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동남아 식민주의 ② 식민 진출의 동기 향료무역 이득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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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 October 2016 43 42 Chindia plus 16세기 말에서 17세기까지 중상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부를 증대하기 위해 노력했으 며, 그 과정에서 대외 무역과 해외 식민지 건설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수한 장비와 화 력을 갖춘 상선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 애썼 다. 가장 성공을 거둔 나라는 17세기 유럽의 약 2 만 척 상선 중 4분의 3을 차지한 네덜란드였다. 당 시 상선은 평상시에는 문자 그대로 무역선이었 지만 전투가 발생하면 전함으로 바로 투입될 수 있었다. 중상주의 시대 유럽에서 점차 인도 및 동아시 아 무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으며 이러한 배경 에서 동인도회사들이 설립됐다. 1600년 영국 동 인도회사가 가장 먼저 세워졌다. 영국 국왕에게 서 아시아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한 이 회사 의 목적은 무엇보다 동남아의 향료 무역이었다. 1602년 창설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취지도 마 찬가지였다. 1616년에 출범한 덴마크 동인도회사 는 162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서 교역 활동을 시작 했다. 동아시아 무역에 비교적 늦게 진출한 프랑 스는 프랑스의 중상주의를 추진한 대표적 인물인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재 상이 1664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향료 무역과 경제적 이익의 추구 16~17세기 유럽 국가들이 동남아로 식민 진출한 주 동기는 향료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보겠 다는 것이었다. 이는 1511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 제독 이 믈라카에 대한 최종 공격에 앞서 전함의 장교 들과 선원들에게 행한 연설의 다음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이 도시(믈라카)를 점령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요새 건설에 찬성하는 이유는 많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 다른 이유는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마누엘 왕 을 위해 우리가 추가 봉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 도시가 무슬림들이 매년 이 해협으로 가져 오는 모든 향신료와 약재의 집산지이기 때문이 다. (…) 만약 우리가 믈라카의 이 무역을 그들의 손에서 탈취한다면 카이로와 메카가 완전히 파 멸하고 베네치아로는 향신료가 운송되지 않아 상인들이 포르투갈에 와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 라고 확신한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기 전인 1590년대에 이 미 인도와 동남아로 매년 10여 척의 상선을 파송 한 네덜란드인들은 1596년 처음으로 인도네시 아에 왔다. 이 첫 항해를 기록한 빌렘 로데베이크 츠(Willem Lodewijcksz)도 그들이 자바섬 반텐 (Banten)을 방문한 것은 향신료를 거래하기 위 한 것이라고 했다. 향료무역 이득과 선교 열정 우월감에 찬 ‘문명화 사명’이 식민지배 정당화 조흥국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email protected] 유럽의 동남아 식민주의 식민 진출의 동기 Bell Ringer 인문산책 경제적 이익 추구는 유럽 국가들이 동남아에 서 19세기 이후 식민지를 개척하는데도 가장 중 요한 동기가 됐다. 유럽 열강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9세기 초 본격적으로 아시아 식민 진출에 나섰다. 18세기 후반부터 지속돼 온 유럽의 산업 혁명으로 자원 공급지 혹은 유럽 상품의 수요지 로서 새로운 식민지 개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전파 식민 진출에서 경제적 동기 못지않게 중요한 역 할을 한 것은 기독교 전파에 대한 열정이었다. 초기 유럽인들의 비서구권 기독교 전파는 15세 기 로마교황청의 적극적인 선교 정책을 바탕으 로, 또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의 선교 열정을 기반으로 추진됐다. 로마교황청은 특히 1455년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라는 교서를 발행해 동아시아의 원주민을 기독 교로 개종하고, 동인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꺾기 위해 노력하는 포르투갈에 모로코와 동인도 사 이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 왕국을 정복하고 원주 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권한을 부여했다. 기독교는 16세기 초 이후 동남아에서 지속적 인 영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서구 식 민 세력의 무역 및 군사적 이해관계와 함께 유입 됐다. 이러한 측면은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동남아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처음 확립한 것은 1511년 믈라카를 점 령한 포르투갈이었다. 알부케르크는 그의 대원 들에게 믈라카를 공격하려는 이유로 “첫째 (이유 는)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슬림들을 내쫓고 마호 메트교의 불길을 꺼버려 이후로는 다시 일어나 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우리의 주님께 위대한 봉 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은 1641년 믈라카를 네덜란드에 빼앗 긴 후 동남아에서 식민 세력으로서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이 뿌리내린 가톨릭의 영향은 한때 그 식민지였 던 동티모르의 인구 95% 이상이 오늘날 가톨릭 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이는 필리핀 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다. 스페인은 1898년 까지 300년 이상 가톨릭을 전파해 필리핀을 인구 1억 명의 약 85%가 가톨릭 신자인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다. 프랑스도 17세기 후반 동남아에 진출할 때 가 톨릭 선교를 중시했다. 루이(Louis) 14세(재위 1643~1715년)는 1681년 북베트남의 찐(Trinh) 조정에 보낸 서신에서 “과인이 폐하와 폐하의 왕 국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 한 가지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참된 신의 가르침을 이미 포 용한 폐하의 신민들이 그것을 믿을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 과인은 심지어 만약 폐하께서 그 1989년 복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무역선 할버 만호가 네덜란드 호른 항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 세마랑에 세운 유럽 건축양식의 교회당.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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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유럽의 동남아 식민주의 ② 식민 진출의 동기 향료무역 이득과 ... · 2016-10-06 · 기반으로 추진됐다. 로마교황청은 특히 1455년 『로마누스

September / October 2016 4342 Chindia plus

16세기 말에서 17세기까지 중상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부를 증대하기 위해 노력했으

며, 그 과정에서 대외 무역과 해외 식민지 건설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수한 장비와 화

력을 갖춘 상선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 애썼

다. 가장 성공을 거둔 나라는 17세기 유럽의 약 2

만 척 상선 중 4분의 3을 차지한 네덜란드였다. 당

시 상선은 평상시에는 문자 그대로 무역선이었

지만 전투가 발생하면 전함으로 바로 투입될 수

있었다.

중상주의 시대 유럽에서 점차 인도 및 동아시

아 무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으며 이러한 배경

에서 동인도회사들이 설립됐다. 1600년 영국 동

인도회사가 가장 먼저 세워졌다. 영국 국왕에게

서 아시아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한 이 회사

의 목적은 무엇보다 동남아의 향료 무역이었다.

1602년 창설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취지도 마

찬가지였다. 1616년에 출범한 덴마크 동인도회사

는 162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서 교역 활동을 시작

했다. 동아시아 무역에 비교적 늦게 진출한 프랑

스는 프랑스의 중상주의를 추진한 대표적 인물인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재

상이 1664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향료 무역과 경제적 이익의 추구

16~17세기 유럽 국가들이 동남아로 식민 진출한

주 동기는 향료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보겠

다는 것이었다. 이는 1511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 제독

이 믈라카에 대한 최종 공격에 앞서 전함의 장교

들과 선원들에게 행한 연설의 다음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이 도시(믈라카)를 점령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요새 건설에 찬성하는 이유는 많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

다른 이유는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마누엘 왕

을 위해 우리가 추가 봉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 도시가 무슬림들이 매년 이 해협으로 가져

오는 모든 향신료와 약재의 집산지이기 때문이

다. (…) 만약 우리가 믈라카의 이 무역을 그들의

손에서 탈취한다면 카이로와 메카가 완전히 파

멸하고 베네치아로는 향신료가 운송되지 않아

상인들이 포르투갈에 와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

라고 확신한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기 전인 1590년대에 이

미 인도와 동남아로 매년 10여 척의 상선을 파송

한 네덜란드인들은 1596년 처음으로 인도네시

아에 왔다. 이 첫 항해를 기록한 빌렘 로데베이크

츠(Willem Lodewijcksz)도 그들이 자바섬 반텐

(Banten)을 방문한 것은 향신료를 거래하기 위

한 것이라고 했다.

향료무역 이득과 선교 열정

우월감에 찬 ‘문명화 사명’이 식민지배 정당화조흥국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email protected]

유럽의 동남아 식민주의 ② 식민 진출의 동기

Bell Ringer 인문산책

경제적 이익 추구는 유럽 국가들이 동남아에

서 19세기 이후 식민지를 개척하는데도 가장 중

요한 동기가 됐다. 유럽 열강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9세기 초 본격적으로 아시아 식민 진출에

나섰다. 18세기 후반부터 지속돼 온 유럽의 산업

혁명으로 자원 공급지 혹은 유럽 상품의 수요지

로서 새로운 식민지 개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전파

식민 진출에서 경제적 동기 못지않게 중요한 역

할을 한 것은 기독교 전파에 대한 열정이었다.

초기 유럽인들의 비서구권 기독교 전파는 15세

기 로마교황청의 적극적인 선교 정책을 바탕으

로, 또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의 선교 열정을

기반으로 추진됐다. 로마교황청은 특히 1455년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라는 교서를 발행해 동아시아의 원주민을 기독

교로 개종하고, 동인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꺾기

위해 노력하는 포르투갈에 모로코와 동인도 사

이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 왕국을 정복하고 원주

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권한을 부여했다.

기독교는 16세기 초 이후 동남아에서 지속적

인 영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서구 식

민 세력의 무역 및 군사적 이해관계와 함께 유입

됐다. 이러한 측면은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동남아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처음 확립한 것은 1511년 믈라카를 점

령한 포르투갈이었다. 알부케르크는 그의 대원

들에게 믈라카를 공격하려는 이유로 “첫째 (이유

는)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슬림들을 내쫓고 마호

메트교의 불길을 꺼버려 이후로는 다시 일어나

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우리의 주님께 위대한 봉

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은 1641년 믈라카를 네덜란드에 빼앗

긴 후 동남아에서 식민 세력으로서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이 뿌리내린 가톨릭의 영향은 한때 그 식민지였

던 동티모르의 인구 95% 이상이 오늘날 가톨릭

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이는 필리핀

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다. 스페인은 1898년

까지 300년 이상 가톨릭을 전파해 필리핀을 인구

1억 명의 약 85%가 가톨릭 신자인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다.

프랑스도 17세기 후반 동남아에 진출할 때 가

톨릭 선교를 중시했다. 루이(Louis) 14세(재위

1643~1715년)는 1681년 북베트남의 찐(Trinh)

조정에 보낸 서신에서 “과인이 폐하와 폐하의 왕

국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 한 가지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참된 신의 가르침을 이미 포

용한 폐하의 신민들이 그것을 믿을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 과인은 심지어 만약 폐하께서 그

1989년 복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무역선 할버 만호가 네덜란드 호른 항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 세마랑에 세운 유럽 건축양식의 교회당.

[wikimedia commons]

Page 2: 유럽의 동남아 식민주의 ② 식민 진출의 동기 향료무역 이득과 ... · 2016-10-06 · 기반으로 추진됐다. 로마교황청은 특히 1455년 『로마누스

September / October 2016 4544 Chindia plus

것이 가르치는 진리와 교훈을 양지하신다면 폐

하의 신민들에게 누구보다 앞서 그 포용의 영광

스러운 모범을 보여주시게 될 것이라고 정말 확

신합니다”라고 썼다. 루이 14세 정부는 1685년

태국으로 사신을 파견했는데, 태국 국왕을 기독

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주 목표였고 무역은 그다

음이었다.

가톨릭 신앙은 프랑스가 19세기에 베트남을

식민화할 때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랑

스 선교사들이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시

키고 있던 가톨릭은 유교를 엘리트층의 종교이

자 국가행정의 이념으로 삼았던 베트남에서 19

세기 들어 금지됐다. 1840년대 이후 박해는 더욱

심해져 1848년부터 1860년까지 25명의 유럽인

신부와 300명의 현지인 사제, 약 3만 명의 현지

인 신자가 살해됐다. 이러한 가톨릭 탄압은 1850

년대 말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한 직접적인 원

인이 됐다. 베트남에서 가톨릭은 공산주의 체제

에서 퇴보를 겪어 왔지만 오늘날 전체 인구의 약

6%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

김하고 있다.

17세기에 시작된 일련의 운동을 통해 선교 활

동을 전개한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훨씬 뒤에 동

남아에 도래했다. 개신교 선교는 네덜란드인들

이 17세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선교 활동은 19

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진행했

다. 영국은 초기에 광대하고 복잡한 인도에 주

의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남아 선교 활

동은 네덜란드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 하지만

1824~1826년의 제1차 영국-버마 전쟁 결과 미

얀마의 일부 영토를 식민지로 삼고, 1824년의 영

국·네덜란드 조약으로 말레이 반도의 식민 진출

이 자유로워지자 신속하게 개신교 선교사들의

유입을 도왔다. 이 과정은 선교적 노력과 식민 및

상업적 이해관계 간의 협력이었다.

문명화 사명

동남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식민 진출 동기와

관련해 끝으로 서구인들이 비서구 세계에 대

해 갖고 있던 이른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인들

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이 팽창해 미개한 비서

구 나라들을 지배하고 그 민족들을 통치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스페인의 신학자이자 국

제법학자인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는 1538년에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 세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의 진출이나 무역에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상대로 전쟁하는 것은 정당

하며, 또 인디언들은 인간의 위엄과 문명에 어울

리는 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할 능력이 없는 미성

년자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스페인이 라틴아

메리카를 정복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인류의 보편적 진보와

연결시킨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1910년 영국의 정치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는 하원에서 한

연설에서 서구의 식민 통치가 식민지에 정치적

발전을 가져올 뿐 아니라 결국에는 온 인류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

의 근저에는 자신들의 가치와 생활 방식을 절대

적 규범으로 간주한 반면 비서구 세계의 문화는

열등한 것으로 멸시한 유럽인의 유럽 중심적·문

화적 우월감이 놓여 있었다.

유럽 중심주의 태도는 서구인들이 비서구 원

주민들을 개화시켜 근대화된 사회로 인도해야

할 ‘문명화 사명’을 띠고 있다는 주장으로 나타

났다. 그리하여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은 미국이 1898년 필리핀을

식민화하자 ‘미국과 필리핀’이란 부제를 단 ‘백

인의 부담(White Man’s Burden)’이란 시를 써

다음과 같이 외쳤다.

백인의 의무를 수행하라, 평화의 야만적 전쟁을

기아의 입을 가득 채우고

질병에게 명하여 멈추게 하라

그리고 그대의 목표가 가까웠을 때

남들을 위한 목적도 달성되도록 하라

‘문명화 사명’은 실제 식민지 경영에서 무엇

보다도 현지인들에 대한 근대적 교육을 통해 수

행됐다.

많은 서구인은 키플링이 위의 시의 다른 대목

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반은 악마고 반

은 어린이(half-devil and half-child)”인 토착

원주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

차이나의 프랑스 총독 피에르 파스키에(Pierre

Pasquier)는 1930년 10월에 한 연설에서 “우리

는 (…) 우리의 정신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힘의

강력한 성벽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민족들이 우

리의 문명의 틀 내에서 더 나은 삶과 더 광범위한

자유의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 목적을 향해

일해야 합니다. (…) 프랑스가 언젠가는 이 아시

아 토양에서 프랑스의 재능으로부터 발아한 가

장 아름다운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꽃을 피우고

크게 뻗어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

했다.

이처럼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식민지 세계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도해 그들을 문명의 세계

로 이끌 사명을 띠고 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베트남의 가톨릭 탄압은 1850년대 말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한 직접 원인이 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베트남인 사제들의 모습.

[wikimedia commons]

Bell Ringer 인문산책Bell Ringer 인문산책

동남아의 향료

1880년대 중엽 유럽에 퍼져 있던 ‘식민주의 정당성’ 주장

동남아의 향료무역 시장에서 중요한 향료로는 정향(clove), 육두구 씨(nutmeg), 육두구 껍질(mace), 후추 등이

있다. 이들은 음식에 향을 내거나 음식의 보존을 위해 쓰이거나 약재로 사용됐다. 정향과 육두구의 원산지는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이나 일찍이 동남아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이미 12세기에는

자바섬에서 생산됐고 14세기쯤께 수마트라섬에서 대대적으로 재배됐다. 동남아의 후추 생산은 점차 증대해 17

세기에는 인도를 능가했다.

특히 육두구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탐내는 사치품 중 하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 사이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런던의 한 의사가 육두구가 흑사병의 유일한 치료제라고 말한 이후 육두구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리하여 원산지인 말루쿠의 반다(Banda) 제도에서는 약 4.5㎏에 1페니도 되지 않던 육두구가 런던에 오면 거의

600배나 뛰어 2.1파운드에 거래됐다고 한다.

1880년대 중엽 태국이 식민화 위협에 처해 있었을 때 쭐랄롱꼰(Chulalongkorn, 재위 1868~1910년) 왕, 즉 라마

(Rama) 5세는 유럽에 있는 외교관들에게 주권을 유지할 방안을 조사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런던과

파리에 주재하는 몇 명의 태국 외교관이 1885년 건의문을 작성해 라마 5세에게 보냈다. 여기서 그들은 당시

유럽인들이 비서구 국가를 식민화하고자 할 때 흔히 주장하는 식민화 정당성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전 인류에 선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 인류가 모두 같이 행복과 진보에 참여하고 동등한 공의를 누리기를

희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 아시아 국가들의 미발전은 아시아의 발전뿐 아니라 문명의 길을 가고 있는 국가들의 발전에도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미발전된 나라를 통치해 이 나라를 발전과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는 것은 유럽 국가를 위한

기회다.

▶ 이미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계속 그렇게 유지되기를 원하는 유럽 국가는 무역에 매우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약 상품과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공동의 유익을 위해 상업적으로 개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럽인에게 그런 나라를 상업적으로 개방시키고 지하자원을 개발할 기회가 된다.

육두구와 정향. [Shutterstock]

태국의 라마 5세 국왕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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