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수 교수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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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교수의 글쓰기 특강

서정수 교수의 글쓰기 특강

글쓰기 특강은 서정수 교수(한양대 국문과, 국어정보학회 회장)가 펴낸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문장력 향상의 길잡이'(한강문화사), '단락형성의 원리와 방법'(정음문화사), '글쓰기의 기본이론과 서사문/ 기술문 쓰기'(정음문화사), '논리적인 글쓰기--설명문과 논술문(정음문 화사)' 등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한국문장교육 학회의 회장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 서정수 교수는 단락이론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이고 짜임새 있는 글쓰기의 보급을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아비소통신의 청소년세계(YOUTH)에 연재하는 서교수의 글쓰기 특강은 여러분의 문장 수준을 한층 높여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청소년세계(YOUTH)

글쓰기 특강1:국어정보학회 글쓰기 특강을 시작하며

무릇 산마루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그 가운데는 바른 길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 바른 길 곧 좀더 확실하고 빠른 길을 찾아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글을 쓰는 데도 꼭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부터 글을 짓는데 반드시 알고 익혀야 할 바르고 빠른 길을 찾아서 그 길로 곧장 내닫도록 해야 한다.

첫째로 글을 쓰려면 왜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지 그 목적을 바로 알 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힘을 깊고 알차게 가꾸기 위 해서 글을 쓴다. 글은 오랫동안 간직되고 널리 전달되는 것이므로 그 만한 값어치가 있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좀더 새롭고 남다른 알찬 내용을 엮어 내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 고심을 하기도 한다. 더구나 글을 쓸 때는 대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차분 히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생각을 다각도로 가다듬어갈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우리의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게 되는 것 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또 한 가지 목적은 우리의 생각을 널리 교류시킴으로써 삶과 문화와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글은 개인의 생각을 가 다듬어서 알차게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생각들을 서로 주고받게 함으로 써 한층 더 깊고 참신한 생각을 낳고 가꾸어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글을 통하여 만나고 부딪치는 과정에서 끝없이 옹글차고 값진 사상으로 꽃피게 된다. 일찍이 알랑은 그의 <문학론>에서 "가장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남의 생각의 좋은 점을 따와서 그것을 한층 발전시키는 이이다"라고 하였다. 케네디 대통령도 "우리들이 무엇보다 도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각의 계속적인 흐름"이라고 갈파하였다.

이제까지 우리는 앞선 이들의 글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공동의 문화 마당에서 많은 일깨움을 받으면서 자라 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남들에게 문화적으로 빚을 진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계속 공부를 해서 생각과 지식이 깊어짐에 따라 그것을 글로 표현해서 문화의 공 동 터전에 좀더 능동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이제까지 진 빚도 갚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글솜씨를 기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글을 한 편도 못 쓰는 사람은 인간 문화의 공동체에서 낙오 될 뿐 아니라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글을 잘 쓰려고 하면 우선 글짓기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 하였듯이 시작을 해야만 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시작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무슨 일이든지 첫발을 내어 디디기가 마음 먹은 것처럼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우리는 누구나 얼마만큼은 보수성 과 조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는 글쓰기를 꺼려하고 시작을 미루어 오는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저와 머뭇거림의 마음을 깨뜨리고 붓을 잡고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하는 "용기"가 없으면 글 솜씨는 언제까지라도 닦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려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다는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글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대개 "글은 소질이 있는 사람이나 전문가들만이 쓴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있고 글자를 익힌 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마련이다. 글 이란 문자 언어 곧 글자로 적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싶을 때 상대방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다는 마음가짐으로 붓을 들고 종이 위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간다면 글이 된다. 물론 좀더 알차고 짜임새 있는 글을 쓰려면 그 기본 요령을 익혀야 하겠지만 자기의 생각을 가볍게 나타내는 짤막한 글은 언제라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또 한 가지 열쇠는 처음부터 명문이나 미문을 꿈 꾸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글이란 문학가나 전문 문필가들이 쓰는 이름난 글이나 아름다운 문학적인 글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 생활 속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담아서 나타낸 글이 그런 이름난 글 보다 더 소중하고 알뜰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글이라고 하면 문학적이거나 칭찬을 들을 만한 멋있는 글을 생각하는 그릇된 경 향이 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첫술에 배부르랴" 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글을 시작하여야 한다.

셋째로 글을 짓는 데는 그 기본기(基本技)를 튼튼히 익히고 다져야 한다. 좋은 운동 선수가 되려면 처음부터 기본기를 잘 닦아야 한다 고 한다. 그래야만 큰 선수로 성장할 수가 있고 그렇지 못한 선수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기본기를 닦는데 열성을 다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데도 그 기본기를 닦지 않고 남이 쓰는 글을 보고 대강 그 요령을 알아 가지고 글을 써서는 발전이 없다. 그런 사람의 글은 늘 한계가 있고 또 그 짜임새가 허술한 것이 보통이다. 우 리는 이제부터 글짓기의 기본기를 제대로 닦아 보도록 함께 힘쓰기로 한다.

글의 기본기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주제 중심으로 글을 쓰는 기본 원리와 방법을 철저히 익힌다.

2) 글의 중간 조직체인 단락(문단)을 바탕으로 짜임새 있게 글을 쓰는 솜씨를 닦는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쓰는 이가 최소한도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기틀이다. 낱말이나 문장을 알맞게 골라 쓰는 등의 초보적인 능력을 갖춘 이로서 위의 두 가지 기본 솜씨를 잘 익히고 닦아 놓으면 어떤 글도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기본기를 닦지 않고 쓰는 글들이 많은데, 우 리는 그런 잘못된 길을 걷지 않고 먼저 이 기본기를 철저히 닦아 나가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국어정보학회의 글쓰기 특강은 그러한 기본기를 가장 빠르고 바르게 몸에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최대 역 점을 둘 예정이다. 따라서 글쓰기 특강을 철저히 익히는 이는 글쓰기 의 기본 솜씨는 물론이고 사고력과 논술력 향상에도 뚜렷한 향상을 보 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글쓰기 특강2:단락이란 무엇인가?

단락 : 글의 중간 조직체

(1) 단락이란?

단락(paragraph) 또는 문단이란 문장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글의 중간 조직체이다. 우리는 앞에서 일상 대화나 편지 또는 수필이나 논문 따위가 많은 문장들이 이어져서 이루어진다 하였다. 그런 글들을 이루는 문장들은 관련 깊은 것들끼리 한데 어울려 작은 조직체를 이루게 마련이다. 곧 문장들은 아무 관계도 없이 따로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적으로 관계가 있는 문장들끼리 한 묶음씩 작은 조직체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장들의 묶음으로 이루어진 조직체를 우리는 단락 또는 문단이라 부른다.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는 모습을 보자. 무엇보다도 어떤 내용의 문장들이 한데 어울리고 있는지를 눈여겨 살피자.

[보기 2.1]

민수는 부지런하다. 그는 아침 여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방안 청소를 한다. 세수를 하고 바깥에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맨손 체조를 한참 동안 한다. 이윽고 그는 비를 들고 집 앞 마당과 길을 쓴다. 다시 방안에 들어 와서는 신문을 읽고 시간이 남으면 어제 읽던 책을 펴 든다.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는 가방과 전철에서 읽을 책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이런 아침의 일과만 보아도 그가 부지런한 젊은이라는 것을 알만하다.

위 글은 모두 7개의 문장들로 짜여진 단락인데 그 문장들은 모두 "민수의 부지런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로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단락이란 이렇게 "한 중심되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유기적으로 짜여지는 한 묶음의 문장들을 가리킨다.

단락이란 결국 한 토막글이다. 그 자체 안에 중심 사상이 있고 그것을 받들어 나타내는 문장들이 모여서 이루는 한 토막의 글이다. 그것이 비록 여느 글처럼 길고 복잡하게 되이 있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서 일정한 짜임새를 가진 작은 글인 것이다. 이런 짧은 글도 실제로 쓰이는 수가 있다. 쪽지 글이나 간단한 설명서나 시험 답안지 같은 데서는 한 단락만으로 독립되어 쓸 수가 있다.

그러나 뒤에서 차차 보는 바와 같이 일반 글은 대개 여러 단락들이 모여서 이루어지게 된다. 각기 한 중심 사상을 가진 단락들이 모여서 더 큰 주제를 떠받드는 방식으로 좀더 긴 일반글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조직체에서 계나 과와 같은 하부 조직체가 모여 더 큰 조직을 이루는 것과 같은 방식이 된다.

단락들이 한 데 어울려 일반 글을 이루는 방식은 뒤에 가서 다루게 될 것이며 그럴 때에는 단락은 "글속의 글이"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가 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단락을 한 독립된 토막글처럼 여기고 그 짜임새나 기능을 살피게 될 것이다.

(2) 단락의 짜임새

단락은 일반으로 중심 문장과 뒷받침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중심 문장은 한 단락에서 다루어질 내용적 핵심을 나타내는 문장으로서 소주제문(topic sentence)이라고 부른다. 위 보기에서는 맨처음의 "민수는 부지런하다"라는 문장이 중심 문장 곧 소주제문이다. 이런 소주제문은 대개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뒷받침문장 (supporting sentence)은 이 소주제문을 여러 가지로 떠받들어 펼치는 문장들을 말한다. 위 보기에서 중심 문장 밖의 모든 문장들이 뒷받침문장이다. 이들은 여러 개가 한 묶음이 되어 소주제문을 떠받들어 펼친다. 소주제문을 되도록 자세히 풀이하거나 받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락의 짜임새를 구체적인 실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보기 2.2]

[소주제문]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뒷받침 문장들] (1) 왜 때가 되기도 전에 하늘로 날아가는가? (2) 미래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괴로운 환상들에 사로잡힌다. (3) 그들은 지구가 저 끔찍한 "버섯 구름"으로 덮이고, 방사선으로 얽히며, 인구 폭발로 갈기갈기 파헤쳐질 것 같은 환상을 안고 살아간다. (4) 그들은 스스로의 앞날이 그르쳐질 것으로 상상하기도 하며, 약속 시간이 어긋나지 않을까 미리부터 걱정 하기도 한다. (5) 모든 경쟁에서 앞자리를 남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며, 집에 불이 나서 타 버리면 어쩌나 하고 쓸데없이 걱정하기도 한다. (6)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실연당할 것을 걱정하고, 심지어는 그의 삶 전체가 허물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한다. (7) 이처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게 되면 걱정해야 할 재난이 끝이 없다. (8) 더구나 미래에는 우리의 죽음처럼 우리가 미리 조종하거나 손쓸 수 없는 일들이 많다. (9) 그러니 이런 일들을 미리 걱정한다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오히려 삶을 더 망쳐 버릴 뿐이다. (10)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힘으로 조정 할 수 있는 일들도 미래에는 있다. (11) 그러나 그런 일들도 미리부터 앞 당겨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좀더 잘 해결할 수가 있다.

위의 단락은 소주제문을 맨 앞에 보이고, 그것을 11개의 뒷받침문장들이 떠받들고 있다. 뒷받침문장 (1)은 앞의 소주제를 반문 형식으로 암시하고 있고, 문장 (2)는 미래를 미리 앞당겨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환상에 사로잡힌다고 말하고 있고, 그 뒤 (3)에서 (6)까지의 문장들은 그 보기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고, 문장 (7)은 문장 (2)의 내용을 다짐하며, 문장 (8)과 (9)는 손쓸 수도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더우기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문장 (2) 이하에서 뒷받침한 바를 덧붙여 강화하고 있다. 문장 (10)과 (11)은 비록 손쓸 수 있는 일들이라도 미리 걱정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충실함이 더 낫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단락은 소주제문이라는 알맹이와 그것을 차례로 펼치는 뒷받침 문장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쓰기 특강3:소주제문과 뒷받침 문장

(3) 소주제문과 소주제

단락의 중심 문장인 소주제문은 그 단락에서 다룰 중심 문제 곧 소주제(topic)를 그 핵심 요소로 지닌다. 위 [보기 1.6]의 소주제문에서 "부지런함"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단락의 으뜸 생각으로서 모든 뒷받침문장들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구실을 한다. 뒷받침문장들은 이 소주제를 내용적으로 펼치고 떠받들도록 배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주제를 "다스림 생각 (controlling idea)"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단락의 소주제문에 나타난 소주제가 그런 다스림 생각으로서 글 전체 내용을 지배하고 있다.

[보기 2.3]

사람은 첫째로 사람에게서 배운다. 사람의 스승은 우선 사람이다. 글을 읽는 것, 간접적이긴 하나 내용에 있어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글을 배운다면 먼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사람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많고 의의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성현들이 혹은 인(仁)을 혹은 사랑을 혹은 자비를 가르쳤음은 한결같이 인간 관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사람에 의하여 구실을 하게 마련이다.

(박종홍, "학문의 길").

위 글의 첫 문장에 나타난 "사람으로부터의 배움"이 소주제이며 이것은 그 뒤의 모든 뒷받침문장들을 다스린다. 다시 말하면 모든 뒷받침문장은 이 소주제를 떠받들도록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소주제와 어긋나는 내용의 문장들은 거기에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주제문은 그 놓이는 자리가 단락의 첫머리가 아니고 끝부분일지라도 뒷받침 문장들을 거느린다.

[보기 2.4]

멘델은 저 유명한 "유전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고작해야 수도원 뒤뜰에다 완두콩을 심어 놓고 해마다 수확되는 색깔이 다른 완두콩의 수를 헤아려 그 비 율을 산출해 낸 것이다. 이건 참으로 쉽고 하찮은 일에 불과해 보이지만 인류 정신 문화의 일대 변혁을 가져오는 중대한 학문적 업적이 되었다. 멘델이 한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보면 학문이란 어렵다고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일지 "학문 공포증에서 벗어나자"--

위 글의 소주제문은 단락의 끝에 있는 밑줄 친 부분이며, 그 앞 부분이 뒷받침 문장들이다. 앞의 [보기 1.8]와는 반대의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소주제보다 앞에 나온 뒷받침 문장들이라 하더라도 한결같이 소주제문을 떠받드는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뒷받침문장

한 단락의 뒷받침문장은 소주제 또는 소주제문을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알맞게 펼쳐서 충실한 단락을 이루는 구실을 한다. "내용으로 알맞다"는 것은 뒷받침문장이 소주제문과 내용적으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분량으로 알맞다"는 것은 소주제문을 충분히 설명할 만한 수효의 문장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 [보기 1.6] - [보기 1.9]에서는 뒷받침문장들이 대체로 그런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단락들에서는 소주제문을 비교적 잘 펼쳐서 독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 이다.

다음에서도 소주제문을 알맞게 펼친 단락을 볼 수가 있다.

[보기 2.5]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두고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 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삭막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한숨과 눈물로 지새는 장애자들을 찾아서 헌신적으로 돌보아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노인들을 찾아서 모닥불을 짚이고 따뜻한 사랑의 봉사를 줄곧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이웃 사랑의 정신은 본디 종교계를 중심으로 펼쳐져 왔는데 요즈음에는 대학에서 그런 봉사 활동에 학점을 부여하여 장려하는 일도 생겨났고 언론 기관에서 그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도 불우한 이웃들을 돌보는 봉사 정신이 온 사회의 각광을 받으며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 김보들맘, "봉사 정신에 대하여"--

위 글의 소주제는 "봉사 정신의 생활화"이고 그것은 맨 앞에 소주제문("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으로 나타나 있다. 그 뒤의 모든 문장들은 그 소주제를 펼치는 뒷받침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모두 그 소주제와 내용적으로 어긋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분량 면에서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 소주제를 잘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펼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보기 글의 뒷받침은 알맞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일 위 보기의 뒷받침문장 중에 소주제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보기 2.5']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 두고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 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삭막한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선진 복지국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기주의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에서 밑줄 친 내용이 무심코라도 끼어 든다면 그것은 소주제를 떠받들지 못하고 오히려 해치게 된다. 그런 문장은 소주제를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깎아 내려서 역효과를 가져 오거나 혼선을 가져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소주제와 내용적으로 어긋나는 문장이 없더라도 다음과 같이 뒷받침문장의 분량이 너무 적으면 소주제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다.

[보기 2.6]

우리 사회에도 이웃 사랑의 봉사 정신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편에는 두고 두고 우리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미담의 주인공들도 늘어 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학교 발전에 써 달라고 기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

와 같이 뒷받침문장을 두어 개 정도만 늘어 놓고 말면 소주제를 충분히 펼쳤다고 할 수가 없다. 그 정도의 설명만 가지고는 독자가 그 소주제를 충분히 납득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뒷받침이 빈약한 단락 또는 내용이 옅은 단락이라고 하게 된다.

글쓰기 특강4:뒷받침 문장의 알맞은 분량

(5) 뒷받침문장의 알맞은 분량

한 단락의 뒷받침문장은 몇 개나 되면 알맞을까? 그 수효가 정해져 있지는 않으나 여러 필자들이 쓴 단락들을 살펴 보면 평균 5개에서 8개의 뒷받침문장이 쓰이게 됨이 예사이다. 소주제가 비교적 간단한 것이면 서 너 개의 뒷받침문장으로도 무방한 때도 있겠지만, 다소 복잡하거나 중요한 소주제이면 그보다 많은 수효의 뒷받침문장이 쓰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는 8개나 그보다 더 많은 뒷받침문장들을 동원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단락이 너무 길게 되는 것도 바람직스럽지는 않다. 단락 내용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 독자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락이 너무 길어지게 될 경우에는 소주제를 더 작은 범주로 나누어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내 친구의 장점"이라는 소주제를 한 단락에서 다룬다고 하면 아무래도 단락이 길어 지고 복잡해 질 것 이다. 여러 장점을 다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는 그 장점을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정직함", "성실함", "부지런함" 따위와 같이 더 작은 범주의 소주제를 내세우는 것이 다루기가 편할 뿐더러 단락이 길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기 2.7]

내 친구 경구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 애가 거짓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너무 고지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곧이곧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는 또 성실하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해 낸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남에게 미루는 일이 없이 자기가 해낸다. 또 어른이 일을 시키면 남이 보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일을 한다. 그뿐 아니라 그 애는 어떤 아이들보다도 부지런한 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안 청소를 하고 바깥 마당을 쓸고 있는 것도 내가 가끔 목격했다. 숙제 같은 것도 미루는 일이 없이 곧장 해서 가져 온다. 그래서 얌체 같은 애들은 그 애 숙제를 베끼려고 벼르는 일도 많다. 청소 시간만해도 남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쉴새 없이 손을 놀린다. 그밖에 그는 공부도 잘하여 성적이 좋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친구들 간에 싹싹하고 마음 좋아 그 애만 만나면 모두 마음이 편하다고들 한다. 이처럼 경구는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모범적인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장점을 죄 갖추었다.

위에서처럼 "장점" 전부를 한 단락에서 다루게 되면 대강만 언급하고 넘어가도 상당히 긴 단락이 된다. 더구나 그런 여러 장점을 자세히 다루려고 하면 단락이 너무 길어지게 되어 읽기에 부담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다음과 같이 각 장점을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서 각기 한 단락씩으로 다루면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고 또 초점이 선명한 단락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보기 2.7']

내 친구 경구는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 그는 누구보다도 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 애가 거짓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너무 고지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곧이곧대로 말하고 행동 한다. 언젠가는 지각을 했는데, "왜 지각했느냐"는 물음에 "어제 밤늦게까지 놀아서 아침에 늦잠을 잤습니다."라고 대답해서 선생님께 혼이 난 적이 있다. 뻔히 혼이 날 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대답을 했던 것이다. 대충 다른 핑계를 대면 선생님의 꾸중을 피해 갈 수 있었을 터인데, 경구의 솔직한 성품은 그런 사소한 거짓말조차도 입밖에 내지를 않는다.

그는 또 성실하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해 낸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남에게 미루는 일이 없이 자기가 해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남이 보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해 나간다. 경구가 주번 일을 할 때면 우리 교실은 몰라 보게 깨끗해 진다. 수업을 마치고 굳이 청소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경구가 쉬는 시간마다 걸레질을 해대니 교실이 더러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 하는 와중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경구의 성실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뿐 아니라 그 애는 어떤 아이들보다도 부지런한 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안 청소를 하고 바깥 마당을 쓸고 있는 것도 내가 가끔 목격 했다. 숙제 같은 것도 미루는 일이 없이 곧장 해서 가져온다. 그래서 얌체 같은 애들은 그 애 숙제를 베끼려고 벼르는 일도 많다. 청소 시간만 해도 남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쉴새 없이 손을 놀린다. 그의 부지런함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밖에도 그의 장점은 많다. 그는 공부도 잘하여 성적이 좋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친구들 간에 싹싹하고 마음 좋아 그 애만 만나면 모두 마음이 편하다고들 한다. 이처럼 경구는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모범적인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장점을 죄 갖추었다.

단락은 글쓰는 이의 지식 수준에 따라서도 얼마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또는 일반 지식인의 차례로 점차 생각이 깊은 글을 쓰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이에 따라 같은 소주제를 다루는 단락이라도 그 길이나 충실도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초등학생이 이루는 단락이라면 다음에서 보듯이 두세 문장 정도면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기 2.9]

나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잘 가르쳐 주신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끔찍히 아껴 주고 집안을 잘 가꾸어 주신다. 동네 사람들도 우리 아버지 말을 잘 듣는다.

중학생 정도의 글일 때에는 단락의 길이가 더 길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생각이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기 2.10]

나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집에 오시면 쓰러지듯이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피곤한 회사 생활을 20여 년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견뎌 오셨다. 아버지는 회사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 회사를 그만 두게 되면 가족은 누가 먹여 살리느냐 하신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어려움을 묵묵히 참아 오신 것이다.

더 나아가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단락은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보기 2.11]

나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 화를 내시는 법이 없으시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심하게 잔소리를 늘어 놓으셔도 그냥 웃고만 계신다. 우리들에게도 너그러우시다. 성적이 떨어져도 성내시지 않는다. "다음에는 잘 하렴." 하시고는 그뿐이다. 집 밖에서도 아버지의 인자하심은 소문이 나 있다. 우리 집에 다녀 가시는 분들은 한결 같이 "인자하신 분 "이라는 말로 우리 아버지를 칭송한다. 모든 일에 그렇게 너그러운 분을 뵌 적이 없다고들 하신다.

대학생 정도의 글에서는 단락은 더 길어지고 구체적이 될 것이다.

[보기 2.12] 대학생의 글

나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을 직접 실천하실 줄 아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어떤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 적이 있었다. 길에서 떨고 있는 노인을 보다 못해 집으로 모셔온 것이다. 어머니가 "당신이 무슨 사회 사업가예요?" 하고 언짢아 하신 것은 물론이다. "밖이 몹시 춥잖아. 날이 좀 풀릴 때까지만 보살펴 드리자고..." 화를 내시는 어머니를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사랑의 마음이 배어 있었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만 보면 아버지는 그들을 돕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다. 어떤 때는 가족들보다도 그들을 더 우선 생각하는 것 같아 서운함이 생길 정도이다. "박애 정신"이라는 다소 거창한 표현이 아버지에 대한 표현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아버지가 평소에 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그만큼 크신 까닭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아버지를 훌륭한 분으로 존경한다.

글쓰기 특강5: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 연습

모두 4편의 문제와 함께 뒷편에 길잡이를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연 습 문 제>

1. 아래 글의 소주제문과 뒷받침 문장을 가려 보고 단락의 짜임새를 살펴 보자.

<예제 1>

(1) 컴퓨터 문화는 우리에게 점차 뿌리 박혀 가고 있다. (2) 비행기 예약은 컴퓨터가 하는 일이요, 일기 예보도 컴퓨터가 한다. (3) 시간도 컴퓨터가 알려 준다. (4) 즐거운 소식도 컴퓨터가 보내고 또 받기도 한다. (5) 글도 컴퓨터로 쓰고 쉽게 고쳐 쓸 수도 있다. (6) 한 장의 종이도 필요치 않다. (7) 자동차도 컴퓨터가 만들고 설계도 한다. (8) 집 짓는 공정도 점검하고 잘못도 알려 준다. (9) 환자도 진단하고 처방한다. (10) 컴퓨터가 달린 미사일이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키고 인공 위성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벼와 콩이 얼마나 수확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도 컴퓨터가 한다. [편의상 번호를 붙임]

-- 박규태, "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든 컴퓨터 문화"--

2. 아래 예문은 "독일의 도서관"을 소개하는 글의 일부이다. 단락의 짜임새 면에서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 보며 읽어 보자.

<예제 2>

무엇보다도 감탄한 것은 도서관에의 접근이 아주 쉽다는 것이다. 도서관이 산중턱이나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상가의 한 복판에 있다. 시민들은 쇼핑을 하던 길에 도서관에 들른다. 그러면서도 도서관 안은 전혀 소음이 없다.

3. 아래 글은 충분한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뒷받침을 보충하여 제대로 단락을 구성해 보자.

<예제 3>

어렸을 때 맛있게 먹어 본 일이 있는 음식은 늘 기억에 남는다. 나는 대여섯살 적에 할아버지를 따라 시골 장터에 갔다가 육회 비빔밥을

4. 다음 소주제문 중 한 두어 가지를 골라 뒷받침함으로써 한 단락을 이루어 보자.

[1] 나는 우리 어머니를 좋아한다.

[2] 나는 우리 선생님을 존경한다.

[3] 나는 내 친구 000와 특별히 친하다(/안 좋아한다).

[4] 나는 자연 보호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길잡이 1] 윗 글의 소주제문은 첫 문장이다. (2)-(10)은 그 뒷받침문장들이다. (2)-(10)의 뒷받침 문장들은 "뿌리 박혀 가는 우리의 컴퓨터 문화"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길잡이 2] 위 글의 소주제는 "도서관에 가기 쉽다"는 것인데 마지막의 "도서관 안은 전혀 소음이 없다"라는 문장이 끼어들어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조용한 것은 도서관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장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내용은 위의 단락이 드러내고자 하는 소주제와는 관련이 먼 것이다. 아무래도 이 마지막 문장은 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그 도서관은 조용하다"는 소주제를 내세워서 새로 운 단락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위의 예문은 다음과 같이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좋다.

[예제 2']

무엇보다도 감탄한 것은 도서관에의 접근이 아주 쉽다는 것이다. 도서관이 산중턱이나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상가의 한 복판에 있다. 시민들은 쇼핑을 하던 길에 도서관에 들른다. 이렇게 독일인들은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가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도서관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도서관은 조용하기 그지 없다. 도서관이 혼잡스러운 상가들 사이에 있어서 그 안도 소란스러울 것 같지만 막상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생각이 오산이었음을 알 게 된다. 도서관 안에만 들어서 면 절간에라도 들어선 기분이 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신경 쓰일 정도이다.

위와 같이 고쳐 놓고 보면 두 가지 소주제가 각기 별도의 단락 형식 안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길잡이 3] 위와 같은 단락은 충분한 뒷받침이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국민학교 학생이나 중학교 초급 학년 정도의 어린 학생이 쓴 글이라면 몰라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또는 일반 지식인의 글이라면 좀 아쉬운 데가 있다. 위 글을 다음과 같이 보충해 놓고 보면 더 알차고 설득력 있는 글이 될 것이다.

<예제 3'>

어렸을 때 맛있게 먹어 본 일이 있는 음식은 늘 기억에 남는다. 나는 대여섯 살 적에 할아버지를 따라 시골 장에 갔다가 육회 비빔밥을 먹은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어찌나 맛있었든지 지금도 그 기억이 혀끝에 생생하다. 빨간 육회가 소복이 놓인 비빔밥은 지금도 나의 눈에 선하고 요즈음의 어떤 음식점에 가서도 그런 비빔밥을 맛볼 수가 없다. 전주 비빔밥이라는 것이 맛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그것을 먹어 보아도 그때 내가 먹었던 비빔밥만은 어림도 없다. 그때 비빔밥이 지금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처음 먹은 음식이었고 또 양념이나 간이 내가 자란 고장의 것이었기에 구미에 특별히 맞았던 것이었기에 이제껏 나의 미각에 지울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동일한 소주제문(첫 문장)이라도 생각이나 지식 또는 경험에 따라서는 더 충실한 뒷받침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길잡이 4] 위와 같은 소주제문에 관해서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적어 가면 된다. 이때 소주제문과 관계 없는 내용은 조금이라도 끼어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글쓰기 특강6:단락 짜임새의 유형(두괄식, 미괄식, 양괄식)

3.단락 짜임새의 유형

단락은 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이 어떤 순서로 어울리느냐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소주제문을 어느 위치에 두고 뒷받침문장을 배열하느냐에 따라 단락의 짜임새가 몇 가지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위치 관계에 따라 단락은 두괄식, 양괄식, 미괄식, 중괄식 그리고 무괄식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1) 두괄식 단락 [소주제문 + 뒷받침문장들]

두괄식의 단락은 소주제문을 맨 앞에 내걸어 놓고 그것을 떠받드는 뒷받침문장들을 그 뒤에 늘어놓는 짜임새이다. 첫머리 부분에 단락의 핵심이 놓이고 그 뒤에 그것을 풀이하거나 합리화하는 뒷받침 요소들이 이어지는 꼴이다. 이른바 역피라미드 형식의 짜임새인 것이다. 우리가 이제껏 보기로 들어 왔던 단락은 거의 모두 이 두괄식이다.

[보기 3.1]

사람은 누구나 가치를 사랑한다. 가치 곧 진선미를 향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끌리고 세차게 움직인다. 아름다운 꽃이나 그림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며, 착한 어린이의 순진한 행동을 보거나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이들을 대하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모든 일에서 거짓보다는 참다운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특히 탐구심이 강한 이들은 진리를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오롯이 바치는 일조차 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한 소주제문이 맨 앞에 제시되어 있다. 그 뒤에는 소주제문이 나타낸 요지("가치의 사랑")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두괄식의 구조를 보이는 것이다.

두괄식의 단락을 이루는 데 유의할 점은 뒷받침문장 하나 하나를 이어갈 때마다 앞의 소주제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소홀히 하면 빗나간 뒷받침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래의 보기에 서는 모든 뒷받침문장들이 첫머리의 소주제문을 구심점으로 하여 배열되어 있어서 착실한 짜임새를 보인다.

[보기 3.2]

성군 밑에 충신 난다고 세종 때 유난히 청백리(淸白吏)가 많았다. 천성이 검소한 황희(黃喜)는 정승의 자리에만 30년 있었지만 검약 생활은 벼슬하기 전과 조금도 다음이 없었다. 좌의정을 지낸 유관(柳寬)도 마찬가지였는데 빗줄기가 방안으로 쏟아져 내리자 우산으로 가리며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딜고" 하고 걱정했다 한다. 사육신 중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도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는데 모두 세종이 등용해 아끼던 분들이다. --"횡설수설", <동아일보>

위 글은 그 소주제인 "유난히 많은 청백리"를 그 뒤의 모든 문장들이 잘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의 청백리와 관련된 사항만을 선택하여 맨 앞의 소주제를 잘 떠받들고 있어서 핵심이 선명한 단락이 되고 있다.

문장력의 기본을 튼튼히 다지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두괄식 단락을 이루는 요령을 알아 두어야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이 두괄식은 소주제문을 앞에다 두고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목표점을 앞에 두고 전진하는 것처럼 빗나가지 않는 뒷받침이 가능하게 한다. 둘째, 두괄식은 글을 읽는 데도 매우 능률적 이라는 점이다. 두괄식은 그 요지를 첫머리에서 파악할 수 있으므로 읽기가 편하다. 셋째, 두괄식은 다른 모든 단락 구조 유형의 기본이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다른 유형의 단락은 이 두괄식을 다소 조정하거나 손질하면 이룰 수가 있다. 이처럼 두괄식은 가장 효율적이고 기본적인 단락 유형이 되므로 글 쓰는 이는 누구나 일차적으로 익혀 두어야 한다.

2) 양괄식 단락 [소주제문 + 뒷받침문장들 + 소주제문]

양괄식의 단락은 소주제문을 첫머리에 내걸고 그것을 뒷받침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소주제문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짜임새이다. 이 단락은 실제로 두괄식의 짜임새와 같은 것인데, 끝에 가서 소주제문의 내용이 한번 더 되풀이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앞의 [보기 3.1]을 양괄식으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기운 글씨로 쓰인 부분이 뒷 쪽에 첨가된 소주제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를 사랑한다. 가치 곧 진선미를 향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끌리고 세차게 움직인다. 아름다운 꽃이나 그림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며, 착한 어린이의 순진한 행동을 보거나 남을 위해 서 희생을 하는 이들을 대하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모든 일에서 거짓보다는 참다운 것을 천성적으로 좋하하고, 특히 탐구심이 강한 이들은 진리를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오롯이 바치는 일조차 있다. 이처럼 사람은 진선미의 가치를 발견하였을 때 그것을 본성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양괄식을 이루는 데에 주의할 점은 마지막의 소주제문이 첫머리의 소주제문과 내용적으로는 일치하되 그 표현 형식을 달리 하는 점이다. 만일 앞뒤 소주제문이 내용적으로 다르게 되면 주제 파악에 혼선을 가져 올 것이므로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까지 똑같은 문장이어서는 꼴이 사나울 것이다. 아래의 예문에서처럼 같은 내용의 소주제이지만 얼마쯤 다른 표현을 써야 한다.

[보기 3.3]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학문"하면 "어렵다"고 말한다. 만약 누가 학문을 쉽다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자못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들로 "학문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학문"하면 "어렵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신중한 처사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달리 말하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문은 어렵다"는 말에 최면 걸려 있는 듯 하다.

-- 하일지, "학문 공포증에서 벗어나자" 중에서

위에서 보듯이 끝의 소주제문은 앞의 것과 내용으로는 같으나 그 표현 형식은 달리하고 있다.

3) 미괄식 단락 [뒷받침문장들+소주제문]

미괄식 단락은 뒷받침문장들이 앞에 놓이고 소주제문은 맨 끝에 제시 된다. 소주제문의 위치로만 보면 두괄식과 반대의 짜임새이다. 앞 부분 에서는 소주제문 대신에 그것을 이끌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서술이 이루어진다. 소주제문을 맨 마지막에 드러내기 위해서 그 전제적인 서술을 앞 부분에서 하는 것이다.

이 미괄식의 경우도 따져 보면 두괄식과 거의 마찬가지의 요령으로 전개된다. 두괄식에서 소주제문을 뒤로 옮기고 약간의 조정을 하면 미괄식이 이루어진다. [보기 2.1]의 두괄식 단락을 미괄식으로 고쳐 보면 그 요령을 알 수 있다.

가치 곧 진선미를 향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끌리고 세차게 움직인다. 아름다운 꽃이나 그림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며, 착한 어린이의 순진한 행동을 보거나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이들을 대하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모든 일에서 거짓보다는 참다운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특히 탐구심이 강한 이들은 진리를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 을 위해서 자기를 오롯이 바치는 일조차 있다. 이처럼 우리는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참다움 곧 가치를 본성적으로 사랑한다.

위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괄식인 [보기 3.1]에서 다른 뒷받침문장들은 거의 그대로 두고 다만 소주제문을 뒤로 이동하면서 그 앞에 적절한 접속어(한마디로, 이처럼, 따라서 따위)를 써서 접합시키면 자연스런 미괄식 단락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미괄식 단락은 두괄식 단락의 변형이므로 미괄식 단락을 짓는 데도 두괄식 단락의 경우와 같은 요령으로 할 수가 있다. 소주제문을 가상적으로 내걸어 놓고 그것을 두괄식으로 뒷받침하여 전개 한 다음에, 동일한 소주제문을 마지막에 제시하면서 앞의 가상적인 소주제문을 지우는 것이다. 다음의 보기에서 ( )안은 가상적으로 내건 소주제문이다.

[보기 3.4]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권력 지상주의의 꿈은 언제나 정치적 비극의 불씨가 되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의 애를 칭찬 하는 말로서, "그 놈 대통령 감이다." "그 놈 장군 감이다."는 말을 흔히 쓴다. 이런 말은 그 애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은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거는 꿈인지도 모르겠다, 이 꿈 뒤에 서려있는 것은 이조 오백 년 동안 맺혀왔던 모든 백성들의 꿈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고,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은 관리가 되는 것이고, 관리가 되는 것은 곧 일반 서민을 지배하는 계급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백성들의 꿈이란 남보다 나은 지위에 오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꿈은 모든 백성들이 가지고 있을 때 결과적으로 예상되는 것은 권력 투쟁이다. 죽고 죽이고 유배당하는 이조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그것을 실증한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권력 지향의 꿈은 언제나 정치적 비극의 불씨가 되어 왔다. --김상태, "꿈" 중에서--

일반으로 미괄식 단락은 두괄식과는 다른 효과가 있다. 두괄식은 소주제문이 맨 앞에 놓여 있어서 단락의 요지 파악에는 간명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속이 처음부터 너무 빤히 드러나는 면이 있다. 이와는 달리 미괄식 단락은 소주제문을 이끌어 내는 과정을 점층적으로 거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소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미괄식 단락을 이루는 데는 상당한 글솜씨의 숙달이 필요하다. 소주제를 마지막에 제시하고 앞에서는 그것을 이끌어 내기 위한 서술을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옆길로 빗나갈 가능성이 높다. 또 뒷받침 문장의 배열에서도 두괄식에 비하여 어려움이 있다. 목표점을 뒤에 두고 뒷걸음질치는 것처럼 그 배열이 부자연스러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의 초보자는 처음부터 미괄식 단락을 시도하기보다 는 두괄식이나 양괄식을 익힌 다음에 써버릇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그 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야 할 설명문이나 논술문 따위에서는 미괄식 단락을 많이 쓰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면도 있다.

글쓰기 특강7:단락 짜임새의 유형(중괄식, 무괄식)

4) 중괄식 단락 [뒷받침문장 + 소주제문 + 뒷받침문장]

중괄식의 단락은 소주제문이 그 중간에 놓여 있고 앞 부분과 뒷부분에 뒷받침문장이 나뉘어 있는 짜임새이다. 앞 부분에서 얼마쯤 서술을 한 다음에 소주제문을 보여 주고 그 뒤에 다시 보충적인 서술을 하는 방식이 중괄식이다. [보기 3.1]를 중괄식으로 고쳐 써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줄친 부분이 소주제문이다.

[보기 3.1''']

가치 곧 진선미를 향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끌리고 세차게 움직인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가치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꽃이나 그림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며, 착한 어린이의 순진한 행동을 보거나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이들을 대하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모든 일에서 거짓보다는 참다운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특히 탐구심이 강한 이들은 진리를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오롯이 바치는 일조차 있다.

중괄식은 소주제가 단락의 중간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 흠이 있다. 단락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편한 점이 있으나, 읽는 사람으로서 볼 때는 그 요지 파악이 힘들고, 전달 효과가 약화되기 쉽다. 일반으로 독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단락의 첫머리와 끝 부분이기 때문에 글 중간에 들어 있는 소주제문은 잘 드러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괄식 단락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

5) 무괄식의 단락 [소주제문이 겉으로 안 나타남]

무괄식 단락은 소주제문이 표면화되지 않고 뒷받침문장들만 나열되는 것이다. 일반으로 단락은 소주제를 전개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이 경우에도 소주제문은 있게 마련이고 또 그것이 뒷받침되어 드러나야 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무괄식에서는 그것이 단락의 표면 문장으로 나타나 있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런 무괄식의 단락은 두괄식이나 미괄식에서 겉으로 나타난 소주제문을 제외하고 뒷받침문장들만 순리적으로 늘어놓은 경우라고 할 수가 있다. [보기 3.1]을 무괄식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보기 3.1'''']

가치 곧 진선미를 향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그리고 참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끌리고 세차게 움직인다. 아름다운 꽃이나 그림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며, 착한 어린이의 순진한 행동을 보거나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이들을 대하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모든 일에서 거짓보다는 참다운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특히 탐구심이 강한 이들은 진리를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오롯이 바치는 일조차 있다.

무괄식 단락에서는 소주제문이 표면에 안 나타나더라도 독자가 그것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보기에서처럼 그 단락을 읽고 나면 누구나 소주제문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소주제가 잘 전개되지 못한 단락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괄식에서는 특히 이 점을 유의해서 소주제를 누구나 쉽사리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하여야 한다.

무괄식 단락을 처음 익히고자 할 때는 소주제문을 따로 써 두고 두괄식 단락의 경우처럼 전개해 나가는 것이 한 방법일 것이다. 다음에서 그 보기를 살펴 보고 각자 익혀 보도록 하자. 괄호( ) 안에는 소주제를 표시하였다. 이것은 물론 실제 글에는 안 나타난다.

[보기 3.5]

(소주제문: 신식 며느리는 시골 시부모를 아랑곳하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균 할머니로 통하는 분이 있다. 가난한 농사꾼의 몸으로 아들을 잘 가르쳐서 고시 파스까지 시켜 그 아들로 하여금 서울에서 호화 주택에 자가용까지 놓고 살기에 이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잣집 따님을 며느리로 맞이한 덕분이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금이야 옥이야 하는 손자놈의 돌을 맞아 늙은 내외분이 나의 어머니처럼 보퉁이를 들고 아들네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행여나 옷에서 먼지라도 떨어지면 어쩔까 싶어 숨을 죽이며 발을 옮겨 디뎌야 할 저택, 늙은이들의 어깨가 얼마나 으쓱했을까. 아장아장 손자놈이 걸어 나왔다. 얼마나 보고 싶던 핏덩이 인가. 무심결에 "아이쿠 내 새끼야" 외치는 소리에 앞서 어느덧 손자는 할머니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뒤늦게 나오다가 이를 본 며느리가 질겁을 했다. 시부모님께 대한 인사는 그만 두고 "저런 균이 옮으면 어쩔라고" 신경질을 부리며 아기를 빼앗아 가더라는 것이다. "닭 쫓던 개"란 이를 두고 한 말이렷다.

<문도채, "균할머니" 중에서>

위 글은 소주제문이 표면에 안 나타나 있더라도 누구나 그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무괄식은 이렇게 소주제문을 잠재시켜서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괄식 단락은 문예 작품 등에서 많이 쓰이지만 일반 설명문이나 논술문 등에서는 그렇게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것은 아무래도 소주제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을 처음 쓰는 이들로서는 제대로 된 무괄식 단락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무괄식 단락을 이루는 데는 상당한 글솜씨가 갖추어져야 한다. 소주제문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누구나 잘 파악할 수 있게 글을 엮어가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글솜씨를 처음 가다듬는 이는 무괄식 단락의 형성법은 뒤로 미루고 그 기초가 되는 두괄식 단락을 이루는 법을 충분히 익혀두는 것이 현명하다.

글쓰기 특강8:단락 짜임새의 유형 연습문제

1. 다음 예문은 어떤 유형의 단락 구성이고 또 그 뒷받침은 어떤지 살펴 가며 읽어 보자.

<예제 1>

항상 남을 앞지르려고 기를 쓰는 우리들은 계절도 흔히 앞당겨 사는 꼴이 되곤 한다. 우리는 한 겨울에 봄을 맞이하고 봄이 되면 여름을 살기에 바쁘다. 우리는 한 여름에 가을맞이를 서둘러야 하고, 가을이 되면 이젠 겨울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과일을 먹는 습관만 봐도 여실히 입증된다. 우리 나라 풍토에서 참외와 수박이 가장 맛있는 때는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참외와 수박은 한여름에 먹는 과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오늘날 행세를 하려면 한여름이 되기 훨씬 전에 참외와 수박을 먹어 두어야 한다.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겨울에 참외와 수박을 먹는 것이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 쯤에는 그것들을 먹어야 낙오자가 아니다. 물론 때 이른 과일이 제 맛이 날리는 없지만,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면서까지 맛있는 과일 먹기를 원치 않는다.

-- 김태길, "앞만 보고 달리는 계절병" 중에서--

2.다음 단락의 유형은 어떤 것인지 살펴 보고 그 뒷받침은 충분한지 생각해 보자.

<예제 2>

입맛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나이들수록 옛날 어려서 먹던 음식맛으로 회기[回歸]한다. 논새우뿐 아니라 호박풀떼기 손칼국수 도토리묵 심지어 짜디짠 새우젓국 등 옛날 가난에 찌든 시절의 음식이 입맛을 돋운다. 한다하는 요정에서도 누룽지와 된장뚝배기가 오르는 것을 보면 미각의 회기 현상은 나만의 기벽[奇癖]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인 것 같다.

3. 아래의 소주제를 두괄식으로 구성해 보자.

소주제 : 태풍은 그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4. 위의 문제에서 쓴 글의 구성을 양괄식, 미괄식, 중괄식, 무괄식으로 바꿔보자.

[길잡이 1] 위 글은 두괄식 구성이다. 단락의 첫 문장에서 소주제를 제시하고 그 뒤의 두 문장으로 소주제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였다. 그 뒤의 모든 문장에서는 실제 예를 통하여 소주제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단락의 소주제가 비교적 참신하고 그 뒷받침도 정연하여 설득력이 있다.

[길잡이 2] 위의 예문은 양괄식 구성의 글이다. "입맛의 회귀 현상"이라는 소주제가 첫머리와 끝머리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양괄식 구성은 서술이 다소 길어질 때 많이 사용되는데, 위의 경우에는 뒷받침이 다소 짧은 예문에 쓰였다. 어떻든 단락 구성에는 무리가 없는 글이다.

[길잡이 3] 두괄식은 주제를 첫머리에 내세우는 구성이다. 위의 주제를 앞에 내세워 단락을 구성하여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태풍은 그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한 집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울타리와 담도 무너져서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오래된 참나무와 포플라도 최근에 심은 자작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거리 위나 부서진 건물 위에 넘어져 있었다.

[길잡이 4] 양괄식, 미괄식, 중괄식 따위는 본시 두괄식을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두괄식 구성에서 첫머리의 소주제문을 중간이나 뒤 쪽에 옮겨 놓으면 자연스럽게 양괄식, 미괄식, 중괄식, 무괄식 따위의 구성이 이루어진다. 우선 양괄식의 경우는 두괄식의 첫머리에 나온 소주제와 내용은 같되 형식이 다소 다른 문장 하나를 마지막 부분에 덧붙이면 된다. 위의 예문을 양괄식으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밑줄친 부분이 뒤 쪽에 첨가된 소주제문이다.

태풍은 그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한 집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울타리와 담도 무너져서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오래된 참나무와 포플라도 최근에 심은 자작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거리 위나 부서진 건물 위에 넘어져 있었다. 이번 태풍으로 그 마을의 옛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말았다.

둘째로, 두괄식에서 소주제를 뒤로 옮기고 약간의 조정을 하면 미괄식이 이루어진다. 위의 두괄식 단락을 미괄식으로 고쳐 보면 그 요령을 익힐 수 있다. 태풍으로 그 마을에는 한 집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울타리와 담도 무너져서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퉁 불퉁한 오래된 참나무와 포플라가 최근에 심은 자작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거리 위나 부서진 건물 위에 넘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태풍은 그 마을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셋째로 두괄식에서 소주제를 중간에 옮겨 놓으면 중괄식의 구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위 예문을 중괄식으로 고쳐 써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밑줄친 부분이 소주제문이다.

태풍으로 그 마을에는 한 집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울타리와 담도 무너져서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태풍은 그 마을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울퉁불퉁한 오래된 참나무와 포플라가 최근에 심은 자작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거리 위나 부서진 건물 위에 넘어져 있었다.

넷째로, 무괄식의 문단은 두괄식에서 소주제문을 제외하고 뒷받침문장들만 순리적으로 늘어놓은 경우라고 할 수가 있다. 위의 예문을 무괄식 문단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태풍으로 울타리와 담도 무너져서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오래된 참나무와 포플라가 최근에 심은 자작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거리 위나 부서진 건물 위에 넘어져 있었다.

글쓰기 특강9:여러 단락으로 이루어지는 글

4. 여러 단락으로 이루어지는 글

1) 단락과 긴 글의 구성

우리는 앞에서 단락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대강 살폈다. 이제 이런 단락들이 한 편의 글을 이루는 과정을 알아 보기로 한다. 단락들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이어져서 한 편의 글을 엮어 가는지 익혀 두도록 한다.

우선, 실례를 살펴 보기로 하자.

[보기 4.1] 병상에서 보낸 우유

(1)새벽에 배달되는 우유가 오지 않았다. 첫날은 "누가 집어 갔나보다"고 생각했는데 사흘이나 계속해서 배달이 끊겼다. 궁금해서 우유 배달 대리점에 전화를 했더니 우리집 담당 배달 아저씨가 교통 사고로 입원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라 하였다. 더구나, 앞으로 2,3주 동안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2)이 소식을 듣고 나는 딴 제품의 우유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식구들이 우선 아침에 우유를 마시는 오래된 습관 때문에 그 아저씨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성화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신선한 우유를 집어 드는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없는 점은 사실 내게도 무척 아쉬웠다. 또 평소에 다른 우유 대리점에서 자기네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해 오기도 하였으니 이번 기회에 딴 데로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3)그런데 이날 아침 10시쯤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느긋한 마음으로 쉬고 있을 때에 초인종 소리가 났다. 외판원인가 싶어 나가지 않았더니 조심스럽게 초인종이 또 울렸다. 뜻밖에 7,8세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우유예요"라고 말하며 서있지 않은가. "아빠가 병원에서 아줌마 댁에 가져다 드리랬어요" 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것이었다.

(4)나는 우선 부질없는 생각을 했구나 하는 후회의 마음이 앞섰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을 위로는 못할망정 그새를 못 참아서 딴 마음을 가졌으니 말이다. 고객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문제와 생계 걱정으로 병상에서도 편치 못할 우유 아저씨 생각을 다시 하며 미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나의 인정 머리 없는 마음가짐에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5)또 그 아이의 딱한 처지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데 매일 아빠를 대신해 수고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내가 그 애에게 해줄 것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여 본다. 무엇보다도 그 아빠가 빨리 회복돼 그 애의 고생이 끝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 최귀인

위 글은 5개의 단락이 이어져서 한 편의 글을 이루고 있다. 각 단락은 그 시작점을 한칸 안으로 들여 넣어 씀으로써 구분하고 있다. (각 단락 앞의 번호는 편의상 필자가 붙인 것이다).

글을 시작할 때 또는 글의 중간에서 줄을 바꾸고 한 자를 안으로 넣어서 쓰는 것을 "들여쓰기(indention)"라 부른다. 이것은 단락의 경계를 겉으로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표지이다. 만일 위와 같은 긴 글에서 이런 들여쓰기가 없이 모든 문장이 한데 잇대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글의 내용 파악에도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이런 단락의 표지인 들여쓰기는 현대의 거의 모든 글에서 필수적으로 쓰이고 있다.

[새김] 아주 옛날 글에서는 띄어쓰기나 쉼표, 마침표뿐 아니라 단락 구분이 없었다. 글의 내용이 복잡해지고 길어지면서 그런 여러 문장 부호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들여쓰기도 그 중의 한 가지이다. 서구에서는 몇 백 년 전부터 단락 구분의 표지가 나타나게 되었고 우리 나라에는 금세기 초에 이런 들여쓰기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글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들여쓰기의 구실을 바로 알고 쓰는 일이 드물다. 곧 글의 내용 전개와는 관계가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들여쓰기를 한다. 그래서 들여쓰기만 많고 정작 단락 구분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글이 많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이런 들여쓰기로 표시되는 각 단락은 우리가 앞에서 다룬 단락의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다. 들여쓰기로 구분되는 단락은 각기 글 속의 글로서의 짜임새를 보인다는 것이다. 곧 위의 글과 같이 긴 글에서는 들여쓰기가 내용적인 조직체인 단락을 외형적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경계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장들을 임의로 나누어 놓는 들여쓰기는 단락 표지가 될 수 없다. 그런 들여쓰기는 업무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아무 기준 없이 갈라 세워서 부서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선만 빚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내용적으로 한 덩이를 이루고 있는 단락을 서로 구분해 주는 들여쓰기만 단락 표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과 관련 없이 함부로 쓰는 들여쓰기는 어떤 경우에도 단락 표지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면 위 [보기 4.1]에서 들여쓰기로 구분되는 각 단락이 각기 어떤 구실을 하며 그 자체의 짜임새는 어떤지 살펴 보기로 하자. 첫 단락은 이야기의 발단을 서술하는 도입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단락은 본문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이끌어 들이는 길잡이 노릇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다룬 일반 단락 곧 한 소주제문과 그것을 펼치는 뒷받침문장으로 이루어지는 단락과는 다르다. 이런 단락은 "특수 단락"이라 이른다. (이런 단락은 뒤의 '특수단락을 이루는 방법'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단락 (2)에서는 앞의 첫 단락에서 도입된 이야기 내용의 일부를 다룬 것인데, 그 요지는 첫 문장에 나타난 대로 "나는 딴 제품의 우유로 바꾸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이다. 이것은 이 단락의 소주제문이다. 이 단락을 이루는 다른 모든 문장들은 이 소주제문을 떠받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이 단락은 앞에서 우리가 말한 두괄식 단락의 짜임새로 펼쳐지고 있다.

단락 (3)에서는 "아이가 우유를 배달한 사건"을 다루었다. 이 단락은 이 글의 한 고비(절정)를 이루고 있다. 이 단락에서는 그 이야기만 서술하고 소주제문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무괄식 전개를 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극적인 효과를 충분히 거두었으므로 더 이상의 부연이나 소주제문은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락 (4)에서는 "나는 우선 부질없는 생각을 했구나 하는 후회의 마음이 앞섰다."라는 소주제문을 두괄식으로 다루었다. 곧 이 단락에서는 이 소주제문을 앞에 내걸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풀이하여 펼쳤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후회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반성하게 된 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락 (5)에서는 "그 아이의 딱한 처지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라는 소주제문을 역시 두괄식으로 펼쳤다. 찬 바람이 나는데 어린 아이가 일찍부터 우유 배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딱한 처지를 가엾게 여기고 그 애를 도와줄 마음까지 일어났음을 서술하였다. 이 단락은 글의 마무리의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위의 글은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제로 삼고 그것을 몇 개의 단락들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곧 그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서 몇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이 차례로 그 주제의 일부를 떠맡아 짜임새 있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전체 주제 :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단락 (1) 도입 단락 곧 본문에서 다룰 거리를 이끌어 들임

단락 (2) 내용 서술의 일부 곧 딴 제품의 우유로 바꾸어 보려는 생각을 서술

단락 (3) 내용 서술의 한 고비 곧 아이가 우유를 배달한 극적인 사건의 서술

단락 (4) 내용 서술의 또 한 국면 곧 후회하는 마음의 서술

단락 (5) : 내용 서술의 마지막 부분 곧 측은한 마음의 서술

위에서 보듯이 각 단락의 내용 서술은 글 전체 내용을 몇 단계로 나누어 다룬 것이 되는데, 이를 종합하면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주제가 부각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보기 4.1]은 이러한 전체 글의 주제를 몇 가지 단계로 나누고 그 각 단계는 각 단락에서 다루고 있다.

일반으로 글은 이처럼 여러 단락으로 나뉘어 단계적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글의 주제가 체계적으로 다루어질 수가 없으며 따라서 조리있는 서술이 될 수가 없게 된다. 이는 마치 한 조직체가 여러 하위 부서 조직을 통하여 업무를 체계적으로 처리하여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글쓰기 특강10:글 속의 글로서의 단락

2) 글 속의 글로서의 단락

위 글의 분석에서 우리는 몇 가지 주 요점을 간추려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도입 단락과 같은 특수 단락 이외의 단락 곧 일반 단락은 소주제(문)를 하나씩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글 전체 주제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소주제는 글의 전체 주제에서 갈라져 나온 하위 개념이지만 각 단락 안에서는 핵심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각 단락의 핵심 사상을 "소주제(topic)"라 하여 "주제(theme)"와 구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주제는 전체 주제와의 관련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것이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토막글일 때에는 소주제라 하지 않고 주제라 부른다.

둘째로, 한 소주제는 한 단락의 형식 안에서 충분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단락의 형식적 표지인 "들여쓰기"는 한 소주제문을 다루는 단락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 소주제문을 다루는 내용이 두 개나 세 개의 형식으로 분산되어 그 경계를 넘나들어서는 안 된다. 만일 단락 (3)을 다음과 같이 두 단락의 형식으로 나누어 놓고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기 4.1]의 단락 (3)

(가) 그런데 이날 아침 10시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느긋한 마음으로 쉬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외판원인가 싶어 나가지 않았더니 조심스럽게 초인종이 또 울렸다.

(나) 뜻밖에 7,8세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우유예요"라고 말하며 서있지 않은가. "아빠가 병원에서 아줌마 댁에 가져다 드리랬어요" 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것이었다.

앞의 (가) 부분은 아무 소주제문이 없이 두 문장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므로 제대로 된 단락이라 할 수가 없다. 그 뒤의 (나) 부분은 새로운 단락의 형식을 보이는데 아이가 나타난 사실만 드러내므로 소주제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 단락에 속해야 할 문장들을 부실없이 두 개의 형식으로 갈라 놓음으로써 어느 쪽도 온전한 단락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 두 형식의 조각 글은 하나로 합쳐야 한 소주제 문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단락의 소주제문과 그 뒷받침문장들을 쓸데 없이 갈라 놓는 것은 금물이다. 이것은 마치 한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는 차량들을 따로 갈라 놓아서 그중 일부 차양은 기관차가 없이 고립되는 현상을 빚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비유로 말하면 한 부대장의 통솔을 받아 작전을 하게 될 병사들을 부질없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만드는 것과 같이 힘을 집결시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락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쓰는 글들이 많아서 필요 없는 들여쓰기가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수가 허다하다. 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을 한 형식 안에 묶어 두지를 않고 분산시켜 놓아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많을 뿐 아니라 매우 허술한 단락이 되는 수가 너무나 많다.

더구나 한 문장만을 놓고 들여쓰기를 하여 문장마다 고립 시키는 일은 금물이다. 어떤 이는 일부 문장을 강조한다는 명목으로 또는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문장들을 마음대로 따로 떼어서 새 단락을 만드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강조법이다. 단락이라는 조직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며 소주제에 대한 충실한 뒷받침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 한 극단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보기 4.2]

내 아이, 네 아이가 아니다. 모두가 우리 아이다. 내일이면 몰라보게 달라질 묘목들이다. 이들의 여름 방학을 위해 비영리단체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다음주부터 방학이다. 그러나 부모가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여름방학 프로그램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면..."하고 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1970/7/10)

위의 보기처럼 아무 뜻도 없이 한 문장을 따로 떼 놓는 것은 단락이 못 된다. 소주제도 없고 뒷받침도 없이 외로운 고립 문장의 나열은 글의 조직을 이루지 못한다. 문장들이 명확한 소주제를 중심으로 형식으로나 내용으로 똘똘 뭉쳐야 힘이 있는 단락을 이룰 수 있다. "흩어지면 망하고 뭉치면 산다" 는 말은 단락이라는 조직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소주제를 우두머리로 해서 관련된 문장들이 강력히 단합되는 모습을 보여야 단락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어떤 한 문장을 시각적으로 잘 눈에 띄게 고립시키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강조 효과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시각적인 효과만 일삼고 충분한 뒷받침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 하면 뒷받침이 없이 고립시킨 문장은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떤 중요한 문장은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충분히 설명 또는 논증하여 독자를 납득시키는 뒷받침과 함께 내세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따라서 어떤 문장을 강조하고자 할 때 뒷받침 서술이 미약하거나 그것과 유리시킨 채 시각적으로만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잘못된 강조법이다.

위에서 살핀 바를 바탕으로 단락의 일반 개념을 정리하면, "단락은 주제의 일부를 펼치는 문장의 조직체로서 그 형식이 뚜렷이 구분되는 글 속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단락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1) 단락은 글 전체 주제의 일부를 펼친다

(2) 단락은 내용적으로 관련을 가진 문장들로 엮어진 단위 조직체이다.

(3) 단락은 뚜렷한 형식적 경계를 지닌 글 속의 글이다.

[새김] 이 단락의 뜻매김은 Perring(1965)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단락의 정의는 Brooks & Warren(1970), Sullivan(1980) 등을 비롯한 서구 문장론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선 단락은 글 전체 주제의 일부를 펼친다. 단락은 전체 글의 내용 일부를 떠맡아 다루는 하나의 전개 단위체가 되는 것이다. 일반으로 전체 글의 주제는 몇 개의 작은 개념으로 나누어서 다루게 된다. 이를테면, "민수는 훌륭한 학생이다" 라는 단순한 주제의 글을 쓰는 데에도 "민수는 부지런하다, 민수는 봉사 정신이 빼어나다, 민수는 공부를 잘 한다" 따위의 작은 주제로 나누어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 글의 주제가 다소 추상적이므로 이를 좀더 구체적인 하위 주제 들로 나눠 다루어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된 하위 주제 고 소주제를 각기 떠맡아서 집중적으로 펼치는 것이 단락이다.

둘째로, 단락은 내용적으로 관련을 가진 문장들로 엮어진 조직체이다. 단락이 하위의 주제를 다룬다고는 하지만 이것 역시 한두 마디 언급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민수는 부지런하다"라는 소주제만 하더라도 조직적으로 부각시키는 뒷받침 서술이 필요하다. 이처럼 단락은 여러 개의 문장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조직체이다. 하나의 소주제 표시 문장 만을 제시하고 말거나 하나의 뒷받침 문장만을 제시하는 경우는 단락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여러 개의 문장을 이어 놓더라도 그것들이 유기적인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제각기 따로 노는 경우도 진정한 단락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여러 개의 문장들이 긴밀하게 배열되어 하나의 소주제를 집중적으로 펼칠 때 비로소 단락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새김] 간혹 "강조 단락"이니 "분립"이니 하여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락이 가능한 것처럼 표현한 작문 이론서들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본디 한 문장만으로는 우리의 생각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기에 단락이라는 조직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문장만으로도 단락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단락의 존재 의미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감탄이나 극적인 표현에서 그 뒤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를 정상적인 단락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그런 한 문장 단락 운운하는 뜻매김은 그렇지 않아도 한 문장만을 달랑 내걸고 설명도 뒷받침도 없이 팽개치는 산만한 글들을 합리화하는 것밖에는 안 될 것이니 좀더 짜임새 있는 글쓰기를 장려해야 하는 이 마당에서는 백해무익이다. . .

단락은 뚜렷한 형식적 경계를 지닌 글 속의 글이다. 단락 이 글의 전개 단위체로서 글 속의 글이라 할 때 그것은 분명히 경계가 주어져 딴 단락들과 서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단락의 형식적 경계로는 들여쓰기(indention)가 가장 널리 쓰인다. [보기 3.1]의 각 단락에서처럼 단락의 시작 부분을 한 칸이나 두 칸 정도 들여 쓰는 것이다. 이 밖에 "내쓰기, 줄 바꾸기" 따위가 단락의 표지로 사용되기도 하나 들여쓰기가 가장 일반적인 단락 표시 방법이다. 이렇게 들여쓰기를 한 부분에서부터 다음 들여쓰기를 한 부분의 직전까지가 한 단락이 된다. 물론 이 때 내용은 안 바뀌고 들여쓰기만 한 것 이라든지, 내용은 바뀌었는데도 들여쓰기를 한 것 등은 바른 단락 나누기가 못 된다. 그런 경우는 들여쓰기가 바른 단락 표지로 쓰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단락의 내용 바뀜과 관계가 없이 임의로 쓰이는 들여쓰기는 잘못된 것이기에 단락 표지로 인정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들여쓰기만 하면 단락으로 여기는 일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며 단락 표지로서의 들여쓰기를 제대로 쓰는 것이 못 된다. 요컨대, 한 소주제의 펼침을 끝내고 딴 소주제의 펼침으로 넘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만이 단락 경계 표지로서의 들여쓰기가 되는 것이다.

글쓰기 특강11:연습문제

연 습 문 제

1. 아래 글을 분석하여 전체 글의 주제와 각 단락의 요지를 파악해 보자.

<예제 1> 백결 선생과 방아타령

(1)"거문고" 하면 백결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신라 자비왕 때 서울 남산 기슭에 살던 백결 선생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누더기옷을 백 번도 넘게 기워 입었다. "백결"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얻은 것이다. 그렇게도 가난한 속에서도 백결 선생은 거문고 타기에만 몰두하여 마침내 안빈 낙도의 경지에 이른 예술가이다.

(2)선생은 청빈하게 살면서 거문고 타기에만 열중했다. 그날그날 살아가기에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직 거문 타기에만 몰두하는 예술가였다. 마침 한 해가 저물어 가게 되니 이웃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그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설을 지내나" 하고 떡을 찧지 못하는 가난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다만 소리를 생각하며 무슨 곡조를 만드는 일에만 골몰했다.

(3)부인은 내일 양식도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원망스럽게 선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인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지 마오. 인명은 재천이요 또 부귀는 하늘에서 주시는 것이니 부귀가 오고 가는 것을 인력으로 잡으려 해도 막으려 해도 되지 않는 법이니, 부인은 너무 걱정 말고 천명에 맡깁시다."

라고 하면서 부인을 위로하고 타일렀다. 이렇게 선생은 옛날의 위대한 선비나 예술가들처럼 가난하다 하여 누구를 원망 하거나 도둑질 할 생각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선생은 참으로 낙천적인 예술가의 참모습을 지닌 분이었다.

(4)이윽고 선생은 "여보, 우리 집에서는 떡방아를 찧을 수 없으니 내 거문고로 방아 찧는 곡조를 만들어 보리다."

라고 말하고는 거문고 줄을 고르고 방아 찧는 곡조를 뜯기 시작하였다. 한 곡조 한 곡조 넘어 갈 때마다 무의식중에 부인도 곡조에 맞추어 장단을 치며 나중에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이로 미루어 선생의 거문고 음악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가난한 아내를 위하여 지은 곡이 "대악"이라고 하는 방아 곡조이고 후세에 길이 길이 전해지는 "방아타령"이다.

(5)자고로 위대한 예술가는 아내를 굶기고 아이들을 맨발로 거닐게 하며 심지어 노부모마저 돌보는 일을 잊고 오직 자기 예술의 길에만 전념하는 일이 많았다. 백결 선생이야말로 그런 고매한 안빈낙도의 경지를 이룬 예술가의 한 분인 것이다.

[설명의 편의상 각 단락에 번호를 붙임]

2. 아래와 같은 주제와 그것을 분석한 각 단락의 요지를 가지고 직접 글을 써 보자.

주제 : 독서의 보람(제목도 같음)

1 단락 : 도입 단락(다룰 내용의 개관이나 암시 등)

2 단락 : 주제의 1부 펼침 "독서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케 한다"

3 단락 : 주제의 1부 펼침 "독서는 알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준다"

4 단락 : 주제의 1부 펼침 "독서는 안목을 넓혀 준다"

5 단락 : 주제의 다짐 "독서는 정신 면에서 뚜렷한 성장을 주는 것이다"

[길잡이 1] 위 글은 모두 5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졌다. 각 단락은 글 전체의 서술을 일부씩 떠맡아 정연하게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락 (1)은 도입부로서 백결 선생이 거문고의 명수라는 점과 가난 속에서도 훌륭한 예술가였음을 시사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이 글의 주제가 암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도입 단락은 본격적인 내용 전개는 하지 않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단락 (2)에서는 첫머리 문장에 나타난 소주제문("백결 선생은 청빈하게 살면서 거문고 타기에만 열중했다.")이 펼쳐 졌다. 이 단락은 글 전체 내용의 일부를 떠 맡아 다룬 것이다. 그 단락은 이야기 단락의 한 가지이다.

단락 (3)은 그 마지막 문장에 있는 대로 "낙천적인 예술가"라는 소주제가 다루어졌다. 이 단락에서도 글의 일면을 떠맡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앞 단락을 이어 받아 발전시키는 내용이다. 이 단락은 미괄식으로 전개하였으며 역시 이야기 단락의 한 가지인데 뒷부분에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단락 (4)에서는 첫 문장에 나타난 대로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곡조를 탄 사건을 다루었다. 이 단락은 이 글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으로서 극적인 장면을 서술한 이야기 단락이다. 다만, 뒷 부분에서는 그 곡이 훌륭함과 방아 타령의 유래 등을 설명하였다.

단락 (5)는 마무리 단락으로서 백결 선생이 안빈낙도하는 위대한 예술가임을 서술하였다. 이것은 앞의 여러 단락 내용을 바탕으로 글의 주제를 드러내는 구실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