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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沒沒 沒沒沒 沒沒(沒沒沒 沒沒沒 沒沒) 어어 어어어어어어 어어 어어 어어 어어어 2022-04-12 Page 1 of 46 沒 沒沒沒 沒沒沒沒沒沒 沒沒沒 沒沒 沒沒 沒沒沒沒 沒沒沒沒 沒沒沒 沒沒沒沒沒 沒沒沒 沒沒沒沒沒. 沒沒沒 沒沒 沒 沒沒沒 沒沒 沒沒沒, 沒沒 沒 沒沒沒 沒沒沒沒沒沒沒. 沒沒沒沒 沒沒 沒 沒沒 沒沒沒 沒沒 沒沒 沒沒沒 沒沒沒沒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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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

沒知覺 時代의 理性(몰지각 시대의 이성)

어느 민족주의자의 匕首 잡기 혹은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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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沒知覺 時代의 理性(몰지각 시대의 이성)

1어느 민족주의자의 匕首 잡기 혹은 던지기

4들어가면서

61.‘와병설’ 해프닝이 보여주는 한반도의 오늘 이야기

92.중국, 북한 군부의 득세를 경계하다.

123.노무현의 토론 제기, 갈등을 연쇄화하는 재미?

174.엔케리를 받아들인 대통령, 노무현

215.뉴라이트 집단을 앞세운 MB식 이념전쟁;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246.2008년, 선군정치의 북한 군부를 보는 눈

277.후계자, 과연 있나 없나?

308.남북한의 결별, 중국에게 확실한 기회를 보장하다.

349.서울, 남북간 ‘핫라인’ 개설의 의지는 없다.

3810.북한식 실리주의 실체를 보지 않으면 정세판단은 금물이다.

4111.중국, 정말 북한과의 전쟁까지 생각했었나?

4512.조만간 맞이할 MB정부의 남북관계 핵겨울

4813.북핵은 여전히 유효한 정권유지의 보루로 작동한다.

5214.북한의 그림자 세력, 2인자 그룹

5515.‘와병설-후계자-선택권’은 한 묶음이다.

5916.중국, ‘미워도 다시 한 번’ 웃으며 북한으로 다가서다.

6217.‘시간 벌기’가 일본의 작전명령 제1호다.

6518.한국,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려는 정권 움직임이 살벌하다.

6919.미국은 한반도의 ‘왕초’ 노릇에 굶주리고, MB정권은 ‘똘마니’를 자처하며 친일을 키우고, 백성들만 불쌍하게 된 국면이다.

7220.독재, 반민주, 수구, 종교편향, 기득권 유지를 기본으로는 정권유지가 어렵다.

들어가면서

6월 30일 이후 이른바 ‘시대 시리즈’를 두 달 넘도록 집중해서 쓰고 난 이후 많이 지쳤다. 9월 5일 마지막 자료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2010년의 북한, 후계구도’에 대한 이야기를 일차 정리해보았었다. 한반도의 급변이라는 주제에서는 반드시 언급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한반도의 독자성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면 핵심문제는 딱 두 가지다. 첫째는 북한의 향후 단기 내 생존방식이나 각도이고 둘째는 남한의 친미 친일화의 진척 정도와 전개 방식이다. 이 둘 간에는 피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진다. 남과 북, 두 쪽 모두에서 시대를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나아가 이 두 전쟁의 결과에 의해 한반도의 향후 짧게는 2~3년, 길게는 5~15년 이후의 위치가 매겨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래가 달린 두 테제를 우리는 양 어깨에 메고 있다. 이 무게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대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건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당장 서울에서부터 한반도 주변 모든 곳에서 이 시대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예상대로 9월 9일 북한에서 상황은 터졌다. 북한발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일종의 흔들기 국면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 시발점은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 김정일 위원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 딱 하나였지만, 이내 ‘와병설’, ‘위기설’로 증폭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속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줄 사람은 없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소위 ‘얼치기 전문가들 판’이 벌어졌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서 나는 이걸 ‘호들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난 2004년 이후부터 잊을만하면 나오던 주제였다.

정작 중요한 위기는 미국발로 시작되었다. 9월 15일, 추석을 넘긴 바로 다음날부터 미국금융가는 요동을 쳤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 미국 3위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의 합병, 세계 1위 보험사 AIG에 대한 미 정부의 구제금융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9월 20일, 미국 정부는 ‘전례 없는 금융위기’에 ‘전례 없는 액션’을 취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미 의회에 7,000억불의 구제금융집행을 상정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기축통화로써의 ‘미 달러화’의 위치문제로부터 공급주의 경제학의 종말, 나아가 파생상품을 통한 금융버블 국면에서 빚어진 기업의 부실을 정부가 안게 되는 모럴해저드 논쟁까지 다양하게 번져간다. 한마디로 미국은 지금 위기에 빠졌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조차 비난이 터져 나온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과연 어떤 일을 벌일는지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나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국지전 도모 등도 능히 예상 가능하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최고선’이라는 관념으로 접근하는 ‘타성’(惰性)이 변했다는 징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유럽도 중국, 일본도 모두 술렁대는 차에 북한은 조용히 핵 시설의 재 가동을 시도한다. 여전히 ‘핵(核)은 조선의 정조(貞操)’라는 스탠스는 유지된다. 남한은 악성의 경제위기를 설(說) 수준으로 감추려는 정권과 정부의 꼼수 속에서 더 이상은 견지하지 못할 정도의 실물경제의 파국이 눈앞에 와있다. 그런 차에 엄밀히 망해가는 건설업자를 살려 새로운 부동산 버블 국면을 조성하면서 경제성장이라 우기며 버텨보려는 얄팍한 정책이 터져 나온다. 그린벨트 지역의 대폭적인 해제를 비롯하여 상위 1%만을 위한 종부세 인하, 공기업의 민영화는 수순을 밟아 이행되는 중이다. 실패한 모델인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성공하리라고 기대하기 쉽지 않다.

실물경제의 현장에서는 비명이 곳곳에서 날카롭게 질러진다. 외환유동성이 확보되지 않아 오버나이트가 성행한다. 이 정도 수준이면 확실한 ‘9월 위기설’이 아닌 위기 자체다. 그럼에도 이를 80년대식의 강압통치, 독재국면으로 몰고 가서 해결하려는 시도도 잇따른다. 이른바 케케묵은 좌파 배척론을 살리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속에 접목할 기세다.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것말고 할 수 있거나 할 줄 아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물러설 배후공간을 두지 않는 밀어붙이기가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회 내부의 갈등은 증폭 수준이 아니라 폭발직전으로 몰린다.

일본은 조용히 그들 식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예상대로 아소 다로가 나왔다. 그가 대표다. 한국에 대한 친일의 재구성, 다시 백 년이라는 프로그램을 완성하게 될 대표선수로 그가 지목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즉, 일본은 극우, 우익체계를 통해서 21세기 초 그들의 생존법을 찾아낸다는 복안을 실행하고자 한다. 남한의 ‘친일사냥개들’은 여전히 이에 적극 협조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검토수준이 아닌 뿌리를 아예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좌익 우익의 갈등이 아니라 일본우익(극우)과 한국의 민족본위 이성(이건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온전한 생존을 위한 기본단위로 민족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 우파, 진보 보수라는 논의 자체가 의미가 없다.) 간의 대결로 이어진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 정권은 그 본질 자체가 ‘친일’이다.

그나마 지난 두 달여 한반도를 침탈하려는 일본기획자의 책략과 한국에 형성된 친일 사냥개의 본질, 나아가 그 전술적인 접근방식까지는 정리를 해보았다.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 내가 내놓을 마지막 패 이외는 남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이제 ‘왜 친일이 문제인가’ 하는 논의에 기표 하나를 던졌다는 점에 일단 만족한다. 필요하다면 더 진전된 이야기도 재구성해 봐야 하는 경우도 있을 터이다.

이제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회와 이 시대가 처한 본질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작업은 범위의 광활함으로 인해 첫 시작부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챙겨보려 한다.

이 글의 제목은 ‘몰지각 시대의 이성’이다. 부제로 ‘비수잡기 혹은 던지기’라고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부엌에서 쓰는 칼이 아니다. 이건 애당초 살상용으로 설계된 칼을 가지고 다루는 경우에 속한다. 그러므로 잡는 것, 던지는 것은 방어와 공격을 의미하게 된다. 당연히 생사를 건 행위다. 죽기 위해 칼을 드는 패배주의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 그런 이성으로는 몰지각의 팻말을 부러뜨릴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표상이다.

1. ‘와병설’ 해프닝이 보여주는 한반도의 오늘 이야기

해프닝의 첫 이야기는 이른바 ‘김정일 와병설’이다. 이것은 한반도의 오늘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지표를 제공해준 (예상이 아닌) 실질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9월 9일을 전후한 시기에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었고 확산되었는지는 별로 논의할 대상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안 자체를 보는 시각에 있다. 전혀 다른 시각을 중심으로 9.9~9.19까지 열흘간 벌어진 ‘호들갑’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미국은 어디로부터 이 정보를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한국이 그 정보를 제공했다고 생각하는가? 와병설의 첫 단추를 꿴 것은 미국 정보기관이었다. 그것도 국방부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중앙정보국(CIA)까지 이어지는 정보유출의 루트가 보였다. 거기에 한국이 개입한 흔적은? 없다. 공동의 작전이었는가 아닌가에 아닌 쪽으로 방점이 찍힌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 정보를 공개적으로 유출함으로써 얻고자 했던 기대효과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 포인터다.

둘째, 한국의 정보기관이 발표한 ‘첩보’는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양치질’까지 나오고 나서야 이런 ‘첩보성의 정보공개’가 문제가 된다는 여론이 터졌다. 봉화진료소에 차량이동이 증가했느니 하는 것은 국방부에서 나왔지만 와병의 증상에 대한 부분은 대체로 국정원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사실인가 아닌가에 대해 반론을 펴기 어려웠던 것은 감히 국정원의 정보수집 노하우에 대들만한 사람이나 기관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첩보인가 확인된 정보인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정보를 유출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부분도 지적될 수 있다.

셋째, 와병설 유포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정보의 공개적 측면은 감안한다 하더라도 김정일 위원장의 병력(病歷)이나 혹은 유고(有故)까지 이르는 상황은 여러 차례 설정된 바가 있었다. 왜 이 시점이었는가? 왜 이런 방식의 접근을 했는가 하는 점을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각국의 의도가 각각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유포지역은 두 군데였다. 미국과 한국. 둘 간의 의도도 각각이었다면, 이 두 의도간에는 어떤 상충(相衝)이 있었을까 살펴봐야 한다. 한미간의 공조에 의해 이른바 중국의 대북개입을 차단할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 흔적도 없다.

넷째, 과연 북한은 와병설을 어떻게 활용하려고 했는가 하는 점이다. 강력한 부인이 김영남-현학봉으로 이어지면서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생각된 대목도 있었다. 6자 회담이 아니라 북미간에 테러지원국 해제를 둘러싸고 매우 불편한 시기에 터진 ‘사건’이었고 그것은 의외로 북한의 내부적인 단결고취에 적절하게 활용된 흔적마저 있다. 의도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파악마저 애매해졌다. 그리고 평양이나 해외 어느 곳에서도 이 문제로 요동이 벌어진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차분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통제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다섯째, 누가 가장 근접된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업무 파트너이기도 한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류홍차이(劉洪才)는 16일 멀리 일본까지 가서 공명당 대표 오타 아키히로와의 면담에서 이 문제를 꺼냈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분명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당분간 요양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수준으로 중국이 보는 이 사건의 시각을 마무리했다. 중국의 정보력이 한 수 돋보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여전히 북한의 대량난민 발생 우려 등을 꺼내면서 위기의식을 이어갈 의도를 보였다. 한국은 김하중 통일부장관이 ‘부적절함’을 이유로 기자들이 더 이상 이 기사를 쓰는 걸 막기에 급급했다. 지나치게 정보가 정부고위급에서 새어나가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비난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병상통치나 또는 (병상의) 문고리 권력, 후계자 문제를 비롯해서 한미간 군사공조를 통한 직접적 개입을 담은 작계 5029까지 는 논의가 이어졌다. 결론은 뚜렷하지 않았다.

여섯째, 이번 사태를 통해 정리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는 9월 18일 미-일-한 세 나라가 북한 정보를 캐기 위해 중국 단둥 등 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꽤나 상세하게 보도했다. 정보를 캐는 전장터로 중국 변경이 변했다는 약간 비아냥도 섞여 있었다.

이 열흘 간 흘러나온 정보 가운데 만일 북한이 의도적으로 흘린 역정보가 있다면, 그 첩보나 정보를 주워서 전달했던 라인은 북측의 혹독한 뒤 캐기에 당할 수 있다 보여질 정도다. 북미관계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썬 전망 이외는 어렵지만, 국면만 본다면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을 더 이상 압박하기도 곤란한 지경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더 심각하다. 라인부재라는 현실을 절감하지만 왠지 MB정권은 오히려 좌파 제거론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매개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아예 이 문제를 아전인수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인 뉴라이트 집단도 있다. 일본은 한 걸음 뒤에서 구경하는 위치로 가는 척하며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중국은 조용하지만 은근히 적극적이다. 이렇게 교통정리가 되어가는 국면이 나왔다.

약간 고차원적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을 평가한다면, 한국은 내부적으로 북한 정보의 분석이나 취합 혹은 판단능력에 있어서 ‘바닥’을 보여주었다 해도 할 말이 별로 없다. 너무 일찍 정보의 패를 깠기 때문이다. 일희일비하던 순간은 여러 차례 나타났지만, 소위 전문가들은 대부분 ‘설과 첩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양한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 정작 필요한 요소를 내놓지는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면에 숨겨진 내부적인 대책이 현실적으로 전무하다는 한계도 발견되었다. 그 점에서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사건만으로 본다면 관망자였을 뿐이다.

중국이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는 다크호스일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북중 간에 이어져온 오랜 시간의 동맹이 가진 힘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한-미-일 동맹이 한반도 북부에서는 전혀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상황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은 은근히 속으로는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이처럼 실력이 다 까발려진 경우는 근래 처음이었다.

사태의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화평연변’(和平演變)’. 즉, 평화적인 수단을 통하여 상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종의 책략이란 의미다. 이것은 주로 서방 자본주의(제국주의)가 사회주의 공산국가에 대한 ‘흔들기’의 방식으로 인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단을 평화로, 목적은 체제개편’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래서 영문으로는 ‘Peaceful Evolution Policy’라고 사용한다. 등샤오핑 식으로는 ‘시원한 바람은 계속 쏘이되 모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역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상대의 화평연변 전략에 대응하는 방식이 바로 반(反) 화평연변이었고, 북한도 예외 없이 언제나 상대가 이 전략을 구사하지 말 것을 요구해 왔던 참이었다. 자꾸만 흔들기가 나오자 북한에서 이를 ‘악의적’이라고 화를 내는 상황이 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이것이 화평연변으로 활용된다는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사실이 그러하다.

미국에 의해 진행된 대북 화평연변 전략의 핵심은 바로 ‘흔들기’라는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내부를 흔들어야만 한다는 것은 곧 ‘붕괴 시나리오’에 대한 추론을 얻고자 하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국의 인권문제 간섭으로부터 민주화 요구, 그러한 세력에의 지원 등은 모두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북미관계가 밀월 국면으로 이어지다가 그 한계를 절감하는 수준에서 미국은 화평연변을 다른 방식으로 접목하기 시작했다.

중국도 9월 초순과 중순에 걸쳐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대응을 이렇게 읽고 있었다. 결국 상황이 꽤나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런 사태에 왜 은근히 즐기는 듯한 입장이 될 수 있는가를 찾아보는 게 관건이다.

북중 관계가 과연 어떤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2008.7 시진핑 국가 부주석의 평양방문은 양자 관계가 완전한 회복국면으로 갔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제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날카로운 수읽기가 진행 중이다. 상대적으로 북미관계는 그 이후 대단히 경색된 국면이 유지된다. 그러나 판을 깨려고 하기 보다는 일정 수준 이어가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무엇을 목적으로 할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여하간에 한반도는 이제 곧 2010년을 향한 정점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일단 중국이 2007년까지 읽었던 한반도의 국면을 살펴봐야 어렴풋하게나마 해답이 나온다. 미래를 보는 정답은 없지만 한반도는 그나마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현재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단지 그것을 읽는 눈이 사시(斜視)가 되면 실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2. 중국, 북한 군부의 득세를 경계하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이 터지자 말자 나왔던 보고서 “북조선의 화평연변. 붕괴 및 중국의 대책(北朝鮮之和平演變. 崩壞及中國之對策)”은 그 점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내용이다. (일본 문예춘추 2007.12호 게재) 그러나 이 관측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중국식의 화평연변은 2004년 이후, 그러니까 북핵을 둘러싸고 북한이 미국을 향해서 움직이던 시점에 이미 전략이 구성되고 있었고 이것은 그 중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보고서의 필자 링예(綾野)는 1954년10월생. 국방대학 국제전략 연구부에 소속하는 외에 중국 한반도연구회의 특약연구원이다. 대개의 중국 내 한반도 연구가들이 밟는 코스처럼 그도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유학과 한국고려대에서 연구경험이 있고 군적으로 대령(大枚) 계급의 현역군인이다. 그는 이 보고서로 인해 2007.1. 근신처분을 당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공개가 중국식으로 보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북한의 붕괴=김정일 정권붕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이것은 북한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배경에 대하여 당 중앙관계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바로 중국 공산당의 시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조선이 미국에 급속하게 접근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핵실험이라는 중국의 안전보장까지 위협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중국은 아직까지도 구태의연한 “중조우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외교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대조선 외교의 현장이나 연구자간에는 이에 대한 불만이 강한 것입니다.”

중국이 북핵을 중국을 향한 도전이라고 읽는 배경에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그간 유지되었던 중국 수중에 있던 북한 외교가 어느 시기에는 자칫 미국의 손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절박감까지 묻어나 있다. 그러나 본질은 ‘북한 정권의 미래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상대를 다루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북한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다. 베이징과 평양간의 거리는 1천 킬로미터 남짓하다. 몹시 가깝다.

실제로 중국은 90년대 김일성 주석의 사후 북한 붕괴를 본격적으로 예상하고 그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다. 필연적 붕괴론이 중국 내부에서 횡행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분석보고에서도 정권이 ‘1년 이내, 늦어도 3년 이내’ 붕괴한다는 결론이 났었고, 외교부가 소집한 ‘조선반도정세무허회(朝鮮半島情勢務虛會)가 포스트 김정일의 긴급사태를 상정한 응급조치가 검토된 적도 있었다.

이 시기의 대응 시나리오는 세 가지였다. 첫째, 신병 요양의 명목으로 김정일이 중국 또는 러시아로 장기 출국하는 망명패턴이었다. 결론적으로는 베이징 보다는 동북의 허알빈, 장춘, 또는 홍콩과 가까운 심천, 운남성 쿤밍까지도 거론되었다고 한다.

둘째, 과거 소련, 동유럽 패턴으로 미국, 한국, 일본 등의 압력과 지지를 통해 탄생하는 ‘민주화 반(半) 집권체제’ 가능성이었다.

셋째, 군부가 서방국가와는 다른 정치스타일을 주장하며 민주화를 막고 중국, 러시아에 국가재건 협력을 구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예상은 깨어졌다. 북한은 ‘선군정치’를 통해 보다 강력한 김정일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의 실패는 비단 링예의 보고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중국이 잘못 읽은 북한’이라는 주제로 여러 편이 작성된 바 있다.

실제로 군사적인 행동도 북중 변경지역에서 있었던 것이 바로 2006년의 상황이다. 중국 인민해방군 선양군구 소속 제16집단군 포병부대가 2006.7.25 21:23 백두산 일대에서 23기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한 일(‘해방군보’ 인터넷판 2006.8.1), 7월말 같은 부대 약 2,000명이 투먼, 롱징, 훈춘 등 동북지역에 증파된 일(연합뉴스 2006.8.1) 등 군사적인 대비행동은 늘 북중 지역에서 지난 몇 년간 있어왔던 일이었다. 이것을 단순한 군사훈련 차원으로 읽을 수는 없다.

링예의 보고서가 읽은 북한 붕괴론의 근거는 다음 다섯 가지다.

첫째, 경제적 파탄. 둘째, 북한 내부에서 높아진 지방분권 의식. 셋째, 중국과의 관계 냉각 이후 대미, 대일, 대한 접근 강화. 넷째, ‘선군정치’의 한계. 다섯째, 후계자 문제다.

주목할만한 것이 바로 사회 내부의 양극화에 대한 지적이다. 외국과의 접촉경험을 가진 자가 사회 내 역할을 키워나가는 것, 국경근처나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한 분권의식 강화로 중앙의 구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내용의 핵심은 바로 ‘선군정치와 세습제도의 한계’로 모아진다. 선군정치를 통해 군부가 비대할 만큼 비대해진 상황에서 이것이 결국 후계자문제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2012년 이내 김정일의 건강상태 급변이 되면 세습은 실현되지 못하고 현 체제는 그 자체가 붕괴된다고 본다. 후계자를 지명했다고 하더라도 5년이라는 단기 내에 집정경험, 자질, 권위라는 점에서 육성이 불가능하고, 이것이 붕괴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그렇지만 10년 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후계자가 이른바 가계승계가 가능해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15년 내라면 김일성과 같이 장래 화근이 될 세력의 ‘대청소’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관건은 ‘김정일의 건강상태’로 집중된다.

중국의 당시 관찰에서 북한 내에 후계자를 육성하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즉, 김정일 자신이 걸어온 ‘후계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김정일의 경우를 상정해서 나온 판단이었을 것이다. 역시 북한에 대해서는 중국이 그러했듯이 준비된 권력이양 프로세스가 중국이 보는 북한측 후계자 유무를 보는 한 기준점이었던 셈이다.

핵심은 군(軍)의 권력계승이었다. 1991년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지위를 김정일에게 넘기고 1992년 헌법을 개정, 국방위원회를 제정하여 그가 위원장으로 김정일을 부위원장으로 두며 ‘원수’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1993년 정식으로 국방위원장을 이양했다. 그럼에도 1994년 김일성 사후 3년 동안 상중통치가 이어질 정도로 북한 내부의 권력승계에는 난점이 있었기 때문에 현 시점 북한은 김정일 이후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군이 관건이 된다. 2,200만 인구에 110만의 정예병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을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선군정치를 ‘목타는 데 독이 든 국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로, 군을 강(江)으로 정권을 배로 예를 들며 ‘강은 배를 나를 수 있지만 범람하면 전복시킬 수 있는’ (水能艀船.能覆船) 홍수직전의 상태로 표현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군의 영향력은 내정, 외교문제 등까지 미쳐 미사일 발사, 핵실험의 강향, 대미, 대중 외교정책, 국내 경제정책에까지 강한 결정의사를 갖추고 있다. 이 점은 지금 대두된 것이 아니라 2003년경 이후 중국 군사학원, 국방대학, 국무원발전연구센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선군정치는 그 장점보다는 폐해가 훨씬 더 커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비대화한 군을 조타할 능력 있는 후계자가 생겨날 것인가에 대해 ‘압도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부담이 되는(負) 유산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이다.

“지금은 아직 김정일에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관철하는 군이지만 금후 김정일의 쇠약이 분명해짐에 따라 김정일 자신의 제어능력도 느슨해지고 그에 따른 군의 폭주가 시작될 것은 충분히 예측된다. 김일성에서 김정일에의 정권교체는 어떻든 무사히 이루어졌지만 이 교체는 수십 년 간 시간과 주도 면밀한 준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감안할 때, 현 상황에서는 김정일이 후계자를 위해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는가는 전혀 미지수다. 그리 되면 선군정치는 곧 찾아올 북한권력의 과도기에 있어서도 또한 김정일 정권을 후계하는 신 체제 하에서도 과중한 ‘부(負)의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보고서 작성자인 링예가 아직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여전히 북한연구에 집중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그의 관점이 중국 전체의 시각은 아니지만 이것은 2008년 들어 중국이 북한과의 교류를 급속하게 늘려나간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 이의는 없다.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 등이 2007년 10.3 공동선언 이후 대북접근을 늦추면서 압박을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사이, 북중 양국 관계는 한층 더 긴밀하게 될 계기를 마련해준 측면도 있다. 거기에는 한국의 MB정부가 초창기부터 대북정책 자체를 ‘후 순위로 돌려둔’ 상황에서 빚어진 해프닝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번 9월 벌어진 ‘와병설’은 2006년 북핵 실험 이후 새로운 문제점 하나를 추가하게 되었다. 바로 ‘핵 통제권’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북한의 군부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선군정치라는 특정한 사회운영 체계가 아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미국은 이번 ‘화평연변’에서 핵 통제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를 확인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인가도 보려 했던 흔적은 여러 군데 발견된다.

그러나 결론은 ‘없다’로 통한다. 확인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확인 자체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 정보력 보다는 상황판단의 모호함이 들어있는 곳,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오늘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3. 노무현의 토론 제기, 갈등을 연쇄화하는 재미?

이 이야기는 조금 이후에 더 자세히 정리를 해보기로 하자. 고려할 요소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면 한반도 문제가 예전에도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자세히 알려면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참 ‘와병설’로 한반도 당사국들이 시끄럽던 9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2.0’이라는 토론 사이트 베타판이 개설, 일반에 공개되었다.

확실히 노무현 추종세력은 MB정권의 미숙함을 딛고 똘똘 뭉칠 기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권기간 내내 했던 미숙함이 이런 행위로 모두 가려진다고는 볼 수 없다. 노무현 정권기인 2002~2008년은 사실상 우리 역사에서 21세기 첫 머리를 장식하고 그 방향을 정리하는 매우 귀중했던 시대였지만, 그의 집권기 깔끔하지 못하고 오히려 난삽해진 상황에서 마구 불러들인 여러 분야의 ‘갈등’도 그에 못지 않다. 공과를 따진다면, 그의 시대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오류들이 넘쳐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명분은 넘쳤지만 실리가 없었다는 평가도 동시에 있고, 그것은 한반도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워낙 2008년 MB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벌어지는 한국 사회 내부의 난사가 깊은 탓인지 이 부분보다는 그의 ‘정치행보가 아니라 주장하는 정치행보’에 사람들은 우려 섞인 모습으로 주목했다. 그게 드러났다.

9월 19일자 한겨레신문의 사설이다.

“[사설] 전직대통령의 토론웹사이트개설 유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넷 토론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을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이트를 개설하며 올린 글에서 “성숙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대화와 타협’이고 이를 위해선 시민사회의 소통이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 자유롭게 대화하되 깊이 있는 대화가 이뤄지는 시민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게 취지”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 쪽은 사이트 개설이 정치활동 재개라는 분석을 부인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토론에 참여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 쪽은 사이트 개설이 “전직 대통령의 사회적 책임의 일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세 결집으로 이어질 것이란 의구심을 많은 국민이 갖고 있다. ‘왜 꼭 그런 쪽으로만 보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존경 받는 전직 대통령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 현실에선 전직 대통령들 스스로 좀더 조심스런 태도로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는 게 바람직하다. 얼마 전 노 전 대통령 핵심 측근 두 사람이 골프장에서 사돈을 맺고, 노 전 대통령은 결혼식 주례를 보고, 친노 인사들이 대거 집결한 걸 보면서 많은 국민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친노 인사들은 정치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든 안 하든 그건 스스로 결정할 문제고, 나중에 국민이 판단할 문제다. 다만, 전직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세 결집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적절치 않다. 벌써 ‘민주주의 2.0’엔 노 전 대통령의 정치활동 재개를 요구하는 글들이 여럿 올라오고 있다. 그게 노 전 대통령 생각과 전혀 무관하다 하더라도, 그런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노 전 대통령 쪽은 정치적 논란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좀더 신중하게 ‘민주주의 2.0’ 운영 문제를 검토하길 바란다.”

사설의 논조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한겨레는 칭찬이 아니라 다각도로 정책 비판을 했었지만 촛불민심이 MB정권 하에서 강하게 탄압 받는 국면에서 나온 이 사설은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 사람들은 분분히 의견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MB정권은 이러한 사실을 즐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겨레가 양비론을 목적으로 이 글을 실은 것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의 의견을 요약해보자.

“저소득층을 위한 독서캠페인, 대안학교운동 등 사회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활동을 펴라.”

“촛불에 편승하려고 하나?”

“완벽한 조중동 논조다. 한겨레를 안보겠다. (이런 글 쓰려면) 한겨레 문닫아라.”

“민주시민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좋은 장을 제공했지 않나?”

“인기 없고, 실정으로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로 MB정권을 출범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노무현 캐릭터가 가진 문제점이 드러났다. 쥐뿔도 없으면서 구호나 양산하고, 통합을 외쳤지만 개뿔 무슨,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놨다. 국민과 소통한 게 무에 있나? 민주주의 2.0을 논하기 전에 먼저 0.2라도 제대로 했어야 하지 않나. 양심도 없는 정치 무뢰한이다.”

“노가의 준동은 MB의 인기만 올려준다.”

“지금은 암담한 현실, 이거라도 어디냐.”

“한겨레는 왜 반목하며 시비를 거나!”

“대화와 타협을 말하면서 ‘독선과 분열’만 획책했지 않는가. 법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변호사 기질 때문이었나?”

“한겨레는 노무현 지지가 아니라 민주당 지지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이명박-노무현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참이다. 단순히 전임정권에 대한 보복 같은 것은 아니다. 쇠고기 파동으로 빚어진 촛불민심은 여러모로 이 둘의 갈등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특히 MB정권 자체의 성격적인 부분에서 대립과 유사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설거지 론’의 핵심은 노무현 시기 유지해온 친미기조, 신자유주의 정책이 현 시점에 방향전환되지 않으며 이어진다는 것으로부터 출발된다.양극화 빈곤화로 가는 흐름은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비정규직이나 계층간 소득격차 확대, 청년실업 문제는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좌파배척론은 상대적으로 MB정권의 친일성향을 드러내게 하였고, 이를 정권의 친위이자 매개로 하여 단순히 정권의 독점적 지위 강화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해 ‘(지난 십 년의)재평가를 통한 독점지위 공고화’라는 전략을 구사하려는 MB정권과 노무현은 절대 양립이 불가능한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노무현 세력은 2001년의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마이너 중의 마이너’ 즉, 유권자 전체의 10~15% 수준이 맥시멈 한계다. 그에 비해 한나라당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은 25~35%라는 광범위한 지지대를 가진 것이 한국 정치세력의 구성도이기도 하다. 여기에 김대중을 중심으로 그가 정치력을 가질 경우에 지역구도와 함께 보여주었던 20~25%의 지지세력이 합쳐질 경우에만 그는 정치주류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부동산 정책 실패,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 심화 등으로 두들겨 맞는 가운데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임기말 패퇴되면서 지금 그의 정치적 지지세력은 기껏해야 5%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이번 한겨레 사설 파동이 보여준 셈이다. 극성 지지자-흔히 ‘노빠’라고 부르는-를 규합하는 움직임, 그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무현을 MB가 반가워할 리는 없지만 의외로 이 세력은 더 불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촛불민심이 붕괴된 원인중의 한가지로 꼽는 것이 바로 ‘노빠’(친노 가운데 과격한 친노)와 다른 집단지성간의 이질감 때문이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그 현상은 확연하게 보인다. 이들은 결코 진보나 좌파 같은 선명한 색채를 가진 것도 아니다. 노무현이 그리 했듯이 이른바 ‘쟁론화’에 강하고 좌파와 중도를 오가는 묘한 선상에 위치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천착한다. 그러나 정작 노무현은 재임기간 동안 한미FTA를 비롯하여 강력한 친미정책을 구사했고 신자유주의의 보편화를 이끌어내는 정책을 시행했던 인물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의 정체성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이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비평도 있다.

거기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이번) 금융위기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는 발언이 민주주의2.0에서 토의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자임했고, 어쩔 수 없다는 명분(약소국이어서)을 대면서 미국과의 FTA를 추진했고, 당연히 정책적으로도 탄핵 이후 그 기조를 밀어붙였다. 그런 그가 “시장주의를 지지하고 신자유주의가 위기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 스스로의 절대 모순에 빠지고 만다. 실제로 정권 막바지에 이르며 수출지상주의를 내걸고 과속개방을 한 후유증도 만만치가 않다. 바로 이 점이 그의 한계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투박함에 감추어서 끊임없이 양산했다는 비난도 그래서 나온다. 토론은 즐길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국가의 현재와 미래 생존을 현실에 맞게 논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한국 내의 정치세력 가운데 ‘무관심’- ‘무응답’-을 세력으로 하는 정치 노코멘트 집단의 구성비율이 항상 가장 높은 것이 이해된다. MB도 싫지만, 노무현도 그에 못지 않게 혐오감이 들고 나아가 야당인 민주당도 마찬가지라는 정치 전반에의 혐오증이 민심 저변에 깔려있다. 결집될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들은 늘 분산되어 있다. 노무현이 민주당을 ‘지역적인 선량들이 모인 곳’이라는 한계를 지적하며 ‘(정치적) 지역주의를 넘어서자’는 강한 메시지를 내자 오히려 민주당이 발끈했다. 이것은 그가 집권 시기에도 이루기 어려웠던 지역주의 한계, 그리고 그를 타파하기 보다는 자신의 세력화에 골몰했던 행위 등으로 이른바 친노-민주당 간의 넘을 수 없게 형성된 간극(間隙)을 더 벌이는 계기를 제공한 듯 보인다.

민주당에서는 노무현을 ‘분열의 화신, 반골의 극치’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 있다. 그는 민주당의 전통성을 깨어버렸다는 시각이다. 2002년 선거 국면에서 보자면 그 이야기는 달리 해석해볼 부분도 있다. 노무현은 민주당표와 인터넷표라는 두 가지를 합하여 당선되었고, 민주당을 버리고 그 자신만의 인터넷표에 더 천착하게 된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면서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정권 말기에 들어 팽개쳐진 민주당과의 싸움에서 다시 패배하게 되고, 이 둘 간은 다시 합쳐지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 한나라당은 다시 세력을 확장, 집권까지 가게 된다. 결국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지만 그 한계에 봉착했던 노무현이 한나라당에 갖다 바친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 현상에서 얻어진 경험과 세력이 중요하다. 바로 MB정권이 독재형 드라이브와 뉴라이트 집단을 끼고 돌면서 친일매국세력의 텃밭으로 한국을 변모시키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에 공권력이 가세하는 것도 사회분위기의 일단을 보여준다. 영혼이 없는 공직자들에겐 책임추궁을 당할 반대세력이 없다는 건 호재다. 당연히 주축세력으로 힘이 옮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노무현이 순진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반사작용으로 민심이 MB를 선택하게 하는 데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현 정치 흐름에서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짧은 MB정권 초기에 나타난 5적(賊)은 존재한다. 정권의 핵심인 청와대, 정권을 지탱하는 한나라당, 친일매국세력의 온상이자 일본 사냥개 뉴라이트 집단, 정치화되고 사적 이익만 갈망하는 개신교 집단, 그리고 권력과 결탁한 대기업이다. 사실상 한국이란 나라의 절대 다수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년 선거의 결과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이도 있다. 문제는 이들이 추구하는 선진화, 우경화로 포장된 사실상의 ‘친일화’를 막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고, 또 대항할 존재 기반이 무너진 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 시기의 잘못이라는 점이다.

노무현의 이번 시도는 지독스럽게 정치적이다. 그러나 본격적 투쟁도 아니며-그것이 정말 민주주의라면,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피를 요구하는 경향임을 안다면- 단순한 ‘입질’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또한 ‘교활한 정치색’을 벗기는 차마 어렵다. 자신의 집권시기에도 펴지 못했던 정책을 지금 꺼내놓는다 해도 그 행위가 정치적으로 국민 대다수에게 진정으로 다가서지는 못할 듯하다. 아무리 ‘민주주의 대세론’을 외쳐도 마찬가지다. 그의 투박한 봉하마을의 은거가 MB와 대비되면서 심정적인 지지는 있을지언정 정치세력화까지는 요원하다. 그러나 그것은 MB로 인한 반사이익이다. 이것을 파악한 MB정권의 기세가 더욱 강한 포지션을 선택할거라는 점은 명약관화해지는 상태다. 이를 제지할 세력도 현재로써는 없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의 ‘갈등 제기’(이것을 ‘토론이나 쟁론 제기’라고 부른다)는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지적이긴 하지만 그가 집권 내내 해왔던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다가는 사라지는’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나타날 공산도 아주 크다. 토론의 깊이를 말하지만 행동이 안 따르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을 노무현은 민주주의로 착각했다. 민주주의는 국사(國事)가 아니라 방법상의 구성요소일 뿐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쟁론화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부분이 비판 받는다 하더라도 그가 이미 한 차례 국사를 운영했던 사람으로써 경륜(經綸)보다는 실책(失策)이 더 부각도리 수 있다는 점에서 변명 못할 내용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4. 엔케리를 받아들인 대통령, 노무현

2006.1.4 1,400 선을 돌파한 코스피 지수는 2007.4.9자로 1,500선을 통과하게 된다. 그에 탄력을 받은 노무현은 그 해 6월 2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정부정책의 성과는 경제성장률보다 주가를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고 하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원광대 명예정치학 박사 수여 연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책 전체의, 경제에 대한 전망 전체를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측정해 놓은 것이 주가입니다. 지금의 우리 경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 거냐, 우리 기업들의 수익이 어떻게 될 거냐 하는 데 대한 예측을 돈 걸고, 돈 걸고 예측을 말하는 것이 주식의 가격 아니겠습니까?

돈도 걸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 얘기는 소용없습니다. 자기 재산 딱 걸어놓고 '올라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때 주가가 올라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요새는 좀 너무 많이 올라가서 제가 좀 걱정입니다. (웃음) 사실은 제가 올해 바랐던 것이 1500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가를 올리기 위해서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칙대로 했습니다.

저는 경제에도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만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도 원칙이 있고, 원칙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정석이라고, 바둑에 비유해서 정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책이, 모범적 정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대로 했습니다. 남은 기간에도 그대로 할 것입니다.”

‘주가를 올리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는 당시 시중에서 돌던 주가 2,000까지, 3,000까지 심지어는 대망의 6,000까지 가보자고 하던 말에 냉소를 지었을 것이다. 솔직하게 1,500선으로 안정되길 희망한 발언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는 걸 상기해보면 그렇다. 노무현이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엔케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는 일본의 낮은 금리로 인해 촉발된 일본 엔화자금의 세계시장 투자현상을 말한다.

알려진 것으로는 2005년 중반기 이후 2006년까지 매우 강력한 엔케리 자금이 움직인 것으로 되어있다. 2008.8 현재 5개 시중은행의 엔화 대출규모는 9,129억엔으로 전월 대비 109억 증가했고 지난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세계로 퍼진 엔케리 자금의 전체 규모를 추산하기는 어렵다. 추정치만 나올 뿐이다. 대략 344조엔 규모, 그 가운데 주식 51조엔, 채권 210조엔, 대출 83조엔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재경부, 산은경제연구소 등에서는 2007년까지는 엔케리 규모를 50~60억불 수준으로 봤다. 그러나 2008년 현재 5개 시중은행 규모에서만 해서도 이 규모는 훨씬 넘었다.

2007.8.6 한국은행이 외국환은행의 외화대출을 해외에서 실제 사용할 자금과 국내 제조업시설자금용으로 엄격히 제한키로 했지만 2008년 초까지도 엔화대출은 주택, 병원건물, 상가, 토지, 빌딩이나 아파트 소유자, 병원신축자금 등으로 최저 2% 수준에서 대출기간 1~3년으로 한국 시장에 풀렸다. 60억불이란 추정치는 금융기관 차입, 엔화대출, 일본인의 국내주식투자 대금의 합산이라고 했지만 사채시장에 들어온 일본 자금 등을 포함하면 실제 대출규모가 어디까지인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세계가 서브 프라임 사태의 배후에서 위기를 가장 크게 조성한 것이 바로 엔케리라고 분석하는 상황에서조차 엔화자금은 한국을 횡행한다. 경제지표로 든 코스피 지수의 상승과 엔화대출 간에는 분명 상관관계를 가졌다. 그래서 미국 발 금융위기에 요즘은 엔화 대출을 받은 개인상공업자, 기업, 시설자금, 부동산업자 할 것 없이 모두 원금+환율 상승분+이자까지 들어가는 난제에 부닥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2002년부터 한국에서 엔화 대출은 러시 조짐을 보였다. 초기에는 중소기업, 자영업자를 타켓으로 하면서 낮은 이율로 금융시장에 침투했다. 단기외채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엔케리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1:10의 원화 가치가 1:7까지 올라가고 강남 아줌마들의 일본원정 쇼핑이 줄을 이었다. 달러대출금리가 연 4~6%대였을 때, 엔화대출은 2~3%였다. 엔화를 빌려서 부동산, 주식 시장에 투자하는 거의 광풍이 일었던 때였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주식도 덩달아 오르고, 원화는 비싸지는 시절을 겪었지만 그것은 지금 닥친 유동성 위기 직전의 호황으로 보이는 착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현상은 2007년 들어서 조짐들이 드러났다. 노무현 정권시기 주가 자체가 실제로는 이러한 금융자본이 배태한 비정상적인 수치가 포함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동산 폭등의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그것을 노무현은 알고 있었다. 시중은행의 엔화대출 규모는 1조 2천억엔 수준이지만 전체적으로 봐서는 약 27조원 수준, 그 중 주식 10조, 채권 3조, 대출 14조원으로 보는 것이 추산정치다. 물론 추정일 뿐이다.

다시 그의 원광대 발언으로 돌아가보자.

“대체 비교해보면 제가 민주주의를 어느 정권보다 못했습니까? 나라 경제가 어느 정권에 비해서 잘못됐다는 것이냐, 한번 꼼꼼히 따져보면, 뭐 그리 크게 자랑할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실패라고 그렇게 매도될 만큼 그렇게 실패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난히 ‘그렇게’라는 말이 많이 들어갔다. 당시 노무현 정권을 실정(失政)이라 몰고 갔던 조중동 등 언론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난에 근거가 없지 않았기에 문제였다. 아무리 조중동과의 싸움을 했지만 그 자신이 민주주의 하나에 매달리는 사이 교묘하게 침투 당한 버블화된 경제 속에서는 분명 붕괴의 싹이 트고 잇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겠지만 MB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아예 그 싹에 비료를 주듯 원화를 절하해버렸다. 달러 대비 자국화폐의 가치유지도 아닌 절하국면에서 수입 원자재가 상승을 부추기고 이어 물가는 사정없이 오르게 된다. 거기에 10%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종부세 감세, 부동산 하락을 막기 위해 그린벨트 해제, 죽은 건설사를 살리는 버블화 정책 등이 잇따른다. 전세계적인 유동성 위기 상황을 나 몰라라 하는 정책노선이 유지된다. 아예 경제를 죽였다가 다시 살리겠다는 식, 그도 아니면 기득권만 살리는 철저한 ‘먹튀’ 본능이 튀어나왔다. 여전히 미련을 두는 대운하 프로젝트를 두고 ‘삽질경제’라는 말도 나왔지만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

결국 MB정부의 경제위기 상황은 처음부터 강만수의 등장과 함께 예고된 것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시기 가속화한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하에서 엔케리자금을 도입하는 단기외채로 살려낸 증시, 부동산, 중소기업의 국면이 일거에 대기업 프렌들리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굳이 미국의 서브 프라임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가계대출, 주택담보대출 등 형성된 버블국면에서 세계금융시장의 유동성 악화는 곧 수출의존도 75%의 한국시장에 최악의 경제환경을 조성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바로 이 점이다. 노무현과 이명박,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집합이 드러난다. 노무현은 친일을 거부했지만 경제정책의 원칙 적용이라는 구실로 엔케리 자금이 한국금융가를 마음껏 휘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자영업자, 중소기업, 부동산, 그리고 가계대출 등에 엔케리 자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없다. 강남부동산 폭등의 원인에도 엔화대출이 있었다. 그 약점을 보면서 대통령 선거의 혼란기에 일본의 금융은 철저하게 한국에 대해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설계들을 해 들어왔다.

MB정권은 일본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집권 후 엔화대출규모는 꾸준히 늘었다. 지금 당장 엔케리 자금의 전면 회수가 있다 하더라도 경제에는 문제가 없다고 호언하지만 실상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미 대상이 폭넓게 가계로 번져 있다. 부동산, 주식 시장에서조차 엔화자금의 비율은 전체 시장규모에 비해 무조건 ‘적다’고 할 수도 없다. 아직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죽자 살자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고 500만호를 10년 내 지어서 모든 국민이 집을 가지게 하겠다는 허황된 시도까지 나왔다.

이제 일본이 취할 조치가 관건이다. 골드만삭스의 9.10자 보고서에 미국 정부의 누적 재정적자가 5조 3000억불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치가 나왔다. 7,000억불 수준의 구제금융으로 되지 않고 추가적으로 1조~2조달러 규모의 국가공적자금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당면 금융위기의 투입 추산치도 나왔다. 세계증시는 이에 반짝 반응을 하지만, 문제는 미국도 이른바 파생상품의 범위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 보니 규모 자체를 확실히 지금 내놓을 수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세계금융시장은 일단 하방 곡선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구제금융마저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 모럴 헤저드의 대표적 사례로, 미국이 책임져야 할 일로 성토와 뭇매를 맞고 있다.

일본이 한국 시장에 어떻게든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일단 현 추세대로라면 재정적자가 되든 말든 빚더미를 쌓는 한이 있더라도 무리한 경제정책을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 MB정부의 스탠스이고 보면, 그 가운데 일본은 틈바구니를 찾게 될 상황이 곧 온다고 봐야 한다. 벌써부터 조짐은 현실로 나타나는 중이다. 엔화 대출의 만기연장이 되지 않는 사태, 일부 은행에서는 의사 등 위험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엔화대출 자체를 중단해버리고 있다. 병원 등도 줄도산이 예고된다. 엔화대출과 외환수요 간에 겹쳐진 어두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론은 노무현이건 이명박이건 간에 걸어왔고 가는 길은 엇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경제정책의 결과물을 ‘주가’로만 판단하자는 노무현이나 ‘내가 대통령이 되면 브랜드 가치로도 주가지수 3,000은 간다’고 했던 사람이나 경제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경제를 통한 일본의 침투를 예상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다른 한 쪽은 그로 인한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것은 각 정권의 본질을 볼 때,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서민들, 중소기업, 그리고 상위 5%에 들지 못하는 비 기득권 계층만이 이 위험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누군가 천민경제학을 말했지만 지금은 귀족경제학이건 천민의 그것이건 간에 ‘나라를 건 도박’이 벌어진 국면이다. 일본이 지난 2000년 이후 한국 땅에 심어둔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의 경제침탈 역량이 곧 우리에게 비수로 작용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경제위기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곧 보게 될 것 같다. ‘친일’을 선택한 후폭풍이다.

5. 뉴라이트 집단을 앞세운 MB식 이념전쟁;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경제와 교육’은 ‘친일의 재구성’ 프로그램을 ‘다시 백 년’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기획자의 핵심 테제에 속한다. 그것은 영구지배와 직결된 단어이기도 하다. 단순한 육체적인 사슬이 아니라 정신적인 족쇄가 채워지는 과정이다.

MB정권이 들어선지 반 년이 넘어서자마자 본격적으로 교육에 대한 강한 집착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이런 시도는 있었다. 촛불민심의 눈치를 보다가 이제 기회를 만났다 싶으니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 서커스 같은 캠페인의 목적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기득권 세력의 공고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백년대계인 교육의 장악이다. 이 둘 간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바로 절대권력을 구축하겠다는 발상법이다.

MB정권 가운데 상당수의 보수계 인물들은 지난 십 년 동안 절치부심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정권을 내어주는 경우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연히 정치 자체에 무관심하게 국민들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수단과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국민 모두를 위해서 나올 재간이란 쉽지가 않다.

이들에게는 방법이 딱 한 가지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즉, 이념전을 통해서 좌우 대립을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정권과 기득권 유지의 키워드를 찾는 것이다. 자신들은 당연히 ‘우파’(우익)이라는 자리를 차지하면서 보수를 자처한다. 친일세력이 써먹었던 방식 가운데 좌파론을 그대로 대입하고 있다.

정당성이 없는 정권일수록 ‘분열’은 기회라는 인식이 있다. 국민들 사이를 이간질 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권력을 전횡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매사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구도를 만드는데, 특히 친일세력은 이를 ‘이념’에서 찾는다.

왜 노무현이 무능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매우 단순하다. 그 또한 정치적으로 갈등을 조장하는데 익숙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인 탄핵국면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갈등이 본질적으로 추구한 목표물에 이르지를 못했다. 오히려 훼절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게 옳다. 즉, 자신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종속을 맹세하는 가운데 특별한 이념론을 만들어내지도, 또한 그들과 강력한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고 권력을 놔버린 케이스에 속한다. 그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엄밀히 그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직무를 기망한 것이다. 물론 그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결과는 자신의 권리인 선거에 참여한 당사자, 즉, 국민에게 책임과 의무가 동시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를 막을 방법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들 세력에게 권력을 바치는 데 크게 일조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가 마구 터져 나온다.

정부와 한나라당, 그러니까 MB정권이 모두 모여 소위 ‘보수원로그룹’이 중심이 된 ‘교과위원회’를 만들었다.겉으로 아니라고 하건 아니건 그들은 토의를 진행하고 있고 행동대원까지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만든 ‘교과서 포럼’의 이영훈, 박효종 같은 친일매국의 사냥개를 중심으로 교과서를 난도질 하기 일보직전이다. 그들의 요구를 개정판에 담겠다는 것은 곧 그들이 지금까지 주장한 식민지근대화론으로부터 위안부 공창론까지 이르는 친일사관, 일본우익의 역사론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결정과 같다.

그 속에 각자의 이익이 있다.

국방부는 국방부대로 제주 4.3사건을 “대한민국건국 저지를 위해 남로당이 지시한 대규모 좌익반란”으로 규정함으로써 과거 관동군 출신으로부터 이어져온 한국군의 초기 오점을 지워보려 한다.

상공회의소는 교과서 개정요구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03년, 2005년, 2007년에 이어 네 번째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교과서의 반시장적인 성향만 수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이슈를 다룬다. 재미난 것은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남북정상회담은 방식이나 격식 측면에서 북한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였다”고 개정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가 역사를 건드리더니 이제는 상공회의소조차 역사적 전문성, 외교 프로토콜의 기획자가 되고 있다.

통일부는 엉뚱하다 싶을 정도로 ‘햇볕정책’을 ‘화해협력정책’으로, ‘북한체제의 고착화’를 ‘북한유일지배체제’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었다. 일견 타당성이 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다.

2008.9.8 전국 16개 시 도 교육감이 역사 교과서 시장을 50% 넘게 장악하고 있는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교과서가 이념적 편향되었으므로 내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다른 교과서가 선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이 말하는 ‘그’ 교과서는 도서출판 기파랑(대표 안병훈)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말하는 듯하다. 일부 교육감들은 2002년 교육부에 의해 승인된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를 밝혔지만 정권이 나서는 이 ‘이념전쟁’, ‘우경화 드라이브’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과연 이것이 국가를 위한 길인가?

앞서 여러 차례 왜 ‘친일매국세력의 친일의 재구성’이 무서운 작업이었는가를 설명한 바 있다. 이들은 매우 조밀하게 들어온다. ‘경제와 교육’, 이 두 분야는 그들로써는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일선 고지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만 가지면 정권 연장은 쉽다. 방송언론의 장악도 중요하지만 국민은 경제적 여건이나 혹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방향에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더 크다. 소시민에 대한 정치접근에 속한다.

이를 위한 그들의 두 번째 작업은 바로 ‘우익 네트워크의 구성’에 있다. 지금도 뉴라이트 집단은 대한민국이 생긴 이래 가장 커다란 정치, 사회 집단이 되어 있다. 이들이 친일이고 보면, 한국은 이미 사회 국가 내부에 강력한 친일찬양집단, 친일경배세력을 두고 있다. 이들은 교활하다.

이를 테면 종교적인 갈등을 야기하면서 사회에 심어두는 새로운 세력은 엉뚱하게도 ‘평신도 협의회’라는 것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평신도들이 어떤 형태로 대표성을 가지는지도 모르지만 여하간에 자기네들끼리 모여서-이를 보수인사가 주축이 된다고 표현하지만-협의회 같은 모임 하나를 뚝딱 만든다. 그리고 발표를 한다. ‘종교갈등은 안 된다’고 해놓고, 대표성을 잠식해 들어간다. 당연히 이들은 뉴라이트 집단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상득, 한승조 같은 인물들이 그 안에 포진한다.

수법은 매우 단순하지만 효과는 몹시 크다. 왜냐하면 벌써 세력화된 동조자들이 있고, 거기에 정권과 정부가 가세한다. 방송언론의 장악을 통하여 이를 홍보하는 데 문제가 없다. 이렇게 삼 박자를 맞추어 두면, 무슨 세력을 만들어도 모두 하나의 네트워크 속으로 흡입이 가능하게 된다.

다시 노무현으로 돌아가 본다.

그의 실패는 단순히 그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이러한 사태를 예방하지 못한 잘못까지 져야 한다는 데 있다. 혹자는 이를 그의 전적 책임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떤 수준의 힘이 있는가는 MB정권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2.0’의 실험을 ‘소도 2.0’이라고 폄하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친노 그룹의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그들에 대한 공격쯤으로 간주하겠지만 한 시대에는 최소한 시대를 넘어가기 위해 해주었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없었던 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 많은 기여가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공과에서 공보다는 과가 더 많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MB정권의 이념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정해졌고 또 다시 ‘밀어붙이기’라는 몹시 극악한 방식이 동원될 것은 틀림없다. 그들 스스로 한국이란 국가와 사회 전반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수준은 어디쯤일까 생각해보면, 결국 한국을 고스란히 일본에게 ‘다시 백 년’ 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지점까지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보다 명백해진다. 지금은 분명한 ‘시대전쟁’이다. 단순히 한국 내의 이념적 내란(內亂) 수준으로 파악될 때는 아니다.

6. 2008년, 선군정치의 북한 군부를 보는 눈

이런 시점에서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북한은 대단히 묘한 위치에 서있다. 1998년 본격적으로 ‘선군정치’가 시작된 이후, 군부는 비대해질 만큼 비대해져 이제는 더 이상 확장이 될 수준은 아니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규모의 축소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대내외적인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군부 내에서도 갈등이 벌어질 조짐이다. 물론 이것을 조선노동당에서 일정 수준의 억제력을 가지고 해나가고는 있다고 하나 첨예한 군사적인 대응국면의 유지로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봐야 한다.

김정남은 최근 이런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국(북한)의 경제가 재건되지 않으면 최고지도부가 무슨 욕을 들어먹을 지 모른다.”

이 걱정은 비단 어느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북한이란 사회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작용되는 논제가 되어 있다. 앞서 ‘와병설’의 진행과정에서도 보았듯이 이 사태는 앞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강성’(剛性)을 유지할 공산이 크다.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9월 22일 북한이 IAEA의 핵봉인 해제를 요청했다는 것은 단순한 협박이나 혹은 조정국면을 기대했다기 보다는 ‘관성’(慣性)이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통제는 오로지 한 사람인 김정일 위원장의 손에 달려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인지 미국은 와병설 가운데서도 ‘그가 죽는 것도 그렇다고 권력이 흔들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위험성을 잘 안다.

실제 상황은 어떤가? 의학적인 ‘스트록’(strock)이 지속적으로 그에게 건강의 위협으로 가해지는 중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뇌졸중이나 혹은 일정 수준의 치매현상까지 동반한 노화(老化)가 드러난 상태다. 현실적으로 온전한 정신으로 직무를 수행 가능한 시간은 하루에 몇 시간도 채 되지 못한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이 살아있는 것은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를 목적으로 한 ‘내부적인 갈등과 투쟁’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북한도 지난 십 년 동안 꾸준히 외부세계와의 교감이 가능했던 경험된 젊은 인력들이 수급되는 중이었다. 그들이 노동당, 군부까지도 모두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있어 현실적인 북한 사회의 난점을 극복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난 60년 짜진 ‘권력의 안전망’을 쉽게 일탈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순응이 아니라 다각적인 활로를 찾고자 하지만 그 성과는 빠르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 세력들이 잠재적인 변혁주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선군정치 하의 ‘국방위원회’라는 존재를 두고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다. 조선노동당이 우위인가, 아니면 군부가 위주인가 하는 점에서 나온 논쟁이다. 김정일의 지위는 당 총비서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란 두 개의 직위를 동시에 가지며,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당의 우위를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선군정치라는 시스템에서 군부의 확충이 지난 십 년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들여다보는 관점의 차이가 분명 있다.

사회주의 헌법 제103조에 명시된 국방위원회의 역할 기능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하며, 국방부문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애고, 중요 군사가부들을 해임 또는 임명, 군사 칭호를 제정하며 장령 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또한 북한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을 선포하고 국방위원장은 일체의 무력, 즉, 인민무력부 산하의 정규군을 비롯하여 로농적위대, 교도대, 붉은 청년근위대 등을 지휘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란 타이틀이 지난 십 년은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명의보다 훨씬 대외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도 나온다.

첫째, 김정일이 없는 국방위원회는 허수아비다. 둘째, 국방위는 실제 권한 행사보다는 모이라면 모이고 사안이 끝나면 흩어지는 단순한 명령대행기구다. 셋째, 김정일의 직계 가족 가운데 국방위에 가입된 자가 없다. 넷째, 노동당 중앙군사위와 지위, 역할의 문제가 겹치거나 혹은 하위에 있다. 다섯째, 지난 9.9절 충성편지의 수순도 노동당이 우선이었다. 역시 노동당이 우위다. 여섯째, 따로 청사나 사무실을 가지고 활동하는 상설조직이 아니다는 등이다.

과연 그런가?

군에 대한 강조는 김정일 본인의 말로 정리가 되었다. 이를테면 “혁명의 군대는 주체사상의 핵심적인 힘이고 주력이다. 군대는 인민이며 국가이고 당이다”로부터 “군을 통수하는 국방위원회를 국가특별행정기구로 격상시키고, 국방위원장의 지위가 법률상으로 국가원수이며 또 국가의 상징이 된다. 동시에 군인의 사회 내 계급을 노동자, 농민, 지식계급이라는 3대 사회계급의 최상위의 위치로, 국내에 있는 일의 모든 것에 군사와 군인이 우선 된다”는 것이 바로 선군정치의 강령이다. 그가 이 시스템 속에서 가동했던 국방위원회가 단순한 ‘허상의 실체’라고만 볼 수 있는가에 관건이 있고 이를 통해서 과연 현재의 북한 내부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사회, 경제, 정치적 함의를 찾아보는 것이 앞으로 나타날 ‘갈등’의 방향을 들여다보는 계기판이 된다.

당연히 이 갈등 구조는 ‘당 정 군’이라는 3대 요소에서 조선노동당과 국방위원회라는 두 축과 그리고 김정일이라는 상위의 조율자를 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존재감 상실은 곧 이 축 간의 과도한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중국은 이러한 상태를 군사적인 맹동주의가 등장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게 보고 있다. 미국은 이 상태 이후의 이른바 ‘핵 통제권’에 더 관심이 많다. 둘 다 엇비슷한 관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과연 북한이 독자성 유지를 위하여 어떤 노선을 택하는 ‘정리’(整理)를 할 것인가에 무게감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바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후계론’이다. 앞서도 ‘혁명가계승계’와 ‘혁명정통승계’라는 개념으로 혁명의 유지라는 측면을 제시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축들 간의 갈등 속에서도 혁명의 대의를 버릴 수 없는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외국물을 먹고 들어온 신선한 젊은 피들이 많다고는 하나 여전히 북한이란 국가 사회는 하나의 ‘혁명체’로 존재하고 이를 버릴 경우에는 명분을 부여 받지 못하는 체제다.

남한에서 ‘친일’이 뿌리를 내리려는 과격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서 북한은 이러한 내우(內憂)를 맞고 있다. 그러기에 이들의 우선순위는 모두 하나로 모아진다. 즉, ‘어쩔 수 없는 대결적 구도’라는 것이다. 그 첫 머리는 바로 북미관계에 있다.

왜 북미관계인가?

북중 관계의 혈맹과 동맹구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립 생존이란 개념이 몹시 강하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이 선택한 3년의 상중통치를 통한 이른바 ‘인덕정치’ 이후 곧 바로 ‘국방위원회’를 축으로 하는 ‘선군정치’로 넘어갔다. 이 시스템에서는 분명 정권 공고화에는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경제적인 개혁 또는 개방을 통한 체질개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군부는 이 시점부터 비대화 단계에 들어가서 사회 국가전반에 파고들었다.

미사일, 핵 개발 등 국가존립 유지를 위한 무력의 구축 상태에서 첨예한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북중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거의 주기적인 마찰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북미관계라는 새로운 축이 등장을 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북한은 고립되는 현상이 이어졌다. 남북관계가 2000년 이후 일정 수준 경제적 숨통을 터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유지되던 군사적 강성대국의 기조는 2005년 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다시 겪게 된다. 북미관계는 지지부진하고, 그렇다고 강해진 군부의 입김으로 핵 미사일 무장력을 포기하는 개방의 선택은 불가능한 단계였다.

북미 간 접근이 강화되는 시기,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은 중국에게 강한 쇼크로 다가왔다. 북한은 재개된 6자 회담의 국면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낙관했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북중 간의 갈등이 재봉합되는 과정이 나타났고 북미 간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리하게 이어진 것이 바로 2008년의 상황이다. 남한에 새로 등장한 MB정권은 미국보다 더 강력한 대북 압박정책을 기조로 했지만 북한이 선 순위로 해결할 과제는 바로 북미-북중 관계라는 두 축이었던 것이다.

7. 후계자, 과연 있나 없나?

이러한 1998년 이후의 흐름에서 ‘왜 (북한에서는) 후계자 논의가 가시화되지 않는가?’라는 테제가 등장한다. 당연히 이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의 각 축들이 가졌던 ‘김정일 이후의 시대’라는 관점도 존재하고, 또한 ‘북한의 화평연변(和平演變)’을 주제로 한 미국, 중국의 접근도 한 몫을 하게 된다.

딱 이 시기, 남북관계는 사실상 겉치레의 정치적 화장질을 하기에 급급했다. 사안에 접근하는 본질이 달랐다. 남과 북이라는 민족끼리의 해결책을 도모하자는 ‘구호’는 공허했던 것이다. 내부적인 통제를 위해 정착시킨 선군정치의 시스템 속에서 온전한 협력이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또한 남한의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정권도 이 부분에 있어 이렇다 할 획기적인 기획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두 쪽 모두가 이 시기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방식의 후계자 논의가 북쪽 내부에서는 벌어졌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 시기에 본 사람과 다음 시기에 본 사람이 각각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유력자는 계속 바뀌고, 오늘 이야기 되었던 후계자는 내일 외유를 떠나거나 숙청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아예 후계논의가 없었고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본질은 ‘김정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내부에서 상황에 따른 이합집산, 정치적인 담합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후를 한 치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갯속으로 빠져드는 상황이 이어진다. 당연히 ‘(제대로 승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들 권력을 지탱하는 축 위의 김정일 이라는 조종자의 생존연한이 관건이 된다.

일단 그간 벌어진 내부적인 후계전쟁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9~2000년 연간, 김정철은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가 당시 당중앙위 조직지도부에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었건 간에 신분 자체의 특수성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있었던 시기였던 셈이다. 심지어 2002년경에는 ‘김정철 동지의 사업체계를 세우자’는 구호가 등장했던 것마저도 당시의 분위기만으로 본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일회성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시도로 보기에는 여러 정황에서 일정 수준의 위임권도 행사하던 때였다.

당시 가장 큰 정적은 장성택이었다. 2003년경부터 굳이 황장엽의 발언-김정일 사후에는 장성택이 유력하다-이 아니더라도 중국, 일본에서는 그에게 방점을 찍는 인물들이 꽤나 많았었다. 그만큼 그와의 접촉에 노력했던 장면들이 드러난다. 단순히 김정일의 매제라는 신분이 아니라 김정일-장성택 간에 뗄래야 뗄 수 없는 인간적인 정리까지 포함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접근이었다.

당시 김정철의 생모인 고영희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는 단계였고, 그녀는 장성택과 그를 추종하는 최룡수(인민보안상) 등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영희와 함께 장성택 제거에 나섰던 김용순 대남비서가 2003.6.16 고영희의 생일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제거되고(10.26사망), 장성택도 그 해 7월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지하고 2004년에는 직무정지를 당하게 된다.

2004.5.26 고영희는 유선암으로 사망, 6월초 평양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직후 김정철은 비공개로 중국을 여행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유력한 후계자였다. 김일성이 말했다는 ‘김정일이 천재라면 김정철은 만재다’라는 말이 유행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가 고비였다. 고영희를 ‘조선의 어머니’로 하는 우상화 작업을 주도하던 정하철 선전담당 당비서가 제거되면서 김정철은 후계일선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것이 누구의 지시였는가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겠지만 실제 이와 같은 논의중지는 김정일의 의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볼 때, 그가 중지시켰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2004년 하반기~2005년 하반기 약 1년 동안 김정철은 여성호르몬 과다분비 등의 병명이 언급되면서 그 자신도 독일, 유럽 등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가 재등장한 것은 2005년 10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시점이다. 독일 슈피겔은 당시 만찬에 김정철이 동석했으며 이것은 중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 이후 김정철은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서기실 등을 거치게 된다. 2006년에는 중앙당 고위관리 사무실에 김일성-김정일-김정철의 3대 초상이 게재된 적도 있다는 증언도 있다. 2007년에 들어 김정남은 베이징의 한 소식통과의 대화에서 “후계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시켜도 안 한다”는 발언을 한다. 중국은 사실상 이 시점에서는 김정남의 후계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2007.11.24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는 더 직설적이었다. 김정철이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임명 되었고, 이것은 김정일이 1969년 27세 나이로 그 직위를 가진 것과 동일한 절차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김위원장 집무실이 있는 중앙당 본청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흘렸다. 당 조직지도부는 당을 담당하는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군을 담당하는 리용철 부부장이 있는 곳이다. 김정철은 2000년 이후 꾸준히 당을 근간으로 하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이 시기 직전의 세 가지 가장 큰 변화가 눈에 띈다. 장성택은 2007년 초 다시 등장하여 사법 및 경찰, 인민보안성, 국가안전보위부까지 관장하는 당 행정부장 직책을 맡게 된다. 그가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예측도 흘러 나왔다. 그렇지만 파당 형성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에 그의 행동반경은 제약이 있다는 설도 동시에 흘러 나왔다. 그리고 2007.4.12 연형묵(2005.10사망)의 후임으로 국방위 부위원장에 김영춘이 임명되면서 확실한 군의 실세로 등장한다.

2008년 3~4월, 김정철은 다시 중앙당 검열 지도의 책임자로 청진시와 중앙당 부분에서 등장한다. 중앙당, 보위부, 국방위원회까지 검열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김정철은 확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번 ‘와병설’에서 많은 예측들이 난무하는 것일까?

추측의 근거는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 3대 가계(직계) 승계를 하지 않는 것이 김정일의 방침이다. 또한 북한 내에서도 3대 승계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둘째, 김정철뿐만 아니라 김정운, 김정남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다. 장성택-김정남 간의 연대가 있다. 이들 간의 대결구도가 존재한다. 셋째, 군부가 이러한 3대 승계에 찬성하지 않는다. 군부만의 독자적인 집단지도체제의 형성에 방점을 찍어주길 기다린다. 넷째, 김위원장이 아직은 건재하다. 그러므로 후계논의는 2010년 이후에 하자고 결정한 상태이므로 누구라도 언급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문제는 여전히 미결상태로 존재한다.

확실히 3대로 이어지는 가계승계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9.9절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 북한은 사회적으로 김정일의 존재감 자체가 더 부각된 상태다. 그에게 결정의 위임권이 있다는 사실을 전 사회 국가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달리 해석하자면, 이것은 ‘김정일의 몽니’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된다. 하부로부터의 권력투쟁에 대한 사전 단속이고 매우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고도 판단된다.

혹자는 ‘(병원 혹은 침상) 문고리 권력’을 들어 김옥-장성택 간의 담합 또는 알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본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이다. 과거로부터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바로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선군정치 하에서 대형세력이 된 군부의 존재다. 이들의 선택방향이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잣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산하 위원회를 구성하여 ‘군부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시범 가동 중이라는 이야기도 흘러 나온다. 그 또한 터무니 없는 소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건강에 따른 위임권의 하방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정운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