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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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이 정 배* 1) I. 들어가는 글 지난 총, 대선과 달리 1년 남짓한 금번 선거의 경우 복지(福祉)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될 것 같다. 뉴타운 정책으로 집칸이나 있는 중산층의 마음 을 사로잡아 정권을 탈환했던 한나라당조차 노무현 정권에게 퍼붓던 좌편향 의 비난을 감수한 채 복지로 승부수를 띠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 경 기 곳곳에서 공약(空約)이 되어버린 뉴타운 정책의 부메랑을 상쇄하는 수단 으로 복지가 선거에 이용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복지에 대한 근본 철학은 물론 구체적 예산 확충방안도 없이-근본 반값 등록금 空約에서 들어 나듯이- 복지를 통해 서민을 살리겠다는 정책만 남발되는 상황에서 이 역시 公約이 되지 못할 개연성이 커 보인다. 이점에서 민주당 역시도 예외가 아닐 듯싶다. 이들의 복지정책 또한 서민에 대한 사랑과 애정보다 정책적 우위(優 位)를 점하여 정권을 재창출을 목적한 정치적 판단의 산물인 까닭이다. 자신 의 몫부터 내놓고 구조적 모순타파를 열망하는 정의에 대한 열망 없는 봉사 나 복지는 진정성이 없다. 사회적 정의 없이 복지를 통해 국민여론을 유리하 게 이끌려는 시도는 정치적 술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박근혜와 손학 규, 두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들이 기획재정위원회에 속해 복지재원을 위한 세금정책을 주제로 대선 전초전을 치르게 되었다하니 누구에게 더 진정성이 있는가를 관심 갖고 지켜 볼일이다. 1) 모두를 부자로 만들기보다 누구라도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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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이 정 배*1)

    I. 들어가는 글

    지난 총, 대선과 달리 1년 남짓한 금번 선거의 경우 복지(福祉)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될 것 같다. 뉴타운 정책으로 집칸이나 있는 중산층의 마음

    을 사로잡아 정권을 탈환했던 한나라당조차 노무현 정권에게 퍼붓던 좌편향

    의 비난을 감수한 채 복지로 승부수를 띠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 경

    기 곳곳에서 공약(空約)이 되어버린 뉴타운 정책의 부메랑을 상쇄하는 수단

    으로 복지가 선거에 이용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복지에 대한 근본

    철학은 물론 구체적 예산 확충방안도 없이-근본 반값 등록금 空約에서 들어

    나듯이- 복지를 통해 서민을 살리겠다는 정책만 남발되는 상황에서 이 역시

    公約이 되지 못할 개연성이 커 보인다. 이점에서 민주당 역시도 예외가 아닐

    듯싶다. 이들의 복지정책 또한 서민에 대한 사랑과 애정보다 정책적 우위(優

    位)를 점하여 정권을 재창출을 목적한 정치적 판단의 산물인 까닭이다. 자신

    의 몫부터 내놓고 구조적 모순타파를 열망하는 정의에 대한 열망 없는 봉사

    나 복지는 진정성이 없다. 사회적 정의 없이 복지를 통해 국민여론을 유리하

    게 이끌려는 시도는 정치적 술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박근혜와 손학

    규, 두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들이 기획재정위원회에 속해 복지재원을 위한

    세금정책을 주제로 대선 전초전을 치르게 되었다하니 누구에게 더 진정성이

    있는가를 관심 갖고 지켜 볼일이다.1) 모두를 부자로 만들기보다 누구라도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종교철학

  • 170 신학논단 제65집 (2011)

    홀로 외롭거나 배고프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훨씬 쉽고 위대한 일이란

    생각 때문이다.

    이런 한국적 정황에서 금번 목회자 하기 세미나에서 ‘디아코니아’를 주제로 택한 것은 대단히 시의적절한 신학적 판단의 결과물이다. 디아코니아

    란 기독교의 정신인 ‘이웃 사랑’의 다른 말로서 섬김과 봉사를 뜻하는 바, 국가가 펼치려는 복지정책과 의미 및 내용상 가장 근접한 개념이기 때문이

    다. 즉 디아코니아는 기독교 신앙에서 유래한 사랑의 행위(Caritas), 사회적

    활동으로서 교회가 책임져야 할 사회적 영역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2) 그

    렇기에 기독교적 디아코니아를 통해 교회는 국가의 복지정책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바른 실천, 곧 정의를 위해 비판과

    조언을 선사할 무한 책임이 있다. 디아코니아가 교회적 삶의 핵심인 이유는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들 중에 있다’(눅 22: 27)는 예수의 말씀에 기인한다. 후일 디아코니아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는 복지를 국가적 책무로 돌리며 세상 밖을 향한 책임적

    봉사에 인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룡처럼 커진 교회와 영원한 미자립 교

    회가 난립, 병존하는 자본주의화된 교회의 존재 양태자체도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섬김의 그리스도론이 교회적으로 옳게 실험되지 못한 결과라 하

    겠다. 디아코니아란 본래 교회 안에서 기독론적 실험이 성공한 구체적 실상

    인 까닭이다.3) 따라서 디아코니아가 사도직(Episkopat)에 비해 가치서열 적

    으로 하위에 속해 있거나 교회가 권력화되는 실상 그리고 대사회적 경비가

    교회예산에서 지극히 적은 비율을 점하는 현실 등은 한국 교회가 ‘섬김’의 기독론적 실험에서 실패한 반증이다. 본래 사도직과 봉사직(Diakonat)은 하

    나였던 것으로 교회의 사회적 관련성은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결코 간과

    된 적이 없었다. 영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애시당초 분리되지 않았다는 말

    이다. 즉 식탁공동체에서 가난한 이들을 먹였고 고아와 과부를 염려했던 교

    회 내 디아코니아는 그 영역을 밖으로 확장시켰고 나아가 노예제도, 가부장

    제를 철폐하는 방식으로 로마제국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택할 만큼 사회 변

    1) , 2011. 5. 28. 기사 참조.

    2) Theologische Realenzyklopaedie, Bd. 8, Walter de Gryuter 1981, 621. 이후 이것은 빌립보서

    2장의 ‘겸비의 기독론’으로 발전되어 간다. 이하 TRE로 사용할 것임.3) TRE, Bd. 8, 658.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71

    혁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4) 이점에서 유럽의 신학자들이 에큐메니칼

    시대에 적합한 ‘디아코니아’로서 총체적 상황에서 ‘삶의 양식’(Lebensstil)의 창발(創發)5)을 언급한 것은 대단히 의미 깊다. 2013년 부산에서 열릴 10차

    WCC대회가 주제 선정에 있어 정의를 평화와 생명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6) 여기서 ‘총체적’(Ganzheitlich)이란 말과 ‘삶의 양식’은 각기 디아코니아의 토대이자 본질(내용)을 적시한다. 세계가 경제적 불평등 및 생태위기를 비롯한 난공불략의 다차원적 곤궁(Not) 속에 있고

    그 근간에는 ‘제국’으로 상징되는 바, 인간의 욕망을 통해 공공영역의 사유화를 추동하는 자본주의가 있는데 그 병폐를 치유할 대안적(공동체적) 삶이

    야말로 디아코니아의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체(Wholeness)와 거룩

    (Holiness) 그리고 구원(Salvation)이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음이 전제되어

    있다.

    본 논거의 활성화를 위해 요청되는 것은 우리 시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이다. 디아코니아의 근본 에토스는 유지하되 그 구체적 양태는 과거와는 달

    라야 하는 까닭에서이다. 이점에서 신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학사가 J.

    리프킨은 21세기를 일컬어 신앙과 이성의 시대를 넘어선 공감의 시대라 말

    한 바 있고 H. 콕스는 세속적인 것 속에서 성스런 것을 찾아야 하는 성령의

    시대로 명명했으며 과정신학자 D. 그리핀 같은 이는 종래의 ‘존재유비’나 ‘신앙유비’와 달리 자연과 초자연의 새로운 종합이 모색되는 시기로 보았고 혹자는 분화되었던 일체 종교들이 점차 수렴되는 두 번째 차축시대에 접어

    들었음을 강변하기도 했다.7) 이런 시대적 인식들은 비록 인습화된 근본주의

    적 정서로는 수용키 어려울 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시대 적합한 재구성을 위

    해 그리고 디아코니아의 신(新)차원을 말함에 있어 유익하다는 것이 필자의

    4) M. 보그·J. D. 크로산/김준우 옮김, 바울의 첫 번째 서신들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당시의 로마제국은 오늘 우리의 경우로는 제국화된 자본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5) TRE, Bd. 8, 656.

    6) 장윤재, “정의의 눈으로 보는 생명과 평화: 제 10차 WCC 부산 총회의 주제에 대한 신학적 이해,” 미간행 논문 (2011), 4-5 참조.

    7) J. 리프킨/이경남 옮김, 공감의 시대 (서울: 민음사, 2010); H. 콕스/김창락 옮김, 종교의 미래 (서울: 문예출판사, 2010); D. 그리핀/김희연 옮김, 위대한 두 진리 (서울: 동연, 2011); 카렌 암스트롱/정영목 옮김, 축의 시대-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서울: 교양인, 2010).

  • 172 신학논단 제65집 (2011)

    생각이다. 이들은 저마다 표현은 달랐으나 ‘神죽음의 죽음’을 선포하는 소위 탈(侻)세속화8)를 선포했으며 그 속에서 종교(신앙)의 의미와 과제를 새롭게 묻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의 시대인식을 존중하되 20세기의 신학자 D.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생각이다.9) 디아코니아가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과 달리 사는 삶의 총체적 양식의 문제로

    인식되는 한에서 본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이해는 탈세속화 시대에 상응하

    는 디아코니아 신학의 보고(寶庫)란 생각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위해 다음

    과 같은 절차가 필요할 듯싶다. 우선 첫 장에서 필자는 디아코니아가 실현되

    어야 할 탈세속화 시대의 징조 및 실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것이며 둘째

    장에서는 탈세속화 시대에서의 디아코니아 본질과 향방을 정의를 무력화시

    키는 보편적 악의 실재를 ‘제국(Empire)’의 시각에서 살필 생각이다. 그리고 셋째 장에서는 탈(脫)세속화적 정조(ethos) 하에서 ‘디아코니아’의 신학의 정체성을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과 연계시킬 것이며 디아코니아의 주체로서

    ‘교회’를 성령론적 시각에서 확대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교회 안과 밖에서 生起하고 있는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이며 다양한 실상들을

    소개할 것이며 그들의 출현을 기존 교회로선 생경할 수도 있겠으나 탈세속

    화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적극 평가할 생각이다.

    II. 탈(脫)세속화 시대의 도래와 그 실상: 디아코니아의 자

    리매김을 위하여

    우리는 앞서 디아코니아란 교회 공동체 현실에 대한 기독론적 실험이라

    하였다. 교회의 존립 여부 및 그 정당성 물음이 기독론적으로 정위된 디아코

    니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디아코니아가 중요하지만 교회 공동체

    가 자리한 시대적 상황 및 현실에 대한 이해 역시 대단히 긴요하다. 시대

    및 현실 인식이 실현되어야 할 디아코니아의 구체적 내용을 적시하기 때문

    이다. 예수가 대답이라면 오히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물어

    야 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오늘의 상황을 크게 탈세속화시대로 읽고자 했

    8) J. 카푸토/최생렬 옮김, 종교에 대하여 (서울: 동문선, 2003).9) D. 본회퍼/이신건 옮김, 디트리히 본 회퍼 묵상 52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0), 292 참조.

    특별히 그의 성육신 이해가 탁견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추후 다뤄질 것이다.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73

    다. 神의 죽음을 예견했던 세속화 신학자 역시 神의 죽음의 ‘죽음’을 선포하며 신앙이 새롭게 재탄생될 수 있는 시대임을 긍정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렇다고 우리의 신앙 양식을 이성이 지배했던 근대 이전으로 돌리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성의 시대를 통과한 탈세속화는 따라서 급진적 정통주의로

    의 회귀나 비합리적 상대주의에로의 함몰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여기서 교

    회 현실을 지배하는 목하의 근본주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탈세속화의

    한 부정적 양상일 개연성이 크다.10) 근본주의란 종교인들조차 세속으로부터

    자유치 못할 경우 그에 대한 거부와 반감으로 세상적 가치 일체를 부정하는

    신앙적 순수와 열정의 산물이란 것이다.11) 하지만 근본주의의 문제점은 그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축소시키는 화석화된 믿음을 야기(惹起)시킨다는 데

    있다. 한편으로 탈세속화는 전체를 부정하고 차이(상대성)를 강조하는 포스

    트모던 사조와 같으면서 다르다. 차이를 소중히 여기나 지켜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모두가 직면해 있는 보편적 난제를 인

    정하는 것도, 그를 위해 인간 본성에 근거한 차이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

    역시 그와 다른 일면일 것이다. 나아가 신적 사랑에 근거한 윤리적 보편성의

    긍정 또한 탈세속화 시대의 종교가 지향하는 바라해도 좋을 듯하다.12) 여하

    튼 신의 죽음 이후시대를 말하는 탈세속화 시대의 도래는 차이에 함몰된 보

    수적 포스트모던 사조와 달리 세상을 달리 추동할 것이며 디아코니아의 향

    방을 새롭게 정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본장의 핵심은 탈세속화 시대를 일컫는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

    고 정리하는 데 있다. 여러 학자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 시대를 정의

    했으나 필자는 그것을 카푸토의 견해를 따라 탈세속화란 개념으로 묶고자

    했다. 여기서는 J. 리프킨, H. 콕스 그리고 D. 그리핀의 경우를 살필 것이며

    이들의 시대인식이 결국 ‘제국’(Empire)13)과 맞서기 위한 것임을 적시할 생각이다. 인류가 직면한 범세계적인 자본지배구조로서의 ‘제국’과 그로인해

    10)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124-132.11) 이들이 부정하는 세상적 가치로는 페미니즘, 다원주의, 동성애 등이 있다.

    12) 알랭 바디우/현성환 옮김, 사도바울-제국에 맞선 보편윤리를 찾아서 (서울: 새물결, 2008) 참조.

    13)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윤수종 옮김, 제국 (서울: 이학사, 2001). 이는 구체적 (민족개념)지녔던 과거의 제국주의와 달리 초국적 형태로 진화된 자본주의 지배체제를 지시한다.

  • 174 신학논단 제65집 (2011)

    야기될 항차 기후붕괴의 실상을 타개할 방책을 찾고자 함이다. 우선적으로

    리프킨은 자신의 책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의 본성을 ‘공감하는 능력’ (Homo Empatipicus)에서 보았고14) 우리 시대를 공감의 시대라 명명했다.

    이는 중세의 신앙의 시대와 근대적 이성의 시대와 구별되는 우리 시대의 별

    칭이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시대가 인간의 보편성을 죄에서 찾았고

    그로부터의 탈주를 신앙을 통해 제시했다면 이성적 효율성을 인간적 보편정

    황으로 인식한 근대는 진보를 통해 인간의 살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目下의

    현실은 신앙을 통한 천국행도 이성에 따른 진보에 대한 확신도 더 이상 보편

    적일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거대한 체제, 사실적 종말의 위기에

    노출된 지구 생태적 현실이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 놓은 까닭이다.

    이로부터 리프킨은 인간의 존재론적 취약성을 보편적 조건이라 여겼다. 하

    지만 전 지구적 차원의 공동위협 앞에서 인간은 연약하기에 더욱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고난의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연대할 수 있다고 믿

    었다.15) 따라서 그에겐 존재론적 취약성을 보호하되 약함이 오히려 세계(보

    편)의식을 위한 수단으로 ‘공감’이 중요했던 것이다. ‘공감’이란 여기서 탈세속적 방식으로 신앙을 재구성, 재(再)언표 한 것이다.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

    는 약한 자신의 본성에 비춰 이웃 및 타자를 헤아리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세계를 꿈꾸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리프킨은 인류의 공감대가 자연에 까

    지 미치기를 소망했고 그로써 삶의 보편적 토대로서 자연을 지켜낼 수 있다

    고 믿었다. 이점에서 근대적 자율성이 피안적 신앙의 세속적 표현이었다면

    ‘공감’은 神이 육화된 공간인 이 땅을 살리는 신앙의 탈세속적 표현임이 틀림없다. 공감이 신앙과 이성의 대척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보완하는

    합(合)의 차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16)

    한때 세속화를 주창했던 콕스는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며 성스런 것(聖)

    의 도래를 강조하고 있다. 그의 구분법에 의하면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신앙

    14) 리프킨, 공감의 시대, 1부 내용 참조.15) J. 리프킨/이원기 옮김, 유로피안 드림 (서울: 민음사, 2009), 349. 40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감이 이타심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타심이 다소 일방적 배려의 차원이라면 공감은 인간

    모두의 약함에 근거한 쌍방의 관계로서 좀더 보편성을 띠는 까닭이다. 이타심이 선천적 특성

    을 지니는 반면 공감은 선천적이면서도 후험적이란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이 있다.

    16) 앞의 책, 351-352.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75

    (faith)과 믿음(belief)의 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다.17) 여기서 신앙은 내면 속에서 신적인 것의 재발견, 세속에서의 영적인

    자각과 같은 것으로 ‘궁극적 관심’(틸리히)이자 하느님의 심장(마음)을 느끼는 것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의 영을 품고 그의 희망을 살

    아냈던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신앙은 명제적 진리로 바뀌었고

    예수에 대한 신조로서의 믿음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영의 종교가 합법적, 제

    도적 틀 속에 갇혀버린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콕스는 탈세속화, 곧 성령의

    시대에 이른 지금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새 차원인 ‘영성’의 이름하에 실험되고 있음을 지적했다.18) 이 경우 ‘영성’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의 이미지가 말하듯 제도적 경계를 허물며 명제적 진리가 아닌 소위 수

    행적(perfomative)진리를 적시한다.19) 부활이나 대속적 교리를 믿는가의 여

    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지금 여기서 삶으로 표현되는지에 대한 물음

    이란 것이다. 이점에서 키에르케고어의 다음 말은 탈세속화를 연 선구자20)

    로 평가받기에 합당하다. “진실한 의미에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시적이 될 때 확증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아닌 크리스챤이 되는 것

    은 자기기만이며...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이다.”21) 하지만 콕스가 예측한 종교의 미래, 탈세속화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간다. 축(軸)의 종교들이 공급

    한 다양한 문화적 생기(生氣)를 받아 신조(교리)로 규정된 기독교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22) 이는 예수를 따르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창조성, 곧 불고 싶은 대로 부는 영(靈)의 전적 요구라 생각된다.

    이는 신앙으로 재창조된 (탈세속적)기독교만이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JPIC) 이란 지구적 과제를 책임지는 보편종교로 거듭날 것이며 하느님 평화

    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콕스의 확신에 따른 것으로서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향방을 가늠케 한다.

    17) 콕스, 종교의 미래, 13-14.18) 앞의 책, 22-30.

    19) 여기서 말하는 수행적 진리는 행위의 결과(열매)를 통해서만 진리가 입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성서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20)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66-73 참조.21) S. Kierkegarrd, Tranining in Christianity, A Kierkegarrd Anthology, ed. R. Bretall (Newyork:

    Modern Library, 1950), 325.

    22) 콕스, 종교의 미래, 311; 암스트롱, 축의 시대-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 176 신학논단 제65집 (2011)

    과정신학자 D. 그리핀 역시 다른 관점이긴 하나 탈세속화의 영성을 시

    대 필연적인 것으로서 적극 意味化하였다. 자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시대

    적 구분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그리핀은 근대이전의 초자연적

    신관과 근대 과학이 표방한 자연주의(이신론)의 한계를 말하며 양자 간의 창

    조적 종합으로서 탈현대적 범재신론을 세속화이후시대의 神觀으로 제시했

    다.23) 이는 전통적 창조론인 ‘無로부터 창조교리’(Creatio ex Nihilo)가 신의 전능성을 강조한 나머지 자연주의적(아리스토텔레스) 관점을 부정했고 신정

    론(神正論) 물음을 야기 시켰다는 비판에 근거한 것이다.24) 따라서 이런 초

    자연성에 대한 부정이 과학적 근대의 에토스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기계론과 초자연주의 간의 부적합한 동거 시기가 있었으나25) 근대의 주된

    관심은 초자연을 탈각시킨 자연주의 내지 유물론 철학에 있었다. 하지만 근

    대 자연주의의 결정적 오류는 모든 지각이 육체적 감각을 통해서만 형성된

    다는 감각주의적 지각설에 있다.26) 초자연주의를 배제하는 것과 비감각 지

    각을 허용하는 일은 결코 동일한 사태가 아닌 까닭이다. 자연 역시도 인간이

    파악할 수 없을 뿐 지각의 주체라는 사실은 부정키 어려운 사실이다. 이점에

    서 탈근대의 기독교, 곧 탈세속적 영성은 세상에 대한 신의 결정론적 영향력

    을 더 이상 강조할 수 없다. ‘無로부터의 창조’가 자연의 능동성 일체를 부정했으며 인간의 의지마저도 신의 결정이라 여겼고 현재질서가 최상이라는 부

    정의(status quo)를 확대 재생산했으며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종교라는

    명제적 진리를 부추겼던 탓이다.27) 이점에서 탈세속적 종교로서 기독교, 곧

    범재신론(Panentheism)은 근대 자연주의와 새로운 종합의 과정에서 범경험

    주의(Panexperientalism)를 토대로 生起된다. 범(凡)경험주의란 정신/물질

    간의 선험적 차이 내지 이원론을 거부하며, 존재하는 것 일체를 의식의 주체

    로 보는 가운데 만물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적시한다.28) 여기서 범재신

    론은 神과 자연의 창조성을 함께 허락하는 바, 세계 내의 뭇 존재(현실적 계

    23) 그리핀, 위대한 두 진리, 3부 내용 참조.24) 앞의 책, 33.

    25) 앞의 책, 41-52. 대표적 학자로 르네 데카르트를 명명할 수 있다.

    26) 앞의 책, 68-69.

    27) 앞의 책, 116-128.

    28) 앞의 책, 167-176.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77

    기들)와 관계를 맺는 세계(자연) 속에 있는 하느님을 뜻한다.29) 따라서 우주

    의 신성(神性)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느님은 세상을 향한 ‘원초적 지향’(initial aim)을 지닌 존재로서 세상을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에 자연 자체와 동일할 수 않다. 그럼에도 세계 속의 각 개체들 역시 창조성을 지닌

    까닭에 악에 대한 책임 역시 神만의 몫이 아닌 것이 과정신론의 특징 중 하

    나일 것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자연 및 세계의 재신(활)성화가 탈세속화의

    또 다른 모습이란 사실이다. 즉 범재신론은 초자연적 기독교나 유물론적 자

    연주의에 대란 거부로서 제국이 가중시키는 기후붕괴에 맞서게 할 것이며

    기독교의 특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웃종교들과의 공존을 통해 세상을 달

    리 만드는 ‘새길’인 까닭이다.30)

    지금까지 말한 바, 존재의 나약함에 근거한 ‘공감’의 세상, 수행적 진리를 통한 지구적 종교로의 기독교의 지평 확대 그리고 자연의 재활성화로 인

    한 기독교의 전적 재구성 등은 성령 시대의 구체적 징표들이다. 이것은 근대

    성, 곧 神의 죽음을 無化시키려는 탈세속적 시도이지만 인습적 기독교이해와

    는 다르기에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성령의 시대로서 이를 거역하기

    어렵다. 세계 곳곳에서 보이는 종교의 근본주의적 양상은 이를 거역하려는

    반동적 발버둥일 뿐이다.31) 그럼에도 때가 차 절정에 이른 인간 정신을 저지

    하는 것을 무모한 일로 보기에는 현실이 너무 악하다. 실상 세 사상가들이

    꿈꿨던 세상은 세속성의 상징이자 실체인 보편적 악에 대한 성찰의 산물이

    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차이의 축제’를 선포한 탈근대성과 달리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 즉 탈세속적 영성을 통해 차이들을 하나로 묶고자 했다. 이는 근대적 체계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하나, 곧 보편의 길을

    추구할 목적에서이다.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을 갖고 이들이 맞선 것은 바

    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제국’이자 그것이 부추긴 생태적 종말이었던 것으로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향후 디아코니아의 본질과 향방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9) 앞의 책, 185. 이 경우 하느님은 창조성의 원생적 예증(aboriginal instance of Creativity)이라

    불리 운다.

    30) 앞의 책, 226-231.

    31) 콕스, 종교의 미래, 310.

  • 178 신학논단 제65집 (2011)

    III. 인간과 자연의 가난을 부추기는 ‘제국(Empire)’과 탈

    (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향방

    본 장에서 우리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적 지배구조,

    곧 ‘제국’의 실상을 파헤쳐 볼 것이다. 전 세계적 가난과 생태적 빈곤화를 가중시키는 ‘제국’과 맞설 수 있는 탈세속적 디아코니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함이다. 성서의 하느님 나라(바실레이아)가 영토(공간)적 개념이 아니

    라 불의한 정치권력에 항거했던 시대적 신학담론 곧 하느님의 왕권통치였다

    는 입장과 공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32) 따라서 여기서는 칼 마르크스를 포스

    트 모던적으로 재구성한 사상가로 稱해지는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多衆)이론에 주목할 것이다.33) 하지만 이 책이 중요한 이유를 ‘제국에 맞선 보편윤리를 찾아서’ 란 부제가 붙은 프랑스 철학자 알랑 바디유의 사도바울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34) 당대 최고의 프랑스 철학자 바디유가 성서의 인물 사도바울에게서 ‘제국’의 대항담론을 찾았던 까닭이다. 그는 바울을 동시대적 맥락에서 거짓된 보편담론들과 투쟁했던 열정(혁명)적 신앙

    인으로 보았다. 주지하듯 다메섹 체험은 바울 생애의 분기점이었다. 이를 회

    심이나 소명으로 보는 것이 기존 신학적 관점이었으나 바디유는 여기서 거

    짓된 보편담론으로부터의 탈주를 읽어냈다.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을 지

    배했던 것이 유대주의와 헬라문화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자는 율법에

    터한 특수(예외)주의적 담론이며 후자는 지혜(이성)의 유무로 인간을 판단하

    고 야만인을 양산하는 전체주의적 보편담론이었다.35) 이런 담론을 배경삼아

    예수 추종자를 박해했던 그가 다메섹 체험을 통해 그로부터 일탈을 선언한

    것이다. 바울에게 종교적 체험의 본질이자 기의가 바로 두 담론으로부터의

    자유였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육체로 알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영적인 삶의 본질이었던 바, 이런 지배담론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바울에겐

    죽음의 길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지배담론이 오늘 우리 시대에 자본

    주의에 근거한 ‘제국’임을 아는 일이다. 이것이 저자가 바울을 동시대인으로 32) Burton Mack, “The Kingdom sayings in Mark,” Forum 3 (1987); 장윤재, “정의의 눈으로

    보는 생명과 평화,” 8-9에서 재인용.33) 제국은 각주 12에서 소개했고 다중은 조정완 등에 의해 2009년 세종서적에서 출판되었다.34) 각주 11번 참고.

    35) 바디우, 사도바울, 83-85.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79

    불러 낸 근본적 이유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제국’의 틀 속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상태인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바디유는 진리란 일체 담론 속에

    있지 않고 오직 사건으로서만 생기함을 강조함으로써 제국과 맞설 수 있는

    보편적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것을 바로 바울에게서 보려했다.36) 다메섹 사

    건이 지시하듯 하느님이 사랑인 것은 사건의 보편성을 뜻하는 바,37) 하느님

    은 모두에게 저마다의 방식(문화)으로 진리를 사건화 시켜 거짓된 보편주의

    로부터의 탈주를 돕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디유는 제국과 맞서는 보편

    적 윤리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믿었다.38) 필자는 바로 여기

    서 탈세속화 시대가 요청하는 디아코니아의 요체를 볼 수 있었다. 콘스탄티

    노플 이후의 교회가 로마를 기독교화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로마화시

    켰듯이 현실의 교회 역시 자본주의 양식을 그대로 덧입고 있는 까닭이다. 자

    본주의적 틀 속에서의 디아코니아는 철저하지도 성서적일 수도 없기에 키에

    르케고어의 말처럼 오히려 성령 모독의 죄를 범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중요

    한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일체 담론이 진리가 아니라 사건 자체가 진리라는

    점이다. 여기서 ‘사건’은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동시성’의 다른 말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이 자본주의적 지배구조. ‘제국’의 거짓된 보편성과 싸우려면 옛 시절 유대교가 그랬듯 특권적 예외주의에 함몰된 교회

    적 특수주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39) 세상을 살리는 보편적 윤리가 ‘사건’을 통해 개별적으로 생기(生起)되는 한, 기독교 역시 일체를 향해 개방되는

    것이 마땅하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되

    었으며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바울의 증언을 그가 주목했던 이

    유이다.40) 이처럼 자신을 지배했던 과거의 정체성들에게 조차 열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보편성으로서 진리이다. 그렇기에 사건의 보편성은 의당 기

    존 담론들과 같이 차이들의 해체를 통한 획일화를 뜻하지 않는다. 차이들 간

    의 위계를 결코 논하지 않았고 차이를 횡단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관용적 평

    36) 앞의 책, 33.

    37) 앞의 책, 119, 147. 168. 참조

    38) 앞의 책, 209.

    39) 앞의 책, 84-87.

    40) 필자는 이것을 논어에 나오는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라는 말로 풀었

    다. 그릇이 되면 이미 정형화되는 까닭이다. 그릇이 아니어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정배,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서울: 동연, 2010), 26.

  • 180 신학논단 제65집 (2011)

    등을 강조할 뿐이다.41) 이런 평등에 근거하여 차이를 넘어선 개별자들의 연

    대가 바디유가 원했던 보편성이었고 그것으로 자본주의적 지배구조인 ‘제국’과 맞서려 했으며 이를 위해 바디유는 바울을 우리와 동시대인으로 불러 세

    워야만 했다.42) 바디유가 기획했던 보편성은 따라서 존재의 취약성에 근거

    한 ‘공감’과 일체 경계를 부수는 ‘하느님의 영’(靈) 그리고 범경험주의에 터한 관계적 유신론 곧, ‘범재신론’과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이 모두는 결국 지구적 가난을 확대시키는 ‘제국’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유일한 생명공간인 지구(자연)생태계를 지키려는 ‘불가능한 열정’을 선사하는 까닭이다. 이런 열정이야말로 탈세속화 시대의 종교성의 본질이며 항차 삶의 양식을 총체적

    으로 달리 만들 수 있는 디아코니아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의들은 결국 해체되었던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복원시키려는 시도들이기에

    필자는 이를 탈(脫)세속화란 말로 총칭(總稱)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디유가 맞서려 했던 ‘제국’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그리스도교 진리가 감당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되어야 할 책이 바로 제국과 다중 임을 누구라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주지하듯 이 책들을 통해 네그리는 탈현대적 상황에서 노동개념

    을 재구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지배담론인 ‘제국’과 맞서고자 했다. 이를 위한 사회적 실천, 곧 노동을 새로운 존재론의 구축이라 여겼고 탈세속화 시대

    의 종교적 의미로 격상시켰다.43) 이것은 정당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

    님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D. 죌레의 신학적 전망과 상응한다.44) 인간 주

    체, 진정한 종교성이란 일체의 선험적(형이상학적) 담론에 터하지 않고 범세

    계적 가난과 자연 파괴를 가중시키는 자본주의적 지배구조로부터의 단절을

    기획하는 불가능한 열정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진리란 담론 속

    에 있지 않고 오로지 사건으로 발생한다는 바디유와 의미상통 한다. 하지만

    초국가적 자본의 힘이 군림하는 현실, 곧 국가주권 마저 무력화 시키는 탈

    (脫)영토화된 ‘제국’은 세계적 가난의 산실(産室)이나 동시에 그 공간자체는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제국의 긍정성은 국민주권(정체성)이 해결

    41) 바디우, 사도바울.42) 앞의 책, 18, 24.

    43) 마이클 하트/정남영·박서현 옮김, 네그리 사상의 진화 (서울: 갈무리, 2008), 192.44) D. 죌레/박재순 옮김, 사랑과 노동 (서울: 한국 신학연구소, 1998).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81

    못한 자아/타자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무력화시킨 최초의 장소이기 때문이

    다.45) 여기에는 민족의 이름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정체성이란 타자를 일자

    로 환원시키는 동일성(초월)의 폭력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타자를 생산하

    여 환영으로 만든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는 물론 그 식민지배의 부산물인 저

    항적 민족주의 역시 예외일 수 없음이 네그리의 생각이었다.46) 이처럼 정체

    성 부정은 담론이 진리라는 것을 거부했던 바디유를 크게 닮아있다. 따라서

    정체성 대신 제국의 문화적 특징으로서 ‘혼종성’(Hybridity) 혹은 ‘잡종성’이란 말이 회자된다.47) 의당 차이와 특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자본이 지배

    하는 제국 하에서 더 이상 순수(정체성)는 없고 민족은 존재치 않는다. 이점

    에서 혼종성은 분명 제국의 긍정적인 면이다. 여기선 위계도 없고 경계를 가

    로지르는 차이의 정치가 가능할 수 있다. 누구라도 他者化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윈리上으로 제국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 과거(근대) 제국주의

    시대보다 탈현대적 제국에서 위계와 차별이 각별하다. 혼종성과 차이가 제

    국 속에서 즉각적으로 해방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차이를 찬양하되

    그것을 포괄, 구별, 관리하는 체계가 마련된 탓이며 탈현대주의의 보수성을

    제국이 적절하게 활용한 결과라 하겠다. 일체의 차별적 담론을 경멸하나 지

    구적 가난과 기후붕괴를 야기하는 제국은 실제로 무수한 차이들의 온상인

    셈이다. 따라서 지구적 가난과 생태파괴가 확대되는 한 제국의 혼종성은 근

    대적 정체성보다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네그리는 전세계적인 가

    난을 ‘차이의 공통이름’이라 명명했다.48) 이는 제국의 딜레마이자 극복되어할 시대적 과제로서 디아코니아가 요청되는 실상이다. 혼종성으로 근대적

    타자를 넘어섰으나 ‘가난’으로서의 차이가 재생산되었고 기후붕괴의 폐해 역시 가난한 자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지만 제국의 무장소성(Non-place)49)으

    로 비판의 대상자체가 실종된 상황에서 교회의 디아코니아 역시 향방을 달

    45) 네그리, 제국, 198-199.46) 앞의 책, 158. 여기서 네그리는 서구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난 저항적 민족주의를 ‘독이 든

    선물’로 비유했다. 민족주의가 외부와 맞서기 위해 자신의 내부 속의 차이를 억압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47) 앞의 책, 201. 여기서 혼종성이란 호미 바바(Homi Bhabha)의 용어로서 ‘혼종적 주체성’의 줄인 말이다.

    48) 앞의 책, 216.

    49) 앞의 책, 257.

  • 182 신학논단 제65집 (2011)

    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 장의 주제인 바, 여기서는 네그리의 견해를 좀

    더 따라가 보겠다. 그의 사상의 백미는 주지하듯 이렇듯 ‘가난한 노동자’를 제국에 맞서는 유일한 대항마로 보는데 있다.50) 하지만 가난한 자란 결코

    마르크스적 프롤레타리아 계급개념의 차원과 결코 동일시되지 않는다. 탈현

    대에 접어들며 노동의 본성 자체가 많이 달라졌던 까닭이다. 외적 자본에 의

    존된 노동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가치화 할 수 있는 노동의 새 차원, 즉 비물

    질적이며 소통적인 노동의 내재적 가치가 중시된 것이다.51) 제국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성별(젠더), 업종별(노동형태), 문화, 민족적 다름 그리고 세계관

    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물질적인 노동이 지닌 소통과 협력 때문이란 것이

    네그리의 확신이었다.52) 이런 이유로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일컬어 특이

    성(차이)을 유지하면서도 상호 소통을 통해 제국과 맞설 능동적 주체로서 多

    衆(Multitude)이라 하였다.53) 하지만 노동 본성 자체의 변화가 多衆으로서

    가난한 자들 간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는 네그리의 확신은 일면 긍정할 만하

    나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주지하듯 혼종적 주체성으로서의 多衆은 민중이나

    대중과 구별되는 것으로54)단일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특징으로 한

    다. 그렇지만 多衆의 내부적 차이, 즉 그들 간의 특이성이 정말 소통될 것인

    지 나아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일이 가능할지는 더욱 숙고할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통적인 것(공통감)’이란 빈자(貧者)들의 아픔을 가중시키는 경제의 지구적 경제통합을 비롯하여 국제법의 불의한 권력행

    사에 대한 항거,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및 생태환경 운동 나아가 원주민 생

    존투쟁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제국의 편향된 권력이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할수록 생존을 위한 ‘공통감’을 찾으려는 多衆의 역할 또한 한없이 커져가고 있다. 이런 ‘노동의 공통되기’ 역시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으로서 가난한 노동자들, 곧 多衆의 종교적 열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생산의 정

    50) 앞의 책, 275-293.

    51) 앞의 책, 370-396 참조.

    52) 여기서 필자는 이런 노동이해의 변화를 마르크스 노동관의 탈현대적 이해라고 생각했다. 아

    울러 노동의 비물질적 성격은 컴퓨터(정보) 산업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53) 앞의 책, 498 이하 내용.

    54) 민중이 계급적 차원에서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시킨 개념이라면 대중은 내적 차이를 고려

    치 않는 무차별적 개념이라 하겠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조정환 외 옮김, 다중 (서울: 세종서적, 2008), 18-19 참조.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83

    보화 및 노동의 비물질적 특성, 곧 노동의 질과 본성 자체의 변화만으로 ‘노동의 공통되기’, 곧 제국(권력)에 맞선 ‘삶정치’(Biopolitics)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55) 네그리가 국가주권이 무력해진 정황에서 多衆

    의 천재적 지능56), 소위 집단지성에 의거하여 제국의 권력에 대한 새 차원의

    정치적 저항운동을 강조했으나 그곳에는 초월적 상상력이 부재했다. 그에게

    초월은 삶권력에 대항하여 주권을 획득하는 노동의 생산성(공통감)에서만

    존재했던 까닭이다. “남성, 여성, 노동자, 이주자, 빈자 그리고 다중의 모든 구성요소를 포함하는 공통된 방식으로 인류의 유산을 관리하고 식량, 재화,

    지식, 정보 및 기타 모든 형태의 부와 미래의 생산을 이끄는 방법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이다.”57) 이점에서 네그리는 우리에게 ‘주권’인가 ‘아나키’인가를 양자택일하라고 했다.58) 그러나 구체적 보편으로서 多衆만이 주권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多衆의 저항적 역할과 그가

    구성할 삶정치에 집중한 나머지 多衆의 내면성을 간과했고 그 천재적 지능

    만을 과대평가한 탓이다.59) 달리 말하면 플라톤적 유산을 부정한 나머지 스

    피노자의 내재성을 보수적으로 추종한 결과라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네그리의 多衆論을 정치사회학 영역에서 R. 도킨스나 .A. 윌슨 식

    (式)의 유물론이라 평가하고 싶다.60) 탈세속화는 초월의 퇴출이 아니라 그의

    복귀이며 초월과 내재, 양자 간의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종합을 뜻하는 것일

    뿐 내재성 그 자체를 초월로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디유가 사건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 역시 초월에 대한 언표가 달랐던 것으로 그것의 부정은

    결코 아니었다. 이점에서 철학자 바디유와 사회 정치학자인 네그리의 변별

    력이 들어난다. 하지만 필자는 네그리를 통해 향후 교회가 관심해야 할 디아

    코니아의 향방을 분명하게 배웠다. 진리를 여타 담론으로 환원치 않고 삶속

    에서 전지구적 민주주의, 평화, 가난의 철폐, 생태계 복원 등을 원하는 多衆

    의 열망을 ‘특이성에 근거한 공통성’(공통감) 내지 ‘구체적 보편’으로 본 것

    55) 앞의 책, 20-21, 152.

    56) 앞의 책, 442.

    57) 앞의 책, 411.

    58) 앞의 책, 433.

    59) 이정배, “민족과 탈민적 논쟁의 시각에서 본 토착화 신학: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의 비판적 독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151 (2010), 176-177 참조.

    60) 앞의 논문, 177-178.

  • 184 신학논단 제65집 (2011)

    은 자폐적 증세를 보이는 현실 교회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네그리는 이런

    열망을 ‘세속적 오순절’이라 할 만큼 공통을 향한 차이들이 소통을 강조한 것이다.61) 오순절 이후, 곧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공통감은 중요하며 그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탈세속화 시대에 이른 지금 교회는 뭇 차이(이념)들과 공존하며 당시 로마와

    맞섰던 예수처럼 초(超)자본주의화된 제국권력에 대항할 정신적 에토스와

    삶의 태도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JPIC를 주창한 C. 봐이젝커가

    가난과, 전쟁 그리고 생태계 파괴가 지구상에 산적에 있는 한 기독교 정신,

    곧 구원의 실현은 아직 요원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62) 하여

    필자는 탈세속화 시대에 있어 기독교(인)의 재주체화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옛적의 키에르케고어가 말했듯 그것을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선교사가

    되는 일이라 믿고 있다.63) 미래적 대안이 될 수 없는 자본주의 삶의 양식,

    제국이 교회마저 잠식하는 현실에서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공공적으로 정위

    하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되 세상을 달리 만드는 디아코니아의 본질이

    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IV. 기독론적 실험으로서의 교회의 디아코니아, 그 성령론적

    확대-본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 이해와의 연계 속에서

    우리는 서론에서 디아코니아가 기독론적으로 정위될 필연적 이유를 언

    급했다.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기독론적 실험의 잣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카톨릭 신부 이반 일리히의 말대로라면 이런 실험은 선한 사마리아인(눅

    10:25-37)의 삶을 통해서만 통과할 수 있다.64) 예수가 인간이 된 강생, 수육

    의 사건을 최상의 것(복음)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사마리아인이 보여주었듯

    61) 네그리, 제국, 463.62) 이는 JPIC 공의회를 발의한 공로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

    에서 행한 연설의 요지이다. 신학자들은 20세기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서 아우

    슈비츠 경험과 1990년 서울에서 열린 JPIC 공의회를 꼽는데 있어 주저치 않는다.

    63) 이정배, “한국교회를 향한 돌들의 소리: 고독하라, 저항하라, 상상하라: 키에르케고어, 본회퍼 그리고 李信의 苦言,” 「웨슬리 회심 273주년 기념 강연회 자료집」 (2011), 9-10 참조.

    64) 이반 일리히/이한·서범석 옮김, 이반 일리히의 유언 (서울: 이파르, 2010), 12-13. 1부 내용.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85

    사랑의 새 차원을 열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복음의 신비는 길가에 버려진 사

    람에게 다가선 순간에만 재현되고 반복된다는 것이 일리치의 분명한 확신이

    었다. 기독교(복음)가 최선인 것은 교리, 신조에 있지 않고 종교인조차 지나

    치는 어려운 순간과 사건에 참여할 수 있는 힘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목

    하 현실교회는 참여가 아니라 개념과 교리를 갖고 누구 이웃인가를 묻고 있

    다. 교회 밖 구원의 교리적 유무(有無) 논쟁은 디아코니아의 기독론적 실험

    을 방기한 결과로서 최선이 타락한 최악의 실상일 뿐이다.65) 사마리아인의

    행위 자체가 영생인 것이 성서의 본뜻인 한에서 디아코니아가 기독론적 실

    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논거가 정작 현실 교회

    안에서는 실종되었으나 탈세속시대에 접어든 세계는 이를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이라 칭하며 보편윤리란 비종교적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곤경(Not)과 마주함에 있어 주저치 않고 있다.66)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대제사

    장이나 율법학자들 역시 그럴만한 종교적 이유가 없지 않았으나 결국 그들

    이 이웃이 아니었고 영생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듯이 인습적 복음(구원)관의

    탓으로 교회가 지구적 가난 및 생태계의 빈곤과 대면치 않는다면 최선이 타

    락하여 최악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시대적 궁핍과의 싸움이 기독

    교적 구원의 전부는 아니겠으나 개인과 우주를 아우르는 총체적 시도(total

    approach)야말로 디아코니아의 기독론적 실험에 합당하다고 확신한다. 따

    라서 탈세속화 시대에서도 교회가 디아코니아의 주체여야 하겠으나 그럴수

    록 디아코니아가 발생하는 곳마다 교회이며 그곳에 영생(永生)이 있다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의 존재 양식 역시 요구된다.67) 이하에서 우

    리가 기독론이 곧 교회론이며 그것을 바로 디아코니아로 본 본회퍼의 비종

    교적 해석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神없이 神앞에 서고자했던

    그의 신학 역시 ‘동시성’의 추구로서 탈세속화의 정조(ethos)와 잘 조우되는 까닭이다.

    65) 앞의 책, 13. 110. 이점에서 일리히는 우리 역시 죄를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66)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곤경, 곧 강도만난 자의 현실은 생활임금은커녕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 ‘워크턴트’로 전락하여 빈곤의 대물림에 내물린 학생들, 사회적 안전망에서 빗겨난 이주 노동자들이 구체적 예가 될 것이다.

    67) TRE, Bd. 8, 645.

  • 186 신학논단 제65집 (2011)

    앞서 우리는 지구적 가난과 생태파괴의 실상을 논했고 차이의 공통된

    이름인 인간과 자연의 가난에 맞서기 위한 보편윤리의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혼종성이란 이름하에 차이를 부정치 않으면서도 제국의 ‘삶권력’을 거부하는 多衆들의 일치된 몸짓에서 세속적 오순절의 징후를 본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비록 네그리가 多衆의 천재적 지능(집단지성)으로 선회한 한계가 있으나 ‘삶권력’으로서의 제국담론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인류를 가난과 자연이란 공통의 과제 앞에 내 몰았던 것은 바디유가 말했던 사건으로서의 진리가 아닐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분명 탈세속화 시대에 부합된 종교(초월)성의 현시라

    확신한다. 달리 말하면 이는 그리스도와의 동시성을 획득하는 일이자 불가

    능한 것을 향한 열정이며 인간 및 세계를 향한 사랑의 새 차원을 드러낸 강

    생신비의 본질과도 상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사건으로서의 진리를

    은총(Gabe)과 사명(Aufgabe)의 관계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68) 디아

    코니아의 새 차원을 열어 준 네그리를 따르되 초월을 내재로 환원시킨 그와

    의 변별력을 명백히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예배와 봉사 혹은 말씀과 행위의

    관계로도 치환할 수 있는 것으로서 디아코니아의 영(초월)적 차원을 명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말씀 선포로 인해 디아코니아적 소명이 발생하기에 항

    시 은총 혹은 선물(Gabe)이 먼저이고 봉사 직이 그를 뒤따른다는 것이 기독

    교 전통의 핵심이기도 했다.69) 본회퍼를 원용하자면 궁극(Lezte)과 궁극이전

    의 것(Vorletzte)으로 대별될 수 도 있겠다. 하지만 말씀(은총)이 디아코니아

    를 낳고 그것이 다시금 말씀이 된다는 것이 성육신의 해석학적 순환이다.70)

    즉 하느님이 육체(물질, 역사)가 되었으나 다시금 그 육체가 정신(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71) 초월이 역사 속에 있으나 역사에 함몰된 것이

    아니기에 디아코니아 그 자체는 원리상 하느님 나라 곧 구원의 상대적 실현

    이라 보는 것이 옳다. 72) 하지만 강조되어야 할 것은 상대적인 디아코니아

    자체가 다시금 말씀(영)이 된다는 사실이다.73) 이는 디아코니아의 실종이 말

    68) TRE, Bd. 8, 650.

    69) TRE, Bd. 8, 652.

    70) TRE, Bd. 8, 653.

    71) 이신 외,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서울: 종로서적, 1992), 167 이하 내용. 이 책은 2011년 동연 출판사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72) TRE, Bd. 8, 653.

    73) TRE, Bd. 8, 653. 이에 대한 구체적 예증으로 ‘울지마 톤스’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를 들 수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87

    씀을 사건화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는 경종일 것이다. 현금

    의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잃었기에 영적일 수 없음을 적시한다. 하지만 그럴

    수록 성서 속의 그리스도는 언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습과 형태로서-더

    욱 오늘의 시각에선 개인을 넘어 전 세계, 우주적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

    실 자체를 각성시킨다. 디아코니아가 다시금 말씀과 은총이 된다고 믿는 까

    닭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섬기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존재(현실)

    와 동일시된다는 사실은 디아코니아와 교회론 그리고 기독론 간에 不二적

    관계를 성립시키며 그로써 디아코니아의 초월성과 내재성, 그 양면을 함께

    긍정하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는 多衆이론과 맥락

    을 같이하되 多衆을 추동하여 ‘차이의 공통이름’, 곧 우리시대의 공통감인 ‘전 지구(우주)적 가난과 고통의 실상과 더불어 정면 승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독교에 대한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으로서,

    필자는 이하 내용에서 그의 기독론적 실험을 탈세속적 방식, 곧 성령론적 토

    대를 사용하여 확대 재 서술 할 것이다.

    주지하듯 본회퍼 목사는 자신이 속했던 루터교회가 히틀러에게 종속된

    현실을 보았고 더욱 유대민족의 분리정책(아리안 조항)에 동의했던 당시 교

    회를 향해 홀로 의롭게 항거했던 신학자였다. 항차 대학살을 목적하여 유대

    인을 특별관리 대상으로 삼았던 국가정책에 동조한 까닭에 교회는 유대인들

    에게 씻을 수 없는 빚을 걸머지게 되었다고 천명한 것이다.74) 이렇듯 나찌

    정권에 협력한 교회는 본회퍼에게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었고 그렇게 된 원인

    을 두 왕국설에 터한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 자체에서 찾았다. 교회와 사회

    그리고 세계 나아가 우주가 상호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고 다차원적인 하느

    있을 것이다. 그는 하느님 부름으로 의사와 본당 사제직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남수단의 한센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 우연히 발견한 암으로 소천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선택했

    느냐고 물었을 때 그중 으뜸가는 한 가지 이유를 다음처럼 말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란 예수 말씀의 향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삶,

    디아코니아가 분명 하느님 은총이자 선물(Gabe)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의 삶을 보며 톤스의 주민들이 하느님을 발견했고 자신들을 위해 보내준 예수인 것을

    고백했을 때 그의 삶, 디아코니아가 다시금 말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디아코니아

    가 은총(말씀)과의 해석학적 순환관계 속에 있음을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74) D. Bonhoeffer, Gesammelte Schriften, Bd. 2. Muenhen 1958, 48. 본 내용은 우리말로 번역

    된 성도의 공동생활에 실려있다. 이것은 본회퍼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 188 신학논단 제65집 (2011)

    님의 전영역이라 여겼던 탓이다.75) 이는 디아코니아의 신학적 향방을 기독

    론적으로 정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에 본회퍼의 질문은 항시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무엇인가?’에 있었고 그럴수록 예수를 향해 ‘당신은 하느님 자신입니까?’를 지속적으로 물었다.76) 오늘 인간 삶의 총체적 현실을 위한(pro me) 그리스도의 현재성, 곧 신앙의 동시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인간됨을 죽기까지 복종했던 예수의 행위

    에서 찾았고 심지어 이런 성육신을 인간으로 하여금 신(神)되게 하는 초대라

    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인간의 고통과 함께 했듯이 인

    간 역시 이웃의 고통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신앙의 동시성이자 역동성을 일

    컫는바-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 성육신의 신비임을 강변한 것이다.77)

    이는 예수 안에서 존재와 행위가 하나인 것을 확증한 결과로서 예수의 실존

    과 자신의 실존이 ‘동시적’ 상태가 되는 사건이자 명령, 곧 ‘나를 따르라’는 말의 다른 식 표현이었다. 영생의 질문을 갖고 있던 율법학자에게 선한 사마

    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누가 너의 참된 이웃인가를 물었던 예수의 심중을 상

    상해도 좋을 듯싶다. 하지만 성서의 그리스도와 구체적 실존으로서 기독교

    인이 ‘동시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사건이자 은총이었다. 외적 조건(노동)의 변화에 기인한 것도 의지적 노력의 차원만이 아닌 뜻밖의 사

    건, 곧 사랑의 선물이란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의 존재이유는 세상 한가운데

    서 현재적 그리스도의 장소가 되는데 있다.78) 재론 하지만 현실교회가 이런

    공간이 될 수 없는 경우, 곧 동시성이 生起할 수 없다면 디아코니아 역시 기

    대하기 어렵고 그로써 건물로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

    지만 본회퍼에겐 이런 말도 가능하다. 존재와 행위가 하나 되는 겸비, 곧 디

    아코니아가 실현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리스도가 세계적 고통의 현실에서 언제고 어디서든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로서 현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본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 해석과 내용상 직결되는 사안이다. 여기서 핵심은 앞서

    도 보았듯이 기독론과 교회론 그리고 디아코니아(윤리)가 나뉠 수 없는 하나

    란 점이다. 이는 디아코니아적 실천이 기독론적으로 정위되었으며 기독론적

    75) TRE, Bd. 7, 57.

    76) TRE, Bd. 7, 59.

    77) 본회퍼, 디트리히 본 회퍼 묵상 52, 292.78) TRE, Bd. 7, 60.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89

    실험의 유일 잣대로 역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神이 사라진

    세속세계 속에서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 새 길, 곧 탈세속적인 ‘비종교적 해석’을 일층 더 강조할 뿐이다. 무엇보다 비종교적 해석은 구원의 내면적 개체성이나 형이상학(교리)적 체계로서 기독교를 논하는 방식과 분명한 선을

    긋는다. 형이상학(두본성론)과 개인주의는 성서적 케리그마(使信)나 오늘날

    인간이해와도 맞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79) 본회퍼가 神없이 神앞에 선

    존재로서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본 것은 기독교인 역시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현존에 참여(동시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

    속화 이후 복귀한 종교(신앙)의 본성을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이란 말로 언표한 카푸토의 말을 상기시킨다.80)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실

    존에 참여한 존재, 곧 동시적 실존에로의 열망은 사건으로서의 은총이자 탈

    세속적 영성의 핵심으로서 본회퍼는 그런 은총과 영성을 살아냈던 구체적

    인물이었다. 더욱 본회퍼의 하느님은 삶 한가운데서 피안(초월)으로 계신 분

    이었기에 죄와 죽음이란 한계상황 속에서 그를 사적으로만 이해했던 인습적

    관행과 결별할 수 있었다.81) 여기서 핵심은 ‘타자를 위한’(pro allias)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일 뿐 아니라 교회의 존재 형식이었고 동시에 ‘나를 따르라’(Nachfolge)는 예수의 부름 곧 디아코니아적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82) 이는 세상이라는 횡적 관계 속에서 예수를 보았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사회적 책임에서 빗겨갈 수 없음에 대한 천명인 셈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

    월성을 인간 및 사회의 구체적 정황에서 찾고자 한 것은 십자가 신학과 세속

    성의 절묘한 결합으로서 비종교적 해석이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신학

    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본회퍼가 神이 사라진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 고통- 현재로서는 전 지구적 가난-에 참여하는 여러 형식들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신학 일체를 비판했던 변증법적 신학자 바르트와 달리

    세상의 세속성(자율성)을 긍정했기 때문이며83)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의

    79) D. Bonhoeffer, Letter and Paper from Prison (Newyrk: Mcmillian, 1967), 143-144.

    80)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87 이하 내용.81) 본회퍼는 인간의 약점과 한계에서만 만나는 하느님을 ‘deus ex machina’라 하여 거리를 두었

    다.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uenhen, 1970), 304-308. 참조.

    82) 에버하르트 베트게/김순현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서울: 복있는 사람, 2007), 103. TRE, Bd. 7, 56.

    83) TRE, Bd. 7, 59, 151-152. 여기서 칼 바르트와 ‘신앙 유비’와 본회퍼의 동시성에 근거한 비종

  • 190 신학논단 제65집 (2011)

    모습을 지닌 하느님이 바로 기독교적 초월임을 역설했던 까닭이다. 이렇듯

    ‘나를 따르라’는 세속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와의 ‘동시적 실존’이 되고자 하는 신앙의 사건화로서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의 산물이자 디아코니아의 본질

    을 적시한다. 본회퍼의 다음 말 속에서 우리는 기독론적 실험에 통과한 디아

    코니아, 곧 탈세속화 시대에 걸 맞는 디아코니아의 향방을 분명하게 가늠할

    수 있다. “교회가 새 출발을 하려면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교회는 세속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무엇이며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념이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은 모범을 통해서만 무게와 힘을 얻을 수 있

    다.84) 이는 교세확장에 관심한 종교(교회)의 관점에선 턱없는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성서가 증언하는 삭개오의 기쁨을 구원의 열매로 인식한다

    면 교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들을 위해 내어 놓아야 마땅하다. 자본

    주의 체제 속에 사는 우리가 옛적의 삭개오가 그랬듯이 떳떳하지 못한 세계

    경제 질서에서 물질을 향유하며 살고 있는 까닭이다.85) 이것은 ‘내가 나의 神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답임이 확실하다.86) 불가능한 것을 사랑하고 그를 향한 열정을 품는 것이 神을 사랑하는 탈세속적

    방식이다.

    그럼에도 기독론적으로 정위되고 실험된 디아코니아는 중요성에도 불

    구하고 그 지평을 성령론적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수차 암시했듯 현실

    은 인류의 가난을 넘어 자연의 황폐화 내지 우주적 파멸로 치닫고 있기 때문

    이다. 의당 이것들은 초국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동전의 양면적 상태일 것이

    다. 하지만 신앙적 동시성에 근거한 기독론적 토대만으로 자연 생태계의 빈

    곤을 치유하기에는 시대 적합한 더 큰 틀의 신학적 이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자가 생각해 본 것이 성령론적 시각이다. 물론 이것은 필자 고유한

    생각만은 아닐 것이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리했다. 요한복음서(요14:12)에

    의하면 성령은 우선 예수를 대신한 것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일을 기대하며

    내리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 자신의 일을 미정고(未定稿)로 名하며 전

    교적 해석간의 차이가 분명해 진다.

    84) 베트게, 디트리히 본회퍼, 256;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315.85) 김경재, 삭개오의 기쁨 (서울: 한들출판사, 2011), 17-20.86)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1장 내용 전부.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91

    우주 생태계, 곧 완전고(完全稿)를 향한 무한 책임을 성령과 더불어 우리 그

    리스도인에게 맡기신 것이다.87) 또한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하느님

    영으로서(요3:8) 일체의 벽을 허무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일컫는다.

    이는 하느님이 교회보다도 큰 분이기에 이천년 기독교 역사가 만든 어떤 교

    리와 신조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확신과 有關하다. 아울러 성령은 기독교적

    진리가 형이상학(존재론)적이기 보다 수행적 차원임을 적시한다. 바람이 부

    는 것은 나뭇가지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이 맺는

    열매를 통해서만 증명된다는 것이 성령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

    아코니아의 중요성을 우주론적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일체 피조물 속에 내주하며 고통받고 있다는

    로마서(롬8:18-25)의 증언이다. 이는 D. 그리핀이 말했던 범경험주의와 무관

    치 않은 것으로서 우주만물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는 범재신론의 가능

    성을 시사한다.88) 더욱 하느님 靈인 ‘루아흐’ 곧, 성령이 피조물을 대신하여 탄식하고 있다는 성서말씀은 생태계의 빈곤을 적시하는 것인바, 이들의 한

    맺힌 절규를 듣는 것이 성령체험의 한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럴 경우 지극히

    작은 자 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란 디아코니아의 기독론적 실험은 성령

    론적 차원에서 자연 및 우주 생태계로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靈이신 하느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요4:24)은 우주 자연 생태계

    를 복원하고 회복시키는 일과 결코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다.89) 동일 선상에

    서 과정 신학자 수하키 역시 우주 생태계(피조물)에 대한 폭력이 하느님에

    대한 반역인 것을 동시대 기독교교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사명으로 삼고 있다.90) 그렇기에 그녀는 원죄를 피조물의 안정과 평화를 파

    괴하는 필요이상의 폭력에서 보았고 그것을 야기(惹起)하는 인간 본성 및 사

    회구조를 분석했으며 이를 근거로 불필요한 폭력을 극복하는 것이 죄 용서

    이자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길(구원)인 것을 역설하였다.91) 이런 가르침은

    87)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편 (서울: 현암사, 2008), 790-812 내용.88) 마커스 보그/한인철 옮김, 새로 만난 하느님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 여기서는 성

    서의 하느님이 바로 범재신론의 표상과 같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89) K. Stendahl, Energy for Life, Reflection on the theme “Come Holy Spirit, Renew the Whole Creation” (WCC Publication, 1990), 51; 이정배, 조직신학으로서의 한국적 생명신학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55.

    90) 마조리 H. 수하키/김희헌 옮김, 폭력에로의 타락 (서울: 동연출판사, 2011).

  • 192 신학논단 제65집 (2011)

    기후붕괴의 원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는 의미, 곧 기

    독교인의 재주체화에 대한 고민을 아니 할 수 없도록 한다.92) 이는 곧 디아

    코니아가 총체적 영역에서 인간 삶의 양식 자체를 달리 만드는 일과 깊이

    연루되었음을 뜻한다. 재주체화 된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君子不器’란 말이 지시했듯 그리고 바디유가 ‘사건으로서의 진리’를 통해 말하려 했던 바, 이웃종교 및 시민사회 구성원들과 더불어 공감하는 삶을 나타내 보여야 마땅하

    다. 이는 종래와 같은 타자 부정의 에토스를 끝내야 가능할 수 있다. 지구적

    규모의 대재난 앞에서 종교, 문화 그리고 민족, 계층 간의 차이는 ‘제국’의 폭력 앞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네그리의 말대로 차이의 공

    통이름인 ‘전(全)지구적 가난’과 ‘생태적 빈곤’을 교회 안팎에서 ‘공통’의 과제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 진 것이다. 다중(多衆) 혹은 시민사회 구성

    원들과의 공감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시민 단체들과

    공감하는 방식으로 가난, 인권, 환경과 같은 지구적 차원의 주제에 관심하는

    것이야 말로 탈세속화 시대에 이른 현실에서 기독교적 디아코니아가 감당할

    과제라 믿는다. 초월성(영원성)이란 공공성(公共性)의 지평을 상실한 경우

    공허한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93)

    이점에서 우리에겐 특수계시와 보편계시, 인간과 자연 나아가 기독교와

    비기독교간의 경계를 허무는 성령의 보편성을 더욱 주목해야 할 시점에 이

    르렀다. 일찍이 희랍교부 이레네우스는 ‘말씀’과 ‘영’을 하느님의 두 손으로 비유한 바 있었다. 성자뿐 아니라 성령 역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리는

    지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하느님의 영이 기독론에 종속시킨 것이

    기독교의 역사였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영이 시간적으로는 처음 창조 時

    부터 현재는 물론 새로운 창조 때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기독교 내외 모

    든 영역에서 충만한 보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탈세속화에

    이른 오늘의 교회가 성령의 보편성이해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 의식의 심화

    는 물론 디아코니아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94) 이점에서 오

    91) 앞의 책, 237 이하 내용.

    92) 이정배,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머릿글 참조.93) 한나 아렌트는 공공적 삶을 영원성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했다. 그녀에게 공공성과 영원성(초

    월)은 의미상 같은 것이었다.

    94) Amos Young, Beyond the Impass-toward a pneumatological theology of religion (Patermoster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93

    순절 신학을 공공성(디아코니아) 차원과 연계시킨 신학자 아모스 영(A.

    Young)은 하느님 영을 인간 삶 전반에 걸쳐서 이해했고 따라서 법, 제도,

    국가조차도 이런 영의 현상들로 이해할 것을 강변했다. 그렇기에 하느님 영

    이 세계 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체험과 무관치 않다는 차원에서 영의 보편성

    은 ‘토대적 성령론’(foundational Pneumatology)이라 명명되었다.95) 이는 보편적 인간성과 세속성 속에서 토대(근본)적 성령론의 공공성(公共性)을 보

    려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기독교적’ 체험과 세계 내 인간 존재간의 ‘보편적’ 체험간의 유비 및 상호 치환 가능성이 인정된다.96) 물론 이것 역시도 하느님

    영으로서의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이 ‘토대’로서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적 체험으로부터 시작하나 그 지평을 인류 공

    통체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는 토대적 성령론 속에 내재된 에큐메니칼

    적 지평과 디아코니아의 범위이다. 우주 및 인간의 생활세계 전체가 하느님

    영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토대적 성령론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 용은 국가 및 시민단체 그리고 이웃종교들과의 만남에

    있어 기독론적 잣대를 행사하는 것 보다 성령의 보편성(토대)에 근거, 삶의

    공공성을 문제 삼는 것이 탈세속화 시대의 선교이자 디아코니아의 향방인

    것을 역설 할 수 있었다.97) 물론 토대적 성령론의 맥락에서 예수의 역할 역

    시 축소되거나 간과되지 않는다. 하느님 영을 온전히 실현시킨 예수는 마성

    적인 고립성과 파괴성을 극복한 존재로서 삶의 공공성과 보편성의 화신(化

    身)인 까닭이다.98) 현실 교회와 기독교인들 역시도 하느님 영을 좆아 예수처

    럼 공공성과 보편성을 역사 속에서 실현시킨다면 그들의 디아코니아 역시

    기독론적 실험에 성공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

    아를 위해 토대적 성령론이 기여한 것 중 중요한 하나는 교회밖 세계의 문

    화, 상황, 신념, 관습 등에 주목하여 그들의 진리 독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press, 2003), 58.

    95) Ibid., 57-61. 토대적 성령론은 근본적 성령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96) 이것은 칼 바르트 식의 신앙유비(Analogia Fidei)와는 크게 다르며 가치론적 차이를 전제로

    하는 가톨릭의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도 구별되고 기독교 전승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

    건이 항시 ‘always-already’와 ‘not-yet’의 시간적 구조 속에서 유비로 나타난다는 D. 트레이시의 ‘유비적 상상력’(Analogial Imagination)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성령론적 토대 하에서 기독교 안팎에서의 체험의 공통성 곧 공공성을 말하는 까닭이다.

    97) Ibid., 101-103, 115-117.

    98) Ibid., 153, 158.

  • 194 신학논단 제65집 (2011)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에큐메니칼 의식의 고양이다. 이전에는 물론 향후 역

    시도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국가 및 다(多)문화적 정황에서 이뤄져야 할 과제

    인 까닭에 디아코니아 지평을 성령론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교회의 공공(보

    편)성 강화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V. 탈 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교회의 에큐메니칼 의식

    확장과 디아코니아의 미래적 구상

    오랜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항시 민족과 국가적 정

    황 속에서 수행되어 왔다. 최근에는 전지구적 가난을 비롯한 생태계 파괴 등

    의 현실에 직면하여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시민단체들과도 깊이 연루되어가

    는 추세이다. 특정 종교나 이념, 단체만으로 세계적 규모의 난제(難題)를 해

    결할 힘이 부족하기에 점차 연대(Solidarity)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적 디아코니아의 독특성을 포

    기할 이유는 없으나 앞장에서 언급한 성령론적 보편성에 근거할 때 본래 이

    ‘땅을 위한 종교’99)로서 기독교는 가난, 인권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한 이웃들과 손잡는 일 역시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이다. 인류 공동의 집인 ‘오이쿠메네’의 붕괴에 직면하여 인류 보편적 지혜를 얻고 행동을 같이 할 수 있을 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이 열린 것이며

    기독교를 비롯한 일체 종교 및 민족과 인류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책

    이 생겨날 수 있다. 이점에서 필자는 디아코니아의 성령론적 이해에 터하여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의 핵심을 무엇보다 이웃종교 내지 건전한 시민

    단체들과의 연대성에서 찾고 싶다. 반값 등록금을 비롯한 복지국가로 진입

    하려면 교회는 모두가 함께 살기위해 원수까지도 긍정하는 에큐메니칼 의식

    을 먼저 고양시켜야 한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존재처럼 무한 책임을 요청

    하는 자구의 존속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비동비이’(非同非異)란 말100)이 있듯 ‘다르지만 같다’는 삶의 새로운 에토스(Ethos)를 키워 나가야 99) 이점에서 S. 멕페이그는 성육신을 하느님이 하느님 되기를 포기한 것으로서 초월을 초월하면

    이 땅이 되는 바, 기독교는 의당 땅의 종교임을 강조하였다. 셀리 멕페이그/김준우 옮김,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참조.

    100) 이것은 신라의 고승 원효의 화쟁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고영섭 편, 원효 (서울: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95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교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은 물론 주변의 선한

    이웃들과 더불어 ‘제국’으로 인해 생겨난 차이의 공통이름인 ‘가난’과 지구 생태계의 ‘빈곤’을 위해, 달리 말하면 성령론적 토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토대 자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것

    이 바로 성령체험이고 공공성을 파괴하는 마성적 세력과 맞서는 일이 기독

    론적 조건이자 그 실험인 것을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신학이 선포할

    내용이다. 필자는 이를 A. 네그리의 말을 원용하여 ‘세속적 오순절’ 운동이라 일컫고자 한다. 저마다 다른 말로 이야기했으나 모두에게 소통되었던 오

    순절 언어사건은 오늘 저마다 생각과 이념은 다르나 토대가 무너지는 전(全)

    지구적 현실에서 공통감을 창출할 수 있는 것과 비견되는 까닭이다. 주지하

    듯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다행히 이런 세속적 오순절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1919년 당시 종교들이 연합하여 민족의 독립을 선포했던 역사

    적 사건을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동학, 불교와 더불어 기독교는 민족독립이

    란 공통과제를 위해 대표 33인을 구성했고 고통을 공유했다. 이런 경험에 터

    하여 오늘의 기독교 역시도 지역단위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하는 33인의 종

    교인 모임을 구성하여 위치한 지역의 현안을 숙고하고 해결하는 과감한 연

    대성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101) 지구적 차원과 가난과 생태적 빈곤에 맞

    서는 구체적 방법은 지역 내 환경, 교육, 먹거리, 유통구조 등의 현안과 씨름

    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토대적 성령론의 시각에선 기독교와 이웃종교는

    결코 선악으로 대별되지 않는다. 성령이 관통해 흐르는 삶의 토대를 재구축

    하는, 곧 공공성을 위해 불러진 선한 벗일 뿐이다. 기독교와 이웃종교는 자

    신의 종교 창시자의 정신세계에 충실 할수록 더 많은 ‘공통감’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탈세속화 시대의 종교들은 함께 살고 함께 죽을 운명적 동지일

    수밖에 없다. 제국에 맞선 ‘토대’를 위한 싸움은 종교의 생명력인 까닭이다.

    예문서원, 2002) 참조.

    101) 이정배,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27, 260. 이하 내용. 필자가 아는 바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세 경우를 소개하겠다. 기장 성암교회와 화계사 그리고 수유성당이 이미

    10년 이상 함께 바자회를 열어 지역의 빈곤 퇴치을 위해 힘써왔고, 최근에는 예장 덕수교회

    와 길상사 그리고 직전에는 경동교회, 문정동 성당 그리고 정토회가 공동으로 바자회를 개

    최하여 지역을 돕는 행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방식의 디아코니아가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들 행사를 ‘나비’(NAVI)라고 명명했다. 나비 효과처럼 그 영향력이 널리 퍼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 196 신학논단 제65집 (2011)

    종교마저 지금처럼 제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그래서 불가능한 것을 향

    한 열정을 소멸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어느 것이 되었든지 간에 의당 버림을

    당할 것이다. 종교학자 정진홍은 기독교가 우리 민족을 선교한 것 같지만 실

    상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오백여년 동안을 민족과 함께 지냈던 불교, 유교의 경우가 그랬듯 최선을 최

    악으로 변질시킬 경우 우리의 민족혼이 기독교를 토해낼 수도 있음을 시사

    하는 중대한 발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는 타자부정이 아닌 오로지 공

    감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입증됨을 명심할 일이다.

    다음으로 필자는 같은 맥락에서 한국교회와 시민단체간의 연대성을 디

    아코니아의 향방의 차원에서 강조할 생각이다.102) 지금껏 모이는 교회에 충

    실했던 교회로선 사회적 선교, 곧 디아코니아의 구조적 차원을 감당키에는

    현실적 제약이 적지 않았다. 소위 흩어지는 교회의 역할을 상당부분 방기했

    던 것이다. 이점에서 한국 교회는 박원순의 ‘희망제작소’나 ‘기독교 환경연대’ 등과 같은 시민 및 종교연합단체 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대사회적 역할, 곧 디아코니아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 될 수 있다. 언

    젠가 신문을 통해 박원순은 시민운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근원적 한계가 영

    성의 결핍에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들의 일은 성격상 쉽게 결말지을 수

    없고 오히려 마주한 장벽 앞에서의 좌절이 일상인 상황에서 그 일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영성의 시급함을 적시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종교들을 향한

    시민단체들의 긴급 요청인 것으로서 오늘의 교회가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

    아줄 수 없다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교회는 디아코니아의 새 차원으로서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일을 감당하면

    좋을 듯싶다. 우선 교인들을 적성과 직업 그리고 관심사에 따라 관련 시민단

    체 회원으로 참여케 하는 소위 흩어지는 교회 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최근에는 ‘일상’의 신학화란 말이 회자되는 바, 신앙으로 양육된 성도들에게 시민사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교

    회의 개방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다음으로 지역현안에 관심하는 건전

    한 시민단체를 위해 교회는 자신의 디아코니아적 실천을 위해 일정부분 예

    산을 지원해야 마땅하다.103) 대다수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관

    102) 앞의 책, 28-29 참조.

  • 이정배|탈(脫)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그 向方 197

    계로 공평무사한 NGO의 역할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가 지원하는 예산은

    현안문제를 옳게 처리토록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산 신도시

    에 위치한 한 감리교회의 경우 담임목사가 성도들의 관심사와 학력 등을 근

    거로 유관 시민단체로 파송하여 시민활동을 돕도록 했고 그들의 경험과 판

    단을 종합하여 예산을 지원하는 획기적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핵

    심은 교회적 디아코니아의 범위가 개인차원을 넘어 ‘토대’ 자체를 붕괴시키는 빈곤과 평화의 구조적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필자는 탈세속화 시대의 디아코니아 과제로서 농촌교회 현실을

    도시 교회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한국 사회가 그렇듯

    도시 교회 역시 농촌교회를 희생양 삼아 발전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의 상태로는 농촌교회는 예수 재림 時 까지도 영원한 미(未)자립 상태에 있

    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다수 농촌교회는 도시 목회자를 양성하는 수습기

    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정주목회를 작정한 소수의 목회자들이 있긴 하

    나 극히 예외적이다. 오늘의 문제는 농촌의 몰락과 교회의 몰락이 빠르게 진

    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향후 디아코니아의 향방을 생태

    적 전망 하에 마을 살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