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마을 38호(201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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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를 일구는 농도상생마을공동체 2013 06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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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아름다운마을 38호(2013 06)

생 명 평 화 를 일 구 는 농 도 상 생 마 을 공 동 체

2 0 1 3 0 6 제 3 8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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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편집실에서 ] 삶의 길 따름의 길 최소란

[ 특집 ]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4 신앙, 교육, 농촌에 희망걸다 문동환, 홍순명

8 “자기 먹을 건 자기가 하라고 하셨지요” 박공순

10 “내 일평생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조화순

12 “목사는 없어도, 농사꾼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 임락경

14 “가난은 그분의 초대장입니다” 김영락

16 “역사의 발길에 채여 여기까지 왔지요” 박형규

18 [ 그리고 ] 싹 났다 길서영

22 [ 알림 ]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

24 [ 農생활 ] 마른 싹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아름다운마을> 펴낸 곳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기자 김세진 김준표 김형우 임안섭 주재일 최소란 디자인 김준표 서아름

문의 02-999-9294, 010-2578-6050 누리편지 [email protected] 누리집 www.maeullo.net 후원 국민은행 487101-01-436510

<아름다운마을>은 강원도 홍천 아미산자락 효제곡마을과 서울 북한산자락 인수마을을 오가며 농촌과 도시에서 농도상생마을공

동체를 일구는 사람들의 삶을 증언합니다. 시대 과제와 소통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소통과 대안]에 담습니다. 일상과 관

계, 수련을 통해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와 이유를 찾아봅니다. 마을밥상 지기들이 밥을 차리는 마음을 [밥상머리]에 모읍니다. 기

독청년아카데미에서 만나는 20·30대 청년대학생들과 [청춘답게] 모험하는 활동을 나눕니다. [청소년마당]과 [마을학교] [아이들세

상]은 홍천과 인수 마을학교 아이들이 살아있는 배움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농(農)을 통해 문명과 삶 전체를 다시 살

피고 재구성하는 [農생활]과 건강한 주거문화를 만들어가는 [생태건축] 현장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만나보기]에서는 당신과 우

리가 함께 만나고픈 사람을 찾아갑니다.

2013 06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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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편집실에서

최소란 편집장

삶의 길은 따름의 길입니다. 우리는 스승이 가르쳐준 삶을 따라 살아가고 있고, 스승 또한 우리에

게 따름의 삶을 보여준 것입니다. 역사의 스승 뒤에서 우리는 모두 제자입니다. 시대의 질곡을 몸으

로 살아오신, 그래서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가 되신 어른들을 만났습니다.

선생 따라 집 나서 한평생 동광원 수도공동체를 일궈온 박공순 언님, 동일방직 여공으로 들어가

70~80년대 노동운동 현장을 가슴으로 지켜온 조화순 목사님, 이 땅의 질병과 먹을거리의 근원을 파

고들었던 임락경 목사님, 원자력공학도에서 환경운동가로, 다시 수도원으로 뛰어든 김영락 원장님,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박형규 목사님. 이분들이 5월 17일~19일 강원도 홍천에

서 열린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수련회에 오셔서 뒤돌아본 인생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생생한

고백과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지면 관계상 짧게 줄인 점을 감안해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명동학교, 가나안농군학교, 오산학교, 풀무학교의 산 증인들을 한 자리에 모시고 열린 원탁토론도

이번호 마을신문 지면에 중계합니다(사정상 두 분의 증언은 다음 기회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구한

말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민족의 새 시대를 준비하며 젊은이들을 키우고자 선각자들이 세

운 학교들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였고,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음에도, 우리가 복원하고 계승해야

할 경험과 정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우리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뜻 깊은 만남과 배움이 있

어서 감격스러웠습니다. 붙들고 있는 학문이 구태의연해지지 않도록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가르치는 가치를 담지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일군 역사를,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신 문동환 목사님과

홍순명 선생님의 증언으로 들어봅니다.

삶의 길 따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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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신앙을 토대로 다음 세대를 키우고, 미래문명의 희망이 될 공동체를 일군 마을공동체의

산 증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구한말 우리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워진 명동촌에서 성장하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목사로서의 삶에 뜻을 품은 문동환 목사와, 한국전쟁 직후 전신 오

산학교의 초지를 지키려 다시 세워진 풀무학교를 50년 가까이 지켜왔던 홍순명 선생이 ‘신앙, 공

동체, 교육, 새로운 역사와 문명’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 4년간 교목으로 지

냈던 오세택 목사도 함께 토론하기로 했으나, 사정상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였다. 5월 17일 강

원도 홍천에서 열린 이번 대담은 아름다운마을교육공동체 최철호 교장이 진행했으며, 아름다운

마을교육공동체 학생과 교사, 학부모, 공동체지도력훈련원생 등 250명이 참석했다.

문동환 새 내일의 출발은 아파하는 얼이에요. 이것이 없이 참된 새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명동1)’은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입니다. 정치하러 가지 않고 학문으로 젊은이들을 깨우쳐

서 새날의 주인이 되게 하겠다는 함경북도 학자 넷이 1899년 두만강 북쪽 명동으로 건너와서 농사

짓고 서당을 세웠습니다. 일년 동안 학교를 이끈 정재면 목사2)가 “아이들만 예수 믿게 해서는 이 나

라가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는다면 내가 머물러 있겠소” 그랬어요. 주역과 맹자

를 낭독했던 유학자들이 상투 깎고 제사 못 지낸다는 얘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사흘 동

안 의논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받아들였어요.

우리 외할아버지 문병규 선생3)은 “학자가, 기독교가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예수 믿어?” 이러면서

식구들이 잠자는 동안 성서를 세 번이나 읽었어요. 그러고 나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건 문

1) 나라가 망해가던 때 민족의 힘을 길러 독립의 미래를 준비하고자 1899년 2월 함경도에서 일시에 140여 명의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백두산 북쪽 만주 북간도에 이룬 마을공동체. 농사를 지으며 개간한 땅이 600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2) 1907년 독립운동단체 ‘신민회’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파견된 정재면 선생은 명동학교의 요청으로 교사로 부임했다. 교장 김약연을 전도해 성경과 예배를 정규과목으로 설치했다. 

3) 1899년 다른 네 가문과 함께 일가족 40명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해 명동마을을 만들었다.

신앙, 교육, 농촌에 희망 걸다[대담] 항일민족운동의 요람 명동학교의 산 증인, 문동환 목사 오산학교의 맥 이은 풀무학교 지킴이, 홍순명 선생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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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긴 하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무엇보다도 사랑과 정의, 평화가 있어” 하면

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명동학교 교가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한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비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덕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한뫼라는 것은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에요. 단군 정신을 이

어받은 것이 명동이에요. 사실 유학, 실학, 동학이 다 이 단군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선조들의 정

신은 한님, 하느님이에요. 한님의 은덕으로 생명을 얻은 한 식구라는 그런 정신이 있습니다. 명동

은 그런 정신에 살았어요. 그리고 만주에서 같이 공부한 김재준, 안병무, 문익환 목사를 통해서 한

신에서 우리 민족을 아파하면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얼과 얼이 통하는 교육, 더불어 사는 평민 교육

홍순명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서 어떻게 민족을 각성시키고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 고

민한 선각자들과, 생각하는 민중들의 염원이 명동학교, 오산학교4), 풀무학교의 기류로 나타난 것

이라고 오늘 이 자리에서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산학교의 건학이념은 교육과 기독교와 농촌을 일

체화하여 한국의 이상적인 축소판 같은 곳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통치자들에 의

해 초지를 지킬 수 없게 됐습니다. 오산의 정신을 내면화하신 이찬갑 선생5)과 주옥로 선생의 뜻이

합쳐져서, 1958년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가 개교했습니다. 이찬갑 선생은 “도시문명 교육은 물질 교

육, 간판 교육, 허세 교육이었다. 농촌을 중심으로 정신 교육, 실력 교육, 인격 교육을 해야 한다. 문

명을 고쳐 세우는 것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둔 교육에 있다”는 웅대한 말씀을 당시 중학교 1학년

생들 앞에서 말씀하셨어요.

풀무학교를 졸업하고 현실적으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전공부(대학과정)

를 시작한 지 13년이 됐습니다. 전공부는 한 해 졸업자가 10명 미만인데, 그 중 4~5명이 농촌으로

들어갑니다. 전공부는 오전에 인문, 오후에 실습을 합니다. 인문교양은 ‘기도의 정신’입니다. 기도

하는 마음과 농사짓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전공부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학생들이 시험

을 안 봅니다. 대신 이후에 자기가 뭘 하겠다는 논문을 씁니다. 또 하나는 선생님과 학생들 간에 계

급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학교하고 마을 사이에 담이 없습니다. 지역은 몸이고 학교는

지역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의 마을 속에서 교과서에서 얻지 못하는 생활풍습, 5천 년 농경생활, 계

절의 리듬 같은 온전한 교양을 배웁니다. 모든 지역이 살아 움직이는 거예요.

최철호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 선생을 비롯한 당대 선각자들에게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향하는 가치를 현재화할 수 있는 삶의 관계, 터전인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도 땅까지 물색했는데, 감옥에 잡혀가는 바람에 못하셨죠. 지금 지식인들이

철학을 책과 머릿속에서만 다루며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과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꿈

꾸는 것을 현재화하기 위해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 조직,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중요했습

4)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남강 이승훈 선생이 1907년에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한 학교.

5) 이찬갑 선생은 증조부의 동생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후 오산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1958년 풀무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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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명동학교와 오산학교, 풀무학교가 가지고 있는 교육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교

육과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문동환 교육은 얼과 얼이 통하게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선배들은 철저히 배우고 시작했는데, 지

금 사람들은 선배들과 얼이 통하지 않아요. 왜냐면 산업문화가 막 밀고 나가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머리를 잘 써서 좋은 기계를 만들어서 남을 잘 이용해서 부자가 되고 힘을 가지느냐 이것이 산업문

화예요. 경쟁, 경쟁, 경쟁이에요. 자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비참한 것을 보고도 아파하지 않아요.

산업문화라는 게 얼마나 지독하게 우리 모두를 세뇌하는지 몰라요. 이것에서 탈피한다는 게 그렇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교회에 가봐도, 인권 얘기는 해도 산업문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

어요. 교육은, 이렇다는 것을 철저히 보게 하는 일, 이것을 본 예수나 모세, 이런 선배들하고 철저하

게 기가 통하는 일이에요. 지식은 도구일 뿐이에요. 요즘 교육은 도구만 가르쳐줘요. 역사를 얘기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하는 얼을 얘기하지 않아요. 새 문화를 만들려면 역사에서 우리 선

조들의 얼, 더불어 사는 얼을 봐야 해요.

홍순명 ‘더불어 사는 평민’이 풀무학교의 교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이웃

과 더불어 잔치를 하는 겁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목표로 보면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나 경제적 수

단으로 보는 것도 바뀝니다.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자연에서 일하는 건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농업은 이제 농민의 생업만은 아니고, 생활농업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개교할 때 선생님이 두 분이셨는데, 두 분이 “우리 학교는 교장도 없고, 사원도 없다”고 약속을 하

셨습니다. 그게 학교의 좋은 전통이 됐습니다. 훌륭한 지도력이란 “남을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남

보다 학교의 방향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 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든지

간에 서로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각기

다 은사들이 있고, 자기가 받은 은사의 선한 관리자가 돼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데 쓰는 것, 모

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학교에는 큰 분도 있고 작은 분도 있

고, 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랬어요. “풀무학교가 풀무학교가 된 것은 사람들이 어줍지 않으니까 풀무학교가 됐

다”고. 똑똑하면 올라가서 위에서 지시하는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습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다

도시로 가버리고 좋은 대학에 가고, 못하는 사람은 능력도 없겠다 시골을 지키다 보니까, 전국친환

경농민연합회장에 어줍지 않은 사람인 저희 학교 졸업생이 만장일치로 선출됐어요. 크고 훌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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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보다도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최철호 해방운동을 했던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인 신앙은 지

금의 기독교와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훨씬 폭넓고 훨씬 깊이 있었습

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 오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 이런 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세는

엄격한 자기수련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삶 자체에서 ‘다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이죠. 《대학》은, 자기를 교육하는 것, 자녀를 교

육하는 것, 부부가 상호 간에 교육되어 가는 것, 이 모든 교육의 삶을 도를

닦는 것, 수도로 보고 있습니다(修道之謂敎). 그런데 이런 삶의 전통과 가

치들이 사장되고, 외워서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교육의 패턴이 자리 잡게

되면서, 교육에서 자기 수련을 잃어버렸습니다. 풀무학교처럼 일관되게

그 길을 걸어가는 학교는 참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었을 때 주어지게

되는 혜택들, 여러 이해관계들 앞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홍순명 오산학교는 식민통치 끝 무렵에 더 많은 인재를 키우고 싶다

는 좋은 교육적 동기로 대학 승격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쉽게

조건 없이 허가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교장선생님을 당시 조만식 선

생님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조건, 일본 사람들이 일본 역사를 가르치

는 조건, 학생들이 일본 요배하는 조건으로 승격을 해줬습니다. 자꾸 이

래 가지고 안 되겠다 싶어서 양심적인 분들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타협도 필요할 것 같지만, 한 걸음 타협이 몇 걸음 퇴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찬갑 선생님이 뼈아프게 경험하셨기에 물질적 지원에

대해 이찬갑 선생님이 단호하셨습니다. 학교도 어려울 때보다 어느 단계

에서 돈이 조금 생길 때 더 조심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풀무학교에도 뜻밖에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움직여서 돈이 좀 들어왔

습니다. 아무래도 이걸 좀 잘해서 정규인가를 받고, 좋은 학생들도 모집

하고, 교육 내용도 충실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사회, 교사회, 학생회, 지

역사람들이 모두 심오한 토론을 했습니다. 결국 학교를 크게 하고 국가에

서 지원받는 것은 정신을 더 충실히 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

습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사를 잘 지으시는 할

머니인데 자격증이 없다고 해서 강사로 서지 못하게 돼요. 우리는 얼마든

지 마을 어른들을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거든요. 제도라는 건 우리 몸에

맞아야지 옷에 우리 몸을 맞출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일반 학

1921년 태어난 문동환 목사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함께 자라온

문익환, 안병무, 김재준 등과

한신대를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이끌었으며, 교회 청년들과 공동체

'새벽의 집'을 만들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수감되었다가

1992년 미국으로 가서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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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에 비해 조금 못 받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자급하면 됩니다. 우리 뜻대로 하면 됩니다. 오산학교

는 대학을 하려고 했다가 못했지만, 우리는 어쨌든 전공부라는 것을 우리 수준에서 하고 있고, 오산

은 마을을 만들다가 중단되었지만 우리는 어쨌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농업은 직업이 아니라 의무

최철호 홍순명 선생님은 풀무학교 전공부를 계획하면서 온전한 마을공동체, 학교를 통한 마을

공동체 구현을 위해서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이 빨리 공감을

얻지 못하고 상당 기간 시간이 가고 준비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전공부를 시작하실 때, 풀무

고등학교에서 훈련받았던 학생들이 전공부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겠다 이런 기대를 당연

히 하셨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홍순명 따끔한 질문인데요. 올해 풀무학교에서 전공부로 한 학생이 왔어요. 작년에는 안 왔고

요. 고등학교는 한 학급 25명 중에 금년에 농업을 선택한 사람이 6명이었습니다. 신앙이나 진로에

대해서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명한 소비자도 필요하기에, 농업을 하

지 않는다고 잘못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어떤 농업전문학교는 학비를 국가에서 대주고 외국에 나

갈 기회도 주선해주는 데 비해서, 전공부는 학비도 본인이 내야 하고 외국 나갈 기회도 없고 하니,

꼭 전공부가 최선의 선택지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올해 한 학생이 들어와서,

어떻게 전공부를 들어왔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학교에 들어가면 교육과정에 짜

여진 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전공부에 오면 그 학생에 맞게 선생님이 구체적인 조언을 주고 도와준

다고, 나를 위해서 학교가 도와주는 것과 학교를 위해 나를 맞추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 전공부에 오는 학생이 있으면, 그 지역에서 ‘전공

부에 들어가도 괜찮네’ 이럴 수도 있겠지요. 지금 전공부 1/3은 대학교 졸업생들이 들어와서 이 지

역에 남기도 합니다.

최철호 풀무학교가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진 데에는,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농촌을 수

호하며 유기농사를 복원하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이 세 가지 축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농사를 지켜낸다’,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간다’고 하는 데서는 뚜렷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신앙공동체’, ‘신앙교육’이라는 맥락에서 풀무학교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요? 단순히 ‘기독교 종교인’을 양산하는 기독교교육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종의 새로운 신앙운동

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 힘이 되었는데, 그러한 운동의 재생산을 학교가 어

떤 역할로 받아들였는지 듣고 싶습니다.

홍순명 풀무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을 배웁니다. 학생들이 하루 한 시간씩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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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계시록까지 읽고 발표합니다. 그래도 좋으면 자녀를 보내십

시오”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이 성경을 정해서 아침에 한 장씩 쭉

읽으면 3년 동안 성경 1독을 합니다. 또 조를 짜서 한 사람이 복

음서 한 권씩 요약하고 공감하는 부분을 발표하고, 질문 내지 반

박을 하고, 그러면 제가 10분 코멘트를 해줍니다. 성경은 직접 읽

어야 하고, 날마다 읽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학교를 나간 다음

에 어떤 종교를 만나거나 어떤 교파를 만나는 건, 본인들이 하나

님과 맺는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기독교라는 큰 공통기반이 있기에 조금 다른 건 얼마든지 관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신앙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활과 결부되어야 하고 또 역사와

도 결부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기초가 될 때 바른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

수님을 ‘랍비’라 부릅니다.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외워

서 창조적으로 새로운 말씀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고전 경전

에 숙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민이셨고, 물질과 경쟁에

서 마음을 돌려 하나님나라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기 개인을 발견하고, 사회공동체에 기여하도록 하는 교육의 목적

은,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잘 관리해서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성경의 정신과 일치

합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말씀이 교육에 있어

서 대헌장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사람을 욕하면 지옥에 떨어진

다고 되어 있어요. 사람을 재능으로 평가한다든지, 일등만 인정

하다든지 그러면 안 됩니다. 성적이나 가정경제, 장애 여부에 의

해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가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농업이라는 건, 하나의 기술이나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농업은 깊이

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사

람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창조질서의

파괴로 신음하고 있는 자연을 돌보는 것입니다. 단지 돈 벌려고

항생제 먹이고 공장식으로 키우다보니, 조류독감이 퍼지고, 불쌍

한 동물을 죽이게 되고…, 이건 아니라고 하는 걸 알려주는 근거

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교육과 농업을 살리는 동시

에, 농업을 통해서 교육과 신앙을 배울 수 있고, 교육을 통해서 신

앙과 농업을 살릴 수 있다, 이런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36년생인 홍순명 선생님은

교사를 하다가 군대에서

풀무학교 기사를 접하고 감동받아

군 제대 후 스물넷의 나이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합류,

42년 동안 재직했다.

2001년 풀뿌리 주민대학인 2년제

전공과정을 창설하여 농촌에서

우리 사회의 뿌리를 가꿀

일꾼을 길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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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땅도 없고, 아주 산도 그런 악산이 없어요. 개명산이라고, 너무너무 무시무시한 산인데, 맨 돌이

고, 흙이라고는 없어요. 여자들이 먹을 것은 없고 식구는 오십 명이나 되고 하니까, 땅을 파서 옥

수수라도 심어서 갈아서 죽이라도 끓여 먹어야 살 것이니까….

우리 선생님은, 자립자족해서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하라고 그런 정신을 가르치셨어요. 어디

든지 가면 자립을 생각하고 살라고…. 직조도 많이 짜서 서울 교회에다가 팔고, 보리농사를 하고,

여자들이 새끼들을 꼬고 가마니치고 했어요. 딴 사람들이 와서 보고 이런 자갈땅에서 농사를 이

렇게 하다니, 기가 막히다고…. 전부 풀해서 여자들이 작두를 썰어서 그걸 썩혀서 뿌려서 농사를

짓고. 그 식구들 먹을 거 남기고 보리를 백오십가마니를 냈어요. 또 어디 옛날에는 불이 잘 났는

지 몰라요. 불나싸면 그냥 여자들이 비호같이 뛰어올라가서 불 다 끄고 내려오면 동네 남자들 인

자서야 와요. 이제 산 밑에 올라오고 있어. 그럼 불 다 타버리지. 허허.

단체에서는요, 참 피눈물 날 때도 많죠. 부딪치는 일도 많았죠. 많은 사람 마음이 똑같지를 않

은디, 개명산에서는 50명 정도 젊은 처녀들이 참 참고 사느라고 애들 쓰셨죠. 세상에 원망도 많은

데 그걸 참고, 맨땅 파서 질쌈하고 그러니 얼마나 속에 불이 날 때도 많겠어요. 자기 하고 싶은 공

부도 못하고, 댕기고 싶은 곳도 못 댕기고…. 단체생활은 자기 욕망을 끊고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

로 살아야지, 부닥치고 싸우면 어떻게 살아요. 서로 형제를 존경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렇게 희생하는 분들이 있어야 잘될 거라고 믿어져요. 그거는 인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

장을 해주셔야 돼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 60년대 배고픈 세상에, 맨밥이라고는 해야 우거지죽뿐이에요.

근데 거기 곳간에서 저축미를 모아요. 서울 시내 50년대에는 다 판자촌인데, 배고파서 우는 사람

들 천지야. 그런 소리를 듣고 우리는 죽이라도 먹겄냐 하면서. 한 서너 달 떼면 많아요. 하루는 식

모가 화가 났는가 그 저축미를 마당에 흩어버려요. “와, 어른들 나오실까 무섭다. 빨리 줍자” 해서

그걸 다 쓸어 담고 돌 고르고 했어요. 위에 어른들이 배고픈 사람들 빨리 안 갖다주냐고 해서 밤

에 이고 노나주러 갔지요.

“자기 먹을 건 자기가 하라고 하셨지요” 한평생 농사하며 수도공동체 일궈온 박공순 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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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죽어라고 참아주고, 죽어라고 다독거려주고. 자기는 아무리 괴

로워도 참고 또 참고 피눈물을 흘리면서라도 희생을 해야 해요.

아무리 목구녕까지 차올라도 그놈 삼키고 참고. 그 사람 사랑할

때까지 잘 봐주고 그래야 될 거 같아요. 참고서 말씀 보면, 하나

님이 위로해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현필 선생님 돌아가실 때, 그날 저녁에 내가 하루 저녁이라

도 가서 선생님을 지켜봐야겠다, 그러면서 올라갔죠. 불을 때고

방구석에 가서 앉았는데, 벌써 당신은 갈 줄 아시고 “내일 손님이

많이 올 텐데…” 하며 저보고 가서 쉬래요. 자꾸 가서 쉬라고….

당신 아프신 거는 생각을 안 하고 남을 저러고 쉬라고 해싸신고.

내가 하루 저녁이라도 선생님을 지켜봐야지 가기는 어딜 가, 끝

까지 고집을 피우고 있다가, 선생님이 가실 때가 되니까 숨이 차

시니까 자꾸 일으키라고 하세요.

일으키라 해갖고 안고 있고, 시중 드는 사람이 물을 이러고 입

에 적셔준당께. 그때는 이미 안 받으시더라고. 그런데 고개를 떨

어뜨리시더라고. 그 언니는 울고 있고, 저 방에서 어른들은 막 깨

서 와서 선생님 가실랑갑다 하고 있는데, 그 떨어뜨렸던 고개를

다시 한 번 들어서 이렇게 저를 돌아보실 때, 가슴과 가슴에서 느

껴지는 것이 ‘내가 너를 기억한다’ 그러신 것 같아. 그 말을 듣기

는 들었는데 꿈인가 생시인가 그랬는데, 딱 3시 되니까 운명하시

더라고. 당신 가시는 날짜와 시간도 그렇게 다 아시더라고. 하나

님이 그 시간이라도 우리를 지켜보게 해주신 은혜가 감사하더라

고요.

노동이 기도라고, 노동이 기도라고 해서 항상 그저 땅 파고 농

사짓고 그것만 제일이라고 했었어요.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해도

살아지지도 않고, 젊었을 때는 욕망도 많고…. 그래도 그걸 꺾고

살았던 것은 선생님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동광원은, 탁발수도승으로 살며

걸인과 병자들을 돌보던 이현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일군

노동수도공동체이다. 올해 일흔

여덟이신 박공순 언님은 20대

초반에 벽제 동광원에 들어와

버려진 땅 4천 평을 개간해서

평생을 농사지으며 수도하며

살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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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상록수》에 감동받아 농촌계몽운동을 하겠다 마음먹고 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렇게 간 시골이, 내가 생각했던 시골이 아닌 거예요. 남자들이 농사는 쬐끔 지어가지고

다 노름으로 탕진하고, 여자들 패고…. 근본적인 게 바뀌지 않으면 문제가 너무 많은 거예요. 거

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오명걸(본명 조지 오글, 1962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개척)이라는 미국 선교사를 만났

어요. 이분이, 산업사회 속에서 노동자들이 희생당하는데 이들을 선교하려면 젊은 여자목사가 꼭

필요하다고 저를 설득하는 거예요. 나는 부잣집 딸이었어요. 대접만 받았고, 한 번도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미쳤냐? 내가 왜 공장에 가느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그 양반이 “노동해

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안 하겠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제가 갈게요” 했어요. 예수

믿으면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이라고 1,200명이 있는 섬유회사예요. 1966년에 신분을 감추고 공

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오명걸 선교사 말이, “당신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공장에 하나님이 오셔

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입 다물고 겸손하게 일만 열심히 하라는 거예요. 나는

반박하기 싫어서 “알았다”고 해놓고는 속으로는 ‘아니야’ 그랬어요. 전도를 하려면 옆사람하고 얘

기를 해야 되잖아요. 몰래몰래 말을 거는데, 누가 호루라기를 ‘삐’ 부는 거예요. 반장이 “저 여자 오

늘 처음 들어왔는데 건방지게 말이 많아!”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내가 대학교 나오고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산업선교고 뭐고…. 그런데 별안간 ‘네가 목사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때 내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 되기에는 아직

도 멀었습니다.’ 그리고 콧물, 눈물이 범벅이 돼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 나도 모르게 약

속을 했어요. ‘하나님, 이 가난한 노동자가 아픔 당하는 이 현장을 내 일생 동안 떠나지 않겠습니

다.’ 나도 몰라.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하나님, 일평생 현장 떠나지 않겠습니다” 평생 노동운동하고 땅 살리는 현장에 간 조화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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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현장에, 마구간에서 하나님이 태어났어요. 나는

노동자들에게 “예수는 노동자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하고 가르쳤어요.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억울한 현장에 있어요. 자기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

는데 살 수가 없는 그런 현장.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십자가를 같이 지는 분이

오늘의 예수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요새도 문제 많잖아요. 난 새벽

마다 신문 보면서 우는 게 일이에요. 전에는 막 분해서 욕을 했어요. 그런데

이젠 욕이 안 나와요. 가슴이 타요. 여기가 이렇게 타는데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다리로 가야 되는 거예요. 현장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현장에

가면 뭐합니까? 기도하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자 그러

고 거기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힘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뭔지 알아요? 위에서부터 아래, 만나는 거 이게 십자가

예요.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하면 별안간에 풍덩 빠지는 거 같아요. 그럼 하

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나는 간 곳이 없어요. 기도는 버리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욕망, 그걸 버리는 게 기도라고 생각해요. 난 일생 동안 한 번도 뭘 달

라고 한 적이 없어요. 차도 없고 컴퓨터도 안 해요. 조화순 하나만이라도 그

렇게 살아야 한다, 이상한 똥고집이 있어요. 내가 재작년부터 독거노인으로

확정 받았는데, 한 번도 돈이 없어서 못 살아본 적이 없어요. 진짜 재미있어

요, 하나님 정말 믿으면….

내가 예순한 살 되던 해에 은퇴를 했어요. 감리교 신학대학원 나와서 자

리 없는 목사가 3천 명이래요. 나라도 빨리 관둬야지 해서 뒤도 안 돌아보

고…. 내가 결단을 잘해요. 운동을 18년 하다가 시골 교회로 돌아가니까, 다

들 되리라 생각을 안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거예요. 일생 동

안 농사만 지어서 허리가 꼬부라진 할아버지들 보면 난 가슴이 미어져요.

길 가다가 괜히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런데 진심은 다 통해요.

한 번은, 내가 요시찰 인물이니까 교회를 하는데도 안기부에서 이놈들이

와요. 뭘 또 조사할 게 있으니 연행해 가겠다고. 내가 “미쳤냐? 안 가!” 소

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부목사가 얘기해서 장로님 다섯 분이 들어오는 거

예요. “우리까지 데려가쇼” 그러는 거예요. 조금 있으니까, 교회 마당에 동

네 사람들과 교인들이 꽉 차서 “우리 목사님 데려가려면 우리 다 데려가라”

고…. 그때 그 뿌듯함은 아, 이게 목회하는 맛이구나 싶었어요.

내가 시골을 왔잖아요. 해방신학 한다, 여성신학 한다, 통일신학자다 그

러는데,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이제 마지막 남은 게 땅을 살리는

운동, 생명신학이에요. 이 땅이 다 죽어가고 기후가 바뀌는데, 땅을 살려놓

아야 되잖아요. 교회가 그걸 해야 해요. 살아서 천당을 살지 않는데 죽어서

어떻게 천당 갑니까? 삶이 따라오지 않고 입으로 하면 설득력도 없고 감동

을 주지 않아요. 예수처럼 살자. 예수가 고난의 현장에 있어요.

조화순 목사는 1966년부터

산업선교 현장에 뛰어들어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예수 정신으로

운동했고, 1983년 인천 달월교회로

돌아와 13년간 목회를 했다. 정년을

8년 남긴 1996년 은퇴를 선언하고

강원도 평창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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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4학년 때 꼴찌를 하고서, 앞으로 무슨 직업으로 살까 고민했어요. 공무원이 안정된

직업이라 공무원을 하려고 보니까 공무원은 사회에 없어도 살겠더라고요. 교회 가니까 목사가

훌륭한 직업으로 보였는데, 목사가 없으면 더 잘 살 것 같더라고요. 공무원은 없어도 살고, 목사

없으면 더 잘 사는데, 농사짓는 사람 없으면 다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평생 농사를 짓자고 4

학년 때 결정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학교문제가 앞으로 우리나라에 큰 문제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학교는 가지 말자, 그것도 4학년 때 결정했어요.

열두 살 때 미국인 선교사한테 세례를 받았어요. 열 살 때부터 세례 문답하는 것을 들어봐서

줄줄 외웠거든요. 교회 장로님들이 설교하면서 이현필·유영모·함석헌 선생이 훌륭하다 이런

이야기를 늘 하셨는데, 만날 수가 있어야죠. 훌륭한 분들 얼굴이라도 봐두면 내가 평생 재산이

되겠다 생각하고 국민학교 졸업하고 1년 있다가 찾아갔어요. 이현필 선생을 찾아갔더니 폐결핵

때문에 전염된다고 안 만나주는 거예요. 그래서 한 2km 떨어진 무등산에서 선생을 기다리고 있

는데, 거기 어느 노인 목사님이 계시더라고요. 결핵환자들과 같이 사는 최흥종 목사였어요. 그

분을 만난 게 내 일생에 큰 행운이었어요.

그분은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 잘 안 알아주지만, 내가 증언을 해야 할 목사님이세요. 최흥종

목사는 상속받은 땅을 내놓고 나병환자들을 광주시내에서 생활하도록 했어요. 그러다가 나병

환자들과 총독부를 찾아가 소록도 시설을 확충하도록 하고, 육지에 요양원 하나를 더 얻어내셨

어요. 그래서 여수요양원이 생긴 거예요. 나중에 손양원 목사가 후임으로 오시게 되었죠. 그리

고 나병환자 문제를 해결한 다음 폐결핵 환자들하고 사시는 거예요. 저도 거기서 일하면서 이러

다 전염되고 때 되면 죽겠구나 하며 살았죠.

집회 때 설교를 통해 이현필 선생을 만났죠.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집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

복한 사람은 소지품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두벌 옷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복한 사

람은 속옷이 없습니다.” 실제 그분은 메리야스 하나 하고 파자마 바람에 돌아가셨어요. 말씀대

로 딱 실천하고 가신 분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들 생각이 나요. ‘아, 최흥종 목사님은 이

렇게 했었다. 이현필 선생님은 이렇게 했었다.’

“목사는 없어도, 농사꾼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 농사지으며 장애인들이 함께 사는 시골집 임락경 목사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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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여수 애양원교회에 설교를 다닌 지 오래되었어요. 어느 날 담임목사님

이, 우리도 어디다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저기 나병환자촌에서 선교비를

주겠다고 하면 다 싫어한다고 시골교회에 보내주면 받겠냐고 하셔서, 내

가 받는다고 그랬죠. 받겠다는 생각이 쉽게 나온 거 같지만, ‘야, 이제는

나병환자들보다 내가 비참하게 살아야 되는데 이걸 내가 할 수 있겠나?’

그걸 받은 뒤로는 휴게소 비빔밥보다 비싼 밥은 안 사 먹어봤어요. 유영

모 선생, 이현필 선생, 최흥종 선생 하신 것 다 따라서 했어요. 아침에 일

어나서 기도 한 시간을 해야 한다, 내가 중학교 안 갔으니까 잠자기 전에

꼭 책을 봐야 한다, 앉을 때는 무릎 꿇고 앉자, 하루 한 끼 먹자, 이발소 가

지 말자, 새 옷 사 입지 말자…, 전체 서른 가지가 넘었어요. 내가 지금까

지 그대로만 했으면 이건 동양에 철인이 아니고 기인 하나 생겼을 거예

요.

그러고 있는데 서른 살 때 백춘성 장로란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분 하는

말이 “나보다 젊은 사람은 무조건 선생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딱

무릎 끓고 앉아서,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적고 계셔요. 그분이 어떤 분이냐

면, 어머님이 광주시내 부자였는데, 이현필 선생에게 감화를 받아서 유산

을 이현필 선생님에게 양보하셨어요. 그 유산이 동광원이 된 것이죠. 그

러고선 그 겨울에 숟가락도 안 들고 빈손으로 나간 거죠. 그리고 서울에

서 한국공업소라는 회사를 20년간 운영했어요. 그 무렵에 저를 찾아오신

거죠. 그렇게 훌륭한 분이 무릎 꿇고 내 얘기를 적는다고…. 그 때 장로님

을 만나고는, 내가 서른 가지 이상 정해놓은 그걸 그 자리에서 깼어요. 물

론 다 깬 건 아닌데, ‘아, 이걸 밖으로 내세워서는 안 되겠구나’ 했지요. 백

춘성 장로를 안 만났더라면 나는 아마 어디 깊은 산속에서 기도하고 있으

면서 ‘하루 네 시간 잔다, 절대 고기 안 먹는다…’, 이러고 있을 거예요. 그

장로님 만난 게 내 일생에 큰 행복입니다.

오늘도 모내기를 하다 왔어요. 천 평이 넘는데 1년 농사지은 것이 재작

년에 소 두 마리 길러서 판 돈보다 적어요. 내가 복이 없는 사람이죠. 4학

년 때, ‘고기는 없어도 사는데 곡식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쪽으로 가야 한다’ 이 생각을 한 거예요. 저는 예수 직업이 농사꾼

이라 생각해요. 예수가 비유를 들 때 자기 경험이 아니면 비유를 못 들어

요. 씨 뿌리는 비유가 아주 적실했는데, 돌밭에 나온 씨는 말라비틀어지

고, 가시떨기에 나온 건 크다가 죽고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혹

100배 맺는다는 뭔 얘긴가 하고 4학년 때 논에서 새를 쫓다가 벼 이삭을

세어봤어요. 그랬더니 정말 아주 못 된 건 30개, 중간 건 한 60개, 잘된 건

100개…. 예수가 밀 이삭을 세어봤나 봐요. 대충 숫자놀음이 아니었던 거

예요. 내가 벼 이삭을 세어보고서 확실히 알았어요. 농사꾼 예수의 직업

을 따라가야죠.

임락경 목사는 국민학교 졸업 후

이현필, 최흥종, 유영모 선생 등을

따르며 환자들을 돌보았고, 지금껏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강원도 화천 시골집에서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며

농사지은 콩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 직접 딴 벌꿀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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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라면 세속을 등지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수도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저는 세상을 너무 사

랑하기 때문에 산에서 수도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이 염려가 되고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이뤄지

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산속에 들어와 있지만,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

히 가난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믿습니까? 잘 안 믿어지지 않나요? 사

실 저도 확실히 그럴 것 같은데 정말일까 생각하면서 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살아보니까 그 말씀

이 공감이 되고 저의 임상실험 결과이기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되고 환경운동을 해왔습니다. 환경운동 현장에서 살펴보니 환경 재앙은 물질의 남용에서

오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환경운동은 절제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낮에는 환경운동을 하면서 석 달

간 동광원에서 전기 없이 지내며 단순하게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진지하

게 살라면 수도를 해야 한다는 설교를 들으며 수도하는 삶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가 2004년 강원도 홍천 장평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려면 전기를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 원자력을 공부해 그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기를 안 쓰려

면 샘물이 주변에 있어야 하는데, 감사하게도 저희 땅에는 세 군데나 샘물이 나왔습니다. 저뿐 아니

라 가난하고 단순한 삶을 살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을 품은 몇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노동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의 삶은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돈에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삶으로 선

포하자는 뜻입니다. ‘돈을 무력화시키고 돈을 좀 비웃어보자. 그러려면 내 손으로 농사, 집, 옷을 지

어보자’ 이런 뜻을 품고 살았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켜고, 집 지을 때는 창문이나 문짝은 비

싸니깐 중고로 얻어왔습니다. 열 평짜리 예배당을 지었는데, 어느 교회를 철거하게 되었다고 해서

뜯어 가지고 왔습니다. 7년째 집을 짓고 있습니다.

“가난은 그분의 초대장입니다”세상을 사랑해서 산으로 간 하늘길수도원 김영락 원장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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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사실 힘듭니다. 하지만 “가난하면 힘을 낼 수밖에 없다.” 동광원 박공

순 언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먹을 건 없고 농사는 지어야 하니까, 배고

프면 개울에 가서 맹물로 배를 채우고 일을 했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죠? 저는 3~4년을 그 고민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그

이야기에 답을 얻었습니다. 가난하면 다 할 수 있다. 가난하면 길이 없으

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은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

에 나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돈이 없

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

혜로 들어갑니다. ‘고난 외에는 길이 없다’,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 ‘

죽고자 하면 산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삶으로 실험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가난에 복이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해야 하나님과 가까

워집니다. 몸이 아프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하나님의 초대

장입니다. 가난하면 궁리를 하게 됩니다. 가난하면 자연친화적이게 됩니

다. 가난하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가난을 회피하

고 두려워합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가난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면 굶어 죽거나 병들 수 있습니다. 가난, 죽음, 십자가가 얽혀 있습

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의 삶은 고난, 십자가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것을 깨달으면서 저를 돌아보면, 저는 아직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가난

을 흉내 내고 있을 뿐입니다.

환경문제를 돌아보아도 가난한 삶, 절제된 삶이 중요합니다. 에너지

를 소비, 그것도 너무 과하게 소비해서 늘 문제가 아닙니까. 또 모든 재

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아껴 써야 하는 것이겠지요.

동광원 어르신들은 흘러가는 물도 필요한 양만큼만 떠서 먹었다고 합니

다. 물이 많다고 헤프게 쓰면 내 마음이 헤프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

다. 나를 위해서도 아끼는 것이 맞습니다. 단순하고 검소한 삶은 이 시대

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나의 삶을 돌아보면,

너무나 부유합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 가운데 영적 빈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의 풍요가 영적 빈곤을 가져온 셈입니다.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에도 그런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풍

요를 누리려면 물질적으로 빈곤해야 한다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과하게 물질을 소비하고 누리는 이

세태 속에서 절제와 가난한 삶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김영락 목사는 원자력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지만,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목사가 되었다. 이후 생명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갖고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활동을

하다가 2004년부터

하늘길수도원을 개척해,

전기를 쓰지 않는 생활을 하며

노동과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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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민주화운동 과정에 ‘연루되지’ 않은 사건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

고, 또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분, 박형규 목사님. 목사님은

올해 아흔한 살이시다. “손자뻘들 많이 왔네. 아니, 증손자뻘.” 강원도 홍천에 있는 생동중학

교와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학부모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박형규 목사님

이 진실되게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목사님은 1923년에 태어나 일제시대에 성장기를 보내셨다. 열 살 때 집이 망해서 일본 오사

카로 갔고, 거기서 소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호주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기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고, 일본에서 일본말을 모르기에 “영 바보가 되어버렸”단다. 일본 친구

들은 목사님을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다른 과목은 다 빵점이었는데” 산수는 백점을 받으셨

단다. 산수는, 일본어를 몰라도 풀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인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니까. 피식

민지 국가의 한 소년이 겪은 시련을 유쾌한 에피소드로 승화시켜 들려주셨다.

중학교 들어갔을 때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1931년), 중국까지 침략하려 하고(1937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일본 정부는 학교에 천황폐하 사진을 학교에 걸어놓고

등하교 시 90도로 절을 하게 했다. 그때부터 ‘007작전’이 시작되었다. “신앙인으로서 우상숭배

는 치욕적이거든요. 안 하기로 하고 그래서 방법으로는 상급생이 오기 전에 새벽 일찍 학교 가

서, 퇴교할 때도 상급생들 나간 뒤에 퇴교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상급생에게 들켜버렸다.

절을 하라는 상급생의 명령에 목사님은 끝까지 버텼고, 급기야 가족들 몰래 그 다음날부터 학

교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어머님이 알게 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절을 해

도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시며 두 모자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아픈 역사 속에서 아들

을 아끼는 어머니의 사랑과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역사의 발길에 채여 여기까지 왔지요” 민주화운동의 버팀목, 박형규 목사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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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우리 집에서는 군대 가야 하고 폐

병으로 일찍 죽을 테니까 씨나 하나 받아두자는 의미로 장가를 보냈고,

신부 집에서는 열여덟 살 넘어가면 군대 가서 정신대 해야 하는데, 폐

병쟁이라도 좋으니까 시집을 일단 보내자, 그렇게 해서 저쪽은 시집 오

고 난 장가를 간 거예요” 일본의 전시체제가 강화되며 남자는 군대에,

여자는 정신대에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런

데 다행히 목사님은 군대에 끌려가진 않았다. 폐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전 한글을 가르치다 감옥을 가게 되고, 그 일로 감시를 받

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대목은 토지개혁이었다. 목

사님 아버지는 한의사로 돈을 버셔서 꽤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을 부쳐먹고 사는 소작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따라갔다가, “지

주라는 자가 얼마나 죄가 큰지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자로 살지

않겠다. 될 수 있는 대로 가난하게, 일부러 가난하게 살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목사님의 인생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우리 근현대사였다. 우리 일상은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매일의 일상은 ‘역사’를 머금고 있는 소

중한 것이다. 90년 인생을 살아오시며 후회되는 것이 없냐는 질문에,

목사님은 “후회되는 게 참 많죠”라고 답하신다. 그중 “교회에 충실하지

못하고 가족들 고생시킨 게 참 미안하고 후회된다”고 하셨다. 목사님의

뼈아프고 정직한 답변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잘 되새겨야 할 것 같다.

목사님은 자신이 굉장히 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함석헌 선생님 말씀을 빌려, “자기가 원해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모두 도망가지. 발길에 채여서 어쩔 수 없

이 하는 거지. 내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발길에 채여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라고 하셨다. 자기 의지, 자기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누군가의 발길에 차이는 것. 결국 그런 관계 가운데 내가 있느냐? 우리

시대의 아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내가, 우리

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연에 이어 박형규 목사님은 넓은 마당으로 나가서 우리에게 춤을

선보이셨다. 보통 때는 지팡이를 들고 걸으셨지만, 춤출 때 지팡이를

내려놓고 장구 장단에 몸을 맡기셨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동작 하나

하나에 깃든 묘한 멋이 가슴을 촉촉하게 했다.

1973년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

건을 주도해서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던 박형규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유신반대투쟁에

앞장서고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을 보호해줘

‘길 위의 목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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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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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지도력훈련원"은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

성서가 증언하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공동체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공개 연수회를 준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절망적 현실에서 애통함으로 회개를 선포하던 선지자들을 사로잡았던 소망입니다. 선지자들의 이상은 예수와 성

령사건을 통해 역사 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성령사건을 통해 생성된

전혀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통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증언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늘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치부하거나 세련된 체념으로 유보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성령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장식

물로 전락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공동체, 성령사건으로 생성된 새로운 관계, 철저한 제자도를 지향하

는 신앙공동체의 삶과 실천, 이것이 신앙하는 삶의 근본이며 희망이라 믿습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

깊고 오래된 왜곡과 이탈에서 벗어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절규입니

다. 세속 권력과 부를 흠모하는 종교의 타락, 강고한 이해관계와 수많은 현실적 제약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총체적

모순, 개혁의 거품과 반복된 개혁의 좌절로 인한 깊은 체념..., 이를 한꺼번에 넘어 서는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이라 믿습니다. 복잡할수록 근본에 철저히 서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첩경이자 정도입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고 어떤 소명을 주시는 지를 함께 묻고 찾아가는 만

남이 되길 기대합니다. 신학생, 목회자 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력들이 함께 공부하고 고민을 나누고 동지로 세워져

가는 아름다운 만남을 소망합니다.

성령의 은총 속에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절망적 현실, 메마른 안정, 습관적 체념을 벗어버리고,

근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만남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현재화하는 성령의 은총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원장 최철호 목사(아름다운마을공동체)

·일 시 : 2013년 7월 15일(월)-17일(수) 2박3일

·장 소 : 장신대 세계교회협력센터(서울 광장동)

·등 록 : 숙박 9만원, 비숙박 7만원 (식사포함)

·입금계좌: 국민은행 097602-04-135322 (김지명)

·주 최 : 공동체지도력훈련원

·문 의 : 조윤하 사무국장(02-764-4116)

·신 청 : http://goo.gl/XaCLd

알림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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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름다운마을신문 2013 06 38호

7/15(월) 16(화) 17(수)

7:30 ~ 8:30 아 침 밥 상

9:30 ~ 10:00 등록 / 안내

10:00 ~ 11:00 <예배>유경재/안동교회 원로목사

9:00 ~ 10:20 <기조강연>

교회 본질 회복을 향한 한국 공동체 운동의 역사와 소명

정태일/사랑방공동체

9:00 ~ 11:20 <공동체 집담회>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

-개척: 어떻게 준비, 시작할 것인가?-전환: 성숙과 위기, 새로운 도약!-연합: 무엇을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지도력: 어떻게 양성, 계승할 것인가?

참석자 모두...

11:00 ~ 12:30 <기조강연>

新 뜻으로 읽는 한국사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10:40 ~ 12:30 <만남: 사례나눔Ⅰ>한국 공동체들의 현황과 소명

이형우/개척자들정태일/사랑방공동체

최철호/아름다운마을공동체11:40 ~ 12:30 <찬양과 성찬>

12:30 ~ 1:40 점 심 밥 상

<강의>주체적 자각, 창조의 영성,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

1:40 ~ 3:00한국의 창조적 사상운동

유영모*함석헌의 씨알사상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3:20 ~ 4:40김용기의 가나안농군(農軍)학교운동

오세택/서울두레교회

5:00 ~ 6:20한국의 수도공동체와 영성운동

동광원*예수원을 중심으로이영재/전주화평교회

1:40 ~ 3:40 <만남: 사례나눔Ⅱ>한국 공동체들의 현황과 소명

이영숙/디아코니아자매회김인수/민들레공동체 김태룡/한결공동체

3:40 ~ 4:20 휴 식

4:20 ~ 6:20 <선택 강의>내적 치유와 가족상담

김성옥/헤세드힐링센터

새터민과 함께하는한반도 평화공동체

권혁신/새터마을공동체

함께 짓는 생태건축구자욱/생태건축 ‘흙손’

6:20 ~ 7:30 저 녁 밥 상

7:30 ~ 10:00 <종합토론>주체적 자각, 창조의 영성,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이영재/전주화평교회오세택/서울두레교회

7:30 ~ 10:00 <원탁토론>근원을 향한 목회의 고뇌와 도전

신앙하는 삶이란 무엇인가?교회*목회란 무엇인가?

김기석/청파감리교회손은기/충주엄정교회정성규/부천예인교회

10:00 ~ 11:00 <모 둠 별 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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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땅을 뚫고 얼굴 내미는 새싹들

에 “싹 났다!” 하며 외치는 이들의 환호로

온 밭이 들썩거린다. 이 마른 씨앗 어디에

서 쉼 없이 잎을 내는 부지런함과 움직임이

나오는 걸까? 이 마른 씨앗 어디에 그 굵고

든든하게 뻗는 줄기가 숨어 있는 걸까? 도

대체 어떻게 질긴 열매 껍질과 색색이 다른

열매 한 알 한 알을 만들어내는 걸까? 한 작

물 안에서도 뿌리, 잎, 줄기, 열매, 껍질, 씨

앗, 뿌리, 서로 전혀 다른 색과 결의 물질들

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놀랍고 신비롭

다. 옥수수를 심다가 문득 든 물음과 놀라움이, 한 이랑을 다 심을 때까지 계속된다.

제 안에 다 있다. 작은 씨앗 안에 모자람 없이 모두 다 있다. 물론 햇빛, 공기, 물, 흙, 기온…. 다양한 외

부의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자라는 것이지만, 한 생명의 고유한 성질과 모양은 그 씨앗 안에 원래 모두 잠

재되어 있다. 씨앗을 품어주는 땅과 햇빛과 비를 만나면 생명은 싹을 틔워 쉴 새 없이 자라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씨앗을 심고, 싹이 이제 막 나고, 나오지 않는 싹을 기다리던 때. 5월 초였다. 마른 땅에 내린 비가 땅을

촉촉하게 적셨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밭도,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싹들도, 심겨진 씨앗도 너무 좋아하

는 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내리는 비가 좋아 비를 피하지도 않고, 밭에 앉아 싹들과 함께 즐겁게 비를

맞았다. 이 비를 맞고 이제 막 난 싹들은 쑤욱 클 것이고, 기다리고 있는 싹들도 반가운 싹을 보여주겠지.

내가 밭에 직접 물을 주려면 물조리개를 들고 대 여섯 번은 왔다 갔다 해야 겨우 한 이랑 정도, 그것도 겉

흙을 살짝 적시는 정도로밖에 주지 못한다. 이제 막 틔운 싹이 가뭄으로 말라갈 때, 내 마음도 함께 말라

가는 듯 애태워본 후에야 온 밭을 촉촉하게 적시며 내리는 비가 온 생명에게 은혜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

었다. 매일 뜨는 햇빛과 온 누리를 적시는 비, 모든 생명을 품고 기르는 땅의 온전한 은혜 없이는 어떤 생

명도 싹틔우고 자라지 못한다.

씨앗에 내재해 있는 100%의 온전한 생명력과 온 우주가 한 생명을 향해 베푸는 100%의 은혜가 만나 생

명이 나고 자란다. 그렇게 자라는 다양한 생명들의 함께 함과 서로 도움이 삶을 더 완전하고 풍요롭게 한

다. 너와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믿고, 우주와 곁에 있는 친구들의 은혜에 잇대어 사는 삶에 감사하며 소망

을 잘 품고 살기를 기도하게 된다. 밭에서.

農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