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문과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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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학문과 인생

    발 행 : 고철환교수 정년퇴임회 준비모임

    발행일 : 2012. 3. 30.

    펴낸곳 : 신 광 사

    주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386-6번지전 화 : (042) 636-2370

    팩 스 : (042) 636-2372

  • 목 차

    1. 개인소개 및 통계 ············································································ 1

    2. 선생, 연구, 교육 ············································································· 3

    퇴임 ········································································································· 3

    학생과 선생의 권력 불균형 ·································································· 4

    연구: 자기화, 토착화, 고유화 ······························································ 6

    교육 ········································································································· 8

    추억, 그리고 퇴임 ················································································· 10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 12

    60-70년대: 서울문리대 생활과 독일유학 생활 ································ 12

    80-90년대: 해양학과 교수생활과 갯벌연구, 해양퇴적물 오염평가

    연구 ·················································································· 16

    2천년대: 갯벌연구 ················································································ 19

    4. 사회활동과 나 ················································································· 21

    90년대: 민교협과 경상대 투쟁 ··························································· 21

    90년대: 환경운동과 새만금 투쟁 ······················································· 25

    2천년대: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관료사회 경험 ································ 28

    2천년대: 유럽 와덴해갯벌 자연보전 전통의 도입 ···························· 31

    5. 나의 정체성 ····················································································· 36

    학부실험, 대학원실험과 나 ·································································· 36

    대학, 교수, 사회, 국가와 내 생각: 자유 ············································ 39

    자연, 자연보전에 비친 내 모습 ··························································· 41

  • 6. 나의 학문, 퇴임, 그리고 인생 ······················································· 44

    내가 경험한 학문 ·················································································· 44

    퇴임 후의 공부 ······················································································ 45

    인생과 집중력 ························································································ 46

    부록:

    Ⅰ. 대학원 연구생활에서 지켜 본 고철환 선생님:

    김종성, 고려대 교수 ······································································· 48

    Ⅱ. 고철환의 연구논문 피인용 지수

    (총 인용수=1,261회, h-index=20) ··············································· 56

    Ⅲ. 고철환교수의 해양저서생태학 연구실 졸업생명단 2012. 2 ······ 58

  • 1. 개인소개 및 통계

    1

    1. 개인소개 및 통계

    이름: 고철환, 高哲煥, Chul-hwan Koh

    생년: 1946년 9월 19일

    고향: 제주도 성산면 온평리 1003번지

    현주소: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63번지

    결혼: 지순희와 1976년 독일 튜빙엔에서 결혼

    고윤정, 고범혜, 고윤경, 사위: 이성목, 조근희, 오준호(범혜친구),

    손자손녀: 정빈, 수안

    키, 몸무게: 174 센티미터, 70 킬로그람

    성격: 배려와 애정이 부족함, 까다로움, 그래서 후회하고 이제야 관용

    을 배우려 함, 다양함을 잘 포용하지 못함, 솔직담백함, 정확함과

    단순함을 좋아함, 낯을 가림, 권위를 싫어함, 형식(겉)을 싫어하

    고 내용(속)을 보고자 함, 위보다 아래에 집중함, 언제나 모른다

    는 가정에서 출발함, 일과 책임에 너무 집중함, 민주적 공감대 형

    성을 중요시함

    교육: 인천논현초, 인천중, 제물포고,

    서울대 문리과대학 식물학과(1965/69), 동 대학원(69/74),

    독일 키일대학교 해양연구소(75/79)

    장학금: 독일정부장학금(DAAD, 1974/79)

    직장: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해양학과(1981/2012, 2000 지구환경

    과학부로 개편)

    연구분야: 해양저서생태학(암반해안, 연안 및 내만 연성저질, 대륙붕, 대륙

    사면), 갯벌생태학, 퇴적물오염평가, 갯벌보전정책(취미연구)

  • 나의 학문과 인생

    2

    논문: 총 100편(국내학술지 48편, SCI 국제학술지 52편)

    SCOPUS Performance Index(발표논문 인용된 횟수, 2012): 약

    1,300회

    SCOPUS h index(20회 이상 인용된 논문수) 20편

    국제 초청강연 10여회, 국제학술회의 논문발표 67회

    저서: 수리분류학(1988, 대우총서), 해양생물학(1997, 서울대 출판부),

    한국의 갯벌(2001, 서울대 출판부), 기타 book chapter 17편

    신문잡지 게제 글: 약 400편

    언론보도(신문, 티브이, 잡지 등): 약 300편

    사회단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1994),

    환경연합시민환경연구소소장(1995), 수중과학회회장(1997),

    새만금생명학회회장(1999), 생태지평연구소이사장(2008)

    국제기구: 동아시아해양환경협력기구 부의장(2011)

    정부보직: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2003/5)

    포상: 황조근정훈장(2007), 한국해양학회 특별학술상 2110,

    표창장(2012, 30년 근무)

  • 2. 선생, 연구, 교육

    3

    2. 선생, 연구, 교육

    퇴임

    오래전부터 퇴임을 생각해 왔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니 불쑥 찾아 온 느낌

    이다. 우선은 제도가 나를 밖으로 던져버리는 듯하다. 그동안 억척스레 챙기

    던 실험기구가 내게는 갑자기 쓸모없는 물건이 돼 버리는 것도 이상하다. 나

    이가 많다는 이유도 그리 수긍이 안 간다. 퇴임 관련한 서류에 정년퇴임 말고

    도 여러 퇴임이 있음을 읽으면서 비로소 나의 생각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된다. 정년이 아닌 다른 이유로 퇴임하는 분들의 애환이 가슴에 와 닿으니 나

    의 퇴임은 섭섭함 보다는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나를 밖으로 내치는 제도를 나무라지 말고 홀로 서서, 용기로 무장해야겠

    다. 세상의 자영업은 모두 분노, 저항, 억척스러움으로, 통한의 현 위치를 자

    리매김했을 터이다. 이제 다시 아래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의 기득권에 연

    연하는 불공정한 시작에의 미련도 버려야 한다. 깊은 호흡으로, 심연으로 가

    라앉자. 덮개를 벗기고, 위선의 뚜껑을 벗기고, 속내를 들여다보려 아래로, 밑

    으로만 집중하던 옛날의 나로, 단순한 나로 돌아가자. 그러면서 위를, 혹시라

    도 해맑을 수 있는 바깥을, 어렴풋한 희망을 그리며 나를 추슬러 보자.

    학교생활에는 그동안 부담도 있었다. 학교생활은 연구와 교육인데 연구가

    부담스러웠다면 이는 온당치 않다. 여러 다른 직업군이 부러워할 연구직에 있

    었으면서, 또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학교에 있었으면서, 그 부담을 말하는

    것은 우쭐한 건방짐에 불과하다. 그저 퇴임의 변이니 학교생활의 애증 정도는

    말해 볼 수 있겠다.

    학교생활의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학생과의 연구 작업

    마무리에 있는 논문쓰기라고 답하겠다. 젊은 학생들과 지내니 젊어 보이고 활

    력이 있어서 좋겠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러나 실제는 실험과 논문작성이라는

  • 나의 학문과 인생

    4

    연구 작업이 젊은이들과의 매일의 일인데 이는 따지고 지우고 새로 쓰는, 고

    치기의 연속이어서 젊음을 느낄 겨를이 없다. 대충 덮어 놓고 가기도 하고 부

    담을 지고 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연구는 지난 30년간 끊임없이 내가 하던 일

    이다.

    나와 학생 양쪽은 모두 학술지 게재를 아주 어렵게 생각한다.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학술지 게재라고 답하니 구차하고 모양새가 없다. 그러나 연구의 설

    계, 실험, 논문쓰기, 이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과 선생이라는 요소가 뒤섞인 온

    갖 학교생활이, 애증이 모두 이 논문생산에 얽혀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가지

    고 평생을 쩔쩔 맸으니 연구는 나의 기본능력을 넘어서 있는 듯하다.

    수온이 올라가고 생산성이 증가하는 등의 단순한, 자연의 값을 찾아 헤맨

    것이 뒤돌아보면 철모르는, 순진했던, 순수했던 생활처럼 여겨진다. 값을 측

    정하고 인과관계를 찾는 작업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는, 지극히 단순하기만 한

    자연관찰의 과정인데 그 과정에 종사하는 인간은 단순함을 넘어서, 혼미하게

    얽혀 있음을 이제야 뒤돌아본다.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거기에 있는

    데 자연을 알려는 연구자는 탐욕으로, 술수로, 자기의 이익을 화려하게 포장

    한 연구라는 과정에 착취로 개입해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감을 이제야 뒤돌아

    보고, 내게 남아 있는 그 잔영을 부끄러워한다. 나는 그냥 단순한 쪽으로만

    달리려했던 듯하다. 몇 개 붉은 색 묶음집을 결과물로 앞에 놓으니 왜소하고

    허탈하다.

    학생과 선생의 권력 불균형

    선생이 학생에게 학술지 게재 논문쓰기를 강요하는 것이 정당한지도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졸업을 핑계로 선생의 권력행사가 과도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영어논문 쓰기는 학생의 입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책무임이

    분명하다. 만일 내가 옛날에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논문 쓰기를 요구 받았다면

    당연히 졸업을 못했고, 당연히 학교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학생

  • 2. 선생, 연구, 교육

    5

    들을 복도에서 스칠 때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비켜 달아난다. 그들의 영어논

    문 쓰기를 둘러 싼 괴로움을 내 이 작은 가슴은 감당할 수가 없다. 따뜻한

    눈길, 말의 위로는 위선일 뿐이어서 그냥 학생을 피해버리곤 했다. 영어논문

    이 없으면 대학원 졸업을 못하도록 한, 이 규정을 만들 때 학생의 입장이 대변

    되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선생의 권력은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파헤치기가 어렵다.

    영어논문 쓰기에 내재된 교육명분은 괜찮은가. 불변의 원칙인가. 학생과 선생

    의 구조적 힘의 불균형을 잉태하는 그 명분은 제거할 수 없는가. 학생과 선생

    의 관계를 인간권리라는 기본, 단순 원칙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가. 교육이라

    는 명분은 선생의 강력한 공격무기이다. 권력이 강한 선생이 가진 칼이니 권

    력이 약한 학생은 선생 칼이 모순이라 하더라도 저항할 수가 없다. 학생은 피

    하고 또 피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벽을 치고 각을 세운다. 학생과 선생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의 존재로 변한다. 학생과 선생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

    는다. 그 벽은 위선적 명분의 무기를 거두어야 허물어진다.

    학생과 선생의 벽을 허물 수 있을까. 연구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학생과 선

    생 간의 벽을 허무는 데는 학생 주도의 혁명적 비판, 선생 주도의 햇볕 교육의

    두가지가 있을 법하다. 혁명적 비판은 학생이, 또는 교육수요자가 그 구조를

    공격하는 형태이며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사회운동, 문화운동으로 발전해야

    가능하다. 교육 수요자의 한 당사자인 학부모가 학생을 대신해서 구조적인 문

    제를 공격하는 참교육 운동도 하나의 벽허물기 사례이다. 교육민주화 운동에

    도 이런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햇볕 교육은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즉 선생 책임이다. 햇볕 교육이라 하

    면 따스한 교육, 마음이 스며든 교육, 이해의 교육, 감싸는 교육, 관용의 교

    육,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사랑으로 보살피는 교육 등을 염두에 둔 것이

    다. 그저 ‘마음의 교육’이라 하면 어떨까한다. 햇볕 교육은 정치용어, 마음의

    교육은 현장용어이겠다. 그동안의 내 연구, 자연탐구 과정에서 마음의 교육

    을 적용하면 어땠을까 싶다. 마음의 교육은 구조적 필연이 아닌, 구성원 선생

  • 나의 학문과 인생

    6

    의 자발성에 기초한다. 선생의 능동적인, 사려 깊은, 포용의 행동을 전제로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교육의 이러한 참모습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늘

    구조를 찾아 헤매었다. 인간을, 학생의 가족, 배경, 상황을 보는 것은 정당하

    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마음으로 생길 학생에 대한 편견과 편애를 두려

    워했다.

    나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서 서로가 위선을 벗어 던진, 투명한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내는, 권리와 책임이라는 핵심 요소로 환원되는 단순한 관계를 시

    도했다. 학생의 출신지, 가족, 부, 성격, 능력에는 관심을 안보였고 어느 학생

    이나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연구에 책임을 다하는가를

    물었다. 이런 단순화로 학생과의 다양한 얽힘을 피하고 나 자신에 집중하려

    했다. 학생 역시 선생에의 벽을 쌓아 선생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후 그 속에

    자기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연구내용을 드러내어 토론하

    는 것을 피하고 열려진, 터진, 공동의 공간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학생과

    선생의 이 벽은 완고한, 허물어지지 않는, 내가 넘어설 수 없는, 위선적 권력

    불균형의 모순에서 온 벽이다.

    연구: 자기화, 토착화, 고유화

    30년의 학교생활에서 느끼는 것은 ‘연구는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의 핵심

    은 ‘자기화’, ‘토착화’, ‘고유화’일 터인데 자연과학은 서양학문이어서 모든 내

    용을 서양을 흉내 내면서 배워가므로 위의 세 단계 모두가 어렵다. 내용을 소

    화하고 체화해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어느

    연구 분야에서라도 자기화란 자기가 이해해서 소화하는 일이고 토착화는 동

    료와 함께 소화한 내용을 우리 것으로 정착시키는 일이며 고유화는 그룹의

    정체성으로 발전해서 남들과도 비교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하겠다. 고유

    화는 ‘지역학’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선진국 연구자들은 한국 사례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 앞서 있는 세계적 주제의 발전방향에 관심을 가

  • 2. 선생, 연구, 교육

    7

    질 뿐이다.

    30년이나 주어졌던 그간의 연구과정을 잘 설계했었다면 토착화, 고유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은 학생 주제 대부분을 나의 관심분야로 좁혀

    서 하나만 파고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정당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또 졸업생들이 좁은 분야에 치중되는 문제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시작하는 해양저서생태학 분야여서 미래의 세부 주제간 균형

    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자기화, 토착화, 고유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자율성이 중요한 요소

    임을 늘 염두에 두었다. 학생이 스스로 자기 주제를 선택하고 또 주도권을 가

    지고 연구하는 것이 자기화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

    생 주도로만 연구주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연구는 한 분

    야가 아닌,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서로 다른 분야를 다룬 결과가 되었다. 80

    년대의 동해안 오호리 암반해안 연구, 동해 대륙붕 대륙사면 연구, 동남해안

    내만 연구, 90년대의 서해안 갯벌연구, 동남서해안 연안퇴적물 오염평가연구,

    2천년대의 갯벌 생산성 연구 등을 거쳤는데 지역과 주제가 서로 다른 논문들

    을 생산하였다.

    나의 연구에서 다룬 주제는 식물, 동물, 군집, 생산성 등 대상과 관점이 이

    질적으로 섞여 있다. 일본전통으로는 가볍다고 비판 받고, 미국식으로는 논문

    의 질을 문제 삼을 것이다. 내 논문의 질은 대체로 그냥 그래서 고유화를 말하

    기 부끄럽다. 나는 연구란 ‘고유화’에 접근할수록 우수해 진다고 생각하고 시

    도했는데 결국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차분히 생각해서 고유화가

    가능한지를 판단할 할 일이었는데 지금은 후회도 된다. 고유화에 가까이 갔던

    분야는 생태학 보다는 오히려 연안퇴적물 오염평가연구였다. 생태학은 훨씬

    어려운 분야인 것 같았다.

    오염평가연구는 강성길이 일본연수에서 보고 온 한 두개 사례를 추동해서

    시작한 것인데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해서 잘 진행이 되었다. 생태

    학보다 오염평가연구에 더 파고드는 이유를 학생들에게 물으니 화학분석을

  • 나의 학문과 인생

    8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연과학도를 꿈꾼 것은 실험복을 입고 플라스크를

    흔들며 분석하는 것이 멋있어서였는데 오염평가연구가 여기에 가깝다는 것이

    다. 하여간에 90년대 후반의 약 5년간 진행한 이 연구는 나름대로의 추억을

    남겼다. 그 당시로서는 충분한, 나로서는 처음인, 규모 있는 연구비를 지원 받

    은 것도 특별했다. 선생, 학생이 모두 하나가 되어 정신없이 열심히 공부했고

    자정을 넘기는, 세미나의 표본적 역사를 남겼다. 연구비로 대부분의 학생을

    미국, 일본으로 연수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연구비로 학생을 해외

    연수 보내는 일은 그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고 이는 내 고유의 아이디어

    였음도 강조해 둔다. 나는 학생들의 새로운 분야에 대한 이해, 소화, 자기화

    과정이 가능한지를 관찰하기도 하였다. 실험실 학생들이 매우 우수함을 서로

    가 확인한, 최소한 자기화 과정은 분명히 가능함을 확인한 시절이기도 하였

    다. 고가의 분석 장비 구입이나 운영 등의 문제가 발목을 잡아 고유화에 이르

    지는 못했지만 연구 족적만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교육

    교육은 연구보다 훨씬 어렵다고 느꼈다. 연구는 목적이 세밀하고 구체적인

    데 교육은 막연해서 문제해결식 집중이 불가능하다. 내가 했던 연구를 교육

    과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했을는지 생각해 보았다. 연구를 교육으로 보면 망

    가트리고, 부러뜨리고, 던져버리고, 또 포기하는 여러 상황을 모두 하나의 과

    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적인 면도 함께 섞어서, 따뜻한 마음으로, 문화

    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효율을 포기하고 연구의 고유화라는 목표도 꺾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나는 연구를 교육으로 보아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였다. 연구

    를 교육적으로 하려면 그 어려움은 논문작성을 학생과 함께 완성해 가는 과정

    에 있었다. 인간적인 교육, 따뜻한 마음이 논문작성이라는 병목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 물론 실험이나 측정 등도 모두 세심히 해야 자연의 참값에 도

  • 2. 선생, 연구, 교육

    9

    달하므로 신경을 써야 하니 그 일들을 하나하나 학생과 함께 세심하게 해 나

    가기가 쉽지는 않다. 연구는 세심해야 결과를 얻지만 그 세심함을 내가 드러

    내면 학생은 피한다. 세심함을 강제하지 않으면 결과를 얻지 못하니 연구를

    포기해야 한다. 빠져나오기 힘든 모순의 쳇바퀴이다.

    연구를 잘 하려면 다른 조직처럼 실험실도 계급 체계를 가져야 될 것 같았

    다. 학생과 선생이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있는, 고용된 연구자가 중간

    단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토의 과정이 정제된 답을 내 놓을 수

    있도록 하는 하이라키 구조이면 세세하게 직접 어린 학생과 토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학교구조에서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이 부분은 서로 대충 했다.

    학생의 생활습관도 실은 교육해야 할 부분이 꽤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학생

    들이 요즘 흔히 매달리는 인터넷은 학생들의 공부시간을 많이 빼앗아 간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하루 종일 인터넷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인터

    넷 서핑이라고도 하던데 공부와 달리 그냥 피동적으로 클릭하는 일이므로 학

    생들에게 연구처럼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는다. 80년대에는 정치적 상황이 좋

    지 않았으므로 학생들은 저녁이면 자주 모여 술을 마시려 갔다. 더구나 하숙

    이 흔하던 시절이어서 하숙집 사연도 구구절절이 많았다. 이런 학생들의 생활

    속에 교육은 그러나 파고들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활교육은 오히려 가정,

    부모,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여겼다. 나는 연구의 핵심은 물론 학생들의

    정제된 생활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접근하는 것은

    학생의 인권문제라고 여겼다. 또 내가 교육으로 성과를 낼 수도 없는 문제라

    고 여겼다. 관찰하는 사항은 있지만 이를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연구의 바탕, 또는 기저가 아직 우리세대에서는 튼튼하지 못하다는 생

    각을 했다. 연구의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 연구의 개인조건인 자

    발성, 어학, 창조성도 더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개인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예를들면 대학원 이전 교육은 연구와는 큰 상관이 없이 진

    행된다. 초중고, 학부의 교육과정은 연구를 위한 훈련을 전제하지 않는다. 대

  • 나의 학문과 인생

    10

    학원 이전 교육은 연구를 위해서는 많이 부족하다.

    학부교육은 연구와 연결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대학원에서 연구를 잘 하

    도록 훈련하는 구조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의 학부제는 교양교육 위주여서 그

    냥 ‘인간완성’ 얘기를 하다말기 때문에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고등학교는 입

    시위주 교육이다. 중학교 교육은 잘은 모르지만 고등학교에 다를 바 없다. 초

    등학교는 어떨까. 초, 중, 고, 심지어 대학의 어느 틈바구니에서도 연구훈련은

    찾아보기 힘든데 대학원에서 갑자기 어떻게 연구를 하라는 말인가. 창조성 훈

    련이 중요할 터인데 대학원에서 갑자기 개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선생과 학

    생의 온갖 싸움과 애증이 여기서 뒤얽힌다. 영어논문을 써서 국제학술지를 통

    과하려면 언어능력이 필수인데 갑자기 되지를 않는다. 학생은 논문쓰기를 감

    당할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 정말로 학생은 괴로운 시간을 대학원에서 보낸

    다고 보아야 한다. 선생이 학생을 잘 위로하며 ‘마음의 교육’, ‘돌봄의 교육’을

    왜 안하느냐고 비난할까봐 두렵다. 나 역시도 긴장하면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잘 만들지도 못하는 연구결과들을 붙들고 학생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니 마음

    의 교육은 자꾸 멀리 도망을 갔다.

    추억, 그리고 퇴임

    이제 제도 밖으로 나오니 학생들과의 애환도 모두 떨려 나간다. 긴장의, 고

    도로 응어리진 애증이 그냥 풀리고, 악수하고 등을 두드리고, 그냥 허허 웃을

    관계로 변한다. 이제는 연구로나 ‘일’로써 학생을 만날 필요가 없으니 학생과

    선생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다. 이렇게 풀어지니 학생들 하나하나가 생각난다.

    모두 죽어라고 왜 그리 열심히 했는지. 우리 모두는,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처럼 왜 휘몰려 내달렸는지. 공부라는 체제에서 한 걸음도 못 빠져나가게 나

    는 왜 그리 학생을 옥죄었는지. 그렇다고 내가 인생을 가르친 것도 학생은 배

    운 것도 아닌데, 학생이 연구과정을 배웠다 해서 경제적으로 더 풍부해진 것

    도 아닌데, 직장을 잘 구한 것도 아닌데, 징표로 남아 있는 무엇도 없으며,

  • 2. 선생, 연구, 교육

    11

    압박에 지쳐서 달아나기만 했던 지금의 인생들일 터인데, 지금의 살과 뼈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학생 입장에서 질문을 던진다.

    오호리 파도에 부서져 흐드러진 우리들 다이빙의 흔적, 암반조사, 생물사진

    찍기를 하던 그 학생들은 무엇을 가슴에 담고 떠났을까. 광양만에서 동해바다

    천오백미터 수심까지, 기괴하게 만든 그 그랩을 던지던 학생들은 그 위험에서

    살았음에 안도할 것이다. 새만금으로 돌변해버린 거전, 광활 갯벌을 걷던 그

    학생들은 새만금 방벽의 분노를 어떻게 삭이고 있을까. 강화, 동막, 화성, 곰

    소, 함평 갯벌 모두 질척거림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새로 시작했던 퇴적물

    오염평가 공부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것은 고생이 덜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진짜 공부로 악착같이 소화하려 갈등의 흔적을 남기며 가졌던 몸부림은 지금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열심히 써 댓던 논문에 학생 하나하나의 뿌듯한 추억

    이 되살아난다. 얼마 전 새로 시작한 갯벌 에너지 플럭스 공부는 버릴 수 없는

    나의 애착이었지만 이제 털어내 버려야 한다.

    연구가 꼬이는 핵심이 무엇인가도 생각해 본다. 아마도 체제인 듯하다. 석

    사, 박사의 교육, 논문심사, 학술지 게재, 졸업 등의 학사관리가 개인이 아닌

    구조 속에 철저히 있어야 한다. 선생 개인이 아니라 학과의 모든 선생이 함께

    해야 한다. 일본에서 석박사 논문발표, 논문심사 과정에 학과 선생 모두가 참

    여하고 듣고 질문하고 투표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선생이 참여할수록 학위

    수여가 투명해지고 분명해진다. 지금은 심사과정이 학생과 선생의 개인감정

    으로 점철되기 일쑤이다. 학과 선생들과 개선점을 얘기해 본 적도 있지만 대

    부분은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석박사 학위는 더 열려진 공간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퇴임은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이 느지막한 나이에 내 혼자의 힘으로,

    내 개인의 욕구로 채우고 싶은 공부가 무엇일런지에도 생각이 미친다. 조용히

    나를 추동하면서, 쫒지도 않고 쫓기지도 않으며, 안달하지 않고 닦달하지도

    않으며, 그냥 쭈그리고 앉아 하는, 향방 없는 책읽기를 생각해본다.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정년퇴임을 하니 내가 쫒던 ‘단순함’이 갑자

  • 나의 학문과 인생

    12

    기 눈앞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허탈하다. 구조에서, 시장경제의 옥죄임에서

    내쳐지고, 풀어지는데서 오는 허탈감이다.

    자유롭다. 제도와 체제 밖에 서게 된다. 과학의 엄밀함에서 자유롭다. 학생

    으로부터 자유롭다. 나에게 덧씌어졌던 구조는 나를 살리고 이롭게 명예롭게

    하는 구조였으니 그것을 탓함은 정당치 않다. 너무 올곧게만, 잘하려던, 나태

    하지 않으려던, 주변의 비판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보자.

    나의 목소리는 이제 허공으로 빗나간다. 시간 속에 빨려버린, 구조에의 저항

    은 이제 헛발질이다. 허탈하다. 그래도 나를 향한, 내면의 나를 향한 새로운

    저항이 나를 추스릴 것이다. 알고 싶은, 깨어 있으려는 욕구가 응어리로, 이

    작은 가슴에서 뜨겁게 달구어지려 한다. 낯선, 당황스런 자유이다.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60-70년대: 서울문리대 생활과 독일유학 생활

    나의 60-70년대는 서울문리대 학생으로서의 대학생 생활과 독일유학 생활

    이다. 여기서의 대학생활과 독일에서의 대학생활은 어떤 의미에서 대척점에

    있다.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였다. 무얼 몰랐던 60년대, 무얼 배우려던 70년

    대였다.

    2011년 개교기념일에 받은 A4용지의 30년 근속 표창장을 표구해서 달아

    놓았다. 교수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작했고 연구가 무엇인지 모르고 했고,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며 선생을 했던 지난 30년이다. 나 자신

    은 늘 모르는 것 투성이인 늦깍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대강 10년이 늦다는

    생각도 했다.

    60년대의 대학생활 중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취직시험

    볼 자신이 없어서 그냥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러다 어찌어찌 공부했고 ‘생년’

  •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13

    이 적당해, 경쟁이 없어서 교수가 되었다. 65년에 입학한 학과는 식물학과이

    고 컷트라인에 맞추어 입학했는데 매일 왜 내가 식물학인가를 부끄러워하며

    학교에 다녔다. 식물채집 초록 깡통의 부끄러움, 광릉 숲, 지리산을 메고 헤맬

    때의 시선들에 주눅 들던 자존심은 마음을 짓눌렀다. 대학 강의 대부분이 엉

    성하던 60년대였지만 그나마 있던 강의도 유치할 뿐이었다. 선생님들을 존경

    하기도 어려웠다. 나도 별로지만 선생도 별로라고 생각했다. 선생이 되면 꼭

    좋은 선생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저 도망가고만 싶었다.

    60년대 나의 상징은 한자 싸인이라 해야겠다. 버스표조차 꾸어야 했던 가

    난이지만 어떻게 솔직하게 살아보느냐를 가슴에 품었었던 것 같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분에 넘치게, 어줍잔케 ‘위선’을 우습게 봤다. 지금도 누가 목소리를

    낮추며 점잖을 떨면 징그럽게 싫어한다. 또 누가 폼 잡고 그럴듯하게 얘기하

    면 빨리 본론을 얘기하라고 마음속으로 울부짖는다. 빨리 핵심에 도달해 분석

    하고 이해하고 비판하고자 집중력을 발휘하려는데 그 따위 장황한 얘기는 귀

    에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본론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려 나는 너무 초조해

    한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만든 한자 ‘싸인’, ‘煥’의 초서는 어린 마음의, 거짓

    에의 반항이다. 대강, 대충, 친구끼리 서로 출석 싸인 해 주는 교양수업들인데

    유독 나만은 남들이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하는 싸인으로, 친구들이 내 출석여

    부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했던, 횡횡하는 가짜에의 반항이었다.

    독일에 간 것은 74년 6월이다. 가스통 레버파의 암벽등반을 배우리라 상상

    하며 산사나이로, 남아로, 식물학의 부끄러움을 넘어보자는 막연함에 시도한,

    반항의 독일 행이었는데 충격적인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쓰려져가는 나의

    운연동 초가집과 육중한 돌집, 첨탑 돌교회가 대비되었다. 얼음이 꽁꽁 언 고

    향의 양푼 세숫대, 웃풍으로 떨던 나의 건넌방이 스팀 나오는 화장실에서 생

    각이 났다. 불온서적 금지의 조국과 레닌의 붉은 책 장터가 겹쳐졌다.

    바위타기로 현실을 뿌리치던, 선인 주봉 침니의, 겁에 질려 토해내던 푸르

    틱틱한 위액이, 체화된 세상모름이, 세상에의 모험심이, 가난에의 반항이 나

    를 독일로 데려갔다. 독일정부장학금 시험에서 유일한 한국인 심사위원 선생

  • 나의 학문과 인생

    14

    님(화학과 박인원 교수님, 기가 막혀서 지금도 그 분을 기억)이 면접이 끝나고

    는 나보고 독일 문정관님 질문에는 하나도 바른 대답을 안했다고 일러 주었

    다. 그래도 그 독일 문정관이 나를 합격시켰고 공항까지 와서 나를, 우리를

    배웅하며, 내 삶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독일까지 보내 주었다.

    생각이 자유롭게 열렸던, 내 삶을 포용했던 그 세계에 나는 도착했다. 알프

    스와는 너무 먼, 독일의 북쪽 끝, 발틱해 ‘키일’이라는 곳이었지만 스쿠버 다

    이버로 활동하면서 ‘해양생태학’을 공부했으니 그래도 응어리진 부끄러움을

    모험으로 넘어서려 했던 어린 마음은 다독거려 진 셈이다. 어두움에 겹쳐진,

    그렇다고 세상을 알려고 한 것도 아니고, 독재에 항거하지도 못한, 촌티 나는

    내 마음이 키일 대학 캠퍼스의 붉은 대자보와 만날 때의 충격은 새로움이었

    다. 남쪽 독일의 여러 유학생이 독재타도를 외치던, 본의 데모를 외면한 창피

    함은 아직도 찡하다. 순박한 만년설에의 꿈, 발틱해 얼음 물속 체온강하 사투

    를 내미는 것 역시 촌티 창피함이다.

    키일 해양연구소에서는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왜 자발적으로 수업에 들어

    갔는가. 이상하지만 나는 학위를 하지 않고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

    했다. 어떻게든 취직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학위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권위를 위한 학위가 아니라 취직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취직을 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가끔 도서관에 가기도 했지만

    책을 펴면 졸았고 주위 독일 학생들의 눈총을 받았다.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에 강의를 스스로 찾아가면

    서 그냥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소그룹 수업에도 참석했

    다. 그 때 선생이 나에게만 너무 조심스럽게, 아주 오래 질문했는데 그 강의에

    들어 온 것이 엉뚱하다는 의미였음을 몰랐다.

    내게 살과 피가 됐던 강의는 해양학 실습 I-II 이다. 1년간 매일 아침 9시에

    서 저녁 6시까지 진행되던 실험이다. 나의 친구 마틴 덕에 끼어서 끝까지 갈

    수 있었다. 마틴은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연구

    소에서 여러 독일 친구들이 도움을 줬지만 그 때는 고마운 것을 몰랐다. 나의

  •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15

    지도교수는 구체적이지 않아서 나는 늘 불만이었다. 그분이 내게 늘 적당한,

    모호한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던 것이 인간 존중의 표시였는데 그것을 나는

    몰랐다. 그분은 심장이 나빠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학위 논문은 미카엘이 도왔다. 통계방법을 응용한다고 설쳤는데 통계 강의

    를 아무리 들어도 나는 이해를 못했었다. 미카엘은 통계도 잘 하고 논문도 잘

    쓰지만 어눌하다고 사람들이 놀리던 친구이다. 스쿠버 다이빙 동료들도 빼빼

    마른 내가 물속에서 나와 오들오들 떠는 것을 보면 장비도 챙겨주고 샤워도

    먼저 하도록 했다.

    독일에서 나를 도와준 분으로 독일정부장학재단 아시아 담당관 브란디도

    른 박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에 갔을 때 처음 내가 가게 된 곳은

    브레머하펜이라는 작은 도시의 아주 작은 연구소였다. 여기서 6개월 쯤 지나

    면서 브란디도른씨가 브레멘 시에서 만나자고 해서 나는 실험결과를 모두 들

    고 가 보여주면서 지금의 연구소가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분

    은 나를 키일 대학교로 보내주었고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예외적으로 장학금

    을 주었다.

    독일은 나를 풍요롭게 하였다. 그 풍요는 국가, 사회, 학교, 지인, 가족이

    만들어주었다. 내 생활을 통째로 뒷받침하던 장학금, 끝까지 인내로 나를 받

    아 준 쉬벵케 지도교수님, 콜랏츠니를 포함한 스쿠버 다이빙 동료, 내가 강의

    를 들었던 선생님들 모두가 인간이해의 기본정신으로 나를 받아 주었지만 나

    는 그걸 모르면서 그저 덤벙거렸다. 시골촌뜨기, 문화적으로 다듬어지지 않

    은, 인간이해의 기본조차 모르는, 원주민 같은, 그런 나를 수용하고 가르치고

    경험하게 한 고마움을 지금의 나의 행동에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수치이

    다. 내가 얻은 풍요로움을 국가, 사회, 동료, 후학, 친구, 가족과 나누어야 한

    다. 내 욕심을 채우는 오만한 이기심을 떨쳐버려야 한다. 부족한 나눔에의 나

    의 부끄러움을 통렬히 비판해야 한다.

  • 나의 학문과 인생

    16

    80년-90년대: 해양학과 교수생활과 갯벌연구, 해양퇴적물 오염평가 연구

    81년 해양학과에 와서 대학원생 방에 들어갔는데 첫 인상은 너무 지저분했

    다. 원래 이런 일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실험실을 정리하는데 고생해서이다.

    슬리퍼, 바지, 운동화, 농구공, 야구클럽, 방망이, 전기 줄에 먼지가 온통인 책

    상 밑을 학생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처음 학생 최진우를 만나서

    나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최진우는 나와 10년 차이인, 너무나 착하고 진실한,

    공부를 위해 태어난 학생으로 지금도 몇 년에 한번 있을 그의 독특한 화법을

    즐긴다. 우리나라 최초 저서동물 그랩채취도 5톤짜리 어선을 사용해서 광양

    만에서 최진우와 처음 했다. 그 그랩은 최진우가 청계천에서 만들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방법론으로 사용하겠다고 강원도 오호리를 연구지역으로

    택했다. 현대의 미니버스를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뒷문을 공기통 실기에 편리

    하도록 개조했다. 민박집에서 꾸부리고 자던 기억, 고스톱 하던 기억도 난다.

    초기 5-6년간, 학생들이 오호리 암반해안, 해중림에 대한 논문을 썼고 비록

    우리말이지만 학술지에도 실었으니 그런대로 연구를 시작한 셈이었다. 80년

    대 중반에 오호리 연구는 그만 두었다. 그 당시 과학재단 1년 연구비 200만원

    이었는데 비용이 모자랐다. 바람이 불면 며칠 씩 민박집에 머물러야 했고 오

    호리 앞 죽도에 나가면 언제나 위험이 뒤따랐다. 암반에서 물속으로 그냥 뛰

    어드는 다이빙이어서 파도가 치면 물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판국이었다. 자고

    먹는 것도 엉망이고 강원도까지 가는 것도 보통 길이 아니었으니 학생과 선생

    모두가 쇠진했다. 성락길, 강영철, 안인영, 임주백, 소성권 등 모두 모두 고생

    했다.

    88년에 만경, 동진 갯벌 공부를 너무도 우연히 시작했다. 농업진흥공사에

    서 서울대 몇분 선생님께 의뢰한 연구에 끼었는데 현장을 가보고는 너무 놀랐

    다. 배로 타고 나가서 닻을 내리고 기다리면 갯벌이 드러나는데 그 드넓은 광

    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아니 어찌 이런 곳이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우리 연구

    팀이 새만금 구상 단계의 영향조사팀 정도일 듯 한데 그런 개발구상은 안된다

  •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17

    고 결론을 써서 구박을 받고 더 이상 그 팀에 끼지 못하였다. 그 보고서는

    아직도 내 책장에 꽂힌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후에 여러 학생들이 갯벌

    논문을 써서 졸업을 했는데 적은 연구비로 가능하고, 직접관찰, 채집, 방법론

    적용이 모두 수월했기 때문이다. 질척한 뻘에서 고생한 학생들은 예외적인 추

    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개펄, 갯펄, 갯벌의 용어 논란을 갯벌로 통일한 것은 1997년 새어민에 발표

    한 글을 통해서였다. 황산벌의 ‘벌’과 갯흙, 갯가의 ‘갯’을 결합한 갯벌을 제안

    해서 지금은 대강 갯벌로 통일되어 있다. 한겨례에서는 여전히 개펄을 사용하

    는데 펄은 펄흙이라는 뜻이므로 맞지 않다. 또 논란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5대 갯벌에 속한다는 것이다. 5대 갯벌 역시 새어민에 내가 발표한 글에서

    주장한 내용인데 그 이후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5대 갯벌이 어디인

    지, 자료는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

    데 이 역시 대강 5대 갯벌로 정리되어 있다. 지금은 심지어 예를 들면 순천만

    에서도 순천만이 세계 5대 갯벌이라고 주장한다. 5대 갯벌이라는 구호는 갯

    벌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식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모두 80년대

    말 이후 10년 이상을 지속한 갯벌 공부의 결과들이고 또 사회적 의미를 가지

    기까지 노력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갯벌연구를 처음 촉발했던

    만경, 동진 연구의 결과를 정리하면서 88년 당시 보고서에 내가 잠시 써 놓았

    던 옛날 글이 있어 아래에 옮겨 놓는다.

    “매우 작은 우리의 결실이지만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애착을 느끼는 듯하다.

    갯펄을, 배타고 나간다는 일이 믿겨지지 안터니만, 배를 타고 가서는 또다시

    걸었어도 결국은 그 끝을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섰던 첫날이 생각난다. 처음

    나간 거전 펄은 우리를 배로 돌아오게 하는 일조차 거부하려 하였다. 그래도

    배꼽 이상 물이 안찬게 다행이었지. 胤浩, 庸元을 아주 잃어버릴뻔도 했는데,

    순모의 성큼거리며 걷는 모습이 늘 눈에 선하다. 그래도 우리는 Reine

  • 나의 학문과 인생

    18

    Wolle라며 소백산에서, 갯펄의 맺힌 한을 풀었으니까

    尙禧가 살던 고향 땅에서 이렇게 고생하며 일하게 될 중이야 어느 누군들

    알았겠는가. 광활한 광활리에서 태어난 상희가, 이제 깊은 학문의 세계로

    돌어오길 바랄 뿐이다.

    수일 밤을 지새며 칠톤짜리 쪽배에 몸을 실고 부대끼던 震雨, 炯澈이를

    장미장에서 만났던 반가움은 잊을 수가 없을게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갯펄에서만은 우리를 진두지휘하던 鉉出, 무어든

    챙기며 쫓아오는 大鎬, 언제나 힘께나 쓰는 聖卷이가 없었으면 아마도 우리의

    군산펄, 거전펄, 계화도펄은 그렇게 많은 추억을 간직하지 못했으리라, 이제

    昌勳이도 우리의 마음속 사람으로 자리를 굳혀 가겠지. 농게를 발견했던

    군산펄의 경창골짜기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뜨거운 태양볕에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 希先이가 시집가던 바로 그 여름날이 생각난다.

    이제는 모든 추억이 다 이 한권에 녹아들어 우리의 사이를 끈적이게

    하는구나. 화려한 결론일랑 淳模, 尙禧, 震雨의 논문에서 기대하기로 하자.

    부끄러운 속살이지만 그래도 드러내 놓으며, 모래펄 갯펄을 대면할 기회를 준

    농업진흥공사에 감사한다.

    이렇게 묶음을 만들도록 하는 우리의 저력과 우리의 하나 됨이 고마울

    뿐이다.

    1988년 12월, 서울대 해양학과 저서생물실, 고철환”

    갯벌공부, 저서생태 공부를 겸하면서 90년대 후반에는 퇴적물오염평가 연

    구를 시작해서 약 5년을 보냈다. 서해, 남해, 동해의 항구와 연안지역 퇴적물

    을 채취해서 여러 오염물질을 분석하고 오염 정도를 평가하는 연구인데 과학

    재단이 아닌 정부부처 연구비를 처음 받았다. 정부부처에서 연구비를 직접 주

    는 것도 처음 알았고 또 그 연구비는 액수가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른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을 함께 참여시켜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모두 고생했다.

  • 3. 대학생활, 실험, 연구

    19

    개념을 잡기도 어려웠고 세부 연구항목을 배치하기도 어려웠으며 결과를 논

    문으로 만들기도 어려웠으며 심지어 연구비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온갖 고생을 하고 나도 매일 책상에 오래 앉는 바람에 디스

    크가 빠져나와 수술까지 했다. 연구비가 충분해서 학생들 연수도 대부분 다녀

    왔고, 학생들이 미국, 일본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너무나 잘 해 나

    갔다. 우리 모두는 마치 가난한 학생이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처음 하는, 죽자 살자 매달리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너무 집

    중하고 열심히 해서 실험실 학생 모두가 지쳐버린 연구이기도 했다. 지쳐버린

    우리들 마음은 늘 나의 부족한 관용으로 쏠렸다. 치열한 연구 속에서 마음의

    교육, 베품, 돌봄의 교육정신은 모두 다 도망가 버렸다. 욕심을 넘어선 너그러

    움, 돌봄, 형평으로 ‘우리들의 연구’를 만들었어야만 했다. 지금, 그 부끄러움

    을 감춰야 하는 나의 모습이 초라하다.

    2천년대: 갯벌연구

    2천년대는 일본에서의 연구년, 갯벌연구의 새로운 시도, 정부 일로의 외도

    가 생각난다. 센다이의 동북대학(도호쿠) 3개월, 후쿠오카의 사가대학 1년 체

    류로 일본의 연구관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 갖는 연구년을 사가대학에서

    가졌고 디스크 수술 후유증도 회복하였다. 갯벌연구의 새로운 시작도 사가대

    학에서 열렸다. 저평지연구소 소장께서 나를 이사하야 간척, 아리아케 바다

    측정지점으로 안내해 주었고 여기서 학부 4학년생 한명을 데리고 약 8개월간

    갯벌조사를 해서 귀국 후에 김종성과 함께 두 개의 논문으로 작성하였다. 김

    종성은 자발적으로 두꺼운 영어 보고서도 만들어 주어서 이를 사가대학에 제

    출하였는데 그곳 분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김종성과 두 편의 논문을 쓰면서는

    어떻게 우리가 이런 아이디어에 도달할 수 있을까에 흥분하고 엔돌핀이 나온

    다고 서로 좋아했다. 그는 내 의견을 악착같이 쫒아 했고 결국 서로의 생각이

    합일되는 수준까지 함께 갔다. 학생들은 보통 선생의 제안을 귀찮게 여기는데

  • 나의 학문과 인생

    20

    그는 그렇지 않아서 편했고, 함께 논문을 쓰던 몇 년간 나는 연구가 참으로

    좋고 행복했으며 나의 연구 역시 좀 성숙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2천년대 후반에 나의 마지막 연구인 규조류, 일차생산, 미세산소전극 등의

    갯벌연구에서는 다시 옛날처럼 마음고생을 좀 했다. 연구 속도, 효율, 약속 지

    키기 등에 대한 학생과 선생의 생각에 차이가 너무 커서 서로 고생을 했는데

    나의 괜한 연구욕심이 이런 상황을 만드는구나 생각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실험하고 논문을 쓰는 일을 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마지막 남은 학생들이어서 챙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70년대 독일에서 유

    학하면서 배웠던, 꼭 해보고 싶은 실험이었고 90년대에 몇 번 학생들에 맡겼

    지만 실패해서 정년을 바라본 2006년에 할 수 없이 시작한 실험인데 내가 집

    중해서 챙기면 무언가 되리라 생각한 것이 결국 나의 과한 연구의욕으로 내비

    쳐지기만 했다. 자연과학이라는 세밀한 학문에서 나이가 들면 떠나야 함을 알

    려 준, 늦은 과욕의 부끄러움이 내재된 연구이다.

    내 연구의 줄거리는 오호리 암반생태, 동남해역 저서동물, 서해 갯벌, 동남

    해 연안 퇴적물오염, 그리고 다시 서해 갯벌로 이어지는 듯하다. 대상으로 분

    류하면 동식물 벤토스와 퇴적물오염이라고 하겠다. 또 상징적으로는 갯벌과

    퇴적물오염으로 요약할 수 있다.

    퇴적물오염 연구는 우리나라 최초이다. 몇 개 논문은 그 아이디어 때문에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퇴적물 오염 연구는 학생들이 좋아했다는 것, 논문을

    충분히 발표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학생들이 사업으로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좋아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연구가 가능했던 것

    도 특징이다.

    갯벌연구 역시 우리나라 최초이다. 갯벌연구는 완전히 내 스타일이었다. 나

    는 육체적으로 힘든 것을 잘 모르며 일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이 당황했

    을 것 같다. 갯벌이면 강화, 인천에서 시작해서 목포를 거쳐 순천만까지 어디

    나 갔고 푹푹 빠지는 뻘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학생들이 화성갯벌에서

    푹 빠져서 못나오던 사진을 보면 내가 괜히 이렇게까지 일했다는 생각도 스친

  • 4. 사회활동과 나

    21

    다. 갯벌연구는 80년대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매달렸는데 모두 그 힘든 노동

    을 마다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 한 갯벌연구의 결과는 결국 우리나라 갯

    벌이 세계적으로 귀중하다는 대중인식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우

    리나라 정책도 바꾸고 또 유럽 와덴해와도 교류하였다. 지금은 갯벌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국가에서 많이 발주하는데 우리 학생들은 그런데는 치사해서 끼

    지 않는다. 학생들도 국가와 대항하고 있다. 나는 2012년 2월29일의 정년퇴

    임식을 끝으로 지그재그 30년의 연구생활을 마감하였다.

    4. 사회활동과 나

    90년대: 민교협과 경상대 투쟁

    나의 사회생활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활동했던 교육민

    주화운동, 환경운동에 대해서 거칠게라도 기록을 좀 해 놓고 싶다. 교육문제,

    환경문제는 나의 사회참여의 통로였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기

    타 내 전공분야 밖의 세상을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또는

    바꾸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도 있었고 또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알아야 한다

    고도 생각했었다. 물론 내가 세상을 좋게 하는데 특별히 이바지 한 것은 없다.

    이런 사회활동은 퇴근 시간 후인 저녁에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서 시간을

    쪼개어 저녁에 조금씩 단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서울대지회에 입회한 것은 80년대

    말/90년대초 일 것이다. 민교협이 88년 체제 이후 만들어졌으므로 나도 초기

    회원의 한명이다. 한신대에서 막 옮겨 온 철학과의 송영배 선생님이 나를 입

    회시켰는데 이상희, 백락청, 김진균, 안병직 선생님 등 몇 분이 초대해 준, 산

    꼭대기에 있는 교수회관에서의 입회 기념 식사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독일에

    서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고 사회에의 비판을 배

  • 나의 학문과 인생

    22

    워보자는 욕심도 있어서 입회하였다. 회원은 대부분 인문대 사회대 선생님들

    이신데 나만 유독 자연과학이어서 선생님들의 토론 내용을 이해하고 쫒아가

    지는 못하였다.

    서울대 민교협 월례세미나는 교육과 사회문제를 골고루 다루어서 여기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매년 학술대회,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우리에게 민주화는

    가능한가’ 등의 제목에서 보듯이 정치적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나는 늘 국가

    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정권을 겨냥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면 앞자리에 앉아

    서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자연대 동료교수들은 신문기사를 보고 나를 심하게

    비판했다.

    중앙민교협에 결합하면서는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민교협은 그 당시에 약

    1,200명 회원의 거대 조직이었다. 학교별 지부와 서울경기, 대전충남, 부산경

    남, 광주전남의 지역조직, 대의원제로 구성한 중앙조직이 있으며 중앙조직의

    집행부와 사무실을 서울에 두었다. 1천여 명의 회원조직이지만 이상하게도

    재정이 취약하고 집행부도 맡을 사람이 적어서 쩔쩔매곤 했는데 그래도 서울

    대와 한신대가 합심해서 집행부를 잘 꾸려나갔다. 내가 서울대민교협 회의와

    세미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니까 나보고 중앙민교협 집행부에서 좀 일을 하

    라고 해서 봉천동 사무실에 매주 수요일 저녁회의에 참석하였다. 지금도 그

    사무실은 그대로이나 교수노조와 나누어 쓰고 있어서 비좁다.

    중앙집행부에 가니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분류하여 여러 가지를 새로 배우

    는 식의 활동을 맡겼다. 내게 주어진 직책은 대외협력위원장이었는데 그 직책

    덕분에 다른 단체들과 함께 연대하고 활동하면서 폭 넓게 배웠다. 그 당시 운

    동권의 최대 전국조직은 민족민주전국연합이었다. 서울에서의 큰 집회와 데

    모를 대부분 전국연합에서 주도했는데 늘 사람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를 놓

    고 고민하던 회의가 생각이 난다. 민교협 집행부는 전국연합과 노선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노동운동에 더 집중하려면 전국연합을 탈퇴해야 한다고 의견

    이 모아졌다. 나는 민족, 민주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 그것 때문에 갈라서야

    하는지 입장이 분명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대외협력위원장이므로 결국 내가

  • 4. 사회활동과 나

    23

    전국연합총회에 가서 민교협은 전국연합에서 탈퇴 해야겠다는 말을 했다. 지

    금 생각하면 민족과 민주의 노선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탈퇴하는

    이유를 잘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민교협은 전교조와는 긴밀히 일했기 때문에

    전교조회의, 참교육학부도 등 학부모단체 회의에도 참석하였는데 이들 단체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느꼈다.

    나는 어디서건 회의를 할 때면 그 내용을 숙지하려고 열심히 정리를 했었

    다. 민교협 수요회의에는 내가 참석했던 대외 행사와 회의에 대해서 항상 정

    리된 형태의 문건을 제출했는데 이렇게 하니까 나보고 의장을 맡으라고 했다.

    사실은 원래 민교협 맨 이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종파 같은 흐름인데, 나는

    새로 추가된, 그냥 신선한 사람일 뿐이고 원래는 그들 종파 사람 중에 한명이

    의장을 맡아야 한다. 그래도 나보고 하라는 것이 집행부의 저녁 소주에서 오

    랫동안 논의된 내용 같아서 그냥 의장을 하겠다고 했다. 공주대학에서 열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새로 나를 의장으로 추대한다고 하니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자며 일어나보라는 대의원도 있었다. 93년인가 94년이었으니 늦깍이 운동

    가가 된 것이다.

    의장을 맡은 후 한달도 되지 않아서 최갑수 교수가 전화를 했다. 장상환

    교수 등 경상대 교수들을 잡아넣으려 하니 집행부회의를 급하게 소집해야 한

    다고 호암으로 오란다. 김인걸 교수랑 몇몇이 와서 내용을 듣고 어떻게 덤벼

    보자고 논의하고 일단 헤어졌는데 이튿날 신문에는 벌써 서울대 교수가 움직

    인다고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권력과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공권력과의 싸움은 길거리의 데모일 터인데 교수들이어서 그런지 주로 성

    명서 작업으로 버텼다. 기자회견, 성명서, 또 성명서, 전화 등등의 작업과 작

    전에 매달렸던 매일이었다. 기자회견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그 비좁은 민교협

    사무실에 스티로폴을 깔고 프린터 걸개글씨를 붙이고 쭈루니 앉아서 텔레비

    전 카메라 조명을 받았다. 언론도 우리를 많이 도왔다. 경상대교수 8인 공동

    집필 교과서를 불온사상 전파로 보고 교수들을 구속하려는 경찰대가 경상대

    로 출동하고 8인 선생들은 연구실에서 방어막을 치고 버티는, 투쟁의 현장이

  • 나의 학문과 인생

    24

    치열한 상황에서의 중앙집행부 지원 작업인데 모두 신이 나서 열심히 했다.

    보통 때는 잘 안보이던 서울에 계시는 민교협 선생님들은 모두 들려서 우리를

    격려했다. 특히 성균관대, 방통대 선생님들이 매일 우리를 지켜 주었다. ‘우리

    는 함께’라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전국의 민교협 선생님들이 모두 경상대에 모여서 총회를 열고 성명서를 발

    표하며 집단투쟁을 하였다. 두세달 간의 집요한 노력으로 결국 경상대 교수들

    의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그 당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문건을 실험실에서

    받아보고 읽어 보았는데 우리들의 성명서로 발표했던 주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고 감개무량 하였다. 영장을 기각해준 판사는 최인석, 공안검사는

    박만이었다. 이름을 잊지 않는 것도 워낙 그때 고생해서이다.

    유초하 교수를 잡아넣으려고 하는 일은 묘하게도 경상대 사건이 좀 마무리

    되면서 겹쳐서 일어났다. 충청도 신문은 1면 톱으로 유초하 교수 수염인물 사

    진을 실고 무슨 간첩인양 보도하곤 했다. 충북대에 가서 기자회견도 하면서

    버텼는데 유초하 교수를 안기부에서 소환하고 모두 쫒아 다니면서 시위하고

    지원했다. 유초하 교수를 안기부에서 종북으로 분류했던 것 같은데 이는 잘못

    된 분류라고 저녁 소주에서는 우리끼리 얘기들을 했다. 민족, 민주의 차이가

    유초하 교수를 오히려 살려낸 것 같았다.

    유초하 교수 사건이 마무리 되가는데 정현백 교수를 또 잡아갔다. 독일에서

    무슨 활동을 해서 서너명의 교수를 잡아갔다고 아침 신문에 난 걸 보고 알았

    는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잡혀간 선생 중에 YS와 아침에 가

    끔 조깅하는 분이 계셨던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조깅친구가 끼어 있는 것을

    안기부가 잘 몰라서 잘못 건드린 사건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하여간에 성명서

    작업으로 다시 북적거렸고 안기부 규탄 공청회도 열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

    가 방어한 이들 일련의 사건들이 ‘신공안 세력’ 작품이라고 하였다. YS 정권

    이 출범하면서 민주화를 두려워한 공안세력이 똘똘 뭉쳐서 민주세력을 공격

    한 것으로 우리들끼리 대강 판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나중에 돌아다는

    얘기로는 공안세력이 교수들이 이렇게 센 줄 모르고 교수를 공격했다고도 했

  • 4. 사회활동과 나

    25

    다. 하여간에 똘똘 뭉쳐서 싸웠고 다른 시민단체들도 교수들이 앞에서 방어해

    줘서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민교협을 방문해서 우리를 격려해 준 인권단체, 교육단체, 사회단체, 식당

    아줌마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그 옛날 ‘우리 함께’ 했던 민교협의

    의리의 교수님들께 모두 고마움을 전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도와 준

    언론의 강한 힘에도 박수를 보낸다. 내 개인적으로는 민교협은 세상의 참모습

    을 들여다보고 배울 수 있게 한 고마운 존재였다. 배움의 근저에 민교협이 있

    었고 실천의 힘으로 민교협이 있었다. 이데올로기, 권력, 국가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한 민교협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민교협과 나’라는 에세이에 간단

    히 써 놓기도 하였다.

    90년대: 환경운동과 갯벌, 새만금 투쟁

    환경운동 활동도 약간은 복잡한데 그래도 줄거리를 잡자면 ‘모름에서 시작

    한 앎의 과정’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80년대 말에 동대문 근처에 사무실을

    가진 공해추방운동을 그냥 감각적으로 방문했는데 마침 안병옥이가 활동한다

    고 해서 만나볼 겸 들렸었다. 공해추방운동이 광화문으로 이사하면서는 환경

    운동연합인가 환경연합인가를 놓고 이름 싸움도 벌렸었는데 그런 식으로 활

    동하는 중에 ‘시민환경연구소’를 만든다고 나보고 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막상 소장 일을 시작했는데 언론에는 보도가 되고 실제 일은 잘 돌아가지를

    않는,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그런 어정쩡한 세월을 보

    냈다. 실무자와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지만 일 체계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느슨한 실무진 정서와 나는 잘 안 맞아서 결국 일을 잘 하지도 못하고 임기를

    채우고 말았다.

    새만금에 간 것은 87년이다. 나의 최초 새만금 조사보고서는 지금도 애지

    중지 가지고 있다. 처음 간 그 갯벌에서 광활하게 펼쳐지던 그 광경에 놀라던

    그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 후에 우리나라에 아주 특별한 갯벌이 있다

  • 나의 학문과 인생

    26

    는 것을 잡지, 언론에 알리면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갯벌운동에 기폭제 역할

    을 한 것은 장덕수 피디가 만든 문화방송의 ‘갯벌은 살아있다’였다. 그 필름을

    본 감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90년대 초에는 갯벌연구회를 만들기

    도 했는데 언론에서 갯벌취재를 하려면 의레 나에게 문의하고 동행을 요청했

    다. 에스비에스 등 다른 방송에서도 갯벌 다큐멘터리는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

    는 상황까지 되었다. 새만금이 가장 중요한 대중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2천년

    대 들어서인데 그때 케이비에스가 네델란드 등을 방문하면서 만든 다큐멘터

    리가 장덕수 피디에 버금가도록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방조제가 거의 막힌

    황량한, 오염으로 이미 찌들어 녹조가 낀 새만금에서 케이비에스 피디와 인터

    뷰하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90년대 중반의 갯벌연구회는 전문가를 많이 끌어들였는데 갯벌의 중요성

    을 학술적으로 잘 알려서 정책적으로 갯벌을 보호하는 식을 바랬기 때문이었

    다. 나의 갯벌운동의 실제 시작은 영산강 4단계 사업이었던 것 같다. 영산강

    방조제뿐만이 아니라 그 남쪽 해남지방의 갯벌까지 모두 막혔는데 자동차를

    타고 한바퀴 돌아보면서는 좁은 병목을 막고 넓은 갯벌을 얻는, 그래서 갯벌

    막음의 경비를 최소화한 인간의 착상이 무척 협오스러웠다. 그렇게 좁은 병목

    의 안쪽 갯벌은 모두 산란장, 보육장인 것은 누가 보아도 뻔 한 이치이다. 농

    사를 짓는다고 막았지만 지금은 그냥 형식적으로 농사짓는 나대지로 남아 있

    다. 함평만 전체를 막는 영산강 IV단계가 환경영향평가 등을 진행하던 그 당

    시에 여러 번 목포에 갔다. 공청회에서 농림부가 동원한 전문가들과 한바탕

    싸우러 간 것이다. 그 당시에 위의환씨, 서한태 박사님 모두 공청회에서 목소

    리 높혀 상대와 싸웠다. 서 박사님은 뒤쪽에 앉아 냅다 소리 지르며 분위기를

    돋구었고 위의환은 책상을 쳤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인데 아침에 와서도 편

    익분석표를 고치며 갯벌막이가 이익이라고 거품을 뿜었는데 어느 교회의 장

    로라고 하면서 자기는 양심적으로 계산했으니 자기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

    다. 위의환과는 친해져서 장흥환경운동연합 창립식에 초대받아 가서 강연도

    했고 또 위의환 형의 복숭아밭에 가서 잠도 같이 잤다.

  • 4. 사회활동과 나

    27

    나의 새만금 반대활동의 후반부는 ‘새만금 생명학회’ 창립으로 모아졌다고

    도 볼 수 있다. 새만금 문제가 자꾸 시들어가니까 어떻게든 이슈로 만들고자

    90년대 후반에 창립했는데 언론에서는 크게 반응이 없었지만 이시재, 조승헌,

    켈러만 박사 등 여러 선생님들이 도와주었다. 새만금 방문 프로그람도 만들고

    또 켈러만 박사와도 잘 연결해서 체계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조계

    사에서 창립식을 가졌는데 백락청, 안병직 선생님이 와서 격려해 주었다. 그

    때 내 처가 아침에 써서 내게 건네 준 창립선언문을 창립식에서 읽었다. 수경

    스님은 그때 이미 적극적이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전에 실상사를 방문

    해서 수경스님과도 오래 얘기를 나누었다. 문 신부님은 새만금 운동에는 나중

    에 결합한 분이다. 새만금 운동에 얽힌 얘기는 지금 생태지평의 장지영씨가

    모두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장지영씨가 새로운 단체로 연구 중심

    의 시민운동 단체를 만든다고 하면서 나 보고 함께 해달라고 얘기하기에 그러

    마고 끌려간 것이 지금의 생태지평이다. 생태지평의 공동이사장을 내가 지금

    맡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장지영과의 의리 때문이다.

    새만금 갯벌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 버스

    투어를 준비했었다. 참교육학부모회와 함께 한 투어에서는 조개 캐느라 사람

    들이 바쁘다는 생각을 했다. 주강현, 제종길, 이화여대의 내 처의 친구들까지

    모두 함께 가서 갯벌경험을 하며 고생했던 투어도 있었다. 이미경 국회의원과

    여성그룹이 함께 갈 때는 버스가 고장 나서 중간에 몇 시간씩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또 잠자리를 대충 준비해서 하꼬방에서 밤새 모기에 뜯겼다.

    모두 모두 고생했는데 그 이유가 내가 그런 식의 투어를 어떻게 조직하는지

    몰라서였다. 나는 다른 사람 잠자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빨리 갯벌에 나가

    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여성연합에서 준비한 투어에서는 사람들이 갯벌을 이

    렇게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모두 좋아서 뛰어다니느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임옥상 화백이 현장예술 한다고 손학규 의원까지 모시고 왔는데 내가 잘 모르

    는 예술이 어떻게 현장과 만나는지를 관찰했다.

    새만금 반대투쟁에서 알게 된 것은 관료들은 막무가내라는 것이었다. 새만

  • 나의 학문과 인생

    28

    금을 막아서 쌀을 생산하는데 쌀값 이외에 안보미 값까지 계산해서 편익에

    넣어야 한다는 식이다. 내가 보기에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주장인데 농림부 공

    무원은 모두가 이를 근거로 새만금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국가를 지키는 공

    무원이 쌀값에 안보미를 더한 편익을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

    다. 정치인은 더 막무가내였다. 전라북도 도지사들은 모두가 새만금이 전북을

    잘 살게 해 준다고 하면서, 그래서 자기는 새만금도지사라라고 하면서 표를

    긁어모으는 걸 보면서 도대체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

    통령 선거에서도 새만금은 철저히 표를 긁어모으는, 개인의 도구였다. 새만금

    이 시작된 노태우 때부터 김영삼, 김대중, 또 새만금 물막이가 완성된 노무현

    정부 때까지 새만금의 권력정치는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새만금을 막으면 이

    득이 온다고 하면서 뒤로는 개인 권력을 움켜쥐는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민교협이 권력, 공안세력과의 싸움이었다면 새만금은 전문가, 기술관료, 정치

    인과의 싸움이었다. 사실 나는 순해서 싸움을 잘 못하는데 하여간에 자꾸 싸

    움에 말려들었다.

    2천년대: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관료사회 경험

    연구부분에서 잠시 써 놓았지만 디스크 수술 후에 일본에 체류하면서 그래

    도 꽤 회복을 해서 돌아 온 것이 2003년 초 일 것이다. 일본에 있으면서 단체

    들이 나를 방문하면 의레 이사하야 간척지를 보여 주었는데 2천년대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새만금이 여전히 문제였기 때문이다. 새만금 마지막 물막이

    를 언제 하느냐로 신경이 곤두 선 때였고 케이비에스에서도 자세한 다큐멘터

    리를 만들어 방영했다. 그러던 차에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일을 보지 않겠느냐

    는 의사타진이 와서 몇몇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그 일을 맡겠다고 했다.

    운동단체에서는 벽돌을 빼가는 식이라고도 했지만 참여정부이니 해 볼만하다

    고 생각했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일은 한마디로 관료와의 투쟁이라는 느낌이다. 관료와

  • 4. 사회활동과 나

    29

    일하면서 나는 그냥 순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철저히 이익이 내재된, 숨

    기고 드러내며 조절하는 그 기술에 당황한 적도 여러 번이다.

    처음 출근한 곳은 여러 부처에서 파견 나왔다는 대강 15명 정도의 직원이

    자리한 사무실이었다. 잠깐 둘러 본 첫 인상은 컴퓨터로 신문을 보는 사람들

    같았다. 유학가기 위해서 어학공부하려고 온 사람, 몸이 불편해서 쉬러 온 사

    람, 일을 귀찮아해서 쫓겨 온 사람, 얌체 짓으로 미움 받아서 밀려 온 사람

    등 여기에 온 사연도 서로 다른 것 같았다.

    첫 대통령보고는 에너지문제였는데 그때 성실하고 착한 유성씨가 고생했

    다. 공무원들이 자료 주기를 꺼리므로 문제의 본질을 아는데 꽤 시간이 걸렸

    다. 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대통령이 정책보고를 받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가

    처음이라고 했다. 사회단체에서 추천해 근무하는 직원들도 정책보고서를 만

    들어야 했다. 대통령 보고서이므로 나는 끝까지 챙겼다.

    늘 부딪히는 어려움은 대통령보고 사항이 부처이익에 반할 수 있다는 생각

    에서 온 부처파견 공무원의 비협조였다. 대통령은 각 부처의 이익을 넘어서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전체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 하나 부처는

    자기 권한을 절대 놓지 않으려 했다. 물 문제를 우리가 다루었는데 질이 좋은

    물을 담보하려는 환경부와 충분한 물을 공급하려는 건교부의 의견을 조율하

    기가 매우 힘들었다. 일종의 부처 간 정책통합인데 이런 정책통합은 행정학

    책에는 있겠지만 행정현실에서는 어려운 얘기였다. 인력, 권력, 예산을 양자

    중 한명은 양보해야 하는 조건이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했다. 위원장은

    직원의 인사권, 예산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인격으로 품어 안아야 한다

    던데 그 인격은 그냥 폼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익, 손해의 정교한

    대차대조표에 따라 움직였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일해야 했고, 관료들과 일

    해야 했고, 청와대와 일해야 했었다. 지속가능발전이란 경제, 사회, 환경의 통

    합이라고 책에 써 있는데 정책, 법률, 계획의 통합이 쉽지 않았다. 나는 통섭

    이라는 말도 그냥 책에 있는 말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학문은 분야별 지식

  • 나의 학문과 인생

    30

    이 넘나들 수 없게 깊어서, 인간은 이익의 벽이 너무 높아서, 행정은 권한의

    벽이 너무 두꺼워서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졌다. 인간세계가 아닌 학문세계는

    그래도 통합이 될 성 싶기도 한데, 어떤 학문분야의 책들은 (물론 나는 잘 모

    르지만) 잠시 스쳐보면서 이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지식 위의 지

    식을 펼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기능적, 도구적 지식을 가지고 있

    다고 생각했다. 지식이라기보다는 삶의 수단으로서의 기술정보이다. 지식 위

    의 지식은 천재성을 전제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통합

    하겠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학자들도 몇 있는데 천재는 아닐 것이고 보통의

    지식을 조합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만든 도구적 지식, 또는 정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을 파고드는 정보이다.

    갈등이라는 의제로 통합에 접근해 본 적도 있다. 갈등에서는 이해당사자간

    의 윈윈, 또는 상생이 통합일 것이다. 요즘 통합진보, 통합민주, 다시 통합연

    대 등으로 정치가 시끄럽다. 통합은 보통 대차대조표를 두고 덧셈 뺄셈을 하

    면서 만들어지는 이해당사자간 이익의 기계적 분배이다. 여기서 1+1은 3이

    되려면 가치가 가미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치를 가미하려면 당사자가 감각적

    으로라도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위원회에서 다룰 수

    있었던 갈등사안은 여러 가지였다. 한탄강댐, 사패터널, 천성산 등이 모두 환

    경관련 갈등이었다. 이 중에서 한탄강댐을 위원회에서 다루었는데 과학, 이해

    당사자, 관련부처 등의 구성원간 논의과정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해보자

    는 입장에서 다루었다. 결론에 앞서 논의과정을 중시하는 원칙이었다. 합리적

    사고를 전제로 한 과정설계라고 나는 생각했다.

    갈등해결 구조를 만들고 투명성, 형평성 등의 원칙을 서로 합의해가면서 문

    제에 접근했는데 1차 결론에 이르고 최종결론에서 실패했다. 가치문제까지는

    염두에 둘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미 이해당사자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조정하

    는 팀 자체를 이해당사자들이 불신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다.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 싶었다. 통합, 통섭의 길이 어려움을 보여준 사례였다.

    내가 경험한 관료의 권력은 공공성, 양심 등의 막연한 개념으로 무장한 개

  • 4. 사회활동과 나

    31

    인이라기보다 승진, 이익, 조직방어의 개인으로서 엮은 그물망 같았다. 책임

    은 그물망을 따라 실오라기 끝자락까지 분산되었다. 무엇을 지시하면 그 사항

    을 바가지에 물로 담아서 모래에 쏟아버리는 듯 했다. 물은 모래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 형체를 남기지 않았다. 책임자에게 그 형체를 물으면 다시 그물

    망 실오라기가 엉기성기 얽혀서 올라왔다. 나는 자정을 넘기며 일한 적이 많

    았다. 바보같이 일한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누군가는 대통령께 흡족한 ‘내용’

    을, ‘형체’를 만들어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발전은 이삼십년은 기다

    려야 하는, 이론과 현실의 격차가 큰, 그 괴리를 관료와 전문가 모두가 넘어서

    지 못하는, 관료의 이익과 갈등으로 뒤엉킨, 쓰디 쓴 한약 같았다. 그 쓴 약은

    내 몸속에 녹아들어와 세상을 더 넓게 보게 했다.

    2천년대: 유럽 와덴해갯벌 자연보전 전통의 도입

    국토부에서 갯벌보전의 선진적 전략을 도입하고자 유럽의 와덴해와 업무협

    약을 맺은 지 벌써 3년이 된다. 나는 와덴해와 우리가 인력, 재정, 역사, 전통

    이 다르므로 협약을 맺으면서 교류하는 것은 서로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생각

    해서 처음에는 적극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기관에서 그 쪽과 덜커덩 협

    약 이야기를 꺼냈고 수습은 안되서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 안타까워서

    돕기 시작했다. 축적된 정보의 차이가 워낙 커서 불균형 협약이 될 수도 있는

    데 괜찮은지 물었더니 괜찮다고 해서 협약 일을 도왔다. 와덴해 심포지움에

    참가해서 협약도 맺고 기자회견도 하고 또 초청강연자로 우리나라 갯벌을 소

    개해서 한국과 와덴해가 협약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향하고자 함을 알렸다.

    협정문의 서문은 내가 과거에 독일과 가졌던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2000

    년 네덜란드의 그로닝엔에서 개최한 와덴해 심포지움에 초대 받아서 강연했

    는데 사람들이 좋아 했고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서 와덴

    해 전문가가 공동노력 한다고 권고문에 조항을 넣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있었던 나와 와덴해 교환 기록들을 더 참고해서 서문을 만들고 공동협력의

  • 나의 학문과 인생

    32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협약을 완료한 것이 빌헬름스하펜, 2009년 봄이었을

    것이다.

    2008년 11월, 람사회의를 창원에서 개최했는데 나는 그때 국제심포지움을

    준비했다. 와덴해 사무국, 영국의 Birdlife International, 호주의 Wetland

    International 등, 국제단체들에 편지를 해서 심포지움에서 발표해 달라고 했

    는데 모두 열심히 해 주었다. 각 단체들이 자기의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점들

    을 요약해 주었다. 전체 결과를 책자를 만들어 출판하려 했는데 원고를 일부

    밖에 받지를 못해서 심포지움 결과가 책으로 발간되지는 않았다.

    창원 람사회의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심포지움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더 이상 대형 간척사업을 하지 않게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람사협약 협

    정문 부속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포지움이 끝나고 다른 국제단체

    들에게 우리나라의 대규모 간척상황을 다시 한번 알리고 이런 간척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도록 국제협약에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나는 제안했다. 모두

    들 이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다들 괜찮다고 해서, 물론 이들 단체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엉뚱한 대형 간척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문서 작업을 별도의

    워크숍을 통해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유럽, 호주 등의 국가대표들과 로

    비를 해서 람사 결정문에 부속서를 넣을 수 있었다. 약 2쪽의 문건인데 내가

    주도한 중요한 문건이다.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 간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

    고 표명하도록 만든 문건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협정문은 지금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인천, 강화, 아산,

    가로림 등 약 4만헥타르를 방조제로 둘러쌓을 예정이므로 국제관례로는 이해

    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람사협약이 FTA와는 다르게 강제협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국제관례에서 벗어나는 국내행정에 분노할 수 밖에 없

    다. 2011년에는 인천만조력 반대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도 활동했는데

    신재생에너지 촉진을 위한 이상한 법률 때문에, 하여간에 너무 이상하게 경기

    만에서 드디어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무식한 일이다.

    나는 우연히도 일찍이, 대략 90년대 중반 쯤 부터 와덴해와 수십 차례의

  • 4. 사회활동과 나

    33

    상호교류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 경험에서 알게 된 유럽 와덴해 갯벌의 핵심

    은 ‘갯벌의 자연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전한다’는 선도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이 선도원칙은 와덴해3개국 와덴해보호 협약 이후에 만들어졌다. 3개국 협약

    이라고 하지만 형식은 그냥 공동성명 1982(1982 Joint Declaration)이다.

    90년대 중반 쯤인데 내가 공부했던 키일 대학 해양연구소에 약 한달 머무

    를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북해의 와덴해 국립공원을 방문하고 싶다고 옛날 스

    쿠바 친구 루모 박사에게 말했더니 나를 슐레스비히 갯벌국립공원의 누군가

    에게 소개해 주었다. 약 100킬로를 서쪽으로 달려서 막상 그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옛날 학교친구 켈러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갯벌과의 교류가 시작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