공화정의 필연적인 도래

    와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던 작업으로 보인다.특히 일제의 검

    열이 체계화되고 엄혹해진 환경 속에서 정치적인 모색을 그대로 드

    러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식민지라는 환경은 서구의 소설들과

  • - 3 -

    동일한 모색을 허용하지는 않았다.결국 이 텍스트에서 ‘왕정 이후’

    의 해답은 모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Ⅳ장에서는 1940년대 초 전시 동원기에 출현한 김동인의 『대수

    양』을 다룬다.거칠게 요약하자면 이 텍스트는 이광수의 『단종애

    사』가 모호하게 남겨놓은 새로운 질서 모색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

    의 대답을 대표한다.이 텍스트는 세조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훈구파

    및 왕들의 전통적인 입장의 논리를 표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이렇

    듯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정치 담론인 패도를 구현하면서도 동시에

    전선기행체험 이후 일제의 강력한 힘에 현혹된 당시 지식인들의 보

    편적인 세계관을 드러내 준다.본격적인 전시동원기에 접어들면서

    상당수 식민지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구적 가치에 극단

    적 회의를 느끼고,일제의 제국적 주체가 됨으로써 파국을 돌파하려

    고 시도했는데 김동인도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김동인의

    텍스트에서 세조로 표상된 새로운 군주는 전통적인 정치 질서와의

    과감한 결별을 선언하고,대륙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분명히 한다.그리고 대중들도 강력한 왕에 대한 분명한 선망을 보

    여주고 있다.이는 역사를 통해 일제의 대륙으로의 침략 의도를 내

    면화하고 일제의 선전 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Ⅴ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한다.이와 더불어 정당하지만

    유약했던 왕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애도와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선망을 각각 대변하고 있는 단종과 세조가 해방 이후의 문화적 재

    현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는 점을 밝힌다.해방 이후의 문화

    적 텍스트들은 단종과 세조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공간에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 역시도 식민지시기 역

    사소설들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았다.이러한 왕에 대한 문화적 재현

    들이 드러내는 정치적 무의식이 실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와 실

    천들과는 어떤 관련을 맺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 추후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 - 4 -

    주요어: 단종, 세조, 문화적 재현, 기억, 정치적 무의식, 역사소설,

    『단종애사』, 『대수양』

    학번: 2010-22978

  • - 5 -

    Ⅰ. 서론 1

    1. 문제제기 1

    2. 선행연구 검토 4

    (1) 역사소설 일반에 대한 문학적 연구 4

    (2) 역사소설에서의 단종과 세조의 재현과 그 의미 8

    (3) 단종과 세조에 관한 역사학적 연구 9

    3. 이론적 자원 11

    (1) 역사소설과 정치적 무의식 11

    (2) 기억의 사회적 재구성 14

    4. 연구방법 및 자료 16

    (1) 연구방법: 담론분석 16

    (2) 연구자료 16

    Ⅱ. 전통적 기억의 대립과 권력투쟁 19

    1. 국가적 공식기억의 확립: 「단종실록」과 「세조실록」 20

    2. 대항기억의 도전: 사육신의 탄생과 단종의 죽음 재해석하기 27

    3. 기억을 통한 권력투쟁의 전개: 복권운동의 전개 32

    4. 공식기억과 대항기억의 융합: 국가적 기념 35

    5. 소결 38

    Ⅲ. 망국을 위한 애도 - 이광수의 『단종애사』 39

    1. 서사생산의 배경: 과거에 대한 관심 40

    (1) 일본인 조선연구단체들과 조선총독부의 자료 편찬 40

    (2) 순종의 국장과 6․10 만세운동 42

    (3) 야담운동과 조선의 발굴 45

    (4)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의 역사소설 46

    2. 유약한 왕을 위한 장례: 『단종애사』 49

  • - 6 -

    (1) 멈출 수 없는 욕망, 세조 49

    (2) 눈물의 왕, 단종 55

    (3) 왕에 대한 애도 59

    3. 소결: 왕을 위한 문학적 장례 61

    Ⅳ. 강력한 영웅군주의 출현 - 김동인의 『대수양』 63

    1. 서사생산의 배경: 전시동원기와 민주주의의 좌절 64

    (1) 전시동원의 시작과 문학의 ‘암흑기’ 64

    (2) 이광수에 대한 도전 66

    (3) 김동인의 영웅론과 전선기행체험 70

    2. 새로운 군주를 위한 환영식:『대수양』 73

    (1) 유약한 왕, 단종 73

    (2) 구국의 영웅, 수양대군 77

    (3) 강한 권력에 대한 욕망 82

    3. 소결 84

    Ⅴ. 결론 및 이론적 함의 86

  • - 1 -

    Ⅰ.서론

    1.문제제기

    임은 떠나갔다.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이래,이

    왕(李王)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순종은 1926년 사망했고,그 이후로

    한반도에서 왕은 사라졌다.이후 독립운동사에서나,해방 후 새롭게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논의들에서 입헌군주제는 정치체제로 비중 있

    게 고려된 적이 없다.프랑스에서는 1세기에 가까운 혁명과 왕정복

    고의 지난한 과정을 겪은 후에야 왕이 정치체제에서 소멸했다는 점

    을 생각해본다면1),우리는 너무 쉽게 왕을 떠나보내고,왕이 없는

    세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임을 보내지 않았다.TV,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왕은 건재하다.2012년 하반기 조선시대 광해군을 다룬 영화 는 천만관객을 돌파하며,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또한

    공중파 TV 방송에서도 매일 저녁 드라마로 수많은 왕을 만나보게

    된다.그리고 이것은 2000년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남한을 한

    정해서 생각해본다면 1950년대 이후 왕을 다룬 사극영화,드라마,

    소설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그리고 이러한 왕을 소재로 문화

    적 텍스트들은 대선정국에서는 실제의 정치와 쉽게 유비되고 동일

    시된다.또한,언론에서 쓰이는 “왕의 남자”,“상왕”과 같은 표현에

    서 보듯이 정치의 영역을 서술하고 이해하는 담론들에서도 왕정의

    언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정치적으로는 이미 왕을 손쉽게 잊어버리고도

    사회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왕을 잊지 못하고 있을까?민주공화정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왕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이 질문에 응

    답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체제에서 왕이 사라지고 문화적 재현 공간

    에서 왕이 부상하게 된 식민지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시기

    대중문화 텍스트들에 나타난 왕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왕을 재현

    1) 이에 대해서는 아귈롱(1998)을 참조.

  • - 2 -

    하는 방식들이 출현하게 된 계기와 지금의 재현 방식들의 역사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본고는 이 시기 문화적 재현 공간에 떠오른 여러 가지 매체 중에

    서도 역사소설에 주목하고자 한다.역사소설은 소위 문화통치기와

    맞물려 192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1940년대까지 신문이나 잡

    지 등의 지면을 빌려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역사소설은 장르의 특

    성상 필연적으로 지나간 과거를 소재로 다루고 있고,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든지 간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제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식민지 시기 많은 소설가들은 엄혹했던 검열을 회피하는 수단

    으로 소설을 활용했으며,소설 속에 당대에 대한 진단과 평가를 함

    축하고 있었다.또한,역사소설은 여타 논설 등에 비해 가독성이 높

    았고,잡지나 신문 등에 연재되면서 대중성을 확보하였고,이를 통

    해 독서대중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천정환,2003).또한 식민

    지 시기 발표된 장편의 역사소설들이 195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

    까지 주목할 만한 역사소설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 또

    한 이 시기 역사소설을 주목하게 만든다(김치홍,2002:11~13).결

    국 이 시기 역사소설은 작가에게는 현실에 대한 진단을 은유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독자들에게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미지

    를 소비되는 장을 열어주었음과 동시에 이후의 역사소설들의 생산

    과 소비의 방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식민지 시기 역사소설에서 중심인물로 포착되는 조선시대의

    왕은 단종과 세조,연산군 정도로 제한적이다.세종,문종,성종,선

    조 등도 소설의 주변 인물로 등장하긴 하지만 텍스트 내에서의 역

    할이 제한적이며,단종과 세조,연산군이 가진 이미지에서 크게 벗

    어나지 않는다.즉 식민지 시기 역사소설,더 나아가 현재의 텍스트

    들에서 재현하는 왕의 이미지는 단종과 세조,연산군의 묘사에서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이 글은 이 중에서도 단종과 세조에 주목하고

    자 한다.우선 연산군이 폭군의 의미만을 구성하는 것에 반해 단종

  • - 3 -

    과 세조는 서로 대립되는 방식을 통해 좋은 왕과 그렇지 못한 왕을

    동시적으로 제시한다.이는 단종과 세조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텍

    스트들에서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다.즉 이들은 옳음과 그름,강함

    과 약함,능력과 무능,성숙과 치기 등 다양한 대립을 표상하는 기

    호로 등장하고 있고,이러한 대립을 통해 좋은 왕과 나쁜 왕의 의미

    를 구성해나간다.

    단종과 세조의 표상 방식에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둘을

    둘러싼 해석과 표상의 대립이 전통과 근대를 가로지르는 시간대에

    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이후에 상술하겠지만 단종과 세조를 어

    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텍스트들과 단종

    및 사육신 복원을 위한 정치적 운동 등을 통해 논쟁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식민지시기의 역사소설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해방 이후

    의 시기 내내 영화,소설,드라마,연극 등에서도 이 둘에 대한 묘사

    와 평가는 유동적으로 변해왔다.결국,단종과 세조라는 소재는 조

    선시대와 식민지시기를 가로지르는 이미지 경합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본고가 주목하는 대상들은 전통을 근거로 식민지 근

    대성을 해명하는 동시에 근대에 이르러 전통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

    되었는가를 추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이다.

    특히 같은 식민지 시기 안에서도 단종과 세조에 대한 평가와 표상

    이 시기와 작가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더 한다.이후

    에 자세히 다루겠지만,1920년대 후반 문화통치기에 발표된 소설인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다룬 세조가 패륜적인 폭군인데 반해,

    1940년대 초반 전시동원기에 발표된 소설인 김동인의 『대수양』에

    서의 세조는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난다.또한,단종에 대한 평가도

    미묘하게 바뀌어 있다.특히 1920년대가 본격적으로 조선을 발굴하

    는 시기이자 동시에 현실적으로 왕이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시기였고,1940년대가 일본제국의 담론에 의해 새로운 근대

    로의 상상을 강요받았던 시기라는 점에서 단종과 세조의 표상의 변

  • - 4 -

    화는 단순히 우연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본고는 이렇듯 조선시

    대부터 식민지시기까지 경합하는 왕의 이미지 변화를 추적함과 동

    시에 왜 하필 이 시기에 이 왕들이 이러한 형상으로 등장했으며,그

    의미와 효과는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려고 한다.

    2.선행연구 검토

    이 장에서는 먼저 문학적 연구에서 이루어진 식민지 시기 역사소

    설의 연구 경향을 검토하고자 한다.역사소설에 관한 문학적 연구는

    축적된 양이 많고,매우 다양한 역사소설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제한된 지면 아래에 모두 검토하는 것은 필자의 역량으

    로는 불가능하다.따라서 이 장에서는 먼저 본고와 관련된 역사소설

    에 관한 대표적인 이론적 논의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다음

    으로는 식민지 시기 역사소설에서 나타난 단종과 세조의 재현 양상

    에 관한 연구를 검토하고자 한다.마지막으로 문학적 연구 외에 단

    종과 세조를 다룬 역사소설에 대한 역사학계의 비평을 검토하고자

    한다.

    (1)역사소설 일반에 대한 문학적 연구

    역사소설에 관한 문학적 연구는 연구경향과 시기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하나는 2000년대 이전의 문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이며,다른 하나는 기존의 역사소설 해석에 반발해 2000년대

    이후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연구경향들이다.전자의 연구들이 주로

    역사의식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면,후자의 연구들은 전자의 연구

    들을 반박하면서 역사소설의 발생과정과 기능을 탐색하고 있다.그

    리고 역사소설 일반에 관한 연구들 속에서 본고가 주목하는 『단종

    애사』와 『대수양』은 역사소설의 대표작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

    지하고 있다.

  • - 5 -

    ① 역사의식과 역사소설

    해방 이후 문학에서 이루어진 역사소설 논의의 시발점은 백낙청

    (1966)의 논문이다.백낙청(1966)은 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을 근거

    로 단순히 역사를 소재로 삼는 것만으로 역사소설이 되는 것이 아

    니라,과거를 현재의 전신으로 파악하는 역사의식을 표현하고 있어

    야 역사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백낙청이 이를 근

    거로 국문학의 대표적인 역사소설로서 단종과 세조를 다룬 이광수

    와 김동인의 소설을 제시하고,이들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논문이다.

    백낙청(1966)의 평가에 따르면 이광수의 『단종애사』는 루카치가

    말하는 "중도적 인물2)"을 제시하지 못 하고,단종의 심리묘사에만

    치중하여 “예술적 손실을 초래(백낙청,1996:20)”하고,계몽문학으로

    서 기능하지도 못 한다.결국 이 소설은 대중의 국사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기는 했지만,일본의 어용학설에 쉽게 동조되고,지적 진보와

    개혁정신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동인의 『대수양』도 사정

    은 크게 다르지 않다.이 소설 역시 중도적 인물의 부재 속에 당시

    의 사회적 상을 충실히 재현해내지 못 한다.김동인은 이광수를 감

    상적이고 권선징악적 우국지사로 비판해놓고는,자신도 그러한 인물

    에서 벗어나지 못 함으로써,결과적으로는 일제를 비판하는 것에도,

    민족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지 못 했다.

    백낙청의 논문을 길게 검토한 것은 이후의 식민지시기 역사소설을

    평가하는 논의들이 백낙청과 유사한 논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대

    표적으로 류재엽(2010),장양수(1996)등의 논의들은 모두 루카치의

    역사의식에 근거해서 이광수와 김동인의 역사의식이 불충분하고 한

    계가 있는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아래의 역사학적 평가와 비교

    2)루카치(1987:34~35)는 중도적 인물의 예시로 월터 스코트의 역사소설의 주인공을 제시

    한다.중도적 인물은 낭만주의적 영웅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민족적으로 전형적인 성격"

    을 가지면서,"상호 투쟁하는 양 극단을 서로 매개"하여 상호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사회세력들을 서술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 - 6 -

    해볼 때,백낙청(1966:24)이 “단종과 수양의 충돌에 관해 어느 편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사실 무의미한 것이다.”증거를 들이밀

    기도 어렵고 “역사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고 지적한

    점은 이들 논의가 가지는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는 재현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본고의 논의

    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의 문제는 평가기준을 선험적이고 당위적으

    로 설정해두고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의 여부로 역사소설을 평가하

    고 있다는 점이다.이렇게 역사소설의 기능을 특정한 문학적 장치를

    통해 민족문화를 정확하게 재현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

    을 계몽해야 한다는 선험적 의무로 미리 재단함에 따라,역사소설에

    서의 재현이 가지는 의의에 대한 적극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이 논의들은 역사소설에서 표출되는 역사의식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모양에 대한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식민지 시

    기 문학에서 중도적 인물이 아닌 왕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나타나

    게 된 조건과 그 묘사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에 대한 분석이 빠질

    수밖에 없다.

    ② 역사소설의 발생과정과 기능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역사소설에 대한 기존의 연구경향에 반대하

    여 식민지 시기 여러 담론과의 상관성을 통해 근대 역사소설의 기

    원과 계보를 추적하는 논의들이 늘어나고 있다(김경미,2009:365).

    최근의 연구들은 1920-30년대 유행하던 여타 역사물과의 상호 교류

    에 주목하고 신문․잡지와 같은 ‘매체’의 역할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사소설의 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역사,문학,매체,독자 간의

    관계를 역사물과 역사담론의 생산-수요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든지,

    역사소설의 통속성 역사소설의 대중 서사적 특징 등에 주목한다(김

    종수,2008:289).

  • - 7 -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승윤(2009)의 연구이다.이승윤

    (2009:16~17)은 근대의 여러 매체들이 생산해내는 다양한 역사담

    론의 형성과 소설적 수용,나아가 근대적 역사소설 양식의 정립에

    이르는 사적(史的)관계에 대해 고찰한다.그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던 영웅물이나 전기물들을 계승했던 구활자

    본 고소설들을 전사(前史)로 하여,1920년대 후반 야담운동과 역사

    물 보급운동을 기점으로 정착한 새로운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다.그

    는 알박스의 기억의 사회학 논의를 차용하여 역사소설이 그 이전의

    고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영웅을 서사의 중심에 놓지만,이 영웅들이

    이제 민족을 이야기하기 위한 매개물이라는 점에서 근대화된 것이

    라고 이해한다.역사소설은 대중들에게 역사를 소비하게 함으로써

    공통된 민족 기억을 창출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 개별 작품 수준의 구체적인 연구 중 본고와 관

    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가 김경미(2009,2011)의 연구이다.김경미

    (2009)는 본격적으로 집합기억의 매체로서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세조대왕』을 연구했다3).김경미(2009)는 『단종애사』의 1920년

    대 민족성을 고양하는 문화담론 하에서 이광수가 『단종애사』를

    집필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이광수의 서사전략이 역사를 통해 민

    족적 기억을 재구성하고 호명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다른 연구

    (김경미,2011)는 1940년대 역사소설인 『세조대왕』을 분석하고 있

    다.이 연구에 따르면 이 소설은 이광수가 『단종애사』에서 펼쳤던

    민족주의 담론이 당대의 황민화 담론을 전유하여 굴절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연구는 역사소설이 마땅히 했어야 할 기능을 하지 못 했다

    는 관점에서 벗어나,사회적․정치적 조건과 담론적 환경 속에서 어

    떤 기능을 하는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3) 앞에서 언급한 선행연구들도 부분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민족적 기억을 소환하는 매체

    로서 역사소설들의 성격을 주목하긴 하지만 부분적 언급에 그칠 뿐 분석의 핵심으로 삼

    지는 않는다.

  • - 8 -

    어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특히 역사소설을 이전의 담론 형식들의

    계승이자 변형이자 동시대의 다른 역사담론과의 상호작용으로 파악

    하는 이승윤(2009)의 연구는 역사소설의 이해를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여전히 역사소설의 민족계몽의 도구로

    서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기능적 설명에 머물러 있다.즉 이들의

    연구는 루카치가 말한 중도적 인물 없이 식민지시기 역사소설들이

    어떻게 민족계몽의 역할을 이루었는가의 해명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민족계몽의 담론이 어떻게 일제의 식민화담론과의 접합 속에서 변

    형되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들에서도 여전히 역사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의

    의의가 적극적으로 평가되지 못 하고 있다.특히 이승윤(2009)의 관

    점을 개별적인 작품 수준으로 가지고 내려와 연구하고 있는 김경미

    (2009,2011)의 연구에서 이광수가 왜 굳이 단종과 세조라는 역사적

    인물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분석은 결여되어 있다.결국 이들의 연구

    는 역사소설이라는 형식의 등장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넓히고 있지

    만,개별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특히 왕)묘사가 가지는 통시

    적이고 공시적인 문화적 의의는 충분히 드러내지 못 하고 있다.

    (2)역사소설에서의 단종과 세조의 재현과 그 의미

    식민지 시기 단종과 세조를 상세하게 묘사한 역사소설로는 이광수

    의 『단종애사』,『세조대왕』,박종화의 『목 매이는 여자』,김동

    인의 『대수양』 등이 있다4).이 절에서 검토할 연구들은 이 소설들

    에 나타난 인물들의 성격을 중점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이다.먼저 조

    진기(1974)는 이광수의 『단종애사』,김동인의 『대수양』,박종화

    의 『목 매이는 여자』에서 나타난 인물과 플롯 차이를 정리한다.5)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각각의 소설들이 단종과 세조 측의 인물들을

    4) 이 텍스트들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이후의 절을 참조.

    5) 이외에도 『단종애사』와 『대수양』의 플롯과 인물을 비교한 다수의 연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들은 모두 조진기의 연구와 한계와 의의를 공유하고 있다.

  • - 9 -

    각각 다르게 선악의 구도로 묘사하고 있다는 평면적 분석에 머물러

    있다.그리고 이러한 인물과 플롯 차이가 나타난 이유를 작가의 개

    성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보인다.이 연구는 세조와 단종이 왜 하

    필 그 시기에 문화적 재현 공간에 특정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그

    러한 재현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 하고

    있다.

    한편,최주한(2005)은 이광수의 역사소설을 민족의식 고취의 도구

    로만 보는 관점이 반쪽의 이해에 불과함으로 지적하면서,이광수의

    역사소설이 자전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이러한 관점

    에서 그는 『단종애사』와 『세조대왕』에 나타난 세조(수양대군)가

    이광수 자신의 삶의 투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두 작품에서 세조

    (수양대군)는 권력을 찬탈했다는 자책감을 내비치는데,이것이 곧

    “정치적 행로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국 권력에의 정치적 타협에 직

    면해야 했던 이광수 자신의 내적 자괴감(281)”의 표현이라는 것이

    다.

    세조를 작가 자신의 투사로 파악하는 최주한(2005)의 관점은 일견

    타당하다.특히 이광수를 제국권력과의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끊임

    없이 고뇌해야 했던 지식인으로 이해하는 그의 논의는 이광수를 비

    롯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소설쓰기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성격을 해

    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세조 이

    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텍스트를 생산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일면적인 이해이며,세조가 단종과의 대비를 통

    해 구성되면서 대중에게 왕의 이미지 일반을 심어주었다는 측면은

    충분히 고려하지 못 한 해석으로 보인다.

    (3)단종과 세조에 관한 역사학적 연구

    역사학에서는 단종․세조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수양대군이 부당하게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 - 10 -

    주류적 견해를 이루고 있지만,김두봉(1998)과 최정용(1996)과 같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이후의 즉위가 정당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

    다6).한편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일종의 조작된 쿠데타이며 세조의

    즉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 내에서도 논쟁은 존재한다.그것

    은 이재호(2008)와 한국인물사연구원(2011)에서 나타나듯이 사육신

    이 누군가인가에 대한 논쟁이다.결국 역사학계의 논쟁의 핵심은 당

    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것이다.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본

    고의 관심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있지는 않다.본고는

    단종과 세조에 관한 문학적 창작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고,그것이

    대중들에 의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역사학의 관점에서 역사소설을 평가하는 흥미로운 논의로 정

    두희(1992)의 논의가 있다.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이 당시의 가치관

    에 비추어봤을 때,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전제

    한다.이에 따라 세조를 평가하는 문제는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

    력과 지켜야 할 윤리적 가치의 대립”의 문제가 된다(정두희,1992:

    84).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곧바로 이광수와 김동인의 소설을 쓰고

    있던 식민지 상황과 일치하며,이에 따라 이들의 역사소설들(『단종

    애사』,『대수양』,『세조대왕』)을 작가들의 자기 시대의 진단으

    로 파악하여 논의를 전개한다.그에 따르면 대립되는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였던 『단종애사』의 이광수와 『대수양』의 김동인 모두

    실상 세조를 제대로 비판하지는 못 했으며,이는 1940년대 이후 이

    광수마저 『세조대왕』을 통해 세조를 찬양함으로써 현실의 권력에

    무작정 순응하는 그릇된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친일로 기울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역사소설 쓰기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 있는 소수의 연구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특히

    6) 본고와 관련하여 최정용(1996)은 흥미롭게도 역사학계가 일반적으로 수양대군을 비판하

    고 사육신을 옹호하는 것이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부여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

    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 - 11 -

    그는 이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단종과 세조의 문제가 역사적 사실

    과 부합하는가를 따지는 실증성의 차원 외에 현실의 권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차원을 포함한다는 것을 지적했다.그러나 본고가

    보기에는 같은 식민지 시기라 하더라도 이광수와 김동인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의 차이를 세심하게 지적하지 못 했고,이에 따라 이 소

    설들이 조형해낸 세조와 단종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를 밝히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소설에 드러난 작가들의 인물 평가만

    을 근거로 이것을 곧바로 친일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것 또한 사

    태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 하는 것이다.

    3.이론적 자원

    선행연구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왕을 다룬 역사소설

    들이 왜 하필 그 시기에 왕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나타났

    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이 필요하다.이를 위해서는 먼

    저 식민지 시기가 정치적으로 현존했던 왕이 사라지고 문화적 재현

    공간에 왕에 대한 묘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독특한 시기에 나타

    날 수 있는 정치적 무의식의 매개로서의 역사소설이 가지는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그리고 이 역사소설이 다루고 있는 왕의 재

    현이 가지고 있는 집합기억으로서의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1)역사소설과 정치적 무의식

    역사소설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소

    설을 이해하는 준거의 원형인 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앞에서 검토했듯이 백낙청을 위시로 한 선구적인 역사

    소설연구자들은 루카치가 역사소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문학적

    구성요소로 강조한 ‘중간자’를 강조한 나머지 근대의 역사소설이 가

    지는 기능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 했다.루카치는 월터 스코트의 역

    사소설을 근대적 역사소설의 효시로 지목하면서 “월터 스코트의 예

  • - 12 -

    술은 이 시기의 본질적인 진보의 경향,즉 진보에 대한 역사적 옹호

    를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루카치,1987:71)”고 주장

    했다.루카치가 보기에 근대적 역사소설의 기능적 핵심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계몽주의 이념을 표현하

    는 것이다(루카치,1987:22~23).즉 역사소설은 “인간진보의 모순

    을 형상화했고,이 진보를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대하여 역

    사적인 수단들을 가지고서 옹호(루카치,1987:467)”해냈다.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루카치가 이해한 역사소설은 근대와 전통을 나누

    고,전통을 치밀하게 실재적(real)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근대의 도래

    가 불가피함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가 말하는 역사소설의 기능 수행은 무의식적인 것에

    가깝다.제임슨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랑스 후기/탈구조주의가 역

    사와 시간의 개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모든 서술형

    식을 공시성의 축으로 환원시킨다고 비판하면서(여홍상,1991:289),

    서술의 행위는 기의나 지시대상으로부터 분리된 “부유하는 기표”의

    “자유로운 유희”가 아니라 “현실”혹은 “역사”의 알레고리적 재현을

    통해 역사적 문제를 “상상”적으로 해결하려는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이며,이를 위해 서술자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소나 장르적 관행

    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사용하거나 변형하여 일종의 통합된 “초부

    호”혹은 “큰 서술”을 생산하려고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환언하자

    면 서술화의 행위에 있어 한 작가는 문화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속에서 역사의 모순을 “닫거나”“포함하려고”시도한다(여홍

    상,1991:290).

    이렇게 보면 문학은 무/의식적으로 루카치가 언급한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의 도래를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 이전부터

    혁명 이후의 근대적 질서를 구상하고 예감하기도 했다.헌트(1999)

    는 프랑스혁명을 아버지인 왕을 죽이고,형제들 간의 연대인 공화정

    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려고 했던 시도로 해석한다.즉 신경증 환자

  • - 13 -

    들의 환상인 가족로망스7)적인 집단적 무의식이 혁명기 정치의 밑바

    닥,즉 정치적 무의식으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정치

    적 무의식이 포착되는 중요한 예술적 장르 중 하나가 소설이다.혁

    명 이전의 소설들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갈등으로 인해 위기에 처

    한 가정들을 그리고 있었고,폭군인 아버지를 온화한 아버지로 변화

    시키거나,아버지 없는 세계의 결말을 탐색하고 있었다.8)프랑스 소

    설들은 이렇듯 혁명을 예감했을 뿐만 아니라,“1792-1794년 사이의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을 서술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공화국에 우

    호적이었던 작가들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 공화국적 덕성의 보

    루가 될 수 있음을 열심히 입증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헌트,1999:

    125).”

    이렇듯 왕정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질서로 공화정이 출현할 때

    작가들이 문학적 양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를 예감하고 정당화

    하는 것은 프랑스혁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Mcconville(2006)의 논

    의에서 보듯이 혁명 전 1776년 미국 혁명 이전에 지방 차원에서 영

    국 황실을 기념하는 축제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에 보듯이 미

    국은 왕정이었고,이것이 미국혁명을 계기로 해체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9).Downes(2002:45~50)에 따르면 공화주의 작가들은 혁명 전

    후로 전제정의 전횡이 미국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하

    기 시작했다.또한 그의 논의에 따르면 미국혁명을 계기로 왕정이

    해제되는 과정 중의 중요한 의식으로 미국인들이 당시 영국 왕이었

    7)프로이트는 가족로망스를 “이제 자신이 낮게 평가하게 된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대체

    적으로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고자 하는”신경증 환

    자들의 환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헌트 ,1999:9~10).

    8) “혁명이 출발하기도 전에 소설가들은 아버지가 없는 세계의 결말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린 헌트,1999:62).”

    9) 헌트(1999:106~108)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그녀는 미국혁명에서 나타난 미국의 자기

    인식 변화를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로 설명한다.미국은 혁명 이전에는 영국의 아이

    를 자처하며,영국이 폭군으로 굴지 말 것을 경고했고,혁명의 국면에서는 영국의 왕 조

    지 3세를 “비자연적인 아버지”라고 지칭했다.그리고 독립전쟁 동안 워싱턴이 정치적 아

    버지이자 국민들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1790년대에 이르면 미국의 혁명가

    들은 워싱턴을 매개로 지혜로서 자식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아버지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 - 14 -

    던 조지 3세의 모형을 처형하는 것이었다.미국인들은 왕을 “메타포

    적으로”살해하고,새로운 공화정의 질서를 모색한 것이다10).따라

    서 미국혁명에서 메타포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며,소설들 역시 이

    러한 메타포를 구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수 있다.식민지 조선의

    역사소설들 또한 루카치가 역사소설의 전범으로 말한 문학적 구성

    요소를 활용하지는 않았지만,전통적 질서와의 결별과 새로운 근대

    적 질서의 출현에 대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발언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특히 조선의 왕을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들은 미국혁명에서의 모의 모형 처형처럼 왕정과 관련된 모종

    의 문화적 의식(ritual)으로 기능했던 것은 아닐까?특히 식민지 조

    선이 일제의 검열을 극도로 의식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다는 점,정

    치적 발화가 자유롭지 못 했던 상황에서 소설을 위시로 한 문학이

    가졌던 위치,특히 어떤 방식으로든 지나간 과거를 다룰 수밖에 없

    는 역사소설의 특성 등이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하게 한다.

    (2)기억의 사회적 재구성

    본고는 세조와 단종의 이미지를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기억’이라는 용법은 ‘역사’와의 대립과 상호작용 속에서 등장

    했다.‘기억’과 ‘역사’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기억연구의 이론적 기반

    을 이루는 알박스에서도 발견된다.알박스는 니체가 기억을 삶과 관

    계된 것,역사를 삶과 거리가 먼 것으로 구분했던 것에서 더 나아간

    다.알박스는 ‘집단적 기억’이라는 용법을 통해 기억이 집단의 단결

    및 존속과 관계된 것이라는 태제를 제시한다(아스만,2012:175~

    177).11).

    10)아렌트(2004)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모두 군주정을 대체하는 질서를 모색하는 혁명으

    로 이해하지만,이 두 혁명이 대체하는 군주정의 차이를 강조한다.미국혁명이 영국의 제

    한적 군주제를 대체한 것임에 반해,프랑스혁명은 절대주의를 대체하는 것이었다.그래서

    아렌트가 보기엔 프랑스혁명이 절대군주의 왕좌에 인민을 앉혀 놓은데 반면,미국혁명은

    선거에 의한 독재를 경계하며 새로운 권위로의 모색으로 이어진다.

  • - 15 -

    그런데 기억이 집단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집단 또한 기억을 형

    성한다.대표적으로 Schwartz(1991)의 연구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미지가 1865년~1920년 사이 남북 전쟁을 거치면

    서 민주화(democratized)되었다고 지적한다.워싱턴은 1800~1865년

    사이에는 귀족적인 이미지 밖에 없었지만,1865년 이후 평범한 사람

    의 이미지가 추가됨에 따라 워싱턴을 둘러싼 두 가지 이미지가 경

    쟁하게 된다.1865년 이후의 워싱턴 이미지의 재편은 남북전쟁 이후

    의 평등주의적이고(egalitarian)산업화된 미국의 사회적 변화를 반

    영한 것이지만,귀족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잔존하는 것은 집합기억

    이 순수하게 유동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올릭(2011:145~198)또한 집합기억 연구가 4가지 해로운 가정 -

    단일성,모방의 직접성,실체성,독립성 -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단일성 가정은 집단기억이 끊임없는 갈등과 논쟁의 과정

    에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모방의 직접성 가정은 집단기억이 특정한

    매체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한다.실체성은 집단기억을

    물화함으로써,기존의 기억하는 방식이 이후의 기억하는 방식에 의

    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마지막으로 독립성 가정은 집단기억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배태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조선의 왕이 어떠한 이미지로 기억되는가를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위의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본고가 주목하

    는 단종과 세조가 경합하는 기억들임을 인지하는 동시에 이러한 경

    합이 당대의 사회적 구조를 반영하면서도 이전 시대의 기억 방식과

    도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11)이와 반대로 ‘역사적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

    또한 ‘집단적 기억’이 항상 복수로 존재한다면,‘역사적 기억’은 단수로 존재한다(아스만,

    2012:177).

  • - 16 -

    4.연구방법 및 자료

    (1)연구방법:담론분석

    앞서 설명했듯이 본고는 식민지시기 문학장에서 나타난 왕의 해석

    경쟁이 전통적인 기록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보고 있다.그리고 단종

    과 세조에 대한 대립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이 기록들을 기억투쟁의

    관점으로 보고,식민지시기 문학작품에서 나타난 세조와 단종의 해

    석을 이 기억투쟁의 계승이자 단절로 이해하려고 한다.이에 따라

    세조와 단종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가를 분석하기 위해서

    는 해당 기억들을 담지하고 있는 기록들과 문학작품들을 서사이자

    담론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취할 것이다.

    페어클럽(2011)은 언어학적인 서사분석이 너무 기호학적 방법론에

    치중해서 사회적 함의에 대한 분석이 약하고,푸코를 위시로 한 사

    회학적 담론분석들은 기호의 함의를 연구자의 자의에 맡기는 한계

    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 바 있다.그리고 보다 정치한 분석

    을 위해서는 담화를 둘러싼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

    안한다.각각의 층위는 텍스트(texts),상호작용(interactions),맥락

    (contexts)이며 이들 층위간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담론분석은 이

    세 개의 층위에 관한 다음의 서술들을 포함한다. (1) 기술

    (description)은 텍스트의 형식적 속성들을 밝히는 과정이며 (2)해석

    (interpretation)은 텍스트를 둘러싼 산출과 해석의 상호작용 관계를

    파악하는 과정이고 (3)설명(explanation)은 이러한 상호작용들이 사

    회적 맥락과 맺는 관계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2)연구자료

    단종과 세조가 식민지시기 역사소설에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

    현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광수의 『단종애사』는 단종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단종과 세조를 소설적 인물로 세밀하게 형상화

  • - 17 -

    한 최초의 식민지시기 역사소설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김동인의

    『대수양』은 『단종애사』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띠면서 『단종애

    사』가 다루었던 역사적 시기를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단종과 세조에 대한 다른 재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소설에서 나타난 단종과 세조의 이미지 재현의 대립

    은 식민지 시기 역사적 상황과 결합된 고유한 특징을 보여줌과 동

    시에 이전 시기의 대립을 계승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단종과 세

    조가 보여주는 대립적인 왕의 형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

    선시대의 기록물들에 나타난 단종과 세조의 해석을 살펴봐야 할 필

    요가 있다.이를 위해서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물인 실록과 이에 대

    항해 사림들이 생산한 역사기록물들의 총화인 이긍익의 『연려실기

    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그리고 『연리실기술』에 실린 기록 중

    에 남효온의 『육신전』과 권화가 편찬된 『장릉지』는 검토의 의

    의를 가지기에 여기서 따로 언급하고자 한다.각 기록물들의 서지

    사항은 아래와 같다.

    ① 『단종애사』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1928년 1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동아

    일보에는 1928년 11월에서 1929년 12월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연재 중과 후에 30여 편의 독후감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이 인기에 힘입어 1930년에 10월 동서관

    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기도 하였다.본고에서는 1995년 일신서적출

    판사에서 나온 『단종애사 Ⅰ』『단종애사 Ⅱ』를 인용했고,동아일

    보에 1929년~1930년에 연재되었던 본도 참고하였다.

    ② 『대수양』

    『대수양』은 김동인이 1941년 3월부터 그 해 12월에 걸쳐 ‘조광

    (朝光)’지의 64~73호에 걸쳐 연재한 작품이다.이후 1943년에 남창

  • - 18 -

    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본고에서는 1987년 김동인전집의

    12권으로 출판된 조선일보사 판 『대수양․서라벌』을 인용했다.

    ③ 단종실록 및 세조실록

    『단종실록』의 원래 이름은 『노산군일기』였으나,숙종 때 그가

    단종으로 추존된 이후 『단종대왕실록』이라고 하였다.단종의 즉위

    와 선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다른 실록과 달리 편찬 연월일과

    편찬자들의 성명․직위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단종이 살해된

    세조 3년(1457)10월 이후에 세조의 제위 시 편찬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세조실록』은 세조가 승하한 다음 예종 원년(14《세조실

    록》은 세조가 승하한 다음해,즉 예종(睿宗)원년(1469)4월 1일(갑

    인)에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최항(崔恒)을 감춘추관사

    (監春秋館事),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를 지춘추관사(知春秋館

    事), 이승소(李承召)·김수령(金壽寧)·정난종(鄭蘭宗)·이영은(李永垠)·

    이극돈(李克墩)·예승석(芮承錫)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

    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다(이상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홈페이지를

    인용). 본고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를 인용하였다.

    ④ 『연려실기술』

    이긍익은 1736년(영조 12년)에 출생하여 1806년(순조 6년)에 사망

    한 학자다.소론이었던 할아버지가 역모에 몰려 그의 아버지와 마찬

    가지로 그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매진하였다.그는 조선 개국

    이래 당시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 야사들을 모아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연려실기술』을 편찬하였다.이후 여러 가지 종류의 전

    사본들이 내려왔고,지금까지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판본은 최

    남선 주도의 광문회 인본과 일본인 주관의 조선고서간행회 인본이

  • - 19 -

    다(이병도,1982:3~5).본고에서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이 두 본을

    주로 참조하여 국역한 1982년 수정판인 『국역 연려실기술 Ⅰ』을

    인용했다.

    ⑤ 『육신전』

    『육신전』은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에 실린 기록으로 단종복

    위운동 추진과정과 그것이 세조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받고 처형된

    내용을 중심으로 사육신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 기록물은 최초

    로 단종복위운동의 주도자들을 사육신으로 지칭하고,이후의 단종

    및 사육신 복권운동이 진행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추강집』은

    1510년본,1577년본,1677년본,1921년본 등이 존재하며,이 중 1510

    년본은 유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김성언,2009:1~18).본고에서는

    박대현이 편찬한 남효온(2009)을 인용하였다.

    ⑥ 『장릉지』

    『장릉지』는 『연려실기술』에 수집되어 있는 기록물 중의 하나

    로 영월부사였던 윤순거가 노산군에 대한 기록을 모아 『노릉록』

    으로 정리했던 것을,단종이 복위된 이후 권화가 이를 고증하고,단

    종이 복위된 사실과 육신이 복관된 전말을 속지로 편찬하여 합쳐

    간행한 기록물이다.이후 이 기록물은 정조가 단종복위사건 때 사사

    된 230명을 장릉에 배향할 때 참고가가 된 기록물이었다(세종대왕기

    념사업회,1979:16~18).인용은 『국역 연려실기술 Ⅰ』에 수록된

    부분을 인용하였다.

    Ⅱ.전통적 기억의 대립과 권력투쟁

    식민지시기 형성된 단종과 세조의 이미지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

    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의 질료를 구성하는 동시에 전사를 이루는

    조선시대에 형성된 이 두 왕의 이미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조선

  • - 20 -

    시대 동안 만들어지고 유통된 단종과 세조에 대한 서사들은 아스만

    이 언급한 전통적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아스만(2011:100~112)이 지적한대로 전통적 기억은 민족적 기억

    과는 구별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전통적 기억도 근대적 민족

    기억과 달리 특수한 계층만을 수신자로 가지며,이들의 정체성 확립

    에 기여한다.그러나 근대적 민족 기억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기억

    또한 가치들을 중개하고,그 가치에서 정체성의 특성과 행동 규범

    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따라서 전통적 기억 또한 분열

    적일 수 있고,하나의 대상을 둘러싼 다양한 기억들이 경합하는 장

    을 구성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종과 세조를 둘러싼 기억들을 구성하는 서사들도 각기

    특정 정치적 국면에서 어떤 정치적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가

    에 따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갈리고,서로 다른 가치들을 강조하

    기도 하며,상대편 서사의 진실성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과 반박의

    양상을 띨 수 있다.또한 한 서사를 진실로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서사 혹은 그 서사에서 묘사된 인물들이 표현하는 가치에 대한

    해석도 정치집단이나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이러한 관점 하

    에서 이하에서는 단종 사후 조선에서 나타났던 단종과 세조에 관한

    서사를 정치적 국면과 정치적 집단 간의 관계 속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1.국가적 공식기억의 확립:「단종실록」과 「세조실록」

    실록은 단종과 세조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자 공식적인 국가기억으로서 가치를 가진다.또한,다음 절에

    서 다룰 사림들의 서사들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실록의 사건 서

    술과 인물 평가에 도전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따라서 이 절에서

    는 공식기억과 대항기억으로 균열되는 지점이자 대항기억을 형성했

    던 이후의 서사물들이 반박하려고 했던 부분들,즉 세조 즉위의 정

  • - 21 -

    당성 여부를 중심으로 실록의 기록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사건은 세조가 의정

    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인 계유정난,그리고 그 이후에 벌

    어진 단종의 양위이다.계유정난의 경우,이후의 텍스트들이 문제

    삼고 있는 첫 번째 지점은 이것이 명칭 그대로 난을 진압한 것인가

    의 문제이다.실록의 기록은 난의 주동자로 황보인,김종서,안평대

    군을 지적하고,이들이 오랫동안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단종 즉위년 세조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이미

    황보인,김종서,안평대군의 난을 우려하고 있었고(1452년 윤 9월 22

    일 기사),계유정난이 일어나던 해 3월에 한명회는 세조를 처음 만

    난 자리에서 안평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허후 등과 자주 술자

    리를 벌이며 접촉하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1453년 3월 21일 기

    사).

    단종 1년(1453년)9월 25일(무인)1번째 기사가 난(亂)을 실체화

    하고 있다.이 기사에 따르면 권람의 하인이 황보인의 하인과의 대

    화를 통해 황보인,김종서,안평대군의 반란 일시,반란 시의 군사

    운용 및 병기운반 계획 등의 상세한 내용을 입수했음을 밝히고 있

    다.이 기사는 또한 난을 왕에게 보고하여 진압하지 않고,독자적인

    세력을 세조가 이것을 바로 왕에게 보고하지 못 하게 된 경위를 아

    래의 세조의 언급을 통해 밝히고 있다.세조에 따르면,왕에게 보고

    하는 것이 절차적 정당성을 가장 높게 갖추는 것이지만,반란세력과

    내통하고 있는 환관인 김연과 한숭 때문에 이 절차를 따를 경우,난

    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따라서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에 흠집이 생기더라도,상황에 맞는 최

    선의 수단으로 자신이 직접 난을 진압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것이

    다.

    “이제 곧 계청하여 주살(誅殺)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나,김

  • - 22 -

    연(金衍)과 한숭(韓崧)이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있으니,내가

    비록 밀계(密啓)하더라도 저들이 반드시 먼저 알 것이다.만약

    먼저 알면 우리 붙이의 목숨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으나,

    기밀(機密)의 일이 한 번 누설되면 화(禍)가 곧 따라 일어날

    것이니,도리어 재촉하는 것이다.무릇 천하의 일은 상경(常

    經)과 권도(權道)가 있는데 어찌 하나만 굳게 지키고 통하지

    못하여 일의 기회를 잃을 것인가?변통하여 중(中)을 얻는 것

    이 곧 상경(常經)이니,의(義)가 마땅히 먼저 발(發)하고 난 뒤

    에 계문(啓聞)할 것이다.”

    단종 1년(1453년)9월 25일(무인)1번째 기사

    마침내 10월 10일,세조는 자신의 휘하들을 이끌고 직접 김종서를

    꾀어내어 살해한 뒤,입직승지 최항과 환관 전균에게 사정을 알린

    다.아래의 언급은 세조가 환관 전균에게 말한 내용이다.세조는 미

    리 왕에게 알리지 않고 행동을 결단한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왕이 놀라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왕이 어리다는 점이 반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 또한

    밝히고 있다.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세조가 말한 내용-인용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히 여기어 널리 당

    원(黨援)을 심어 놓고,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

    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

    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지금 부득이하여 예전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의 일을 본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

    를 잡아 죽였으나,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

    기를 청하는 것이다.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 - 23 -

    하고,또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기운을 돌리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천천히 아

    뢰고 경동할 것이 아니다(단종 8년(1월)10월 10일(계사)1번

    째 기사).”

    실록에 의하면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계유정난의 정당성은 사후적

    으로 왕과 대중들에 의해 인정받았다.단종은 “군국(軍國)의 중한 일

    을 모두 세조에게 위임하여 총치(摠治)하게 하고,삼군 진무(三軍鎭

    撫)한 사람에게 명하여 군사 1백 40인을 거느리고 따르게”함으로써

    수양의 행위를 지지해주었다.그리고 아래의 반응에서 보듯이 백성

    들은 살해된 대신들의 시체를 모욕하고 위해를 가함으로써 열렬하

    고도 잔혹하게 정난을 지지했다.결국 실록에 따르면 계유정난은 최

    상의 절차를 불가피하게 따르지는 못 했지만,상황의 제약을 고려했

    을 때,수단의 정당성을 갖추었고,왕과 대중들에 의해 그 정당성을

    추인 받을 수 있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

    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

    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단종 1년(1453년)10월 10일(계사)1번째

    기사).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영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다.금성대군의

    두 번째 역모 시도가 전해지고,이 사건에 단종의 매부인 정종,단

    종의 친모 역할을 대신했었던 혜빈,혜빈의 측근인 상궁 박씨 등이

    연루되자,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단종이 내린 선

  • - 24 -

    위교서는 세조에게 이루어진 양위의 정당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제

    시한다.하나는 단종 스스로가 너무 어리고,궁에 고립되어 국사를

    처리할 능력이 없으며,특히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건들이 연속

    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자신으로서는 국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다른 하나는 자신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자신을 대신

    하여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일소해왔으며,그 능력과 성품 등으

    로 보건대,이러한 위기상황에서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나 소자(小子)가 방가(邦家)의 부조(不造)하지 못할 때를 당하

    여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고 궁중 안에 깊이 거처

    하고 있으므로 내외의 모든 사무를 알 도리가 없으니,흉한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켜 국가의 많은 사고를 유발하였다.숙

    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나의 몸을 도

    우시면서 수많은 흉도(兇徒)를 능히 숙청하고 어려움을 크게

    건지시었다.그러나 아직도 흉한 무리들이 다 진멸(殄滅)되지

    않아서 변고가 이내 계속되고 있으니,이 큰 어려움을 당하여

    내 과덕한 몸으로는 이를 능히 진정할 바가 아닌지라,종묘(宗

    廟)와 사직(社稷)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

    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天命)과 인심의 귀의(歸

    依)하는 바가 되었다.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아!종친(宗親)과 문무의

    백관,그리고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우리 숙부를 도와 조종

    (祖宗)의 아름다운 유명(遺命)에 보답하여 뭇사람에게 이를 선

    양할지어다(세조 1년(1455년)윤6월 11일(을묘)1번째 기사).

    이후의 사림들의 서사가 도전하는 실록의 주요한 핵심 중에 하나

  • - 25 -

    는 세조 및 그 수하들이 단종의 폐위 및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점

    이다.실록은 단종의 죽음의 책임은 단종 본인에게 있다는 점을 강

    조한다.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폐위하게 된 직접적인 방아쇠

    는 사육신들의 복위 운동을 승인했던 일과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와

    권완이 벌인 역모사건 때문이다.실록에 따르면 성삼문 등의 사육신

    이 별운검을 통해 세조와 세자를 살해하려던 계획했으나,이 계획이

    한명회의 계책에 따라 틀어지고,김질의 고변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다.성삼문은 역모를 인정하고,자신들의 동조자들을 모두 밝

    힌다.그리고 자신들이 상왕의 승인과 지지 하에 역모를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좌승지(左承旨)구치관(具致寬)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에

    가서 성삼문(成三問)등에게 묻기를,

    “상왕(上王)께서도 역시 너희들의 역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는

    가?”

    하니,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알고 있다.권자신(權自愼)이 그 어미에게 고(告)하여 상왕께

    알렸고,뒤에 권자신·윤영손(尹令孫)등이 여러 번 약속을 올

    리고 기일을 고하였으며,그날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

    궁(昌德宮)에 나아가니,상왕께서 긴 칼을 내려 주셨다.”

    하였다.구치관이 또 권자신에게 물으니,권자신의 대답도 성

    삼문과 같았다(세조 2년 (1456년)6월 7일(을사)1번째 기사).

    그래서 조정의 공론은 단종을 폐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것은 세조이다.그러나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와

    권완이 벌인 역모사건이 벌어지자,세조는 가족의 의리를 다하는 것

    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보장하는 공적인 문제가 우선함을 근거로 상

    왕을 노산군으로 어쩔 수 없이 강등한다.그러나 노산군에 대한 대

  • - 26 -

    접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주문함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전날 성삼문(成三問)등이 말하기를,상왕(上王)도 그 모의(謀

    議)에 참여하였다.’하였으므로,종친과 백관들이 합사(合辭)하

    여 말하기를,‘상왕(上王)도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편안

    히 서울에 거주(居住)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하고,여

    러 달 동안 청하여 마지 않았으나,내가 진실로 윤허(允許)하

    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지금에 이

    르기까지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亂)

    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

    (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命)과 종사(宗社)

    의 중(重)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복(降

    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목숨을 보존하여서 나

    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오로지 너희 의정부에서 중

    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세조 2년(1456년),6월 7일 1번째

    기사).

    실록은 또한 세조에게 단종의 죽음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으며,

    단종의 죽음 이후의 처리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강조하

    고 있다.노산군으로 강등으로 유배된 이후 금성대군과 송현수의 단

    종 복위시도가 다시 발각된다.세조는 양녕대군 등의 종친과 신하들

    의 노산군을 사사하자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오는 등 정치적 압박

    을 받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노산군을 지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노산군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세조는 장례를 치

    러 주었다.

  • - 27 -

    임금이 이르기를,

    “불가하다.옛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협

    박에 못 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하였고,또 성인(聖

    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

    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고,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다시 영(瓔)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이를 윤허하였다.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 3년

    10월 21일(신해)2번째 기사).

    지금까지 분석한 실록의 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실록은 결

    국 수양대군이 국가의 위기가 닥친 비상 상황에서 불가피한 방법에

    따라 계유정난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우고,이를 사후에 왕과 백성

    들에게 인정받아 권력을 얻고 이후에도 여러 혼란을 진압하는 영웅

    이 되는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다.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빈번한

    시도들의 재발 속에서 단종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단종 스스로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영웅인 수양대군에

    게 왕위를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세조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유배 보내야 했고,정치적 역경

    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단종의 죽음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 했으나,

    불행히 단종이 자살해버린 것이다.

    2.대항기억의 도전:사육신의 탄생과 단종의 죽음 재해석하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림들의 서사는 실록의 서사를 반박하는 형태

    로 등장한다.사림들은 세조의 공신들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자신들

    의 정체화했으며(identify),이러한 정체성 형성의 주요한 자원 중에

  • - 28 -

    하나가 세조를 재평가하고,단종복위운동의 주체들의 정당성을 복원

    하는 서사들이었다.이 장에서는 사림들의 많은 서사들이 핵심이 사

    육신 만들기와 세조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보고,그 점을 중심으로

    이 서사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① 사육신의 탄생

    국가의 공식적 기억에 대한 최초의 대항기억의 서사화는 남효온의

    「육신전」에서 발견된다.남효온은 단종 어머니의 묘 복원 문제를

    제기했다가,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발언하지 못 하게 된 인물이다.

    남효온은 성삼문 등을 육신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들을 충의 기호로

    격상시키고,세조 즉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텍스트는 육신들의 행위가 노산군을 핑계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데 많은 부분들이 할애되어

    있다.여섯 인물들 중 복원운동이 발각된 직후 자살한 유성원을 제

    외하면,살아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이 고문에도 낯빛을 바꾸지 않

    고,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임을 주장했다.이들 중 박팽년과 성

    삼문은 세조의 녹을 먹고도 세조의 비난에 대해,세조를 왕으로 칭

    한 적이 없다고 맞서거나,세조에게 받은 녹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는 것을 근거로 자신들의 행위가 모순적인 것이 아님을 강변한다.

    그들 주장의 핵심은 자신의 임금은 노산군을 위해 충성을 다한 일

    관적인 행위이다.

    아래의 세조와 성삼문의 대화에서 세조와 육신(성삼문)의 입장차

    이가 분명히 부각되는 한편,작중 성삼문의 입을 빌린 남효온의 세

    조 비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세조 스스로가 권력을 장악한 명분

    으로 내세운 '주공'의 사례를 세조의 행위에 적용하면서 세조가 왕

    이 된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은 하늘의

    두 개의 해가 뜬 것과 같이 자연스럽지 못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 - 29 -

    세조가 친히 국문하여 꾸짖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

    반하였는가?"하니,성삼문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

    위시키려 했을 분입니다.천하에 그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

    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제 마음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

    는 바이거늘 어찌 배반이라고 하십니까.나리는 평소에 걸핏

    하면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에게 또한 이런 일이 있었

    습니까.삼문이 이렇게 한 것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

    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남효온,2007:263)."

    육신들이 지적한 가장 큰 부당함은 세조가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것이지만,계유정난 직후 육신들의 행동을 통해

    계유정난 역시도 정당한 과정은 아님이 드러난다.성삼문은 정난공

    신의 칭호를 "부끄럽게 여겼고,여러 공신들이 번갈아 가며 연회를

    베풀었으나 홀로 베풀지 않았다(남효온,2007:262)."하위지는 "세조

    가 영의정이 되자,조복을 모두 팔고 전 사간으로서 선산에 물러가

    살았다(남효온,2007:267)."또한,「육신전」과 같이 수록된 「허후

    전」은 계유정난에서 죽은 황보인을 옹호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허후를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고와 관련하여 이 텍스트에서 눈여겨 볼만한 특징은 노산군의

    행위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세조의 행위만 존재한다는 점이다.그

    리고 여기서 세조는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물로 등

    장한다.의연하고 침착하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육신들과 달

    리,세조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

    한다.그는 다만 분노하여 "발을 구르고","매우 노하여 무사로 하여

    금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하는 등 폭력만으로 그들을 누

    르려는 모습을 보여준다(남효온,2007:263).

    이러한 묘사 속에서도 서술자는 세조가 신하로서 큰 공훈을 세우

  • - 30 -

    고,왕으로서도 높은 덕을 쌓았으니,육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평가하기는 한다.그러나 이러한 표명에도 불

    구하고 이전의 서술들을 통해 계유정난의 부당함과 세조의 왕위 즉

    위가 정당성을 갖추지 못 했다는 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성대하도다 혜장대왕(세조의 시호)이여.영의정으로 황각에 있

    을 때에는 그 공훈이 주공에 비견되고 왕위에 올라서는 그 덕

    이 순 임금과 같으셨기에 높고 크며 넓고 원대한 덕을 무엇이

    라 형용할 수 없었으니,육신이 복장하지 않은 것이 무슨 허

    물이 있겠는가.백이가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으나 주

    나라 무왕의 덕이 실추되지 않았고,엄광이 동강에서 낚시질

    했으나 한나라 광무제의 공이 손상되지 않은 것과 같다(남효

    온,2007:271).

    ② 단종의 죽음 재해석하기

    사림들이 생산한 텍스트는 단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시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한다.먼저 다수의 텍스트들은 단

    종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것임을 주장한다.『연려실기

    술』에 수록된 “음애일기(陰崖日記)”가 대표적인데,음애일기는 실록

    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사기에 말하기를,‘노산이 영월에 있어서 금성군의 실패함을

    듣고,자진하였다’하였는데,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놈

    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도대체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종용하던 자들이다.계유

    실록이라는 것에 대개는 이런 것이 많다(이긍익 편저,1982:

    409).

  • - 31 -

    음애일기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들은 노산군 사후의 장례도 제대로

    치러 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병자록은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가

    망설이는 사이,노산군 밑의 통인 하나가 자청하여 "활줄에 긴 노끈

    을 이어서,앉은 뒤의 창구멍으로 그 끈을 잡아당겨"교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이후 단종이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으며,후환이 두

    려워 그 누구도 수습하지 못 했다.

    영남야언과 병자록은 노산의 장례는 끝내 왕실 차원에서 치러지지

    않고,호장 엄홍도가 백성들을 동원해 장례를 지냈다고 밝히고 있

    다."이 때 홍동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홍도가 말하기를,"옳은 일을 하고도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하였다."는 구절은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루는 일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는가를 드러

    내주고 있다.

    아성잡설과 축수록은 강에 던져진 노산의 시신을 한 아전이 노모

    를 위해 준비해둔 관을 이용하여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밝히고

    있다.또한 다른 기록에 따르면 장례뿐만 아니라 이후의 제사도 제

    대로 치러지지 않았다.음애일기는 제사가 마을사람들에 의해 치러

    졌으며,이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정인지를 위시로 한 정난공신들을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읍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

    사지내고 길흉․화복에 이르러서도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

    지내었다.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하기를,"정인지 간적놈들에게

    핍박되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슬프다,자고로 충신․의사가 반드시 대가

    세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중략)촌부녀자나 동네 아이들

    까지도 군신의 의리도 알지 못하고 눈으로 흉한 변고의 일도

    보지 못하였건만,지금까지 불평하여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 - 32 -

    전하는 것(후략)(이긍익 편저,1982:409).

    이상의 기록들에 내포된 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실록이 전

    하는 바와 달리,노산군의 죽음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벌어진 타살

    이며,세조와 그 권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이 기록들에 따르면

    세조와 권신들은 후일 노산군을 타살하고,그의 장례와 제사조차 제

    대로 치루어지 않았고,오히려 마을 사람들이나 하급 관리들이 눈치

    를 보며 그에 대한 장례를 치렀을 만큼,단종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핍박했다.결국 이러한 비난을 통해 단종은 무고한 희생자가 되고,

    그의 죽음을 예로서 갖춘 사람들은 의로운 인물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3.기억을 통한 권력투쟁의 전개:복권운동의 전개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한 이후 세조는 종친과 외가인 심씨,처

    가인 윤씨 인사들을 중용하였고,정난의 공신이었던 정인지와 한명

    회와 사돈관계를 맺는 등 훈척 및 공신 위주의 정치를 확립했다.이

    들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치는 16세기 이후 사림정치 때

    까지 이어진다.이에 대항했던 사림들은 한산 이씨,문화 유씨 등

    사육신이었던 이개와 유성원과 통혼으로 연결되었던 가문의 인사들

    이 사림에 핵심이 된 인물들과 결합하고,성삼문을 절의의 모범으로

    삼으면서 형성된다(김경수,2006).

    그러나 사안의 파급력과 민감성 때문인지 단종 문제는 직접적으로

    정계에 제기되지 못 한다.세조 사후 단종의 친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복원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된다.특히 남효온은 당시의 정치

    개혁을 주장하면서 소릉 복원을 상소를 통해 제기했고,이것이 문제

    가 되어 정치적 진입이 막힌다.문종을 명분으로 죽은 노산군의 어

    머니 문제를 꺼내는 방식으로 사림들은 권신들의 권력 정당성에 균

    열을 내려했던 것이다.이 당시 왕이었던 중종은 이를 곧 자신의 정

  • - 33 -

    통성의 문제로 이해했고,이 문제를 검토할 뿐,쉽게 결정을 내리지

    는 못 한다.

    이후 세조 즉위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은 이후 연산군 때의 사화

    를 통해 다시 부각된다.사초에 포함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의

    제를 세조에 빗대어 세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글로 몰렸다.김종직

    은 남효온의 스승이었으며,살해된 김일손은 이전에 소릉복원 문제

    를 제기했던 만큼,이들의 죽음은 당대의 정권이 부정한 피 위에 서

    있는 정권을 주장하려 했던 사람들의 시도를 권신과 왕이 강하게

    진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의 과정에서 위에서 분석한 서사들은 이후의 중앙정치에서의

    단종 및 사육신 복원 운동,사림들의 도전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그 도전들의 산물이기도 하다.우선 남효온의 『추강집』은

    1510년에 이미 문집으로 간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경상도의 사

    림들에게 널리 읽히면서,사림들이 사육신 복원 운동을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으로 보인다.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난 이후,이들은 선조에게 남효온

    의 「육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그들이 「육신전」을 권하는 핵

    심은 성삼문이 충신 중의 충신이라는 것이다.이들이 단종보다 먼저

    사육신의 복원을 먼저 주장하는 것에서 사림들의 기억하고 기념하

    려는 핵심이 사육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선조는 「육신전」을 읽고 나서 사림들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선조는 『육신전』이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있어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부터 공격한다.그리고 이어지는 선조의

    반박의 핵심은 사육신이 충신이 아니라는 것이다.사육신이 충신이

    라면 단종이 선위했을 때 관직을 버렸어야하며,관직을 유지하고 새

    로운 왕을 섬긴 마당에 왕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출세를 도

    모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