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맹리 106번지 단독주택부지내 유적 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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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맹리 106번지 단독주택부지내 유적 시굴조사 약보고서 2009. 4. (사)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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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맹리 106번지 단독주택부지내 유적시굴조사 약보고서

2009. 4.

(사)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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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조 사 개 요1. 조 사 명 : 용인 맹리106번지 단독주택부지내 유적 시굴조사

2. 조사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106번지 일원

3. 전체 조사 면적 : 586㎡

4. 조사기관 : 재단법인 겨레문화유산연구원

5. 조사기간 : 2009년 3월 30일 ~ 2009년 4월 28일(실조사일수 6일)

6. 조사단구성

조 사 단 장 : 신 창 수(겨레문화유산연구원 원장)지 도 위 원 : 하 문 식(세종대학교 교수)

: 백 종 오 (충주대학교 교수)책임조사원 : 김 기 태(겨레문화유산연구원 연구실장)조 사 원 : 김 영 준(겨레문화유산연구원 연구원)

박 한 재(겨레문화유산연구원 연구원)보 조 원 : 이 요 한(총신대 역사교육학과 졸업)

이 재 식(총신대 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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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조 사 현 황1. 조사목적

- 용인 맹리 106번지 일대에 단독주택건축공사시행(조사 의뢰인:김승진)에 앞서 공사로 인해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매장문화재에 대비해 사전에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설 사업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여 건설사업과 문화유적 보존이 조화롭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함.

2. 조사경위

-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의하면, 조사지역은 용인 맹리 유물산포지 3의 북동부분에 해당된다. 조사지역의 서편에는 행군이토성이 있고, 남편에는 용인 맹리 유물산포지 4가 있다.1) 2002년 용인 맹리 유물산포지 3을 확인할 때, 주거지 바닥면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함께, 백제토기편이 많이 채집되었으므로, 유적의 범위와 유물의 출토 밀도가 높아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본 시굴대상지역의 동쪽으로 연접한 지역은 2007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시

굴조사 결과 백제시기로 추정되는 수혈 2기, 주공 3기 그리고 타날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이에 본 단독주택부지 조성과 관련하여 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9년 2월 (재)겨레문화유산연구원에 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1)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3,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토지박물관 학술조사총서 제17책, 567~570, 578~5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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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 조사지역 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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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2】조사지역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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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유적의 위치와 환경1. 자연지리적 환경

경기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는 용인시는 동쪽은 이천시, 서쪽은 수원시 ․ 화성시, 남쪽은 안성시 ․ 평택시, 북쪽은 성남시 ․ 광주시와 접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긴 능형의 형태이다. 조사지역인 양지면은 용인시의 3읍(기흥읍 ․ 구성읍 ․ 수지읍), 7면(포곡면 ․ 모현면 ․ 남사면 ․ 이동면 ․ 원삼면 ․ 백암면 ․ 양지면), 4동(중앙동 ․ 역삼동 ․ 유림동 ․ 동부동) 중 하나이다. 양지면은 용인시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광주군 도척면과 용인시 포곡면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이천시 마장면, 남쪽으로는 용인시 동부동과 원삼면, 서쪽으로는 용인시 유림동, 동부동 과 접하고 있다. 경도는 동경 127° 01′ 17″이며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00′ 12″에 위치하고 있다2).

용인을 지형구(地形區)로 구분하면 형제봉 산계, 탄천 ․ 신갈천, 성산 산계, 경안천 ․ 진위천, 봉래산 ․ 독조산 산계, 양지 ․ 백암분지 등 여섯 개의 지형구로 나눌 수 있다. 용인은 산지와 곡저평야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양지면은 남북이 높고 동서가 낮은 지형을 이루어 산들이 북쪽과 남쪽에 연봉 형태로 동서로 분포하고 있다. 해발 500m 내외의 산들이 분포하고 있어 고개가 많으며 예전에는 교통 소통에 장애가 되었다.

양지면의 주요 구성암석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흑운모편마암 ․ 석영운모편암, 쥬라기의 흑운모화강암, 제4기의 충적층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양지면의 경작지대는 대부분 대대천, 주북천, 복하천, 노곡천, 남곡천 등 하천연변의 충적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분지의 경우 그리 크지 않은 작은 규모지만 북동쪽으로 열려있는 개방형 분지로서 경사가 완만한 풍화물 침식 지형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체로 구릉성 지형에 해당하며 북부서안 기후형과 남부서안 기후형과의 점이지역으로 위도에 따른 기후변화와 식물분포상의 변화가 뚜렷하다. 연평균 기온은 대략 10℃ 내외이고 대략 태백산맥을 축으로 한 설형의 등운선이 형성된다. 용인의 탁월풍(卓越風)은 서북풍이며 도내의 다른 곳과 동일하다. 따라서 12월 초부터 이듬해 3월까지 한랭건조한 서북풍이 불기 때문에 가옥들은 이 바람을 고려하여 축조되었다. 양지면도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탁월하며, 강수량이 연평균 1,100~1,200㎜로 북부서안 기후지역과 비슷하다. 양지면의 산지는 500m 내외로 식물의 수직적 분포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삼림을 살펴보면 온대림지역에 속한다. 온대림지역은 소나무가 주식생으로 각종 활엽수

2) 畿甸文化財硏究院, 2005, 龍仁 麻北里 百濟 土壙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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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혼효림(混淆林)을 이루는 지역이 넓게 나타난다. 원래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낙엽활엽수림이 우세하고 하층식생으로 진달래, 싸리나무 등이 우세한 식생경관이나 현재는 자연림이 파괴되어 소나무가 주요 수종으로 분포하고 있다3).

2. 역사적 배경

용인지역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35에는 “거서현(巨黍縣)은 본래 고구려의 구성현(駒城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용구현(龍駒縣)이다.”하여 이 지역이 처음부터 고구려의 영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 나온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이 지역이 본래 백제의 지역으로 멸오(滅烏)라 불렸는데, 고구려가 이를 취하여 구성현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중 어떤 것이 보다 명확한 것인지는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우나, 고구려가 이 지역을 취하기 전에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백제시기에 이 지역이 멸오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4).

용인이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13년(1413) 용구현과 처인현(處仁縣)을 합하여 용인현(龍仁縣)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 이전 삼국시대에는 멸오 ․ 구성 ․ 거서로,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용구로 불리었다.

용인이 속한 한강 유역권은 백제의 성립 당시부터 고구려의 남진, 신라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3국간 세력의 핵심 충돌지였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뒤 차츰 한강유역을 넘어 한강이북과 금강유역, 전남지역을 잇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며 한반도의 주도권을 쥐게 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의 남진정책에 밀려 한강유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의 기록이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 등에 반영되어 한강 이남의 경기 남부지역을 비롯한 용인지역을 ‘본래 고구려의 영토…(本高句麗…)’라고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점령한 후 한강 이남의 용인지역에 구성현을 설치하였다고 하지만 고구려가 용인지역을 장기간에 걸쳐 적극적으로 점령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에 신주(新州)를

3) 龍仁文化院 · 鄕土文化硏究所, 2001, 陽地面誌.4) 韓國文化財保護財團, 2006, 용인 동백 동원로얄듀크 신축예정부지 문화유적 시 · 발굴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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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여 대중국기지로 삼아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 용인지역은 현재 경기도 이천지역으로 비정되어 신주(新州)의 속현으로 한강 이남의 주요 거점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용인지역이 한천교통로를 따라 쉽게 한강유역과 서해안 및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남양만일대로 향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에 의한 통일이후 용인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포함된 다른 소속 군현과 마찬가지로 삼국기에 비해 그 지정학적 효율성이 크게 감소되었을 것이다5).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685년 지방행정조식을 재정비하여 9주 5소경을 설치했을 때 용인은 한강 하류지역을 포괄하는 한산주(漢山州)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718년 주 ․ 군 ․ 현의 지명을 한식으로 고쳤을 때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개칭되었으며 용인은 거서현으로 불리었다.

고려의 지방 행정제도가 5도 양계로 개편되면서 용구현은 현재 경기도 남부지역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던 양광도에 속하게 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시대는 22개의 역도와 525개의 역이 있었는데 현재 용인지역을 통과한 역도로는 하남시의 덕풍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인 광주도로서 한양~광주~이천~음죽~충주로 이어지는 역로와 한양~양재~괴산~연풍 등으로 이어지는 역로가 이에 속하였다.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김윤후(金允侯)가 사살하여 몽고군을 퇴각시킨 일이나 고려 말에 왜구가 용인에까지 침입하자 이부(李富)의 지휘 아래 격퇴시킨 일은 용인의 군사 ․ 교통상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이다.

용인지역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경기 좌도에 속하였다가 경기 좌 ․ 우도가 통합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는데 충청도에 속해 있었던 양지현(陽知縣)이 경기도에 편입된 것은 1413년의 일이었다. 1390년에는 부곡이었던 양량촌(陽良村)을 현(縣)으로 격상시켜 감주(監務)를 두었고, 1413년 광주진(廣州鎭) 추계향(秋溪鄕)으로 치소(治所)를 옮겨 현감(縣監)을 두고 죽주(竹州)의 고안(高安) ․ 대곡(大谷) ․ 목악(木岳) ․ 제촌(蹄村) 등의 부곡을 떼 주었다. 이후 단행된 군현 통폐합에 의해 용구현은 처인현과 합하여 용(龍)자와 인(仁)자를 따서 용인현이라 하고 수원진(水原鎭)에 소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용인은 현감(縣監)과 훈도(訓導)가 각 1명씩 파견되었다고 한다. 양지현(陽知縣)은 1500년에 혁파되어 이천부(利川府)에 합속시켰다가 1504년 복설되면서 원래의 읍치에서 서쪽 10리 정수산(定水山) 아래에 읍치를 정하였다6).

용인현은 1895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인군(龍仁郡), 양지군(陽知郡)으로 명칭이 5) 京畿道博物館, 2000, 龍仁 壬辰山城.6) 龍仁文化院․鄕土文化硏究所, 2001, 陽地面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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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며 전국 23部制의 시행으로 충주부(忠州府)에 소속되었다가 13部制의 시행으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용인에서도 1896년 제1차, 1907년 제2차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7).

용인군은 1914년 3월 지방 행정 단위를 통폐합하여 전국을 97개 군으로 개편할 때 이전의 용인현(龍仁縣)과 양지현(陽知縣), 그리고 죽산현(竹山縣)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된 것이다. 당시 용인군에는 모두 12개의 면이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 개편을 거쳤는데, 1985년에 이르러 기흥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용인읍을 포함해 2개 읍, 9개 면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 3월 1일부터 시로 승격되었고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외사면이 백암면, 내사면이 양지면으로 개칭되었다. 2000년 9월 구성면이 구성읍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12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되고 6개동이 신설되었다가 2005년 수지구와 기흥구․처인구를 비롯하여 3개구 1읍 6면 22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8).

3. 고고학적 배경

용인지역의 고고학적 조사는 일제시대 도요지(陶窯址) 중심으로 시작되어 본격적인 조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추진되었다.9) 이후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광역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10). 최근에는 대규모 택지개발사업과 이에 따른 도로건설 등으로 인하여 많은 수의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수지 · 죽전리 · 동백리 · 구갈리 · 신갈리 · 마북리 · 언남리 등지의 조사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의 분포상황을 통해 고고학적 환경을 시대별 · 유적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용인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평창리유적11)을 비롯해 구성읍 동백리, 모현면 갈담리일대, 남사면 봉무리 · 북리 · 봉명리 · 방아리 · 아곡리, 이동면 천리 · 덕성리 · 묵리, 원삼면 목신리 · 보정리 등 비록 많은 곳에서 유물이 채집되었으나12) 평창리유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이들은 대개 대7) 龍仁郡誌編纂委員會, 1990, 龍仁郡誌.8) 한신大學校博物館, 1998, 龍仁 水枝 百濟 住居址.9) 국립중앙박물관, 1988, 「용인군 지표조사」, 신암리Ⅰ.10) 서울大學校博物館, 1996, 龍仁市의 文化遺蹟.11) 서울大學校 考古美術史學科 · 京畿道博物館, 2000, 龍仁 坪倉里 舊石器遺蹟 發掘調査報告書.12) 龍仁郡誌編纂委員會, 1990, 龍仁郡誌 ; 한신大學校博物館, 1999, 龍仁市 竹田地區 文化遺蹟 및 民俗 調査

報告書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3,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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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하천변에 인접한 것이 아니라 지류변(支流邊)에 인접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용인의 지층 가운데에서도 고토양층이 확인되는 곳이 많아 한강 및 안성천 유역의 지류들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된다면 인근의 광주 삼리유적13)과 같은 내륙지역에 위치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기흥 농서리 유적14)이 정식 발굴 조사되어 안산 신길동 유적과 시흥 능곡동 유적등과 함께 내륙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이밖에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타제석기와 마제석기가 보정리 연원부락에서 채집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편이 기흥읍 상갈리15)와 구갈리, 죽전 등지16)에서 수습되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에 신석기시대 유적이 더 많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전 지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며, 종류나 수량에서 다른 시기의 유적에 비해 월등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용인지역만의 특성이 아닌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지석묘, 석관묘, 주거지 등 다양한 유구가 나타난다. 용인과 인근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구갈리17) · 죽전리18) · 마북리19) · 임진산20) · 봉명리21) · 청덕리22) 등지에서 주거지가 조사되었고, 왕산리 · 주북리 · 상하리 · · 근삼리 · 매산리 · 사암리 · 서천리 · 신완리 등지에서는 지석묘가 확인되었는데, 특히 조사지역지근거리에 맹리 지석묘가 존재하여 주목된다. 이 밖에도 모현면 초부리에서 세형동검의 용범이 확인되었고23), 기타 석부 · 석촉 · 석검 등이 여러 곳에서 수습되었다24). 이외에 유물산포지로 확인된 유적으로 포곡면 영문리 · 전대리 · 유문리, 모현면 일산리, 기흥읍 보라리, 이동면 묘봉리, 백암면 백봉리 · 옥산리 · 장평리, 남사면 봉명리, 죽전동 등지에서 무문토기가 수습되었다25).

용인 지역에서는 아직 초기철기 · 원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유적과 유물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예가 없으며 인근의 수원 서둔동 유적26), 화성 고금산 유적27) 등에서 관련시기의

13)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광주 삼리 구석기유적.14) 기호문화재연구원, 2007,『경부고속도로(기흥∼판교간) 확장사업부지내 용인 농서리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15) 明知大學校博物館ㆍ한신大學校博物館, 2003, 기흥 상갈지구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16) 畿甸文化財硏究院, 2001, 龍仁 竹田宅地開發豫定地區內 대덕골 遺蹟 發掘調査略報告書.17) 명지대학교박물관, 1997, 기흥 구갈3지구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18)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龍仁 竹田 宅地開發豫定地區內 대덕골 遺蹟.19) 畿甸文化財硏究院, 2005, 앞의 책.20) 京畿道博物館, 2000, 壬辰山城.21) 畿甸文化財硏究院, 2000, 용인시 봉명리 공장건설부지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22) 畿甸文化財硏究院, 2006, 龍仁 淸德里 百濟 竪穴遺構.23) 金載元, 1965, 「龍仁出土細型銅劍鎔范」, 李崇寧博士頌壽紀念叢, 李崇寧博士頌壽紀念叢刊行委員會.24) 畿甸文化財硏究院, 2002, 龍仁 興德地區 宅地開發事業 文化財 地表調査 報告書.25)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ㆍ용인시, 2003,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26) 林炳泰, 1982, 「수원 서둔동 주거지 발굴」, 博物館新聞 제126호.27) 서울대학교박물관, 2002, 華城 古琴山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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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이 조사되었다.삼국시대에 들어와 용인지역은 이전의 마한의 세력에서 벗어나 백제의 성장과 함께 백

제의 영역으로 흡수가 추정되며 이와 관련된 유적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지읍 풍덕천리28), 기흥읍 구갈리29), 구성읍 보정리30)의 주거지를 비롯하여 내대지31), 보정리 고분군 동측부32), 소실마을33), 구갈리34), 영덕리35)에서 수혈유구 등이 조사되었으며 이외에 죽전리·청덕리36)·언남리37) 등지에서도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죽전리에서 백제시대 토광묘38)ㆍ마북리에서 백제시대 주구목곽묘 및 토광묘39)가 조사되었으며, 소실봉의 남사면에서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이후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보정리 고분군40)은 주변의 성복리 요지(窯址)41)나 언남리 유적42), 여주 매룡리43), 파주 성동리 유적44) 등지의 유적과 함께 신라 한강진출로의 출자관계나 신라에서 통일신라로의 계기적 관계를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유적은 생산유적인 가마와 소비유적인 건물지 · 분묘 등이 조사되었다. 먼저 가마는 이동면 중리의 고려 백자가마45)와 서리의 고려 백자가마46) · 죽전의 청자가마47) 및 도기가마48) 등 고고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가마에서 생산된 기물이 소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성읍의 마북리 사지49) 및 중세 건물지50) 등의 건물지와 함께 마북리 정광지구51) · 단국대 신축부지52) · 좌28) 한신大學校博物館, 1998, 龍仁 水枝 百濟 住居址.29)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器興 舊葛(3)宅地開發地區內 龍仁 舊葛里 遺蹟.30) 畿甸文化財硏究院, 2005, 용인 삼막곡~연수원간 도로개설구간내 유적 발굴조사(약보고서).31)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2,「龍仁 竹田地區 4구역 문화유적 정밀시굴조사」(지도위원회의 자료).32)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신갈~수지간 도로 확 · 포장공사 예정구간 문화유적 발굴조사」(5, 6차 회의자료).33) 畿甸文化財硏究院, 2005, 龍仁 寶亭里 소실 遺蹟 試·發掘調査 報告書.34) 京畿道博物館, 2000, 앞의 책.

35)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신갈~수지간 도로 확 · 포장공사 예정구간 문화유적 발굴조사」(1차 회의자료).36)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 용인 동백~죽전간 도로구간내 문화유적 시 · 발굴조사 보고서.37) 세종대학교박물관, 2001, 龍仁 彦南里遺蹟.38)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龍仁 竹田 宅地開發豫定地區內 대덕골 遺蹟.39) 畿甸文化財硏究院, 2005, 龍仁 麻北里 百濟 土壙墓.40) 한신대학교박물관, 2002, 용인 보정리 고분군 지표조사 보고서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3, 「용인 보

정리 고분군 발굴조사 회의자료」.41) 한신大學校博物館, 2004, 龍仁 星福洞 統一新羅 窯址.42) 세종대학교박물관, 2001, 龍仁 彦南里遺蹟.43) 畿甸文化財硏究院, 2000, 驪州 上里·梅龍里 古墳群 精密地表調査報告書.44) 경희대부설 고고미술사연구소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 전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1992, 통일동산 및 자

유로 개발지구 발굴조사 보고서. 45) 湖巖美術館, 1987,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 ; 湖巖美術館, 2003,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Ⅱ.46) 이동면 서리에는 상반 고려백자 요지 외에 하반 · 상덕 · 중덕 등 일대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청자 및

백자가마 12개소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畿甸文化財硏究院, 2001, 용인 이동 서리 상반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약보고서.).

47) 畿甸文化財硏究院, 2006, 龍仁 寶亭里 靑磁窯址 -죽전 택지개발사업지구내 12 · 14지점 발굴조사 보고서-.48)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龍仁 竹田宅地開發地區內 대덕골 유적.49) 한신大學校博物館, 2003, 龍仁 麻北里 寺址.50) 한신대학교박물관, 2004,「용인 마북리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약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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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리53) 등에서 분묘가 조사되었다. 조선시대의 유적은 각종 도요지54)와 산성·봉수 등의 관방유적55) · 건물지56) · 분묘 등의

유적이 상당수 확인되었다. 이상과 같이 용인지역은 과거 역로(驛路)와 읍치(邑治)의 존재로 인해 남부지방에서

중앙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요 거점이자 한강 주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현재도 중요한 교통로로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도 이에 따른 대규모 택지개발 및 도로건설 등으로 인해 많은 수의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새로운 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역사 · 고고학적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51) 京畿道博物館, 2001, 龍仁 麻北里 高麗 古墳.52)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연구소, 1997, 龍仁 麻北里 遺蹟.53) 明知大學校博物館, 1994, 龍仁 佐恒里 高麗古墳群 發掘調査報告書.54) 한신大學校博物館, 2001, 「龍仁 上峴里 기와가마」, 京畿 南部의 朝鮮時代 遺蹟.55) 관방유적은 구성읍 소재의 壬辰山城(경기도박물관, 2000, 앞의 책)과 포곡면 석성산성(石城山城), 구성읍 동

백리 할미성(충북대학교박물관, 1999, 「老姑城ㆍ姑母城」, 용인의 옛 성터), 원삼면 태봉산성(台峰山城), 태봉산 토성지 등이 조사되었다.

56)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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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조 사 내 용1. 조사방법 조사지역은 단독주택이 들어서는 곳과 주택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구분 할 수 있다. 시굴 조사는 지형조건을 고려하여 단독주택이 들어설 대지에는 10m 간격으로 그리드를 구획한 후 다시 각 그리드내에 2×10m를 3개소 설치하여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주택부지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개설될 부분에는 동-서 방향으로 2×20m Tr.1개소를 설치⋅조사하였다. 조사는 유적의 층위 파악에 집중하여 2007년 기 조사된 유구와의 연관성과 맹리 유물산포지의 성격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어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구지표면에서 다량의 타날문 토기편 들과 추정 수혈2기 등 이 확인되어 지도위원회의를 거쳐 출토된 유구의 수습조사를 실시하고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2. 조사내용 1) 층 위

【사진 1】조사지역 층위현황

시굴대상지역은 조사결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완만한 사면으로 추정되나, 단지조성과 경작 등으로 인하여 원지형을 절·삭토한 다음 1.5m∼2m정도 복토가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교란이 심한 상태였다. 조사지역의 전체층위는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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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위 내용 출토유물 및 유구1층 표 토 ⋅ ·2층 복 토 층 약 150∼200㎝, ·

3층 흑갈색 부식토층 약 30~50㎝, 구지표면 / 유물포함층

자기편+무문토기·타날문토기 혼재

4층 적갈색 점토층 약 20∼30㎝ 유구 기반층 수혈, 타날문토기 등5층 풍화암반층 바닥층 ⋅

【표 1】 조사지역 층위 상황

(2) 조사 내용 금번 조사지역은 기 조사된 106-18번지 남서쪽 지역으로 복토층을 걷어내고 원지형(구지표면)을 찾는데 주력하였으며 구지표면 하부로는 기 조사된 유구(수혈, 추정주공)57) 와 관련된 시설과 유물을 찾고자 하였다. 3층인 구 지표에서는 토기편들이 출토되었으며 4층과 5층에서는 성격미상에 수혈과 소혈 등이 확인되었다.

시굴지점 출토유구 출토유물 비 고1Tr. · 자기편·타날문토기2Tr. 성격미상 수혈1기⋅소혈3기 타날문토기3Tr. · ·4Tr. 성격미상 수혈 1기 다량의 타날문토기

【표 2】 Tr.별 시굴결과

57)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맹리 106번지 시굴조사 약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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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시굴 2Tr. 수혈 및 소혈 모습. 【사진 3】 시굴4Tr. 수혈 출토 모습.

【사진 5】 시굴조사 출토 토기류 각종【사진 4】 수혈內 토기출토모습.

확인된 수혈2기에 대한 수습조사 결과 2Tr. 출토 수혈과 소혈들은 층위가 퇴적되면서 4층에 일부 혼입되어 형성된 자연퇴적 구덩이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4Tr 출토 수혈은 평명원형의 수혈로 주변으로 목탄과 함께 조사되었다. 수혈의 전체 평면이 조사경계지역 밖으로 벗어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혈 내부에서 타날문 토기편 과 수혈주변으로 숯자리 2기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소성과 관련된 유구일 것으로 추정된다.

시굴지점 시굴출토유구 수습조사 결과 출토 유물2tr 성격미상 수혈1기⋅소혈3기 자연 퇴적 구덩이 타날문토기4tr 성격미상 수혈 1기 추정 원형 수혈1기와

숯자리2기 타날문토기

【표 3】 Tr.별 수습조사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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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2Tr 세부조사 모습 【사진 7】 2Tr 수혈 조사후 모습

【사진 8】 4Tr세부 조사모습 【사진 9】 4Tr 수혈 조사후 모습

【사진 11】 4Tr출토 숯자리모습【사진 7】 4Tr출토 수혈 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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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조 사 성 과 조사지역은 용인 맹리 유물산포지 3으로 기 보고된 지역으로 2007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조사가 한차례 이루어진 지역이다. 금번 조사는 단독주택 조성을 위한 대지로 이 일대의 유적의 잔존 여부를 확인하고 고고학적 자료를 마련하고자 실시되었다. 금번 시굴조사와 수습조사의 성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조사대상지역은 북→남으로 경사진 완만한 사면이었으나 주택단지 조성과 경작등을 위하여 원지형을 절·삭토하여 1.5m∼2m정도 원지형에서 복토가 이루어져 있었으며, 또한 이 과정에서 교란이 심한 상태였다 둘째, 구지표면 하부인 4층에서 성격미상 수혈 2기, 소혈 3기와 주변으로 원삼국∼백제 타날문 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셋째, 수습조사결과 확인된 수혈 2기중 2Tr . 출토 수혈과 소혈들은 자연 퇴적된 구덩이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4Tr 출토 수혈은 평면원형의 수혈로 주변에 숯자리와 함께 확인되었다.

넷째, 출토된 유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퇴적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 조사된 양상과 지형으로 추정해 볼 때 유적의 중심은 현 조사지역 북쪽인 107-1전과 106-6전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본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수혈유구와 출토 유물 등은 용인시에서 기 조사된 용인 청덕리 백제수혈 유적과 용인 서천지구 유적 등과 함께 이 지역 백제시기에 고고학적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