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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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5 9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한동대학교 T.H.Elema 석좌교수) . 머리말 지금으로부터 128(1884) 124일에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한국 근·현대사상 최초로 시도된 문신(文臣)주도의 유혈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애국 심에 불타는 일단(一團)반청(反淸) 민족주의 관료들이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이후 가중된 ()()조선 간섭정책에 반발하여 당시 집권하고 있던 민씨(閔氏) 척족정권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집권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함과 동시에─메이지(明治)유신(1868)이후의 일본을 본받아─구미(歐美) 지향의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조선을 아시아에서 일본과 대등한 문명국으로 발전 시킬 목적으로 단행한 거사였다. 그렇지만 쿠데타는 1961박정희 장군이 사시킨 군사 쿠데타와는 달리 쿠데타의 주인공들이 거사 성공에 필수요건인 자체 무력을 구비하지 못해 주한(駐韓) 일본공사관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했다가 일본 공사가 지원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거사 3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후의 한국 역사 전개에 심대한 역효과를 초래 했다. 청은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일층 강화하여 1894청일전쟁(淸日戰爭)발발할 때까지 9년간 조선을 청의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들면서 한국인의 독립·개화노력을 억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정부가 1880초부터 추진했던 개화·자강운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립·반()은둔국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요컨대, 갑신정변 이후 청이 조선에서 펼친 보호국화 정치는 1905-1945년간의 일제(日帝) 식민통치와 마찬가지로 한국 인의 자율적 근대화 운동을 좌절시킨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신정변을 한국 역사 발전에 아무런 긍정적 기여를 하지 , 말하자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해야 마땅한가? 1) 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발표자의 소견이다. 강의에서 발표자는 (1)갑신정변 주역들의 면모를 살펴보고, (2)그들이 추진했던 정변이 어떻게 발발했다가 실패했 는지를 개관한 다음, (3)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구상이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 는지를 점검함으로써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를─현재적 관점에서─재음미해 보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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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 주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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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유 영 익 (한동대학교 T.H.Elema 석좌교수)

    Ⅰ. 머리말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1884) 12월 4일에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한국

    근·현대사상 최초로 시도된 문신(文臣)주도의 유혈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는 애국

    심에 불타는 일단(一團)의 반청(反淸) 민족주의 관료들이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이후 가중된 청(淸)의 대(對)조선 간섭정책에 반발하여 그 당시 집권하고 있던 친

    청 민씨(閔氏) 척족정권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집권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

    보함과 동시에─메이지(明治)유신(1868)이후의 일본을 본받아─구미(歐美) 지향의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조선을 아시아에서 일본과 대등한 문명국으로 발전

    시킬 목적으로 단행한 거사였다. 그렇지만 이 쿠데타는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성

    사시킨 군사 쿠데타와는 달리 쿠데타의 주인공들이 거사 성공에 필수요건인 자체

    의 무력을 구비하지 못해 주한(駐韓) 일본공사관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했다가 일본

    공사가 지원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거사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그 후의 한국 역사 전개에 심대한 역효과를 초래

    했다. 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일층 더 강화하여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할 때까지 9년간 조선을 청의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만

    들면서 한국인의 독립·개화노력을 억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정부가 1880년

    대 초부터 추진했던 개화·자강운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반(半)독

    립·반(半)은둔국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요컨대, 갑신정변 이후 청이 조선에서

    펼친 보호국화 정치는 1905-1945년간의 일제(日帝) 식민통치와 마찬가지로 한국

    인의 자율적 근대화 운동을 좌절시킨 주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신정변을 한국 역사 발전에 아무런 긍정적 기여를 하지 못

    한, 말하자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해야 마땅한가?1) 반

    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발표자의 소견이다. 이 강의에서 발표자는 (1)갑신정변

    주역들의 면모를 살펴보고, (2)그들이 추진했던 정변이 어떻게 발발했다가 실패했

    는지를 개관한 다음, (3)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구상이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

    는지를 점검함으로써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를─현재적 관점에서─재음미해 보고

    자 한다.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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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갑신정변 주역들의 면모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1875년 전후에 형성된 ‘개화당(開化黨)’(일명: ‘독

    립당’)의 멤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핵심인물은 아래 에 보이는 김옥균, 박

    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다섯 사람이었다.

    갑신정변 주역(主役)들의 인적 상황

    이름 본관 부친의

    관직, 이름

    정변

    당시의

    나이

    (만)

    과거 문과

    등과 년도

    외유 경험

    (자격)

    1884년

    관직

    정변 후에

    획득한

    관직

    김옥균

    (1851-

    1894)

    안동 강능부사

    김병기(양) 33 1872 일본

    외아문

    참의 호조참판

    박영효

    (1861-

    1939)

    반남 공조판서

    박원양(음) 23

    부마

    (駙馬)

    1872

    일본

    (수신사)

    한성부

    판윤

    광주 유수

    전후영사

    겸 좌포장

    홍영식

    (1855-

    1884)

    남양 영의정

    홍순목 29 1879

    일본,

    미국

    (조사,

    보빙부사)

    외아문/

    내아문

    협판,

    우정국

    총판

    좌의정

    서광범

    (1859-

    1897)

    대구 이조참판

    서상익 25 1880

    일본/미국

    수신사/

    보빙사,

    종사관

    외아문

    참의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

    판 우포장

    서재필

    (1863-

    1951)

    대구 군수

    서광하(양) 21 1882

    일본육군

    호산학교

    유학생

    조련국

    사관장

    병조참판 겸

    정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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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공통점은 아래와 같다.

    1. 조선 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 가운데 세력이 큰 가문의 출신으로서 박영효

    를 제외하고 모두 과거(科擧)문과에 합격한 수재들이었다.

    2. 평균 연령은 (만)26세로서 국정 운영에 필요한 행정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관료들이었다.

    3.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조선의 대표적 개명관료 (전 우의정) 박규수

    (朴珪壽)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이동인(李東仁)

    등 중인과 불교 승려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반입한 서양문물 소개서들─예컨대, 웨

    이유안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1844), 쉬치유(徐繼畲)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1850), W.A.P. Martin역, 『만국공법(萬國公法)』(1864) 그리고 후

    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西洋事情)』 (1869)─을 입수·탐독함으로써

    서구세계의 근대적 문화에 대해 상당히 수준 높은 식견을 갖추었던 지식인들이었

    다.

    4. 그들은 1880년대 초에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과 제도시찰단의 일

    원 내지 그들의 고문 내지 종사관 자격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화된 일본의 제

    도와 문물, 그리고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조사한 경

    력을 가진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드나들 때 그 당시 일본 지성계의 최고 지도자로서 ‘탈아입구론

    (脫亞入歐論)’을 제창하던 후쿠자와와 교유하면서 그로부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

    았다. 그들 중 홍영식과 서광범은 1883-84년간 조선이 미국에 파견한 최초의 외

    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돌아

    보는 과정에서 보빙사의 외국인 비서 겸 자문역을 맡았던 하버드대 출신의 인류학

    자 로웰(Percival Lowell)로부터 미국의 정치·외교 제도 등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2) 또한 그들은 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귀국 여행의 안내역을 맡

    았던 해군 소위 포오크(George C. Foulk)와 버나도(John Bernadou)로 부터도 미

    국의 제도·문물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5. 개화당의 수장인 김옥균(金玉均)은 ‘교유에 능하고 글 잘하고 시문·서화를 다

    잘한 호탕했던 인물’로서 재승덕박(才勝德薄)한 약점이 있지만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비록 미국에 가본 일은 없지만 일본을 처음 방문할 때 선중

    (船中)에서 황쭌센(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애독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호기심/호감이 많았고, 일본 체재시에는 윤치호(尹致昊)에게 ‘국금(國禁)을 무시하

    고’ 영어를 배울 것을 적극 권장하며 자기 자신도 영어를 배웠다.3) 그는 요코하마

    에 있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과 빈번히 교류하면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들을 빌려 읽고 그들에게 조선 선교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기독

    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실제로 그는 1883년 여름에 서울을 방문한 일본주

    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ev. Robert S. Maclay) 목사를 고종에게 소개함으로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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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 고종으로부터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는 권한을 얻어내는데 일조했고,

    1884년에는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가 서울 중심부에 토지를 매입하려 할 때 이 일을 도와주었다.4)

    이러한 친미(親美)적인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884년 10월 25일─아래에서

    재론하는 바와 같이─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서울 주재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개화당 정변 계획을 미리 통보하기도 했다.

    6. 김옥균 이외의 다른 개화당 멤버들 역시 대부분 미국과 기독교에 대해 호감

    을 가졌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친일 개화당’ 혹은 ‘일본

    당’─즉 ‘친일파’ ─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친일·친미

    개화당’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Ⅲ. 갑신정변의 시작과 끝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 저녁에 발발했다가 12월 6일 오후에 ‘일장춘몽

    (一場春夢)’과 같이 끝났다. 아래에서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

    자.

    1. 시대적 배경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흥선 대원군(大院君)의 하야, 고종(高宗)의 친정 개시: 1874-

    조·일 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 1876

    청의 직예성총독겸북양대신(直隸省總督兼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 조선문제 관

    장 개시: 1879-

    조사일본시찰단(朝士日本視察團: 일명 ‘신사유람단’)의 일본 시찰: 1881

    조·미 수호통상조약 체결: 1882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의 서울 부임: 1883/5

    2. 정변 발발의 배경

    (1) 임오군란(1882/7/23)을 계기로 청, 조선에 대해 고압적인 내정간섭 개시

    (=조선 속국화정책 발동): 1882/8 - 1884/12

    -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이 거느린 청의 주둔군

    3,000명이 서울에 진주(進駐): 8/23-

    - 청군, 흥선 대원군을 중국으로 납치: 8/26

  • 제 1 주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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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 1882/10

    (2) 임오군란 후 조선에 선파된 청의 주요 군인·관리·고문관들 :

    주둔군 사령관: 우창칭(吳長慶). 1884/4에 통령기명제독(統領記名提

    督) 우자오유(吳兆有)로 교체

    총영사(총리조선각구교섭통상사무): 천슈

    탕(陳樹棠) 1883/10/20 부임

    외교·재정분야 고문(외아문 협판/해관총세무사/전환국총판): Paul G.

    von Möllendorff (목참판) 1882/12/12 부임

    조선군대의 조직·훈련 담당 총책(‘총리영무처조선방무 ’ ): 위안스카이(袁世凱) ‘ 신건친군영(新建親軍營) ’

    4영=(좌영, 우영, 전영, 후영, 총 5,000명)을 조직·훈련

    3. 고종(高宗)이 신임하는 개화당 관료들, 일본과 미국 시찰: 1882-1884

    박영효, 임오군란 후 수신사(修信使) 자격으로 도쿄 방문: 1882/9-11

    월말

    김옥균의 일본 방문: 1882년에 두 차례, 그리고 1883/6~84/5(= 총 22

    개월). 마지막 방일 때의 목적은 300만 엔 국채 모금.

    서재필 등 13명의 사관후보생들, 일본 도쿄의 ‘육군도야마(戶山)학교’

    에 유학: 1883/5/20~1884/7

    홍영식과 서광범,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 시찰: 1883/7/14-

    84/5/31

    4. 청·프전쟁(The Sino-French War): 1884/8/23-1885/6/9

    프랑스 해군,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시된 전투의 일환으로 타이완의 지

    룽(基隆) 포격: 8/5 후지엔성(福建省) 후조우(福州)를 공격

    하여 복건함대(福建艦隊)를 전멸시킴: 1884.8.23 청 선전

    포고 청·프군 간의 격전: 1884/8-11

    그 후 프랑스 육군, 통킹의 육전에서 대패: 1885/3/28 리홍장~파트

    노트르(공사), 텐친(天津)에서 청·프수호통상평화조약 체결:

    1885/6/9

    Ⅳ. 개화당의 쿠데타 계획 추진

    1. 청∙프전쟁 발발 후 개화당 멤버들의 위기의식 고조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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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당에 대한 친청(親淸)사대당의 태도 경화 민영익(閔泳翊)의 배반

    (1884/9)과 군사권 장악(1884/10)

    개화당의 한 요인, 미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포크 무관에게 친청파의 개화

    당 핍박 하소연: 10월 초

    “In October one of the progressive party leaders told me that unless

    foreign intervention prevented, Corea would soon be irreclaimably in

    the hands of the Chinese, and with great bitterness went on to say that

    his small party had not only lost power to proceed further and had

    been receding, but they were in actual danger of execution; that this

    might follow any charge made against them by the Chinese faction….”5)

    2. 개화당의 한 요인, 미 공사관의 무관 포크에게 개화당의 유혈 쿠데타 계획 통

    보: 10/25

    “10월 25일 개화당 인사의 한 사람이 나를 찾아오자마자 격하게 국왕과

    개화당이 불행한 입장에 놓여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그는

    신중한 태도로 한국을 위해서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와 4영사,

    그밖에 가능하다면 네 명의 하급관리를 처치해야만 되겠다고 말을 하였

    다. 그는 쉽게 흥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에게 언제나 분명하고

    정확한 것만 이야기 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나는 어찌해서 그러한 계획을 나에게 털어놓느

    냐고 화를 냈다. 이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는 잠시 날카로운 말이 오고 갔

    고 쉬이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었다.”6)

    3.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오(竹添進一郞)의 서울 귀임(歸任): 10/30

    김옥균, 일본공사관에서 타케조에와 면담: 10/31

    타케조에 공사, 고종 알현: 11/1

    이 무렵, 다케조에는 청·프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김

    옥균을 격려.

    4. 박영효의 저택에서 개화당 영수들 4명(김, 박, 홍, 서)이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와 더불어 쿠데타 모의 우정국 개국축하연에서 거

    사하기로 합의: 11/4

    5. 다케조에 공사, 본국 정부에 최종 훈령 하달 요청(아래 두 안 가운데 택1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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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 11/12

    갑(甲): 청국과의 일전(一戰)을 각오하고 친일적인 독립당(獨立黨)을 선동하여

    조선의 내란을 야기시킬 것.

    을(乙): 청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 자체의 운명에 맡기되 독립당이

    대화(大禍)나 이지 않도록 보호하는데 그칠 것.

    6. 김옥균, 다케조에 공사를 방문하여 쿠데타 실천 계획 최종 합의: 11/25

    (1) 암살 대상자 확정, (2) 국왕의 강화도 파천안(播遷案) 포기, (3) 다케

    조에, 10여만 엔(円) 기채(起債) 약속, (4) 공사관에 배치된 일본군이 왕

    궁에 들어가 국왕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국왕의 친필 요청서 발급 방법

    에 관해 합의

    이 때 다케조에는 1개 중대의 일본군으로써 청군 1,000명을 능히 대적

    할 수 있으며, 북악(北岳)에 진을 치면 1주간, 남산(南山)에 진을 치면 2

    개월간 지탱할 수 있다고 장담. (만약 청군이 출동한다면 일본은 청·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내포한 발언으로 이해됨.)

    7. 김옥균, 국왕 및 왕비와의 알현에서 “일∙청이 교전한다면 그 승부는 어찌될

    것인가?”라는 왕비의 질문에 “일∙청이 단독으로 교전한다면 승부를 예료

    (豫料)하기 어렵사오나 이제 일∙불(佛)이 합세한다면 일본의 승리가 확실

    합니다.”라고 답변: 11/27

    8. 한강의 압구정 근처에서 쿠데타에 동원될 조선 병사들과 일본인 자객들 4명

    이 오리사냥을 가장한 얼굴 익히기 예행연습: 12/2

    Ⅴ. 쿠데타의 결행

    1. 신축된 우정국 개국 축하연 도중에 인근 가옥에 방화, 민영익 암살 실패:

    12/4 밤 10시

    2. 국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김: 12/5

    국왕 명의로 일본공사에게 일본군 호위 요청:“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

    朕)”

    경우궁에서 친청 사대당 요인 6명과 환관 1명 처단:

    민태호(보국/무위도통사: 민영익의 친부)/ 조영하(예조판서)/ 민영목

    (병조판서); 좌(左)영사(이조연), 전(前)영사(한규직), 후(後)영사(윤태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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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과 류재현(환관)

    행동대: 조련국사관장 서재필 휘하의 사관생도들(이규완 등)과 장사 이인

    종 및 전영병, 윤경완 등 약 40명

    3. 왕과 왕비, 계동궁을 거쳐 창덕궁으로 되돌아옴: 12.5

    - 이재원(李載元: 영의정)중심의 새로운 내각 구성(명단 발표: 12.6):

    (1) 대원군의 친척(종친)들

    (영의정)이재원, (좌찬성)이재면, (병조판서)이재완, (평안감사)이재순,

    (세마)이준용 등

    (2) 개화당 요인들

    김옥균(호조참판), 홍영식(좌의정), 박영효(전·후영사/좌포장), 서광범

    (좌·우영사/대리외무독판·우포장), 박영교(도승지), 서재필(병조참

    판/정령관)

    (3) ‘온건 개화파’ 관료들

    신기선, 김홍집, 김윤식, 윤웅렬, 어윤중 등

    - 12월 5일 오후 창덕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홍영식(洪英植)이

    국왕에게 아래와 같은 ‘국정이혁안(國政釐革案)’을 주상(奏上)하여

    윤허를 받음. (공표되지 못함)

    (1) 재래(在來)의 관제(官制)를 일변(一變)하여 내각(內閣) 급(及) 팔성

    (八省)을 설치할 것.

    (2) 과거(科擧) 급제(及第)의 방법을 폐할 것.

    (3) 인재등용(人材登用)을 문지(門地)에 따르지 말고 널리 이를 사민

    (四民)에게서 구할 것

    (4) 내관(內官)을 폐지하고 내관도 또한 인재(人材)에 따르되 등용(登

    用)의 길을 넓힐 것

    (5) 국왕전하(國王殿下)를 고쳐 폐하(陛下)라고 칭하고 전(傳)을 다시

    칙(勅)으로 칭할 것.

    (6) 지나(支那)에 대하여 세빙(歲聘)의 예(禮)를 폐(廢)할 것.

    (7) 전권대사(全權大使)를 지나(支那)에 파견하여 우리 나라가 독립(獨

    立)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대원군(大院君)의 방환(放還)을 청구할

    것.

    (8) 본래 관원(官員)으로 예오(穢汚)의 소행이 있는 자를 각각 극형(極

    刑)할 것.

    (9) 내외공채(內外公債)를 모집하여 운수(運輸)·교육(敎育)·군비(軍備)

    의 충실을 기할 것.

  • 제 1 주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13

    *(10)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폐하여 장씨(張氏)[장빈(張嬪)]를 세우

    기로 함.

    *(11) 일본에서 고토오 쇼지로오(後藤象二郎, 1838-1897)씨를 국사(國

    師)로 초빙하여 개국진취(開國進取)의 방책(方策)을 세움.7)

    *(위의 이혁안 가운데 10조와 11조는 부대주문에 포함되어

    있었음.)

    Ⅵ. 쿠데타의 좌절

    1. 다케조에 공사, 일본군(180명)을 왕궁에서 철수시키겠다고 통보: 12/5(혹은

    12/6)

    다케조에 공사가 갑자기 ‘배신’한 이유:

    자기의 11/12일자 청훈(請訓)에 대한 본국정부의 (11/28일 작성)회훈(回訓)을

    12/4일 오후에 접수

    본국 정부의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무대보(外務大輔) 요시

    다 키요나리(吉田淸成)가 작성하여 보낸 회훈의 내용:

    “청국과의 충돌은 부당하니 독립당으로 하여금 온화수단(溫和手段)을

    취하도록 하라.”

    2. 왕비(명성왕후), 우의정 심순택을 통해 비밀히 청군에 출동 요청.

    3. 청군의 창덕궁 공격 개시: 12/6 오후 3시 (우조우유 vs. 위안스카이)

    4. 김옥균 등 9명, 인천으로 피신 치토세마루(千歲丸: 선장, 쓰지 카츠사부로

    오)에 승선, 일본으로 망명: 12/11

    5. 고종을 배종한 홍영식, 박영교 및 7명의 사관생도, 청군 막사에서 참살당함.

    Ⅶ.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1. 근본원인: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의 정변 필패론(必敗論): 1884/12/6

    (1) 군주(君主)를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다.

    (2)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3) 인심이 불복하여 변(變)이 안으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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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4) 청병(淸兵)이 곁에 앉아 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 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병대를 몰아

    들어 갈 것이다.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사소한

    일본병(日本兵)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5) 가사 김(金)·박(朴) 여러 사람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

    도, 이미 민씨(閔氏)와 상(上)께서 친애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니 이는

    건곤(乾坤殿: 왕과 왕비)의 의향을 위배한 것이다. 군부모(君父母)의

    뜻을 거스리고서 능히 위세를 지킬 수 있겠는가.

    (6) 만약 김·박 여러 사람의 당(黨)이 많아서 조정(朝廷)을 채울 수 있다면

    혹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두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

    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인(淸人)이 있

    고 안으로 군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붕당(朋黨)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성(順成)함을 꾀할 수 있겠는가.8)

    2. 구체적 원인:

    1884년 11월에 이르러 청·프전쟁이 예상과 달리 청국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일본정부의 대(對)한반도 정책에 변화가 일어남.

    3. 만약 청·프전쟁이 애당초 김옥균과 다케조에가 예상했던 대로 프랑스에 유리

    하게 전개되어 청이 패전의 궁지에 몰렸더라면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김옥균과 그의 일당을

    경솔하고 무모한 모험가들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Ⅷ. 갑신정변 주역들의 개혁 구상

    익히 알려진 대로,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이 품었던 개혁구상은 그가 정변 실

    패 후 망명지 일본에서 집필한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실린

    에 담겨있다. 그런데 발표자는 김옥균의 14조 정강 보다 위에 인용한 홍영식의

    12개조 ‘국정이혁안’이 더 신뢰성이 높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두 가지

    개혁안의 내용이 크게 상치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자료의 내용을 종

    합하여 분석해보면, 갑신정변 주역들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달성하려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첫째, 중국(淸)에 대한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려 했다. 이를 위해 (1)

    과거 조선과 중국과의 조공관계(朝貢關係)를 청산하고 앞으로는 조청(朝淸)간의

  • 제 1 주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15

    외교와 통상을 만국공법에 따라 상호 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한다. (2) 조선

    이 청(淸)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국왕의 호칭을 전하(殿下)에서

    폐하(陛下)로 격상시키고 국왕의 명령을 ‘전(傳)’에서 ‘칙(勅)’으로 바꾼다. (3) 임

    오군란 후 청에 구치(拘致)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방환을 실현한다.

    둘째, 종래의 (중국식)관제(官制)를 폐기하고 (일본식)내각(內閣)제도를 수립

    한다. 내각(內閣)은 8성(省)으로 구성되며 내각의 대신(大臣)과 참찬(參贊)들은 정

    기적으로 합문(閤門)내의 의정소(議政所)에 모여 정령(政令)을 의정(議定)하고 공

    포(公布)한다.

    셋째,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혁파하고 문벌(門閥)의 특권을 폐지하여 사민평

    등(四民平等)의 원칙에 따라 능력본위로 인재를 등용한다.

    넷째, 국가 재정(財政)은 호조(戶曹)에서 통일적으로 관할하고, 지조법(地租

    法)을 개정하여 정부의 수입을 늘인다. 교통수단(交通手段)의 발달과 국민 교육

    (敎育)의 진흥, 그리고 군비(軍備)의 확충을 도모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공채(公

    債)를 모집한다. 각도의 환자(還上)를 영구히 면제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엄

    벌함으로써 민중의 경제적 고통을 덜어준다.

    다섯째, 군제(軍制)면에서는 (임오군란 후 청의 위안스카이가 조직한)4영(營)

    을 폐지하여 1영(營)으로 통합하되 영군 병사들 가운데 우수한 자로써 근위대(近

    衛隊)를 조직한다. 근위대의 대장(大將)직은 왕세자(王世子)에게 맡긴다.

    여섯째, 근대적인 경찰(警察)제도를 수립한다.

    일곱째, 내시부, 규장각, 혜상공국 등 유해무익한 정부기구들을 폐지한다.

    여덟째, 명성왕후 민씨(閔氏)를 폐서(廢庶)하고 그 대신 의화군(義和君) 이강

    (李堈)의 생모인 장빈(張嬪)을 왕비로 추대한다.

    이 개혁안들에 나타난 강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이 채택한 내각제도를 도입하여 내각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행함으로써 종

    래의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지양하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확립하겠다

    는 것이다. 김옥균과 홍영식 등 개화당 당원들은 미국의 공화제(共和制)의 장단

    점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제도의 채택은 고려하지 않았다.

    Ⅸ. 맺음말: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1. 갑신정변은 조선왕조 건국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이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인

    중국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려 했던 애국적 거사로서 근대 한국

    민족주의 발달사에 있어 획기적 의의가 있다. 이 정변은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

    만 한국인의 마음속에 주변 강대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경계심/적개심을 고취시킨

    점에서 정신사적으로 불멸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16

    독립운동을 논할 때 1905년 이후의 항일(抗日)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그에 선행하

    는 항청(抗淸)독립운동을 간과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최근 중국이 세

    계 최대 강국의 하나로 부상하면서 한반도─특히 북한─에 대해 패권주의적 정책

    을 펴고 있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대청(對淸)독립운동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갑신정변은 19세기 후반 한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실현하려 했던 일련의 개

    혁운동과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서 중요한 의

    의가 있다.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일부 개화당 멤버들(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단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청일전쟁 발발 후에 조국으로 돌아와 갑

    오경장(1894-96)과 독립협회 운동(1896-98)에 적극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과 근

    대화에 이바지하려 했다. 그들 가운데 최연소자인 서재필은 3·1운동 후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李承晩)과 손잡고 1922년까지 해외 독

    립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이어진 개화당 멤버들의 독립정신과 조

    국 근대화 노력은 해방 후 이승만 주도하의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거시

    적으로 볼 때, 갑신정변은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한국인의 독립국가 탄생을 가능

    하게 만든 원천(源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그들이 내세운 개혁정강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기약하고 문벌의 타파와 인민 평등의 권(權)을 내세워 능력본위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오랫동안 발호해왔던 귀족(양반)의 전횡을 배제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근대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실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

    일 수 있다. 따라서 갑신정변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사의 원점으로 평가할 수 있

    다.

    4. 종래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친일파’로 간주해 온 학계 일각의 견해는 재고되

    어야 한다. 물론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역들이 1884년에 거사할 때 일본공사관의

    무력 지원에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정부의 사주(使嗾)하에서

    정변을 일으킨 일본의 주구(走狗)는 아니었다. 그들은 거사 결정을 일본측과 상의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으며 그렇게 결정한 사실을 일본공사관에 알리기 전에 미

    국 공사관에 먼저 알렸다. 따라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은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기 보다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용일파

    (用日派)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 제 1 주_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17

    1)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최근의 논문으로서는, 최영호, 「갑신정변론」『한국

    사시민강좌』7(1990), 61-75쪽을 손꼽을 수 있다. 2) 로웰은 1886년에 한국에 관해 Chosǒn: The Land of Morning Calm─A Sketch of Korea이라는 무게 있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학식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3) 김영철, 『영어, 조선을 깨우다』(일리, 2011), 1, 207-211, 218쪽 4) 유영익, 「1880~90년대 개화파 인사들의 개신교 수용 양태」, 『진단학보』

    70(1990/12), 91-92쪽. 5) George C. Foulk, “Report of Information Relative to the Revolutionary

    Attempt in Seoul, Corea, by Ensign George C. Foulk, December 4-7, 1884.”

    George M. McCune and John A. Harrison, eds., Korean-American Relations: Documents Pertaining to the Far Eastern Diplomacy of the United States, Vol. Ⅰ: The Initial Period, 1883-1886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1), p. 110. 6) Ibid.. pp. 110-111. 번역문은 이광린, 『김옥균: 삼일천하로 끝난 개혁 풍운

    아』(동아일보사, 1994), 74쪽에서 인용. 7) 『井上角五郎先生傳』(東京: 1943). 이광린, 「갑신정변 ‘정강’에 대한 재검

    토」,『개화당연구』(일조각, 1994), 26쪽에서 재인용.

    8) 국사편찬위원회 편, 『윤치호 일기』 (탐구당, 1973)Ⅰ, 118쪽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 9 강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18

    < 부록 1>

    김옥균의

    1. 대원군(大院君)을 조속히 귀국케 하고 청국(淸國)에 대한 조공허례(朝貢虛禮)

    를 폐지할 것.

    2. 문벌(門閥)을 폐지하고 인민평등(人民平等)의 권(權)을 제정하고 재능(才能)에

    의해 인재(人材)를 등용할 것.

    3. 전국(全國)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를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할 것.

    4.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있는 자만을 허통(許通)하여 등용(登

    用)할 것.

    5.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貪官汚吏) 중에서 가장 심한 자를 처벌

    할 것.

    6. 각도(各道)의 환자(還子)를 영구히 면제할 것.

    7.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8. 조속히 순사(巡査)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9. 헤상공국(惠商公局)을 혁파할 것.

    10. 그 동안 유배(流配), 또는 금고(禁錮)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11. 사영(四營)을 합쳐 일영(一營)으로 하되, 영중(營中)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

    위대(近衛隊)를 조속히 설치하고 육군대장(陸軍大將)은 왕세자(王世子)로 정

    할 것.

    12. 일체의 국가재정(國家財政)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

    무관청(財務官廳)은 폐지할 것.

    13. 대신(大臣)과 참찬(參贊)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閤門)[편전의 앞문]내(內)의

    의정소(議政所)에서 회의(會議)하고 정령(政令)을 의정(議定), 공포할 것.

    14. 정부육조(政府六曹) 이외의 무릇 용관(冗官)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작의(酌議)하여 품계(禀啓)케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