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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보고서 I 23 프라하에 단기 연수를 다녀온 이야기 글_ 양민석 ·고등과학원 수학부 연구원 201491 일부터 약 3개월간 단기 해외 연수로 체코 프라하를 다녀왔다. 해외에 학회로 열 흘 정도 나가 본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몇 개월을 보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잘 적응하고 지낼 수 있을 지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떠났다. 프라하 중심가에 있는 Academy of Sciences 에 소 속된 수학 연구소가 목적지이다. 그곳은 고등과학원과 여러면에서 유사한 연구소이다. 수학, 물리 학, 컴퓨터 과학, 핵 물리학의 네 개의 연구 부서로 이루어져 있고 연구원의 수와 건물의 규모 등 여러가지로 고등과학원과 비슷하다. 한국에서 오전 10시쯤에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가량 비행한 끝에 도착했다. 직항이어서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도착한 현지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다. 유럽 한 복판에 있는 체코는 물론 EU 에 속해 있지만 꼬룬이라는 독립적인 화폐를 사용하기 때문에 먼저 현지 화폐로 환전을 해야 했 다. 하지만 공항에서는 환전 수수료가 15%가 넘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교통비만 환전하고 연구소 에서 예약해준 숙소로 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탔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지하철 출입구에 아무것도 없다. 표를 찍는 기계도 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이 여느 평범한 계단을 20개쯤 내려가 면 지하철이 다니고 있다. 첫번째 난관은 지하철 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유럽 곳곳으로 가는 기차 들이 복잡하게 있고 기차표를 파는 곳은 보이지만 지하철 표를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 거리며 방황하다 계단 옆에 공중전화기처럼 생긴 기계를 발견했다. 그것이 표를 파는 자판기다. 하지만 자판기에 스크린 같은 것이 없다. 요금이 써있는 버튼을 누르고 돈을 넣으면 종이가 하나 나온다. 그 종이가 대중교통 티켓인데 메트로, 버스, 트램 등 모든 대중 교통 수단을 거리와 환승 횟수에 상관없이 일정 시간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트램이나 버스를 최초로 탑승했을 때, 기 둥 옆에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 같은 것에 그 종이를 넣으면 날짜와 시간이 찍혀서 나온다. 그럼 그 티켓은 활성화가 된 것이다. 표 검사원이 표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 유효한 시간이 지났거나 시간이 찍혀있지 않다면 무임승차로 간주하고 엄청난 벌금을 내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3개월 동 안 단 한 번도 표 검사원에 요청을 받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2시간쯤 누워 여행의 긴장을 풀었다. 저녁 이 되어 허기가 느껴졌다. 호텔이 주택가 한 가운데에 있고 거기엔 상점이 없다. 다시 전철역까지 Newsletter Vol 52 학회 보고서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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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회 보 고 서 I

23

프라하에 단기 연수를

다녀온 이야기

글 _ 양민석·고등과학원 수학부 연구원

2014년 9월 1일부터 약 3개월간 단기 해외 연수로 체코 프라하를 다녀왔다. 해외에 학회로 열

흘 정도 나가 본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몇 개월을 보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잘 적응하고 지낼

수 있을 지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떠났다. 프라하 중심가에 있는 Academy of Sciences 에 소

속된 수학 연구소가 목적지이다. 그곳은 고등과학원과 여러면에서 유사한 연구소이다. 수학, 물리

학, 컴퓨터 과학, 핵 물리학의 네 개의 연구 부서로 이루어져 있고 연구원의 수와 건물의 규모 등

여러가지로 고등과학원과 비슷하다.

한국에서 오전 10시쯤에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가량 비행한 끝에 도착했다. 직항이어서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도착한 현지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다. 유럽 한 복판에 있는 체코는 물론 EU

에 속해 있지만 꼬룬이라는 독립적인 화폐를 사용하기 때문에 먼저 현지 화폐로 환전을 해야 했

다. 하지만 공항에서는 환전 수수료가 15%가 넘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교통비만 환전하고 연구소

에서 예약해준 숙소로 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탔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지하철 출입구에 아무것도

없다. 표를 찍는 기계도 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이 여느 평범한 계단을 20개쯤 내려가

면 지하철이 다니고 있다. 첫번째 난관은 지하철 표를 구하는 것이었다. 유럽 곳곳으로 가는 기차

들이 복잡하게 있고 기차표를 파는 곳은 보이지만 지하철 표를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

거리며 방황하다 계단 옆에 공중전화기처럼 생긴 기계를 발견했다. 그것이 표를 파는 자판기다.

하지만 자판기에 스크린 같은 것이 없다. 요금이 써있는 버튼을 누르고 돈을 넣으면 종이가 하나

나온다. 그 종이가 대중교통 티켓인데 메트로, 버스, 트램 등 모든 대중 교통 수단을 거리와 환승

횟수에 상관없이 일정 시간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트램이나 버스를 최초로 탑승했을 때, 기

둥 옆에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 같은 것에 그 종이를 넣으면 날짜와 시간이 찍혀서 나온다. 그럼

그 티켓은 활성화가 된 것이다. 표 검사원이 표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 유효한 시간이 지났거나

시간이 찍혀있지 않다면 무임승차로 간주하고 엄청난 벌금을 내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3개월 동

안 단 한 번도 표 검사원에 요청을 받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2시간쯤 누워 여행의 긴장을 풀었다. 저녁

이 되어 허기가 느껴졌다. 호텔이 주택가 한 가운데에 있고 거기엔 상점이 없다. 다시 전철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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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tter Vol 52학

회 보

고서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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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과 학 의 지 평

학 회 보 고 서 I

10여분을 걸어가서 거기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갔다. 과일 50가지, 치즈 50가지, 소시지와 햄

50가지, 요구르트 50가지, 빵 50가지, 맥주 20가지 등 몇 가지 품목은 엄청나게 많은 종류가 있고

그 외에 공산품이나 다른 식품은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햄, 치즈, 빵, 우유, 사과, 포도,

물 등을 샀지만 한국 돈으로 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체감상 식품 가격은 한국의 1/3 정도로 느

껴졌다. 숙소에 돌아와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첫날을 보냈다.

음식 이야기를 더 하자면 현지인처럼 살다가 돌아가겠다는 결심으로 출발했고 처음 한달 동안

은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골목길 식당을 주로 다녔다. 체코 음식은 주로 주식이 고기이고 부식으

로 덤플링이라 부르는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것을 고기 소스에 찍어 먹는다. 예를 들면, 닭 반마리

가 통째로 구워져서 나오거나 300그램짜리 고기 한 덩어리가 구워져서 절인 양배추와 접시에 올

려져 나오거나 한다. 3주 쯤 지나 한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던 김치가 계속 생각난다. 잘 익은 김

치의 아삭아삭하고 칼칼한 감칠 맛 그리고 고슬고슬하고 씹으면 찰진 흰 쌀밥이 너무나 간절하

다. 4주차에 이르러 오후 3시쯤 연구실을 뛰쳐나가 한국 식당을 찾아 프라하 골목길 곳곳을 헤집

고 다니기 시작했다. 3시간 안에 한국 식당을 찾아내어 저녁을 먹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골

목길을 누비다 결국 큰 길 뒷길에 관광객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한국 식당을 발견

했다. 한국의 있는 평범한 분식집 수준의 맛이지만가격은 3배쯤 되는 한국 식당에서 반찬까지 남

김없이 다 먹고 나오면서 그동안 도대체 왜 현지인처럼 먹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는지 그 이

유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 남은 두 달은 하루에 한 끼니는 스테이크 가격에 두 배

를 주고 한국 식당에서 먹었다. 음식 말고 여러가지 일들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적응이 되

었고 프라하 거리가 동네 골목길처럼 익숙해지고 유럽 사람들로 가득찬 카페 한 가운데 앉아 있

어도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한국이 가

장 편하고 좋은 곳이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게 되었다.

공부하는 게 직업인 사람으로서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문단은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이 느껴진다. 그 연구소는 해석학에 강점이 있는데 다양한 해석학의 세부 분야를 주제로 세미나

가 매일 있었다. 세미나를 참석하면서 느꼈던 것은 연구원들의 연구 주제의 다양성 뿐 아니라 깊

이와 난이도의 편차가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연구원들이 각자 자기의 연구를 발표할 때

마다 항상 일종의 강한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주제와 비

교하고 경쟁하기 보다는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에 맞는 연구를 수행하며 거기에서 앞으로 나

아가는 것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서로 평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자기 문제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이 인기나 유행과 관계없이 한 주제와 문제를 오랜 시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틈틈히 그 연구소 교수진이 쓴 최근 논문 중에서 관심있는 논문들을 읽기도 하고 내가 세미나

톡을 하기도 했다. 읽었던 논문 중에 하나가 내 배경지식으로 확장하는 것을 도전해 볼 만 했다.

엄밀성을 상당히 희생하고 형식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논증을 마구 건너 뛰면 확장된 어떤 결

과가 성립할 것 같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꼼꼼히 계산을 해서 엄밀하게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3주동안 치열하게 반복해서 계산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중간 과정들이 암산으로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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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tter Vol 52학

회 보

고서

I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밀한 계산은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구체적인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공식들

을 만들어가며 3주 정도 매일 생각하니까 마치 새로운 구구단처럼 중간 과정들이 각인이 되서 어

느날 갑자기 암산이 되기 시작했다. 그 후에 한 3일 정도 더 시행착오를 한 끝에 가장 복잡한 부

분이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논증이지만 내가 잘 모르는 사실들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그 연구소에 있는 전문가에게 내가 추측하고 그동안 계산하여 얻은 결과

를 설명하고 남은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니 환한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중간에 그것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주로 토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3달의 시간이 지나고 한국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일단 무언가 얻은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은 홀가분 했지만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차고 황홀한 야경으로 유명한 프라하

의 관광지 한 복판에서 관광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출퇴근 길이나 한국

식당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건축물들을 여러 개를 매일 보며 지나쳐야 했다. 그 중의 특히 인상적

인 것 하나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내가 있던 연구소는 구 시가지 광장 근처에 있다. 그곳에 Prague(프라

하) astronomical clock 이 있다. 시간 뿐 만 아니라 달력 해와 달의

위치 같은 천문과 관련된 것들을 나타내는 다이얼이 기계적인 장치

들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1410년에 Charles(까를) University 의 수학과 교수가

설계하고 만들었는데 6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작동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 시계이다.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관광 온 것 같은

전문 사진가 수준의 관광객이 찍은 고품질의 사진들을 블로그

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내가 폰으로 직접 찍은 사진 하나

를 붙여넣고 연수를 다녀온 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