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冊封)이나 책례(冊禮),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선대(先代 ... · 2013-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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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 장서각의 의궤와 기록유산적 가치 70 글.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장서각의 의궤와 기록유산적 가치 1. 의궤 그리고 장서각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고, 의궤는 그 기록의 대표적 사례이다. 성리학에 기반하여 예치(禮治)를 추구했던 조선의 국가운영에서 의례는 단순히 행사의 개념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 가 강하였다. 따라서 그 의례의 기록인 의궤는 조선의 국가와 왕실의 운영과 문화를 이해하는 주요한 자료 가 된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책이다. ‘의례(儀禮)의 궤범(軌範)’이란 의미로, 반복되는 비슷한 의례의 궤범 으로 제작되었다. 국가와 왕실의 의례에 대해서는 기본 적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책에 큰 골격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원론적인 『국조오례의』로는 의 례를 구체적으로 설행하기에 한계가 따른다. 이에 이 미 설행되었던 의례의 모든 것을 의궤라는 기록으로 남 기고, 이를 통하여 왕실의 혼사·장례·부묘( 廟)·잔 치·건축·편찬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 여 유사한 행사가 있을 시에 참고하도록 한 것이다. 의궤는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 책 또는 9책에 이르는 분량을 활자로 인쇄하여 널리 보 급한 것도 있다. 각 책의 제목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 監儀軌)’와 같이 해당 의례를 주관한 임시 관서인 ‘도감 (都監)’의 명칭에 ‘의궤(儀軌)’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 반적이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부터 의궤가 제작되었으 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의궤로는 1601년 (선조 34)에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대 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시기가 내려올수록 종류 도 많아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졌다. 의궤가 작성되는 주요 행사로는 왕비나 세자 등의 책 봉(冊封)이나 책례(冊禮),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선대(先代)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의 마련에서 능원(陵園)의 조성 및 천장에 이르는 각종 상 장례(喪葬禮), 신주를 종묘(宗廟)에 모시는 부묘( 廟)를 비롯한 여러 제례(祭禮)가 있다. 그밖에 국왕이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궁궐 건물의 건설 및 보수, 공신 녹훈, 왕실 인장(印 章)이나 국왕 초상화의 제작 등에 편찬되었으며, 정조대에는 화성의 건설과 국왕의 행차에 대해서도 각기 장편의 의궤가 작성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있는 장서각은 서울대학교에 있는 규장각과 함께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의 전적을 관리하는 양대 서고였다. 조선 왕실의 서고는 1690년(숙종 20)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숙종이 직접 쓴 ‘규장각 (奎章閣)’ 현판을 달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숙종의 기획은 실 제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조가 즉위하며 창덕궁 금원(禁苑, 현재의 秘 苑)에 왕실서고를 짓고 숙종의 ‘규장각’ 현판을 걸면서 명실상부한 왕 실서고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며 규장각의 기능과 역할은 축소되었고 보관 되던 서적은 흩어져, 1895년(고종 32)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격하 되기도 하였다. 순종황제에게 양위한 고종황제는 황실의 권위를 회복 하기 위해 궁궐 내에 흩어져 있던 전적을 다시 모으기 시작하였다. 홍 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 등에 소장된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 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 등 총 10만 여 책을 모아 제실도서(帝室圖 書)로 명명하고 목록을 만들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 대한황실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이왕직(李王職)이었다. 이왕직에서는 1915년 12월 창 덕궁 명정전(明政殿) 뒤쪽에 4층의 근대식 서고를 지어 전적을 옮기 고, 1918년 2월 27일 ‘장서각(藏書閣)’이란 현판을 걸었다.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 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 이에 3차에 걸쳐 14만 여 책이 이관되었다. 현재 장서각 자료는 당시 남 아 있던 자료에 그 이후 수집된 자료가 모여 다시 조성된 것이다. 장서각 자료와 규장각 자료는 각 자료들의 원 소장처에서 기인하는 차이가 중요하다.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규장각 자료는 규장원, 홍문관, 집옥재, 춘방 등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어 완 정(完定)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문화재관리 국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된 장서각 자료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지 않 은 적상산사고자료, 군영자료 등에 낙선재, 칠궁(七宮), 봉모당(奉謨堂), 보각(譜閣), 종묘와 각 능재실(陵 齋室) 등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가 모여 이루어졌다. 이 중 역 대 국왕의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御畵) 등 봉모 당의 전모자료와 보각의 왕실 보첩류는 기록문화의 정 수로서 특히 중요하다. 2. 장서각 소장 의궤의 현황 현재 남아있는 조선왕조의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584종 약 2,95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341 종 503책, 국립문화재연구소에 14종 15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약탈된 외규장각(外奎章 閣) 소장 의궤가 유일본 30책을 포함하여 191종 297책 이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영구반환의 형 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이외에도 일본·미국· 카자흐스탄 등 해외와 국내 도서관 및 지방자치단체에 일부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이로 보면 의궤의 대다수 A rchives 71 기록인 2013 AUTUMN + Vol.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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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 이슈와 현장 | 장서각의 의궤와 기록유산적 가치70 70

    글.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장서각의 의궤와 기록유산적 가치

    1. 의궤 그리고 장서각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고, 의궤는 그 기록의 대표적

    사례이다. 성리학에 기반하여 예치(禮治)를 추구했던

    조선의 국가운영에서 의례는 단순히 행사의 개념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

    가 강하였다. 따라서 그 의례의 기록인 의궤는 조선의

    국가와 왕실의 운영과 문화를 이해하는 주요한 자료

    가 된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책이다. ‘의례(儀禮)의

    궤범(軌範)’이란 의미로, 반복되는 비슷한 의례의 궤범

    으로 제작되었다. 국가와 왕실의 의례에 대해서는 기본

    적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책에 큰 골격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원론적인 『국조오례의』로는 의

    례를 구체적으로 설행하기에 한계가 따른다. 이에 이

    미 설행되었던 의례의 모든 것을 의궤라는 기록으로 남

    기고, 이를 통하여 왕실의 혼사·장례·부묘(祔廟)·잔

    치·건축·편찬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

    여 유사한 행사가 있을 시에 참고하도록 한 것이다.

    의궤는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

    책 또는 9책에 이르는 분량을 활자로 인쇄하여 널리 보

    급한 것도 있다. 각 책의 제목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

    監儀軌)’와 같이 해당 의례를 주관한 임시 관서인 ‘도감

    (都監)’의 명칭에 ‘의궤(儀軌)’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

    반적이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부터 의궤가 제작되었으

    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의궤로는 1601년

    (선조 34)에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대

    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시기가 내려올수록 종류

    도 많아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졌다.

    의궤가 작성되는 주요 행사로는 왕비나 세자 등의 책

    봉(冊封)이나 책례(冊禮),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선대(先代)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의 마련에서 능원(陵園)의 조성 및 천장에 이르는 각종 상

    장례(喪葬禮), 신주를 종묘(宗廟)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비롯한 여러

    제례(祭禮)가 있다. 그밖에 국왕이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궁궐 건물의 건설 및 보수, 공신 녹훈, 왕실 인장(印

    章)이나 국왕 초상화의 제작 등에 편찬되었으며, 정조대에는 화성의

    건설과 국왕의 행차에 대해서도 각기 장편의 의궤가 작성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있는 장서각은 서울대학교에 있는 규장각과

    함께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의 전적을 관리하는 양대 서고였다. 조선

    왕실의 서고는 1690년(숙종 20)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숙종이 직접 쓴 ‘규장각

    (奎章閣)’ 현판을 달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숙종의 기획은 실

    제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조가 즉위하며 창덕궁 금원(禁苑, 현재의 秘

    苑)에 왕실서고를 짓고 숙종의 ‘규장각’ 현판을 걸면서 명실상부한 왕

    실서고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며 규장각의 기능과 역할은 축소되었고 보관

    되던 서적은 흩어져, 1895년(고종 32)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격하

    되기도 하였다. 순종황제에게 양위한 고종황제는 황실의 권위를 회복

    하기 위해 궁궐 내에 흩어져 있던 전적을 다시 모으기 시작하였다. 홍

    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 등에 소장된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

    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 등 총 10만 여 책을 모아 제실도서(帝室圖

    書)로 명명하고 목록을 만들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 대한황실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이왕직(李王職)이었다. 이왕직에서는 1915년 12월 창

    덕궁 명정전(明政殿) 뒤쪽에 4층의 근대식 서고를 지어 전적을 옮기

    고, 1918년 2월 27일 ‘장서각(藏書閣)’이란 현판을 걸었다.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

    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

    이에 3차에 걸쳐 14만 여 책이 이관되었다. 현재 장서각 자료는 당시 남

    아 있던 자료에 그 이후 수집된 자료가 모여 다시 조성된 것이다.

    장서각 자료와 규장각 자료는 각 자료들의 원 소장처에서 기인하는

    차이가 중요하다.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규장각 자료는 규장원,

    홍문관, 집옥재, 춘방 등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어 완

    정(完定)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문화재관리

    국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된 장서각 자료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지 않

    은 적상산사고자료, 군영자료 등에 낙선재, 칠궁(七宮),

    봉모당(奉謨堂), 보각(譜閣), 종묘와 각 능재실(陵 齋室)

    등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가 모여 이루어졌다. 이 중 역

    대 국왕의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御畵) 등 봉모

    당의 전모자료와 보각의 왕실 보첩류는 기록문화의 정

    수로서 특히 중요하다.

    2. 장서각 소장 의궤의 현황

    현재 남아있는 조선왕조의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584종 약 2,95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341

    종 503책, 국립문화재연구소에 14종 15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약탈된 외규장각(外奎章

    閣) 소장 의궤가 유일본 30책을 포함하여 191종 297책

    이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영구반환의 형

    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이외에도 일본·미국·

    카자흐스탄 등 해외와 국내 도서관 및 지방자치단체에

    일부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이로 보면 의궤의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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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기록인 2013 AUTUMN + Vol.24

  • 72 이슈와 현장 72 72

    는 규장각과 장서각에서 관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서각 소장 의궤는 341종 566책으로 63책이 결책되어 남아 있는

    의궤는 503책이다. 이 자료들은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종묘서(宗

    廟署), 사직서(社稷署), 선원전(璿源殿), 예조(禮曹) 등에 분상되어

    있던 것으로, 장서각으로 이관되면서 축적된 것이다.

    이 중 유일본 의궤는 모두 39종 56책으로 고본 의궤를 동일본으

    로 파악하면 31종 43책이다. 여기에는 의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고본(稿本) 의궤 8종 13책이 포함되어 있다. 고본 의궤를

    제외하면 31종 43책이 유일본이다. 13종은 대한제국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제작한 것으로, 장서각 소장 의궤 중 조선시대 제작한 의

    궤는 26종이다.

    또한 어람용 의궤는 25종 39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 대다수는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것으로, 제작 건수도 1~2건 이내로 축소되어

    이왕직에 보관했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의 어람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제작한 의궤 중 어람용 의궤와 유사한 장황(粧潢)

    을 보인다.

    이 중 의궤와 관련된 원소장처별 이관 사정은 약간씩 차이가 있

    다. 현재 장서각의 의궤는 조선시대 4사고의 하나인 무주 적상산사

    고,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 등 전모자료를 보관하던 봉모당, 종묘,

    사직서, 임금의 어진을 봉안했던 선원전과 영희전, 왕실에서 사용하

    던 관곽(棺槨)을 제작하던 장생전, 사당인 경모궁과 경우궁, 경기감

    영, 동궁, 예조 등에 보관되었던 것들이다.

    이 중 192종으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것이 무주 적상산사

    고의 의궤로, 1911년 4사고를 폐지하면서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사고의 자료를 총독부 소유로 하였다가 이왕직

    이 반환을 요청하자 기증형식으로 돌려주었다. 이런 사정을 보여주

    는 것이 현재 적상산사고본 의궤에 공통적으로 찍혀있는 ‘무주적상

    산사고소장조선총독부기증본(茂州赤裳山史庫所藏朝鮮總督府寄贈

    本)’이라는 위 아래로 긴 네모난 인장이다.

    또 하나 장서각 의궤 중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16종의 봉모

    당 의궤이다. 이 의궤에는 ‘봉모당인(奉謨堂印)’이 찍혀 있는데, 애초

    봉모당은 의궤를 봉안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제

    작된 의궤가 봉모당에 봉안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 장서각 소장 의궤의 기록유산적 가치

    장서각 소장 의궤는 몇 가지 점에서 기록유산으로서 가

    치를 지닌다.

    첫째, 조선시대 의궤의 장황(粧潢)을 살필 수 있다. 대부

    분의 적상산사고 의궤가 일제강점기에 개장(改粧)되었지

    만, 종묘서, 예조 등에 분상되었던 의궤는 원래 표장을 유

    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의궤의 원래 표장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궤의 가치는 의례의 과정을 정리한 내용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장황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단이나 종이로 서책이나 문서를 꾸미는 장황

    은 당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근거가 된

    다. 또한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당 자료에 대해 어

    떤 마음을 가졌으며 또 서책의 장정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

    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대부분 본래의

    장황이 훼손되어 조선왕실의 의궤는 원래의 장황을 보여

    주는 것이 드물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의궤는 거의

    대부분 개장한 것으로, 철장본의 경우 변철과 국화동, 박

    을정 등이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장되었다는 조사결과

    가 있었다. 장서각 소장 의궤 역시 개장한 것이 대부분이

    지만 원래의 장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일부 남아 있다.

    장서각 소장 의궤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적상산사고본

    의궤는 분상용 의궤로, 대부분 일제강점기인 1918년과

    1919년에 걸쳐 개장하였다. 의궤는 임금에게 올리는 어람

    용과 관리나 사고에 보관하는 분상용으로 나누어 제작하

    는 데, 동일한 내용을 수록하였다고 하더라도 장황에 있어

    서는 큰 차이가 있다. 원래 분상용 의궤의 장황은 어람용

    의궤와 달리 삼베로 표지를 만들고, 별도의 제첨 없이 표

    지에 직접 제목을 썼다. 또한 의궤는 크기와 분량 때문에

    책을 고정하기 위해 실로 묶는 대신 그 자리에 변철을 대

    고 못[박을정]으로 고정하였다. 이때 변철을 어람용은 문

    양을 새긴 주석으로 제작하지만 분상용은 문양이 없는 무

    쇠를 사용하였다. 사용하는 못도 어람용 5개, 분상용 3개

    01 분상용 의궤 중 원 표지(좌)와 개장한 표지(우)

    02 불에 탄 흔적

    로 차이가 있다. 특히 어람용에는 변철과 못 사이에 국화동이라는 장식

    을 덧대었다. 현재 적상산사고 의궤는 일관되게 붉은 색 종이로 표지

    [朱紙衣]로 개장하고, 변철과 박을정을 제거하였으며, 뒤표지 안쪽 면

    에 개수(改修) 일자를 찍어놓았다.

    그림 01은 [순조·익종]부묘도감의궤([純祖翼宗]祔廟都監儀軌)이

    다. 왼쪽 자료는 종묘서에 분상된 원래의 표장이며, 오른쪽 자료는 적

    상산사고에 분상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개장한 표장이다. 다른 의궤

    에서 확인되듯 적상산사고에 분상된 의궤 역시 왼쪽 표장과 동일한 형

    식을 지녔다.

    종묘서와 사직서의 의궤 역시 개장한 것과 원래의 표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섞여있다. 원래의 표장은 베로 표지를 만들고, 앞뒤로 변철

    을 댄 뒤 박을정으로 고정한 형식적 특징을 띠고 있다. 그러나 종묘서

    의궤 중 훼손이 심한 것은 문화재관리국에서 1960년대 초 개장을 하였

    다. 주로 좀벌레로 인해 구멍이 많이 생긴 것, 화재로 인해 그을리고 탄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훼손된 책장은 배접을 하고 황색의 두꺼운 현

    대 종이로 표지를 다시 하였다. 사직서 의궤 역시 종묘서 의궤와 동일

    하게 개장을 하였다. 이외에 선원전과 예조의 의궤가 일부 소장되어 있

    는데, 원래 분상용 의궤의 장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적상산사고 의궤 중 개장한 것에서 불에 그슬리거나 탄 흔적이 모두

    21종의 자료에서 나타난다. 위치는 당초 변철을 없애고 선장(線裝)하

    며 끈으로 묶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정을 알려주는 기

    록이 없어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화재로 인해 직접적으로 훼손된

    것은 아닌 듯하다. 책등이나 박을정이 있었던 자리에 집중적으로 나타

    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개장할 때 박을정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

    해 박을정을 불에 달구어 빼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된다.

    그림 02의 왼쪽 자료는 불에 탄 흔적이 모두 세 곳이며, 오른쪽 자료

    는 다섯 곳이다. 그 위치는 일반적인 분상용에서 나타나는 3개의 박을

    정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다섯 곳에 흔적이 있는 오른쪽 자료는 어람

    용의 5개 박을정 위치와 일치한다. 박을정의 위치에 큰 차이가 없음을

    감안하면 개장하면서 박을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흔적임이

    분명하다.

    원래 분상용 의궤의 장황은

    어람용 의궤와 달리 삼베로

    표지를 만들고, 별도의 제첨 없이

    표지에 직접 제목을 썼다.

    또한 의궤는 크기와 분량 때문에

    책을 고정하기 위해 실로 묶는 대신

    그 자리에 변철을 대고 못[박을정]으로

    고정하였다.

    73 기록인 2013 AUTUMN + Vol.24

  • 74 이슈와 현장 74 74

    둘째, 장서각에는 최종 단계의 의궤를 제작하기에 앞서 만든 고본 의궤 11종 21책이 소

    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의궤로, 최종 단계의 의궤를 제작하기 위해 미리 작성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본 의궤는 의궤의 제작 과정과 일제강점기 의궤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두 본을 서로 비교하면 내용에 있어서 차이는 없다. 다만 고본 의궤는 크기가 완성된 의궤

    에 비해 확연히 작게 제작하였고, 기명(器皿)의 경우 명칭만 적고 ‘도(圖)’ 또는 ‘유도(有圖)’라

    는 부전지를 붙여놓았다. 반차도 역시 행렬 그림은 없고 해당하는 자리에 그 내용을 글로 적

    어놓았다. 명칭 역시 가 아니라 로 표시하였다. 책지

    는 미농지(美濃紙)로, 변란과 판심이 인쇄된 이왕직의 용지를 사용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궤가 어람용은 초주지(草注紙), 분상용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한 것과 크게 다르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의궤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시기별로는 1911년(순헌황귀비 엄씨

    의 사망), 1919년(고종의 승하), 1921년(고종의 부묘), 1926년(순종의 승하), 1928년(순종

    의 부묘)에 제작된 것들이다. 일제강점기 의궤의 제작은 이왕직이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조선시대 국장(國葬)과 도감(都監)이라는 용어가 어장(御葬)과 주감(主監)으로 바뀌어 격하

    된 왕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본 의궤는 조선시대 의궤와 일제강점기 의궤의 차

    이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03 고본 의궤와 최종 제작된 의궤

    셋째, 적상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의궤가 존재한다. 적상산사고 의궤 중

    일부에는 해당 의례에 따른 의궤의 제작부수와 분상처가 적혀 있다. 통상 의궤는 4

    건에서 9건을 제작하여 각 처에 분상한다. 일반적으로 강화부, 태백산, 오대산, 적

    상산의 4사고(四史庫)라고 해서 모든 의궤를 봉안했던 것은 아니다. 의궤에 따라서

    는 일부 사고에만 봉안했던 것들이 나타난다.

    그림 04는 『선원보략수정전라도무주적상산봉안의궤(璿源譜略修正全羅道茂朱赤

    裳山奉安儀軌)』이다. 1757년 2월 15일 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였고, 3

    월 26일에는 대왕대비이자 영조의 모후인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승하하였다. 이에 따

    라 1758년(영조 34)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을 수정하며 제작한 것인데, 내

    제에 오직 무주 적상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규장각에 소장된 관련 의궤와 비교하면,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먼저

    봉안처를 내제에 명기하여 제작한 점이다.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규장각의 의궤에

    는 본청의궤(本廳儀軌/奎14065), 강화봉안의궤(江華奉安儀軌/奎14064)로 되어 있

    다. 곧 는 수정청에, 는 강화도사고에, 장서각 소장본은 적상

    산사고에 분상하기 위해 제작하였음을 명기한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분량과 기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는 반

    차도가 18면임에 비해 는 12면이고, 장서각 소장본은 반차도가 없다. 이

    의궤들은 낙장(落張)된 자료가 아닌 온전한 자료임을 감안하면 반차도의 유무와 장

    수의 차이는 이 의궤들의 제작 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기술방식

    역시 세 본이 각각 확연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일부분의 기술 순서를 바꾸거나 내용

    을 축약한 것이 아니라 전혀 별개의 자료처럼 각각 기술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4. 앞으로의 문제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에 따라 이제 의궤라는 단어가 우리 국민들 사이에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의궤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에

    보관되었는지, 그 특징은 무엇인지 등 의궤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장서각에 소장된 의궤는 원래 장정의 원형을 보이고, 적상산사고 봉안용 의궤처

    럼 특정한 봉안처를 명기한 것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만든 고본 의궤를 포함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장서각에 소장된 의궤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의궤

    의 일부일 뿐이다.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문화를 알려주며 당시 출판문화를 대변하

    는 의궤는 지금 남아 있는 의궤들을 대상으로 정리하고 연구할 때 비로소 그 본모습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04 선원보략수정전라도무주적상산봉안의궤 (璿源譜略修正全羅道茂朱赤裳山奉安儀軌)

    필자 소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문학 전공으로 석·박

    사를 마치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

    고 있다. 그 동안 장서각에서 국가왕실문헌의 정리와 연구를

    담당하다가 지금은 백과사전편찬실장으로 『한국민족문화대

    백과사전』의 개정·증보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왕실문화총서

    인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공저, 돌베개) 등을 집필하였다.

    75 기록인 2013 AUTUMN + Vol.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