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과학이 담긴 국보(2) - 공주 무녕왕릉 - cheric게 미치도록 설계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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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공업화학 전망, 제19권 제2호, 2016 강 병 희 강사 (고려대학교) 백제 무녕왕릉은 처음 매장된 모습 그대로 발견되어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그 중 12종류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들 출토품들은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실상을 알 수 없었던 백제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전해 준다. 가히 세기적 발굴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무덤 자체는 1983년부터 사적 13호로 관리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왕릉 등 모든 주요 무덤들이 사적으로 분류되고 있는데서 비롯되며, 실제 문화적 가치는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1971년 6월 29일 오후 4시 웅진 백제시대 주요 고분군인 송산리 무덤 중 일제강점기에 벽돌무덤으로 확인된 6호분의 뒤로 경사를 따라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해 지하 배수로를 내던 중, 인부의 삽 끝에 입 구 벽 벽돌이 걸리면서 무녕왕릉이 발견되었다. 고분은 처음 매장된 상태 그대로였으며 봉분 앞을 막은 벽돌 윗부분을 걷어내자 밀폐되었던 내부로부터 하얀 연기가 나왔다고 한다(그림 1). 그림 1. 벽돌을 쌓아 막은 무녕왕릉 입구. 그림 2. 무녕왕릉 입구에서 본 복도의 첫 모습. 왕릉은 송산 남쪽 기슭의 풍화 암반층을 굴착하여 평평하게 깎아낸 뒤 남향으로 조성되었으며, 입구는 벽돌 벽으로 봉쇄 되었고, 터널형 벽돌 무덤 위 봉분은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올렸다. 무녕왕은 3년 뒤에 돌아 간 왕비와 합장되었는데 묘지석에 의하면 왕은 62세, 왕비는 치아 감정결과 30여 세였으며, 각 각 돌아간 후 27개월 후(3년상)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무덤방으로 가는 복도에는 나무 조각이 남아 있어 목제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간 지점에는 벽돌 틈으로 자란 식물 뿌리에 의해 흩트려진 동제 발 과 수저, 6개의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청자 호(청자 육이 호), 왕과 왕비의 지석, 그 위에 놓여 진 한 꾸러미의 오수전(중국 양나라 철전), 무덤을 수호하는 석수가 있었다(그림 2). 또한 왕비의 지석 뒷면 에는 토지 신에게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다는 매지권이 새겨져 있어 도교적인 배경으로 이해되고 있다. 관을 두는 무덤방인 현실에는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를 두었는데 일본산 나무로 만들어져 옻칠을 한 칼럼: 과학이 담긴 국보(2) - 공주 무녕왕릉 http://www.ksie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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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칼럼: 과학이 담긴 국보(2) - 공주 무녕왕릉 - CHERIC게 미치도록 설계되었고, 벽돌 무덤방과 복도는 4개 층은 벽돌을 뉘어 쌓는 길이모쌓기를

78 공업화학 전망, 제19권 제2호, 2016

❙강 병 희 강사 (고려대학교)

백제 무녕왕릉은 처음 매장된 모습 그대로 발견되어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그

중 12종류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들 출토품들은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실상을 알 수

없었던 백제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전해 준다. 가히 세기적 발굴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무덤 자체는

1983년부터 사적 13호로 관리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왕릉 등 모든 주요 무덤들이 사적으로 분류되고

있는데서 비롯되며, 실제 문화적 가치는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1971년 6월 29일 오후 4시 웅진 백제시대 주요 고분군인 송산리 무덤 중 일제강점기에 벽돌무덤으로

확인된 6호분의 뒤로 경사를 따라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해 지하 배수로를 내던 중, 인부의 삽 끝에 입

구 벽 벽돌이 걸리면서 무녕왕릉이 발견되었다. 고분은 처음 매장된 상태 그대로였으며 봉분 앞을 막은

벽돌 윗부분을 걷어내자 밀폐되었던 내부로부터 하얀 연기가 나왔다고 한다(그림 1).

그림 1. 벽돌을 쌓아 막은 무녕왕릉 입구.

그림 2. 무녕왕릉 입구에서 본

복도의 첫 모습.

왕릉은 송산 남쪽 기슭의 풍화 암반층을 굴착하여 평평하게 깎아낸 뒤 남향으로 조성되었으며, 입구는

벽돌 벽으로 봉쇄 되었고, 터널형 벽돌 무덤 위 봉분은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올렸다. 무녕왕은 3년

뒤에 돌아 간 왕비와 합장되었는데 묘지석에 의하면 왕은 62세, 왕비는 치아 감정결과 30여 세였으며, 각

각 돌아간 후 27개월 후(3년상)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무덤방으로 가는 복도에는 나무 조각이 남아 있어

목제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간 지점에는 벽돌 틈으로 자란 식물 뿌리에 의해 흩트려진 동제 발

과 수저, 6개의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청자 호(청자 육이 호), 왕과 왕비의 지석, 그 위에 놓여 진

한 꾸러미의 오수전(중국 양나라 철전), 무덤을 수호하는 석수가 있었다(그림 2). 또한 왕비의 지석 뒷면

에는 토지 신에게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다는 매지권이 새겨져 있어 도교적인 배경으로 이해되고 있다.

관을 두는 무덤방인 현실에는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를 두었는데 일본산 나무로 만들어져 옻칠을 한

칼럼: 과학이 담긴 국보(2) - 공주 무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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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 News, Volume 19, No. 2, 2016

KIC News, Volume 19, No. 2, 2016 79

관은 세월이 지나 무너져 서로 겹쳐 있었으며, 시신은 남쪽인 문을 향해 머리를 두고 안치되었음이 확인

되었다. 이 중 관의 재질은 당시 일본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대변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실 바닥은

앞면 108 cm를 남기고 전체를 21 cm의 높이로 벽돌을 쌓아 관대로 삼았으며, 현실과 복도의 경계로부터

무덤 밖 묘도까지 벽돌로 조성된 배수구가 중앙 바닥 밑을 관통하여 길게 조성되었다(그림 3).

그림 3. 복원된 무녕왕릉 내부 모습.

그림 4. 무녕왕릉 무덤방.

그림 5. 무녕왕릉의 4평1수 식 벽돌 쌓기.

그림 6. 무녕왕릉 아치의 작은모쌓기에 사용된 사다리꼴

전. 두 면이 합쳐야 한 송이의 연꽃이 된다.

둥근 봉분은 중심이 무덤방의 중심보다 5.8 m 위쪽으로 가게 조성하여 쌓인 흙의 압력이 무덤방에 적

게 미치도록 설계되었고, 벽돌 무덤방과 복도는 4개 층은 벽돌을 뉘어 쌓는 길이모쌓기를 하고 그 위로

1개 층을 세워 쌓는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여 쌓았다(그림 4, 5). 이를 4평(平)1수(竪)라고 하는데 동일 시대

중국의 경우는 6평1수, 4평1수, 3평1수가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규모가 작은 경우 길이모쌓기로만 조

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측면에서 작용하는 횡압력 등에 효과적이어서

구조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다.

천장은 조금 뽀족한 아치형으로 쌓았는데 이는 같은 시기 중국 남조의 반원형 아치와는 차이가 있다. 이를

위해 7단, 8단부터는 안쪽 면이 짧고 뒤쪽이 긴 사다리꼴 형태의 전을(그림 6) 3평1수로 쌓았다. 벽돌 사이에

는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발라져 있으며, 특히 천정은 이음새에 석회를 메워 견고하게 축조하였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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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는 위로부터의 하중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구조로 무녕왕릉은 이를 위해 각 위치마다 크기

와 두께가 다른 7종류의 사다리꼴 벽돌들을 설계에 맞추어 구워내어 조성하였다. 이는 수학적 지식과 이

를 응용한 공학적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무덤방 북쪽 벽 1곳과 동, 서벽 각 2곳에는 주위에 붉은 색

을 두른 보주형 감실을 마련하고 중국제 자기 등잔을 두었는데 무덤을 폐쇄한 후 산소가 없어질 때까지

타다가 꺼진 듯 발굴 당시에도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는 무덤방의 유물들에게 유용한 환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상의 여러 무녕왕릉 구성 요소들은 모두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 특히 양나라의 지배층 무덤에

서 찾아 진다.《삼국사기》에서도 당시 양나라와 밀접했던 기록이 있어 웅진 백제시대 새롭게 나타난 전축

무덤은 국제적 교류를 통해 전래된 것임이 확인된다. 기록에는 당시 기술자들과 학자들이 왔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출토품 중 일부가 양나라에서 수입되었거나 그들 기술자들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는 의

견도 있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무녕왕릉의 천장 아치는 약간 뽀족한 모습으로 양나라 무덤들의 반원형 아치와는 다르다. 중국의 경우

벽돌 아치공법은 이미 여러 단계의 발전을 거쳐 한나라 때 완성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모두 반원

형 아치로 조성된다. 또한 무녕왕릉에 설치된 배수로는 관대 보다 낮은 무덤방 바닥과 복도가 만나는 경

계부터 시작되며 바닥 밑으로 조성된 벽돌 구조가 무덤 밖 묘도까지 길게 이어지는데 중국 남조 전축분의

배수로는 무덤방 바닥에 벽돌로 만든 작은 웅덩이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부터 복도를 지나 묘도까지 길게

조성하여 차이를 보인다. 이는 중국 남부지방이 습하기 때문에 마련된 구조라 한다. 어째든 이러한 차이

들은 무녕왕릉이 백제의 기술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새로운 양식의 결과물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문물 교류에서 이러한 실재 적용상의 차이는 원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모방했을 경우,

혹은 완전하게 이해하여 이를 현지에 맞게 적용할 때 일어난다. 무녕왕릉이 발견되기 전인 1956년, 화학

을 전공한 서울대 이태녕 명예교수는 인접한 6호 고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무녕왕릉과 동일한 벽돌무덤

인 고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름철임에도 벽면 등 내부가 건조하게 말라 있었고 복도 중앙에 마련된

배수로는 내부가 차갑고 젖어 있었다고 한다.

별도의 물이 흐른 흔적이 없는데 젖어 있어 의문이 생겼고 이후 실험실을 건조하게 유지할 필요성이 있

어 고민하다 6호 무덤의 배수로에 힌트를 얻어 냉장고의 냉각 판을 노출시켜 두었더니 습기가 그곳에 물

방울로 맺혀 손쉽게 제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녕왕릉 바닥 밑 배수로의 여름철 온도는 낮았을 것이며 무덤 내, 외부의 온도 차가 커져 결로현상이

일어날 경우 이곳에서 먼저 물방울이 되어 적당한 수준까지 습도가 제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송산

리 6호분의 경우 시작점에 둥근 홈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백제는 한성시절에도 움집이 존

재하였다. 오랜 움집 생활 속에서 확보된 제습의 지혜가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 무녕왕릉 출토품들은 백제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여 이룩했던 예술적, 기술적 성취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왕비의 관식(그림 7), 왕의 귀걸이에 달려 있는 하트 모양의 심엽형 장식(그림 8), 벽돌에 표현

된 연화와 인동문(그림 5, 6) 등에는 균형 있고, 부드럽고, 풍요롭고, 우아한 백제의 예술적 감각이 그대

로 드러난다. 귀걸이 등의 각종 장식에 보이는 누금세공 기법과 금실의 발견(그림 9) 등도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입구 복도에 있었던 무덤을 수호하는 일각 뿔의 석수

(돌로 만든 상상의 동물)는 중국 예들에 비해 가장 사랑스럽고 특히 뒷모습은 정겹기만 해(그림 10, 11) 엄

격한 기질의 중국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옛 문화재를 계승한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지식), 선(마음), 미(아름다움)를 오늘에 되살려 보는 것

이다. 근래 송산리 6호분에 둔 제습기가 적정 습도를 유지하지 못해 유물의 손상이 우려된다고 한다. 혹

시대적 변화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그 가치를 상실한 채 잊혀진 오랜 과거의 아날로그적 지혜에서

문제 해결의 계기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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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 News, Volume 19, No. 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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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한 쌍이 발견된

왕비의 관장식 중 하나.

그림 8. 왕의 귀걸이.

그림 9. 금실.

그림 10. 무녕왕릉 출토 일각 석수.

그림 11. 석수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