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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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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kfg! ol뚱 2010년 10월 25일 초판 1쇄 인쇄

    2010년 10윌 30일초판 1쇄 발행

    지은이 이인수

    만든이 이싱구

    만든곳 이천문화원

    주 소 경기도이천시 영창로312 시민회관내

    전 화 031-635-2316

    팩 스 031-637-7486

    홈페이지 www.cc2000.or.kr

    제 작 도서출판홍익기획 02-2274-8110

    등 록 제 2-777호

    @ 이인수, 2010

  • IV

    01 천 의 인

    /빌간 i}

    우리 고장 이천은 아득한 옛날인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터를 이루고 살

    아온 유서갚은 고장이다. 원적산을 뒤로 한 신둔면 · 백사면 일대의 지석묘들

    을 비롯한 선사유적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시대 후기가 되면 고

    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팽창세력이 교차하는 패권 각축장이 되어 설봉산성

    과 설성산성, 효양산 토성같은 유적들을 남겼다.

    고려 건국과 함께 이천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고장은, 성종 때 거란 80만

    대군의 침입을 적장과의 담판으로 물리쳐서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던 나라의 운명을 구한 서희徐熙 선생을 배출하였다. 서회의 가문인 이전

    서씨는 서펼에서 서희, 서눌까지 삼대에 걸친 명 재상을 배출한 고려조의 손

    꼽히는명문이었다.

    조선조 초의 대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이천향교기에서 말하기를 당시 이

    천은 ‘땅이 넓고 기름져서 백성이 많고 부유하다’ 고 했다. 조선 건국초 이천

    현이라 불리웠던 이 고을은 세종 26년에 인구가 천 호 이상이 되었으므로 예

    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하게 된다. 서선 · 김길통 · 최숙정 · 이관의 등은 조선

    전기에 이전을 빛낸 인물들이다.

    중종 때 대학자 모재暴顆 김안국金安國이 기묘년의 화를 피해와서 이천 풋골

    (지금의 부발읍 죽당리)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모재는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모

    아 가르치고, 농장을 손수 경영하기도 했다. 후진 양성과 향촌교화를 위해 힘

  • 쓰면서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니 당시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던 퇴계가

    그를 만나러 이천을 다녀간 적도 있다. 소위 괴정육현뾰펀六웠이라 하여 모재

    와 함께 어올렸던 성담령 · 강은 · 엄용순 등은 당시 이천의 대표적인 사림파

    선비틀이었다.

    임진 · 병자 양 난을 당해 나라가 위난에 빠졌을 때 이천은 김명원 · 이성

    임 · 박병룡 · 박난영 · 이홍망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신미양요 때 강화도

    진무중군으로 광성진을 사수하다 순절한 어재연 장군은 고장의 대표적인 충

    신이다.

    이 책은 이천학술총서 아홉 번 째 권으로 이천이 배출했거나 이천과 갚은 관

    련을 맺은 인물들을 널리 소개하기 위한 책이다. 최근 선양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서희 선생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천의 인물 연구는 거의 불모지

    나 마찬가지인 실정이었다.

    이천의 인물들을 보다 심도있게 조명한 이 책이 우리 고장 향토사 연구에 중

    요한 단서가 되리라 확신하며, 집필에 심혈을 기울이신 이인수 국장님의 노고

    에감사드린다.

    2010년 9월 30일

    이전문호변장 이상구

    V

    발 간 사

  • VI 이 천 의 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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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머 리 어|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는 우리 고장 이천이 자랑하는 인물로 최근 이천시에

    서는 서희 선생을 선양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해 오고 있다. 서희

    의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 고장의 인물사 연구는 거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향토사를 연구한다는 사람으로 늘 부끄럽던 차에 이 책을 엮어 내면서

    이제 겨우 짐 하나를 벗어놓은 것 같다.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이며 농학자인 류달영 박사께서 일찍이 서희 인물선

    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유럽이나 일본 같은 문화선진

    국을 가보면 고장의 유명 인물들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것들은 모두 소중하

    게 보전하여 후손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

    리 고장에서도 훌륭한 인물들을 통해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큰 자부심을 느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자부심이 없다면 앞날에 대한

    희망도 고장의 밝은 미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물사 연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관련 자료

    의 부족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필자같은문외한들도 역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옛 문헌들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과거에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일이니 그 만큼 세월이 좋아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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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r이천의 인물」 편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이천출신 및 이전

    과관련 있는 인물 28인에 대한자료들을 정리하여 수록했다 r이천읍지」 인불

    편에 수록돼 있는 서원徐遠 · 홍흡洪治 · 박란朴蘭 · 이현문李顯門 · 어석명魚錫命

    같은 분들은 구체적인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를 찾지 못해 부득이 제외하였다.

    조선 후기의 인물 몇 분도 같은 이유에서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양녕대군 이제李提와 모재茶顆 김안국金安國은 이천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에

    서 오래 살면서 향촌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세자의 자리에

    서 쫓겨 나게 된 양녕대군은 처음에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듬

    해인 1419년(세종 1) 상왕 태종의 명에 의해 이천으로 배소를 옮기게 되며, 이

    후 18년 동안을 이천에서 살면서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모재는 중종조 기묘사화 이후 향촌 선비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준 인물

    이었다.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 난 그는 이듬해인 1520년(중종 15) 이천 춧골

    로 내려와 터를 잡고 8년 동안을 살았으며 이후 여주 이포로 거처를 옮겨 다시

    벼슬길에 오르는 1537년(중종 32)까지 계속해서 이천을 드나들면서 선비들과 교

    유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r모재집」에 보면 이천을 주제로 했거나 괴정

    육현塊훔六賢을 비롯한 이곳 선비들과 주고받은 많은 시와 글들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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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편에 수록한 충 · 효 · 열 인물들은 과거 r이천읍지』와 『읍죽군읍지』에 수

    록된 인물들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중 박난영朴蘭英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은

    이천의 대표적인 충신이지만 이미 제3편에서 다루었으므로 중복을 피하였다.

    r이천의 인물」발간으로 이천시지 편찬 이후 문화원이 연차 사업으로 추진해

    온 이천학술총서 편찬사업도 웬만큼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됐다. 여건이 허

    락된다면 앞으로는 청소년들을 위한 향토사 편찬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

    다. 처음이다 보니 미흡한 부분도 많지만 이 책이 우리 고장 인물사 연구에 작

    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때-이천의인물

    2010년, 가을의 문턱에서

    李仁洙

  • 못/ /케.

    발간사' ••• IV

    글머리에 ••• V I

    석itl깥 고려시대의 인물

    임금님이 내린금술잔도마다한徐쩌***3

    겨레의 위대한스승徐맥 ••• 11

    심대 째 정승이 된徐때 ••• 33

    성품이 어질고무예에도능했던徐짜 ••• 39

    작l싼쉰i 조선전기의 인물

    성품이 곧고 맡은 일에충실했던 徐選••• 47

    利川에서 16년동안귀양살이 한짧寧大君 •• ‘ 53

    시육신의 죽음앞에 자신의 글불사른金吉述 ••• 61

    성종을탄복시칸학자李파義 ••• 73

    고호탤노래한詩A 깐깐해파 ••• 77

    도량었는재상이었던 파成公 #않휩 ••• 91

    칭앉폈가부친처럼 섬겼던 成째敵***99

    제川 춧골에서 성리학보급에 힘쓴金安閔 ••• 107

  • 호암산에우거,학처럼짧윈건姜1隱 ••• 129

    嚴用”며과오늘도푸른六觸혼의 느티나무 ••• 135

    詩와해금을벗삼고살잊랜吳慶 ••• 145

    괴정육현의 일인 任짧昆 ••• 151

    문무를겸전했던오옥선생 李聖任••• 157

    임진왜란때팔도도원수金命元 ••• 161

    ‘r찮驚 초선후기의 인물 안주성전투의용장朴命龍징군 ••• 173

    병자호란때 적진에서 순절한朴蘭英 ••• 179

    일곱고을에송덕비가선李弘望 ••• 183

    홍장거유들이 宗師로삼은李顧i1i ••• 191

    학문과육예가뛰어났던 때밟훨E홉 ••• 195

    강원감사로선정베푼 宋廷奎••• 199

    五君子의 한사랍으로문명이 높R뀔 宋與••• 205

    利川이 배출한틱월한유학자李핸 ••• 209

    利川의 천주교전래와순교자鄭澈 ••• 223

    신미양요와 충신 때在淵장군 ••• 235

  • 충·효·열인물

    중 ••• 251

    충신金應健

    효 ••• 252

    효자 金碩助/효자 宋天民/효부양녀(良女)終伊/

    박도연(朴道淵)의 처 효부李~/효자 金道興/효자 金파/효자 金跳/

    효자사노〈私쨌) 徐太金/효자朴弘殺/효자金錫龍과부인 §양J\;

    열 ••• 265

    곽계형 (郭季亨)의 처 열녀 뽑~/정적(鄭週)의 처 열녀 金民/

    한검(韓險) 처 열녀 朴民/열녀 사비(私陣) 永禮/경시강t없時짜)의 처 열녀 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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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인물

  • 임금님이 내린 금술잔도 마다한

    1~ 585

    사슴의 보은으로 태어난 아이

    이천을 본향으로 하고 있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성씨들 중 유일한 성씨인

    이천 서씨는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孝찮山에 묘가 있는 신라 아간阿千 서신일術lþ

    씬을 시조로 하고 았다. 서씨의 처음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r.문헌비고」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밴이 난을 피해 이천 서아

    성徐阿城으로 피난을 왔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성을 서씨로 했다는 설과, 백제

    가 망한 후 의자왕의 왕자 중 하나가 당나라로 망명하여 벼슬살이를 하면서,

    부여技餘 씨의 ‘餘’ 를 ‘徐’ 로 바꿔서 성을 삼았다는 백제 왕족의 후예설이 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씨 대부분이 이전 서씨에서 비롯되어 달성 · 대구 · 남

    양 · 연산 · 장성 등 여러 이본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서신일은 통일신라말 조정에서 아간대부란 벼슬에 있었으나, 세상이 어지러

    3

    서 펼

  • 4 0) 천 의

    인 물

    운 것을 보고 동생 신통術뼈과 더불어 이천 효양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포성당布뿔堂을 짓고 스스로 처사라 부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간

    대부란 신라의 관직 17등급 중 여섯 번 째인 아찬阿쉽을 말한다. 신일에게는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나이 팔섭이 다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

    는 것이었다. 동생 신통이 제안하기를 자신의 아이를 양자로 삼아서 가문의

    대를 잇도록 하자고 하였지만 동생에게도 아들이 하나 뿐이었으므로 신일은

    동생의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r고려사」 서희 열전에 보면 서신일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국초(고려초)에 서멸의 。}벼자 서신얼이 교외에 살고 있었는데 하

    류는 샤슴이 화쌀을 맞고서 딸려왔다. 서신얼이 二Z 쌀을 뽑고서

    숨겨쥬어 샤냥칸이 장지 뭇하고폴야갔다.꿈에 한신인해λ이 나

    타나서 샤례하는말이 ‘샤슴은나의 아들이다.그배의 힘을잉어

    야플이 욕습을 유했으나 마땅히 二2배의 착손을 랙대효 채상이 되

    거1 하려랴’ 라였다. 신얼이 냐아 팔섭에 필을 낳았는데 과연 펄 ·

    희 · 놓아 이어셔 채상이 되었다1)

    사냥문에게 쫓기는 사슴을 살려준 은공으로 효양산 신령으로부터 계시를 받

    아 나이 팔십 세에 아들 필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r세종실록 지리지」나 r동국

    여지승람」 등에도 소개되어 있는 이천의 유명한 설화 중 하나다. 한편 '_flj}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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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고려사J 94권, 열전7 , 서희

  • 이란 지명이 생겨나게 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눈 앞에 둔 태조 19년(서기 936)의 일이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군과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이

    천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고려군이 복하천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홍수가 나서

    시빨건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는 시벗물을 건너려고 해도 건널 수

    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중도에서 출정을 포기하고 군사들을 되돌려야 할 판인

    데, 이를 본 효양산에 사는 서목쩌낌이란 사람이 앞장 서서 물길을 인도하여

    모든 군사들이 무사히 뱃불을 건널 수 있었다. 그후 신검군을 물리쳐서 마침

    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개선한 태조가 서목의 일을 가상하게 여겨 이 고을에

    이천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하니 이것이 이천이란 고을 이름이 생겨나게 된

    내력이다.

    이천 서씨 족보에 의하면 서목은 신일의 양자가 될 뻔했던 동생 신통의 아들

    이니 서펼에게는 사촌형이다. 이 땅이름에 얼킨 서목의 일화는 당시 이천지방

    을 대표하는 호족 집단으로 추정되는 이천 서씨들이 태조 왕건을 도와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사실을 반영한 다고 볼 수 있다.

    바른 말로 임금을 깨우친 명재상

    정민공찌댔公 서펼徐%'ì은 901년(효공왕 5)에 태어났으며, 965년(광종 16)에 65세

    로 사망했다. 그가 생존해 있던 시기는 후삼국의 패권 각축과 고려의 건국을

    거쳐, 제4대 왕으로 정종의 친동생인 광종이 즉위하면서 왕권강화를 비롯한

    5

    서 펼

  • 6 이 천 의 인 물

    외교와 국방정책의 강화, 과거제 실시를 비롯한 각종 제도정비 등을 통해서

    국가 체제의 새로운 틀을 잡아 가던 시기였다.

    서필에 관해서는 r고려사」 열전에 간략한 행적이 실려 있는데 ‘서필은 이천

    사람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처음 도필]筆로 진출한 뒤 계속 벼

    슬이 높아져서 대광내의령大또內議令에 이르렀다.’ 2)고 하였다. 도필은 문서작성

    을 담당하는 말단 관리이며 내의령은 고려초 삼성의 하나인 내의성內짧쉽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관직이다. 이렇게 말단 관리로 시작해서 문관의 최고위직

    까지 오른 사실을 보면 그가 매우 뛰어난 관리였음을 알 수 있으나, 보다 구체

    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r고려사」 열전에는 서필의 청렴 강직한 성품을 알려주는 몇가지 일화가 나

    오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광종은 사치한 것을 좋。}라는 임긍이었다. 어느날 광종이 채상

    왕함맨조JÆ흉t. 황보광겸홍험j캅황과서펄에게 긍으로 만든슐잔을상

    으로 쥬었는데 서펄 흔자서만 샤양하고 맏지 않았다. 엄긍이 2.

    까탑을융으나 펄이 배당랴~l를 ‘신이 채상규설을제대료뭇하면

    서도과윤한은총을임었는데 다시 긍드로만든그릇을내려시나

    더육 송유스럼고 풍어} 념치는 얼엽니다. 의복과 二Z릇의 쓰임에는

    각각 유별이 있어야 하고, 샤치와 경소한 정도에 따랴셔 냐랴의

    치 란;짧L이 좌유되는 것 엽니 다. 만얼 신 하들이 긍그릇을 쓴다면

    엄긍께서는앞으료뮤슨그릇을쓰시렵니까’랴였다.그의 말에 광

    r~..rr ..... -.:..'r..I:..Y2‘’"'"그~r ....... "=>.~'":ε~r..II..r..rI..r~그~"'-..r ....... "'-~'G."C.‘n~.r ..... "'-~~'G.'rrr ....... 'r ....... ~ ....... ""'-~그;r ..... 'r ....... ~r~二;::εεr.r..LJ..~二.r~그ε.r~"-..r~ι:r_..~"-rr ....... "-....... ~_..",=

    2) r고려사」권93. 열전7 3) 위의 잭.

  • 종은 깨달은 바가 있어 ‘二Z매가 세상 샤람틀이 진귀하게 여기는

    보융을 j효율효 여 ~1 ̂ 1 않으나 냐논 경의 말을 보율료 삼을 것이 요’랴고치하라였다.

    일찍이 서필이 임금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원컨대 성상께서는 공

    없는 자에게 상을 주지 마시고 공 있는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광

    종이 잠자코 있다가 이튿날 측근을 보내서 ‘공있는 자는 누구이며 공없는 자

    는 누구인개를 물어 오도록 했다. 서필이 측근 신하에게 말하기를 ‘공 있는

    사람은 원보元따 · 식회式셉를 말히는 것이고 공없는 자란 바로 너희들이니 반

    드시 이대로 아뢰어라’ 고 대답하였다.

    광종이 고려로 귀화해 온 중국 사람틀을 후대하여 신하들의 저택과 처녀들

    을 골라 나누어 주곤 하였다. 하루는 필이 ‘신이 사는 집도 제법 넓은 편이니

    바치고자 합니다’ 라고 아뢰자 광종이 그 까닭을 물었다. 펼이 대답하기를

    ‘지금 귀화한 사람들이 벼슬을 골라 차지하고 좋은 집을 골라 살고 있는데 대

    대로 국록을 받는 신하들은 오히려 옛 집을 잃은 사람이 많습니다. 신의 어리

    석은 소견으로 자손들의 뒷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이 살아 있을 때 집을

    거두어 주신다면, 남은 봉록으로 다시 작은 집을 마련하여 앞날에 후회가 없

    도록 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광종은 화가 났으나 나중에 뉘우치고는 다시는

    신히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또 내구內멜에서 기르던 말이 갑자기 죽자 광종이 노해서 말을 돌보았던 관

    리를 처벌하려고 했다. 이 때 서펼이 말하기를 ‘옛날 공자께서는 마구간에 갑

    자기 불이 나서 그 속에 었던 말이 타죽었을 때 사람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먼

    저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하고 공자의 어진 행실을 예로 들어

    7

  • 간하여 관리의 죄를 면하게 해준 일도 있었다. 서펼은 이렇게 틈만 있으면 바

    른 말로 임금을 깨우쳐서 잘못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965년(광종 16)에 서펼이 별세하자 삼중대광 태사내사령三핑大[초 太師內史令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민貞따이다.994년(성종 13) 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開國 貞敏公으로 광종묘정에 배항

    서필 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이천지방

    에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처음 관계

    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것 등을 보면 그가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그리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 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도 광종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

    광종계 인물로 보는 상반된 의견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광종이 쌍기떨S와

    같은 귀화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섰던 일에

    서 보여지듯이, 직언과 간쟁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즉 훈신勳면 세력의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의나 직언이 광종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 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고, 내사령이라는 높은 관직에 까지 오를 만큼 중용되고 있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돼야 한다는 뭇을 피력하여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

    혁 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4)

    -8-

    이천의인물

    ’:r-...... r ..I""' ..... ...--..I..I:..,r-..I~_...Ir ...... ..-Ir ...... ~:J.二'"ε.r..rr....:二;:-...... ...--...... .., ...... ..,..-..I ...... ..,.-_I:I ...... ~r ...... ...-I .... I ..I ...... ~I ...... 'r"~.rI~:.,;.그~...:.:;,....--..Ir.r_r~ε""ι;ε~I ....... ~ ..... ...-..zJ:..ι:二‘;::...... 그~r ...... ~ .... 느 ... ...--J~→’: 4) r민족문화대백과사전J12권, 64쪽

  • 서필은 이처럼 광종의 정책에 일부 비판적이면서도 임금의 정치개학을 적극

    지지한 인물로 보이며 그로 인해 광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높이 등용 되

    고 있는 것이다. 광종 묘정의 배향공신이 서필과 유신성쩔뻐뼈 단 두 사람뿐인

    점도 위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셈이다.

    족보에 의하면 서펼이 서염微 · 서희鋼 · 서영經 세 아들을 둔 것으로 되

    어 있는데, 서희를 제외한 나머지 두 아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서필

    의 묘는 아들 서희의 묘와 함께 여주군 산북면 후리 상두산에 있다.

    9

    서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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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뺨‘ 4후ψ

    /7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 전략가 H-서희

    외교부 장관 서희, 국방부 장관 이순신, 해양수산부 장관 장보고, 통일부 장

    관 김구 등은 수 년전 인터넷 상에 등장했던 ‘내각드림팀’ 의 각료 이름들이

    다. 내각드림팀이란 그 무렵에 중동에서 한국인이 테러 조직에 납치당해 피살

    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의 외교적 무능력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함께, 역

    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쌓은 위인들로 가상의 꿈의 내각을 구성해 본 내용

    인 것이다. 장위공쭉威公 서희徐照는 고려 성종조의 명신으로, 우리 역사상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전략가인 동시에 자주정신에 투철한 외교관이었다.

    성종 12년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입해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

    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혼자몸으로 호랑이굴과도 같은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과 담판하여 적군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함으로써 나라를 위험

  • n-이천의인물

    에서 구해 냈다. 몇 마디 말로 적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그리 대수

    롭지 않은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희의 외교 담판에는 앞 일을 내

    다보는 지혜와 뛰어난 판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해 자신의 폼을

    돌보지 않는 불굴의 용기와 애국충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도 서희를 가리켜 ‘겨레의 위대한 스승’ 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1)

    서희는 내의령內짧令 서펼徐펴의 둘째 아들로 서기 942년(태조 25)2)에 태어났

    다. 어릴 때 이름은 염윤없允이며 호를 복전폐11이라 했으니 그가 태어나서 어

    린 시절을 보낸 효양산 밑을 흐르는 복하천에서 따온 이름으로 추정된다. 서

    회의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造은 이천 서씨 시조로 통일신라 말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효양산에서 살았다. 신일은 나이 팔십이 다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

    어 걱정이었는데, 하루는 사냥문의 화살을 맞고 쫓기는 사슴을 구해주고 그

    보답으로 팔십 세에 외동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슴의 보은으로 얻은

    아들이 서희의 부친인 서필인데 임금 앞에서도 서슴없이 바른 말을 잘 하기

    로 이름났던 청렴 강직한 인물이었다.

    서희는서기 960년(광종 11). 18세의 아직 어린 나이로과거를보아갑과에 급

    제한 후 광평원외랑탱評§싸郞에 임명되었다. 원외랑은 광평성의 정6품 벼슬로

    과거급제자의 첫 관직으로는 파격적인 인사였으니 서희의 자질이 그만큼 뛰

    어났음을 알 수 있다. 31세 때인 972년(광종 23) 내의시랑內짧샤郞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을 받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고려와 송은 10여 년

    동안 국교가 중단된 상태였는데 서희의 절도있고 예법에 맞는 언행을 가상히

    여긴 송의 태조가 검교병부상서險校兵部때필란 벼슬을 내렸다. 뒷날 거란과의

    X二r-..I:.εr..rII-ζεrIII.E~그r-I-._I-I:..ε.r..I:.εr..I ....... ...-~..--I .... .-.:.....--~→:ε.r...:::.. ... ~I ..... r~~二r~I_,."'-I_.~~ε.r....::.εr~...I.Ir~τ,r_.:rτrI_..~_":二.. ...-~→ :....-...II ....... ~I.ÆI1J.....-II-

    1) r대동렁 메시지J(1999) r徐熙서거 1000주기 추모학술대회」 자료집, 이전문화원 고구려연구회 2) 서회의 출성연도에 대해서는 서기 942년과 943년 두가지 설이 있으나 942년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李仁洙(2009) r서희 선생에 관한몇가지 쟁점들J r확뜯어 고쳐야할이땅의 0 1릅들J217-218쪽, 이천문화원

  • 외교 담판을 통해 보여준 그의 탁월한 외교술이 이 때부터 싹든 것이라 하겠

    다.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에 있는 갯머리 성황당에는 당시 송나라로 가기 위

    해 이 곳 해안에서 배를 띄웠던 서희에 얼킨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

    42세 때 인 983년(성종 2) 좌승左책을 거 쳐 병관어사兵官때까가 되고, 같은 해

    다시 정2품 내사시랑 평장사內史l:ye~平]둔따로 승진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입해 오자, 서희는 임금의 명을 받고 중군사ψ폐핏가 되어 적

    의 대군을 막게 되었다. 이 때 성종도 서경으로 거동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대

    비책을의논했다.

    그런데 거란의 위세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대부분의 신하들이, 거란이 요구

    하는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맺는 것이 좋겠다고 할지론씨l밴펴

    을 주장했다. 성종도 할지론에 따르려고 하는데 서희가 앞장 서서 굴욕적인

    화진을 반대하고 나섰다. ‘적들과 한번 싸워 본 후에 화친을 의논해도 늦지 않

    다’ 고 성종을 설득한 서희는 정확한 정세 판단을 통해 이미 거란의 속셈이 무

    엇인지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단신으로 적진을 찾아가서 적장 소

    항덕쩌효짧)과 담판하여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의 대군을 물러가게 함으로

    써 위태롭기 그지 없었던 나라의 운명을 구해 냈으니 서희의 나이 52세 때

    일이다.

    이듬해부터 쉴 새 없이 북진 개척에 나서서 군사틀을 이꿀고 압록강 남쪽 경

    내에 까지 내려와 살던 여진족을 몰아낸 후 청천강 이북 280리 땅에 성을 쌓

    고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 때부터 비로소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 연안까지 미

    치게 되었다. 이처럼 쉴 틈도 없이 나핫일에 힘을 쏟았던 서희가 병을 얻어 서

    ?二rr....... ..-_:-_..":m~~ ..... ..-~.-y-...r_,.'r'I"'1""' ..... ~~...r.:;,‘~~..-~_r_....-...... ~_....-_I'_r ...... ..-_r • ..-...... ..-_r_:τr ..... ..-...... ..-...... ~..-_....-_r_:-Jτr_:τrr ... ..-.-rr ..... r_:-_r...:그~J그~ ..... ..-:......-..... ..-_....-I_.. ... νr-r ..... ..-..... ..--...... ..-...... ...-...... ..-_r ....... ...--...... ...--f ..... ~

    3) 소항덕은 과거의 문헌에는 모두 소손녕(第끊寧)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항덕이 본래의 이름이며, 손녕은 자(字)이므로 소항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李仁洙, 앞의 잭.220쪽

    n-서희

  • μ-이천의인물

    기 998년(목종1) 7월, 55세의 한창 일할나이로 별세하니, 나라에서는국장國쫓

    의 예를 갖추어서 장례지내고 장위章威란 시호를 내렸다.

    서기 1027년(현종 18) 성종 묘정에 배향되고, 1033년(덕종 2)에는 태사太師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8왕을 모신 숭의전뿔

    짧£을 경기도 연천에 세우고 1451년(문종 1)에 는 고려조의 대표적인 충신 16

    인을 배향공신으로 제향했는데, 이 때 서희도 공신의 한사람으로 위패가 모셔

    졌다. 1564년(명종 19)에는 이관의李寬줬 · 김안국金安댐과 함께 이천 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고려의 북방정책과 거란

    거란찢升-거타이은 퉁구스와 몽고의 흔혈족으로 알려진 동호來胡 계통의 한 종

    족이었다.5세기 무렵부터 만주 남부를 흐르는 요하않河-시라무렌강 상류지역에

    서 여러 부족 집단으로 나뒤어 유목생활을 해왔다.

    그 후로도 거란인들은 주로 중국의 만리장성 북쪽 넓은 초원지대를 무대로

    흩어져 살면서, 수 백년 동안을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가축을 놓아 먹이기에

    적당한 땅을 찾아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

    구려의 전성기 때인 장수왕 시절에는 거란의 일부가 고구려에 예속된 적도 있

    었으며, 8세기 무렵부터는 당나라 위그르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거란의 여

    러 부족 집단들 중에서도 특히 8개 부족들의 힘이 강해서, 이들 8개 부족 가

    운데 한 사람의 맹주가 선출되어 전체 부족을 다스렸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

  • 인 강대국이었던 당과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에서 일어나 발해의 세력에 눌

    려서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거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운 사람은 요의 태조인 야율아

    보기때t阿保機였다. 10세기 초 당의 멸망을 전후로 중국이 혼란에 빠진 시기를

    틈타서, 차츰 세력을 넓힌 야율아보기는 마침내 부족 전체를 통합하고 916년

    에 거란국을 세웠으며 얼마 후에는 나라 이름을 ‘대요大않’ 라 고쳤다. 서기

    925년, 요의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발해를 공격하여, 이듬해 2월 서울인 홀

    한성忽규城을점령함으로써 발해를멸망시켰다. 그여세를몰아서 거란은중국

    본토까지 진출하여 지금의 북경지방을 포함히는 연운키않 16주를 손아귀에 넣

    는 등 중국 북부와 만주에 걸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서기 960년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새로이 일어나고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 나가고 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

    세는 이렇듯 신흥강국인 송과 거란, 고려, 세 나라가 서로 세력을 마주한 상태

    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란의 팽창정책은 이를 주시하던 고려, 송과 필연적인

    마찰을 가져 올 수 밖에 없었다.

    뒷 날 서희가 거란의 적장과 외교 담판에서 강력하게 주장했듯 고려는 고구

    려를 계승해서 세워진 나라였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써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이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뭇에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국을 세운 직후인 922년(태조 5), 거란은 닥

    타 · 말 등을 예물로 보내면서 고려에 수교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려는 그 이

    전부터 버려진 땅이던 명양 옛 터에 성을 개축하여 북방 진출을 위한 전초기

    지로 삼는 등 북진 개척에 힘을 쏟았다. 서기 922년과 그 이듬해에도 태조는

    몸소서경을순행하고 이후로도틈만있으면서경까지 행차하여 제사를올리

    5-서띄

  • m-이전의인물

    거나 북진을 순행하면서 중요한 곳에 성책을 쌓도록 했다. 고려 건국 초는 남

    쪽에 신라와 후백제가 아직도 건재해 있던 시절이다. 삼국이 서로 패권을 다

    투던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도 태조가 이처럼 북방 개척에 정성을 기울인 것은

    고려의 북방정책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고구려를 계승해서 일어난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 당하자 태조는 거란을 더

    욱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때였으므로 마땅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서기 936년(태조 19), 통일

    의 대업이 완성되자 곧 후진後룹과 손을 잡고 거란을 협공할 계책을 모색했지

    만 실현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942년(태조 25) 10월에 거란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펼을 예물로 보내왔다. 그러나 태조는 사신을 붙잡아 섬으로 귀양보

    내도록 하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萬夫橋 다리 밑에 매어 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태조가 이처럼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강경한 조치를 내린 것은, 고려와 같

    은 민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며, 신의를 모르는 야

    만족인 거란과는 국교를 맺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한

    편 거란은 당시 그들의 국내 사정이 불안정한 데다가 얼마 후 중국에서 일어

    난 송과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고려로부터 받은 치욕적인 대응에 대해서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고려 태조는 임종 때까지도 거란을 미워해서, 자손들에

    게 남긴 훈요십조힘11뿜-Hlt 속에 ‘거란은 금수의 나라로 우리와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이를 정도였다.

    태조의 돗을 이은 고려의 국왕들은 나날이 강성해 가는 거란과의 충돌에 대

    비하여 국방력을튼튼히 하는데 힘썼다. 즉정종때 서경을근거지로광군사光

    軍허를 조직하여 군사들을 조련하고, 광종 때는 고려의 서북면인 맹산 · 박천

    등 청천강 유역과 영흥 · 고원 등 동북면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도록

  • 했다. 한편 외교면에서는 거란과 전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송과 국교를 맺어

    서, 두 나라가 서로 손잡고 거란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폈다. 서기 972년 서희

    가 광종의 명을 받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 것도 고려의 이같은 외교정

    책 때문이 었다. 그 결과 982년(성종 4)에는 송나라가 고려로 사신을 보내서 거

    란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의해 오기도 했다.

    거란을 적대시 하는 고려의 정책은 거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잖은 위협이

    되었다. 983년 거란에서는 6대 임금인 성종원이 즉위하는데, 그는 장차 송

    을 굴복시켜 대륙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거란이 안심하고 송

    을 공격하려면 우선 다른 한 쪽에서 위협이 되고 있는 고려를 먼저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거란의 성종은 고려가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거란

    을 섬기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기 993년 마침내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공격하기에이르렀다.

    그러나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수 차례에 걸친 거란의 고려 침공은 서희와

    강조냈化 · 양규楊재 · 강감찬확벼였 · 강민첨갖RIlf.1 등과 같은 뛰어난 인물틀의 활

    약과 고려군의 굳센 저항에 부딪쳐서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η-서펙

    거란의 고려 침입과 서희

    거란은 고려를 공격하기에 앞서서 장애물이 되는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부터

    정별에 나섰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려 건국에 이르기까지 평양 이북 땅은 주

    인 없이 버려진 땅이었다. 고려가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청천강 이북 일부

  • mm-이천의인물

    지역까지 국토를 넓히기는 했지만, 그 북쪽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들과 발해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송나라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는데 그

    중요한 품목은 말이 었다. 한창 때는 연간 1만 필의 우수한 말들이 송으로 보내

    졌으니, 이와 같은 여진과 송의 관계가 거란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거

    란은 성종뿔宗이 왕위에 오른 서기 982년부터 해마다 여진 정벌에 나서서 압

    록강 유역을 평정해 나갔다. 발해의 유민들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세운 정안

    국定安댐을 멸망시킨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986년(고려 성종5)에 거란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했으나 고려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고려 정벌 의지는 더욱 굳어졌

    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자신의 사위인 동경유수 소항덕에게 영을 내려 고

    려 1차 침입을 감행하기에 이르니 서기 993년(고려 성종 12) 윤 10월이었다. 이

    에 앞서 5월에 서북계 여진인들이 거란의 동정이 심상치 않다고 알려 왔으나

    고려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들였다. 그러다가 8월에 다시 여진인들이 사

    태가 위급함을 알리자, 그제서야 성종은 각 도로 전령을 보내서 군비를 갖추

    도록 영을 내렸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의

    대군을맞게되었다.

    거란 대군의 침공으로 상황이 급박해진 성종은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

    로 삼고, 서회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삼아 적을 막도록

    했다. 또 성종도 몸소 서경에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로 나가서 군사들을 독려

    하려고 했으나, 적군이 봉산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도에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봉산군을 공격한 거란은 첫 싸움에서 고려군의 선봉인 급사중

    給事中 윤서안尹f.îfJJl을 사로잡아 기세를 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군사 서희가

  • 봉산군을 구하기 위해 급히 군시를 이꿀고 달려가니 작은 승리에 취해 오만

    해진 적장소항덕이 공언하기를

    유려 냐랴가。1 마 고유려의 옛 영료를차지하고 있었는데, 자긍

    너희 고려까유려 강료흘정령랴였가 해윤에 료벨하려 온것이다.

    하였다. 또 서신을 보내오기를 ‘우리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아직까지

    귀순하지 않는나라는기어코소탕할터이니 지체 말고속히 항복하라’고위

    협했다. 이 상황을 살펴 본 서희는 고려가 적당히 양보만 한다면 거란이 굳이

    씨움을 하지않고 화친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래서 돌아와 임

    금에게 ‘저틀이 화친할 의사가 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서희의 보고를 들은 성종은 감찰사헌藍察司않 이몽전李쫓많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서 화의를 청했다. 기고만장해진 소항덕이 ‘80만 대군이 이르렀다. 만약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시킬 터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속히 우

    리 군영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라’ 고 항복을 강요했다. 이몽전이 고려

    를 침공한 이유를 묻자 적장이 대답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

    므로 우리가 천벌을 내리려고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맺으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고 말도 안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협박을 되풀이 했다.

    이몽전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성종은 즉시 신하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거란의 대군을 대적할 수 없으니 중신들이 군시들

    을 거느리고 가서 항복하자고 하는가 하면 혹은 황주에서 자비령갚悲챔에 이

    르는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떼어 주고 그곳을 경계로 하여 서경 이남의

    땅이나마 보존하자고 하는 등, 굴욕적인 화친을 맺자는 의견들 뿐이었다. 마

    mη-서띄

  • 20

    01 천 의

    인 물

    침내 성종도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자는 할지론폼뼈5숨을 따르기로 하고, 서

    경 창고에 있는 군량미를 모두 풀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는 군량미

    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동강 물 속으로 던져버릴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서희가 이 굴욕적인 강화론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서희는 말하

    기를,

    식량이 녁녁하면 가허 성을지켈 슈 있고싸융에서 승리할슈도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영력이 약하고 강한 데 딸련 것이 야니

    라, 적의 약접을 잘 엿보아 칸샤를 융적이는데 달렸슴니다. 더유

    나식량은백성들의 생영이나마찬가지이요료,차라리 적의 슈중

    에 플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함뷰료 버려서는 안휩니다. 이는 랴늘

    의 뜻에도어웃냐는얼엄니다.이

    서희의 말을 들은 성종은 그의 의견을 옳게 여겨 군량미를 강물에 던져 버리

    라고 한 명령을 거두었다. 이어서 그는 할지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반대하면

    서 이렇게말했다.

    거 란의 동경후후어'l~ì 유리 얀육뷰훗~1:용P어l 이 료가 까지 슈 백 려

    땅은 원래 여전족이 상던 땅임니다. 광종께서 二Z 곳을 빼앗아 가

    쥬嘉:H'I . 송광짧 등의 성을 쌍으셨는데 이제 겨란야 온 것은 。1

    듀 성을 차지하려는 것 쁨암니다. 그런데 저플。1 고유려의 옛 땅

    ’~":l..~..r..I ..... ~"':..~"-rr-""::"T"I ...... "-..r~τr:Lε=그ζ~그~""':J..T;_εrI'~"G.."'T_..

  • 을 찾겠다고 공언하는 것은샤설 유려를 말」로써 협딱하겠다는속

    셈엠니다.그려으로지긍거란의 위셔1 만을보고경솔하게 서경 。1

    육의 땅을 떼어 쥬자는 것은 묘책이 야념니다. 자음의 삼각산 。1

    육 또한 모듀 고유려의 옛 땅인데 그플야 한없는 욕심으로 。1 곳

    까지 강요한다연 二Z때는 또 어떻게 라사 협냐까?Sl

    서희의 이 말속에는거란과의 앞날까지 미리 내다보는그의 뛰어난안목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의 서울 이북의 땅도 고구려의 땅이었으므로 거란에게

    맥없이 양보만 하다가는 나중에는 고려의 서울인 개경까지 떼어 줄 수 밖에

    없다는 돗이다. 서희는 이어서 ‘한 나라의 강토를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갈

    라 준다는 것은 실로 자손만대의 수치입니다. 폐하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힘껏 적과 싸워 보도록 한 연후에 그 때가서 화친을 의논해

    도늦지 않습니다.’하고싸울것을주장했다.

    이 때 민관어사民官때팎인 이지백李知白이 나서며 ‘성조몇패께서 나라를 일으

    걱 그 위엄을 자손에 물려주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 적이 강하다고 해서

    가볍게 강토를 갈라 준다니 원통합니다.’ 하고 서희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지

    백은이어서 시 한수를지어 옮기를 ‘천리 강산을젖먹이 아이처럼 가볍게 여

    기다니 두 조정의 대신틀이 초주멘周를 원망하노라’ 6l고 하였다. 이것은 옛날

    중국삼국시대 촉나라의 대신인 초주가왕에게 권해 국토를위나라로 넘겨 주

    도록 했기 때문에 천추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시를 예로 들어, 할지

    론을주장하는신하들의 어리석음을조롱한것이다.

    r_r.J.T"" ...... ..-~그r ...... ..-L.II.~'r'~~-:r::...'r..JJ..~"Q,.~二;r..... "'::ì..~~~...-J::.ε;r_r;.εr..r.J.'F"" ...... ..-___..~'F"" ...... ..-_Lε:τ;r_r1그w..-...... ~~..-_. .... ~:.....-...... ..-~그’:r~τrr-r .... .-~그←TI~τr_n..-__....-...... "C.εr ...... r ......

  • 22

    OJ 천 의

    인 돋i

    성종도 비로소 깨닫고 서희의 의견을 쫓아서 땅을 떼어 주고 화친을 맺으려

    고했던 결심을바꾸게 되었다.

    서희와 소항덕의 역사적 담판

    한편 소항덕은 고려의 회탑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청천강을 넘

    어 안융진安1:x:鎭을 공격해 왔으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決方이 힘껏

    싸워 거란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거란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한 채 사

    람을 보내서 항복할 것을 재촉했다. 성종이 다시 합문 사인開門舍A 장영張瑩을

    거란군 진영으로 보냈는데 소항덕은 트집 잡기를 마땅히 고려의 대신을 보

    내서 나와 면담케 하라’ 고 요구했다. 성종은 할 수 없이 군신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의논하도록 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

    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에 공을 세우겠는7r 하고 물었으나 아무도 감히 나

    서는 신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랑이 굴과도 같은 적진을 혼자서 찾아

    간다는 것은 목숨을 돌보지 않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런데 이 때 서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감히 어

    명을 받들고 적장을 만나겠습니다.’ 하고 사신이 되기를 자청했다. 성종은 서

    희의 두 손을 잡아 치하하고, 강변까지 몸소 행차하여 적진으로 가는 그를 배

    웅했다.

    거란군 진영에 도착한 서희가 통역을 시켜 소항덕을 만나기를 청하니, 항덕

    은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요 그대는 작은 나라의 신하이니 마땅히 뜰 아래

  • 엎드려서 절을 하라’ 고 요구했다. 서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응수하기를 ‘그

    대가 임금이라면 신하의 예로써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같은 대신들이 만나는데 어느 한 쪽이 절을 하는 예법은 받아들일 수 없다’ 고

    거절했다. 이 일로 통역관들이 몇 차례씩 오고 가게 되자, 서희는 그대로 처소

    로돌아와서 자리를펴고누워 버렸다.

    언돗 생각하기에 적장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

    이의 외교적인 교섭은 두 나라의 대표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주고

    받을수 있어야한다. 이 때 만일 서희가항덕에게 굴복하여 머리를숙였더라

    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적장 앞에서 고려의 입장과 요구조건을 관철시커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항덕은 서희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단상에서 서로 같은 신하의 자격으로 만날 것을 허락했다. 서희의 예리한 판

    단력과 두둑한 배짱이 이미 적장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예를 올린 후 마주보고 앉았다. 소

    항덕이 먼저 서희에게 말했다.

    그래의 냐랴는 옛 신라땅에서 얼어났고 (유리는고유려 땅어l"'~ 얼어

    났으나) 고유려 땅은 유리의 소유다. 그렌터1 二Z배 냐라가 유리 땅을

    점령하였다. 또 유리와 국경을 캡하고 있는데도 야다 건너 송을

    섬가고 있기 해윤에 이벤어1 유리가정벨을 하게 된 것이다.끼

    ~J~그rI"_r__.....-r~τ~~"-...I그’-:J..~~~~..J>.~..rI ..... ""J."Si....-..... ~Tj...-..... ~"':....-...J..~~_L.;,.'C....-r"''':r..I' ...... 'rI:.;:-: • ..-_..'':rr J.'''":r_r ...... ..-Ir__..그ε~ ...... ...-_I'r_....-r_þ,..-..... "'":r;,...-..rr_....-_r_r_.:r: .... ..-~...-_r~그’"L“r

    7) r고려사j 권93 , 열전7 , 서희전

    서 희

  • 24

    01 천 의

    인 물

    소항덕의 이 말을 통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해 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

    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란이 고구려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구려의 정통

    성을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며, 또한 고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인 거란을 제쳐 두고 송과 외교관계를 맺은 데 대한 불만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서회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2.래의 딸은 샤살아 아니다. 유리나라야 말로 고유려의 옛 땅에

    서 얼어났기 때윤에 국효흘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음을 한 것이

    다. 땅의 경계;로 온다연 그대 냐랴의 동경도 다 유리 경내에 있는

    데 어찌 국경을 침멈했다고 하는가. 압록강 얀팎도 또한 유려 땅

    인데 지긍여진이 플어와서 상연서 샤이를가흐막야조맹라지 풋

    했다.만얼 여진을쫓고유리 옛 땅을되찾아성을쌍고도로가흥

    랴게 되면 어찌 슈교하지 않겠는가. 장칸야 냐의 의견을 장칸의

    임긍께 전달한다면 흘럼없이 이를 받아플이거l 훨 것이다 8)

    서희의 말은 추호의 빈틈도 없이 단호하면서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서

    희의 태도를 본 항덕은 고려가 쉽사리 양보하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는 수 없이 거란왕에게 담판 결과를 보고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를 물었더니, 거란의 성종으로 부터는 ‘고려가 화친하기를 스스로 먼저 청

    해 왔으니 군사를 회군시커도록 하라’는 회답이 왔다.

    이렇게 해서 거란은 고려가 압록강 동쪽의 땅을 소유하는 것을 정식으로 인

    정하는 대신, 거란과 국교를 맺고 거란의 연호를 시용한다는 형식적인 조건을

    8) 위의잭

  • 내세워 군사를 거두고 스스로 불러갔다. 이처럼 거란이 순순히 물러간 데에는

    예상보다도 강한 고려군과의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과,

    수 많은 병력을 적지에 오랜 동안 주둔시키기 어려운 그들의 속사정도 작용하

    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란의 의중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이에 단

    호하면서도 슬기롭게 대처한 서희의 탁월한 자주 외교의 값진 승리라 하겠다.

    거란과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나서 소항덕은 진중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서희의 노고를 치하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희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임금과 신히들이 모두 황급하게 무기를 손에 잡고 전쟁터로

    나온지 여러 날이 되었소 그러니 내 어찌 한가하게 잔치를 즐길 수 있겠소’ 하

    였다. 그래도 항덕은 뭇을 굽히지 않고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서 화의를

    이룬 마당에 환영의 예가 없어서야 어디 되겠는캐 하고 다시 권하여, 서희는

    승낙하고 거란 진영에 7일 동안을 머물면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소항덕이 이처럼 분에 넘치는 환대를 베푼 이유는 상대국 대선에 대한 단순

    한 예의상의 접대라기 보다도 서희의 비범한 인품에 이꿀린 탓이 아닌가 여겨

    진다. 서희가 칠일 만에 소항덕과 작별하고 거란 진영을 떠나오는데, 항덕은

    낙타 열 마리, 말 백 마리, 양 천 마리와 비단 오백 필을 예물로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북진 개척에 나선 서희

    서희의 역사적인 담판 결과 거란은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고 거란의 연호

    를 사용한다는 형식적인 화의 조건으로 명분을 세워 처음에는 고려를 통째로

    25

    서 희

  • 26 이 천 의 인 물

    집어 삼킬 듯 기세등등했던 대 병력을 스스로 되돌리고 말았다. 한편 고려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주인이 분명치 않았던 압록강 연안 지역이

    바로 고려의 영토라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해서 당시의 강대국인 거란으로 하

    여금 이를 인정토록 했으니 뭇하지 않았던 큰 선물까지 얻은 셈이었다. 이것

    은 서희의 결단력과 슬기 그리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용

    기와 충성심에서 얻어진 값진 성과이며 일찍이 우리 외교사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빛나는승리였다.

    만일 할지론에 대한 서희의 강력한 반대와 외교적 교섭이 없었다고 가정하

    면, 십중팔구 고려 조정은 대부분의 신하들이 주장했던 대로 서경 이북의 땅

    을 거란에게 떼어 주고 굴욕적인 회친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고려는

    거란의 속국처럼 되어 나라의 주권을 외국에 간섭당하는 수치를 두고 두고 감

    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의 북쪽을 거란이 지배함으로

    써, 장차국토의 보전마저 어려운상황이 되었을지도모른다.

    이와 같이 서희는 나라의 운멍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 주

    변 정세를 꾀뚫어 보는 갚은 통창력으로 거란의 속셈을 간파하고, 목숨을 돌

    보지 않은 용기와 결단력으로 적장과 외교적 담판을 벌려 나라의 위기를 구해

    냈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에서 돌아오는 날 성종은 몹시 기뻐하며 백관들을

    거느리고 몸소 강가에 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았다. 이어서 성종은 서둘러 박

    양유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거란왕에게 예물을 보내려고 했다. 이를 본 서희가

    ‘신이 항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옛 땅을 도로 찾은 다음 국교를 맺

    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강 이 쪽 땅을 회복했을 뿐이니, 강 저 편까지 회

    수될 때를 기다렸다가 국교를 정상화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고 만류하였

    다. 그러나 성종은 ‘오래도록 왕래가 없으면 무슨 후완이라도 있을까 염려된

  • 다’ 고 하여 거란으로 사신을 보냈다.

    거란의 침입이 있던 이듬해인 994년(성종 13)부터 서희는 군사를 이끌고 북진

    개척에 나섰다. 이때 서희가 개척한 북방 영토를 흔히 강동6주江찌六JH라 부르

    고 있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여섯 개가 아닌 여닮 개의 성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9)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이 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과 발해의 세력권

    으로 나뉘어져 지배를 받기도 했다. 발해가 망하고 나서 주인없는 땅처럼 되

    어버린 이 지역으로 여진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때로는 고려의 변방까지 내려

    와약탈행위를하는등문제거리가돼 있었다.

    소항덕과 담판 결과에 따라서 거란이 고려의 북진 개척을 묵인하고 그 소유

    를 인정하기로 약속한 절호의 기회를 서희는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이 지

    역에 사는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 일부를 되찾아 영토를 확장함

    으로써, 건국 이래의 숙원이던 북진 정책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

    게 북진 개척에 나선 서희는 장흥長興 · 귀짧펴化 · 곽주폐11' 귀주웬 1I 네 곳에

    성과 보루를 쌓았다. 다음 해에도 또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안의갖찮 · 흥화

    쩌化 · 선주피'11 • 맹주힘.11 네 곳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렇듯 3년 동안에 걸쳐서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북진 개척에 힘쓴 결

    과, 청천강 이북의 땅 280리를 확보하여 이 때부터 비로소 고려의 영토가 압

    록강 연안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후일 거란의 2차 침략 이후 거란이 고려에

    게 반환을 요구했던 강동6주의 대부분이 이 때 서희의 노력으로 그 기초가 이

    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서희가 쉴새없이 북진을 개척하고 성을 쌓아 거란과 접경 지역에 대한 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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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01 천 의

    인 물

    를 튼튼히 한데에는, 주변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던 그가 앞으로

    거란의 또 다른 침략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희가 개척한 북진은 실제로 후일 일어난 거란의 잇단 침입 당시 고려군의

    중요한 방어진지가 되어 적을 물리치거나 침입을 지연시키는데 있어 큰 역할

    을했던것이다.

    고려의 큰 벌이 지다.

    부친 서펼의 청렴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은 서희 역시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

    을 서슴치 않는 강직한 신하였다.983년(성종 2) 병관어사로 왕의 행차를 수행

    하여 서경에 갔는데, 성종이 몰래 영명사란 절로 놀러 가려고 했다. 서회가 글

    을 올려 그것이 옳지 않다고 간하니, 성종이 놀러 가려했던 계획을 중지하고,

    도리어 말과 안장을 상으로 내렸으며 내사시랑으로 승진시켰다. 또 일찍이 임

    금을 호위하고 해주에 갔을 때 성종이 서회의 막사를 찾아와 안으로 들어 오

    려고 했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의 막사는 폐하께서 오실 곳이 못됩니다.’ 하

    고 제지했다. 이어서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신의 술은 폐하께 드릴만

    한 것이 못됩니다’ 고 거절하니, 성종은 시종에게 명해 어주를 가져 오도록 해

    서, 막사 밖에 술상을 차려 함께 술을 마신 후 돌아 갔다.

    공빈령供줬令 정우현鄭X玄이 당시 바르게 다스려야 할 일곱가지 일을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웅을 사게 되었다. 성종이 재상들을 모아놓고

    ‘정우현이 감히 직책에서 벗어난 일을 논했으니 벌을 주는 것이 어떻겠는7}'

  • 하자, 신하들이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고 하였으나 서희가 흔자서 반

    대하고 나섰다. 서희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잔하는 데 있어 관직의 유용이 없었는데 직책을 뱃어

    났다는것이 무슨죄엽니까? 신이 채쥬가없는 샤람드효채상자

    리에 잘뭇 앉야 있으변셔, 지위를 흉치고 헛되이 늑만 먹었기 때

    윤에 직픔이 낮은자가정샤의 장잘옷을논하도록하였으나 이것

    은 신의 죄엠니다. 더우냐 정유현이 논한 엘플은 배단허 적캘한

    것플아니 오히려 상을쥬어 장려해야마땅합니다 1이

    고 변호하였다. 성종이 크게 깨달아 정우현을 감찰어사로 임명하고, 서회에

    게는 수 놓은 안장과 궁에서 기르던 말, 그리고 술과 과실 등을 내려 위로하고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의 벼슬을 내렸다. 쉴새없이 북진 개척에 나서서 3년 동안

    이나 여진 정벌과 영토 확장에 정성을 쏟았던 서희는 996년(성종 15)에 병을 얻

    어 자리에 둡게 되었다. 그가 개국사며댐후라는 절에 틀어가 병을 치료하고 있

    는데, 성종이 봄소 행차하여 문병하면서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내렸다. 또

    곡식 천 석을 절에 시주하여 서희의 병이 속히 쾌유되기를 벌었다.

    그러나 병이 점점 위독해 져서 998년(목종 1) 음력 7월27일 55세의 한창 일

    할 나이로 별세하니, 나라의 기둥이었던 큰 별이 떨어지고 만 셈이었다. 목종

    은 슬퍼하여 베 천 펼, 보리 삼백 석, 쌀 오백 섬, 뇌원차따밍茶 이백 각, 대차大

    茶 십 근, 단향목 삼백 량을 부의로 내리고, 국장의 예를 갖춰 장사지냈으며 시

    1이 r고려사j 권93 , 열전7 , 서희전

    29

    서 띄

  • 30

    0) 천 의

    인 물

    호를 장위활威라 했다. 서회의 묘는 부친 서필의 묘와 함께 여주군 산북면 후

    리 상두산鍵山 기숨에 있다.

    서희의 후손으로는 맏아들 서눌徐쾌과 둘째 아들 서유걸徐維않, 셋째 서위徐많

    외에도 측실에서 서주행徐周行을 낳아서 모두 사형제 아들을 둔 것으로 나온

    다. 서눌은 삼중대광 내사령三펀大[혹內핏令으로, 서필에서 눌에 이르는 조손 3대

    가 나란히 내사성의 최고 벼슬을 지내고 임금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

    다. 둘째 서유걸은 좌복야左않射를 셋째 서위는 이름이 서유위徐짧않로 소개된

    곳도 있으며 벼슬이 장야서령掌治뽑令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서희의 가장 큰 업적은 말할 것도 없이 적장 소항덕과의 외교 담판으로거란

    의 대군을 스스로 물러가도록 해서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나라의 운명을 구한

    일이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당시 송과 거란을 비롯하여 고려를 둘러 싼 주변

    국들에 대한 그의 높은 안목과 정확한 판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서희는

    거란이 80만 대군이라고 위협하면서 고려를 멸망시커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

    고 있지만, 송나라와 대치한 상태에서 전쟁을 오래 꿀기가 어려운 처지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적당히 물러가기 위한 명분만 세워 준다면 거란과의 화

    친이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서회는 조리있는 말과 당당한 태도로

    적장을 설득하여, 거란과 국교를 맺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작은 명분을

    주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큰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사리 판단이 뛰어난

    탁월한 외교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서희는 바르고 강직한 성품에다 진정한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임금

    과 신햄이 모두 겁을 집어 먹고 군량미를 대동강 물에 던지고자 했을 때 바

    른 말로 간해서 이를 중지시킨 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맺으려

    는 것을 앞장서서 반대한 일, 아무도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적장과의 담

  • 판을 자청하여 적진을 찾아 간 일 등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호랑이굴과

    도 같은 적진에 들어가서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한 태도로 적장과 맞서

    서, 오히려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용기없이는 불가능한 일

    이며, 이것은 서희의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

    롯되었다고볼수있다.

    서희가 이룩한 북방 영토의 개척도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이다. 서

    희는 거란과의 담판을 통해 얻어 낸 북진 개척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하

    다고 보았다. 거란에게는 방해가 되는 여진을 몰아내고 교통로를 열겠다고 했

    지만,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건국 이래의 숙원인 북진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희는 쉴 틈도 없이 군사를 이꿀

    고 여진족 정벌에 나서서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기에 흔신의 힘을 다했다.

    만일 서희가 좀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북진 개척이 계속 되었더라면, 고려

    는 압록강 너머까지도 영토를 넓혀 진정한 고구려의 계승을 이루었을 지도 모

    른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앞장서서 나라를 구한 서회

    의 지혜와 용기, 뛰어난 애국심은, 우리 역사 속의 등불이 되어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죄-서의

  • 앙대 째 정승이 된

    徐음맴

    內史令을 지내고 정종 묘정에 배향 죄-서눌

    원숙공元펴公 서눌徐때은 본관이 이천으로 고려 성종 때 거란의 침략을 적장

    과 외교 담판으로 물리친 태보내사령太%內있令 서희짧Q의 맏아들이다. 서둘의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과거에 급제한 후 40년이 념도록 성종 · 현

    종 · 덕종 · 정종 네 임금을 섭기면서 어진 정시를 폈다.

    서눌은할아버지 서필 아버지 서희에 이어 내사성內史강의 최고 벼슬인 내사

    령內史令을 지내고 정종 묘정에 배향됨으로써, 조손 삼대가 나란히 정승 벼슬

    을 지내고 임금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일찍이 둘의 증조부인 서신

    일徐깨迎이 사냥문의 화살을 맞고 쫓기는 사슴을 구해주고 나서, 효양산 신령

    으로부터 짜땅히 그대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이 되도록 하리라’는

    예언을 들었는데, 신령의 예언이 틀어맞았던 셈이다.

  • 34 01 천 의 인

    서눌은 996년(성종 15) 갑과에 급제하였으니, 부친 서희가 압록강 동쪽 북진

    개척에 심혈을 기울이던 무렵이다, 1016년(현종 7) , 어사대 중승쩌]史휩中후이 되

    고, 이듬해 형부시랑쩌뼈뿜n으로 사신이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018년(현종

    9) 상서이부시랑尙랍짧待郞겸 좌간의대부左遊大夫를 거쳐서, 1021년(현종 12)에

    는 국자쇄주 지이부사띠子헛活 知호웹핍를 지냈다, 1022년(현종 13), 딸이 현종의

    비1)로간택되면서 중추사우산기상시中樞많右歸해파로승진했으며, 이듬해 1월

    에 참지정사창知政판가 되었다, 1024년(현종 15) 서북면 행영도통行합웹統이 되고,

    그후 내사시랑內써흉따 · 판서경유수사#個京많守필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待郞平章事로 판상서이부λ담때밥호部펄를 겸하였다.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검교태사檢校太師와 문하시중門下댐中을 차례로 지냈다.

    1036년(정종 2) , 승하한 덕종의 신주를 태묘치행에 모시는데 그 예절을 둘러싸

    고 신하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 서눌이 옛 노나라의 예를 들어 대안

    을 제시함으로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서눌이 경학에도 조예가 깊었음

    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038년(정종 4) 5월에는 고려로 귀화한 여진족 구

    둔h따과 고도화高刀化 두 사람이 도령장군都짧쯤뭘 개로댐路와 재물을 두고 다투

    다가, 개로가 취한 틈을 타서 타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중待中 서눌 등이

    왕에게 진언하기를, ‘귀화인도 일반 백성들과 같으니 국법대로 처리해야 한

    다’고 하였으니, 서눌 또한 바른 말 잘하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이

    다, 2) 1039년에는 문하시중겸 판도병마λ}判都兵띄使가 되고, 1041년(정종 7), 등

    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를 하사받고 중대광필大[흐으로 품계가 올랐다.

    r-.r;ε:""Cr.:..ε~I'...r..I::J..~I"..r~rIIr...rJ..""T...r ...... ~εT...r ....... ~ε:..~..I ...... :CI.:.J.~I .... ~....Ii.-.:..~I ....... ~...r .................. ~..r~εT~‘:....~‘:r .... ε:r.rIL‘:"'~..I~r-I~"-I....r:.~‘:""'Cì..TI""J:

    1 ) 현종13년 8월 j椰g가 되어 興盛宮主라 불렀으며 元쩔王尼로 봉해졌다 _r고려사J4권, 세가4 2) 徐吉洙, (1999) r徐熙의 家系m究J r徐熙 서거 1000주기 기넘 학술대회」 자료집 .43쪽, 利川文化院 · 사단 법인고구려연구회.

  • 1042년(정종 8) 두 번씩이나 상표하여 퇴관하기를 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

    며, 병이 들어 지장사뼈짧농에 가서 머무는데 왕이 우승선右잭효 김정준金廷俊을

    보내서 어의倒衣 2습, 곡식 1000석, 말 2필을 절에 시주하고 복을 벌도록 했

    다. 병이 위독해 지자 왕이 친히 거동하여 문병하고 삼중대광 내사령三파大탤 內

    史令의 관직을 내렸으며, 자손에게는 영업전永業田이 하사되었다. 이 해 6월13

    일에 별세하니 왕이 중광전에 나가 냥하에서 조문하며 애도하였다. 시호를 처

    음에는 간경떠敬이라고 했다가 선종 3년에 원숙元웹으로 고쳤으며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거란과 대외 관계에서 활약

    서눌이 조정 중신으로 정사를 돌보던 시절에도 거란과의 대외관계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앞선 993년(성종 12), 서희의 외교 담판에 따라서 짧은

    동안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거

    란의 성종뽕宗은 틈만 있으면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속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고려에서 ‘강조탱化의 변란’ 이 일어나자 이를 핑계로 1010년

    (현종 1) 왕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꿀고 고려를 침입해 왔다. 거란군은 한 때 개

    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지만 고려군의 끈질긴 항전이 이어지자 적당히 군

    시를 되돌렬 구실을 찾게 되었다. 이 때 고려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제의해

    오자, 고려왕이 직접 거란에 입조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물러갔다.

    그후 거란은 군시를 철수하며 조건으로 내걸었던 고려왕의 입조를 강력하게

    35

    서 눌

  • %-이천의인물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무시히는 태도를 취하자 이번에는 서희가 개척한

    압록강 남쪽의 영토 반환을 요구했다. 고려는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시 송과

    국교를 맺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에 거란은 1019년(현종 9), 소배압짧排뼈이

    지휘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또 다시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침입해 왔다. 그러

    나 이번 침략 역시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군

    사를 철수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창姜빼贊이 거느린 고려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비참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고려 침략이 모두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자, 그후 거

    란은 고려에 대한 무력 침략을 포기하고 화친 정책으로 돌아섰다. 거란이 멸

    망하는 서기 1125년까지 약 10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었지만 거란은 여전히 국경을 마주한 위협적인 나라로 고려의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상대였다.

    1029년(현종 2이 9월, 거란의 동경장군束京將軍으로 있던 대 연림大延쩨이 거란

    에 반기를 들어 흥요국興違國을 세우고 고려로 사신을 보내서 구원을 요청했

    다. 대연림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7세 손이었다. 흥요국을 룹는 문제를 두

    고 조정 중신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데, 곽원郭元은 이 기회에 거란이 차지하

    고 있는 압록강 동쪽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출병을 주장한 반면, 최사위 · 서

    눌 · 김맹 등은 글을 올려 흥요국 문제로 거란에 맞서는 것에 반대하였다 3)

    그후 덕종이 즉위한 1031년 11월 거란에서 돌아온 김행공金行옆이 왕에게

    말하기를 ‘거란이 우리가 청한 일을 들어주지 않으니 사신을 보내지 마십시

    요’ 하고 거란과의 단교를 주장했다. 이 때문에 다시 중신들 사이에 찬반 논란

    n.~'Cr'r...I:;.‘」ε:"~'Cì..~'Cì..~'Cì..~‘~ε:CI.:.ì.ε~...... 'Cì..~r .... 'Cì..~ε,,":J,.~~‘7 ........ ~_.'Cì..~'CT...r_r-I'..r.r-I:i.ε~ε:r..,L,...~I..그~..r:;.,.~...._~_r_.."Çj‘7-II.그~ε~~~-ì.~‘;

    3) 앞의잭.44쪽

  • 이 벌어졌는데, 서눌등이 이번에는 ‘저들이 이미 우리 말을쫓지 않으므로 절

    교해야 합니다’ 하고 강경책에 찬성하고 나섰다. 왕이 서둘 등의 의견을 따라

    사신의 파견을 중지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고려는 거란에 대해 보다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북쪽 경계에 성을 쌓는 등 방비를 강화했다 4)

    1037년(정종 3) 9월, 거란 황제의 명에 따라 래원성來핏J&에서 고려의 영덕진

    원lE펴으로 통첩해 오기를 ‘고려가 처음에는 우리를 힘써 섭기다가, 몇 해 째

    예가 빠졌으니 공물을 람으려면 먼저 표장값안을 올려야 한다. 진실한 정성이

    있으면 따로 허락을 내렬 것이다’ 고 하였다. 서눌 등 14명이 의논해 올리기를

    ‘사신을 보내서 고주告했}는 것이 옳습니다’ 고 하였다. 또 1039년(정종 5) 봄

    에 문하시중 서눌이 ‘지난 해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보1成떤를 더 쌓으려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화친하였으니 사신이 가는 면에 표를 붙여서 그 성보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청하소서’ 하고 아뢰니 왕이 이를 허락했다 5)

    위의 사례들을 보면 서눌이 어느 때는 강경하게 국교를 단절해야 한다고 했

    다가, 또 어떤 때는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여, 거란 정책에 대해서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눌은 최고의 외교 전략가였던 아벼지

    서희처럼 당시 거란과의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면서, 침략이 또 다시 되

    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는 무모하게 거란에 맞서

    거나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일 없이 그때 그때 강온 양 면 작전을 적절히

    구사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눌의 직계 후손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다만 평당 서씨의

    시조인 서준방徐俊해이 그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그 대신 눌의 동생인 서유걸徐

    ~~ιrL~~"r..r_..~ ..... ~I_.."r_:그"_r..r..I:....-Ir ....... ..-rrrr_r..r ..... ..-_r..r....J..,...I_r_r_r_:-_r_r~τrI_..-_.....,.--...rr_.....,.--rr ..... ....--I ..... 'r_rr .... r"~그"_.,:~τr~τirJ그r-4"-_r.~ ~"': .. ..-:.~ • ...-.... ~"'..-..... ~←r ..... ~←.rI_ZτrI_..Y""_. ••• : .. ‘r 4) 앞의책. 5) 앞의잭, 46쪽

    37

    서 눌

  • %-이천의인물

    維傑은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유걸은 좌복야左않射를 지냈으며, 아들 서정

    徐펴은 벼슬이 병부상서 · 중추원사 · 참지정사 · 좌복야 등을 거쳐서 평장사에

    이르렀다.

    서균徐均은 정의 아들로 증조부 서희의 음덕으로 관로에 올라 판장작감사判

    將作짧事를 지냈다. 담력있고 무예에 능해서 여섯 차례나 양계병마사펌界兵찌않

    를 지낸 서공徐않, 무신란 때 희생된 서순徐淳-동지추밀원사은 서균의 아들이다.

  • 성품이 어질고 무예에도 능했던

    4뽕켰앉

    兩界兵馬使를 여섯 차례나 역임 %-서공 서공徐행은 고려 성종조의 명신인 태보내사령 서희徐照의 현손이다. 성품이

    어질고 겸손하며,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달리기와 활쏘기에도 능했다고 했으

    니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공에 관해서는 「고려사」 속에

    일부 단편적인 기록만 전해올 뿐이어서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데 얼마 전에 「서공신도비」 비문의 내용1)이 알려짐으로써 가족관계와 관직 등

    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서공의 증조부는 서희의 둘재 아들인 서유걸徐쩨傑-좌복야이며 조부는 서정徐

    챔-평장사이다. 부친은 판장작감사]'IJ將作많안를 지낸 서균徐꾀, 어머니는 창화군

    r_r.r_...'r"Lεr~'r:...":t."""..r-_r_r"."""..r-I..r-.... "':ìr ..... "'Y"'r.r-I:J..~ ..... '-_rr_z:.,"""..rr~二~_L’-:r_r~τr_L....-__..~........... Lεr..I .......... _....-_r ........... 1그ζ .. ..-rr ..... ~εn그:r.,j’η-.. "'J그o:r ..... ‘if" ... '"二r.J.ζ.. ....-...... ..-:_εr ... .-_r_rJ그r-IJj.'r""~...-r:..‘’:

    1 ) 徐좀福(2004) r徐했神道陣試考J r利JII徐R宗諸j 이전서씨대종호1 , 2004 . 3月륭

  • 40

    01 천 의 인

    대부인昌化웹大夫A 이 씨로 검교예부시랑險校禮部待郞 이당李居의 딸이다. 서공의

    출생년도는 나와있지 않으나 신도비문 가운데 ‘신묘년(서기 1171, 명종 1) 7월에

    71세로 별세했다’ 고 했으니, 이를 역산하면 1101년(목종 4) 생이 된다 2) 인종 때

    음보않補로경령전판관월싫폈IJ官이 되고 그후여러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