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인격의 사전편찬학 제요 · 2016-12-07 · - 임진왜란 시 정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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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백과사전편찬실’ 콜로키움 인물·인격의 사전편찬학 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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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회 ‘백과사전편찬실’ 콜로키움

    인물·인격의 사전편찬학 제요

    2016년 11월 25일(금)

    13:30∼17:30

    국은관 1층 회의실

    한국학지식정보센터 백과사전편찬실

  • 목 차

    [논제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항목의 하위 구성 요소와 기술 방법’(이건식, 단국대학교 교수, 국어학)

    [논제 2]

    ‘諡號, 전근대 관료형 인물의 死後 品格’(김동건,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한문학)

    [논제 3]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 요소와 그 모형’(김명화,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고문헌학)

    [논제 4]

    ‘국내 인명사전 편찬의 현황과 전망’(김희연, 한국학대학원 석사과정, 고문헌학)

    [논제 5]

    ‘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 : 관계망 그리기’(전경목, 한국학대학원 교수, 고문헌학)

  • [논제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항목의 하위 구성 요소와 기술방법’

    이건식(단국대학교 교수, 국어학)

  • - 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항목의 하위 구성 요소와 기술 방법에 대하여

    - 임진왜란 시 정토 장군 李薲의 인물 정보를 중심으로-

    이건식(단국대)

    1. 서언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인물 정보 제시의 발전적인 방법을 제안하

    기 위해서 인물 항목이 가질 수 있는 하위 구성 요소의 종류와 기술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자 한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한국 역사 상 매우 중요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인물에 대한 정보의 제공이 매우 미진하여 인물에 대한 해설이 극히 간단한 요

    약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인물 정보 기술에 있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이 가지는 단점을 국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 나라 역사 인물에 대해 풍부하며, 압

    축적이며 객관적 내용을 제공하고 있는 『국조인물고』의 내용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국조인물고』에는 우리 나라의 역사 인물 2,065인에 대한 상세한 전기가 제공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임진왜란 시 정토 장군이었던 李薲의 사례를 들어 『국조인물고』에서 기술된 내용이 이빈 장군에 대하여 풍부하며, 압축적이며, 객관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제

    안하고자 한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록 李薲 장군의 인물 정보 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록 李薲 장군의 인물 정보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간략 정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간략정보]

    • 한자 李薲 •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 유형 인물

    • 시대 조선

    • 성격 무신

    • 성별 남

    • 생년 1537년(중종 32)

    • 몰년 1603년(선조 36)

    • 본관 전주(全州)

    • 관련사건 임진왜란

    • 대표관직(경력) 회령부사|경상좌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

    • 집필자 김진봉

    다음으로 인물에 대한 해설 자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2 -

    (2) 가. [정의] 1537(중종 32)∼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무신.

    나.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원(聞遠). 이효창(李孝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는 이수성(李守盛)이고, 아버지는 서흥부수(瑞興副守) 이춘억(李春億)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첨정 김국량(金國良)의 딸이다.

    다. [내용]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회령부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충주에서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 들어가 임진강을 방어하다가 다시 패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평양을 방어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이원익(李元翼)을 따라 순안(順

    安)에서 싸웠다.1593년(선조 26) 1월에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탈환하자 군

    사를 이끌고 명나라 군대에 종사하였으며, 이일(李鎰)을 대신하여 순변사(巡邊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2월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

    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기자 권율과 함께 파주산성을 수비하였다.

    같은 해 왜군이 진주와 구례지방을 침략할 때 남원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 진주성

    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대죄종군(戴罪從軍)하다가

    1594년 경상도순변사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상부와의 의견대립으로 물러났다가 임

    진왜란이 평정된 뒤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퇴하였다.

    라.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명재유고(明齋遺稿)』, 『국조인물고(國

    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에서 보듯이 ‘정의, 개설, 내용, 참고문헌’ 등의 항목으로 이빈 장군에 대한 인물 정보

    를 제시하고 있다. ‘정의, 참고문헌’ 등은 본격적인 인물 정보 서술 자료가 아니고 주요 특

    징만을 기술한 것이고 ‘개설, 내용’ 등이 본격적인 인물 정보 서술 자료라 할 수 있다.

    (2나)의 ‘개설’ 항목과 (2다)의 ‘내용’ 항목에 서술된 세부 항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가. [개설] : 가계 내력

    나. [내용] : 주요 경력 사항에 대한 편년 기술

    1570년 무과 급제

    1592년 충주에서 신립(申砬)의 휘하로 출전하여 패함.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서 임진강을 방어, 평안도병마절도사로 평양을 방어, 이원익(李元

    翼)을 따라 순안(順安)에서 전투.

    1593년 1월에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군대에 종사. 이일(李鎰)을 대신하

    여 순변사(巡邊使), 2월 권율(權慄)과 함께 파주산성을 수비. 남원 수비.

    당시 진주성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대

    죄종군(戴罪從軍)

    1594년 경상도순변사에 복직

    1595년 상부와의 의견대립으로 퇴직

    임진왜란 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빈 장군에 대해서 (3가)의 ‘가계 내력’과 (3나)의 주요 경력 사항에 대한 편년 기술만으

    로는 조선 정조 때 심진현(沈晉賢)이 왕명에 의해 만든 인물지인 『인물고』에 이빈 장군이

  • - 3 -

    왜란시정토인(倭亂時征討人) 22인의 하나로 수록된 사실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征討의 의미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征伐’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정벌’이란 적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을 말하지만 왜란시정토인(倭亂時征討人)에서의 征討는 왜적과의 싸움에

    서 전공을 세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3)의 내용에서는 이빈 장군의 ‘전공’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인물고』의 내용을 그대로 계승한 『국조인물고』의 왜란시정토인(倭亂時征討

    人) 28인 조에 실려 있으며 윤증(尹拯, 1629~1714)이 작성한 이빈 장군의 행장에는 이빈

    장군이 왜 왜란시정토인(倭亂時征討人)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 임진왜란의 전공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3.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윤증(尹拯)의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 내용 분석

    윤증(尹拯)이 작성한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의 내용의 요점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

    인물정보 기술 항목

    가계

    임진왜란 이전 관직

    왜적 방어 전투

    왜적 추격 전투

    전투 전술

    임금에 대한 충성심

    귀향

    포도대장 사퇴

    자손의 내력

    행장 작성의 내력

    인물 평가

    윤증(尹拯)이 작성한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의 내용에서 ‘왜적 방어 전투’와 ‘왜적

    추격 전투’에 대한 이빈 장군의 전공을 기술한 내용을 보면 왜 이빈 장군이 왜란시정토인

    (倭亂時征討人)의 한 명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윤증(尹拯)이 작성한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는 이빈 장군의 업적에 대한 객관

    적이고 압축적인 기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이기 위해 ‘왜적 방어전투, 왜적

    추겨 전투, 임금에 대한 충성심, 인물 평가’ 등의 내용에 대해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

    狀」의 내용을 소개하고 관련되는 사료를 제시하기로 한다.

    1) 이빈 장군의 왜적 방어 전투

    윤증은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 이빈 장군의 왜적 방어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2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이해 4월에 왜란이

  • - 4 -

    일어났다. 조정이 기복(起復)을 명하여 공에게 경상좌도 병마사(慶尙左道兵馬使)를 제수하

    였는데, 공이 장례를 이유로 사양하자 임금이 형제가 몇 명이냐고 하문하였다. 세 명이라

    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수상(守喪)할 사람은 있구나.” 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운

    구(運柩)를 하도록 하고 공에게는 부임을 독촉하였다. 공이 필마(匹馬)로 충주(忠州)에 도

    착하여 신립(申砬)의 달천(㺚川) 진영에 들어갔다가 신립이 패전하자 다시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의 군영으로 달려가서 임진(臨津)을 지켰다. 임진이 붕괴하자 서

    쪽으로 행재소(行在所)로 들어갔는데 평안도 병마사에 임명되어 평양을 지켰고, 평양이

    함락되자 관찰사 이원익(李元翼)을 따라가 군대를 순안(順安)에 주둔시켜 놓고 평양에 머

    무르고 있는 적병과 서로 버티었다.

    이빈 장군이 북상하는 왜적을 방어한 전투는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전투 지역별로 중요한 것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료 1] 이에 앞서 이양원(李陽元)은 이일(李鎰)·신각(申恪)·김우고(金友皐) 등과 함께 대탄

    (大灘)에 있었고 한응인(韓應寅)과 김명원(金命元)은 권징(權徵)·신길(申硈)·이빈(李薲)·이천(李薦)·유극량(劉克良)·변기(邊璣) 등과 함께 임진(臨津)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싸우

    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서료 2]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연광정(練光亭) 건너편의 동원(東院)을 밤에 공격한

    일은, (중략) 이원익(李元翼)·이빈(李薲)에게도 약간의 은전(恩典)을 내려 권장하는 뜻을 보임이 타당할 듯합니다.”

    [사료 3] ‘사 유격의 군마가 패하여 돌아올 적에 조 총병이 서문(西門)에 결진(結陣)하고

    있다가 이빈(李薲)의 군마가 적군과 함께 대화를 하는 듯한 것을 바라보았으며 적군도 차츰 퇴각하였다. 총병은 생각하기를, 저들이 이미 적과 마음을 같이하니 일을 해낼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퇴병(退兵)했다. 왜적이 뒤에서 추격하자 이빈이 추격하여 적

    수십여 명을 죽이니 적은 드디어 성으로 퇴각하여 들어갔다. 총병의 말은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사료 4] 근자에 원래 평양에 있던 적이 모두 서쪽으로 나와 순안현(順安縣)에서 10리 되

    는 곳까지 핍박해 왔기에 절도사 이빈(李薲)이 극력 차단하여 막았습니다.

    [사료 5] 병사(兵使) 이빈(李薲)의 군사는 모두 순안에 집결시키고 신이 진을 치도록 명하고서 진중에 들어가 위로하고 성지(聖旨)를 개유하였습니다. 군사와 전마(戰馬)를 보니

    퍽 정예스럽고 강하였습니다. 신이 이빈에게 ‘전사(戰士) 가운데 죽은 자가 얼마나 되

    는가?’ 하고 묻자 ‘처음부터 지금까지 죽거나 도망하여 줄어든 수가 기천 명이다.’고 하

    였습니다.

    [사료 6] 이빈은 아뢰기를, “군사가 비록 적으나 처음 적을 만나 궤멸할 때와는 같지 않고

    여러 장수들 역시 죽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사료 7] 신이 이빈과 함께 행재(行在)로 왔는데 이빈이 무인으로서 도망하지 않은 것을

  • - 5 -

    훌륭히 생각하고 병사(兵使)로 삼기를 청했었습니다. 그 후에 조 총병(祖摠兵)이 말하

    기를. ‘그대 나라 장관(將官)이 후면을 맡아주었기 때문에 아군이 사상자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였는데 이른바 ‘그대 나라 장관’이란 바로 이빈입니다.” (중략) 이빈이 아

    뢰기를, “3현(三縣)에 14개 진(陣)이 있는데 강동(江東)ㆍ순안(順安)에는 모든 보루(保壘)를 쌓아 막고 있으니, 지금은 전일에 적에게 궤멸되어 흩어지던 때와는 다릅니다.

    만약 평양을 잃으면 다시 차지하기가 어려울 듯하므로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사료 1]은 이빈 장군이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 들어가 북상하는 왜적을 임진강에서 막아내고자 한 것이다. [사료 2]에 나오는 연광정(練光亭)은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 가에 있는 누각(樓閣)을 말한다. 따라서 [사료 2]는 이빈 장군이 평양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사료 3]도 평양에서의 방어 전투를 말한 사료이다. [사료 4], [사료 5], [사료 7] 등은 평안도 강동(江東)과 순안(順安)에서 이빈 장군이 왜적을 방어해을 말해 주는 사료이다.한편 [사료 6]과 [사료 7]은 왜적과의 싸움에 대한 이빈 장군의 자신감믈 말해 주는 것이다. 즉 임진왜란 개전 초기와 다르게 이제는 왜적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음을 이빈 장군은 언급

    하고 있다.

    2) 이빈 장군의 왜적 추격 전투

    윤증은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 이빈 장군의 왜적 추격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명장(明將)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수복하자 공은 군대를 이끌고 종군하였

    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정월에 이일(李溢)을 대신하여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파주(坡州)까지 내려왔다가 명군(明軍)이 조금 불리하여 제

    독이 퇴군하려 하자 공이 유성룡(柳成龍) 등과 퇴각하지 말고 세를 보아 가며 다시 진군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제독은 듣지 않았고 총병(總兵) 장세작(張世爵)은 발로 공을 차기까

    지 하였다. 이에 공이 권율(權慄)과 함께 군대를 연합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켰다.

    이윽고 적병이 경성(京城)을 버리고 도망치자 공이 상주(尙州)까지 추격하여 싸워서 격퇴

    하였다. 드디어 경상 우도와 전라 좌도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크고 작은 수십여 합의 싸

    움에서 누차에 걸쳐 적병을 물리치고 다시 의령(宜寧)에 주둔하여 장사(將士)를 훈련시키

    고 항복하였거나 귀부한 자들을 안무하여 영남 지방의 보장(保障)으로 삼으니 관군과 의

    병들이 모두 귀속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12월 28일 조의 기사를 보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평양을

    탈한하기 위하여 평양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이 때부터 이빈 장군은 제독 접반사로 왜적을

    몰아내는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 왜적을 몰아내기 위한 이빈 장군의 전투는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전투 지역별로 중요한 것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이빈 장군이 평양을 탈환할 때의 전공과 관련된 사료는 다음과 같다.

  • - 6 -

    [사료 8] 병조 판서 이항복, 동지 이빈이 명을 받들고 제독을 지송(祗送)하러 교외에 나갔

    다. 제독이 묻자, 통사(通事) 등이 고하기를, “국왕이 병조 판서와 수성 대장(守城大將)

    으로 하여금 교외(郊外)에 전송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사료 9] “평양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들이 진흙 수렁에 빠졌는데, 이빈(李薲)의 군사가 활을 쏘기만 하면 모두 적중되므로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명나

    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기교로 어떻게 적을 여기에까지 오게 하였는가?’ 하였다

    [사료 8]은 이빈 장군이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맞이하러 간 사료이다. [사료 9]는 평양의 탈환 전투에서 이빈 장군의 부대가 백발백중의 활솜씨로 왜적을 격퇴하고 명군을 구출한 전공의 사료이다.평양을 탈환한 명나라 군대는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남하하다가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던 역관)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였다. 이에 명나라군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물게 하고, 조선의 제장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할 것을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회군하였다. 이 때 이빈 장군은 명나라 군의 회군을 만류하는 데에 앞장 섰다.

    [사료 10] 절도사(節度使) 이빈(李薲)이 바로 그들 앞에서 꿇어 엎드려 청하였으나 장수 이하가 모두 물리쳤고, 그 중에서 총병(摠兵) 장세작(張世爵)이 더욱 물러나 주둔해야 한

    다는 설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얼굴과 어조에 노기까지 띠면서 속히 물러가라고 했습니

    다. 그러나 제독은 온화한 말로 깨우치기를 되풀이하여 마지않으므로 신들은 부득이

    도로 물러났는데, 이날 즉시 행군하여 동파로 물러나 머물렀습니다.”

    [사료 11] 13일 새벽이 이빈이 또 치보하기를, ‘본진 소속의 군인이 권율의 진으로부터 와

    서 하는 말이 「왜적이 3위(衛)로 나누어 나오는데 각각 홍·백·적색의 3색기를 가졌고 포위하여 접전한 지 한참 만에 3위가 모두 아군에 패배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고 결

    국에는 도망갔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사료 11]은 이빈 장군이 행주대첩 전투에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1593년(선조 26) 2월 12일 행주대첩의 승리 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이빈 장군은 파주산성에 웅거하였다.

    [사료 12] 신은 재차 권율을 독려하여 돌아가 행주 산성을 지키게 하고 싶었으나 목책과

    영루(營壘)가 이미 모두 타버려 군사들이 웅거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임시로 파주

    뒷산에 머물러 이빈(李薲)ㆍ고언백(高彦伯) 등과 고기 비늘처럼 진을 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진(臨津) 이남 지역을 굳게 지키는 한편 기회를 보아 경성의 동서를 습격

  • - 7 -

    하여 공취할 계획입니다.

    서울에 집결한 왜적은 1593년(선조 26) 4월 18일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이때 조선군은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섬멸하고자 했으나 이를 명나라 군대가 막게 된다. 이빈 장군 역시 왜군을 추격할 수 없게 된다.

    [사료 13] 밤 삼경에 야불수(夜不收) 2인이 전라 감사 권율을 압송하여 제독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강을 건너간 뜻을 따져 물었습니다. 또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 등이 급히 보고한 바에 의하면 중국군이 강변에 늘

    어서서 군사를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빈의 중위 선봉장(中衛先鋒將)인 변양준(邊良

    俊)을 목에 칼을 씌워 끌고 갔기 때문에 상처가 심해 피까지 토했다고 했으며 이빈 역

    시 강가에 억류시켜 떠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빈 장군은 왜적을 부산 방향으로 추격한다.

    [사료 14] 다만 근일 동쪽 변방의 비보(飛報)를 살펴보면, 이빈(李薲) 등 여러 장수들은 모두 사잇길을 따라 곧바로 부산(釜山)으로 나아가서 중국군의 뒤에 있지 않고, 권율(權

    慄)·선거이(宣居怡)·이복남(李福男) 등은 아직 경계를 넘지 못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

    등이 이끄는 주사(舟師)는 먼 해항(海港)에 있어 모두들 중국군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

    문에 서로 합세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합니다. 또 김명원(金命元)의 장계를 보건대, 선거

    이는 벌써 영남으로 들어갔고 이빈 등의 여러 장수들도 계속 적을 참획(斬獲)하는 성

    과를 올리고 올리고 있다 합니다.

    [사료 14]]는은 이빈 장군이 왜적을 추격하면서 왜적을 격퇴한 전공을 말해 주고 있다. 윤증의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는 상주에서 왜군을 격퇴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593년(선조 26) 6월 22일 왜군은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여 호남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때 명나라군, 권율, 곽재우 등은 적은 수로 10만의 대군을 맞서 싸우는 건 무리라며 성을 비우는 전략을 주장했으며 이빈 장군도 이에 동조하였다. 윤증의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 따르면 이빈 장군은 “이윽고 진주성(晉州城)이 함

    락되자 공이 성을 지키지 못한 죄로 장계(狀啓)를 올려 처벌을 기다렸다”고 한다. 윤증의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는 지난번 패전의 죄로 이빈 장군의 가자(加資)가 삭감되

    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제2차 진주성 전투 패전 이후에도 이빈 장군은 경상도 지역에서

    계속 왜군을 격퇴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진주성을 점령한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이빈 장군이 격퇴한 기록들이다.

    [사료 15] 그러나 모든 구획(區劃)과 분부를 지극히 세밀히 한 뒤에야 일을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제장(諸將)들이 대부분 진주성(晉州城) 안에 있고, 이빈(李薲)·고언백(高彦伯)·곽재우(郭再祐) 등도 삼가(三嘉)에 있으면서 진주를 외원(外援)하고 있습니다.

  • - 8 -

    조실록 1593년(선조 26) 7월 11일

    [사료 16]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은 운봉 팔량치(八良峙)에서 지키고 있으며,

    [사료 17] 남방의 적세(賊勢)는 적이 처음 남원(南原) 경내 성현(星峴)에 이르렀을 적에 순

    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 왜적의 선봉과 접전하여 여러 급(級)을 베고 다수를 쏘아 맞히자 적이 후퇴하여 대진(大陣)으로 들어갔으므로 아군도 퇴군하여 돌아왔다.

    [사료 18] 남원(南原)에는 사 총병(査總兵)·낙 참장(駱參將)이 이빈(李薲)과 더불어 들어가서 지켰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흩어졌으므로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이

    직접 문부(文簿)를 들고서 겨우 지공(支供)하였습니다.

    [사료 19] 서북(西北)에 있는 본국의 제장(諸將) 즉 이빈(李薲)·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선거이(宣居怡) 등도 또한 범이 산에 있는 위엄을 빙자할 수 있어서 영잔(零殘)한

    군졸을 거두어 의령(宜寧)·울산·경주 사이에서 나누어 막으면서 날마다 혈전(血戰)하고

    있는데 형세는 이미 위축되었습니다.

    [사료 20] 의령(宜寧)의 군대는 전에 함안(咸安)에서 승전한 공이 있었습니다. 경주의 군대

    는 이미 이시언(李時彦)이 가서 위무하였는데 이제 또 권협이 위무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빈(李薲)의 제진(諸陣)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는다면 군정이 서운해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함안에서 승전한 군공에 대해서도 아울러 마련하여 권협으로 하여금 그 군대

    를 두루 순시하고 모두 같이 위무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사료 21] 경상도 순변사 이빈(李薲)이 치계하였다. (중략) 신은 전라 병사 이시언(李時言)과 직접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 등의 지역에 복병하여 변에 대비하고 있습니

    다.”

    [사료 15]는 이빈 장군이 삼가(三嘉)를 지키고 있었고 [사료 16]는 이빈 장군이 운봉 팔량치(八良峙)에서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사료 17]과 [사료 18]은 이빈 장군이 남원(南原)에서 왜군을 격퇴하였고, [사료 19]와 [사료 20]은 이빈 장군이 의령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고, [사료 21]은 이빈 함안에서 왜군을 방어하고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3) 이빈 장군의 전투 전술

    윤증은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 이빈 장군이 구사한 전투 전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악하고 있다.

    공은 군사를 지휘함에 신중을 기하는 데 힘쓰고 대개 복병을 매복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

    었으며, 전공을 세우고서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명장(明將) 및 제장(諸將)에게 돌렸다.

  • - 9 -

    이빈 장군의 복병 전술은 다음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사료 22] 신잡은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을 만났더니, 빈이 신의 아우인 신립(申砬)·신길(申硈)이 패배한 것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많은 수의 군사를 나누어 험조(險阻)한 곳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적을 덮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빈 장군의 휘하의 군사를 잘 지휘했음은 다음 사료로 확인된다.

    [사료 23] 한명련(韓明連)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권희인(權希仁)도 잘 싸운 사람인데

    적탄을 맞아 죽었고, 이빈(李薲)의 군사 90여 인이 전투에 익숙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료 24] 병조 판서 이덕형이 아뢰기를, “출신(出身)한 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간 자는 모

    두 이빈(李薲)을 싫어하는데 이것은 필시 이빈이 사졸을 애휼(愛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료 25]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 이빈(李薲)의 첩정(牒呈)에 의하면, 해진(該陣)에 소속된 평안도 군인 훈련 정(訓鍊正) 김운성(金雲成) 등 60인이 연명으로 정장(呈狀)하

    기를 ‘집을 떠나 천리길을 와서 3년을 고생하며 수자리를 살고 있으니 부모를 생각하

    고 처자를 그리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

    고 있다.

    이빈 장군이 통솔력이 없다면 [사료 23]에서 말하는 전투에 능한 90여인이 있을 수 없다.

    이빈 장군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전투에서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

    24]에서는 이빈 장군이 휘하 군사를 애휼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는 이빈 장군이 거느린

    군사가 평안도 병사임을 간과한 것이다. [사료 25]는 이빈 휘하의 군사들이 평안도 병사임

    을 말하여 주고 있다. [사료 24]는 수년 동안 고향을 떠나 남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평안도

    병사를 이빈 장군이 잘 통솔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이빈 장군의 임금에 대한 충성심

    윤증은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 이빈 장군의 충성심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빈이 질병을 무릅쓰고 적을 토벌하여 많은 수급(首級)을 거둔 일

    은 매우 가상하다. 다만 지난번 패전의 죄로 삭감된 가자(加資)는 서둘러 다시 제수하기

    는 어렵다. 다시 격려하여 뒷날의 전공을 지켜보도록 하라.” 하였다. (중략) 또 하교하기

    를, “적과 대립한 지가 벌써 3년이나 되어 군사들의 심리는 안이한 생각에 젖을 수 있고

  • - 10 -

    백성들의 생각도 해이해질 수 있다. 경(卿)이 돌아다니며 여러 군대를 효유(曉諭)하여 기

    필코 적을 섬멸하라.” 하였다. 이에 공이 장계를 올려, “이 적이야말로 이른바 만세를 두

    고 잊을 수 없는 적입니다. 가령 그의 살을 씹어 먹고 가죽을 깔고 잠을 잔다 하여도 속

    이 시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왕족으로 태어나서 과분하게도 막중한 부탁을

    받은 이상 마땅히 신명을 다 바칠 뿐입니다.” 하였다.

    언젠가 보검(寶劍) 하나를 얻은 일이 있었는데, 당시 많은 대신이 이를 가지고자 하는 것

    을 공이 들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장수의 신분이오. 어떻게 보검을 가지고 권귀

    (權貴)에게 아첨할 수 있겠소?” 하고, 임금에게 바치고 말았다.

    5) 이빈 장군에 대한 인물 평가

    서인이었던 윤두수(尹斗壽)는 이빈 장군을 폄하하는 발언을 선조 임금께 자주 드린다. 이러

    한 내용은 『선조실록』에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이빈 장군이 동인이었던 유성룡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윤증은 「巡邊使贈兵曹判書李公行狀」에서 이빈 장군에 대한 이항복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평하기를 “난리 후 여러 장수중에 신하의 의리를 잃지 않은 이는 오

    직 이빈공 뿐이다.”라 하였다. 원종(原從)에 녹훈되었고 정헌 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다만 백사(白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공을 잘 알아 일찍이

    당시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말하기를, ‘난후(亂後) 여러 장수 중에서 오직 이 아무개가 신

    하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고, 또 공이 세상을 마쳤을 때 만시(輓詩)를 지어 애

    도하기를,

    ‘기성(箕城)에서 떠돌던 그 장수 , 寥落箕城將

    하늘의 뜻으로 드러누운 지 오래네 . 冥機臥十秋

    패위를 만나 시름에 잠겼고, 醉愁逢覇尉

    가난하여도 오구는 팔아먹지 않았네. 貧不賣吳鉤

    대수에 부는 바람 쓸쓸하고, 大樹風蕭瑟

    운대의 잘못된 일 끝이 없네. 雲臺事謬悠

    황천에 간 이 기술할 사람조차 없으나, 無人記黃壤

    수많은 장교들 모두에게 벼슬이 내려졌네.’ 列校盡封侯

    이항복은(李恒福)은 또 『백사선생별집(白沙先生別集)』 권3에 실린 「경자군공등제의(庚子

    軍功等第議)」에서 이빈 장군의 전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사료 26] 변란 초기에 영남(嶺南)의 장수로는 다만 박진(朴晉) 한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

    므로, 도내(道內)의 모든 군공(軍功) 있는 자들이 모두 박진에게 수급을 바쳐서 전계

    (轉啓)하게 하였기 때문에 박진의 서장(書狀)에 기록된 수급이 가장 많았고, 서방(西

    方)의 건장한 군졸들은 모두 이빈(李薲)에게 소속되어 순안(順安)에 진(陣)을 치고 조석으로 대전(對戰)하였으므로, 이빈의 서장에 기록된 수급이 가장 많았습니다. 이러한

    유(類)는 박진과 이빈뿐만이 아니라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데 박진과 이

  • - 11 -

    빈에게 그침은 올바르지 않고 지금은 어찌하여 이 사람들에게는 유독 관하 사람이 참

    획한 수급에 대한 포상이 없고, 그 당시에는 전혀 소문도 없던 사람들이 분잡하게 일

    어난단 말입니까. 이것이 곧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한 가지 단서입니다. /變初嶺南之

    將 只有一朴晉 凡道內軍功者 皆獻級於晉 使之轉啓 故朴晉書狀所錄首級㝡多 西方健卒 皆屬於李薲 而陣於順安 朝夕對戰 李薲書狀所錄首級㝡多 若此類 難可悉數 非止晉薲 而今何此人等 獨無管下所斬之賞 而其時蔑蔑無聞者 紛然而興耶 此可證一端也

    [사료 26]은 이빈 장군과 박진 장군의 휘하 군사들이 전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에

    따른 포상을 받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빈 장군이 전공을 세웠음에도 정권의

    실세가 아니라 부하들에게 전공이 돌아가지 못했음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4. 결언.

    생략함.

    생략함.

  • [논제 2]

    ‘諡號, 전근대 관료형 인물의 死後 品格’

    김동건(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한문학)

  • - 1 -

    諡號, 전근대 관료형 인물의 死後 品格

    김동건1)

    1. 머리말

    諡號는 해당 인물이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나라에서 추증한 이름으로 공적인 인

    물 품평의 기준이었다. 시호는 중국에서부터 시행되었으며 堯, 舜, 禹와 같은 전설적인 임금

    의 이름도 시호로 여겨진다. 諡法의 제도가 완비된 것은 周나라 때로 보이며, 이후 진시황

    의 명에 따라 일시 폐지하였다가 漢나라 때에 다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법흥왕 1년(514)에 先王이 죽자 智證이라는 시호를 올린 것이 시초

    가 되며 한말까지 계속되었다.2)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2품 이상의 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를 주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提學이나 儒賢, 節臣 등에게는 정2품이

    못되어도 시호를 주었다. 관직에 있지 않았던 金時習이 ‘淸簡’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 그

    사례이다.

    조선의 諡法은 중국고대의 「周公諡法」, 「春秋諡法」, 蔡邕의 「帝諡」, 蘇洵의 「諡法」을 따른다. 시호에 사용된 글자는 300여자에 이르는데 글자마다 나름의 뜻이 담겨 있어 생전의 행

    적에 알맞은 글자를 조합하여 만들고, 시호아래 公자를 붙여 불렀다. 조선과 같은 崇文主義

    사회에서 文자를 부여받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으며 이외에도 貞, 恭, 襄, 靖 자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관에게는 忠, 武, 義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증거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 자

    체가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나, 문제는 좋지 않은 시호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시호를 받느냐는 문제는 그 자손과 일족의 명예와도 관계되었기에 시호의 글자를 둘러싸고

    시비와 논란이 많았으며, 뒷날에 이르러 시호를 고쳐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일도 자주 일어

    났다.

    조선시대 증시 행정은 諡狀의 작성에서 연시․사시연에 이르기까지, 까다로운 절차를 공정하게 운영하였다. 예조 → 봉상시 → 예조 → 이조 → 의정부를 거쳐 왕의 재가를 받는 과정

    도 치밀하였으며, 홍문관과 봉상시의 합시 과정은 행정의 공정성을 위한 합리적인 절차였

    다. 봉상시를 두어 시호 사무를 주관하게 하되 독단을 막기 위해 홍문관과의 합의 체제를

    유지하게 했고, 비록 왕의 재가가 있어도 서경을 거쳐야만 공식적인 시호로 확정될 수 있었

    다.3)

    1. 유가족이 行狀을 작성

    1) 백과사전편찬실 연구보조원

    2) 1910년 순종 3년 8월 26일 세 번째 기사, “이간 등 57명에게 시호를 주고 이총 등 3명의 시호를 고쳐주다”

    3) 김학수,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증시(贈諡) 행정, 고문서연구23, 2003.

  • - 2 -

    2. 행장을 바탕으로 諡狀을 작성하여 禮曹에 제출

    3. 예조에서 諡狀을 검토하여 奉常寺로 이관

    4. 봉상시에서 시장을 弘文館에 이송하면, 홍문관에서 동벽 이하의 관원 3원이 모여 3망을 의논

    5. 홍문관의 동벽 1원이 봉상시정 이하 여러 관원과 합좌하여 3망을 결정

    6. 3望을 의정부 사인, 검상 중 1원이 서경하여 시장과 함께 이조에 보고

    7. 예조에서 이조로 행정을 이관하면, 이조에서 다시 관련문서를 첨부하여 의정부로 행정 이관

    8. 의정부에서 상주하여 왕의 재가를 받음

    9. 사헌부, 사간원에서 시호를 서경

    10. 선시 및 연시

    이처럼 시호의 부여에 있어 복잡한 절차를 거친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기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시호를 정하는 방법인 諡法과 시호의 의미에 대한 관심은

    전통 중국 사회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다. 沈約 諡法, 賀琛 新諡法, 王彥威 續古今諡法, 蘇洵 諡法, 王圻 諡法通考, 劉長華 漢晉迄明諡彙考 등의 자료는 전통 중국 사회에서의 시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현대에 와서도 시호에 대한 관

    심과 연구는 지속되었고 이는 王受寬의 諡法硏究를 통해서 정리된 바 있다. 시호에 대한 연구는 시호 제도의 기원과 원리, 자격과 대상 등을 밝히는 데 주안을 두어

    진행되었다.4) 그러나 시호에 자체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며 그에

    따른 시호의 의미 분류와 분석 역시 시도된 사례가 없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태조에서

    연산군까지 시호가 부여된 인물 513명의 시호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 관료형 인물

    의 사후 품격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5)

    2. 시호와 卒記의 상보관계

    시호는 졸기와 관계가 깊다. 卒은 일반적으로 大夫의 죽음을 뜻하며6)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卒記는 관리의 喪事에 대한 왕의 處事와 그러한 處事가 합당한지의 여부를 따지는 구

    조가 내재되어 있다. 관리로서의 능력은 三品[賢/能/非才]으로 구분하였으며, 관료로서의 인

    격은 淸-濁으로 논의 되었다. 졸기는 조정에서의 처신, 인간관계, 청렴함, 업무능력, 동시대

    인물에 의한 평가, 이에 대한 사신의 종합적인 논평 등이 어울어져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왕실 중심의 서술 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에 의한 곡필의

    문제는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기는 인격요소에 대한 직접적인 언

    급을 통해 인물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이는 여타 인물 품평과 관련된 기록에 비해 졸기의

    특수성을 부각시킨다.8)

    졸기의 서술체계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卒-家系-行績-諡號-評決(史臣曰)-子孫’의 패턴을

    이루고 있다.9) 또한 졸기의 서술 형태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일화 삽입형, 일대기적 구

    4) 유상근, 「李朝時代의 贈諡制度」, 상은 조용욱박사 송수기념논총, 1971; 신용호, 「선현들의 시호연구」, 공주사대논문집, 1989; 박홍갑, 「조선시대의 시호제도(諡號制度)」, 『한국 중세 사회의 제문제: 김윤곤 교수 정년 기념 논총』, 한국중세사학회, 2001;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 문학동네, 2010.

    5) 이후 시기를 확대하여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6) 禮記 曲禮 下,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7) 신현규, 「조선왕조실록 열전 형식의 졸기 시고」, 어문론집 27집, 1999.8) 評決(史臣曰)은 전체 졸기에서 20% 정도가 기술되어 있다. (신현규, 1999, 24쪽.)

  • - 3 -

    성형, 타인 평가형의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10) 위의 서술체계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격요소들을 정리한다면 아래에 제시한 마인드맵과 같다. 인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

    에서 졸기에 포함된 인격요소는 해당 인물의 인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졸기와 시호는 해당 인물의 행실을 바탕으로 그 실제적인 덕을 밝혀 후세에 경계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시호는 단 두 글자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표현에 있어

    제한이 있다. 따라서 인물에 대한 진실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시호뿐만 아니라 졸기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시호를 ‘忠景’이라 하였는데, 자신을 위태하게 하면서 윗사람을 받든 것이 忠이고, 義에서 행하면

    서 일을 이루는 것이 景이다.

    ‘丁悼’라고 贈諡하니,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한 것을 丁이라 하고, 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悼라 한다.

    졸기에서 贈諡의 부분은 대부분 위의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두 글자의 시호를 적시하고 각

    글자에 해당되는 시호주를 통해 부연설명을 하게 된다. 시호만 적시하고 시호주에 대한 설

    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南在(1351~1419)나 李永垠(1434~1471)은 졸기와 함께 각각 忠

    景, 丁悼라는 시호를 부여받았다. 또한 시호에 따른 諡號註를 통해 시호를 내린 이유를 설

    명하고 있다. 남재는 자신을 위태하게 하면서 윗사람을 받든 사람이기 때문에[危身奉上] 忠

    이고, 의로 말이암하 행하며 일을 이루었기에[由義而濟] 景이라고 하였다. 이영은은 사실을

    진술하되 능히 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述事不第] 丁이고, 중년에 일찍 죽었기에[中年早

    夭] 悼라고 하였다. 諡號註는 인물에 따라 적절하게 부여되는데 시호로 부여되는 글자가 같

    더라도 시호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 시호주를 통해 보면, 丁은 부

    정적인 의미를 가진 시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졸기의 내용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개국 공신이 되자, 세도를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탈취하였다. ○ 무인년에 辨定都監 提調가

    9) 신현규, 『朝鮮王朝實錄』 列傳 형식의 卒記 試考, 어문론집 27, 1999.

    10) 이은미, 「‘卒記’의 敍述法을 활용한 글쓰기 교육의 可能性 探索」, 어문연구 43, 2015.

  • - 4 -

    되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재를 고소한 일이 있는데, 재가 성을 내어 딴 일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핍박하니, 그 사람은 분해서 죽었다. 그 까닭에 만년에는 재산이 제법 부유하였다. ○

    또 그 아우 南實과 살림을 다투어서 종신토록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남실은 아침 밥을 겨우 먹는

    데도 구휼하지 않았다.

    ○ 성품이 본래 貪墨하여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뇌물 받기를 만족함이 없게 하였다. 일찍이 鞋匠

    에게 가죽을 주고 신[鞋]을 만들게 하여 값 얼마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값을 깎고 만들기를 매

    우 엄하게 독촉하여 조금 더디면 문득 가두었다. 그 獄事를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음이 많았다.

    ○ 예조 판서 金謙光과 더불어 妾을 가지고 다투다가 司憲府에 고소하니,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義禁府에 옮겨서 鞫問하자, 이영은이 憤이 발하여 卒하니 당시의 평론이 더럽게

    여겼다.

    남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운 인물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성군에

    봉해졌다. 후에 경상도도관찰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시호도 忠景으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졸기에서는 남의 노비를 탈취하고, 자신을 고소한 자를 핍박하여 죽

    게 하고, 재산에 집착하였으며, 아우와 화목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영은은 세조, 성종 때 의 문신으로 동부승지·좌부승지, 병조, 형조 참판을 거쳐, 성종 때

    순성좌리 공신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洪應·金守溫 등과 함께 明皇誡鑑歌詞를 번역하였고,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여 戶典을 考閱하였으며, 세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丁悼라는 부정적 시호를 받았

    다. 인물의 업적에 비해서 잘못이 클 경우 잘못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졸기에서는 첩을 가

    지고 다투다가 패하자 자신의 분을 못 이겨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를 여과 없이 나타내고 있

    다. 이영은의 사건은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일을 무마하기 위해 임금에

    게 거짓을 고하기까지 하였는데, 조사한 결과 첩이 되었던 그 여인이 자색은 없고 재산이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들이 결국 재산을 다투었던 것으로 결론났기 때문이다.11)

    남재의 경우 부정적인 졸기의 논평에도 불구하고 시호에서는 그 잘못을 덮어주어 忠景이라

    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영은은 졸기의 논평에서도 그의 황당한 죽음을 언급하였고 시

    호 역시 惡諡에 해당하는 丁悼를 받았다. 업적이 그 잘못을 덮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

    다. 이는 論語에서 孔文子 같은 인물이 왜 ‘文’이라는 시호로 불리게 되었느냐는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공문자는 노나라 애공 원년인 기원전 494년 제나라와 노나라의 연합군을 도와 唐晉을 공

    격하여 范氏와 中行氏를 구해내기도 했고 영공이 죽자 영공의 손자인 蒯聵의 아들 輒을 세

    워 노나라의 정경으로서 정사를 주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상위 귀족인 太叔

    疾의 본처를 내쫓게 하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짓을 저질렀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로 인하여 太叔 疾이 원래 아내의 여동생과 부정을 저지르자, 공문자는 다시 질과 자신의

    딸을 이혼시키고 그 딸을 질의 동생과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문자는 질을 공

    격하기 위해 군사를 준비해놓고 공자에게 상의하러 가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인물에 대한

    어두운 문제가 있더라도 ‘文’이라는 시호를 주었던 것은, 공문자가 ‘민첩하면서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12)이었다. 곧 인물의 장점이

    11) 성종실록 권12, 성종 2년 윤9월 2일 신축 2번째 기사.12) 論語, 「公冶長」,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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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점을 덮을 수 있다면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시호를 부여하는 것이 시법의 원칙

    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호는 반드시 졸기와 함께 고려해야 인물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시호가 해당 인물의 품격을 진실하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 인물의 단

    점보다는 장점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후세에 경계를 드리운다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어 보인다. 특히 조선에서는 惡諡를 많이 부여하여 경계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였다. 시호

    는 당대 인물들 누구나 수긍할 만한 人格美의 典型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전형들은 조선시대 관료들이 살아가고자하는, 혹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 목표

    중 하나였다. 시호의 가치는 그러한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 시호의 현황과 그 분석

    (가) “시호라는 것은 평생의 업적에 대한 得失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 벼슬을 除授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13)

    (나) “宰相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그 威勢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니, 그 몸이 죽어 시

    호를 의논하게 된 뒤에야 그 사람됨을 안다. 幽 혹은 厲라고 이름 지으면 孝子·子孫일지라도 百

    世토록 고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죽은 뒤에 아무 公이라 칭하여 그 무덤에 제사한 것을 어

    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그 청을 들어주면 뒤에도 이것을 본떠서 고치려는 자가 있을 것인데, 어

    떻게 낱낱이 들어주겠는가? 임금에게는 私가 없어야 하니, 그 아들은 괴롭더라도 나는 고칠 수

    없다.”14)

    (가)는 시호가 한 인물에 대한 평생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므로 벼슬을 제수하

    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시호를 중요시한 세종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

    다. (나)는 김극유가 아버지 金國光(1415∼1480)이 받은 시호를 바꾸어 달라며 올린 상소

    문에 대한 성종의 傳敎다. 성종은 비록 나쁜 시호를 받았더라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하였다.

    김국광은 丁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였고,[述義不克],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였다.[恭己鮮言]는 의미를 가진다. 김국광은 우의정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

    고 부정적인 평을 받았는데, 김극유는 여러 차례 시호를 고쳐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호의 글자 수는 시대가 지나오면서 점점 늘어났다. 周禮의 시법에는 28자였던 것이 史記의 시법에는 194자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1438년(세종 20)까지 이 194자를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奉常寺에서는 글자의 부족으로 시호를 의논하는 데 있어 사실과 맞게 하기

    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임금에게 증보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자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儀禮, 經傳通解續, 文獻通考등을 참고하여 새로 107자를 추가하여 시법으로 사용하는 글자는 301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에는 簡에서 匡까지 총 91종의 시호가 제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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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諡讀誄>15) 등의 자료에 실려 있는 시호들을 모아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총 165종의 시호

    가 있음을 확인하였다.16) 그러나 실제로 이 글자들이 모두 시호에 사용된 것은 아니며 상당

    히 제한적으로 활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시호를 부여받은 인물 513명에 대한 현황을 확인한다.

    시호는 졸기와 함께 부여되었다. 그러나 졸기가 있다고 시호도 있는 것은 아니다. 시호의

    부여는 졸기와 별도로 진행되는 행정절차다.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졸기의 대상이 된 인물은

    780명이었다. 그 중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은 513명이다. 졸기의 주인공 중에서 약 65%의

    인물이 시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아래는 513개의 시호에서 중복된 것을 제외한 고유값

    을 구한 것이다. 총 289개의 시호가 확인된다. 앞 글자를 기준으로 정리하였으며 괄호 안의

    숫자는 중복된 시호의 개수를 뜻한다.

    簡肅(1), 簡平(1), 剛悼(1), 剛武(1), 剛莊(1), 剛靖(1), 康昭(1), 康安(1), 康襄(1), 康夷(2), 康平(1), 康胡(1), 康懷(1), 敬烈(1), 敬肅(1), 敬節(2), 敬平(1), 敬憲(1), 敬胡(1), 敬孝(2), 景武(2), 景肅(2), 景節(1), 景質(2), 景惠(2), 景僖(1), 恭簡(7), 恭頃(1), 恭戴(1), 恭度(3), 恭悼(1), 恭穆(1), 恭武(4), 恭繆(1), 恭昭(2), 恭肅(7), 恭安(4), 恭襄(4), 恭懿(1), 恭莊(1), 恭長(1), 恭平(1), 恭惠(2), 恭胡(1), 恭孝(1), 恭厚(1), 恭僖(2), 夸厲(1), 戴敬(1), 戴敏(1), 悼孝(1), 良簡(4), 良敬(3), 良景(3), 良度(2), 良悼(1), 良安(2), 良襄(1), 良節(1), 良精(1), 良靖(7), 良平(3), 良惠(1), 良孝(2), 良厚(1), 戾悼(1), 烈成(1), 靈靖(1), 靈平(1), 明憲(1), 武愍(1), 武節(1), 武厚(1), 文簡(9), 文剛(1), 文康(1), 文敬(2), 文景(8), 文匡(1), 文度(2), 文悼(1), 文良(4), 文烈(2), 文愍(1), 文成(1), 文肅(5), 文順(1), 文安(3), 文襄(3), 文翼(1), 文長(3), 文節(4), 文定(1), 文貞(7), 文靖(9), 文質(1), 文忠(5), 文平(5), 文憲(1), 文獻(1), 文惠(2), 文孝(3), 文僖(4), 成度(1), 成烈(1), 成安(1), 成靖(1), 世襄(1), 昭簡(2), 昭剛(1), 昭度(1), 昭思(1), 昭襄(1), 昭懿(1), 昭夷(1), 昭靖(1), 昭懷(1), 昭孝(1), 肅魏(1), 肅憲(1), 順節(2), 安簡(2), 安悼(4), 安良(1), 安武(2), 安愍(1), 安成(1), 安昭(3), 安肅(2), 安襄(8), 安長(1), 安靖(7), 安平(1), 安胡(1), 安孝(1), 襄簡(2), 襄敬(1), 襄景(1), 襄頃(1), 襄度(1), 襄悼(1), 襄烈(1), 襄武(3), 襄墨(1), 襄敏(1), 襄昭(2), 襄肅(1), 襄安(1), 襄夷(1), 襄莊(2), 襄節(1), 襄靖(11), 襄替(1), 襄平(7), 襄惠(4), 襄胡(1), 襄懷(1), 襄孝(2), 襄厚(2), 襄僖(1), 元靖(1), 威戾(1), 威襄(2), 威靖(1), 威平(1), 魏肅(1), 懿簡(1), 夷簡(1), 夷敬(1), 夷悼(1), 夷安(3), 夷靖(2), 夷平(1), 翼景(1), 翼成(1), 翼襄(1), 翼元(1), 翼魏(1), 翼平(3), 翼惠(1), 章簡(2), 章悼(1), 章成(1), 章懿(1), 章節(2), 章孝(1), 莊剛(1), 莊敬(1), 莊襄(5), 莊節(1), 節孝(1), 丁悼(1), 丁靖(1), 定安(1), 定平(1), 玎悼(1), 貞節(2), 貞簡(1), 貞景(4), 貞度(1), 貞烈(1), 貞武(1), 貞肅(5), 貞襄(1), 貞莊(1), 貞節(2), 貞靖(2), 貞惠(1), 靖簡(2), 靖康(1), 靖德(1), 靖穆(1), 靖武(1), 靖宣(1), 靖昭(1), 靖肅(1), 靖順(2), 靖襄(1), 靖元(1), 靖夷(1), 靖節(3), 靖平(10), 靖胡(1), 靖孝(2), 靖厚(3), 齊簡(2), 齊戴(3), 齊度(1), 齊安(1), 齊懿(1), 齊貞(1), 齊靖(1), 齊平(1), 直憲(1), 質景(1), 忠簡(3), 忠景(3), 忠烈(1), 忠武(1), 忠敏(1),

    15) 김세균, 琬琰通考 권6, ; 박용대 외, 增補文獻備考, 「職官考」 권26, , 柳長源, 常變通攷 권16,

    16) 이는 더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정확한 수량을 확인해야 한다.

    왕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계

    졸기

    부여40 8 131 237 16 30 98 5 169 46 780

    시호

    부여22 6 74 146 11 12 82 4 136 20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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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成(2), 忠襄(1), 忠魏(1), 忠貞(3), 忠靖(4), 忠僖(1), 平簡(3), 平度(2), 平悼(1), 平肅(1), 平安(1), 平煬(1), 平襄(1), 平翼(1), 平節(1), 平靖(3), 平胡(1), 平厚(3), 憲平(1), 惠肅(1), 惠懿(1), 胡簡(2), 胡剛(1), 胡戾(1), 胡穆(1), 胡文(1), 胡敏(1), 胡安(3), 胡襄(2), 胡威(1), 胡夷(1), 胡靖(1), 胡平(1), 胡僖(1), 荒繆(1), 荒胡(1), 懷簡(1), 孝文(1), 孝昭(1), 孝靖(1), 僖敬(1), 僖景(1), 僖悼(1), 僖安(1), 僖襄(2), 僖懿(1), 僖節(1), 僖靖(2), 僖憲(1)

    文이라는 시호는 忠, 靖, 襄, 敬, 憲, 簡, 良, 平, 僖 등과 같은 하위 시호를 거느린다. 또한

    忠이라는 시호는 靖, 武, 成, 僖, 襄, 簡, 貞 등과 같은 하위 시호를 거느린다. 시호의 배치

    는 일정한 위계와 배열 규칙이 있다. 시호는 앞에 오는 것과 뒤에 오는 것이 정해져있는 경

    우가 있고, 앞뒤 모두에 쓰이는 경우도 있다. 忠武라는 시호는 있지만 이를 뒤집어놓은 武

    忠은 없으며 文貞이라는 시호는 있지만 貞文은 없다. 이것은 더 큰 德을 나타내는 글자를

    먼저 제시해야하기 때문이다. 文이나 武가 뒤에 제시된 시호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 해당 글

    자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달라지게된다.

    시호는 앞 글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시호를 擬望할 때 三望을 임금에게 올리는데, 일반

    적으로 앞 글자는 동일하게 하고 뒷부분의 글자로 차등을 두었다. 李彦迪(1491~1553)의

    경우, 시호를 文忠, 文貞, 文元으로 올렸는데 임금은 文元으로 낙점하였다.17) 봉상시에서는

    앞의 글자를 文으로 확정하고 뒤에 오는 글자를 忠-貞-元 중에서 임금이 낙점하게 한 것이

    다. 세 개의 시호 중에서 역시 앞의 것의 격이 가장 높으며 뒤에 올수록 격이 낮은 것이 된

    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시호의 格을 구분할 수 있다.

    具致寬(1406~1470)의 경우 봉상시에서는 貞質, 貞簡, 貞昭로 의망하였는데 선조는, “능성

    은 평생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청백하게 조심하여 살았다. 지금 아뢴바 시호는 실제

    에 부응하지 아니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라고 하였다. 이에 더 높은 忠烈이라는 시호

    를 내리게 되는데,18) 이를 통해 質-簡-昭의 관계는 물론 貞○ 계열 시호보다 忠○ 시호가

    더 높은 평가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호의 앞 글자와 뒷글자의 고유값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앞에만 오는 글자와 뒤에만 오는 글자, 앞뒤에서 같이 오는 글자를

    무엇인지 확인하였다.

    文(30), 襄(25), 恭(21), 靖(17), 良(14), 安(14), 胡(13), 貞(12), 平(12), 忠(11), 昭(10), 僖(9), 齊(8), 康(7), 敬(7), 翼(7), 景(6), 夷(6), 章(6), 剛(4), 成(4), 威(4), 莊(4), 武(3), 孝(3), 簡(2), 戴(2), 靈(2), 肅(2), 丁(2), 定(2), 惠(2), 荒(2), 夸(1), 悼(1), 戾(1), 烈(1), 明(1), 世(1), 順(1), 元(1), 魏(1), 懿(1), 節(1), 玎(1), 直(1), 質(1), 憲(1), 懷(1)

    靖(19), 平(17), 襄(16), 簡(16), 節(14), 悼(13), 肅(12), 安(12), 孝(11), 度(9), 武(8), 胡(8), 景(8), 惠(7), 敬(7), 昭(6), 烈(6), 憲(6), 僖(6), 懿(6), 厚(6), 成(6), 夷(5), 莊(4), 敏(4), 剛(4), 懷(3), 穆(3), 長(3), 愍(3), 貞(3), 魏(3), 質(2), 頃(2), 戴(2), 繆(2), 康(2), 良(2), 順(2), 翼(2), 戾(2), 元(2), 文(2), 厲(1), 精(1), 匡(1), 定(1), 忠(1), 獻(1), 思(1), 墨(1), 替(1), 德(1), 宣(1), 煬(1), 威(1)

    恭(21), 玎(12), 世(10), 章(4), 靈(2), 丁(2), 夸(1), 明(1), 齊(1), 直(1), 荒(1)

    17) 선조실록 권3, 선조 2년 7월 10일 신사 2번째 기사.18) 성종실록 권7, 성종 1년 9월 13일 무자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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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度(9), 厚(6), 敏(4), 穆(3), 愍(3), 長(3), 頃(2), 繆(2), 匡(1), 德(1), 厲(1), 墨(1), 思(1), 宣(1), 煬(1), 精(1), 替(1), 獻(1)

    文(28), 貞(14), 安(13), 良(12), 順(12), 忠(11), 質(9), 惠(6), 康(5), 翼(4), 僖(3), 元(2), 夷(2), 剛(0), 敬(0), 戴(0), 威(0), 懿(0), 定(0), 懷(0), 戾(-1), 景(-2), 魏(-2), 孝(-2), 莊(-3), 昭(-4), 憲(-4), 烈(-5), 武(-5), 成(-5), 胡(-6), 肅(-11), 靖(-11), 悼(-12), 節(-12), 簡(-14), 襄(-15), 平(-16)

    襄(41), 靖(36), 文(32), 平(29), 安(26), 恭(21), 胡(21), 簡(18), 良(16), 昭(16), 節(15), 貞(15), 僖(15), 敬(14), 景(14), 悼(14), 肅(14), 孝(14), 忠(12), 武(11), 夷(11), 成(10), 康(9), 度(9), 翼(9), 惠(9), 剛(8), 莊(8), 齊(8), 烈(7), 懿(7), 憲(7), 章(6), 厚(6), 威(5), 戴(4), 敏(4), 魏(4), 懷(4), 戾(3), 穆(3), 愍(3), 順(3), 元(3), 長(3), 定(3), 質(3), 頃(2), 靈(2), 繆(2), 丁(2), 荒(2), 夸(1), 匡(1), 德(1), 厲(1), 明(1), 墨(1), 思(1), 宣(1), 世(1), 煬(1), 玎(1), 精(1), 直(1), 替(1), 獻(1)

    확인된 시호 중에서 앞에서 사용된 것은 49개이며 뒤에 사용된 것은 56개이다. 이를 다시

    살펴보면 앞에서만 사용된 것은 11개이며 뒤에서만 사용된 것은 18개였다. 앞뒤의 자리에

    모두 오는 것은 37개였다. 앞 글자의 출현 횟수를 기준으로 뒤에 오는 글자의 출현 횟수를

    빼면 숫자가 클수록 앞에 오는 시호이며, 0에 수렴될수록 앞뒤에서 모두 사용된 시호, 그리

    고 숫자가 작아질수록 뒤에 오는 시호이다.19) 이를 통해 글자의 전후 배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호에 사용된 글자의 고유값을 계산하였다. 289개의 시호에서 사용된 글자는

    67개에 불과하다. 세종 때 증보하여 301개의 시호를 설정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활용된

    것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襄, 靖, 文, 平 등은 30회가 넘게 사용되었지만 한두

    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시호들도 많다. 그러나 같은 시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시호주까지

    동일한 경우는 드물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호에 소속된 諡號註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4. 시호의 肯否와 諡號註

    塗白奎의 에서는 서주 金文에 근거하여 서주시대 13왕의 시호는 모두

    美稱이며 ‘幽’, ‘厲’ 조차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초는 나

    쁜 시호란 없는 것이므로 시호를 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것이고 진정으로 죽은 사

    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아예 시호를 정해주지 않은 경우라고 말한다.

    諡法에 의하면, 나쁜 시호로는 桀이나 紂보다 나쁜 것이 없으며, 그 다음으로는 桓, 靈이 나쁜

    것이며 그 다음은 幽, 厲가 나쁜 것이다. 이것은 고금에 모두에게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내 견해

    19) 본 데이터는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시호를 부여받은 인물 513명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향후 시호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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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桀과 紂는 이름일 뿐 시호가 아니다. 이름은 살아 있을 때 부여된 것이

    고 죽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夏나라 말기와 殷나라 초기에는 아직 시호가 없었으므로 桀은

    시호가 아니다. 殷나라 말기와 周나라 초기에는 비록 諡法이 있었지만 시호를 받게 되면 영예로

    운 것이고 받지 못하면 욕이 된다. 紂라고 이름 불렀다는 것은 모욕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20)

    정초는 전통시대에 나쁜 의미의 시호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노력했던 학자였

    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후대에 와서도 나쁜 시호에 대해 설명하려고할 때 많이 인용되었

    다. 李翼 역시 孟子가 나쁜 시호로 정해진 ‘幽’ 와 ‘厲’를 후손들이 바꿀 수 없다고 한 부분

    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에 의하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경우에 ‘厲’라고 하고, 막혀서 통하지 않은 경우에 ‘幽’

    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나쁜 이름은 효자가 차마 선친께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호

    라는 것은 죽었을 때 그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살았을 때 행한 일이 끝나면 이때에야 비로소 이

    름을 피하고 바꾸어 부르게 되는데 이는 공경하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큰 행동에는 큰 이

    름을 받고 작은 행동에는 작은 이름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 이름을 불러 그것이 세상에 알려질

    때에 큰 행동과 작은 행동은 큰 절개와 작은 절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나쁜 행동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조 중에는 공경할 만 한 점을 가지

    지 않은 사람도 없고 미워할 만 한 점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는데, 그를 부를 때에는 의리상

    공경할 만하다고 부르는 것이지 미워할만 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실로 효자와 자손의 뜻

    이다. 만약 선조에게 악함이 있다고 하여 자손이 이것을 드러내어 이름 부르고 후세에 드러내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21)

    상고시대에 나쁜 시호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신하를 대상으로 한 시호에는 貶下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墨[貪而敗

    官], 赧[喪國心懈], 戾[不悔前過]와 같은 것은 받지 않는 것이 나을 만큼 치욕스러운 시호

    다. 웬만큼 악한 짓을 한 인물이 아니라면 비교적 좋은 시호를 내리는 것이 시법인 바, 이

    처럼 惡諡를 받은 인물은 그가 살았을 때 한 짓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호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호를 정하게 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주변 기록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특히 諡號註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호주는 태조,

    정종, 태종 까지는 달려 있지 않고 세종대부터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513개의 시호 중에서

    시호주가 있는 것은 404개이다. 404개의 시호에서 추출된 글자는 65개이며 이들이 포함하

    는 시호주의 개수는 아래와 같다.22)

    簡(5), 剛(3), 康(3), 敬(4), 景(4), 頃(1), 恭(6), 夸(1), 匡(1), 戴(1), 德(1), 度(1), 悼(2), 良(1), 戾(1), 厲(1), 烈(2), 靈(1), 明(1), 穆(1), 武(7), 繆(1), 墨(1), 文(13), 敏(1), 思(1), 宣(1), 成(3), 世(1), 昭(2), 肅(5), 順(3), 安

    20) :“按諡法, 惡諡莫如桀紂, 其次莫如桓靈, 其次莫如幽厲 此古今之所聞也. 以身所見皆不然. 桀紂

    是名耳, 非諡也. 名者生之所命, 而非死之所加也. 當夏之季, 當殷之興, 則未有諡. 桀非諡也. 當殷之季, 當紂之興,

    雖有諡法, 然得諡爲榮, 不得諡爲辱. 名之以紂, 辱莫大焉.”

    21) 李翼, 孟子疾書:“按諡法, 殺弑無辜曰厲 壅遏不通曰幽, 此惡名, 非孝子之所忍加於父者也. 諡者, 死於易其名也, 生事旣畢, 於是焉, 始諱易之, 所以敬也. 故曰, 大行受大名, 細行受細, 名之浮於行也, 大行細行, 猶言大節細

    節, 非謂惡行而亦稱之也. 記曰, 為先祖者, 莫不有羙焉, 莫不有惡焉, 銘之義稱羙而不稱惡, 此實孝子慈孫之意也. 若先祖有惡, 而子孫揚以名之, 用暴於後世, 安在乎.”

    22) 더 구체적인 사항은 부록의 표 에 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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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煬(1), 襄(6), 元(1), 威(3), 魏(1), 懿(1), 夷(2), 翼(3), 章(2), 莊(4), 長(1), 節(1), 丁(2), 定(1), 玎(1), 精(1), 貞(5), 靖(7), 齊(3), 質(2), 替(1), 忠(4), 平(8), 憲(2), 獻(1), 惠(4), 胡(2), 荒(1), 懷(1), 孝(6), 厚(1), 僖(1)

    文이 13개로 가장 많고 平이 8개, 武, 安, 靖이 7개, 恭, 襄, 孝는 6개의 시호주로 서술되

    었다. 같은 글자라 하더라도 시호주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恭肅(7), 安襄(8), 文

    靖(9), 文景(8) 처럼 시호가 같더라도 이를 시호주와 함께 보면 훨씬 더 다채로운 양상을 나

    타낸다. 성석린에서 이극감까지 여덟 사람의 시호는 동일한 文景이지만, 앞뒤 전체의 시호

    주까지 동일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23) 시호주까지 고려한다면 의미를 조합할 수 있는 경우

    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적은 수의 글자로도 나름의 변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文의 경우 학문, 지식, 도덕, 예의 등에 대한 인격적 요소를 표현할 수 있다. 武의 경우 무

    관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강직한 성품과 단도직입적인 성향 등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成은 임금을 성공적으로 잘 보좌한 경우와 순후하고 담박한 성품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

    처럼 한 글자의 시호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격의 다채로운 표현이 가

    능한 것이다. 따라서 시호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을 비추어보면, 당대에 어떠한 지점이 높이

    평가받았는지 알게 된다.

    시호는 인물의 학문, 자질과 능력, 업적, 품성, 삶에 대한 태도 및 사망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까지 담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호는 무엇을 받더라도 죽은 사람의 인격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키는 영광스러운 칭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호를 통해 후세에 勸誡를 드리우는 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아래와 같은 시호는 받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시호를 통해 조선시대 관료형 인물에 대한 다양한 품격과 그들이 추구했던 삶의 가

    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인격을 자리매김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마련해준다.

    夸 華言無實 말만 화려하고 실상이 없다.戾 不悔前過 이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않았다.厲 暴慢無親 난폭하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다.靈 不勤成名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명성을 이루었다.墨 貪以敗官 탐욕을 부리다가 관직에서 파면되었다.煬 去禮遠衆 예를 버리고 무리에서 멀어지다.丁 述義不克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다.玎 逑義不勉 의로움을 행하되 힘쓰지 않았다.替 言行相違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났다.荒 好樂怠政 놀기를 좋아하고 정사에 게을렀다.

    23)

    성명 시호 전 시호주 후 시호주

    成石璘 文景 文 道德博文 景 由義而濟

    鄭招 文景 文 學勤好問 景 由義而制

    權軫 文景 文 慈惠愛民 景 由義而濟

    鄭欽之 文景 文 學勤好問 景 布義行剛

    權踶 文景 文 博聞多見 景 由義而濟

    姜孟卿 文景 文 忠信據禮 景 由義而濟

    李克堪 文景 文 勤學好問 景 心能制義

  • - 11 -

    5. 맺음말

    본고는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시호를 부여받은 인물 513명에 대한 시호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 향후 시호의 전수조사를 통해 그 전모를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분류를 세분화시켜 문신․무신의 시호 차이 및 직급별 시호부여에 대한 관계 등을 구체화하여 분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를 통해 시호가 가지는 품격을 차등 있게 구분하여야

    한다.

    시호는 당대 인물들이 인식한 人格美의 전형을 설정하고 살아가야하는 방침을 설정하였다

    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기존의 사전항목 기술에서 시호는 ‘시호는 ○○이다.’ 정도

    만 기술되어 있을 뿐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호는 한 인물의 사후

    품격을 공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매우 치밀한 행정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요성을 왕도 충분히

    인식하였다. 惡諡를 받은 후손은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해 고쳐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

    다. 따라서 향후 인물 서술에 있어서 시호와 졸기 및 시호 지정에 관련된 인물 평가 자료들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물의 진실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 - 12 -

    시호 시호주

    簡 平易不訾, 一德不懈, 恭敬行善, 居敬行簡, 平易不懈

    剛 彊毅果敢, 强毅果敢, 追補前過

    康 溫柔好樂, 信柔好樂, 溫柔和樂

    敬 夙夜恭事, 夙興恭事, 夙夜警戒, 夙興供事

    景 由義而制, 由義而濟, 布義行剛, 心能制義

    頃 敏以敬愼

    恭 敬事供上, 執禮御賓, 執事堅固, 敬順事上, 不解于位, 不懈于位

    夸 華言無實

    匡 貞心大度

    戴 典禮不愆

    德 執義揚善

    度 心能制義

    悼 中年早夭, 年中早夭

    良 溫良好樂

    戾 不悔前過

    厲 暴慢無親

    烈 秉德尊業, 有功安民

    靈 不勤成名

    明 思慮果遠

    穆 中心見貌

    武 威彊敵德, 剛强直理, 剛彊直理, 性剛理直, 刑民克服, 克定禍亂, 性强理直

    繆 名與實爽

    墨 貪以敗官

    文學勤好問, 道德博文, 道德博聞, 慈惠愛民, 忠信接禮, 博聞多見, 博文多見, 忠信據

    禮, 勤學好問, 忠信愛人, 博問多見, 敬直慈惠, 施而中理

    敏 好古不怠

    思 追悔前過

    宣 善聞周達

    成 佐相克終, 爲相克終, 惇厖淳固

    世 承命不遷

    昭 容儀恭美, 昭德有勞

    肅 執心決斷, 執心斷決, 執人決斷, 剛克爲伐, 剛德克就

    順 慈徧服順, 柔賢慈惠, 慈和徧服

  • - 13 -

    安 好和不爭, 和好不爭, 寬容和平, 寬柔和平, 寬裕和平, 好貨不爭, 寬裕平和

    煬 去禮遠衆

    襄 甲冑有勞, 因事有功, 甲冑有能, 甲胄有勞, 因事有勞, 甲胃有勞元 行義悅民

    威 猛以剛果, 猛以强果, 猛以彊果

    魏 克威捷行

    懿 溫柔賢善

    夷 安心好靖, 安心好靜

    翼 思慮深遠, 剛克爲伐, 思慮深遠

    章 敬愼高明, 溫克令儀

    莊 勝敵志剛, 勝敵志强, 勝敵至强, 勝敵志壯

    長 敎誨不倦

    節 好廉自克

    丁 述義不克, 述事不弟

    定 純行不爽

    玎 逑義不勉

    精 恭己鮮言

    貞 淸白守節, 不隱無屈, 直道不撓, 固節幹事, 外內用情

    靖 恭己鮮言, 寬樂令終, 柔直考終, 寬樂令從, 柔德安衆, 事不躁進, 恭己解言

    齊 執心克莊, 執心克壯, 資輔就共

    質 忠正無邪, 名實不爽

    替 言行相違

    忠 危身奉上, 險不辭難, 廉方公正, 事君盡節

    平 布綱治紀, 治而無眚, 執事有制, 洽而無眚, 克定禍亂, 惠無內德, 布剛治紀, 執務有制

    憲 博聞多能, 博文多能

    獻 薦可替否

    惠 愛民好與, 寬裕慈仁, 柔質慈民, 寬柔慈仁

    胡 彌年壽考, 彌年壽老

    荒 好樂怠政

    懷 慈仁短折

    孝 慈惠愛親, 秉德不回, 大慮行節, 五宗安之, 乘德不回, 能養能恭

    厚 思慮不爽

    僖 小心畏忌

  • [논제 3]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 요소와 그 모형’

    김명화(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고문헌학)

  • - 1 -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요소와 그 모형

    김명화1)

    1. 머리말

    2.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 방식과 요소

    1) 이색·기대승·이항복의 사례

    2) 이이의 사례

    3.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시대 사람의 일생 또는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물은 年譜, 行狀, 碑銘, 諡狀 등의

    연보·행장류 전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죽은 사람의 생애 전체를 포괄하는 기록물은 연보이

    며, 생애 전체를 포괄하면서 행적에 중심을 둔 기록물은 대표적으로 행장이 있다. 연보·행장

    류 전기의 작성자는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동료, 아니면 그 자손이며 일정한 서술 방

    식과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작성자의 관점에 따라 공통되면서도 상이한 서술요소로 내

    용이 구성된다. 이와 같은 서술요소는 당시의 사회적 인격 요소를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필자는 조선시대 학자·관료의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요소를 분석하여

    조선시대 인물을 정의하는 사회적 인격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또한 이를 통

    해서 현대의 백과사전 편찬에서 조선시대 학자·관료 인물을 어떤 서술요소를 통해 서술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 방식과 요소

    1) 이색·기대승·이항복의 사례

    조선시대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 방식을 간단히 살펴보기 위해 연보·행장 중에 조선전

    기에 작성된 목은 이색과 고봉 기대승, 백사 이항복의 연보·행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목은 이색(1328~1396)의 연보는 목은고에 序·年譜·行狀·神道碑 등의 순으로 수록되어있다. 따라서 연보는 1404년(태종 4)에 권근(1352~1409)이 작성한 서문, 행장과 함께 작

    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색의 행장은 제자인 권근이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성 시기는

    15세기 초로 추정된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연보는 1629년(인조 7) 간행본에 수록

    된 것, 1907년 간행본에 수록된 것이 있다. 본고에서는 1629년 간행본을 분석하였다. 기대

    1)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학과 박사과정

    2) 본래 행장은 죽은 사람의 행적을 간명하게 쓰는 글이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글이 장황하고 번다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행장의 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전기 또는 중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보와

    행장을 살펴보았다.

  • - 2 -

    승의 행장은 제자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1582~1650)이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성 시기는 17

    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백사 이항복(1556~1638)의 연보는 전해오지 않는다. 이항복의 행

    장은 제자인 장유(1587~1638)가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성 시기는 17세기 초반으로 추정된

    다.

    전체적으로 연보의 작성자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행장의 작성자는 제자에 의해서 작성

    되었다. 서술 방식을 살펴보면 연보는 죽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일을 연월일순으로

    서술하였고 사후에 발생한 추증·증시·서원 배향도 연도별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달리 행장

    은 일정한 서술 방식과 요소를 사용하여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주로 먼저 죽은 사람의 인

    적사항과 가계 내력(본관, 선계, 사조)에 대해 설명하고, 다음으로 출생, 소싯적 성품과 학문

    과정, 과거 시험, 연도별 관력과 행적, 그리고 사망의 순서로 죽은 사람의 일생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이어서 작성자가 죽은 사람의 타고난 자질, 학문 성취, 정치적 능력, 강조될만한

    행적, 저술 활동 등에 대해 총평을 하고,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의 가족 사항(부인, 자손, 후

    계)을 서술한다.

    행장의 서술 방식은 대상 인물의 행적에 따라서 달라졌는데, 대체로 연도별 관력을 중심

    으로 서술 되었다. 행장의 작성자가 인물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스승의 관력과 학

    문·정치적 행적 등을 중점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색은 고려조의 관리로써의 행적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조에 활동하는 학자들을 키워낸 스승·학자의 행적 또한 중요하게 강

    조되었고, 기대승은 관직 생활보다는 사림으로 학문에 몰두한 점을, 이항복은 왜란을 겪은

    혼란한 시대에 왕에게 충성하는 관리로써의 행적이 강조되었다.

    연보의 서술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달려졌는데, 관직 제수 및 거처 변동 등의 연도별 간

    략한 정보만을 제시하던 방식에서 인물의 모든 행적을 연도별로 망라하는 서술 방식으로 변

    하였다. 이색의 연보는 조선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후기의 연보와 비교하면 그 내용이

    매우 간략하다. 주로 상세설명 없이 제수된 관직 사항과 거처의 변동, 유배된 곳과 이배된

    인물 행 장 연 보 서술 방식

    이색

    ▫연도별 관력 중심으로 서술

    ▫성리학 진흥과 후진 양성, 공민왕에게 한 간언

    등을 중점적으로 서술

    ▫내용면에서 행장이 연보보다 더 자세함▫행장은 연보의 연도별 간략정보(관력·거처)에 상세설명(관직에 임명된 이유, 정

    치적 성과, 대화 인용 등)을 덧붙인 서술

    방식

    행장: 관리·학자

    의 행적 강조

    연보: 관력·거처

    변동·거상 등 단

    순 나열

    기대승

    ▫연도별 관력 중심으로 서술

    ▫경연·외교·사림 활동, 이황과의 관계 등을 중점적

    으로 서술

    ▫내용면에서 연보가 행장보다 더 자세함.▫연보는 관력보다는 학문 성취에 더 중심을 두며 서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누

    구와 무엇을 강론했는지, 어떤 글을 지

    었는지, 특히 이황과의 관계 자주 언급

    행장: 관력은 요

    약, 사림으로써

    행적 강조

    연보: 관력·거처

    변동·거상 등 단

    순 나열, 학자의

    행적 강조

    이항복

    ▫연도별 관력 중심으로 서술▫관직별 성과 설명, 임진왜란 때 승지·병조판서 활동 및 외교 성과를 중점적으로 서술

    ▫선조·광해군과의 문답, 간언 강조(군신관계)

    행장: 관리의 행

    적 강조

    이색·기대승·이항복의 행장과 연보의 서술 방식 비교

  • - 3 -

    사항, 장례를 당한 것 등 사실만을 나열하였다. 작성자의 서술 관점을 찾아 볼 수 없다.

    기대승의 1629년 연보는 이색의 연보와 비슷하게 관력·거처 변동·거상 등의 사항을 단순

    히 나열한 면도 있지만, 다른 간략정보가 풍부하다. 예를 들면, 학문의 진보 과정(나이별 읽

    은 책 나열, 성리학에 대한 강론 및 논설 작성), 학문 교류와 관련된 이황·김집·이항·김인후·

    정추만·노수신·김계 등을 언급, 부모의 장례 이외에도 기일·묘지 작성·이장·성묘·시제·가묘

    등의 예법과 관련된 일, 유람을 하거나 정자를 짓는 일, 언제 혼인을 했고, 아들을 낳았는지

    등이다. 이런 다양한 간략정보는 이후 1907년 연보에서 상세설명 및 편지·저술 인용을 덧붙

    여 그 양이 배가 된다. 덧붙인 내용을 살펴보면, 문집에 수록된 내용을 적극 활용하여 학문

    과 관련된 편지·논설·저술 등의 내용이 다수 추가 또는 일의 선후관계를 수정, 이전에 보이

    지 않던 종형 판윤공 기대항에 대한 내용 추가(기대승이 이량에게 논박 당했을 때 도움),

    명종의 복상 기간 논란 내용(예송관련) 등이다.

    2) 이이의 사례

    조선시대 연보·행장류 전기의 서술요소를 살펴보기 위해 율곡 이이의 연보·행장류 전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이의 일생과 행적을 기록한 것은 연보·행장·신도비명·시장·묘지명 등

    이 있다. 연보는 이이의 아들 이경림이 찬한 연보를 송시열(1607∼1689)이 다시 교정하고

    이후 박세채(1631∼1695)가 보완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3) 행장은 사돈인 김장생

    (1548~1631), 신도비명은 이항복(1556~1618), 시장은 이정구(1564~1635), 묘지명은 사

    위인 김집(1574∼1656)이 지었다. 기록의 양으로나 작성된 시점으로나 연보가 다른 기록물

    의 내용을 모두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연보를 기준으로 서술요소를 분석하였다.

    다음의 표는 율곡 이이의 연보·행장류 전기의 내용을 연보 기준으로 연도별로 정리한 표

    이다. 이 표는 총 366개의 내용으로 정리되었고, 모든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은

    총 80개이다. 이 내용은 첫 번째 서술요소인 인물의 몸·마음·행적·언어·평가 5가지로 나누었

    고, 이는 다시 37가지의 상세 서술요소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서술요소인 인물의 몸은 생

    물학적인 몸을 만들어 준 선조, 부모를 비롯한 인물의 가족과 관련된 서술요소이며, 인물의

    마음은 인물의 사회적 인격을 형성하는 성품 및 학문과 교우 활동에 관련된 서술요소이다.

    인물의 행적은 앞의 몸과 마음을 기반으로 사회적으로 실천된 인물의 관력, 공적에 관련된

    서술요소이며, 인물의 언어는 인물이 남긴 저술 및 작품을, 인물의 평가는 인물에 대해서

    당대 또는 후대에 평가한 내용에 관련된 서술요소이다.

    3) 본고에서 살펴본 율곡이이 연보는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온 간본이다. 이는 1814년

    해주에서 전서활자본을 그대로 목판에 번각한 전서중간본이다. 연보는 원집 1611년 간행 시에는 이이의 아들

    이경림이 찬한 연보가 실렸고, 이후 송시열이 다시 정리한 연보를 기준으로 하다가 박세채가 찬한 〈年譜考

    證〉을 반영하여 새로 편차한 연보가 실렸다.

  • - 4 -

    나이

    연도

    월 /계절

    서술요소1

    서술요소2 서술요소3 내용연보

    행장

    신도비명

    시장

    묘지명

    0     몸 인적사항 본관, 휘, 자 . 0 0 0 00     몸 사조 고증조부의 성명, 관직, 증직,

    부인. 0 0 0 0

    0     몸 선계 고려조 시조~고조 전까지의 가계

    . 0 0 0 0

    0     몸 부모 성품 부모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씨 품성

    . 0 0 0 0

    1 병신 12 몸 출생 출생지출생연월, 출생지 강릉부 북평촌

    0 0 0 0 0

    1 병신   몸 출생 모친 모친의 꿈/아명 현룡 0 0 0 0 03 무술   마음 학문   외조모 이씨와 대화/석류 0 0 . 0 05 경자   마음 성품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