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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광장-최인훈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광장-최인훈

 최인훈은 전후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하나로서, 작품들을 통하여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속에 위치시키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해온 폭넓은 사유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광장’은 1960년에 발표된 이래로 지금까지 여러 세대를 거쳐 읽혀온 작품으로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새로운 경험과 지적 모험을 자극하는 ‘현재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넓게는 한국문학사, 좁게는 한국 소설사에서 큰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물론 ‘광장’ 이전이나 이후에도 남북의 분단 상황과 좌우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편향된 시각으로 분단문제에 접근한 이 작품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분단문학이라고 평가하기 힘들다.

최인훈은 이 작품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해서 냉철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비판과 성찰을 보여준다. 분단 현실에 대한 이러한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성찰은 이념의 본질과 진정한 삶의 행복과 관련해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二項)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3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만, 기실 이러한 절망감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인간성을 말살하는 이념의 횡포에 대한 성찰에 지나지 않는다면, 명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쓴 대부분의 이념소설이 그렇듯이 한국소설사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나 개인과 사회의 긴장과 갈등, 인간 자유의 문제 등과 같은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광장’은 ‘이명준’이라는, 한국소설사에 보기 드문 관념적 주인공을 창조하였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통하여 4·19 혁명 이후의 한국 소설이 전후(戰後)소설의 관념적 경향에서 벗어나 내면 공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전기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사랑’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광장’은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비평서가 출간될 정도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는 작품인데, 이러한 소설의 열린 구조는 이 작품을 비롯하여 최인훈 소설의 ‘현재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이래로 무려 여섯 번의 개작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작과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작가의 수정 및 첨삭 작업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작품 감상의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대한 독서를 출발점으로 이른바 ‘분단문학’ 전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거나 또는 작가가 1994년에 발표한 ‘화두’를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독서체험이 될 것이다.                                     <박성창 서울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돈키호테-세르반테스

문학이 창조해 낸 으뜸가는 인물 전형 중의 하나는 돈키호테일 것이다.

그것은 어릿광대 같은 희극적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에 실존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비극적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희비극은 그의 시대착오적 기사(騎士) 편력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으로 쉰을 넘긴 나이에 기사소설 읽기에 미쳐 있던 주인공이 마침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녹슨 투구와 갑옷,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몸소 편력 기사로 나서는 것이다.

출정은 세 번에 걸쳐 이어진다. 첫 출정은 혼자 떠나지만 두 번째 출정에는 우직한 농부 산초를 설득해 종자(從者)로 동반하고 나선다. 여기서 주인과 종자 사이에는 복고적 기사세계의 이상주의와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주의가 간단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유머를 빚어낸다.

대립하는 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와 우정을 다하는 두 인물의 인간적 조화는 세르반테스가 엮어낸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 출정에 나선 돈키호테는 마침내 백기사와의 결투에서 지고 귀향길에 올라 기사 편력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말이 비극적인 것은 돈키호테에게 존재 이유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요 실존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우선 문학사적 관점에서 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전후 스페인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배경으로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서사 장르의 주제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서사 시점을 다양화시켜 여러 일화와 인물과 행위를 일관된 구조와 플롯으로 교직(交織)해 내는 것,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 인물들의 중층적 관점을 대비시켜 리얼리티를 증대시키는 것 등 세르반테스의 서사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설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키호테를 소설 중의 소설로 꼽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돈키호테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근대사회의 인문주의적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키호테의 맹목적 기사 편력은 산초의 합리적 이성에 대해 비이성적이지만, 윤리적 관점에서 정의를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산초보다 이성적이다.

햄릿이 극단적으로 계산적인 개인주의 이성으로 번민하고 있다면 돈키호테는 개인주의적 합리성을 떠나 도덕적 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햄릿과 견줄 때 돈키호테의 미덕은 무엇보다 도덕적 선의 의지를 투명하게 그려낸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돈키호테는 서구의 종교개혁과 아메리카 진출,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인쇄술의 혁명 등 제반 사회변동 가운데 도래한 근대사회의 문화적 결실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 돈키호테의 고전적 가치는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 되새겨지는 휴머니즘 정신에 있다. 그래서 웃음과 풍자로 17세기 스페인인들에게 유쾌한 지적 훈련의 동기를 제공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유머와 해학으로 정보화 시대에 요구되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춘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3>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로알드 호프만 

 우리 몸은 140억 년 전 빅뱅우주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원소인 수소와 그보다 수십 억 년 후 어느 별에서 만들어진 무거운 원소들이 만나 이루어진 화학원소들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화학물질’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자기 비하적인 일인지 모른다.

문제는 현대를 사는 교양인에게 화학의 전모를 제대로 전달하는 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세 편의 시집과 시화집을 출간했고, 심미적 혜안으로 과학을 해석하는 많은 글을 남긴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는 참으로 권장할 만한 책이다.

호프만은 다음 두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화학이 어떻게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할 뿐 아니라 과학의 오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나는 과학의 전체적인 영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옛날에는 특권 엘리트에게만 허용되었던 필수품과 안락함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화학은 비료를 통한 영양의 증진, 소독을 통한 위생의 향상, 의약품을 통한 질병의 퇴치 등에 기여함으로써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인간 수명이 두 배로 연장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반면 이처럼 우리 삶에 안락함을 가져다준 화합물들이 환경오염을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화학의 발전에는 대립적인 요소들이 긴장을 조성한다. 서로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화합물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어떤 물질은 뛰어난 약효를 나타내고, 유사한 다른 물질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긴장감이다.

화학에서 대립적 요소는 결합-분해, 정적-동적, 평형-섭동(攝動·주요한 힘의 작용에 의한 운동이 부차적인 힘의 영향으로 인하여 교란되어 일어나는 운동), 천연물-합성물, 순수-불순, 유익-유해, 순수-응용 등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호프만은 이런 다양한 화학의 대립적 요소에 대해 적절한 사례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한편 대부분의 화학자가 화학의 실용성만을 내세우고 화학에 대한 일반인의 무지와 부당한 공격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데 비해 호프만은 환경론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호프만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물질세계에 대해서, 특히 인간이 세상에 더해 놓은 합성화합물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민주 시민에게 어느 정도의 과학 지식은 필수적이고, 일반인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 긴요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화학의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이 책은 진정한 교양과학도서라 할 만하다.                                                  <김희준 서울대 화학부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루쉰 소설전집-루쉰 

고전과 만나는 계기는 다양하다.

우연하게 눈에 띄었는데 알지 못할 힘에 끌리기도 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만나기도 한다. 글자로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만화로도 만나고 영화로도 만나며, 요즈음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도 만난다.

고전과 독자의 관계도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첨단의 멀티미디어 환경과 초국적 자본주의 체계는 고전을 더 이상 ‘순수의 영역’에 가둬두지 않는다. 읽고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방식에서, 인터넷 게시판 소설이나 온라인 게임에서와 같이 읽고 다시 쓰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전이 소비된다. 고전이 안 읽힌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전의 두루누리(유비쿼터스·어디서나 존재함)화가 진척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고전과 만나는 계기와 방식이 다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전을 대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고전을 죽이는 행위와 진배없게 된다. 실제로 많은 고전이 그렇게 죽어갔다.

고전의 장점은 그 자체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내장하고 있음에 있지 않다. 고전은 ‘카오스’일 따름이다. 모든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 담겨 있다. 독자는 저마다의 관심사와 필요를 갖고 고전에 들어가, 각자의 필요대로 답을 얻고 길을 찾는다.

고전이 안겨주는 삶과 사회,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통찰과 해석은 이렇듯 고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전은 일종의 미디어(매체)다. 혼자 있어도 빛을 발하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고 그 쓸모가 확산되는 존재이다.

루쉰(魯迅·1881∼1936)은 이런 면에서 꼭 짚고 넘어갈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던 그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중국 바깥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중국작가이다. 이는 그의 소설이 지닌 미디어로서의 뛰어난 성능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전통과 근대를 성찰했고, 일본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근대와 근대 너머를 사유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갖고 들어와 그의 소설에 비추어보고 뭔가 답을 얻어갔다. ‘지금-여기’의 고민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 루쉰의 소설은 그래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루쉰소설전집’에는 그가 평생 출간한 3권의 소설집이 모두 담겨 있다.

첫 번째 소설집은 ‘함성((눌,열)喊)’이다. 여기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와 중국인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아Q정전’ 등 15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방황’으로 여기에는 ‘축복’ 등 11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세 번째 소설집은 ‘고사신편’이다. ‘옛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제목의 이 소설집은 일반 민중에게도 친숙한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 일색이다. 이 방식은 루쉰이 ‘고대와 현대에서 제재를 취하여 그들을 함께 얘기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듯이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고전은 늘 새롭게 쓰이고 만들어진다. 그건 콘크리트가 아니라 찰흙이다. 따라서 빚는 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빚어진다.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마음. 고전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백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은 서구의 문학계가 지나친 실험정신으로 ‘소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 ‘소설의 소생’을 증명했다. 문단을 짓누르던 엄숙주의와 실험정신의 족쇄로부터 소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식 유머문학으로 분류될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철학적 의미가 풍부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이 소설은 1982년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됐다.

소설은 ‘마꼰도’라는 가상 마을에 사는 부엔디아 집안의 7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서구의 식민지배와 왜곡된 근대화를 겪어온 콜롬비아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들을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환희와 고독, 탄생과 죽음 등 삶의 파노라마 속에 녹여 펼치면서 소재의 지역적·정치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동시에 인물들의 반복적 행태와 순환적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하기도 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 가족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갈등은 없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지을 수 있는 욕망과 사회적 금기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철저하게 진지함이 결여된 이 작품에는 구약성서와 중세 서사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전설과 풍속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패러디와 아이러니, 유머와 함께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결합을 암시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인의 존재론적 인식이 반영된 표현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환경과 역사, 존재양식과 사고방식에서 서구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식적, 미학적 종속관계를 단절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서구의 이성중심적, 리얼리즘적 전통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지어 언급되기도 한다. 중심부 담론에 의해 재단된 현실을 교정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고, 중심부 담론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식민 지배를 받으며 왜곡된 자아에서 탈피하면서 진정한 주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종의 ‘탈식민주의 글쓰기’이다. 그래서 ‘모든 것의 해체’를 지향하는 제1세계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루이스 보르헤스 식의 환상문학과 구별된다. 마르케스의 마술성이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이야기의 현실 비판적 기능을 강화한다면, 보르헤스의 환상성은 구체적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세계를 형성할 뿐이다. 자연히 정치·사회적 기능면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소설의 경우 황석영의 ‘손님’, 임철우의 ‘백년 여관’ 등의 작품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환영과 혼령, 초자연적 현상 등 비현실적 요소가 현실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면서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 민족 특유의 의식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민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6>간디 자서전-마하트마 K 간디 

 간디자서전은 부제인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가 말해 주는 바와 같이 비폭력을 통해 이룩한 순수영혼의 투쟁사이다.

이 자서전이 선정된 것은 그의 사상이 제3세계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간디 스스로 그 사상의 가능성을 실천적 삶을 통해 온몸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간디는 가히 서양사상 일변도의 사상사에 실천으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룬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자서전은 제1차 불복종운동이 한창이던 1920년까지의 간디의 전반부 인생을 기록한 것으로 독립운동 이전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이 자서전이 널리 읽히는 까닭은 그의 기본사상과 실천방법이 이 시기에 이미 확립되었고 이 자서전이 그 과정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디자서전에서 연약하지만 너무나 순수해서 그 어떤 폭력에도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영혼을 보게 된다. 간디의 사상은 비폭력(Ahimsa)을 통한 진리파지(眞理把持·Shata Graha)라고 요약할 수 있다. ‘Ahimsa’는 모든 생물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간디의 말은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간디가 아무도 실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을 일관되게 사랑과 용서, 포용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기실 비폭력을 외친 것은 간디가 처음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폭력을 배제하지만 이들 종교는 이런 가르침을 개인의 삶에서만 다룬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비폭력을 공공(公共)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간디에게 있어 비폭력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사람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간디가 진리파지 운동을 벌일 당시의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착취로 민중의 활력이 메말라버린 빈곤과 패배주의의 시대였다. 인도는 150만의 인원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지만, 이에 대한 영국의 보답은 민족운동에 대한 강화된 탄압이었고 인도인들은 절망과 무기력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성공시킨 원동력은 간디의 높은 도덕성이었다. 간디가 가진 도덕적 우위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영국의 총칼을 극복함으로써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 자서전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좋다. 간디의 이상은 고원하고 그 실천은 따라하기 어렵지만, 이 자서전은 너무나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간디가 위대한 넋으로, 성자로 추앙받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덕성의 힘을 증명하는 간디자서전은 물질 위주의 세상을 살아가게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인생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홍식 서울대 법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7>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으로,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아직 봄바람 차가운 어느 날 오후 양지쪽 밭두렁을 무심히 걷던 중 문득 엄습하는 황홀감에 넋을 잃고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눈물이 왈칵 치솟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참냉이 잎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그리고 나물 캐던 누나를 따라다니던 시절이, 냉이죽조차 먹지 못해 누렇게 부황에 떠서 죽어 가던 이들을 대동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시 한순간이 더 지나서이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묏부리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비등(沸騰)성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삶의 허망한 실상을 절감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존재의 새 국면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문학 및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로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는 세월의 여과작용을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및 ‘스완네 집 쪽으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많은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스완 씨 댁 쪽으로’가 정확한 번역이다.

                                                   <이형식 서울대 불어교육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8>국가-플라톤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무엇이며 가장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정의란 무엇이며 과연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가? 서양세계 첫 정치철학서로 평가되는 플라톤의 ‘국가’는 이 같은 물음을 제기하며 정치공동체 내에서 인간의 삶을 전체 모습에서 검토한다.

이 책은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저자의 조국 아테네가 50여 년의 융성기를 보낸 후 스파르타와의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몰락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그가 사랑하던 아테네 식 정치공동체의 회생에 대한 저자의 깊은 소망이 담겨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이상국가 소망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는 그런 국가가 지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고 책의 말미에 밝히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통해 그가 그린 것은 허황한 꿈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이 최상의 수준에서 발휘되는 공동체의 모습과 그 성립을 위한 조건이다.

이 책에 담긴 그의 성찰은 그 시대와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얘기할 때도 언제든지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특히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시각에서도 대담하다고 할 수 있을 많은 주장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철인통치론이나 시인추방론, 사유재산을 갖지 않는 통치자들의 이상적 공산공동체 구상, 여성통치자가 등장할 기회 부여,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주장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것은 ‘국가는 정의를 토대로 할 때에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앎에 기초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각자의 것’이라는 정의 아래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것을 배분받으며 △각자 타고난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는 공동체가 가장 좋은 나라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구성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통치하면 그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며 이를 ‘철인(哲人)통치’라고 정의했다. 이는 서양문명 초창기의 ‘지식국가’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제 나눈 긴 대화를 다시 전하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대화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질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설정을 통해 대화자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향후 논의내용과 전개방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게 된다. 독자들은 어느 단계에서나 전혀 다른 논의 전개를 시도하며 대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플라톤은 철학이 특정한 교설(敎說·가르치고 설명함)의 ‘굳은 체계’가 아니라 주어진 문제에 관해 진리를 추구하며 이것이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생동하는 현장’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플라톤은 제기되는 물음과 비판에 대해 방어하며 근거를 제시하는 탐구의 작업만이 학문이며 철학일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박종현 교수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2500년 전의 고전을 한국의 독자들도 정확하고도 유려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김남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한중록-혜경궁 홍씨 

1762년 음력 윤달 5월 13일 영조대왕이 큰아들 사도세자의 처소를 찾아갔다.

양력으로 치면 8월 초쯤, 무더위로 푹푹 찔 때다.

왕은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고 목이 메도록 빌었다. 섬돌에 머리를 부딪기도 했다. 11세의 어린 손자(후에 정조)까지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결심은 반석 같았다. 세자를 죽이고자 하는 뜻을 쉬 이루지 못하자, 급기야 뒤주를 가져오라 했다. 재촉과 만류가 되풀이되면서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었다. 세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주에 들어갔다. 거구의 세자는 왕이 직접 꽁꽁 봉한 좁은 뒤주 속에서 어둠, 무더위,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숨졌다.

이 과정을 지척에서 겪은 이가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혜경궁은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죽였건만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시아버지가 지존이니 어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혜경궁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도 20년 동안 한을 가슴에만 품고 지내다가 환갑을 맞을 때쯤에야 옛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총 5차례에 걸친 회고록을 총칭한 것이다. ‘한중록’은 일관되게 기획된 글이 아니어서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중록’은 좋은 문학 텍스트는 아니다.

게다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아들 정조에게 사사(賜死) 당한 작은아버지, 유배지에서 죽은 동생 등 대개 친정 식구들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어서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분출을 보인다. ‘증오의 서’라 불릴 만큼 직설적이다.

하지만 정제되지 못한 표현과 감정이 ‘한중록’의 매력이기도 하다. 꾸미지 않고, 멋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본(異本) 중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소장본처럼 자기 부모의 부부싸움까지 시시콜콜 다 얘기하는 이본을 더 가치 있게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중록’의 가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이나 혜경궁의 글 솜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지켜보는 필자의 시선이다. 혜경궁은 가해자 영조의 며느리이자 피해자 사도세자의 아내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한때 외가를 공격한 적도 있는 정조의 어머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당사자의 필치를 따라 읽어가면서 정치, 인간관계, 인간 심리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영문 번역본 ‘한중록’을 펴낸 미 컬럼비아대 김자현 교수는 수업시간에 미국 학생들에게 ‘한중록’을 읽혔더니 아주 반응이 좋더라고 했다. 무릇 고전은 국적을 뛰어넘는 법이다.

현재 출간된 ‘한중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김동욱 선생이 교열하고 주석한 ‘한듕록’(민중서관·1961)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여타의 ‘한중록’은 대부분 이 책을 쉽게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김용숙 선생의 역저 ‘한중록 연구’를 참조하며 ‘한듕록’에 도전해 보자.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0>도덕계보학-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1887년에 출간한 것은 이미 8권의 저서를 낸 후였다.

이 책은 니체가 1886년 그의 사상을 종합해 출간한 ‘선악의 피안’의 속편으로 그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술된 약 160쪽의 비교적 얇은 책이다.

니체는 사상에서 가장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이 책을 통해 탐구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 오랫동안 강요되면서 뿌리내려오게 됐다는 것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 책은 도덕적 가치 기준 중 공존하지만 구별되는 두 가지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좋다’와 ‘나쁘다’, 그리고 이와는 구별되는 ‘선하다’와 ‘악하다’라는 두 쌍의 기준이다. 그는 이 두 기준이 명확하게 다른 연원을 갖고 있으며, 또 서로 다른 역사를 거쳐 발달해왔다고 강조한다.

니체는 ‘좋다’와 ‘나쁘다’의 가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확립된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독점하던 종족 집단이 스스로를 ‘좋다’고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강요한 결과로 생긴 기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가치 기준은 ‘금발의 야수’로 불리던 게르만 전사(戰士) 귀족들의 것이었고, 게르만의 관습이 그들이 지배하던 유럽 대륙 전체로 전파돼 유럽 사회의 일반적 속성으로 뿌리내리면서 굳어진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선하다’와 ‘악하다’의 기준은 다수의 피지배 계층이 갖고 있던 지배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표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전사 귀족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성직자들이나 유대인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직자들이 대중의 원한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고 주장한다.

즉,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피지배층이 갖고 있던 원한을 분출해 지배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수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우회적인 형태로 지난 2000년 동안 서서히 서구인들에게 정착돼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 기준이 만들어낸 결정체가 바로 ‘금욕적 이상’이라고 결론짓는다.

니체는 이 책에서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분출하는 본능에 따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강력한 동물로 인간을 회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극복하는 위대한 모습으로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는 존재로 진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초인’이란 독재적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극복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또 사회적 약자들의 원한이 만들어내는 독소는 특히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결국 사회적, 개인적인 원한이 쌓이면 그 사회 또는 개인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므로 이들이 핍박받지 않도록 자유주의의 확산, 창의력의 독려가 사회 구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 봐야 한다.            <최정운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1>젊은 예술가의 초상-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여러 작품 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일반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자 현대 성장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소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유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뒤 예술가의 꿈을 안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가정과 조국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성장소설과 달리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 대신 주인공의 ‘의식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갖가지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자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저항하며 또는 소화해 내는지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여기에 매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언어선택을 통해 이를 설명,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과정에 개입해 독특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찬사에 걸맞게 이런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체험을 감수성이 예민한 식민지 청년인 주인공의 비장한 성장과정에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스티븐 디달러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작가 자신이 잠시 사용한 적 있는 필명이었다. ‘스티븐’은 신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역경을 탈출한 그리스 신화 속의 예인(藝人)이다. 이처럼 목숨을 거는 비장함과 비상하는 경쾌함은 실제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옛날 옛적 아주 좋았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신화는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양가치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가 여러모로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점이었으며 21세기에도 각광받는 현대고전작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의 위상이다.

둘째는 그의 책이 그가 성취한 인간탐구가 유례없이 풍부하고 진솔하며 철저하면서도 문제의식이 강해 매우 각별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단련시킨 자전적 상상력이 도시와 시민, 언어와 의식, 역사-신화-정치 등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도시 더블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셋째는 그 체험내용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다분히 친숙한 주제와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도 한국처럼 한때 이웃나라에 종속되는 비슷한 처지의 식민지 약소국의 갈등을 겪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처럼 남의 사정을 내 일인 것처럼 몰입해 볼 수 있다.

사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문학의 가장 핵심인 ‘율리시스’를 읽기 위한 입문서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김종건, 이상옥, 나영균 교수의 번역본 등 10여 종이 나와 있다. 작가에 관한 전기로는 리처드 엘먼의 책 ‘제임스 조이스’가 탁월하다. 이 역시 최근 전은경 교수의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김길중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2>변신인형-왕멍 

 1987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변신인형’은 왕멍(王蒙)의 대표작이다. 왕멍은 20세기 후반의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최근 들어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고 있는 그의 소설은 1940년대부터 문화대혁명까지 사회주의 중국의 분투와 영광, 실패와 상처를 짊어지면서 개혁 개방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와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소설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첫째는 1942∼1943년 일본에 점령당한 베이징의 한 가정 이야기다. 이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누나, 남동생(주인공 니자오)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유럽 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지만 속물적이고 방탕한 인물로 그려져 봉건적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등과 끊임없이 싸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언어학자가 되어 있는 성인 니자오가 1980년 독일을 방문해 겪는 이야기다. 니자오는 아버지의 옛 친구인 한 독일인 학자의 집에서 ‘난득호도(難得糊塗·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뜻)’라는 정판교(鄭板橋)의 글씨를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니자오가 귀국한 뒤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1942∼1943년 당시 가족 구성원들의 훗날의 삶과 죽음에 대한 회상이 전개된다.

넷째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개개인의 황폐한 삶이다. 그 황폐함은 너무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 거의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온통 불화와 적의만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는 그 부정적인 삶들은 차라리 폐기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니자오의 젊은 시절을 통해 그러한 삶들의 폐기를 주장하며 이모와 외할머니를 반동분자로 고발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난득호도’라는 글씨를 계기로 시작된 회상 속에서 그 삶들은 부정적인 동시에 진정성을 지닌 모순된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 모순의 발견은 이미 니자오 자신이 1957년 우파분자로 몰려 핍박받았을 때부터 잠재되어 있던 것이고, 그 잠재태가 1980년의 회상을 통해 현재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 그 모순을 보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이상(理想)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해 억압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짓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강력한 전언이다.

이는 작중 인물 니자오와 작가 왕멍의 자기반성이며 나아가서는 중국의 사회주의혁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고 개혁 개방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미래에 대한 비판의식의 점검이다. 20세기 중국이라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제기된 이 메시지는 그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

이 작품에서 문학적으로 특히 주목할 것은 시점과 화법의 복합이라는 특유의 서술 방식을 통해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가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서술 방식을 깊이 음미할 때 한층 풍부한 독서가 가능해질 것이다.

                                                 <전형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3>카오스-제임스 글리크 

인류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다수의 지성인 사이에 요즈음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복잡한 것은 조각으로 분해하여 각 조각을 이해하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사상이 빛을 잃어가고 있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라는 오래된 사상이 다시 유행하면서 공동체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창발현상(創發現象)을 이해하려고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의 홍수, 수십억 개의 염기 등 방대한 정보를 다루기 위해서는 복잡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며, 과거의 정량적인 방법보다는 정성적인 방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던 현상들을 카오스나 프랙털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류의 생각과 정신은 한층 더 커가고 있다.

거울을 바라보면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고, 그 속의 눈동자에는 다시 내가 들어 있고, 그 속에는 또다시 내가 있는데, 이같이 ‘나 안에 나 있다’라는 현상은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수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복잡계론, 비선형 동역학계론, 네트워크나 링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위와 같은 현상을 연구하고 있고, 그중 대중적 인기를 타고 있는 것이 카오스와 프랙털 기하학이다.

여기에서 카오스란 ‘질서 속의 무질서’를 뜻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미래 속의 예측불가능성’을 말하기도 하며, ‘신문에 난 조그만 칼럼’이 ‘인류의 의식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나비효과’를 이르기도 한다.

카오스는 날씨에 대한 장기간 예측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고 주식시장의 비주기적 변동, 전염병 확산이나 생태계의 변화, 심장의 박동, 밀가루 반죽하기라든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주기 등 많은 것을 설명한다.

프랙털 또한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식물의 잎이나 해안선의 모양, 산이나 구름의 모습, 허파꽈리의 생김새, 핏줄의 분포 등 프랙털이 아닌 것이 없다. 프랙털은 디지털 자료의 압축 등 여러 곳에 응용되고 있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이들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본다.

이들은 무작위성을 설명하기도 하고, 지휘자 없이도 한 무리 반딧불이가 다같이 불을 깜빡이는 것이라든지, 철새가 줄지어 나는 것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제임스 글리크 씨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뉴욕타임스에서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근무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1980년대에 유행하던 과학적 사고의 변화를 방대하게 수집하여 아름다운 이야기인 ‘카오스’를 만들어냈다.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수학자와 과학자가 위대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바치는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악보 읽기, 시 읽기, 그림 읽기 등 다양한 읽기가 있듯이 ‘카오스’를 읽을 때에도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과학적 생각을 맛본다는 자세로 대한다면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홍종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4>역사-헤로도토스 

기원전 484년에 헤로도토스는 에게 해 소아시아 연안의 항구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치적 이유로 사모스 섬에서 잠시 망명 생활을 거친 뒤 오랫동안 아테네에서 지냈는데 그때 그는 정치가 페리클레스 및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와 친교를 맺게 됐다.

그는 ‘이야기꾼’으로 청중에게 주로 아테네 여러 명문 가문 이야기, 전쟁 이야기, 그 밖의 역사적 사건들, 미지의 땅에 대한 경이로움을 들려주었다.

그는 여러 그리스 도시를 방문하고 주요 종교축제나 경기가 열릴 때마다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져 그리스 세계가 양분되자 페르시아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양국이 동맹국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해 싸웠던 것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체로 꾸민 것이 ‘역사’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다.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되살림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라고 정의를 내린 키케로가 처음 그렇게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위대한 업적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특히 왜 양대 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탐구자’로서 ‘탐구’라는 뜻의 ‘역사(Historiai)’를 썼다.

그는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전해지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서술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아프리카인, 아랍인, 카르타고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이탈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스키타이인 등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역사’는 전부 9권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헤로도토스 본인이 구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이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청중 앞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카그나치의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 9권은 각기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낭독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講)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음 7∼9권은 10년 후 마라톤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기도를 묘사한다.

‘역사’는 테르모필레 전투(22강), 살라미스 해전(24강)을 거쳐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패퇴(26강), 아테네 제국이 수립되는 제28강으로 끝난다.

이 책은 최초의 ‘동서대전(東西大戰)’을 다룬 것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동서 문명의 충돌을 살펴보게 한다.               <허승일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5>탁류-채만식 

소설은 감성 혹은 느낌으로 파악한 당대의 역사이다. 한국의 근대사를 감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내 인식 영역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대소설사에 우뚝한 몇몇 작품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채만식의 ‘탁류’는 한국 근대사를 파악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근대 한국의 초상을 한마디 느낌으로 포착한다면 ‘탁류’라는 말에 앞설 어휘가 없을 듯하다. ‘청류(淸流)’보다는 ‘탁류(濁流)’에 주목한 까닭은 탁한 역사의 흐름, 무뢰배(無賴輩)들이 횡행하는 현실의 실감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 줄은 ‘금강(錦江)…’이다. 줄을 바꾸어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게 째져 가지고는 …(중략)…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로 이어진다. 이렇게 서술자는 느긋하게 금강이 주는 느낌에서 글 읽기를 시작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식민지 수출항 군산과 서울이다. 군산은 왜곡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핵심이 되는 지역성을 지닌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탁류’가 흘러나가는 항구도시고, 근대화의 산물인 통신시설이 정비된 곳이며,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이 운영되는 공간이다. 군산은 통신과 돈과 무질서와 혼란이 뒤엉킨 크로노토프(시공간)로서 이 소설의 주제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펼쳐지는 인간사를 훑어보고 나서 그 느낌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주제는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주입하는 이성의 타액(唾液)에 실려 나온다. 수은 위에 금이 뜨듯이.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탕개가 풀려 흐느적거리며 탁류에 휩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단작스러운 인간 정주사, 몰염치한 인간 고태수, 가증스러운 인간 장형보, 음흉한 인간 박제호, 그리고 자기를 지킬 만한 깨달음도 선한 싸움을 위한 의지도 결핍되어 있는 초봉이 등 속된 세계를 살아가는 속물 군상이다. 그런데 이런 속물들은 따져보면 식민지 체제에서 속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판단은 탁류라는 ‘느낌’ 뒤에 진통을 수반하는 자성에서 비롯된다. 깨우침이 있는 독자는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닦달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란 무엇인가’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역사 전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민주의의 노예적 속성에 희생된 것이 초봉이의 삶이다. 식민지 경제구조 안에서 운영되는 가족을 앞세워 자기를 희생하는 초봉이의 태도는 그 체제가 주입한 노예근성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적, 경제적 수탈을 거쳐 정신의 노예근성을 심어 놓은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절망감의 원인을 알아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고 그 깨달음을 따라 실천할 시간 여유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비극은 비롯된다. 이 비극을 극복해 내는 데는 허구적 상상력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역사의 질곡에서 살인죄인이 된 초봉이의 앞길, 그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보듬어 안고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데는 작가와 독자의 상상적 전망이 유일한 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서는 지적 모색이 소설을 읽는 이의 의무인 까닭은 그것이 역사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한용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6>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 

자주적이고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미국인의 원형을 그려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통해서 19세기 미국인들은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이 소설은 미국문학의 전통을 만드는 데 중요한 밑바탕을 제공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키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미국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게 하기 때문에 미국문학 전통을 논의할 때도 빼놓을 수 없다.

강을 따라 또는 숲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헉(허클베리)의 삶은 문명사회가 부여하는 구속의 틀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유를 향유하고자 하는 현재의 미국인들이 시도해보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미국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인종, 종교문제 등 당대의 사회문제를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제목처럼 소년 헉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며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과부 더글러스가 강요하는 경직된 ‘문명화교육’에 불만을 품은 헉은 자신처럼 문화적 적응에서 도태된 아버지 팹과 외딴 오두막에서 자연과 더불어 원초적인 삶을 산다.

비록 숨 막히는 문명교육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폭력 역시 견디기가 힘들었던 헉은 근처 잭슨 섬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서 헉은 노처녀 잡슨 에게서 도망친 흑인노예 짐을 만나게 된다. 이후 헉과 짐이 강을 따라 내려가며 벌이는 모험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돈독한 우정은 당시로서는 꿈도 꾸기 힘들었던 ‘흑과 백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헉은 짐과의 생활을 통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고, 심지어 짐에게서 그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부성애까지 느끼게 된다.

소설 중간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으로 당대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비판한다.

뗏목이 부서져 헉은 그랜저포드 집안에 피신하게 되는데 이 가문은 근처 셰퍼드슨가(家)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등 험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두 집안의 싸움을 통해 작가는 우매한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계속된 모험 중에 만난 사기꾼, 자칭 왕과 공작을 통해 인간이 돈 때문에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있다.

소설 후반부에는 지금까지 온전히 형성된 헉의 정신적 성장과 짐과의 흑백갈등을 넘어선 형제애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들에게서 이전의 당당한 모험가의 모습은 간데없고 어린아이 톰의 황당한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종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사그라지면서 작가가 현실의 복잡한 문제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해석돼 ‘도피부’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톰이 상징하는 백인에 의해 흑인과 약자는 종국에는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당시 미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더불어 흑백문제에 관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극소수의 백인이 톰이 상징하는 그 사회의 주류를 지배하는 문명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시대의 배타성’을 풍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조철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7>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이라는 작은 책자의 저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충격적 주장을 제기한다. 필요한 경우 정치가들은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때로는 위선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때문에 그의 이름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적인 정치책략가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데에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만 매달린다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적 공헌을 정당하게 볼 수 없으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필요에 따라 일체의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조한 이면에는 당시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사회철학이던 기독교와 인문주의적 공화제 사상과 같은 ‘지적 전통’을 전복하겠다는 그의 야심 찬 지적 작업이 깔려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당시의 지적 전통 위에 수립된 정치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라기보다는 ‘있어야 할’ 이상적 정치공동체의 문제만을 다뤄 항상 사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정치학의 핵심은 ‘권력의 조직체를 어떻게 획득하고 유지할 것인가’였던 것이다.

당시까지 모든 정치이론의 중심이었던 ‘바람직한 정치 공동체의 구성과 조직의 문제’는 그에 의해 ‘효과적인 권력 조직의 획득과 유지의 방안에 관한 문제’로 바뀌게 된다. 이 권력 조직을 그는 ‘스타토(stato·국가)’로 정의하였는데 이는 그의 정치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권력 조직으로서의 국가의 문제가 마키아벨리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정치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이론에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릴 만한 큰 사건이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이 대결을 통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정치 조직으로서의 근대적 영토국가가 출현했던 당시에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도시국가 피렌체의 관리이던 마키아벨리는 군사 외교 업무를 접하게 된다. 이때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사 대결장으로서 유린되던 이탈리아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조직을 통해 이들과 같은 영토국가의 조직을 확보하고 또 뛰어난 군사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공동체 안전을 위한 결정적 수단인 힘, 즉 권력과 능력의 문제는 정치학의 중심 문제였다. 그가 ‘비르투(virt`u)’라고 표현한 이 힘이 하나의 그릇에 담겼을 때, 또 하나의 조직체가 되었을 때 국가가 된다고 정의했다.

마키아벨리의 공헌은 당대에 출현하기 시작한 근대적 정치질서의 역사적 의의를 그 누구보다도 빨리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한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근대 정치이론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군주론’을 이해할 때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기존의 도덕률에 대한 거부는 충격적이었겠지만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사(修辭)적 필요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박상섭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8>논어-공자 

“배우고 그것을 틈틈이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이렇게 시작하는 ‘논어’가 공자의 말씀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공자가 성인이고 논어가 불멸의 고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다. 20년 전에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요즘도 그런지 필자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어떤 때는 학생들에게 ‘논어’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리타분’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거름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 참된 농군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듯이 논어가 지닌 그 고리타분한 냄새에서 옛 선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때에야 우리 속에 스며있는 전통의 향기를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겠다.

논어는 2000년 이상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지식인은, 심지어 불교 승려들까지도, 논어를 반드시 읽어야 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논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공자 말씀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갔다.

논어는 조선의 유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그 시대의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논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논어는 그 자체로도 읽고 음미해 볼 만한 책이지만 우리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논어의 해석이라는 모습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논어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런 역사적 이유 외에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논어는 소위 ‘수레 축 시대’라고 불리는 2500여 년 전의 책이다. 다른 고전도 마찬가지지만 논어에는 문명이 열리면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논어는 간결한 대화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내용도 너무 평범하다 싶을 정도로 쉽다. 그렇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공자의 짧고 함축적인 대답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읽고 나서 한참 있다가 다시 생각해 보면 ‘아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감탄하게 하는 책, 이런 책이 정말 고전이라 할 만한데 논어가 그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논어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소위 성인 혹은 현인이라고 칭해지는 공자와 제자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양념 같은 부분 때문에 공자를 성인으로 모신 후대의 유학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논어에 실린 공자 말씀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더불어 성인도 약점이 있음을 알게 되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논어는 대화록이므로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도 좋은 책이다. 한문 실력도 늘릴 겸 원문과 대조해서 읽으면 더 좋겠다. 한문으로는 못 읽더라도 주석을 참조하면서 꼼꼼히 읽으면 우리 조상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주희(주자·朱子)의 사상도 아울러 알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자꾸 읽다가 보면 공자가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며 이래서 ‘공자 말씀’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허남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19>셰익스피어 4대비극 

 23일은 셰익스피어가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지 389주기가 되는 날이다. 셰익스피어는 시대, 문화, 지리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의 어휘와 구절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인용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연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 “세상에 좋거나 나쁜 것은 꼭 없어. 모든 게 생각 나름이야”, “이 세상은 무대요, 우리는 한낱 배우에 불과해” 등등.

셰익스피어의 인물과 작품들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고 삶의 깊이를 더해 준다. 이들은 극작품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작가의 문학작품, 음악, 오페라, 그림, 영화 등 모든 예술 영역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

셰익스피어에겐 40편에 이르는 작품이 있지만 우선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지름길로 ‘햄릿’, ‘맥베스’, ‘좋으실 대로’, ‘폭풍’ 등 네 작품을 추천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4개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 있는 번역서는 없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해설이 담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서 비극의 대표 격인 ‘햄릿’과 ‘맥베스’를 먼저 접해보자.

그러면 셰익스피어에 어떻게 접근해야 좀더 잘 감상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심리학자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는 마음을 열고 즐길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햄릿’은 복수비극 또는 사색과 우유부단의 비극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너무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 ‘햄릿’에는 살인과 간통을 범한 클로디어스가 있으며, 왕의 명령을 따르다 애매한 죽음을 맞이하는 햄릿의 친구인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이 있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여러 독백이 있는가 하면, 잔인한 복수 행위가 있고, 무덤 파는 광대의 인생철학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복수의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과 번민을 거듭한 뒤 햄릿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신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인간의 운명은 한치 앞도 알 수 없으니 우리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맥베스’는 왕을 시해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 맥베스가 가증스러운 살인마로 타락해 가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참담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 극은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역만을 수행하는 ‘한낱 배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유가 되면 그의 희극 중 대표 격인 ‘좋으실 대로’와 ‘폭풍’도 접해보자. ‘좋으실 대로’는 권력욕과 질투 등으로 얼룩진 궁정에서 벗어나 관용과 용서, 자비가 가능한 자연 속으로 젊은이들이 도피해 낭만적 사랑을 이루는 목가적 환경 속에서의 연애희극이다.

반면 ‘폭풍’은 폭풍으로 인해 난파가 발생하자 원수지간인 형제의 아들과 딸이 사랑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서로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로망스이다.

비극이 권력욕과 연관되어 살인과 암투, 복수가 난무하는 어두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희극은 우리가 동경하는 이상향을 무대로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을 보여준다.                                <변창구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0>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흔히 현대는 자유와 개성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몰개성과 획일성의 풍조 또한 확산되고 있다. 통설과 대세에 동조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한 징후이기도 하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부담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 ‘자유론’의 목적은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정치권력을 제한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정치권력의 행사가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사회적 다수가 행사하는 권력이 개인의 자유에 더 큰 위협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개성을 살리기 위해선 이제 ‘국가권력’이 아닌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다수의 횡포’는 공권력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며 관습이나 여론의 압력이라는 형태로 개인의 영역에 침투하기도 한다. 다수의 횡포는 어떤 형태의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한다. 밀은 “이는 다수의 횡포가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개인의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행복의 조건인 개별성과 자아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 요구된다.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진리는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오류 가능성’과 ‘부분적 진리’를 인정할 때 사회 진보가 가능하다. 이 책은 “전체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밀은 또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유럽을 유럽답게 만든 요인, 그것은 바로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고 말한다. ‘자유와 다양성’은 지적 진보의 조건이다. 사회 내 다수의 의견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면 정체 또는 쇠퇴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자유론’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다.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위험은 자유의 과잉이 아니라 순응적 태도의 확산이다.

그러나 자유를 최대한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질서와 안정이 요구된다. 밀은 “질서란 진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추가적인 목표가 아니라 진보 그 자체를 위한 수단이며 그 일부분이다”고 정의했다. 즉, 사상의 자유가 신장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그 합의는 건전한 교육과 공론에 의해 유지된다. 밀의 ‘자유론’은 진보적 역사관과 경험적 인간관을 기초로 한다. 그의 전체 저작의 맥락에서 볼 때 ‘자유론’은 원칙적 자유주의의 천명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 국한된 교훈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론’은 분명 자유주의의 고전이며 자유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유홍림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1>양철북-귄터 그라스 

역사를 소설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퀴퀴하고 끔찍하고 묵직한 야만적인 역사를?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세 살 생일날에 성장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양철북을 목에 매달고 다니며 두드리는 어린 아이 오스카가 몸으로 체현한 이야기 ‘양철북’은 바로 독일과 폴란드 국경의 자유도시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의 역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전후사의 축소판이다.

본 것을 쓰는 데 가차 없는 어린이의 눈과 출생부터 정신 성장이 완결되어 세상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진 주인공 오스카는 공식적 역사가 보여줄 수 없는 무대 뒤편의 삶, 탁자 밑의 부정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그만 양철북을 두드려 세상과 사회에 경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괴성으로 허울의 문명을 상징하는 유리와 창에 금이 가게 만들고 깨뜨려 부순다.

한 방화범이 밭을 매던 카슈바이 할머니의 네 겹 치마 속에 도망쳐 들어가면서 시작된, 정신병원에 수용된 오스카의 과거 회상은 당대 소시민들의 성(性), 부패, 나약함, 속물근성, 어이없는 끔찍한 죽음, 전쟁의 진행 등을 일상 속에서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후 독일사회의 주요 화두가 ‘과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면 그라스의 ‘양철북’은 무기력하고 비굴하며 현실에 안주했던 당시의 소시민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소시민들은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니고 수동적 가담자도 아닌, 자발적인 동참자로, 파시즘의 지지층으로 비판된다. 나치의 군악대 연주나, 무대 밑 오스카의 양철북 리듬이나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는 군중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철북’의 이야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사와 치밀하게 얽히면서―독일어로는 모두 ‘게쉬히테’라 표현되는―이야기와 역사가 서로 의미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독일의 패배로 갑작스레 러시아 군인들이 밀려들어올 때 오스카가 내민 나치 당원 배지를 감출 데가 없어 마체라트가 결국 “당을 삼키고” 목을 찔린 채 러시아군이 쏘아댄 총탄을 맞고 죽는 장면은 그라스식 그로테스크와 반어, 풍자를 여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59년 발표 당시에 극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과거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자 최고 작품이며 독일 소설의 한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는 현대 독일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항상 시대의 문제(전후사, 68운동, 시민사회 문제, 통일문제, 여성문제 등)에 정면으로 맞서되 우리에게 익숙한 리얼리즘 기법이 아닌, 작가 특유의 양식(반어, 풍자, 환상, 알레고리 등)으로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양철북’은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에 의하여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다시 한번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영화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한 전후 독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최윤영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2>정지용 전집-정지용 

 한국 현대 시문학사를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정지용(鄭芝溶·1902∼1950)을 들 수 있다. 그는 1926년 ‘학조’에 ‘카페 프란스’와 같은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해 1930년대 초반에는 ‘시문학’파에 참여하여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이후 종교시와 산수(山水)시라는 시적 편력을 거쳐 해방 정국에는 좌익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하필 정지용의 시집을 추천하는 것은 그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쓰면서 한국시의 변화상과 우리 문단의 고뇌를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였지만 이미지를 중시하는 순수 서정시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섬세한 언어의 조탁(彫琢)과 감각적인 이미지는 후대문인들, 특히 1940, 50년대에 활동한 문인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를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1920년대 후반 ‘조선지광’에 발표한 시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며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로는 그의 대표작인 ‘향수’나 ‘유리창 1’ 등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시는 ‘향수’의 첫 부분으로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하여 인간의 원초적 마음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향에 대한 심상(心象)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지금은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30년대 중반엔 일제 파시즘의 가혹한 탄압 앞에서 그는 절대적인 신에 눈을 돌려서, 식민지 지식인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인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하여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지용의 이와 같은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의 고전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즉 ‘바다’의 시편을 거쳐 ‘옥류동’ ‘비로봉’ ‘장수산’ ‘백록담’으로 시선(視線)을 옮기고 있다.

이후 새벽안개처럼 찾아온 광복은 이 땅의 지식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방 정국을 맞아 정지용은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보여주었던 ‘자기 지키기’ 행위였던 우리말로의 글쓰기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시를 쓰기보다는 나라를 만들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언론인으로서의 글쓰기와 학교 선생으로서의 가르치기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 근대 문인들의 글쓰기는 지식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지용의 시적 편력과 글쓰기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윤여탁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3>그리스 로마 신화 

서양문학과 서양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다. 아니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독자를 인간의 이상과 욕망, 동경과 좌절, 사랑과 증오, 환상과 현실이 원색으로 교차하는 매혹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무엇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세월의 흐름에 빛바래지 않는 이야기의 재미가 있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세상을 삼분한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 숱한 모험담의 주인공이 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난 아르고 원정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 바람보다 빠른 발로 구혼자들을 물리친 처녀 아탈란테, 선조 탄탈로스의 죗값으로 대를 이어 신들의 저주를 받은 아가멤논의 가문, 이름 없이 오래 살기보다 영웅으로 요절해 영원히 기억되기를 택한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채 분투하는 헥토르, 아내 페넬로페의 품에 안기기 위해 10년을 헤맨 오디세우스, 함락된 트로이를 등지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의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는 이 모든 인간들의 절박한 사연이 불멸하는 신들의 오만한 여유와 맞물려 살아 숨쉰다. 그 속에는 어려서 읽고 들은 모든 것과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고, 어려서는 의식하지 못한 철학적인 사유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켜켜이 숨어 있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도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천년 넘는 세월 동안 구전 시가와 문자화된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틀이 바뀌고, 모양새가 다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