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域의 佛敎發展과 交流에 관한 硏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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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1 / 1 noname1.htm 2008-03-08 / 오후 3:05 博士學位論文 西域의 佛敎發展과 交流에 관한 硏究 指導敎授 權奇悰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韓枝延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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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없음 1 / 1

    noname1.htm 2008-03-08 / 오후 3:05

    博士學位論文

    西域의 佛敎發展과 交流에 관한 硏究

    指導敎授 權奇悰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韓枝延

    2007

  • 博博博博士士士士學學學學位位位位論論論論文文文文

    西西西西域域域域의 의 의 의 佛佛佛佛敎敎敎敎發發發發展展展展과 과 과 과 交交交交流流流流에 에 에 에 관한 관한 관한 관한 硏硏硏硏究究究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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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東東東國國國國大大大大學學學學校校校校 大大大大學學學學院院院院 佛佛佛佛敎敎敎敎學學學學科科科科

    韓韓韓韓枝枝枝枝延延延延

    2007

  • 博博博博 士士士士 學學學學 位位位位 論論論論 文文文文

    西域의 佛敎發展과 交流에 관한 硏究

    韓 枝 延

    指指指指導導導導敎敎敎敎授授授授 權權權權 奇奇奇奇 悰悰悰悰

    이 論文을 博士學位 論文으로 제출함

    2007년 가을

    韓 枝 延의 哲學 博士學位論文을 인증함

    2007년 가을

    위원장위원장위원장위원장________________

    위 위 위 위 원원원원________________

    위 위 위 위 원원원원________________

    위 위 위 위 원원원원________________

    위 위 위 위 원원원원________________

    東 國 大 學 敎 大 學 院

  • - i -

    목 차

    Ⅰ. 序論 ·······························································································1

    1. 연구목적 ······················································································1

    2. 연구방법 및 범위 ·····································································4

    Ⅱ. 傳來期 佛敎의 性格 ·····························································9

    1. 傳來期 西域의 상황 ·································································9

    1) 기원전 西域 各國의 상황과 민족 ········································10

    2) 기원전후 周邊國과의 관계 ··················································15

    2. 佛敎의 傳來 ··············································································24

    1) 沙漠南道의 佛敎傳來 ·····························································25

    2) 天山南路 交易路의 佛敎傳來 ···············································34

    3. 전래된 佛敎의 性格 ·································································37

    1) 天山南路의 佛敎 ·····································································38

    2) 沙漠南道의 佛敎 ·····································································40

    Ⅲ. 天山南路의 佛敎發展 ·······················································46

    1. 西域傳에 나타난 各國의 모습 ···········································46

    2. 카쉬가르국(Kashgar)의 佛敎 ·············································51

    1) 카쉬가르국의 國家發展과 中國과의 관계 ··························51

    2) 카쉬가르국의 部派佛敎發展 ················································55

    3. 쿠차국(Kucha)의 佛敎發展 ·················································62

    1) 쿠차국과 中國과의 관계 ······················································63

    2) 쿠차국의 大․小乘佛敎 ···························································66

  • - ii -

    4. 高昌國의 大乘佛敎 ·································································80

    1) 高昌國의 國家發展 ·································································80

    2) 高昌國의 佛敎發展 ·································································82

    5. 西域佛敎文化의 전파 ···························································87

    Ⅳ. 沙漠南道의 敎學的 特性 ··················································92

    1. 카시미르국(Kashmir)의 佛敎 ·············································92

    1) 카시미르국과 沙漠南道의 교류 ·············································92

    2) 카시미르국의 部派佛敎發展 ··················································98

    2. 호탄국(Khotan)의 大乘佛敎 發展 ···································107

    1) 호탄국의 발전과 교류 ··························································107

    2) 大乘佛敎 中心의 호탄국 ······················································111

    3. 鄯善國의 佛敎와 그 특징 ·················································122

    1) 鄯善國의 발전과 교류 ··························································122

    2) 鄯善國 佛敎의 특징 ·····························································126

    Ⅴ. 西域과 中國佛敎의 관계 ··············································131

    1. 5胡 16國時代 佛敎交流 ·····················································131

    1) 人物을 中心으로 한 交流關係 ·············································132

    2) 佛敎思想의 전파 ···································································137

    2. 南北朝時代 佛敎思想交流 ·················································143

    1) 南朝의 西域僧侶 활동 ··························································144

    2) 北魏佛敎와 西域佛敎 ····························································153

    3. 涼州佛敎의 특징 ··································································165

    1) 經典流入의 중심지 ·······························································165

    2) 涼州佛敎의 전파 ···································································174

  • - iii -

    4. 西域佛敎文化와 中國文化 ··················································180

    Ⅵ. 結論 ···························································································186

    도표 ······································································································ 193

    도판 ······································································································ 197

    지도 ······································································································ 202

    참고문헌 ······························································································ 205

    ABSTRACT ························································································ 213

    中文抄錄 ······························································································ 219

  • - 1 -

    ⅠⅠⅠⅠ. 들어가는 들어가는 들어가는 들어가는 말말말말

    1. 연구목적

    西域이란 명칭은 中國 각 史書에 「西域傳」의 “西域”에 根據해 칭한다. 西域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漢書』「西域傳」에서 보인다1). 그리고 이후의 중국 史書에서는 각 列傳 끝부분에 「西域傳」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狹義的으로는 현재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각

    국가를 말하는 것이며 廣義的으로는 현 로마까지 이르는 거대범주에

    속하는 지역을 뜻한다. 이러한 西域에 관한 개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이 중국의 비단과 관련한 동서교통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 英文 Silk Road)’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서역보다는 좀 더 광범위한 지역을 뜻하게 되었

    다. 실크로드란 본래 오아시스루트(Oasis Route)만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리히트호펜, 헤딘(S.A.Hedin), 스타인(A.Stein) 등이 활동했을 때까지 실크로드의 주개념이 되었던 길이다. 그리고 북쪽의 초원지대를 일컫는 스텝루트(Steppe Route, 草原路), 南海의 각 국가를 연결하는 마린루트(Marine Route, 海上路)의 세 갈래로 나뉘게 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槪念이다2).

    그 가운데서도 오아시스루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민족과 국

    가가 興亡盛衰를 거듭하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용되고 있는 루트이

    기 때문에 실크로드라는 개념이 주로 이 오아시스루트에 사용된다. 이러한 오아시스루트 역시 다시 세 갈래 길로 나눌 수가 있다.3) 天山을

    1) 『漢書』卷96上 「西域傳」. “西域以孝武時始通 本三十六國 其後稍分至五十餘皆在匈奴之西 烏孫之南 南北有大山 中央有河 東西六千餘里 南北千餘里 東則接漢”.

    2)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작과비평사, 2001), pp.35 ~ 80. 최한우, 『중앙아시아학연구』(上), (펴내기, 2004), pp. 32 ~ 40.

    3) 이 三道가 처음 언급되기 시작하는 것은 隋 裵矩의 『西域圖記』에서 보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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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으로 天山北路와 天山南路, 다시 沙漠을 중심으로 한 沙漠北道와 沙漠南道로 나뉠 수가 있는데, 天山南路와 沙漠北道는 통상 같은 갈래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주요한 길은 沙漠北道와 沙漠南道이다. 沙漠北道는 중국 長安(현 西安)을 출발해 敦煌―玉門關(혹은 양관)―車師前王政(현 투르판)―카라샤르(현 언기)―龜玆(현 쿠차)―악수―疏勒(현 카쉬가르)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그리고 沙漠南道는 中國 長安―玉門關(혹은 양관)―미란―엔데레―니야―케리야―호탄―야르칸드―카쉬가르로 통하는 길을

    가리킨다. 위의 두 主道는 기원전부터 이용되고 있었는데, 주로 彩色土器, 즉

    彩陶나 玉의 이동경로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채도의 경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채도와 中國 河南省 유역에서 출토된 앙소문화의 유

    물들을 비교․분석한 결과, 채도 문양이나 형태에 있어 중국의 채도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이 대체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추세이다.4) 그리고 이 주장에 의해서라면 채도의 이동경로로는 西域지역이 이용될 수밖에 없다.

    현 학계에서는 서역의 개념보다는 실크로드 혹은 중앙아시아학의 개

    념으로 연구되고 있다.5) 그리고 실크로드학이나 중앙아시아학에서 모두 東西交易路라는 기본개념 하에서 정치군사, 역사지리, 문화교류 및 민족에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때문에 각 지역의 종교를 개별

    것으로 돈황을 咽喉라 보면서 현재의 천산남북로와 사막남도에 해당하는 세 갈래의

    길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隋書』「列傳」권 67 裵矩條에서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4) 앤더슨은 그의 책에서 중국 선사시대 채도에 관한 편년을 나누면서 메소포타미아 채도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출현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Anderson, J.G Children of Yellow Earth, Studies in Prehistoric China, London, 1934.

    5) 중국에서는 西域과 실크로드를 동일한 개념으로 쓰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주로 서역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되고 있다. 서양에서는 주로 중앙아시아학 즉, Central Asia의 개념으로 연구되어졌다. 국내 정수일은 『씰크로드학』에서 그 범위를 육로․해로를 모두 포함한 개념으로 보고 있고, 최한우는 육로상의 국가연구에 있어 중앙아시아학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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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실크로드학, 중앙아시아학에서 다루었던 交易路의 개념을 바탕으로 서역 각 국가별

    불교의 발전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交流狀況을 고찰하고자 한다. 佛敎가 印度에서 발생한 후 세계 곳곳으로 불교의 전파가 이루어졌

    고, 특히 北方佛敎 내지는 大乘佛敎圈이라고 일컬어지는 中國―韓國에 이르는 불교전파는 思想的으로, 文化的으로 하나의 文化圈이 형성될 만큼 宗敎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었다.

    佛敎文化圈이 형성될 만큼 아시아권에서의 불교 전파는 대단히 중요

    한 歷史的 사실이다. 이러한 불교전파의 문제는 주로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印度―中國간 불교 전파의 문제는 전파과정의 중간지역인 실크로드 지방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지역 특성상 연구하기 어려

    운 문제점이 많아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때문에 西域佛敎에 관한 연구가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西域 각 지역에서 佛敎가 형성, 발전, 성행된 시점과 각 시기적으로 발전된 불교사상이 연구되어야만 중국과 한국에서의 불교사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래되고 발전하게

    되었는가 라는 문제를 비단 思想史的 觀點에서만이 아닌 전반적 佛敎

    史的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에서 西域佛敎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연구

    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西域 각국 그리고 각 시대별로 현존하는 자료를 종합하여 天山南北路와 沙漠南路의 각국 사정

    과 歷史的 變遷過程 속에서 佛敎思想, 文化 등을 함께 考察하고자 한다. 그리고 西域 각 국가들은 쿠샨왕조의 활발한 佛敎 전파 활동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部派佛敎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특질은 그 동안 대중부 혹은 유부계통에서 대승불교로 발

    전했다는 학설과 불상조성의 연대가 대승불교 흥기시기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서역에서도 특히 인도접경 지역의 불교성격이 지극히 대승적이

    라는 학설이 대두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이러한 대승흥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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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파불교와의 관계 및 불상의 조상과 대승과의 관계를 인도 접경의 서

    역지역에서 고찰함으로써 서역에서의 대․소승불교의 발전상을 재조명하

    도록 한다. 더불어 이러한 부파불교 발전 이후 大乘佛敎가 발전되는 시점과 각 국가별로 어떠한 大乘思想이 전개되었는가를 보도록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지금까지 실크로드라 하면 스텝로, 오아시스로, 마린루트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생각되어 왔고, 때문에 이러한 루트를 연구하는 것을 실크로드학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 가운데서도 오아시스루트가 中國의 서쪽지역에 위치하므로 여기서는 이 오아시스

    루트를 西域이라고 명명하도록 한다. 실크로드의 槪念으로 연구된 것은 주로 地理學的인 觀點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19 ~ 20세기 서역을 탐험, 발굴 조사한 영국의 오럴 스타인(Aurel Stein),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러시아의 올덴버그(S. Oldenburg), 독일의 알버트 그린베델(Albert Grunwedel),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 등이 이루어놓은 학문적 성과는 주로 地理學的 혹은 美術史的인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6) 이밖에도 서구의 학자들과 중국 및 일본학자들에 의해 言語學的 硏究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7). 이러한 연구들 역시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6) A. Stein, Serindia; Detailed Report of Explorations in Central Asia and Westernost China 5vols, London, Oxford Univ., 1980, Ancinet Khotan; Detailde Report of Archaeological Explorations in Chinese Turkestan 3vols, Oxford, 1907, Oldenburg, S. von, Turkestanskaja Turkestanskaja exspeditsija, Petersburg, 1914, 態谷宣夫 등의 여러 논문들은 주로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7) Jan Nattier, Church Language and Vernacular Language in Central Asian Buddhism, Numen vol.XXXVII, 1990, 山田龍城, 『梵語佛典の諸文獻』平樂寺書店, 1959.등에서는 서역의 불교사상을 언급하기보다는 언어학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대장경과의 비교를

    통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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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고 있으며 현재 그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실크로드학 혹은 중앙아시아학에서는 연구목적에서 밝혔듯이

    교역로에 초점을 맞춘 역사 및 문화의 연구가 주된 것이었다.그러나 佛敎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그 硏究成果가 미비하다. 게다가

    남아있는 자료조차 많지 않고 주로 중국 각 사서류 말미에 남아있는

    西域傳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각국의 探險團에 의해 씌어지고 발굴되어진 자료들을 통해 연구

    할 수밖에 없는 제약점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결국 西域史에 관한 基礎 硏究조차 주로 漢시대에 국한된

    상태로 기존 연구성과를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 이루어진 中日共同尼雅遺跡學術調査8) 역시 정치․역사․문화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불교사적인 연구성과는 미비한 상태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中國의 각 史書類 안에 있는 「西域傳」을 기본

    으로 당시 西域의 政勢와 여러 국가들 간의 交流 등 기본적 西域 各國

    에 관한 기초적 이해를 하도록 한다. 이러한 기초적 이해를 토대로 각종 탐험보고서와 선행된 연구성과물, 그리고 중국의 譯經者들이 어떤 經典을 언제 飜譯하였는지에 관한 考察 등을 통해 西域佛敎의 면모를

    일부분 밝혀내려 한다. 특히 서역출신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활동했던 기록을 토대로 서역의 불교발전 과정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은 서역불

    교 관련 자료가 존재하지 않고, 출토된 일부 경전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통할 수밖에 없다.

    西域을 탐험, 발굴 조사한 보고서들은 매우 중요한 연구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영국의 스타인의 Serindia; Detailed Report of Explorations in Central Asia and Westernost China(5 vols.), Ancient Khotan; Detailde Report of Archaeological Explorations in Chinese Turkestan(3 vols.) 등은 지금 현재까지도 인정받고 있는 보고서라 할 수

    8) 中日共同尼雅遺跡學術考察隊, 『中日共同尼雅遺跡學術調査報告書』2권, 法藏館,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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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주로 스타인의 보고서와 오타니 탐험대의 보고서

    를 위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 밖에 보고서를 제외한 학술서적 가운데서는 국내 정수일의 『고대문명교류사』 『실크로드학』를 비롯한

    개설서 등을 참조하며 현재 西域 관련 書籍을 활발하게 출간하고 있는

    中國의 여러 서적들을 참조하여 西域에 관한 대략적 고찰을 하도록 한

    다. 이렇게 西域 각국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바탕으로 『高僧傳』, 『續高僧傳』, 『開元釋敎錄』, 『出三藏記集』 등의 승전류와 玄奘의 『大唐西域記』, 法顯의 『法顯傳』등의 불전류를 통해 西域佛敎를 살펴본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境界線上은 훔볼트(Von Humboldt)적인 地理的 槪念, 즉 동서로 카스피 해에서 서부 만주지역인 興安嶺 산맥에 남북으로 알타이 산맥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는 범위를 이 영역에 넣었

    다. 이후 리히트호펜(Richthofen)은 훔볼트의 위와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대신 카스피해를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등 실크로드에 대한 경

    계문제가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리적 개념보다는 文化的 槪念이 포함되며, 더불어 遊牧民族과 定着民族의 경계를 구분지어 다시금 재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지리적으로는 주로 天山山脈 以南, 파미르 고원 以西, 崑崙山脈 以北에 한하는 지역을 위주로 불교사상의 흐름을 보고자 한다. 불교전파 과정에서 훔볼트적인 범위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 범위가 너무 광범

    위해지기 때문에 사상흐름에 필요한 부분들에 관해 언급은 하되, 주요 지역에서는 제외하도록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를 「西域傳」과 中國 각 시기별로 등장하는 地理志 등과 더불어 文化․遺跡地를 함께

    접목하여 地圖를 이용한 西域佛敎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첫째, 西域 各國에 佛敎가 傳來되는 時

    點과 더불어 傳來되는 佛敎의 性格이 어떠한가를 규명하도록 한다. 주로 遊牧民族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형성되고, 각 국가가 발전하면서 발생되는 交流의 일부분이었던 불교는 각 루트에 따라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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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는 방법이나 시기가 틀리므로 天山南北路, 그리고 沙漠南道로 나누어 보도록 한다. 둘째, 카쉬가르국, 쿠차국, 고창국에 이르는 天山南路의 각 국가를

    중심으로 佛敎가 발전해가는 과정, 그리고 전파되는 양상을 통해서 그 특징과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방식이 틀려지는 모습을 전개해가도록

    한다. 특히 지금까지는 현장의 기록에 의해 쿠차국에서는 주로 小乘佛敎가 發展되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과연 쿠차국의 佛敎가 小乘佛敎였는가 그리고 大乘佛敎發展의 시작점 및 발전하는 불교

    교리의 성격 등을 추정해본다. 셋째, 沙漠南道上의 거대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해가도록 한다. 카시

    미르는 사막남도 상에 놓여진 국가는 아니지만, 호탄국 및 鄯善國 佛敎發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沙漠南道 상에 함께 포함하며 특히

    印度佛敎 發展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살펴본다. 그리고 호탄국은 『華嚴經』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호탄국의 불교발전을 살펴봄으로써 大乘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 등을 고찰한다.넷째, 西域 각국에서 전파되는 불교가 中原에서 統合되면서 발전하

    는 과정 그리고 西域과의 交流를 5胡 16國 時代에는 인물과 전파되는 佛敎經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서역불교의 발전상이 드러나는 시기가 곧 중국불교에 있어서 5호 16국 시대이므로 사상 및 문화적 발전이 모호한 중국불교 전래기를 뛰어넘어 5호 16국 시대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이후 南北朝時代에 들어서면 南朝와 北魏의 불교가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 역시 南朝와 北朝로 나누어 西域

    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의 일부분으로써 ‘역경의 중심지’로 인식되어오던 양주지역의 불교가 서역불교로 분류되어져 ‘경전유입의 중심지’ 혹은 ‘역경자 배출의 중심지’로 새롭게 조명되어져야 함을 밝힘으로써 제2의 서역불교로써의 양주불교로 정착시킨다.

    그리고 제 Ⅲ장과 Ⅴ장에서는 西域의 佛敎文化를 본다. 서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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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문화가 불교사상과 더불어 발전하기 때문에 思想的인 부분을 文化

    에 얼마만큼 담아내고 있는가에 관해 兩 道路를 중심으로 보며 이후

    中國佛敎文化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中國佛敎의 文化가 시간이 지

    남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알아본다.

  • - 9 -

    ⅡⅡⅡⅡ. 傳傳傳傳來來來來期期期期 佛佛佛佛敎敎敎敎의 의 의 의 性性性性格格格格

    傳來期라 함은 印度에서 佛敎가 이 지역으로 전파되어 西域 各國에

    서 점차 佛敎에 대한 이해를 싹틔우기 시작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西域 각 오아시스 국가들의 이동이 매우 잦은 시기이다. 匈奴族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이미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각

    국가들이 부득이하게 이동을 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불어 인도 및 그리스의 侵略戰爭으로 인한 요인도 함께 작용하여 西北印度에서 西域

    內部에 이르기까지 큰 지각변동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佛敎, 文化 등이 民族의 이동과 함께 더불어 이동하는 양상을 볼 수가 있는 시기이

    다. 따라서 佛敎가 전래될 수 있는 여러 要因들 가운데 위에서 언급한 주요 원인을 먼저 살펴본 후에 본격적으로 佛敎가 전래되는 모습을 알

    아본다. 또한 지리적 특성이 있는 西域이기 때문에 각 국으로 어떤 불교가

    전래되었는가에 관해서는 天山南北路와 沙漠南道로 나누어 보도록 한

    다. 이는 그 출발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佛敎가 傳來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나누어 살펴보고, 과연 傳來期에 흔히 구분되는 大乘 및 部派佛敎의 양상이 보이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 傳來期 西域의 상황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西域에서는 많은 변동이 일어난다. 기존의 土着勢力들은 匈奴와 漢나라의 西域經營權 쟁탈전으로 인해 강을 따라 小規模 國家를 형성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民族이 退出 혹은 流入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우선 당시의 상황과 민족이동의 모습을 보고 이후 印度 및 中國과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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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를 통해 國家建立, 發展의 상황을 살펴본다. 西域은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여러 국가가 형성되고 그 形成過程에서 주변 大國들의 영향을 받

    게 되기 때문에 佛敎가 전래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印度의 民族移動과 漢나라의 西域經營을 통해 西域 각국의 형성과 발전을 서술한다.

    1) 기원전 西域 各國의 상황과 민족『漢書』「西域傳」에서는 西域 民族에 관해 “塞種”이란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곧 DariusⅠ(BC. 521 ~ 486년) Behistun 명문에 새겨진 sak�를 “塞(sək)”으로 音譯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史記』「大宛列傳」에서는 張騫이 대국 大宛(Farghana), 大月支(Indoscythae), 大夏(Bactria), 康居(Sogdia)와 더불어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국 가운데 많은 국가들이 바로 이 “塞種”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이 種族은 4개의 주요 부락이 합쳐져 구성된 것으로 Asii, Tochri, Gasiani와 Sacarauli의 4부족이 聯盟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9) 余太山은 더욱이 이 민족이 기원전 6세기 즈음에는 西域 대다수 강 주변에 정착해 있던 Massagetae 종족을 쫓아내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10). 기원전 176년경 大月支가 서쪽으로 이동함으로 인해 이 種族이 강제 추방당하며 伊犁강, 楚河 유역 등을 포기하고 일부분은 錫爾 강 북단까지 밀려나고 일부는 南下하는 등 각 지역 도처로 산재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남하한 이들은 阿姆河 以南 지역으로 진입하여 박트리아(Bactria) 왕국을 멸망시키고, 大夏를 건립하였으며, 다른 일부 무리는 페르가나(Ferghana) 분지에 집입해 大宛을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일부는 서쪽 咸海, 里海 이북으로 이동, 奄蔡를 건립하고, 석이강 이북에 남아 있던 부류가 바로 康居로 남게 된다.

    9) 余太山, 『西域通史』,中州古籍出版社, 1996, pp. 48 ~ 50.10) 상게서. pp. 46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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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들 민족은 각기 다른 自然․地理的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中

    國 漢나라 장건이 분류한 行國과 土著으로 각각 그 특성을 지니게 된

    다. 장건의 기록에 따르면 行國은 大宛, 大月支, 大夏, 康居이고, 土著에는 烏孫, 奄蔡, 條支, 黎軒, 身毒의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11). 이들 각 국가의 특성상 행국은 바로 遊牧部族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土著는 農業에 임하는 定着部族 내지는 국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기원전 西域 전반적 정황은 바로 각 부족간의 聯盟과 獨立,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각국의 특징이 드러나는 시기로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각 국가의 성립과 서로 다른 민족의 대 이동이 일어남으로 인해 이후 발생하게 되는 宗敎, 文化的 흡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西域지역은 天山을 중심으로 北路와 南路, 그리고 沙漠을 중심으로 한 沙漠北道와 沙漠南道로 나누어볼 수 있다. 印度에서 간다라지역(현재 파키스탄 일대)을 거쳐 中國 땅으로 들어오는 길은 天山北路 혹은 南路, 沙漠南道의 세 갈래 길을 선택하여 들어올 수가 있다. 다시 말해 長安(현 西安)을 시작하여 甘肅城의 河西柱廊을 통과, 敦煌에서 옥문관을 통과하여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인 天山南路에는 하미―투르판―카라샤르―쿠차―악수―툼슉―카쉬가르로 통하는 길이 있다. 그리고 남쪽길은 미란―엔데레―니야―케리야―호탄―야르칸드―카쉬가르로 통하

    는 길이 된다. 위의 두 경로 가운데서 天山南路는 남쪽의 沙漠南道보다 오아시스 국가가 잘 형성되어 있었고, 그나마 험준함이 덜 하기 때문에 그 옛날 商人이나 求法僧侶들의 이용이 가장 잦았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天山南路에 위치한 쿠차국(현재 신강성위그르자치구의 “庫車縣”)은

    天山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향하는 남쪽으로 더

    흘러내려가 塔里木河를 이룰 정도로 주변의 다른 오아시스와는 차원이

    11) 『漢書』「列傳」卷61, 張騫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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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린 지형을 갖고 있다. 투루판의 카레즈처럼 지하를 파들어가 雪山의 물을 흐르게 하여 얻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天山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도시 곳곳을 흐르고 있으므로 부족의 형태이든, 소국가 형태이든 이 지역에서의 國家建立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쿠차국에 관한 언급은 中國 史料 가운데 『漢書』에서 가장 먼

    저 언급되고 있다. 관련 기사는 제 Ⅲ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人口, 家口, 勝兵이 숫자만 보더라도 西域 내에서도 강국이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러한 쿠차국의 民族 구성원이 어떠했는가에 관해서는 前秦 建元

    年間에 중국에서 譯經활동을 했던 曇摩難提가 번역한『阿育王息壞目因

    緣經』에 쿠차국과 아쇼카왕과의 관련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제 마땅히 나라를 나누어 염부제 땅 가운데 절반은 내가 취하고 절반은 아들에게 주리라. 나의 아들 법익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지금과 다름없이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新頭河의 바깥쪽 娑伽國에서부터 乾陀越城과 烏特의 여러 마을 劍浮와 安息과 康居와 烏孫과 龜茲와 于闐과 秦土에 이르기까지

    이 염부제의 절반을 법익에게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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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그 이름을 후세까지 드날리도록 할 것이다.12)

    아쇼카왕의 오해로 인해 아들 法益의 눈을 빼었는데 아쇼카왕이 이

    후 安息, 康居, 烏孫, 龜玆, 于闐 등지를 물려주어 法益이 통치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經典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은 玄奘의 『大唐西域記』나 티베트장경에서 설하고 있는 ‘于闐 建國說話’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玄奘은 于闐國 建國說話를 기록하는데 있어, 아쇼카왕이 遊行 도중 아들을 낳았는데 점을 쳐보니 왕이 죽기 전에 왕이 된다는 점

    괘가 나와 두 눈을 빼앗기고, 于闐國에 버려졌고 버려진 아이는 于闐國의 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阿育王息壞目因緣經』은 西域 각국이 中國의 서역점령 이

    전에는 주로 印度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13) 印度와의 관련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은 『大唐西域記』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經敎와 律義는 印度의 것을 따르고, 그 읽는 것은 인도문이다. 아직은 漸敎에 머무르고 있으며, 식사는 세 가지 정육을 섞고 있다.14)

    이는 앞에서의 『阿育王息壞目因緣經』에서 印度와 쿠차국과의 관계

    12) 『阿育王息壞目因緣經』(『大正藏』卷50, p. 175, 上). “一分賜子 使我法益 長生壽考 治化人民 如今無異 新頭河表 至娑伽國 乾陀越城 烏特村聚 劍浮安息 康居烏

    孫 龜茲于闐 至于秦土”.13) 이러한 대목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문서가 주로 “카로슈티”문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인도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로슈티문자는 인도 서북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인도 방언으로 중국문자인 한자로 완성된 문서보다 이 카로슈티로 완성된 문서가 더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14) 『大唐西域記』卷1(『大正藏』, 卷51, p.970, 上). “經敎律儀取則印度 其習讀者卽本文矣

    尙拘漸敎 食雜三淨潔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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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보여주는 예와 다를 것이 없이 印度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음

    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이른 시기부터 唐代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도의 言語․風習․宗敎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가 있

    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카쉬가르국 및 카시미르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쿠차국이었다. 뒤에서 더욱 자세하게 보겠지만 특히 카시미르는 西北印度와 근거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佛敎에 있어서는 第4結集을 완성시킨 지역이다. 다만 언제부터 불교가 전파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앞으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기원전 2 ~ 1세기, 그러니까 班超가 西域 각국을 漢에 복속시키기 이전까지는 인도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추측케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쿠차국 뿐만 아니라 호탄국 역시 원 土着勢力과 더불어 印度系

    民族이 합쳐져 國家가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매우 지배적이다.15) 스타인의 추정과 호탄국의 역사적 王朝 이름에는 일련의 특성이 보이고 있

    는데, 왕의 이름은 모두가 인도식이거나 接頭辭로서 “Vijaya”를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16) 게다가 于闐國 건국설화 내지는 불교전래 설화 내용에서 카시미르 지역의 아라한이 호탄국에 들어와 佛敎寺院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필시 카시미르 지역을 비롯한 西

    北印度와의 연관성을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건국 설화에서 초대 왕인 Sa―nu를 보호해준 神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천왕(Kuvera)이다. 뿐만 아니라 毘沙門天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인도의 神적 개념이 포함된 것으로 쿠차국과 마찬가지로 인

    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說話의 내용뿐만 아니라 유적 및 유물의 차원에서도 西北印度 특히 탁실라

    (Taxila) 지역의 불교조각 내지는 유적지의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어17)

    15) Aurel Stein경은 그의 저서 Serindia에서 카시미르지역의 사람들과 호탄 사람들의 생김새가 매우 비슷해 이 두 지역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16) B.N.Puir, Buddhism in Central Asia, pp. 52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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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줄 근거가 마련되고 있다. 따라서 기원전후 西域에서는 기존 原住民이 遊牧化되거나 혹은 定着

    國家化 되는 양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변모해 가는데, 그 배경에는 匈奴를 비롯한 기타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여러 강을 중심으로 소규모 국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西域 각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中國 측보다는 西北印度의 民族과 融合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宗敎, 文化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지는 시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기원전후 周邊國과의 관계기원전후의 西域 歷史는 匈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西域地

    域과 中國을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민족은 漢族이 아닌 바로 匈

    奴族이었기 때문이다. 匈奴는 古代 中國의 北方地域에 살던 일개 遊牧民族이었다.18) 全國時期 匈奴는 주로 北方地域에서 활동했으며, 중국의 각국은 匈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長城을 築造하였다. 秦나라가 建立된 이후에는 萬里長城을 쌓아 방어를 하는 동시에 군사를 파견해 匈奴

    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匈奴族 가운데 單于씨가 종족을 이끌었는데 秦漢時代가 되면 묵특선우(冒頓單于)가 匈奴族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으며, 中國을 위협하던 시대 역시 이 묵특선우代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묵특선우 이전에도 匈奴는 매우 강성하여 西域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

    니라 중국 內地까지 자주 침범하여 中國 변방, 즉 지금의 甘肅城 지역을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었다.19) 또 한편으로는 상업을 목적으로 한 지속적인 상인의 출입이 잦았는데, 『史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17) 임영애, 『서역불교조각사』, 일지사, 1996, pp. 111 ~ 135. B.N.Puir, 상게서 pp. 62 ~ 64.

    18) 근래의 중앙아시아 연구를 통해 많은 학자들이 흉노를 단순한 유목민족이 아니라 “흉노제국”으로 인정하면서 흉노를 실절적인 최초의 스텝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다.(최한우, 『중앙아시아 연구(上)』, 서울, 펴내기, 2003, pp. 95 ~ 99).

    19) 余太山, 『西域通史』, 中州古籍出版社, 1996, pp. 48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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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이후 匈奴는 和親을 끊고 中國과의 연결로인 보세를 공격하

    고, 자주 변경에 침입, 약탈하였는데 그 횟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흉노는 탐욕스러워 무역은 계속했는데 그것은 漢의 재물을 좋아하여 무역한 것이다. 漢도 역시 무역을 중시하여 단절하려 하지 않았다.20)

    이렇게 강성한 匈奴도 秦始皇帝에 의해 고비사막까지 퇴진했지만, 中國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다시 萬里長城을 넘어 침입해오기에 이른

    다.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하여 漢을 세운 후, 匈奴로부터의 잦은 공격에서 벗어나고자 대군을 거느리고 출격하지만 오히려 흉노에게 7일 동안 포위되었고, 해마다 비단을 상납하며 왕의 딸을 흉노왕에게 받치는 것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文景之治’를 겪게 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흉노는 타림분지로의 진출이 용이해졌고, 孝文帝 때에 이르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묻는다. 황제는 전에 화친의 조항에 대해 나(묵특선우)는 그 뜻에 부합하여 함께 화친하였다. 그러나 한 국경의 관리 우현왕은 독단적으로 漢吏와 상쟁하여 양 군주의 의를 끊고 형제의 친선관계를 벌어지게

    하였다. 황제로부터 詰問의 편지가 다시 왔기에 내가 사자를 보내어 답을 보냈지만 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한의 사자도 오지 않는다. 한은 그 때문에 화평하지 않다. 이제 하급관리가 화친을 깨뜨렸기에 우현왕을 벌주어 그에게 서방으

    로 월지를 찾아 공격토록 했다. 우현왕은 월지를 멸하고 모두

    20)『史記』卷110, 「匈奴列傳」 第50. “自是之後 匈奴絶和親 攻當路塞 往往入盜於漢邊 不可勝數 然匈奴貪 尙樂關市 嗜漢財物 漢亦尙關市不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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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시켜 누란, 오손, 호걸 및 그 부근 26개국을 평정하고 모두 흉노의 영역으로 하였다. 활을 당기는 모든 민족은 함께 한 가족이 되고, 북방의 여러 나라는 이미 안정되었다. 원하건대 전쟁을 그치고, 사졸을 휴식케 하며 말을 길러 지금까지의 한맺친 일을 잊고 예전의 화친을 부활시켜 변경의 백성을 안정

    케 하여 예전과 같이 하고 싶다. 21)

    匈奴는 中國과의 和親條約을 빌미로 변방을 지키던 중국 군대를 月

    支 공격에 이용하였고, 이에 성공하자 결과적으로는 서역 각지에 있던 26개국이나 되는 국가들을 복속시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 보이듯이 당시 서역지역에는 최소 26개국의 크고 작은 국가가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편지를 받은 한나라 조정에서는 匈奴와의 화친을 위해 성급히 孝文帝의 답문과 더불어 비단 등을 흉노에게 보내

    게 된다.앞서 기술한 高祖 때의 사건은 진시황제 이후 처음으로 中國과 匈奴

    와의 우위관계가 뒤바뀐 것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처음으

    로 西域地域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다. 즉, 高祖代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갖게 된 중국으로서는 貿易이나 思想․文化의 交流가 목적이 아닌, 당시 역사에 대한 만회를 위해 서역지역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정치․군사․생산의 모든 면에서 국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漢 武帝에

    (BC140 ~ 87) 이르면, 漢나라는 매우 강성한 제국으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국가 내부에서는 王權을 더욱 강성하게 하며 集權體制를 더욱 堅固하게 하였고, 對外的으로는 오랑캐를 정벌하며 領土를 확장함으로

    21) 『史記』卷110, 「匈奴列傳」 第50. “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 恙 前時皇帝言和親事 稱書意 合歡 漢邊吏侵侮右賢王 右賢王不請 聽後義盧侯難氏等計 與漢吏相距 絶二

    主之約 離兄弟之親 皇帝讓書再至 發使以書報 不來 漢使不至 漢以其故不和 隣國不附. 今以小吏之敗約故 罰右賢王 使之西求月氏擊之 以天之福 吏卒良 馬彊力 以夷滅月氏

    盡斬殺降下之 定樓蘭烏孫呼揭及其旁二十六國 皆以爲匈奴 諸引弓之民 幷爲一家 北州

    已定 願寢兵休士卒養馬 除前事 復故約 以安邊民 以應始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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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 秦나라때보다 西漢 영토의 판도가 훨씬 넓어진다. 中國이 대규모 정치 사절단을 외부로 파견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시

    작되었다. 武帝가 파견한 張騫 역시 匈奴와의 전쟁에 대한 저항 혹은 반격하기 위한 사절단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다. 武帝가 匈奴를 擊破하기 위해 大月支國으로 사절을 보내 挾攻을 요청하기 위해

    張騫을 보내게 된 것이니 이는 그 目的性이 지극히 군사적 차원의 사

    절단이었던 것이다. 大月支國과의 협공에 관한 발상이 나오게 된 배경에 관해 『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武帝가 잡아들인 匈奴族 포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匈奴가 月支를 격파하고 그때 月支王을 죽여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勝戰의 기념으로 삼았다. 月支는 항상 匈奴에 대한 원한이 있어 어느 나라건 匈奴를 挾攻하여 원한을 갚고

    싶다고 하고 있다.22)

    匈奴族 포로는 月支國이 흉노에게 깊은 원한이 있게 된 배경을 말하

    고, 군사적 기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武帝는 급히 사자를 모집하여 月支로 파견하고자 하니 이때 張騫이 발탁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張騫은 建元 2년(BC. 139) 甘父라는 胡人을 비롯한 100여 명을 데리고 甘肅으로 출발하였는데 결국 匈奴에게 잡혀 선우 앞에 끌려가

    게 된다. 선우는 張騫 일행이 月支國으로 가는 사절단임을 알고 그를 포로로 삼고 匈奴族 여자와 婚姻을 시켜 歸化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張騫은 이후 탈출에 성공해 월지까지 갔다오는 시기가 무려 13여 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23). 그러나 이때 張騫은 月支의 위치를 파악하는 소

    22)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建元中爲郞 是時天子問匈奴降者 皆言匈奴破月氏王 以其頭爲飮器 月氏遁逃而常怨仇匈奴 無與共擊之”.

    23) 『史記』卷123, 「大宛列傳」第63. “大宛之跡 見自張騫 張騫漢中人 建元中為郎 是時天子問匈奴降者 皆言匈奴破月氏王 以其頭為飲器 月氏遁逃而常怨仇匈奴 無與共擊之 漢

    方欲事滅胡 聞此言 因欲通使 道必更匈奴中 乃募能使者 騫以郎應募 使月氏 與堂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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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을 얻게 된다. 月支로 가는 도중 大宛國24)에 도착하자 張騫은 月支로 가려는 목적을 설명하고 匈奴를 격파한 후 中國과의 交流 協定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張騫 일행에게 大宛國에서는 길 안내인과 통역자를 함께 보내 康居25)를 지나26) 대월지에 도착하는데 성공케하였다.

    그러나 이미 匈奴에게 쫒겨 지금의 Zeravshan 강 유역, Oxus 강의 북쪽과 Uzbekistan, Tadzhikistan 일부에 정착한 月支로서는 匈奴로부터의 침략에서도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한나라와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굳이 협공을 통한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張騫의 흉노정벌 역설에도 불구하고 月支王은 협공에 대한 의지가 생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歸國

    胡奴甘父俱出隴西 經匈奴 匈奴得之 傳詣單于 單于留之曰 月氏在吾北 漢何以得往使

    吾欲使越 漢肯聽我乎 留騫十餘歲 與妻 有子 然騫持漢節不失”.24) 대완국에 대한 당시 위치와 간략한 정황에 대해 『史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흉노의 서남에 위치하며, 한나라에서는 正西에 위치한다. 한나라로부터는 서쪽으로 만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들은 땅을 중심으로 한곳에 머물며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고 포도주가 있다. 그리고 좋은 말이 많은데 한혈마(말이 피땀을 흘림)라 하는데 본래 天馬의 종자라고 한다. 이 나라는 성곽과 가옥이 있으며, 속읍으로는 크고 작은 70여 성에 인구는 수십만 명쯤 된다. 그들의 무기로는 활과 창이 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 그 북쪽에는 강서, 서쪽에는 대월지, 남서쪽에는 대하, 북동쪽에는 오손, 동쪽으로는 우미와 우전이 있다.… 이때 한나라에 알려지게 된다.”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大宛在匈奴西南 在漢正西 去漢可萬里 其俗土著 耕田 田稻麥 有蒲陶酒 多善馬 馬汗血 其先天馬子也 有城郭屋室 其屬

    邑大小七十餘城 衆可數十萬 基兵弓騎 其北則康居 西則大月氏 西南則大夏 東北則烏

    孫 東則玗于窴,…”).25) 康居에 대해 『史記』에서는 “강거는 대원국으로부터 서북으로 이천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유목 국가로 그들의 풍속은 월지와 비슷하다. 활을 쏘는 군대가 8, 9만 명이나 되고 대원과 인접해 있다. 강거는 나라가 작아 남으로는 월지국에, 동으로는 흉노에 복종하여 받들고 있다.”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康居在大宛西北可二千里 行國 與月氏大同俗 控弦者八九萬人 與大宛隣國 國小南羈事月氏, 東羈事匈奴”).

    26)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居匈奴中 益寬 騫因與其屬亡鄉月氏 西走數十日至大宛 大宛聞漢之饒財 欲通不得 見騫 喜問曰 若欲何之 騫曰 為漢使月氏 而為匈奴所

    閉道今亡 唯王使人導送我 誠得至 反漢 漢之賂遺王財物不可勝言 大宛以為然 遣騫為

    發導繹 抵康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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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중 다시 匈奴에게 잡혔으나 匈奴族 內分으로 겨우 귀국에 성공하였

    다. 月支와의 동맹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주24에서도 언급했듯이 대원국의 汗血馬와 더불어 포도 등이 많이 생산됨을 알게 된 武帝는 西域

    各國과의 交易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張騫의 1차 西域行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그 失보다는 得이 더 많은 사절행이었다고

    보여진다.그 뒤 漢 武帝 元朔 6년(BC. 123), 張騫은 校尉로 大將軍을 따라 다

    시 匈奴 정벌에 나서는데, 사막에서의 물과 식물이 자라는 곳을 알고 있었기에 한나라 군대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돌아올 수 있게 되어 張騫

    은 ‘博望侯’에 임명된다.27) 그러나 그 다음해인 元狩 1년(BC. 124)에는 李廣과 함께 흉노정벌을 위해 떠났다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한나라 군

    대가 큰 피해를 입고, 張騫이 李廣과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못하자 속죄금을 내고 庶民으로 살게된다.28) 다시 또 이듬해 渾邪王이 백성을 끌고 漢나라에 투항하자 金城, 河西 서쪽에서 南山을 따라 鹽澤에 이르기까지 匈奴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간혹 흉노가 공격해와도 아주 드문 일이 되었다.29) 이후 張騫은 자신의 서역 원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烏孫과의 동맹을 武帝에게 주청하며 다음과 같은 당시 정황을 설

    명하였다.

    烏孫王의 이름은 昆莫인데, 곤모의 아버지는 흉노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 왕이었습니다. 흉노가 쳐들어와 그 아비를 죽여 곤모는 태어나자마자 초원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와 그 위를 날고, 늑대는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27)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騫以校尉從大將軍擊匈奴 知水草處 軍得以不乏 乃封騫爲博望侯 是歲元朔六年也”.

    28)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與李將軍俱出右北平擊匈奴 匈奴圍李將軍 軍失亡多 而騫後期當斬 贖爲庶人”.

    29)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其明年, 渾邪王率其民降漢 而金城 河西西並南山至鹽澤空無匈奴 匈奴時有候者到 而希矣”.

  • - 21 -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선우는 그를 神人이라 생각하고 거

    두어 길렀습니다. 곤모가 장년이 되자 병사를 거느리게 해보니 자주 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선우가 그의 아버지의 백성들을 곤모에게 돌려주고 오랜기간 서쪽변방을 맡겼습니다. 곤모는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공략했는데 활을 쏠 수 있는 군사가 수

    만이 되고, 싸움에 익숙합니다. 선우가 죽자 곤모는 그 무리를 이끌고 중립을 지키면서 흉노와 조회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흉노는 기습공격도 감행했으나 번번히 지자,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고 멀리합니다. 지금 선우는 새로 우리 군대에 시달리고 있으며, 혼사왕이 지배하던 땅은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오랑캐들은 습관처럼 우리 물건을 탐내고 있으니 만일 이럴 때 오손

    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 동쪽으로 더 가까이 하게 하여 혼사왕

    이 살던 땅에 살게 하고, 우리와 형제의 의를 맺게 한다면 형세로 보아 오손은 필시 한나라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게만 한다면, 흉노의 오른팔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손과 연합할 수만 있다면 그 서쪽의 대하 등의 나라도 모두 한나라의 外臣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30)

    이러한 張騫의 주청은 武帝로 하여금 烏孫과의 同盟決意를 굳건하게

    만들었고, 장건은 다시 正使가 되어 烏孫으로 갔다. 결과적으로는 비록 계획했던 바대로 烏孫을 河西지역으로 불러오지는 못했으나 양국 사이

    에는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더불어 大宛, 康居, 月支, 大夏 등지와도 많은 교류가 있게 되어 중국에서 이들 나라로 파견되는 사절단의 수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漢나라에서는 서역 각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

    30)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臣居匈奴中聞) 烏孫王號昆莫 昆莫之父 匈奴西邊小國也. 匈奴攻殺其父 而昆莫生於野 烏嗛肉蜚其上狼往乳之 單于怪以爲神 而收長之 及壯 使將兵 數有功 單于復以其父之民予昆莫 令長守於西域遠徙 中立 不肯朝會匈奴

    匈奴遣奇兵擊 不勝 以爲神而遠之 因羈屬之 不大攻 今單于新困於漢 而故渾邪地空無

    人 蠻夷俗貪漢財物 今誠以此時而厚幣賂烏孫 招以益東 居故渾邪之地 與漢結昆弟 其

    勢宜聽 聽則是斷匈奴右臂也 幣連烏孫 自其西大夏之屬皆可招來而爲外臣”.

  • - 22 -

    었는데, 앞서 언급되었던 ‘汗血馬’에 대한 한 武帝의 끝없는 욕심은 결국 大宛과의 전쟁으로까지 전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2차례에 걸쳐 감행된 대완전은 결국 서역 대부분의 국가가 한나라에 복종케되

    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제는 현 敦煌 酒泉에 都尉를 두고, 현재 쿠차국 동쪽 지역에 輪台를, 지금의 쿠얼라 지역에는 屯田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통과하는 중국 사절단의 식량 등의 공급을 책임지

    웠다.31)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어 중국이 서역을

    지배하게 되었듯이 다시 뒤바뀌는 상황이 되어 李廣利의 7만 대군이 흉노에 항복하게 됨으로써 한나라는 서역경영을 포기하였다. 나라 경제사정 상의 이유도 한 몫하면서 서역까지 눈 돌릴 틈이 없던 한나라

    는 昭帝 始元 2년(BC. 85) 즈음부터는 정세가 바뀌게 되어 흉노의 내분, 국내적인 안정으로 현 쿠차국 지역의 동쪽에 西域都護部를 설치하고 서역지배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匈奴의 내분은 계속되어 單于간의 대립으로 漢나라는 큰 어려움 없이 天山南路를 장악할 수가 있게 된

    다32). 이로써 교역의 무대가 甘州, 凉州 등에서 長安으로까지 발전되게 되었고, 외국 상인들의 출입이 잦아졌다. 이때에 천문, 역학, 갖가지 식물 ―오이, 마늘, 호두, 석류, 당근, 완두콩 등―과 더불어 향신료의 수입도 이루어져 경제적인 발전 역시 급속도로 진행되어졌다고 보여진다.後漢時代에는 西域經營에 관한 일관된 정책이 없었으므로 西域의 각

    국과 後漢간의 관계는 일정하다고 볼 수가 없다. 더욱이 前漢 末, 後漢 初의 혼란함을 틈타 中國에 속해있던 西域 각국들을 다시 匈奴에 귀속

    31) 『史記』卷123, 大宛列傳 第63. “而漢發使十餘輩至宛西諸外國 求奇物 因風覽以伐宛之威德 而敦煌置酒泉都尉]西至鹽水 往往有亭 而侖頭有田卒數百人 因置使者護田積粟 以給使外國者”.

    32) 『漢書』, 卷94上, 「匈奴傳」. “單于欲求和親 會病死 初單于有異母弟為左大都尉 賢 國人鄉之 母閼氏恐單于不立子而立左大都尉也 乃私使殺之 左大都尉同母兄怨 遂不肯

    復會單于庭 又單于病且死 謂諸貴人 我子少 不能治國 立弟右谷蠡王 及單于死 律等與

    顓渠閼氏謀 匿單于死 詐撟單于令 與貴人飲盟 更立子左谷蠡王為壺衍鞮單于 是歲 始

    元二年也”.

  • - 23 -

    하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또한 중국의 中華思想이 부각되는 시기이므로 西域의 각국들은 더욱 中國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제1대 왕인 光武帝는 前漢時代 高祖 때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어 전반적으로 피폐한 상황에 처해 오로지 국내안정에 힘쓸 수밖에 없었

    다. 따라서 재위 33년동안 匈奴와의 전쟁도 가급적이면 피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西域 지역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2代 明帝 ~ 4代 和帝 시대에는 흉노와의 관계를 재정리하면서 서역과의 교류가 필

    요했기 때문에 관계개선을 하였다. 이러한 後漢時代에는 西域에 관해 『漢書』「西域傳 」에서 전반적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武帝 때부터 통치하기 시작한 西域은 본래 36國이었는데 스스로 나누어져 55國이 되었다. 이 모든 국가가 匈奴의 서쪽, 烏孫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南北에는 거대한 산이 놓여져 있고, 중앙에는 강이 있으며, 東西로는 6천여 里, 南北으로는 1천여 里에 이른다.33)

    前漢代에 36國이었던 오아시스 국가들은 아마도 각 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전시대 匈奴와 中國간의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이동 등의 이유

    로 각 국이 세분화되는 현상보다는 이 지역으로의 인구 유입이 더 큰

    이유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前漢 時代, 여러 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서역 각 국에서는 가교 역할과 각 국에서 들어오는 사절단 및 상인들을

    위한 물자공급을 원활히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의 각

    요지에는 새로운 국가 내지는 부족 집단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더욱이 中國과 匈奴의 세력이 급격하게 그 위력이 떨어져 오아시스 국가들은 제각기 독립하여 그 나름대로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33) 『漢書』卷96 上, 「西域傳」 第66 上. “西域以孝武時始通 本三十六國 其後稍分至五十餘 皆在匈奴之西 烏孫之南 南北有大山 中央有河 東西六千餘里 南北千餘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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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기 이후 타림분지를 둘러싼 거의 모든 국가가 독립을 하여 새로운 文化 및 文物을 접하게 되며 급속도로 번영한다.

    한편 흉노는 南北의 兩國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남측의 흉노는 중국에 귀속되었고, 한은 북측의 흉노를 공격함으로써 西域 각 국가를 다시 굴복시키고 도호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後漢은 다시 막강해져 서역으로의 진출이 용이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거의 대부분 앞선 시대의 張騫과 같이 서역에 통달한 班超 夫子가 그 역할을 충실

    히 해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後漢 明帝 永平 16년(AD. 73), 班超는 서역으로 출전하여 蒲類海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從事인 敦恂과 더불어 서역에 파견된다.34)後漢代의 西域經營은 실제로 班超와 班湧의 시대 이외에는 거의 이

    렇다할 만한 특이점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前漢時代의 武帝 때보다 못한 활동으로 인해 이 시기부터 이후의 3 ~ 4세기 가량은 서역 각 국은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각기 서역 내에서의 국가형성과 더불

    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 것이다.

    2. 佛敎의 傳來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원전 西域 國家의 형성에는 西北印度의 영향

    이 많았다. 民族的 融合으로 시작해 國家 建立 및 發展에 있어서도 中原보다는 印度의 영향권 下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佛敎의 傳來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이 필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다. 西域에 佛敎가 傳來된 시점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점으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國家形成과 동시에 傳來된 것인지,

    34) 『後漢書』卷47, 「班梁列傳」第37. “十六年 奉車都尉竇固出擊匈奴 以超爲假司馬 將兵別擊伊吾 戰於蒲類海 多斬首虜而還 固以爲能 遣與從事郭恂俱使西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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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는 國家가 형성된 이후 交流에 의한 결과로 佛敎가 傳來된 것

    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沙漠南道와 天山南路의 두 갈래 길로 나누어 보도록 한다.

    1) 沙漠南道의 佛敎傳來沙漠南道에 위치한 호탄국에 佛敎가 流入된 시점에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호탄국의 建國說話에 기록되어 있는 建國時期를 규명

    해봄으로서 佛敎傳來時點을 추정해볼 수가 있다. 불교전래 설화와 건국설화와의 연관성을 통해 전래시점뿐만 아니라 호탄국 건립 당시 인

    도 및 중국과의 관계를 규명하며 또한 建國說話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

    용으로 설화가 담고 있는 의미, 상징성을 알아보도록 한다. 호탄국의 건국설화는 현재 티베트불전과 玄奘의 『大唐西域記』 두 문헌에서 묘

    사되고 있다. 티베트문헌에서는,

    아쇼카王이 遊行 도중 호탄국에 도착했는데, 어느 날 밤 왕비가 이곳에서 잘 생긴 왕자를 낳았다. 점치는 사람이 점을 쳤더니…지금의 왕이 죽기 전에 왕이 될 것이다라고 해 왕은 두

    려워 왕자를 내다버렸다. 그런데 땅에서 우유가 솟아나와 왕자를 살렸으므로 그 아이를 地乳(Sa―Nu, Kustana)라 칭하게 되었다. 그 때 중국에는 위대한 보살왕이 있었는데 왕에게는 이미 999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毘沙門天에게 기원하여 1000명의 자식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비사문천은 버려진 아이를 이 왕에게 주었다. 중국왕에 의해 키워진 아이는 자라서 자신이 실제 중국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자신이 태어난 서쪽으로 향했다. Sa―Nu의 아버지 아쇼카왕에게 耶舍라는 이름의 대신이 있었는데, 왕에게 미움을 사 동족 7000명을 이끌고 호탄국으로 오다가 Sa―Nu 일행을 만났다. 두 집단의 영토다툼이 계속되자, 비사문천과 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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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이 공중에서 이를 보고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두 신은 지금까지 이 나라의 수호신으로 숭배된다. Sa―Nu가 왕이 되고 약사는 대신이 되어 동서에서 온 이주자들은 각각 구역을 정

    하여 정주하였다. 양 구역의 중간지대에는 중국인과 인도인이 혼합되었는데 이 곳에 성역을 건설하였다. 건국은 불멸 후 234년 Sa―Nu가 19세 때의 일이다.35)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玄奘의 『大唐西域記』에 기록된 건국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나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막한 대지였고 단지 비

    사문천이 거주하고 있었다. 옛 인도의 아쇼카왕이 태자를 탁실라국의 태수로 보냈는데, 아쇼카왕의 왕비가 이 일로 태자를 미워하여, 칙서를 위조해 태자의 죄를 물어 명하여 양눈을 도려내게 하였다. 아쇼카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이 일을 담당한 재상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추방된 자들은 이 나라의 국경으로 들어와 이 곳의 호족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그때 東國帝王의 한 왕자도 역시 죄를 지어 도망 와 이 나라의 동

    쪽지역을 차지하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나중에 東西의 두 왕이 서로 싸워 서군이 패하고 동왕이 동서 두나라

    를 통일하였다. 양국이 통일을 이루자 국왕은 한 선인의 교시를 받아 수도를 호탄국의 땅에 세웠다라고 전한다. 왕은 나이가 들었지만 이제껏 자식이 없어 가계가 끊어질 위기에 놓였

    다. 바사문천에게 청해 자식을 기원하자 그 때 神像의 이마가 갈라지면서 아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우유를 먹지 않아 곧 죽게 되자 왕은 다시 빌었는데 갑자기 땅이 융기하면서

    우유가 솟아 아이는 그것을 마시고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

    35) W.W.Rockhill, The Life of the Buddha and the Early History of His Order, London, 1982, pp.233 ~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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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다. 이에 神祀을 세워 비사문천을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 후 왕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地乳로 길렀기 때문에 지유를 국호로 하였다.36)

    위의 티베트불전과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建國說話에 관해 호탄

    국 自國의 權威 및 王室의 正統性을 확립시키려는 說話 윤색과 아쇼카

    왕의 전설 요소를 도입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더불어 두 문헌의 공통점으로 호탄국의 초대왕은 동국제왕의 자손이라

    는 점을 들고 있다.37)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위의 티베트불전에 의하면 건국을 이룬 Sa―Nu는 실제로는 아쇼카왕

    의 아들이다. 어릴 때 中國 王에 의해 길러졌다 하더라도 印度 王室과의 血緣關係는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또한 大臣의 직위를 갖고 있는 약사 역시 인도에서 들어온 대신으로 비록 우두머리를 쫓아 호탄

    국으로 유입되어 온 민족 구성이 印度와 中國으로 나뉜다하더라도 Sa―Nu는 인도왕실의 핏줄인 것이다.

    반면 현장의『大唐西域記』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東國帝王의 아

    들이 호탄국을 건립하고, 그의 아들 이름을 國號로 정했다고 하고 있

    36) 玄奘,『大唐西域記』(『大正藏』卷51, p. 943, 上 ~ 中). “昔者此國虛曠無人 毘沙門天於此棲止 無憂王太子在呾叉始羅國 被抉目已無憂王怒譴輔佐遷其豪族 出雪山北居荒谷

    間 遷人逐物至此西界 推擧酋豪尊立爲王 當是時也東土帝子蒙譴流徙居此東界 群下勸

    進又自稱王 歲月已積風敎不通 各因田獵遇會荒澤 更問宗緖因而爭長 忿形辭語便欲交

    兵 或有諫曰 今何遽乎因獵決戰未盡兵鋒 宜歸治兵期而後集 於是迴駕而返 各歸其國校

    習戎馬 督勵士卒 至期兵會 旗鼓相望旦日合戰 西主不利 因而逐北遂斬其首 東主乘勝

    撫集亡國 遷都中地方建城郭 憂其無土恐難成功 宣告遠近誰識地理 時有塗灰外道 負大

    瓠盛滿水 而自進曰 我知地理 遂以其水屈曲遺流 周而復始 因卽疾驅忽而不見 依彼水

    跡峙其基堵 遂得興功卽斯國治 今王所都於此城也 城非崇峻攻擊難剋 自古已來未能有

    勝 其王遷都作邑建國安人 功績已成齒耋云暮 未有胤嗣恐絶宗緖 乃往毘沙門 天神所祈

    禱請嗣 神像額上剖出嬰孩 捧以回駕國人稱慶 旣不飮乳恐其不壽 尋詣神祠重請育養 神

    前之地忽然隆起 其狀如乳 神童飮吮 遂至成立 智勇光前風敎遐被 遂營神祠宗先祖也

    自茲已降奕世相承 傳國君臨不失其緖 故今神廟多諸珍寶 拜祠享祭無替於時 地乳所育

    因爲國號”.37) 山崎元一, 「于闐建國傳說の一考察」『山本博士還曆記念論文集』, 山川出版社, 1972,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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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쇼카왕, 즉 인도 왕실과의 혈연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왕실과의 혈연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호탄국의 초대왕은 동국제왕의 자손이라는 점은 양 文獻에 관한 명확한 분석이 필요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호탄국의 건국설화는 두 문헌 모두 호탄국의 건국과 더불어

    호탄국 왕실 자체에 대한 正統性 確立이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인도, 중국과의 血緣關係로 묶음으로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탄국의 建國時期가 명기되어 있다는 점이다.티베트불전에 의하면 ‘건국은 불멸 후 234년 Sa―Nu가 19세 때의 일

    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멸연대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불멸연대에 관해서는 대략 60여 종이 있으며, 최근에는 대략 기원전 500 ~ 400년대로 보고 있다.38) 이 가운데 說話內容 상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기원전 486년설, 기원전 483년설, 기원전 478년 설 등이 있는데, 만일 486년 설을 따른다면 486―234=252년으로 건국시기를 대략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기원전 252년 경 건국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호탄국에 건국설화의 내용으로 建國과 동시에 佛敎流入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점이 생길만큼 佛敎的 색채를 띤 윤색이 있었던 기록이다. 그러나 현재 호탄국의 佛敎傳來說話가 現存하는 만큼 그 전래설화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洛陽伽藍記』, 『大唐西域記』와 티베트불전 『于闐敎法史』에 기

    록되어 있는 전래설화는 다음과 같다.

    ① 『洛陽伽藍記』

    본래 우전왕은 불법을 믿지 않았다. 어떤 오랑캐 상인이 비로전이란 이름의 비구를 성 남쪽 살구나무 아래에 데려다 놓

    고 왕에게 죄를 아뢰며 말하였다. ‘지금 다른 나라의 승려를

    38) 에띠엔 라모뜨, 호진 譯, 『인도불교사』1, 시공사, 2006 pp.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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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남쪽 살구나무 아래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내며 즉시 가서 비로전을 보았다. 비로전이 왕에게 말하였다. ‘여래가 나를 보낸 까닭은 왕에게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탑 하나를 만들게 하여 왕업을 영원하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왕이 말하길, ‘나로 하여금 부처를 만나게 한다면 당장 명령대로 하겠다’

    비로전이 종을 울려 부처에게 고하자마자 라후라를 보내 형

    체를 바꾸어 부처로 만드니 공중에 부처의 모습이 나타났다. 왕이 오체를 땅에 던져 절하고는 즉시 살구나무 아래에 절을

    만들고 라후라 상을 그리니, 부처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우전왕은 다시 정사를 지어 라후라 상을 모셨다. 그읏을 엎어놓은 듯한 탑 그림자가 항상 건물 밖으로 나와 그것을 보

    는 자들은 회향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안에는 벽지불의 신발이 있는데 당시까지도 썩지 않았다. 가죽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데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39)

    ② 『大唐西域記』

    옛날 이 나라에 불교가 아직 행해지지 않았을 때 아라한은

    카시미르국으로부터 이 숲속에 와 선정하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사람은 그 용모와 차림새에 놀라 왕에게 자세히 고해바쳤

    다. 왕은 몸소 나가 그 거동을 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한은 여래의 제자로 조용한 곳에서 선정을 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대왕이 복덕을 행해 불교를 넓히고 가람을 지

    39) 楊衒之, 서윤희 옮김,『洛陽伽藍記』(눌와, 2001년) pp. 183 ~ 184. 『洛陽伽藍記』卷5, (『大正藏』卷51, p. 1019, 上). “于闐王不信佛法 有商將一比丘石毘盧旃在城南杏樹下 向王伏罪云 今輒將吳國沙門來在城南杏樹下 王聞忽怒卽往看毘盧旃 旃語王曰 如來

    遣我來令王造覆盆浮圖一軀 使王祚永隆 王言令我見佛當卽從命 毘盧旃鳴鍾告佛 卽遣

    羅羅變形爲佛 從空而現眞容 王五體投地 卽於杏樹下置立寺舍 畫作羅羅像 忽然自滅

    于闐王更作精舍籠之令覆瓮之影恒出屋外 見之者無不回向 其中有辟支佛靴 於今不爛

    非皮非莫能審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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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승도를 모여들게 해주십사 말하였다. 왕은 여래에게 어떤 덕이 있으며 어떤 신이기에 나한이 숲속에 살면서 고행을 하

    고 그 가르침을 받들고 있는가를 물었다. 나한은 여래는 사생에 자비를 베풀고 삼계를 지도하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

    지 않기도 하며, 生滅流轉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에 귀의하는 자는 생사의 경지를 떠날 수가 있고 그 가르침을 믿

    지 않는 자는 애욕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고 하였다. ……가람을 지었으나 부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것인지 왕이 묻자 나한은 정성을 보이라 하였고, 왕은 부처님께 예를 갖추자 하늘에서 불상이 내려와 왕에게 간타를 건네주었

    다. 왕은 그로부터 진심으로 불교를 보급하게 되었다.40)

    ③ 『于闐敎法史』

    世人을 구도하는 미륵보살과 문수보살 두 분이 우전이 三世

    佛 福田 가운데 한곳이라는 것을 알고 우전사람들을 선지식으

    로 만들기 위해 두 분은 우전으로 내려와 잡니마국 동산에 도

    착하였다. 미륵보살은 국왕이 되어 위지림박와라 이름하였고, 문수보살의 화신 비로자나비구는 잡니마니국 동산 안에 거주

    하면서 사람들에게 문자와 말을 가르쳐 聖敎가 일어나게 하였

    다. 후에 국왕 위지림박와는 성자 문수보살과 비로자나 비구를 위해 우전에 잡니마사를 건립하였다.41)

    40) 玄奘,『大唐西域記』卷12 (『大正藏』卷51, p. 943 中 ~ 下). “昔者此國佛法未被 而阿羅漢自迦濕彌羅國 至此林中宴坐習定 時有見者駭其容服 具以其狀上白於王 王遂躬往

    觀其容止 曰爾何人乎 獨在幽林 羅漢曰 我如來弟子閑居習定 王宜樹福弘讚佛敎 建伽

    藍召僧衆 王曰 如來者 有何德 有何神 而汝鳥棲勤苦奉敎 曰如來慈愍四生誘導三界 或

    顯或隱示生示滅 遵其法者出離生死 迷其敎者羈纏愛網……王苟從其請建僧伽藍 遠近咸

    集法會稱慶 而未有揵稚扣擊召集 王謂羅漢曰 伽藍已成佛在何所 羅漢曰 當至誠 聖鑒

    不遠 王遂禮請 忽見空中佛像下降授王揵稚 因卽誠信弘揚佛敎”.41) W.W.Rochkill, The Life of The Buddha and The Early History of His Order, London,

    1982, pp. 233 ~ 237, 寺本婉雅 譯, 『于闐國佛敎史の硏究』, 國書刊行會, pp. 16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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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세 가지 文獻 모두 佛敎傳來와 동시에 伽藍과 佛像, 塔의 建立이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호탄국 佛敎가 시작되는 시점에 관해서 위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살펴본다. 티베트불전의 『于闐國授記』에 보면 ‘우전 건국 165년 Vijaya

    sambhave 3代왕이 즉위하고 5년째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3代王인 위지림박와는 建國 후 165년이 흐른 시점에 王位에 즉위, 5년 후 佛敎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국시기는 앞서 252년으로 추정, 이에 근거하여 기원전 82년경에 호탄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

    그런데 중국과 서역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점은 前漢

    武帝年間이다.42) 張騫에 의한 서역착공으로 중국과 서역간의 교류가 시작된다. 張騫은 기원전 138년 1차 서역행을 기점으로 기원전 119년의 4차 서역행까지 무려 24년간에 걸쳐 서역각국으로 원정을 나선다. 서역행의 목적은 흉노정벌에 두었지만 이 원정을 통해 漢의 서역경략

    권을 보장키 위해 回廊이 설치되었다. 이후 後漢代에 들어서면서 장군 班超가 鄯善國과 于闐國을 漢나라에 복속시켰다. 그렇다면 前漢時代 원정을 떠났던 張騫은 호탄국에 관해 『漢書』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본다.

    우전국은 왕이 서쪽의 성을 통치하며 장안에서 9,672里(37,976,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가구수는 3,300호, 인구는 19,300명, 병사는 2,400명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제후와 좌우의 장군, …… 옥석이 많이 나며, 서쪽 380里를 가면 皮山이 통한다.43)

    42) 『漢書』卷96 「西域傳」 “西域以孝武時始通”.43) 『漢書』卷96 「西域傳」 “于闐國 王治西城 去長安九千六百七十里 戶三千三百 口萬九

    千三百 勝兵二千四百人 輔國侯 左右將 …… 多玉石 西通가皮山三百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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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가구, 인구, 병사의 수는 張騫의 원정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기원전 138년 ~ 119년에 걸친 사항이라 볼 수 있다. 이후 班超장군은 後漢 明帝 永平 16년(73)에 서역에 파견되었다. 이때 호탄국에 들어간 班超장군과 관련된 기사를 『後漢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于闐王 廣德은 사차국을 공격, 격파하여 남도에서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흉노는 사신을 보내 우전국을 감독, 보호하였다. 반초장군은 이미 서역에 들어와 먼저 우전에 도착했다. 광덕왕은 존경의 뜻을 깊이 나누었다. 또한 그 풍속으로 무당을 믿었다. 무당이 말하길……44)

    班超장군이 호탄국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後漢 明帝 永平 16년, 즉 기원후 73년에 원정을 갔을 당시의 風俗에 관해 언급하면서 佛敎에 관련된 풍속의 묘사는 전혀 찾아볼 수

    가 없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점을 대략 기원후 70년 정도로 잡고 있으며, 실질적인 불교전파를 그 이전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班超가 호탄국에 들어갔을 시점에 중국에서는 이미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탄국의 풍속에 대해 巫俗信仰的인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호탄국불교의 시작은 伽藍, 佛像, 塔 등의 造成과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불교전래설화처럼 기원전 82년경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면 이미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기원후 73년에 특기할 만한 불교적 색채없이 ‘巫俗信仰’이라 기술한 것은 전후사정을 고려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기존의 기원전 82년설에서 100여년 후인 기원후 70여년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45)

    44) 『後漢書』卷47 「班超列傳」 “是時于闐王廣德新攻破莎車 遂雄長南道 而匈奴遣使監護其國 超旣西 先至于闐 廣德禮意甚疏 且其俗信巫 巫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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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약 중국불교에 전래된 시점이 확실치 않다면 기원전 전래

    설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탁실라국의 내용을 살펴보자. 『大唐西域記』에서 탁실라국에 관한 기록 가운데 아쇼카왕과 태자 사이에 일어

    난 일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은 태자 측근 시자들을 책망하고 아래 관속들을 힐문, 혹은 파면하며 혹은 추방하고 좌천시키거나 사형에 처했다. 일에 관계된 모든 호족들은 설산 동북쪽 사막 안으로 이주했다.46)

    위와 같은 기록은 전설에 불과하긴 하지만 내용 자체가 호탄국의 건

    국설화, 불교전래설화의 상황과 매우 관계가 있으며 영국의 Stein경이 탁실라인과 호탄국 사람들간에 그 생김새가 매우 유사하다는 기록을

    남긴 것, 또 탁실라 부근에서 사용하던 카로슈티 문자가 호탄국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됨에 따라 오히려 班超의 기록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호탄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은 기원전 82년설에

    무게를 두고자 한다. 그리고 전래 방법 또한 탁실라의 이주민들이 불교를 직접 갖고 들어왔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그 경로는 탁실라의 이주민들이 카시미르를 통해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호탄국으로 들어왔

    을 것이다. 탁실라와 카시미르는 현재 직선거리로 16.7킬로미터로 반나절이면 왕래가 가능한 곳이다. 더욱이 후에 서술하겠지만, 카시미르국은 제4결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이므로 이주민들이 이동하면서 카시미르국의 승려들과 더불어 호탄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 보여진다.47)

    45) 황문필 역시 그의 논문 「佛敎傳入鄯善與西方文化的輪入問題」에서 이러한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호탄국의 건국 시기를 건국설화에 의거한 시기보다 늦게 잡고

    있다.(『黃文弼歷史考古論集』, 文物出版社, pp. 345 ~ 347).46) 玄奘,『大唐西域記』 (『大正藏』 卷 51 p. 885 中). “王乃責彼輔臣詰諸僚佐 或黜或放

    或遷或死 諸豪世俗 移居雪山東北沙磧之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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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탁실라 및 카시미르 지역의 이주민들이 국가를 성립시키면서

    동시에 불교가 전파되며, 위의 기록과 같이 제 3대 왕 때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오히려 전래시점을 말하는 것보다는 國敎化된 시

    점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호탄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은 기존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