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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제3편 자료로 보는 금산 우리나라의 역사사료 중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매우 드물며 특히 지방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만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은 ‘기록 국가’라 할 만큼 많은 기 록을 생산해냈지만 국가변란을 거치면서 소실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계 획적으로 소멸되고 유출되어 조선 초기의 기록은 매우 희귀하다. 그런 가운데 『조 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너무도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가치를 지닌 기록물은 찾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행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한 공식 국 가기록이다. 1대 태조(太祖)부터 25대 철종(哲宗)까지 472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으며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 적 사실이 망라되어 있다. 실록의 편찬은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실록청에서 관련 자 료를 수집하여 작성하며 철저하고 엄격한 관리로 기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금산지역의 기록은 매우 다양하다. 정치·행정적인 내 용 뿐만 아니라 금산 지역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 파견된 관리의 행적, 금산 사람 들의 일화, 자연재해 등 금산의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 다. 본 절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 sillok.history.go.kr)를 활용, 금산과 관련된 지명·인명 등을 검색하여 정리하였 다. 6백건 이상의 기사 중 금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주요 기사를 선별하고 연 대순으로 나열하였다. 이중 자연재해와 관련된 내용은 역사편에 수록하였으므로 본 절에서는 제외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여한 후 훗날 포상 받는 수 많은 인물 중 금산·진산 사람이 아닌 경우 제외하였다. 금산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과 깊이 관련있는 상소문 등의 기록은 내용이 다소 길더라도 축약하지 않았다. 많 은 정보를 담고 있는 기사에서 금산·진산과 관련된 내용만 남기고 나머지 문장은 축약하였다. 실록 중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숙종실록보궐정오, 경 종실록·경종수정실록 등 3대 왕의 실록이 수정 또는 개수되었는데 중복되는 기사 는 큰 차이가 없는 한 하나로 정리하였다. ■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1393년(태조 2년) 1월 7일 제2절 조선왕조실록 제4권 비단고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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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2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우리나라의 역사사료 중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매우 드물며 특히 지방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만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은 ‘기록 국가’라 할 만큼 많은 기

    록을 생산해냈지만 국가변란을 거치면서 소실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계

    획적으로 소멸되고 유출되어 조선 초기의 기록은 매우 희귀하다. 그런 가운데 『조

    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너무도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가치를 지닌 기록물은 찾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행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한 공식 국

    가기록이다. 1대 태조(太祖)부터 25대 철종(哲宗)까지 472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으며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

    적 사실이 망라되어 있다. 실록의 편찬은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실록청에서 관련 자

    료를 수집하여 작성하며 철저하고 엄격한 관리로 기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금산지역의 기록은 매우 다양하다. 정치·행정적인 내

    용 뿐만 아니라 금산 지역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 파견된 관리의 행적, 금산 사람

    들의 일화, 자연재해 등 금산의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

    다.

    본 절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

    sillok.history.go.kr)를 활용, 금산과 관련된 지명·인명 등을 검색하여 정리하였

    다. 6백건 이상의 기사 중 금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주요 기사를 선별하고 연

    대순으로 나열하였다. 이중 자연재해와 관련된 내용은 역사편에 수록하였으므로

    본 절에서는 제외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여한 후 훗날 포상 받는 수

    많은 인물 중 금산·진산 사람이 아닌 경우 제외하였다. 금산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과 깊이 관련있는 상소문 등의 기록은 내용이 다소 길더라도 축약하지 않았다. 많

    은 정보를 담고 있는 기사에서 금산·진산과 관련된 내용만 남기고 나머지 문장은

    축약하였다. 실록 중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숙종실록보궐정오, 경

    종실록·경종수정실록 등 3대 왕의 실록이 수정 또는 개수되었는데 중복되는 기사

    는 큰 차이가 없는 한 하나로 정리하였다.

    ■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1393년(태조 2년) 1월 7일

    제2절 조선왕조실록

    제4권 비단고을 이야기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23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명령

    하였다.…(후략)

    ■ 심효생의 졸기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전략)… 심효생(沈孝生)은 본관이 순천(順天) 부유(富有)이며 지금주(知錦州) 심

    인립(沈仁立)의 아들이다. 폐왕(廢王) 경신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계해년

    에 을과(乙科)에 제 2인에 올라 당후관(堂後官) 으로부터 관직을 오랫동안 하여 장

    령(掌令)에 이르렀다. 대대로 전주(全州)에 거주했던 때문에 평소부터 임금에게 마

    음을 두어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승(中丞)에서 외

    직(外職)으로 나가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가 되었다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

    使)로 승진됐으며, 또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어 병기(兵器)를 제조하니,

    사람들이 그 정교함을 칭찬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부성군(富

    城君)에 이르고, 나이는 50세였다. 아들은 심도원(沈道源)이다. …(후략)

    ■ 신문고로 고발 당한 검교 참찬 조호를 평주로 귀양 보내다. 1401년(태종 1) 8월 13일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조호(趙瑚)를 평주(平州)로 귀양보내었

    다. 처음에 호가 지금주사(知錦州事) 안속(安束)과 더불어 헌부(憲府)에 장획(臧獲)

    을 쟁송(爭訟)하니, 헌부에서 속을 옳게 여기었다. 호가 노하여 헌부를 힐난하고 욕

    하였다. …(후략)

    ■ 양인을 호소하는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은 헌부의 관리들을 귀양보내다. 1409년(태종 9) 4월 18일

    “지평(持平) 유박(柳博)을 금주(錦州)로 …(중략)… 유배시키고 …(중략)… 지평

    유박은 사헌부의 장무(掌務)로 있으면서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여 심복(審覆)하지

    아니하고, 공공연히 고장(告狀)을 물리쳐서, 억울함을 품고도 호소하지 못하도록

    하여, 마침내 예궐(詣闕)하여 신문고를 쳐서 신청(宸聽)을 번거롭게 하는 데까지 이

    르게 하였으니, 원하건대, 유사(攸司)에 내려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의

    정부에 내려 그 죄를 의논하여 유배시켰다.

    ■ 나주·금산 등 일곱 고을에 창고를 설치할 것을 전라 관찰사가 청하다. 1411년(태종 11) 9월 2일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금산(錦山)에 창고가 모두 차서 곡식을 쌓을

  • 524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곳이 없어 창고를 설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칠성군 윤저가 금주 땅에서 동석(銅石)이 산출됨을 보고하다. 1412년(태종 12) 4월 19일

    칠성군(漆城君) 윤저(尹柢)가 동발(銅鉢) 두 개를 바치고 또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전라도 금주(錦州) 땅에서 동석(銅石)이 산출한다 하오니, 원컨대

    캐어 오게 하소서.”

    전 삼척 군사(三陟郡事) 윤종정(尹宗貞)에게 명하여 캐도록 하였다.

    ■ 임실현에서 사냥을 하고자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몰이꾼을 징발하다. 1413년(태종 13) 9월 16일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명하여 구군(驅軍) 을 뽑아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임

    실현(任實縣) 지방에 금수(禽獸)가 많다는 말을 듣고 순행(巡幸)하고자 하여, 경상

    도·충청도에서 각각 1천 명씩과 전라도에서 2천 명을 본월 24일에 금주(錦州) 남제

    원(南濟院)에 모이도록 기약하였는데, 각각 10일 양식을 싸 오게 하였다. …(후략)

    ■ 대신들이 임금의 임실에서 사냥하는 것을 말리다. 1413년(태종 13) 9월 20일

    (전략)… “신이 일찍이 거가(車駕)가 장차 전라도로 향하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

    문에 공억(供億)을 모두 남쪽 고을에 준비하여 두었습니다. 만약 다시 북도(北道)에

    판비(辦備)하게 한다면 제때에 미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고, 김여지(金汝知)가 임금의 뜻을 맞추어서 또한 말하였다.

    “그밖의 공억(供億)의 준비는 쉽게 혹은 간단히 마련됩니다. 장막(帳幕)은 이미

    진주(珍州)에 보냈으니, 옮겨 설치할 수가 없겠습니다.”

    임금이 정부에 이르기를,

    “옛날의 현주(賢主)는 간(諫)하는 것을 듣고 그만 둔 자가 많았다. 이제 내가 비록

    본심(本心)이 아니나 감히 면종(勉從)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가 공억(供億)을 제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임실(任實)로 향하였다. …

    (후략)

    ■ 유성을 떠나 임금이 전라도 진주 원산의 들에 머물다. 1413년(태종 13) 9월 22일

    어가(御駕)가 온정(溫井)을 출발하여 전라도 진주(珍州) 원산(猿山)의 들에 머물

    렀다. 임금이 태조(太祖)의 태산(胎山)을 보고 말하였다.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25

    “태실(胎室)에 봉사(奉祀)하는 것은 비록 옛 의례(儀禮)가 없다고 하나, 의당 지

    나가는 산천(山川)에 예로 제사지내는 것을 의방(依倣)해야 할 것이다.”

    내시(內侍)를 보내어 태조의 태실에 제사지냈다. 시종(侍從)한 여러 신하와 군사

    들에게 4일 식량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3도(三道)의 구군(驅軍)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 대간들을 외방에 부처하다. 1414년(태종 14) 7월 8일대간(臺諫)의 관원을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였다. 임금이 대간의 관원을 순

    금사(巡禁司)에 가두고 그 까닭을 형문(刑問)하고자 하여, 대언(代言)으로 하여금

    당직 관원(當直官員)을 갑자기 소환하게 하니, 대언이 아뢰었다. …(중략)… 순금사

    (巡禁司)에 명하여 대간의 관원을 불러 오도록 하여 왕패(王牌)를 내보이고 아울러

    자원 안치(自願安置)시켰는데, 집의(執義) 이작(李作)은 부여(扶餘)에, 장령(掌令)

    복간(卜僴)은 대흥(大興)에, 이유희(李有喜)는 춘천(春川)에, 지평(持平) 이맹진(李

    孟畛)은 충주(忠州)에, 이문간(李文幹)은 신은(新恩)에, 사간(司諫) 윤회종(尹會宗)

    은 진산(珍山)에 …(후략)

    ■ 사사로이 사냥하고 사람을 때린 지금산군사 송희경을 과죄하다. 1415년(태종 15) 5월 17일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송희경(宋希璟)에게 장(杖) 1백 대를 때렸다. 송희경이

    고을 아전[郡吏]을 시켜 사냥꾼을 데리고 사냥을 하게 하였으니, 정향포(丁香脯)를

    공상(供上)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고을 아전 두 사람이 그 잡은 짐승을 사사로이

    차지하고 바치지 아니하자, 송희경이 노하여 곤장을 때리니, 두 사람이 다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장(杖)에 처한 것이었다.

    ■ 무고죄로 전 지금산군사 송희경의 직첩을 거두고 장 1백대를 속받게 하다. 1416년(태종 16) 1월 17일

    전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송희경(宋希璟)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장(杖) 1백 대

    를 속(贖)받게 하였다. 처음에 송희경이 금산(錦山)에 임명되었을 때 전렵(畋獵)을

    맡아 보는 아전이 잡은 노루와 사슴을 숨긴다고 의심하여 장(杖)을 때려서 죽은 자

    가 2인이었다. 감사(監司)가 이를 입안(立案)하여 파직하고 속(贖)을 거두었더니,

    송희경이 말하기를, “아전은 실지로 병사(病死)한 것이요, 장(杖)으로 인하여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고, 상서(上書)하여 변명하였다. 명하여 경차관(敬差官)과 행대 감찰(行臺監察)

    을 파견시켜 그 고을로 가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니, 송희경이 도리어 반좌(反坐)되

  • 526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었다.

    ■ 황단유와 박송비 자손의 노비 송사를 담당했던 형조·대간의 관원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하다. 1417(태종 17) 6월 9일

    갑오년의 형조(刑曹)·대간(臺諫)의 관원과 지금의 형조·대간의 관원들을 의금

    부에 하옥시켰다. 육조 판서(六曹判書)·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를 불러 말하였

    다. …(중략)… 의금부에 명하여, 지수천군사(知隨川郡事) 김희(金熙), 나주 교수관

    (羅州敎授官) 이초(李椒), 지진산군사(知珍山郡事) 유선(柳善), 전 헌납(獻納) 정곤

    (鄭坤)을 잡아 오게 하니, 김희와 이초는 갑오년의 형조 정랑이었고, 유선은 장령이

    었으며, 정곤은 헌납이었기 때문이었다.

    ■ 각군에 정배된 내시나 수령들에게 휴식처를 주거나 후대하는 것을 금하다.

    1419년(세종 1) 4월 2일(전략)… 금산 충군(錦山充軍) 육영생(陸英生) 들에게 정배된 내시나 수령들에게

    휴식처를 주거나 후대하는 것을 금하다.

    ■ 수강궁에 문안하다. 1419년(세종 1) 5월 27일 (전략)… 수강궁에 문안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산선(繖扇)받는 것을 거

    두라 하였다. 상왕이 환자 엄영수(嚴永守)는 내시부의 종에, 양자산(梁自山)은 원평

    (原平) 관노로, 김해(金海)는 해주 군(軍)으로, 육영생(陸永生)은 금산(錦山)의 군정

    (軍丁)에 속하게 하였다. …(후략)

    ■ 효자·절부·의부·순손의 실적을 찾아 아뢰게 하다,

    1420년(세종 2) 1월 21일(전략)…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중외에 교서를 내리어, 효자·절부(節婦)·의부

    (義夫)·순손(順孫)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實迹)으로 아뢰라고 했더니 금산(錦山)

    의 부정(副正) 임영순(林英順)의 처 한(韓)씨는 나이 26세에 지아비가 죽었으나, 지

    금까지 절개를 지켜 이제 나이 61세이다. 임영순의 처 한씨에게는 그 마을에 정문

    (旌門)을 세워 포창하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게 하라고 하였다…(후략)

    ■ 유정현 등이 홍여방·송인산·허척 등의 대역죄를 청하다. 1420년(세종 2) 4월 26일

    (전략)… 송인산이 말하기를, ‘내가 경기 경력(京畿經歷)이 되어 상왕의 거둥이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27

    백성에게 번거로운 폐해가 되지나 않을까.’ 하니, 박서생·허척은 옳다 그르다 함

    이 없었고, 정연은 말하기를, ‘상왕께서는 이미 왕위를 내어 놓으시고 한가로이 계

    시는 터인즉, 거둥하시는 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인가.’…(중략)… 여방은 장기(長

    鬐)로, 서생은 상주로, 인산은 익산으로, 정연은 진산으로, 허척은 영천(永川)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 사헌부 집의 박안신 등이 송희경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다. 1422년(세종 4) 1월 10일

    사헌부 집의(執義) 박안신(朴安臣) 등이 소(疏)를 올려 송희경(宋希璟)은 일찍이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을 때, 형을 굽혀 두 사람을 죽였는데, 지금은 지함양군

    사(知咸陽郡事)가 되었으니, 원컨대 이미 내린 명령을 회수하여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고, 그 법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금천 부원군 박은의 졸기 1422년(세종 4) 5월 9일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

    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

    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석은 사람이 지나치게 알아주심을 받아, 금주(錦州) 3년의 임기를

    면하고 조정으로 들어와 문하부(門下府) 간관(諫官)의 영광을 받았는데, 갑자기 동

    료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실로 나의 잘못으로 스스로 취한 것이나, 다시 군직(軍

    職)을 받게 되었으니, 오직 공(公)이 용서한 덕택으로 생각합니다. …(후략)

    ■ 목공을 곤장으로 죽인 지금산군사 유익지를 파면하다. 1423년(세종 5) 1월 22일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유익지(柳翼之)를 파면시켰으니, 목공(木工)을 곤장으

    로 쳐서 죽인 때문이었다. …(후략)

    ■ 지금산군사 등을 인견하다. 1425년(세종 7) 12월 7일 임금이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이희약(李希若)을 인견하였다. …(후략)

    ■ 영암의 이두언·손발·금음동이 사람을 구타 살해하였으므로 교형에 처하다. 1431년(세종 13) 10월 13일

  • 528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금산(錦山)의 장교(將校) 손발(孫發)이 사람을 구타 살해하였으므로 교형에 처하

    다. …(후략)

    ■ 지금산군사 황경돈이 사조하니 인견하고 수령의 직책을 다할 것을 부탁하다. 1433년(세종 15) 12월 4일

    지금산군사 황경돈이 사조하니 인견하고 수령의 직책을 다할 것을 부탁하다.

    ■ 지진산군사 김유보가 사조하니 백성을 사랑할 것을 당부하다. 1434년(세종 16) 11월 28일

    지진산군사 김유보(金兪甫)가 사조하니, 불러 보고 말하기를, “이 백성들을 사랑

    하여 기르는 데에 그 마음을 다하라.”하였다.

    ■ 의정부와 육조에서 답험손실법과 공법에 대하여 의논하다. 1438년(세종 20) 7월 10일

    (전략)… 공법에 대한 가부를 경상·전라도 인민에게 묻는다 하였는데 겸판호조

    사(兼判戶曹事) 안순(安純)이 경상도 안동(安東)과 전라도 금산(錦山)의 인민들은

    반드시 이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안동과 금산은 그 토

    지의 품질이 척박한 곳이온데, 만약 똑같이 세(稅)를 거두게 되면 어찌 원성이 없겠

    습니까. 또 경상·전라 등지라 할지라도 어찌 해마다 상등(上等)이 될 수 있겠습니

    까. 이는 왕년을 고험해 보면 가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후략)

    ■ 금산 사람 윤성대가 본군과 용담현 및 진천에 금·은·구리·철·납 등이 생산됨을 아뢰다. 1440년(세종 22) 1월 15일

    전라도 금산(錦山) 사람 윤성대(尹成大)가 와서 아뢰기를,

    “본군과 용담현(龍潭縣)에 금·은·구리·납·철이 생산되고, 신이 일찍이 채굴

    하여 철을 제련하여서 시험하였사옵니다.”

    하고, 또 석웅황(石雄黃)을 바치면서 아뢰기를,

    “본군의 중 혜오(惠悟)의 집 북쪽에서 생산되는데, 혜오가 말하기를, ‘이것이 주

    홍(朱紅)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윤성대(尹成大)와 은공(銀工)을 역마에 태워서 전라도·충청

    도로 보내게 하고, 인하여 양도 관찰사에게 전지하기를,

    “성대의 말을 듣고 채취하여 시험하고, 품질이 좋은 것을 가려서 보내라. 그 금·

    은·구리·납·석웅황의 산출이 많고 적음과 역사(役事)하기가 어렵고 쉬운 것을

    아울러 아뢰고, 다른 사람은 채취하지 못하게 하라.”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29

    하였다.

    ■ 형조에서 사노 장명 등의 처벌을 아뢰다. 1440년(세종 22) 9월 24일형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진산(珍山) 죄수인 사노(私奴) 장명(長命)이 사람을

    구타하여 죽였으니, 율대로 교수형(絞首刑)에 처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

    랐다.

    ■ 의정부에서 전제를 고쳐 상정할 일과 개혁할 조건을 상신하다. 1445년(세종 27) 7월 13일

    의정부에서 호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상신하기를,

    “이제 전제(田制)를 고쳐 상정(詳定)할 일과 개혁할 조건을 고사(考査) 연구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중략)… 1. 공수 위전(公須位田)은 지금 대·중·소로

    (小路)로 나누어 유수부(留守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관(牧官)의 대로(大路)는

    30결, 중로(中路)는 25결, 도호부(都護府)·지관(知官)의 대로는 25결, 중로는 15

    결, 소로는 10결을 절급(折給)하고, 각 고을 안의 공수전(公須田)은 모두 다 혁파(革

    罷)하여 없앨 것.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를 제외하고 6도(道)의 주(州)·

    부(府)·군(郡)·현(縣)을 대·중·소로 나누는데 …(중략)… 금산(錦山)·진산(珍

    山)은 소로(小路)로 할 것 …(후략)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전라도 진산군에서 자황 모양의 돌을 캐어 보내도록 유시하다. 1447년(세종 29) 윤4월 23일

    전라도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

    “《본초(本草)》에 이르기를, ‘웅황(雄黃)은 무도산(武都山) 골짜기 돈황산(燉煌

    山) 남쪽에서 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황(雌黃)은 무도산(武都山) 골짜기에

    서 나는데, 웅황(雄黃)과 더불어 같은 산에서 나되, 그 산 음지에 금(金)이 있어서

    금의 정기(精氣)가 쏘이면 자황(雌黃)이 난다.’ 하였다. 그런즉 두 물건이 다 무도산

    (武都山)에서 나는데, 웅황(雄黃)은 산 남쪽에서 나고 자황(雌黃)은 산 북쪽에서 나

    는 것이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남쪽 가마괴목[加麽塊項]이라는 데서 자황(雌

    黃)이 난다 하니, 또한 웅황(雄黃)도 있을 것인즉, 그 산 남쪽과 북쪽에서 나는 여러

    가지 자황(雌黃) 모양의 돌을 한 짐바리[一駄] 캐어 보내라.”

    하였다.

    ■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해 소나무에 관한 감독 관리에 대해 상신하다. 1448년(세종 30) 8월 27일

  • 530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의 첩정에 의거하여 상신하기를,

    “병선(兵船)은 국가의 도둑을 막는 기구이므로 배를 짓는 소나무를 사사로 베지

    못하도록 이미 일찍이 입법을 하였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가만히 서로 작벌(斫伐)

    하여 혹은 사사로이 배를 짓고, 혹은 집재목을 만들어 소나무가 거의 없어졌으니

    실로 염려됩니다. 지금 연해(沿海) 주현(州縣)의 여러 섬[島]과 각 곶(串)의 소나무

    가 잘되는 땅을 방문하여 장부에 기록하였는데, 금산(錦山) 등 상항(上項) 주현(州

    縣)의 도(島)와 곶(串)에 전부터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나

    무가 없는 곳에는 그 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관원을 보내어 심게 하고서 옆 근처에

    있는 수령(守令) 만호(萬戶)로 하여금 감독 관리하고 배양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

    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후략)

    ■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羅州牧)(전략)…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으로 고

    쳤다. 신라 말년에 견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일컫고 모두 그 땅을 차지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금산(錦山) 사람들이 후고려왕(後高麗王) 궁예(弓裔)에게

    붙으니,【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원년 신미.】 …(후략)

    ■ 세종실록지리지 용담현(龍潭縣)(전략)… 월경(越境)은 진안(鎭安) 주호며(走乎旀)의 땅이 현의 남쪽에 들어와 있

    고, 금산(錦山)의 소리(所理)·대곡(大谷) 등의 땅이 현의 동쪽에 들어와 있다. …

    (후략)

    ■ 세종실록지리지 장수현(長水縣)(전략)…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安陰)에 이르기 37리, 서쪽으

    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23리, 남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금산(錦山)

    에 이르기 46리다. …(후략)

    월경(越境)은 금산군(錦山郡)의 안성소(安城所)의 땅이 현의 북쪽 이흘음리(伊迄

    音里)와 양악소(陽岳所) 사이에 들어와 있다.

    ■ 세종실록지리지 무주현(茂朱縣)상산 석성(裳山石城)은 본래 무풍(茂豊) 지경에 있었는데, 중간에 금산(錦山)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도로 본현에 환속(還屬)시켰다.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31

    ■ 의정부에서 봄·가을에 1도의 1도회에서 염초를 구워내도록 아뢰다. 1450년(문종 즉위년) 9월 19일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군기감(軍器監)에서 염초(焰硝)를 구워 내는 방법은 이보다 먼저 각도(各道)에

    서 도회(都會)를 두고 일정한 장소[常所]로 정하였으니, 다만 도회(都會)의 읍(邑)

    만 해마다 폐해를 받을 뿐 아니라, 소속된 군현(郡縣)이 길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

    로, 무릇 염초(焰硝)에 소용되는 흙과 준비해 두었다가 쓰는 잡물(雜物)을 수송 운

    반하는 즈음에는 온 경내(境內)가 소요(騷擾)하여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다단(多端)

    하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각기 그 부근 지방에 도회(都會)를 나누어 두고는, 해마다

    봄·가을에 1도(道)의 1도회(都會)에서 염초(焰硝)를 구워 내게 하고, 한 차례 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번갈아 가면서 휴식(休息)하도록 하소서.

    …(중략)…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고산현(高山縣)을 1도회(都會)로 삼아서 전주(全

    州)·금산(錦山)·진산(珍山) …(후략)

    ■ 지진산군사 황유와 여러 현감들이 사조하니 병 때문에 인견치 못하다. 1451년(문종 1) 7월 16일

    지진산군사(知珍山郡事) 황유(黃瑜)·연산 현감(連山縣監) 곽음(郭廕)·예안 현

    감(禮安縣監) 정보(鄭保)·양구 현감(陽口縣監) 박종(朴種)·봉화 현감(奉化縣監)

    강여위(姜汝爲)가 사조(辭朝)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병 때문에 친히 인견(引見)하지 못한다. 각각 제 고을에 가서 공경히 보살

    피라.”

    하였다.

    ■ 사헌부 집의 박팽년이 금산에 부임했던 허안석의 수양자 문제를 아뢰다. 1451년(문종 1) 9월 4일

    (전략)…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박팽년(朴彭年)이 아뢰기를,

    “허안석(許安石)이 허모지리(許毛知里)라는 첩(妾)의 아들이 있어 금산(錦山)에

    부임하였을 때, 그 향교(鄕校)에 취학케 하였습니다. 뒤에 허안석이 죽고 그의 처

    (妻) 이씨(李氏)가 허안석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본부(本府)에서 이를 추핵

    (推覈)하였으나 여러 해 동안 그 결단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진정 허안석의

    아들인데도 수양자(收養子)의 속임에 떨어져 밝혀지 못한다면, 그 관계가 가볍지

    않습니다. 청컨대 이를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삼성(三省)이 합동하여 국문(鞫問)토

    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532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허안석이 살아 있을 때 그 아들이라고 징험할 만한 계권(契券)이라도 있더냐?”

    하였다.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비가 죽은 뒤에 증명하기 어려운 사람을 가지고 억지로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이에 황보인(皇甫仁)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허안석의 집에 본래 재물이 넉넉하니, 이제 그 처가 수양자의 오도(誤導)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의금부에 회부하여 추핵해 밝히는 것이 온당합니다.”하였다. …

    (후략)

    ■ 허모지리가 허안석의 첩자인지의 여부를 변별해 다스려서 계문하도록 하다. 1451년(문종 1) 9월 7일

    (전략)…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사헌부(司憲府)에서 추핵하던 허모지리(許毛知里)가 죽은 지군사(知郡事) 허안

    석(許安石)의 첩자(妾子)인지 여부의 진위(眞僞)를 대성(臺省)과 함께 변별해 다스

    려서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당초 허안석의 처 이씨(李氏)에게 충개(蟲介)라는 계집종[婢]이 있었는데

    그의 지아비 김승재(金升才)는 이씨의 아우 이백자(李伯孜)의 노(奴)였다. 허안석

    도 역시 충개와 은밀히 사통하고 있었는데, 충개가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허모지

    리였던 것이다. 허안석이 죽으니 이씨가 허안석의 자식이 아니라고 배척하여 허모

    지리가 사헌부에 고소하기를, ‘내가 사실 허안석의 아들입니다. 원컨대 그 제사(祭

    祀)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이씨에게 물으니, 이씨의 대답

    이 ‘김승재의 소생이라.’ 하여 10여 년을 두고 판결이 나지 않았다. 그 증인(證人)

    들도 혹은 허안석의 자식이라 하고, 혹은 김승재의 자식이라고 하였는데 허안석의

    자식이라고 이르는 자는, ‘허안석(許安石)이 허모지리를 사랑하여 금산(錦山)에 있

    을 때 향교(鄕校)에서 글을 읽게 하였고 일찍이 손님을 대하여서도 역시 손가락으

    로 가리켜 말하기를, 「내 자식이라.」고 하였는데, 특히 이씨가 그의 양녀(養女) 권

    씨(權氏)를 사랑하여 그 자산(資産)과 노비(奴婢)를 다 양녀에게 전하려고 김승재

    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고, 김승재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자는 말하기를,

    ‘허모지리가 허안석이 죽은 뒤에 오랫동안 성을 김(金)으로 일컬어 왔고 공가(公家)

    의 문서까지도 역시 김으로 일컬어 왔는데, 김승재가 죽은 뒤에 김승재의 후처(後

    妻)와 재물을 다투다가 이를 한성부(漢城府)에 소송하여 얻었으니 이제 와서 허안

    석의 자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 자산과 노비를 얻으려는 심산이라.’고 하였다. 이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33

    에 이르러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변별케 한 것이다. …(후략)

    ■ 허후가 주자본 《좌전》 1부를 바치니 승도와 한가한 사람을 모집하여 간행하게 하다. 1453년(단종 1) 6월 5일

    (전략)… 처음에 좌참찬(左參贊) 허후(許詡)가 주자본(鑄字本) 《좌전(左傳)》 1부

    (部)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글자가 커서 읽어 보기에 편할 것이니, 청컨대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

    금 교정(校正)하도록 하여, 전라도(全羅道)에 보내어 판각(板刻)을 간행하게 하소

    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금산 군사(錦山郡事) 권기(權技)가 이미 판목(版木)을 준비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 김연지(金連枝)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승도(僧徒)와 한인(閑人)들을 모집하여 처음으로 간행(刊行)하게 하되, 절대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또 수시로 인쇄하여 바치라.”

    하였다. …(후략)

    ■ 의정부에서 여러 도의 도회소에서 만드는 군기의 일정 액수를 정하기를 청하다. 1453년(단종 1) 6월 9일

    의정부에서 병조(兵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라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 여러 도(道)의 도회소(都會所)에서 만드는

    군기(軍器)가 일정한 액수가 없어서 감련관(監鍊官)의 하는 데에 따라서 그것을 만

    들므로 혹은 지나치게 많아서 폐단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중략)… 전라도

    (全羅道)는 전주 도회소(全州都會所)에서 본주와 금산(錦山)·여산(礪山)·고산(高

    山)·진산(珍山)·무주(茂朱)·용담(龍潭)·진안(鎭安)·장수(長水) 등 9개 고을

    이 갑(甲) 5부(部), 주(胄) 5정(頂), 각궁(角弓) 25장(張), 장편전(長片箭)·궁대(弓

    帒)·나도 통아(羅韜筒兒) 각각 25부(部)요, …(후략)

    ■ 의정부에서 효자·열녀 등을 아뢰다. 1455년(단종 3) 2월 29일(전략)… 금산군(錦山郡)의 고 주서(注書) 길재(吉再)의 딸은 유학(幼學) 이효성

    (李孝誠)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舅姑]를 섬기기를 부모(父母)를 섬기듯이 하였습

    니다. 26세에 그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자, 모든 상제(喪制)에 관계되는 일을 한결

    같이 《가례(家禮)》에 따르고 부도(浮屠)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 시아버지가 이효성

    의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여러 아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으나, 길씨(吉氏)

    의 효성(孝誠)에 감복하여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길씨(吉氏)가 그 뜻을

  • 534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알고서 시아버지에게 다 돌려주고 자기의 노비(奴婢)를 거느리고 봉양(奉養)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시부모가 감복하여 뉘우쳐서 그 노비와 전지를 빼앗지 않았습니

    다. 정사년에 이르러 그 어미가 병이 나자, 친정 집으로 돌아와서 곁에서 모시다가

    〈어미가〉 죽게 되자 그대로 머물렀지만, 매 절기(節氣)에 반드시 의복(衣服)과 맛있

    는 음식을 갖추어서 돌아가 시부모를 뵈었습니다. 그 오라비 길사순(吉師舜)이 서

    울에서 벼슬살이할 때에 길씨(吉氏)와 그 언니 김석정(金石精)의 처(妻)가 동심(同

    心)으로 그 양미(糧米)를 보내 주었습니다. 길사순이 죽자 아들이 모두 어리고 약하

    니, 조카를 시켜 시체를 맞아 와서 집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또 조카로 하여금 상례

    (喪禮)를 주장하게 하였고, 길씨(吉氏)는 길사순의 아내와 같이 거처하면서 상복(喪

    服)을 기년(期年) 동안 입었습니다. 또 김석정(金石精)의 처(妻)가 죽자 3년 동안 심

    상(心喪)하였습니다. 또 시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몸소 스스로 약(藥)을 받들었고,

    죽게 되자 울다가 눈이 어두워졌으며, 여러 아들들이 불사(佛事)를 행하려고 하였

    으나, 길씨(吉氏)가 장자(長子)의 아내로서 먼저 삭제(朔祭)를 행하니, 여러 아들들

    이 이로 인하여 감탄하고 깨닫고서 다만 삭망전(朔望奠)만을 행하였습니다.

    〈위의 사람들은〉 그 부녀(婦女)로서의 행동이 가상(可賞)하니, 마땅히 아울러 복

    호(復戶)하소서 …(후략)

    ■ 한남군 이어(李 ) 등을 귀양보내다.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한남군 이어(李 )를 금산(錦山)으로 귀양 보내다. …(후략)

    ■ 병조에서 각도의 내지에도 거진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에 분속시킬 것을 청하다. 1455년(세조 1) 9월 11일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각도(各道) 연해(沿海)의 요해지(要害地)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그 방어를 견고히 하고 있으나, 내륙의 주현(州縣)에는 아직 진을 설치하지 않

    아서 만약 구적(寇賊)이 발생하여 변진(邊鎭)이 감히 이를 막지 못하게 되면, 반드

    시 마구 들어와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밟는 것처럼 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청컨대 내지(內地)에도 적당히 요량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근방(近

    方)의 여러 고을을 중익(中翼)·좌익(左翼)·우익(右翼)에 분속시키도록 하소서.

    그 익(翼)을 나눌 여러 고을과 절목(節目)은 뒤에 갖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중

    략)… 전라도(全羅道)의 전주도(全州道)는 그 중익을 전주(全州)·여산(礪山)·익

    산(益山)·금구(金溝)로 하고, 좌익은 금산(錦山)·진산(珍山)·무주(茂朱)·용담

    (龍潭)·고산(高山)으로 하며, 우익은 김제(金堤)·만경(萬頃)·태인(泰仁)·정읍

    (井邑)으로 합니다. …(후략)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35

    ■ 의금부에서 금성 대군 등을 분산 안치하고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따르다. 1456년(세조 2) 6월 27일(을축)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지(傳旨)를 반들어 이영(李瓔)을 전라도 금산(錦山)에, 안치(安置)하니,

    청컨대 그 고을의 수령에게 미리 거처할 곳을 수리하게 하되, 난간·담장과 문호

    (門戶)를 될 수 있는 대로 높고 견고하게 하고, 내려간 뒤에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로

    지키게 하여 외간 사람들과 서로 통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후략)

    ■ 경상·전라도 관찰사에게 유배된 종친에게 술과 고기를 줄 것을 명하다. 1456년(세조 2) 11월 8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효문(曹孝門)·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

    使) 송처관(宋處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김수산(金壽山)을 금산(錦山)에

    보내어 이어(李 )에게 술을 주려고 하니, 경은 술과 고기를 판비(辦備)하여 붙여

    보내어 먹이게 하라.” 하였다.

    ■ 경상·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안치된 종친에게 여름옷 등을 주게 하다. 1457년(세조 3) 5월 9일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치

    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금산(錦史)에 안치(安置)한 이영(李瓔)과 그 아내가

    있는 각처(各處)에 여름 옷을 보내니 동봉(同封)한 사목(事目)을 상고하여 나누어

    주고, 또 감영(監營)에 있는 유둔(油芚)을 각각 2장(張)씩 주도록 하라.” 하였다.

    ■ 경상·전라 관찰사에게 도내에 안치된 종친의 금방을 엄하게 할 것을 명하다. 1457년(세조 3) 6월 28일

    전라관찰사에게 “도내 금산(錦山)에 안치된 이영(李瓔)의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

    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 하였다. …(후략)

    ■ 형조에 명하여 조석문·강맹경·박종우 등에게 계집종을 내려 주다. 1457년(세조 3) 8월 21일

    금산에 영속한 계집종 소사(召史)를 전 제학(提學) 윤사윤(尹士昀)에게 내려 주

    고, 금산(錦山)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소근이(小斤伊)를 부정(副正) 홍순손(洪順

    孫)에게 내려주었다. …(후략)

  • 536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다. 1457년(세조 3) 10월 20일

    전라도(全羅道) 전주진(全州鎭)에는 여산(礪山)·용안(龍安)·함열(咸悅)·익산

    (益山)·고산(高山)·금산(錦山)·무주(茂朱)·용담(龍潭)·진안(鎭安)·금구(金

    溝)·태인(泰仁)을 속하게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전라도 관찰사에게 금산군에서 개간한 조학사의 음자 천자판을 올려 보내도록 하다. 1458년(세조 4) 2월 4일

    (전략)… 승정원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금산군(錦山郡)에서 개간(開刊)한 조학사(趙學士)의 음자 천자판(陰字千字板)

    을 올려 보내라.” 하였다. …(후략)

    ■ 금산에 안치된 이영과 광주에 안치된 정종과 그 아내에게 3절기 의복을 내리다. 1459년(세조 5) 5월 29일

    (전략)… 금산(錦山)에 안치된 이영(李瓔)과 그 아내에게 3절기의 의복을 내려 주

    었다.

    ■ 병자년에 유구국으로 표류했던 양성·고석수를 유구국 사신이 데리고 오다. 1461년(세조 7) 6월 8일

    금산(錦山)에 사는 사노비(私奴婢) 고석수(高石壽) 등 10인이 병자년 1월에 제주

    (濟州)로부터 배를 타고 오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유구국 사신 중

    [僧] 덕원(德源)이 고석수를 데리고 왔으므로,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공궤(供饋)

    하게 하였다. 임금이 양성 등을 인견(引見)하고 표류한 연유 및 지형(地形)·풍속

    (風俗)을 묻고 좌승지(左承旨) 한계희(韓繼禧)에게 이르기를, “자세히 묻고 갖추 기

    록하여 아뢰라.”하였다.

    ■ 천안 군사를 면하려 한 최청강을 공신적에서 삭제하고 장 1백에 진산 관노로 영속시키다. 1462년(세조 8) 7월 11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상인(喪人) 최청강(崔淸江) …(중략)… 원종 공신적(原從功臣籍)에서 삭제하고,

    장(杖) 1백에, 진산 관노(珍山官奴)에 영속(永屬)시키도록 하였다.

    ■ 병조에서 군기를 상정하여 아뢰다. 1466년(세조 12) 7월 12일 병조(兵曹)에서 군기(軍器)를 상정(詳定)하여 아뢰기를, …(중략)… 금산(錦山)·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37

    에는 각기 향각궁(鄕角弓) 46장(張) …(후략) 이었다.

    ■ 전라도 관찰사에게 진산에서 산출되는 석자황은 더 채취하지 말 것을 명하다. 1468년(세조 14) 1월 10일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

    仁)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진산(珍山)에서 산출(産出)하는 석자황

    (石雌黃)은 더 채취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명하여 양순석 및 전라도의 금산 관노로 영속시킨 조명을 방명하게 하다. 1469년(예종 1) 4월 11일

    (전략)… 명하여 전라도의 금산(錦山)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킨 조명(趙銘)을

    방명하게 하였다. …(후략)

    ■ 병조에서 지금의 군액 및 분번할 수와 3도 군정의 감액할 수 등을 기록하여 아뢰다. 1470년(성종 1) 2월 30일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지를 받들건대, ‘국가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니, 군액(軍額)이 점점 줄

    어 들었다. 세조(世祖)께서 국가 대계를 위하여 대신을 보내어 한산(閑散)한 사람들

    을 찾아 모아서 군액을 보충하게 하였으나 초쇄(抄刷)할 때에 너무 상세한 것을 면

    치 못하였고, 백성들도 안일한 데에 습관이 되어 혹 도피하는 자가 있었다. 이로 말

    미암아 군보(軍保)가 충실하지 못하고, 번상(番上)이 빈삭하여 농사에 힘쓸 틈이 없

    어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기니, 쓸데 없는 군사는 도태하여 버리고, 번차(番次)를

    다시 정하여 군사와 백성을 유족하게 함으로써 세조의 군사를 족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 등이 자세히 참고하건대, 제색

    (諸色)의 군사가 정한 액수가 너무 많아서 액수를 채우기가 쉽지 않고, 아울러 4번

    (番)으로 서로 교대하게 하니, 쉬는 날이 많지 않아서 점점 피폐(疲弊)하게 됩니다.

    또 을유년에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의 군사를 병적에

    올릴 때에 밭[田] 5결(結)로 한 정부(丁夫)에 준(准)하고, 고공(雇工)·백정(白丁)을

    아울러 계산하여 보(保)를 만들었으므로, 그 액수는 비록 많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

    은 없으니, 고쳐서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황

    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영안도(永安道) 등의 도는 그때 군안(軍案)을 미처

    만들지 못하였는데, 전정(田丁)·고공(雇工)·백정(白丁)을 아울러 계산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 액수의 많고 적은 것이 알맞으니, 마땅히 예전 그대로 하소서.

  • 538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다만 위의 항목에 제도(諸道)·제읍(諸邑)의 군사는 정한 액수가 없으므로, 이것으

    로 인하여 번상(番上)이 가지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군액(軍額) 및 분번(分番)할 수

    와 3도(道) 군정(軍丁)의 감액(減額)할 수와 아울러 응당 행해야 할 사건을 가지고

    개록(開錄)하여 아룁니다. …(중략)… 전라도(全羅道)에 있어서 …(중략)… 금산(錦

    山)은 6백 24인데 지금 지금 5백 90으로 정하고, 진산(珍山)은 2백 50인데 지금 2백

    으로 정하고 …(후략)

    ■ 예조에서 절행한 사람들을 포상하여 풍속을 격려하게 할 것을 청하다. 1471년(성종 2) 6월 23일

    금산(錦山) 사람 양적(梁逷)의 처(妻) 삼덕(三德)은 지아비가 범에게 잡힌 바 되

    자, 삼덕이 왼손으로는 지아비의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짧은 낫을 휘둘러 범을

    치고 곡읍(哭泣)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범이 버리고 가거늘, 마침내 집 동쪽에 장

    사지내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시아비를 따라서 살았다 하니, 청컨대 소재관

    (所在官)으로 하여금 정문 복호(旌門復戶)하도록 하소서.

    ■ 병조에서 하삼도의 군액 감소 계획을 올리니 받아들이다. 1472년(성종 3) 2월 1일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번에 전지를 받으니, ‘제도의 군액(軍額)이 너무 많다. 병사는 많은 것보

    다 정한 것이 귀중하니, 재주를 시험하지 않은 군사는 그 수를 적당히 감하라.’ 하

    셨습니다. 신 등이 지난 경인년에 〈정한〉 제도의 정병(正兵)의 원액(元額)을 자세

    히 참고하여 보니, 총인원 8만 60가운데에서 하삼도(下三道)에는 5천 8백 60을 줄

    이고, 또 제진(諸鎭)의 유방군(留防軍) 1만 6천 5백을 제하고, 〈나머지〉 5만 7천 7백

    을 가지고 7번(番)으로 나누어 번마다 8천 2백 40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인

    (保人)을 정함에 있어서 전정(田丁)·고공(雇工)·재인(才人)·백정(白丁)과 각종

    장인(匠人)을 아울러 계산할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감한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제 위 항목의 5만 7천 7백 가운데에서 〈전정·고공 등〉 9천 7백을 감하고, 하삼도

    (下三道) 각 고을의 인물의 쇠잔하고 성함을 따라 골고루 줄여서 기록하여 아뢰니,

    청컨대 제도의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로 하여금 자세하게 상고하여 보인을 개정

    하고 군적(軍籍)을 만들게 하소서. 그런데 지난 번에 각종 군사[諸色軍士]의 거느리

    고 있는 인정(人丁)을 보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역사를 정한 까닭에 한 집

    안에 부자 형제(父子兄弟)가 각각 신역(身役)이 있어 서로 구원할 수가 없으니 진실

    로 가긍(可矜)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군사가 동거하는 아들·사위·아우는 비

    록 보수(保數)보다 많다 하더라도 2정(丁)에 한하고, 〈나머지는〉 다른 역사를 정하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39

    지 말게 하소서. 또 《대전(大典)》에는 원주(院主)와 동거하는 족친(族親) 2인(人)은

    다른 역사를 정하지 못하도록 되었지만, 그러나 그 소임이 매우 괴로우니, 청컨대 1

    인을 더하여 다른 역사를 정하지 말게 하소서. 각진의 유방군(留防軍)은 옛날에는 3

    번(番)으로 나누어 한 달[一朔]만에 서로 체대(遞代)하게 되어 다른 군인보다 힘들

    고 괴로우니, 이제 번상(番上)하는 정병(正兵) 4만 8천 가운데에서 5천 5백명을 덜

    어서 유진군(留鎭軍)에 이속시켜 4번(番)으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쉬게 하고, 그 나

    머지 정병 4만 2천 5백 명은 8번(番)으로 나누어 번마다 5천 3백 10명씩 번상(番上)

    하여 숙위(宿衛)하게 하소서 …(중략)… 금산(錦山)은 6백 2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

    를 줄여 5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5백 10으로 정하게 하였고 진

    산(珍山)은 2백 50 가운데에서 전에는 50을 줄여 2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

    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후략)

    ■ 이극균에게 전라도 진산군의 동철 산출을 엄격히 감시하라고 이르다. 1474년(성종 5) 윤6월 18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도내 진산군(珍山郡)에 동철(銅鐵)이 산출되는 곳은 일찍이 벌써 치부(置簿)하

    여 사람이 채취(採取)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근일에 강효순(康孝舜)이란 자가 취

    련(吹鍊)한다고 와서 고발하니, 반드시 이것은 이 군에서 동철(銅鐵)이 많이 산출하

    는데 방금(防禁)하는 것이 엄격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추성(秋成)한 뒤에 농가의

    틈을 기다려 본관으로 하여금 취련(吹鍊)하여 올리게 하고 산출함이 많고 적은 것

    을 자세히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 전라 감사 김순명에게 하서하여 금산군에 안치된 영의 신과 그릇들의 개선을 명하다. 1476년(성종 7) 9월 16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김순명(金順命)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지금 듣건대 금산군(錦山郡)에 안치(安置)시킨 영(瓔)이 신고 다닐 신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고, 먹을 물을 담아 두는 그릇이 또한 더러워져서 물을 먹을 수도 없다

    하니, 그 삶이 가련하다. 마땅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자주 개선하게 하여 일정한

    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 효자와 열녀인 이원곤·자비·전극공·중비 등에게 사환시키거나 정문 복호를 하다. 1476년(성종 7) 10월 7일

  • 540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예조(禮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하여 아뢰기를,

    “금산군(錦山郡) 사람 어모 장군(禦侮將軍) 이원곤(李元坤)은 그 어미를 봉양함

    에 있어서 자식의 직분을 다하여, 어미가 병들었을 때에 직접 탕약(湯藥)을 달여서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옷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어미가 죽자 곁을 떠나지 않

    고 거적 베개를 베고 슬피 부르짖으면서, 죽만 먹고 물 마시며 집안 일은 돌보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장사(葬事)를 치르고서는 묘(墓)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朝

    夕) 상식(上食)을 손수 올리고,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제(祭)를 드린 뒤에

    먹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하루 세 번씩 분향(焚香)하고, 저물녘에는 늘 묘 곁에 엎

    드려 모시며, 삼년상(三年喪)을 마치도록 한 번도 귀가(歸家)하지 않고 밤낮으로 호

    곡(呼哭)하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했습니다. …(중략)… 《대전(大典)》에 의하여 이원

    곤은 상(賞)으로 벼슬을 내리고 …(중략)…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예조에서 투항해 온 야인들의 처리에 대해 아뢰다. 1478년(성종 9) 3월 19일(신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에 나온 야인(野人) 들을 전라도 금산

    (錦山)에 배치하고, 부실(富實)한 민호(民戶)에서 보증을 해 주어서 아내를 얻게 하

    고, 가옥(家屋)과 전지(田地)를 주되, 3년 동안 한(限)하여 관(官)에서 의복과 식량

    을 주어 생업(生業)에 안정(安定)하게 하고, 매년 세말(歲末)에 생활하는 상태를 계

    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전라 감사 정난종에게 진산 북면 말흘현의 동·철광을 잡인이 캐는 것을 금하게 하다. 1482년(성종 13) 3월 1일

    전라도 관찰사 정난종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듣건대 도내(道內) 진산(珍山) 북

    면(北面) 말흘현(末屹峴)에 동(銅)과 철(鐵)이 서로 섞인 돌이 많이 생산된다 하니,

    잡인(雜人)들의 채취(採取)를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화의군 이영이 도움을 청하니 밭을 주도록 호조에 명하다. 1483년(성종 14) 6월 25일

    이영(李瓔)【곧 화의군(和義君)이다.】의 아들 이원(李轅)이 상언(上言)하기를,

    “아비 영(瓔)이 지난 을해년에 금산관(錦山官)에 안치(安置)된 뒤 은혜를 입어 여

    러 차례 방면(放免)되었지만, 다만 노비(奴婢)와 전산(田産)이 적몰(籍沒)된 나머지

    춥고 배고프며 괴로와서 살아갈 수 없으니, 원컨대 가엾게 살펴주소서.”

    하니, 호조(戶曹)에 명하여 밭을 주도록 하였다.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41

    ■ 효자 이원곤의 서용 문제 등을 논의하다. 1483년(성종 14) 12월 8일(전략)… “신은 사람을 추천하라는 명을 삼가 받았으나, 듣고 본 것이 적어서 성

    상의 뜻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은 매우 넓고 우리 나

    라는 작은데, 어찌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암혈(巖穴) 속에 숨어 있는 자가 있겠습니

    까? 다만 신이 듣건대, 무사(武士) 이원곤(李元坤)이라는 자가 금산(錦山)에 사는

    데, 모상(母喪)을 당하여 묘(墓) 옆에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고 집안 일

    은 돌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본도(本道) 감사(監司)가 일찍이 효자(孝子)로 천거(薦

    擧)하였다고 하니, 서용(敍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모두 효자의 집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행실이 아무

    리 착하다 하더라도 일을 다스리는 데에는 서투른 자가 있으니, 내가 마땅히 시험

    해서 쓰겠다. 무릇 사람이 말을 교묘하게 하여 명예를 취하는 자가 많은데, 일찍이

    임금 앞에서는 아무리 말과 의논을 잘하더라도 물러가서 능히 실천하는 자가 몇이

    나 되겠는가? 그러니 말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취할 수 없다. 사람을 아는 것을

    나는 매우 어렵게 여긴다.”

    하였다. …(후략)

    ■ 사평(司評) 신복의(辛服義)를 금산군(錦山郡)에 보내 불법을 살피게 하다. 1486년(성종 17) 12월 10일

    (전략)… 사평(司評) 신복의(辛服義)를 금산군(錦山郡)에, 보내어 불법(不法)을

    살피게 하였다. …(후략)

    ■ 금강산 사자암의 금은 불상을 훔친 자를 체포하게 하다. 1487년(성종 18) 9월 11일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금은 불상(金銀佛像)을 비밀리 금강산(金剛山)의 사자암(獅

    子庵)에 두고 금 50여 냥과 은 5,6백 냥을 썼는데, 근일에 내관(內官)을 보내어 살펴

    보니 불상이 다 없어지고 다만 그 옥대(玉臺)가 풀숲 사이에 버려져 있었다. 내 생각

    으로는, 전일에 복천사(福泉寺)에서 부처를 훔친 것을 고한 자가 반드시 이 일을 알

    듯하니, 의금부(義禁府)의 〈관원을〉시켜 가서 체포하게 하고, 경력(經歷) 강숙회(姜

    叔淮)를 진산(珍山)에 보내어 고한 사람 오을미(吾乙未)를 잡아 도사(都事) 안해(安

    該)와 함께 진도(珍島)에 가서 그 무리인 박은손(朴恩孫)을 체포하게 하고, 또 도사

    윤여림(尹汝霖)을 시켜 적승(賊僧) 지경(知冏)을 체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 542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 장례원에 이영 등의 첩 자식들을 종량시키도록 하다. 1489년(성종 20) 5월 14일

    장례원(掌隸院)에 전교하기를, “이영(李瓔)이 자기의 여종인 아난(阿難)을 첩으

    로 삼아 낳은 노(奴)인 건리동(件理同)과 비(婢)인 내은금(內隱今)을 첩으로 삼아 낳

    은 노(奴) 수달(修撻), 금산(錦山)의 관비(官婢)인 감지(甘之)를 첩으로 삼아 낳은 노

    (奴) 팽수(彭守) 및 건리동이 금산 관비 명가(命加)를 얻어 낳은 비(婢) 진금(眞金)

    과 유금(有金), 수달이 봉상시(奉常寺) 비(婢)인 제석(弟石)을 얻어 낳은 노(奴) 억년

    (億年)과 억만(億萬)을 영원히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 개성부 유수 유순·경기 관찰사 김제신 등에게 하서하여 북정 일정을 통지하다. 1491년(성종 22) 7월 4일

    (전략)…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성준(成俊)과 이계동(李季仝)을 부

    원수(副元帥)로 삼아, 금년 10월에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바로 그 굴혈(窟穴)을 공

    격하여 무찔러 없애버리고야 말겠다.

    지금 병부(兵符)를 보내니, 합해 조사하여 …(중략)… 무주(茂朱)·운봉(雲峯)·

    장수(長水)·진안(鎭安)·용담(龍潭)·금산(錦山)·진산(珍山)·고산(高山)·남원

    (南原)·임실(任實)·구례(求禮)·곡성(谷城)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초 9일에 길

    을 떠나서 9월 18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중략)…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

    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 사람이 어찌 이오로

    (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

    방 백성을 북방 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 금산군수 이집 등에게 한 자급을 더하다. 1493년(성종 24) 12월 24일이번 정사(政事)에서 …(중략)...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집(李緝)에게 …(중략)…

    모두 한 자급(資級)을 더하였는데,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염근(廉謹)하게

    봉공(奉公)한다고 계문(啓聞)하였기 때문이었다. …(후략)

    ■ 개월을 채우지 못했는데 승자된 진산군수 이철근을 개차할 것 등을 청하다. 1494년(성종 25) 7월 14일

    (전략)… “진산 군수(珍山郡守) 이철근(李鐵根)은 전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으로

    임기(任期)를 채우지 못하고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이제 4품(四品)의 직(職)을

    제수함은 심히 외람됩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임광재(任光載)의 말한 것을 보건대 정리(情理)에 먼 것이 심하다. 존금(存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43

    今)을 통간(通奸)한 일은 존금(存今)과 사건에 간여한 사람들이 모두 자복하였는데

    도 이제 바로 항거(抗拒)함이 이와 같으니, 저는 반드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어찌 형장(刑杖)할 수 있겠느냐?’고 이를 것이다. 그 행실이

    이와 같으니, 나는 아마도 그가 풍질(風疾)을 앓아서 그렇게 된 듯하다. 그러나 마

    땅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겠다. 임원준(任元濬)이 말한 일과 같은 것은 그것을 정

    원(政院)에 물어 보고, 이철근(李鐵根)의 일은 마땅히 이조(吏曹)에 물어보도록 하

    라.” 하였다. …(후략)

    ■ 금산 관비 매읍덕의 죄를 고하다. 1499년(연산 5) 10월 30일상참과 조계를 받았다. 승지 이손(李蓀)이 아뢰기를, “금산(錦山) 고을 관비(官

    婢) 매읍덕(每邑德)이 간부와 모의하여 본부 막손(莫孫)을 찔렀으니, 죄 능지(凌遲)

    에 해당하므로 삼복(三覆)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법대로 하라.” 하

    였다.

    ■ 금산 관비 매읍덕의 죄를 형벌을 논의하다. 1499년(연산 5) 12월 15일(전략)… 승지 이손(李蓀)이 아뢰기를, “금산(錦山) 고을 관비 매읍덕(每邑德)이

    간부(奸夫)인 향리(鄕吏) 이윤양(李閏陽)과 함께 본부 막손(莫孫)을 죽이려고 인후

    (咽喉)를 찔렀는데 죽지 않았습니다. 죄가 참대시(斬待時)에 해당하여 삼복하옵니

    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율대로 하라.” 하였다. 이손이 다시 아뢰기를, “이윤양

    은 비록 이미 사(赦)를 받았사오나 이윤양은 향리요, 막손은 관노(官奴)이오니, 향

    리와 관노는 종과 주인 사이와 같사온데 함께 고을에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향리로 죄를 범하여 먼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자는 물간사전(勿揀赦前)한다.’ 하

    였으니, 청컨대 이윤양은 온 집안을 변방으로 옮기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윤양이 아무리 사를 받았지만 형장 1백 대를 때려 온 집안을 변방(邊方)으로 옮

    기라.”하였다.

    ■ 의금부 도사 이덕형이 전라도의 죄인을 잡아오니 정승들에게 국문하도록 하다. 1502년(연산 8) 5월 28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이덕형(李德亨)이, 전라도 금산(錦山) 등지의 죄인을

    잡아오니, 정승들에게 빈청(賓廳)에서 국문(鞫問)하도록 하였다.

    ■ 전 대간들을 귀양보내다. 1504년(연산 10) 3월 18일윤원(尹源)을 금산(錦山)에 부처(付處)하였다. …(후략)

  • 544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 신봉로를 진산에 정배하다. 1504년(연산 10) 4월 1일신봉로(申奉盧)를 진산(珍山)에 형장 때려 정배하였다.

    ■ 전일 죄인들의 죄를 더하라 아뢰니 따르다. 1507년(중종 2) 윤1월 29일김감은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여 금산(錦山)에 부처한다. …(후략)

    ■ 팔도 관찰사와 개성부 유수에 전일의 고변을 하유하다. 1507년(중종 2) 2월 1일

    팔도 관찰사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게 하유하기를, “이번에 박경(朴耕)·

    김공저(金公著)·이장길(李長吉) 등이 대신을 해치고 조정을 어지럽히려 하였으므

    로 심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곧 수범(首犯)과 종범을 가려 …(중략)… 김감(金勘)

    은 고신을 빼앗고 공훈을 삭제하여 금산(錦山)에 귀양보냈고 …(후략)

    ■ 삼남 각지의 도적들을 체포할 것을 전교하다. 1508년(중종 3) 3월 5일충청·전라·경상도 등 관찰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듣건대, 강도들이 충청

    도 황간(黃磵)·영동(永同)·옥천(沃川)·연풍(延豊)·괴산(槐山)·청안(淸安)과

    전라도 무주(茂朱)·금산(錦山)과 경상도 문경(聞慶)·상주(尙州)·지례(知禮)·금

    산(金山)·거창(居昌)·산음(山陰) 등지에서, 백주에 떼를 지어 통행하는 길을 차단

    하여 약탈하고, 마을에 공공연하게 다니면서 의복·양식·반찬·활·화살 등 물건

    을 탈취하며, 또 소를 겁탈해 내어 실어 가기도 하고 행인과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짊어지게 하며, 소는 잡아 먹고 민간의 여자들을 공공연하게 붙잡아 가고, 양

    반집 부녀들에게까지도 난행을 하려 든다고 한다. …(중략)… 사실이 이미 전파되

    어 조정에서도 벌써 들었는데도, 경 등은 조치를 해서 붙잡지 못하고 또 아뢰지도

    않으니, 한 방면(方面)의 책임을 맡긴 의의가 전혀 없다. 이에 조관(朝官)을 보내어

    도내(道內)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사람을 뽑아내어 도적을 붙잡게 하겠으니, 경 등

    도 뜻을 같이하여 조치해서 혹시라도 계책이 누설되거나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

    여 기어이 체포하도록 하라.

    그 상벌(賞罰)의 격례(格例)는 경관(京官)이 가지고 가는 사목(事目)에 기재되어

    있다. 또 전일에 살해 약탈된 사람과 빼앗긴 소의 수효 및 군기와 양반집 부녀들에

    게 난행하고자 한 것 등을 자세하게 갖추어 상고하여 화급히 아뢰게 하라. 조정에

    서 이미 상세히 들은 바이니, 만약 숨기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수령(守令)은

    원 형벌보다 등급을 올릴 것이요, 경 등도 또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 대간·헌부가 군수 현령의 일을 아뢰다. 1510년(중종 5) 1월 12일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45

    대간이 아뢰기를 …(중략)… “진산 군수(珍山郡守) 서정(徐汀)과 능성 현령(綾城

    縣令) 김광후(金光厚)는 사람됨이 탐오하니, 모두 가소서.” …(중략)… 나머지도 윤

    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대간이 내직을 중히 할 것과 변방 수령의 무과 중시 응시 문제를 아뢰다. 1516년(중종 11) 8월 8일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번(李蕃)·덕원

    부사(德源府使) 최명창(崔命昌)·금산 군수(錦山郡守) 소세량(蘇世良) 등은 대간과

    시종을 지낸 사람들입니다. 요즈음에는 대간에 결원이 생기면 수령 중에서 경체(徑

    遞)하여 제수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외직에 나간 사람이 적어서 수령을 지낸 뒤

    에야 4품(品)에 승진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수령이 된 사람이 도리어

    많습니다. 이번(李蕃) 등의 노친(老親)이 만약 외방에 있다면, 스스로 수령을 구할

    수도 있겠고 또 전조에서 의망하여 상께서 윤허하시는 것도 모두 가합니다. 그러나

    명창은 모친이 서울에 있고, 세량은 노친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아비가 현재 수령

    이며, 번(蕃)은 노친이 없는데, 3인이 모두 수령이 되었으니, 외직을 중히 알고 내직

    을 가벼이 여기는 폐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체(事體)에 어떠하겠습니까? 내보내지

    마소서.” …(후략)

    ■ 헌부에서 이효언·정광보·장한공·한성·송세림·김식 등을 체직하도록 하니 윤허하지 않다. 1518년(중종 13) 12월 19일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또 아뢰기를, …(중략)… 금산 군수(錦山郡守)

    정광보(鄭光輔)는 성질이 본래 탐혹하여 자목(字牧)의 책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

    (중략)… 모두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귀양간 김정이 함부로 출입한 일로 금산 군수 등을 추문하게 하다. 1520년(중종 15) 1월 14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황세헌(黃世獻)이 아뢰기를, “신이 금산(錦山)에 안치

    (安置)시킨 김정을 이배(移配)하는 일 때문에 금산에 이르니, 김정이 어미가 아프다

    는 소식을 듣고 함부로 어미가 있는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돌아와서 현신(現身)하

    였습니다.”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안치된 사람은 출입(出入)할 수 없는 법인데

    김정이 마음대로 귀근(歸覲)하였으니 자못 법을 두려워하는 뜻이 없는 것이다. 금

    산 군수 정웅(鄭熊)은 잡아다가 추문하고 김정 및 수직(守直)한 자들은 그 도 감사

    (監司)로 하여금 추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546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 김정의 일로 인해 이빈 등이 정원의 황세헌을 논핵하다. 1520년(중종 15) 1월 15일홍문관 부제학 이빈(李蘋)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김정(金淨) 및 금산(錦山)의

    관리를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를 보건대, 다만 어미를 만나려고 출입한 죄만을 추

    문하게 하셨습니다. 가령 김정(金淨)이 실지로 어미를 만나기 위해서였더라도 역시

    망명(亡命)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계교가 있었음이리까! 신 등이 자세히 듣건

    대, 김정은 어미를 만나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다른 곳에 갔었다 합니다. 황세헌

    (黃世獻)은 반드시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인데도 사실대로 내계(來啓)하지 않았으며,

    정원(政院)이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함에 있어서도 정직하게 하지 않았으니, 만약

    이렇게 한다면 옹폐(壅蔽)하는 화(禍)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 사실을 추핵(推

    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정(金淨)은 이미 안치시켰으니 경내(境內)를 벗

    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어미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하나 만약 다른 계교가 있

    었다면 이는 실제로 망명한 것이다. 단 황세헌의 말이 ‘김정이 어미를 만나러 갔었

    는데 신이 군(郡)에 도착한 다음날 스스로 왔다.’ 하였으므로 단지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 홍문관은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아뢰는

    것일 터이니, 정원은 황세헌(黃世獻)을 불러 상세히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 이중이 두 차례 형신을 받고서 복초하고 이신을 다시 추문하다. 1520년(중종 15) 4월 20일

    이중(李中)의 공초(供招)에, 【두 차례 형신(刑訊)을 받고서 복초(服招)한 말이

    다.】

    “내가 김식(金湜)·이신(李信)과 함께 서제(庶弟)의 침방(寢房)에서 이야기할 때

    에, 이신이 말하기를 ‘심정(沈貞)이 말을 탄다면 형세가 어려울 듯하나 초헌(軺軒)

    을 탄다면 돌입하여 찌를 수 있을 것이다.’ 하매, 김식이 ‘네가 사로잡히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이신이 ‘서너 종례(從隷)가 나를 잡으려 하더라도 몸을 빼어 달

    아나기는 어렵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신이 초계(草溪)에서 돌아와 김식이 간 곳

    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김식이 간 곳은 알 수 없으나, 갈 때에 나에게 말하기

    를 「이신은 내가 있는 곳을 알 것이니, 상주(尙州)에 다녀온 뒤에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 하였다.’는 말을 전하니, 이신이 성이 나서 말하기를 ‘김식이 나를 믿으

    면 죽음도 피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이토록 나를 의심하니 무엇하러 다시 고

    생하며 찾겠느냐?’ 하였습니다. 이신이 또 말하기를 ‘문자를 아는 것은 내가 너에

    게 미치지 못할지라도, 지려(智慮)로 말하면 네가 나보다 못할 것이다.’ 하기에, 내

    가 대답하기를 ‘네 말이 과연 옳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신을 다시 추문(推問)

    한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김식이 나를 데리고 무주(茂朱)에서 거창(居昌)으로 향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47

    하는 중도에서 이야기할 때에 나에게 묻기를 ‘이제 만약에 도둑의 무리가 떼지어

    일어난다면, 네가 타일러 데려올 수 있겠느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할 수 있다.’

    하니, 김식이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해진 중의 옷을 입

    고 걸식하는 것으로 꾸며 도둑이 둔친 곳에 들어가면 저들이 꺼리지 않을 것이므로

    만나 이야기하고 따라서 타이를 수 있을 터인데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였더니, 김

    식이 기뻐하며 웃었습니다. 또 이중의 서제의 집에서 논의할 때에 김식이 말하기를

    ‘영광(靈光)의 도둑떼가 매우 많은데 거의 때를 기다려서 일어난 자들이다. 도둑의

    괴수는 성이 조(趙)인데 유자(儒者)이고 지휘를 잘하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내

    가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 계책을 세워 잡으려던 자인데 어렵기 때문에 그

    만두었었다.’ 하였고, 그 뒤에 김덕순(金德純)도 이 도둑이 이상하다고 말하였습니

    다. 또 밥짓는 아이를 구하려고 내가 이중이 다니는 절에 있었는데, 마침 어느 떠돌

    이중이 영리하여 사랑스러운 아이를 거느렸으므로, 이중의 집에 붙여 두었더니, 김

    식과 이중은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배반하여 떠날까 의심하여 숨겨 두고 보이지 않

    았으므로 내가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감창진(甘倉津)에 이르러

    저물었으므로 자고서 이튿날에야 돌아왔는데, 김식과 이중은 이미 칠원(漆原) 관아

    (官衙)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양편을 다 잃은 것을 노하여 포기하고 산간(山間)으로

    돌아가려 하였더니 이중의 아내가 머물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가옹(家翁)이 저녁에

    돌아올 것이다.’ 하므로, 내가 이중을 만나보려고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이중이 과

    연 돌아왔으므로 내가 산으로 돌아갈 뜻을 말하였더니, 이중이 몹시 말리고는 김식

    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있을 곳은 너와 함께 붙여 있을 수 없으니, 너는 서울에 가

    서 전에 약속한 일을 처리하고 금산(錦山)·횡천(橫川)의 산간에서 나를 찾아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며칠 동안 이중의 집에 머물고 나서, 태성산(台星山) 마을에 있는 숭선정(崇

    善正)에게 가서 김덕순의 소식을 전하고, 최운(崔澐)에게 들렀다가 상주(尙州)에 있

    는 숭선정의 종의 집으로 도로 가서 묻고는 김덕순과 이연중(李連中)이 이미 서울

    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충주(忠州)에 있는 김식의 종의 집과 손만지(孫蔓

    枝)의 집에 갔더니 모두들 ‘김덕순 등이 이미 서울로 올라갔다.’ 하였습니다. 음죽

    (陰竹)으로 가는 도중에 사촌 오라비와 함께 가는 구걸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내가

    ‘너희들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고 말을 붙이니 ‘경주(慶州)에서 온다.’ 하였습니

    다. 그날 밤에 드디어 간통하고 동행하여, 이달 초닷샛날에 서울로 들어와 남대문

    밖에 있는 권경(權經)의 집에 묵고 아내와 짐을 그 집에 붙여 두고서, 나는 처남과

    함께 무명 한 필을 가지고 고양(高陽)에 있는 박미(朴楣)가 다니는 절에 가서 양식

    을 사고 거기서 묵다가 9일에 붙여 있던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내와 짐이 모두 없

    어졌습니다. 집을 지키는 종[婢] 승비(勝非)가 으르며 말하기를 ‘상전(上典)이, 이

  • 548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집이 길가에 있고 또 조정 관원의 집에 붙어 있으므로 일이 발각되면 큰 화가 있을

    것이니 성 안에 있는 집에 와서 짐과 아내를 데리고 빨리 멀리 떠나라고 하더라?’

    하므로 나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고 곧 처남을 전생서(典牲署) 앞에 있는 경수소

    (警守所)에 두고서 권경의 집에 갔더니, 권경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여종을 시켜

    말하기를 ‘너의 아내와 짐은 여기에 없으니, 뒷날 와서 상전을 만나서 찾아라.’ 하

    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을 나와 처남을 데리고 이름은 모르나 중으로 있을 때의

    주인 집에 가서 자고, 10일에 처남과 함께 와서 권경을 찾으니, 권경이 나와서 말하

    기를 ‘네 거동을 보건대 반드시 큰 일을 일으키겠으니 빨리 멀리 떠나거라.’ 하기에

    ‘내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 물었더니 ‘네 아내는 두 마음을 가졌고 또 이런 흉년에

    먹을 것을 구하기도 참으로 어려운데 아내는 두어서 무엇하느냐?’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비로소 멀리 떠날 뜻을 가졌습니다.

    마전(麻田) 나루를 건너 정금원(鄭金院)에 들어가 자고, 11일에 이천 부내(利川府

    內)의 이름 모를 역원(驛院)에 이르고, 12일에 음죽(陰竹) 천미천(天彌川) 가에 있는

    폐원(廢院)에서 자고, 13일에 가흥창(可興倉)의 해우(廨宇)에서 자고, 14일에 속리

    산(俗離山)으로 향하였습니다. 가다가 금천(金遷)에 이르러 앉아서 생각하기를 ‘당

    초에 김식을 따라 망명한 까닭은 김식이 중이 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종자(從者)

    가 되어 고사(古事)를 듣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김식이 번번이 미치고 어리석고 도

    리에 어그러지는 일로 밤낮으로 꾀므로, 내가 승락하는 체하였으나 속으로는 한심

    하게 여겨왔으며, 이번에 이렇게까지 낭패하게 되었으니 조만간 망신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오기로 뜻을 결정하였습니다. 음죽을 지나 여주(驪州)의

    이름 모를 사람의 집에 갔더니 거동이 황당하다 하여 거절당하였으므로 굶고 산 기

    슭에서 자고, 15일에 서울로 들어와 아비 이름이 이연동(李延同)이라는 사람의 집

    에서 자고, 16일에 고변(告辯)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중이 두 차례 형신을 받고서 복초하고 이신을 다시 추문하다. 1520년(중종 15) 4월 27일

    (전략)… 접때 망명한 자【김정(金淨)·기준(奇遵)을 가리킨다.】를 그 도의 관찰

    사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였는데 관찰사가 늦추고 머뭇거리며 전혀 마음을 쓰지 않

    고 추문하여 아뢰었으니, 전라도 관찰사도 추고(推考)해야 하며, 김정·기준이 전

    일 망명한 정상이 명백하니 나래(拿來)하여 추문하는 것이 어떠한가? 사관(史官)을

    보내어 삼공에게 물으라.”

    하매 …(중략)… 전교하기를, “망명한 사람을 어찌 당초에 나치(拿致)하여 추문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다만 접때 인심이 의구하여 안정하지 못하였는데 망

    명한 자를 나치하게 하면 한때의 죄받은 자들이 다 놀라 두려워서 앞을 다투어 서로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49

    도망할 것이고, 그러면 기강이 더욱 해이해질 것이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김정·

    기준을 의금부(義禁府)에 나치하되, 김정 등을 나래할 때에 지나는 각 고을로 하여

    금 군사를 내어 호위해 보내게 하여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정·기준 같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

    로 알고 그 어미를 만나 보려고 수령에게 허가를 받고 나서야 갔으므로 본래 망명의

    유가 아닌데 감사가 뜻밖에 적간(摘奸)하므로 정웅(鄭熊)과 같은 수령들이 스스로

    죄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도망하였다고 대답하였으니, 엮어 만든 화(禍)

    를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조정이 더욱 소요하게 되었다.【정웅은 이

    때 금산 군수(錦山郡守)였다.】

    ■ 이신이 김식이 망명한 정상을 말하다. 1520(중종 15) 4월 16일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김전(金詮)·좌의정(左議政) 남곤

    (南袞)·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 권균(權鈞) 심

    정(沈貞) 손주(孫澍) 이행(李荇)을 부르니 처마밑에 입시(入侍)하였다. 이신의 말은

    이러하였다.

    …(중략)… 신이 당초 약속할 때에 거사한 뒤에 금산의 횡천현(橫川縣) 땅으로 돌

    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산이 깊고 흙이 기름져서 살 만하므로 그곳에서 사세가

    돌아가는 것을 보려 하였습니다. 또 김식이 무주에서 개령에 있는 도범룡의 집에

    와서 산가지[算]를 잡고 점치고는 웃었으며 이튿날 말하기를 ‘오래 있지는 않을 것

    이니 1∼2년일 것이다.’ 하였으나,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몰랐습니다. …(중략)…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신(李信)이, 김식(金湜)이 망명(亡命)한 정상을 극진하게

    헐뜯었으므로 임금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심한데, 남곤·심정의 무리가 곁에서 넌

    지시 도와서 큰 화(禍)가 사류(士類)에게 만연하게 하였으니, 말하면 답답한 일이라

    하겠다.

    ■ 이중이 두 차례 형신을 받고서 복초하고 이신을 다시 추문하다. 1520년(중종 15) 4월 20일

    이중(李中)의 공초(供招)에,【두 차례 형신(刑訊)을 받고서 복초(服招)한 말이다.】

    …(중략)… 이신을 다시 추문(推問)한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김식이 나를 데리고 무주(茂朱)에서 거창(居昌)으로 향하는 중도에서 이야기

    할 때에 나에게 묻기를 ‘이제 만약에 도둑의 무리가 떼지어 일어난다면, 네가 타일

    러 데려올 수 있겠느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할 수 있다.’ 하니, 김식이 ‘어떤 방

    법으로 할 수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해진 중의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으로 꾸

    며 도둑이 둔친 곳에 들어가면 저들이 꺼리지 않을 것이므로 만나 이야기하고 따라

  • 550제

    3편 자

    료로

    보는

    금산

    서 타이를 수 있을 터인데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였더니, 김식이 기뻐하며 웃었습

    니다. 또 이중의 서제의 집에서 논의할 때에 김식이 말하기를 ‘영광(靈光)의 도둑떼

    가 매우 많은데 거의 때를 기다려서 일어난 자들이다. 도둑의 괴수는 성이 조(趙)인

    데 유자(儒者)이고 지휘를 잘하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내가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 계책을 세워 잡으려던 자인데 어렵기 때문에 그만두었었다.’ 하였고, 그

    뒤에 김덕순(金德純)도 이 도둑이 이상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밥짓는 아이를 구

    하려고 내가 이중이 다니는 절에 있었는데, 마침 어느 떠돌이중이 영리하여 사랑스

    러운 아이를 거느렸으므로, 이중의 집에 붙여 두었더니, 김식과 이중은 내가 그 아

    이를 데리고 배반하여 떠날까 의심하여 숨겨 두고 보이지 않았으므로 내가 찾아보

    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감창진(甘倉津)에 이르러 저물었으므로 자고서

    이튿날에야 돌아왔는데, 김식과 이중은 이미 칠원(漆原) 관아(官衙)로 돌아갔습니

    다. 내가 양편을 다 잃은 것을 노하여 포기하고 산간(山間)으로 돌아가려 하였더니

    이중의 아내가 머물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가옹(家翁)이 저녁에 돌아올 것이다.’

    하므로, 내가 이중을 만나보려고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이중이 과연 돌아왔으므로

    내가 산으로 돌아갈 뜻을 말하였더니, 이중이 몹시 말리고는 김식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있을 곳은 너와 함께 붙여 있을 수 없으니, 너는 서울에 가서 전에 약속한 일

    을 처리하고 금산(錦山)·횡천(橫川)의 산간에서 나를 찾아라.’ 하더라고 하였습니

    다. …(후략)

    ■ 김정을 첫 번 추문한 단자를 내리고 곧바로 추국하여 죄를 정할 수 없다 이르다. 1520년(중종 15) 5월 14일

    김정을 첫 번 추문(推問)한 단자(單子)를 내리고 이르기를,

    “김정을 추문하는 까닭은 정웅(鄭熊)의 공초(供招)에 김정이 달아났다고 하였기

    때문인데, 이제 김정의 상소를 보건대 그 어미의 병이 심하므로 읍수(邑倅)게게 고

    하고서 돌아갔다 하였으니, 곧 바로 위력으로 추국(推鞫)하여 죄를 정할 수 없다.

    다만 죄인은 마음대로 배소(配所)를 떠날 수 없으므로 근친갔더라도 그 죄가 있

    으며, 정웅은 잡아와서 면질(面質)하지 않을 수 없다.【정웅은 금산(錦山)의 수령이

    다.】하였다.

    ■ 김정간·윤사익·유성춘의 직을 갈게 하다. 1520년(중종 15) 10월 4일헌부가 아뢰기를, “김정간(金貞幹)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서 거전(居殿)한 지

    오래지 않아서 부정(副正)으로 올랐으므로 온편치 못하며 …(후략)

    ■ 정원에서 화의군의 일을 고찰하여 아뢰다. 1522년(중종 17) 4월 23일

  • 제3장

    기록

    으로

    보는

    금산

    551

    정원이 아뢰기를,

    “화의군의 일을 고찰해보니, 세조조(世祖朝)에 죄를 얻어 금산(錦山)으로 유배되

    었다가 성종조(成宗朝)에 놓아주어 편리하게 거주하도록 하였고, 그의 후손이 관작

    (官爵)을 복구해 달라는 일로 상언(上言)하자 종부시(宗簿寺)가 방계(防啓)했었으

    나 성종께서 특별히 윤허하셨고, 그 자손이 승습(承襲)하게 하는 일로 승전(承傳)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급(級)은 곧 화의군의 증손입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

    였다.

    ■ 전라도 관찰사 유관이 여역으로 인한 각 고을의 사망자 수를 치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