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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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27 그랜드미션 신학대학원 | 곽두일 역사서/지혜서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지도교수님: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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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2012/9/27

그랜드미션 신학대학원 | 곽두일

역사서/지혜서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지도교수님: 박준성

Page 2: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

TABLE OF CONTENTS

제 1 장 서론 .............................................................................................................................................................. 3

제 1 절 연구의 배경 ....................................................................................................................................................... 3

제 2 절 연구의 목적 ....................................................................................................................................................... 3

제 3 절 연구의 방법 ....................................................................................................................................................... 4

제 4 절 연구의 한계 ...................................................................................................................................................... 4

제 2 장 역사란 무엇인가 ..................................................................................................................................... 5

제 3 장 성경은 믿을만한가? (김종만, 2004) ............................................................................................... 7

제 1 절 고문서 검증법 ................................................................................................................................................... 7

제 2 절 고대 사본의 문서적 증거 ........................................................................................................................... 7

제 3 절 구약성경의 신빙성 ......................................................................................................................................... 8

제 4 절 맛소라사본(AD 900)과 사해사본(BC 125)은 완전 일치 ................................................................ 9

제 5 절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 (BC 2300) ....................................................................... 11

제 6 절 구약성경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길가메슈’ (BC 3000 년전) ............................................ 12

제 7 절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지구랏.................................................................................................................. 13

제 8 절 히타이트 제국의 초기 수도 – 하츄샤(Hattusha) ....................................................................... 14

제 9 절 모압 왕 메사의 비석 .................................................................................................................................. 15

제 10 절 산헤립의 팔각 프리즘 (The Sennacherib Cylinder or Taylor Prism) ............................... 16

제 11 절 히스기야의 수로에 있던 실로암 비문 ........................................................................................... 17

제 12 절 고레스 ............................................................................................................................................................. 18

제 13 절 흑색 방첨탑 (Black Obelisk) ................................................................................................................. 20

제 3 장 신앙과 역사 (Faith and History) .................................................................................................. 21

제 1 절 페린의 견해에 대한 대안(代案) ............................................................................................................ 28

제 2 절 신앙적 지식에 대한 검증 ........................................................................................................................ 29

Page 3: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2

제 3 절 역사적 지식과 상호인격적 지식........................................................................................................... 32

제 4 절 신앙의 제유형 ................................................................................................................................................ 34

제 4 장 성경의 기록목적 .................................................................................................................................. 36

제 5 장 고대의 사건들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 ............................................................................ 37

제 6 장 성서 해석에 있어서 믿음의 위치 .............................................................................................. 38

제 7 장 결론 ........................................................................................................................................................... 40

참고 문헌 ......................................................................................................................................................................... 42

그림목차 ............................................................................................................................................................................ 43

Page 4: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

제 1 장 서론

제 1 절 연구의 배경

역사(歷史)는 기독교신학을 조명해 주는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은 이른바 하나님이 인간과 공유하고 또 인간을 통하여 그의 전 창조물과 공유하고

있는 “역사”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 (Pannenberg, 1963)1 하지만, 이미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구약을 인정하지 않는 마르시온과 같은 이단들이 있어왔고 (문경규, 2007)2,

프라이(Hans Frei)는 성경의 역사서가 ‘역사 같은(history-like) 것을 가질 뿐 역사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한다. (송병현, 2012)3 과연 지역과 시간대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구약 성경들은

역사가 아니며, 2010 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 책들 일뿐일까? 특히 역사서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수천년전의

중동지역의 역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본 연구는 그랜드 미션 신학대학원의 『역사서/지혜서』 과목 수강 중에 박준성 교수님께서

주신 발제 과제로서 구약 역사서가 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글이다.

제 2 절 연구의 목적

성경이 역사에 근거를 둔 신뢰할만한 문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히고, 특히 구약 역사서가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 알고자 한다. 이에 따라

역사서 연구를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1 W. Pannenberg, “Redemptive Event and History,” (trans by S. Guthrie) Essays on O.T.

Hermeneutics, ed. by C. Westermann, John Knox Press, 1963, op. cit., p.314.

2 문경규 저, 『사도의 창조론』 (서울: 복음문고, 2007) p. 142

3 송병현 저, 『엑스포지멘터리 역사서 개론』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 p. 47

Page 5: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4

제 3 절 연구의 방법

연구의 방법은 구약 역사에 대한 해설서를 통한 문헌 연구이다. 이를 위해 주제와 연관성이

있는 자료들을 정리 하고 있다. 그 중 성서의 신뢰성 여부에 대한 글은 고고학적 지식에

기반한 실증자료 보고를 취하고 있는 김종만 박사님의 PPT 자료에서 취한다. 더불어 신앙의

인식론적 근거나 역사적 사실성을 멀리하는 실존적 또는 소위 상호인격적 이해만을

강조하는 현대신학자 중 한명인 노먼 페린의 견해를 분석하면서 이를 비판한다.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견해는 필자가 한때 다녔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구약신학 교수님이셨던 김의원 교수님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밝힌다.

제 4 절 연구의 한계

이 보고서의 한계는 주로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신학서적과 인터넷 상에 오른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매우 제한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역사성을 무시하는 현대신학자인 불트만, 바르트,

판넨버어그, 래드등의 대표 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씩 반론을 펼쳐가며 성경의

역사성과 그 신학적 가치에 대해 논하려 하였으나, 일주일에 채 되지 않는 제한된 시간으로

인해 자료의 접근이 쉬웠던 페린(Norman Perrin)에 대한 반박으로 연구의 내용을 제한코자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제의 새로운 조명을 취하다기보단, 관련 주제에 대한 자료를

열거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이제 다시 신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원 2 학기에 접어든 미숙한 신학생의 한계라 하겠다.

Page 6: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5

제 2 장 역사란 무엇인가

1830 년대에 랑케가 역사의 도덕화에 대해 정당한 항의를 제기하면서 역사가의 임무는

“그것이 진정 어떠하였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여주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 별로 심오하다 할 것 없는 이 경구(警句)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3 세대 동안

독일과 영국의 역사가들은, 심지어는 프랑스의 역사가들까지 ‘Wie as eigentlich

gewegen’이라는 마술적인 문구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E.H.카, 1993)4 역사의 객관적

측면을 강조한 랑케의 "역사가는 자신을 숨기고 역사적 사실만 말해야 한다."는 견해는

실증적 역사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는 크게 이바지 하였으나 역사의 주관적 측면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과거에 관한 그 밖의 다른 사실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도대체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역사가에게나 공통된

기초적인 사실이 있고, 이러한 사실이 말하자면 역사의 뼈대가 된다. 하우스만은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 (ManiliiM., 2011)5라는 말로 이 부분을 설명한다. 모든 역사가에게

공통된 이른바 기초적 사실은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원료에 속하지 역사 그 자체가 속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고찰해야 할 점은, 기초적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은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의 선험적인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말을 걸어 올 때에만 이야기한다. 피란델로6의 작품 속 한 인물이

‘사실은 자루와 같아서 그 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서 있지

못한다’라고 한 말은 유시민과 ‘청춘의 독서’에서 재차 인용함으로서 유명해진 말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사실의 우위 및 자율성이라는 학설에 최초의 도전이 제기된 때는

1880 년대와 1890 년대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번진 이 생각은 20 세기 초 이탈리아의

크로체에 의해 "모든 역사는 오늘의 역사7"라고 하면서 랑케의 입장에 반대하는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즉, 랑케가 주장하는 객관적 역사 서술은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면서 역사가의

4 E.H.카 저, 곽복희 옮김. 『개정판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 청년사,1993) pp.19~20

5 M. Manilii Astronomicon : Lieber Primus (2nd ed. 2011). P.87

6 Luigi Pirandello (1867~ 1936), 이탈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7 널리 알려진 이 명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 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 메아리 칠 따름이다’ (B. Croce, History as the Story of Liberty, Egal. Transl. , 1941, p.

19) E.H.카 저, 곽복희 옮김. 『개정판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 청년사,1993) p. 35 재인용

Page 7: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6

입장과 시각에 따라 역사 서술도 달라진다고 하였다.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강조하는

크로체의 이러한 입장은 자칫 역사적 상대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었다.

한편 20 세기 후반 영국의 카는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랑케와,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강조하는 크로체를 모두 비판하면서 중도적(조화적)인 입장을 보여 주었다. 즉,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존재로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이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란 그에 의하면,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 없는 대화8"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줄 자료, 즉 사료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탐구(객관적으로)하고, 그 결과를 그 자신의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주관적으로)하는 학문이

역사라는 뜻이다.

8 앞의 책 p.47

과거의 사건 + 역사가의 견해 =역사

Page 8: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7

제 3 장 성경은 믿을만한가? (김종만, 2004)9

제 1 절 고문서 검증법

1. 사본 연대가 원본연대와 가까울수록

2. 남아있는 사본이 많을수록

3. 남아있는 사본들 간의 일치 정도

4. 외적인 자료들과의 일치 정도

제 2 절 고대 사본의 문서적 증거

저 자 (책 이름) 원문연대 최초사본 간격 사본 수

아리스토텔레스(시학) 340 BC AD 1100 1,450 년 5

율리우스 시저

(갈리아전쟁기) 50 BC AD 900 950 년 10

헤로도투스 (역사) 435 BC AD 900 1,350 년 8

호머 (일리아드) 900 BC BC 400 500 년 643

투키티데스 (역사) 400 BC AD 900 1,300 년 8

플라톤(테아이테토스) 360 BC AD 800 1,150 년 15

구약성경 1400~400 BC 125 BC 200~400 년 5,000

신약성경 AD 50~100 AD 125 50 년 8,000

F.F. 부르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원본보다 1,300 년이 지난 후에 있는 그 사본들

때문에 헤로도투스와 투키테데스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떤 고전학자도 하지

않습니다.”

9 본 장의 모든 자료들은 남원교회 김종만 박사님의 ‘돌들이 외친다!’ 라는 PPT 파일에서

발췌하였음을 거듭 밝힌다.

Page 9: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8

제 3 절 구약성경의 신빙성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가 기원전

400 년 경에 기록되었고, 맛소라 사본은

그로부터 1300 년이나 후에 쓰여진 사본이므로

많은 오류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런데, 1940 년대 중반에 굉장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1945 년 이스라엘 동부지역 사해바다

부근의 쿰란언덕에서 베드윈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동굴 속에 들어갔을 양을 찾기

위해 돌을 던져 보았다. 일일이 들어가 보기가

어려우니까 호주머니에 돌을 넣고 다니다가 동굴

안에 던져 본 것이다. 그러다가 양이 있으면

돌을 맞고 소리를 내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양이 있는 것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양 소리가 안 나고, '쨍그랑' 소리가 났다.

그래서 혹시 누가 보물상자를 묻어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그

동굴 안에 보물은 없고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 쓸데 없어 보이는 가죽 두루마리가

있었다. 목동은 이것을 '별 볼 일 없구나. 엿이나 바꾸어 먹자'라고 생각하고 아주 싸구려

값으로 골동품 상에게 팔았다. 그 골동품 상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래도 이것이

뭔가 비싼 것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훨씬 비싼 값으로 시리아 정교회의 주교에게 팔았고,

그것이 미국으로까지 건너갔다가 이스라엘 구약학자의 집념의 추적 끝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비밀거래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연구됨으로써 BC 125 년경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사본, 즉 사해사본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지 불과

270 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 기록된 것이었다. 맛소라 사본이 1300 년이나 후에

기록되었다고 비난이 심했는데,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인해 공백기를 1100 년이나 줄여 놓게

되었고, 구약성경 마지막 책 말라기서 원본이 쓰여진 뒤로 270 여년으로 사본의 연대를

좁히게 되었다. 그 이후에 많은 고고학자들이 사해 바다 부근 쿰란지역의 11 개의 동굴에서

구약성경사본뿐 아니라 신약성경사본도 일부 발견하게 되었다

Figure 1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Page 10: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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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절 맛소라사본(AD 900)과 사해사본(BC 125)은 완전 일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AD 900 년의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을

비평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믿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원본연대(BC 1400-400)와

너무나도 간격이 커서

구약성경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내용의 변질 가능성을 늘

지적해 왔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가?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오랜 후에 필사된 맛소라사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의 기록을 보존해 오신 것이다.

랜달 프라이스( '사해 사본의 비밀'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1953 년 조각난 사본들을 모으기 위해 각국의 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이 예루살렘으로 갔죠.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본을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1958 년까지 모두 7 개의 사본이

공개됐죠. 이때부터 제대로 번역도 안 된 사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중도에 포기하거나 연구를 마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사본의 금전적 가치와는 별도로 사본에

씌어진 내용 역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학자들과 베두인 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동굴을 이 잡듯이 조사했습니다. 사본에는 에스더만 빼고 모든 구약 성경이 실려 있습니다. 현대

성경과 유대교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죠. 그 전까지는 890 년에 씌어진 것이 가장 오래된 구약

성경이었는데 기원 전 200 년에 씌어진 사해사본은 1100 년이나 앞선 거죠. 성경 연구에 있어

아주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학자들은 구약 성경이 예수가 살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수천 년 전에 씌어져 수많이 번역돼 왔지만 이 사본들의

내용은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1987 년에 나온 신약 성경에 더 가깝습니다. 현대의 성경이 수천 년 전에 씌어졌다니 정말

놀라운 거죠. 사본이 기록된 기원 전 2 백 년보다 훨씬 전인 수백 년 전쯤에 원본이 씌어졌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AD 900 년의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을

비평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믿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원본연대(BC 1400-400)와

너무나도 간격이 커서 구약성경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내용의 변질 가능성을 늘

지적해 왔다. 또한 BC 700 년에 기록된 이사야서(52:13~53:12)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내용도 결국 필사본이 예수님 부활 승천한 후에 필사된 것이기 때문에

Figure 2 2000 年 만에 발견된 두루마리 성경

Page 11: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0

조작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사야

53:5)”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가?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오랜 후에 필사된

맛소라사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의 기록을 보존해

오신 것이다. 또한 이 필사본의 연대는 BC

125 년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필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의

예언은 의도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십자가 사역을 분명하게

예언하셨고 그 일이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봉하셨다. 구약 성경의 사본은

맛소라학파의 전통을 따르는 주 후

9 세기의 것이 가장 오랜 것이었으나 1947 년

사해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그 연대가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 성경사본학에 있어서 사해사본의 발견만큼이나 위대한

발견은 없었다. 팔레스틴의 한 목동이 양들을 따라 가다가 동굴들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동굴 안으로 던진 돌이 2000 년여 가까이 잠자던 항아리를 깨뜨린 것이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즈음에 독일을 중심으로 한창 일어나던 자유주의신학의 발흥으로 성경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원기자에 의해서 기록될 때에

역사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이 수많은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서 필사되고 전수, 보존될

때에도 확실하게 역사하셨음이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증거되게 된 것이었다. 사해사본이

발견되었을 당시 자유주의진영의 신학자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가운데

많은 오류들이 있음을 증거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전혀 다른 전통에 의해 필사, 보존된 사해사본을 연구한 결과 기존의 성경과의

차이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Figure 3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Page 12: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1

제 5 절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 (BC 2300)

1964 년 로마대학의 고고학 발굴대가 시리아

북부에 있는 텔 마르디크(Tell Mardikh)를

발굴하였다. 에블라(Eb-la) 도시가 세상에 빛을

드러냈다. 무려 15,000 여개의 토판이 발굴되었다.

이 시대는 아브라함(출생 2166 년)과 비슷한

연대기에 해당된다.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으로

기원전 3 천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대한 창조의 작업을 하신 분이

‘루갈/Lugal’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모세의 시기보다 1000 년 이전에 사람들이 창조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며, 문자에 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창세기 앞부분의 장들은 솔로몬 시대보다 수백 년 이후에 최초로 기록된 것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기록은 성경의 족장시대에서 성경 이외의 역사와 연관이 있는 메소포타미아

4 개국 연맹이 가나안 지역의 5 개국을 침략한 사실과 관련된 사항이었다. 에블라 도시가

다른 주변국들과 상거래를 기록하고 있는 토판에는 창세기 14 장(1~2 절)에 나와 있는

가나안의 5 개국, 곧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소알)가 성경의 순서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경은 비록 그 자체가 역사적 기록을 위한 책은 아니지만 당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Figure 4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 (BC

2300)

Page 13: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2

제 6 절 구약성경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길가메슈’ (BC 3000 년전)

대홍수의 이야기는 바벨론 신화에도 있는데, 노아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이야기는 길가메쉬의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서 신들이 한

사람에게 배를 만들어 홍수를 피하라고 지시한 내용을 담고 있다.

Page 14: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3

제 7 절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지구랏

수메르 인들은 이 지역에 기원전 3000 년 전부터 인공으로 만든 계단식 언덕 꼭대기에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이 곳을 중심으로 경배를 드리고 생활하였다.

지구라트는 '높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이 건축물은 주변에 큰 바위나 돌을 구할 수 없어서

진흙을 구워 쌓아갔다. ‘벽돌’과 ‘역청’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진실성을 더해준다. 바빌론

지방에는 건축 시에 흔히 사용되는 돌들이 나지 않는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성이다. 그 지역에서는 불에 구워진 벽돌들이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져 왔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왕조를 거쳐 계속해서 건축되었다.

대영박물관의 연구원인 조지 스미스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지구라트(Ziggurat: 높은 건물)

벽의 파편을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이 신전 건물은 신들을 성나게

하였다. 어느 날 밤 신들은 사람들이 짓고 있던 건물에 내려와서 그들을 흩어 버렸으며

그들의 말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건물 짓는 일을 방해하였다” 이 내용으로 볼때 성경의

바벨탑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현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20 여개가 있고 오랜 된 것은 BC 4000 년것으로 보인다.

Page 15: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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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절 히타이트 제국의 초기 수도 – 하츄샤(HATTUSHA)

Hittites :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수 1:4, 창 15:20)

창세기 12 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과 계약(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나

온다. 하나님은 아브람 자손이 이방에서 400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과 그 후에 큰 재

물을 이끌고 나올 것에 대해서 예언하였다. 그 말씀이 그대로 출애굽을 통해서 그대로 성취

되었다. 아브람의 자손에게 애굽강에서부터 유브라데강까지 주겠다고 하시면서 헷족속의 땅

도 말씀하셨다.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이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인다. 지금은 없어졌

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하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

'로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

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

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Page 16: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5

제 9 절 모압 왕 메사의 비석

성경은 단지 오므리왕에 대해서 왕상 16:21~28 까지 짧게 기록을 하지만 성경 이외의

기록에서는 대단한 왕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설형문자로 된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비트 오므리’, 즉 “오므리의 집’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모압 왕 메사가 디본에

세운 모압비석이 1868 년에 발굴되었다. 기록에 오므리가 모압 북쪽을 지배하고 있어서

모압이 그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물 저장소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적이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어도 잘 견딜 수

있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이렇게 강대한 왕일지라도 그가 여로보암의 악한 길로 행했기때문에 악한 왕이요

성경에서는 매우 짧게만 언급하고 있다.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Page 17: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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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절 산헤립의 팔각 프리즘 (THE SENNACHERIB CYLINDER OR TAYLOR

PRISM)

대하 32:1~21

열하 18:13~19:37

사 36 장~37 장

“앗시리아의 예루살렘 침공과 패퇴 그리고 산헤립의 암살 사건”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 사건을 의심해온 사람들에게 성경기록의 진실을 훌륭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에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함께 힘써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였다.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준비하여 비밀수로를

내고 퇴락한 성을 재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기도를 응답하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

약속이 있던 그 밤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서 앗시리아 군사 18 만 5 천 명을

몰살하였다(왕하 19:35, 사 37:36). 초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산헤립의 팔각 프리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각기둥에는 히스기야를 “마치 새장에

든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정작 정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앗시리아 진을 어느 밤에 들쥐가 침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쥐들이 활줄과 전통과 방패 손잡이 등을 쪼아먹어 싸울 수 없게 했다고 기록한다. 아마도

선 페스트를 전염으로 인한 사망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Figure 5 British Museum, London

Page 18: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17

제 11 절 히스기야의 수로에 있던 실로암 비문

히스기야 왕(원년 BC 715)이 신앙개혁을 단행하고 그리고 강대국 앗수르에 대항하였다.

히스기야는 유다지역과 세펠라 지역을 요새화했으며, 특히 예루살렘을 강력한 요새로

만들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정비하면서 한 일은 2 가지이다. 1)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여

강력한 요새를 만드는 것이며(대하 32:5), 2) 수로를 만들어서 적이 오래 포위하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한 일이었다(대하 32:3~4)

고고학자나 역사가들이 이것을 히스기야의 수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부터 예루살렘 성내의 남쪽 끝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물을 끌어 들이는

길이었다. 1880 년 한 아이가 실로암 못가에서 놀다가 수로 벽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길이가 540m 나 되는

수로의 전모가 드러났다. 벽에

새겨진 그에는 길이가 1200

규빗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히스기야 왕 당시

길이의 단위였던 규빗이

45cm 라는 것이 밝혀졌다. 오늘날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로의

건설공법이다. 건설 일꾼들은 2

무리로 나뉘어서 서로 끝부분에서

파고 들어왔는데 정확히 가운데서

만났다. 오늘날처럼 측량장비가

발달되지 못했는데도 그런 일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age 19: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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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절 고레스

1) 고레스 실린더

고레스 실린더에는 이 바사의 통치자가 바벨론을 무혈 진격으로 탈취한 후에 시행한

개혁들을 상술하였다. 바벨론의 고레스는 BC 576 년에 당시 메대국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봉신이었던 캄비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BC 559 년 반란을 일으켜 메대 왕국을 전복했다.

당시 메대 왕국의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카바도기아· 파르티아· 드랑가니아· 아리아·

코라스미아· 박트리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레스의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유화정책이다. 당시 바빌론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레스는 전쟁에 승리하자마자 칙령을

발표, 이들을 해방시켰다. 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는 그를 '야훼의 목자' '메시아' (이사야 44 장

28 절과 45 장 1 절)로 불렀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고레스는 유다의 이송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는 여건

형성을 위해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사용한 대리자로서 그려져 있다.

BC 700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BC 586 예루살렘 성전 파괴

BC 539 고레스 왕이 칙령 발표

BC 516 성전 재건 완성

Page 20: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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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레스 왕이 건설한 파사르가데 왕궁과 그의 무덤 (BC 530)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헌도 그를 '온 세상의 왕, 지구 네 축의 왕' 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고레스의 무덤은 파사르가데의 남쪽 끝, 동서양을 잇는 '왕의 대로' 선상에 있다.

외형은 거의 완벽하게 보전돼 있었다. 무덤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밑바닥 높이가

5.5m 인 모두 6 개의 사각 계단형으로 이뤄져 있고, 그 위에 높이 5.5m 인 석실이 있다.

이란 관리인의 허락을 얻어 무덤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 석실에는 창문이 달린 이중문이

안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그 안에 고레스의 시신과 금빛 관이 있었을

것이다. BC 325 년 세계 재패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찾아와 무덤이 도굴된 것을

보곤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Page 21: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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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절 흑색 방첨탑 (BLACK OBELISK)

그 당시 강대국 앗수르(앗시리아) 왕 살만에셀 3 세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 때에 전쟁을 벌여

아합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또 한번 오므리 집안 아합 일가를 몰살하고 왕이 된 예후는

또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된다. (왕하 9 장)

앗수르의 방첩탑에 따르면 예후의 집권 원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3 세(BC 858~824)가

다메섹의 영역이었던 길르앗에 있는 도성들을 차지하면서 갈멜산 부근에서 예후, 두로와

시돈 왕에게서 조공을 요구하였는데, 예후는 앗수르의 강력한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조공을 바쳤다.

Figure 6 흑색 방첨탑

Page 22: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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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신앙과 역사 (FAITH AND HISTORY)10

얼핏 생각하면, 인격적 신앙(personal faith)이 역사에 어떻게 관련되는가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것처럼 생각된다. 이에 대한 응답은 다음 3 가지 선택 중 어느 하나로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NashRonald, 1989) (로날드내쉬, 1996)

1. 신앙은 역사에 의존하고 있다.

2. 신앙은 역사와는 독립적이다.

3. 만약 존재한다면, 이 둘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선택(mediating option) 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자면, 신앙이 역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지만,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신앙, 의존, 그리고, 역사와

같은 단어에 각기 다른 의미가 내포될 경우에, 이같이 단순한 주장은 많은 수의 각기 다른

이론들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 신앙과 역사의 관계와 같은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한가지

유익한 방법은 이 주제에 대해 앞에서 이미 논(論)한 바를 하나의 출발점으로 사용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페린 (Norman Perrin) 에 의해 제시된 견해가 될 것이다.

(PerrinNorman, 1967)11 곧 페린이 구분한 3 종류의 지식(역사적 지식,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신앙적 지식)을 신앙과 역사의 의존관계, 또는 독립관계에 대한 논의의 기초로

활용할 것이다12

페린의 역사적 지식(historical knowledge)은 과학적인 역사기술(歷史記述)(즉, 계몽기

이후의 역사기술)로 말미암아 성립된 과거에 관한 지식의 종류를 의미한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그대로"(as it really was) 의 역사를 연구하는 랑케(Ranke) 의 탐구에 의해 예증된

역사적 지식의 종류인 것이다. 페린은 역사적 지식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事實的) 지식

"(hard knowledge)으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이같은 지식은 그것이

10 이 고찰은 페린(Norman Perrin)의 「역사적 지식」 (historical Knowledge),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historic knowledge), 「신앙적 지식」(faith-knowledge)사이의 구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 지식에 있어서의 신앙의 위치도 보다 깊이 검토되고 있다.

11 Perin,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Jesus, pp. 234ff.

12 페린의 “역사적 지식 "(historical knowledge) 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 "(Chistoric

knowledge) 의 구별은 마르틴 켈러 (Martin Ke11er) 의 잘 알려진 구분인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예수”(historic Jesus) 사이의 구별, 곧

“히스토리에 (historie)로서의 예수”와 “게쉬테 (Geschichte) 로서의 예수”사이의 구별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다.

Page 23: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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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의 세대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효용성(utility)에는 관계없이 그리고 탐구가가 그것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관심의 부족과는 관계없이 추구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지식은 새로운 정보(information) 에 비추어 비판적인 수정(修正)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객관적이다.

페린은 설명하기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historic knowledge)은 “본질적으로 그대로의

‘사실적인’ 역사적 지식의 수집물로부터 취사선택(取捨選擇)한 것이다. 이 같은 종류의 지식

중 어떤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errinNorman, 1967)13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훗날의 세대는 그들 개인이나

그들의 동시대인들에게 관계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의

수집물로부터 취사선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81 년도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작품인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는 1924 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에릭 리텔(Eric Liddell)

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선수겸 선교사에 대한 많은 역사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14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는 리델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 세대에

기독교인의 헌신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열어 놓았다고 느꼈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 지식

(historical know ledge) 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 (historic knowledge) 이 되며,

실존적인 의미(existential significance)를 가지게 된다.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어떤 역사적 지식이 그것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훗날의 어떤 세대에게 가지게 될 중요성,가치성, 관계성, 그리고 의미성 등에 있다.15

“과거의 역사적 지식은 그것이 ‘우리들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거나 ‘우리들과 직접적인

접촉점(a point of contact)을 가지고’ 있거나 하는 한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이 된다. (PerrinNorman, 1967)16

히스토리에(Historie) 에 포함될 만큼 충분히 중요한 모든 과거의 사건 중에서 일부의

13 Ibid., p. 235.

14 리델의 생애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그 영화에 나오는 몇 가지 사실들인 이야기의 흥미를 돋구기

위해 꾸며진 내용임을 알고 있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은 역사(Historie)가 아니었다.

15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페린의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사이의

대조에 대한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페린의 구분은 역사는 오직 과거에 일어난 중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핵심적인 통찰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과거의 사건이 중요치 않거나

풍요치 않다고 믿어진다면, 그것은 어떠한 역사의 기록으로 보존되지는 못할 것이다. 폐린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구분과 관련시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1) 단순과거(the simple

past)- 아주 사소하기 때문에 어떠한 역사적 기록으로도 보존될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2) 중요과거(the important past~ 잘 보존된 모든 사실을 포항하고 있다. (3) 주요한

중요과거 (the important important past)~ 훗날의 어떤 세대에게 의미 있는 과거에 대한 “사실적인

지식”(hard information)이다. 이것은 페린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에 해당된다.

16 Ibid.

Page 24: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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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만 이 훗날의 어떤 세대의 게쉬테(Geschichte) 에 충분히 포함될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은 한 개별적인 사상가나 일단(一團)의 사상가들에게

차지하는 그것의 중요성의 범위에서 역사적 지식과는 다르다.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에 더하여,페린은 “신앙적 지식”(faith

knowledge)이라고 부르는 3 번째의 범주를 인정하고 있다. 안셀름(Anselm)의 해석에

따르면,신앙적 지식은 그 이상의 중요한 지식이 생각될 수 없을 만큼 아주 중요한 과거에

관한 지식이다. 페린은 신앙적 지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신앙적 지식은 종교적 헌신(Religious commitment)과 분리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중립적인 입장이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의 경우에 있어서는 가능하면서도

바람직한 것이지만, 신앙적 지식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중립성이 불가능하다. 신앙적 지식은

오직 종교적 신앙이나 헌신이 등장할 때에 가능해진다. 이같은 헌신은 신자 개인의 헌신일

수도 있고 신자들의 공동체의 헌신일 수도 있다.

2. 페린은 신앙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한정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확실히, 페린에게는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건만이 사람들을 신앙적 지식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신앙적 지식’’은 문제의 그 사람에게 귀속되는 특별한 가치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그 사람에

관한 지식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의

의미는 과거에 살았던 어떤 익명의 사람들에게 거의 귀속될 수 있다. …… 그러나, “신앙적

지식,’은 오로지 계시, 종교적 체험,종교적 신앙 등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한

인물에게 귀속될 수 있다. (PerrinNorman, 1967)17

‘‘예수는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항목에 해당 되지만, 동시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의 범주에도 해당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들 자신의 경험 속에서뿐 아니라 전체

인류의 경험 속에서도 중대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앙적 지식에 의하여

사람은 예수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은 우리가 역사 속의 어떤 다른 개인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신앙적 지식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페린은 역설한다.

여기서 이와 같은 [예수의〕죽음에 귀속되는 가치는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간주되는 사실로 인해서 신앙적 지식에 귀속되는 것이다.…… 예수는

17 Ibid., p. 237.

Page 25: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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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탐구의

추이(推移)에 따라 가변적인 (글자 그대로) 역사적 진술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켰다는 것은 확실히 역사적 진술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비록

기독교인으로서 그 사실을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을 주목 하는 것마저도 역사가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다. (PerrinNorman, 1967)18

페린이 지적한 것은 “예수는 죽었다”는 진술(statement)은 역사적으로 탐구될 수 있으나

“예수는 세상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주장(claim)은 역사적 탐구를 초월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 지식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예수는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죽음 속에서 한 인간의 단순한 처형

이상의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원리적으로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역 사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심오한 선언을 탐구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역사가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예수의

죽음에 초역사적인 영역 (transhistorical dimension) 을 부여한다.

3. 신앙적 지식에 대한 페린의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은 그보다 더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반박 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보다 전통적인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적 지식은 역사적 지식에 필연적으로 의존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3 번째 주장에는

반론을 제 기할 것이다. 이와 같은 페린의 논지(論旨)에는 다음 두 가지 질문이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의 사건 (또는 한 사건의 내력)이 역사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즉 어떤 사실이 히스토리에(Historie)

(실제적인: actual)가 아니면서 게쉬테(Geschichte)(의미있는 : meaningful)일 수가

있는가 ?이고 둘째는, 하나의 사건(또는 그 사건의 내력)이 히스토리에가 아니면서 신앙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이다. 불트만(Bultmann) 과 페린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마샬(L

Howard. Marshall)과 같은 보수주의 학자까지도 게쉬테가 반드시 히스토리에에 의존 하지는

않는다고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MarshallI., 2001)19 우리는 이미 불트만이 게쉬테와

히스토리에를 구별하는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명제를 지적하였다.

마살의 근거는 그의 사상 속에서 그 같은 구분의 본질에서 볼 때는 아주 다르다. 마샬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음이 역사적 탐구를 통해 중명되는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사람들이

종종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험적 사실을 주목하였다. 예컨대, 미국인들은 워싱턴이나 링컨과

같은 국가적 영웅에 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사실로 믿고 있다. 그리하여, 마샬은

신화나 전설이 신앙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우리는

18 Ibid., pp.237–38.

19 Marshall, I Believe in the Historical Jesus, pp. 44-45.

Page 26: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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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나 인물들이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그 여부를 불문하고 신앙적 지식을 가질 수가

있다 는 것이다. 따라서, 게쉬테가 되는(후세의 세대에 실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는

히스토리에 실제적인 기초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하나의 실례가 이것을 예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역사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는 글래스톤베리사원의 유적지이다. 그 유적지를 방문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지점이 아더왕의 무덤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표시가 붙어 있는

육안으로 보이는 무덤은 무시해버리고 옛날에 그 사원의 거룩한 제단이었던 곳 앞에

서있었음을 의심 없이 상기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같은 경험을 할 때에 풍부한 감정이 솟아날 수 가 있다. 아더,원탁, 그리고 엑스카리버

등의 표상(表象)은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사람의 의식 속에 쉽게 새겨질 수 있다. 비록

아더왕에 관한 이야기 중에 어느 것도 히스토리에에 기초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게쉬테로서 기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아더왕이나 링컨대통령에 대한 비역사적인 전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들을

게쉬테와 히스토리에 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무시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공상적인 백일몽 (白曰夢)이나 국가적인 신화의 중요한 부분인

영웅전을 무시해 버리면, 게쉬테의 기능을 수행하는 비역사적인 사건들은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더왕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었고 그에 대한 모든 이야기 들은 순전히 허구였다고 완전히 확신하고서 그의

“무덤”앞에 서있었더라면, 나는 그에 대하여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을

이성적으로(rationally) 소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더왕에 관한 어떤 이야기들이

히스토리에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둔 것이었다는 믿음을 무시 한다면,그에 대한 몽상적인

백일몽은 영화 백설공주 (Snow White)나 7 인의 난장이들(the Seven Dwarfs) 에 대한 감상과

구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신화나 전설이 신앙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페린의 주장을 적절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신앙에 대한 묘사적 설명 (descriptive account)과 규범적 설명 (normative account)

사이의 구별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가 순전히 묘사적인 관점에 따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을 살펴 본다면, 우리는 사실상 사람들이 천차만별의 이유를 가진 모든 사물들이 선하고

악하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묘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저

신화나 전설일 따름인 이야기들 중에서도 신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이것은

페린이 거의 무관심했던 점이다. 신앙적 지식의 행위 역시 사람들이 믿어야 할 것, 곧

사람들이 믿을 권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규범적(規範的)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

같은 신앙에 대한 규범적 견해는 체계적인 신앙의 근거가 되어야 할(ought to be) 것을

고려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어떤 사람들은 비역사적인 것 속에서도 신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라도, 합당한 질문은 그들은 이와 같은 신앙적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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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성적인 사람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아더왕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조금도 역사적일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때,그의 낭만적인 백일몽은 덧없이 끝이 나고, 그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마찬가지로,역사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예수에 관한 신앙적 지식 역시

참되고 정돈된 신앙으로 적합할 수가 없다.

4. 페린은 계속하여 신앙적 지식은 상호인격적(interpersonal) 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 (Martin Buber)의 유명한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은 “나-그것’’이 라는 관계의 지식(I-It Knowledge)의 실례이고,

반면에 신앙적 지식은 “나—당신”이라는 관계의 지식(I-Thou Knowledge)의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부버는 이같이 아주 난해한 전문술어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어떤

객체(object)나 사물인 지식의 행위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어떤 주체(subject)인 인격적인

지식의 행위를 서로 구분하는 데 사용하였다. 예컨대, 이 책이나 나의 자가용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내가 어떤 비인격적인 사물에 관계되는 나ᅳ그것의 지식이지만, 나의 딸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내가 다른 주체에 관계되는 나—당신의 지식이다. 나一당신의 지식은 실존적인

상호인격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페린은 이것이 신앙적 지식을 규정짓는다고 생각한다.

5. 마지막으로, 페린은 신앙적 지식은 초역사적(trans- historical) 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이 요점을 다음과 같은 3 가지로 세분하여 설명 하고 있다 ; (1) 신앙적 지식은 그것이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하나님)의 개념을 다루기 때문에 초역사적이다. (2) 신앙적 지식은

그것이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에 모두 독립적일 수 있기 때문에,

초역사적이다. (3) 신앙적 지식은 그것이 종말론적인 미래를 대망(待望)하기 때문에 즉

역사를 초월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바라보기 때문에 초 역사적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것은 우리는 인격적 신앙과 역사와의 관계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에 접근하는 한 방법으로서 역사적 지식,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 그리고, 신앙적 지식이라는 페린의 구분을 출발점으로 삼아

뼈대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페린의 주장은 아주 보수적인 사상가들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통찰력을 간직하고 있다. 페린이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적 지식에 타당성을 기꺼이 부여하는 것은 아주 부적합한 시도이다.

불트만이나 페린과 같은 사상가들의 실존주의 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개신교

자유주의의 신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에 있어서 이론적

지식의 위치를 전락(轉落)시키고ᅳ 그것을 실존적인 헌신이나 상호인격적 소통(疏通)으로

대체하는 것에 공통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훈련 받은 정통 기독교인은

기독교신앙의 주체적인 측면(헌신)을 무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는

주체적인 헌신이 인식론적인 공백(空白)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신앙적 지식이기 위하여 가지는 실존적 의미를 어찌하여 당연히 수반하는가? 확실히

그 의미에 대한 한가지 이유는 인간은 그 사건에 대한 신적(神的)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는

Page 28: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27

지식이다. 인간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석(특별계시로 주어진 해석)을 이해하게 될

때,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에 합당한 신앙적 반응의 필요성과 본질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말을 바꾸면,이해,해석, 그리고, 인식적(Cognitive)

지식(상호인격적(interpersonal)지식과는 반대되는)은 페린의 설명에는 빠져 있는 신앙적

지식의 중요한 조건이다.

페린은 역사적 지식은 적어도 다음 3 가지 면에서 신앙적 지식과 관련된다고 말함으로써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쳐 나간다. 첫째로, 역사적 지식은 그것이

신앙적 지식의 내용(content)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positively) 관계된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지식은 그것이 신앙의 상(傷) (faith-image)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신앙에 아주 중요하다. “예수를 믿는” 전통에 따르면, 역사적 지식은 필연적인 신앙의

내용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결국 기독교적 용법(用法)에 있어서, 신앙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고, 신자는 어떤 대상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대상’’이 “예수”인 한에 있어서,

역사적 지식은 그것으로 그 내용에 대한 주요한 원천이 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주요원천은 언제나 교회의 선포, 즉 부활한 주님에 대한

기독교인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포일 것이다. (PerrinNorman, 1967)20

이상의 글귀에서 볼 때, 페린은 신앙과 역사적 지식 사이에 그가 이전에 끼워 넣었던

간격의 크기를 좁히려고 애를 쓰고 있다. 역사적 지식은 결국 신앙적 지식에 중요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앙의 내용의 주요원천이 될 수는 없다. 전형적인 불트만의

방식을 따라,그는 역사적 지식에 근거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교회의

케류그마(kerugma) 에 그 주요 원천을 고정시킨다.

둘째로, 페린은 역사적 지식은 그것이 예수에 관한 허위개념이나 부당개념을 저지하는 점검

책으로서 기능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방식으로 신앙적 지 과 관계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우리의 제한되어 있으나 진실한 역사적 지식에 의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된 케류그마 (kerygma)의 그리스도, 즉 올바른 신앙상은 역사적 예수에 일치하는

상이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의 가치는 이 예수에 관한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케류그마와 유사한 사이비 그리스도들의 선포를 가려내는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우리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지식은 기독교의 케류그마를

정당화시킨다. 즉 그것은 그것을 케류그마로써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써 정당화한다. (PerrinNorman, 1967)21

20 Perrin,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Jesus, p. 244.

21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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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기서, 페린이 의도한 바는 예수에 대한 참된 신앙상과 거짓된 신앙상 사이를 구분해야

하는 필요성이 상존(相存)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지식은 비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셋째로, 페린은 역사적 지식은 훗날의 신자들이 초대 교회의 것으로 추측되는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한 관계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신앙적 지식과 관련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시대나 문화에 소속된 신자가 그 신자 당대의 상황에 알맞은 양식으로

진술된 예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페린의 견해는 키에르케골(Soren

Kierkegaard)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동시대성’(同時代性 : contemporanfrous)이 된다고

지칭한 것과 유사하게 생각된다. 여기서 키에르케골이 의도한 바는 자기가 소속된 덴마크

루터 교회의 메마르고 활력없는 정통론의 배경에서 볼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와 오직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키에르케골은 사람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제 1 절 페린의 견해에 대한 대안(代案 )

페린이 자신의 불트만주의적인 견해를 본질적으로 좌우 양 극단의 견해를 중재하는 중도적

견해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페린의 우측에는 내가 지지하는

견해인 역사적 지식은 신앙적 지식에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되고, 신앙적 지식을 구성한다는

견해를 표방한 요아킴 예레미아스 (Joachim Jeremias) 같은 사상가들이 앉아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페린과 불트만 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적어도,그들은 만약 예수의 부활이 결코 일어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 : 12 —19 에서 천명한 것처럼 헛된

행위라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페린의 좌측에는 칼 야스퍼스(Karl Jaspere)와 슈베르트 오그덴 (Schubert Ogden) 같은

사상가들이 앉아 있다. 페린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신앙적 지식을 역사적 지식에 보다

밀접히 연결시키는 반면에,페린의 좌측에 위치한 사람들은 신앙적 지식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 간의 구별을 확실히 하지 않고 있다. 이와같이 보다 급진적인 사상가들에게는

예수에 관한 지식이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지식과 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만약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앙적 지식이 그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과 다름이

없다면, 예수는 단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인물의 부류에 속하는 한 사람이 되어 버릴

뿐이고,결과적으로 역사 안에서의 그의 유일성(唯一性)을 파괴해버리는 견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페린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가장 적절한

양식의 지식(신앙적 지식)은 우리가 다른 중요한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과는 구별 된다고 반박한다.

Page 30: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29

제 2 절 신앙적 지식에 대한 검증

과학적 역사기술에 입각한 기준에 따라 검토되는 역사적 지식과 달리, “종교적 또는 신앙적

지식은…… 이 와는 확실하게 다른 검증을 수반하여야 할 것인데 ; 그것은 그것이 중재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해, 그것이 시사하는 종교적 경험의 종류,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삶과 공동체적 삶의 특성 등을 포함한다.’’ (PerrinNorman, 1967)22 그러나,

페린은 또한 신앙적 지식에 경험적 인 역사적 검증이 관련되어 있음도 시인한다. 그는

신앙적 지식은 “관련된 범위 안에서, 그 지식이 경험적인 의미에서 실제적이고 진실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검증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역사적 지식이 이와 같은 종류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고 해도,이 의미는 또한 역사적인 지식에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언제나 인정되어야 한다.” (PerrinNorman, 1967)23

불트만과 페린같은 사상가들이 신앙적 지식을 역사적 지식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을 기피하는 이유는 많이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이러한 이유 중의 보다 중요한 몇

가지는 그들의 사상의 기초로서 작용하는 자연주의적인 철학적 전제들과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전제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만약 그들이 이런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충분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불트만과 페린은 모두

기독교신앙과 같이 중요한 것을 가변적인 것으로 만들고 역사적인 지식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반 뷰렌(Paul Van Buren) 은 이렇게 하는 것은

‘‘만약 역사적 판단이 예수의 형상을 재창조한다면 신앙의 성격과 내용은 역사적 재구성에

따라야 될 정도로 기독교인을 역사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지로” (BurenPaul, 1966)24

전락시켜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결국 이 논증은 역사는 결코 확실성(certainty)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역사적 탐구의 결과는 언제나 수정에 부쳐지고 오류가

예상되는 개연적 (蓋然的) 결과인 것이다.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이며 불확실한 역사의 기조는

사람이 천국을 소원하는 것에 대한 근거만큼이나 의혹이 많지 않은가? 그렇게 중 요한 것을

그렇게 불안정한 것에 의존시키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가? 지금까지 불트만과 같은

사상가들은 자기들이 기독교를 역사적 왜곡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이러한 위험에서

구출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공헌 해왔다고 자부하였다.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추구된 이 같은 종류의 제외는 값비싼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불트만이 이룩한 지적 업적을 확고히 해주는 것이 못 된다. 만약 모든 걱정 근심이

22 Ibid.,p.241.

23 Ibid.

24 Paul Van Buren,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 (New York: Macmillan, 1963), pp. 124-25.

Page 31: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0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리학적인 확신(assurance)으로 극복된다면,역사나 불트만의

이론이나 연구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유능한 최면술사를 동원하는 것

뿐이다. 불트만에 의해 요청된 똑같은 심리학적인 확실성은 단순히 사람들을 “신앙”의

상태로 최면시킴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보수주의자는 자신이 생활 속에서 의심의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대적하고 위험을 무릎 쓸 것이다. 월리 엄 호던(William Hordern) 은 이전에 다음과

같이 고찰했었다 ;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는 인생의 모든 제약 가운데 들어왔는데, 그것은 또한 역사의 제약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으로 이런 종류의 역사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에 참여하심을 파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어둠 속에서 탈피하는

것을 전혀 요구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답변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범위 안에서

결단을 하도록 요구 받는다. (HordernWilliam, 1977)25

신학자 마이클 쿡(Michael Cook) 은 역사적 모험의 망령에서 신앙을 배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거부해야 할 이유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째로, 신앙 그 자체는 본질상 모험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성격상 신앙은 그것이 역사와 본래적 내지는 본질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

신앙은 엄격히 말해, 우리들을 보다 깊숙이 인간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속으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의 모험이나,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우리의 인간성(humannens)의

중심부에서 발견된다. ……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신앙 그 자체는 모험이다. 신앙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기꺼이 의탁하도록 모든 의심과 모험을 제거시키거나 그 의탁 가운데서 역사적인 것을

포함시키지 않는 종류의 확실성을 부여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약속된 미래를

신뢰하도록 하는 종류의 확실성을 제공한다. (Michael L. CookS.J, 1981)26

이와 유사한 견해가 개신교도인 후우버 (Arlie J. Hoover)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

그런즉,역사와 신앙은 둘 다 그것들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신뢰의 자세를 요구하기

때문에 아주 유사하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보통사람은 역사가의 연구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가는 자기의 목격자들과 문헌들을 신뢰해야 한다. 심지어는 목격자들도 자기들

자신의 의식을 먼저 믿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뢰는 경신성(輕信性 :

근거없이 쉽게 믿어버림)이나 속기성(速欺性 : 근거없이 쉽게 속아버림)이 아니다. 그것을 중시해야

25 Hordern, New Directions in Theology Today, p. 55.

26 Michael L. Cook, S.J., The Jesus of Faith (New York: Paulist, 1981), p. 25.

Page 32: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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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그것은 이성적(즉, 논리적) 확실성의 수준에는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다, (HooverArlie, 1976)27

후우버에 의하면, 역사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객관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측면이다. 역사의 이러한 2 중적 성격은 역사가 신비주의(mysticism)와 실증주의의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역사는 신비주의를 기피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완전히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사건은 거기 뒤에서 일어났었다. 따라서, 그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일어났을 때부터 그것은 모든 탐구적인 정신에 이용이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문자화될 수 있고 묘사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을 검토하도록 그들에게 권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됨을 불평하는 사람들은 객관성을 기준으로 역사적 사건을 잠재적으로

보편적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HooverArlie, 1976)28

따라서, 역사는 객관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신비주의의 주관주의를 배척한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주관적 측면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실증주의의 경향도

기피한다. 과거는 직접 경험될 수가 없다. 과거는 오직 기록의 매개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만약 역사가가 자기의 권위를 믿지 못한다면, 그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신앙과 역사는 모두 합리주의와 〔주관주의〕의 최상의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병행한다. 역사와 신앙은 지식과 소망 사이의 예민한 균형 그리고, 이성과 의지, 분석과 선택,

머리와 가슴, 아울러 논리와 가치 사이의 유익한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 …… 신앙이 확실성과

경신성(credulity)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신념의 상태인 것처럼 역사는 (1) 하나님의 전체적인

노출과 (2) 하나님의 전체적인 은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계시의 한 양식 이다. 순수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그의 계시가 적절하게 내재하는 역사 속에서

찾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미 믿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기꺼이 역사의 불확실성과 우연성, 그리고 증명곤란 등을 지적한다. (HooverArlie,

1976)29

따라서,이 견해에 따르면,신앙과 역사는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유지될 수가 없다. 역사적

지식이 없는 신앙의 종류는 신약성경 속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27 Arlie J. Hoover, Dear Agnos: A Defense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Baker, 1976), p. 122.

28 Ibid.

29 Ibid.,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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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지식도 성립될 수가 없다. 신앙은 역사적 지식을 성립시키는 필연적 전제조건이다.

신앙과 역사는 상호의존적이다.

제 3 절 역사적 지식과 상호인격적 지식

에밀 부르너 (Emil Bruner) 와 같은 신정통주의신학자 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는

자신들의 다수의 논거를 나一 당신 이라는 관계의 지 식 (I-Thou knowledge : 이것은

‘‘나ᅳ그것’’이라는 관계의 지식(I-It knowledge) 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주체一객체관계(Subject-Object relationship)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 종교적 지식의

모형(paradigm)이라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그들은 인간이 객관적으로

참된 명제에 관련된 인식적 지식(cognitive knowledge)을 무시하고,인간 상호간의 대화

양식을 좇아 신의 계시를 해석하였다. 종교에 있어서 나一당신과 나ᅳ그것이라는 관계의

지식 사이의 2 분법은 많은 근거들을 훼손시킬 수 있다.30

단지 한가지를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인간상호간의 대화 양식에 대한 견해에 의존하는

것은 그것이 나一당신 관계의 지식과 나 —그것 관계의 지식으로 완전하게 양분된다고

주장하는 한 오류이다. 두 인간이 서로간에 대한 어떤 선행적(先行的)인 지식이 없다면,

인간상호 간의 관계가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같은 나一당신 관계의 지식과 나一그것 관계의 지식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은 역사에

있어서 아주 분명하다. 두 사람은 결코 서로간의 역사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이는 실제로

밀접한 상호인격적 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 카톨릭 계통의 학자인 마이클 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두 사람이 서로 접할 때, 그들은 서로 아는 데 이르는 일종의 역사적 -비판적 관점(예컨대, 배경,

관심 등>을 통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단순히 피상적인 관계를 떠나 보다 깊은 인간적인

어떤 관계를 진행시키려면, 거기에는 그들이 다른 인간들에 대해 알려진 것의 기초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곳까지 와야 한다. 하지만, 신뢰 그 자체는 그 신뢰가 이루어져야 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입증하려는 증거 의 종류를 넘어서는 것이나, 신뢰의 순간은 초월의 순간, 곧 다른

사람의 선함(goodness)을 근본적으로 긍정하고 엄격하게 중명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하여 기꺼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 자체로써 그것은 사람이 가장 상처받기 쉬운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커다란 모험인 것이다. (Michael L. CookS.J, 1981)31

30 예를 들어,Ronald Nash 의 「The Word of God and the Mind of Man」을 보라.

31 Cook, The Jesus of Faith, pp.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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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의 견해는 옳다. 피차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게으른 대화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역사에 대한 불가피한 문제들이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상호인격적 지식은 역사적 지식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사료된다. 신앙적 지식이 인간상호간의 인격적 지식과 유사한 범위가 어디까지이던 간에

신앙적 위탁이 사전적(事前的) 인 역사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믿음은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사람이 친구가 되거나 사랑에 빠질 때,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위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탁은 결코 어떤

사전지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이다. 위탁을 하는 사람은 비록 그 사람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해도, 그는 증거를 초월하여 믿고,신뢰하고 의지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지는 여전히 어떤 증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주 많은 신학자들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인식적 지식을 배제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쿡의 지적은 중요하다. 역사적 지식은 상호인격적 지식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지식은 위탁이 이루어진 뒤에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위탁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역사에 대해 믿었던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 사람을 상정해

보자,예를 들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잃은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세월이 흘러 이

사람이 청년이 될 때까지 그는 죽은 아버지가 용기 있고 고상하고, 덕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수없이 들어왔다. 그의 아버지게 대한 믿음의 상(像)이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암시할 때 그는 자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랑한다. 즉 그는 자기 아버지를

믿는다. 그러나, 이제 젊은이가 자기 아버지에 관한 모든 애기들이 거짓임을 알았다고

생각해 보자. 즉 진실한 그의 아버지는 그 젊은이가 믿어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에, 우리는 감히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들이 예수의

경우에서 주장하는 데서 보이는 것처럼 역사적 진실이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믿는

믿음에 무관하다고 주장하겠는가? 어떤 규범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잘못된 역사적 지식을 수정하는 것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앙적 지식을 파괴해버릴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신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달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역사적 지식의 변화는 인간상호간 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파괴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그것이 비종교적인 삶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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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절 신앙의 제유형

신앙의 역사적 지식의 관계를 우리가 논하는 것은 몇 가지 신앙의 양식에 대한 고찰로

귀결될 수가 있다. 몇 가지 이에 대한 비유들(analogies)은 신앙과 역사의 상호의존성을

보다 깊이 조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1. 신앙은 의지하거나 의존하는 물리 행위에 비유될 수 있다. 신앙은 자신의 몸을

어떤 버팀대에 기대는 행위에 의해 예증되는 일종의 복종 또는 위임이다. 사람이 앉고자 할

때,그는 자기의 모든 체중을 의자에 맡기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앉을 때,그는 의자가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만큼 충분히 견고하다고 믿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의자가

자신의 체중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어쨌든 앉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정확히 말해 이성적

인간의 규범이 되지 못한다. 이런 신앙의 규범은 강력하게 신앙이 객관적인 지지,즉

역사에 의해 제공된 지지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2. 신앙은 또한 팽팽한 줄 위를 걸어가는 것에 비유 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균형을 요하는 행위이다. 후우버 (Arlie Hoover)가 주장한 것처럼 신앙은 ‘‘이성주의와

신앙주의, 이성과 신뢰증거와 위탁, 머리와 가슴. …… 그리고 사실과 가치 사이의 섬세한

균형에 도달하는 것이다.’’ (HooverArlie, 1976)32 이와 같은 모험에 성공하는 비결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문화는 위험스럽게도 비인격적인 합리론에 의존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를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 측면에 얼마나 극단적으로 치우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키에르케고르는 간혹 비합리주의자

아니면 주관주의자로 오해되었다. 오늘날에는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에 대한 치우침이

너무나 지나쳐서 합리주의에 대한 치우침은 보충적인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33

3. 신앙은 또한 도약(leap)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은

신자가 도움이 되는 증거를 넘어서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도약에 비유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를 초월해서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증거를

초월하여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흄 (David Hume)의 과학법칙에 대한 분석은 이에 대한

유익한 하나의 실례이다. 흄은 우리가 어떻게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고 아는지를

물었다. 비록 우리가 태양은 언제나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알 수 있을까? 흄의 질문은

32 Hoover, Dear Agnos, p. 37

33 로날드 내쉬의 책「The Word of God and the Mind of Man」에서 비합리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현대신학의 동향이 살펴지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것, 곧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정신에 대한 인식적 지식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 속에 참된 명제를

계시 하셨다는 확신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 개관하고 있다.

Page 36: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5

과학적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자연법칙에 대한 우리의 전제가 주어졌을

때,우리는 자연은 질서정연하게 계속 운행될 것이라는 신념을 전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는 과거와 같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신념의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과학법칙은 증거의 보증보다 더 확실하게 말한다. 즉 증거는 우리에게 단지

오늘날까지 일어났던 일을 말할 수 있을 뿐이지만 과학법칙은 미래에 계속 일어날 일까지

예언한다. 우리는 단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증거를 가질 뿐이기 때문에 어떤 유익한

증거라도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언의 근거는 될 수 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흄에

의하면, 실제로 미래에 대한 “과학적’’주장의 바탕이 되는 것은 신앙이다.34 태양이 내일도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실제로 증거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일어난 일의 증거로부터 우리가 믿거나 의지하는 것이

미래에 일어 날 것이라는 사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구한다. 종교적 신앙은 확실히

도약과 유사한 종류를 포함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이라고

말했다(고전 13:12).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신앙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다. 따라서 신앙은 그것이 도움이 되는 증거를 초월하여 나아가는

위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도약에 비교될 수 있다.

신앙을 도약으로 간주하는 것에 관련된 많은 혼란으로 인해 신앙을 일종의

어둠에서,분명히 말하면, 지옥의 늪에서의 엄청난 도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를 모르면서 벼랑 위로 뛰어오르는 어떤 사람도 모범적인 신앙인은 아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을 도약이라고

말했을 때,그가 염두에 두었던 생각은 줄넘기할 때의 도약이었다. 사람이 줄넘기를 할 때

그는 처음에는 땅에 서있다가 그 다음에 땅에서 뛰어 올라 다시 땅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결코 아주 오랫동안 땅을 떠나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신앙이 도약과 비유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증거로부터, 곧 도움이 되는 객관적

증거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계속하여 확실한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역사는 신앙의 사람들에 의해 요구되는 확실한 증거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은 도약을 선호하기 때문에,또 다른 의미에서 도약에 비유될 수 있다.

신앙은 확실한 한계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물침대 위에서 뛰어볼

것이다. 만약 신앙이 도약이라면,그 도약을 받쳐주는 견고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지하는 근거나 이유 또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34 Hume은 보다 특이한 방법으로 습관과 관습 같은 유사어를 사용하여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Page 37: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6

제 4 장 성경의 기록목적

구약성경은 일반적인 역사책이 아니다. 구약성경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객관적인’

역사, 곧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첨부되지 않은 사실 자체’만을 기록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은 실제 역사에 일어난 사건을 신학적인 동기를 통하여 기록된

역사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보고 받을 수 있는 과거의 모든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만은

아니다.

신학과 역사는 분리되지 않으므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역사

기록의 임무를 신학적 활동의 차원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만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과 다른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영역인 것으로 인정한다면,

일반 역사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어떠한 회의주의의 성향도 우리가 하려는 작업에서 발견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 연구가 단지 성경적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다는 뜻은 아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사건을 사회학적 내지는 정치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역사, 곧 ‘신학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현대 역사학이나 열왕기

기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나 기록의 방법은 전혀 다르다. 현대 역사학자는 유다의

멸망 사건을 강대국의 정치 현황과 당대의 상황으로 해석하는 데 끝나지만, 열왕기 저자는

이 같은 상황도 언급하면서, 더 나아가 이런 상황의 변화를 하나님의 뜻에서 발견했다.

열왕기 기자는 당시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의 멸망을 국가의 죄 값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징계(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불순종의 언약 저주) 35 (김의원, 1998)로

간주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역사가의 연구를 넘어가는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열왕기의

역사 해석과 현대 역사가의 해석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다.

Von Rad 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형태 속에 역사가 통합되어 있다고 했다. (RadG., 1975)36

성경은 결코 객관적인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서는 독자들에게 심적인 변화와 결단을

촉구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역사서는 역사, 문학, 윤리, 신학이 잘

융합된(integrated) 놀라운 작품성을 띈다. (송병현, 2012)37

35 김의원 저, 『舊約歷史』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 pp.25 ~26

36 G.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II,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75, p. 447

37 송병현 저, 『엑스포지멘터리 역사서 개론』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 p. 38

Page 38: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7

제 5 장 고대의 사건들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대의 상황에서 설정된 성경의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관련성의 문제는 성경 자체만큼이나 오랫동안 존속하였으나 19 세기 독일의 역사철학자인

헤겔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지게 제기된 쟁점이다. 헤겔은 ‘역사 속의 정신‘ 이라는 개념을

현재를 과거에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자리 매김 하였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갖게 되는 연결성만이 중요하다.

오직 과정만이 계시적이다. 과거는 현재와의 관계를 기초로 그 관련성이 결정된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여러 사건들과 역사는 결국 현재와 연관될 때에만 관련성올

지니게 된다. (밴게메렌 W.A., 1993)38

역사로부터 신앙의 분리는 구약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초래하였고 뒤이어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실추시켰다.39 신약학자들은 예수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학적

해석으로부터 '역사적 예수'의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불트만(Bultmann)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신앙의 예수로부터 역사적 핵인 나사렛 예수를 분리시키기 위해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비평적 방법은 성경의 각 책들을 수많은

전승들에 의해 생겨난 문학적인 파편들로 분해하였다. 클럭(Klug)은 비평주의자들의

딜레마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을 잘 대변해 준다: "역사비평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매장시키는 그 장례식에서 친히 장의사들이 되어 버렸다." (KlugEugene, 1977)40

해석의 과정은 해석자와 본문, 고대의 사건과 20 세기 사이에 결코 분리를 야기시켜서는 안

된다. 헤겔철학(Hegelianism)은 그와 같은 분리를 야기시킨다. 고둥비평은 더욱 그 차이를

부각시킨다. 분명히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해석의 과정에서 성경과 현대의 독자들이 서로

연루된다. 진정한 해석은 고대의 메시지를 성경 독자에게, 똑같지는 않으나 유사한 방식으로

되살려 준다. 하나님은 말씀해 오셨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모세, 예언자들, 우리 주님,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현대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이 그의 음성을 들으며 (요 10:1-5), 그 음성은 성서로부터 우리들에게

다가온다고 말씀하셨다.

38 W.A. 밴게메렌. 『구원계시의 발전사 1』. 안병호, 김의원 역. ESP. 성경읽기사. 1993. p15.

39 For a survey, see Alan R. Millard, “Approaching the Old Testament,” Themelios 2 (1977):

34-39.

40 Eugene F. Klug, Foreword to The End of the Historical Critical Method, by Gerhard Maier (St.

Louis: Concordia, 1977),9.

Page 39: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8

제 6 장 성서 해석에 있어서 믿음의 위치

성서학의 연구 동향은 전통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현대의 성서학은 그 연륜이 100년 정도밖

에 안되었지만, 성경연구의 방법론과 성경연구의 깊이와 폭에 미친 그 충격은 부인될 수 없

다. 금세기 구약학계의 놀랄 만한 연구성과들 중의 하나는 고대 근동 및 구약 본문에 관한

보다 광범한 연구결과들을 통합하고 있는 풍성한 소논문들, 전공 논문들 및 주석들의 양산

이다. 19세기 초에 발행된 구약성경 중의 어떤 책에 관한 주석과 이에 대응되는 20세기 중

반에 발행 된 주석을 비교해 본다면.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

문헌학. 비교종교학, 고고학. 역사에 기반을 둔 통찰력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초기 기독

교도들의 주석, 중세의 주석, 종교개혁 당시의 주석들은 도외시 되었다. 과거의 것을 거부하

는 태도와 아울러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태 도가 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성서학계에서는 성경을 교회로부터 꼭 빼앗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비평학은 성경 각

책들이 등장하였던 원래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그만큼 메시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일즈(Childs)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결과는 달랐다. "우리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그만

큼 더 성경을 잘 이 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ChildsB.S., On Reading the

Elijah Narratives, 1980)41

성경연구는 여타의 문학적 혹은 종교적인 문헌에 대한 연구와 그 성격이 다르다. 성경연구

는 개인의 믿음이 전제되는 것이며. 전인격적인 헌신이 요구 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 있는

(정경적인) 주장을 고려해 볼 때, 또한 수세기 동안 내려온 유대교 및 기독교적 전통에 비추

어 볼 때.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믿음에 의한 투신을 통하여 성경을 적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전제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로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청교도

들, 또는 다른 어떤 학식 있는 성경독자들의 증거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 연속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지식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서 끝날 것도 아니다. 차일즈가 지적한 대로 “’비평이전적' 이란 용어는 조잡할 뿐만

아니라 거만하기 까지 하다.” (ChildsB.S., The Book of Exodus, 1974)42

둘째로, 구약을 연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

신의 정체성올 절대로 잃지 않게 된다. 구약성경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로 되돌아가라는 차

41 B.S. Childs, “On Reading the Elijah Narratives,” Interpretation 34 (1980):128.

42 B.S. Childs, The Book of Exodus, OTL, x.

Page 40: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39

일즈의 부르짖음은 학계를 일깨웠다. 그는 “믿음 안에서의 해석"이라는 소논문에서 비평학의

근본적인 오류가 한결같이 '주석의 목적이 객관성에 있다’ 는 가정을 취하는 데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대신 그는 설득력 있게 종교개혁적 모범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됐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구약을 읽었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이 다같

이 그의 백성에게 두신 하나님의 한 가지 목적을 증거하고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전제 안에

서 출발하였다. … 그들은 이 증거는 어떤 중대사를 행하셨던 그 어떤 분을 향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서를 읽었다."

차일즈는 이렇게 해서 신학적 맥락 안에서의 주석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우

리가 ''진정한 주석의 해석적인 순환 안으로 들어가야” (ChildsB.S., Interpretation in Faith: The

Theological Responsibility of an Old Testament Commentary, 1964)43 만이 신학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차일즈의 방법은 현대 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외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

해석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1. 한 단일한 본문은 전 구약성경 안에서 이해된다. 전 구약성경은 그 단일한 본문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2. "하나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서 옛 것은 새로운 것에 비추어, 새로운 것은 옛 것에 비추

어 해석된다.

3. 성경주석자는 구약 및 신약에서 출발하여 신학적인 현실 그 자체로 나간다, (또 역방향으

로도 움직인다): “성경 본문은 과거로부터 물려 받은 죽은 유적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전달하는 살아있는 통로이다.

43 B.S. Childs, “Interpretation in Faith,” Interpretation 18 (1964):437, 438. Hermeneutic

theory increasingly recognizes the place of the individual in interpretation.

Page 41: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40

제 7 장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개별적인 기독교신앙과 역사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역사가 무엇이고,

역사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검토해 보고, 고고학에 근거한 성경의 유의미한 역사성에

대해 알아보고, 기독교신앙은 전적으로 역사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독립적인가? 라는 문제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신앙과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점에서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을 믿는 인격적 믿음이나

신뢰는 때때로 그 사람의 역사에 관한 (about) 믿음을 기초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역사적

지식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때, 그 사람을 믿는 믿음은 약화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 인간적

친분관계와 사랑에 근거를 둔 인격적 믿음과 신뢰의 종류는 본래적으로 역사적 요인을 안고

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역사에 관해 더 잘

알기를 원한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지식은 신뢰와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고,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신앙과 신뢰도 역시 본래적으로 역사

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과거가 있는 종교였다. 그 과거가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미래에 대한 사실에 기초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 해석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서로 관련시키고 고대 본문을 현대적 상황에

적용시키는 과정이다. 성경 연구자가 성경에 대하여 취하는 관점은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실

것이며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과거 사건들에

대한 연구는 20 세기의 사람들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들은 구속의 계획을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들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 비록 20 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을 거의 2 천 년간 계속된

교회사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며 긴급한 현대적 쟁점들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수도

없고, 그들이 처한 신학적인 체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선한 연구(주석)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헌신과 자기 이해,

그리고 신학적 확신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연구가 사실들의 획득과 분석을

포함하는 한에서 역사-문법적 접근은 고대의 낱말들의 의미와 그 본문의 삶의 정황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별히 구약 역사서는 시편이나 잠언과 같은 문학작품이 아닌 시간과 공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글을 통해 직접 알 수 있기에 다른 성경장르보다 더욱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명확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들의 삶 가운데 일하심의 원리를

적용시켜 날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책이다.

Page 42: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41

크로노스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신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와 방법은 2500 여년전 구약의

역사서가 기록될 때나 2000 년도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Page 43: 역사서의 신학적 가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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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목차

Figure 1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 8

Figure 2 2000 年 만에 발견된 두루마리 성경 ............................................................................ 9

Figure 3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 10

Figure 4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 (BC 2300) ................................................... 11

Figure 5 British Museum, London ...................................................................................................... 16

Figure 6 흑색 방첨탑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