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일천 오백 년 꿈속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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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일천 오백 년 꿈속을 거닐다 1. 맨날 그렇게 야권에서 맴돌지 말고 여권이라도 만들어 봐.” 작년 여름에 선배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도 그러 것이 중국사를 공부했고 주로 세계사만 맡아온 처지이지만 어쩌다 보니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다. 내 팔자에 언감생심 외국이 무어랴 싶은 것이, 나름 경력이 있는데도 교사를 상대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에 한 번도 얻어걸려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근무만 하면 100% 외국 연수를 보내준다는 학교에도 있어봤는데, 4년차에 내 차례가 오자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양보하고 내년에 가란다. 무심히 그러마 했다가 바로 다른 학교로 이동하면서 못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나이 제한에 걸리 는 처지가 되니 내 팔자에 외국은 없나 보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자 선배 선생님은 조선일보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 을 권하셨다. 선생님 본인도 못 가셨다는데 제가 되겠냐 했더니 하신 말씀이다. 일단 여권부터 만들고 신청해 보라 신다. 웃고 말았다. 그런데 학년 말, 업무 마무리로 한창 정신없는 즈음에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공문이 떴다. 추첨이란다. 교장선생 님께 추천서를 받고 신청했다. 웬일인지 안 될 거란 느낌이 없다. 그리고 1229일 저녁에 당첨이란 연락을 받았다. 30일에 등록. 생전 처음 외국행에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안내를 찬찬이 읽고 전화 로 묻고, 다른 선생님들이 올려놓은 질문을 참고로 하나하나 준비를 갖춰갔다. 일정이야 다 정해져 있으니 그저 따라 만 다니면 될 테고 22일 오후 오사카에서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다행히 재작년에 일본국제 교류기금 자료실에서 받아온 일본정부 발행의 일본 지도(가이드가 버스에 붙였던 지도가 그것이었다)와 관광안내서, 그리고 짬짬이 들여다 본 구글 지도와 구글 어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거리 모습까지 미리 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출국준비에 조선일보사에서 숙제까지 내줬다. 다행인 것은 읽을 책 두 권 중 얼핏 보기에 더 어려워 보이는(실제로 는 요령 없이 책을 만들었기에 그럴 뿐이지만) 김현구교수의 책은 진작에 읽은 터라 읽는 것은 금방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장점이 잔뜩 보이던 전과는 달리 약점이 눈에 띄지만 이는 그동안 내가 일본사에 대해 조금은 더 익숙해진 덕분 이겠다. 그래도 독후감은 마감날이란 16일 밤에야 간신히 완성했는데 프린터가 고장이다. 토요일도 일이 많아 밤늦어 서야 독후감을 메일로 보내고 네 시간이나 잤는지 말았는지 하고서 집을 출발했다. 집 앞에서 출발하는 기차편이 2주 전에 이미 매진이라 할 수 없이 서울역 출발 KTX 표를 끊었다. 표 인쇄도 못해 지갑에 들어 있던 영수증에 시간과 좌석만 메모해서 챙겨 둔 터였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배불리 먹으면서 일 곱 시까지 여유를 부렸는데, 일요일 새벽엔 버스가 자주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갑자기 맘이 급해 허둥지둥 나갔는 데 저만치 앞에서 버스는 떠나고 다음 차는 꿩궈먹은 소식이다. 이십 분을 까먹고 다른 버스를 탄 뒤 신촌에서 택시로 갈아타는 우여곡절 끝에 기차에 올랐다. 2. 부산 일단 점심을 먹어야 한다. 부산은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번엔 유명한 집을 가기로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 초원복국. 물론 모임 장소와 가까운 영도 지점. 그 주변에는 병원과 약국이 즐비해 집에서 챙기지 못한 멀미약에, 일단 챙겨 두었으나 더 필요할 듯한 감기약(쌍화탕)을 사려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약국이 열은 되는데 도무지 연 곳이 없다. 도리 없이 우선 뜨끈시원하게 복국 한 그릇 먹고 영도다리 건너오니 집결 장소인 롯데백화점 안에 약국이 영업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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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일천 오백 년 꿈속을 거닐다

    1. 집

    “맨날 그렇게 야권에서 맴돌지 말고 여권이라도 만들어 봐.”작년 여름에 선배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도 그러 것이 중국사를 공부했고 주로 세계사만 맡아온 처지이지만

    어쩌다 보니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다. 내 팔자에 언감생심 외국이 무어랴 싶은 것이, 나름 경력이 있는데도 교사를 상대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에 한 번도 얻어걸려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근무만 하면 100% 외국 연수를 보내준다는 학교에도 있어봤는데, 4년차에 내 차례가 오자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양보하고 내년에 가란다. 무심히 그러마 했다가 바로 다른 학교로 이동하면서 못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나이 제한에 걸리는 처지가 되니 내 팔자에 외국은 없나 보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자 선배 선생님은 조선일보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권하셨다. 선생님 본인도 못 가셨다는데 제가 되겠냐 했더니 하신 말씀이다. 일단 여권부터 만들고 신청해 보라신다. 웃고 말았다.

    그런데 학년 말, 업무 마무리로 한창 정신없는 즈음에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공문이 떴다. 추첨이란다. 교장선생님께 추천서를 받고 신청했다. 웬일인지 안 될 거란 느낌이 없다. 그리고 12월 29일 저녁에 당첨이란 연락을 받았다. 30일에 등록. 생전 처음 외국행에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안내를 찬찬이 읽고 전화로 묻고, 다른 선생님들이 올려놓은 질문을 참고로 하나하나 준비를 갖춰갔다. 일정이야 다 정해져 있으니 그저 따라만 다니면 될 테고 22일 오후 오사카에서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다행히 재작년에 일본국제교류기금 자료실에서 받아온 일본정부 발행의 일본 지도(가이드가 버스에 붙였던 지도가 그것이었다)와 관광안내서, 그리고 짬짬이 들여다 본 구글 지도와 구글 어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거리 모습까지 미리 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출국준비에 조선일보사에서 숙제까지 내줬다. 다행인 것은 읽을 책 두 권 중 얼핏 보기에 더 어려워 보이는(실제로는 요령 없이 책을 만들었기에 그럴 뿐이지만) 김현구교수의 책은 진작에 읽은 터라 읽는 것은 금방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장점이 잔뜩 보이던 전과는 달리 약점이 눈에 띄지만 이는 그동안 내가 일본사에 대해 조금은 더 익숙해진 덕분이겠다. 그래도 독후감은 마감날이란 16일 밤에야 간신히 완성했는데 프린터가 고장이다. 토요일도 일이 많아 밤늦어서야 독후감을 메일로 보내고 네 시간이나 잤는지 말았는지 하고서 집을 출발했다.

    집 앞에서 출발하는 기차편이 2주 전에 이미 매진이라 할 수 없이 서울역 출발 KTX 표를 끊었다. 표 인쇄도 못해 지갑에 들어 있던 영수증에 시간과 좌석만 메모해서 챙겨 둔 터였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배불리 먹으면서 일곱 시까지 여유를 부렸는데, 일요일 새벽엔 버스가 자주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갑자기 맘이 급해 허둥지둥 나갔는데 저만치 앞에서 버스는 떠나고 다음 차는 꿩궈먹은 소식이다. 이십 분을 까먹고 다른 버스를 탄 뒤 신촌에서 택시로 갈아타는 우여곡절 끝에 기차에 올랐다.

    2. 부산

    일단 점심을 먹어야 한다. 부산은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번엔 유명한 집을 가기로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 ‘초원복국’집. 물론 모임 장소와 가까운 영도 지점. 그 주변에는 병원과 약국이 즐비해 집에서 챙기지 못한 멀미약에, 일단 챙겨 두었으나 더 필요할 듯한 감기약(쌍화탕)을 사려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약국이 열은 되는데 도무지 연 곳이 없다. 도리 없이 우선 뜨끈시원하게 복국 한 그릇 먹고 영도다리 건너오니 집결 장소인 롯데백화점 안에 약국이 영업중이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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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을 맡긴 뒤, 전화로 목소리만 만난 김재억 가이드를 만나 안내를 받고 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다들 열심히 들었을 터이니 빼놓기로 하자. 다만, 설문에도 써 놓았으나 우리나라는 일본사에 대해 무지하다. 역사교사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초등교사는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그래서인지 강의가 참 쉽게 쉽게 간다. 미리 받은 책자를 읽어둔 덕분에 복습하는 느낌. 그러나 역사교사를 잔뜩 모아놓았을 터이니 좀 더 자세히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많은 인원에 시간이 부족한 현실도 감안해야 하는 법. 아무래도 학교에서 맡은 일이 일인 만큼 준비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데 더 신경 쓰인다. 사실 감기약을 먹은 터라 비몽사몽 간에 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전 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선생님이 말을 걸어 주었으나 몇 년 되지 않아 벌써 전혀 기억에 없다. 이런. 연말에 그 학교에 가기도 했는데 말이지. 작년 여름 이래로 갑자기 늙는 느낌인데 그 후유증일까?

    강의가 끝나고 건물을 나서니 해는 지고 바람이 분다. 바닷바람이 처음 뭍으로 오르는 곳. 뜨끈한 국물의 시간이다. 방한 마스크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써서 바람을 막고는 광복동으로 천천히 걸었다. 무릎이 아프니 멀리 가지는 못하는데 가까운 곳은 이번 여행 동료들이 잔뜩 몰릴 기세다. 홍대앞 거리처럼 청춘의 도시로 변해버린 광복동 저 모퉁이를 이리저리 돌아 눈에 띈, 오랜 세월이 켜켜이 어린 골목안 가게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영도의 먹자골목은 참 푸짐했기에 광복동도 그러하려니 했는데 맛은 훌륭하나 건더기가 반쪽이다. 흠, 해운 노동자를 상대로는 음식 인심도 넉넉하군. 그래도 뜨끈한 국물 한 대접 더 얻었다. 육고기를 즐기지 않는데도 참 예외적인, 퍼가고 싶은 맛이다.

    큰 길로 나오니 자갈치 시장 앞으로 차가 가득하다. 지하철로 이동,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드디어 출국수속을 하고 배에 올라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니 다다미가 깔렸다. 널따란 방에 모두들 서먹서먹하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종일 몇 번이나 땀으로 푹 젖은 데다 무릎이 부어오르는 상황이라 일단 씻고 쉬자 싶었는데 이야, 신난다. 샤워 수준이 아닌 탕이 둘씩이나 있는 거다. 게다가 아직 일러서 사람이 적다. 탕 안에 20분은 넉넉히 들어앉아 있었나? 몸이 풀리고 아픈 다리가 낫는 느낌이다. 한쪽에서 떠드는 목소리가 일행인데 벌써 얼굴을 텄는가 보다. 뭐 어쨌든 개운하게 씻고 방으로 오니 인사 타임. 둘러 앉아 서로 자기 소개를 하고 보니 가나다 순으로 버스를 태우느라 몽땅 한씨·황씨다. 그렇게 많은 한씨·황씨 남교사가 모인 것은 처음이다. 버스는 더하겠지.

    11시 즈음에 드디어 출발. 불빛이 휘황한 광안대교를 뒤로 일본으로 떠나는데 혹시나 하며 나가봤더니 갑판으로 나가는 문이 잠겼다. 오, 윤심덕·김우진 커플 탓인가, 바다가 거칠어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 예방을 하는 거겠지? 춥기도 하지만 배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갑판에 나가는 거라는데, 실망이다.

    방의 불이 꺼졌다. 자라는 신호. 잠이 부족하지만 웅웅거리는 엔진의 진동에 더해 배가 조금씩 흔들린다. 이런 걸 롤링이라고 한단다. 오래 전에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갈 때 멀미한 기억이 있지만 아직 괜찮다. 멀미약은 그냥 두고 자기로 했다. 잠이 부족해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인지 낯선 환경이라서인지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자다 깨다 콜록거리기를 반복하다 엔진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후쿠오카·하카다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해서도 여전히 배 안에서 기다리다가 식사. 상상외로 푸짐하다. 뷔페식. 일본식 아침으로 배불리 먹고 하선.

    3. 규슈 첫날

    일본의 첫 인상은 긴 줄로 시작되었다. 다른 승객이 다 내리고 나서 입국수속을 밟는데 그나마 늦게 나갔더니 거의 맨 뒤이다. 목욕탕 덕에 감기 기운은 가라앉았나 했는데 간밤에 설친 잠에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무릎이 다시 아프다. 몸이 좋지 않을 때 수업을 하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몸의 기가 죽죽 빠져나가는 느낌인데 꼭 그 식이다. 식은땀도 흐른다. 그 와중에도 흰색 마스크를 쓰고 아프리카를 다녀온 사람을 찾는 안내문을 든 직원이 참 곱다. 하지만 그 칙칙한 감색 제복이라니. 70년대 이전의 우리를 보는 듯하다. 우리 일행이 다 들어오자 그 고운 아가씨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쉬는 나이 지긋한 흰머리의 직원의 유니폼은 새까만, 제국의 인상이다. 그래도 입국수속은 별 탈 없다. 일본말로 했는지 영어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운이 빠졌으나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자신감이 생긴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니 아니나다를까, 맨 뒤다. 다리 때문에 앞으로 가이드와 같은 호차 동행에게 참 민폐겠구나는 불길한 예감이다.

    버스로 갔다. 다나카상(田中さん).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절대 흥분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다. 한국 손님을 태운다고 한국말 인사를 익히는 기사는 적다고, 가이드가 고맙다고 일러준다. 추가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농담인 일본에서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3

    낚시의 달인. 그리고 그 아내 – 미끼상도 가이드의 안내에 등장한다. 그리고 출발. 항구에서 벗어나 거리의 모습이 보인다. 짙은 회색 기와에 납작하나 단순하지 않은 지붕, 연한 브라운에 가까운 회벽, 다닥다닥 붙은 건물. 핸들에 바구니 달린 자전거. 저 멀리 산이 끝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일본식 2층집이 이어지는 풍경.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높은 건물이 도무지 없다. 무조건 부수고 높이 지어버리는 우리완 영 다른 ‘허름한’ 친숙함. 이런 것이 도시의 색을 만드는 것이리라.

    지도상의 이름은 후쿠오카(福岡)이나 바다나 항구는 하카타(博多)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사무라이의 동네는 후쿠오카이고 상인의 동네는 하카타인데 합쳐졌고, 아직도 그 이름을 고수한다고 한다. 흠, 하카타란 이름을 포기하긴 쉽지 않을 터이다. 바람과 해류 탓에 한반도와의 인연이 가장 먼저 이어진 이곳 규슈(九州)는 일본이 일찌감치 외부와 교류한 곳이다. 우리의 첫 방문지 터만 남은 다자이후(大宰府)는 당과 신라군의 침략을 걱정했다는 배경이 있는데, 이곳 후쿠오카는 몽골-고려군의 공격을 막은 곳이란 역사성도 가지고 있다. 외부와의 통로인 것이다. 힐튼호텔에서 받은 후쿠오카 안내지도에는 숙소 힐튼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원구방루(元寇防壘)라 해서 몽골군 침략에 대비해 세운 요새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수성(미즈키水城)이 당-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걱정하며 만든 것과 연관되는 것이다. 실제 전투 지역은 표시가 없으나 이 일대였을 터. 1차 몽골-고려 연합군이 다자이후 공격 중에 태풍으로 무너진 곳도 이 하카타 만(灣)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센고쿠(戰國)시대에 이 하카타는 유럽의 부르크(burg)에 비견되는 자유도시로서 상업과 대외무역이 번영하는 곳이 된다. 하지만 버스는 시내가 아닌 시외로 나가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려 다자이후 터에 도착했다. 좁은 동네길과 작은 버스, 경차가 대부분인, 마치 수원 교외 비슷한 느낌의 동네.

    고대(古代), 율령(律令)시대가장 늦게 도착하니 벌써 강의 준비가 끝나 있다. 손승철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우선은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

    리의 오노성(大野城)에 올라가보고 싶으나 당연히 안 될 말. 주춧돌 흔적을 보니 과연 천황이 진두지휘를 했을 만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 싶은데 더 인상적인 것은 유적지 둘레를 빙 두르고 있는 앙상한 겨울나무이다. 무슨 나무일까 다른 호차의 가이드에게 물었으나 모르겠단다. 나중에 안내지도를 읽다 보니 이곳은 철따라 피는 꽃이 훌륭한데 그 앙상한 나무는 가이드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히노키(檜-편백나무, 노송나무)가 아니라(그건 상록수이니) Cherry Blossom, 즉 일본이 자랑하는 사쿠라란다. 다자이후 정전(正殿) 터 앞에 서 있는 건 무슨 카에데(楓, 단풍나무)라고 팻말이 붙었다. 수성(미즈키水城)은 멈추지 않고 휘익 지났으나 그곳은 10월의 코스모스가 장관이라고 하고.

    돌아보는 사이 벌써 다들 버스에 타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동작이 빠른지. 본래 늘태보에 무릎이 새로 말썽인 나로서는 또다시 걱정이 앞서서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버스가 돌아나오는데 눈에 확 띄는 다자이후 터 안내 도로표지판. 세월을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감있는 그 표지판은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앞 도로에서 보이는 것이니 버스가 휙 도는 잠깐 사이에 띄었으나 이미 시간은 지났다. 스마트폰도 없고 남의 카메라를 빌려 가져온 약점이 여기에 있다. 찍고 싶은 것에 바로바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 나도 어서 디지털카메라를 사야겠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셨다는 다자이후 텐만궁(天滿宮)이란 신사는 근처이나 이번과는 상관없으니 통과. 저 멀리 아리타(有田)를 향해 고속도로로 나섰다. 고속도로에서도 보이는 수성을 순식간에 지나자 아침 햇살이 꽤 강하다. 커튼을 치니 밖을 볼 수 없다. 낯선 곳을 지날 때 가장 즐거운 것이 바로 경치 구경인데, 내 욕심만 부릴 수는 없다. 대신 잠깐 졸고 휴게소에 들러 처음으로 자판기도 이용해보았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우리랑 비슷한 가격. 우리가 흉내낸 17차의 원조 16차를 마셨다. 그 휴게소에서 놓친 것이 있다. 뒤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일본 역시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에서 관광안내지도를 무료로 나누어준단다. 광양실고의 선생님이 지도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이미 휴게소를 떠난 지 오래다. 지도 모으기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또 기회가 있겠지?

    근세(近世), 센고쿠(戰國)와 에도(江戶) 시대일본이 1871년 오스트리아 빈 박람회에 출품했던 커다란 도자기를 전시하는 곳은 독일(스위스였던가?)의 성을 옮겨

    놓은 듯한 바로크식 건물이다. 일본의 서양취미를 엿보여주는 그런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인데 도자기를 전시하고 판매도 하는 그런 곳에서 점심식사. 가이드는 사진도 찍으라고 끄는데 원조가 아니라고 무시하고 말았다. 덕분에 어디인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말았다. 식사는 또다시 뷔페식. 내 입맛은 일본에 딱 맞는지 다른 사람들은 맛이 이상하다는 아이스크림조차 내겐 독특하면서도 맛있게 느껴진다. 살찔 징조가 보인다. 이놈의 바이킹구(バイキング-뷔페를 이렇게 부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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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타 초(有田町). 오사카 밑의 아리다 시(有田市)가 아니라 사가 현(佐賀 縣)에 있다. 예전에 헷갈렸던 기억.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에선가는 백토(사실 돌이다)를 찾은 이삼평(李三平)이 아리타자기(야리타야키有田燒)를 굽게 되는 이즈미야마(泉山) 산이 소개되는데 그곳을 가지는 않고 도잔신사(陶山神社, 스에야마진자)가 있는 곳만 가게 되었다. 좁다란 산길을 요리조리 돌아돌아 도착한 조그만 동네. 그 앞산 꼭대기. 동네 이름은 오다루(大樽)란다. 산과 산 사이의 좁다란 계곡 같은 동네. 직계 15대 후손이 직접 나와 인사를 하고 조선일보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그 신사는 바로 앞에 철길이 있다. 신사에 있는 동안 미도리라는 이름의 기차(Midori Express)가 두 차례 지나간다. 기차길 옆 오막살이가 아니라 신사. 꽤나 시끄럽겠다. 이래서야 신이 있다는 느낌이 나겠나 하지만 사실 신사 건물 자체는 철길에서 상당히 높이 올라앉아 있으므로 별 상관없지 싶다. 신사는 안내판부터 도리이까지 청화백자로 구워 만든 본격적인 모습이다. 본전에 걸어놓은 장식도 마찬가지. 태풍에 망가져 죽죽 갈라진 도리이가 뭔가 좀 안쓰럽긴 했다. 그 뒤편 산꼭대기에 이삼평 비가 있어 온 동네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돈도 들어가 만들어놓은 비탈길(도잔사카)로 내려왔는데 봄부터 꽃이 멋진 곳이란다. 길이 좁아 기다리는 버스가 길을 막고 있다. 그 앞에 늘어선 조그만 가게. 희미한 오후 햇살에 먼지가 비치는 듯한 쇼윈도 안쪽은 물건조차 별거 없어 한가로와 보이는데 그래도 가게마다 특색 있는 것들이 있단다. 개중 아리타관(有田館)이란 상호의 가게가 가장 큰데, 혹시 그 이삼평 후손이 운영하는 것일까? 남의 것을 베끼지 않는 마음가짐. 우리가 아는 일본과는 또다른 모습이고 관광지 상점마다 온통 똑같은 중국산 기념품이 넘쳐나는 우리와는 영 다르다.

    이번엔 우리나라 충청남도에 있는 당진과 같은 이름의 가라쓰(唐津) 시 친제이 마치(鎭西町)의 나고야(名護屋). 다시 산길을 돌고돌아 나와 고속도로로 한참을 달린 끝에 도착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드디어 일본의 성 자취를 처음 보게 된다. 사뭇 오래 전, 지리교사 답사에 따라갔다가 우리나라 축대 쌓기 모습을 왜성쌓기라고 배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성벽과는 그 모습이 퍽이나 다르다. 식민지의 경험이 이런 식으로 일상 속에 촘촘히 들어와 있구나 싶은데, 이 나고야성은 동네의 축대와는 전혀 다르다. 큰 바위, 좀 작은 바위를 솜씨좋게 쌓아올린 모습 속에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그랭이 공법과 같아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짧은 시간 안에 높고 단단히 쌓으려면 크기가 다르다고 돌을 허투루 다루면 안 되는 법.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돌쌓기의 아이디어는 결국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성벽 훼손을 최소화하려는 주차장 자리잡기. 그 좁은 자리에 단번에 집어넣는 일본 버스기사들의 솜씨. 와우.

    입구에는 역시 일본이라선가 부처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 성 오르기. 센고쿠시대에 만든 성인 만큼 산노마루(三の丸), 니노마루(二の丸), 혼마루(本丸) 구조를 갖추고 있어 차라리 오르기 편하다. 우리 같으면 심한 비탈을 기다시피 올라가야 할 것 같은 높이인데도 이리 저리 돌아 올라가기에 경사가 한결 낮다. 굽이굽이 올라가는 자리 자리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하다. 그 산뜻한 공기. 그리고 그 끝에 나서면 갑자기 확 트이는 전망. 벼랑은 깎아지른 듯 하고 저 멀리 바다는 희미하다.

    나고야성 박물관은 월요일이 쉬는 날이라는데 우리 때문에 열었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안내하던 부산 살았다는 분도 쉬는 날 나오셨다. 모두들 감사하다. 그리고 성터에서 늦게 내려온 탓에 박물관 입장이 늦어 내 생전 처음으로 유물 구경을 그리도 어설프게 했다. 앞으로도 박물관은 이러할 것임을 예감했는데 다행히 도록을 구입할 짬은 있었다. 제대로 못 보니 도록으로라도 대신해야 할 터. 도록은 생각보다 쌌다.

    현재이제 고속도로로 후쿠오카·하카타로 귀환. 자기소개를 하면서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힐튼 호텔에 도착했다. 바닷가.

    갯벌을 메꿔 만든 땅. 소프트뱅크의 후쿠오카 돔구장 바로 곁에 있는 이곳은 건물 모양이 독특하다. 위에서 보면 배 모양이다. 하카타를 무대로 하는 일본의 요리 만화에 간혹 등장하는 풍경. 서울 학교 근무자가 8호차 남교사 중에는 딱 두 명인데(모두 고교 근무) 그 둘이 같은 방을 쓴다. 남들은 끄는 가방, 멜 가방 잔뜩인데 이분은 다 채우지 않은 커다란 배낭 하나. 산을 좋아하는 분인 듯하다. 바리바리 싸온 처지라 가뿐한 짐이 너무 부럽다.

    호텔 방문은 카드키를 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그리고 키를 꼽는 곳에 넣어야 불이 켜지는 구조. 짐을 정리하는데 무릎이 휘청 한다. 아직 배를 내리지 않은 느낌이다. 그리 많이 걷진 않았으나 비탈이 많아 무릎에 무리가 갔는가 보다 하고 저녁 식사. 4층, 또 바이킹구. 힐튼 답게 화려한 조명과 장식에 흑인 요리사가 커다란 눈에 빙긋이 웃음을 담고 고기를 써는데 일본말이 유창하다. 아주 다양하고 일식도 좋았으나 특히 양식이 본격적이어 보인다. 잔뜩 먹었다.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5

    객실로 가니 또 머리가 위잉 하는 기분이다. 피로의 후유증이겠지? 복도로 나가 보니 층별 안내판이 붙어 있다. 배 모양. 아, 그렇구나. 바닷가 간척지, 배 모양, 고층건물(방은 26층인데 중간층이다). 결론은 내진설계와 바람일 듯. 내 몸 상태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온다. 얼음을 받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 한 통 받았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일본은 최고의 대접이 차를 내는 것이란다. 물도 좋다고 한다. 화장실 수돗물을 그냥 먹어도 좋단다. 정말 우리 수돗물과 달리 물때가 거의 끼지 않는다. 얼음을 넣어 마시니 개운하고 깔끔하다. 방에는 녹차 외에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서양계 호텔다운 대응이리라. 재미있는 것은 1회용 포장. 우리의 커피믹스 스타일인데 일본이 먼저일까, 우리가 먼저일까. 아마 일본이 앞서겠지? 인기는 우리나라에서이지만.

    생각 외로 방은 좁으나 1인용 침대는 넓은 편이다. 피로를 핑계로 일찍 자는데 자리가 설어선가 이리 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편한데도 누리지 못하니···.

    4. 규슈 둘째 날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아침은 일찍 시작. 식사 자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첫 번째 입장. 일본식 낫토를 기대했는데 없다. 서양계 호텔이라서일까? 가이드도 벌써 모두 나와 줄을 세운다. 아침도 배불리. 간밤에 술을 펐다는 젊은 동행이 접시 가득 퍼와놓고 입맛이 없다고 찌푸리고 있는 데, 곁에서 접시를 두 번이나 싹싹 비웠다.

    짐을 챙겨 나오면서 데스크에서 후쿠오카 관광지도를 받았다. 영어, 중국어, 한글로 나와 있다. 한국 관광객이 많다는 증거. 규슈 전체 지도는 영어판 책자 안에 작게 나온 것 밖에 없단다. 일찍 나와선가 버스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산책 겸 길을 건너니 버스에서 다나카상이 안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버스 탈 생각이 아니어서 살짝 다리 곁 코스를 산책했다.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출근한다. 자전거에서 일어서서 비탈을 올라가는 아가씨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흐릴까 싶어 우산을 준비했는데 활짝 갠다. 가이드의 설명에 일본 날씨는 두 가지란다. 비오거나 비올 듯하거나. 차창 밖 햇살이 눈부시다. 커튼을 쳐야 했다. 오늘도 창밖 보긴 글렀으니 한숨 자자.

    고대, 고분 시대자료실 먼저 구경. 에타 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 전방후원고분의 한 형태로 이곳에서 나온 칼의 명문이 유명

    하다. “台(治)天下獲□□□鹵大王世”로 시작되는 문장에서 ‘치천하(治天下)’와 ‘대왕(大王)’이란 표현 때문이다. 그리고 ‘獲□□□鹵’가 누구냐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치바 현의 이나리다이(稻荷臺) 1호 고분에서 출토된 칼의 명문에 등장하는 ‘獲加多支鹵大王’와 같은 이일 것이라 보아 와카타케루란 이름을 가진 유랴쿠(雄略)천황과 관련되었으리라 설명한다. 검의 실물은 당연 도쿄국립박물관에 있고 자료실에는 복제가 전시되어 마음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명문을 분명하게 새겨넣었고 안내판에는 해석이 붙어 있다.

    무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유리에 습기가 가득 해서 안이 잘 보이진 않으나 무덤 안의 관은 집모양. 죽은 뒤의 세상에서 무덤은 집이 되는 것이겠지. 우리와 다르지 않은 계세 사상. 출토 유물도 백제계라는 것이 확실한 동네인 셈이다. 고분시대 일본사 책에 늘 등장하는 곳 중 하나라 궁금했는데 봉분의 나무를 없애지 않고 두어 우리네 왕릉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또 도자기 체험관이 같이 있다. 역사 전시의 기본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쓸 데 없이 어려운 말로 치장한 우리나라 자료관, 박물관과 차별되는 사례다.

    우리 일행만 우글우글 하니 한국 어딘가 관광지 분위기인데 아기엄마가 애를 데리고 산책을 와 있다. 버르장머리 없게 키우는 우리나라 애들 빼놓고 애는 어느 곳이든 귀여운 법. 흐릿한 다자이후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와 있더니 여기는 화창한 봄날같은 날씨에 어울리는 꼬마의 등장이다. 어린데 일본말 아주 잘 한다. 아, 여기 일본이지.

    현재하카타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표지판에 도스(鳥栖)가 보인다. 축구선수 윤정환이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했다는, 도스

    에 연고를 둔 일본 축구팀이 유명하다는데, 이곳이다. 관광객 상대의 식당에서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이곳 라면인가 우동인가는 좀 짰다), 다들 아래층 기념품점을 도는 중에 재빨리 빠져나가 파친코 가게 옆 헌책방엘 잠시 들렀다. 우리나라에 몇 년 동안 진출했다가 철수한 Book Off의 어딘가 동네 지점. 깔끔하기고 깨끗하나 약간의 소설과 문고본, 그리고 온통 만화, CD다. 서울역이나 신촌에 있던 우리나라 북오프의 분위기 역시 체인점이라 모두들 똑같았나 보다.

  • 6

    다시 이동. 이번엔 규슈국립박물관. 가는 길에 어느 곳에선가 초등하교(치쿠시노筑紫野 시립 아시키阿志岐소학교) 하교 시간과 맞아서 소학생들이 학교에서 우르르 몰려나온다. 아무리 학교가 좋아도 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하다. 부지런히 뛰어가는 어린이의 등에는 검은색 촌스런 란도셀. 우리 세대가 아마도 란도셀을 메던 마지막 시대일 듯하다. 일본과는 약간 모양이 달랐다. 나는 누나가 메던 것을 물려받았는데 빨간색이라 징징거렸더니 아버지께서 감색 페인트를 칠해주셨는데, 쓰다 보니 덮개 부분의 칠이 벗겨져 붉은 색이 드러났다. 이런 걸 메고 다닐 때는 한 학교에 학생이 너무 많아(운동장 조회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던 기억이 있는데 운동장 가득한 전교생이 6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1,2학년은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어 한 교실을 두 반이 사용했다. 그리고 3학년 땐가 모두들 그런 가방에서 벗어나는 바람을 타고 나 역시 그 유명한 쓰리쎄븐 가방을 새로 받아 메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여긴 아직도 그렇다. 예전에 ‘쫑아는 사춘기’라고 번역되어 만화전문 채널에서 방영했다는 일본 만화 역시 전입생이 란도셀이 아닌 일반 서류가방을 들고 있어서 모드들 일반 서류가방으로 가방을 바꾸는 이야기로 첫 회가 시작되는데, 그 주인공은 5학년.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3학년에 가방을 바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은 여전히 란도셀이다. 한 번 정해지면 쉽게 바꾸지 않는 나라. 하카타 항구에서 입국수속을 할 때 직원들의 복장이 다시 생각나는 장면이다.

    규슈국립박물관은 일본에 세 번짼가의 국립박물관이라는데 자기 유물이 별로 없어서 빌린 유물로 벌이는 특별전이 많단다. 아주 멋진 건물이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그런데 가는 길이 눈에 익다. 어제 다자이후 가는 길과 겹친다. 다자이후 덴만궁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넓은 길로 가는 건지 조금 돌았다. 그래선지 하교하는 초등학생을 만났던 것. 이번에도 도착이 늦어 후다닥 가느라고 주차장 쪽에서 제대로 보질 못했는데 건물 그늘에서 강의하는 시간에 사진을 찍으려 보니 서쪽을 향해 산을 내려가는 거북이(현무) 모습이다. 파란 유리의 거대한 거북. 그늘 쪽에서 보니 아쉽게도 머리 부분이 부속 건물에 가린다.

    이 박물관은 3층에서 백제와의 특별전 중이다. 그 유명한 칠지도 실물이 등장한다 해서 기대했다. 과연···. 그 외에도 어둠침침한 곳에 불상이 잔뜩에 고대 중세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한 중요한 전시가 가득이다. 넓기 짝이 없어 역시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도록으로 대체했다. 게다가 ‘도록(圖錄-즈로쿠)’이란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쩔쩔맸다. ‘그림 도’자를 ‘즈’라 읽는다. 물론 전체를 구입하지 못하고 특별전 도록만 구입. 그리하고 나니 4층을 볼 시간이 없다. 그래도 억지로 올라가 그야말로 뛰다시피 돌다 말고 아쉬움을 가득 안고 나와야 했다. 역시 맨 뒤.

    이제 규슈를 벗어나야 할 시간이다. 버스는 고속도로로 나서서 윙윙 달린다. 그럼에도 맨 뒤 출발이라 앞 차가 보이지 않는다. 다나카상, 속도를 올린다. 왕복 4차로 고속도로에서 1차로로 계속 달리면서 2차로 차들을 추월하고 있다. 그런데 고속도로의 풍경이 참 여유롭다. 화물차나 자가용이나 모두들 그리 빨리 달리지 않는다. 앞서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순순히 달린다. 가이드의 말에는 이곳 고속도로에서는 과속, 과적을 하지 않는단다. 그래선가 도로가 참 깨끗하다. 정신없이 앞지르며 뻔질나게 차로를 바꾸는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풍경이 사뭇 다르다. 게다가 고속도로에 가로등이 없는 구간이 참 많다. 가이드의 경험에 의하면 고속도로에 가로등이 없어 밤에 과속을 하면 매우 위험하단다. 저편 도로 너머로 기린 맥주 공장(?)이 보인다. 규슈, 특히 구마모토 쪽은 물이 좋아 맥주공장이 많다는데 그래서일까. 하지만 도로는 곧 산골로 들어섰고, 한동안 도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해가 기울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깊은 산골 분위기. 그런데 갑자기 산과 산 틈새로 바다가 나타났다. 규슈에서 혼슈로 넘어가는 다리 간몬대교의 등장. 배가 지나다니는 것을 생각해서 높직이 매단 거대한 다리를 건너 시모노세키 도착.

    고대 말에서 중세로, 그리고 근세, 근대 – 단노우라에서 시모노세키까지아카마신궁.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저 유명한 겐페이(源平)의 마지막 전투인 단노우라(壇の浦) 전투에서 투

    신 사망한 당년 8세의 안토쿠(安德)천황을 모신 신사다. 천황을 모신 곳이라 신사라 하지 않고 신궁(神宮)이라 부른다. 투신하였기에 미즈텐노(水天皇), 미즈텐구(水天宮)라고도 한단다. 그에 대한 공양탑은 낮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아주 촘촘한 층구조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불탑과 각도가 비슷하지만 층간격이 전혀 다르다. 그러니 높이가 낮다. 또 8지경(八咫鏡)이 발견되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천황의 3종신기 중 하나였던 거울 진품이라 하는데, 1958년에 이야기가 시작되어 20여 년이 지난 1978년에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정성이 하늘에 뻗친 것을 보니 신토가 종교는 종교다.

    잠시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를 보자.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7

    기요모리 공의 미망인인 이위 마님은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던 터라 평소 입던 쥐색 겹옷을 뒤집어쓰고 명주 너른바지의 좌우 자락을 걷어 묶었다. 그러고는 왕실의 보물인 구슬 함을 옆에 끼고 보검을 허리에 차더니 주상을 품에 안고서 “내 비록 여자지만 적군의 손에 죽지는 않겠다. 마마와 함께 갈 것이니 마마께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둘러 내 뒤를 따르라” 하며 뱃전으로 걸어갔다. 주상은 올해 여덟 살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수려한 용모는 빛을 발해 주위가 환히 빛나 보였고 검은 머리는 치렁치렁 어깨 너머까지 자라 있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냐?” 하고 묻자 이위 마님은 어린 주상을 쳐다보며 눈물을 참고서 “마마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셨나이까? 전생에 십선의 계행을 하신 공덕으로 현세에 만승천자로 태어나셨으나 악연으로 인해 이제 운이 다하신 거랍니다. 우선 동쪽을 향해 이세의 대신령께 작별 인사를 드린 다음, 서방정토에서 맞아주시도록 서쪽을 향해 염불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이 나라는 변방 소국이어서 귀찮고 어지러운 일이 많았기에 극락정토라는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려 하옵니다” 하고 울며 아뢰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도는 평상복인 황의를 입고 각발을 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어린 주상은 작고 여린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먼저 동쪽을 향해 이세 대신령께 작별 인사를 올리고, 그 다음 서쪽을 향해 염불을 올렸다. 그러자 이위 마님은 바로 주상을 품에 안더니 “바다 밑에도 왕궁이 있답니다” 하고 달래면서 천길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신궁이 바라보는 바다가 단노우라이다. 중세 일본 불교를 바탕으로 ‘어제는 동관(東關) 기슭에서 재갈을 나란히 10만여 기, 오늘은 서해 파도에 닻줄을 풀고 7천여 명’이라 하여 성자필쇠(盛者必衰)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일본 중세 이래 가장 인기 있는 작품 헤이케이야기의 무대 중 마지막. 지금은 다른 견해도 많이 나와 있는 것으로 아나, 이 전투로 다이라(平) 가문을 완전히 몰아낸 미나모토(源) 가문이 가마쿠라에 막부를 만드는 것이 일본 중세의 시작이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다이라든 미나모토든 그 원 조상은 천황집안이라고 한다. 천황의 후손이 현 천황과 촌수가 멀어진 뒤 지방으로 내려갈 때 천황이 새로 성씨를 내려주는데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그래서일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군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 두 집안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결국 일본은 천황과 관련해서만 최고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권위를 갖추는 걸까? 센고쿠시대라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을 다 뒤집어버리는 전쟁의 시대였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關白)의 지위나마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어린 천황을 모시는 신궁이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다니, 탐방 일행이 3백 명이 넘어 숙소 잡기가 만만찮을 것임을 고려하면 조선통신사의 모든 이가 숙소로 삼았을 리는 없고 아마 정사·부사 등등 고위 관리 몇몇만이 머물지 않았나 싶은 작은 규모다. 책자에 소개된 에도 시대 신궁 주변 마을 모습 역시 조촐하다.

    주차장 옆 바닷가에는 “조선통신사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라는 기념비가 있다. 신궁으로 가기 전에 들러서 모두들 사진 하나씩 찍고 가는데 글자가 김종필의 글씨이다. 한일의원연맹에서 만들었다나? 김종필이 회장을 할 때 만들었단다. 옆과 뒤를 못 보아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통신사그림의 부조도 새겨져 있다. 아마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나랏돈으로 만들어둔 것 아닐까?

    동네 이름이 예전에 아카마(赤間)라선가 신궁 건물은 온통 빨간색. 중국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단청 같은 짙은 색이 아닌 그저 새빨간 건물. 어느 선생님은 부적을 산다. 공부에 관한 부적. 흠, 입시와 관련해서는 다자이후텐만궁에 갔어야 하는데 여기서 찾는 것이 좀 그래 보이나 어디든 부적을 살 수 있다면 일본 문화를 느끼는 좋은 거겠지. 그곳에서 에마(繪馬)의 실물도 보았다. 일종의 일회용일 텐데도 참 곱고 튼튼해 보인다. 식당 나무젓가락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는 나라여서일까, 아니면 신에게 기원하는 물건이기 때문일까?

    신궁 옆은 그 유명한 춘범루(슌판로春帆樓). 개도 자기 집 마당에서는 짖는 소리가 커지기 마련인데 1885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할 때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리훙장은 얼마나 무게를 잡았을까? 그러나 딱 10년 만에 이번엔 늙은 리훙장이 자기 집을 떠나 일본 촌구석으로 불려와 심지어 습격까지 당해가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를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던 장소가 아카마신궁 바로 곁이라니. 그 옛날 춘범루는 자취도 없고 일본측 대표 두 사람의 동상과 기념관 안의 재현전시가 다인데 복제품이라 그런지 저녁 햇살에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햇빛에 가린 유리 안쪽에는 화려했던 춘범루의 옛 모습을 찍은 사진과 리훙장의 사진, 글씨, 널리 알려진 회담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리훙장이 습격을 피해 다녔다는 소로 쪽에는 재미있게도 수상 겸 외무부장관이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글씨를 쓴 메이지천황 수레(輦) 주차자리 기념비가 있다. 뒤를 보지 못해 언제였을지는 모르지만 혹시 조약 체결 과정에 메이지천황이 방문했던 걸까?

    현재이제 배를 타러 신모지(新門司) 항으로 가야 한다. 버스가 다시 비탈을 오르는데 여중생 한 녀석이 만화를 보면서

    비탈을 오른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집에 가는 건 아닐 듯한 시간. 어딘가를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리라. 우리나라에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걷고 있을 텐데 일본은 스마트폰보다 아직은 만화일까?

    다시 간몬대교를 건너고 산길을 돌아 신모지항에 도착, 배에 올랐다. 이곳 역시 일본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알고

  • 8

    있는데 그 규모는 부산이나 하카타와는 사뭇 다르다. 주변도 한산하다. 두 척에 나누어 탄다는데 다른 배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또다시 맨 뒤에 도착하였으니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다나카상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정해진 방에 가니 캡슐형 숙소다. 4호차 남선생님들과 같이 쓴다는데 사생활을 보호하는 구조라 서로들 서먹서먹하다. 저녁 식사는 또다시 바이킹구. 순서대로 나오란 걸 바로 나와 줄을 서니 가장 먼저 음식을 받은 이들이 가져온 음식양이 엄청나다. 역시 젊구나 하면서 돌다 보니 내 접시 역시 남 흉 볼 바가 아니다. 구석 자리에서 다 먹고 나오면서 보니 후식 코너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마시멜로 초코퐁뒤. 보기만 했지 언제 마시멜로를 먹어보긴 했을까 싶어 몇 개 집어먹었다. 씹는 맛이 젤리 비슷한 게 아주 흥미롭다. 더 부드럽고 살짝 단맛이 도는, 이러니 아이들이 좋아하겠구나 싶다. 그 유명한 마시멜로 테스트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식사 후 갑판으로 나가는 건 어떨까 하고 갑판문을 열어보았더니 열린다. 각 층별 갑판을 휘익 돌아보는데 가장 위층 비싼 곳은 조용하다. 배는 아직 출발 전. 우리 숙소 바로 위층에서는 일본 노인들이 갑판 옆 테이블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어떤 도시락일지 궁금하다. 일본은 도시락(벤또) 문화가 발달한 곳. 하지만 노인들이니 사람이 우글거리는 뷔페가 싫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온통 외국인 아닌가.

    한 바퀴 돌고 식당 앞 홀에서 음식 광고판을 보았다. 레스토랑에서 봄 계절음식을 할 예정인 듯한데, 도무지 무슨 음식인지 읽을 수가 없다. 같이 계신 선생님은 일본에서 몇 년 사셨다는데 잘 모르겠단다. 매점의 남직원에게 물어보니 조금 뒤에 직접 나와 읽는 방법을 하나하나 친절히 소개한다. 일본은 한자의 소리를 이용하여 한자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네 말을 표기하는데 그 덕분에 들어본 음식 이름인데도 도대체 알아먹지 못했다. 그 곁에 TV가 있어 한자리 차지하고 보기로 했다. 마침 아시아경기 예선 일본의 축구시합인데, 텔레비전은 최신이지만 화질은 구식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빨리 HD방송으로 전환한 것으로 아는데 예전 화면인 것. 그래서 녹화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실황이다. 그곳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8호차 남선생님들이 모여들었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첫날 만큼 오래 있진 못한다.

    자리로 돌아왔다가 자기 전에 혹시 하고 갑판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보니 이번에도 열린다. 세토 내해를 달리는 배 고물로 나가니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 양쪽 기슭이 다 보인다. 세토 내해가 좁긴 하다. 그만큼 바다가 잔잔하다. 더 작은 배인데도 대한해협을 지날 때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침 지나는 곳이 촌이라서일까? 육지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다. 도시의 휘황함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불빛 몇 개가 흔들릴 뿐. 육지와 달리 서녘 하늘에는 기울어진 오리온자리가 찬란하다. 일본의 자동차회사인가 상표인가 하여간 스바루라고 부르는 좀생이별도 오랜만에 본다. 황소자리, 큰개자리, 쌍둥이자리, 뱀주인자리···. 눈이 많이 나쁜데도 이렇게나 많이 보인다. 대신 동녘은 흐려 있다. 일기예보에 오사카 쪽은 내일 밤부터 비가 온다더니. 일본이 큰 나라이긴 한가 보다. 뭐 우리나라도 지역에 따라서는 그런 곳이 있지만 사실 어느 곳이든 밤하늘을 보면 어느 쪽이든 환하게 밝다. 도시의 불빛이 밤새 꺼지지 않는 거다. 이십 년이 조금 못 되는 세월, 소위 말하는 아이엠에프 전에 학교에서 천체망원경을 사는 붐이 불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일제로 제법 괜찮은 놈을 샀는데 천체망원경 사용법을 모르고, 또 밤에 이걸 들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야외학습 계획을 세워야 하니. 그래서 한 1년 열심히 빌려다 쓴 적이 있다. 그 다음 학교에서도 마침 망원경을 산 덕분에 설명서를 번역해주고 과학 선생님 한 분과 저 멀리 강원도까지 관측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에는 이승복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같이 간 분이 멧돼지가 나올 듯하다는 그런 산골임에도 하늘이 훤했다. 산 몇 개 너머에 스키장이 있어 그러하단다. 그런데 일본은 고속도로에 가로등이 별로 없어서인지 하늘이 어두운 곳이 이렇게 있는 거다. 찬바람을 피해 시설 뒤편 바람이 막히는 곳에서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추억에 젖었다.

    5. 오사카 첫날 – 아스카, 나라

    피곤해서인지 전날 보다는 조금 더 잤지만 역시 깊지는 못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꾸역꾸역 아침을 먹었다. 이번 아침에는 드디어 낫토가 나왔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양식으로 먹는데 일본에 왔으니 일식이지 하면서 낫토를 먹어보았다. 몇 년 전 국내 모 업체에서 내놓았던 낫토와 맛이 다르다. 청국장 비슷한 냄새는 같지만 훨씬 맛이 부드럽고 좋다. 국산은 아린 맛이 남았는데 그런 뒷맛이 전혀 없다. 돌아가면 이런 맛을 다시 보기 힘들겠지 하는 아쉬움이 큰 순간이다.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9

    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커피 한 잔을 즐긴다. 창밖이 희뿌옇다. 자리로 돌아오니 방송이 나온다. 무어라 하는지는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카시’라는 말에 후다닥 일어나 사진기를 들고 갑판으로 나갔다. 틀림없이 곧 아카시 대교를 지날 거라는 안내일 거다. 일본의 유명한 경치 중 하나라는 데 과연 어떨까. 벌써 여러 사람이 나와 사진을 찍는다. 간몬대교처럼 높다란 사장교. 배가 사뭇 빨리 나아가니 다리를 전부 찍기 쉽잖다. 그리고 역시나 세찬 바닷바람. 이 다리는 시코쿠의 제일 동쪽, 즉 우리가 가는 바닷길의 제일 동쪽에 있는 마지막 다리이다. 커다란 화물선들이 저쪽 혼슈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멀리 도시가 보인다. 고베(神戶). 일출까지 찍고서 보니 바다가 훨씬 넓어졌다. 살짝 남쪽으로 커브를 그리면서 배가 달린다. 저 흐린 하늘 쪽에 오사카가 있겠지 싶은데 너무 추워 들어가기로 했다.

    오사카에 도착한 다음 이번에는 늦지 않게 내렸다. 새로운 버스 8대가 기다린다. 이번 기사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목소리도 우렁우렁하고 몸집 커다란 아저씨. 오사라기상(大佛さん). 어, 어디서 들어본 특이한 성씨인데 뭐더라 한참 생각을 하는데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밤에야 비로소 생각이 나서 사흘 째 되는 날, 오사카성에선가 한 마디 건넸다. 오사라지 지로(大佛次郞)와 구라마 텐구(鞍馬天狗)를 안다 그랬더니 아, 하면서 뭐라뭐라 막 이야기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다. 오로지 글자만 읽는 일본어 실력이다 보니 대화가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뭔가 관계된다는 말을 한 듯하다. 내가 아는 건 오로지 ‘대불’이란 글자의 특이한 성씨를 가졌는데 다이부쓰가 아닌 ‘오사라기’라고 읽는다는 것. 그의 장편소설로 구라마 텐구라는 게 있는데 예전에 국내에 일부가 소개된 적이 있다는 것.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다. 단 한 권. 그렇게 짧은 게 아닐 텐데. 가난한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해결하며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은 신문연재 작품이라 대중소설가라고 인식되었으나 그의 사후 재평가되면서 지금은 ‘오사라기 지로’상이라는 문학상도 있다는 것 등을 읽었는데 그 책은 현재 누군가에게 빌려준 상황이라 확인하지는 못했다.

    고대 – 나라(奈良), 헤이조쿄(平城京), 아스카(飛鳥)일정이 바뀌었다. 아스카(飛鳥)와 나라(奈良)를 가는데 동대사(도다이지東大寺)를 뺄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와서 먼

    저 가기로 한 것. 신난다. 고대 일본의 랜드마크를 확 바꾸어놓은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조쿄(平城京)라는 도성의 건설과 율령시대, 그리고 불교가 사회 저변에 자리잡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그 유명한 동대사. 일정에 빠져 있기에 아쉽기 짝이 없었는데 결국 가는구나 싶다. 가이드가 유명한 사슴 이야기를 한다. 냄새를 조심해야 한다나. 동대사에 도착하고 나서 남문 옆에 모아놓고 설명하는 걸 듣는둥마는둥 하면서 사슴을 보고 있으려니 수컷 두 마리가 싸움을 한다. 옳다꾸나 싶어 사진을 찍는데 이놈들이 이리저리 뛰다 내게로 돌진한다. 하마터면 받힐 뻔 했는데 다행히 살짝 닿는 것으로 끝났다. 사슴의 승부가 나서 진 놈은 화단으로 도망치고 이긴 놈은 자랑스레 자리를 차지한다. 한 초등학생이 사슴에게 과자를 주는데 자꾸 따라붙자 난처해한다. 남문 앞에까지 도망치는데 사슴이 따라간다. 사슴 상대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남문은 철망으로 곁이 가려져 있다. 들여다보니 절 입구에 늘 있는 거대한 목조 사천왕상. 아주 멋지다. 새나 동물이 들어가 훼손될까 염려해서인지 철망으로 가려 보는 데는 좀 아쉽다. 나로서는 사실 밋밋한 대불보다 이것이 더 멋있다. 그러나 둘이 없다. 어디로 갔을까. 언제 훼손되었을까. 동대사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이니 공부를 해봐야 하겠다. 설명에는 골기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꼭 우리나라의 영향만은 아니지 않을까? 중국에서 기원한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

    중국인 관광객이 많다. 이 동대사는 중국에 절대 뒤지지 않는 크기이니 중국인으로서는 어떤 감정일까. 중국 스님까지 초청하여 개안공양을 했다는데···. 그리고 본전 앞의 포장로의 돌은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데 일본이 천하를 다스리는 고대 제국이라는 이념을 표현한 것이리라. 중국은 그 크기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제국임을 드러낸 데 비해 일본의 경우는 어찌 보면 상당히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임나일본부 등이 그러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고대에 갖추어놓고 있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이런 거야 광개토대왕릉비 등에서도 보이는 세계 각국 고대 사회에서 늘 나타나는데, 이데올로기와 실제는 다른 법. 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일본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외침략이나 근세 통신사 관련 갈등에서도 나타나는 장면이다. 근대에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이념을 실현해냈으니 평범한 일본인은 자신의 과거가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까. 심지어 제국 시대의 역사관을 비판하며 등장한 전후 역사학의 중심에서조차 ‘동이의 소제국’이란 용어는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21세기가 된 지금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국내에는 도대체 소개되질 않는다. 그저 일본의 역사왜곡 자체만 이야기한다.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 건지를 제쳐놓고.

    일본은 옛 것을 수리할 때 옛 모습 그대로만 하지 않고 당대의 모습으로 바꾸는 전통이 있단다. 그래서인가 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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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 대불전 역시 나라 시대 원래 모습이 아니라 에도시대 건축물 답게 변형되어 있다. 앞쪽 지붕에 튀어나온 둥근지붕을 추가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에도시대 건물에 등장하는 이런 구조(이름을 모르겠다)가 일본의 투구(이런 모자를 쓴 쇼군 그림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처럼 보여 전투에 나서는 모양새라고 생각되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본의 미의식이 그러하니 어쩌랴. 그래서인지 칠이 다 벗어졌으나 세월을 느끼게 하는 남문이 좀 더 멋져 보인다. 가마쿠라 시대의 건물.

    대불전(금당) 안은 역시 어둡다. 금당 앞에는 사람들이 부처님께 향을 올린다. 비로자나불. 화엄 세계를 표현한 이 절의 부처님은 사진을 막 찍을 수 있는데 잘 안 찍힌다. 플래시를 안 써서 그럴까? 그냥 뒤로 돌아 전시물을 본다. 부처님 손 하나, 동대사 옛 모습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읽을 시간 없이 또 그냥 휙 돌아나와 보니 금당 앞에 등롱이 예쁘다. 잘 보니 문이 있는 면과 천녀의 모습이 번갈아 있다. 자물쇠가 달린 문쪽은 사자인가 하는 동물 네 마리의 부조가 똑같고 천녀는 면면이 다 다르다. 다 악기를 가지고 있거나 연주하는 모습. 그러고 보니 입장권에 있는 국보는 놓치지 않고 찍었구나 싶다. 나라시대까지 한반도나 수·당과의 교류를 통하여 일본이 중국이나 우리의 문화를 받아들여 스스로 국제적인 모습을 이룩한 문화의 총 본산. 그러니 이 동대사에는 그 외에도 많은 건물과 유물이 있는데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게다가 이곳은 헤이조쿄 아닌가. 일본 고대 율령시대의 도읍지. 곁에 줄줄이 유적지가 늘어서 있는데 그냥 지나가야 한다. 심지어 저 뒤에는 정창원(쇼소인正倉院)이 있다는데. 하. 아참, 나중에 그 정창원에 소장된 보물 중에는 이 동대사 대불개안 공양에서 쓰인 부처님을 덮은 포장을 벗길 때 쓴 줄이 남아있다는 사진을 보았다.

    이번에는 골목골목을 돌아 법륭사 앞 2층 식당. 오사카의 유명한 기쓰네우동과 나라즈케가 들어 있는 벤또 점심을 먹었다. 몇 년 전 정읍 사는 분의 소개로 먹기 시작한 나라즈케(奈良漬-울외라는 일본에서 건너온 참외 사촌 비슷한 놈으로 만든다)는 일식집에서 간혹 먹어본 맛이었는데, 식구들은 별로라지만 나는 아주 맘에 들어 매년 사먹고 있었다. 그 원조 나라즈케가 여기다. 아래층에서는 진공팩으로 포장해서 판다. 크게 비싸지 않은 값에 심지어 가지까지 절여놓았다. 살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나왔다. 다른 과자도 꽤나 맘에 들긴 하는데 짐이 커지니, 그렇잖아도 다른 이들 따라다니기 힘든 처지에 커다란 짐을 가지고 쩔쩔매기 뭐하단 맘이었던 것. 나중에 꽤나 후회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으랴.

    근처 법륭사(호류지法隆寺) 앞으로 갔다. 백제계 사람들이 세웠다는 이 절은 동대사에 비해 너무나 한산하다.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단다. 하지만 인원이 많으니 일단 절반은 인근의 후지노키 고분으로. 이카루가(斑鳩-한자 그대로는 얼룩비둘기란 이름이다)라는 이름의 이 동네는 지금도 그 이름을 쓴다. 조용하고 깨끗한 중산층 동네. 집도 멋지지만 경차가 주류인 규슈 시골과는 달리 이곳은 차들이 크다. 외제차도 간혹 보인다. 여기서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길 집이 예뻐도 찍지 말란다. 그도 그럴 것이 웬 외국인들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와 떠들면서 자기 집을 찍는다면 황당하리라. 그런 길을 주욱 걸어가다 보니 동그란 하수구 맨홀뚜껑도 컬러로 법륭사 그림이 들어가 있다. 이런 건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것인데 아주 예쁘게 만들어놓았다. 고분에 도착하여 설명을 듣고 횡혈식 석실분이란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고 주위를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에타 후나야마에서처럼 이곳 역시 붉은 꽃이 피어 있다. 규슈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후나야마 고분에 핀 꽃은 분명 동백인데 이 꽃은 조금 달라 보인다. 동백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1월이란 한겨울에 꽃이라니. 일본은 확실히 남북으로 긴 동네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살다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하게 생각했을까 싶기도 하다. 여름엔 물론 덥겠지? 여기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 남들이 다 금강이라 해왔던 백촌강(白村江)을 서정석교수가 동진강이라 말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간략하지만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직접 논문으로 쓴 내용이라고 한다. 찾아 읽어봐야겠다.

    드디어 법륭사. 들어가는 남대문이 우리나라 문과 다르지 않아 익숙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담의 만듦새. 정영호교수가 강조하는 짚 섞은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불탄 벽화 이야기가 유명한 이곳에 대한 담징 이야기는 지금은 빠진지 오래지만 오랫동안 고교 국어교과서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정한숙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었고 국사교과서에서도 그림 사진까지 넣었던 탓이다. 수업시간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대충 읽고 넘어갔지만 잘못 알고 쓰여진 작품을 교과서에 넣고 수십 년을 배우게 하였으니 우리나라 사람의 상식에 오류가 생길 수밖에. 이렇게 우리는 일본에 무지한데 무시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절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그 유명한 탑의 모습이 보인다. 그 진입로에서 보는 절의 모습은 탑의 윗부분과 중문이 어우러져 아주 멋지다. 나오면서 산 도록에는 오전 햇살이 비추는 이 장면을 찍어놓았다. 가장 멋진 장면을 표지로 넣는 법. 내 감각이 남들과 다르지 않구나 싶어 으쓱하다. 그리로 안으로 들어갔다. 맞는지 모르겠으나 이 절과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1

    탑 수리를 위한 건축회사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회사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금강조(곤고구미金剛組).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세운 목조건물이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기술을 이어온 이 회사 덕분이라고 하는데, 남대문 복원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뉴스를 보면 우리는 뭘까 싶다.

    줄맞춰 들어가 본존불을 보고(얼굴이 길다), 그 유명한 금당 안의 유물과 그림도 보고 탑에 있는 조각도 들여다보았다. 궁금한 것은 탑을 오중탑(五重塔)이라 하는데, 오중이란 다섯 겹이란 소리다. 탑의 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위와 아래층의 넓이가 거의 비슷해서일까? 작은 돌이 깔린 마당에서 탑과 금당 사진을 찍는데 금당의 위쪽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이 남다르다. 자세히 보니 기둥을 용이 두르고 지키는 모양새다. 용이 지키니 무너지지 않겠지? 그리고 탑의 맨 아래층 지붕과 덧붙인 지붕(이건 일본식이라 한다, 이게 없으면 정림사지 5층석탑 같은 것과 흡사하다)은 바로 위의 지붕을 받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는 도깨비가 앉아 지붕을 머리로 이고 있다. 녀석들, 어쩌다 여기 잡혀서 천사백 년을 고생하누 하고 절로 웃음이 나온다.

    뒤의 유물전에서 잔뜩 있는 부처와 인왕, 길상, 쇼토쿠태자상 등 외에도 가이드가 이것만 봐도 일본 온 값을 한다는 백제관음(구다라관음百濟觀音)상을 보았다. 늘씬하다. 보통의 인체비례와는 전혀 다른 호리호리한 체형에 커다란 키. 사진을 찍지 말라는데도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역시 유명한 쇼토쿠태자의 옥충주자(玉蟲廚子). 예전에 책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사진도 없는 탓에 이 옥충주자란 것이 주전자인가 뭔가 싶었는데, 사진을 보게 되니 전혀 아니다. 뭘까 싶었는데 부처님을 모시는 일종의 건물모형인 셈이다. 실물을 보니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탑에 안치하는 사리장엄구 같은 크기인 줄 알았더니 내 키보다 크다. 전시관 안에는 일본 노인 둘이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이 동네 사람들로 은퇴한 뒤 이런 봉사활동을 하는 거겠지 싶은데 나이 지긋한 일본인 관람객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는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도무지 모르겠다. 아쉬워하는 순간 그 옥충주자 곁을 돌다가 다리를 그 받침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 아픔. 나와서 바지를 걷어보니 까지기까지 했다. 가이드가 걱정을 한다. 위치가 통증이 심한 곳이긴 하지만 뼈를 다친 것이 아니라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닌데 밴드에 약까지 구해 준다. 정말 감사하다.

    법륭사를 떠나 이번에는 석무대(이시부타이石舞臺). 아스카 산골 한 모퉁이에 있다. 좁은 동네 골목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니 널따란 주차장이 나온다. 그리고 멀리서도 보이는 석무대. 고대의 백제계 권력자로 유명한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우리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곳에서 노(能)를 공연시켰다는데 그럴 만도 하다 싶었는데, 설명하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고 석실을 보는 순간 이건 꼭대기만 봐서는 고인돌스럽지만 흙을 덮어서 그렇지 고구려나 백제 초기의 돌무지무덤 양식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소가씨 집안이 백제에서 건너갔다는데 무덤은 가장 바꾸기 어려운 법. 그 전통무덤을 커다랗게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었구나 싶다. 돌아나오면서 이곳도 사쿠라가 아름답게 피는 곳이란 안내 사진을 보고 같은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다 보니 매점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지도를 산다. 뒤로 처졌지만 매점으로 급히 갔더니 사람이 없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볼일을 보고 가이드가 찾아올 정도로 늦어서 지도도 못 사고 절름거리는 다리로 뛰다시피 버스로 왔다. 민폐대왕.

    이번에는 비조사(아스카데라飛鳥寺). 버스로 가지 말라는 길이라는데 좁은 동네길을 그예 간다. 커다란 버스로 잘도 운전한다 싶다. 숲길을 빙 돌아 시골길 조그만 주차장이 있는 절 앞에 도착. 법륭사처럼 자갈을 깔아놓은 절 안은 조그맣다. 남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부처님 사진을 먼저 찍고 후원을 보았다. 안의 전시물 중에는 가마쿠라 시대의 것이라는 대흑천(大黑天) 목상이 재미있다. 일종의 재록신인데, 커다란 보따리를 메고 있어 복장만 바꾸면 완전 산타크로스다.

    나와서 이번 매점에서 다행히 아까 사지 못한 지도를 살 수 있었다. 항공사진을 지도로 만든 것. 제법 비싼 편인데 동네 이름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같은 아스카이지만 보통 알려지기론 비조(飛鳥)라 하는데 이곳 지도는 ‘명일향(明日香)’이라 표기되어 있다. 발음이야 똑같이 아스카인데 멀리서 찾아온 도래인들을 상징하는 듯한 새도 좋지만 내일의 멋진 모습을 꿈꾸는 ‘내일의 향기’란 이름 역시 아주 그윽하다. 그리고 덕분에 이 지역에도 얼마나 많은 유적이 있는지 알았는데, 문제는 분명 설명을 들었는데도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머리 무덤에 못 갔다는 것. 절이 작아서인가 매점에서 지도를 산 뒤에도 웬일로 빈둥거릴 시간이 있었으니 가 봐야 하는데 말이다. 645년 다이카개신의 신호탄으로 궁궐 안에서 공격을 받아 이루카가 처참하게 죽고 나서 아버지가 지키는 집은 며칠 만에 함락되고 소가씨는 몰락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 무대 중 하나다. 유홍준교수는 자전거로 이 동네를 돌았다고 하는데, 여름에는 좀 그렇지만 그게 참 좋을 거다. 시간이 많다면.

  • 12

    현재골목골목을 나와 오사카로 간다. 저녁은 호텔이 아닌 별도 식당에서. 우리는 간코즈시(がんこ壽司)로 갔다. 어느 지

    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오사카 병원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전철역이 인근에 있는데 역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 모모타니(桃谷) 지점일까? 이곳은 집에서 가져온 오사카 관광 안내 책자에 맛좋은 초밥집으로 가볼 만 하다고 소개된 곳인데 이렇게 지점이 많을 줄 몰랐다. 오사카와 교토, 효고, 나라 등에 잔뜩 있다. 관광안내 책자엔 그 중 우메다 본점만 외국어 소통이 된다고 소개되어 있어 가 볼까 싶었는데, 잘 된 셈이다. 또 본점도 여러 곳이다. 우메다 본점에는 못가지만 맛이야 같은 수준이겠지. 어쨌든 아주 맛있게 먹었다. 고추냉이도 맛있고, 초밥의 회도 아주 맛있다. 우리의 선어회와 다른 숙회. 숙성시켜 먹는다. 두어 번 먹어본 경험에 비춰 보면 우리나라에서 초밥을 먹으면 대체로 회가 질기게 씹힌다. 유명한 미스터초밥왕에서 표현하듯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듯한 느낌이 전혀 없다. 밥도 좀 진 편이고. 그래서 초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 초밥은 만화에 등장하기에 지나친 과장인 줄 알았던 표현, 즉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듯한 느낌이 난다. 아주 부드럽다. 잘 먹는 덕분일까, 곁의 여선생님들 중에 초밥 못 먹는다고 넘겨주어 더 먹는 사치를 누렸다.

    가게 안 조명이 아주 환한데 서빙을 담당하는 사람은 아마 등급 차이일까 옷이 다르다. 나이든 사람은 회청색 옷에 고동색이 더해졌고 젊은 사람은 분홍과 흰색. 아주 예쁜 아가씨가 있다. 유카타(맞나?)를 입고 있는 둘 중 키가 훤칠한 쪽. 발그레한 뺨에 머리를 단정히 묶고 일본옷을 입어서인지 아주 미인이다. 마침 곁에 있던 여자친구 없다는 20대 남선생님에게 어떠냐 물으니 취향은 아니란다. 그래도 그 곁 여자친구 있다는 선생님은 내 의견에 동의해준다. 피부미인이란다. 나중에 생각하니 혹시 그 두 젊은 아가씨는 아르바이트 고등학생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뻐 보이는 그런 피부는 우리나라 고교생도 그러하니. 뭐 요즘엔 갑자기 화장 열풍이 불어 떡칠을 많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고교생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할까? 우리는 학교 규정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등등의 복잡한 규정이 있으나 대체로 무시하고 그냥 들 한다. 일본도 그러할까?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들통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과연 그러할까 싶기도 하다. 추가로 취향이 아니라는 그 선생님이 여자친구 없다니, 이웃 테이블 여선생님들이 난리다. 사진도 찍어갔다. 용인서 온 젊은 선생님, 좋은 일이 있으려나?

    어두운 병원 앞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고교생인지 중학생인지 학생들이 하교한다. 아마 동아리활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듯하다. 삼삼오오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한창 때니 배고플 테지만 이렇게 늦게 하교하는 학교 생활은 얼마나 즐거울까. 학원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학생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런데 자전거는 네거리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가는 것 같아 보인다. 학생의 치기일까 아니면 뭔가 규칙이 있는 걸까. 잘 모르겠는데 차들의 반응이 우리와 다르다. 전혀 엉키지 않는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정말 크다. 나카노시마(中之島)라는 곳에 있는데, 바로 곁에 오사카국제회의장이 있어 외국인 손님을 모시는 곳인 듯하다. 리가 로열 호텔은 일본 최대의 호텔 체인 중 하나라는데 근처에는 작은 여인숙(인Inn)도 있다. 방 규모도 후쿠오카 힐튼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힐튼과 달리 방에서 인터넷 사용이 무료란다. 서랍을 여니 연결선이 있다. 컴퓨터를 가지고 간 터라 연결해 보았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같은 방 선생님의 말로는 스마트폰으로의 접속도 쉽지 않단다. 다음날 가이드가 말하길 갑자기 많은 사람이 접속하다 보니 트래픽에 무리가 간 듯하다고 한다. 하긴, 삼백 명이 갑자기 접속했을 테니.

    방 동료 선생님은 후배들과 한 잔 하러 나가신단다. 넓은 침대. 아주 따뜻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몸을 녹일 수 있는 온도에 욕탕에서 목욕까지 마치니 몸이 노곤하고 피로가 풀리면서 잠이 온다. 일찍 자기로 했다. 자기 전에 차를 한 잔. 우메곤부차(梅昆布茶)를 맛보았다. 다시마차라니 상상도 못해 봤다. 조그만 알갱이는 매실 조각이겠지? 맛은 진한 다시마국물 뭐 그런 것. 그런데 영문 표기가 플럼(plum-양자두)이라고 되어 있다. 이전 학교에서 미국에서 온 원어민교사가 내가 매실을 씻고 있는 걸 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매실을 영어로 뭐라 할지 몰라서 그냥 매화의 열매라고 한 적이 있는데 우메보시의 나라 일본에서 그렇다. 아니면 정말로 매실을 플럼이라 하는지 궁금하다.

    6. 오사카 둘쨋날

    역시 편한잠은 아니었다. 덕분에 일찍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양쪽에 벌려놓은 골라먹기. 음식 종류는 힐튼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3

    이 조금 더 나은 듯하지만 맛은 역시 좋다. 특히 달걀 요리가 꼭 있다. 하지만 낫토가 없는 것이 아쉽다.오늘은 교토, 그리고 오후의 자유시간. 밤부터 비가 왔다. 드디어 준비해간 우산을 쓸 시간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는 생각보다 많이 오는데 마치 봄비 같은 느낌이다. 찬바람이 휙 지나가지만 이 바람 뒤에는 꽃소식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일찌감치 준비하고 내려가는데 가이드에게 묻는 것을 깜빡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지 아니면 그냥 도톤보리에 모두 내리는지. 일반 답사에서는 숙소가 원점이니 당연히 호텔로 들어가는 사람을 태워줄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시간을 위한 준비물을 방에 두고 나갔다. 이 판단착오로 자유시간에서 두 시간 가까이를 날리고 말았다. 역시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한다. 더구나 나는 단체관광이건 개인관광이건 외국에 나간 것이 처음 아닌가. 모르는 주제에 제멋대로 생각했으니 어쩔 수 없는 벌칙인 셈이었다.

    근세 – 에도 시대 초기의 교토교토로 간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 이래로 오랜 수도, 아니 천황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그 구조는 헤이조쿄나 마찬

    가지로 장안성을 본떠 만든 거대하고 반듯한 도성. 서울의 경우 이런 구조가 없지 않지만 그리 넓지 않은 데다 풍수지리에 따른 구조변경이 있어서 반듯반듯한 맛이 많이 떨어진다. 지형에 따라 이리저리 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여전히 바둑판 구조. 메이지 시대에 도쿄가 수도가 되면서 천황이 도쿄의 쇼군성(오늘날 황거라고 부르는 천황궁)으로 옮겨가 이곳은 더 이상 천황과 인연이 없지만, 천 년의 역사가 서린 곳. 그중에서 먼저 니조성(니조조二條城)으로 갔다.

    교토 시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바둑판 모양 동네가 줄지어 보인다. 길도 넓다. 오사카도 그러하지만 규슈의 촌동네보다 전반적으로 차가 크다. 외제차도 많이 보인다. 길 크기가 만만찮아 보여 가이드에게 혹시 이 길이 주작대로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주작대로는 아닌 것 같다. 가라스마도리(烏丸通)가 주작대로 아닌가 싶고, 그 다음 길인 셈인데(호리카와도리堀川通라고 한단다) 여기도 만만치 않게 널찍하다. 착각하기 쉬울 정도다. 가다 보니 고조(五條) 쯤 되는 곳에서 서쪽으로 절이 보인다. 서본원사(니시혼간지西本願寺).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모모야마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이 많단다.

    이치조(一條)에서 주조(十條)에 이르는 말은 황궁을 향한 가로길을 가리킨다. 조(條)란 나뭇가지이기도 하지만 도성구조에서는 커다란 가로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울로 말하자면 종로, 을지로, 퇴계로 같은 정도. 우리는 정말 종로 외엔 흔적이나 있을까 싶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경주와 비교해야 하는데 경주는 내가 모르니. 주작대로와 나란히 만들어놓은 세로길을 합쳐 네모반듯한 동네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방(坊)이라 한다. 둘을 합쳐 조방제라고 한다. 때문에 주작대로의 존재는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의 수도 구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시설이다. 현재 서울로 말하자면 주작대로는 광화문의 세종로. 그런데 아무개조라는 말은 귀족의 성씨이기도 하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교토귀족으로서 메이지유신에 적극 참여했던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있다. 저택이 있던 장소 덕분에 이런 성씨를 갖게 된 걸까. 니조성의 이름도 그러하다. 두 번째 길에 있다 해서 니조인 것.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의 중요한 성이다. 도쿠가와 가문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쇼군의 지위를 약속받은 최초의 인물인 세 번째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완성했단다. 동생에게 밀릴 뻔하다가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쇼군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따로 설명이 없어 가이드의 설명과 안내 DVD를 보았는데 시간이 없어 소리나는 마루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이게 보물이 따로 없구나 싶은게, 쇼군이 교토에 올 때 머문다는 이곳은 그 신분에 따른 입장 제한이란 방 구별(그래도 쇼군을 따르거나 혹시라도 얼굴을 볼 수 있는 신분이겠지만 토자무라이(遠侍-한글판 팜플렛에는 가신이라 되어 있으나 일본설명서에는 다이묘大名라 되어 있다)들의 대기소(도라노마虎の間란 별칭), 공식 응접실이랄 시키다이노마(式臺の間-다이묘와 로주가 만나는 곳이란다, 쇼군에의 헌상품 같은 것도 여기서. 그래서인지 뒤편에는 로주들의 업무장소가 있다. 나오면서 보게 되는 그곳의 그림은 갈대와 기러기그림인 노안도蘆雁圖, 그리고 버드나무와 해오라기 그림인 유로도柳鷺圖가 있다), 그리고 쇼군이 다이묘를 대면하던 가장 넓은 방(오히로마大廣間, 가장 화려하다. 장식도 엄청나고, 일본의 유명한 방 구조인 도코노마도 보인다. 그리고 이곳의 첫 번째 방인 이치노마가 대정봉환의 장소라서인지 인형으로 그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나오면서 보게 되는 이곳의 네 번째 방에는 눈에 확 띄는 거대한 소나무와 힘찬 매 그림이 있다. 송응도松鷹圖), 그 다음은 구로쇼인(黑書院-쇼군이 신판親藩, 즉 도쿠가와 가문 출신 다이묘와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나 그 전부터 도쿠가와 가문을 모시던 가신들이 승진한 다이묘를 만나던 곳), 쇼군 생활공간과 침실인 시로쇼인(白書院, 수묵화 중심의 하얀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칙사를 맞이하던 방. 이곳은 도자무라이들과 같이 취급한다. 하지만 뭔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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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가 반대로 된 느낌. 천황은 천황인가 싶기도 하다. 안은 온통 가노파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전체가 900점이 넘는단다. 미술사 책에서만 보았던 작품을 실제로 본다. 복제일지도 모르겠으나 조명을 어둡게 해놓고 촬영 금지인 것을 보면 복제가 아닌 원본 가능성이 크다. 비가 와서 더 어두운 바람에 피곤한 눈이 미처 다 미치지 못하는 커다란 그림들. 금빛이 번쩍이는, 모모야마(桃山) 문화의 끝자락이라고도 한단다.

    정원은 원래 모습이 아니라 쇼와 시대에 수리했다고 한다. 멋진데 시간이 없다. 사진 하나만 찍고서 얼른 지나치고 혼마루 쪽으로 가려니 나가야 한단다. 따로 와서 구경하라는 가이드의 말에 재빨리 나와 세이류엔(淸流園)도 그냥 넘겼다. 늦었음에도 매점에 가서 교토안내 팜플렛을 좀 집어왔다. 인력거를 타는 모습도 보인다.

    현재점심식사는 아라시야마(嵐山)라는 곳인데, 동네 이름과 식당 이름이 같다. 토산물 판매소와 함께 아예 지도를 만들

    어 놓고 있다. 산책로가 좋단다. 2층으로 올라가니 놓인 밥상에 종이로 만든 냄비가 끓고 있다. 어떻게 종이로 했는데 타지도 않을까 신기해들 하는데, 일본이야 원래 종이를 여러 가지로 사용하기로 유명한 나라 아닌가. 게다가 애초에 마르지 않으면 타지 않는다. 일회용이란 의미가 확실하다. 작은 연료는 끓기에 적당한 크기라 먹는 과정에서 끓고 나니 불이 꺼진다. 그래도 다 먹을 때까지 뜨끈뜨끈한 상태가 유지된다. 이런 점은 다른 식당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처럼 휴대용 메탄가스통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깊이 생각해서 개발한 것이겠다. 뒤처리도 빠르고. 대신 그 많은 쓰레기는 어찌할까?

    비오는 겨울이니 뜨끈한 국물에 땀을 흘리면서 먹고 나니 생각 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도게쓰다리(渡月橋)를 건너 나카노시마 공원으로 산책하는 길이 좋다 해서 나섰는데 가다 보니 인력거꾼이 비를 맞으며 서서 인사를 한다. 또 인력거가 천천히 달리고 있기도 하다. 그쪽으로 노선 변경. 교토의 이들 인력거꾼은 유명하단다. 진리키샤(人力車). 영어의 rickshaw는 이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력거꾼은 샤후(俥夫)라고 한다는데, 비가 와서인지 몸에 붙는 검은 긴옷에 일종의 비옷을 덧입고 일본특유의 작은 삿갓 같은 걸 쓰고 있다. 사진을 찍어둘까 하다가 혹시 몰라 그냥 지났다. 여자 인력거꾼도 있다. 돌아와 홈페이지를 검색하니 아라시야마가 교토 인력거 회사의 총본산이라고 되어 있다. 인력거를 끄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도 주욱 나온다. 나이든 사람도 있는 것이 이런 직업도 우리와 달리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가격이 그리 싸지는 않을 터. 가이드 역할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지방 하천 규모의 오오이가와(大堰川) 강에 비가 와서인지 유람선 선착장은 한가하고 조용한 동네 길에 수학여행을 왔는지 중학생들이 재잘거린다. 호젓한 골목으로 들어가 연인 둘이 사진을 찍고 있던 호곤인(寶嚴院)이란 작은 절을 지나 덴류지(天龍寺)라는 절로 들어갔다. 그런데 입장료가 있다. 들어가보고픈데(이곳은 바위 여덟 개의 모래 정원으로 유명한 곳) 시간이 없다.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나오는데 주차장으로 연결된 골목이 없다. 빙 돌아 오니 역시 내가 맨 뒤. 주차장 쪽은 갑자기 외국인부터 해서 사람이 많다. 속세를 떠났다가 돌아온 기분이다.

    고대 – 백제의 미소이번엔 광륭사(고류지廣隆寺). 사진 찍지 말라고 가이드가 신신당부한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면서 이리 저리 주변을

    돌다 사진을 찍고 했는데 그저 쳐다볼 뿐 별로 제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했더니 쇼토쿠태자전 같은 경우 정면에서 찍는 것이 실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옆에서 찍으라고 당부했다는 것. 소박한 동네 안쪽의 학교 곁에 있는 이 절 역시 작다. 하지만 작은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미륵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 손가락이 부러진 이야기의 연유가 과연 실상과 맞을까 싶기는 한데 어쨌든 예전과 달리 수리를 한 것은 맞고 그 때문에 얼굴이 바뀌었다는 말은 들었다. 비교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전에는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정말로 똑같았고 지금 것은 정말 얼굴에서 콧대 부분이 좀 더 날카로워진 듯하다. 그 원본을 보는 것이다. 이 불상은 일본 고교일본사 교과서에 표지 사진으로 쓰는 곳이 있기도 하고, 우리의 자료집 표지사진으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크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60cm 남짓의 작은 크기라더니 웬걸. 등신대 마냥 크다. 안산서 오신 선생님은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아주 감동한다. 그런데 난 감성이 말랐는지 눈이 피곤해서인지 어두워서 잘 안 보여서인지 모르겠다. 흐릿한 윤곽만 살짝 알아볼 뿐이다. 차라리 그 맞은편의 천수관음, 견삭관음 같은 것들에 훨씬 눈길이 간다. 우리에게 낯선 밀교 영향의 불교에서 나오는 작품들이어서일까? 더 환해서일까? 나오면서 도록을 사는데 작은 데도 값이 좀 나간다. 쳇 하는데, 안산 선생님은 그림엽서까지 사신다. 미륵반가사유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비닐에 싸주는데 비가 오기에 안성맞춤이다. 버스에 있는 쓰레기 담는 봉지에 다시 넣어 젖지 않게 단단히 채비를 했다.

    현재

  • 아스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 ··· 15

    고속도로를 달려 오사카에 도착했다. 도톤보리. 지도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일단 오사카 지도를 가지고나온 선생님의 지도를 보고 외운 다음 오사카 중심의 세로길인 미도스지를 따라 구경하면서 걸었다. 중간에 대한민국 영사관이 나온다. 들어가 지도 같은 것 있을까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나지만 우리나라 공무원 불친절은 유명하다. 굳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 여기가 관광안내소냐는 지청구를 들을 가능성이 있는 거다. 게다가 경찰이 둘이나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빗속을 천천히 걸어 아메리카무라와 이곳저곳 골목을 지나 숙소로 왔다. 번화한 거리는 뭐 다 그렇지만 비싼 외제차도 꽤 전시가 되어 있는 그런 부자 동네 같은 분위기. 숙소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는데 게이샤 차림 비슷하게 기모노로 무슨 공연 또는 의례 복장을 한 아주머니(?)들이 잔뜩 탄다. 그리고 두 층 정도인가를 올라간다. 무슨 행사가 있는가 보다. 얼굴 화장은 하얗게 하질 않았다. 옷을 잡아주는 사람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한다. 화려한 꽃무늬의 붉은 색 기모노인데 무슨 무늬인지 제대로 보질 못했다. 엘리베이터 가득 그런 옷차림의 여자들이 타는 바람에 땀범벅인 나로선 긴장한 셈.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씻고 나서 셔틀버스를 타고 우메다 쪽으로 나갔다. 내가 가고자 계획했던 곳이다. 하지만 JR오사카역의 관광안내소를 먼저 갔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 그냥 지나치고는 9시 넘어 갔더니 문을 닫았다. 통한의 순간이다.

    우메다 주변 곳곳을 돌아보았다. 물건도 조금 사고, 퇴근 시간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먹자골목도 지났다. 건물 자체가 온통 그런 곳이다.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로는 술집이나 간단한 국수를 먹는 가게에서 정말로 서서 먹는다는 것이다. 선술집이란 말 자체가 서서 마시는 술집이란 소리이고 옛날엔 우리도 있었다는데 여긴 아직도 그렇다. 가게가 정말 좁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떠드는 목소리에 코에 들어오는 맛좋은 식사나 안주 냄새. 유명하다는 네기다코야키도 사먹었다. 우리나라 사람도 줄을 선다. 오사카역 주변에서는 정말 우리나라 말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린다. 일행일 리는 없다. 더 사서 호텔로 가지고 왔는데 룸메이트가 없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결국 집으로 가져와 데워 먹었다. 그래도 참 맛좋다. 다코야키의 본고장 오사카. 심지어 집집마다 다코야키 구이판이 있다는 전설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다. 생각보다 약간 비싸긴 한데, 뭐 재료가 좋고 음식이 제대로이니 그럴까?

    시간이 많이 늦어서 오하쓰신사는 길 건너편에서 대충 쳐다보고 말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소네자키 숲의 정사의 여주인공 오하쓰(お初)를 모시는 신사를 가보려 했던 건데. 이 번화가가 에도시대에는 울창한 숲이었던 것. 큰 미련은 없고 신사도 작아 가 봤다 정도로 끝날 곳이긴 한데 아무래도 길 건너편에서 쳐다보는 건 분위기 상 아니긴 하다.

    적당히 돌다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마침 버스가 와 있다. 타고 보니 모두 일본인들이다. 갈 때도 그랬지만 출장이나 그런 일로 오사카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 점퍼에 땀내를 풍기는 게 미안할 정도로 모드들 양복에 깔끔한 매무새다. 숙소 같은 커다란 고급호텔을 이용한다는 건 그래도 나름 지위가 있는 직장인들이겠지 싶다. 아니면 넉넉한 사람들이거나.

    7. 오사카 셋쨋날 – 근세 이후 오사카, 그리고 자이니치(在日)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날 많이 걸은 게 피곤하긴 했는가 보다. 10시에서야 숙소로 돌아왔으니. 짐을 챙기는데 혹시라도 흘리는 것이 있을까 봐 신경이 많이 쓰인다. 간신히 짐을 다 꾸리고 나오니 엘리베이터가 만원이라 도무지 탈 수가 없다. 위층에서 다 차서 내려오는 상황인 거다. 기다리기 쉽지 않겠다 싶어 연결된 다른 쪽 건물로 가니 그곳 엘리베이터는 아주 한가롭다.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