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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碩士學位請求論文

崔瑩將軍 신앙 연구A Study on the General Choi-Young Belief

2010年 2月

仁荷大學校 大學院

韓國學科(韓國史專攻)

레티응옥껌(Lê Thị Ngọc Cầ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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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碩士學位請求論文

崔瑩將軍 신앙 연구A Study on the General Choi-Young Belief

2010年 2月

指導敎授 徐永大

이 論文을 碩士學位論文으로 提出함

仁荷大學校 大學院

韓國學科(韓國史專攻)

레티응옥껌(Lê Thị Ngọc Cầ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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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論文을 레티응옥껌의 碩士學位論文으로 認定함

2010年 2月

主審 副審 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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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 논문은 한국의 최영 장군 신앙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최영 장군 신앙은 선초(鮮初)로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도 여러 지역에서 무속의 신으로 모셔지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최영 장군은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뛰어난 활동을 했던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무장이다. 그는 일평생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고 나라를 위해 공을 많이 세웠지만 결국에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다. 최영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업적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동시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해졌으며 무속에서는 신격화하여 모시기도 했다. 특히 무속에서의 최영의 신격화는 그의 억울한 죽음에 연관이 있다.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민간에서 수호신으로 모시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무속신앙의 장군신으로 모시는 경우이다. 이 두 경우에서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최영 장군을 모심으로 그의 한을 풀어주고 동시에 국태민안,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기원과 보호를 원한다. 현재 민간의 최영장군 사당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린다. 이러한 모습은 남해안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이 지역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외에 무당들이 최영장군 신당을 만들어 모시기도 하고 최영장군 당굿 보존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한다. 또한 지역 동제에서도 최영 장군을 기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무속에서의 최영장군신의 보편성을 확인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최영장군의 생애를 사료를 통해 알아본 후 조선시대에 그를 신격화 한 과정과 현재 민속에서의 숭배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많지 않았던 무속신앙에서 최영장군을 모시는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살펴보았다. 사료 외에도 필자가 현지에서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반영하여 사료 외에 야사나 민담, 전설 등에 이르는 자료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전체상을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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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1

II. 최영의 인물상과 평가 ...............................................................5

1. 인물상...................................................................................5

2. 평가....................................................................................10

III. 신격화 과정.............................................................................16

IV. 현대의 최영 장군 신앙............................................................23

1. 민간신앙의 수호신 최영.....................................................23

2. 무속신 최영........................................................................31

V. 맺음말........................................................................................39

참고문헌.........................................................................................41

Abstract.........................................................................................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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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한국 무당이 숭배하는 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무당이 숭배하는 신 중에는 자연신을 비롯하여 실존했던 인물인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최영(崔瑩, 1316~1388) 장군, 남이(南怡, 1441~1468) 장군,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심지어 맥아더(Mac Arthur, 1880~1964) 장군도 있다. 이렇게 보면 무속신앙이 숭배하는 신의 범위는 넓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실존 인물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왕족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또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장군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필자는 고려 말의 충신인 최영 장군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왜냐하면 그는 고려의 대장군으로서 일평생 나라를 위해 공을 많이 세웠고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영 장군의 죽음과 동시에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영 장군 신앙을 통해 고려 말~조선 초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최영 장군 신앙을 연구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장군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최영 장군이 무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인 이유에 대한 궁금증에서 연구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최영 장군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뛰어난 활동을 했던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무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했다. 이러한 업적을 이유로 하여 민간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모시기도 한다. 특히 무속신앙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격화해서 중요한 무속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서 단순히 최영 장군이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많이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신격화하는 것은 아니다. 무속신앙에서는 그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비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신다고 말한다. 민간신앙과 비슷하게 무속신앙에서도 사람들이 최영 장군을 모시는 이유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위해서이다. 그 외에도 무속신앙에서는 최영 장군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를 신격화해서 모시기도 한다. 최영 장군을 신앙의 형태로 모시게 되는 것은 조선초기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 설화를 통해서 최영 장군의 영험함을 신격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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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서는 최영 장군 출생에 관한 이야기나 살아 있었을 때 그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의 영험함을 보여주는 설화로는 ‘적묘(赤墓)1)’ 이야기와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사당에서 나타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덕물산에 있는 사당은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최영 장군사당이다. 이러한 사당의 존재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사람들이 최영 장군을 모시고 굿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무당들은 자기 신당에 최영 장군 제사 자리를 만들어 모시고 있다. 또한 최영 장군 당굿보존회2)를 설립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당굿을 행하고 있다. 현재 최영 장군 유적(遺跡)은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에 있으며 생가인 홍성에는 기봉사(奇峰祠)가 있고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남해지역에서 제일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렇게 남해지역에 많이 분포한 이유는 고려시대에 최영 장군이 연해지역에 출병하여 왜구를 격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영 장군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역사학적이나 민속학적으로 다루어져왔다. 역사학의 논문은 백은영의「문헌설화와 구비 전승에 나타난 고려의 기억-문화적 기억속의 최영 장군」과 유창규의「高麗未 崔瑩 勢力의 형성과 遼東攻略」이 있다. 백은영은 최영이 ‘충장’으로 기억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영 장군이 설화에서는 ‘배신당한 자’로 기억되고 있었다고 한다.3) 유창규는 최영의 세력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 최영은 잔존한 전문적 군사집단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집단을 중앙군의 핵심으로 유지해서 고려 왕실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우왕 14년 최영은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자로 등장했고 그 후에 明과의 협상보다는 요동공략을 통한 강경 대응으로 맞섰지만 결국 실패했다.4) 민속학 논문은 최길성 · 양종승 · 허용호의 논문이 있다. 최길성은 논문「恨 의 象徵的 의미-崔瑩 장군의 죽음을 중심으로」에서 그의 죽음이 사회극으로 확장되고, 그의 원혼을 달래는 신앙으로도 전개된다고 했다.5) 양종승의「최영 장군신1) 최영 장군 무덤에 풀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묘는 “적묘”라고 했다는 설화가 있다. 2) 최영 장군 당굿 보존회 본부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646-37번지에 있으며 회장은 서

경욱 무당이다. 이 곳에서 매년 당굿을 개최한다. 2008년에 최영 장군 당굿 보존회가 학술적 연구자들과 최영 장군 당굿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3) 백은영,「문헌설화와 구비 전승에 나타난 고려의 기억-문화적 기억속의 최영 장군」,『한국중세사연구』, 한국중세사학회, 2007.

4) 유창규,「고려말 최영 세력의 형성과 요동 공략」,『역사학보』143, 역사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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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최영 장군 당굿」에서는 최영 장군 유적지에 대해 언급하고 최영 장군당굿의 의례도 소개했다.6) 허용호는「최영 장군 당굿의 연희적 구조와 특징」에서 최영 장군당굿의 연희적 구조와 특징에 대해 살펴봤고7), 그 외에도 최영 장군당굿의 음악, 굿춤, 신복, 무구, 제물과 지화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논문도 다수이다. 그러면 최영 장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지적, 연구되는 내용은 최영 장군은 청렴 강직하게 살았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며 후에 무속신앙이 그를 신격화해서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최영의 신격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조선 사람이 평가하는 최영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영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는데 선행 연구 논문들은 그것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제 2장에서 최영의 인물상과 평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최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외에 조선 학자들이 최영을 애석해하고 탄복해하는 사료를 찾아 소개하였다. 심지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최영을 참형 시킨 것을 지적하는 사료도 있다. 이는 최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생각되며 최영 장군의 신격화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선행 연구논문들 중 최영 장군 신앙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는 없었다. 그 예로 민속학 논문들은 무속신앙 속의 무속신 최영과 당굿에 대하여 주로 언급했다. 연구자들이 최영 장군신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최영의 대표적인 인상은 무속신이다. 오히려 필자는 최영이 무속신이라기보다 민간신앙의 수호신으로 더 넓게 모셔지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무속신앙의 최영신과 민간신앙의 최영신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의 연구 진행 방향을 제시하자면 선행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먼저 최영의 인물상과 평가를 살펴본 후, 조선시대에 드러난 신격화 과정을 살펴보고 현재 민속에서의 숭배 실태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 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많지 않았던 무속신앙에서 최영 장군을 모시는 시기와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보겠다. 최영 장군은 신격화하게 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18세기의 기록을 통해 추측한 선행연구의 의견이 있는데 본 논문에 15세기 기록을 통해서 최영 장군을 모시는

5) 崔吉城,「恨의 象徵的 意味 - 崔瑩將軍의 죽음을 중심으로」,『비교민속학』4, 비교민속학회, 1989.

6)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7) 허용호,「최영 장군 당굿의 연희적 구조와 특징」,『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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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를 더 구체적으로 추측해 볼 것이다. 그 외에 필자가 현장에서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반영하여 정사 자료 외에 야사, 민담, 전설 등에 이르는 자료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전체상을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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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최영(崔瑩)의 인물상과 평가

1. 인물상

최영(崔瑩)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태어나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 12월, 만 72 세로 사망하였다. 최영은 평장사 유청(惟淸)의 5 세손이고 그의 아버지 원직(元直)은 벼슬이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다. 최영은 군사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뛰어났던 행동을 했던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해서 많은 업적을 세운 무신이고 탁월한 정치 수단으로 중앙정계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권력의 핵심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문에 결국 그 계획이 틀어지면서 고려가 망하게 되고, 그는 억울하게 참형을 당하였다. 최영에 대해 전하고 있는 기술은『高麗史』와『高麗史節要』이다. 그래서 두 사료는 귀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기술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에 따라 씌어진 것이라서 최영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지는 주의 깊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먼저 최영의 인물상을 검토하여 보자. 첫째, 최영은 뛰어난 무장이고 정치 ․ 군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권력을 갖던 장군이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면 최영은 한국인의 뇌리 속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8) 홍건적의 침입은 두 차례였을 뿐이지만 그 피해는 엄청나서 공민왕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멀리 안동까지 피난 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침략에 불과하였다. 왜구와 같이 전국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왜적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이미 고종(高宗, 1213~1250) 때부터였으나, 심하게 창궐하게 된 것은 충정왕(忠定王, 1337~1352) 2년(1350) 이후였고 공민왕(恭愍王, 1330~1374) 때부터 공양왕(恭讓王, 1345~1394) 때까지 41년 동안 총 529회로, 평균 1년에 13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의 잦은 해안촌락 침략으로 인한 농민들의 내륙 이주는 해안지대 농토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들은 개경과 가까운 강화도까지 습격하고, 조세운반

8) 홍영의,「최영-구국의 영웅인가 망국의 책임자인가」,『역사비평』48, 역사비평사, 1999,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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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 관직명

31대 공민왕

.우달치(于達赤), 호군(護軍), 대호군(大護軍), 대장군(大將軍), 상호군(상장군(上將軍)).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서해(西海).평양(平壤).이성(泥城).강계(江界) 체복사(體復使), 동북면 체복사(體復使), 양 광, 왜구 체복사(體復使).서북면 순문사(平壤尹兼西北面巡問使),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서북면 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양광도 진변사(楊廣道鎭邊使),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경상, 전라, 양광 3도 도통사(三道都巡察使),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평양윤, 계림윤.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첨의평리(僉議評理).전리판서(典理判書),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을 위한 해상교통까지 두절시켰다. 개경은 많은 귀족들이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습격에 의한 불안과 해상교통 두절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일본과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9) 이러한 나라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최영은 이성계(李成桂) 정지(鄭地) 등과 왜구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과정에서 최영은 무장(武將)이 되어 등장하였다. 최영이 담당한 관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2> 최영 장군이 담당한 관직10)

9) 이기백,『한국사 신론』(한글판), 일조각 출판사, 2008, 184쪽. 10) 위의 표는『高麗史節要』에서 나온 내용을 표로 정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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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32대 우왕

.6도 도통사(六道都統使),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 8도 도통사(八道都統使).판삼사사(判三司事), 판순위부사(判巡衛府事), 판중방사(判重房事), 영삼사사(領三司事),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 장군은 고려 시대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즉 최영 장군은 당대에 정치적으로 뛰어난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장군의 성품은 청렴결백 하며, 뛰어난 성격을 갖는 인물이었다. 그의 청렴결백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년에 최영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되었다. 신우가 일찍이 토지를 주자 최영은 국가가 빈약한 것을 고려하여 받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200석을 내여 군량에 보충케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번에 또 곡식 80석을 내여 군량에 보태게 하였다.11) 신우가 최영의 딸을 안해로 삼고저 사람을 보내여 청혼하였다. 최영이 불응하여 말하기를 “제 딸은 보잘것없을 뿐 아니라 또한 정실의 소생이 아니므로 언제나 결박에 두었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배필로 될 수 없으니 전하가 기어이 데려가려면 늙은 나는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12)

재물을 멀리한 장군의 이러한 성품은 일찍부터 다져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군의 아버지 원직은 열여섯 살 된 장군에게 “너는 금덩이 보기를 돌 조각같이 하라”고 하라고 말했고 최영은 이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점은 조선 초의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11)『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48쪽.12)『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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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초라하였으나 그 곳에 만족하고 살았으며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간혹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 것을 보면 개나 돼지 만치도 여기지 않았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백함을 탄복하였다.13)

그 외에도 최영은 왕에게 아첨하지 않고 왕이 잘못할 때마다 강직하게 간언할 것을 신하들에게 권했다.

신우가 유람 가려 하였다. 최영이 간하기를 “이제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는 형편이며 또 방금 농사 시절인데 분별없이 유람을 즐기여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14)

셋째 최영은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도 컸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일반민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그들 입장에서 정책을 입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에서 물가가 폭등하여 장사군들이 털끝만한 이해를 다투는 형편이었다. 최영이 이것을 증오하여 일체 매매하는 물품은 우선 경시서(京市署)에서 가격을 사정하여 세 받은 표식이 없는 자는 쇠갈고리로 등심을 뽑아 죽인다고 공포하고 커다란 쇠갈고리를 시장에 내어 걸었다.15)

넷째 최영 장군은 적의 침입시에 생사에 관심없이 적에게 끝까지 대항하는 저돌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병에 걸렸을 때도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몸의 상태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서강에서 왜적을 방비할 때 병에 걸려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 이런 것은 아무런 시련이 되지 못했다.

왜적이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를 무찔렀는데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는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최영이 이것을 듣고 토벌을 자청하니 신우는 최영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와 같이 란폭

13)『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46쪽.14)『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45쪽.15)『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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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장수를 보내면 확신성 있게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휘하 군사도 평소에 훈련이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요구하였으므로 신우가 허락하였다. 최영이 여러 장수 와 함께 동서강에서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할 때 병에 걸렸다. 모든 장수들이 “당신의 병이 위중하다”고 말한 즉 그는 말하기를 “장군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선에 나온 이상 어찌 병을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의사가 약을 권한즉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 이미 늙었고 또 사생은 천명에 있는 것인데 구태여 약을 먹고 살기를 바라겠는가.”16)

그는 강직한 성품답게 잘못한 재상들은 가차없이 처벌했으며, 철저히 군법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원한을 가진 사람 역시 많았다.

12년에 신우가 서해도로 사냥 갔다. 지봉주사(知鳳州事) 류반이 신우를 접대한다고 빙자하고 백성에게서 많은 재물을 거두었다. 최영은 그가 백성에게 폐해를 끼친 것을 미워하여 매를 쳤다17). 군대 중에서 말과 소를 잡아먹는 자가 있었으므로 혹은 목을 베기도 하고 혹 팔을 잘라 군사들에게 보이자 모두 공포에 떨며 추호도 범죄 하는 자가 없었다.18)

최영은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요동정벌에 성공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다. 이성계도 역시 군인으로 시작하여 많은 전쟁에서 무훈을 세운 용감한 장군이었다. 지난 날 왜구의 격퇴과정에서 최영 ․ 이성계는 막장한 무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사실 최영과 이성계의 사이에는 외교정책의 문제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대립이 존재했다. 원래 외교정책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14세기 후반기에 고려가 당면한 하나의 큰 숙제였다. 공민왕이 죽은 뒤에 신돈의 비(婢)의 몸에서 태어난 우왕이 이인임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즉위한 후 권세를 독차지한 이인임 공민왕 시대의 친명책을 버리고 친원책으로 되돌아가자 이에 대하여 이성계 ․ 정몽주 등은 강력히 반대하였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16)『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39쪽.17)『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51쪽. 18)『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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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명이 원의 쌍성총관부 아래에 있던 지역을 명의 영토로 삼는다는 통보를 했다. 이 때는 최영, 이성계 등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는데, 명의 통보를 받고 분개한 최영과 우왕이 요동 정벌을 하고자 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군사를 모으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군도통사, 우군도통사로 삼아 원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최영과 우왕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게 되었다.19) 최영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다. 부정적 평가도 있고 긍정적 평가도 있다. 최영에 대한 평가는 다음 절에서 검토해보자.

2. 평가

『고려사』에서 최영은 조선 사가들에게 시대 현실에 눈이 어두워 공요 정책을 펼친 장본인으로 비난받는다. 趙仁沃, 許應 등은 최영이 나라를 위해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해서 공을 많이 세운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그 외에 최영이 용맹하고 죽음을 무릅쓰는 성격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최영의 죄가 아주 크다고 지적했다. 조인옥이 말하기를 “그 공은 크나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요동 공격을 결정함으로써 명나라 황제에게 죄를 지어 거의 나라를 뒤집어엎을 뻔하였습니다. 이른바 공이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허응 말하기를 “[…]실로 국가의 흥망을 걸머진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계책이 없고 노쇠하여 큰 나라와의 외교 절차에 어두워 임금을 추동하여 마침내 요동 공략의 군사를 일으킴으로서 천자에게 죄를 짓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쳤으며 하마터면 나라를 뒤집어엎을 뻔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전일의 공로를 모두 짓밟아 버리었습니다.”라고 하였다.『고려사』 마지막 부분에 尹沼宗이 평하기를 “[최영의]공은 이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20)”라고 결론을 내렸다. 최영 장군에 대해 기록한 문헌 중『高麗史』는 귀중한 사료이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에 따라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지는 주의깊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윤소종, 조인옥과 허응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했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어서 최영에 대한 의견19) 이기백,『한국사 신론』(한글판), 일조각 출판사, 2008, 185쪽. 20)『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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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객관적이지 못한 면이 있을 것이다. 이성계의 승리로 최영은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계는 역적이다. 고려 사람은 최영이 끝까지 적과 싸워 국가를 보호했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군이 죽었을 때 서울 사람들은 저자를 닫았으며 이 소문을 들은 거리의 어린이들이나 시골 부녀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최영의 시체가 길가에 놓여 있었는데 오고 가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렸다고 전해진다.21) 이렇게 보면 최영은 분명 일반 백성들에게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었음에 분명하다. 『高麗史』의 결론은 “공은 이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이지만 장군은 형장에서 “내가 평생에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나의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하였다.22) 최영 장군은 분명히 억울하게 죽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믿었던 사람으로 부터의 배신으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23) 장군이 평생 동안 나라를 생각한 것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의 제일 억울한 점은 아마도 고려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도 최영 장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다음과 남아 있다.

최영은 학식이 없는 사람으로 위주(僞主)와 함께 요동(遼東)을 침범하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지만, 전하께서는 대의를 들어 회군(回軍)함으로써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한 상황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세상을 구제한 전하의 공이 종묘 사직에 있는 것입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권1 태조조(太祖朝) 1년)

조선 학자들이 최영은 ‘학식이 없는 사람’이나 ‘배우지 못하여 계책이 없다’라는 말은 분명히 객관적지 않은 것이다. 최영은 문한(文翰)을 소양으로 하는 가문의 전통을 배경으로 성장한 사람24)이고 일평생 중요한 관직을 지내고 공업을 많이

21)『高麗史』권 113, 열전 26, 최영(북역 고려사). 신서원출판, 1964, 157쪽. 22) 최승범,「최영 장군의 몇 가지 일화」,『한국인』18, 사회발전연구소, 1999, 7쪽. 23) 崔吉城,「恨의 象徵的 意味 - 崔瑩將軍의 죽음을 중심으로」,『비교민속학』4, 비교민속 학

회, 1989, 46쪽. 24) 홍성이,「최영-구국의 영웅인가 망국의 책임자 인가」,『역사비평』48,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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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 사람이다. 그러한 학식이 없고 계책이 없다는 평가는 적합하지 않다. 부정적 평가 외에도 긍정적 평가를 찾을 수 있다. 최영 장군의 죽음과 함께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성립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부터 세종까지 최영 장군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 초 지식인들에 의한 최영의 기록도 남아있다. 이 사료들은 최영이 반역자가 아니고 충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이성계(李成桂)는 왕조를 세운 후 5년(1396)이 지나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봉상시에 명하여 고려조의 시중(侍中)인 최영(崔瑩)의 시호(諡號)를 주게하였다. (태조실록 권10 5년 10월 18일)

이런 시호를 내려 주는 이유는 최영의 충신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었거나 고려 충신을 대접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이려고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때부터 조선왕조가 최영 장군의 공덕을 칭송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최영을 기리고 탄복하는 시도 많이 남아 있다. 원천석25)(元天錫, 1330~?)은 통제사(統制使) 최영이 형(刑)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편을 지었다.

其一

거울이 빛을 잃고 주석이 무너지니/ 水鏡埋光柱石頹사방의 백성들 모두 슬퍼하네/ 四方民俗盡悲哀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어지게 된다 해도/ 赫然功業終歸朽꿋꿋한 충성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으리/ 確爾忠誠死不灰이미 기록된 사실사책에 가득 실렸건만/ 紀事靑編曾滿帙새로 이루어지는 흙무덤 가련도 하구나/ 可憐黃壤已成堆멀고 먼 저승에서 무엇을 하느냐하면/ 想應杳杳重泉下뜬 눈으로 동문을 향해 울분을 참지 못 하리/ 掛眼東門憤未開26)

301쪽. 25) 원천석(元天錫, 1330~?)은 고려 말의 정세에 대한 개탄하고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

다.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6) 이익(李瀷),『성호사설(星湖僿說)』권 20, 경사문(經史門), 최영 공요(攻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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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은 최영 장군의 죽음은 곧 중심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히 그의 억울한 죽음을 중국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이야기를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일평생에 최고 가치인 충(忠)이 정작 고려의 의해 좌절되고 죽게 된 최영 장군의 원통함을 오자서의 비유를 들어 피맺힌 한을 풀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其二조정에 홀로 설제 뉘 감히 간여하랴/ 獨立朝端誰敢干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 하였네/ 直將忠義試諸難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爲從六道黔黎望삼한사직을 편안케 했네/ 能使三韓社稷安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同列英雄顔更厚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未亡邪侫骨猶寒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更逢亂日誰爲計가소롭다 세상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可笑時人用事奸27)

두 번째 시에서는 충(忠)으로 무장한 최영 장군과 반대로 그렇지 못한 동결의 무인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최영은 과감한 용기와 충의로 조정과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했지만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다. 원천석은 오히려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비열한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최영이 죽은 이 시점에서 남아 있는 사람이란 이제 간사하고 무능한 대신들 뿐이고 더 이상 고려를 위기에서 구할만한 계책을 세울 인재가 없음을 한탄했다.

其三내 지금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我今聞訃作哀詩공위한 슬픔보다 나라위한 슬픔일세/ 不爲公悲爲國悲천운의비 태도알기 어렵고/ 天運難能知否泰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邦基未可定安危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 들 무슨 소용 있으며/ 銛鋒已絶嗟何及충성스런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忠膽常孤恨不支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獨對山河歌此曲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白雲流水摠噫嘻28)

27) 이기(李墍) 찬,『송와잡설(松窩雜說)』, (『대동야승(大東野乘)』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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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은 최영과 국가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석은 자신이 최영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곧 나라가 위기에 처한 슬픔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다. 최영 장군의 억울한 처형 집행은 나라의 존폐를 걱정할 정도의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최영 장군의 굳고 곧은 충성은 그 예민함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아 정치적인 대립자들로 인해 늘 외로움을 동반했고 결국 최영은 그 세력과의 분열 속에서 희생자가 되었다고 묘사했다. 결국 그의 죽음은 자연을 비롯한 고려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안정복29)(安鼎福, 1712∼1791)은 고려사를 읽고 최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명나라 황제 위력을 물리칠 자 누구던가/ 明帝威名孰可擠요동 정벌 나서다니 닭이 삵쾡이 잡으려는 격/ 攻遼無異搏狸鷄최공이야 어쨌거나 진실로 충신이었지/ 崔公自是忠謀士피맺힌 일편단심 죽어 변치 않았다네/ 一掬血腔死不迷30)

그리고 변계량31)(卞季良, 1369~1430)의 최영에 대한 시를 소개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용 바쳐 충성하다 백발이 성성하니/ 奮威匡國鬢星星말 배운 아이들도 그 이름은 알고 있지/ 學語街童盡識名일편의 장한 마음 죽지 않고 살아서/ 一片壯心應不死천추토록 태산처럼 비끼어 있으리라/ 千秋永與太山橫32)

28) 이기(李墍) 찬,『송와잡설(松窩雜說)』, (『대동야승(大東野乘)』本).29)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그는 여러 학문을 섭렵했으며 특히

경학과 사학에 뛰어났다. 그는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실학자이었다. 30)『순암집(順菴集)』1, 고려사를 읽고 느낌이 있어[讀麗史有感].31)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며『태조실록』을 편찬하고『고려사』

를 개수에 참여하였다. 32) 변계량(卞季良),『춘정집』2, 시: 최 시중 (崔侍中)을 곡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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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이들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최영을 충신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최영을 애석해하며 탄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심광세33)(沈光世, 1577~1624)는 최영이 죄가 있다는 의견을 비판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려는 원종(元宗) 때부터 원(元) 나라를 섬겼는데, 충렬왕(忠烈王)은 드디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백여 년을 내려오면서 충선왕(忠宣王) 이하는 모두 원나라의 외손이 대대로 나라를 다스렸다. 명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공민왕(恭愍王)이 명 태조를 의주(義主)라 하여 섬기기로 하였으나, 한때 북원(北元)과 경솔히 인연을 끊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했고, 이인임(李仁任)과 지대윤(池大奫) 등은 원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하여, 서로 헐뜯고 배척하다가 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 후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자, 마침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므로, 드디어 원나라를 섬기자는 논의가 더욱 높아져서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였는데, 마침내 왕조(王朝)가 바뀌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비사(祕史)에서 듣기를, “그 당시 우리태조(이성계(李成桂))의 공명(功名)이 날로 왕성해지고, 또 ‘이씨가 임금이 될 것이다.’라는 풍설이 있었으므로 최영은 아주 그를 꺼렸으나 죄를 씌울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나라에 죄를 짓게 하고, 그것으로써 제거해버리려고 하여 마침내 이 계교가 나왔다.”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큰 잘못이다. 어찌 나라를 비어놓고 군사를 내주어 남을 해치고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고자하고도 그 화를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다만 자기의 한 몸을 보존 못하는데 그치겠는가. 망한 이의 어리석은 짓이 아니랴.34)

이상과 같이 최영에 대한 평가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그의 뛰어난 업적과 성품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평가 역시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33) 심광세(沈光世, 1577~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1613년에 응교(應敎)를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다.

34) 심광세(沈光世),『해동악부(海東樂府)』(『대동야승』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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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신격화 과정

민간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격화해서 모신다. 민간에서 최영 장군의 신격화는 이미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영 장군 신앙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자료는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택리지(擇里志)』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경(松京)에서 동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덕적산(德積山)이 있는데 위에 최영의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어, 사당 옆에 침실을 만들고 민간의 처녀를 두어 사당을 모시게 했다. 늙거나 병들면 새로운 소녀를 택하여 이를 계승한다. 지금까지 300년 동안 하루같이 그렇게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밤에 종종 영혼이 강림하여 교혼(交婚)하였다.35)

18세기에 최영 장군 신앙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책은 이중환의『택리지(擇里志)』외에 박지원36)(朴趾源, 1737~1805)의『연암집(燕巖集)』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중앙의 모든 관청과 지방의 주현(州縣)에는 이청(吏聽)의 옆에 귀신에게 푸닥거리하는 사당이 없는 곳이 없으니, 이를 모두 부군당(府君當)이라 매년 10월에 서리와 아전들이 재물을 거두어 사당 아래에서 취하고 배불리 먹으며, 무당들이 가무와 풍악으로 귀신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또한 이른바 부군(府君)이라는 것이 무슨 귀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려놓은 신상(神像)을 보면 주립(朱笠)에 구슬갓끈을 달고 호수(虎鬚)를 꽃아 위엄과 사나움이 마치 장수와 같은데, 혹 고려 시중(侍中) 최영의 귀신이라고도 말한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청렴하여 뇌물과 청탁이 행해지질 못하였고, 당세에 위엄과 명망이 드날렸으므로 서리와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신을 맞아 부군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최영은 일찍이 몸소 장수와 정승을 도맡고도 능히 위태로운 상황을 버텨내어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고 말았으며, 죽어서도 밝은 귀신이 되어 나라의 제사 의식에 오르지 못하고, 마침내 도리어 서리와 하천배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그들의 무람없는 대접을 기꺼이 받고 있으니, 신령하지 못한 어리석은 귀신이라 이를

35) 이중환(李重煥),『택리지(擇里志)』(허경진 옮김), 서울: 한양출판, 1996, 173쪽. 36) 조선 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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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다. 관직에 있을 때 청렴했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꼭 모셔야할 귀신이 아닌데 그 귀신을 섬기면 군자는 이를 아첨이라고 이른다.37)

비록 최영 장군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18세기에 확실히 최영 장군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덕적산(德積山)은 덕물산(德物山)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 덕물산(德物山)은 북한에 있기 때문에 직접 가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에는 덕물산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1928년 5월말, 1931년 2월, 5월 3차에 걸쳐 한국 무속 신앙의 대표적인 덕물산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그는 덕물산에 대해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산정의 부락을 신산동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높고 낮게 돌로 쌓은 담과 울툭불툭한 소로가 상하로 돌아가고, 40호 초가집이 있다. 그리고 부락이 들어갈 사이도 없는 곳에 장군당 즉 최영사의 문이 있다. 신전(神殿)은 삼간사면(三間四面)의 기와지붕으로 이어져 있는 본옥에 자리 잡았다. 건물에 얹은 몇 장의 청기와는 당시의 화려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본당 정면 구석에는 최영 장군 및 그의 첩이라고 하는 여인의 큰 소상이 있고, 그 우측에는 장군의 한 딸과 두 아들 그리고 군웅이 모셔지고, 좌측에는 용상을 받고 있는 별상이 있다. 별상의 딸은 천연두신 호구별상이라 하고, 별상은 소위 뒤주대왕이라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이르는 말이다. 또 옆벽에는 삼불제석 ․ 칠성실 ․ 송악산신 ․ 가망님 ․ 사방천왕 ․ 임경업장군, 좌측벽에는 감악산 천총대왕 ․ 가망부인 ․ 용왕 ․ 용왕부인 ․ 송악산신 ․ 삼불제석의 화상이 걸려 있고, 대소 볼록거울이 함께 걸려있고 장군의 장남이 청룡도와 삼지창을 가지고 서 있다. 한 구석에는 연기에 거슬린 촛대가 있으며, 신기는 무녀가 굿할 때 사용한다. 촛대는 굿이 끝난 밤에 그 당번 무녀가 반드시 장군당에 촛불을 켜도록 되어있다. 아마 그 옛날 무녀는 신처(神妻)로서 신을 모시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락의 중앙에는 장군의 부인을 모신 부인당이 있다. 장군당에 비해 규모는 떨어지지만 역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당안에 부인의 소상을 안치하고 뒤로는 큰 신경을 걸었고 그것과 나란히 좌우로 삼불 등을 모시고 외랑에는 부인의 하졸의 화상 및 수광대(首廣大) 두 개를 걸어두었다. 취지로 보아 암 장군당과 같다고 할 수 있다.38)

이를 통해 최영 장군과 같은 무속의 중요한 신들 대부분은 덕물산에서 모셔지

37)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연암집(燕巖集)』권 1,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안의현현사곽후기(安義縣縣司郭侯記).

38) 아키바 다카시,『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심우성(沈雨晟) 옮김), 동문선 출판사, 1993,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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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알 수 있다. 덕물산은 영험한 산이기에 여기서 모셔지는 최영 장군신 역시 영험한 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울굿 문서에는 덕물산의 최영 장군사는 만신(萬神)의 조종(祖宗)이라고 말하기도 한다.39) 뿐만 아니라 맞이굿을 할 때나 새 무당을 내는 내림굿을 할 때면 신어머니 될 사람은 신애기를 데리고 최영 장군사를 찾아 장군님 전에 제를 올리는 의례를 베푼다. 그리하여 장군님 전에 신애기가 내림굿을 하게 된 사연을 고하는 것은 물론 내림굿을 해도 되겠는지, 그리고 내림굿을 하게 된다면 장차 신 애기가 큰 무당이 될 수 있겠는지 등을 물었다. 이와 같이 계보 있고 족보 있는 큰 무당들은 제자 입무식을 치르기 전 덕물산 최영 장군사를 찾아 영험스런 장군님을 배알한 후 의례를 베푸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다.40) 이들을 통해 조선시대에 최영 장군신은 무속신앙의 중요한 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아키바 다카시의 덕물산 최영 장군당의 도당굿에 대한 기록을 보면 최영 장군신이 무속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록을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상동은 장군당을 비롯해 부인당 ․ 본향목 ․ 도당터 등 도의 성소를 중심으로 7명의 무녀가 몇 명의 주민들과 함께 엄동의 밤 내리는 눈을 무릅쓰고 등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굿을 하여 생계를 꾸미는 곳, 그리고 다른 주민들이라 해도 적어도 간접적으로 혜택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는 아주 전형적인 무당촌이다. 산정 가까이에 있는 나무는 도당굿날 이외에는 벨 수 없도록 금기되어 있다. 만일 이를 어기면 반드시 신벌을 받는다는 신산. 그러나 한 평의 조밭도 없는 산정, 당나귀 등에 벼를 싣고 운반하기에도 너무나 가파른 산허리, 물을 긷기 위하여 조석으로 몇 마장씩 비탈길을 오르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신산, 이러한 곳에 삼백 명의 주민이 모여서 오히려 산기슭 농민들보다도 풍부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한국에 있어서 무속신앙의 큰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41) 위에 언급한 자료들을 통해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은 조선 초부터 강하게 전해

39)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29 쪽.

40)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20 쪽.

41) 아키바 다카시,『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심우성(沈雨晟) 옮김), 동문선 출판사, 1993, 28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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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중환의『택리지』를 살펴보면 최영 장군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양종승은 덕물산 최영 장군 사당은 적어도 1451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42) 왜냐하면『택리지』는 18세기 중엽(1751년)에 쓰여졌고, 내용에 따라 사당 시봉자를 두었던 전통이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면 사당을 지은 지는 적어도 15세기 중엽(1451년)부터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늦어도 15세기 중엽(1451년)에는 무속에서 최영 장군을 신격화하게 되고, 모시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 18년(1436 병진/명 정통(正統) 1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지난 옛날에 참형당한 장수와 재상들의 성명을 종이에 써서 장대[木竿]에 걸어 놓고 두박신(豆朴神)(두박(豆朴)은 시속 말로 엎드러져 넘어지는 소리이다)이라고 호칭하므로, 동리마다 전해 가면서 서로 모방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며 의혹해서 제사를 지내는 데에 이르렀는데, 종이와 베[布]를 다투어 가면서 내어놓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용인 현수(龍仁縣守) 장아(張莪) 가 이를 잡아서 그 지방(紙榜)을 불살라 버렸는데, 임금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오늘날 세상에 이런 괴상한 일이 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하고, 즉시 소윤(少尹) 이보정(李補丁) 과 부정(副正) 민효환(閔孝懽)을 보내어 가서 처음 요망한 귀신을 만든 자를 추핵(推覈)하게 하고, 만약에 소문이 있더라도 그 벼슬을 물론하고, 바로 고신(栲訊)을 행하게 하였다. 보정 등이 명령을 받들어 추핵하여 양성(陽城) 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인 강유두(姜流豆) ·박두언(朴豆彦) · 최우(崔雨) 를 잡았다.”43)

(세종실록 권72 18년 5월 10일)

이를 통해 1436년 전에 양성(陽城)현[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참형당한 장수와 재상들을 모시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의 이와 같은 행동을 봤을 때 모시게 되는 인물은 특별한 인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필자가 생각할 때 이 마을 사람들이 모시게 되는 인물은 아마 최영 장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추측 때문이다. 첫째, 위의 사료가 쓰여진 세종 18년 (1436)은 고려가 망한지 얼마 안 되는 시42)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32

쪽.43) 이 기록은 이능화가『조선 무속고』에서 언급했는데 최영 장군과 연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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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고려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모시게 되는 인물이 참형당한 장군이라는 점은 당시의 두박신(豆朴神)으로 모셔진 인물이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참형당한 장군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즉 그 인물은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사람이라는 가능성이 크다. 둘째, 두박신(豆朴神)에 대한 위의 기록이 1436년의 기록이기 때문에 적어도 1436년 전에 이미 두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하면 두박신은 고려말부터 1436년까지 참형당한 장군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朝鮮王朝實錄』에서 태조부터 1436년인 세종 18년까지 모든 참형당한 사람들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태조실록에서 태조 때 참형을 당한 사람은 모두 23명인데 그 중에 최영과 임견미(林堅味, ?~1388), 신용무(申用茂)만 고려말기의 장군이고 나머지는 장군이 아니다. 이인임(李仁任, ?~1388)과 도길부(都吉敷, ?~1388)는 고려시대의 문신, 염흥방(廉興邦, ?~1388)은 고려말기의 권신, 찬성사(贊成事, ?~1388)는 고려후기 문하부(門下府)의 정2품 관직. 그렇다면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참형당한 장군(두박신)은 최영이나 임견미, 신용무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태종실록에서는 참형당한 장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 초기부터 세종 18년(1436)까지 참형당한 사람은 전체 188명이며 그 중에 참형당한 장군은 5명이다. 그들은 충청좌도 도만호(都萬戶) 김성길(金成吉), 별장(別將) 윤보개(尹甫介), 호군(護軍) 김인(金仁), 통사 김척(金陟), 변장(邊將) 김경(金敬)이다. 그러면 세종실록 18년에 언급한 참형당한 장군은 최영이나 임견미인나 충청좌도 도만호(都萬戶) 김성길(金成吉), 별장(別將) 윤보개(尹甫介), 호군(護軍) 김인(金仁), 통사 김척(金陟), 변장(邊將) 김경(金敬) 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태조 때의 임견미, 신용무와 세종 때의 장군들은 민속신앙에서 신격화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없고 그에 대한 전설도 없다. 최영만이 민속에서의 전설이 전해지고 무속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 중에 신앙에서 신격화 하게 되거나 전설이 남아 있는 경우들을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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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했던 인물 시기 직위강감찬 948-1031 고려시대의 명장공민왕 1300-1374 고려 제31대 왕최영 1316-1388 고려시대의 장군이성계 1335-1408 조선의 제1대 왕남사고 1509-1571 조선중기의 학자사명당 1544-1610 조선중기의 승려서화담 1488-1546 조선중기의 학자단종 1441-1457 조선의 제6대 왕금성대군 1426-1457 세종의 여섯째아들신립 1546-1592 조선중기의 무장유자광 1439-1512 조선전기의 문신연산군 1476-1506 조선 제10대 왕이괄 1587-1624 조선중기의 무신곽재우 1552-1617 조선 전라도 병마 절

도사이여송 1549-1598 중국 명(明)의 장수

(將帥)임경업 1594-1646 조선중기의 명장정철 1536-1593 조선중기의 문신 겸

시인숙종대왕 1661-1720 조선 제19대 왕남이 1441-1468 조선전기의 무신사도세자 1735-1762 조선 제21대 영조의

아들명성황후 1851-1895 조선 고종의 황후

<표-5> 신앙에서 신격화하게 되거나 전설로 남아있는 존재했던 사람들44)

위에 명단을 보면 강감찬, 공민왕, 최영, 이성계 4명은 1436년 전에 죽었지만 강감찬과 이성계는 참형당하지 않았고 공민왕은 장수가 아니고 왕이다. 그런데 두박신은 세종실록 18년에 기록되어 있어 1436년 전에 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박신으로 신격화되게 인물은 1436년 전에 죽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신격화된 사람들 중에 최영이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참형당한 장수일 가능

44) 홍태한,『인물전설의 현실인식』, 서울: 민속원, 2000, 10~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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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높다. 왜냐하면 최영은 장군이고 1436년 전에 참형당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고 민간신앙이나 무속신앙의 중요한 신이라는 점에서 최영 장군이 세종실록에서 언급된 장수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두박신은 최영 장군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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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당 소재지 향사일남구 무민사 남구 감만동 463-1 양력 4월 20일수영 무민사 수영구 수영동 507-9 음력 3월 3일

부산 최영 장군사당 동구 범일 2동 자성대공원 내 음력 5월 5일

산제당 영도구 신선 2동 봉래산 음력 1월 13~17일음력 9월 13~17일

경남 통영 최영 장군사당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150번지

음력 1월 14일음력 12월 14일

IV. 현대의 최영 장군신앙

조선시대부터 계승한 최영 장군사당은 현재 여러 지역에 있는데 최영 장군을 신격화하는 방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의 모습이다. 최영 장군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백성을 위해 왜구를 격파시킨 대장군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수호신으로 모신다. 이곳에서 무당은 필요 없고 마을민들이 직접 기원하는데 지정한 날짜에 각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올리고 기원한다. 이런 사당에서는 무속 신앙과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영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무속 신앙에서 무당들로 인해 그를 모시게 한다. 최영 장군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유능한 장수였음에도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신격화 되었다. 무속신앙에는 무당들이 자기 집에 신당을 지어 최영 장군을 모시고 굿을 한다. 신격화 방향은 다르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람들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지켜준다는 점에서 비슷한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1. 민간신앙의 수호신 최영

현재 한반도에서 최영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사당은 여러 지역에 있는데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표-6> 전국의 최영 장군사당45)

45) 위의 표는 김병섭,『고려명장 최영의 역사 흔적을 찾아서』, 세종출판사, 2007 와 하종갑,『南海岸의 敏速信仰』, 서울: 우석출판사, 1984 에서 나온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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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장군당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장군산

음력 섣달 그믐정월 초이틀

장군당 남해군 남면 평산리 평1부락 (현재 허물어졌다)

음력 10월 15일 23시

남해 무민사 남해군 미조면 539-3번지 음력 3월 13일충남 기봉사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산

39-7번지 음력 9월 26일

충북 기봉영당 청주시 상당구 외남동 150-44번지

음력 3월,9월 중정일

전라남북 두천사 전북 익산시 팔봉동 은기리 상두마을 566-1 번지 음력 3월

제주도 최영대장신사 추자면 대서리 155번지 음력 섣달 그믐 밤음력 6월말~7월초

서울 공민왕 사당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42-1번지 음력 10월 1일

경북 진충사 김천시 구성면 광명동 하촌 627번지 음력 3월 3일

독묘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37번지 가을 상강 절후

강원 덕봉사 강릉시 병산동 산 26-1번지 음력 3월 8일

전국에 최영 장군 사당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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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보면 최영 장군 사당은 남해지역에서 많이 모여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많이 발견된다. 특히 서울에 있는 사당에서 최영 장군은 대부분 주신 옆에 부속신으로 봉안된다. 이순신 장군, 관우 장군, 공민왕과 함께 최영 장군이 봉안 되어 있다.46) 그러나 최영 장군이 어떤 연유로 부군당에 모셔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영 장군이 왜구를 무찌른 공로 때문에 그를 신으로 승화시켜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47). 이곳에는 장군에 대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하종갑의『南海岸의 民俗信仰』에서 남해에 있는 장군당의 설화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해군 남면 평산리 평1부락 장군사당〉 1. 최영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어느 날 마을村長이 꿈을 꾸게 됐다. 2. 꿈에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나타나 빨리 앞바다에 나가보지 않고 뭘하느냐고 호통을 치더란다. 3.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村長은 그 길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니 상자가 하나 떠있고, 그 속에는 최영 장군의 유품들이 들어 있었다. 4. 그것을 건져다 사당에 모시고 이름도 장군당이라 바꿔짓고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48)

※〈남해군 삼동면 미조리 무민사(武愍祠)〉 1. 첨사(僉使)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미조 앞바다에 떠있으니 찾아서 잘 모시라”고 현몽을 하더란다.2. 첨사가 수문장을 시켜 바다에 나가게 했더니 얼마 안있어 과연 나무궤짝을 건져왔는데 그속에 칼과 영정이 있었다. 3. 첨사는 이 유물들을 짚으로 싸서 보관했는데 어느날 불이 나 유물을 태우게 될 지경에 영정이 날아가 지금의 무민사자리에 놓여있다. 4. 그후 영정자리에 지금의 무민사를 짓고 칼과 영정을 모시고 있다.49)

평산리 장군당과 미조리 무민사는 일치된 전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설46) 홍태한,『서울의 마을 굿』, 민속원, 2009, 62쪽. 47) 필자가 현장에 조사하는 것과 하종갑의『南海岸의 民俗信仰』, 서울: 우석출판사, 1984, 28쪽

에서 나오는 관점이다. 48) 하종갑,『南海岸의 敏速信仰』, 서울: 우석출판사, 1984, 29쪽. 49) 하종갑,『南海岸의 敏速信仰』, 서울: 우석출판사, 1984,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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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 최영 장군의 영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영 장군의 영험으로 마을민들을 보호하자는 뜻에서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모신다. 남해지방은 일본과 가장 가까워서 왜구의 노략질이 제일 심했다. 최영 장군은 백성을 대신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준 인물이어서 남해안에서 최영 장군을 신으로 승화시켜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최영 장군에게 모셔서 마을의 평안과 농사가 잘 되게 하고 태풍의 피해는 감소시키를 기원한다. 그 외에 경상도 지방에서 최영 장군에 대한 설화도 있다.

1. 옛날에 인제 정초가 되면 인제 그 민속놀이 일체로 동네에서 농악을 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인제 그 동네에서 첫 번째로 동네에 모신 성황당을 앞에 가서 성황신을 강신을 해가지고 그 강신의 전도에의 해서 집집마둥(마다) 심방을 해가면서 집집마다의 안일을 빌어주는 이런 정초의 행사입니다. 2. 그런데, 도랑을 사이에 두고 옛날에는 덕구리가 경상도 땅이요이짝3. 내덕리에는 강원돈데, 강원도지역에는 태백산 지령을 모셨고, 경상도에는 인제 최영 장군을 위패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집마둥 인제안택을 빌어서 심방을 해이래 내려오다가 그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편에 집에를 같이 깃대가 마주섰을 때는 언제든지 공교롭게도 최영 장군을 모신 깃봉이 저절로 뿌러지는 이런 일이 번다했다 그랩니다. 그걸로 보면 역시 그 왕지신위하고 장군신위가 강약을 일러 줬다는 그 얘기도 되겠습니다.50)

이 설화를 통해 경상도 지방에서도 최영이 장군신으로 모셔졌음을 알려준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없으나 이 지역은 고려말 최영이 왜구의 노략질을 진압하기 위해 주둔했던 곳이므로 장군의 공을 기억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영 장군 사당 중에 필자가 답사 다녀왔던 곳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기봉사(奇峰祠):

기봉사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위치한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삼봉산(三峰山), 본주 동쪽 23리 지점에 있는데 그 가운데 봉우리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다. 최영 장군이 죽은 후 여기에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는데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1905년에 다시 이 사당을 지었다51). 사당 건물에서 50)『한국구비문학대계』, 강원편, 영월군, 상동읍 설화 12, 녹전리,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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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峰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안에는 최영 장군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최영 장군의 호가 기봉(奇峰)이어서 기봉사라고 부른다. 최영 장군은 1316년 홍성군 홍북면에서 태어났지만 현재 최영 장군의 흔적이나 관련된 사람도 없다.

기봉사(奇峰祠) 기봉사 안에 무민공 제사자리

향사는 매년 양력 9월 26일 홍성군 최영장군 숭모회 주관으로 봉행한다. 행사를 할 때에 홍성사람들 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온다. 무당들도 사당에 와서 굿을 하자고 했지만 하지 않는다. 이곳의 행사는 조상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굿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52) 홍성에는 기봉사외에 최영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있다. 금마면 철마산 공원에는 최영 장군 금마의 상과 금마총이 있다. 금마총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용봉산(龍鳳山)에 최영 장군 활터가 있다. 이곳에서 최영 장군이 소년시절 무예를 익혔다고 전해오고 있다.

2. 수영 무민사(武愍祠)

무민사는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507-9에 위치하며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이곳 수영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퇴했다고 전해진다.53)

51) 2009-03-17 홍성에서 기봉사 앞에 무민공 최영장군 숭모회장 황필성 인터뷰. 52) 2009-03-17 홍성에서 기봉사 앞에 무민공 최영장군 숭모회장 황필성 인터뷰.53) 2009-03-21 무민사에서 사당을 관리하는 정명돌 인터뷰. 김병섭,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 세종출판사, 2007,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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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원래 강신(降神)무녀가 최영 장군 영정을 모시고 살던 오두막집이었는데, 무녀가 죽은 뒤 마을에 우환이 자주 생기자 주민들이 1963년 오두막을 헐고 사당을 처음 세웠으며 1973년 개축했으나 노후되어 2005년 5월 다시 건립하였다.54) 원래 무당의 집이 있지만 현재 무속과 관련되는 것은 없다. 사당 건물에

무민사-주변에 마을민의 집이 있다 무민사 안의 최영장군 영정 사당 뒤에 선사(先史)바위

‘武愍祠’ 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사당안에 나무로 만든 제상이 있고, 제사 위에는 ‘崔瑩將軍神位’라는 위패와 촛대 2개, 향로 1개가 얹혀 있고, 최영 장군 영정이 걸려있다. 무민사 뒤에는 높이 약 2.5m, 7평가량 되는 선사(先史)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무민공 최영 장군 사당을 보호하고 최영 장군의 넋이 깃들어 있어,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 불리고 있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수영의 향토의병 결사대 25명이 왜구와 싸워죽기를 다짐하고 행동을 맹세한 바위라 일명 ‘맹세바위’라고도 부른다.55) 평일에는 문을 닫고 매년 음력 정월 보름 새벽에 마을 주민이 제를 지내오다 2006년부터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는 제사 삼일 전에 제주가 사당에 가서 청소를 하고 대나무 가지와 소나무 가지로 금줄을 치고 마당가 열두 군데에 황토를 놓았으며 당사 안에 불을 켜 두었다. 요즘은 제사 앞

54) 이 내용은 무민사 앞에 세워진 설명문을 참고했다. 그렇지만 김병섭의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에서 “무민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하며 무 녀의 오두막집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무민사가 무녀의 오두막집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다른 사당은 보통 마을의 풍수지리(風水地理)와 알맞은 아름다운 높 은 산에 짓고 있다. 그런데 이 사당은 작은 골목의 다른 사람들의 집 옆에 위치한 사당이다. 그래서 이 사당은 원래 최영 장군을 모시던 무녀의 집일 것이다.

55) 김병섭,『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 세종출판사, 2007,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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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아침에 집사가 사당에 가서 청소를 하고 위와 같은 금줄을 치고 마당가 열두 군데에 황토를 놓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 둔다. 제물은 메밥, 눈이 붙은 마른 명태, 찐 대우 한두 마리, 부침개, 나물, 과일, 탕, 술 등이 있으며, 모든 제물을 제주 집에서 만들다56). 김병섭의『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에는 수영 무민사에서 한문으로 최영 장군 사당 중건 기금 기록을 분석하며 다음과 내용을 소개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의 최영 장군 사당은 이곳 지역민이 자율적으로 기금 모음을 하여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바다에 연접한 수영지역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왜구의 약탈에 시달려 왔다. 오랜 풍우에 사당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보다 못한 태덕수 선생이 심붕회를 조직해서 우리는 최영 장군 사당을 개축하자고 결의하고 지역민 모두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십시일반 사당개축 기금을 모금하였다. 나무 판에 기록된 성금 기탁자는 지역민 백여 명 되었으며 노력봉사 등 틈나는 대로 개축에 협조하신 분도 많았다고 하며 장군의 고마운 은공을 항상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57).

이 기록을 통해 수영동 사람들이 최영 장군의 공을 기억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모셨음을 알 수 있다.

3. 범일 최영 장군 사당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사당은 부산진 지성(支成) 안에 있다. 사당 앞에 세워진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최영 장군은 고려 충숙왕 3년 (서기 1316년)에 출생하셨다. 장군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淸廉)하여 왕실(王室)의 숙위병(宿衛兵)으로 근무하였고 공민왕 3년에는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수차에 결쳐 내, 외란을 평정하여 그 용맹함이 원나라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홍산(鴻山) 싸움에서는 왜구를 크게 무찔러 왜구가 최영 장군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몹시 무서워하게 되었다. 전장에서 최영 장군의 기(旗)가 보이면 왜구들은 전의(戰意)를 잃고 도주하였다는 사실은 장군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하였고 탁월한 군의 통솔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나라를 위하였고 장군의 위대한 웅지(雄志)와 구국정신(救國精神)은 민족의 혼이 되어 우리 가슴에

56) 남촌지 발간추진위원회,『南忖誌』, 도서출판, 1995, 356~359쪽. 57) 김병섭,『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 세종출판사, 2007,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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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부산 연해의 각처 (감만동, 수영동, 영도, 자성대)에 왜구를 섬멸한 장군의 고마움을 하나의 신앙으로 승화 시켜 사당을 지어 마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장군의 영(靈)을 모시면서 매년 음력 오월 오일(단오)에 지역주민에 의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58)

이 글을 통해 지역민들이 최영 장군이 왜적을 격퇴한 것에 대해 감사하여 신앙으로 승화 시켜 사당을 지어 마을 수호신으로 장군의 영을 모셨음을 알 수있다. 보통 사당 문을 닫아두고 음력 5월 5일에만 문을 열어 제사를 지낸다.

자성대(子城臺) 안의 최영장군 사당에서 현재 남아있는 자성대(子城臺)의 자취 지역 사람이 빌고 있다

필자가 답사 갔을 때 무당 한 명과 지역민 두 명이 최영 장군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최영 장군을 위해 굿을 하는 것이 아니고 최영 장군 사당 옆의 산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무당의 말이 최영 장군 굿은 이 사당에서 하지 않고 본인 집에서 한다고 한다. 위의 세 곳에 답사 갔을 당시 사당에서 기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물어봤는데 그들은 특별한 사항 때문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장군의 고마운 은공 때문에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앞에서 고려시대 왜구를 물리친 공적이 있는 최영 장군이 설화와 민간신앙에서 신격화되어 전승되고 있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최영 장군이 백성에게 신격화되는 경로에는 민중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준 충장으로서의 기억이 가장 강하게 작용했다.

58) 범일 최영 장군 사당 앞: 부산광역시 동구청장, 19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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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속신앙의 崔瑩 장군신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최영 장군은 영험한 신이었고 현재에도 최영 장군신은 무당들에게 중요한 역할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 최영 장군은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무속신앙에서 신격화하여 모신다. 장군을 모시면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자신의 기원하는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모시는 이유는 한국 무속의 영혼관을 빌려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속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저승인 내세로 가서 영생하거나, 다시 현세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무속의 영혼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순조롭게 살다가 저승으로 들어가 영혼으로서 선령이 되고, 후자는 생전의 원한이 남아 저승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혼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악령이 된다59). 억울하게 죽으면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모셔서 한을 풀어준다. 그래서 굿판에서 사람들은 원혼 맺힌 최영 장군을 기리면서 동시적으로 자신들의 바람인 기복적 시화연풍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풀이를 지속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60). 이처름 사람들은 최영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기에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 믿고 있어서 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격화한다. 최영 장군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신격화 되었다. 현실의 사람은 죽은 후에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능력의 도움으로 자신의 안녕을 빌고자 그를 신격화 했다.61) 한국 무속신 중에 최영 장군 뿐만 아니라 임경업(林慶業) 장군, 남이 장군도 억울하게 죽었지만 남보다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무속신앙에서 장군을 신격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59) 그래서 한국 무속신앙의 신인(神人) 중에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비명횡사한 왕족인 사도세자, 명성황후 등이 있다. 둘째, 애국적으로 나라를 위해 싸워 공을 많이 세운 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최영 장군, 임경업 장군, 남이 장군 등이 있다. 여기서 모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 공통점이지만 최영 장군과 임경업 장군의 업적 그리고 비 범한 능력 때문에 구별할 필요 있다고 생각한다.

60) 김태곤,『巫俗과 靈의 세계』, 한울 출판사, 1993, 57쪽. 61) 洪泰漢,『說話와 民間信仰에서의 實存人物의 神格化 過程-南怡 將軍과 林慶業 將軍의 경우』,

韓國民俗學報, 한국 민속학회, 1994,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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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신을 숭배하고 신이 사람을 보우해주는 것은 신앙의 기본 원리이다. 그리고 보통 위대하고 출세한 인물들을 선택하여 숭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지만 한국 무속신앙의 경우에는 실패한 장군들을 선택하였다. 여기서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공감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즉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면 자기의 한도 풀어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무속신앙의 인도적인 의미인 동시에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신앙 속에서의 최영 장군은 나라의 태평성대와 수호를 위한 존재로 신격화된다. 또한 무당의 영험력을 극대화시키기도 하고 풍어를 관장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최영 장군굿은 최영 장군신을 모셔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면서 그의 영험함으로 나라의 태평성대를 바라고 사람들의 기원을 하기도 하는 굿이다. 이 굿은 최영 장군 및 신령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흥겹고 즐겁게 한다.62)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최영 장군당을 지어놓고 매년 봄, 가을 정기적으로 당굿을 행하고 있는데, 그 형식은 황해도굿 형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이는 당굿을 책임지고 있는 서경욱63) 무당이 황해도굿 전승자이기 때문이다.64) 이 곳의

62)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32쪽.

63) 필자가 최영 장군당굿 보존회에서 서경욱 만신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어 알게 되었다. 서경욱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과 양종승의 글을 참조하면 서경욱이 최영 장군을 모시는 무당이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서경욱은 태어날 때 몸이 약했다. 어느 날 부모님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이불로 싸놓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어머니는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이불을 펼쳐보니 그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면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앓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17살 될 때 원인 모르는 병으로 3개월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밥을 먹지 못 하고 입이 말라 혀가 꼬일 지경이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대문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약물을 떠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약물을 받아먹을 힘조차 없었다. 할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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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거리 목적1.신청울림 신청(神廳)에 신들을 모시기 2.당맞이 최영 장군신을 굿청에 모셔와 좌정시킴3.일월맞이 옥황, 칠성 등이 모셔지기4.상산맞이 환인, 환웅, 단군을 맞이하는 의례5.초부정거리 사용될 신복, 신구, 신도구 등을 깨끗하게 정화함6.초감흥거리 신령과 만신과의 합의임7.소대감거리 소찬의 음식을 진설하여 소찬을 받는 대감을 모시고 놀리

다8.성주거리 거주하고 있는 집의 수호신을 맞이하는 의례9.칠성제석거리 칠성과 제석님을 모시는 거리10.별성거리 별상장군, 손님, 손님마마, 별상애기 등을 불리기 함11.영정거리 원혼 맺혀 죽은 조상, 친인척, 동기간, 스승, 도료 등의 영

정들을 풀어 먹여서 물려낸다 12.말명거리 큰 무당으로 불리다 죽은 후 신격화된 신령들을 모셔 놀린

굿은 장군당굿보존회에서 주관하고,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최영 장군 당굿 차례는 다음과 같다.

<표-7> 최영 장군당굿의 거리들65)

“너는 아직 여기 올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을 먹여주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 후 병은 이유없이 나았다. 그 후부터 서경욱이 꿈을 꾸면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화되는 경우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3세 되었을 때 강원도 출생의 32세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도 서경욱에게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시흥을 가야겠다고 남편에게 부탁하여 서경욱 부부가 찾아 간 곳은 지난날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나 알려준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땅을 사야 한다며 남편에게 요구했으나 남편은 쓸모없는 땅이라며 거절하고 말았다. 3년 후 그 땅은 금싸라기가 되어 있었다. 서경욱은 자신에게 신이 들어온 것을 알아 차렸다. 그렇지만 신을 받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던 딸이 통곡을 하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장군님과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를 보았는데 수박을 넝쿨째 집안으로 굴려 주었다고 했다. 서경욱은 겁이 났다. 자신이 신을 받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신이 딸에게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할수없이 결국 서경욱은 38살 되었을 때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와 신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얼마 후 그에게 최영 장군이 주신으로 강림하였다.

64)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35쪽.

65) 위의 표는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에서 나온 내용은 표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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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3.군웅거리 짐승들을 타살한 붉은 피로 전쟁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 것이다.14.타살거리 소, 돼지, 닭을 생타살하여 신령께 바치는 의례이다15.대감거리 육찬을 진설하여 대감을 모신다16.먼산장군거리 멀고 가까운 주변에 계시는 장군님을 모시고 놀린다17.토일성수거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남성신들을 모신다18.신장거리 신장을 모시고 놀린다19.최영장군거리

최영장군님 및 여러 장군님들을 모시고 쌍 작두 타기를 한다

20.대신거리 대신들을 불러들여 흥겹게 놀린다21.창부거리 여창부 남창부 광대씨들을 모시고 놀린다22.조상거리

동주최씨 최영장군 조상을 비롯하여 경관만신의 친가, 외가, 시가 그리고 친지동료 드의 조상과 죽은 영혼들을 모신다

23.목신서낭거리 서낭문을 열다24.마당거리 굿이 끝난다

1거리~6거리는 신령들을 모셔오는 의례이고 7거리~23거리는 신령들에게 재물을 바치는 의례이다. 무당이 신령들에게 재물을 바치면서 흥겹게 춤을 추어 신령들이 흡족하게 먹고 놀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면 신령들은 사람에게 명과 복을 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된다고 믿는다. 24거리는 굿을 끝내는 의례이다. 24거리 중에 최영 장군거리는 다른 거리보다 특별하고 가장 중요한 거리이다. 그것은 작두를 타는 것이다. 작두는 몸주신을 장군신으로 모시거나 조상 중에 장군부리가 있는 경우에만 탈 수 있다.66) 최영 장군거리에서는 먼산장군, 성수장군과 최영장군 등 장군들이 총 출연한다.67) 양종승은 작두타기에서 모셔지는 장군들이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이를 비유하여 말을 탄다는 뜻으로서 작두타기를 마상(馬上)타기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작두에서 내릴 때에는 하마(下馬)한다고 66) 최진아,『최영장군당굿을 중심으로 살펴본 무구의 기능과 신격』,『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

장군당굿 보존회, 2008, 156쪽.67) 이민주,『최영장군당굿 신복의 종류와 형식』,『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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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 작두를 타기 위해서는 우선 사해용왕을 상징하는 물동이와 쌀이 듬뿍 담긴 말쌀 사이에 상을 끼어 넣는다. 그리고 그 위에 작두를 올려놓고 탄다. 따라서 작두타기는 쌀을 담은 말과 상을 타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만신은 작두 위에 올라서서 공수를 내리고 기뽑기를 한 다음 춤을 추어 장군의 위엄을 나타낸다.68) 작두를 타는 이유는 최영 장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며 모든 액을 작두날로 눌러 없앤다는 의미를 지닌다69).

작두를 타고 있는 무당

다음은 최영 장군당굿의 최영 장군 복식과 무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서경욱 무당의 경우). 신복은 무당이 신을 부르거나 신과 놀 때 입는 옷이다. 신복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령님을 상징한다. 최영장군당굿에는 여러 신령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신복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색상이 화려하여 평상복과 달라 보인다. 그 중에 최영장군신의 복식은 갑옷과 투구이다. 투구의 모정에는 삼지창이 날카롭게 뻗어있으

68) 양종승,「최영장군신과 최영장군당굿」,『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37쪽.

69) 백은영,「문헌설화와 구비 전승에 나타난 고려의 기억-문화적 기억속의 최영 장군」,『한국중세사연구』, 한국중세사학회, 2007,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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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붉은 상모로 장식한다. 투구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정 부분의 발(鉢)과 목과 등을 가리는 아(錏)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이 장군복은 놋쇠미늘을 연결하여 만든 두석린갑으로 구성되어 있다.70)

최영장군당굿의 의복들

최영 장군신의 의복

신복과 같이 무구도 신령을 상징한다. 무당이 기본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무구가 있다. 그 것은 상쇠방울, 만성수부채, 서낭기, 대신칼 등인데 최영 장군신을 상징하는 무구로는 명두, 삼지창, 작두, 최영장군칼 등이 있다.

70) 이민주,『최영장군당굿 신복의 종류와 형식』,『최영장군당굿 연구』, 최영장군당굿 보존회, 2008,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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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

최영장군신의 무구들 최영장군칼

최영 장군은 살아 있었을 당시 대장군이었으며 뛰어난 인격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후 민간으로부터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무속신앙에서도 무속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 외에도 현재 사람들은 최영 장군을 기억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그 예로 매년 열리는 최영 장군 축제가 있다.

고양시 최영 장군 추모대제 홍성에서 2006 최영 장군 탄신 개념 궁도대회출처:http://blog.naver.com/son3640/60038398903 출전:http://cafe.naver.com/samsungjung/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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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를 통해 최영 장군에 대해 기억도 하고 그의 애국심과 청렴결백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6년 10월 20일에 울산에서는 한국 최대 4500톤급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 ‘최영함’의 진수식을 거행하였다. 함명은 고려시대 명장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경(평양)과 개경(개성)이 함락되자 이를 물리치고 수복하고, 외적이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던 최영 장군의 진취적 기상을 계승하기위한 취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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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맺음말

최영 장군은 여러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보면 그는 한국의 대장군이고 중요한 정치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그는 영험한 신이다. 그의 죽음은 여러가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료를 통해 당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를 존경하고, 동시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최영은 홍건적, 왜구를 격퇴해서 당시 사람의 고생을 풀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청렴결백과 애국심,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셋째, 그의 뛰어난 군사능력 때문이다. 넷째, 그의 안타깝고 애석한 죽음 때문이다. 최영 장군의 애석한 죽음은 그가 죽은 후 많은 전설을 낳아 전해지고 있고 신격화되어 모셔진다. 특히 무속 신앙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에 영험한 무속신으로 신격화했다. 최영 장군의 신격화는 조선초에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덕물산의 최영 장군 사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당이고, 그곳에는 최영 장군의 영험한 전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현재 한반도에는 최영 장군사당이 여러 지역에 있는데 경기, 경북, 강원, 충남, 충북, 남해 등이 있다. 대부분의 사당에서는 최영 장군을 수호신, 장군신으로 모신다. 무속신앙에는 무당들이 집에서 신당을 만들어 무속신으로 모신다. 민간신앙과 무속신앙에서 최영 장군을 모시는 방향은 다르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즉 사람들은 장군을 모시면서 국태민안, 태평성대, 그리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기원하고, 장군신이 보우해주기를 바란다. 또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죽은 후에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능력의 도움으로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생각에서 신격화시킨 것이다. 특히 무속신앙에는 장군을 모시면서 장군의 한을 풀자는 의미도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자신들의 한이 아직 이승에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택하는 방법은 한풀이이다. 그것은 무당이 굿을 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한은 달래어지고, 이에 따라 죽은 자는 온전하게 구천으로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이루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대신해서 이루어 주는 것이다. 최영 장군 신앙을 통해 한국무속신앙에서는 민중의 공감을 갖는 비범함과 동시에 억울한 죽음을 가진 인물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최영 장군 신앙은 검토를 통해 고려말기의 역사적 의미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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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로 인하여 백성은 고통받고 명나라와 영토를 경쟁하였기 때문에 국토 전체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조정에는 친원파와 친명파로 분립되어 대중국 외교에 대한 주장이 두 방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최영 장군은 공민왕과 북벌을 주장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찾기위해 군사를 일으켜 먼저 만주(滿洲)를 점령하여 주권을 찾으려 하였다. 그렇지만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을 반대해서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이성계의 회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나라의 주권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회군 행동은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무튼 이성계는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게 되는 중요한 기회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마지막까지 수호했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사람들은 그를 고마워하고 그의 죽음을 애석하고 안타깝게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해서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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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GENERAL CHOI-YOUNG BELIEF

General Choi-Young was a premier and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ed forces of the Goryeo Dynasty during the 14th century. The

general was greatly respected for his loyalty, patriotism, and humility.

He was executed by his subordinate commanders, headed by General

Lee Sung Gye, who later became the first king of the Choseon

Dynasty. He became a deity of Korean and his powers can be found

through images in the temples and the intercession of spirit mediums

(shamans) nowadays.

This study focuses on Choi-Young General’s life and the process

of his deification through the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Goryeo

Sa) and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Choseon Dynasty (Choseon wangjo

sillok). What people though of him is considered through the

unauthorized history and folktale. In addition, to evaluate the

importance of him in shamans…, many factors of temples of

Choi-Young are actually investigated by the author in the regions of

Korea.

From the record of history documents, there was one-sided

estimation about Choi-Young by Choseon Dynasty’s scholars. They said

that he was stubborn, foolish and had enormous mistake to de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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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ck Ming Dynasty that was more powerful than Korea at that time

in 1388. Nevertheless, General Choi-Young was worshipped from the

first of Choseon Dynasty. There are two ways of worship of

Choi-Young. He is worshipped in many temples as a hero. Especially,

in Korean Shamanism he becomes an important deity. The reason that

shamans deified him is not due to his achievements or his great

personality but is due to his miserable 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