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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원서

    청원인 성명 정덕한

    주소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599-8번지 302호

    청원인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 번지 일대 구 (주)유유산업

    부지에 대하여 아래 청원취지와 같이 매장문화재의 발굴을 결정하여 주

    시기를 청원법 제4조 제4항(공공의제도 또는 시설의 운영)에 따라 청원

    합니다.

    청원의 취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번지 일대 안양시 소유(매입계약기간

    중) 구 (주)유유산업 부지에 대하여 세부 활용계획수립에 앞서 문화재

    보호법 제55조의 제1항(연구목적으로 발굴)에 따라 매장유물의 발굴

    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여주시기를 청원 합니다.

    별첨 1.청원 이유서 1부.

    2.소견서 및 참고자료 1부.

    2008년 1월 24일

    청원인 정 덕 한

    안양시의회 의장 귀하

  • 청원이유서

    1. 청원인은 고대 북아시아 기층언어(基層言語)를 공부해오는 가운데 사

    전적 자료가 남아있는 중세 만주어연구를 통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반도 지명(地名)의 현재 위치를 규명하는 작업(역사 제터 잡이 연

    구)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특별히 만주어계통 어휘의 지명으로 이

    루어진 안양시 일대의 역사지리학적 지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

    니다.

    2. 청원인은 1960년 가을(4.19 직후) 시흥군 청년학생단체 협의회장 자

    격으로 국보급 역사유물이 두 개나 존재하는 당시 시흥군 동면 안양

    리 212번지 일대에 유유산업(주) 안양공장을 신축허가해준 시흥군에

    게 건축허가의 취소를 요구하는 한편, 역사유물 가운데 “3층석탑(三

    層石塔 · 당시는 보물 제5호. 현재 경기도지방유형문화재 164호)”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공장을 착공한 유유산업에 대해 원상복구명령을

    내려줄 것을 진정한 사실이 있습니다.

    3. 이에 대하여 당시 시흥군 이재덕(李載德) 군수는(건축허가는 전임 이

    실경(李實慶) 군수) 이범수?(李範秀?) 동면장(東面長)(직무대리?)과

    유유산업 건설 책임자 이영춘(李永春) 전무 및 청원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한번 시행된 건축허가를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함

    으로 건축은 그대로 진행하되, 해체된 삼층석탑은 중초사 당간지주

    (中初寺 幢杆支柱 · 보물 제4호) 근처로 이전 복원하고, 그에 대한

    형사책임을 요구할 것이며, 추후 공장건축과정에서 출토되는 역사 유

    물들은 철저하게 수집하여 시흥군이 지정하는 장소에 보존하기로” 합

    의하고 이에 대한 유유산업 측의 이행각서를 받은바 있습니다.

    4. 그 이후에도 “이전 복원된 삼층탑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보다 축소되었

    다(3층탑이 아니라 5층탑 이었다는 주장)” 또는 “또 하나의 탑비(塔

    碑)가 땅속에 묻혀있다”는 물의 속에 지역의 고로(古老)들이나 고고

    학계에서는 유유산업 부지에 안양이라는 지명(地名)의 원천(源泉)이

  • 5. 되는 안양사7층전탑(安養寺七層塼塔)이 자리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과 추정(推定)이 나돌았으나 이미 공장시설이 합법적으로 들어서 있

    기 때문에 발굴 등 본격적인 조사를 하지 못한 채 안양시민들은 자기

    고장의 역사적인 참 모습을 찾지 못하고 미망(迷妄)속에 지내왔습니

    다.

    6. 당시의 무모한 공장건축은 일제 때 부터 보물 제5호로 지정되어온 삼

    층석탑에 대하여, 정부가 원래의 형태가 훼손되어 예술성이 상실 되

    었다는 이유로 1996년 10월 24일 보물에서 제외 조치시켜, 경기도 지

    방문화재로 강등 지정된 나머지 현재에도 우리나라 보물 제5호는 자

    리가 비어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2003년 안양시는 건축한지 47년이

    지난 이 공장건물에 대하여 시 지정 아름다운건축 작품으로 지정한바

    있습니다.

    7. 한국 전탑(塼塔)의 중견연구자인 박홍국(朴洪國 · 위덕대학교 박물관

    장) 교수는 “한국의 전탑연구(韓國의塼塔硏究)” 저서에서 안양사 칠층

    전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중초사지는 (주)유유산업 부지 내에 있는데 여기에 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작(作) 인데 비하여, 남아있는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

    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초사지에서 창건당시의 탑은 찾아볼 수 없는 셈이다.

    안양사 전탑은 실로 한국전탑의 행열(行列) 중 후미(後尾) 가까운 곳

    에서 찬연히 빛나던 마지막 거려탑(巨麗塔) 이었다.

    이처럼 장려(壯麗)하였던 전탑이 오늘날 탑지(塔址)마저 찾아볼 수

    없음은 조금은 이상한 일 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원간의 관계가 고려 초에는 어떠하였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안양

    사 전탑의 탑지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회사 측이 수집해 놓은 중초사지 출토 와전(瓦塼)중에는 전탑의 탑

    전(塔塼)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

  • 다.” (참고자료 제1호 별첨)

    8. 2007년 11월23일자 안양시민의 신문은 “안양시가 2007년 6월 (주)유

    유산업의 부지 및 건물을 240억 원에 3년 분할지급 조건으로 매입하

    였고, 안양시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용역을 맡겨 전문가의 의견과,

    지역 각계전문가 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의견서결과를 가지고 그 활

    용방안을 결정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한바 있습니다.(참고자료

    제4호 별첨)

    9. (주)유유산업 부지는 “안양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는 안양사(安養

    寺) 사지(寺址)로서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기 때문에 발굴을 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 문화재로서의 용도 이외에 일반용도의 토지로

    서는 활용하기 어렵다”는 현장여건 때문에 그 동안 “매매가 성립될 수

    없는 땅”으로 인식되어왔는데 이를 안양시가 매입한 것은 매우 뜻 깊

    은 일로서 미궁에 빠진 안양의 역사적 정체성(正體性)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만 하다고 할 것입니다.

    10. 그러나 현재에도 지상에 국보급 유물과 경기도유형문화재가 존재하

    는 이 부지의 활용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문화재전문연구기관에 발

    주하지 않고, 일반관광사업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발주한

    사실과, 의견조사서의 설문에 부지의 형질변경을 하지 않은 채 기존

    건물만을 리모델링 하여 5개 “복합 문화관광 공간(휴게 및 휴식, 편

    의시설 공간)“과 ”김중업 현대건축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묶

    어, 설정한 것은 처음부터 매장유물발굴을 하지 않고 안양의 역사적

    정체성 규명은 계속 땅속에 묻어두겠다는 편법적인 예단(豫斷)이 전

    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감출 수 없습니다.

    11. 이 건물들은 건축한지가 47년이 지난 건물들로서 내구성면에서 보더

    라도 멀지 않은 훗날에 헐고 다시지어야 할 처지에 있는데, 낡은 건

    물을 철거하는, 그때에 가서 대지에 손을 대서 매장문화재가 발굴되

    면 그때 문화재 용도로 활용하더라도 우선은 발굴을 기피하고 편법

  • 적으로 많은 예산을 들여 기존 건물에 대한 리모델링 공사만 하여

    문화재 이외의 용도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

    는 공공예산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안양시의 행정적 일관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지역의 역사적 제 모습 찾기를 외면하는 결과

    를 가져올 염려가 있습니다.

    12. 청원인은 이 염려를 통하여 자기 고장의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해 많

    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다른 고장의 도시행정과는 동 떨어진 안양

    시정의 모습을 느끼고 있으며, 건물은 건드리지 않고 대지에 대하여

    서 만 발굴을 해보아도 규명할 수 있는 자기 고장의 역사적 참 모습

    찾기를 외면하고, 서둘러 현대 건축의 요람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그 일이 그렇게 시급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13. 청원인은 안양시가 앞으로 이곳을 어떠한 성격과 목적의 시설로 활

    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을 떠나서, 열려 있는 자세로 사전

    에 부지의 정확한 성격과 법적지위를 파악하여, 그에 적합한 개발을

    시행하는 것이 오히려 건전한 시정(市政)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활용계획의 수립에 앞서 매장문화재를 발굴하

    여 주실 것을 청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4. 청원인은 안양사의 역사성에 대하여 청원인과 다른 소견을 가진 분

    들이 계시다면, 필요에 따라 공개토론 또는 청문을 통하여 유유산업

    부지 매장유물 발굴의 정당성에대하여 성실하게 의견을 개진(開陳)

    할 수 있음을 아울러 밝히는 바입니다.

  • 소견서

    안양사칠층전탑지(安養寺七層塼塔址)가 중초사지(中初

    寺址)와 동일 장소인 것으로 추정하는 청원인의 소견.

    안양사의 역사성

    고려국가는 918년 왕건(王建)의 쿠데타에 의해 건국된 이래 성종(成

    宗·981~997) · 문종(文宗·1046~1083) 연대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정치· 경제·사회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중세 국가로서의 제도를

    완비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국가는 국왕(國王) 및 귀족(貴族)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를 성립 시켰으며, 11세기의 전 기간에 걸쳐 그것을 안정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귀족사회가 분열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고, 이것이 이자겸(李資謙)의 난(亂)과 묘청(妙淸)의 난, 그리고 무

    신의 난(武臣亂)으로 이어 졌다.

    정중부(鄭中夫)등이 무신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1171년부터 86년에

    걸친 무신들의 집권기는 왕권의 붕괴를 불러 왔고, 이어 1231년부터 30

    년에 걸친 몽고(蒙古)와의 전쟁 끝에 화해가 성립되어 원(元)나라의 간

    섭을 받다가 충렬왕(忠烈王)4년인 1278년에 독자적으로 통치권(統治權)

    을 다시 행사할 때까지 48년 동안 국가 체제는 혼란에 빠졌다.

    몽고의 간섭기간 동안, 치안에 필요한 일정 수(數) 이내에서만 관군(官

    軍)을 둘 수밖에 없는 원(元)나라의 통제 속에서 자주적인 국방력을 상

    실하다 시피한 시기에, 함경도(咸鏡道)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에 속하

    였던 함흥(咸興)지방의 여진계(女眞系) 토호 출신 이성계(李成桂)가, 홍

  • 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를 격퇴하는데 무공을 세워 중앙권력에 등장

    하였는데, 그의 휘하에는 동북면(東北面) 지방에서 형성된 여진계(女眞

    系) 사병집단(私兵集團)을 비롯하여 군공(軍功)으로 관직에 오른 신흥무

    장들이 포진함으로서 관군을 압도하는 무력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왕권과 기존정치세력을 지키려는 최영과, 신흥군벌 세력인 이성계가 반

    목(反目)하는 정치적 구도(構圖) 속에서 최영은 왕의 지원 속에 정부의

    군사비(軍事費)를 가지고 안양사를 다시 고친다는 명분으로 수천여 명의

    승병(僧兵)을 갖추었고,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놓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위화도(威化島)로부터 회군(回軍)한 이성계 병력과, 승병(僧兵) 위주로

    조직된 최영의 군대가 개성 왕궁 내전의 화원(花園)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끝에 이성계 군이 승리함으로서 고려왕조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안양사의 승군(僧軍)

    고려시대 승군의 성격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정규군의 성

    격인 관군이 있고, 권력적 토호들이 자기비용으로 유지하는 군사력은 가

    병(家兵)으로 부르는 한편 사찰을 본거지로 하여 유지되는 지역결사형태

    의 병력에 대하여는 승군(僧軍)으로 부르는데, 지역주민의 시주와 왕실

    의 지원 아래 운영되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소견이 일치되고 있다.

    그런데 왕건의 고려 건국과정에서부터 최영의 마지막 화원전투에 이르기

    까지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승군으로 활약하던 안양지역 군사력 이다.

    또한 안양사와 관련된 기록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왕건, 김부

    식, 최영 등 고려사상 최고 권력의 주인공 들이다.

    안양지역은 백제(百濟) 건국의 씨알이 되었던 이른바 십제(十濟)의 중심

    으로서 수도를 공주(公州)로 이전(移轉)한 뒤에도 일종의 지역신앙결사

    (地域信仰結社) 형태로 결속(結束) 되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발전시켰

    고, 이어서 같은 백제 지역출신인 개성(開城)의 왕건 세력과 함께 고려

    를 세워야한다는 건국이념(建國理念)을 같이하는 가운데 강감찬(姜敢贊)

  • 최영 등의 걸출(傑出)한 왕권수호 무장(武將) 들을 배출한 것으로 보인

    다.(강감찬과 최영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왕건의 개국 쿠데타군으

    로 무공을 세웠고 어린 시절을 안양사 에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건국당시에는 반 궁예 쿠데다 군으로 시작해서, 최충헌(崔忠獻)

    무신정권에 대한 왕권수호 전투 및 최영의 개성 왕궁수호 전투 때에는

    승군(僧軍)의 신분으로, 또한 무신정권에 의한 보복으로 안양사가 잠정

    적으로 해체(解體)된 직후에 벌어진 거란(契丹)군 침략 때의 개성왕궁방

    어전투에서는 관악산 초적(冠岳山 草賊)의 신분으로 안양지역의 군사력

    은 고려 왕권을 지키는 유력한 군사조직 으로 일관했다.

    특히 고종(高宗) 때 최충헌 무신정권에 대한 왕권 친위(親衛) 거병에서

    패배를 당한 뒤,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안양산(安養山)의 침엽수

    (栢樹)를 개성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두 옮기면서 여기에 동원된 연도백

    성들의 원성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양사는 무신정권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후 최영에 의해 다시 제

    모습을 갖춘 뒤, 개성 왕궁 내전의 화원(花園)전투에서 이성계군 에게

    최영과 함께 사로잡힌 승군 현인(玄麟)이 “처음부터 승군을 조직하고 최

    후 까지 저항한 죄”로 유배 길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에게 참살 당한 사

    실과, 신앙결사 조직인 안양사의 정신적 뿌리인 시흥의 금암산(衿巖山)

    의 “한 우물”(현재는 안양시 석수동과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의 경계지점)

    옆에 호랑이 석상(石像)을 세우고 산 이름을 호압산(虎壓山) 또는 호암

    산(虎巖山)으로 바꾼 사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정인지가 “지역주민 들

    이 안양사를 재건하고 있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 시킬 것”을 어전회의에서

    주장한 사실 등으로 보아 안양사의 정체성은 정치적인 목적과 방법에 의

    하여 반복해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묻혀버린 결과, 뒷날에 와서는 원래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면 안양사는 언제, 어떻게 지어 졌을까?

  • 고려사(高麗史) 태조총설조(太祖總說條) 기록에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

    아내고 신라를 평정한 뒤 옛 고구려지역까지 국토로 삼을 것 이라고 암

    시하는 이른바 “고경비자(古鏡秘字)”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고경(古鏡)을 가지고 온 전달자의 모습에 대하여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 앞에 있는

    전성고상(塡星古像)이 그 모양과 같으며 좌우 손에도 역시 바라와 거울

    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창근이 기뻐하여 자세히 그 모양을 아뢰었더니”

    하는 고사(故事)에 대한 기록이 있고,

    불교사전에 의하면 왕건은 집권직후인 태조4년(921년) 동주(東州) 발삽

    사(勃颯寺)를 일신중수(一新重修) 하는 한편, 절 이름도 고경비자(古鏡

    秘字)의 내용을 따라 용공사(龍貢寺)로 바꾸었다.

    실제로 이 고경비자의 예언을 내세워 왕건은 철원을 비롯한 강원도 동부

    와 북부지역의 신라계 사찰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시기인 왕건의 집권 후 4년을 전후하여, 건국과정에서 현재의

    경인지역에 있던 구 십제 세력을 동원하여 고려건국에 뜻을 함께한 능정

    (能正)을 위하여 왕건은 발삽사와 같은 방법으로 중초사터를 포함하여

    주변 일대에 대규모의 사찰과 칠층전탑을 세우고 안양사라고 절 이름을

    고쳤을 것으로 보인다.(안양사는 수천 명이상의 많은 승병을 수용할 수

    있도록 다른 절에 비하여 건축의 규모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볕 양(陽)자를 써서 안양사(安陽寺)로 출발한 절의 명칭이 기를 양(養)

    자를 쓰는 안양사(安養寺)로 바뀌게 된 경위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안양사에 대한 사격(寺格)의 문제는 본 청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①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

  •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벽양면(碧養面) 신일리(新日里) 금강산(金剛山)

    에 있는 절. 지금의 은적사(隱跡寺). 신라 흥덕왕(興德王) 10년(835년)

    중 와룡(臥龍이 창건하고 발삽사(勃颯寺)라고 하였다. 고려태조 4년(921

    년)왕건이 일신중수(一新重修)하고 절 이름을 용공사(龍貢寺)라고 고쳤

    다.

    조선 숙종 44년(1718년) 절이 불타매 중 청계(淸溪)가 동쪽 산기슭 10리

    밖에 옮겨 짓고 다시 용공사라고 하였고, 옛터에는 경월, 만월, 청파 등

    3명의 중이 절을 다시 짓고 용흥사(龍興寺)라 하였는데, 조선 고종 13년

    (1876년)에 용공사가 다시 불타매 수봉, 세하 등 2명의 중이 다시 짓고

    隱跡寺라고 이름을 고쳤다.(불교사전)

    ② 高麗史 列傳 四十二 叛逆

    최충헌(崔忠獻)

    흥왕사(興王寺),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 안

    양사(安養寺), 수리사(修理寺) 등의 승(僧)으로 종군(從軍)한 자들이 최

    충헌(崔忠獻)을 죽이기로 꾀하여 거짓으로 분궤(奔潰)하는 것 같이 하는

    자들이 새벽에 선의문(宣義門)에 이르러 급히 부르짖기를,

    “거란병(契丹兵)이 이미 이르렀다.”

    고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고 들이지 않으므로 승도(僧徒)가 북을 치고

    떠들며 관목(關木)을 베고 들어가 문지기 56인을 죽였다. ----

    뒤에 최충헌(崔忠獻)의 집으로 향하였는데 겨우 시가(市街)에 이르자

    순검군(巡檢軍)에게 쫓긴 바 되어 몰려서 신창관(新倉館)에 이르러 더불

    어 싸웠다. 최충헌(崔忠獻)이 가병(家兵)을 보내어 이를 협격(挾擊)하였

    다. 중의 괴수가 유시(流矢)에 맞아 거꾸러지고-----

    마침 큰 비가 내렸는데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고 또 중 300여 명을 남계

    사(南溪寺) 냇가에서 베니 전후(前後)에 벤 중이 거의 800여 명이므로

    쌍인 시체가 산(山)과 같아 사람이 몇 달 동안을 지나가지 못하였다.

  • ③ 高麗史 列傳 四十三 叛逆

    최이(崔怡)

    안양산(安養山)은 강화(江華)에서 거리가 수일(數日)의 노정(路程)인 데

    최이(崔怡)가 문객 장군(門客將軍)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하여금 그 백

    수(栢樹)를 취하여 심게 하였는데 때는 바야흐로 혹한(酷寒)이었으므로

    역도(役徒)가 동사(凍死)하는 자도 있어 연로(沿路)의 군현(郡縣)이 집

    을 버리고 산(山)에 올라가 이를 피하였다.

    최이(崔怡)가 또 사람을 보내어 관악산(冠岳山) 초적(草賊)이 둔 친 곳

    에 들어가 적괴(賊魁) 5인과 정예(精銳) 50인을 유치(誘致)하여 후(厚)

    히 상(賞)주어 우군(右軍)에 충군(充軍)하였다.

    ④ 高麗史 年表

    辛酉年 : 禑王七年 (1381년)

    ⑤ 高麗史 列傳 五十/ 禑王 十四年(1388년) 四月

    中外의 僧徒를 發하여 軍士를 삼고, 京畿兵을 뽑아 東西江에 주둔케 하

    여 倭를 방비하였다.

    崔瑩에게 八道都統使를 더하고

    李成桂는 右軍都統使를 삼고, 左·右軍의 數가 모두 三萬八千八百三十人

    이요 이 가운데 個人 使役人은 一萬一千六百三十四人 이다. 遼東출병.

  • ⑥ 高麗史 列傳 五十/ 禑王 十四年(1388년) 五月

    李成桂 威化島에서 回軍. 花園전투에서 崔瑩 敗北.

    ⑦ 高麗史 列傳 崔瑩(四)

    신창(辛昌)이 서매 다시 최영(崔瑩)을 잡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왕안덕

    (王安德)·정지(鄭地)·유만수(柳曼殊)·정몽주(鄭夢周)·성석린(成石璘)·조

    준(趙浚)을 시켜 최영(崔瑩) 및 내원당(內願堂) 승(僧) 현인(玄麟) 등을

    국문하니 현인(玄麟)은 처음 최영(崔瑩)과 모책(謀策)하여 승병(僧兵)을

    내었고 회군(回軍)함에 미쳐 또 최영(崔瑩)과 더불어 항거하여 싸운 자

    이다.

    ⑧ 朝鮮王朝實錄 世宗 三十年 七月 二十一日

    정갑손과 허후가 정부와 육조의 뜻으로 와서 불당의 일에 대해 아뢰다

    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煦)가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의 뜻으로 와서 아뢰기를,

    “ 전하께서는 이 일을 작은 것으로 생각하시지만 신 등은 작은 일로 생

    각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살펴 생각하소서.”

    “ 삼성산(三聖山) 안양사(安養寺) 터에 큰 절을 다시 창건한다는데 이것

    이 모두 전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불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백성이 또 새로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한다는 말을

    들으면 뒤를 이어서 만계(萬計)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 ⑨ 朝鮮王朝實錄 文宗 四年 十月 十九日

    “불사를 금지하는 것 등을 논의하다”

    정인지가 아뢰기를

    우선 소문(所聞)을 가지고 말한다면 안양사(安養寺)는 다 황폐된 지 오

    래 되어서 초막(草幕)으로 되고 조금도 간가(間架)는 없었습니다. 소문

    에 들으니, 그 초기에 한 늙은 중이 있어서 이 절 아래에서 죽었는데,

    그 제자 중들이 이 절의 골짜기 중에서 시체를 불태우고, 인하여 부도

    (浮屠)를 세워서 향불[香火]을 받들고, 드디어 초막(草幕)을 지어서 거

    처하였습니다. 무식한 무리들이 영이(靈異)하다고 생각하여 다투어 미포

    (米布)를 내어 중창(重創)하여, 이로 인하여 거찰(巨刹)이 되었습니다.

    비록 옛터에 따라 수창(修創)하였다고 하더라도 새로 창건하는 것과 다

    를 것이 없습니다. 만약 금지하지 않는다면 사사(寺社)를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한갓 형식이 될 것입니다.”

    ⑩ 한국중세사 연구-고려전기의 왕실혼인에 대하여

    하현강 (일조각-1988)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각 지역 호족의 딸들과 혼인을

    하여 29명의 후비와 부인을 거느렸다.

    이러한 혼인 관계의 배경에는 태조 쪽 에서는 물론이고 지방세력 쪽에서

    도 어느 정도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즉 태조 쪽에서는 각 지역의 호족들을 자기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

    법 이었고 호족세력 쪽은 국가권력에 동승하기 위한 수단 이었다.

  • ⑪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6권 p309 - 한길사-1994)

    그러나 지역사회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호족이 형성

    되기 보다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사원을 중심으로 결속된 지방 세력

    들도 있었다.

    왕건은 이들 지역신앙공동체와 결속을 다지고, 그들을 국가가 지원하는

    사찰로 육성하는 대신 그들의 군사력을 승군으로 흡수하여 통치기반을

    형성하고 확장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농민·천민 층은 특정종파와는 괴리된 채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한 조탑(造塔) 주종(鑄鐘) 에

    참여하기도 하고 팔관회· 연등회 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

    된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 이었다.

    고려불교사의 연구에서 가장 취약적인 분야는 지방사회 또는 피지배층과

    불교와의 결합양태에 대한 문제이다. 신라통일시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

    쳐 존재하던 향도조직과 촌락공동체의 관련이라든가, 팔관회·연등회 등

    의 불교적인 행사와 촌락단위의 신앙형태와의 관련에 대한 해명은 불교

    사뿐 아니라 사회사 분야에서 더 주목해야할 과제이다

  • 참고자료

    참고자료 제1호

    한국의전탑연구(韓國의塼塔硏究 ) (學硏文化社 · 2000년)

    박홍국(朴洪國) ( 위덕대학교 박물관장)

    현재 경기도 안양시에는 안양사가 있으나 칠층전탑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십권· 금천현(衿川縣)· 사찰 · 안양사 조에

    : 삼성산의 남쪽에 있다. 고려태조가 세운 7층짜리 벽돌로 쌓은 탑이 있

    다. 김부식이 지은 비석의 글씨는 없어졌고 이숭인이 지은 재건기록이

    있다]의 가록에 의하여 그 존재만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그 탑

    지(塔址) 및 탑전(塔塼)을 찾아볼 수 없다.(103쪽)

    안양사 전탑은 문헌에 의하여 그 창건 시기는 고려 태조(太祖-10세기)대

    임이 분명하지만, 현재 까지 그 탑 자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실체(實體)가 사라진 이 탑은 탑지(塔址)만 남기고 사명(寺名)을

    포함,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못한 다른 전탑보다는 훨씬 상세한 모습으

    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卷十 衿川佛宇條에 포함된

    이숭인(李崇仁)의 중수기 원문(重修記 原文) 일부를 옮겨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안양사 전탑은 실로 한국전탑의 행열(行列) 중 후미(後尾) 가

    까운 곳에서 찬연히 빛나던 마지막 거려탑(巨麗塔) 이었기 때문이다.

    [累塼七層, 蓋以瓦, 最下一層 環以周廡十又二間, 每壁繪佛扶薩人天之像,

    外樹欄循, 以限出入, 其爲巨麗他寺未有也]

    [(탑은) 7층이었는데 지붕에는 기와를 덮었고 맨 아래층 에는 주무(周

    廡) 열 두 칸을 둘렀고, 벽마다 불, 보살, 천인의 상을 그렸으며 바깥에

  • 는 난순을 세워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는데 탑의 크고 아름다음이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필자번역]

    이처럼 장려(壯麗)하였던 전탑이 오늘날 탑지(塔址)마저 찾아볼 수 없음

    은 조금은 이상한 일 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안양사 바로 서쪽에는 중초사지(中初寺址)가 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기에 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作 인데 비하여 남아있

    는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초사지에서 창건당시의 탑은 찾아볼 수 없는 셈이다.

    이처럼 가까운 두 사원간의 관계가 고려 초에는 어떠하였는지를 알아내

    는 것이 안양사 전탑의 탑지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

    각된다.(현재의 중초사지는 (주)유유산업 부지 내에 있는데 유유산업측

    이 수집해 놓은 중초사지 출토 와전(瓦塼)중에는 탑전(塔塼)으로 사용되

    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151~152쪽)

    “朝鮮의 塼塔에 대하여“

    高裕燮 [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 - 通文館 : 1972]

    “또 時代的으로도 限定하여서는 아니될 例로서 與地勝覽 卷十 衿川佛宇條

    安養寺에 寺之南有高麗太祖所建 七層塼塔 이라 있어 李崇仁의 重修記가

    실려있다.(본문 생략) 즉 고려에도 전탑은 훌륭히 있었다.

    현재 총독부 박물관에 그 탑에서 붕괴된 塼片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

    는 신라 탑전의 一樣式을 模하여 佛像을 浮彫하고 있다. (131 쪽)

  • 참고자료 제2호

    안양사 탑 중신기(安養寺 塔 重新記)

    이숭인 찬(李崇仁 撰) 국학번역원 번역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한(漢) 나라 때 축법란(竺法蘭)이라는 중에

    서 시작하여 드디어 온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중 아도(阿道)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실로 신라 때의 일이다.

    불교는 그 설(說)이 굉장하고 분방하며 매우 넓다. 또 화복(禍福)의 설

    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런 까닭에 천하 사람들이 다 귀의

    (歸依)하게 되었다. 비록 명철한 임금, 충의(忠義)한 신하일지라도 더러

    크게 절을 지어 불교를 확장시켰다. 대개 국가를 위하여 복리(福利)를

    희구하는 것이니 또한 군자(君子)의 마음 쓰는 것이 후하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부처가 돕는다는 설로써 간여하는

    자가 있어서 그의 말을 채용하여 탑(塔)과 불묘(佛廟)를 많이 두었다.

    지금 금주(衿州) 안양사(安養寺)의 탑(塔)같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자은종사(慈恩宗師) 양가도승토(兩街都僧統) 임공(林公)이 내게 와서 말

    하기를, “안양사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것입니다. 이미 퇴락하였으므로

    문하시중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 최공(崔公 崔瑩)이 지금의 주지 혜겸

    (惠謙) 대사와 더불어 개수하여 새롭게 하였습니다.

    혜겸은 저의 제자입니다. 나를 통하여 선생에게 글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자세한 것은 혜겸이 반드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혜겸이 왔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이 절에 머무른 지가 몇 해 되었습니다. 절의 유래

    를 조사하여 보니 예전에 태조께서 장차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려고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가다가 바라보니 산 위에 구름이 다섯 가지 빛

    으로 채색을 이루었으므로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과연 한 늙은 중이 구름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름을 능정(能正)이라고

  • 하였습니다. 함께 말해 보니 태조의 뜻에 맞았습니다. 이것이 이 절을

    짓게 된 유래입니다.

    절의 남쪽에 탑이 있으니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습니

    다. 맨 아래층에는 빙 둘러서 12칸의 회랑(廻廊)을 만들고, 벽마다 불

    (佛)ㆍ보살ㆍ인천(人天)의 상을 그렸으며 밖에 난간을 만들어 출입을 제

    한하게 하였습니다. 그 크고 화려한 규모가 다른 절에는 없었던 것입니

    다.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기어 거의 기울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 진실로 다

    시 세우고자 한 것이 오래였으나 힘이 부족하였습니다.

    신유년 7월에 시중(侍中) 최공(崔公)을 뵈옵고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공

    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탑(塔) 아래에서 기숙한 일이

    있었다. 우러러 태조가 이 절을 처음 경영한 일을 생각하고, 나 스스로

    맹세하기를 신(臣)이 훗날 영달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보시리라고 하였었다. 이제 지위가 모든 동료들

    의 위에 있으니 영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양광도(楊廣

    道) 안렴사(按廉使)에게 이첩(移牒)하여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그

    경비를 제공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그 공사를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저

    는 주머니를 기울이고 시주(施主)들의 희사를 모아 쌀과 콩과 돈과 베를

    모두 얼마만큼 마련하였습니다. 또 저와 같이 손이 놀고 있는 자 약간명

    을 청하여 왔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시기가 이해 8월의 어느 길일(吉日)이며 완성한 시기는 9

    월의 어느 길일이고, 낙성식을 거행한 것은 10월의 어느 길일입니다. 이

    날은 전하께서 내시 박원계(朴元桂)를 보내어 향(香)을 내리고 도승(道

    僧) 1천 명으로써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거행하여 사리 열두 개와 불아

    (佛牙) 한 개를 탑속에 안치하는 의식(儀式)을 마쳤습니다. 시주를 바친

  • 각계의 인사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거기에 단청을 장식한 때는 임술년 2월이고, 거기에 상(像)을 그린 때는

    계해년 8월이었습니다. 탑 안의 네 벽에는, 동에는 약사회(藥師會), 남

    에는 석가열반회(釋迦涅槃會), 서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의 모습을 그렸으며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에 상(像) 하나씩을 그렸으니, 소위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이란 것입니

    다.

    공사를 맡아본 무리가 4백여 명이며, 백미(白米)가 5백 95석, 콩이 2백

    석, 베가 1천 1백 55필이 쓰였습니다. 아, 이것은 막대한 비용이며 거

    대한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완성할 수 있었음은 다 우리 최 시중

    공(崔侍中公)의 서원(誓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최공은 오직 국가

    의 복리를 바랄 뿐입니다. 어찌 사사로이 자기 한 몸을 위한 일이겠습니

    까. 이러한 훌륭한 일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를 도모하려면 글로 써놓

    지 않고는 방도가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글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하였

    다.

    나는 아직 불교에 들어가 본 기회가 없었으니, 어찌 감히 말할 것이 있

    겠는가. 하지만 나는 역사의 기록을 맡은 관원이다. 모든 공사(公事)가

    있을 때는 반드시 써두는 것이 직책이다. 더구나 이 탑에서는 성스러우

    신 조종(祖宗)과 어진 재상의 두터운 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글을

    쓴 까닭이다.

  • 참고자료 제3호

    김극기(金克己) 시문(詩文)

    고려 때의 이름난 시인 김극기(金克己)가 안양사를 두고 남긴 시가 이숭

    인(李崇仁)의 안양사 탑 중신기(安養寺塔重新記) 말미에 함께 소개 되었

    는데 이 시의 내용에서 안양사가 시냇가 붉은 다리 옆에 위치하고 있음

    을 말해주고 있다.(유유산업은 삼성천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시흥쪽과 왕

    래하는 옛날 도로가 당간지주 앞을 지나 현재의 장석 광산 쪽으로 나있

    었다. 붉은 다리는 당간지주 앞의 개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다리를 건너 감색(泔色) 불궁(佛宮)에 이르니,

    조촐한 놀이길이 다행히도 부처 있는 곳과 함께 했다.

    푸른 못에는 교교하게 가을 달이 잠겼고, 붉은 잎사귀에는 쓸쓸하게 밤

    바람이 운다.

    불사(佛社) 안에는 일찍이 사객(謝客)을 용납하지 않는데, 시냇가에서

    다행히 도옹(陶翁· 陶淵明· 詩心높은 절의 주지)이 맞이한다.

    서로 이끌어 웃음 띠며 돌아가기를 늦추는데, 지는 해가 서쪽에 넘어가

    니 고갯길은 반쯤 붉어 있다.

    파리한 말을 몰아 서울로 향하다가, 우연히 안양사에 들어 유숙하다.

    참고자료 제4호

  • 안양시민의신문 기사

  • 참고자료 제5호

    중초사지 출토유물현황조사 보고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 (2001년)

    유유산업 공장 신축당시 출토된 유물로 회의실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동빈 김상기 선생의 감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유물은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중초사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현재 수막새 기와 14점, 암막새 기와 1점, 암막새 기와 편 1점, 치미 편

    2점, 전(塼) 4점, 청동발 3점, 금동용두 1점을 비롯해 모두 43점이 보관

    되어 있다. 각 유물의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4) 오각형 전

    장방형 벽돌과 삼각형 벽돌을 붙여 놓은 형태이다. 상단의 뾰족한 곳에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데, 중앙의 장방형 문을 중심으로 화살표 문양이

    주위에 시문되어 있다. 하단에는 불규칙한 음각선문이 가로방향과 사선

    방향으로 엇갈리게 시문 되어 있다.

    태토는 굵은 석립이 섞인 점토로 회청색의 경질 벽돌이다.

    (25x14,3 ㎝, 두께 5㎝)

    (25)전

    전편으로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선이 굵고 볼륨이 강한 초화문을 시문

    하였다. 같이 출토된 오각형 전으로 보아 본래는 오각형 전으로 추정된

    다. 태토는 가는 석립이 섞인 점토로서 회청색의 연질벽돌이다.

    (15,5x13㎝, 두께 4,7㎝ )

  • (26) 장방형 전

    장방형의 벽돌이다. 벽돌은 상면에 사선방향으로 9조의 음각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다.

    태토는 굵은 석립이 섞인 점토로서 회청색의 연질벽돌이다.

    (29,7x14,9㎝, 두께 4,5㎝)

    (27) 사다리꼴 전

    정삼각형 전에서 1/3 정도를 잘라내어 사다리꼴 형태로 만든 전이다.

    무문으로 각면을 매끄럽게 잘 정선 하였다.

    태토는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로 회백색의 연질벽돌이다.

    (29,5(11)x10㎝, 두께 3,3㎝)

  • 유유산업 부지 삼층석탑의

    원형복원에 대한 연구 (1)

    정 덕 한

  • 유유산업부지 삼층석탑의 원형복원에 대한 연구(1)

    서론

    이 연구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유유산업 부지에 있는 경기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삼층석탑에 대한 것으로서 이 탑이 국가보물 제5호로

    지정될 당시의 관계 자료에 나타난 원래의 모습과 훼손된 현재 상태를 비교

    하는 방법으로 망실된 부재를 확인하여 원형복원의 방법을 찾기 위한 연구

    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현대화 과정에서 공장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문화유산이 훼손된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미 국가보물로서

    의 가치를 상실한 문화재에 대하여 원래의 상태로 복원 시키려는 포기할 수

    없는 노력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자료조사과정에서 이 석탑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로 처음 지정될 당시,

    촬영된 실물사진이 수록된 도록(圖錄)과 탑체(塔體)의 실측수치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조사결과 1934년(소화 8년) 조선총독부가 269건의 보물을 지정하

    면서 사진을 촬영한 것은 남대문(崇5門)과 동대문(興仁之門) 및 圓覺寺址多

    層塔(탑골공원 13층탑) 등 3건 뿐이었고, 이 탑체(塔體)의 모습에 대하여는

    높이가 약12자(360㎝)라는 해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1938년(소화12년) 5월에 경기도가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 · 사적

    일람”에서 이 탑의 현황에 대해 “3층 석탑 가운데 1개 층이 굴러 떨어져

    탑신과 옥개가 탑 밑에 흩어져 있고 현재는 2층탑의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

    제1층의 높이는 2자9치, 제2층의 높이는 4자2치로서 전체 높이는 약12자”라

    는 구체적인 치수가 기재되어 그나마 원형 확인의 단서로 삼을 수 있었다.

    이수치를 가지고 가상공간에서 탑체를 입체적으로 원형복원 시키는 실험을

    통하여 삼층탑으로 복원된 이 탑의 높이는 현재의 366㎝ 보다 97㎝ 높은

    463㎝이었고, 상부 1개 층이 전락(轉落)하여 2개 층만 남았을 때의 높이는

    364㎝로서 공장건축으로 옮겨질 때에 잃어버린 것은 52㎝ 높이의 제2층 탑

    신(塔身)과 45㎝ 높이의 제3층 탑신 등 2개 탑신 부분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 발굴을 통하여 이들 2개 탑신만 찾는다면 100% 원형복원이 가능해져서 3층

    탑을 국가보물 제5호로 복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당초의 가상복원 실험에서 탑신받침의 치수에 비해 몸집이 작다는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는 현재의 제1층 탑신이 원형에서는 제2층 탑신 이었고 없어진

    것은 제1층 탑신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실측조사 과정에서 안양시청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김지석씨가 제시한

    유유산업측이 공장 착공 직전에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실물 사진에 나타난

    제1층 탑신의 모습이 현재의 제1층 탑신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제2층 탑신이 없어진 것으로 인정, 다시 복원실험을 하게 되었으나 옥개와

    탑신받침의 크기에 비하여 몸집이 작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또한 석탑해체 당시 작업원 으로 일한 사람들의 증언과 김지석씨가 제시한

    사진 배경으로 나온 산의 능선모습을 종합하여 볼 때 일부 공장건물이 철거

    되어야 망실된 탑신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국보와 보물

    보물은 관보(官報)에 고시(告示)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보물(寶物)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보물 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지정되

    어 1955년 이전에는 유형문화재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를 같은

    국보(國寶)로 명칭을 바꾸었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어 1963

    년 재지정하면서 728점의 지정문화재 중 386점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2001

    년 11월 현재 지정된 보물은 1,315점(해제 문화재 제외)에 이르고 있다. 국

    보지정과 보물지정의 차이점은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것 중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가장 으뜸인 것으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가장 우수하며 특이한 것으로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문화재이다.

  • 한편 국보처럼 시대를 대표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더라도 또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없더라도, 일반적인 지정의 수준에 이르면 보물이 된다. 그래서 보물

    의 수는 국보보다 많고 동형(同形)의 것들이 많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

    화재의 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보

    국보 1 호 -- 숭례문 일제 보물 제1호

    국보 2 호 -- 원각사지 십층석탑 “ 보물 제4호

    국보 3 호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 보물 제8호

    국보 4 호 -- 고달사지 부도 ( 훼손 ) “ 보물 제15호

    국보 5 호 -- 법주사 쌍사자석

    국보 6 호 -- 중원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7 호 -- 홍경사 사적비

    국보 8 호 --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국보 9 호 -- 정림사지 오층석텁

    국보10 호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보물 1 호 -- 흥인지문 일제 보물 제2호

    보물 2 호 -- 보신각종 “ 보물 제3호

    보물 3 호 -- 대원각사비 “ 보물 제5호

    보물 4 호 -- 증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6호

    보물 5 호 -- 증초사지 삼층석탑 “ 보물 제7호(제척)

    보물 6 호 --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 “ 보물 제13호

    보물 7 호 -- 원종대사 혜진탑 “ 보물 제14호

  • 보물 8 호 -- 고달사지 석불좌 “ 보물 제16호

    보물 9 호 -- 현오국사탑비 “ 보물 제17호

    보물10 호 -- 강화하점면 오층석탑 “ 보물 제18호

    중초사지 삼층석탑의 현황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유유산업 구내에 있는 고려 중기의 삼층석탑으로서

    기단을 포함한 높이 3.66m이고 국가보물 제5호였다. 본래 이 탑은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에서 동북쪽으로 약 80m 가량 되는 밭 한가운데에 상

    단의 제3층 탑신과 옥개부분이 무너져 있었는데, 이곳에 유유산업 공장이 건

    설되면서 1960년 12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삼층석탑을

    옮길 당시 묻혀 있던 기단부를 발굴하였던바 단층기단임이 판명되었고 기단

    면석 가운데 한 면이 없어 새로 치석하여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의 제2, 3층 옥신석과 노반 및 상륜부재 일체는 찾지 못한 채 복원되

    어, 현 상태는 단층기단 위에 제1층 옥신석이 있고 그 위에 세 개의 옥개석

    만 겹쳐서 쌓여 있다.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석탑은 널찍한 여

    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이 짜여 졌고 그 위에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면석

    을 받고 있는데, 이 굄대는 별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4매의 판석을 결구

    하였으며, 각형 2단이 높직하게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기단면석은 각

    면 1매씩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양쪽에는 우주가 정연하게 각각 나왔으

    나, 중앙에는 지주 등의 조각이 없다.

    현재 남면의 면석이 다른 석재로 보이는 것은 이전과 보수 때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기단갑석은 2매의 판석호로 덮었는데, 하면에는 부연이 있고 상

    면에는 탑신부를 받은 굄대가 마련되었다. 이 굄대는 각형 1단인데, 이것은

    각형 2단인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에서 벗어난 양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탑신

    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인데, 현재 남아 있는 제1층 옥신은 각 면

  • 에 양쪽 우주가 정연한 것으로 보아 없어진 2, 3층 옥신석에도 우주가 모각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각 층의 옥개석은 그 조성양식이 같으나 하면의 옥개받침은 제1층(初層)과

    2층 4단씩이고 3층은 3단으로 줄었다. 옥개석의 형태는 매우 넓고 두꺼워서

    무겁게 보이며, 따라서 제1층 옥신석은 지나치게 위축되어 보인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도 반전이 약하며 추녀 밑이 수평을 이루

    었고 옥개석 정상(頂上)면에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는 굄대가 각형 2단으로

    모각된 점은 아직도 고식(古飾)을 간직하고 있는 일면이라 하겠다.

    상륜부는 부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3층 옥개석 정상면 중앙에 찰주

    (刹柱)를 세웠던 작은 구멍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부에 비하여 기단부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다기보다

    는 균형을 잡지 못한 탑이라 하겠으며, 탑신부에서도 옥신에 비하여 옥개석

    이 너무 커서 널찍한 기단과 큼직한 옥개석 사이의 초 층 옥신석은 너무 빈

    약해 보인다. 그러므로 기단부 구조에 있어서 특이한 양식과 건조수법을 보

    이고 있을 뿐 석탑의 조형(造型)상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삼층석탑을 보물에서 제외한 경위

    문화재청의 회신

    “우리 청 에서는 1966년 일제가 지정한 모든 문화재(503건)을 대상으로 일

    제에 의하여 잘못지정 되었거나 잘못 평가된 문화재를 우리기준으로 새롭게

    재평가 하고자 일제지정문화재재평가위원회(문화재위원 32명 등 관계전문가

    34명)를 구성하여 지정의 명칭, 등급, 종별, 가치왜곡 등에 대한 재평가를 실

    시한 바 있다.

    ㅇ 경기도 안양시 소재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1963년 보물 제5호로 지정

    되었으나, 일제지정문화재 국보, 보물 실무위원회 재평가 결과와 문화재위원

  • 회 건조물분과 제8차 회의(1996년 10월24일)에서 “원형이 훼손되었으므로

    보물에서 제척하고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검토”권고 결정에 따라 1997

    년 12월 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ㅇ 위와 같은 사유로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된 보물 제5호는 비어있으며,

    다른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문화재청 건조물과 담당자)

    삼층석탑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보물지정 관계 기록

    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要覽

    朝鮮總督”社會敎育課 昭和十年

    一. 昭和八年八月發布せられだる朝鮮總督”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會官

    制に基さ設置せられたる保存會に咨文し朝鮮總督に於て指定したる物件

    は寶物二六九件古蹟七十件古蹟及名勝二件名勝及天然記念物五二件合計

    三九四件の多さに達せり

    一. 之等指定物件の各個に付其の名稱,種類,所在地等の各般に亘りこれが 解說

    を附し筆寫に代へ以て大方の覽に供することとせり

    一. 本要覽は草忽の際編纂せろを以て解說繁簡宜しきを得ず又遺漏の點なき

    保せず後日更ぬてこれが補正を行はんとす

    朝鮮古蹟名勝天然記念物要覽 目次

    六. 中初寺幢竿支柱

    七. 中初寺三層石塔

  • 指定番號 第六號

    名 稱 中初寺幢竿支柱

    所 在 地 京畿道始興郡東部面安養里

    所 有 者 國

    解 說 本幢竿支柱は花崗石の雙柱にして中央に竿を受くろ基盤あり.

    雙柱は斷面方形の石柱にして,外面に向ひ大面取となし,內方には

    上下二箇所に閂木の孔あり高さ十三尺,幅一面一尺八寸,一面一尺三寸,基盤石高さ一尺なり

    柱記によれぱ幢竿支柱は唐の寶歷二年八月六日採石し翌丁未年

    二月三十日成了とあり,卽新羅興德王十二年あり.

    中初寺は之と遠からすろ時代の創建なろべく,附近に新羅一統時

    代の石塔,礎石を見ろ.

    指定番號 弟七號

    名 稱 中初寺三層石塔

    所 在 地 京畿道始興郡東部面安養里

    所 有 者 國

    海 說 本石塔は花崗石造三層にして,高さ約十二尺なり. 新羅中初寺の

    石塔にして,寺は今廢して,石塔,幢竿支柱,礎石等を存す.

    京畿道 編纂

    京畿地方の名勝史蹟

    朝鮮地方行政學會 發行(昭和十二年五月)

  • 京畿道管內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指定 · 昭和十二年五月 現在)

    目錄

    寶物ノ部

    第一號 木造建築物 京城南大門 京城” 南大門通四丁目

    第二號 木造建築物 京城東大門 京城” 鐘路 六丁目

    第三號 工 藝 品 京城普信閣鐘 京城” 鐘路 二丁目 一百二番 垈

    第四號 石 造 物 圓覺寺址多層石塔 京城” 鐘路 二丁目 三八番 公園地

    第五號 石 造 物 圓覺寺碑 京城部 鐘路 二丁目 三八番 公園地

    第六號 石 造 物 中初寺 幢竿支柱 始興郡 東面 安養里 二一二ノ一田

    第七號 石 造 物 中初寺 三層石塔 始興郡 東面 安養里 二一三番 田

    第八號 石 造 物   北漢山 新羅 眞興王巡狩碑

    高楊郡 恩平面 舊基里 山三番ノ一

    第九號 石 造 物 開城 瞻星臺 開城” 滿月町八一番ノ一 山

    第十號 木造建築物 開城 南大門 開城” 北本町

    (昭和十二年은 1938년)

    解說

    中初寺址幢竿支柱及三層石塔

    始興郡東面安養里に在り, 安養驛の東北方自動車路約三十丁

    中初寺は新羅興德王二年丁未(今を距ろ一千百餘年前)頃の建立と傳へられ, 現在

    其の寺址に幢竿支柱二本竝立してゐろ.

    此の支柱は石造, 高さ十三尺の四角柱て, 石臺の上に四尺の距離で, 石臺の上に

    四尺の距離で立つ.

    各石柱には二ケ所の孔穴あり, 側面に刻字の跡あゐも文字は今識別出來ぬが唐

    の寶曆二年八月六日採石, 翌年二月三十日成了とあると云ふ.

    又同寺址には花崗石造り高さ約十二尺の三層石塔がある. 一層は倒落の儘一間

  • 程離れて散在してゐるから, 今は二層石塔となつてゐる.

    四角形の塔で第一層の高さ二尺九寸, 第二層の高さ四尺二寸あり, 前記幢竿支柱

    と共に中初寺の遺物である.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해설

    중초사지 당간지주 및 삼층석탑 (203쪽) 번역문

    시흥군 동면 안양리에 있는데 안양역의 동북쪽 자동차길로 30정(丁) 거리

    에 있다.

    중초사는 신라 흥덕왕2년 정미(丁未) 즉 지금으로부터 1,100 여 년 전에 건

    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그 절 자리에는 두 개의 돌로 만든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돌 받침대 위에 4자 사이를 두고 서있는 높이 13자의 4각형 돌기둥에는 저

    마다 2개씩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옆면에 글씨를 새긴 자취가 있는데 당 나

    라 보력(寶歷) 2년 8월 6일 돌을 캐서 다음해 2월 30일 만들기를 끝낸 것

    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같은 절 자리에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약12자의 3층 석탑이 있는데 1개

    층은 굴러 떨어져 1칸 거리에 흩어져 있어 현재는 2층탑이 되었다.

    4각형의 탑은 제1층의 높이가 2자9치, 제2층의 높이는 4자2치 인

    데 앞에서 소개한 당간지주와 함께 중초사의 유물이다. (필자 번역)

    한국정부의 국보와 보물지정 관계기록

    國寶古蹟名勝天然記念物總攬

  • 文敎部 (檀紀 四二九十년 三月) [1957년 3월]

    凡3

    一. 이 冊은 檀紀四二八九年 十二月末 現在 國寶古蹟名勝天然記念物을 各種

    別로 나누고 이것을 各 指定番號順으로 적었음.

    二. 地方別表는 指定番號 種別 및 名稱을 列記하고 下欄에 索引 페이지를 記

    載하였음.

    三. 檀紀四二八八年度에 實施한 指定文化財實態調査結果에 의하여 滅失燒失

    등 變動된 現況을 摘要에 簡記하였음.

    四. 所有者姓名欄에 前所有者日本人의 것은 全部 歸屬財産으로 記入하였음.

    國寶

    第六號 一基 京畿道 始興郡 東部面 安養里 二一二番의 一田 所有者 國

    第七號 一基 京畿道 始興郡 東部面 安養里 二一三番田 所有者 國

    원형복원실험

    방법

    탑체를 기단부, 제1층, 제2층, 제3층 등 4개 부분으로 나누고 기록상 명기된

    수치와 현존하는 부분의 실측 수치를 기본 수치로 삼아 가상공간에 입체적으

    로 복원 설정 입력하여 비어 있는 부재의 크기를 산출한 뒤 이를 추가 설정

    하는 방법으로 복원 실험을 하였다.

    기록상 제1층의 높이가 2자9치(95,7㎝)로 기재된 것은 실측결과 옥신(屋身)

    66㎝와 옥신받침 높이 30㎝를 합친 96㎝와 일치 하므로 1938년 당시 실측

    당시 제1층의 범위를 옥신과 추녀 끝(전각) 까지 정한 것으로 보고 이를 제1

    층의 치수로 설정하였다.

  • 과정

    제1층 옥신의 폭이 실측 결과 남북방향 59㎝ 동서방향 61㎝ 이나 이를 받아

    주는 옥신받침은 남북방향 68㎝, 동서방향 79㎝ 이고, 오히려 제2층의 옥신

    받침의 폭이 남북방향 59㎝, 동서방향 61㎝ 로서 현재의 제1층 옥신은 원래

    제2층의 옥신이 이전복원과정에서 제1층의 옥신으로 뒤 바뀐 것으로 추정하

    여 망실된 부분이 제1층의 옥신인 것으로 보고 원상복원실험을 실시한 결과

    망실된 제1층 옥신의 크기가 남북 방향 길이 68㎝ 동서 방향 길이 79㎝ 높

    이 108㎝ 인 것으로 추정된바 있다.

    그러나 안양시청 향토자료실 상임위원 김지석 씨로부터 유유산업측이 공장

    착공 직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제시되어 원점에서 현황과 실측조

    사가 다시 실시되었다.

    기단부와 제1층 옥신만 남아있는 이 사진은 사진기의 각도를 낮게 잡아 기단

    부가 잡초에 가려져 있도록 촬영된 흑백사진인데 옥신부분의 석재인 화강암

    이 부식되면서 생긴 무늬들이 현재 남아있는 옥신부분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제2층과 제3층의 옥신이 망실된 것으로 보고 이를 입

    력 자료로 설정 하였다.

    결과

    실험 결과 옥신의 높이는 제2층 52㎝, 제3층 45㎝로 추정되었고, 너비는 옥

    신받침의 크기와 제1층 옥개의 너비와 옥신의 높이에 대한 비율을 산출자료

    로 활용하여 제2층 55㎝, 제3층 42㎝로 산출 되었다.

    제3층 옥신의 추정 수치는 기록된 치수가 없고, 현존하는 옥개 부분의 실측

    자료만을 입력하여 얻은 것으로 실물과 2~5㎝의 차이가 생길 가능성도 있

    다.

    공장신축당시 삼층탑 해체작업 인부로 일했다는 김용남씨(68 · 석수동 까치

    골 거주)의 증언과 안양시청 김지석씨가 제시한 사진의 배경능선을 종합해

    볼 때 삼층석탑이 있던 장소는 유유산업 공장 동(棟) 북쪽부분 1층 건물(현

    재는 제2층에 가설건물증축) 중간지점으로서 세부 위치확인을 거쳐서 해당건

  • 물의 철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삼층탑 가상공간 입력자료

    제2차 실측 (2008. 2. 16.)

    단위 : ㎝

    기록상 수치실 측

    수 치

    옥 신 높

    이(현존)

    옥 신 높

    이 (추정)

    옥석 받침

    높이(현존)

    낙수면높

    이(현존) 복원 높이

    기 단 부 ①129 129 129

    제 1 층 2자9치 (95.7) ②96 66 30 96

    제 2 층 4자2치 (138.6) ③139 52 50 37 139

    제 3 층 45 14 20 79

    합계 12자 (361.3) ④364 195 97 94 57 ⑤443

    제 1차 실측

    2008. 1. 27. 14:00부터

    협조자 : 신흥철 (현장 관리인 · 011-327-4172)

    총 높이 옥신높이 옥개 높이 재 구성 옥개 넓이옥 신

    받침넓이옥신 넓이 비 고

    기단 127 127 127165(상단

    폭)

    1층 96 65 31 123남북-73/68

    동서-80/79

    남 북 - 5 9

    동 서- 61

    2층 60 60 110남북-64/59

    동서-63/61

    (남북-59)

    (동서- 61)

    3층 58 58 75남북-54/47

    동서-54/52

    계 283/341 192 360 하/상

    기상 원형복원 실험 결과 작성된 도면과 김지석씨가 제시한 사진자료는 다음 첨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