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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기념강좌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안우식 (동경 오비린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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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기념강좌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안우식

(동경 오비린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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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기념강좌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안우식 교수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마치 영화나 텔레비전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

는 광경이 있습니다. 그 광경이란 아래와 같습니다.

장소는 일본・경도(京都) 시내에 있는 시모가모(下鴨) 경찰서 뒷마당. 시일은

1945년8월15일 하오부터 수일 동안. 경찰서 뒷마당에서는 여러명의 경관들이 경찰

청사와 뒷마당 사이를 분주하게 들락낙락하고 있다. 뒷마당으로 나올 때 마다 그들

의 양손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철들이 쌓여있다. 청사로부터 나타난 경관들은 그 서

류철들을 뒷마당 한복판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처넣는다. 검은 연기가 시모가

모 경찰서를 덮치고 한없이 푸른 하늘로 솟아오른다.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필자의 한갓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

는 허황한 상상은 결코 아닙니다. 공교롭게도1972, 3년경에 만난 한권의 책에 그

근거가 들어 있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30여년이나 세월이 흘러간

일이라 그 책의 표제까지는 얼른 생각이 안납니다만 이 무렵에 읽은 이와나미 신서

(岩波新書)의 한권 속에 앞에서 상상해 본 것과 비슷한 내용의 한구절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저자 이름은 마시모 싱이찌(真下真一), 철학자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시모씨는 당시 경도에 거주하면서 어느 대학이나 연구기관 같은 데에

몸을 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하필이면 대일본제국을 대표하는

국가원수이자 육군대원수이며 아라히또가미(現人神=사람의 모습으로 이승에 나타

난 신이란 뜻으로 일제시대에는 천황을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라고 불리어 온 쇼오

와(昭和) 천황(天皇) 히로히또(裕仁)가 옥음(玉音=천황의 육성) 방송을 통하여 국민

에게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대일본제국 군대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영국 소련 중

화민국 등의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였음을 인정하고 연합국측의 제의를 무조

건으로 받아들여 항복하겠다는 내용의 칙어(勅語 =천황이 국민에게 직접 주는 형식

으로 나타내는 의사표시)를 내린 정오로부터 불과 몇시간도 안되는 동안에 자전거

를 몰고 시모가모 경찰서를 찾았을가요. 이 시모가모 경찰서라는 데가 1943년7월

10일에 송몽규를,이어서 17일에는 시인 윤동주와 고희욱을 체포 구류하여「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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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조선 독립운동사건」으로 입건하였으며 급기야 윤동주와 송몽규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간 주요 무대의 하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마시모씨가 자전거를 몰고 시모가모 경찰서까지 갔었다는 것은 이 사람이 경도

시내에 살았건 시외에 살았건 당시 경도시내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전(市電) 즉

노면(路面) 전차와 버스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에 있었음을 뜻하며 이 사실만으로도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왕도인 경도에 이상사태가 생겼음을 짐작케 합니다. 사

실 여느 때 같으면 시민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경찰서를 유독 이 날 이

시간에 한갓 평범한 시민에 불과한 마시모씨가 찾아 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

습니다. 그 까닭은 확실치 않으나 시모가모 경찰서에 대한 마시모씨의 모종의 한과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시모씨는 찾아간 시모가모 경

찰서 뒷마당에서 예상치도 않았던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관들이 증거 문건들

을 인멸하는 광경을, 가까이 점령군으로서 들이닥칠 연합군 앞에서 불리하리라고

판단되는 증거 문건들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시모가모 경찰서는 또다시 새

로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은 내용이 담긴 마

시모씨의 저서의 한구절을 읽고나서 필자가 한술 더 떠서 그 잿더미 속에 든 윤동

주의 유고를 비롯하여 윤동주가 음모했다는 독립운동과 관련되는 소위 증거문건들,

송몽규가 음모했다는 독립운동과 관련되는 소위 증거문건들, 그리고 경찰에 의한

취조조서들이 활활 타오르는 광경을 상상했음은 물론입니다.

필자가 마시모씨의 저서와 만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1972, 3년경의 일이였

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침 틈만 생기면 거주지인 동경과 경도에 있는 경도역사

자료관 사이를 부지런히 내왕하는 시기었습니다. 목적은 말할 나위도 없이 윤동주

들의 사건과 관련되는 자료들을 구하는데 있었습니다. 1972년 정월말에 필자는 동

경에서 이와나미 신서의 한권으로 「김사량―그 저항의 생애―」라는 표제로 저서를

펴낸 일이 있습니다. (2000년에 서울・문학과지성사에서 「김사량평전」 이번역,

출판됨) 그때 이 책의 서장에 대충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원문은 일본어).

“《한줄의 시를 쓴다기보다 차라리 골수를 깍고 골수에서 분출하

는 수장을 가지고 통곡을 종이 위에 베껴쓴 그의 시는 참으로

「슬픈 족속」의 혈서였다.》

이 글은 동지사대학에 재학하면서 민족적 저항의 길을 걸었으며

순난자로서 그 목숨을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지은 젊은 시인 윤동

주를 추도하여 펴낸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에

부친 편자의 말이다. 허나 어째서 이것이 윤동주 한사람만에 한정

되는 일이 되랴. 이것이야말로 열일곱번이나 되는 투옥체험 끝에

마흔 한 살로 옥중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북경대학 출신의

이육사에게도, 철창속에 갇힌 몸으로 조국해방의 여명을 맞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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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학 문학부 출신의 김광섭에게도, 일제군대로의 징병을 기

피하여 지리산중 깊숙이 헤매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민족재생의

날을 맞이하였다는 동경 아테네・프랑세 학생이었던 유진오에게

도 이 밖에 많은 시인과 작가들에게 부쳐져야 마땅한 찬사였다.”

(원문은 일본어)

말하자면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는 이 때 처음으로 시인으로서 윤동주의 이름이 출

판물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저서의 서장에 이런 구절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이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미 시인이나 문예평론가들에 의하여 숱하게 논구되어 성가도 높았던 이육사는 물

론 윤동주 김광섭 유진오 등의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1999년에 한용운시집「님의 침묵」과 함께 「이육사시집」을 일본에서 처음

으로 번역 출판했습니다. 다만 김광섭 시인에 대해서는1973년에 서울에서 있은 어

떤 문인들의 모임에서 만날 기회가 있어서 옥중체험을 기록하여 남길만한 체력이

남아 있다는 판단 밑에 그것이 공개되는 날을 기다리기로 하고――그후「나의 옥중

기」라는 표제로 창작과 비평사로부터 출판되었음――윤동주와 유진오에 대하여 주

목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진오의 경우는 알면 알수록 딱한 사정들이 생겼습니다. 새

삼스럽게 설명 드릴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유진오라는 시인은 남노당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이 사람이 남긴 작품도 그렇거니와 그의 행적조차도 당

시로서는 알 길이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모색을 거듭한 끝에 우선 일본

유학시대의 윤동주와 관련되는 사실들을 조사 발굴하는데 집중하자는 결론에 도달

하였습니다. 물론 그에 따라 중국 용정땅에 대한 조사까지도 계획해 보았지요.. 그

러나 아시다시피1970년대 당시만해도 한・중간에는 국교가 없는 상태여서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일본 국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 내고 밝힐

수 있는 사실은 밝히는 방향으로 키를 돌렸던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경도역사자

료관을 찾은 것도 송몽규 윤동주들의 사건이 터진 당시의 「경도신문」을 비롯한

지방지들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해묵은 사실들을 조사 규명하는 작업이란 지지부진하기 마련입니다. 그래

도 이러한 노력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소득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지 않았다

면 그것은 일본국내에서 윤동주를 다소라도 안다는 분들과의 만남과 이분들을 통하

여 얻을 수 있었던 그들, 특히 윤동주와 관련되는 정보들이었습나다. 서울에서 송우

혜씨의 노작「윤동주 평전」이 출판된 이후 그들에 관한 허다한 정보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에 와서는 새삼스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분들이 제공해 준 것은 주

로 은진중학교 시대의 윤동주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한 사람도 은진

중학교 졸업생이었으며 윤동주와 전후하여 소위 만주국이 일본으로 파견한 유학생

으로 선발되어 당시의 히로시마 문리과대학에 유학한 분이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

도 또한 용정 출신이며 역시 만주국이 일본으로 파견한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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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었던 소위1고 즉 제1고등학교, 동경제국대학과 미국을 거쳐 스웨덴에 유학한

후 스톡홀름대학 교수가 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당시만해도 중국

길림성 영변 조선족 자차주 영변시에 거주하는 식자층은 용정 출신의 윤동주라는

시인을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영변대학 부교장(부총장)이었던 정판용씨가

그랬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도리어 필자가 그들에 대

하여 해설해 주어야 할 판이었지요. 제작년 가을에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던

이 정판용씨는 중국에서 소위 문화대혁명 (1966~1977)이 끝나고 몇해 후에 스톡

홀름대학 교수의 소개로 필자를 찾아 부인과 함께 동경까지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10여일 동안 동경에 머무는 사이에 여러 차례 식사를 함께하는 기회가 있어

서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물어본 즉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런 사실을 두고 미루어 볼 때 다음과 같은 상상이 가능하겠지요.

연구휴가를 영변대학에서 보낸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 마수오가 1985년5

월14일에 용정 시외에 있는 윤동주의 묘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를

도와 준 영변대학 교원 권철, 이해산, 또는 용정중학교 교원 한생철이 진작부터 윤

동주에 대하여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마 오오무라 교수로부터 윤동주가 어떤 사

람인가 설명을 듣고 나서 묘비를 찾는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고..

윤동주와 송몽규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은 물론 이것만이 아니었

습니다. 여담이지만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와 관련하여 주목해도 좋을만한 한가지

새로운 사실도 일본 공안관계 자료들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본론에서 빗나

가는 것을 알면서 잠시 소개한다면 그것은 1920년대에 문단에서 활약한 소설가 서

해・최학송과 관계되는 한가지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국내에서 활약하시는 연구자

여러분에 의하여 밝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단적으로 말하면3・1독립운동이 있

었던 1919년에 최서해가 민족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정의군」에 가담했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송우혜씨의「윤동주 평전」에는 아래와 같은 한구절이 보입니

다.

“・・・김좌진 장군은1919년8월에 세칭 북로군정서(입단 당

시 명칭은 정의단, 후에 대한군정서로 개칭됨)에 들어가 사령

관으로 활약하다가・・・”(97쪽)

최서해의「정의군」과 김좌진 장군의「정의단」,「군」과「단」,글자 한자가 다를

뿐입니다. 정의군이 있고 따로 정의단이 존재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드는 당시의 상

황에 비추어 볼 때 최서해는 김좌진 장군 휘하의 일원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도 역시

“1920년10월에 청산리전투를 치르고 일본군의 대학살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안도현

을 거쳐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97쪽)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서해의 이와 같은 체

험이 그의 단편소설「탈출기」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새삼스럽

게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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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와 관련해서 한가지만 더 보탠다면, 이와 같은 그의 경력을 알고 그에 보답

하는 뜻에서 문학적으로는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춘원・이광수가, 1924년9월에 창

간된 한국 최초의 순문예 월간잡지 「조선문단」의 편집자 자리를 만주땅에서 귀국

한 최서해에게 제공한 것이 아닐가요. 이광수는 방인근과 함께 이 문예잡지를 주재

했으며 월간 문예잡지의 편집자가 되므로써 가난을 면하게 된 최서해는 1924년경

부터 단편「고국」「탈출기」를 포함한 왕성한 창작적 열매를 낳게 되었고・・・.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필자가 시인 윤동주에 관한 조사를 시작한지 몇년 지나

지 않아 주로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이 시인에 대한 관심이 확산해 나가기 시

작했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후 여러 해가 흘러가기는 했으나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인만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윤동주의 묘비를 비롯하여

송몽규와 윤동주에 관한 경찰관계 자료들을 찾아낸 것은 일본 연구자들이였고. 그

런데 그것들까지 참고 삼으면서 총체적이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 바로 오오무라 교

수도「가장 신뢰할 수 있는 평전」「(윤동주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에 대하여―별을

노래하는 시인―윤동주의 시와 연구」수록,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편, 259쪽)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송우혜씨의 「윤동주 평전」입니다. 필자도 오오무라 교수의 평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이 노작을 앞에 두고서는 윤동주나 송몽규에 관해서 감히 옥상

가설의 용기조차 안 날 지경입니다만 그래도 읽고 나니 필자가 갖고 있는 이책에는

스무군데가 넘게 쪽지가 꽂혔습니다. 필자에게는 독서할 때에 오래된 버릇이 있습

니다. 오식이나 오기 즉 글자가 잘못 되었거나 기술된 내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 혹

은 표현이 미비하다고 여겨지는 군데 또는 생각을 달리하는 군데들에 연필로 표식

을 하거나 쪽지를 꽂아 두는 게 그것입니다. 이번 쪽지들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를

들면 부산에서 관부(関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下関)에서 내린 윤동주와 송몽

규가 탄 것은 동해선이 아니라 산양본선(山陽本線)이며 오오사까로부터 경도, 나고

야(名古屋)를 거쳐 동경으로 갈 때 동해도본선 (東海道本線)을 이용하게 되며 일제

시대에 일본 국내에 있었던 제국대학 수는4개가 아니라7개, 국립고등학교는 제8고

등학교까지 있었다는 것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보다 많은 쪽지가 꽂힌 곳은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과 윤동주 및 송몽규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환경과 관련된, 아쉽게도 송우혜씨의 노작에서 새어 나가버린 군데들이

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노작에서 새어 나간 벼이삭들을 줍는 심정으로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나름대로 필자의 윤동주상을 그려 볼가 합니

다.

(1)

“그는1923년에는 다시 일본의 수도 동경으로 공부하러 갔었

다. 그래서 저 유명한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현장에서

겪었다. 동경 유학이라고는 하나, 어느 대학에 적을 두었던 것

은 아니고 학관 같은 데서 영어를 공부했다고 전해진다.”(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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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의 젊은 날과 관련해서 송우혜씨가 기술한 한 구절입

니다. 여기서 말하는「학관」이란 다음과 같은 데가 아니었을가요..

“191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 간 아버지는 우선 정칙(正則)영

어학교라는 예비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광수, 최남선, 신익희,

장덕수를 비롯한 우수한 사람들이 이 학교를 경유하고 있었

다. 뒷날3・1운동의 기수의 한사람으로 알려지게 되는 백관수

는, 최종학교 이름이 정칙영어학교로 되어 있다.・・・조선 학

생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유명인들 가운데도 학생시대에 여

기에 다닌 사람이 많다.”(원문은 일본어)

이 문장은 금년2월에 동경에서 일본말로 번역・출판된 원제목은「일제시대 우리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속에 보이는 한 구절입니다. 저자는 한국 영어영문학회 회장

이며 현대 영미소설학회 회장인 나영균씨, 일본에 유학한 저자의 부친 나경석이 첫

번째로 입학한 학교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나영균씨는 백년의 역사를 갖는 이 학교

가1896년에 동경 칸다꾸 니시키쪼오(神田区錦町)에 세워졌으며 오늘도 교사건물과

학교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니시키쪼오와 인접한 지역이 바로 진

보오쪼오 (神保町), 수루가다이(駿河台)등 현해탄을 건너 온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이모저모로 인연이 깊은 지역, 3・1독립운동에 앞서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2・8독

립선언을 하였으며 윤동주가 한때 머문 한국 YMCA 가 있고 전문적인 하숙집들과

삼성당(三省堂)을 비롯한 신간서점, 고서점들이 즐비한 한편 명치(明治), 중앙, 전수

(専修)등의 대학가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나영균씨의 부친 나경석과 그의 누이 동

생인, 한국 여류화단의 초창기를 개척한 나혜식이 유학한 시대의 이 지역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영균씨가 말하는「우수한 사람들」은 과연 무슨 매력을 느껴

정칙영어학교를「경유」하게 되었을가요. 나영균씨가 만난 교무주임은「이 학교에

는 예나 지금이나 학생명부가 없다. 여느 학교와 달라서 학년제도 없으며 수시로

학생을 모집하고 학생들은 다닐대로 다니다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고 설명하더

랍니다. 또한 송우혜씨는 관동대진재 직후의 윤영석의 생사의 소식을 몰라 불안에

싸인 고향집 가족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이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전

보 문면에는 단지 한 구절, 네바 마인도 라고 쓰여져 있었다.

동경의 윤영석이 보낸 것이었다.”(30쪽)

윤영석은 하필이면 왜 영어로 된 전보를 보냈을 가요. 표기는 일본어 음운식이지

만 분명히 영어로 된 전보, 일본글에는 마인드의〈드〉라는 글이 없어서 마인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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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또 일본어에는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라는 두 종류의 음운식 표기가 있어서

전보는 당시나 지금이나 카타카나로 쓰이므로 음운식 표기라는데 놀랄 것은 없습니

다. 영어를 이해하는 가족이 없는 것을 알면서 어째서 윤영석은 이런 익살을 부렸

을가요. 관동대진재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는 앙양감과 흥분,그리고 정칙

영어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영어와 가까이하고 있다는 긍지감 등이 윤영석이로 하여

금 이런 장난을 치게 한 것이 아닐가요..

시인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이 정칙영어학교에 다녔다고 보는 방증(傍証) 적인 근

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같은 무렵에 이 학교에 다녔다 뿐 아니라 1923년9월1일에

는 윤영석처럼 송우혜씨의 표현에 따르면「관동대지진」을,일본에서는 지진이 원인

이 되어 발생한 화재등의 재난이란 뜻에서 「관동대진재」라고 하고 있는 재난을

겪고 나서 귀국한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작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이기영.

소위 월북작가이며 1984년에 고인이 되었습니다만,일본에서 번역・소개된 이 사람

의 관동대진재 체험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 체험기를 읽고 나서 그 당시만

해도 정칙영어학교에는 현해탄을 건너 온 유학생들이 꽤 많았구나 하는 감회를 가

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영석이 겪은 관동대진재에 대하여 좀더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송우혜씨

도 밝히고 있듯이 이 대진재가 당시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6현 (한국의 도와 같

음)에 거주하고 있었던 많은 한인들에게 크나큰 재해를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송우

혜씨의 기술에서는 이 대진재에 대한 정확성과 구체성이란 점에서 부족한 아쉬움이

남기 때문입니다.

1923년9월1일 오전11시58분,동경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20여만의 가옥들이 붕괴

되고 동시에 일어난 화재로 말미암아 수도 동경은 물론 인접도시 요꼬하마까지 거

의 불바다가 되다 싶이 하였습니다. 24만여명의 사상자를 눈앞에서 본 당시의 혼란

과 공포에 흥분된 시민들이 동요하는 사태를 수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

습니다. 지진을 기화로 사회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민중들이 봉기라도 하지나 않

나 경계한 일본정부 당국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백색테로를 단행하는 계획이

었습니다. 그 계획인즉 불안감으로 전율하는 일반 시민의 관심과 주의를 딴 방향으

로 전환 유도하기 위하여 골치 아픈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탄압함으로써 그 효과를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계획을 세운 사람은 당시의 카또우(加藤) 내각의 내무대신

미즈노 렌따로우(水野錬太郎), 이자는3・1독립운동 직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

이또우 마꼬또(斉藤実)밑에서 정무총감으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과의 인연이 없

었던 것이 아니며 일상적으로 한국 사람을 증오하고 공포감을 안고 있었다고 합니

다.

그래서 이자가 마침 요꼬하마에서 발생한 도박꾼들이 세관을 습격했다는 오보(誤

報) 사건에서 배워 동경에서 가까운 치바(千葉)현 후나바시 무전국(船橋無電局)에

한 사람의 육군대위를 파견하여 9월2일 오전2시와3시에「조선인,지나(支那)인 즉

중국인,사회주의자,노름꾼,무뢰한들이 각처에서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 각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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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엄중히 단속하라」는 무전을 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무전이 방아쇠가 되어

신문호외와 그밖에도 각종 고시가 나붙고 이를 계기로 군부를 선두로 한 경찰,민간

인들로 조직된 재향군인회,경방(警防)단이라고 불렸던 자경단,소방단들이 동원되어

학살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항간에 나 돈 유언비어 또한 왈「조선인이

방화,강간,약탈한다」 「조선인이 수원지와 우물에 독약을 처넣었다」「무장한 조선

인이 요꼬하마항에 상륙했다」「조선인이 시체에서 금반지와 금니를 빼간다」등 참

으로 다양했지요.

계엄령 하에서 군대는 총검을 무기로,재향군인회는 군도(軍刀)를,경반단은 죽창과

몽둥이를,소방단은 갈고랑이를 무기로 삼은 조선인에 대한 체포와 학살은9월2일부

터 본격화하여3일에서5일 사이에 고비에 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테로는17일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극심한 비난이 있어 국제여론의 악화를 우려한 정

부와 군부의 합의 아래 테로 중지령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아

무런 죄도 없는 데도 학살 당한 조선 사람들의 수만 해도,정확히는 알 길이 없으나

약 6000명,다치거나 체포 당하거나 한 사람들은 수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 밖

에도 중국 사람들 약 3000명을 비롯하여 노동조합 간부들이 7명,무정부주의자 오

오스기 사까에(大杉栄)와 그의 처,그리고 소년이었던 오오스기의 조카가 학살당하였

습니다. 주로 9월3일부터5일에 걸쳐서 진행된 대량 학살에는 체포한 조선인을 화물

자동차로 피복창이 있었던 자리에 싣고 가서 휘발유를 뿌리고 태워 죽이는 방법을

비롯하여 총살,자살(刺殺),박살(撲殺),생매장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또 부

녀자들에 대해서는 발가벗겨 놓고 능욕하거나 국부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했다

고 전합니다.

그런데 관동대진재 당시 학살자들은 무엇을 보고 일본인과 한인을 분간했을 가요.

대지진 때 너무도 얼굴이 한인과 흡사하게 생긴 바람에 경방단의 문초에 걸려 하마

터면 갈고랑이로 박살 당할번 한 유명한 연극인이 실제로 일본에는 살았습니다. 동

경 신쥬꾸(新宿)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센다가야(千駄ヶ谷)에서 이 봉변을

당하였다고 일본을 대표하는 연극인이었던 이 사람은 성과 이름까지 갈았다는데 그

것인즉 센다 코래야(千田是也). 이 이름은 소리로 들어야 제대로 그 뜻이 이해된답

니다. 센다가야에서 코리안으로 오해를 받아 하마터면 죽을 번했다는.

그러면 학살자들은 무엇을 보고 한인과 일본인을 가려 냈겠습니까. 패전후에 발표

된 쯔보이 시게지 (坪井繁治)라는 시인이 쓴「17원50전」이라는 시의 표제가 이 의

문을 풀어 줍니다. 누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는지 학살자들은 피난하는 한인들에게

「17원50전」이라고 일본말로 발음 시켜 보고 그 발음이 어색하거나 서툴거나 하

면 그 자리에서 박살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인들에게는 꽤 힘드는 일본어 발음입

니다.

이렇게 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한인들의 위령비가 지금도 동경에서 시골로 빠져 나

가는 큰 강의 봇둑 군데군데에 찾아가는 이도 없이 처량히 서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관동대진재에서 다행히 학살의 피해를 면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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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을가요. 이 점에 대하여 앞에서 보았던 나영균씨의 저작은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학살을 면한 조선인들은 발견되는 대로 나라시노(習志野)에

있는 수용소로 호송 당하고 있다. 나라시노로 연행되어 간 사

람들은 노일전쟁 당시 러시아인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건

물에 40일에서60일 동안 수용된 후에 풀려 나갔다. 수용소생

활은 가혹했으나 적어도 목숨만은 살릴 수 있었다”(88쪽)

동경에서 나리따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나라시노의 수용소에서 풀려 나온 사

람들은 혹은 일본에서의 생활을 계속하거나 귀국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2)

윤동주는 동지사(同志社)대학이 아니라 처음에 입학한 대로 입교(立教)대학에 눌러

앉아 있어도 죽어야만 했을가요. 이 말은 윤동주가 경도가 아니라 동경에서 살았었

다면 사정은 어떠했을가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허용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가

요. 그것은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가 현해탄을 건너온 시기에 비록 소학생이기는

했지만 동경에서 나서 자라나 피부감각으로 이 시대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성장한

체험이 그런 상념을 갖게 하는 것이겠지요.

윤동주가 입교대학에서 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한,따라서 동경에서 경도로 거처를 옮

겨서 살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의견들이 피력되어 왔습니다. 1)입교대학은

영국의 성공회계의 미션스쿠울이라 윤동주와는 교파를 달리한다는 것. 2)실연에 의

한 충격과 아픔. 3)경도에는 경도제국대학에 입학한 송몽규가 산다는 것. 4)동지사

대학에는 윤동주의 시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시인 정지용도 유학했다는 것. 5)윤동

주가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논문지도를 받은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경도에 있었던

제3고등학교에 유학한 분이며 고도 경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진작

부터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 등등.

이들 중에 어느 게 정곡을 찌른 추측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필자

는3)4)5)를 합친 복합적인 동기로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가장 시인다운 동기가 아

니었을가요. 그런데 윤동주가 새로 자리를 잡은 경도나 그의 주변은 그 당시 어떤

상황 속에 있었을 가요. 윤동주가 동경에 있는 입교대학으로부터 경도에 있는 동지

사대학으로 전입학한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942년 10월1일이었습니다. 아

시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10여개월이 되는 시기입니다. 이런 시대에 군국주의

일본에서 미션스쿠울의 존속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배후에 무슨 곡절이 있었다는 뜻

이기도 합니다. 즉 기독교인들도 현세에서는 아라히또가미(現人神) 천황을 윤리적으

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통치권의 주체라는 나라의 존재방식인 국체(国体)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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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국가 곧 천황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에 있었던 동대사(灯台社)라는 기독교인들의 소그룹에 의한,

혹은 개인적인 반체제운동에 관해서는 약간의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만 그 밖에

는 찾을 길이 없다는 것에는 이러한 사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실 1912년에 기독교적인 이상주의를 건학정신으로 표방하면서 창립된 동지사대

학만해도 1920년에는 신도(神道)와 융합한 소위 일본적인 기독교,말하자 면융합이

란 이름의 야합을 창도(唱導)한 에비나 단죠우(海老名弾正)를 대학 총장 자리에 앉

힘으로써 건학정신은 크게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에비나는 또한 조합교회,정확히는

일본 조합그리스도교회를 주도(主導)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6세기 후반에 영국 국

교회로부터 독립한 이 교파는 회중(会衆)파 교회라고도 불리어 온 사실이 시사하듯

이 교회의 권위를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의 신앙에 두었습니다. 그후1886년,영국과

의 관계가 깊었던 일본에 영향을 미친 이 교파는1886년에 일본에 조합그리스도교

회를 탄생시켰으며 일본 프로테스탄트 3대교파의 하나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에비

나가 주도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는 이 교파가 일본식으로 변질했

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1939년에 제정된 종교단체법에 따라 1941년에 일본 그리

스도교단으로 통합되기는 했으나 그 동안에 조합교회는 극히 정치적인 책동에 관여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만 보더라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한 직후 그 상해로부터 어떤 독립운동의 선각자가 일본정부의 초빙

을 받아 동경땅을 밟은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여운형선생,여기에 관계하여

상해까지 선생을 찾아가서 안내자 행세를 하면서 일본정부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어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이 바로 와따세 쯔네키치(渡瀬常吉)를 선두로 한 일본 조합

교회에 소속했던 간부 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큰 여운형선생을 회유함으로써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데 있었다는 것은 두말 할 것

도 없겠지요. 1967년에 일본 그리스도교단이 공개한「전쟁책임고백」이 천황을 신

으로 모신 정치체제 아래서 침략전쟁에 가담한데 대한 반성과 함께 권력과 유착하

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은 범죄들을 저지른데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였음은 물론

입니다. 다만 윤동주가 기독교 사회에서 동지사대학이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가

알 리 만무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송몽규가 입학한 경도 제국대학의 경우,사정은 어떠했을 가요. 1928년에

경제학부 교수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추방처분을 당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어서 1933년에는 법학부 교수 타끼가와 유키토시(瀧川幸辰)도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추방처분을 당하였습니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

학을 연구하였고 무산자 운동에 관여한 탓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도)대(학)사

건」 혹은 「타끼가와 사건」이라고 일컬어진 이것은 타끼가와 교수가 그의 저서에

서 형법이란 개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극히 자유주의적인 형법학설

을 주장한 데 대하여 공산주의적이라는 레테르를 붙여 문부대신이 강권을 발동하여

일방적으로 교수를 파면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도 제국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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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치를 지키기 위하여 교수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맹렬

한 반대운동이 벌여졌으나 경관대에 의한 탄압으로 무참하게도 물러나고 말았습니

다.

그러면 한인들과 관련해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 가요.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수였던 미즈노 나오끼(水野直樹)는 그의 논문「윤동주와 경도재주 조선인」

(「별을 노래하는 시인」수록,125쪽)에서 경도 제국대학에 한정되는 일은 아니나

1941년이후 경도에 거주한 한인들 사이에서 검거 혹은 검사국으로 송치된 사건에

대하여1944년의「경도부지사(京都府知事) 인계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용하

고 있습니다.

“ 민족공산주의 그룹    경도대학생 김배준 외 8명

조선독립기독교 관계자   목사 황선이 외 6명

공산주의 그룹    입교대학생 토미따 영수 외 5명

동아연맹을 이용한 독립운동 관계자 동아연맹참여조영주 외 8명

불경(不敬)낙서사건   고등상과학교생도 김주원 외 2명

조언비어(造言蜚語)사건 외4 토우지중학생 나까야마시게지 외 6명

영화를 이용하려 한 독립운동사건 촬영조수 김도한 외 1명

해군지원을 방해하려 한 폭력행위(협박)사건 직공 카쯔야마 모리히로

조선독립운동 및 불경사 건 경도중학생 김영규 외 2명

조선독립운동사건 경도대학생 송몽규 외 2명 ”

이후에도 사건들이 발생했으리라고 봅니다만1944년말까지 한해서는 마지막 것이

윤동주 송몽규 관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윤동주가 아니라 「송몽규 외2명」으로

표기된 것은 주범과 종범의 차이, 주모자를 송몽규로 인정했기 때문이겠지요. 윤동

주에 대한 판결에서는 미결구류 일수를 산입했는데도 송몽규에 대한 판결에서는 그

것을 산입하지 않았다는 차이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

경낙서사건」「조언비어사건」「폭력행위(협박)사건」을 제외한다면 딴 것은 모조

리 악명 높은 「치안유지범 위반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바꾸면10건49명

중 치안유지법으로는 7건 39명이 체포된 셈입니다. 또한 동아연맹 사건을 포함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건이7건입니다. 그런데1944년 현재로 「요(要)경계인물」

로 지명되어「경계사찰」중에 있었던 인물이135명이므로 만약에 이들 사건관계자

가 전원 요경계 인물인 경우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될 한인들은 2・7인에 한사람 곧

3명중 1명 꼴의 매우 높은 비율로 검거되어 검사국으로 송치되는 셈이 되겠습니다.

이 처럼 퍽 긴장과 조심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어쩌다가 몹시

조심성이 필요한 지역을 골라 하숙을 정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필자에게도 낯익은

데지만 경도대학 미즈노 나오끼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이 자리 잡은 「경도시 좌경

구(左京区)는 시내에서도 한정(閑静)한 주택가인데 실은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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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거주하는 지역이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에 재일 한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내무성과 경찰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협화회(協和会)」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도부(府)에 거주한 한인은 1943년 현재로 77,796명,경도 시내에는 약

56,000명이 살았습니다. 또 시내에서도 한인이 많았던 지역은 경찰서 관할구로는

호리까와(堀川)경찰서 관내가11,574명으로 으뜸,윤동주들이 거주한 좌경구를 관할

한 시모가모(下鴨)경찰서 관내는7,040명이며 시내에11군데 있었던 경찰서 관내 중

5번째로 한인이 많았던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료들은 이 좌경구에는 한인이 한곳에 집중하여 거주한 지역이 있었

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소학교 학구별로 집게된 1935년의 조사로는 양정(養正)학

구에1741명이며 좌경구내에 거주한 조선인의45퍼센트가 이 학구에 집중하여 살았

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양정학구에서는 전세대(世帯)의13・2퍼센트가 한인 세

대,인구로는7퍼센트가 한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경도 시내만이 아니라 일본 각

처에서 볼 수 있었던 한 지역에 한인들이 집중하여 거주하는 현상은 경제적인 빈곤

과 민족적인 차별 때문에 딴 지역에서는 거처를 구할 수 없는데 그 원인이 있었습

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조선출신 동포거주 비률이 고률인 것은 주로 빈곤자 밀주

(密住) 구역 및 신시역(新市域) 방면의 학구」였다고 경도시의 사회과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양정학구 내에서도 윤동주가 살았던 타나까타카하라쪼(田中

高原町)는 실은 경도시 사회과가「특히 조선출신 동포들이 다수 밀집하는 장소」로

꼽은 시내31군데 중의 하나로 좌경구내에서도 한인 거주자가193명,거주인구의 1

7・2퍼센트를 차지하는,비률이 특출하게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좌경구내의 한인 집주(集住) 구역에는 윤동주와 같은 유학생도 살았거니와 보다

많기는 「자유노동자」즉 토목건축 방면의 날품팔이 노동자가 아니면 기껏해야 부

근에 있는 염색공장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지역에서 조금만 북쪽으

로 가면 이찌죠지(一乗寺) 지역이 있습니다. 이곳은 쿠죠(九条),사이인(西院)과 함께

경도시내에서도 전통산업과 관련된 염색공장들이 많기로 알려졌지만 1200년의 왕

도였던만큼 신사불각(神社仏閣)들의 유적을 제외한다면 전통산업인 섬유관계기업

말고는 볼만한 것이 없는 도시가 경도란 데었지요. 왕도였던 경도에는 천황과 조정

에 출시하여 천황을 모시는 쿠게(公家)라고 불린 귀족 문관들과 무사라고 부른 무

관들이 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귀족들에게 고급스로운 의복을 제공하기 위

하여 발달해 온 것이 쿄오유우젠 (京友禅) 혹은 니시진오리(西陣織)들을 생산하는

전통산업인 섬유업체와 염색업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코오베(神戸) 오

오사까(大阪) 나고야(名古屋)등 인근도시들이 모조리 미군 폭격기 B29 가 떨어뜨린

폭탄과 소이탄(焼夷弾)들의 미끼가 되었는 데도 나라(奈良)와 함께 경도에서는 폭탄

은 커녕 소이탄의 세례도 안 받은 사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윤동주는 한인 교포들이 밀주한 지역에서1942년10월부

터 다음 해 7월14일까지 약10개월간 타께다(武田) 아파트에서 하숙생활을 하였습

니다. 또 1942년4월1일에 경도 제국대학에 입학한 송몽규는 윤동주보다6개월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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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역시 좌경구내의 키타시라까와 (北白川) 히가시히라이쪼(東平井町)60번지에 있

었던 시미즈 에이이찌(清水栄一)네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하여 16개월 동안 살았

습니다. 이 두사람이5분정도의 거리를 두고 같은 좌경구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한 사

실로 미루어 경도땅을 처음으로 밟는 윤동주의 하숙을 정한 것은 먼저 자리를 잡은

송몽규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같은 정내(町内)에 적지 않

은 한인 동포들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가요. 그것도 생활고와 민족적인 차별

에 시달리는 가난한 동포들이. 물론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강의를

받으러 대학과 하숙집 사이를 오가는 길에서나 혹은 가까이에 있는 유명한 은각사

(銀閣寺)로 통하는 「철학의 길」을 산책하는 길에서 그에게 시적인 영감(霊感)을

불러 일으켜 주는 동포들과 숱하게 마주쳤겠지요. 그럴 때마다 온순한 성격의 윤동

주는 슬픔과 분노로 점점 과묵해졌을 것이고 성격이 불덩이 같은 송몽규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비분강개하는 나머지 일상적으로 속에 품고 있었던 그의 독립운동에의

포부를 토로했을 터이고・・・・・・. 그들에 대한 경도・시모가모 경찰서의 소위

말하는「조선독립운동사건」의 실상이란 사실은 그럴 때의 송몽규의 과격한 언사가

빌미가 되어 조작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오랫동안 필자의 머릿 속에서 맴돌

고 온 상념입니다. 윤동주가 경도가 아니라 동경에 유학했었더라면 하는 필자의 가

정은 동경처럼 숲이 넓은 도시일수록 가려 주고 숨겨주는 물체들도 많을테니 사정

은 그들의 경우도 좀 달라졌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에 예정하기로는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생체실험」설에 대해서도 언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생략하였습니다. 용두사미의 감

을 면치 못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만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

며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