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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교육정신과 연세교육 김 인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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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교육정신과 연세교육

김 인 회1)

머릿글 ··················································································································1

Ⅰ. 언더우드의 선교사업 속에서 교육의 의미 및 범위의 변화 ········ 3

1. 초기(1885-1890) : 준비 교육기 ························································4

2. 중기(1891-1910) : 본격적 교육 활동기 ·········································7

3. 후기(1910-1916) : 대학설립과 삶의 마감기 ·······························10

Ⅱ. 언더우드 교육정신의 특징 ···································································14

Ⅲ.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에 비춰본 오늘의 연세교육을 위한 성찰 16

1. 언더우드 교육정신의 형성 배경 ······················································16

2.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의 의미 ················18

3. 연세교육을 향한 성찰과 소감 ··························································19

1) 본교 교육학과 및 대학원 졸. 이화여대 부교수 역임

본교 교육과학대학장, 박물관장, 국학연구원장 역임

2003. 2. 본교 교수 정년퇴임

한국교육철학회장․한국교육사학회장 역임

현재 : 한국박물관교육학회장․한국자율교육학회장․한국굿학회장

저서 : 한국교육의 역사와 문제․한국문화와 교육․교육과 민중문화․한국교육의 정신과 실천․

한국교육의 위기와 진로․밥상머리 교육부터 다시 하자 외 저서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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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교육정신과 연세교육

머릿글

우리는 왜 오늘 이 자리에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교육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우리 교육, 즉 오늘의 연세교육과

학문, 그리고 오늘의 한국교육과 사회 문화 역사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우리의 안목을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교육이 있기

까지의 정신사적 연원에 대해서 새삼스런 눈으로 돌이켜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연세대학교

에서는 재작년부터 우리 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 박사의 선교․교육․봉사정신을 기리고

재조명하는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과 언더우드 기념강좌를 개최해온 것일 것이다. 진작에

이런 행사를 갖지 않았던 것은 저간의 연세인들이 게을렀거나 무심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교육현실을 성찰함에 있어 1세기 전 이 고장에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한민족의 장래를 튼튼하게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담보라고 믿고 전력투구했던 언더우

드 교육정신의 투철함과 그 정신사적 의미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던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즉,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은 오늘날

까지의 연세교육 속에 계속 이어지고 실천되면서 비록 겉으로는 잘 들어나지 않으면서도 실

제에 있어서는 연세교육을 방향 짓는 정신적 준거로 살아 움직여 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

에 연세인들은 굳이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의 정체를 새삼스럽게 확인할 필요가 그동안에는

없었던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은 지난 1세기의 역사적 상황과는 차원을 달

리하는 총체적 전환의 소용돌이를 맞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인

류문명사적 전환과 민족사적 격동은 우리들로 하여금 19세기 이래의 지난 1세기 역사를 살

아오면서 근거로 삼았던 정신적 준거에 대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위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을 새삼스런 눈으로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지금 격동하는 새로운 역사 속에 이미 발을 깊숙이 들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1세기 전 우리 민족의 역사가 겪었던 것과도 비슷한 총체적 국면전환의 격동기 속으로

어느덧 우리는 이미 들어서버린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언더우드가 품었던 교육정신이 그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연세교육을 비롯한 한국의 사립고등교육으로 구현된바 긍정

적인 역할 등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과연 이제부터 전개될 우

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정신사적 의미로 교육현실과 연계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

문과 담론의 장을 지금 갖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 같다는 상황인식에서의 절박감 같은 것이

오늘날의 연세교육 당국자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증거가 바로 언더우드 선교상과

기념강좌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컨대 첫째, 오늘의 역사적 교육적 격동의 상황이 우리들로 하여금 언더우드의 교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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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해 새삼스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둘째, 앞으로 예상되는 우리의 미

래 역사를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정신적 준거의 정체를 우리 손으로 확인 또는 재규명하지

않아서는 아니 될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이라고 하는 정신사적 원형

이 갖는 미래지향적 의미와 기능에 대해 새롭게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공감하고 있는 것이

다. 셋째,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연세교육과 한국교육이 처해있는 좌표를 확

인할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우리 교육의 꿈과 이상, 비전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언더우드(원두우)의 삶의 과정에서 ‘교육’사업과 관련되는 그

의 교육정신의 실체와 그 교육정신이 갖는 연세교육 및 한국교육의 정신사적 의미를 규명하

고, 오늘의 연세교육과 한국교육에 조명할 것이다. 언더우드 1세의 교육정신을 천착하는 과

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교육정신을 지원하고 이어받아 연희교육을 통해 구현하는 일에

중추적 역할을 한 그의 형과 아내, 그리고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교육실천과 교육정신을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언더우드 3세 원일한과 그 자손들의 연세와의 관계에 대해서

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성 싶다.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은 원두우만의 교육정신이라고

말하기보다 원두우에서 비롯되어 연세교육에 미친, 그리고 한국사립고등교육에 미친 언더우

드 일가의 교육정신이라고 넓게 생각해야겠다는 관점에서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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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언더우드의 선교사업 속에서 교육의 의미 및 범위의 변화

언더우드 1세가 26살 젊은 나이의 개척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이후

1916년 10월 12일 서거할 때까지 32년에 걸친 사역활동을 전개하면서 실천한 사업과 이룩한

업적들에 대하여는 이미 그의 사망 당시에 발표된 게일(J. S. Gale)목사의 글을 비롯하여 그

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목사, 그와 함께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하디(R. A. Hardie), 노블(W. A. Noble), 마

펫(S. A. Moffett) 등의 조사 및 헌사기록들과 당시의 국내외 언론(뉴욕타임스 1916년 9월

16일, 뉴욕헤랄드 1916년 9월 18일자, 매일신보 10월 19일자 등)보도 등에서 일단 요약 정리

된바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뿐만 아니라 그의 미망인 릴리아스 H. 언더우드의 언더우드

전기3)와 그의 아들 원한경의 책 「한국의 근대 교육」4), 그리고 이광린이 쓴 「초대 언더우

드 선교사의 생애」 등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사역

활동을 전개하면서 겪어야했던 난관과 시련들, 그런 일들과 맞선 그의 신념과 용기, 신앙,

인간관계 방법, 한국 땅에서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그의 꿈과 이상,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한국의 교육에 대한 그의 이해와 포부 철학 등의 구체적 내용과 모습의 편린들을 그의 선교

편지5)에서 살필 수 있다. 나는 앞에 열거한 자료들에서 언더우드의 선교사업 내용을 발췌

정리하고 업적을 추모 상찬하는 작업에 관심 갖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통해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과 포부,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한 노력들이 감춰 갖고 있는 한국 근대 교육의

정신사적 의미를 찾는 일에 관심 갖는 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언더우드의 사역활동을 통털어 볼 때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서나 한국민이 보다 나은 장래

를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돕는 일에서나 교육이야말로 첩경이 아닐 수 없다고 믿는 교육에

대한 그의 신념과 포부는 선교활동 초기에서부터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확고부동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

러의 교육활동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교육을 통한 선교사업 확장에 대해 중요한 관심

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온지 불과 20일 만인 1885년 4월 25일자로 그가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에는 학교건물을 지을 땅을 확보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런

데 정작 그때에 이미 교육기관을 만들고 학교사업을 성공적으로 시작하는 감리교의 사역활

동을 자주 언급한 그의 편지 속에서 그의 교육사업에 대한 열망과 초조함을 읽을 수 있다.

한국 도착 직후부터(1885년 4월 10일) 제중원의 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매일 아침 그를 찾아오는 소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계획임을 말하면서 건물이 없어 학교를

당장 시작할 수 없는 형편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편지내용(1885년 7월 6일)에서 우리는 언더

우드의 교육기관 설립을 향한 열망이 그의 선교활동 초기부터 불붙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학교교육사업을 위해 조만간 무슨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역의 앞길

이 열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1886년 1월 20일자 편지)고까지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기관 설립을 향한 그의 열망은 그가 죽기

2)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250-255쪽.

3) Underwood of Korea, L. H. 언더우드 지음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 기독교문화, 1990.

4) Horace Horton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International Press, New York, 1926.

5) 김인수 옮김,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1885-1916),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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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1915년 4월 12일)에 경신학교 대학부를 개교하는 것으로써 결실을 맺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의 교육정신과 철학은 그 결실의 싹이 큰 나무로 자라 수많은 씨앗을 세상에 배출

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연세교육이라고 하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구현되어 왔다고 할 수 있

다.

실제로 언더우드가 생각하고 실천한, 그리고 꿈꿨던 교육의 내용은 교육기관으로써의 학

교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 속에서 교육과 관련되는 활동과 개념의 범위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 모든 교육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은 기독교 신

앙의 전파이지만 그는 선교의 깃발을 들고 맨 앞에서 달려가는 일에 못지않게 한국의 자연

과 인간, 그 문화와 언어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일에 몰두했다. 상류지도층과만 교류하는 것

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들과 가까워지려하는 접근방법과 자세는 당시의 일부 선교사들과 조

화를 이루지 못하고 심한 경우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선교활동 초기인 1886

년 가을경에는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자신의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감리교 해외선교부

에서 위임받고 사역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1886년 9월 17일자 편지). 그의

이러한 요청이 다음 해 봄까지도 되풀이 되었다(1887년 5월 1일자 편지)는 사실로 미루어

초기 선교활동과정에서 선교사들 간의 알력과 갈등으로 언더우드가 겪었을 괴로움의 일단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선교사들 간의 의견불일치와 부조화로 말미암아 그가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괴로움은 그의 교육관련 활동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점점 늘어가는 과중한 업무량

에 덧붙여 어떤 면에서는 더욱 심해지고 그의 교육이상이 첫 결실을 맺을 즈음이 되어서는

그의 심신을 피폐 할대로 피폐케 했기 때문에 끝내는 대학설립 다음 해에 그를 숨지게까지

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의 교육관련 활동의 범위와 그가 전력투구했던 사역관련 업무내용을 종합

해볼 때 언더우드가 지녔던 교육의 의미와 범위는 대체로 초․중․후기의 세단

계로 나누어 그 교육정신사적 내용을 정리할 수 있을 듯싶다.

1. 초기(1885-1890) : 준비 교육기

그의 선교활동 초기는 선교사로서의 사역활동 일체가 교육적 의미를 갖는 것

으로 인식한 넓은 의미의 교육관 형성단계로서, 선교 및 교육사업의 기초를 다

지는 일에 전력투구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에 온 이후 첫 5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활동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진력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해야할 자기 자신을 교육하는 일에서도 필사적인 노력을 감행한다.

즉, 성경번역사업 및 사전편찬사업, 그리고 앞으로 그가 개척해야할 한국이라는

고장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체험교육으로서의 한국어 습득노력과 세 차례에 걸

친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선교활동 초기부터 그는 고아원을

만들고 이것을 학교로 발전시켜 운영한다.

그가 한국어 학습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는 서울에 온지 1년 뒤에는 제중원에서 한국어

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1885년 7월 6일자 편지에서

그는 그의 한국어 교사가 한국인 가톨릭교도로 매우 뛰어난 교사인데 신부들의 방해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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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그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그런데 불과 반년 뒤인

1886년 1월 31일자 편지에서는 한국어에 관한 작은 책을 6월이나 7월까지 쓸 계획임을 밝히

고 있다. 그의 사역활동에서 한국어 학습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전력투구한 결과 그는 1년

만에 한국어로 강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3년 뒤에는 “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편찬을 끝내고 1890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간행한다. 그런데

이 두 책의 내용은 각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서 실제로는 한국어 문법관련 책 두 권과

한영사전 및 영한사전 도합 네 권의 책을 출판한 것이다.

그가 한국어 습득과 한국어 문법 및 사전편찬을 위해 얼마나 전심전력 했을런지에 대하

여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그는 한국어 학습에 쏟는 열성만큼이나

사역활동을 위한 자기 교육에도 저돌적으로 임했으니, 한국어를 배우자마자 성격번역사업에

착수한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 결과 한국에 도착한지 일년 남짓해서 그는 아펜젤

러와 함께 번역한 마가복음의 첫 임시본을 간행했다.6) 초기 개척선교사들 중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성서번역에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일했다. 실제로 “둘 다 이

일을 특전으로 감당함으로써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아펜젤러는 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

러 가던 중에 익사했으며,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휴가 때, 가을과 겨울에 닥칠 과중한 업무

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해 두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번역 일에 몰두

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라고 그의 부인은 말한다.7)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지 2년을 지나면서 북부지방으로 순회전도여행을 떠날 결심을 한

다. 어느 정도 한국 실정을 파악했을 뿐 아니라 한국어도 익숙해졌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

이다. 1887년 11월 초에 서울을 떠난 그는 송도 솔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방문했다. 이

로써 언더우드는 한국의 내륙과 북부지방에 전도여행을 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언더우드는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특

히 한국의 이름 없는 민초들은 그 때까지 서양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친절하고 순

박하며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그는 첫 번째 여행이 있은

지 반년 뒤인 1888년 4월에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와 같이 두 번째 북부지방 여행을 떠났

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첫 번째 여행에서 뿌린 전도의 씨앗이 싹트고 성장하는 모습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14일 결혼한 그날에 신혼여행을 겸한 세 번째 북

한지방 전도여행을 떠났다. 온갖 위험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내외는 송도 솔내 평

양 강계를 거쳐 배를 타고 압록강 강변에 읍들을 두루 방문하고 의주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

온다. 의주를 떠나면서 언더우드는 진정한 회개의 증거를 보이는 100명의 지원자 중 약 30

명을 만주로 데리고 건너가서 세례를 주었다. 서울서 여행을 떠나기 앞서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에게 여행 중 전도와 세례를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여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던

때문이다.8)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그해 말부터 자기 나름의 고아원사업을 추진

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5월 11일 고아원을 개원한다. 그런데 이 고

아원은 동시에 학교를 겸한 교육기관의 기능도 했다. 실제로 이 학교에서 실시

하는 교육수준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1887년 6월 17일자 언

6) Lillias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1918년초판, 198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영인 발행, pp. 46-47.

7) 앞 책, p. 47.

8) 앞 책, p. 89.

L. H. 언더우드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Underwood in Korea), 기독교문화, 1990. 100쪽

각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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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드의 보고편지에서 학생들이 한국정부에서 주관하는 몇 가지 시험에서 한문 실력을 칭

찬받았으며, 영어과목에서 상위학급들은 매우 우수하여 미국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윌슨편

3학년 교재(Wilsons Third Reader)를 읽고 있는데 영어를 배운지 1년도 못되는 영어실력이

이렇게 놀라워서 이 학생들은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 훌륭한 통역사로 일할 수 있지만 당분

간 학교 안에 있게 하여 1년 정도 지나면 우리학교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내용

을 볼 수 있다.

이 기관은 뒤에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이라고 고쳐졌지만, 미국에서는

1894년경까지 ‘언더우드학교’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9) 이 학교의 교

육목표는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전도사와 교사의 양성에 두고 있었고 학

생들이 장차 사회에 나아가 그들이 받은 교육이념을 적절히 활용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도 하였다.10) 이 예수교학당에서 배출된 인물들 중에는 도산 안창호, 우

사 김규식 등이 있다.11) 그러나 이 학교는 1897년 10월 재한 북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한국에는 아직 고등교육의 요청이 적으며 재래의 학교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로,

언더우드와 에비슨(Aviso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게 된다. 그러다가 선교부는 1901

년에 다시 학교를 열기로 하고 게일에게 교장 일을 맡긴다. 1905년에 게일 교장은 학교

이름을 「경신」으로 바꿨다. 같은 해에 선교부에서는 미국 장로교 전도회 외국선교회

장으로 많은 일을 하다가 1903년에 작고한 웰즈(John D. Wells) 목사를 기념하는 학교건물

을 짓고 학교이름을 「죤 D. 웰즈 기독교일꾼양성학교」(John D. Wells Training School for

Christian Workers)라고 명명했다. 그러니까 경신학교의 다른 이름이 생긴 셈이다.12) 경신

학교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과 더불어 신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새로운 것

을 깨우친다는 뜻의 경신(儆新)이라는 교명은 1915년 4월 12일 경신학교 대학부

라는 이름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이 학교는 언더우드가

작고한 다음 해인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로 인가받아

오늘의 연희동 캠퍼스 터에 자리 잡게 된다.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은 한국어학습, 성경번역, 전도여행, 고아원학교운영 같은 폭넓고 다

양한 교육방법을 통해 그가 한국에 온 첫 5년 동안 자기 자신을 불태움은 물론 마치 메마른

들판에 불씨를 던진 것처럼 궁중에서부터 압록강변 오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곳곳에 빠

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미리부터 텃밭이

준비되어있는 고장에서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깨닫도

록 도와주는 개척적이고 도전적인 사업이었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초

기에 체험하고 절감한 한국어학습의 교육적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의 손을 거쳐 세

상에 나오게 된 한국어 교재와 한영․영한사전 및 마가복음 번역본을 비롯한 수많은 출판물

9) 이광린, 앞 책, 43-44쪽 참조.

10) 이광린, 앞 책, 45쪽.

11) 특히 김규식은 4세 때부터 언더우드 슬하에서 자식처럼 키워졌다.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이 한국말에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김규식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때문이었다.

손인수,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 -H. H. 언더우드의 선교교육과 한국학 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2.

54-55쪽.

12)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245-247쪽.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pp. 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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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사회교육적 기능으로 현실에 변화를 가져온다. 후일 우리 연세대학교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어교육기관인 한국어학당(오늘의 언어교육원)을 만들게 되는 교육정신사적 원

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언더우드 자신의 한국어 학습노력에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

다. 언더우드 교육사업 초기단계의 교육적 성격을 정리한다면, 한국에 기독교와 서양문명을

알리고 전파하기위한 준비교육단계로써 그 교육의 주된 대상은 자기 자신과 한국민중들이었

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그가 만든 한국어학습을 위한 문법교재와 사전은 앞으로 한국

에 올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교육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한 준비교육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90년 10월 21일자 편지 말미에서 “한국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뿌리를 뻗어가고 있으

며, 그 토양은 씨앗이 자라가게 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심고 뿌리는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면

서 안타까운 심정을 들어낼 만큼 그는 한국에 온 첫 5년 동안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과 넓은

지역에 파종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면서 이 황무지 토양의 엄청난 가능성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자신이 첫 5년을 “널리 씨 뿌리는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13)

2. 중기(1891-1910) : 본격적 교육 활동기

그의 사역활동 초기 5년이 준비 교육기간의 의미를 갖는다면 다음 20년은 본

격적인 교육 활동기로 구분해도 좋을 성 싶다. 초기단계가 한국에 기독교와 서

양을 알리는 교육의 준비단계로서 자기 자신을 연마함과 아울러 한국의 현실을

체험하면서 개척선교사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확인하느라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바쁘게 지낸 시기였다고 한다면, 중기단계는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는 교세확장

규모를 감당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 초인적으로 많은 일을 한 시기이다. 성경번역,

미국에서의 한국선교지원요청 연설(1891, 1907-8), 「찬양가」간행(1893), 지방전도여행(1894,

1896. 1., 1898. 9. 12., 1899), 고종의 신변경호(1895), 「그리스도신문」(Christian News)창간

(1897. 4. 1), 「협성회보」창간(1898. 1. 1), 조선교육협회 회장 피선(1904), 「한국평론지」

(The Korea Review)주간(1905-6), 「한국 선교계」(The Korea Mission Field)창간(1905. 11),

「한국 개신교 수용사」(The Call of Korea)출간(1907), 「동아세아의 종교」(The Religion

of Eastern Asia)간행(1910) 등 그는 이 기간동안 한국에서의 선교와 교육활동을 일관된 원

칙과 정책에 따라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때로는 비난과 모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교와 교육에서의 언더우드의 원칙은 이른바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90년 봄에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사업에 종사하다

가 미국으로 가는 도중 네비우스 부처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자기의 경험에서 얻은 선교전

략을 선교사들에게 소개했고 재한 장로교선교사들은 이 방법을 선교사역의 강령으로 받아들

였다. 네비우스 방법의 요점을 언더우드는 네 가지로 요약한바 있다.14)

첫째, 각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곳에 남는다.” 각 사람은 그리스

13) H. G. 언더우드 저 (한동수 역), 와서 우릴 도우라(The Call of Korea), 기독교문화선교회, 2000. 150쪽.

14) 앞 책,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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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위한 개인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야하며 자신의 생

계는 스스로 책임을 진다.

둘째, 교회발전을 위해서는 현지교회가 책임질 수 있고 동일하게 경영할 수 있는 방법과

도구만을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교회 스스로가 충분한 인력과 수단을 공급할 수 있는 단계가 되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하여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전파사역을 감당하도록 한다.

넷째, 현지인들에게 자신들의 예배당을 스스로 건축하도록 독려하고, 교회건물은 한국 고유

의 양식을 따르게 하며, 건축방식도 지역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도록 한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네비우스의 한국방문 훨씬 이전, 언더우드 자신이 한국에

오기보다 먼저부터 한국에서는 한국인들에 의한 사역이 이미 진행되어 왔던 사

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의주까지 여러 차례 선교여행을 하게 된 것도 그러한

기초가 있었던 때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에 있는 로스(John Ross) 목사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의 수고를 통해 이미 적지 않은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북경과 서울

사이에 있는 주도로를 왕래하면서 그 길을 지나는 한국인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

회를 얻게 됨에 따라,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소책자와 성경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들 중에 회심한 사람들은 한국에 돌아와서 마치 영국이나 기타 기독교국가에서

볼 수 있는 서적 행상인이 되어 복음의 씨앗을 널리 뿌리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복음화의 길

을 예비하였다.

이 행상인들 중 한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래’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를 본 이웃들 가운데 여러 명이 회심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선교사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을과 이웃마을에서는 이미 기독교가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고 한다. 1886년 연말이 다 된 어느 날, 행상인 서상륜씨가 나의 집에 방

문한 일이 있다. 그는 로스씨로부터 소개장을 받아가지고 와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세

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를 선교사들의 내부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요청은 우리가 순회사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15)

이점과 관련하여 백낙준은 한국개신교사에서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상륜은 관서지방 특히 그의 고향인 솔내에다가 씨를 뿌린 결과, 1898년에 한국 최초의

교회가 그 곳에 창설되었다. 1884년과 1885년 두 해에 걸쳐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을 무렵

에는 개신교도들이 국내에 이미 있었다.16)

이렇게 텃밭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국의 북쪽지방 전도여행에 더

욱 자신감을 갖고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창기 선교사역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 주민들이 선교사가 전해주

는 복음을 열심히 경청하고 그를 외국에서 온 손님으로 친절히 대접해 주었으며, 스스럼없이

그리고 열심히 그가 가져간 책들을 구입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특징은 지금까

15) 앞 책, 122-123쪽.

16) 백낙준, 앞 책,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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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계속되고 있다. 북부지방 전역에 걸쳐서 분명하게 드러난 점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복

음의 씨앗과 배포된 책들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과, 효과적인 사역의 기회가 다른 어떤 곳에

서보다도 이 지역에서 더욱더 많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이 그 지역의 다른

마을에 책을 배포하고 판매하는 일에 참여했고, 선교사들의 노력도 주로 그 쪽에 맞추게 되었

다. 그래서 그들의 순회여행은 거의 북쪽으로만 향하게 되었다. 선교의 문의 가장 활짝 열린

곳은 의주였는데, 한번은 인근에 있는 마을과 시골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모여

들어 정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17)

한국인의 품성에 대한 긍정적 신뢰와 한국인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교

회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고 믿는 자주자치정신이야말로 언더우드가 초기

단계 때부터 지녔던 교육정신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민중에 대한 신

뢰를 그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다소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심지가 견고한 것이 한국인들의 특징이

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이 처음부터 회심자들의 특징으로 드러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18)

한국인은 중국인만큼 냉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만큼 변덕스럽지도 않다. 그들은

옹고집과 같은 무분별한 보수적 성향이나 변덕스럽다고 할 만큼 쉽게 순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냉정하게 비교 검토하여 만일 정말 좋은 것이

라고 판단될 때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신앙과 전통을 경솔히 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

서 기꺼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처럼 미신에 매여

있지 않으며, 그들의 옛 종교에 빠져있지도 않고, 과거의 전통을 맹신하지도 않는다. 반면 일

본사람들처럼 무조건 모방하거나 따라하지도 않는다.19)

언더우드는 그의 사업 초기부터 교육기관 설립계획을 갖고 노력해왔지만 중기까지도 스

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큼 교육사업이 진척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교육사업의 필요성과 교회와 목회자들을 교육시켜야할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도사업이 그들에게 워낙 과중하였

기 때문에 마땅히 교육적 필요가 요구하는 만큼의 모든 역량을 기울일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전도사업의 기회가 확장되고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

사역 외에 선교사들이 또 다른 힘을 기울여야 하는 기독교학교를 세울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

이다.20)

그랬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학교들이 선교사들의 노력보다도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

력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그 교육의 결과가 대학으로까지 이어져야만하며 그 일에는 선

교회의 적극적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17) H. G. 언더우드 저 (한동수 역), 앞 책, 154쪽.

18) 앞 책, 155쪽.

19) 앞 책, 55쪽.

20) 앞 책,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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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독교학교의 설립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소래에 있는 작은 교회는 바로 이 점에

서도 다시 본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회 초기부터 그러니까

예배당을 짓기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인 교사를 채용한 교회부설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기

독교 교과서를 제작하여 공급하는 일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반

교과서에서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이렇게 열악하게 시

작한 기독교교육이지만, 이제 우리의 목표는 교회의 크기를 불문하고, 모든 교회가 각각의 부

설학교를 세우고 운영경비를 스스로 충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에 한 선교회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337개의 교회부설학교(주로 남학교이기는 하지만)가 설립되었으며, 그중에

334개의 학교가 운영경비를 전적으로 스스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21)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사역이 결국 자신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교육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충당하기를 원했으며, 현재 선교회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

로 훌륭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선교회는 이에 덧붙여 이러한 중․고등학교 교육이 대학

교육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한국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도 이미 준비를 시

작하였다. 이 모든 사역을 진행하면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교육제도가 한국을 위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로 이어지는 하나

의 교육과정이 일차적으로 교회와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의 입학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선교적 차원에서 보면 오히려 그들을 입학시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22)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04년 2월 18일자 편지에서, 한국교회가 단계적 성장과정을 거쳐

완전히 독립적인 교회가 되게 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교육을 강화하여 목회지도자들을 길러

내서 그들에게 의결권을 주어 교회운영에 함께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것으로 보아 초

기단계를 지나자마자 신학교육을 비롯한 본격적 교육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904년 9월에 선교사들은 교회 등에서 설립한 기관을 통솔하고 서로 연결을 가져야 효과적

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견지에서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언더우드를 회장으로 추

대했다.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 사무소를 두어 각종 교회학교를 관리하고 한국정부와 연락

을 취하는 일, 교회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술어의 통일을 꾀하는 작업 등을 진행했다.23)

언더우드가 한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처음 구상한 것은 고아원학교를 운

영하던 때부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8년 9월 8일 그는 주한 미국공사를 통

해 한국정부 앞으로 대학설립허가를 요청했다가 허락을 얻지 못했던 적이 있

다.24) 그러나 그를 포함한 선교사들은 언젠가는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1906년 1월 16일자 편지에서 을사조약으로 말미암은 한국

인들의 치욕감을 교육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현재 한국에서의 교육은, 특히 선교사들의 감독 하에 있는 교육은 상당한 반동

력을 받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보다 좋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 나라 위에 내려앉아 있는 이 치욕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국 사

람들은 점점 더 많이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21) 앞 책, 128쪽.

22) 앞 책, 129쪽.

23) 이광린, 앞 책, 221-222쪽.

24) 이광린, 앞 책,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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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기(1910-1916) : 대학설립과 삶의 마감기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에 따라 외국선교사들에게

도 많은 제재가 가해졌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선교사업을 추

진해 나갔다.25) 이때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 간에는 대학설립 위치 문제에서 의

견이 갈라져 있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 등은 서울에다 세우기를 바랐고, 다른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은 평양을 원했다. 심지어 그가 속한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의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호주장로회 및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주재 선교부에서도 언더우드에

반대했다. 언더우드는 종교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인문사회 계통의 넓은 학문을 교수해야

되며, 서울이야말로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니 훌륭한 교사, 교재, 강의 등은 서

울에서 다 얻을 수 있는 이점이지만, 이런 이점 중에는 평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서울에다 대학을 세울 것을 원했다.26)

언더우드는 1912년 봄에 몇 개월의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갔을 때 서울에 세울

대학문제에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과 몇 차례 협의한 바가 있는데 한국에 있는

선교회의 반대가 심한 마당에, 선교부와 선교회에서 분리된 독립적이고 초교파

적인 대학을 세운다면 자금을 지원해 주겠으니 계획을 추진해달라는 강력한 요

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되면 실질적으로 선교본부와 선교회에서 분리되는 것

이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언더우드는 대학이 모든 선교의 깊은

관심사가 되기를 바랐으며, 그들 모두가 돌보고 함께 나누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

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쉬운 길을 피하고 거칠고 험난한 언덕길을 택했다.”27)

언더우드타자기 회사를 경영하던 그의 형은 미국에 머물면서 사업을 함께 하

자고 권하면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서 그

를 반대하는 선교회 일부에서는 그가 사직하는 것을 반기리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한국에서의 사업을 지

금 그만두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열린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그

는 그 모든 제안들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부인 릴리어스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그러한

제안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잠시라도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선교사업은

십자가이기도 했지만, 생명이자 기쁨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생명이 지속되는 한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28)

그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의 외아들(원한경)이 모교인 뉴욕대학을 졸업했

고, 아버지를 따라 선교사업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25) 이광린, 앞 책, 239쪽.

26) 1912년 12월 23일자. H. G. Underwood (김인수 옮김), 언더우드목사의 선교편지(1885-1916), 장로회신학대학

교 출판부, 2002, 536쪽

*앞으로 편지 인용은 연월일자나 ( )속에 쪽수로 표시함.

27) L. H. 언더우드 (이만열 옮김), 앞 책, 294쪽.

28) 앞 책,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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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모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모교에서 두 번 명예박사학위

를 받은 셈이 된다. 1901년에 첫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명예신학박사를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29) 또 그는 이 여행에서 그의 형으로부터 대학설립을 위하여

52,000달러의 기금을 희사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몇 달 뒤에 그의 아들도 미국장로

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돌아왔다.30)

1912년의 미국 방문은 그의 일생 중 언더우드 자신은 물론 언더우드 가문의

교육정신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의미 깊고 중요한 한 대목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그가 내린 큰 결단의 의미 때문이다.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남․북감리

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와의 연합으로 서울에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

을 설립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온갖 난관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

장 크고 중요한 난관은 그를 아끼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형으로부터의 강력하고 매력적인 제

안들을 외면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때 내린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결단이야말로 그의

교육정신, 곧 “모든 대학들이 그 기점을 두게 될, 초교파적인 기독교 종합대학설립”31)의 꿈

을 실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외아들 원한경이 그의 모교를 졸업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을 알게 된 사건의 교육정신사적 의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받

아드린 김규식과 함께 자라면서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고 배운 원한경의 선택이야말로 어쩌

면 원두우의 교육정신의 첫 계승이며 결실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언

더우드의 교육정신을 논함에 있어 학교나 교과서 같은 제도교육의 범위를 넘어서는 넓은 의

미의 교육을 전제해야하는 것도 그의 교육의 결실이 학교나 교회의 설립에 국한하여서만 맺

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그의 형 존(John T. Underwood)의 재정적 지원의 현실적 의미이다.32) 그가 이때

형으로부터 희사 받아 가지고 돌아온 52,000달러라는 거금이 있었기에 대학설립이 그만큼

힘차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09년에 미국 선교본부에서 대학설립비로 청구한 1만

달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해에는 서울에 대학을 세우는 일조차 보류하기로 결

정하기까지 했던 사실33)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확보한 기금의 규모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

겠는 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앞에서 말한 바,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을 원두우만이 아니라 언더우드 일가의 교육정신으

로 넓게 생각하는 관점의 구체적 근거들 중 일부를 그의 1912년 미국 방문 대목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1912년은 언더우드의 삶에서 교육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9) 앞 책, 295쪽.

이광린, 앞 책, 240쪽.

30) 이광린, 앞 책, 240쪽.

연세대학교 백년사 편찬위원회, 연세대학교 백년사 1, 연세대학교 창립 백주년기념사업회, 1985. 59쪽.

31) 1910년 7월 19일자 편지. (507쪽)

32) 그는 그 후에도 1918년에 연희동으로 학교를 옮길 때 새로 지은 건물 건축비용 5천불을 기부했고, 1912년

10월에 원한경이 초석을 놓은 언더우드홀의 건축비 10만달러를 그의 동생에 대한 기념으로 기부했다.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pp. 136-137.

33) 앞 책,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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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더우드는 평생소원이던 대학을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

적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원한경이 요약 설명한 것처럼 “여러 가지로 어려운 한국 상황에서 오랫동안의

격렬한 업무와 또 설사를 자주하는 동양 풍토병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있었지

만, 몇 해에 걸친 동료 선교사들과의 의견충돌, 그리고 그의 동기와 성격에 대한

공격은 그를 슬프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마감을 재촉했다.”34)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빨리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가 대학을 만들고 나서 1년 반밖에 더 살지 못한 책임의 일부분은 언더우드

자신에게도 없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부인이 표현

한 것처럼 “영국 불독처럼 한 번 붙들고 늘어지면 끝까지 놓지 않는”35) 그의 성

실하고 집요한 성품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심신이 지친 상태의 그가 요양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말을 새로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간 것이 그 증거다.

설사 당시 일제의 교육령에 따라 대학에서 강의하려면 일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

문36)이라 하더라도 굳이 일본에까지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성품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

다. 한국에 있으면 방해받는 다른 일들 때문에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어렵다고 판

단했기 때문이겠지만, 20대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1년 만에 한국어로 강의하던 젊은 나

이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심신조건이 결코 같은 상태일수가 없을 것임을 몰랐을 리 없

었을 터인데도 그런 결정을 한 것은 그의 불독 같은 성품 탓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

구나 일본에서 하루 서너 시간의 정규수업을 받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두 명의

교사에게 하루 아홉 시간씩 일본어를 배웠다는 사실37) 이외에도 일본에 와 있는

새 선교사들과 일본교회 및 일본 YMCA 지도자들, 일본 수상을 비롯한 주요 인

사나 단체들과 만나 온갖 종류의 빈번한 접촉을 계속한 그의 생활 방식은 56세

그의 나이라면 정상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명을 단축하는 무

모한 행동이었다고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언더우드의 교육정신 속에서도 가장 언더우드다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같은 열정과 불독 같은 집요한 투지와 용기는 개척선교사로서의 그의 신앙의

당연한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점이 있다. 수많은 선교사

들 중에서도 언더우드는 유별나다 하리만치 전투적이고 초인적인 용기와 역동

성을 발휘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사일 뿐 아니라 최초로 북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체험한 탐험가이었다. 그는 권총을 들고 고종의 신변을 밤새워 지킨

무장경호원이었다. 선교사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그 일을 맡을 만큼

그는 남달랐던 것이다. 그가 일생을 통해 실천하고 성취한 사업의 종류만 해도

일반적인 선교사의 범주를 크게 벗어난다. 그는 탐험가이고 의사이고 교수이고

강연자이고 감독이었고 목수였고 연관공이었으며, 왕의 경호원이었고 외교관이

34)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p. 135.

35) 1894년 5월 28일자 편지, (308쪽)

36) L. H. 언더우드, 앞 책, 322쪽.

37) 앞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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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신문과 잡지 발행인이었으며, 사전편찬자였고 문법학자였다. 성경번역가였

고 찬송가편찬자였다. 그리고 이 나라에 최고 수준의 초교파적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한 대학설립자이다. 그의 손자 원일한은 “우리 언더우드 집안은 어딘지 ‘써

클’ 밖에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 자라나면서 나는 막연하나마 우리 언더우드

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38)면서 자기 가문에 대한 긍지를 피력한 적이 있

다. 언더우드가의 남다름은 바로 원두우의 삶의 과정에서 들어난 원두우만의 인

생행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굳센 믿음과 넓은 사랑

으로 용맹 정진한 그 걸음걸이를 통해 뿌려지고 심어진 교육정신이 남달랐던 데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교육정신은 원천적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심에서 비롯된“39) 것으로, 자기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활해야 한다.“40)고 믿는 언더우드가의 신앙자세

의 바탕이기도 하다.

38) Horace G. Underwood 지음, Michael J. Devin 편집, 주장돈 번역,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나의 한국

생활을 회고함-,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82쪽.

39) 앞 책, 305쪽.

40) 앞 책,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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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언더우드 교육정신의 특징

언더우드 1세 원두우의 삶에서 씨 뿌려지고 싹이 트기 시작한 언더우드의 교

육정신은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삶과 교육실천을 통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면

서 연희의 교육정신으로 자리잡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1934년 10월 12일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취임사 속에서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은 구체적으로 집약 정리되어 연

희교육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 먼저 저는 이 기회를 위하여 감사합니다. 외국인인 저로서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조선

의 형제들과 이 땅에서 일하게 된 이 기회를 위해서 감사합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저로서 해외

에 계신 여러 친구들의 아낌없이 주신 물질의 힘으로 설립한 이 기관을 사용할 이 기회를 위

해서 감사합니다. …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에 강화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으신 단군의 종교적 정신을 위해서

감사하며… 천여 년 전 신라가 나은 최치원과 같은 현인들과 그의 뒤를 이어 나온 유명한 선

생들을 위해서 저는 감사합니다.

2천년 전에 동양에 나시사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 학교의 이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

도를 위해서 감사하며 전 교장 두 분의 성의로우신 봉사와 크신 포부 또는 본교 교직원 제씨

의 여일하신 노력, 본교에서 나아가서 현하반도 각지에서 활동 중에 있는 반천의 졸업생 여러

분과 현재 이 자리에 있고 앞으로 조선의 주인공이 될 학생제군! 이들과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저는 참으로 감사하는 바이올시다.

우리 연희의 고상한 이상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또한 저의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이 이상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만한 것이니 교육을 위하여 우리 교문을 두드

리는 수백 청년에게 우리는 동양과 서양에서 발전된 최량의 교재를 선택하여 이 학생들이 사

회에 나아갈 때에 반듯이 있어야할 일반 도구를 주려는 것이며, 현재를 판단하기 위해서 필요

한 인류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모든 시대와 여러 지방의 예지를 주려는 것이며, 모든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자신력을 얻기 위해서 각자의 자제력을 넣어주려는 것이며, 모든 교회와 계급과

민족에게 대해서 가져야할 협동적 태도를 발전시키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신의 지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지식에 의해서 얻은 사회적 의무감을 발전시키려는

것이며 동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기의 부분을 다할 수 있는 청년을 길러 조선사회로 내어

보내려는 것이며, 반만년 조선 문화 창고에서 무엇이나 조선인으로서 기억할만하고 명심할만한

것을 취하며 또한 금일에 사용될만하고 현대 민중에게 줄만한 모든 것을 취택하려는 것이며,

본교의 모든 설비와 도구를 이용하여 현대의 문제를 연구하게 하며 따라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일반 물질, 사회 및 정신적 문제에 해결을 주는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의 행

동 및 원리, 학생 및 교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여하히 밀접한 연락을 향유하거나 여하히 거대한 건물을 소유하거나 여하히 고귀한

명성을 얻었거나를 막론하고 우리는 사람 없이는 목적을 달할 수 없고 목적을 달하려면 우리

는 두 발로 서고 걷고 말할 줄만 아는 동물보다 가장 높고 참된 의미의 인물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또한 여하히 고귀한 학위나 큰 지식을 소유했음을 물론하고 우리 목적에 동감하지 않

고 그 달성을 위해서 전심전력하려는 교원이 아니면 우리는 요치 않으며 소나무 아래서 꿈이

나 꾸려는 학생이나 4․5층 양옥에 정신을 잃고 수간두옥에 들어갈 줄 모르는 학생을 우리는

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교수나 학생을 불문하고 깨어서 자지 않으며 몽상보다 계획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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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포의 사는 집이면 양옥이거나 초가를 물론하고 내 집으로 여길 줄 아는 인물을 요구합

니다.

우리는 서양인으로 이곳에 오는 것을 요구치 않고 조선사정에 깊이 동정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온 이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경기도나 평안도나 경상도나 기타 어느 도에서든지

그 도의 사람으로서 오는 것을 요구치 않으나 3천리 조선강산 어디든지 나가서 ‘저 물은 내 집

앞으로 흐르는 강’이며 ‘저 봉우리는 내 집 뒤에 솟은 뫼이거니’하고 웨칠 줄 알며 어느 고을

사람이나 한 겨레로 맞을 수 있는 인물을 요구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장로교인이

나 감리교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나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사업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이 학교가 이러한 통일적 이상 아래 설립된

것은 그 역사를 아는 이에게 명백히 들어난 사실이올시다. 본교의 설립을 위해서 서양에서 온

사람이 동양에 게신 분과 합했고 이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외국에 있는 네 교파와 조선 내

에 있는 장․감 양 교회에서 협조를 받았습니다.

옳습니다. 그 재료가 어느 지방에서 산출되었음을 물론하고 이를 한 큰 건물 안으로 통일시

키며 각 도로부터 오는 청년을 받아서 자기 민족이나 외국인의 산출한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

며 전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과 그 나라 방언으로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게 하며

각 교파인을 받아서 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나니 이렇게 사람과 종교의 교재를 결합시킴으

로서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연희의 이상입니다.

…”41)

원한경 교장의 취임사 속에서 연희교육의 이상으로 제시된 언더우드 교육정

신의 골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을 듯싶다.

첫째 :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

침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사해동포주의가 연희교육의 정신적 토대이다.

둘째 : 동서양과 인류역사의 모든 경험에서 가려 뽑은 가장 좋은 교육내용으

로 학생들에게 지식과 기능, 예지, 자신감, 자제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 연희교육

의 실천이다.

셋째 : 다양성을 존중하는 협동적 태도와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기독교정신

으로 봉사 헌신할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연희교육의 목적이다.

넷째 :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희교육에서는 교파나 출신지역이나 인

종의 차이를 불문하고 헛된 명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이 민족의 현실에 대해 마

음 깊이 느끼고 한국의 자연과 한민족의 삶의 현장에 동참하기 위해 전심전력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된 참된 사람, 곧 실천적 능력인을 교수와 학생으

로 원한다.

다섯째 ; 민족 인종 국가 지역 소속교파 같은 사람들의 출신성분과 배경의 다

양성을 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결합함으로써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연희교육의 이상이다.

41) 延禧專門學校 同門會, 「延禧同門會報 第三号」, 昭和 10年(1935), 2月 22日字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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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에 비춰본 오늘의 연세교육을 위한 성찰

1. 언더우드 교육정신의 형성 배경

원한경이 취임사에서 제시한 연희교육의 ① 정신적 토대(민족주의 정신과 기

독교 정신), ② 실천(가장 좋은 교육), ③ 목적(다양성 존중하며, 사회적 책임감

갖고, 헌신하는 삶의 인간 배출), ④ 필요한 인간상(실천적 능력인), ⑤ 이상(기독

교적 봉사정신의 세계인)은 비록 원한경 자신이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

국의 교육상황을 근대 교육학의 방법과 이론으로 연구 정리한 최초의 한국교육

사42)를 저술했을 정도의 뛰어난 교육학자였다고 할지라도 원한경 당대의 경험과

철학만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내용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원한경은 그의 선친

에 비해 덜 전투적인 성품이었던 것 같다. 그 대신 포용성과 영민함을 지닌 지

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품으로 선친의 이상을 승계하여 실현하는 후계자로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선친보다 더 깊이 한국의

자연과 역사 문화에 대해 체험탐구하고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선친처

럼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영한사전을 출판했으며 한국관련 서양문헌목록을 최초로 정리했

을 정도로 학자적 역량을 지닌 인물이다. 더구나 문헌연구만이 아니라 한국의 산하와 바다

를 탐사하고 한국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밀착 연구하는 현장연구가로서의 혜안도 뛰어난 바

있다. 그가 한국의 배와 바다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국의 선박과 이순신의 거북

선 및 해전내용을 연구해 발표한 책 「한국의 선박」43)에서는 일찍이 그의 선친이 이순신과

거북선을 서양에 소개한 것44)보다 훨씬 전문적인 내용의 연구와 조사결과가 실려 있을 뿐

아니라,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 민중들의 습속과 신앙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

다. 원한경의 한국무속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오늘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놀라

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현장조사를 토대로 한 살아있는 민속보고서라

고 할만하다. 그는 바다와 관련된 무속연구만 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수렵 안내서」

에서는 한반도에 분포되어 살고 있는 야생동물의 분포와, 동물들 중 몇 종류에 관련되는 약

재를 소개했는가하면, 산신제 같은 한국의 산악 수렵문화와 관련되는 민속신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45) 그는 심지어 손수 설계한 배 「검은 오리」를 제작하여 가족들과 같

이 타고 서해안 일대를 항해했는가 하면, 백두산을 탐험하고 천지에 배를 띄워 수심 측

량을 시도했을 만큼 그가 매료된 한국의 산하와 자연,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폭넓

고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니고 산 사람이다.

그러한 원한경이기에 그가 제시한 연희의 교육정신과 이상이 그 자신의 경험

42)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43) H. H. Underwood, Korea Boat and Ships, Seoul : Yonsei University Press, 1979.

44) H. G. 언더우드, 와서 우릴 도우라(The Call of Korea), 57쪽.

45) 손인수, 앞 책,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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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사고의 소산 일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원

한경의 그러한 생각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 곧 그가 지닌 경험과 관심과 신

앙과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자연과 인간과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이

해와 따뜻한 애정은 그의 선친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서만 설명이 가능할 수밖에

없을 성 싶다. 그러니까 원한경의 취임사 내용은 원두우의 교육정신을 이어 받

은 원한경 만이 엮어낼 수 있는 연희교육의 정신과 이상의 구체화작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원한경에 의해 묘사된 연희의 교육정신과 실천내용에 관련될 수 있는

구체적 사안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도전은 원한경 이전시대에 원두우에 의해서

이미 제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연희교육의 정신적 토대 중 하나인 민족주

의는 언더우드가 선교 초기부터 실천한 교회의 자립운영정책과 한국 민중에 대한 존중과 애

정, 그리고 한국인과 함께 주님의 식탁에 앉아야한다고 믿는 그의 남다른 선교정신이 연희

교육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94년 1월 4일자 편지에서 보면 당시 선교

사 사회의 분위기는 병에 걸릴까봐 한국인들과 성찬식을 같이하려 하지 않을 정도이었으니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은 처음부터 남달랐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 수준의 교육 또한 언더우드가 대학을 세울 생각을 할 당시부터의 꿈으로서, 그가

그만큼 한국인들의 자질과 가능성을 일찍부터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갖게 된 교육실천정신이

다.

교육목적으로써의 다양성 존중, 사회적 책임감, 헌신 등 역시 언더우드 자신이 경험을 통

해 확신하게 된 인간성의 취약한 점들을 개선목표로 설정한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편한 것만 찾고 힘든 곳으로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말하

는 것을 보면서46), 그리고 교파와 지방색으로 나뉘어 다투는 한국인 사회와 일부 선교사들

의 행태를 경험하면서 원두우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배운 것을 모두 전파해야 하

며, 크리스찬의 신앙은 그의 일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기에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활해야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예수 그리스

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심에서 비롯된다.”고 보는47) 다양성 존중과 사회적 책임, 기독교적 헌

신을 교육목적으로 하는 언더우드가의 교육정신을 속으로 길러왔고 그 정신이 그의 아들로

또 손자로까지 이어졌을 뿐 아니라, 연희의 교육목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보고

싶다.

원한경은 그가 교장 취임사에서 밝힌 연희교육의 목적과 이상을 달성키 위해

문자 그대로 이 땅의 모든 대학이 지표로 삼을 최고의 대학을 만들려고 전심전

력했다. 그는 그의 선친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인의 지적 능력과 거대한 가능성

을 확신하고 있었기에48) 연희전문의 교육방침을 한국인 교수가 한국말로 한국

학생들에게 한국인을 위한 최선의 교육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실천했다. 그 뿐

아니라 언젠가는 이 학교를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교육

46) 1894년 3월 2일자 편지.

47) 원일한, 앞 책, 305쪽.

48)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of Korea, 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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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인사 보직 행정에서부터 전개했다. 선교사들이 관리하던 학교 회계사무를 한

국인 교수에게 맡기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학교 운영을 부교장인 유억겸 중심체제로 바꿨는

가 하면, 교내의 주요 직책과 보직을 한국인 중심으로 하는 등 학교의 운영주체가 한국인이

되게끔 바꿔나갔다.49) 이 또한 한국인의 교회는 한국인의 손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

영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의 선친의 교육정신을 연희전문에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희교정에서는 국학의 이름으로 역사․철학․문학․사상․국어․민속․종

교․경제․사회 등 한국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발굴 천착하고 정리하는 한국

학연구의 선구적 작업들이 진행되었으며, 연희교정에 모인 당대의 석학들은 민

족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신앙 같은 다양한 정신적 사상적 종교적 배경에도 불구

하고 화목한 동료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내용

으로 가장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여 민족과 역사를 위해 봉사할 인재로 기르는

일에 진력했던 것이 원한경이 부교장과 교장으로 일하던 1928년부터 1940년경까

지의 연희교정의 모습이다.

당대의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학자들을 망라한 교수진을 갖출 수 있

었던 것은 원한경이 언더우드의 교육정신과 학문적 소양 및 지도자로서의 영민

함과 포용성으로 학교를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

에서부터 찾아온 종교 계층 교육수준의 배경이 다양한 학생들을 받아들여 조국과 민족의 장

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려는 정신과 가치관 생활태도를 길러주는 연희교육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천적 능력인으로 자라고 있는 연희의 젊은 인재들을 보듬고 아끼는 원한경의

교육적 이상주의와 사랑이 버팀목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1930년

대 후반에 연전문과생이던 선친으로부터 그러한 원한경의 인품을 말해주는 일

화를 직접 들은 기억을 갖고 있다. 보성전문과 운동시합을 끝낸 축구부(또는 야

구부?) 학생들이 기숙사 방안에서 문을 잠근 채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노는 것

을 알게 된 ‘똥배’라는 별명의 사감교수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야단을 치자 학생

들은 방안에서 사감의 별명을 부르고 놀려대면서 문을 안 열준 채 술에 취해 잠

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학생들이 밖으로 나간 후 사감은 방안에 흩어져 있는 맥

주병들을 모아서 상자에 넣어들고 그날의 교직원 회의석상에서 그 사실을 공개

고발했다. 그때에 연전에서는 학생의 음주 사실이 적발되면 가차 없이 제적하는

엄한 규칙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발내용을 다 들은 원한경 교장이 “운동부 학생

들이 술 마셨다는 증거가 있습니까?”하고 묻자 사감은 빈맥주병들을 증거로 제

시했다. “그것들은 빈맥주병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엊저녁에

운동부 학생들이 맥주를 마신 증거입니다.” 원 교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마치 재

판관의 판결문 같은 선언을 했다. “빈맥주병은 술 마신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맥주병에다 석유도 담고 간장이나 기름도 담는 것이 보통인데 어

떻게 빈맥주병을 술이 담겼던 증거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원한경의 국량과

인품을 짐작케 하는 일화라고 하겠다.

49) 손인수, 앞 책,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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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의 의미

모든 현재는 그 자체의 과거를 지니게 마련이다. 현재가 곧 과거는 물론 아니지만, 과거

와 단절된 채 성립하는 현재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과거의 어떤 것을 현재를 만든 원인으

로 보느냐이다. 과거를 어떤 안목과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가 하는 관점의 문제다. 과

거를 보는 관점은 오늘의 현실에서 결정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지나온

어제를 돌이켜 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가에 따라

서 오늘을 있게 한 어제를 보는 안목과 기준도 결정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연세교육, 나아가서는 오늘의 한국교육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는

오늘의 교육상황 속에 처해 있는 자신의 위치와 존재의미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교육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른바 전문

가라면 그가 교육부 장관이든 초등학교 교사든 대학 총장이든 대학 교수든 이 점에 있어서

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 교육 속에서 그대는 왜 그곳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 우리들 모두는 자신만의 대답을 내어 놓아야만 하는 의무를 지닌 채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얼마나 정직하고 진솔한 대답이냐가 문제이지, 맞고 안 맞고는 별개의 문제

이다. 자신의 인격과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고뇌의 경험을 거쳐 찾아낸 대답이라면 내용이

아무리 유치하고 터무니없어도 정직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질문에 대답하려는 우리 연세인들 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늘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가 있는

것이다. 바로 설립자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이 그것이다. 오늘의 우리 시대, 이른바 국경이 무

너지는 세계화 정보화의 무한경쟁시대, 민족․종교․지역․국가간의 갈등과 통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시대, 지구 전체에서나 우리사회 안에서나 경제적 문화적 양극화 다원화 과

정과 동시에 획일화 과정이 격심해지고 있는 시대, 우리 민족의 운명이 총체적으로 변

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우리의 교육은 어느 위치에 있으

며 앞으로 어느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를 점검하고 성찰해 보기 위해 반드

시 필요한 나침판으로 우리에게는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러니 앞에서 정리해 본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을 오늘의 연세교육을 향한 질문 항

목으로 삼아 그 의미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 연세교육에서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민족주의 교육정신이 얼마나 살

아있으며, 기독교적 사해동포주의는 얼마나 살아있는가.

둘째 : 연세교육의 어떤 것이 모든 대학들이 기점으로 삼을만한 최고수준의

교육실천인가? 우리 학교만이 감당할 수 있는 학문연구와 교육실천에서의 강점

은 과연 무엇인가.

셋째 : 학문연구에서나 교육정책수립에서 우리 학교는 스스로 어느 만큼이나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세계 개방적 포용성을 발휘하고 있는가. 우리

학교와 연세인들의 사회적 헌신과 봉사노력은 어느 정도인가.

넷째 : 연세의 교육과 학문연구에서 관념적 탁상공론이나, 선진국 모방이나,

서열경쟁을 위주로 하는 종속적 태도와 가치관으로 연세인의 권위와 명성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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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고 과시하는 유행은 혹 없었나. 우리 학교사람들이 민족의 삶의 현장과 문

화적 전통에 공감하고 참여 봉사하는 일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한 부분은 혹 없

었나.

다섯째 : 연세인들은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 기독교적 봉사를 함에 있어 모

든 대학들의 기점이 된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의 교육, 그리고 그 교육을 있게 한 교육의 역사를 연세교육의 물을 마시면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연세대학의 식구들 모두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곳에 지금 우리는 서 있다. 우리들의 관점과 해석이 다양할수록 기독교 사립 종합대

학으로서의 연세의 교육정신은 활력을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에 나온 질문들마

다에 대해 한 가지로 통일된 대답을 만들어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오늘의 연세

교육의 총체적 변화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관찰하고 이해하느냐의 문제는 연세인 각자의 처

지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3. 연세교육을 향한 성찰과 소감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 경험한 나 나름의 성찰과 연세교육의 정신사에 관련

된 소감을 피력하려 한다.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의 교육적 영향력 실추, 특히 도덕적 권위가 실추되는 참담한

과정으로서의 한국 현대교육사 속에서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서는 교육정신

의 역사가 죽지 않고 살아왔노라!”라고 큰 소리로 당당히 외칠 수 있는 학생과 교수나 졸업

생이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오늘의 오염되고 황폐한 정신문화풍토 위에 홀로 우

뚝 설 수 있는 선비․사표․군자․원한경이 말한 참사람일 것이다. 문화적 정신적으로 궁핍

한 이 시대에는 그런 인격이야말로 재벌 못지않은 정신적 부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런 인격들의 ‘우리 학교’야말로 진정한 부자 학교임에 틀림없다. 캠퍼스나 건물의 크기, 연

구비 수혜액의 과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제일 좋은 또는 유일한 학교로 우뚝 설 수 있어야

‘우리 학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 연희동산이 자랑스런 ‘우리 학교’이

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분명히 그러하다. 그 시절의 우리 학교에서는 문과와 수물과, 곧 인

문학과 기초과학을 토대로 한 위에 상과, 곧 현실 적응력을 기르려는 문화 풍토 위에서 기

독교 정신으로 영혼을 일깨우도록 교육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관료가 지배하는 신식민지적 교육, 신자유주의 시장논리의 척도에

따라 최고를 추구하는 경쟁방법만으로는 지금의 연세대학교는 절대로 제일 좋은 또는 세계

유일의 대학이 될 수 없다고 나는 본다. 인문학적 정신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토대삼

지 않는 교육으로는 연세대학교가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서열경쟁에

몰두해 있는 오늘의 많은 대학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는 보통의 대학이 될

수 밖에 없다. 보통의 대학들 중 한 대학으로서의 연세는 절대로 최고나 유일의 ‘우리 학

교’ 소리를 듣는 학교가 될 수 없다. 우리 나름의 교육정신과 전통을 본령으로 삼아

가장 좋은 교육을 하는 유일한 학교가 되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우리 학교가

토대로 삼아야 할 교육전통의 본령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연세의 민족주의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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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정신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성경말씀은 연세교육

의 궁극적 지표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 나름의 교육정신의 근거도 여기서 찾아

야 할 일이다. 이 교육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실천의 역사에서 우리 학교의

교육전통의 성격과 특징을 정리한다면 바로 연세 국학의 인문학적 전통이다. 인

문학은 시류에 휩쓸리기 보다는 그 흐름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정신을 닦는 학문이

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교육에서는 깊고 넓은 학식 못지않게 예리한 통찰력과 자유로운 정

신을 소중한 것으로 가르친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야말로 연세교육이 기대하는 이상이

될 수 있다. ‘나를 믿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그의 자유

는 진리로 인해 진리로부터 조차도 자유로울 수 있는 참자유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신자유주의로 위장한 문화식민지

쟁탈전의 와중에 민족의 통일시대를 대비하면서 우리 연세가 감당해 내야만 할

역사적 소명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1세기 전에 우리 민족이 수난의 역사에 빠

져들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우리나라가 처한 온

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라야만 감당해낼 수 있는 소명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 본연의 과업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교육이다. 그러니 우리

학교의 교육에서 연세교육만의 전통과 특징이 살아나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학

교에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 진출

해야 한다. 3년 전부터 연세대학교가 교책사업으로 국학연구에 매년 10억여 원

의 예산을 지원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연세국학연구가 생기를 얻어 국내 대학

들의 국학연구를 선도하는 수준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연세교육정

신의 각성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연세인문학 재충전 과

정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 오랫동안 간과되어왔던 민속학과 문화예술 교육

의 활성화가 그것이다. 인문교육과 문화예술을 활성화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연세교육이 세계 유일의 개성과 위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고 투자이다.

이미 정년퇴임을 한 이 사람에게 우리학교의 설립자이신 언더우드의 교육정

신을 연구하여 발표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허락해 주신 연세대학교 당국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 합니다는 말씀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