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 오사에 대한 연구 (大天 五事에 대한 硏究) - 민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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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大天 五事에 대한 硏究 指導敎授 전 호 련(해주)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閔 明 淑(벽공)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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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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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大天 五事에 대한 硏究

指導敎授 전 호 련(해주)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閔 明 淑(벽공)

2002

碩士學位論文

大天 五事에 대한 硏究

閔 明淑(벽공)

指導敎授 전 호 련(해주)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3年 月 日

閔 明淑(벽공)의 文學 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2003年 月 日

委員長 __________________㊞

委 員 __________________㊞

委 員 __________________㊞

東國大學校 大學院

- iii -

目 次

Ⅰ. 緖 言 ····························································································1

1. 硏究動機와 目的 ·············································································1

2. 硏究方法과 範圍 ·············································································2

Ⅱ. 佛滅後 敎團의 分派 ··································································4

1. 結集과 敎團의 形成 ·······································································9

2. 根本分派의 年代 ·········································································30

Ⅲ. 諸論에 나타난 大天의 評價와 五事 ····································34

1. 諸論에 나타난 大天의 平價 ························································36

2. 大天의 五事에 관한 異見 ····························································41

1) 五事의 傳承 ·····················································································42

2) 大天 以前의 五事內容 ····································································43

3) 大天의 五事 ·····················································································50

Ⅳ. 大天의 五事와 阿羅漢 ····························································59

1. 阿羅漢 槪念의 成立과 展開 ························································59

2. 阿羅漢의 범주 ···············································································62

3. 佛陀와 阿羅漢의 관계 ·································································65

1) 佛陀와 阿羅漢의 根源的 관계 ······················································65

2) 佛陀와 阿羅漢의 깨달음과 救濟方便 ·········································66

4. 각 部派의 阿羅漢觀 ·····································································69

- iv -

1) 上座部系統의 阿羅漢觀 ··································································69

2) 大衆部系統의 阿羅漢觀 ································································72

Ⅴ. 大天의 五事가 불교사에 미친 향 ····································74

1. 大天의 五事와 根本分派의 관계 ················································74

1) 上座部의 입장 ·················································································81

2) 大衆部의 입장 ·················································································83

2. 僧團에 미친 향 ·········································································85

3. 菩薩思想의 成立 ···········································································87

Ⅵ. 結 語 ··························································································96

參 考 文 獻 ·····················································································99

ABSTRACT ·················································································105

- 1 -

Ⅰ. 緖 言

1. 硏究動機와 目的

부처님 당시의 불교 교단은 一味和合의 僧團을 이상으로 하는 종교 단체 으며,

교단은 세속에서 서로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왔던 이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므로 구성원들간의 교리나 계율, 혹은 수행방법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로 심각

한 諍事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와 같은 불화는 부처님 열반 이후에 더욱 심화되는데, 이것은 오직 經律만을

의지해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불타가 남긴 가르침에 의해 합

리적으로 해결 가능한 경우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존의

규정에 비추어 合法인가 非合法인가를 둘러싸고 비구들간에 의견차이가 생기는 것

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佛滅 후에 교단의 활동 범위가 印度 각지로 넓어짐에 따라 각 지역을 중심

으로 승가가 형성되면서 지역의 특수성이 가미되어 律의 적용이나 수행의 방법에

도 현저한 차이가 나게 되었다. 여기에 사회적․경제적인 변화로 승원에 안주하는

자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자들이 분리되어 서로를 비판하는 경향도 생기게 되었

다. 그 가운데 大天의 五事는 초기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 던 阿羅漢에 대

한 비판의 문제로 僧伽 分派와 더불어 부파불교 시대의 학파 형성 이외에 대승불

교의 형성에 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불타가 열반한 이후에 원시불교의 교단은 上座部와 大衆部라는 두 부파로 나뉘

어졌으며, 남북방의 傳承은 그 원인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

은 교단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교단 구성원간의 논쟁과 대립을 의미한다.

또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과 주장을 함으로써 분파의 계기가 되었

- 2 -

다. 즉 北方所傳은 大天의 五事에, 南方所傳은 十事非法에 기인하여 분파의 원인을

찾고 있다. 불교의 전통에서 이렇게 相異한 분파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당시 사람들의 분파에 대한 입장이 상이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각각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띄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

다.

본 논문은 불타가 열반한 이후에 교단의 근본분파에 대한 원인과 상이한 견해를

살펴보면서 근본분파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大天의 五事에 대해 고

찰해보고자 한다.

大天은 五惡見을 주창하여 불교 교단의 분파를 초래한 惡比丘로 지탄을 받기도

하고, 혹은 學德을 겸비한 스승으로 평가되기도 한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五事의

문제는 불교 교단에 주요한 논제가 되어 왔으며, 승가분파와 더불어 部派佛敎와

大乘佛敎의 형성에 적지 않은 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한편 大天이 五事를

주장한 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보다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서 佛果를 얻으려고 하는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大天의 五事說이 등장하게 된 당시 교단의 상황은 어떠했으며, 五事說

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는 무엇인지, 五事說에 대한 승가의 관심과 반응은 어떠했

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五事의 전승과 五事의 주장에 대한 배경, 그리고 원인을 분석하여 大天의 五事

제창 후 승가는 어떻게 변모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구

체적 동기다.

2. 硏究方法과 範圍

각 부파의 주요 논서, 즉 八犍道論 , 發智論 , 大毘婆沙論 , 異部宗輪論 등

- 3 -

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大天五事에 관한 각 학파의 주

장을 비교하여 大天五事의 진의와 그 본질적 의도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상

세한 이해를 위해 여러 가지 빨리어 해석본과 한문본, 그리고 기존의 여러 학자들

의 연구 성과물을 참조하 다.

본 논문 Ⅱ장에서는 結集과 敎團의 형성 및 敎團分派의 연대를 살핌으로써 그에

대한 배경과 상이한 견해를 살펴보고자 하며, Ⅲ장에서는 諸論에 나타난 大天의

評價와 大天의 五事에 관한 異見, 大天 이전의 五事 傳承과 大天이 주장하는 五事

의 내용을 大毘婆沙論 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하며, Ⅳ장에서는 阿羅漢의 의

미와 정의, 佛陀와 阿羅漢의 관계 및 根源的 관계, 佛陀와 阿羅漢의 깨달음과 救濟

方便 및 각 부파의 아라한관을 정리해 보고, Ⅴ장에서는 大天의 五事와 교단분파

의 관계, 上座部와 大衆部의 입장, 大天五事가 교단에 미친 향과 菩薩思想의 성

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의 시대적 범위는 제1결집부터 초기대승의 보살사상 성립시기까지로 제한하

고자 한다.

- 4 -

Ⅱ. 佛滅後 敎團의 分派

불타가 열반한 이후에 불교 교단이 部派로 分裂된 것은 傳言에 의하면 교단의

내부사정에 의해서다. 즉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들 사이에 생활 속에서 일어난 문

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드러나 분쟁이 생겼기 때문에 그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회합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단체의 통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석존의 遺敎가 合誦되

었다고 한다. 이러한 집회를 일반적으로 결집이라고 칭하며, 결집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던 비구들이 별도로 새로운 부파를 결성했다고 전해진다.

部派敎團은 승가의 분파에 의해서 발생한다. 승가의 분파는 ‘破法輪僧’과 ‘破羯磨

僧’이 있다. ‘破法輪僧’은 승가를 불교 이외로 개종시키려 하는 분파로 提婆達多의

破僧을 칭한다. 그에 대하여 破羯磨僧은 불교 내부의 분파이다. 즉, 갈마에 의해서

구성된 승가의 분파를 의미한다. 대립한 두 派의 비구들이 별도로 갈마를 하는 경

우 처음으로 승가의 분파라고 한다.1)

불교 교단의 분쟁은 석존 재세 시부터 있었다. 유명한 提婆達多의 五事와 불교

교단의 五事의 쟁론을 시작으로 하여, 불타가 코삼비의 고시타園에 머무실 때 장

로 아나율과 함께 거주했던 바히야라는 비구가 교단을 분파하려는 생각뿐이었는데

도 아나율이 한 마디도 참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타께서 사건을 우려했다는 기록

이 있고2), 코삼비의 비구들이 격렬하게 쟁론하고는 화해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중

부경전에 전해진다.3) 彌沙塞律 4)에 대가섭과 부루나의 推問答, 阿育王傳 의 아

난다와 가섭의 問答5), 특히 결집이 끝난 뒤 대가섭이 아난을 呵責하는 설명이 구

1) 平川彰, 「律藏より見たる大乘敎團」, ( 印度學佛敎學硏究 6­1), pp.34∼35.

** 이후부터 印度學佛敎學硏究 는 印佛學 으로 약칭함.

2) Aṅguttara - Nik ya, IV.241(vol. II, p.239) 南傳藏 18, p.418.

3) Majjhima­Nik ya,. 48(vol.1, p.320) 南傳藏 10, p.54. 增一阿含經 16( 大正藏 2,

p.626中). 金倉圓照, 印度中世精神史 中, (岩波書店, 昭和 37), pp.196∼198.

4) 彌沙塞律 ( 大正藏 22, p.191).

5) 阿育王傳 권4( 續藏經 10, p.14). 高井觀海, 小乘佛敎槪論 , (山喜房書林, 昭和 53), p.5.

- 5 -

체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각 율장에서 이에 대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나 빨리율에서

는 다섯 가지 사실을 들고 있다.6)

빨리본 法句經 의 주석에 설하고 있는 코삼비에 있었던 說法長老(Dhamma

Katika)와 持律長老(Vinayadhara)의 쟁론 등이 있으며,7) 불타가 열반한 이후 수밧

다(Subhada)의 폭언은 대가섭 등으로 하여금 경과 율의 합송을 서두르게 한 것과

합송 중에 장로 등과 아난다의 小小戒 經律에 대한 논란의 발생, 또한 합송 후에

당시 오백 비구 등과 함께 남산에 유행하고 있었던 부루나가 결집의 내용에 대한

승낙의 거부 등은 교단 분파의 발단 조짐이라고 볼 수 있다.

僧殘의 제10조 ‘僧伽의 分派라는 學處(Saṅghabhedasikkh padaṃ)’8)와 제11조 ‘分

派를 따름이라는 學處(Bhed nuvattakasikkh padaṃ)’9)에서 볼 수 있듯이 불타의

재세 시에 승가를 분파시키고, 승가를 분파하는 무리를 돕거나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승려들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또한 갈마에 불만을 품은 비구는 갈마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는 사례

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제바달타와 제바달타를 따르는 무리는 승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리를 형성하 다.

대가섭의 열반 후에 법의 傳持者로서 아난다( nanda)와 율의 전지자로서 우빨

리(Up li)를 시작으로 경과 율의 사자상승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만일 법의 내용인

經律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면 이것은 經律 겸비의 중심인물의 소실을 의미

하게 되는데, 그에 따르는 교단 통제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어 각 파에 대한 분파

대항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와 관련하여 그 문제를 단속하려는 상좌 장로들

의 노력이 도리어 소장파 혹은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비구 등에게 반감을 사는 결

6) 五分律 권30( 大正藏 22, p.191). 申星賢, 「初期佛敎 敎團에서 迦葉과 阿難의 關係」

佛敎學報 第36輯,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1999), p.262.

7) 쟁론에 대한 내용은 賀幡亭俊, 「大天の五事非法につぃて」 ­初期イント淨 土敎思想との

關連から­, ( 印佛學 , 7­2), pp.166∼167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8) VinayaⅢ. pp.172∼173. 백도수, 「 比丘戒經(Bhikkhup timokkhasuttaṃ) 에 대한 연구」,

東國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1, p.55.

9) VinayaⅢ. p.175. 백도수, 위의 논문, p.56.

- 6 -

과가 되어 교단의 분파를 더욱 조장하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된 것이다.10) 당시

승가의 질서는 법과 율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승가는 비구들의 합의 하에 운 되

었기 때문에 각자의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었다. 특히 초기의 전승은 口傳

이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비구들의 그룹이 촉구되었다. 경전을 암송하

므로 도둑맞거나 홍수, 화재로 분실될 염려나 경전의 내용이 바라지 않는 이에게

전달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11) 이것은 승가 내에 견해의 차이를 생기게 하고 견

해를 달리하는 그룹 사이에 쟁론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승성

전의 해석에 대한 견해 차이에 의해서 분파의 본질적인 원인과 이유가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의 정치․경제면을 살펴보면 전 시대의 공화정치가 붕괴되고 국왕의

권력이 확대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자산경제의 진전이 수반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 변동은 비구들의 생활환경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재가신자

들의 승가와 승원에 대한 보시는 일시적인 주거지에서 구적인 정주지로 발전시

켰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승으로써 변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생활을 규정하는 律의 체계화가 현저하게 진전되었으며, 화폐경제의

발전은 젊은 비구들의 생활이념에 많은 향을 주게 되었다. 교단의 수입이 증대

되어 출가승려의 생활이 윤택하게 되자 신앙심에 의해서가 아닌 생활 때문에 출가

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12) 혹자는 재물에 현혹되기도 했다는 내용이 성전에

등장하기도 한다.13) 그에 따라 교단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타종교인들로부터 비

난을 받는 사례도 생겨나게 되었다.14)

베살리의 제2결집에서 보이는 金錢納受의 문제15)는 생활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10) 西 義雄, 阿毘達磨佛敎の硏究 , (國書刊行會, 昭和 50), pp.9∼10.

11) 鄭舜日, 印度佛敎史 , (원광대학교출판부, 1999), p.98.

12) 中村元, 原始佛敎の成立 , ( 原始佛敎 2, 小林製本所, 昭和 53), p.363.

13) 早島鏡正 편저, 박용길 역, 비구의 고백․비구니의 고백 , -마음으로 읽는 불전 3-,

(민족사, 1991), pp.170∼171.

14) 芳村修基 編, 佛敎敎團の硏究 , (百華苑, 昭和 43), pp.66∼67.

15) 南傳藏 4, p.459; 大正藏 24, p.677下.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p.455下); 毘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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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의 규정에 대한 저촉을 정법으로 합법화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문제

는 교단 내의 보수적이고 엄격주의자인 장로들과 진보적인 관용주의들간에 쟁론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즉 실생활에 적응할 수 없게 된 율조문의 엄격함을 개혁

적 해석에 의해서 완화시키려는 진보적인 입장[持法者․說法者]에 대해서 어디까

지나 조문의 이행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입장[持律者]의 대항, 혹은 비구의 생활에

있어서 용인되었던 관습[淨法]을 제약하기 위하여 새로운 규정을 개혁하려는 엄격

주의[持律者]에 대해서 종래의 자유를 주장하는 관용주의[持法者․說法者]의 대립

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불교 교단 내의 변화와 그 변화에 대응하는 비구

들간의 입장 차이를 엿볼 수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으로, 佛滅 후의 불교 교

단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의 대항이 점점

표면화되어 베살리 결집 이후 아쇼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융화할 수 없는 부

파[上座部․大衆部]로 발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16)

또한 불타의 遺法에 대한 해석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異說이 평등

한 입장으로 주장되었다. 그 때문에 이설의 그룹을 일방적으로 파문하는 권한은

어떤 승가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견해를 달리하는 비구들은 독립한

승가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출가자들의 최고 목표 던 아라한에 대한 비판,

석존의 理想化와 超人化를 둘러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 등이 쌓여 일어난

것이다.

분파의 원인에 대한 대표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

① 島史(Dīpaviṃsa) 를 시작으로 하는 세일론 편년사는 칼라 아쇼카왕(Kala

Aśoka 100년)의 치하에 밧지족이 주창한 十事에 의해서 상좌부와 대중부의

母經 ( 大正藏 24, p.819中); 有部毘奈耶雜事 (同24, p.412上, p.413上15);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高麗大藏經 23, p.573上 ; 五分律 ( 大正藏 22, p.192 中,

p.194 中).

16) 岩波講座 東洋思想 第10卷, ( インド佛敎 3, 岩波書店, 1989),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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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二部의 분파가 생겼다고 전하지만 빨리 율장을 비롯하여 諸部의 율장에

서는 이러한 내용은 설해지지 않고 단지 세일론 상좌부만의 독립 전승에만

나타난다.17)

② 현장역의 異部宗輪論 에 의하면 佛滅 후 100여 년 아쇼카왕의 치세에 王都

華氏城에서 大天의 五事를 둘러싸고 상좌부와 대중부의 이부로 분파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역의 部執異論 , 十八部論 , 티베트 역에서는 五事를

둘러싸고 분파했다고 전할 뿐 大天의 이름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18)

③ 大衆部系의 所傳으로 보이는 舍利弗問經 에는 舊律(가섭이 결집한 대중부

율)과 新律(구율에 새로운 증광을 가한 것)의 찬반을 둘러싸고 구율의 찬성

자는 다수로서 大衆部라고 부르고, 신율의 찬성자는 소수이지만 장로비구들

이 있었기 때문에 上座部로 불 다. 이것이 율의 增廣에 따른 분파의 원인이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재의 계본 가운데 衆學法의 다수를 보면 大衆部율

에 비해서 上座部나 說一切有部의 중학법의 수가 더 많다.19)

④ 바브야(Bhavya)의 이부 분파의 해설에는 上座部의 所傳은 佛滅 후 116년 아

쇼카왕의 치세에 많은 쟁론이 생겼으므로 승가가 이부로 분파되었다(제1설)

고 전하고 있으며, 대중부전에 따르면 上座部, 大衆部, 그리고 分別說部의 세

가지 부파로 분파했다고 할 뿐, 근본분파의 연대에 대한 언급이나 그 사유는

上座部 소전과 동일하게 제시되고 있다.20)

⑤ 바브야(Bhavya)의 正量部傳21)에 의하면 佛滅 후 137년 화씨성에서 난다

17) 島王統史(Dīpaviṃsa) iv; 大王統史(Mah vaṃsa) iv. 44∼53; v. 16∼32. pp.55∼

59. ( 南傳藏 60, pp.167∼173).

18)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15上, 15中); 十八部論 ( 大正藏 49, pp.18上); 部執異

論 ( 大正藏 49, pp20上).

19) 舍利弗問經 ( 大正藏 24, p.900下).

20) 異部分派解說(Nik yabheda­vibhaṅga vi khy na) (東北大學西藏大藏經總目錄 No. 4139).

21) 바브야의 Nik yabheda는 全稱을 異部分派解說 이라 한다. 티베트에만 傳譯되었으며,

저자 바브야는 한역의 청변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내용은 소승 18부 분파의 양상을

간단하게 기록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곳에 상좌부, 대중부, 정량부의 3파의 소전을 순

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1설은 상좌부 전으로 승가의 분파가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

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2설은 대중부전이며 근본분파를 상좌부, 대중부, 분별설부

- 9 -

(Nanda)왕과 마하파드마(Mah padma)왕이 聖衆을 소집했을 때, 악마 바드라

(Bhadra)가 비구의 옷을 입고 갖가지로 神變을 보이고 五事(大天의 五事와

거의 같음)를 제창하고 승가를 이분했다(제3설)고 전하고 있다.22)

根本分派의 원인으로 남북의 전승은 十事, 五事, 律의 增廣 그리고 내용 불명의

쟁론의 전거를 들 수도 있지만, 계율에 대한 관대주의와 엄격주의의 대립, 석존의

이상화와 초인화를 둘러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 경설을 둘러싼 대립 등이

쌓여서 근본분파가 일어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와 함께 사회, 경

제사적인 원인으로 살펴보면 마우리아 왕조의 쇠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쇼카왕 시대에는 華氏城의 불교 교단이 당시의 불교 교단 전체의 통합적 중심

으로 중요시되어 코삼비나 산치 지방의 불교도 그 향 하에 있었는데, 당시 아쇼

카왕의 파승을 막고자 하는 강한 시책 덕분에 분파를 피할 수 있었으나 왕의 사후

에 분파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23) 근본분파의 연대에 대해서는 부파에 따라

相異가 있으니 빠르게는 佛滅 직후 제1결집으로 보고(窟內, 窟外結集), 늦게는 기

원전 제3세기의 아쇼카왕의 시대로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방법으로 등

장한 것이 결집이다.

1. 結集과 敎團의 形成

第1結集24)은 王舍城(R jagṛha) 結集, 五百結集, 五百集法, 大伽葉 結集, 제1차 合

의 3부로 설명하고 있다. 제3설은 정량부의 소전이라고 하는데 악마 바드라의 五事로

인한 분파에 대해 설하고 있다. 金倉圓照의 中世精神史 中, pp.285∼286 참고.

22) 異部分派解說(Nik yabheda­vibhaṅga­vi khy na) , 大谷, No.5640, Vol.127, pp.253∼

1-1ff.

23) 靜谷正雄, 小乘佛敎史の硏究 , pp.5∼6.

24) 제1차 결집에 대한 자료로는 毘尼母經 ( 大正藏 24, pp.817上∼819中), ( 高麗大藏經

24, pp.519下∼523上) ; 十誦律 ( 大正藏 23, pp.447上∼450上); 摩訶僧祗律 ( 大正

藏 22, pp.490中∼493上), ( 高麗大藏經 21, pp.391上∼395上); 五分律 ( 大正藏 22,

pp.190中∼192上); 根本有部雜事 ( 大正藏 24, pp.402下∼408中); Culla­vagga, 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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誦(pathamadhammasaṃgīti) 등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결집의 장소에 따

라서 왕사성 결집이라고 칭하고 있다. 佛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침을 열었

고 가르침의 내용도 다양하 다. 그러한 가르침은 비구들이나 재가자들에게 각인

되거나 전달되어 전해져 왔는데, 불타의 열반 직후 500명의 아라한 비구들이 불타

의 규정(Vinaya)과 가르침(Dharma)을 굳건히 보존하고자 하 다. 그것으로 인해

성립된 것이 바로 제1차 결집이다. 결집에 대한 동기는 자료에 따라 다른데 율장

에서 전하는 동기와 경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 다르다.

빨리율에 따르면 불타가 반열반에 들어 7일이 지나 늙은 출가자인 수밧다25)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들이여, 울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大沙門에게서 잘 벗어났다. 우

리는 억압되었었다. 이것을 너희들은 해야 한다, 이것을 너희들은 해서는 안 된

다고 하 다. 지금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말자.”26)

가섭은 이 비구의 말을 들으면서 승단의 기강과 장래를 우려하며 불타의 가르침

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여 결집을 결심한다.

“존자들이여, 우리들은 법과 율을 잘 결집합시다. 법 아닌 것이 더 널리 퍼지

Ⅱ, X1. pp.2∼15); 撰集三藏及雜藏傳 ( 大正藏 49, pp.1下∼4上); 迦葉結經(권1)

No,2027, 後漢(A.D.147­) 安世高譯( 大正藏 49, pp.4中∼7上); 阿育王傳 ( 大正藏

50, pp.112下∼114上); 阿育王經 ( 大正藏 50, pp.150中∼152上); 佛般泥洹經 ( 大正

藏 1, pp.175上∼下); 般泥洹經 ( 大正藏 1, pp.190下∼191上); 分別功德論

(No.1507, 後漢(­A.D.220) 失譯, 大正藏 25, pp.40下∼41上); 菩薩處胎經 ( 大正藏

12, pp.1058上∼中); 大智度論 (No,1509, 後漢(A.D.402∼405) 鳩摩羅什譯, ( 大正藏

25, pp.67中∼70中); 大悲經 (No.380, 高齋(A.D.558) 那連提耶舍譯, ( 大正藏 12,

pp.971中∼下); 島史(Dīpaviṃsa) ; 大史(Mah vaṃsa) ; 善見律毘婆娑 , Sama­ntap sadik , 四分律 의 500결집사( 大正藏 22, pp.966下∼968下) 등에 설해져 있다.

25) 馬田行啓, 印度佛敎史 , (早稻田大學出版部, 大正藏 14, p.105)에 의하면, ‘혹은 외도라

고도 전한다’고 설하고 있다.

26)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 (V. ii pp.284∼285)(南傳藏, 4, pp.426∼427).

alaṃ vuso ma socittha m paridevittha, sumutt mayaṃ tena mah samaṇena,

upaddut ca mayaṃ homa idaṃ vo kappati idaṃ vo kappatīti, id ni pana mayaṃ

yaṃ icchiss ma taṃ kariss ma, yam na icchiss ma na taṃ kariss m '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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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전에, 법이 사라지기 전에, 율 아닌 것이 널리 퍼지기 전에, 율이 사라지기

전에, 법을 헐뜯는 자가 힘을 얻기 전에, 법과 율을 지니는 자가 약해지기 전

에.”27)

라고 가섭은 말하면서 불타가 남긴 가르침을 결집할 것을 제의했으며, 그곳에 있

던 비구들은 모두 찬성했다.

五分律 과 善見律毘婆娑 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28) 四分律

과 五分律 , 그리고 毘尼母經 에서는 폭언을 한 비구는 수밧타가 아니고 우파난

타(跋難陀)로 되어 있으며,29) 十誦律 30)에서는 폭언을 한 사람은 ‘한 비구’로 되어

있다. 島史 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大史 에서는 역시 수

밧타(善賢)의 폭언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며,31) 摩訶僧祗律 에서는 ‘摩訶羅의 한

비구’ 가 폭언한 것으로 되어 있고,32) 大唐西域記 에서는 ‘게으른 비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33) 大唐西域記 의 이러한 표현은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면 再考

해 보아야 할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한다.

經藏에서는 律藏과는 달리 결집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佛般泥

洹經 34)과 般泥洹經 35)에서는 결집 동기를 말하지 않고 결집에 대해서만 언급하

고 있다. 迦葉結經 36)에 의하면 불타가 열반에 든 직후 수많은 제자들이 불타의

27)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V. ii pp.285)(南傳藏 4, p.427). handa

mayaṃ vuso dhammañ ca vinayañ ca saṃg y ma, pure adhammo dippati

dhammo paṭib hiyati, avinayo dippati vinayo paṭib hiyati, pure adhamm­

av dino balavanto honti dhammav dino dubbal honti, avinayav dino

balavanto honti vinayav dino dubbal hontīti.

28) 五分律 ( 大正藏 22, p.190中); 善見律毘婆沙 ( 大正藏 24, p.673中∼下).

29) 四分律 ( 大正藏 22, p.966中); 五分律 ( 大正藏 22, p.190中); 毘尼 母經 ( 大正

藏 24, p.818中).

30) 十誦律 ( 大正藏 23, pp.445下∼446上; p.447上∼中).

31) 南傳藏 60, p.164.

32) 摩訶僧祗律 ( 大正藏 22, p.490中).

33) 大唐西域記 ( 大正藏 51, p.922中).

34) 佛般泥洹經 ( 大正藏 1, p.175上 이하).

35) 般泥洹經 ( 大正藏 1, p.190上 이하).

36) 迦葉結經 ( 大正藏 49, p.4中). 前田惠學, 原始佛敎聖典の成立史硏究 , (山喜房佛書林,

1964),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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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이어 반열반에 든다. 그래서 가섭이 결집을 결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阿育

王經 과 阿育王傳 에는 불타가 열반에 들기 직전 가섭에게 결집할 것을 유언한

것으로 되어 있다.37)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와 大智度論 에서는 불타가 가섭에게 삼장을 결집

할 것을 부촉했으며,38) 撰集三藏 및 雜藏傳 에서는 결집동기에 대해 한 마디

설명도 없이 가섭이 대중들에게 결집할 것을 제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39)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결집동기는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핵심에 있어

서는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佛滅 후 불타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던 많은

제자들이 불타의 뒤를 따라 열반에 들어 불타의 가르침이 사라져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0)

결집은 대가섭을 중심으로 500명 아라한이 실현하 다고 전하고 있으며, 대가섭

이 우빨리에게 律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41) 결집 시기는 일반적으

로 佛滅 후 100일로 알려져 있다. 빨리본 善見律毘婆娑 에 따르면 7일간 축제를

열고 7일간 사리 공양을 하 다. 그리고 한 달 반이 지나 안거 중에 한 달은 사원

보수와 청소 등을 하 기 때문에 열반 후 3개월 약 90일에 결집을 하 다.42) 장소

는 왕사성의 18개 대사원을 보수하고 웨바라산 칠엽굴의 입구에 만다라당을 세워

부처님의 법좌와 500명의 아라한의 자리 등을 마련하고 합송하 다. 법과 계율의

정비를 절감하고 나서 결집에 앞서 房舍 수리부터 먼저 하기로 합의를 본 점은 석

존 입멸 후 불교 교단을 보는 타종교인의 눈을 의식한 소치인 것이다. 율전의 방

사건도에 설해진 이 사실은 석존의 열반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자신감을 잃게 하

37) 阿育王經 ( 大正藏 50, p.150上); 阿育王傳 (同 p.112上).

38) 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02下); 大智度論 ( 大正藏 25, p.67上∼中).

39) 撰集三藏及雜藏傳 ( 大正藏 49, p.1下).

40) 尹炳植, 「初期佛典의 成立硏究(1)」, 佛敎學報 제30,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1993), p.94.

41) 十誦律 , 僧祗律 , 根本說一切有部律 에서는 율의 결집보다 경의 결집이 먼저 설해

지고 있다. 그러한 형식에 따르는 경전은 북방쪽에 많다고 한다(金倉圓照, 印度中世精

神史 , p.205).

42) 백도수, 「선견율비바사」, 불교원전연구 , (불교문화연구원, 2002), pp.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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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43)

「小品(Culla­vagga)」의 오백건도에 의하면44) 결집시 대가섭이 사회자가 되어

우빨리에게 율을 묻고 그것에 대하여 답을 하 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4바라이의

규정이 어느 곳에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사정 때문에 불타에 의해서 제정되었

는가를 묻는다. 이렇게 해서 각 규정의 事情(vatthu), 由來(nidana), 人(puggala),

制(근본 제정, paññatti), 殊制(보충 제정, anupaññatti), 犯( patti), 不犯(an patti)에

대해서 질문이 반복되고, 비구․비구니의 율이 정해졌다.45) 그 다음 대가섭은 아난

다에게 법을 묻고 아난다는 그의 물음에 대해서 梵網經 이나 沙門果經 등이 어

느 곳에서 누구에 대해서 설해졌는가를 대답하 다.46)

대가섭은 다시 5부 니까야에 대한 경의 유래와 사람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아난

다가 說時, 說處, 因緣, 對機, 說法, 領解 등을 송출했다고 한다.47) 그 당시 부라나

(Purana)는 500비구와 함께 남산에 유행하고 있었는데, 상좌들이 그에게 합송한

내용을 허락 받고, 또한 수지하기를 권하 다. 그러나 그는 ‘상좌들이 법과 율을

합송한 것은 좋지만, 나는 세존께 직접 듣고 수지하 다’고 답하 다.48)

이상이 Culla­vagga의 오백건도에 전하는 제1결집의 내용인데, 그 외 부파의

43) 해주지음, 불교교리강좌 , ( 바라 총서 8, 불광출판부, 1993), p.64.

44)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 (V. ii 287∼288)(南傳藏, 4, pp.429∼430);

atha kho yasm Mah kassapo yasmantaṃ Up liṃ catutthassa p r jikassa

vatthum pi pucchati nid naṃ pi puccati … an pattiṃ pi pucchi. 五分律 권30,

僧祗律 권32, 에도 각각 경을 아난이, 율은 우빨리가 결집했다고 설하고 있다.

45)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 (V. ii 287∼288)( 南傳藏 4, pp.429∼430);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上∼中); 五分律 ( 大正藏 22, pp.190下∼191上); 毘

奈耶雜事 ( 大正藏 24, pp.407下∼408中); 善見律 ( 大正藏 24, p.675上∼中). 十誦

律 ( 大正藏 23, pp.447下∼448中)은 우빨리의 송출내용을 대중들에게 확인하고 있다.

馬田行啓의 印度佛敎史 , p.106에 의하면 制時, 制處, 因緣, 對機, 制規, 犯戒 등을 송

출했다고 하 다.

46)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 (V. ii p.288)( 南傳藏 4, p.430).

47) 馬田行啓, 印度佛敎史 , p.106.

48) Vinaya­piṭaka Culla­vagga [V2b 11] (V. ii p.301)( 南傳藏 4, p.433); 五分律

( 大正藏 22, pp.191下­192上)에서는 부라나가 불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는

일곱 가지 계율조항에 대해 의의를 제기했다. 그것은 모두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塚

本啓祥, 初期佛敎敎團史の硏究 , (山喜房佛書林, 昭和 41), pp.17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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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과 비교하면 전설을 구성하는 요소와 편성의 순서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다.

즉 十誦律 이나 四分律 등에서는 經과 아비담은 아난다가, 律은 우빨리가 송출

했다고 설하고 있으며,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대가섭이 직접 摩窒里迦(논장)를

설했다고 한다.49)

또한 島史(Dīpavaṁsa) 에 의하면 다른 지방의 같은 장소에서 法과 律의 결집

을 했으며, 九分敎를 언급했다고 설하고 있다.50)

현재는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三論玄義 나 三論玄義誘蒙 , 三論玄義檢幽集

등에 인용되고 있는 部執異論疎 에 의하면 “왕사성의 결집시에 가섭이 교수한 界

內의 아라한들, 즉 상좌제자부 외에 界의 밖에서 婆師波가 교수한 대중이 있었는

데 그들이 스스로 一部를 만들어 대중부라고 칭하 다”고 하 다.51)

大唐西域記 에 의하면 “마하가섭은 千人의 대아라한 등과 함께 여래가 열반한

후 雨季의 3개월간에 걸쳐서 三藏을 결집했다. 그의 결집을 상좌부(의 결집)이라고

하며, 그 장소의 서북쪽에서 대중부가 결집을 했는데 凡聖兩衆이 함께 모 기 때

문에 대중부(의 결집)이라고 한다”52)고 설하고 있다.

제1결집의 전설을 사실로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많은 논

란이 있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H. Oldenberg,53) F.O.

Franke,54) A. Bareau,55) E. Frauwallner56) 등이 있다. 이들은 大般涅槃經 에 결집

49)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40( 大正藏 24, p.408中).

時迦攝波作如是念……卽昇高座告諸苾芻曰 摩窒里迦我今自說

50) Dīpavaṁsa ( 南傳藏 60, p.26); 尹炳植, 「初期佛典의 成立 硏究(1)」, 佛敎學報 第

30輯,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1993), p.113; 前田惠學, 原始佛敎聖典の成立史硏

究 , pp.557∼558.

51) 三論玄義誘蒙 ( 大正藏 70, p.550下); 三論玄義檢幽集 ( 大正藏 70, p.456下).

52) 大唐西域記 ( 大正藏 51, pp.922中∼923上).

時尊者摩訶迦葉 在車與九百 九十大阿羅漢 如來涅槃後 結集三藏 … 而此結集凡聖東會

因而謂之大衆部.

53) H. Oldenberg, The Vinaya Piṭaka(PTS I, 1879), intord. p.xxvi.

54) F.O. Franke, The Buddhist Councils at R jagaha and Ves lī(JPTS, 1908), pp.1f.

55) A. Bareau, Les premiers conciles bouddhiques(Paris, Imprimerie de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55), pp.1∼30.

56) E. Frauwallner, Die buddhistische Konzile(ZDMG, 1952), pp.24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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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등이 설해 있지 않은 것 등을 거론하며 제2결집에 대한 권

위를 드러내기 위해 제1결집을 사실적인 것으로 설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인물로는 L. de la Vallée Poussin,57) N. Dutt,58) W.

Geiger,59) 渡邊梅雄, 金倉圓照60) 등으로 제1결집의 역사적 사실성의 진위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전설이 전

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논하고 있다. 특히 한역경전인 佛般泥

洹經 (白法祖譯) 卷下, 般泥洹經 (失譯) 卷下, 大般涅槃經 (法顯譯) 卷下의 三本

에는 명백하게 제1결집의 설명이 인정되는 것으로 논하고 있다고 밝히며 앞의 주

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61) 佐藤密雄도 장부의 大般涅槃經 의 불타 입멸 직후의

기록과 律藏 의 「小品」의 기록(제11. 제20건도)에 나타난 기록을 의거하고 이것이

經과 律을 이분한 것이라고 論斷하 다.62)

제1결집 후 약 100년 후에 계율의 완화를 요구하는 제2결집이 이루어졌다. 제2

결집63)은 Vaiś li(ves li, 毘舍離)의 결집이라고 하며, 摩訶僧祗律 64)에서는 7백집

법장, 7백결집율장으로 불린다. 이것은 칠백인의 회의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

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좌부계 계율의 경우 빨리율65)에서는

칠백인건도(Sattasatika­khand haka), 四分律 66)에서는 칠백집법비니, 五分

57) L. de la Vallée Poussin, Les duex premiers, Muséon, vol. Ⅵ, pp.213∼325(tr. into

Eng. in IA, 1908).

58) N. Dutt, Early Monastic Buddhism(Calcutta, 1941), I. pp.324∼340.

59) W. Geiger, The Mah vaṃsa, or the Great Chronicle of Ceylon, 2nd ed.,(PTS, 1934),

intord. p.1vii.

60) 金倉圓照, 印度中世精神史 中, pp.196∼215.

61) 前田惠學, 原始佛敎聖典の成立史硏究 , pp.559∼562.

62) 佐藤密雄, 原始佛敎敎團の硏究 , (山喜房佛書林, 昭和47), p.53.

63) 제2차 결집의 자료로는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下, 高麗大藏經 24, p.523

上∼524上); 十誦律 ( 大正藏 23, pp.450上∼456中, 高麗大藏經 21, pp.1143下∼1152

下); 四分律 ( 大正藏 22, pp.968下∼971下); 摩訶僧祗律 ( 大正藏 22, pp.493上∼

下); 五分律 ( 大正藏 22, pp.192上∼194中); 根本有部雜事 ( 大正藏 24, pp.411

下∼414下); 法顯傳 ( 大正藏 51, p.86); Culla­vagga Ⅻ; Dīpavaṃsa iv;

M havaṃsa iv pp.44∼53; Samantap s dik , pp.37∼69이 있다.

64) 摩訶僧祗律 卷33( 大正藏 22, p.493上).

65) Vinaya­piṭaka, Culla­vagga Ⅻ, vol. Ⅱ, p.307. ( 南傳藏 4,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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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 67)에서는 칠백집법으로 부른다. 그리고 十誦律 68)에서는 칠백비구멸악법품으

로 부른다. 有部毘奈耶雜事 의 경우는 불타의 열반에 앞선 遊化時代로부터 제1결

집과 제2결집까지의 사건을 역사적인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칠백

건도를 1장으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69) 攝頌 에서는 “第八門第十子攝頌之六, 五百

之餘及七百結集事”70)라고 하고 卷末에서도 “時有七百阿羅漢, 共爲結集, 故云七百結

集”으로 전함에 따라 이 역시 칠백결집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71) 또는, 제2

결집(dutiyasaṃgaha), 제2합송(dutiyasaṃgīti)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베살리 결집의 전설은 상좌부계의 5개 율장, 대중부에 속하는 摩訶僧祗律 , 빨리연

대기의 전승이 있는데, 상좌부계의 諸律에 보이는 기록의 내용은 거의 일치하지만 베

살리 결집 전설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摩訶僧祗律 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일치하되 얼

마간의 간과할 수 없는 상위점이 보인다. 더구나 빨리연대기(세일론사전)의 내용은 部

派 分派라는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고 있어 그 구성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상좌부계의 전승에 의하면 佛滅 후 100년 혹은 110년에 베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베살리에서 十事를 선언했다고 설하고 있다. 빨리율의 칠백건도에 의하

면 칠백회의가 개최된 것은 세존의 반열반으로부터 百歲 때 베살리 밧지족 비구들

이 十事를 제기하 다고 하여 佛滅 후 1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島

史 , 大史 , 善見律毘婆沙 등이 모두 일치한다. 四分律 이나 五分律 도 100년

경으로 일치한다. 이에 대해 十誦律 에서는 불타가 반열반에 든 후 110년에 비야

리국에서 十事를 안출하 다고 해서 10년의 차이가 있다.72)

大衆部律 에서는 이 十事에 대해서 전혀 설하고 있지 않으며, 베살리에서의 쟁

론에 대해서도 ‘佛泥洹後’라고 할 뿐 年數는 논하고 있지 않고 있다. 摩訶僧祗律

66) 四分律 권54( 大正藏 22, pp.968上∼971下).

67) 五分律 권30( 大正藏 22, p.192上∼194中).

68) 十誦律 권60( 大正藏 23, p.453中).

69)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40( 大正藏 24, pp.402上∼414中).

70)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권40( 大正藏 24, p.507下).

71) 平川彰, 律藏の硏究 , (山喜房佛書林, 昭和 45), pp.671∼672.

72) 平川彰, 앞의 책, pp.678∼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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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면 佛滅 후 장로비구는 毘舍離의 沙堆 僧伽藍에 머물고 있었는데, 단월에

‘僧(伽)에게 錢物을 보시하도록’하여 布薩할 때 銅鉢에 채워 작은 발우로 세어서

분배했다. 지율자인 야사가 와서 받고 무엇인가 묻되 그들은 ‘의약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야사는 그것을 거절하고 ‘不淨’, 즉 非合法이라고 비난했다. 그

들은 승가를 비방한다고 거죄갈마를 하여 추방했다고 하는 것이 개요다.73) 즉 摩

訶僧祗律 에는 당시의 비구가 금전의 보시에 집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九事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상좌부계의 律은 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에 의하면 廣嚴城(Vaiśali)의 비구

들이 제창한 十種不淸淨事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 으며, 毘尼母經 에는 금전납수

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없다. 또한 四分律 , 十誦律 , 五分律 , Culla­vagga

등 상좌부의 계율장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 사건의 구체적인 서술도 摩訶僧祗律

과 일치하지만 보다 상세하며, Culla­vagga에 의하면 밧지 비구들이 야사에게 신

심있는 우바새들을 매도했다고 하여 갈마를 결정하자 야사는 함께 간 비구와 함께

우바새의 처소에 가서 “非法을 非法이라 설하고, 法을 法이라고 설하며, 非律을 非

律이라고 설하며, 律을 律이라 설하 는데 그들은 우바새를 매도했다고 한다”고

하고서 금전의 납수는 비법이라고 설득했다. 그때 야사와 함께 간 비구가 그 내용

을 밧지족 비구에게 보고하자 그들은 야사를 非沙門 非釋子라고 하여 거죄갈마를

행하 다고 한다.

摩訶僧祗律 에 의하면 베살리를 떠난 야사는 마투라국의 타사바라(Dasabala)의

처소에 가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베살리에서 결집을 하기로 합의하 다고

한다. 그에 대해 상좌부계 전승은 삼부타(Sam­bhūta) 등의 지원을 구한 경로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부타에 이어 레바타(Revata)의 지원을 얻은 내용도 대

73) 馬田行啓, 印度佛敎史 p.113에 의하면, 밧지족 비구들이 신자에게 금전의 보시를 요구

하자 금전을 보시하는 신자도 있으나, 사문불제자로서 금전을 요구하는 非行을 한다고

말하고 가버리는 자가 있었다. 이것을 본 야사는 놀라고 슬퍼서, 신도들을 향하여 “비법

으로 보시를 받고 비법으로 구함에 보시를 행하는 자는 함께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

여 반성을 촉구했으나, 밧지족 비구들이 듣지 않고 그를 쫓아냈다고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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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율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Culla­vagga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7백결집의 내용도 摩訶僧祗律 에 의하면 五淨法, 九法序, 五事記를 먼저 誦하고

최후에 “이 가운데 발우가 필요하면 발우를 구하고, 의복이 필요하면 의복을 구하

고, 의약이 필요하면 의약을 구해 얻으라. 방편으로 금은 및 금전을 구하여 얻지

말도록 하며 모든 장로에게 수순하여 배우도록 해야 한다”라고 매듭짓고 있다.

그에 대해서 상좌부계 전승은 결집 개최의 결과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승가는 諍事를 결정하고자 하여 베살리에 모 는데 이론이 많아 쟁사의 결정을 보

지 못하 다. 레바타(Revata)의 제안에 의해 P cīnaka와 P theyyaka 측에서 각각

4명씩 斷事人(ubh hik 재판관)이 선출되어 十事가 非法임이 결정되었다. 즉 밧지

족 출신들이 十事의 항목이 여러 가지 관습 혹은 관습에 관한 규정인 율의 조문에

비춰볼 때 합법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하여 결집의 결정은 非合法이라는 결론을 내

린 것이다. 따라서 十事나 五淨法에 대하여 어떤 점에서는 율의 조문에 저촉이 되

지만 조문의 해석에 의해서 저촉되지 않는다고 단정하려고 하는 것이 그 특색이

다. 율은 본래 ‘佛制不改變’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佛滅 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미확

정의 상태에 있었던 규칙이 조문화된 이상에는 조문의 개변은 곤란하 다. 그러나

비구의 생활양식이나 사회생활의 변화 때문에 율의 조문을 그대로 실행하기에는

부적당한 점이 발생하 다. 그러므로 율의 조문을 바꾸지 않고 조문의 해석에 의

해서 처리하는 淨法의 성립이 요구되었다.74)

붓다고사에 따르면 남전 율장주석에는 제3차 결집까지 5명의 율장 스승에 대한

계보, 즉 우빨리, 소나까, 다사까, 싯가바, 목깔리뿟다 띠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야

사비구에 대한 이야기는 기술되지 않고 있다. 세일론 史傳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

용으로 베살리 결집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은 大合誦(Mah saṃgīti)이

라 이름한 법의 결집을 행하여 근본분파를 이 결집에 연결시키고 있다.75)

74) 岩波講座 東洋思想 第10卷, ( インド佛敎 3, 岩波書店, 1989), p.379.

75) 위의 내용은 塚本啓祥의 初期佛敎敎團史の硏究 , pp.207∼228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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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베살리 결집에 관해서는, ① 十事의 裁定만을 전하는 諸律藏의 전승

과 ② 그 후의 상좌에 의한 결집과 그들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일만인의 비구들에

의한 대결집의 결과, 상좌․대중의 이부로 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상반되

는 전승을 둘러싸고 학자들간의 의견도 양분되고 있다. 平川彰은 大毘婆沙論 76)

이나 異部宗輪論 등에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大天의 五事가 대중

부 가운데 지말분파의 원인으로 인정되고 있는 점을 들어 大天의 五事에 의한 근

본분파는 부정하면서 島史 , 大史 등에 의한 내용을 인정하고 있다.77)

佐藤密雄는 原始佛敎敎團の硏究 에서 세일론 사전의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즉

제2결집에 대해 島史 와 大史 , 島史 의 설을 기록했다는 覺音(Buddhaghosa)의

善見律毘婆娑(Samantap s dik ) 序와 論事註(Kath vatthuppakaraṇa­aṭṭhakath )에

十事非法의 처리 후에 법을 결집한 것을 제2결집이라고 한다든지, 또는 十事를 부

결한 일만인의 밧지족 비구가 대결집을 행한 것을 제2결집이라고 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들은 4세기 반 이후의 문헌으로 제2결집의 기록을 이용해

서 대중부의 성립을 제2결집 때에 十事를 부결한 밧지족 비구의 대결집에 의한 것

이라고 논하고 있다.

율장에 제2결집에서 十事를 논의하는 兩派에서 4명씩 선출하여 심의 의원인 8명

의 장로들에 대해서 島史 에는 ‘악인 등을 驅逐하기 위해 베살리에 모 다’78)고

기록하고 있으며, 율장 제2결집에는 모인 사람들은 양쪽 모두 十事를 否라고 인정

했다고 논했는데, 이 기록에는 ‘장로 등은 자기편을 취하여 十事를 破하고, 저들

악인을 구축했다’79)고 했다. 그리고 율장의 기록을 보면 ‘이들 칠백의 비구 등은

76) 카니쉬카왕 治世에 카슈미르에서 개최된 제4결집에서는 阿毘達磨大毘婆論 200권이

편찬되었다. 平川彰, 佛敎硏究入門 (大藏出版株式會社, 1998), p.35.

77) 平川彰, 律藏の硏究 , pp.682∼683.

78) Dīpavaṃsa Ⅴ. pp.26∼27. ( 南傳藏 60, p.33).

tañ ca pakkhaṃ labhitv na aṭṭha thera mahiddhik dasa vatthūni

bhinditv p pe niddhamayiṃsu te/niddhametv p pabhikkhū madditv

v dap pakaṃ sav dasodhanatth ya aṭṭha ther mahiddhik /

79) Dīpavaṃsa Ibid., Ⅴ, p.26. ( 南傳藏 60,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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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살리에 모 다…’라고 하여, 모인 총인원이 칠백 인임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기

록에는 ‘밧지족 비구가 일만 이천인, 불타의 성문이 일만 이천인 모여, 악비구를

구축한 장로들은 칠백 인의 아라한을 선출하여 법의 제2결집을 행하 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여 ‘구축된 악비구 등은 자기편을 얻어 1만인이 모여 대결집을 행하

다고 하여 이것을 대중부 분파의 최초가 된다’80)고 하 다.

島史 의 제4장 결집 기록과 제5장의 분파 기록은 말할 것도 없이 같은 사실을

전자는 그 일 자체를 설하고, 후자는 전자의 사실이 분파를 생하게 했다는 것으로

양자가 완전히 하나의 사실을 논함에 감정적인 대변경을 행하 으며,81) 붓다고사

의 善見律毘婆娑 의 서문이나 論事 의 주석도 島史 의 기록을 보고 거의 일치

하게 기록하 다.82)

또한 남북문헌을 통하여 島史 만 대중부인이 律을 변화시켰다고 하고 있으며,

그 이외에 대중부가 律制上에 이견을 주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제2결집은 十事 問

題를 취급한 것으로 칠백 인이 모여 兩派에서 대표를 선출하여 율장에 정해진 칠

멸쟁법 중의 현전비니멸의 작법에 따라서 十事가 否라고 결정되었으며 한역 善見

律毘婆娑 에 소멸쟁법에 의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문헌에도 十事를 주장한

밧지족 비구가 결정에 반대했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현전비니는 양쪽의 만족을 얻을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되풀이하고 최후 최악

의 경우 다수결정을 했는데, 제2결집은 1회의 의원회에서 이의 없이 결정하여 그

것을 전원에 보고하여 마쳤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제2결집이라고 한 것도 제1결

집 이후에 大般涅槃經 의 4대교법이 암시한 것과 같이, 十事와 같은 새로운 주장

이 있어 각지의 장로, 지식자 등 대교단 등에서 정법 등의 해석이 있었으며 그것

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밧지족 비구 등의 행동 주장으

로 옮겨졌던 것을 야사의 노력으로 베살리 회의를 가졌던 것인데, 제1결집 후의

80) Dīpavaṃsa Ibid., Ⅴ, p.31. ( 南傳藏 60, p.34).

81) Dīpavaṁsa, Ⅴ, p.30. ( 南傳藏 60, p.34); Mah vaṁsa V, pp.3∼4. ( 南傳藏 60, p.174).

82) Samantap s dik Vol.Ⅰ, pp.33∼34 ff. ( 南傳藏 5, pp.44∼45); 善見律毘婆沙 「跋闍

子品」( 大正藏 24, pp.66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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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인 회의로 보아 제2결집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부의 분파와 관계

가 없는 것이다. 즉 세일론 상좌부가 대중부의 분파를 설하는 태도가 악의 이외에

는 없다고 강력하게 논하고 있다.83)

그는 또 Pachow의 說을 인용하 는데, Pachow는 제2결집이 律制上 十事에 관

한 율장의 결집으로 그때 대중부의 대결집은 없었다 하고, ① 대중부율인 摩訶僧

祗律 은 율장의 결집만을 기록하 고, 그때 주제 던 金錢不受를 결정한 것을 인

정하고, 그 律의 니살기바일제 제18에도 금전불수의 戒를 가지고 있는 것, ② 율장

의 제2결집 기록 중에 十事 이외의 九事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九事를

기록하고 있는 그 이외의 것보다 오래된 편집내용이라는 것, ③ 만약 칠백 인 결

집에 굴복하여 대중부 결집이 이루어졌다면 金錢受理에 대한 계경, 즉 바라제목차

를 어째서 바꾸지 않았으며, 경분별을 주석한 부분을 왜 바꾸지 않았을까라는 3가

지 이유를 들고 있다. 또한 분파는 율의 문제가 아니라 교의상의 이유로 大天의

五事와 같은 교리 혹은 교리실천에 대한 지도방법의 충돌이 있고, 뒤이어 분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후에 목갈리풋타 띠사의 論事編纂을 상징하는

제3결집이 일어났다고 논하고 있다.84)

또한 佐藤密雄은 摩訶僧祗律 은 칠백 인이 모여 우선 율장을 합송하고 律制를

확인하고 나서 그것에 비추어 金銀錢은 취할 수 없다고 밝히는 원본적인 자료인데

반해, 상좌부계의 기록은 갑자기 중간에 九事 등을 추가시키고, 제2결집을 쟁론으

로 이끌어 멸쟁법에 의한 斷事人滅諍의 法制에 맞도록 기록을 개조했다고 하고,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대중부의 기록이 소박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은 율장 가운데 금전 납수만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고 九事에 대해

서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Oldenberg85)와 Hofinger86)도 율장에 결집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과 律이

83) 佐藤密雄, 原始佛敎敎團の硏究 , pp.44∼50.

84) W. Pachow, A Comparative Study of the Pr timokṣa(Santiniketan, 1955), pp.20; 佐

藤密雄, 앞의 책, pp.59∼60.

85) H. Oldenberg, The Vinayapiṭaka, vol. Ⅰ, (PTS, 1879), Intro p.xx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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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事, 혹은 금은 납수를 둘러싼 내용을 논하고 있지만 근본분파와 연결된 기록이

없는 점을 예로 들면서 빨리 연대기의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87)

법경스님도 그의 논문에서 근본분파를 十事非法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반론을

펴고 있다. 즉 근본분파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모순된 내용이 있으며, 학자들 간에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세일론 史書들 중 유일하

게 島史 만이 제2결집의 결과를 근본분파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 점과 이 사

서는 기원 후 4세기 경, 즉 베살리 결집 후 약 700년경에 세일론에서 성립된 正典

과는 거리가 먼 텍스트로서 이러한 주장은 Pataliputra(현재의 Patna) 결집 결과로

생긴 분파의 사실을 혼동했을 것이라는 것이며, 대중부율은 金․銀 문제가 분쟁의

핵심을 이루고 나머지 9개항은 분쟁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라

는 점과, 대중부들도 상좌부 학파들과 함께 十事를 단죄하 으므로 엄격주의의 입

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면서 승단의 분파는 이때까지 발생하지 않았으

며, 그 후 반세기 후 경 아라한의 權威格下 문제로 Pataliputra에서 있었던 결집

사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매듭짓고 있다.88)

이자랑은 베살리 결집을 당시 도시에서 승원에 거주하던 비구와 산림의 아란야

에서 걸식하며 분소의를 입고 엄격한 생활을 하던 비구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

다. 베살리의 비구들이 대부분 정법으로 인정한 十事에 대해서 산림에서 엄격한

생활을 지켜왔던 비구들은 정법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해서 생겨난 쟁론으로 보

고 있는 것이다.89) 이 傳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심각하게 대두되는 율과 淨法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十事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두 항쟁 세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당시의 불교 교단의

86) M. Hofinger, Étude sur le concile de Vaiś l(Louvain, 1946), pp.171∼182.

87) 李慈郞, 「初期佛敎敎團の硏究」­サンガの分裂と部派の成立­, (東京大學大學院 博士學位

論文, 2001), p.29.

88) 法鏡(徐盛源), 「V tsīputrīya 學派의 出現과 그 背景(1)」, 한국불교문화사상사 卷下,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2), pp.698∼706(내용 요약).

89) 李慈郞, 앞의 논문, pp.16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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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다.90) 율장에 등장하는 十事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鹽淨; 소금이 없을 때 먹기 위해 그릇에 소금을 저장해 두는 것은 淨인가?

소금의 저축에 대한 내용으로 소금은 단순히 식품이나 약품의 성격을 떠나서 화

폐의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금의 문제는 단순히 생활에서 필요한 식

품의 문제만이 아니라 金銀淨과도 관계된다.91)

十誦律 과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鹽淨,92) 巴利律 에서는 器中鹽淨,93) 有部毘

奈耶雜事 에서는 鹽事淨法,94) 四分律 에서는 得與鹽共宿,95) 五分律 에서는 鹽薑

合共宿淨,96) 毘尼母經 에서는 昨日受鹽今日得和飯食97) 등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을 율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② 二指淨; 정오가 지나서 태양의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지난 시각까지

식사를 하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 十誦律 ․ 有部毘奈耶雜事 ․ 善見律毘婆娑 에서 二指淨(法),98) 四

分律 ․ 五分律 에서는 각각 兩指抄食, 兩指抄食食淨99)으로, 그리고 毘尼母經 에

서는 二指抄飯食100)으로 말하고 있다.

巴利律 에 의하면 “(해) 그림자가 (동쪽으로) 두 손가락 (길이)를 지난 非時에

90) 이자랑, 「베살리의 十事 논쟁과 淨法」, ( 불교평론 10호, ­논쟁의 불교학­, 불교평론

사, 2002), p.3.

91) 睦楨培, 「七百犍度와 第二結集」, ( 韓國佛敎學 , 第二十七輯, 韓國佛敎學會, 2000), p.11.

92)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 p. 453下29); 善見律毘婆沙 ( 大正藏 24, p.677下).

93)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7). 다른 번역에서는

‘角鹽淨’으로 되어 있다.

94)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中).

95)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70上).

96)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上 ; p.193下).

97)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98)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7); 十誦律 ( 大正

藏 23, p.450中 ; p.454上); 有部毘奈耶雜事 (同 24, p.411下 ; p.412下); 善見律

(同 24, p.677下).

99)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69下); 五分律 , (同 22, p.192上 ; p.194上).

100)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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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는 것은 非時食의 바일제에 속한다”101)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자료에서는 이것과 다르게 설하고 있다. “二指”란 해 그림자의 길이를 말하

는 것이 아니라, “두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02)

③ 近聚落淨; 다른 마을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과 十誦律 에서는 近聚落淨,103) 越聚落食淨,104) 毘尼母經 에서는 入

聚落得食,105) 四分律 에서는 得村間(또는 得聚落間),106)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聚

落間淨,107)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道行淨法108)으로 되어 있다.

④ 住處淨; 동일한 경계(Sīman) 내에 다른 주처에서 포살하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과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住處淨,109) 四分律 에서는 得寺內,110) 十誦

律 에서는 如是淨,111)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高聲共許淨法,112) 毘尼母經 에서는

界裏群品作法113)이라고 되어 있다.

⑤ 隨喜淨法; 곧 도착할 비구의 동의를 예상하고 결의한 후에 승인을 구하는

것은 淨인가?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隨喜淨法,114)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隨喜淨,115) 巴利

律 과 四分律 에서는 각각 後聽可淨, 得後聽可,116) 五分律 에서는 求聽淨,117) 十

101)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7).

102) 四分律 ( 大正藏 22, p.969下); 五分律 ( 大正藏 22, p.194上); 十誦律 ( 大正藏

23, p.454上); 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2下);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03)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7)

104)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 p.454中).

105)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06)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69下).

107)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108)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下).

109)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7); 善見律毘婆

娑 ( 大正藏 24, p.677下).

110)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69下).

111)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 p.454下).

112) 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上).

113)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14)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中).

115)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116)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8); 四分律 ( 大正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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誦律 에서는 證知淨,118) 毘尼母經 에서는 讚嘆群品作法119)으로 되어 있다.

⑥ 常法淨; 和尙, 아사리의 습관을 따르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에서는 常法淨,120) 四分律 에서는 得常法,121) 五分律 에서는 習先所

習淨,122) 十誦律 에서는 行法淨,123)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舊事淨法,124) 毘尼母

經 에서는 前人作法後人復作,125)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久住淨126)으로 되어 있다.

⑦ 不攪乳淨; 식사 후에도 잔식이 아닌 우유음식을 먹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에서는 不攪乳淨,127) 十誦律 과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生和合淨,128)

四分律 에서는 得和,129) 五分律 에서는 闍油蜜石蜜和酪淨,130)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酪漿淨法,131) 毘尼母經 에서는 闍油蜂蜜石蜜以酪和之得食132)로 되어 있다.

⑧ 飮闍樓伽酒淨; 발효되지 않은 야자즙을 마시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과 五分律 에서는 飮闍樓伽酒淨,133) 四分律 에서는 得飮闍樓羅酒,134)

毘尼母經 에서는 得飮闍留伽酒,135)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水淨,136) 十誦律 에서

22, p.970上).

117)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中).

118) 十誦律 ( 大正藏 23,p.450中).

119)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20)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8).

121) 四分律 ( 大正藏 22, p.970上).

122)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中 ; p.194上).

123)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124)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中).

125)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26)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127)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8).

128)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129)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130)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上∼中).

131)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2上).

132)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33)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8);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中 ; p.194上).

134)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70上).

135) 毘尼母經 ( 大正藏 24, p.819中).

136)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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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貧住處淨,137) 有部毘奈耶雜事 에서는 治病淨法138)이다.

⑨ 無縷邊坐具淨;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를 뜻대로 할 수 있는 것

은 淨인가?

巴利律 에서는 無縷邊坐具淨,139) 十誦律 에서는 縷邊不益尼師壇淨,140) 善見

律毘婆娑 에서는 不益縷尼師壇淨,141) 四分律 에서는 得畜不割截坐具,142) 有部毘

奈耶雜事 ․ 五分律 ․ 毘尼母經 에서는143) 각각 坐具淨法, 作坐具隨意大小淨, 坐

具不剪鬚得敷로 되어 있다.

⑩ 金銀淨; 금은을 받거나 저축하는 것은 淨인가?

巴利律 과 善見律毘婆娑 에서는 金銀淨,144) 十誦律 ․ 毘尼母經 ․ 有部毘

奈耶雜事 에서는145) 각각 金銀寶物淨, 金銀七寶得自手捉亦得畜之, 金寶淨法, 四分

律 에서는 得受取金銀,146) 五分律 에서는 受畜金銀及錢淨147)으로 되어 있다.

이상으로 제2결집의 爭事의 기원이 되었던 十事의 非法이 율장에 의한 정법과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十事와 같은 小小戒에 저촉되는 행위를 정법으로 인정

할 것인가, 혹은 그러한 정법의 존재는 율의 통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폐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의 차이는 일찍부터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금전 납

수 내지는 十事로 대표된 정법에 대한 문제는 계속해서 승가의 내부에 태동되었으

며, 경향을 달리하는 비구들간에 항쟁이 표면화될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은 제2결집

137) 十誦律 ( 大正藏 23, p.451上 ; p.455上).

138)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1下 ; p.412下).

139)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南傳藏 4, p.459).

140)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 p.455中).

141) 善見律毘婆娑 ( 大正藏 24, p.677下).

142)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70上).

143) 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412上 ; p.413上); 五分律 (同 22, p.192中 ; p.194上);

毘尼母經 (同 24, p.819中).

144) Vinaya­piṭaka Vol. Ⅱ, Culla­vagga V2 b 12 ( 南傳藏 4, p.459); 善見律毘婆

娑 ( 大正藏 24, p.677下).

145) 十誦律 ( 大正藏 23, p.450中 ; p.455下); 毘尼母經 (同 24, p.819中); 有部毘奈耶雜事

(同 24, p.412上 ; p.413上).

146) 四分律 ( 大正藏 22, p.968下 ; p.970上).

147) 五分律 ( 大正藏 22, p.192中 ; p.194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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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거의 대두되었다.

이 문제는 승가에 의한 비구들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승가를 제약하는 율장의 체

계화와 相關的인 관계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즉 제2결집이 발생한 배경에는 율의

조문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持法者에 대해서 엄격주의를 주장하는 持律

者의 존재를 상정해볼 수 있다. 또한 결집에 의한 토의 내용은 상좌부 계율이 十

事로 하는 것에 대해 대중부율은 五淨法 등의 律을 결집의 내용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쟁론의 문제점이 상반되게 전해지는 것은 어떠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일까?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베살리 결집의 전설에 전개되는 두 그룹의 항쟁

이 어떠한 실태 는지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있다.

제2결집의 전설은 베살리의 비구들이 합법이라고 주장하는 금전 납수를 포함한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 사이에 전개된 승가항쟁을 얘기한다. 그 항쟁의 발

단은 밧지족 출신의 비구와 야사의 대립이 시작이지만 양자를 지원하는 두 그룹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그룹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의 견해를 피력하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항쟁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는 P tryyka와 P cīnaka의

두 그룹에 대해서 Przyluski148)와 Hofinger149)는 바수미트라의 異部宗輪論 등에

등장하는 사부중의 龍(派)Sthavira­N ga와 東方(派)Pr cya­Bahuśruta의 대립,

즉 상좌부와 대중부의 대립을 관계시키고 있다. 파치나카는 동방의 뜻이며 파티야

카는 서방의 뜻이라는 점을 들어 동방은 대중부로 서방은 상좌부로 본 것이다. 즉

동서의 대립으로 논하고 있으며, 율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승가의 구성을 이끌어

낸 상좌부의 서방적 지역성과, 경을 중심으로 한 비계급적인 대중부(출가와 재가

를 합친)의 동방적 지역성을 대비시키고 있다.

148) J. Przyluski, Le concile de R jagṛha(Paris, 1926∼1928), p.309.

149) M. Hofinger, Étude sur le concile de Vaiś lī(Louvain, 1946), pp.18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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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十事에 대한 비교

Sattasatikak­Dīpav, Mah v,Samantap­

善見律毘婆娑권1

四分律권54 毘尼母經권4 五分律권30

1 Siṅgiloṇa­ kappa

1 鹽淨 1 得與鹽共宿1 昨日受鹽今日得 和飯食

1 鹽薑合共宿淨

2 dvaṅga­k 2 二指淨 2 兩指抄食 2 兩指抄飯食 2 兩指抄食食淨

3 g mantara­k 3 聚落間淨 3 得村間 3 入聚落得食 3 越聚落食淨

4 v sa­k 4 住處淨 4 得寺內 4 界裏群品作法 4 결

5 anumati­k. 5 隨喜淨 5 得後聽可 5 讚嘆群品作法 5 求聽淨

6 ciṇṇa­k 6 久住淨 6 得常法 6 前人作法後人復作 6 習先所習淨

7 amathita­k 7 生和合淨 7 得和7 酥油蜂蜜石蜜以 酪和之得食

7 酥油蜜石蜜和酪淨

8 jalogi p tum 8 水淨 8 得飮闍樓羅酒 8 得飮闍留伽酒 8 飮闍樓伽酒淨

9 adasaka­ nisīdana

9不益縷尼師 壇淨

9 得畜不割截坐 具

9 坐具不剪鬚得敷 9 作坐具隨意大小淨

10 j tarūpa­ rajata

10 金銀淨 10 得隨取金銀10 金銀七寶得自 手捉亦得畜之

10 受畜金銀及錢淨

Samantap.­p.33.

南傳藏 60.

p.168. Vinaya Ⅱ.

p.294. Mah v.

pp.22∼27.

大正藏 24,

p.677下.

高麗大藏經

24,

p.299下.

大正藏 22,

p.968下 高麗

大藏經 23,

p.573上

大正藏 24, p.819.

高麗大藏經 24,

p.495.

大正藏 22, p.192

上∼中.

高麗大藏經 22,

p.1258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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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誦律권60살바다부비니마득륵가

권5根本說一切有部 毘奈耶雜事권40

부톤 선절교명법생보장사

1 鹽淨 1 鹽淨 1 鹽事淨法1 정확한 인용은 淨鹽을 받는다

2 二指淨 2 二指淨 2 二指淨法2 二指로 먹는 것은 어

떤가

3 近取酪淨 3 取酪淨 3 道行淨法 3 路에서서는 용인한다

4 如是淨 4 如是淨 4 高聲共許淨法 4 주

5 證知淨 5 隨喜淨 5 隨喜淨法 5 隨喜

6 行法淨 6 習淨 6 舊事淨法 6 일체처에서 행한다

7 生和合淨 7 讚酪淨 7 酪漿淨法 7 혼유물

8 貧住處淨 8 生住淨 8 治病淨法 8 질병에서 비롯된다

9 縷邊不益尼 師壇淨

9 縷尼師壇淨 9 坐具淨法 9 부물

10 金銀寶物淨 10 受金銀淨 10 金銀淨法 10 금은을 축적한다

大正藏 23,

p.450中.

高麗大藏經

21, p.1143下

大正藏 23, p.597中

高麗大藏經 24,

p.176中

大正藏 24, pp.411下∼

412上

高麗大藏經 22,

pp.904中∼905上

이에 대해 A. Bareau150)는 전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비구의 소속관계를 검토하

고, 상좌부와 대중부의 관계를 동서의 지리적 항쟁으로 대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고 보고 있으며, 비구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파탈리푸트라에 비해 강가의

서북부지역이나 아반티와 데칸 등의 벽지에서 바라문이나 자이나교 등과 항쟁하며

전도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논하고 있는데,

塚本啓祥과 金倉圓照가 이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151)

당시 마우리아왕조 시대의 발전된 경제사정은 불교 교단에도 적지 않은 향을

끼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려는 무리와 전통을 고

수하려는 무리의 마찰은 당연한 결과 는지도 모른다. 즉, 十事論爭의 배경에는 시

150) A.Bareau, Les premiers conciles bouddhiques, p.82.

151) 塚本啓祥, 앞의 책, pp.226∼228 ; 金倉圓照, 印度中世精神史 中, pp.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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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인 변화를 받아드려 승원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려고 했던 비구

들과, 종래의 엄격한 불교의 모습을 고수하면서 금욕생활과 명상을 즐기며 살고

있던 비구들의 의식 내지는 생활양식의 차이가 반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표는 諸律藏에 등장하는 十事에 대한 비교를 圖表로 만들어 보았다.

2. 根本分派의 年代

根本分派의 연대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브야의 정량부 전승은 佛滅

137년을 근본분파의 연대로 보고 있으며, 大毘婆沙論 은 편년사적인 증거에 대해

서는 논하고 있지 않다. 舍利弗問經 은 대중부계 諸派의 유출이 佛滅 후 제2세기

에 일어났다고 하며, 島史 , 大史 는 佛滅 후 100년의 베살리 결집 후에 근본분

파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大智度論 은 분파를 발생시킨 결집을 佛滅 후 100년으로 하고 있으며, 異部宗

輪論 의 異譯인 十八部論 은 佛滅 후 116년, 部執異論 도 116년, 異部宗輪論 은

百有餘年, 藏譯은 백년이 조금 지나서라고 설한다. 그 후의 眞諦, 義淨, 푸동,

T araan tha 등의 전승은 유부, 혹은 정량부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외에 바

브야의 상좌부 전승은 佛滅 후 160년에 근본분파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근본분파의

연대는 佛滅 후 100∼160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152)

아쇼카왕이 승가의 분파를 막아보고자 애쓴 흔적은 破僧을 금했던 石柱法則에서

볼 수 있지만 그 시대에 상좌부, 대중부의 분파가 있었다는 것은 증거가 불충분하

다. 平川彰은 “왕의 재세 시 교단의 분파가 표면화되기 시작하면서도 아직 결정적

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滅後에 마우리아왕조의 쇠퇴와 관련하여

근본분파가 현실화되었다”153)고 하 다. 아쇼카왕 이전부터 十事와 같은 계율의

152) 塚本啓祥, 「大天の傳承と僧伽の抗爭」, ( 印佛學 , 13­1), p.106.

153) 平川彰, ィンド佛敎史上 , p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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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둘러싸고, 혹은 아쇼카왕 시대에 五事의 주장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

어도 불교 교단이 실제적으로 상좌부, 대중부로 분파된 것은 아쇼카왕 이후라고

보는 것이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또한 아쇼카왕 시대에 불교 교단이 인도 각 지역에 교단의 기초를 확립하고 있

었는데, 카슈미르는 이 시대에 불교가 전해졌다.

說一切有部의 전승에 의하면 末田地154)라고 하는 고승에 의해 이 지역에 불교가

전해졌으며,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하나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어 그것이 후대의

說一切有部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이 지방은 석존의 재세 시에도

불제자 大加旃延이 불교를 전한 지방으로 아반티라고 부른다. 그가 언제부터 이

지방을 교화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불타 재세 시로 추정하고 있다. 大加旃延은

단지 Avnti만을 교화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지역을 전도했으며, 그가 교

화한 지방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지방이 Sovīrạ國의 Roruka이다.155)

또한 이 Avanti 지방은 제2결집의 전설에 의하면 엄격파인 야사가 이곳에서 비구들

의 응원을 청했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곳은 十事를 非法으로 결정했던 엄격한

상좌부계 비구가 많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남인도의 크리슈나 下流에도 아쇼카왕 시대

에 불교가 전해졌는데, 세일론 사전에 의하면 Mogglaliputta Tissa에 의해서 마하데바

라고 하는 고승이 남인도에 파견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목칼리풋타 띠사의 이름은 안

데르 제2塔滑 石骨箱銘文과 산치 제2塔凍石骨大銘文에 Gotiputa의 제자 Mogaliputa로

기록되어 있다.156)

이 남인도는 바로 안드라지방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北傳에 전해지고 있는 내

용으로 制多山에서 大天이 五事를 주창하여 삼부로 분파되었다고 하는데, 이들 부

파가 번성하던 장소가 바로 이 안드라지방이라고 한다. 즉, 기원전 2세기에는 대중

부 계통의 불교 교단이 이 지방에 기초를 쌓고 있었던 것 같다.

154) 마전지의 전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靜谷正雄, 小乘佛­部波佛敎の硏究 pp.234∼

237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155) 前田惠學, 「原始佛敎敎團發展史上における大迦旃延の位置」, ( 印佛學 3­2), p.267.

156) 塚本啓祥, 「上座部敎團史硏究の問題点」, ( 印佛學 , 29­2),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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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南北傳 結集의 비교

部波 資料 年代 治世 諍事 主要人物王의

仲裁結果

A 有部

毘婆沙論 ­ ­ 五事 Mah deva ○ 根本分裂

十八部論 116 Aśoka 五事 ­ 根本分裂

部執異論 116160 Aśoka 五事 ­ 根本分裂

異部宗輪論 100 Aśoka 五事 Mah deva ○ 根本分裂

藏譯輪論 100 Aśoka 五事 ­ 根本分裂

B 部執異論疎 116 Aśoka 五事 Mah deva 根本分裂

C 三論玄義(1) 116 ­ 大乘經五事 Mah deva 根本分裂

D 正量部 Bhavya(3) 137NandaBah pad

am五事 Bhadra 根本分裂

E 大衆部舍利弗問經 佛滅2 ­ 舊律增法 或 比丘 ○ 根本分裂

Bhavya(2) ­ ­ 鬪爭 法 ­ 根本分裂

F 上座部 Bhavya(1) 160 Dharmśka 鬪爭 法 ­ 根本分裂

G 有部 사마야베다 200 ­ 賊住外道 Mah deva 大衆分裂

H 三論玄義(2) 佛滅2 ­ 大乘經移道 Mah deva 大衆分裂

I 三論玄義(3) 200 ­ 賊住外道 Mah deva 大衆分裂

J分別說部

Dīpavaṃsa 236 Dharmśka 賊住外道 Moggaliputr

atissa ○ 還俗追放上座分派結集

Mah vaṃsa 灌頂17

Dharmśka 賊住外道 Moggaliputr

atissa ○ 還俗追放結集

Samantap. ­ Dharmśka 賊住外道 Moggaliputr

atissa ○ 還俗追放結集

Nik yasaṃgraha 236 Dharm

śkaMoggaliputr

atissa ○ 還俗追放結集

Nik yasaṃgraha 255 大衆分裂

최근 세일론 사전의 전도사 파견의 전설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으며 아쇼카왕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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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불교의 발전이 논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전설을 담은 最古의 문헌인 島史 는

전도사가 파견되었다고 전해지는 시대로부터 600년이나 지난 서력 4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불교 문헌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아 그 사이에 사실이 어느 정도 변경되

어 전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설을 사실로 인정하기 전에 북방불전

이나 비문류 등의 다른 계통의 史料 가운데 그 증거를 구할 필요가 있다. 북방 불

전 속에는 그 방면의 교화전설의 사실성을 전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보

이지 않는다. 목칼리풋타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157) 이상 분파의 연대에

대하여 諸論에 등장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앞의 도표로 표시해보았다.

157) 山崎元一, ­インド古代史の展開とアショ­カ王­ アショ­カ王とその時代 , (春秋

社, 1982), p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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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諸論에 나타난 大天의 評價와 五事

十事非法과 함께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大天의 五事說은 출가자들의

최고 목표 던 아라한에 대한 비판으로 승가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

승불교의 장을 여는 데도 상당한 향을 주었던 新說로 기록되고 있다.

大天에 대한 기록은 說一切有部說의 大毘婆沙論 을 비롯해 異部宗輪論 , 部

執異論疏 , 三論玄義 , 異部宗輪論述記 , 현장의 大唐西域記 , 瑜伽師地論 에

대한 窺基의 주석서인 瑜伽師地論略纂 , 增一阿含經 의 주석서인 分別功德論

등에 등장한다.158)

大天은 빨리어와 범어로 Mah deva라고 하며, 經論에 따라 여러 가지 인물로 묘

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전의 大毘婆沙論 에서는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 다음

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인도 마투라국(Mathura)의 상인이 젊어서 결혼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얼

굴이 잘 생겼으므로 이름을 大天이라 지었다.

아버지가 무역 때문에 타국에 가서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 그 사이에 아들

이 장성하여 그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고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말에 겁이 나서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살해하 다. 그 일이 점차 탈로나게 되자 그의 어

머니를 데리고 華氏城으로 도망갔다. 일찍이 본국에서 공양했던 아라한을 만나

158) 十八部論 ( 大正藏 49, p.18上); 部執異論 ( 大正藏 49, p.20上 ; 高麗大藏經 29,

p.563下);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上 ; 高麗大藏經 29, p.567上∼中); 티베트

역(ibid); 阿育王傳 ( 大正藏 50, pp.120下∼121中); 阿育王經 ( 大正藏 50,

pp.162上∼162下); 大毘婆沙論 , 五百阿羅漢 作, 唐 (A.D.656∼659) 현장역( 大正藏

27, pp.510下∼512上); 異部宗輪論述記 (A.D.662) 窺基(新纂大日本續藏53. pp.572

上∼573中); 三論玄義 , 隋 (A.D.549∼623) 吉藏 譯( 大正藏 45, p.8中∼下); 佛

敎大系 pp.483∼484,; 三論玄義檢幽 ( 大正藏 70, p.455 이하); 大唐西域記 ( 大

正藏 51, p.886中 ; p.912中 ; p.886上); 瑜伽師地論略纂 , 唐(A.D.632­682) 窺基

撰( 大正藏 43, 1中); 舍利弗問經 ( 大正藏 24, p.900下); Dīpavaṃsa, xii.5;

xv.38; xvii. 25; xix. 5∼7; Mah vaṃsa, v.206∼207; xii. 3b, 29∼30; xv. 89∼

90; xvii, 20∼21; xxix. 68∼69;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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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그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워 마침내 그 비구를 살해하 다. 마음은 갈수

록 근심과 걱정이 더했는데 뒤에 다시 그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어머니를 죽여 三無間業을 범하게 되었다.

몹시 근심하고 후회하며 잠도 잘 수 없었던 그는 사문 석자가 죄를 소멸하는

법이 있다고 전하는 말을 듣고 계원의 승가람에 갔다. 그 문밖에서 한 비구가

천천히 거닐며 “어떤 사람이 중죄를 지어도 선을 행하면 없어지게 되어 그가

세간을 비출 수 있나니 마치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온 것과 같다”는 내용의 게송

외우는 것을 듣고 환희하여 부처님의 교법에 귀의하고 출가하기를 간절히 청하

으며, 그 비구는 자세하게 검증하지 않고 출가시켰다.

大天은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삼장의 의미를

외워 지녔고 말솜씨가 맑고 교묘하여 잘 교화하고 인도했으므로 華氏城에서 귀

의하며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왕은 이것을 듣고 그를 성에 자주 초대하

여 공양하고 설법을 청하 다. 그 후 大天은 승가람에 있으면서 五惡見을 모아

게송을 짓고 15일 밤 포살할 때 법상에 올라 偈를 설했다. 당시에는 有學, 無學

의 多聞 持戒者 등의 장로가 있어 그 說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논쟁이 일어났

다. 아쇼카왕이 여러 방법으로 화합시키고자 하 으나 효력이 없어 大天의 의

견에 따라 다수결을 택하여 장로측이 패하 으나 논쟁은 그치지 않고 上座部와

大衆部로 分派하 다.159)

이상이 大毘婆沙論 에 등장하는 大天의 일대기다. 大毘婆沙論 의 내용과 달리

그 외의 자료에서는 후대로 내려갈수록 평가가 호의적이며, 특히 대중부 계통의

경론 등에서 위대한 스승 내지는 대승의 선구자적인 대덕으로 설명하고 있다.

大天이 활약했던 사실을 설명해주는 기록은 바수미트라(Vasumitra)의 異部宗輪

論 등의 異譯 4본 등이 있다. 그곳에는 大天과 관련되는 2종의 전설이 보인다.

① 근본부파­佛滅 후 116년에 화씨성에 군림했던 아쇼카왕의 治世에 大天이 제

창한 五事가 원인이 되어 四衆의 사이에서 쟁론이 생겨 상좌부, 대중부의 근

본분파가 일어났다고 하는 전설이다.160)

159)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p.510∼512, 高麗大藏經 27, pp.751中∼755中).

160)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上∼中, 高麗大藏經 29. p.567上∼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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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대중지말분파­佛滅 후 200년 중에 制多山에 머물던 大天이 五事를 說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승가에 쟁론이 생겨 大衆部로부터 制多山部, 西山住部,

北山住部가 생겼다는 전설이다.161)

三論玄義 에서도 佛滅 후 116년에 船主의 아들 마하데바가 출가하여 五事를 說

하여 분파를 일으켰다고 설하고 있으며,162) 佛滅 후 2세기에 대중부의 마하데바가

대승경의 내용을 說하여 부파 분파가 생겼다고 하고 있으며, 佛滅 후 200년에 賊

住比丘의 대표로 활약했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大天이 활동했던 시기는 불멸 후 116년∼200년 사이로 추

정해 볼 수 있다.

1. 諸論에 나타난 大天의 平價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상좌부계의 대표 논서인 大毘婆沙論 에서는 大天에 대

하여 五事라는 惡見을 주장하여 분파를 초래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大毘婆沙論

의 전승과는 달리 현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관의 三論玄義檢幽集(A.D. 1208)

등에는 部執異論(A.D. 548∼569 眞諦譯) 에 대한 진제 소의 부분적인 인용이 보

이고 있다. 그 가운데 大天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大毘婆沙論 과 다소 차이가 있

다.

大天은 상주의 아들로 성은 拘尸柯다. 三逆罪를 범한 大天은 岐吒製國163)의 화씨성에

161)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中, 高麗大藏經 29, p.567中∼下), 十八部論 ( 大正藏

49, p.18上, 高麗大藏經 29. p.564上)에는 ‘支提加, 佛婆羅, 鬱多羅施羅’, 部執異論 ( 大正

藏 49, p.20中)에는 ‘支提山部, 北山部’.

162)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中∼下).

163) 岐는 波의 오자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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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깊이 뉘우치고 출가한다. 그는 총명하 기 때문에 三藏을 모두 익히고 愚迷한 자가

있어 그를 따라 수학하 으며, 大天은 스스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하 다. 阿育王은

그를 자주 궁 안에 초대하여 恭敬供養하고 왕비는 머지않아 大天과 사통한다. 그가 경

율을 설하는데, 非犯을 犯이라 하고 犯을 非犯이라고 하 다. 포살하는 날에 ‘五事’, 즉

“無學漏失引魔引 無知疑惑由他度 聖道現起假聲呼 是謂如來眞諦敎(아라한이라도 魔에

이끌려 漏失하며, 無知가 있고, 의혹도 있으며, 他에 의해서 제도되고, 聖道는 소리에

의해서 나타난다. 이것이 여래의 眞諦敎다)”를 발표하 다.

또한 제자들에게 “佛의 제세 시에는 諸天 및 四部의 衆弟子의 설을 모두 불타가 인가

하여 아난으로 하여금 수지하게 하여…만약 총명한 자가 있어 설법하면 또한 경이 될

수 있다. 그대들도 경을 만들 생각이 있으면 뜻에 따라 지어도 좋다” 고 하 다. 아라

한들은 대노하 고 大天과 爭論하여 신통을 겨루어 아라한인지 범부인지를 구별하게

되자 아라한들이 大天의 무리를 압도하 다. 그때 왕비가 권력으로 破船에 아라한을

태우고 恒河 중에 보냈으나 그들은 공중을 날아 계빈국으로 갔다. 후에 왕비는 깊이

참회하여 개종하고 須陀洹果를 얻었다. 大天의 사후에 아쇼카왕은 아라한들을 맞아

공양하 다.

大天이 經敎의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으므로 아라한들은 다시 모여 三藏을 송

하 다. 그들의 의견에 相違가 있어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파되었다.164)

이상이 部執異論疏 의 내용으로 疏에는 그 결집을 제3으로 기록하고 있다. 北

方所傳에는 분파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결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일

반적인데 비하여 이곳에서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은 아쇼카왕을 거론한 것

과 함께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며, 또한 이 내용이 大毘婆沙論 과 다른 점은

大天의 죄를 삭제하고 아쇼카왕과 妃의 과실을 인정하 으며, 성전의 편찬을 大天

과 결부시키고 이 편찬이 상좌부의 성전과 달리 대중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세일론 사전의 제3결집과는 다른 전승이다.

三論玄義 에서는 大天이 五事와 함께 여러 가지 대승경을 삼장에 첨가하여 해

석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상좌부, 대중부의 분파가 일어났다고 하여 部執異論

疏 와 같이 대승의 향을 받은 전승으로 변화하여 설하고 있다.165)

164) 部執異論疏 ( 大正藏 70, pp.455中∼456下).

165)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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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藏은 三論玄義 에서 3종의 大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① 佛滅 후 116년에 船主의 아들 마하데바가 삼역죄를 저지른 후에 불법에 들어

왔는데 두 가지 일을 하 다. 첫째는 모든 대승경을 취하여 삼장 중에 포함

시켜 해석했다. 모든 아라한들이 法藏을 결집할 때 그 내용을 제외시켰다. 그

러나 대중부는 그 내용을 사용하고, 상좌부는 사용치 않았다. 그 때문에 논쟁

이 일어나 분파가 생겼다. 둘째는 포살할 때 五事에 대해 誦하 으며, 그 때

문에 쟁론이 생겨 분파가 생겼다.166)

② 佛滅 후 제2세기에 대중부의 마하데바가 왕사성의 북쪽, 앙굴다라국으로 이

주해 대승경을 삼장 중에 섞어서 설했다. 그것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어 一說部, 說出世部, 灰山住部 등 삼부로 나뉘었다.167)

③ 佛滅 후 200년에 大天이라고 하는 외도가 있었으며, 마가다국에 우바새가 많

아 불법을 홍포하여 출가자를 잘 외호하 다. 모든 외도가 이양 때문에 출가

하여 賊住比丘가 되었으며, 적주비구의 主가 大天이었다. 大天은 스스로 출가

하 고, 속해 있던 그의 제자들도 같은 무리에 출가하여 수계를 받았기 때문

에 승가에 쟁론이 생겼다. 즉, 無戒의 화상에게 수계한 것이 쟁론의 원인이

된 것이다. 大天은 무리와 함께 支提山에 別住했으며 그 곳에서 이론이 생겨

支提山部, 北山部로 분파하 다.168)

166)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中).

百一十六年外 有舶主兒名摩訶提婆 端正聰明作三逆罪 後入佛法 凡有二事 一者取諸大

乘經 內三藏中釋之 諸阿羅漢結集法藏時 已簡 除此義 而大衆部用此義 上座部不用.

167)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下).

于時大衆部因摩訶提婆私 度住央崛多羅國 此國在王舍城北 此部將華嚴般若等 大乘經雜

三藏中說之 時人有信者 有不信者 故成二部.

168) 三論玄義 ( 大正藏 45. p.9上).

於二百年滿有一外道. 名大天. 爾時摩伽陀國有優婆塞. 大弘佛法. 諸外道爲利養故. 皆剃頭

出家. 便有賊住比丘. 大天爲賊住主. 大天身自出家. 所度弟子依大天 衆出家受戒. 爾時衆

人共諍斯事. 故有支提山部及北山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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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部執異論 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지만 部執異論 에는 五事가 분파

의 원인이라고 설한 데 반하여 이곳에서는 수계가 원인이 되어 분파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窺基의 異部宗輪論述記 에도 大毘婆沙論 중에 등장하는 大天의 전설이 인용

되고 있다. 그리고 玄奘에 의해 기록된 大唐西域記(A.D. 646) 의 전승에 의하면

마갈타국의 無憂王 시절 首都에 500의 아라한과 500의 범부승이 있어 왕은 공평히

옹호했다. 범부승 가운데 마하데바가 闊達多智하 으며, 이교도적인 견해로 논을

지었다. 그래서 승가에 쟁론이 일어났다. 왕은 마하데바 편에 섰으므로 아라한들은

신통으로 가섭미라국에 날아갔다. 그 소식을 듣고 후회한 왕은 아라한을 수도에

돌아오도록 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 내용은 大毘婆沙論 의 내용과 비슷하지

만 大天에 대한 공격의 내용이 완화되어 있다. 즉, 대승은 대중부에서 시작되었으

며 대중부는 大天의 주장에 유래한다고 하는 의식이 암암리에 현장의 관념을 지배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유부에 의해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대승

교도들은 그들의 선구자로 보여지는 大天에 대해서 동정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가

범한 惡事를 조금이라도 없애거나 기억을 없애버리려 했다.169)이와 같은 경향은

瑜伽師地論略纂 을 거쳐 대중부의 論이라고 일컬어지는 分別功德論 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무착의 瑜伽師地論 에 대한 규기의 주석, 瑜伽師地論略纂 에 의하면 大天의

명성은 높았으며 그 덕도 위대하다 하여 五事에 결부된 三逆의 전승으로 비방을

당한 그의 입장을 회복시키고 있다.170) 增一阿含經 의 주석인 分別功德論 에는

“성왕인 大天은 四梵堂을 갖추었다”171)고 하여 그를 극찬하고 있다.

169) 三友建容, 「五事非法と有部の成立」( 淺井園道先生古稀記念論集 一蓮敎學の諸問題, 平

樂寺君店, 平成九年), p.948.

170) 瑜伽師地論略纂 ( 大正藏 43, p.1中).

大天名高德大 果證年卑 王貴欽風 僧徒仰道 旣而 卓牢無侶 遂爲時俗所嫉謗 之以造三

逆 加之以增五事.

171) 增一阿含經 ( 大正藏 25, p.32下).

昔大天聖王具四梵堂 展轉相紹 乃至八萬四千王 皆有梵堂 唯大天一人是大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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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투라의 유부(근본유부)의 교단사인 阿育王傳(A.D. 306) 과 阿育王經(A.D.

512) 에는 大天과 비슷하되 이름을 알 수 없는 비구의 전설이 있다. 그는 속세에

서 母를 살해하는 죄를 짓고 세속을 떠나 삼장을 수지․독송하 다.

우파굽타와 의논하기 위해서 마투라에 갔으나 우파굽타는 그의 과거 죄를 알고

개입을 거부했다. 우파굽타의 제자들이 그것을 알고 우파굽타를 비난했다.172)

티베트 전승의 T ran tha의 印度佛敎史 에 의하면 마투라국의 한 지방 상인의

아들인 마하제바가 있어 부모와 아라한을 살해하고 삼무간의 죄를 지었다. 본인의

죄를 뉘우쳐 가습미라국에 가서 자기의 행위를 숨기고 비구가 되었다.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삼장을 통달하고 사람들로부터 아라한으로 존경받았다. 沙羅婆抵의

가람에 있을 때 바라제목차경에 대해서 비구들간에 異解가 생겼을 때 마하제바는

異見을 보이고 五事非法을 설했다.173)

이상의 전설을 토대로 大天에 관한 인물묘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五事의 제창과 根本分派의 원인.

② 우파굽타에 관련되는 大天과 유사한 전설.

③ 大衆部 지말분파의 원인이 된 자(移度 A.BⅡ).

④ 大衆部 지말분파의 원인이 된 자(外道 A.B.200).

⑤ 高僧으로 칭찬 받았던 인물­ 分別功德論 ( 增一阿含經 의 주석)

⑥ 大德도 아니지만 惡人도 아니었던 인물­ 義林章 篡注

⑦ 마힌다의 스승­Dīp.(7­25).

⑧ 제3결집 종료 후 Mahisamaṇḍala에 포교­Dīp.(8­5).

⑨ 마힌다와 함께 세일론에 포교­Dīp.(17­25).

⑩ Kakusandha(拘留孫)佛의 제자­Dīp.(15­36).

⑪ 보리수를 楞伽島에 보낼 것을 제안한 아쇼카의 대신­Mah.(18­20).

172) 阿育王經 ( 大正藏 50, pp.162上∼162下); 阿育王傳 ( 大正藏 50, pp.120下∼121中).

173) 寺本婉雅, タ­ラナ∼タ印度佛敎史 , (國書刊行會, 1974), pp.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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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Duṭṭhag maṇī왕 시대의 비구­Dīp.(19­6)

⑬ Saṃghatissa 시대의 비구­Mah.174)

이상과 같이 大天을 둘러싼 전승은 몇 개의 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다.

전설의 특징에 따라 보면 ①∼④는 五事를 제창하고 승가분파의 원인이 되었던

大天이 설해져 있고, 이단자로서 취급되었다. ⑤∼⑫에서는 위대한 스승으로써 칭

찬하고 있으며, 敎法의 전도에 힘을 기울 던 전도사로 설명되고 있어 전자와 거

의 반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大天이 동일인인가 혹은 複數의 인물인가에 대

해서는 별도로 하고 大天에 대한 평가가 전승의 계보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지

적할 수 있다. 이들 평가에 의하면 大天을 비방한 전승의 원천은 카슈미르유부에

서 시작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대중부 내지 대승계의 자료는 유부의 전승에 수정

을 가해 大天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또한 大天을 위대한 스승으로 설한 전승은

분별설부와 대중부 대승계에 속하고 있다.

2. 大天의 五事에 관한 異見

이상과 같이 大天에 대한 평가는 전승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大毘婆沙論 등에는 五事와 결부시켜 근본분파의 원인 제공자로 표현하고 있다.

五事를 둘러싼 쟁론의 배경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엄격주의자와 관용주의자의

대립, 혹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기존의 아라한에 대한 일반 비구들의 비난

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비구들과 진보적 사상을 가

졌던 비구들의 대립으로 보여진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대중부의 末派 分派의 결과와 연결하여 흥미있는 견해를

174) 金倉圓照, 印度中世精神史 中, pp.295∼296; 塚本啓祥, 初期佛敎敎團史の硏究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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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고 있다. 즉, 大天이 五事를 주장한 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

신에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서 불과를 이루려고 하는,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사

람들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 五事의 傳承

大天이 五事說을 주장하여 분파를 일으킨 惡比丘로 설명한 대표적인 기록은 大

毘婆沙論 과 현장역의 異部宗輪論 이다. 五事說은 大天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거

론되었던 내용으로 大毘婆沙論 이전의 문헌이나 世友의 異部宗輪論 의 4역 가운

데 현장역 이외의 3역 등에는 大天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五事의 전승에

대하여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有部의 八犍道論 (383역출) 및 發智論 (657∼660역출)에서는 「八犍度(蘊)」 중

에 제3 「智犍度 의 제2 「五種跋渠(納息)」 중에 五事가 악견으로 설해져 있으나,

大毘婆沙論 (656∼695역출)과 같이 大天과 승가항쟁의 전설에는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 또한 鞞婆沙論 (383역출)에는 「智犍度」의 상당부분이 없기 때문에 論外지만

舊婆沙論 (437역출)에는 「八犍度」 중 처음의 3건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智犍度 는 4품이 있으나, 오종납식(五事)의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4

세기역의 八犍道論 에는 거의 오종발거(납식)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5세기역의

舊鞞婆沙論 에는 이 장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舊鞞婆沙論 에는 이것

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大毘婆沙論 의 성립 시에는 八犍道論 혹은 發

智論 의 원형에 오종발거(납식)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장의 성립은 大毘婆沙論 의 원형 성립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분별설부의 論事(Kath vatthu) 175)의 제2품 제1∼5절에는 五事가 異部의

175) 스리랑카 사전에 의하면 아쇼카왕이 불교 승가에 많은 공양을 했으므로 6만의 외도가

賊住로 승가에 들어왔다. 그 때문에 아쇼카園이 혼란에 빠졌다. 왕은 목칼리풋타 티

사를 파타리풋트라성에 초대하여 문제를 수습하려 하 다. 그는 분별설 이외의 非正

統說者를 추방하고 1천의 아라한을 모아 論事 를 편찬하 다. 이것은 佛滅 후 2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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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說로 표시되어 있으며, 붓다고사의 주에는 五事가 東山住部(Pubbasela), 西山住

部(Aparasela)[안드라 지방의 부파 andhaka]의 설로 기록되어 있으나 大天의 이름

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大毘婆沙論 에서의 大天과 五事와 僧伽分派의 전설이

결합되기 이전에 五事만의 전승이 존재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異部宗輪論 에서는 大衆部, 一說部, 說出世部, 鷄胤部, 多聞部, 雪山部 등 諸派

의 설로 五事를 소개하고 있으며, 바브야의 정량부 전승은 五事를 一說部의 說로

하고 있다. 西藏大藏經 176)에는 說出世部의 說로 五事를 기록하고 있으며, 分別說

部(세일론 상좌부)와 說一切有部에서는 그것을 邪說로 보고 있다. 따라서 五事는

대중부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상좌부계에서는 邪說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

다.177) 이상의 五事說은 大天에 의해서 승가에게 더욱 강조되었다.

2) 大天 以前의 五事內容

본래 五事의 쟁론은 四諦, 八正道의 실천자인 아라한 位의 내용에 대한 문제로,

所斷煩惱의 잔재유무, 斷惑理證의 심천의 관찰에 대한 證義이다. 五事非法의 各支

의 항목은 불타의 一念直觀內에 번쩍이는 심리실증의 反省的 사상의 기록과, 입멸

관찰에 의한 須跋陀羅(善賢)의 八正道에 관한 의혹에 대한 불타 교화의 해답이다.

이 五事法의 각 항목은 阿含經 의 수처에 흩어져 있다.

藏文 毘奈耶雜事 에서는

저 毘奈耶法 중에 聖道八智가 드러나면 거기에는 제일의 사문도 또한 드러난다. 그것

에 의해서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관하고, 법의 深底에 達하고, ①猶豫를 벗어나

고, ② 疑惑을 벗어나고, ③ 他에 의해 이끌리지 말고, ④ 他에 의한 말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부정이다. ⑤ 師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諸法에 대해서 不畏를 얻으라.

의 행사로 제3결집이라고 부른다. 平 川彰, 佛敎硏究入門 p.35 이하.

176) 西藏大藏經 , 大谷 Vol. 127, p.257.

177) 塚本啓祥, 「大天の傳承と僧伽の抗爭」, ( 印佛學 13­1),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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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설하고 있으며, 한역 毘奈耶雜事 권38에는

선현이 말하되 나는 항상 스스로 얻은 법으로 유예를 무너뜨리고, … 세존이

이 법을 설할 때 선현은 塵을 멀리하고, 垢를 떠나고, 법안정을 얻어 모든 諦에

서 不壞信을 얻어 애욕의 바다를 건너고 모든 疑網을 끊고 자연히 모든 미묘법

을 통달하 다.178)

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五事法은 원시교단 내에서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논의로 阿含經 곳

곳에서 볼 수 있으며, 五事法의 각 조항은 깨달음에 대한 심상의 논의로 원시교단

내에 거의 존재하고 있던 논제 다. 또한 유부계의 문헌인 八犍道論 이나 發智

論 에서는 五事를 五惡見이라 하 다.

玄奘역의 發智論 과 大毘婆沙論 에는 각각 대응하는 舊譯이 존재한다. 發智

論 에 대응되는 것은 八犍道論 으로 僧伽提婆가 竺佛念과 함께 前秦建元 19년

(383)에 번역했다. 大毘婆沙論 에 대응되는 阿毘曇毘婆沙論 은 佛陀跋摩(혹은 부

타발마)가 道泰 등과 함께 서력 427년에 번역했다.

阿毘曇八犍道論 과 당 현장역의 阿毘達磨發智論 은 同本 異譯으로 보는 경향

이 많아 전자를 舊譯, 후자를 新譯으로 간주하기도 하 다. 따라서 發智論 이 현

장에 의해서 역출되고부터 八犍道論 譯文의 난해함 때문에 불교학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불교전적의 원전연구나 史的 硏究가 성해지면서

八犍道論 이나 「發智論 이 단순한 동본이역이 아니고 독자적인 존재성을 가진 이

본이역이라고 말하게 되었다.179)

八犍道論 과 發智論 에는 같은 의미의 五義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大毘婆

沙論 에 있어서는 신역의 大毘婆沙論 에만 大天의 五事가 기록되어 있다.180) 發

178)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 大正藏 24, p.396下).

說此法時善賢梵志. 遠塵離垢得法眼淨. 於諸諦實得不壞信. 超越愛河斷諸疑網. 自然通達

諸微妙法.

179) 西 義雄, 阿毘達磨佛敎の硏究 pp.56∼57.

180) 金倉圓照, 印度中世精神史 中, (岩波書店, 昭和37), pp.268∼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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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論 에서는 五事의 견해가 각기 身見, 邊執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인 五見의

어느 부분에 포섭되는가, 혹은 四諦 중 어느 諦를 깨달아서 그들 邪見을 단멸할

것인가가 토의되었으며 토의가 끝나면 그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그것을 주

석한 大毘婆沙論 에서는 五惡見의 자성과 대치를 설명한 후에 “等起는 무엇인가.

大天의 인연이 이것의 等起가 된다”라고 하여 大天의 전설을 설하고 五見의 기원

을 大天에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大毘婆沙論 의 내용은 大天이 먼저 존재하

여 五事를 설한 후에 그것을 迦多衍尼子가 發智論 에 채택하여 논제로 하 다는

설명이 된다. 이것은 시간적 전후관계에서 큰 문제가 된다.

五事에 대한 내용은 論事 제2품의 1∼5장 사이에서 자세하게 評破되어 있으나

분파 결집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論事 에 의하면 五事는 東山住部,

西山住部의 邪說이라고 해석되어 있다.

迦多延尼子에 의해서 만들어진 發智論 은 설일체유부파의 기본적이고 조직적인

敎義書이다. 發智論 에 등장하는 五惡見은 제3편(智蘊) 제2장(五種納息)의 끝에

기록되어 있다.

論事 ․ 八犍道論 ․ 發智論 에 등장하는 五事의 내용을 비교 정리해보면 다음

과 같다.

(1) 八犍度論 에 나타난 五見181)

① 失不淨: 아라한은 不淨을 漏失한다. 형상이 정미로운 摩迦夷天이 아라한으

로 하여금 부정을 漏失하게 하여 침상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② 自脫不知: 아라한은 스스로 벗어나는 것을 모른다.

③ 自脫狐疑: 아라한은 스스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의심하여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④ 由他知: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은 他에 의해서 알게 된다.

181) 八犍度論 ( 大正藏 26, p.819上∼下 ; 高麗大藏經 24. pp.698∼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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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稱言苦道苦道種: 苦라고 칭언해야 道가 있으며, 苦라고 칭언해야 道種이 있

는 것이다.

(2) 發智論 에 나타난 五見182)

① 漏失不淨: 어떤 아라한은 天魔에 유혹 당해 不淨을 漏失하는 자도 있다.

② 無知: 어떤 아라한은 스스로 해탈하는데 있어서 아직 無知가 있다.

③ 疑惑: 아라한에게는 스스로 해탈하는 것에 대해서 아직 疑惑이 있는 자도

있다.

④ 但由他度: 어떤 아라한은 다만 他에 의해서만 濟度되는 자도 있다.

⑤ 道及道支苦言所召: 道 및 道支는 ‘괴롭다’고 말을 하는데 있다.

(3) 論事 (Kath vatthu)183)에 나타난 五事

① 不淨漏精: 論事 의 제2품 제1절184)에 의하면 ‘아라한에 不淨漏精이 있는가’

의 문제가 논해진다. 아라한에게도 不淨漏精이 있다고 주장하는 他派에 대해

서 論事 의 저자는 아라한은 貪․欲貪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不淨漏精

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하여 他派는 아라한은 貪은 없지만 不淨漏精은

있다고 하며, 그 이유로 魔衆天이 아라한에게 不淨漏精을 준다고 설한다. 여

러 가지 議論을 반복하다가 論事 의 저자는 율장의 기록을 인용해185) 具念

正知하고 잠자는 자는 不淨을 漏失하지 않는다고 논하고 있으나 他派는 아라

182) 發智論 ( 大正藏 26, p.956上∼中 ; 高麗大藏經 24, p.978上∼中).

183) Arnold C. Taylor, Kath vatthu(London, P li Text Society[이하 PTS], 1979), pp.163∼

203.

184) Kath vatthu, pp.163∼172. Atthi Arahato asucisukkavisaṭṭhīti? ...

185) Vinaya-piṭaka, Vol. i (London, PTS, 1979), p.295. 「아난이여, 정신을 집중하고 氣를

모으고 잠자는 비구들은 부정을 유출하지 않는다. 또한 아난이여, 범부조차도 諸欲에

대한 집착을 버린 자는 부정을 유출하지 않는다. 아난이여, 아라한이 부정을 유출하

는 것은 無處無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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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에게 他人이 의복이나 발우, 床座, 病緣藥資具를 주는 것이 가능한 것 등을

들어 魔가 그들에게 부정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他派의 주장은 어떠한

이유든지 아라한조차도 漏精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소변이나 가래침 등의

생리적인 漏失의 일종이나 혹은 천마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든 아라한들은 이

러한 것들의 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② 無 知: 論事 의 제2품 제2절(無知論)186)에 의하면 ‘아라한에게도 무지가 있

는가’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붓다고사의 주석에 의하면 이것은 東山住部의

설로, 그들은 女․男의 성, 바른 길, 바르지 않은 길, 초목, 숲 등의 명칭에

대해서는 아라한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아라한도 무지는 남아 있다고 주장한

다. 이 주장은 아라한도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을 수밖

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論事 의 저자는 聖典의 예를 들어 반론하

다.

③ 猶 豫: 論事 의 제2품 제3절187)에 의하면 ‘아라한에 猶豫가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동산주부의 설로 그들은 女․男의 이름과 성에 대

해서는 아라한의 결정 사항이 아니므로 ‘아라한에게도 유예가 있다’라고 주장

한다. 그에 대하여 論事 의 저자는 ‘폭류를 건너서 의혹을 끊은 佛陀․勝

者․人王에게 귀의한다’라고 하여 반박하고 있다. 이것은 무지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대한 단순한 것에 관한 의심이 문제가 된 것이다.

④ 他令入: 論事 의 제2품 제4절188)에 의하면 ‘아라한에게 他令入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동산주부의 설로 그들은 ‘아라한에게 他

令入이 있다’고 주장한다. 論事 의 저자는 聖典 등의 예를 들어 반박하고 있

다. 이 내용은 大毘婆沙論 과는 조금 다른 감이 있지만 결국 아라한도 상황

에 의해서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의존할 수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

186) Kath vatthu, pp.173∼180. Atthi Arahato aññ ṇan ti? ..

187) Kath vatthu, pp.181∼187. Atthi Arahato kaṅkh ti? ...

188) Kath vatthu, pp.187∼195. Atthi Arahato paravit raṇ 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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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⑤ 入定者의 語發表論: 論事 의 제2품 제5절에 의하면 ‘入定者에게 語發表가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동산주부의 설로 그들은 初禪入定者는 預

流道의 刹那에 있어서 ‘괴롭다’라는 말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論

事 의 저자는 ‘初禪入定者는 言語를 滅한다’189)라는 성전을 인용하여 그들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190)

大毘婆沙論 에 의하면 ‘괴롭다라고 소리지르는 것에 의해서 聖道는 나타난다’라

고 하여 苦를 외치는 것이 성도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하고 있다. 論事

에서는 동산주부의 설에 의하면 初禪入定者는 ‘괴롭다’라고 하는 말을 發表한다고

하여 苦를 외치는 것을 결과로 보고 있으며, 兩者의 주장은 거의 같다.

論事 에 의하면 아라한에 관한 相違의 견해 근저에는 2종의 아라한 사이의 미

묘한 차이가 문제되고 있다. Sadhammakusala­arhat와 Paradhmmakusala­arhat

이다. 주석에 의하면 전자는 Paňň vimutta를 후자는 ubhatobh gavimutta를 가리

킨다. Paňň vimutta라고 하는 아라한의 지식은 개인적 깨달음에 한정되어 있어서

알지 못하는 남․녀․나무 등의 이름에 대해서는 무지와 의혹을 갖고 있지만,

ubhatobh gavimutta라고 하는 아라한의 지식은 자기 이외에 타인의 깨달음까지

넓다. 그렇다면 五事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Paňň vimutta가 구체적

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가 문제다.

두 종류의 아라한에 대해서는 Majjhima­nik ya 에 의하면 불타가 제자들을

七種類로 분류하는 가운데 첫째로 소개되는 것이 ubhatobh gavimutta(俱分解脫者)

와 Paňň vimutta(慧解脫者)이다.191) 혜해탈자는 진리를 지혜에 의해서 보되, 육체

로 체험하지 않는 자를 말하고, 구분해탈자는 양쪽을 갖춘 자를 지칭한다. 주의할

189) Saṃyutta­nik ya, Vol. iv (Ldndon, PTS, 1973), p.217.

190) Kath vatthu, pp.195∼203. Sam pannassa atthi vacībhedo ti? ...

191) Majjhima­nik ya, Vol. i (London, PTS, 1979), pp.477∼481.

- 49 -

것은 五事가 자기 자신의 아라한관을 주장하기 위한 命題이기보다는 상대방의 아

라한관을 비난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五事를 주장하는 사람

들 사이에서는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 최고의 목표는 아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192)

五事는 대중부 쪽에서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制多山部․西山住部․北

山住部의 南大衆部와 上座部 가운데의 雪山部를 지목할 수가 있다. 두드러진 것은

이들 부파가 모두 산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森林에서 수행하는 비구들이 승원 생활을 하는 아라한들, 즉 산에서의

수행을 즐겨하지 않는 승원 생활을 하는 비구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비판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가져볼 만하다.

【표 3】五事에 대한 비교

五事 1 2 3 4 5 출전

論事

asucisukka

visaṭṭhi

不淨漏精

aññ ṇa

無知

kaṅkh

猶豫

paravitara

ṇa

他令入

Sam pannassa

vacībheda.정(定)에

든 자의 언어발표

Kath vatthu

pp.163∼202

八犍度論 五見 失不淨自脫不

自脫狐

疑由他知 稱言苦道苦道種

大正藏 26,

p.819中

發智論 五見 漏失不淨 無知 疑惑 但由他度 道及道支苦言所召大正藏 26,

p.956中

大毘婆沙論 五事 餘所誘 無知 猶豫 他令入 道因聲故起大正藏 27,

p.510

異部宗輪論 五事 餘所誘 無知 猶豫 他令入 道因聲故起大正藏 49,

p.15上

正量部傳承五事

타인에

응답하는

無知

二心

1)猶豫

2)疑

(타인의)分

스스로 救하는 것이

도이다.

印度中世精神史,

中.pp. 286∼287

정량부 전승은 텍스트에 정량부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파의 차례를 T ran tha(157

192) 李慈郞, 「大天の[五事]主張の背景について」, ( 宗敎硏究 三二四号, 2000), p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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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25?)의 佛敎史 기록(寺本역 363 이하)과 비교해 보면 순차적으로 上座部, 大

衆部, 正量部 所傳으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93) 위의 도표는 諸論에 등장

하는 五事의 내용을 비교 정리한 것이다.

3) 大天의 五事

大天의 五事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논서로는 大毘婆沙論 과 異部

宗輪論 이 있다. 이들에게 수록된 五事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大毘婆沙論 에 나타난 五事

① 餘所誘: 아라한일지라도 다른 이에게 유혹되면 부정한 것이 흐를 수 있다.

大天이 성을 나와 승가람에 있을 적에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인하여 꿈을 꾸

고 부정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전부터 아라한이라 일컫고 있었는

데 제자로 하여금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게 하 더니 제자가 말했다. ‘아라한

이라 함은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한 사람인데 스승께서는 어째서 아직도 이런

일이 있습니까?’ 大天이 말했다. ‘악마에게 희롱당한 것이니 너는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는 이유는 요약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는 번뇌요, 둘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에 의하여 흘러나오

는 일이 아라한에게는 있을 수 없지만 깨끗하지 않은 것이 흘러나오는 일은

아직 면할 수 없다. 모든 아라한이 번뇌는 비록 다했다 하더라도 어찌 소변

과 대변, 콧물과 침 등이 없겠는가. 그리고 모든 악마는 언제나 부처님의 가

르침을 미워하며 시샘하고 있으므로 선행을 닦는 이를 보면 곧 가서 그를 파

괴하니 비록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역시 희롱을 당한다. 나의 경우도 그 때문

에 흘러나온 것이다. 이것은 악마가 한 짓이니 너는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여

193) 金倉圓照, 앞의 책,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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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말라’194)고 하 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아라한이라도 꿈속에서 天女에 유혹당해 부정을 유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大天에 의하면 漏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에게 번뇌의 漏失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소변이나 눈물, 가래침과 같은 생

리적인 부정 등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이, 꿈속에서 정액을 유출하는 것은 어

쩔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행위가 불법을 방해하고자 하는 천

마들의 주된 일이므로 아라한의 의지에 의해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眞諦疏 에는 “타인이 의복을 더렵혔다(余人染汚衣)고 하는 것은 제바가

부정을 유출하고 옷을 더럽혔는데 제자를 속이고 ‘나는 아라한이다. 실제로

부정은 없다. 다만 天魔女의 부정에 의해서 아라한의 옷이 더렵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이 의복을 더럽힌 것이다’라고 하 는데, 그 말에는 虛와 實이

있다. 그는 실제로는 범부이면서 제자를 속이고 위와 같이 말했으므로 거짓

이고, 마녀는 실제로 부정을 가지고 아라한의 의복을 더럽히는 경우가 있으

므로 진실이다”195)라고 기록하고 있다.

② 無知: 아라한에게도 무지가 있다.

大天은 제자로 하여금 기뻐하고 가깝게 붙들어 놓기 위해 교활한 방법으로

차례대로 四沙門果를 수기하 다 그때 제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라

한에게는 마땅히 증득한 지혜가 있어야 하거늘 어떻게 저희들은 도무지 스스

로 아는 것이 없습니까?’ 大天이 말했다. ‘여러 아라한들에게도 역시 모르는

것이 있으므로 너는 마땅히 자기를 불신하지 말라. 모든 무지를 요약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染汚된 것이니 아라한에게는 이미 없는 것이며, 둘째는

染汚되지 않은 것이니 아라한에게도 오히려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너

희들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196)

194)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511上).

195)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中∼下); 三論玄義檢幽集 ( 大正藏 70, p.455中∼下).

196)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511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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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도 四種의 사문과에 있어서 증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즉, 무지에 두 종류가 있으며, 染汚의 무지는 아라한에게는 없지만 不染汚無

知는 남아 있다. 그래서 大天은 후자에 의해서 아라한도 자기의 사문과를 자

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眞諦疏 에는 “아라한에는 三界의 생을 받는 무명은 없지만 무지의 습기인

무명은 있다”197)라고 하 다.

③ 猶豫: 아라한에게도 의심이 있다.

제자들이 다시 大天에게 말했다. ‘일찍이 듣건대, 성자는 이미 의혹을 초월했

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희들은 진리에 대해 오히려 의혹을 품게 됩니까?’ 大

天이 다시 말했다. ‘모든 아라한에게도 역시 의혹은 있다. 의혹에는 두 가지

가 있는데, 첫째는 수면을 본질로 하는 의혹이니 아라한은 이미 끊었으며, 둘

째는 處非處에 대한 의혹으로 아라한이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독각조차 이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혹을 갖고 있는데, 하물며 너희와 같은 성문이 모든

진리에 대하여 어찌 의혹이 없겠는가’198)

猶豫는 주저함, 狐疑, 의혹의 의미로 여기에서는 四諦의 진실을 증지하지만

의혹은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大天에 의하면 의혹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

데, 아라한에 있어서도 處非處의 의혹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다. 眞諦疏

에는 “須陀含果는 삼해탈문에 있어서는 의혹이 없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다. 그러므로 의혹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199)라고 하 다.

④ 他令入: 아라한일지라도 다른 이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

나중에 그 제자들이 여러 경전에서 아라한에게는 성스러운 혜안이 있어 스스

로 해탈한 것에 대해 스스로 증득하여 안다는 것을 설한 내용을 읽고 大天에

게 말했다. ‘저희들이 만일 아라한이라면 마땅히 스스로 증득하여 알아야 하

197)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下); 三論玄義檢幽集 ( 大正藏 70, p.455下).

198)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511中).

199) 三論玄義 , ( 大正藏 45, p.8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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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늘 어떻게 다만 스승으로 깨닫게 될 뿐이며 도무지 現知로는 스스로 증득

하여 알 수 없습니까?’ 大天이 대답했다. ‘어떤 아라한은 다만 다른 이로 말

미암아 깨달으며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마치 사리자가 지혜 제일이

요, 목건련이 신통 제일이기는 하나 만일 부처님께서 수기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스스로 알지 못했을 터인데 하물며 다른 이들이 깨달으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너는 이것에 대해 마땅히 더 따지지 말

라.’200)

아라한도 본인의 깨달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타인, 즉 스승에 의해서 처

음으로 자각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論事 의 해석도 취지에 있어서

는 동일하다. 眞諦疏 에는 “타인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他度)이라고

하는 것은 근기가 下劣한 자는 初果를 얻고도 스스로 얻은 것을 알지 못한

다. 선지식에게 묻고 선지식은 그를 위하여 삼보와 四諦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것, 그것이 初果의 상이라는 것을 설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관찰하

여 처음으로 初果 얻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타인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말한다”201)고 하 다.

⑤ 道因聲故起: 聖道는 소리로 인하여 일어난다.

大天이 비록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질 지만 모든 선근을 끊지는 않았으므로

뒷날 한밤중에 자신이 지은 죄가 무겁기 때문에 ‘장차 어느 곳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될까’라고 생각하다가 근심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자주 ‘괴롭도

다’ 하고 외쳤다. 가까이 머물던 제자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며 괴이하게 여

기다가 새벽이 되자 물었다. ‘편히 지내셨습니까’ ‘나는 아주 안락하다.’ ‘만일

그렇다면 어젯밤에는 왜 괴롭다고 외치셨습니까?’, ‘나는 聖道를 부른 것이니

너는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모든 聖道는 만일 정성껏 괴롭다고 칭하면서 부

200)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511中).

201) 三論玄義 ( 大正藏 45, p.8下)에 의하면 “성인도 타인에 의해서 의혹을 끊을 수가 있

다”라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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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않으면 끝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젯밤에 자주 괴롭다고 부르

짖은 것이다.202)

眞諦疏 에 의하면 “聖道는 언어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聖道를

이루었을 때 언어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舍利弗은 게송을 입

으로 제창했을 때 바로 초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언어에 의해서 聖道는 나타

나는 것이다”203)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으로 五事의 내용에 대해 여러 文獻을 통하여 검토해 보았다. 문헌들의 기

록에 의해서 대립되는 의견의 相違를 논하면 아라한을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그들도 일상적인 것이나 생리적인 현상에서 오는 한계는 면

할 수 없다. 즉, 아라한이 정신적으로는 완벽하여 최고로 이상적인, 보통 인간의

상태를 벗어난 존재이기는 하나 몇 개의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가진

면에서 阿羅漢은 추구되어야 할 최고의 존재로는 말하지 않는다.

(2) 異部宗輪論 에 나타난 五事

大天의 설화와 관계가 있는 異部宗輪論 은 한역으로 十八部論 과 部執異論

이라고 칭하는 異譯이 있으며 티베트역의 異部宗輪論 이 있다.

Bhavya의 정량부 전승204)과 함께 異部宗輪論 (3역 포함)에는 四衆 혹은 三衆

의 비구들이 五事를 둘러싸고 쟁론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異部宗輪論 에는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져 결국 분파가 일어났다고 설해져 있다.205) 部執異論 과 異

部宗輪論 에서는 함께 四衆을 들고 있으나, 十八部論 과 티베트역은 3衆을 들고

있다. 異部宗輪論述記 의 四衆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06)

202) 大毘婆沙論 ( 大正藏 27. p.511中).

203) 三論玄義 , ( 大正藏 45, p.8下)

204) 寺本婉雅, タ­ラナ­タ印度佛敎史 , p.87.

205)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上).

謂因四衆共議大天五事不同分爲兩部 一大衆部二上座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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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龍象衆: 大天의 일파로 비유되는 투쟁의 무리로 위세가 과격하여 누구도 맞

설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성격이 악하며, 왕이나 대신의 힘에 의해 聖衆을

위협하는 무리들

② 邊鄙衆: 大天의 門徒로 마음이 事理의 반대로 움직이며 덕이 없으나 그들이

투쟁의 상수는 아니며, 다만 大天을 따르는 무리

③ 多聞衆: 범부의 학자로 三藏을 통달하고 聖衆에 수순하는 무리.

④ 大德衆: 聖衆으로 학식도 풍부하고 계율에 있어서도 청정하며 四果를 획득

한 上座들

위의 기록을 보면 四衆은 大天의 무리와 上座의 무리라고 하는 두 그룹으로 나

뉘어진다. 결국 현장역의 異部宗輪論 과 마찬가지로 五事를 주장한 大天과 그에

반대하는 상좌들의 쟁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분파의 원인에 대해서도 단지 大天의 五事에 의해서 上座部․大衆部로 분파되었

다는 기록 이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五事의 내용도 大毘婆沙論 의 내용과

동일하다.

異部宗輪論 에 의하면 大衆部의 교리에는 佛身論이나 菩薩觀에 있어서 상당히

진보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당시에 완비된

것이라기보다 大衆部 후기에 발달한 사상체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207)이라

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초기 대중부의 성립과 異部宗輪論 의 성립 시기

를 비교해 보면 수긍이 가는 내용이다.

五事의 내용은 阿羅漢을 인간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제1은 아라한도 그것을 신

체적으로 보는 한 有漏인 점, 제2, 제3은 아라한은 정의적인 번뇌는 끊었지만 사물

이나 법의 뜻에 관한 학문적인 이치는 아직 모른다는 점, 즉 술어로 말하면 일체

종지에 달하지 못한 점, 제4는 아라한은 自覺이 아니고 他의 가르침으로 覺知한다

206) 異部宗輪論述記 ( 新纂大日本續藏經 53. p.573下∼574上).

207) 鄭舜日, 앞의 책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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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 제5는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항상 正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正心에 들어

가도록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아라한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논하는 저의는 불타에

대비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즉, 보살론의 발달에 따라 불타를 신체적으로도 無漏

로 인정하되, 心力에 있어서는 일체지․일체종지를 갖추고 어떠한 것에 관해서도

무지나 의혹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타의 覺知는 어디까지나 자각적으로 항상 정심

에 주하고 있다고 하는 大衆部 一流의 불타관을 예상하여 아라한의 위치를 낮게

보려고 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佛陀와 성문의 相違点을 밝히려는 것으로 근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유부 등의 의견과 합치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208) 유부의 俱舍論 제6장에 의하

면 아라한에 6종이 있다고 한다.209)

6종이란 ① 退法(사소한 것에 의해서 퇴실하기 쉬운 자). ② 思法(퇴실을 두려워

하여 自害하려고 생각하는 자). ③ 護法(퇴실하지 않도록 스스로 防護하는 자). ④

安住法(퇴실도 쉽게 하지 않지만 증진도 좀처럼 하지 않는 자). ⑤ 堪達法(즐겨 練

根을 닦아서 부동법에 나아가는 자). ⑥ 不動法(절대로 퇴실하지 않는 자)이다.

轉根이나 퇴실에 대해서 유부가 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의논이 많은

것 같이 보이나, 그 가운데 論師 자신의 수도상의 체험이나 어려움이 그대로 혹은

간접적으로 반 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은 아라한조차 때로는 도달한 경지에서 후

퇴하던가 아니면 후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혹은 그 경지에 머물러 버리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범부에서 성자에, 따라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길은 보살에서 佛까지

라는 길과는 명료하게 구별된다. 성자의 길은 널리 일반에게까지 열려 있지만 보

살의 길은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동시에 둘이 출현할 수 없는 佛이 반드시 되는 선

택된 희유의 사람으로 한정된 길이다. 이렇게 탄생된 佛은 다른 이에게 공통되지

208) 木村太賢全集 卷5, pp.117∼118.

209) 阿毘達磨俱舍論 ( 大正藏 29, p.129上).

阿羅漢由種性異故有六種. 一者退法. 二者思法. 三者護法. 四安住法. 五堪達法. 六不動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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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18不共法을 갖추고 있다고 유부는 논하고 있다. 성자의 길은 無漏의 慧에 의

해서 번뇌를 끊어 버리는 수행의 길이지만 불타의 도는 정법의 손으로 유정을 가

르치는 이타의 행인 것이다.210)

또한 이 五事의 내용은 대중부 교리의 근본 특색인 아라한, 불타관 및 수도관에

대한 新說로 초기 대중부 일반의 基調的 사상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다. 이것은 이

五事와 發智論 당시에 거론되었던 五見이면서도 근본분파 직후(베살리 결집)의

대중부 사상보다는 발전된 새로운 사상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大毘婆沙論 의 필자가 發智論 의 五事를 註解하면서 그 주창을 남인도 안다라

지방의 불교개척자 大天과의 관련을 암암리에 연결시키고, 의식적으로는 서북인도

불교 교단의 융성을 설명하면서 그 권위를 정하는 것은 흥미 깊은 일이다. 그러나

大毘婆沙論 이 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일시에 서북인도에 정착되었던 五事非法의

신교의가 그 후에 어떻게 진전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형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

다.211)

制多部가 大天의 후손에 의해서 연결된 一派라고 한다면 大天은 불탑숭배자로서

의 일면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여 발전된 것이 制多部일 것이다. 五事의 주

장은 아라한의 불완전성에 대한 것이지만 그 주장의 배경에는 불탑숭배, 즉 이상

화된 불타에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는지 舍利弗問經 외의 분파 문헌을

대조해봐도 마하데바는 制多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制多部는 大天의 가르침을 이어 制多 崇拜를 특히 강조하고 안드라지방에서 최

초로 독립된 大衆部系의 분파일지도 모른다.212) 또한 五事法은 원시교단 중에서

팔정도, 열반, 아라한과 등에 관한 불제자들의 오도의 심상을 논의한 題名으로 大

天이 제창한 쟁론의 제목이 아니다. 이 五事法은 發智論 에도 등장하는데 大天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大毘婆沙論 을 편찬할 때 發智論 의 五事法을 인용하

210) 岩波講座, インド佛敎 1, ( 東洋思想 第8卷, 岩波書店, 1988), pp.223∼224.

211) 賀幡亭俊, 「五事非法について」, p.168. 논자는 그것이 정토교 사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212) 靜谷正雄, 小乘佛敎史の硏究 , (百華苑, 昭和 53),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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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아육왕이 남인도에 파견한 大天이라는 인물을 끌어 올려 그의 所說로 하여 毘

婆沙師의 의견을 주장한 날조설로 인정하는 경향이 학자들간에도 농후하다.213)

213) 寺本婉雅, 平松友嗣, 共編譯, 藏漢和三譯對校 異部宗輪論 , (國書刊行會, 昭和 49),

p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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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大天의 五事와 阿羅漢

이상으로 소개한 大天의 五事 내용은 大天 당시의 阿羅漢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經論의 내용과 상반될 수도 있다. 經論에 설해져 있는 아라한, 즉 아라한과

불타의 차이를 살펴보고, 大天의 아라한관을 수용했던 부파를 찾아보고자 한다.

1. 阿羅漢 槪念의 成立과 展開

阿羅漢은 범어로는 ‘arhat’, 빨리어로는 ‘arahant’라 하고 음역으로 阿盧漢, 阿羅

訶, 阿羅呵, 阿囉呵, 囉葛帝라고 하며, 應, 應供, 應眞이라고 의역한다. 그리고 어원

적으로 살펴보면 arhat는 어근 ‘arh’에서 파생된 명사로 ‘arh’는 공경받을 만한 어

떤 가치가 있는 者라는 의미이고, arhat는 공경받을 만한 자(응공)다.214) 또한 어근

arh에서 at를 부가하여 만들어진 현재분사형의 단수주격으로 응공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프라끄리트어(지방어)의 해석에 따르면 r이 ri가 되어 결국 ar는 ari로

변화되어 의미는 賊, 敵으로, han은 ‘죽이다’라는 의미로 둘이 결합되어 殺賊으로

번역되었다. 또는, arhat를 aruhat로 해석하면 a­ruhat, 즉 생하지 않는 불생의 의

미를 얻을 수 있다. 또한 aruhat는 ‘적을 죽인 자’의 의미가 되는데 이 경우의 ‘적’

은 욕망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언어의 기원을 aruhati, 즉 ‘∼에 어울리다’라고

하는 의미를 둔다. 예를 들면 존경이나 贈物을 ‘받을 가치가 있는, 받기에 어울리

는’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215)

상좌부 불교의 이상적인 모델인 아라한은 리그베다(Ṛg­veda)의 신 아그니

214) P li Englisch Dictionary, p.77. sv. Arahant 참조.

215) エドワ­ド․J․D․コンゼ 著, 平川彰․橫山紘一譯, コンゼ 佛敎 ­その敎理と展

開­, (大藏出版, 昭和 50), pp.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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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i)로 나타난다. 불타 이전에는 신이 아니라 하나의 성자로 표시되고 있으며,

높은 군사계급에 주어진 존칭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적, 윤리적, 도덕적 행위가

뛰어난 자이기 때문이었다.

자이나교에서 아라한은 신과 인간을 위한 존경 칭호로 간주되었으며,

Tīrthaṅkara에게 아라한, 세존, 승자 등은 일반적인 칭호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

로 아라한은 불교와 자이나교에서 성자가 된 승려를 말하며, 존경할 만한 분, 부처

님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한 불교의 성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아라한이 되고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은 상좌부 불교에서 모든 수행자

들의 목표가 된다. 또한 자이나교에서는 아라한 자격은 행복을 설하는 자에게 속

한다. 불교에서 아라한은 가장 높은 단계이며, 초기불교의 출세간의 無學이다. 결

정기에 속한 자이며, 번뇌와 고통을 단멸한 자이며, 미래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

다. 아라한과는 유여열반이며 죽음 후에 직접적으로 완전한 해탈에 이른다.

아라한은 빨리경전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再)生을 다하고, 梵行이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했고, 현재 삶 다음에 더 이상은 없다”216)라고 설하고

있으며, “번뇌를 멸했고 해야 할 일을 다했고 짐을 내렸고 진실한 목적에 도달했

고 존재의 속박을 완전히 멸했고 지혜로써 바르게 해탈한 자, 즉 ‘阿羅漢’은 번뇌

에서 벗어난 자”217)라는 문구로 일반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어떻게 하여 아라한이 되는 가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中部 에 따르면, “비구들

이여, 어떻게 비구가 아라한이 되는가? 그는 사악하고 不善한 法, 煩惱, 다시 태어

남, 고통의 과보, 미래에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멀어진 자이다”218)라고 하여 아라한

216) Dīgha­Nik ya Ⅰ. p.84; Majjhima­Nik ya Ⅰ. p.139. Khīṇa j 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 paraṃ itthatt ya.

217) Dīgha­Nik ya Ⅲ. p.83; Majjhima­Nik ya Ⅰ. p.4; Saṃyutta­Nik ya Ⅰ. p.71.

arahaṃ khīṇ savo vusitav katakaraṇīyo ohitabh ro anupatta­sadattho parikkhīṇ

a­bhava­saññojano sammadaññ vimutto.

218) Majjhima­Nik ya 1. 280. Kathaṃ ca bhikkhave bhikkhu arahaṃ hoti: rak 'ssa

honti p pak akusal dhamm saṅkilesik ponobhavik sadar dukkhavip k

yatiṃ j tijar maraṇ . , 맛지마니까야(中部) Ⅰ, p.21. 주) 45에 “번뇌로부터 멀리

있는 자, 번뇌를 없앤 자라는 의미다…그는 사악한 불선법(不善法)․번뇌․다시 생함

- 61 -

은 사악하고 불선한 법, 번뇌, 재생, 고통의 과보,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자

로 정의하고 있다.

俱舍論 제24에 따르면 해탈도로 말미암아 모든 漏盡의 획득과 최초로 俱生하

기 때문에 누진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누진이생의 때에 이르면 무학의 아라한

과를 성취한다. 이미 무학과의 법을 획득했기 때문에 別果를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무학이라는 이름을 얻는다.219)

아라한향에서 무색계의 수소단의 혹을 끊고 최후에 금강유정에 들어가 유정지의

제9품의 혹을 단멸할 때 眞智가 생기고 곧 무학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다. 아라한을 성취한 자는 성문에 제한된 것이 아니며 獨覺과 佛에 공통적인 칭

호로 사용되고 있다.

成唯識論 제3에 “아라한은 보통 삼승의 무학과위를 총섭한다. 왜냐하면 모두

원히 해로운 번뇌의 적을 멸했기 때문이다”220)라고 말하고 있으며, 아라한의 어

휘에 관해서 大毘婆沙論 제94에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응수자라고

한다. 또 ‘阿羅’는 일체의 번뇌를 말하고 ‘漢’은 能害라고 한다. 날카로운 지혜의 칼

을 사용하여 번뇌의 적을 해치고 제거하기 때문에 阿羅漢이라고 한다. ‘羅漢’을 生

이라 하고, ‘阿’는 無라는 의미로 無生이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하는데, 모든 중생

세계의 생사법 가운데서 다시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漢’은 일체의 악하고 선하지

않는 법(惡不善法)이라고 부르고, ‘阿羅’는 遠離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諸惡 不善法

을 遠離하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부른다”221)라고 설하고 있으며, 大智度論 제2

[後有]․괴로움의 과보, 그리고 미래에 늙고 죽어야 할 것으로부터 벗어난 자”라고

말한다. 백도수 역주.

219) 俱舍論 ( 大正藏 29, p.126下).

由此解脫道與諸漏盡得最初俱生故名盡智. 如是盡智至已 生時便成無學阿羅漢 果. 已得

無學應果法故. 爲得別果所應修學此 無有故得無學名.

220) 成唯識論 ( 大正藏 31, p.13上).

阿羅漢者通攝三乘無學果位. 皆已永害煩惱賊故.

221) 大毘婆沙論 ( 大正藏 37, p.487下).

答應受世間勝供養故。名阿羅漢. 謂世無有淸淨命緣非阿羅漢所應受者. 復次阿 羅者. 謂

一切煩惱. 漢名能害. 用利慧刀害煩惱賊, 令無餘故名阿羅. 復次羅漢名 生. 阿是無義. 以

無生故名阿羅漢. 彼於諸界諸趣諸生生死法中不復生故. 復次漢 名一切惡不善法. 言阿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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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르면, “아라한에 殺賊, 不生, 應受供養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222)라

고 하 다.

俱舍論 제24에 “남의 일( 舊俱舍論 제18에는 他의 이익을 위한 일223))을 마

땅히 지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有染者의 공양을 받을 만한 바가 되기 때문에, 이

의미에 의거하여 아라한이라고 하 다”224)고 전하고 있으며, 여래가 아라한인 이

유에 대해서 大乘義章 제20末에 “첫째, 佛은 일체의 악법을 단절할 만하기 때문

에 應이라고 이름하고, 둘째 여래는 적멸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應이라고 이름하

고, 셋째 여래는 일체의 중생을 교화할 만하기 때문에 應이라고 이름하고, 넷째 여

래는 모든 과실을 모두 끊어 福田淸淨으로 사물의 공경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應

供이라고 부른다”고 하 다.

2. 阿羅漢의 범주

阿羅漢의 범주는 존경의 의미인 존칭에 속하는 경우와 수행의 단계에 정의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경배의 문구에서 잘 알려진 “아라한이시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

취하신 세존께 경배드립니다”225)라고 하여 존칭이나 존경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

이다. 다른 것은 아라한은 선정에서 제4선을 성취한 자를 말한다.

“여기, 춘다여, 어떤 비구가 樂을 버림으로부터 그리고 苦를 버림으로부터 이

者. 是遠離義. 遠離諸惡不善法故. 名阿羅漢. 此中惡者 謂不善業. 不善者謂一切煩惱.

222) 大智度論 ( 大正藏 25, p.71中∼下).

云何名阿羅呵. 阿羅名賊. 呵名殺. 是名殺賊. … 復次阿名不. 羅呵名生. 是名不生. 佛心

種子後世田中不生. 無明糠脫故. 復次阿羅呵名應受供養. 佛諸結使除盡 得一切智慧故。

應受一切天地衆生供養. 以是故佛名阿羅呵.

223) 阿毘達磨俱舍釋論 ( 大正藏 29, p.282上).

由如來一向行利益他事. 不壞法阿羅漢.

224) 俱舍論 ( 大正藏 29, p.126下).

卽此唯應作他事故. 諸有染者所應供故. 依此義立阿羅漢名.

225) Saṃyutta - nik ya 2. 1.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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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정신적 낙과 고의 멸함으로부터 不苦不樂인 思, 念의 청정인 네 번째 선

에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엄

격히 고행하고 산다. 이것이 성스러운 자의 율에 있어서 현세의 낙의 상태라고

말해진다.”226)

그리고 아라한은 9차제정에서도 제4선에 속한다. 그리고 또한 욕계, 색계, 무색

계의 삼계 가운데 색계의 최고위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조용길 교수의 아함성전 에 따르면 “친구여 모든 慾貪의 壞滅, 愚癡의 壞滅, 이

것을 칭하여 阿羅漢果라고 한다”227)고 하여 아라한과는 탐욕과 우치를 멸한 것을

말하고 아라한과를 실현하는 도를 팔정도로 보고 있다.228)

아라한은 4향4과 가운데 하나이며, 4선 가운데는 제4선에 속하고, 9차제정에서는

제4선, 여래십호 가운데 하나이며, 유학과 반대 개념으로 無學이라고 부르며, 무학

도와 무학위에 속한다.

아비달마 논서에 의하면 성문의 이상으로서의 아라한위는 매우 높은 지위에 해

당하며 利根者조차도 三生의 수행을 거친 후에 도달하는 위치이다. 또한 大覺․獨

覺229)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불타에 해당한다.230)

상좌부 전통에 따르면 해탈 열반한 성자( ṛya)를 세 종류, 즉 아라한, 벽지불,

불타라고 한다. 이 가운데 한 존재가 아라한이다. 여기서 아라한은 진리에 의해 규

정된 대로 모든 苦를 멸한 사람이고, 행해져야 할 모든 일을 행한 사람으로 간주

될 수 있었다. 아비달마에서는 애욕의 최후 흔적이 소멸한 순간에 생기는 滅의 인

식과 滅의 인식을 얻은 후에 더 이상 미래에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不生의 인식을

226) Majjhima - nik ya, 1.41. Majjhima - nik ya 1. 22. sukhassa ca pah n dukkhassa

ca pah n pubbe v somanassadomanass naṃ atthagam adukkhaṃ asukhaṃ

upekh satip risu­ddhiṃ catuttaṃ jh naṃ upasampajja vih siṃ.

227) 조용길 편저, 아함성전 , 한국아함실천불교회, (해조음, 2002). p.608.

228) 위의 책, p.609. “친구여, 성스러운 팔지의 도, 그것이 아라한과를 실현하는 도이다. 그

것은 즉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친구여, 이것이 아라

한과를 실현하는 도이고, 그곳에 이르는 방법인 것이다.”

229) 順正理論 권65 「賢聖品」, 大正藏 29, p.726中.

230) 鍵主良敬, 「大乘菩薩道におけろ聲聞の位置について」, ( 인불학 , 11∼2),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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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자가 바로 아라한이다.231)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삼승, 즉 성문, 연각, 보살 가운데 성문승에 속

하는 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보살승에 비하여 낮은 단계를 성취한 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대승사상이 개인의 깨달음에 대한 추구보다는 이타와 집단적 구제를

강조한 보살승을 강조하기 위한 방안으로 설명한 것이다. 또한 大乘入楞伽經 에

서는 아라한을 세 종류, 한결같이 고요한데 나아가는 아라한, 菩提의 원력으로 물

러난 아라한, 부처님이 변화하신 아라한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성문으로서의 아라

한, 보살로서의 아라한, 불타로서의 아라한으로 대치할 수 있다.232)

阿毘達磨大毘婆沙論 제62에 따르면,

아라한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退法이요, 둘째 思法이며, 셋째 護法이요,

넷째 安住法이며, 다섯째 堪達法이요, 여섯째 不動法이다. 여기서 퇴법이란 그

가 당연히 물러나는 것이요, 사법이란 생각한 뒤에 칼로 자기 몸을 해치는 것

이며, 호법이란 은근하고 신중하게 해탈을 수호하는 것이고, 안주법이란 물러나

지도 않고 더 나아가지도 않는 것을 말하며, 감달법이라 함은 잘 견디어내어

부동(不動)에 능히 이르는 것이요, 부동법이란 본래부터 부동 종성을 얻었거나,

혹은 근기를 수련함으로 말미암아 부동을 얻게 된 것을 말한다233)

라고 기록되어 있다.

231) 에드워즈 콘즈 저, 안성두, 주민황 옮김, 인도불교사상사 , (민족사, 1994), pp.179∼180.

232) 大乘入楞伽經 ( 大正藏 16, p.605上).

阿羅漢有三種. 謂一向趣寂. 退菩提願. 佛所變化.

233) 阿毘曇毘婆沙論 ( 大正藏 28, p.241上).

阿羅漢有六種. 一退法. 二憶法. 三護法. 四等住. 五能進. 六不動. 退法者退. 憶法者. 心

生厭憶. 持刀欲自害. 護法者於已解脫. 心生愛樂. 善守護故. 等住者. 不退不進. 能進者能

進至不動. 不動者住本根不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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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佛陀와 阿羅漢의 관계

1) 佛陀와 阿羅漢의 根源的 관계

일반적으로 아라한은 번뇌를 멸한 자이지만 상좌부에서는 제4선에 든 자로 간주

하고 있으며, 번뇌를 멸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불타와 차이를 두고 있다. 불

타와 아라한의 차이에 대해 연구하는 일은 大天의 五事問題를 해결하는 중요한 실

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타와 아라한의 차이는 불타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

고 아라한은 불타가 존재한 이후에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동시에

불타는 승가를 구성하고 원시불교의 결정기법에 따르면 전생에 보살로 도솔천에

태어나 이 세상에 바라문이나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태어나 출가하여 깨달음을 성

취하지만 아라한은 도솔천을 거치지 않아도 되며, 사성계급의 어느 곳에 속하든지

불타가 되는 방법과 달리 아라한이 될 수 있다. 또한 아라한은 재가신자로서도 성

취할 수 있는데, 이것은 후에 반드시 출가를 하거나 열반에 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타는 佛地를 가진 존재이지만 아라한은 佛地를 가지지 않는다. 또한

불타의 色身은 네 가지 특성, 즉 32상, 80종호, 불가사의한 힘과 무한성을 가지지

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234) 또한 불타가 되기 위해서 광대한 시간을 필요로 하

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

아비달마 論書에 있어서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로 아라

한과 불타의 경지는 분명히 구별되고 있으며, 아라한으로서 道와 불타로서의 道가

동일하지 않으며, 凡夫로부터 阿羅漢의 道는 오로지 번뇌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의 道이지만 菩薩로부터 佛陀로서의 道는 자비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234) 에드워즈 콘즈 저, 안성두, 주민황 옮김, 인도불교사상사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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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행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凡夫로부터 阿羅漢으로서의 道는 널리 개방

되어 있지만 菩薩로부터 佛陀로의 道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것은 불타로서의 출현

이 우주 안에 동시에 두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비달마의 論師

들은 석존을 숭앙하는 깊은 마음에서 불타의 위대함을 극구 찬탄하면서 스스로 목

적하는 바를 아라한과에 두어 아라한과 불타의 거리를 엄격히 유지함으로써 佛果

를 엿보는 불손함을 결코 범하지 않았다.235)

불타와 아라한의 차이를 깨달음의 공덕의 차이, 즉 타인에 대한 감화의 능력에

큰 차이를 두고 있었다.236)

또한 승가의 구성문제에서 불타와 아라한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아라한은 당

연히 승가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불타는 승가를 구성하는 사람으로 근본경

전에서도 불법승을 삼보로 규정하여 불타와 승가를 다르게 보고 있으며, 불타에

대한 숭앙이 극대화되어감에 따라 불타는 승가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

받았다.

2) 佛陀와 阿羅漢의 깨달음과 救濟方便

佛陀는 제4선의 단계를 넘어 무색계의 선정과 滅受想定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완

전한 전지적 깨달음을 얻지만 아라한은 단지 제4선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아라한

은 성문에 속하는데 아비달마에서는 성문, 연각과 불타의 차이점을 논함에 있어

불타만이 가진 특유한 속성이나 二乘에게 적용되지 않는 명호에 의해 정의한다.

大毘婆沙論 에 따르면 불타가 소유한 18不共法은 十力, 四無所畏, 三念住, 大悲이

다. 또한 제법의 인식에 대한 불타의 성취에는 4종의 특성이 있다.

① 자신의 수행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불타의 지혜는 다른 것으로부터 배운 것

이 아니다.

235) 후지타 고타츠 외,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 p.267.

236) 森章司, 原始佛敎から阿毘達磨への佛敎敎理の硏究 , (東京堂, 1995), p.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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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각각의 제법의 특수한 상을 아는 遍一切處的인 것이다.

③ 모든 존재의 양상을 아는 遍一切宗이다.

④ 의욕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제대로 아는 無功用적인 것을 그 특성으로 하고

있다.237)

불타는 아라한과 달리 일체의 본질과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능력으로 遍知하고

있다. 세친은 세존만이 무명을 완전히 끊었으며 사물을 如如하게 보지 못하게 방

해하는 업장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해 있다고 설한다. 아라한과 연각은 번뇌의 미혹

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번뇌에 의해 염오되지 않은 근본 무명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그들은 불타의 18不共法 또는 시공에서 멀리 떨어진 대상,

사물의 무한한 복잡성을 알지 못한다.

아라한은 그에게 관심있는 것만을 알려고 하며, 연각은 연기법은 증득하고 있지

만 아직도 법계의 대부분은 그들의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238) 즉 아라한은

무명을 완전히 끊지 못했으며, 업장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지 못했고 근본 무명이

남아 있으며, 불타의 18不共法이나 멀리 떨어진 대상, 사물의 무한한 복잡성을 알

지 못하고 관심 있는 것만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불타는 무명을 완전히 끊고, 완

전히 업장에서 해탈했고, 18不共法이나 멀리 떨어진 대상과 사물의 무한한 복잡성

을 알고 모든 것을 아는 자로 아라한의 능력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율장의 주석에 따르면 완전히 그리고 스스로 모든 법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정등각자이다. 실로 이 분은 완전히 깨달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모든 법

들에 대해 알아야 할 법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깨닫고,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

을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이고, 滅해야 할 법들을 滅해야 할 것으로 실현해야 할 법

들을 실현해야 할 것이며, 닦아야 할 법들을 닦아야 할 것이라고 깨달은 분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滅해야 할 것을 滅했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나는 부처다’라고 말했다.239)

237) 에드워즈 콘즈 저, 안성두, 주민황 옮김, 앞의 책, p.182.

238) 위의 책,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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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4선에서 동일하게 三明을 성취하지만 三明에서 宿命通의 능력이 각각 다

르며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만큼 전생의 기억이 가능하고, 이교도는 44겁까지만 전

생을 기억할 수 있으며, 불제자 중에서도 80대 제자들은 10만겁까지, 두 상수제자

는 하나의 무한 10만겁까지, 獨覺佛은 두 개의 무한 10만겁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240)

근기에 의해서 여섯 가지의 아라한을 건립하는데 그 근기는 구품, 즉 下下, 下

中, 下上, 中下, 中中, 中上, 上下, 上中, 上上의 구품이 있다고 전한다.241)

阿毘達磨大毘婆沙論 제62에 따르면 아라한과를 얻을 때 두 가지 의미를 갖추

는데 하나는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색계를 초월한 것이다. 또한

무색계에서는 일부의 染을 여의기 때문에 預流果를 얻고 전부의 染을 여의기 때문

에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한다. 또한 아라한과를 얻을 때는 무색계를 초월하고 順

上分結을 다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되며, 무색계를 초월하고 무기

의 번뇌를 다한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된다.242)

무색계를 초월하고 異熟이 없는 번뇌를 다한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되며, 무색계를 초월하고 오직 等流果의 한 가지 果의 번뇌만을 다하게 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된다. 무색계를 초월하고 無慚, 無愧와 상응하지 않는 번뇌가

다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되며, 무색계를 초월하고 天趣의 化生을

다한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된다고 하 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阿毘達磨大毘婆沙論 에 의하면 아라한과를 얻을 때는

無色界를 초월하게 되고 順上分結을 다하고, 等流果의 한 가지 果의 번뇌만을 다

하고, 無慚, 無愧와 상응하지 않는 번뇌를 다하며, 天趣의 化生을 다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무색계에서 전부의 染을 여의기 때문에 아라한

239) 율장주석(Samantap s dik ) 1, pp.115∼116. samm s mañ ca sabba­dhamm naṃ

buddhatt pana samm sambuddho, …buddho, …bh vetabbe bh vetabbato.

240) 율장주석 1, 앞의 논문 p.161. 참조.

241) 阿毘達磨大毘婆沙論 권62( 大正藏 27, p.320上).

242) 위의책, ( 大正藏 27, p.323中∼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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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를 얻게 된다고 하 다.243)

결국 아라한과를 얻음은 무색계의 초월과 번뇌를 다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일체의 번뇌를 다한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견해에 따르면 아라한과에서는 見道와 修道에서 끊어지는 모든 번뇌

의 끊어짐을 통틀어 모아서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라한과 불타의 근본적 차이를 판단하게 하는 한 가지 용어는 바로 대비일 것

이다. 大悲는 불타의 18不共法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 苦 뿐만 아니라 숨겨진 苦

그리고 욕계, 색계, 무색계의 苦에 대한 총체적 자비를 말한다. 대비는 苦를 지닌

중생이나 苦가 없는 중생에게 평등하게 느끼는 것으로 大悲心은 貪․嗔․癡를 버

렸고 윤회의 두려움으로부터 중생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동정과 다르다.

불타는 아라한보다 더욱 중생을 요익하게 해주며 그들을 제도한다. 또한 중생을

비탄과 고통의 윤회세계에서 해방시키며, 3승을 가설하여 더 좋은 연을 받아 태어

나도록 한다.

4. 각 部派의 阿羅漢觀

1) 上座部 계통의 阿羅漢觀

上座部系統의 아라한관은 “아라한의 지위에 이르면 有漏業의 번뇌 같은 것을 증

장시킬 번뇌가 없기 때문에 아라한에게는 복업을 증장시킴이 없다”든지 “아라한의

몸은 無漏이다”라고 하여 아라한을 대체로 신성시하고 이를 목적으로 하 다.244)

243) 阿毘達磨大毘婆沙論 권62( 大正藏 27, pp.323中∼324上).

得阿羅漢果時亦具二義. 一者得果. 謂得阿羅漢果. 二者越界. 謂越無色界.… 得 阿羅漢果

時亦具二義. 一越無色界. 二盡天趣化生故. 後二果位方總集遍知.

244) 高涥豪, 佛敎學槪觀 , (宣文出版社, 1991),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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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린다팡하 에서 장로 나가세나는 왕의 질문에 대하여 “아라한은 모든 공포(죽

음에 대한 공포까지)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답한다.

修道論이 아비달마의 해석에 의해서 복잡화되었던 당시의 上座部 불교에서 출가

자들은 滅盡에 달한 아라한의 인간적인 면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上座部 불교

의 실천적 성격을 보면 아라한은 육신을 지닌 채로 현세적 공포 가운데 최상의 것

인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한 입장에서 마음의 修習의 究極에 이르

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아라한은 능력의 범위에 따라 남녀의

성명, 地上의 길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단지 전지자인 여래만이 알 수 있다고 한

다. 이것은 아라한이 전지자인 불타와 비교할 때 전지의 점에서 불타보다 下劣하

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라한은 자기 능력의 한계 내에서 종교실천의 최고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上座部 불교가 아라한을 신격화한 불타에 비교해서 지극히 인간적으로 파악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체에 수반된 본성”이라고 하는 생리에 관

한 신체의 조건을 들어서 아라한의 마음은 그의 신체에 대한 主帝者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라한은 心을 수습하는 까닭에 육체의 고통이 증가되어도 심적 고통은

감수하지 않는다. 오로지 불타가 설한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아라한도를 얻기

위하여 수행했으나 ‘心의 修習’에 멈추어 버려 번잡한 심리론이 전개되고 수행도가

조직화되었다.245)

上座部系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설일체유부의 아라한관은 조금 다른 내용으로 설

명되고 있다. 아라한은 一切漏의 멸진을 얻은 자이다. 그러나 이들도 다시 번뇌를

일으키고 아라한이라고 하는 과를 퇴실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일단 끊은

번뇌가 다시 생기는 이유는 유부가 말하는 三世實有說에 기본을 두고 설하고 있

다. 반면에 불타는 무지를 대치하는 道를 획득했기 때문에 번뇌가 다시는 일어나

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246)

245) 早島鏡正, 初期佛敎と社會生活 , (岩波書店, 昭和 37), pp.609∼623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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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部가 아라한의 四事나 五事를 용인하는데 반하여 상좌부는 이것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설일체유부가 보는 관점의 아라한은 퇴실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

고 아라한이라고 해서 모두 불퇴하고 무생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

서 또한 ‘아라한에게도 亦有學非無學法’이라고 하 으며, 前十五界, 唯名有漏라고

하여 설령 불과에 이른다고 할 지라도 그 佛身은 유루소성이기 때문에 불신에 대

해 번뇌를 따라 더하는 일이 있으니 아라한은 말할 것도 없다 하 다. 이 설은 법

장부의 아라한신 무루설과 대립된다.

아라한은 모두 靜慮의 현기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든 아라한

은 모두 정려를 얻으나 모두 현전에서 정려를 일으킬 수 없다’라고 하 다. 정려란

四禪의 四根本定으로서 이것을 離染得이라고 하는데 이 근본정을 얻는 데는 따로

가행을 하지 않고 얻는다. 그러므로 무학성자가 비록 정려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현기하고 불현기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아라한이 현기하는 것은 아

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라한은 이미 지은 업을 면하지 못한다. ‘아라한은 猶有故業’이라고

하 다. 다시 말하면 아라한은 자기가 전생에 지은 業力의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아라한은 오직 복을 짓는다는 것으로 ‘有阿羅漢 增長福業’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데 이것은 무학의 성자로서도 오히려 복업을 새로 짓는다는 것을 말한다. 성자가

만약 업을 짓는다면 그 업과를 받아야 할 것이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53에 성

자는 不造引業하고 但造滿業한다247)고 하 는데 이것은 화지부가 주장한, 아라한

은 일체복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에 대치되는 것이다.

끝으로 아라한은 연기의 지배를 따른다는 것으로 ‘亦有緣起 秀阿羅漢轉’이라고

하 다. 『아함경』에 ‘我生已盡 梵行己立, 所作己辨, 自知不受後有’라고 기술한 바

246) 宮下晴輝, 「阿羅漢退失論(その二)」, ( 印佛學 31-2), pp.11∼112.

247) 阿毘達磨大毘婆沙論 권53( 大正藏 27, p.277上).

是故聖者不造欲界引衆同分業 但造欲界滿衆同分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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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이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에 대하여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상에서 설일체유부가 주장한 아라한은 결국 완전한 존재로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퇴실의 가능성과 모든 정려의 현기의 불가능, 지은 업의 지배를 받고, 복을

짓게 되고, 연기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여, 상좌부 내에서도 아라한의 격하된 모습

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大衆部 계통의 阿羅漢觀

異部宗輪論 에 ‘有阿羅漢 爲餘所誘와 猶有無知와 亦有猶豫와 他令悟入과 道因

聲起니라’248)하 는데 同述記에 ‘大天分部大衆承其苗裔今陳五事旨’249)라 하 다. 아

라한과에 있어 상좌 大衆部 간에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대목이다.

아라한의 비판 정신과 관련하여 본다면 아라한은 천마수혹의 범위에 있는 것으

로 염오무지는 끊어졌으나, 아직 불염오무지는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적 비

판을 함에 있어서 종종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합당한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한 비판도 하지 못하는 아라한은 자신의 해탈 내 경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

여 다른 성장의 기별을 얻어 비로소 아라한이 될 줄 안다고 하기 때문에 아라한이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하는 비판이다. 이렇게 아라한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중시했

는데 ‘아라한무퇴’와 異部宗輪論 에 ‘所作己辨 無用受法’250)이라고 하여 삼승무학

자를 의미하는 所作己辨과 경계의 차별상을 취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無用受法으로

아라한을 중시하고 있다. 반면에 유부에서는 아라한은 오히려 번뇌의 습기인 불염

오무지가 있으므로 경계의 차별상을 고집하여 인연소생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一說部, 說出世部, 鷄胤部의 아라한관을 살펴보면, 다른 이의 유혹을 받는 경우

248)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下).

249) 異部宗輪論述記 ( 新纂大日本續藏經 53. p.581上).

250)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p.15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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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所誘]가 있고 오히려 [無知]가 있으며 망설임[猶豫]도 있고 다른 이로 하여금

깨쳐 도에 들기도 하며[他令悟入], 도가 소리로 인하여 일어나기도 한다[道因聲起]

고 하 으며, 아라한에게는 물러난다는 뜻이 없으며, 세간의 正見은 없고 信根도

없으며, 無記法도 없으며, 正性離生에 들어갈 때에 온갖 結을 끊는다.

多問部의 아라한관을 살펴보면 異部宗輪論 中四에 의하면 多問部의 교리라 하

여 극히 단편적으로 ‘有阿羅漢, 爲餘所有, 猶有無知, 亦有猶豫, 他令悟入, 道因聲起’

라 하 으며, 그밖에 주장하는 것은 설일체유부와 동일하다. 설가부의 아라한관은

대중부의 주장과 동일하다.

制多部, 西山住部, 北山住部의 아라한관을 살펴보면 아라한에게는 다른 이의 유

혹을 받는다는 등의 五事가 있고, 그밖의 주장은 대부분 大衆部의 학설과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라한관 내지는 비판 의식의 저변에는 대승을 향한 발돋음이 있었

다. 그러나 아라한의 力用은 후세의 大乘이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단순한

독선적 內面力만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인가를 멀리 떠나 山間이나 巖石 사이

에서 스스로만 정화하는데 전념한 자도 있었지만 활동이 뛰어난 자의 경우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분투 노력한 자도 적지 않았다. 불교가 석존의 열반 후에

크게 발전한 것도 실은 이들 아라한들이 不惜身命의 각오로써 포교하 기 때문이

다. 특히 부루나의 포교적 태도는 감동적이다.251)

다만 아라한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로 볼 것인가, 혹은

그들도 일상적인 것이나 생리적인 면에서의 한계는 면할 수 없는 존재로 볼 것인

가에 대한 것이었으며, 일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뛰어난 존재로서는 인정하지만

몇 개의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가진 점에서 아라한은 반드시 추구되어

야 할 최고의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251) 木村泰賢著, 朴京俊譯, 原始佛敎思想論 原始佛敎硏究 Ⅳ, (經書院, 1992),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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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大天의 五事가 불교사에 미친 향

이상과 같이 大天 내지는 大衆部系에서의 아라한에 대한 비하는 당시 승가에 상

당한 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의도와 결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데, 우선은 大

天의 五事가 根本分派와 무관함을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1. 大天의 五事와 根本分派의 관계

大天이라는 이름은 大毘婆沙論 , 異部宗輪論 등의 자료에 등장하고 있으며,

大天의 五事는 주로 설일체유부계의 문헌이나 후기의 티베트역사서에 근본분파 및

대중부 가운데 지말분파의 원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大毘婆沙論 이나 異部宗輪

論 에는 大天이 주장했던 五事에 의해서 불교 교단이 최초의 분파를 일으켰다고

하는 전승이 있는데, 그것이 대표적인 근본분파 원인의 하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大毘婆沙論 이전의 문헌이나 현장역(A.D. 662)의 異部宗輪論 이

외의 3역인 十八部論 , 部執異論 , 藏譯에는 大天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고 五

事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또한 662년의 규기찬의 異部宗輪論述記 에는 大毘婆沙論 에 등장한 大天의 내

용을 인용하 으며, 大毘婆沙論 에 다만 ‘王’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無憂王’이라고

고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규기가 異部宗輪論 을 따라 大毘婆沙論 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근본분파의 전승에 대한 大天, 五事, 분파의 결합은 어떻게 해서 이루

어진 것일까. 어째서 大毘婆沙論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大天과 근본분파의

이야기가 첨가된 것인가. 여기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大天에 관한 이상할 정도의

증오심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설한 바와 같이 근본분파에 大天을 결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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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것은 유부계의 논서이다. 따라서,

① 전설의 上座部, 大衆部의 항쟁이, 有部와 大衆部 항쟁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② 五事와 분파의 전승에 어째서 大天을 결부시킨 것인가의 두 가지 문제를 고

찰할 필요가 있다.

上座部를 표현하는 명칭으로는 Therav da와 Vibhajjav da의 두 종류가 전해지

고 있다. 상좌부계 율장에 의하면 Therav da는 제2결집 때 十事를 非法으로 결정

한 正統派의 이름으로 그들은 分派 후에도 分派前의 이름을 간직하여 Therav da

라는 이름을 고수했다. 따라서 정통파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부는 二分된 부파의

하나가 아니라 放逐된 비구들의 그룹으로 보여진 것이다. Dīpavaṃsa 는 二部派

에서 분파된 諸派를 阿闍梨說이라고 부르고 있다. Vibhajjav da는, 세일론 사전에

의하면 제3결집에 의한 異敎徒를 추방할 때 ‘正等覺者는 Vibhajjav da이다’라고 하

는 견해가 판단의 기준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방불교에 전해지는 상좌부의 명칭에 대해 보면 Bhavya의 상좌부 전승에

‘上座는 성자( ṛya)의 種임을 설명하므로 Sthavira다’라고 했으며, Bu­ston은 ‘상

좌부는 상좌인 성자의 정신적 상속자에 속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주어

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 내용을 보면 근본의 상좌부가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의도가 內在되어

있지만 북방전승은 근본의 승가를 상좌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설일체유

부의 전승에 의하면 상좌부는 대중부와의 쟁론에 패하여 別住한 자들이라고 전하

고 있다.252) 설일체유부는 이들 근본상좌들 보다 본인들이 정통파임을 강조한다.

유부와 대중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보면, 서기전 1세기에는 설일체유부와 대중부

가 서로 대립하는 유력한 부파 다는 것이 마투라의 獅子柱頭의 銘文에 의해서 알

수 있다. 대중부의 최대 중심지는 안드라지방이다. 마투라유부의 교회사에 기록된

카쉬미르유부의 개교사 Madh­y ntika는 세일론 사전에도 목칼리풋타 띠사에 의

해 파견된 개교사 Ma­jjhantika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카쉬미르에 거주했었

252) 塚本啓祥, 「上座部敎團史の硏究」, p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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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상좌부가(그 시기와 어쨌든), 후세의 유부인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大天의

무리에 대해서 살펴보면 세일론 사전은 목칼리풋타 띠사에 의한 마하데바의 남인

도 파견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화씨성의 대중부와 안드라의 대중부의 관계를 이

해할 수 있다.

카쉬미르 및 남인도의 개교는 세일론 사전에 의하면 마우리아의 아쇼카 치세에

해당한다(화씨성에 의한 제3결집 후). 이것은 아쇼카왕의 마에법칙 5에 법대관의

파견지를 제13에는 전도사 파견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에 의해

서 밝혀지고 있으므로 거의 확실하다.253) 따라서 근본분파를 칼라 아쇼카 내지는

난다와 마하파드마의 치세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大毘婆沙論 의 전설에 기록

된 것과 같이 근본분파로 인하여 상좌부가 카쉬미르에 別住했다는 설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대의 大天의 존재도 의심되기 때문에 유부와 大天 등의 교섭을 갖기 위

해서는 마우리아 아쇼카 시대를 想定하는 것이 훨씬 적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大毘

婆沙論 의 전설에는 다른 의도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카쉬미르 유

부가 작성한 大毘婆沙論 은 근본분파의 상좌부에 자신을 결부시킴으로써 유부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大毘婆沙論 성립 시기는 카쉬미르 유

부가 마투라 유부보다 우위에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 역사적 사정을 반 하여

유부의 전승에 카쉬미르 전도의 전설이 가미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254)

大天, 五事 그리고 그 분파의 관계는 바수미트라의 異部宗輪論 에서도 지말분

파와 관련하여 논한 것은 익히 아는 바다. 舍利弗問經 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비

구가 장로비구 사이에서 율의 증광을 둘러싸고 쟁론하여 근본분파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五事의 제창을 율의 조문에 대한 엄격주의에 반대하는 관용주의의 주장이

라고 본다면, 舍利弗問經 에 의한 舊律과 新律의 지지에 관한 논쟁도 五事의 쟁

253) 塚本啓祥, 「インスクリプションと部派」, ( 印佛學 , 9-1), p.79.

254) 塚本啓祥, 「大天の傳承と 僧伽の抗爭」, ( 印佛學 13-1),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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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과 관련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大毘婆沙論 의 작자( 大毘婆沙論 의 원형에

大天의 전승이 없었다면 전승자)가 대중부의 지말분파에 관련된 大天과 五事를 일

부러 근본분파의 전승에 삽입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異部宗輪論 도 근본분

파의 오래된 전승에 大天의 이름을 첨가했다고 할 수 있다.255)

佐藤密雄의 原始佛敎敎團史の硏究 에 의하면 “대중부 新說은 論事 에 의하면

북방소전에 大天의 說이라고 하는 五事가 있는데, 그 五事의 성격을 보면 사상교

의상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수도를 지도하는 수단에 관한 것이다. 장년의 아

라한에 不淨漏精 있는 것은 생리상의 필연이며, 세속의 견문되는 것을 모르는 것

도 대중부․상좌부 대부분 아라한의 당연한 것이다. 또한 다른 이의 기별로 수도

하는 것은 불타 이래로 행해졌던 가르침이다. 만약 大天이 漏精을 인정한다면 그

는 신교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리를 밝혀서 새로운 지도를 하기 때문

에 특이한 지도에 다수의 무리가 모여 그것을 외부인들이 대중부라고 부른 것이라

보여진다.

대중부는 처음부터 스스로 칭했던 것이 아니고 他稱이 어느 사이에 自稱化된 것

은 아닌지, 어쨌든 제2결집과 대중부의 대결집과의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島史 ,

大史 가 그것을 결부시켰다고 하는 것은 후세의 대중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고 하 다.256)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북방전승에서는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大天의 五事를 들

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 자료에는 의문되는 점이 적지 않다. 우선 說一切有部 소속

의 大毘婆沙論 은 發智論 에 대한 주석서로서 發智論 에는 大天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현장역의 異部宗輪論 이외의 3역에서도 大天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학자들간의 거의 공통적인 견해로 大毘婆沙論 을 번역한 현장이

異部宗輪論 에 인용한 것이라 보고 있으며, 五事와 大天이라고 하는 인물과 관계

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둘이 결부된 것일까. 이것은

255) 塚本啓祥, 앞의 논문, p.113.

256) 佐藤密雄, 앞의 책, p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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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헌에 있어서 大天과 대중부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중부에 대한 반

감이 설일체유부의 문헌인 大毘婆沙論 에 반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

면 분별상좌부나 대승의 여러 문헌에서는 大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

거나 적어도 그 정도의 악인으로는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島史 나 大史 등 남방의 빨리 연대기에 의하면 아쇼카왕의 치세 하에서 파타

리푸트라의 제3결집 후에 목칼리풋타 띠사에 의해서 인도 내외의 변경지에 전도사

를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마하데바라고 하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마히사만다라

(안드라지방)에 보내진 전도사다.257) 안드라지방은 남인도에 있어서 불교 최대의

중심지다. 마하데바는 그곳의 개교자로서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를 중심으로 한 대

중부를 혐오하여 그 이름을 빌어 五事를 주창하고 교단의 분파를 일으킨 악인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견해도 보여지고 있다.258)

이와 같이 大毘婆沙論 가운데 기록되고 있는 大天에 관한 내용은 확실히 의도

적인 면이 있다. 大天의 五事와 근본분파의 관계는 논한 바와 같이 불명확한 점이

많으며, 대중부 가운데 지말분파의 원인으로서 거론되는 大天은 역사적인 인물이

다. 大毘婆沙論 의 편찬자가 어떠한 이유로 그의 이름을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

다. 說一切有部의 전승을 살펴보더라도 상좌부, 대중부가 분파할 때 그들은 대중부

의 세력에 려 쫓겨나다시피 카슈미르에 이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부에 대

한 대항의식이 강했을 것이며, 남인도의 개교자 던 高名의 마하데바라고 하는 이

름에 삼역죄 등의 죄를 지웠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佐佐木閑은 大毘婆沙論 에 등장하는 근본분파와 大天이 전혀 관계가 없는 가장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근본분파에 대한 내용은 단지 “그때 鷄園의 쟁론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

후 의견의 차이에 의해서 드디어 분파되고 말았다. 하나는 상좌부, 또 하나는 대중

257) Mahi­samaṇḍala : 山崎元一은 アショ­カ王傳說の硏究 , (春秋社, 1979), pp.139∼

141에서 ① 안드라지방. ② 마이솔지방. ③ 古都를 중심으로 하는 나르마다川 유역지

방이라고 논하고 있다.

258) 李慈郞, 앞의 논문,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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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이다”라는 내용으로 전후에도 근본분파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상좌부나 대중부

의 명칭 대신에 전과 같이 賢聖(상좌부)이나 大天(대중부)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

둘째, 大毘婆沙論 의 내용으로 보면 大天은 정식의 비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

재든 과거든 三無間業을 지은 자는 비구가 될 자격이 없는데 내용 중에 “자세하게

묻지 않고 출가시켰다”는 내용은 大毘婆沙論 의 작자(혹은, 전설의 작자)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구의 자격이 없는 자가 五事를 제창하고, 무리를

거느리고, 끝까지 비구로서 일생을 마친 것이다.259)

현 단계로는 大天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說一切

有部의 자료에 그를 대중부의 개조로 묘사하고 있으나 대중부의 문헌에는 그의 이

름이 보이지 않으므로 확인할 수가 없다. 단지 그에 관한 자료와 학자들간의 견해

를 고려해 볼 때 남인도의 대중부와 관계를 갖고 있는 인물로 무슨 이유인지 說一

切有部 쪽에서 그의 인물됨을 악인의 대명사로 전하고 있으며, 大毘婆沙論 을 편

찬할 때 종래 대중부의 견해로 논의되었던 오종의 惡見과 연결시켰다고 보여진다.

大天에 대한 전설의 특징에 따라 살펴보면 승가분파의 원인이 되었던 大天으로

이단자로서 취급되기도 하고,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 칭찬하고 교법의 전도에 힘을

기울인 전법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大天을 비방한 전승의 원천은 Kaśmīra 유부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대중부 내지

대승계의 자료는 유부의 전승에 수정을 가해 大天의 입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大天을 지목한 유부와 상좌부의 관계는 어떤 것인

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기전 1세기에는 마투라지방에 설일체유부와 대중부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유력한 부파 던 것은 마투라의 사자석두의 銘文에 의해서 알 수 있다. 대중부의

최대의 중심지는 안드라 지방으로 붓다고사에 의해서 안드라 학파의 이름 아래에

기록된 대중부파인 동산주부, 서산주부, 왕산부, 의성부의 존재를 알 수 있다.

259) 佐佐木閑, インド佛敎變移論 ­なぜ佛敎は多樣化したのか­, (大藏出版株式會社,

2000), pp.25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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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g rjunikoṇḍa의 불교유적은 용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 서북인

도와 서인도에 대중부의 존재가 인정되고 있다. 초기대승경전인 般若經 이 남인

도→서인도→북인도라는 발전 경로로 전달되었다고 하는 것을 부합시키면 그 의의

가 크다. 또한 根本有部律의 전승으로부터 서기 2세기경에는 마투라(Mathura) 유

부와 Kaśmīra 유부가 서로 대립했음을 알 수 있다.260)

Kaśmīra의 전도는 유부 내지 근본유부의 전승에 의하면 Madhy­ ntika(末田地)

라고 하는데 세일론 사전의 목칼리풋타 띠사에 의해서 파견된 末田地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카슈미르에 별주했던 상좌가 후세의 유부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大天의

무리에 대해서 세일론 사전은 목칼리풋타 티사에 의한 마하데바의 남인도(Mahi­

samaṇḍala) 파견을 기록하고 있음으로 파타리푸트라의 대중부와 안드라의 대중부

의 支派와는 당연히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Kaśmīra 및 Mahi­samaṇḍala에의 개교는 세일론 사전에 의하면, 마우

리아의 아쇼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근본분파를 칼라 아쇼카 내지는 난다와 마하

파드마 치세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大毘婆沙論 의 전설에 의한 근본분파 상의

상좌계 카슈미르 별주의 기록에는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대의 大

天의 존재도 의심된다. 그러므로 大毘婆沙論 의 전설 형성에는 五事의 내용보다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카슈미르의 유부에 의해 작성된 大毘

婆沙論 은 근본분파의 상좌부에 자신을 결부시켜서 유부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

라 생각된다.

또한 大天, 五事, 분파에 관해서 塚本啓祥은 異部宗輪論 에 등장하는 지말분파

에 관계된 三者의 결합, 舍利弗問經 에 등장하는 엄격주의자와 관용파의 쟁론의

주제가 되었던 舊律과 新律의 문제, Bhavya의 정량부 전승의 정황 등을 예로 들

면서 大毘婆沙論 의 작자가 대중부의 지말분파에 관련된 大天의 五事를 모방하여

거의 확실히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근본분파의 전승에 大天의 이름을 삽입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을 기초로 異部宗輪論 이 Samayabheda의 근본분파의 오래된

260) 塚本啓祥, 앞의 논문, pp.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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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에 大天의 이름을 첨가한 것이며, 大毘婆沙論 의 전설은 유부의 성립 이전에

기원이 되었던 五事에 기인되는 승가항쟁의 전설에 전법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유부의 부파적 특성을 첨가한 것이라 논하고 있다.261)

賀幡亭俊도 發智論 의 五事와 남전 論事 의 五事 내용이 같은 점을 지적하면

서 “ 發智論 및 論事 양쪽 모두 五事 비법을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설하지 않으

며, 發智論 은 당시에 대두되었었던 일종의 五見이고 論事 는 안다카派 등의 설

이다. 안다카派는 島史 , 大史 및 論事註 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인도 본토의 후

기 분파지만 異部宗輪論 의 세우 이전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五事非法을 전

하는 大毘婆沙論 의 설은 發智論 의 五見과 아육왕시대에 안다카 지방에 파견되

어 후에 안다카파의 始祖가 되었다고 하는 大天을 연결하여 시대를 역류하여 근본

분파의 원인으로 만들었다”262)고 하 다.

平川彰도 “十事에 관한 논쟁이 佛滅 110년의 일이라는 것은 十誦律 등에도 전

하는 이상, 유부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불과 몇 년 동안

에 두 차례의 논쟁이 있었고, 마침내 제2의 논쟁으로 인하여 교단의 분파가 야기

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263)고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大天의 五事를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지 않다.

1) 上座部의 입장

異部宗輪論 등의 기록을 보면 상좌부는 불타에 대해 비교적 현실적인 인간으

로 보는 반면 대중부는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모든 여래의 말 은 법륜을 전하

며, 佛은 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시고, 여래의 색신은 실로 邊際가 없고, 여래의

261) 塚本啓祥, 앞의 책, pp.244∼246.

262) 賀幡亭俊, 앞의 논문, p.168.

263) 平川彰 앞의 책, p.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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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도 변제가 없으며, 제불의 수량도 변제가 없다‘고 하는 대중부의 주장을 상좌

부는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다.264) 즉 상좌부는 불타를 높은 인격자로 공경하는데

비해 대중부는 진리의 體現者로서 불타를 표현하 다. 그에 의해서라도 상좌부와

대중부의 대립이 드러난다. 상좌부는 아라한을 이상의 경지로 여기는 반면 대중부

는 불완전한 것으로 인정하고 완전한 경지인 佛, 보살을 이상의 경지로 여기는 것

을 알 수 있다.

五事는 大天의 독창적인 설이 아니며, 大天 이전에 단편적으로 자유주의 던 대

중부들 사이에 주창되어 왔던 것을 大天이 묶어서 일설로 하여 커다란 문제를 일

으켰던 것이다.

근본분파를 기원으로 한 근본 이부의 대립은 佛滅 후 100년경에 베살리 결집할

때에 교회적인 대립이 생하고, 佛滅 후 3세기에 大天의 신설에 의해 교리상의 대

립을 보기에 이르 던 것이다.265)

佛滅 후 장로 상좌들은 승가 四衆의 교육, 練成의 책임, 대외교권 확립 등의 책

임이 있었다. 그것은 안으로 불교 교의의 안정화, 고정화, 정의조직화를 필요로 함

과 동시에 밖으로는 외교사상의 교섭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佛滅 직후부

터 점점 철저해지고 있던 계율존중주의는 점차 비구․비구니 중심, 즉 출가 중심

적 경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에 따라 석존 재세 시의 자유로움, 광활함을 잃고

형식적으로 기울고 세속적인 양상을 점점 보이게 되었다.

불타관에 대해서도 석존은 불타이지만 불타가 우리들의 성도의 목표보다도 옛날

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입멸하여 눈앞에 있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석존을 불타로 보

았다. 그러나 교단의 사회적 통일의 일면으로 불교의 개종자이며 세간적 제일인자

로서 거인화하 다. 그 때문에 신참의 四衆에게는 현실적 實證으로서의 대상이 되

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교단에 현존하는 장로상좌에 대해서 모범적인 유덕자, 즉 모든 아라한

264) 金子大榮, 金子大榮著作集 第一卷, pp.24∼25.

265) 馬田行啓, 앞의 책, p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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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서 새로운 출가자들의 현실적인 이상자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비록 有德者

라도 스스로의 해탈을 위해서 정진할 뿐 제자, 신자들의 육성을 하지 않는 수행자

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출발점은 교단 내외의 사회적 사정에 대응해서 일체

의 지도자, 경 유지 등의 책임자로서의 선의에서 출발하 지만 그 결과 점점 석

존의 진의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한편에서

는 반성의 소리를 내게 되었고 진실된 불타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필요성이 다른

부파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후의 대승불교운동의 발단으로 이어지게 된 것

이다.

한편 아쇼카왕 시대에 이르러 破僧定意의 변경에 의해서 複數의 부파를 통합하

고 한 개의 불교세계를 재구성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남방불교 상좌부도 외압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일체유부는 아쇼카왕의 움직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

었다. 당연히 당시 운동의 중심이었던 대중부와도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후대 大毘婆沙論 을 저술할 때에는 유부가 입장을 바꿔서 파승정의의 변경

을 인정하게 되지만 아쇼카 내지 대중부에게 적대감정을 가졌던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설일체유부는 大天의 五事說을 통하여 본인들이 상좌

부를 대표하는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대중부에 의한 근본분파를 강조하여

본인들의 입장을 합리화하고자 하 다.

2) 大衆部의 입장

근본분파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五事에 관한 모든 전승과 그에 관한 인물에 대

해 검토한 결과, 五事는 불교 교단 내에서 일찍부터 비구들간에 議論이 되었던 명

제 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때문에 근본분파가 발생했다고는 확언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전승이 五事를 둘러싸고 상좌부, 대중부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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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를 설하고 있다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五事의 내용은 아라한에 대한 비난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주장한

자들이 대중부의 비구들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중부 스스로 五事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他部派의 문헌에서만 등장하는 내용이다. 오히려 대중부계

의 문헌인 舍利弗問經 이나 分別功德論 에서는 분파의 원인을 계율의 증광 등으

로 설하고 있다.

大天에 대해서도 전설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면 승가분파의 원인이 되었던 이

단자로서 취급되기도 하고,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 칭찬 받기도 하고, 교법의 전도

에 힘을 기울인 전법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적어도 대중부 내지 대중부의 자료에

서는 유부의 전승에 수정을 가해 大天의 입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불타에 대한 입장도 상좌부와 매우 다른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시시대에

불타와 제자의 입장에 확실한 구별을 두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부파불교에 들어오면서 불타는 煩惱障․所知障을 끊은 상태에 비해 제자인 아라한

은 단지 번뇌장을 끊은 것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별은 上座部, 大衆部 모

두가 동일한 것이었다.

대중부 쪽에서 불타를 점점 초인적으로 觀하기 시작하여 중생구제의 悲願이 무

궁한 존재로 설하기 시작하 다. 한편, 아라한에 대해서는 大天의 五事 등을 주장

하여 결점이 많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시작하 다. 따라서 아라한이 되는 것에 만

족하지 않게 되었다.266)

그들은 인간의 이상을 아라한에 두지 않고 불타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실천의

목표로 삼았다. 그의 목표인 보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이름

하고 아라한을 최고 목표로 하는 사람을 성문으로 구별하 다.267) 그에 따라 서력

기원 후에 대두되기 시작한 보살사상을 받아들여 모방함으로써 불과를 얻었다.

266) 干潟龍祥, 「菩薩思想の起源と展開」, ( 佛敎の根本眞理 , 宮本正尊編, 三省堂, 昭和32),

p.228.

267) 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編集, 「大乘佛敎とわ何か」, ( 講座․大乘佛敎 1, 春秋社,

昭和 56), pp.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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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僧團에 미친 향

五事를 둘러싼 쟁론의 배경에 대해서 이자랑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

다. “五事는 일반적으로 상좌계 불교의 최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아라한의 지위에

대한 비난, 혹은 엄격파와 관용파의 대립이라고 설명하지만, 특히 남인도를 거점으

로 하는 대중부 末派의 발생에 관련이 있는 大天의 五事를 둘러싸고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아라한의 지위에 대한 비난이란 초기불교 교단 가운데 특별한

지위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기존의 아라한에 대한 일반 비구들의 비난이

다. 즉, 일부 아라한이 갖고 있던 절대적인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려고 하는 목적으

로 제창되었던 명제이다. 즉, 아라한의 존엄과 특권을 침해하는 5개 항목의 提題로

그것이 쟁론의 중심과제가 되었으며, 둘째 엄격파 관용파에 대한 내용은 十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엄격주의인 지율자로부터 관용주의 지법자에 대한 비난이었다

고 학자들은 논하고 있다.268) 아라한의 불완전한 점을 지적하는 것에 의하여 律에

대한 정법의 허용을 주장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배경에는 傳法의 正統性을 주장

하는 유부의 부파적 특성이 가미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견해인 大衆部 末派에 대한 내용에는 특히 주목할 만한 가설이 있다. 즉,

大天이 五事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아라한이라고 하는 목표 대신에 보살도의 실천

을 통해서 佛果를 얻으려고 하는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사람들을 부추기기 위

한 것이었다는 견해다. 그의 증거로 우선 大天이 보살로 언급된 문헌이 존재하는

것을 지적하고,269) 五事를 주장했다고 하는 南大衆部의 교리 가운데에 보살도 악

취에 태어나는 것을 면할 수 없다는 교리를 들고 있다. 그의 주장에서는 出世間的

이 아닌 인간화된 보살의 개념을 엿볼 수 있으며, 보살도를 실천하고 그 삶의 방

식을 모방함으로써 불타의 지위에 도달하자고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270)

268) 塚本啓祥, 앞의 논문, pp.112∼113; 金倉圓照, 앞의 책, p.265.

269) 分別功德論 ( 大正藏 25, p.32下).

昔大天聖王具四梵堂 展轉相紹 乃至八萬四千王 皆有梵堂 唯大天一人大士. (이자랑, 앞

의 논문,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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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들이 논한 바와 같이 五事의 주장은 아라한의 불완전에 관한 것이지만

그 주장의 배후에는 불타에 대한 깊은 신앙의 發露로서 대승의 시대를 열게 한 동

기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高井觀海는 다음과 같이 大天을 대승불교의 선구자로 평하고 있다. “大天의 주

장은 진실한 불제자는 모두 預流果, 不還果, 阿羅漢과 같은 소과의 목적을 버리고,

일체의 유혹을 초월하여 일체의 무지와 의혹을 여의는 일체지의 이상세계를 구하

여 그 해탈의 실제를 자기 자신에 의하여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大自覺은 여

래의 가르침에 의하는 것으로 우리도 또한 불타와 같이 진실로 눈을 뜨고 성불하

지 않으면 안 된다. 성불의 이상은 원대하지만 결코 공상은 아니며, 성도를 획득하

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는 자심에 있는 것을 주장하여 당시 불교도

의 이상인 아라한에 대해서 일격을 가해 바른 대승불교의 성불사상을 고조시킬 大

自覺의 필요성을 절규한 것이다”271)

당시 교계의 상황은 진제 삼장의 部執異論疏 에 의하면 大乘佛說 非佛說의 쟁

론이 있었다고 한다.272)

嘉祥大士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三論玄義 에 대승을 믿는 일파와 믿지 않는

일파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前田惠學는 大乘佛敎史論 에서 大天과 대승불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佛陀의 직제자인 목건련과 사리불 등에 대승적 사상이 있었으며, 成唯識論

권3에 大乘佛說의 七因을 들고 있는데, 그 제2인에 ‘本來俱行故’의 因을 들고 있다.

대소승경전이 본래 함께 유행했던 것은 인도의 大小乘 학도들이 함께 공유했던 것

을 보아 대승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현존하 으며, 大天은 사리불과 목건련의 대

270) 李慈郞, 앞의 논문, p.179.

271) 高井觀海, 小乘佛敎槪論 , (山喜房書林, 昭和 53), pp.14∼15.

272) 部執異論疏 ( 三論玄義 )

第二百年大衆部倂度行央崛多羅國 此國在王舍城北 此部引華嚴涅槃勝鬘維摩金 光明般

若等大乘經 於此部中有信此經者有不信此經. (三論玄義頭書所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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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적 사상을 계승하여 대승 일파의 자유진보주의에 입각해서 당시의 아라한과를

배격하고 자기의 주장을 게송으로 만들어 鷄園布薩會議에 제창했던 것 같다. 그러

나 쟁론 때 大天 일파에 대한 찬성자가 많고 상좌 일파에 속한 수가 적은 것으로

보면 大天一派의 이상주의는 당시 교계의 일반 경향으로 大天은 그 시대 사조의

선각자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상좌 일파의 전하는 바와 같이 惡見 妄語로 그 인격

이 비인격자라라고 하면 어째서 당시 일반의 귀의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유부계

통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망언자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주장인 五事新說은 대승적

이상주의의 의미를 선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五事가 大天에 의해 표면상으로 드러난 의의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첫째, 설일체유부의 입장이다. 大天의 五事說을 통해서 당시 승가 사이에서 거론

되고 있던 아라한의 문제점들에 대한 본인들의 입장 발표 내지는 위상 확립이다.

둘째, 그 외의 비구들(일부일지는 모르지만)의 입장으로 아라한의 깨달음에 대한

한계성의 인정, 즉 그들이 최고로 여겼던 아라한에 대한 재조명 내지는 출가자 전

체의 반성 촉구와 함께 불타가 보여주었던 보살도의 실천을 통하여 불타와 같은

모습으로 닮아가려고 하는 동경의 발로다.

3. 菩薩思想의 成立

위에서 大天의 五事에 대한 주장은 보살행을 모방함으로써 불타의 위치에 이르

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으며, 이것은 대승적 이상주의의 의미를 선양하는 것이라

하 다.

대중부 혹은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던 비구들의 동경의 대상은 아라한이 되는 것

보다는 불타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 “불타의 大悲는 중생을 成道 및 成道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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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안치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는 유부의 뜻과는 달리 근본적인 불타의 意趣 던

중생구제, 즉 중생구제의 구극 목표인 일체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

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超人化된 불타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그

래서 찾아낸 것이 보살이라는 사상이다. 불타의 本生譚에 등장하는 佛智를 가진

有情이 행했던 보살행을 행하면 누구라도 불타가 될 수 있다는 것에 해결의 실마

리를 얻은 것이다.

그 시대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역시 보살로 규정하고 내세웠다. 그때까지는 비

구의 모습이 理想型이었다. 모든 번뇌와 집착을 떨쳐버리고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

는 수행자가 비구 다. 일체 번뇌가 사라진 적정한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노

력하 고 그러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아라한이라 하여 존중하 다. 그러다 보니

불교는 자연히 출가 위주의 불교가 되어 재가신자는 교단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

다. 따라서 불교의 본래 뜻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니 부처님 근본사상으로 되돌아

가자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으며, 수행자 또한 새 모습의 보살이 대두되게 된 것

이다.273)

部派佛敎는 계율을 중심으로 하고 선정의 實修를 중시하는 인도적 색채가 강한

종교라면 대승불교는 자비를 강조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존재를 설한다.

대승불교의 특징은 佛果를 구하고 이타를 목적으로 하며 보살사상의 출현이고

불탑에 공양하는 것을 선양하여 諸佛 공양의 공덕을 강조하 다.274)

대승불교의 흥기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지금도 진행중이지만 현재로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결과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부파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 대승불교 성립의 동기를 찾고 있다. 대승불교가 부파 불교에 대한 반성 또

는 발전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둘째, 대승불교 성립이 불전문

학을 편찬해낸 찬불승 계통에 그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있다는 관점이다. 셋째, 불탑

273) 해주지음, 앞의 책, p.66.

274) 靜谷正雄, 「大乘敎團の成立について(下)」, ( 佛敎史學 第14­1, 佛敎史學會, 昭和 43),

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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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존재이다.275) 찬불승은 불탑에 거주하면서 불탑을 예배하는 신자에게 불타

가 행한 前世의 捨身의 선행, 그 결과로서 무량한 공덕을 입은 불타의 모습을 설

명해주던 자들이다. 본인들 스스로는 불타와 같이 되기 위한 수행을 하므로 보살

이라는 자각을 갖게 되었던 초기 대승불교의 중요한 인물이었다.276) 대승교단의

원류에 대해서 平川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대승불교는 아비달마 불교의 교리를 풍부하게 채용했으나 교단사적인 입장에

서 보면 부파 교단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② 論事 나 大毘婆沙論 과 같이 他派의 설을 파척하는데 주력한 논서조차 대

승 내지는 보살불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좌 장로들이 대승

교도들을 상대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諸部派가 전하고 있는 율장에도 보살의 비구에 대한 서술이 보이지 않는다.

④ 대승교도들의 발생의 원류는 불탑을 의지한 신앙자의 집단으로 보인다.

⑤ 부파 불교시대에 불탑숭배가 部派 敎內에 도입되었으며, 부파 교단에게 환

받지 못했다.

⑥ 대승불교도들은 불탑숭배를 흥성하게 하기 위해 佛德을 찬탄하고 讚佛僧의

입장에 섰다. 이러한 讚佛僧者들이 대승불교 발생에 一助했다.277) 그러나 그

들이 단순히 讚佛乘에 그치는 한 대승불교로는 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들이

대승불교에 대한 자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부파교단인 성문승과의 접촉 및

사상적 교류와 반발을 거치면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278)

275) 權奇悰, 「初期大乘佛敎의 反部派的 態度와 對應」, ( 佛敎學報 第34輯, 東國大學校 佛

敎文化硏究院, 1997), p.62.

276) 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編集, 「大乘佛敎とわ何か」, ( 講座․大乘佛敎 1, 春秋社,

昭和 56), p.17 내용 요약.

277) 靜谷正雄, 「大乘敎團の成立について」 上, ( 佛敎史學 第13­3, 佛敎史學會, 昭和 42),

pp.17∼18.

278) 히라가와 아키라 저, 심법제 옮김, 초기대승불교의 종교생활 , ( 깨달음총서 22, 민족

사, 1993),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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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대승불교라고 칭할 수 있는 교단은 서력 1세기부터 서인도에서 마투라에 이

르는 지역에 성립되었다. 그것은 불탑을 중심으로 하여 출가에서 재가에 이르기까

지 성립된 집단이다. 그들은 救濟者로서의 불타를 바라며, 불타의 마음을 본받아

利他를 원하며, 佛果를 구하는 菩薩敎義를 개발하여 聲聞僧․辟支佛僧과 나란히

菩薩僧을 조직하여 在家는 재가에 出家는 출가에 각각 어울리는 보살행이 준비되

었다.279) 즉, 불타에 대한 찬탄, 佛身 中心의 사상, 자비에 기본을 둔 보살의 이타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실천행을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280)

菩薩은 원어로 Boddhisattva(­satta)로 Bodhi는 알다, 자각하다라는 의미로 佛

典에서는 ‘道’, ‘覺’이라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3종으로 설명된다. ① 아라한(聲聞)의

보리, ② 벽지불(獨覺, 緣覺)의 보리, ③ 불타의 보리(無上正等菩提)가 그것이다.

북방의 전승, 특히 대승불전에는 제3의 보리가 보살이 구하는 것이며 제1, 제2는

그것과 구별된다.

남방의 전승은 4종류로 분류한다. ① 보리수, ② 四道果의 지혜 혹은 道, ③ 一

切知性智, ④ 열반의 깨달음 혹은 阿羅漢道智로 이곳에는 아라한의 보리와 보살의

보리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다.281)

보살은 불타의 후보자에게 부여되는 명칭으로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서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보리는 所詮, 一切智라고 하는 뜻으로 보통의 아라한

등이 그 지혜에 제한이 있는 것에 비해 全知者로서의 불타가 지혜를 구한다고 하

는 것 때문에 특히 불타의 후보자를 보살이라고 칭한 것 같다.282) 또한 ‘지혜 있는

유정’, ‘지혜를 본질로 하는 유정’, ‘지혜를 갖고 있는 유정’의 의미다.283)

원시불교시대를 돌아보면 불타도 아라한이었던 것은 大品 등에 예의 五比丘의

교화 후 불타를 합쳐서 세상에 六阿羅漢이 있다고 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279) 靜谷正雄, 佛敎史學 14­1, p.45.

280) 靜谷正雄, 佛敎史學 13­4, p.20.

281) 杉本卓洲, 「菩薩의 語義」, ( 佛敎文化學論集 , 前田惠學博士頌壽紀念會), p.227.

282) 木村泰賢全集刊行委員會編, 「小乘佛敎思想論」, ( 木村泰賢全集 5卷, 大法輪閣, 昭和

43), p.94.

283) 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編集, 앞의 책,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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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사실상 불타의 위대함은 가섭, 사리불 그리고 목련 등이 도저히 미칠 수 없

는 것으로 어떻게든지 그 사이의 구별을 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한

諸派의 의견을 보면 불타도 아라한도 해탈자인 점에 대해서는 동일하다는 것은 각

파가 일치한다.

다른 점은 해탈 후의 力用의 차이점이다. 번뇌를 끊은 상태도 유부에 의하면 무

지에 染汚無知와 不染汚無知의 구별이 있는데 염오무지는 情意的 방면의 무지로

윤회에 속하는 것이며, 불염오무지는 生死의 因이 아니며, 사물에 대한 진리를 알

지 못하는 것이다. 불타는 두 개의 무지를 끊었음에 비하여 二乘은 단지 염오무지

만을 끊은 상태다. 즉 무지를 기초로 한 것에 대한 불타와 이승의 구별이 있는 것

이다.

이와 같은 유부의 입장에 대해서 대중부가 특별히 어떤 의견을 내세운 것은 아

니지만, 앞의 五事問題를 주장함으로써 불타와 아라한의 구별을 밝혀놓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불타 석존에 있어서 아라한은 불타의 異名으로 불타와 하등의 차이가 없었

다. 석존 자신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해탈한 아라한은, 즉 무상의

불타라고 하 다. 그러나 제자의 입장에서 수행이 성취된 자를 아라한이라고 칭하

지만 불타라고는 칭하지 않았다. 또한 덕성으로도 차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으며, 석존은 無師獨悟인데 반해 아라한은 석존의 가르침에 의해서 해탈하 으

며, 중생교화도 마찬가지 다. 게다가 部派佛敎에 이르러서 불타는 煩惱障, 所知障

을 모두 끊은 상태로 인정하지만 아라한은 오직 번뇌장을 끊은 자로 인정되기에

이르 다. 이러한 구별은 상좌부와 대중부계에서도 마찬가지 다. 그러나 그 후에

상좌부계 쪽에서는 불타와 아라한의 차이를 이상의 정도로 하 으며, 성문비구의

得果도 아라한과를 최고로 하여 불타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석존의 뜻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대중부계에서는 불타를 점점 초인적으로 보기에 이르러 불타의 육신은 無

漏이며, 威德無邊하고 壽命無量하여 중생구제의 悲願의 무궁한 모습으로 설하기에

- 92 -

이르 다. 한편 아라한은 大天의 五事와 같은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은 모습으로 묘

사하 다. 그리고 아라한과만을 이루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불타의 진의인 일

체 중생 성불로 조금씩 다가가는 대승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두된

것이 보살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보살이라는 생각이 어느 派에서 처음으로 일어났

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불타의 本生譚이 활발하게 대두되었던 기원전 2세기까지는

보살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았다. 혹은 출현하 어도 일반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1세기 이후, 기원 1세기의 중엽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용어

가 빠르게 모든 부파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대중부에서는 이 보살사상을 적절하게

이용하 다.284) 보살이라는 용어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발생된 보살이라는

명칭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

나 보살이라고 하는 理想形의 등장은 새로운 불교적인 인간상이 탄생되었으며, 보

살의 길은 비록 험할지라도 최고 최선의 삶의 방법이라면 부파 불교를 떠나 보살

의 길을 택하고자 하 던 것이다.285)

石川海淨은 보살을 3종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① 보살을 依主釋으로 본다면

‘覺 혹은 깨달음을 구하는 有情’, ② 持業釋으로 한다면 ‘보리를 깨달을 有情’, ③

같은 依主釋으로 보더라도 ‘깨달음을 타인에게 주는, 혹은 타인을 깨닫게 하는 有

情’의 뜻이다.286)

또한 菩薩位를 성자로 할 것인가 범부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각 파에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상좌부계의 諸派에서는 특히 有部나 雪山部에서는 범부위로

보고 있다. 단지 그 派에 따라서는 보살이 그 수행에 의해서 점점 향상되어 가는

경계가 있다 하더라도 정각을 이루기까지는 아직 번뇌가 있다는 점에서 범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부에서는 보살도 본래 범부 다고 보는 점에서는 상좌부

284) 宮本正尊, 佛敎の根本眞理 , (三省堂, 昭和 32), pp.227∼230.

285) 靜谷正雄, 初期大乘佛敎の成立過程 , (百華苑, 平成 2), p.239.

286) 石川海淨, 「菩薩思想の原流」, ( 印佛學 1­1), p.146.

- 93 -

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그 범부위가 단지 初阿僧祇位 뿐으로 제2 아승지 이상은 이

미 聖位에 들어간 것으로 하 다. 즉, 自利的 수행은 그것으로 완성했다고 해석하

는 것이다.287)

大毘婆沙論 에 의하면 “유정으로서 어리석지 않은 자, 즉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菩提薩埵이다”288)라고 했으며, “薩埵는 보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게으름을 부

리지 않고 쉬지도 않고, 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

살타라고 한다”289)라고 하 다. 산치 바루후도의 佛敎靈跡에는 불탑을 중심으로

한 보살단의 존재가 추측되며, 그곳에 남겨진 기념물로부터 비유문학 불전문학의

형성에 대한 관련을 볼 수 있다.290)

靜谷正雄은 제 학자들의 논설을 예로 들고나서 본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우선 干瀉龍祥의 論에 의하면 거의 성불에 가까워진 것을 알고 있는 불교도가 이

미 성불한 석존을 우러러보고 그 전생을 찾아서 생각해 낸 이름이 보살이며, 보살

은 단지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근저에 ‘보리를 구할 것

이 확정되어 있는 유정’이라고 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살의 기원

적 의미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이면서 보리를 얻을 것이 확정되어 있는 유정’

이라고 논하고 있다.

平川彰은 불전문학을 검토하여 그 중심의 하나인 연등불수기의 사상이 보살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으나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으므로 발보리심의

사상은 연등불 수기에서는 아직 완숙되지 않았다고 논하고 있으며, 연등불수기의

내용을 기원전 2세기 정도로 보고 있다. 靜谷正雄은 연등불수기의 내용이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등장한 것으로 논하고 있다.291)

287) 木村泰賢全集刊行委員會編, 「小乘佛敎思想論」, ( 木村泰賢全集 5卷, 大法輪閣, 昭和

43), pp.95∼97.

288) 大毘毘婆沙論 ( 大正藏 27, p.886下).

有一有情是不愚類是聰慧類 謂菩 提薩陀.

289) 大毘毘婆沙論 ( 大正藏 27, p.887上∼中).

290) 塚本啓祥, インスクリプションと 部派」, p.79.

291) 靜谷正雄, 初期大乘佛敎の成立過程 , (百華苑, 平成 2年), pp.29∼32.

- 94 -

平川彰은 초기대승불교의 특징으로 범부가 보살이 될 수 있으며 수행의 목적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이 되는 것이며, 비록 범부라도 보리심을 냄으로

인하여 보살의 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292)

芳村修基는 西義雄의 주장을 예로 들면서 보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293)

제1은 諸佛本生經系의 보살, 제2는 聲聞種姓이나 緣覺種姓과 구별된 종성으로서

의 보살, 제3은 그러한 구별을 없애고 성불을 信奉하는 보살, 제4는 성불을 목적으

로 하지 않고 大悲一闡提로서의 보살이다.

상좌부계에의 諸派, 즉 유부나 雪山部에서 보살을 인정한 것은 부파불교 이후이

며, 보살도 악취, 즉 지옥, 아귀, 특히 축생에 태어나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스스

로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번뇌에 기초한 業力에 의해서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라 보았다. 단지 그것이 보통의 악취와 다른 것은 보살은 어떠한 경계에 있어

도 수양을 계속하 으며, 그 악취도 무간지옥과 같은 極惡의 장소는 아니었던 점

이다. 따라서 그 사이의 보살은 慾想, 恚想, 害想이 있어 욕망을 일으키거나 恚害

心을 일으키지만 보살이 보살인 까닭은 그것들을 조복시키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

이다. 그뿐만 아니라 初阿僧祇의 끝에 이르러서는 갖가지의 고행을 성취하지만 아

직 장래에 佛이 된다는 자각이 없이 제2 阿僧祇의 끝에서야 作佛의 자각이 일어나

며, 아직 결정무외에 이르지 못하고 제3 阿僧祇를 채웠을 때, 32상의 업을 쌓고 보

리에 있어서도 반드시 無畏 없음에 이르러 처음으로 보살의 자각을 일으킨다.

대중부에서는 보살도 실은 범부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는 상좌부계의 시각과 같

지만 그 범부위가 단지 초아승지위 뿐으로 제2 아승지 이상에서는 이미 聖位에 들

어선 것으로 본다. 즉, 自利的 수행은 이미 그것으로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Kath vatthu에 의하면 안달라파는 과거 가섭불 밑에서 이미 정성이생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때 이미 범부위를 벗어났다고 설하고 있다. 제2 아승지부터는 下化衆生

의 수양을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가지가지 악취에 몸을 나투는 것도

292) 平川彰, 初期大乘佛敎の硏究 (春秋社, 昭和 43), pp.3∼5.

293) 芳村修基, 「菩薩思想の考察方法」, ( 印佛學 , 19­1), p.36.

- 95 -

업력의 결과가 아니고 제도 때문에 원해서 그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윤회 중 보살의 자격에 대해서 다른 의견이 있지만 그 사이의 보살은

가지가지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派든지 간에 승인되는 것이었다.294) 단지

보살의 개념이 대승 시대와 달리 수행시대의 보살로 불려졌으며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보리를 구하는 자로서 수행은 완성했으나 보살 위에 머물러 성불하지 않는

성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대승불교 시대의 大菩薩과 구별되었다.295) 반야

經 도입과 함께 시작된 대승시대에서는 眞佛敎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자는 모두가

보살이며 성불이 가능하다는 설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296)

294) 木村太賢全集 第一卷, pp.94∼96.

295) 初期大乘佛敎の硏究 1, ( 平川彰著作集 第3卷, 春秋社, 1992), p.300.

296) 西義雄, 「菩薩道の理念とその實踐」­特に菩薩思想の興起とその意義­( 印佛學 10­1),

p.103.

- 96 -

Ⅵ. 結 語

이상으로 大天의 五事를 주제로 하여 佛滅 후 교단의 분파와 諸論에 나타난 大

天에 대한 평가, 大天 이전에 등장한 五事說과 大天이 주장한 五事, 大天의 五事說

의 주요 쟁점인 아라한에 대한 고찰 그리고 大天의 五事가 불교 교단에 어떤 향

을 미쳤으며, 아라한 문제를 재조명하면서 드러내고자 하 던 보살사상의 성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大天의 五事說은 上座部․大衆部의 분파에 관한 傳承 가운데 설일체유부의 한역

문헌에 분파의 원인이 되었던 說로 거론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佛滅 후 100

년경 大天이 아라한에 관한 5개의 명제를 주장하 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불교 교

단 가운데서 분쟁이 생겨 大天을 지지하는 그룹(대중부)과 부정하는 그룹(상좌부)

으로 分派되었다고 논한다. 또한 佛滅 후 200년경에 大天에 의한 五事의 주장이

원인이 되어 대중부 가운데서 制多山部․西山住部․北山住部의 末派가 생겼다고

한다. 그 전승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연구가 되어 왔으며, 그 내용의 역사성 내지는

교단 분파와의 관계가 검토되었다. 그 결과 많은 문제가 밝혀졌지만 여전히 五事

주장의 의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상좌부 계통의 최고 깨달음의 위치에 있는 아라한의 지위에 대한

비난, 혹은 엄격주의자와 관용주의자의 대립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남인도

를 거점으로 하는 대중부의 末派의 발생에 관련된 大天의 五事를 둘러싸고는 의견

이 분분하다. 즉, 大天이 五事를 주장한 배경에는 아라한이 되는 것 대신에 보살도

의 실천을 통하여 불과를 얻으려고 하는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대중을 이끌었

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五事를 주장했다고 하는 남대중부의 교리 가운데 보살도

악취에 태어나는 것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 교리를 보이면서 그 주장은 초세간적

이 아닌 인간화된 보살의 개념을 찾으려고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출세간적인

- 97 -

불타에 대한 숭배보다 보살도를 실천하고 그 삶의 방식을 모방하여 불타의 지위에

도달하려고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大天에 대한 자료와 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

음과 같다.

첫째, 大毘婆沙論 에 등장하는 大天五事의 내용은 다수의 학자들의 견해에 의

하면, 근본분파와 무관하며 본인도 동감한다.

둘째, 五事를 분파의 원인과 결부시켜 보면, 十事非法은 지율자가 지법자에 대한

비난으로 사회․경제의 변화와 함께 대두되었던 승가생활에 대한 견해 차이에 의

한 분쟁이라면, 五事는 수행자로서의 자격과 한계에 대한 비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셋째, 大天五事는 아라한에 대한 비판으로, 이전부터 거론되어 왔던 아라한의 능

력의 한계는 大天의 五事에 의해서 더욱 강조되었다.

넷째, 이러한 아라한의 비하 배경에는 아라한을 출가자의 최고 목표로 하기보다

는 불타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 대중부 등의 의도가 있었으며, 그

결과로 대승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보살사상이 출현하

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만들어진 것은 변화에 속하는 것이요, 연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에

따르면 수행사문으로 구성된 승가생활은 그 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과 인간의 삶

의 변화에 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승가가 승가 내․외의 향을 받는 한에서는

승가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다. 승가의 내부변화는 바로 불교사상의 변화이고 승가

의 외부변화는 바로 재가생활의 변화에 따른 승가생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래서 승가의 변화는 사상의 변화와 승가인의 생활변화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발생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에 교단의 변화를 진단한다는 것은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시

에 생활변화의 관련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大天의 五事는 이

전에 전해온 사상을 총섭하여 교단에 하나의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한 것이며, 그

- 98 -

것은 당시의 사상적 변화를 야기하는 거대한 사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건은 교단의 입장에 따라 다른 사상적 해석을 가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것에서

파생된 결과는 결국 分派와 菩薩思想의 출현을 불러일으키고 대승의 성립에 근거

를 제시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가와 교단은 원히 동일한 사상과 생활모습을 지니고 지속될 수 없는 단체이

다. 왜냐하면 세속의 모든 일은 원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그 변화 속

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한에서 승가와 교단의 사상과

생활변화를 부정적 시각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大天의 五事는 보편적으로 아라한의 깨달음을 신뢰했던 당시의

사고에 대한 새로운 사상적 획을 긋는 것으로 아라한의 깨달음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의문을 승가에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문제는 차후에 승가의 논의에

서 획일된 견해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제자들의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초

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 99 -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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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傳大藏經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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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事 ( 南傳藏 57).

十八部論 ( 大正藏 49).

部執異論 ( 大正藏 49).

異部宗輪論 ( 大正藏 49).

阿育王傳 ( 大正藏 50).

阿育王經 ( 大正藏 50).

異部宗輪論述記 (新纂 大日本續藏經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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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論玄義檢幽集 ( 大正藏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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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Daecheon Osa

(the Five Assertions of Daecheon, a Buddhist Priest)

Myong­Suk Min

Department of Buddhist Studie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This study addresses the Five Assertions of Daecheon, a Buddhist Priest,

which belongs to the history of Buddhism. In view of possible causes why

Buddhism was splitted initially just after Buddha's death and corresponding

different opinions, the study aims to consider and investigate Daecheon's Five

Assertions(Kor. Daecheon Osa) that have been regarded as one of such causes.

This study looks into the above subject in each chapter as follows:

Chapter Ⅰ introduces the objectives and methods for this study,

Chapter Ⅱ refers to the backgrounds and different views about the 1st and

2nd Samgiti and their schismatic era as well.

Chapter Ⅲ introduces the lifetime and era when a Buddhist priest Daecheon

acted, and attempts to evaluate his own character, the oral traditions of his

Five Assertions, while comparing such oral traditions with his original, and

Chapter Ⅳ addresses the meaning and category of Arahan and attempt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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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e Buddha's capability with Arahan's, and introduces various viewpoints

of Arahan from each Buddhist body as well.

Finally, Chapter Ⅴ attempts to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Daecheon's 5

Assertions and initial Buddhist schism after the death of Buddha, the different

opinions from Theravada and Mahasamgika, the influence of Daecheon's 5

Assertions on follow­up Buddhist priest groups and the advent of

Bodhisattvaism.

Daecheon Osa(五事) refers to his five assertions. In general, the assertion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① Vulnerable to allurement(餘所誘): If allured by others, even Arahan may

be defiled in his mind.

② Innocent(無知): Arahan may be sometimes innocent.

③ Unconvinced(猶豫): Arahan may be sometimes doubtful.

④ Learned by others(他令入): Even Arahan may learn something from

others.

⑤ True way is clarified from voices(道因聲故起): Truth is perceived from

hearing.

The 5 assertions are described in Palgeondoron( 八犍度論 ), Paljiron( 發智論 )

and Kath vatthu( 論事 ). Besides, the contents of Daecheon Osa as asserted by

Vaibhaśika (說一切有部) are described in two books: Daebibasaron( 大毘婆沙論 )

and Yibujonglyunron( 異部宗輪論 ). However, there are different ideological

positions about the 5 assertions.

This study tries to understand the contents of Daecheon's 5 assertions from

somewhat critical viewpoints or review for Arahan.

In the review for Arahan, the influences of Daecheon's 5 assertions on follo

w­up Buddhist priest groups include the advent of Bodhisattvaism as on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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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cteristics in Mah y na Buddhism, instead of Arahan.

Summing up, the study can be concluded as follows:

First, according to various opinions from many scholars in Buddhism, the

contents of Daecheon Osa as shown in Daebibasaron 大毘婆沙論 have

nothing to do with initial Buddhist schism, about which I also have same

opinion.

Secondly, on the assumption that Daecheon Osa concerns the cause of such

Buddhist schism, ten immoral practices(十事非法) refers to Vinayadhara(持律

者)'s criticism for Dhammadhara(持法者), while 5 assertions(五事) refers to

Dhammadhara's criticism for Vinayadhara.

Thirdly, it is estimated that Daecheon Osa also intended to criticize Arahan

and emphasized the limitation of Arahan's capability, as discussed before.

Fourthly, behind such abasement of Arahan, there were also reformative

movements including Mah saṅgika(大衆部; a relatively liberal Buddhist sect

which is considered to be a forerunner of the Mah y na movement), which

aimed at following the track of Buddha rather than at Arahan in terms of

highest goal everyone would have when entering the Buddhist priesthood.

As a result, such movements helped advance the advent of Bodhisattvaism,

which is considered as one of the most characteristic thoughts in Mahayana

Buddhism.

All given Beings and Buddhist canons must change and be subject to karma,

i.e. cause and effect. According to Pratitya Samutpa da(緣起法), it is found that

the Buddhist priesthood(san. sagha) comprising a herd of monks in Buddhist

practices has been influenced by political, social, ideological changes and the

variation of human life throughout whole history. Therefore, it was possibly

inevitable that the Buddhist priesthood changed its own form and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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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the influence of internal and external variation. Here, the internal

variation of Buddhist priesthood indicates a change of Buddhist thoughts, while

the external variation indicates a change of Buddhist life along with changing

Buddhist life at home. Thus, it can be assumed that the change of Buddhist

priesthood results from the courses of adaptation to changing thoughts and life

style in Buddhist priesth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