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한 중년 남성 ‘아재’와 ‘꼰대’ 사이 · 방송...

5
‘아재’ 전성시대가 오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환영처럼 어른거리기만 하던 ‘남성’과 ‘아버지’를 대중문화가 적 극적으로 소환한 시기였다. IMF 사태로 어수선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실직자가 양산되면 서 남성/아버지는 동정과 격려의 대상이 됐다. 광고는 “아빠 힘내세요~”와 “원더풀 원더풀 아빠 의 청춘~”을 노래했고, 남성 버디 영화 <친구>가 800만 관객을 모았다. 선 굵은 남성 지도자가 등장해 난세를 헤쳐나가는 드라마 <허준>(MBC)과 <태조 왕건>(KBS)이 시청률 1위에 오른 시 기도 이즈음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20세기 끝자락까지 예능 프로그램에는 ‘남성’이나 ‘아버지’가 보 이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고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교양과 이성을 대변 했다. 가부장적 질서 속 ‘남자 어른’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교양-오락의 혼종 프로그램 이 강세를 보인 1990년대에는 중년 전문가 남성들 1 이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곤 했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제외한다면, 예능 속 남성은 전형적인 ‘신사’나 ‘아저씨’의 이미지 2 에서 벗어난 적이 없 다고 볼 수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한 중년 남성 ‘아재’와 ‘꼰대’ 사이 3년 전 4월, <진짜 사나이>(MBC)가 방영을 시작했다. 유약한 연예인들이 ‘남자다운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시청률도 높았다. 비슷한 시기 방영되던 <정글의 법칙>(SBS)은 병영 대신 야생의 남성을 다뤘다. 도심이지만 야생과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버텨야 하는 남성들을 다룬 <인간의 조건>(KBS)도, 낯설고 말 안 통하는 이국 땅에서 좌충우돌하는 노인들을 다룬 <꽃보다 할배>(tvN)도 모두 ‘생존하는 남성들’을 다뤘다. 이 안의 남성들은 건강한 능력자가 아니었다. 대부분 어리숙하고 군기도 빠진, 그저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아저씨’였다. 윤태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양치는 늑대 소년들의 아재목장>(출처: MBN 홈페이지) 1 <호기심 천국>(SBS)의 황수관,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양심냉장고’ 코너의 민용태 등이 그 예다. 작가 김홍신은 토 크쇼 <부부만세>(MBC)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2 한국 토크쇼의 초기 역사를 훑어보면, 진행자들이 대개 개그맨인데도 불구하고 서구적 이미지(자니 윤)나 신사(주병 진) 혹은 옆집 아저씨(이홍렬)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시끌벅적한 집단 토크쇼와는 결이 전혀 다르다.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2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BROADCASTING TREND & INSIGHT

Upload: others

Post on 06-Sep-2019

2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아재’ 전성시대가 오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환영처럼 어른거리기만 하던 ‘남성’과 ‘아버지’를 대중문화가 적

극적으로 소환한 시기였다. IMF 사태로 어수선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실직자가 양산되면

서 남성/아버지는 동정과 격려의 대상이 됐다. 광고는 “아빠 힘내세요~”와 “원더풀 원더풀 아빠

의 청춘~”을 노래했고, 남성 버디 영화 <친구>가 800만 관객을 모았다. 선 굵은 남성 지도자가

등장해 난세를 헤쳐나가는 드라마 <허준>(MBC)과 <태조 왕건>(KBS)이 시청률 1위에 오른 시

기도 이즈음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20세기 끝자락까지 예능 프로그램에는 ‘남성’이나 ‘아버지’가 보

이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고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교양과 이성을 대변

했다. 가부장적 질서 속 ‘남자 어른’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교양-오락의 혼종 프로그램

이 강세를 보인 1990년대에는 중년 전문가 남성들1이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곤 했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제외한다면, 예능 속 남성은 전형적인 ‘신사’나 ‘아저씨’의 이미지2에서 벗어난 적이 없

다고 볼 수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한 중년 남성

‘아재’와 ‘꼰대’ 사이 3년 전 4월, <진짜 사나이>(MBC)가 방영을 시작했다.

유약한 연예인들이 ‘남자다운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시청률도 높았다. 비슷한 시기 방영되던

<정글의 법칙>(SBS)은 병영 대신 야생의 남성을 다뤘다.

도심이지만 야생과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버텨야 하는 남성들을 다룬

<인간의 조건>(KBS)도, 낯설고 말 안 통하는 이국 땅에서 좌충우돌하는

노인들을 다룬 <꽃보다 할배>(tvN)도 모두 ‘생존하는 남성들’을 다뤘다.

이 안의 남성들은 건강한 능력자가 아니었다.

대부분 어리숙하고 군기도 빠진,

그저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아저씨’였다.

윤태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양치는 늑대 소년들의 아재목장>(출처: MBN 홈페이지)

1 <호기심 천국>(SBS)의 황수관,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양심냉장고’ 코너의 민용태 등이 그 예다. 작가 김홍신은 토

크쇼 <부부만세>(MBC)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2 한국 토크쇼의 초기 역사를 훑어보면, 진행자들이 대개 개그맨인데도 불구하고 서구적 이미지(자니 윤)나 신사(주병

진) 혹은 옆집 아저씨(이홍렬)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시끌벅적한 집단 토크쇼와는 결이 전혀

다르다.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2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BROADCASTING TREND & INSIGHT

현재로 돌아와 2016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자. 과거에 비해 다양한 남성이 등장하

지만 가장 눈에 띄는 유형은 ‘부드러운’ 남성이다. 왜소하고 나약한, 그래서 응원이 필요한 남성과

는 다르다. 가부장적 아버지 상도 아니다. ‘말이 통하는’ 남성, 즉 권위는 없지만 존경은 받는 친구

같은 존재다. 아이를 돌보고, 요리를 하며, 브로맨스3를 이룬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 진행자나 출연자가 마흔을 넘긴 중·장년 연예인이라는 점

이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어언 40대 중반을 넘겼고, 김구라와 신동엽, 김제동도 모두 40대다. 비

교적 최근 등장한 서장훈과 안정환도 40대고, 그나마 제일 어린 전현무도 ‘한국 나이’로 마흔이다.

부드러운 중·장년 남성들이 텔레비전 예능계를 점령한 셈인데, 혹자는 이를 ‘아재’ 전성시대라 칭

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단어인 ‘아재’는 2016년 대중문화의 가장 뜨거운 용어가 됐다. 아예 제목

에 ‘아재’를 붙인 예능 프로그램4도 생겼다.

그들은 정말 귀여울까

올해 대중문화의 키워드로서 ‘아재’는 “아저씨의 낮춤말”이라는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누

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이 통하는’, ‘친근한’, ‘귀여운’, ‘소통하는’ 중년 남성을 지

칭하는 단어가 되었고, 이는 SNS와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실없는 말장난인 ‘아재 개그’,

매력적인 중년을 뜻하는 ‘아재 파탈’ 등의 파생어도 생겼다.

3 형제(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조합한 신조어로, 남자와 남자 간의 애정을 뜻한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개입되곤 하

지만 동성애보다는 우정에 가까운 관계를 의미하고,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전형적인 캐릭터 관계로 구조화하는 경우가 많

다. 예능 프로그램 중 <삼시세끼 어촌 편>(tvN)의 차승원-유해진 관계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차-유 커플은 지나치게 성

(性) 역할(차승원의 엄마 역할과 유해진의 아빠 역할)이 강조됨으로써 오히려 브로맨스로 보이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김

미선·이가영(2016). ‘미디어 재현에 나타난 남성성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정치학’, <미디어, 젠더 & 문화>, 31(3) 참조).

4 11월 9일 방송을 시작한 <양치는 늑대 소년들의 아재목장>(MBN).

<삼시세끼 어촌 편2>(출처: tvN 홈페이지)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3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BROADCASTING TREND & INSIGHT

예능 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 <냉장고를 부탁해>(JTBC), <삼시세끼>(tvN)

등이 아재 개념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에 방영을 시작한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

다>(JTBC), <다시 쓰는 육아일기-미운 우리 새끼>(SBS), <인생술집>(tvN) 등도 ‘아재 프로’로 분

류된다.

아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올해 봄이다. 2015년 12월 한 달 동안 아재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고작 112건에 불과했지만, 2016년 1월에는 244건으로 늘었다. 그리고

5월에는 1,000건을, 7월에는 2,000건을 넘겼다. 2016년 여름 한국 언론은 아재가 들어간 기사

를 하루에 70편 정도 생산한 셈이다. 하지만 이 경향이 오랫동안 강하게 지속하지는 않은 듯하다.

9월부터 기사 건수는 급격하게 줄더니, 12월 기준 하루 평균 30건 정도의 기사가 아재를 언급하

는 정도다.

기사 건수로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아재 열풍은 급격하게 타올랐다가 꽤 빠른 속도로

식어가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한국 시청자들이 갑자기 ‘귀여운’ 중년 남성들의 매력에 빠졌다가

벌써 정을 떼기 시작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잘나가고 있고, 계속 만들

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프로그램은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 아재라는 신조어 자체가 잠시

의 열풍에서 자가발전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재 프로그램들을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가 구축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쓰는 육아일기-미운 우리 새끼>의 김건모와 박수홍 등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싱글 남

성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어머니들은 결혼 안 한 아들을 ‘미완성’ 인간으로 간주한

다. “결혼을 해야 해”라는 말을 반복하고, 미래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을 정도로 젊어야” 하며 “냉

장고를 청소해줄” 사람이어야 한다. 전통적 성(性) 관념과 가부장제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포

장되고, 그 포장지 위에 ‘아재’라는 리본을 단다.

그런 의미에서, 이 프로그램 속 남성상은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XTM)의 수구적 남성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5 ‘철들지 않은’ 남성과 그 남성의 조력자 또는 경쟁자가 병치된다는 점에서 그

올해 대중문화의 키워드로서

‘아재’는 “아저씨의 낮춤말”이라는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이 통하는’,

‘친근한’, ‘귀여운’, ‘소통하는’

중년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고, 이는 SNS와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5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의 서사 구조는 지극히 성 대결적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미디어 오늘> 기사 (2016. 1. 3.) 참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6861).

<다시 쓰는 육아일기-미운 우리 새끼>(출처: SBS 홈페이지)와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출처: XTM 홈페이지)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4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BROADCASTING TREND & INSIGHT

렇다. <어쩌다 어른>(O tvN)의 초기 포맷에서도 드러나듯, ‘철없는 중년’이 ‘귀엽고 부드러운 아

재’로 명명됐을 뿐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가장 평균적인 중년 남성을 재현하는 프로그램은 <아는 형님>(JTBC)이

다. 강호동과 이수근, 김희철 등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한다. 거침이 없다. 여성

게스트에게 선정적 농담을 하고 애교를 요구한다. 폭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

획 의도’는 “인생을 좀 아는 형님들”이 인생 해답을 준다고 한다. 아재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소통’

대신 일방적 가르침이 강조되는 셈이다.

장수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MBC)도 비슷하다. 진행자인 김구라와 윤종신 등은 젊은 여

성 게스트를 울리는 ‘중년 독설가’ 캐릭터를 공고히 한다. 분명 귀여운 아재는 아니다.

‘아재’의 환상, ‘아재’의 본색

아재의 대척점에 ‘꼰대’가 있다고 한다. 친근함 대신 권위를, 소통 대신 오지랖과 명령을 내세우는 사

람이라는데, 전통적인 가부장 질서를 체화한 이들이다. 언론은 이제 아재의 시대라고, 꼰대는 시대착

오적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아재와 꼰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거나 무의

미하다. 예능 프로그램이 재현하는 남성상은 변했지만 그 안의 남성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승원과 백종원은 “요리 잘하는 부드러운” 남성이지만 금세 “남성의 우월한 능력을 증명하

는” 캐릭터로 재배치된다.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의 이휘재와 이동국은 “아이와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로 재현되지만 결국 “여성의 영역인 육아를 잠시 도와주는” ‘바깥양반’일 뿐이다.6 ‘대

한민국 대표 아재’라며 여행을 떠나는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의 김용만과 안정환 등

도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가 규정하듯) “여행 계획 세우기엔 자신이 없고 항공권 예약조차

골치 아픈, 그래서 ‘본격 수동형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남성들

이다. ‘귀여운 아재’라고 우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아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 중년 남성이 대중문화계를 거의 독점적으로 지

배하는 현실을 미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이 갑자기 귀

여워졌다거나 세대 간의 불통이 대폭 완화됐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아재’라는 이름 아

래 ‘여성’과 ‘청년’은 가려진다.

텔레비전 안에서도 밖에서도 중년 남성은 권력을 놓은 적이 없다. 단지 권력을 행사하는 방

식이 전통적 권위에서 연민과 자존심으로, 그리고 다시 친근함으로 변했을 뿐이다. 아재 캐릭터

에 환호하는 동안 예능 프로그램의 중년 남성 의존도는 오히려 점점 강해지고 깊어진다.

남성 지배 구조의 그늘

혹자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40~50대 남성이 중요한 텔레비전 소비자로 자리매김하면

서 이들의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베테랑

진행자를 찾다 보니 40대 남성을 선택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여기에 맞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

‘아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 중년 남성이

대중문화계를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을 미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이 갑자기

귀여워졌다거나 세대 간의 불통이

대폭 완화됐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아재’라는 이름

아래 ‘여성’과 ‘청년’은 가려진다.

6 아이를 돌보면서 실수를 연발하거나 불안한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비록 재미를 위한 연출 방식이라 하더라도, ‘여성(어

머니)의 육아 의무/능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5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BROADCASTING TREND & INSIGHT

많아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방송 현실을 이해하는 더 중요한 열쇠는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 사이에 태

어난 지금의 중년 남성들이 사실상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중심적인 행위자였다는 점이

다. 과장을 무릅쓰자면, 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 평생 이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경제성장기

의 마지막 단물을 맛본 이들이고, 민주화를 직접 이끌거나 경험하거나 목격했으며, 전(全) 지구적

대중문화 수용을 처음 맞이한 이들이다.

이들이 노년이 될 즈음에는 ‘할배 문화’가 꽃피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할매’는 배제될 것이

다. 그리고 지금의 청년이 중년이 되었다고 해서 아재 문화가 그들을 반겨줄 가능성도 별로 없다.

물론 젊은이들도 소위 아재 프로들을 즐겨 보곤 한다. 그러나 청년들이 짐짓 복고적이 되어

아재 문화에 공감하는 것은 중년 남성을 이해하기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현재가 만족스럽

지 못하고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주로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거나 모르는 과거를

신화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tvN)를 즐겨 보는 20대는 경험하지 못한 복고에 환호하며 가상의

과거를 만든다. ‘3포세대’, ‘5포세대’로 호명되는 청년들은 텔레비전 예능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포기당한 채 윗세대의 땅을 기웃거려야 한다. 변하지 않은 남성 지배 구조에서 여전히 텔

레비전 예능의 변방을 배회하는 여성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부드러운 이미지의 중년 남성 몇이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중년) 남성 지배라는 방송 현실이 바

뀐 것은 아니다. 모바일 미디어와의 경쟁 속에서 텔레비전은 안 그래도 점점 더 노인용 미디어가 되

어가는 추세인데, 귀여운 중년의 인기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청년/여성을 더 주변화할 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2016년 대중문화의 키워드’를 꼽을 때 아재가 포함되는 것은 그래서

좀 서글픈 일이다. 젊은이와 여성을 눈요깃거리나 단발성 양념처럼 소비해버리는 예능 프로그램

에서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출처: JTBC 홈페이지)

CONTENTS REVIEW

2016. 12+2017. 01 VOL. 09 36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BROADCASTING TREND & INS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