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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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있다면, 녹색 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값 10,000원 특집 제14호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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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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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미래가 있다면, 녹색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2014. 1

1미래가 있

다면, 녹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특집

제14호 2014.11

Page 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애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인간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똑같은 참사와 고통이 반복될 테니까

요. … 정치적이지 말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또다시 사랑하는 사

람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청년 활동가 최승원 인터뷰전문은 58~66쪽

<청년 진보정치 열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 한민성 노동당 청년학생위원회 집행위원장

“어느 활동가의 탄생 ”세월호 활동가 최승원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양솔규 오정심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10월 26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미래에서 온 편지 제14호

표지이야기

가격10,000원

Page 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fromNowhere』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NewsfromNowhere

Page 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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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에서 온 편지

4 편지를 띄우며 녹색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왼쪽|<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5 구독자모집

6 지금+여기 노동당 ■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를 기획하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명의 당원이 남아있습니다|백상진

기획 ■ 스포츠, 상품이 되다

46 돈놀이가 된 공놀이|윤현식

52 총파업, 멈춰선 메이저리그|최백순

58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2 |세월호 활동가 최승원

“어느 활동가의 탄생”|한민성

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12 녹색이 된다는 것의 의미|장석준

18 녹색과 성장:성장주의와 진보정치는 동행 가능한가?|김성훈

23 에너지 시스템 전환과 에너지시민성의 가능성|이정필

28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녹색 세상, 우리가 만들자!|김재호

33 “미래의 시간은 녹색의 편”|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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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67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⑨

기타가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1⃞ : 노동이 문화를 만나다|이선옥

75 쟁점토론 ■ ‘진보정당을 평가해 보자’ 모임 후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정상은

82 정책포럼 직접세로 증세하라|홍원표

88 지역에서 현장에서 멈출 수 없는 시간|김성윤

91 구라파 통신 더 많은 연구자에게 학문의 즐거움과 자유를!| 김은정

96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다시,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 되는가?|임경화

100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말로만 ‘보행친화도시’, 미안하지만 보행자를 위한 도로는 없다|김상철

삶과 문화

108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업계 1위’신문도 굴복시키는 삼성의 힘|조윤호

112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나도원

118 불온한 서재 아이들과 함께 세상 읽기|양솔규

122 노래의 꿈 조성만|민정연

126 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128 편지를 접으며 ‘진보 국뽕’의 추억|박권일

제14호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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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띄우며

스산한 베를린의 가을, 거리에 등장한 독일녹색당의 슬로건에 유권자들은 자신의 눈을 의

심해야만 했다. 전조(前兆)조차 없이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오로지 ‘통일’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돌고 있을 때였다. TV에 등장한 경제학자들은 시시콜콜한 수치들을 들이대

며, 통일에 드는 단기적 비용과 장기적 비용이 얼마인지를 놓고 입씨름을 했고, 기민당이든

사민당이든 정치인들은 온통 동독으로 몰려가 장밋빛 공약들을 유권자들에게 쏟아냈다. 통일

독일선거는 오로지 ‘경제’라는 공약만이 존재할 뿐, 나머지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렇게 통일과 경제, 두 단어가 지배하는 통일독일선거의 한복판에 녹색당은 ‘기후’를 꺼내놓은

것이다. 이런 자신감의 댓가는 컸다. 녹색당은 7년 만에 원외정당으로 밀려나는 참담한 성적

표를 받아야 했다.

독일녹색당이 1990년에 전면에 내세운 선거슬로건은 무모한 측면이 있었다. 독일의 선거

제도 아래에서 녹색당의 지역구 당선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녹색당은 정당비례를 통해서만

원내에 진출해 온 정당이다. 정당득표를 통해 5퍼센트 이상을 득표할 때는 수십 명의 연방의

원을 배출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 의석수는 ‘제로’가 된다. 도박이라면 이런 도박도 없다. 실제

로 녹색당은 1990년의 차가운 베를린을 경험한 이후 훨씬 더 영악하게 움직였다.

좌파정당이라면 그 규모가 작을수록 ‘백화점식 정치’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진지를

강화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노동이 우리가 여전히 집중해야 할 과제라

하더라도 녹색을 하나의 사업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시대는 동네슈퍼 수준의 좌파

정당에게도 노동과 녹색은 동시에 집중해야 할 과제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이 당연

한 신호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만 한다.

최근 국제유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국내유가는 내리지 않는다고 언론조차 호들

갑이다. 교통세, 교육세, 주행세로 대표되는 이른바 유류세 3종 세트 때문에 국내유가는 구조

적으로 내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심지어 일부 시민단체는 유가에 포함되어 있는 과도한 세금

때문에 ‘계급의 역진성’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유류에 더 광폭

한 에너지세를 도입해 그 재원을 재생가능에너지에 쓰는 목적세로 사용하자고 말해야 한다.

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수십 명의

의원을 허공으로 날려 버릴 원내정당도 아니지 않은가.

2014년 10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드림

녹색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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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구 독 자 모 집

구독료 : 매월 1만원, 1년 10만원(일시불), 10년 50만원(일시불)

입금 결제일 : 5일, 25일 중 선택가능

직접납부 : 신한은행 100-028-812208(예금주 : 노동당)

구독문의 : 중앙당 편집실 정정은 / 02)6004-2007 / [email protected]

정기구독자가 되어주세요창간호부터 정기구독자에게 한정발송됩니다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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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아직열두 명의 당원이 남아있습니다

글 백상진 노동당 서울시당 총무부장 사진 박성훈 홍보실장

지금+여기노동당

들어가며

9월 24일, 서울시당이 신입당원 환영

회를 열었다. 신입당원교육을 겸한 이

행사는 2014년에 새롭게 입당한 서울지

역 당원 137명을 그 대상으로 했다. 지난

1월에 열린 이후 8개월 만이다.

시기적으로도 이 행사의 역할은 중요

했다. 하급 당부나 부문위의 움직임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신입당원들이 당 활

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많지 않았

다. 종종 사고당협에 입당한 신입당원들

이 자신도 당협 모임에 나가고 싶다는 바

람을 전해오기도 했다. 하루라도 빨리

광역 당부인 서울시당 차원에서 당원들

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새내기 당직자 티를 막 벗은 내가 행

사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 처음부터 모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를 기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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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7

든 걸 도맡아 만드는 행사가 처음이다 보니, 잘 치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컸다.

기본적으로는 신입당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는 이 자리를 ‘축제’로 만들고 싶었다. 당

원들 뿐 아니라 행사 소식을 들은 누구라도 참여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행사로 말이다. 무엇보다도 많

은 당원들이 즐거운 자리에서 교류하길 바랐고, 참여하지 못하는 당원들에게도 이 당이 ‘살아있음’을 보

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생기 있게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많은 당원들이 참여했고, 그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

극적이었다. 현장의 분위기가 뜨거웠다. 무엇보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얼굴들이 많이 눈에 띄어 좋았다.

오랫동안 당 활동을 하지 않았거나 당 행사에는 처음이거나, 어느 쪽이든 반가운 일이다.

좋은 기획을 성실하게 추진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개인적으로도 감사한 경험이다. 시간

에 쫓기고 예산에 움츠러들면 누구라도 제대로 된 기획을 추진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정된 조건에서도 최

대한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비록 신입당원 환영회에 국한된 내용이지만, 보다

좋은 행사들이 추진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름의 행사 준비 비법을 공유한다.

1. 기획하고 섭외하기 : 등잔 밑이 제일 밝다

당연한 얘기지만,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프로그램을 넘어선 무언가가 필요했

다. 그때 반 년 간의 짧은 당직 생활 동안 여기저기서 마주쳤던 당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대부분 당에 애

정이 있었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당에 보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가진 자원들은 꽤나 가

사진설명 : ①②④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에 참석한 당원들 ③ 공연중인 ‘씨없는 수박 김대중’

④②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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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있거나 유용한 것들이었다. 신입당원교육을 기획하는 초반부터 이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세 개의 특별 행사, ‘노동당×레드북스 당원권장도서전’,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축하공

연’, ‘세계맥주와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이 탄생했다. 당원이 운영하는 서점, 당원이 운영하는 소속사,

당원이 운영하는 맥주수입업체가 특별기획들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물론, 그래서 섭외도 한결 수월했다.

1개월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섭외했고 두세 번씩 연락해서 세부사항들을 조율했다.

2. 홍보하기 : 웹자보의 힘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홍보물이 중요하다.

홍보물의 인상이 행사에 대한 기대치를 좌우하

고, 그것이 곧 참석여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

히 당 밖에서도 보는 당의 홍보물은 비당원들에

게 우리 당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신입당원교육은 당원들이 참여하기에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행사라는 점을 감안해서, 세련

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웹자보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신입당원교육’보다는 ‘신

입당원 환영회’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나름

의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Adobe Illustrater CS6로 작업했고, 폰트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고딕체를 썼다. 이

미지는 고해상도의 사진을 저작권 없이 무료로

제공하는 사이트(pixabay.com)를 활용했다. ‘씨

없는 수박 김대중’로고는 붕가붕가레코드에서 제공받았다.

3. 조직하기 : 신에게는 아직 열두 명의 당원이 남아있습니다

최소한의 행사 내용이 확정되고 홍보물이 나왔다면, 이제 ‘조직화’에 착수할 시간이다. 홈페이지, 이메

일, 문자, SNS(페이스북), 전화 등 가능한 모든 경로를 통해 행사를 알렸다. 참여를 독려하는 일에는 무엇

보다 신입당원이 우선, 그 다음이 기존당원과 비당원 순이었다.

신입당원에게는 먼저 웹자보를 함께 넣은 행사 안내 문자를 두 차례 발송하고 며칠 후 전화를 걸어 참

서울시당 신입당원 환영회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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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9

석 여부를 확인했다.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그리고 충분히 알린 뒤라 “생각해 보겠다”, “갈 수 있으

면 가겠다” 등의 참여를 유보하는 답변이 적었다.

안면이 있는 당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개별적인 연락이었다. 직접 연락해서

안부를 물으며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면, 당장의 참여는 이끌어낼 수 없다 하더라도 당원으로 하여금 당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비당원을 대상으로 한 행사 홍보는 SNS 공간에 의존하는 것 외에 딱히 대안이 없었다. 대중사업을 활

성화시키기 위해서 대중과의 접촉면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단기적으로는

페이스북이 유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4. 행사 준비하기 : 디테일이 중요하다

행사 당일의 목표는 ‘손님맞이에 신경 썼다는 느낌을 주자’는 것이 전부였다. 이정표부터 시작해 행사

장 자리배치, 소품, 주전부리, 상품, 손님용 컵, 단상, 로비까지 모든 것을 보기 좋게 준비해 두는 데 주력

했다. 여력이 안 돼서라면 모르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데 신경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장 난관인 것은 먹을거리였다. 50명가량에게 제공할 맥주와 과일을 당사의 냉장고 한 대로 시원하게

보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급한 대로 맥주 70병 중 절반은 냉장고에, 나머지 절반은 얼음물에 넣어

두었다. 과일은 미리 깎거나 씻어 두고 비닐을 덮어 상온에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침 한 당원께서

당직자들 먹으라고 보내신 배 한 박스가 당사에 도착하는 행운 덕에 빈약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세 종류의

평등조는 가위바위보로 당대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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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을 안주거리로 낼 수 있었다.

5. 행사 진행하기 : 신의 한 수, 레크리에이션!

식순에만 넣어 두고 내용은 급조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신입당원들이 입장할 때 평등, 생태, 평화, 연대의 네 개 조로 자리를 배정한 다음, 각 조가 하나의 정당

이 되어 당대표를 뽑고 자신들이 집권하게 된 상황을 가정하여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당

대표를 뽑을 때부터 기대 이상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더니 대다수가 상황에 몰입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위원장의 심사로 1위를 차지한 ‘연대당’은 레드북스 도서교환권을 상품으로 받았다. 물론 이 상품

은 도서전에서 책이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다.

레크리에이션이 끝나고 마지막 순서는 축하공연이었다. 자연스럽게 뒤풀이 분위기로 넘어갈 수 있도

록 준비한 맥주와 과일을 냈다. 당원이 아닌 사람 중에는, 순전히 공연에 대한 기대로 행사를 찾아온 이도

있었다. 공연이 당 행사에 참여를 이끌어내는 유인이 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6. 기록하기 : 성과를 보존하는 법

서울시당의 인력이 부족하기에 행사 사진은 중앙당 홍보실에 미리 부탁했다. 공을 들여 준비한 행사인

만큼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야 했다. ‘전문가’의 손을 거쳐 당원들의 얼굴이 사진에 담겼다. 레크리에이션

현장은 영상으로도 기록했다. 사진과 영상은 노동당 홈페이지와 서울시당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

나가며

44명이 신입당원 환영회에 왔다. 목표(50명)에 근접한 수치였다. 이 중 신입당원은 20명, 기존당원이

21명, 그리고 비당원이 3명이었다. 현장에서 입당한 2명은 신입당원으로 간주했다. 행사에 참여한 지인에

게 현장 분위기를 전해 들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입당신청을 하기도 했다.

신입당원의 참여율이 약 15%에 불과했다는 점이 아쉽다(137명 중 20명). 한편 이전에 비해 여성 당원들

의 참여가 높았던 점은 뜻 깊었다(14명). 여성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방법을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여성이 직접 전화해 참여 의사를 물음으로써 마음의 장벽을 낮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행사 기획과 실무에서 쌓은 경험을 잘 갈무리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실무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 방법을 공유해 더 좋은 기획으로 더 크게 성공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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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11

‘녹색’이란, 우리 각자에게는 어쩌면 너무 큰 이야기일 ‘생태계’만을 상징하는

게 아니다. 가장 절실하고 생생한 이야기인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녹색이 된다는 것은 ‘각자의 삶을 바꾸고 채워가는 일’을 세상을 바꾸고 다시

만드는 운동의 중심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다.

특 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Page 1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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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장석준부대표

좌파 정치든, 복지국가든,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든 앞에 ‘녹색’을 붙이는 게 유행이다.

심지어는 ‘성장’을 말할 때에도 ‘녹색 성장’이라고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다. 그럼 이렇게 전통적 용어들 앞에 덧붙는 ‘녹색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녹색이 된다는 것의 의미

Page 15: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13

요즘은 좌파 정치든, 복지국가든,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든 앞에 ‘녹색’을 붙이는 게 유행이다. 심지

어는 ‘성장’을 말할 때에도 ‘녹색 성장’이라고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다. 그럼 이렇게 전

통적 용어들 앞에 덧붙는 ‘녹색’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대개 사람들은 이를 과거에 비해 환경문제를 좀 더 고민한다는 뜻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녹색’ 좌

파라고 하면 핵 발전의 위험이나 기후변화에도 관심을 두는 좌파쯤으로 받아들이고, ‘녹색’ 성장이라고

하면 환경변수도 고려하는 성장 구

상을 일컫는 말로 짐작한다. 한 마

디로, 여러 ‘부문’이나 쟁점들 중 하

나로서의 환경·생태, 무지개의 일

곱 빛깔 중 하나로서의 녹색이다.

그러나 녹색을 이렇게만 바라보

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녹색은 애당초 좌파의 전통적 상징색인 ‘적색’에 대비되는 색깔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녹색은

적색만으로는 뭔가 부족해서 거기에 덧붙일 무엇으로 제시된 게 아니다. 적색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 그

리고 이에 따른 근본적 전환의 요청을 상징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적색 + 녹색’이 아니라 ‘적색’이 ‘녹

색’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적색 : 자본주의 함수를 민주주의 함수에 복속하려던 시도

이 이야기를 살피려면 우선 적색이 상징하는 19세기, 20세기 좌파의 큰 줄기를 간략하게나마 짚어 봐

야 한다. 세계사에서 ‘근대’는 서로 대립되는 두 함수가 동시에 등장하고 교호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것

은 민주주의(‘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내용적’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결국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로

이어지는)의 함수 그리고 자본주의의 함수다. 그래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근대를 ‘이중 혁명’의 시대라

고 부르기도 했다.

함수는 흔히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표현된다.

f : X→ Y혹은 y= f(x)

x를 투입했을 때 항상 y라는 산출을 낳는 작용(=f)이 곧 함수다. 근대와 함께 등장한 민주주의 함수에서

x는 ‘자유’고 y는 ‘평등’이다. 그리고 f는 ‘(사회)연대’의 작용이다. 즉, ‘자유’가 ‘연대’를 통해 ‘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민주주의 함수다. 반면 자본주의 함수에서는 x가 ‘자유’이고 y는 ‘부’ 혹은 ‘자본’이다. 여

기에서 f는 ‘(시장)경쟁’의 작용이다. 즉, ‘자유’가 ‘경쟁’을 통해 ‘부/자본’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본주의 함

녹색은 적색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 그리고 이에

따른 근본적 전환의 요청을 상징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적색+녹색’이 아니라, ‘적색’이 ‘녹색’으

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Page 16: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14

수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지난 두 세기 동안 좌파 정치란 자본주의 함수를 민주주의 함수에 복속시키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물론 이 시도는 현실에서 몇 가지 서로 다른 선택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인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함수를 민주주의 함수로 ‘교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본주의

함수를 인정하면서, 다만 민주주의 함수에 의해 그 내적·외적 한계를 설정하려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함수를 민주주의 함수에 부합된다고 ‘가정된’ 또 다른 함수로 대

체하려 했다. 이 함수에서는 ‘경쟁’의 자리를 ‘(국가)지령’(흔히 ‘계획’이라 하지만 그보다는 ‘지령’이라고 하는

게 더 맞다)이 대신한다. 말하자면 ‘지령경제 함수’다. 다만 이 경우에도 y는 여전히 ‘부’, 즉 자본주의 함

수에서의 y와 동일한 지평에 있는 물질적 부다.

녹색 : 자본주의 함수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각성

20세기 말에 기성 좌파 정치에 대한 여러 근본적 반성이 대두했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탈

서구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생태주의의 문제제기는

심각했다. 왜냐하면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좌파의 노력에 ‘도로 아미타불’이라는 차가운 진단을 내렸기 때

문이다.

생태주의는 자본주의 함수가 민주주의 함수와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님을 환기시켰다.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있다. 아니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다.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 함수가 지속 불가능

원자력 발전 반대 시위. “후쿠시마는 어디에나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지금 당장 전원을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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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15

하다는 것이다. 생태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 20세기 말의 여러 사건들, 즉 공해, 유가 인상, 핵발전소

사고, 이상 기후는 인류에게 자본주의가 지구 생태계 안에서 ‘장기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

다.

이런 각성은, 전통적인 적색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너머를 지향하는 흐름의

등장을 뜻했다. 이렇게만 보면, 자본주의와의 대립 전선에서 적색과 함께 할 녹색이 등장했다고 말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했다. 녹색은 단지 자본주의하고만 충돌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껏 자본

주의를 순치하거나 대체하려 한 적색의 여러 흐름들하고도 대척점에 서 있었다. 왜 그러한가?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함수에 대한 일정한 인정을 전제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이

라는 진단은 결국 사회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의 지령경제 함수도 실은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

에서 ‘유사 자본주의 함수’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은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

에서도 ‘유사한’ 지속 불가능성의 운명으로 반복됐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 문제는 더 이상 선각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생태주의가 대중적 이

념·운동으로 처음 부상한 한 세대 전보다 훨씬 더 가시적이고 절박한 사안이 돼 있다. 중국이 지구 자본

주의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화석 에너지 고갈 시점이 더욱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 변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함수의 지속 가능성 문제에는 무감한 채 그것의 복속을 꾀해온

적색으로는 이제 더 이상 현실에 대처할 수 없다.

한데 이것만으로는 녹색의 문제의식을 다 이야기한 게 아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면, 이렇게

결론내리기 쉽다. 그간 좌파 정치(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까지도)가 거둔 성과

는 문제가 없는데, 다만 자본주의 함수

의 지속 불가능성 때문에 이런 성과 역

시 외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고. 즉 자

본주의 함수에 의존하거나 ‘유사 자본주

의 함수’를 통해 이뤄진 성과 자체는 지

속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제외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가장 아픈 비판을 제시한 인물이 이반 일리치다. 일리치는 그 동안 ‘성과’라고 생각해온 것

조차 실은 문제투성이였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 유가가 치솟자 다들 그제야 화석 에너지 고

갈 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일리치는 이미 그 전부터 위기 상태였다고 일갈했다. 좌파든 우파든,

더 많은 부를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게 ‘진보’라 여기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좌파

정치가 추구해온 평등을 실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았다. 이게 일리치의 진

생태주의는 자본주의 함수가 민주주의 함수와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님을 환기

시켰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 함수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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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이다.

교통을 예로 들어보자. 과거보다 더 빠른 열차가 등장했고, 더 많은 계층에게 엄청난 수의 개인 승용차

가 보급됐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더 편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보다 평등해졌는가? 아니다. 그럴수록 집

과 직장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게 당연시됐고, 그래서 서민들의 출퇴근 시간은 짧아지는 게 아니라 도

리어 더 늘어났다. 반면 부유층은 제트기나 헬기를 타고 지구 위를 주유한다.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만 했

다. (이상의 논의는 원제가 ‘Energy and Equity’인 일리치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박홍규 옮김, 미토,

2004]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도로 아미타불’이라 표현한 것이다. 기존 좌파 정치가 ‘성과’라고 자랑하는 것조차 정

작 뜯어보면 평등의 실현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불평등을 해결한다면서 더 심각한 불평등을 불러왔다. 다

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었다. 적색 전통의 자기반성이 더욱 철저하고 근본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

다.

녹색이 된다는 것 : ‘좋은 삶’을 다시 생각하기

근본 문제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 함수의 y와 자본주의 함수의 y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전자의 ‘평등’과 후자의 ‘부’는 서로 상당 부분 겹쳐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빈

곤과 실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당장의 빵과 일자리를 늘리는 게 곧 평등의 핵심이었다. 지금도 저발전

의 덫에 빠진 지구 위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굶주린 이에게는 빵 한 개를 손에 쥐는 것보다 더 소중한 평등의 성취가

소수의 금융 거부들이 전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벌인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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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17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굶주림을 넘어선 곳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더 많은 빵’ 따위가 사회의 새

로운 목표 노릇을 할 수는 없다. 아마도 ‘더 맛있는 빵’이나 ‘더 고급스러운 빵’ 정도가 그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런 목표의 성취가 민주주의 함수의 ‘평등’의 달성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자본

주의 함수의 ‘부’의 실현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빵’의 자리에 ‘자동차’를 넣어도 좋고, ‘집’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속 적색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부처님 손바닥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운동은 이제

그 목표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지난 세

기에 당연시돼온 진부한 상식은 오늘날

재검토의 대상이다. 민주주의 함수가 산

출해야 할 ‘평등’의 내용을 시장과 관료기구가 강요하는 생각과 감성의 틀을 넘어 새롭게 채울 때다. 우리

가 쟁취-실현해야 할 ‘좋은 삶’을 원점에서 다시 그려야 한다.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고전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몇 세대 전에 그 핵심이

각 사람의 자기실현에 필요한 자유 시간의 확대라고 답했다. 다만 현실 좌파 정치가 늘 당장의 재분배 과

제에 골몰하면서 적색 전통 안에서도 이런 애초의 희망이 희석되고 잊혔을 따름이다.

몇 세대 뒤, 앙드레 고르 같은 녹색 사회주의자들이 이 희망을 뒤늦게 재 발굴하고 다시금 강조했다. 그

래서 민중의 가장 중요한 자주관리 대상은 생산 과정이나 경제 활동이 아니라 각자의 삶 자체이며 생산이

나 경제의 자주관리는 기실 삶의 자주관리를 위한 최소 수단일 뿐임을 상기시켰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재화와 서비스의 구매 목록을 늘리기 위해 고용 노동에 투입할 우리 삶의 토막을

늘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노동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강박 없이 우리가 자유롭게 설계하고 창조해

가는 삶의 넓이를 확장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고서야 민주주의 함수는 자본주의 함수에 도

리어 복속되는 일 없이 드디어 문명의 기본 원리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상징이 곧 ‘녹색’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어쩌면 너무 큰 이야기일 ‘생태계’만을 상징

하는 게 아니다. 가장 절실하고 생생한 이야기인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녹색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각자의 삶을 바꾸고 채워가는 일’을 세상을 바꾸고 다시 만드는 운동의 중심으로 되돌린다는 의

미다.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운동은 이제 그 목표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평등’의 내용을 새롭

게 채울 때다. 우리가 쟁취-실현해야 할 ‘좋

은 삶’을 원점에서 다시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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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김성훈대전 당원,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전 사무국장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사람들은 성장주의를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길들

여졌다면, 우리는 다르게 먹고사는 방식을 상상하고 제안하며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해 가야

합니다. 다른 세상은 다른 경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녹색과 성장 : 성장주의와 진보정치는 동행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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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19

성장주의와 암세포

먼저, 성장주의를 알아보기 위해 독일의 보완통화 운동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마그릿트 케네디(Margrit

Kennedy)의 말을 들어봅시다. 그녀는 자본주의 화폐경제의 지속불가능성을 다음의 도표1)로 간략하게 설

명하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A형으로, 유아기나

사춘기에는 급격하게 성장하지만 성인이 되면 양적

인 성장은 끝나고 질적인 성장을 하게 됩니다. 하지

만 자연계에는 C형과 같이, 처음은 완만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가속 성장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곡선

이 바로 암세포 곡선입니다. 제동 장치가 듣지 않는

이 성장은 숙주를 무너뜨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암세포 곡선이 현재의 자본주의 화폐경제의 성장곡

선이기도 합니다. 마그릿트 케네디는, 만일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예수가 태어났을 때 미 달러로 1달러

를 연리 5% 복리로 예금하기 시작했다면 1990년이 되었을 때 지구 체적의 1340억 배에 달하는 예금 잔고

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며, 이러한 경제 제도는 조만간 파탄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녹색과 성장 : 성장주의와 진보정치는 동행 가능한가?

녹색과 성장은 화해 불가능한 대립 개념입니다.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가 나온 이래로, 녹색은 성장

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제어입니다. 근본적 인식의 전환을 위해 제시된 녹색과 그

녹색이 극복하려는 대상인 성장을 한 이불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정신분열이거나 사기(詐欺)입니다. 실제

로 이명박이 광복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신 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저탄소 녹색성장’은 토건산업

과 원자력발전을 위한 ‘녹색 분칠’이었습니다. 녹색을 들러리 세워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 마냥 선전했으

나 탐욕 가득한 황금 숭배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재탕이었습니다. 그것을 막지 못한 우리는, 곧바로 드러

난 4대강 재앙으로 수많은 생명체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원자력발전이라는 ‘예고 없는 재앙’과 함께 살아

야 하는 불안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녹색과 성장에 딸린 물음, ‘성장주의와 진보정치는 동행 가능한가?’라는 주제는 대답하는 데 1초의 머

뭇거림도 필요 없는 물음입니다. 다만 진보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적색과 녹색 사이의 수많은

1) “Interest and Inflation Free Money: Creating an Exchange Medium That Works for Everybody and Protects theEarth(2006)”, <지역화폐> 김성훈, 계간 《환경과 생명》 2006년 겨울호(통권 제50호)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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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녹색당 이론가였던 루돌프 바로(Rudolf

Bahro)2)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과 대립은 똑같이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생산력주의자끼리의 ‘그

놈이 그놈인 싸움’이며, 결국 그 둘은 ‘이란성 쌍둥이’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렇게 일부 생태주의자들

은 ‘진보’를 선형적 시간관과 직선적 발전 패러다임에 갇힌 생산력주의로 간단히 정리하여 폐기 처분하

기도 하지만, ‘진보’는 사전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역사 속에서 부대끼면서 형성된 실천의 개념입니다.

대체로 진보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 환경주의, 여성주의 등을 포함하

는 개념으로 그 공통된 지반은 반자본·반제국주의입니다. 나아가 정치의 과제가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궁극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진보정치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보정치를 정의할 때, 성장주의는 진보정치가 극복해야 할 적이지 동행할 동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그러나 녹색과 성장을 다루는 진보정치의 이론과 실제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훨씬 넓고 깊

습니다. 현실은 늘 이율배반적입니다. 흔히들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침몰하는 타이

태닉호에서 파티를 즐기는 형국이나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설국열차로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파국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파티를 즐기고, 선로를 따라 끝없이 질주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성장에

길들여지고 중독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돈의 논리에 지배를 받으면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싶어 합니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성장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

무한경쟁의 시스템은 멈추는 자에게 현 상태의 유지가 아닌 파산선고를 내립니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성장을 항해 질주해야 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영화 《설국열차》의 결말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열차

를 전복하는 것이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복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질주의 힘을 막으려

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을 만들기 위해 결사한 한국의 진보정당은 그들의 강령과 슬로건에서 적

색과 녹색의 동행을 천명한 지 오래되었지만, 성장주의 패러다임과 단호한 결별을 하지 못한 채 적색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끼어 버렸습니다. 적색과 녹색의 양 날개를 달고 다른 세상으로 비

상하고 싶었으나 성장주의 쇠사슬에 묶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1인 1표의 민주공화정은 1원 1표의 경

제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투표합니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

다 더 커서 부는 소수에게 집중될 뿐입니다.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더 늘려 그것을 중소기업이나 소비

자에게 흘러내리게 한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경제가 성장해 봐야

고용이 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장주의에 기댑니다. 앙드레 고흐즈의 지적

2)《생태사회와 녹색불교》, 유정길,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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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21

처럼 자본주의 본성이 사람들에게 너무 깊게 각인되어 이른바 ‘체제내화’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경

제학자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이 그의 저작 《유한계급론》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

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이고 부자들은 오늘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어서 보수

적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녹색과 적색의 양 날개를 펴서 그들의 공통의 극복대상인 자본주의를 넘어

다른 세상을 향해 유유히 날갯짓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전복을 위한 주체, 그 주체의 기획과 실천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사람들은 성장주의를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졌다면,

우리는 다르게 먹고사는 방식을 상상하고 제안하며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해 가야 합니다. 다른 세상은 다

른 경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다르다고 해서 느닷없이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1981~86년까지 시도

되었던 급진적 런던 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의 슬로건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여’, ‘국

가 안에서 국가에 대항하여’의 실천방향을 가져야 합니다. 동양의 선사들의 표현으로는 ‘땅에서 쓰러진

자 땅 짚고 일어선다’는 사고방식이지요. 한편으로는 칼 폴리니의 유명한 명언 “진정한 진리는 만유인력

법칙이 아니라 중력을 뿌리치고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을 되새깁니다. 패배의 원인을 과학적으

로 분석할 필요가 있겠으나 그것이 패배를 합리화하고 전복의 도전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

은 과학의 이름을 빙자한 남 탓과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전복의 주체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녹색과 적색의 양 진영

에서 자본주의 전복의 주체로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시민사회계급, 주민, 불안정 노동계급이 거론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수고를 도맡아 하면서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부터 소외된

자, 차별과 배제의 대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특정 계급과 계층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 줄 때 정작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내 안에서 먼저 자본주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하루

하루의 삶이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나로

부터 분리하고 대상화한 뒤 그 어둠과 싸우려는 것은 도깨비와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 극복은

300년 자본주의 역사가 아직 해치지 못한 전체적 생명으로서 참 나의 자리를 자각하고 나부터 너를 모시고

살리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주의를 극복할 공동체의 형성 원리입니다.

남 탓, 세상 탓만 하면 도리어 남과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다움을 잃고 자기소외, 자기상실, 자기

분열을 겪게 되고 자본주의도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세상은 나와 내 삶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동심

원을 그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주의를 극복할 지역의 가치입니다. 나부터 할 수 있는 것을 시

작하되 나 혼자 극복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너를 만나 우리가 되어 함께 저항과 건설의 길을 걸어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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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게 나부터 ‘다른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인 실천지침은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공동체의 보존과 지역경제》라는 에세이에서

제시된 17가지 규칙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 글은 ‘세계경제당 VS 지역공동체당’이라는 전선

을 긋고 지역공동체당의 정치적 전망, 강령 구상 속에 쓰여진 글입니다.

한 지역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가 결속되고, 번영하며 지속하기를 바란다면 다음과 같

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1. 어떤 변화나 혁신이 제안될 때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까? 이것이 우리의 복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까?

2. 공동체의 구성원 속에 반드시 지역자연-땅, 물, 공기, 토착생물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3. 지역의 기본욕구들이 (이웃 간의 상호협력을 포함하는) 지역자원으로부터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지를 언제나 생

각해야 한다.

4. 지역의 기본욕구를 항상 우선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가까운 도시로, 그리고 다른 곳으로

생산물을 수출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5. ‘노동절약’이라는 교의(敎義)가 흔히 열악한 노동, 실업, 또는 오염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의깊이 이해해야 한다.

6. 공동체가 단순히 국가나 세계경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지역생산물을 위한 적절한 부가가치산업을 발전시켜

야 한다.

7. 지역농장과 (또는) 삼림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소규모 기업과 사업체를 발전시켜야 한다.

8. 가능한 한 많이 공동체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9. 공동체 안에서의 (어떤 형태로든) 벌이를 늘리고, 공동체 바깥에서의 지출을 줄이도록 노력한다.

10. 가급적 오랫동안 지역경제 속에 투입된 돈이 공동체 내부에서 순환하도록 한다.

11. 공동체의 재산을 보존하고, 청결을 유지하고(다른 곳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노인들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가르

침으로써 공동체가 자기 자신에게 재투자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12. 늙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이 상호간 보살피도록 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반드시 학교에서가 아니라 노인들에게

서도 배워야 한다. 제도화된 ‘탁아’와 ‘양로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노소가 한데 어우러짐으로써 공동체는 스스

로를 인식하고 기억한다.

13. 오늘날 비용계정은 흔히 숨겨지거나 '외부화' 된다. 가능한 한 이러한 비용은 차변에 기재되어야 한다.

14. 지역통화, 공동체기금에 의한 대출 프로그램, 교환시스템 등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15. 이웃사람의 행위가 갖는 경제적 가치를 항상 인식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생활비용이 크게 증가된 것은 이웃의

상실과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재난을 홀로 감당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 농촌공동체는 언제나 가까운 읍이나 도시에 있는 공동체지향적인 사람들과 사귀고,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야 한다.

17. 지속가능한 농촌경제는 지역생산물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도시소비자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얘기하

는 경제는 언제나 경쟁적이기보다 협력적인 경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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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23

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이정필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서울 서대문구 당원

노동당은, 공동체에너지라는 래디컬 스페이스(radical space)가 형성되고

있는 곳에서 에너지시민성을 지향하는 주체들과 만나야 할 과제를 안고 있

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어쩌면 이들은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닐

까? 녹색정치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가까운 곳에 뿌리내리는 흐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 전환과 에너지시민성의 가능성

웨스트밀 태양광 협동조합(사진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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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자주 접하는 ‘에너지 전환’이란 용어는 주로,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에서 벗어나 재생가능에너

지로 이동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과 사회가 자원/자연과

맺어온 오랜 역사에서 에너지 전환이 처음은 아니다. 노예제에서는 노예 노동이 사회를 지탱하는 최대의

동력으로 기능했고, 태양과 바람과 물을 이용한 자연에너지도 줄곧 사용되어 왔다. 물론 산업혁명기의 석

탄은 더 급진적인 에너지 혁명을 가져왔는데, 자본주의 발전의 근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증기기관 등의 동력기계 작동을 가능하게 했던 석탄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남아있

기도 하다. 지하 갱도에서 위험천만한 채굴을 했던 성인과 아동들의 이미지가 그런 경우다. 석탄이라는

에너지원은 산업자본주의 이면의 상징으로서, 노동권을 포함한 시민권을 쟁취하려는 노동대중의 저항의

역사를 명징하게 보여준 사회적 자원이었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와 후쿠시마의 시대에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새로운 외피인 녹색자본주의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생태사회주의와 같

이 다른 세상을 지향하는 것일까? 훗날 재생가능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이 석탄과 석유를 캐고

불을 밝히는 것과 크게 다르다고 기억할 수 있을까? 너도나도 이야기하는 녹색에너지나 지역에너지 확산

이 일정하게 기후변화를 막고 생태계 순환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만인의 자유와 평등도 함

께 향상될까?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에 바로 해답을 찾기보다는 에너지 시스템과 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최근의

이론과 실천을 둘러보면서 문제를 풀어갈 단초를 찾아보자.

에너지 전환, 공동체에너지 담론이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은 누가, 어떻게 참여하고 주도하느냐에 따라 전환의 경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순하

게 정리하면, 주요 행위자/세력을 정부, 시장, 시민사회로 나눠볼 수 있다. 이들 행위자들의 동기와 선택

이 에너지 시스템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리고 행위자들 간의 거버넌스와 관계망이 어떻게 형성

되는지, 일종의 행동공간(action space)이 작동한다. 이 공간의 참여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석

하는 방식도 다르고, 다른 행위자들의 역할을 설정하는 논리와 프레이밍이 상이하며, 서로의 정치적·사

회적 영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 에너지 전환의 거버넌스 배열(governance arrangement)

이 달라진다. 한마디로 ‘정부 논리’, ‘시장 논리’ 그리고 ‘시민사회 논리’가 어떻게 경합하고 타협하는가

에 따라서, 궁극적으로 전환 경로도 달라진다.

이중 시민사회 논리에 속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에너지 전환의 시도로 소개되는 것들이 있는데, 유럽 등

지에서 활발한 에너지시민성(energy citizenship)과 공동체에너지(community energy)에 관한 논의와 실

천들이 그렇다. 다양한 갈래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에너지 시스템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

향으로 구성하는지를 중심으로 간추려볼 수 있다. 우선 서로 대비되는 두 시스템인 경성에너지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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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25

(hard energy system)과 연성에너지시스템(soft energy system)이 각각 재현하는 기술, 환경, 거버넌스,

인간에 대한 내용은 <표1>과 같이 구분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딱딱한 시스템에 결박되어 있어, 정부와 시장의 논리가 재생가능에너지를 말하더

라도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된 형태를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재의 시스템에서 벗어

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탈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안과 밖에서 동시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처

럼, 부드러운 시스템으로의 전환 역시 딱

딱한 시스템의 안과 밖에서 출현할 수밖

에 없다. 그러나 노동조합 등에서 주장해

온 ‘에너지 공공성’ 담론으로는 한계가

있다. ‘민영화’ 공세에 맞서 방어적으로

에너지 산업의 공익과 노동자들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나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과거의 생산 관행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환경적으로 유용

한 생산’은 멀기만 하다.

반면 공동체에너지 담론은 공동체 혹은 지역사회에 의한 재생에너지 시설의 소유와 통제 그리고 에너

지 전환 실험 과정에서의 새로운 주체/정체성의 형성에 좋은 기반이 된다. 지역 공동체가 기획·추진·소

유·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 성과를 지역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향유하는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생

노동조합 등에서 주장해온 ‘에너지 공공성’

담론은 한계가 있다. 과거의 생산 관행을 적극

적으로 극복하려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환경적으로 유용한 생산’은 멀기만 하다.

구분

기술

환경

거버

넌스

인간

(에너지

시민)

경성에너지시스템

집중형, 대규모, 자동적, 연결하고 잊어버림

(plug in and forget), 경성에너지, 기술적 접근

탄화수소 기술 사용 지속 (예 : 청정석탄, 탄소

포집저장), 신규 핵발전 지지

하향식 제도, 사기업 주도, 배제적 대의민주주

의, 전문가 지식 중요

결핍 상태의 소비자, 무지하고 게으르고 수동적

인 존재,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고 자기 이해와

개인 효용을 극대화하고 이기적인 가치를 추구,

타율적 성향

연성에너지시스템

지역분산형, 소규모, 사용자 참여, 연성에너

지, 사회기술적 접근

재생가능에너지 사용, 폐기물 소각과 탄화수

소와 같은 약한 녹색 에너지 자원 회피, 신규

핵발전 반대

지방/지역의 제도적 역할을 보장하는 상향식

제도, 지역사회 협동조합과 민간협력체계, 포

괄적 참여민주주의, 시민지식 중요

적극적인 소비자·시민, 의식 있고 동기를 갖

고 적극적인 참여적 존재, 사회에 속해 있고

생물권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타적 성향

* 자료 : Devine-Wright(2007: 79), 글의 의도에 맞게 일부 용어 수정

<표 1> 에너지 시스템의 사회적 재현과 에너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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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해 볼 수 있다. 에너지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공공부문과의 파트너십/지역에너지공기업 등 다양한 법

적·소유의 형태가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또한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에너지 전환은 그 실험 과정에 참여

하는 공동체/시민들의 정체성이 변화해야 하지만, 공동체에너지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풍력과 태양광 등을 둘러싸고 지역 곳곳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딱딱한 시스템은 대중을 단말기에서 전기 스위치를 누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스템으로부터

격리된 수동적인 소비자로 표상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한다. 에너지 산업의 노동자들과는 사회적으

로 대립하더라도, 딱딱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이해를 같이하고 시스템이 붕괴되는 혼란을 피하려는 입

장을 공유한다.

이에 비해 부드러운 시스템은 대중을 에너지와 기후변화와 관련한 영역에서 능동적, 사회개혁적 행동

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그에 적합한 역량을 발휘하는 시민으로 재현하는데, 이런 시민들에게 과거와 다른

새로운 에너지시민성을 요구한다. 그러한 에너지시민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발휘된다면, 시민들은 능동

적으로 에너지 절약 행동에 나서며 재생에너지 생산에도 참여하고, 공론의 장에서 에너지 전환 정책을 결

정하게 된다. 이렇게 에너지시민성 개념은 에너지 절약이라는 개인적 행위와 에너지 소비자라는 정체성

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에너지와 대중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대문자 에너지(Energy)가 아

니라 다양한 소문자 에너지들(energies)을 실현하고 발견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표 2> 참조).

대문자 에너지

영원한 결핍 상태

공평한 분배 어려움

다수의 생존을 희생해 소수의 이익 보장

사용자와 비사용자의 자율적 공간 훼손

대규모 잉여가치 생산 가능

생태보호는 자연의 한계를 전문적 관리로 가능, 제

한적·일시적 변화만 가능

양적 흐름의 기술적 관리의 실패를 위기로 규정

기계와 상품화된 노동과 자본은 생산력과

이윤의 원천

추상성, 정량화, 기동성, 단수형

자연과 사회의 분리, 자연은 원자재,

에너지와 생명은 자본주의의 노동력

소문자 에너지들

자기 제한 상태

공평한 분배 가능

다수를 위한 안전망 제공

사용자와 비사용자의 자율적 공간 유지

대규모 잉여가치 생산 불가

자연의 한계와 분리되지 않는 생태보호,

적정생활 수준 유지

양적 흐름 위주의 상황 또는 기술적 관리가 필요한

상황 자체를 위기로 규정

지구는 비옥함이나 자연력의 원천,

산업 생산성은 불모나 파괴의 과정

구체성, 정성화, 얽힘, 복수형

자연과 사회의 대화, 자본주의적 노동을 넘어 일을

더 넓은 의미로 이해

* 자료 : The Corner House Energy(2014: 104)

<표 2> 대문자 에너지와 소문자 에너지들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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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27

이제는 에너지시민성을 지향하는 주체들과 만나야할 때

그러면 에너지시민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너지시민성은 생태시민성(ecological citizenship), 그리고

과학기술시민성(scientific technological citizenship)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생태시민성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민주적인 새로운 유형의 시민성으로, 반생태이거나 환경관리적 시민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생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사회 혹은 위험사회를 배경으로 과학기술의 지식과 정

보 공개와 접근, 관련 정책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통제를 의미하는 과학기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시민성

이다. 이러한 시민성들은 개념적으로 각각 생태운동과 과학기술민주화·적정기술운동의 역사적 흐름 속

에서 정립되어 왔다. 에너지시민성은 생태운동과 과학기술민주화운동 등과 연계되어서 발전되어 왔고,

생태/과학기술시민성의 지향과 원칙을 공유하고 있다. 나아가 현재의 시민권(공민권/정치권/사회권)과 민주

주의의 영역을 심화·확장하면서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민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 정부와 시장은 에너지 거버넌스의 행동공간에서 전략적, 실용적으로 조정하며 에너지 전환을 관

리하려 든다. 이런 경합 과정에서 에너지시민성 개념 자체도 경합하게 된다. 시민사회가 상대적으로 강조

하는 공동체에너지에서는 능동적인 에너

지시민성의 중요성이 충분히 부각될 수

있어, 에너지시민성이 형성되는 ‘구성적

공간’이자 그것이 발현되는 ‘창조적 공

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정

부와 시장이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가령

‘전력산업구조개편’이나 ‘에너지 신산

업’, 그리고 ‘저탄소 녹색마을’이나 ‘친환경에너지타운’에서는 제한적이거나 왜곡된 에너지시민성만 기

대할 수 있다.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은 에너지 분야의 개방화와 민주화를 확장한다는 긍정적

인 평가도 많지만, 이 역시 신자유주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의 혐의가 짙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최근 유행하는 시민운동, 사회적 경제, 마을 만들기가 ‘시장의 사회화’와 ‘국가의 민주화’보다 ‘자본주

의의 완충지대’로 기능한다는 지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에너지 전환 실험과 에너지 시스템

전환 사이에는 겉모습만으로는 그 실체를 포착하기 어려운 공간들이 존재한다.

이제라도 노동당은 공동체에너지라는 래디컬 스페이스(radical space)가 형성되고 있는 곳에서 에너지

시민성을 지향하는 주체들과 만나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어쩌면 이들은 우리 가까

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녹색정치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가까운 곳에 뿌리내리는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공동체에너지는 능동적인 에너지시민성의 중

요성이 충분히 부각될 수 있어, 에너지시민성

이 형성되는 ‘구성적 공간’이자 그것이 발현

되는 ‘창조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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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김재호전북 장수 당원, 노동당 전 농업위원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계기로 적록동맹의 시대 전략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녹색사회주의를 향한 현장의 활동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녹색 세상!우리가 만들자!

(사진 : 김재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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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29

농촌, 농민속으로

2005년, 장수로 귀농했다. 생태마을인 하늘소마을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한

다’는 마을규약이 마음을 끌었다.

마을에 들어와 후딱 집을 지어놓고는 곧바로 농사준비에 들어갔다. 농민회에 가입한 것도 집을 짓고

난 직후였다. 지방선거에 군의원후보로 나선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원의 의무를 다했다.

귀농했다고 뭐 다를 게 있나. 몇 년 간 ‘잠수 타고’ 숨어 지내는 활동가들, 그거 아니다 싶었다. 운동과 생

활을 크게 구분한 적이 없으니 귀농한 후 곧바로 농민회 가입하고 당 활동하는 게 옳다 싶었다. 물론 처음

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제 할 일 꾸준히 하면서 재밌게, 질기게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건, 현실과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

시골에 살아 보니 사람은 모순덩어리!

귀농하고 한동안은 생태적인 삶이니, 자립적인 삶이니, 공동체니, 녹색사회주의니 하며 많이도 얘기했

다. 20년 가까이 《녹색평론》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겠는가. 그런데 살아 보니 사람이란

참으로 모순된 존재였다.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났고 말과 행동은 일치되지 않았다. 이상적인 얘기

내뱉었다 뒷감당 못한 경우도 많고, 현실의 작은 이익에 민감해져서 배신감을 안겨 주는 경우도 많았다.

열두 가구가 사는 마을에 가끔 새로 들어오는 가구가 생긴다. 반가운 와중에도 몇몇 주민은 그런다.

“아~ 운동권들, 이제 제~발 고만 좀 들어왔으면 좋겠네!”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삶의 가치를 기준 삼아 집

과 농지 주변의 나무 베는 일도, 마을회관 지원받는 일도, 우사 짓는 일도, 체험마을 지정도, 계곡정비사

업도 모두 “반대! 반대! 반대!”를 외쳐대니 오죽 피곤했겠는가. 이미 정착한 주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농촌 현실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보려 하는데, 새로 들어온 생태주의자들은 이상에 머물며 ‘공중부양’ 한

다. “어디 한번 살아 봐라!” 이게 다, 내 얘기다.

생태고 자립이고 자기 입에 풀칠 못하면 한 입으로 두 말하게 돼 있고, 자기 집 구들방 차가우면 나무

솎는 거 찬성하게 된다. 마을회관 짓는 일 반대했더라도, 지어놓으면 내 집 비좁아서 못 재우는 손님, 마을

회관으로 보내게 돼 있다. 사람들 들락거리는 마을 싫다며 반대했던 내가 150명 규모의 당 귀농수련회를

개최하고 노동당 활동가쉼터를 만들어 놓은 거 보라. 우리 주변엔 비판은 잘하되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

는 사회주의자들 천지다. 자기가 한 말이 결국엔 자기 발목 잡는 상황을 여러 번 겪어 봐야, 입이 무거워지

고 발이 빨라진다. 이것도 다, 내 얘기다.

“치열하게 성찰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숨 쉬듯이 몸을 놀려 단련하고 살지 않는 한, 너무도 당연히 생

각은 퇴보하고 그러지 않아도 늙어가는 몸은 빠른 속도로 퇴화한다. 그러지 않으면서 내가 진보라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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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그 자체로 고집 센 착각이다. 한편,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명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계삼 샘 말마따

나 사람 냄새가 진득하니 배어 있고, 재미가 있으며, 세상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공간이 아니라면 세상을

바꾸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점점 든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믿음. 세상보다 먼저 나를 바꿀

용기.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내 일상에 디자인하는 실천. 진심을 다하고 마음을 읽어주며 나누는 교감. 나

는 이런 것들이, 침 튀기며 논쟁하는 정세분석과 앞 다퉈 내세우는 운동의 원칙과 지구를 구할 명분보다

훨씬, 우리에게 시급하다고 믿게 되었다.” (페이스북 친구 진눈깨비님의 글)

딱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머리로 배운 이상을 입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

로 사람 냄새다. 속옷과 묵은 때는 그대로 둔 채 겉옷만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고 온 활동가들은 여지없이

깨지게 마련인 곳이 농촌이다. 생활과 운동, 이상과 현실, 말과 실천의 부조화를, 유체이탈해서 자신을 내

려다보듯 객관화시킬 수 있는 곳. 농촌으로 오시라! 녹색사회주의 운동의 실현지. 바로 농촌이다. 겉옷만

갈아입고 오셔도 환영한다. 함께 깨져 보고 묵은 때도 벗겨 보자!

최소 10년의 전망으로 농촌을, 지역을 디자인해야

시골에 내려와 다녀 보니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많았다. 특히 귀농한 젊은 당원들이 제법 있었다. 묵묵

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역 일 열심히 하던 이들이었다.

철학캠프, 농업위원회, 민중의집, 귀농수련회, 농민회 활동, 지역 활동, 녹색당과의 연대, 밀양송전탑 반

대, 노동희망버스, 투쟁사업장 농산물후원을 기획해 당원들의 참여도를 높여 갔다. 할 일은 차고도 넘쳤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활동가들 두 세 명만 모여도 지역이 바뀐다. 더군다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진보

정당끼리 실사구시(實事求是), 구동존이(求同尊異), 우애(友愛)와 협력(協力)의 자세만 갖춘다면 지역은

노동당 농업위원회의 쌀 개방 반대 현수막 (사진 : 김재호)

Page 3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31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바뀐다.

장수만 해도 그렇다. 모두의 노력으로 10년 동안 달라진 게 참으로 많다. 귀농귀촌협회, 귀농학교, 친

환경영농조합, 친환경농업인연합회, 장수시민연대, 각종 협동조합, 녹색평론 독자모임, 농민의집, 장수신

문, 가톨릭농민회, 연찬문화연구소, 노동당 농업위원회, 녹색당/노동당 활동가쉼터가 만들어졌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지역을 디자인하며 쌓인 꾸준한 교류와 소통이 서로 간의 신뢰로 이어지고, 이는

정치공학적인 통합이 아니라 신뢰를 갖는 진보재구성의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서로 뒷담화는 할지

언정, 만나면 다시 웃어주고 머리 맞대고 함께 풀어가는 농촌 주민공동체 같은 자세라면 진보운동은 다시

부활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녹색 세상! 할 일은 차고 넘쳤다!

농업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녹색 세상을 구현하는 중요한 터전이며 투쟁을 일구는 요충지라는 이야

기는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반복해 얘기한 것만으로도 할 일은 차고 넘친다.

귀농단체 조직과 지원활동, 친환경농사, 친환경생산자단체 조직과 운영, 농산물대안유통, 친환경농업

인연합회나 농민회, 가톨릭농민회 활동, 농민의집, 지역 의료생협, 독립언론 창간, 인문학강좌, 협동조합,

대안에너지, 마을공동체, 시민단체 결성, 샛강 지키기, 친환경학교급식, 혁신학교, 송전탑반대운동, 대안

교육, 노-농 연대, 노동당 농업위원회, 지역생태모임, 녹색평론독자모임, 쌀 개방 반대, 식량주권 지키기,

세월호 진상규명, 농촌교육문화운동, 녹색대안장터, 의정감시, 골프장반대, 노동당 지역당협, 활동가쉼

터,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농사, 민주노총과 함께하는 조합원은퇴귀농학교, 농민기본소득운동, 녹색노

동전환운동, 농민운동의 방향전환과 재편, 노동당-녹색당 농업공동행동, 농민당원한마당, 당원귀농수련

회, 당 활동가 후원을 위한 논농사… 농촌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사람은 없고 할 일은 많다. 일할 젊은이는

없고 노인은 넘쳐난다. 활동가는 없고 농민운동은 시대 흐름을 꿰뚫지 못하고 힘을 잃어간다. 노동당, 녹

색당 당원과 활동가들이 농촌으로 많이 이주해 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

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농촌으로 온 모든 당원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도 아니

다.

노동당, 녹색당 당원들이 농촌으로 많이 와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이들은 노동가치와 녹색가치를 자

신의 활동 속에 녹여낼 수 있는 정당의 당원이자, 적록동맹의 굳건한 동반자로서 농촌을 반자본주의의 녹

색 진지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농민 속에서 ‘사람 냄새가 진득하니 배어 있고,

재미가 있으며, 세상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농촌을 만들 건가가 중요하다. 자립적 삶, 친환경농

업, 녹색, 공동체, 녹색사회주의에 대한 고민은 넘쳐난다. 그런데, 시골로 오지 않으면 달라질 게 별로 없

다. 진보적 생태귀농이 브나로드 운동과 같이 거대한 시대흐름으로 자리 잡아야 가능하다고 본다. 80년대

의 농촌투신운동이 지금의 농민운동을 이끌어온 힘이라면, 다음 세대의 농민운동은 이들에 의해 주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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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녹색농업과 대안적인 노-농 연대, 녹색사회주의는 바로 이들에 의해 실현될 것이다.

농부 전태일을 환영한다!

홍세화 전대표는 ‘녹색 가치의 깃발을 든 전태일’을 당의 표상으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녹

색사회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주창했다. 노동중심성을 주창하는 분들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시대정신에 맞

는 노동중심성이란 노동운동의 성장주의에 대한 성찰과 녹색전환,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한 고민, 노-농

연대의 관점이 분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 강령이 이를 뒷받침하고, 비정규직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

에 열심인 당원들의 진심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철저히 소외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표상이었던 전태일. 그가 살아있다면 함께 농사를 짓고 싶었다.

그래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쌀도 보내고, 감자도 보내고, 김치도 담가 보내고 싶다. 따뜻하게 연대

하면서 노동자의 요구가 갖는 현실적 한계를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노동운동의 녹색전환은 어떻게

가능한지, 현실적 요구에 막힌 대안세계에 대한 비전은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 적색과 녹색의 만남은 어

떻게 가능한지, 발전노조 조합원과 머리 맞대고 핵발전소 폐쇄에 대해, 밀양송전탑 싸움에 대해 함께 고

민해 보고 싶다.

농민과 노동자, 전농과 민주노총이 친환경농산물로 교류하고, 논밭에서 막걸리 한잔 들이키며 다독이

고, 농민대회에서 식량주권 사수를 위해 너나없이 연대할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보고 싶다. 소중한

노동당원들, 그들이 내게는 녹색 깃발을 든 농부 전태일이다.

녹색 세상을 위한 적록동맹, 우리가 만들어 가자!

전체 운동의 영역에서 적록동맹의 필요성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어느 특정한 그룹과

특정 정당간의 활동영역으로 축소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특히 농촌에 사는 당원들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시급한 일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계기로 적록동맹의 시대 전략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

라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교황마저도 ‘새로운 독재’로 규정한 자본주의사회, 핵마피아들의 준

동이 전 지구적 멸망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녹색사회주의를 향한 현장의 활동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당은 녹색정당이자 농민정당으로서 시대적인 소임을 다해야 한다. 할 일은 차고도 넘친다. 바쁜 농사

철에 글재주 없는 농사꾼이 독수리타법으로, 원고 마감 날짜까지 어겨 가며 낑낑대는 이유다. 노동당의

전태일 당원들, 많이들 농촌현장으로 오시라!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녹색 세상,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가 하자! 지금 하자!

Page 35: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33

특집 / 미래가 있다면 녹색

인터뷰 : 장석준·최백순기관지위원정 리 : 장석준사 진 : 정정은편집부장

장석준(이하 장) : 우선 정책위원장에 출마하게

된 계기부터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한재각(이하 한) : 언젠가는 녹색당에 뭔가 기

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시기가

약간 빨라진 셈이죠. 결정적인 계기는 지방선거였

어요. 지방선거 평가는 기준을 어떻게 잡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저는 녹색당이 실패했

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녹색당의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실패’라고 인식하지 않는 분위기가 선거 직

후에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백년 정당’이

니까 담담하게 가면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죠. 그

래서 마음이 급해진 겁니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2016년 총선까지 가려면 녹색당이 뭔가 해야 하는

데, 그러려면 비평가처럼 얘기하는 걸 넘어서 뭔

가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도 듣고, 여러 당원들이 그

럴 필요성을 같이 느끼고. 그래서 일이 시작된 거

죠.(웃음)

장 :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셨군요.

“미래의 시간은 녹색의 편”

<미래에서 온 편지>의 이번 특집 주제는 ‘녹

색’이다. 애초에 녹색당 당직선거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특집을 준비하던 중에

때마침 녹색당에서 당직선거가 실시됐다. 의

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녹색당의 새 얼굴도

등장했으니 그 중 한 분과 인터뷰를 해보자

는 제안이 나왔다. 녹색쟁점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녹색정치의 한 기둥을 맡고 있는 녹

색당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재각 신임 녹색당 정책위원장

과의 대담을 마련했다.

한재각 녹색당 신임 정책위원장 대담

Page 36: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한 : 사실 처음에는 제 출마를 분위기 띄우는

용 정도로 생각했어요. 경쟁 분위기를 만들어서

당내 경선을 성사시키길 바랐는데 말로만 경선하

라고 할 수는 없고, 내가 발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

다가 판이 만들어지면 빠질 수도 있는 거 아냐, 막

연히 이렇게 생각했죠. 한데 공동운영위원장 선거

는 경선이 됐는데, 막상 정책위원장 선거에는 후

보가 저만 나와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린

거죠.

장 : 함께 논의하면서 준비한 분들도 계셨던 건

가요?

한 : 있었죠. 선거구도가 가시화되기 전, 그러

니까 7월에 당원토론회를 개최했어요. 아마 녹색

당에서는 처음 있는 일일 텐데요. 당 공식조직에서

주최한 토론회가 아니라 당원들끼리 모여서 토론

회를 조직했죠. 그 토론회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일

차적으로 같이 논의했던 그룹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장 : 이번에 공동운영위원장 선거에 나섰던 김

수민 후보도 같이 하신 건가요?

한 : 네. 그러면서 김수민 후보에게 공동운영위

원장 후보로 나가는 걸 권유하기도 했고요.

장 : 막상 정책위원장에 당선되고 나니까 소감

이 어떠십니까?

한 : 뭐, 큰일 났다는 생각이죠.(웃음)큰일이죠.

막상 실제로 일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말할 때와는

느낌이 다르잖아요. 눈에 들어오는 게 더 많아지

고….

장 : 제가 어찌어찌 당직을 맡아서 지금 삼 개

월만 있으면 임기인 이 년을 채우는데요. 제 경험

으로 말씀드린다면, 정말 깁니다.(웃음) (편집자 : 참

고로, 녹색당의 당직 임기도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2년

이다.)

한 : 그렇군요.(웃음)

장 : 지방선거 평가가 중요한 계기였다고 하셨

는데, 중요한 주제인 것 같아요. 노동당도 지방선

거 결과에 대한 평가를 놓고 입장 차이가 있었지

요. 주로 지방선거의 어떤 지점들에 대해서 녹색

당이 실패했다 혹은 부족했다고 평가하십니까?

한 : 명시적으로 드러난 바만 보면, 후보들이

한 명도 당선이 안 됐지요. 특히 유력한 후보로 여

기던 과천시장 후보가 당선이 안 된데다 생각보다

당선권으로부터도 멀리 있었지요. 1위와 경합할

거라 생각했는데 3위가 됐어요. 김수민 전 구미시

의원도 떨어졌고. 지방선거 전을 돌이켜 보면 준

비가 소홀했다고 할 만한 것도 있어요. 뒤늦게 비

례대표 전략이 당원발의를 통해 제기되기도 했고,

가능한 지역에서 후보를 낸다는 수준이어서 전국

적 결정보다는 지역의 결의를 더 중시하는 방식으

로 논의가 이루어졌죠. 이 문제는 당직선거 과정

에서 김수민 후보하고 하승수 후보 사이에 쟁점이

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준비가 덜 되다 보니까 소

홀한 지점들이 있었죠. 재정만 해도 그렇고…. 여

러 가지 측면에서 제대로 못했던 거지요. 득표율

을 보면 총선 때보다 조금 증가하긴 했는데, 크게

의미 있는 건 아닌 것 같고요. 그리고 서울의 경우

엔 그때보다 오히려 더 떨어졌어요. 녹색당이 출

범해서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선거를 거쳤는데, 뭔

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당내·외에 갖

게 했는지 따져본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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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7: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35

제 판단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선 그것을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원래 그런 당, 길게 가는 당

이라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선거 자체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의 평가에서 좀 더 위기가 느껴졌던 거지요.

장 : 노동당에서는 수도권에서 녹색당의 정당

득표율이 노동당보다 높게 나오거나 비슷하게 나

오는 걸 보고 녹색당을 오히려 부럽게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는데요.

한 : 실은 일부에서는 그런 얘기도 하죠. 노동

당은 거의 올인하다시피 쭉 출마했고 경험과 인력

과 예산까지도 상당한 준비를 했는데, 선거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던 우리가 거기에 비등한 결과를

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이야기요. 그게

한편으론 독이 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론 저력이 될

수도 있는 건데, 여러 가지 해석을 해야 하는 상황

인 것 같습니다.

장 : 정책이나 이슈와 관련해서도 평가가 있었

나요?

한 : 이번에는 세월호 때문에 어느 정당이든 정

책을 통한 선거운동은 제대로 못했다고 봅니다. 녹

색당은 작년 말부터 정책콘서트란 방식을 통해 상

향식으로 정책을 만들어내, 정책생산과정을 새롭

게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했어요. 만들어진 공약도

제가 볼 때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는 않는 정책들이

었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정책 자체가 이슈화되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죠.

장 : 그건 노동당의 사정도 거의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럼 지방선거에서 당직선거로 주제를 돌

려서, 당직선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당심

(黨心)의 향배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시죠.

한 :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동운영위원

장 경선을 봐야겠죠. (편집자주 : 녹색당은 일반/여성

각 1인씩 2인의 공동운영위원장을 선출하며, 이들이 다

른 당의 대표, 부대표나 최고위원이 수행하는 업무를

맡는다) 일단 하승수 후보를 공동운영위원장으로

다시 신임했다는 것은 하승수 후보가 오랫동안 해

Page 38: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왔던 것에 대해 당원들이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죠. 또 한편으로는 하승수 후보가 상당히 저돌

적으로 적극적인 선거캠페인들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 측면에서 “구관이 명관이다” 이런 이야기도

나왔어요. 그것은 경쟁자였던 김수민 후보의 출현

과 연결해서 해석해 봐야겠죠. 하승수 후보도

“‘독한 녹색당’이 되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물론

이것은 지자체선거를 거치면서 느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어떻

게 보면 김수민 후보의 출현에 자극받은 것일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

하면서도 안정감이 좀 더 필요하다, 그리고 해왔

던 사람이 계속 안정적으로 끌고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도 나왔죠. 그럼 김수민 후보를 지지한

20퍼센트의 지지자들은 뭘까? 김수민 후보는 지

난 3년 동안 녹색당을 이끌어 왔던 하승수 후보를

포함한 집행부에 대해서 일정하게는 책임을 묻는,

특히 ‘풀뿌리 전략’이라고 불렸던 조직질서가 실

은 일종의 책임방기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적극

적인 공세를 펼쳤죠. 이에 대한 반응이 20퍼센트

에 포함돼 있겠죠. 거기에다 김수민 후보가 자신

의 배경을 이루는 전통적인 진보정당의 언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운동들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녹색당원들의 공감도 얻지 않았겠나 싶어요. 반대

로 여성후보의 경우는, 이유진 후보도 기존 집행

부의 일원이었는데 다시 한 번 뽑힌 거니까, 그런

측면에서는 안정감을 원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

럼 정유진 후보를 지지한 30퍼센트는 또 뭘까? 그

것은 제가 굳이 말을 만들어 붙이자면 ‘낭만적 풀

뿌리주의’라고 불릴만한 부분들이 좀 드러난 것

아닌가 합니다. 현실 정당정치보다는 풀뿌리민주

주의, 직접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생각하는 분들의

표가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죠.

장 : 어쨌든 그렇게 해서 녹색당의 새로운 집행

부가 구성됐는데, 그 출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약간은 색깔을 달리 하는 분들이 모

인 연립정부적 성격을 띠게 된 셈인데, 이게 어쩌

면 이전 집행부보다 훨씬 역동적인 모양새로 나타

날 수도 있을 텐데요.

한 : 실은 좀 어정쩡하달 수도 있습니다. 기존

의 집행부가 일정하게 이어졌다는 측면에서는 당

권력이 바뀐 건 아닌데, 이전 집행부가 보였던 태

도에 비해서는 상당히 역동적이고 도전적이고 진

취적인 방식으로 변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리고

저도 “2016년 총선 승리”를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하승수 후보나 다른 후보들도 이 부분을 많

이 강조했어요. 이런 점에서 이번 집행부는 총선

이라는 제도정치, 선거정치에 대해 소홀히 하거나

거리를 두기 보다는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하려는

쪽으로 입장이 선회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집행부 선거가 2016년 녹색당 총선을 확실히

대비하자는 결의를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장 : 녹색당에서 그동안은 ‘녹색’이 주로 강조

됐었는데 이제는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던

‘당’이라는 대목이 더 강하게 힘을 받기 시작했다

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한 : 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장 : 참 어려운 얘기라 마지막쯤에 가서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 나왔으니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녹색당의 2016년 원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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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9: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37

화 전략은 무엇입니까?

한 : 사실은… 백약이 무익한 상황이죠. 노동당

도 마찬가지겠지만, 지금의 선거제도나 정치제도

자체가 소수정당한테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고, 녹

색당은 그동안의 경험이나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

에 객관적인 조건만 나쁠 뿐 아니라 주체적인 역

량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죠. 말하자면 깃발

하나 밖에 없는 정당인데, 그렇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선거전략이라는 게 실은 많지 않아요. 과

거에 진보정당들이 성장했던 과정을 참고할 수밖

에 없고, 그렇다면 결국 비례대표 전술과 몇몇 전

략적 지역에 집중하는 전술을 취할 수밖에 없겠

죠. 예전에 민주노동당이 보였던 전략하고 큰 틀

에서는 비슷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장 : 당직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선

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이번 특집의

관심이 녹색이니까 이후 녹색당의 핵심 정책 방향

이나 구상 쪽으로 주제를 옮아가 보죠. 정책위원

장 후보로서 공약하신 부분도 있을 테고요.

한 : 녹색당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만들

어진 탈핵정당으로, 실은 그걸 동력으로 만들어진

거죠. 그래서 탈핵문제, 에너지전환문제를 빼놓을

수 없어요. 지금 당장은 현안인 노후원전이나 신

규원전, 경주 저준위방폐장문제, 그리고 고준위핵

폐기물처리문제 등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요. 이런

현안을 다루면서도 전략적으로 수를 한두 수 먼저

두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얘기하

는,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 언어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죠. 재생에너지 확대나 에너지효

율 강화를 강조하면서 이것이 한국경제 또는 지역

경제, 그리고 노동자의 고용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긍정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내서 사람들이 참여할 만한 동기를 만들 것

인가, 이렇게 한두 수 앞서가는 전략을 추진하려

합니다. 당직선거 때는 이를 ‘녹색경제동맹’ 전략

이란 말로 표현했지요. 이것은 하승수 후보가 밝

힌 탈핵/탈송전에 보다 집중하자는 주장이나 이유

진 후보가 비슷하게 했던 얘기들과 연동되면서도,

이로부터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는 것이었어

요. 아무튼 이렇게 하나로 묶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한편에서는 녹색당이 탈핵정당이라고 하

지만 농민정당이고 농업정당이라고 표방하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당원들 직업을 보니까 3위가 농

어민이더라고요. 1위가 직장인, 2위가 주부, 3위

“현안을 다루면서도 전략적으로 수를 한

두 수 먼저 두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어요.

흔히들 얘기하는,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

언어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죠.”

Page 40: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가 농업, 4위가 활동가, 이런 순이에요. 하여튼 그

런 측면도 있고, 최근의 쌀개방문제와 식량문제도

있어서, 결국은 녹색당의 기본 비전인 지역분산적

인 사회와 깊이 연관되죠. 관련하여 지난 총선에

서 제기한 농민기본소득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

로 생각됩니다. 이에 더해, 녹색당의 선거전략이

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녹색당이 존재해야 될

이유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이 생명권, 그러니까

동물복지라든지 반려동물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

기에 포함해서 가리왕산에서의 생태계파괴문제

같은, 환경운동이 전통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온

생태계보호문제도 꾸준히 계속 다뤄 나가야겠죠.

이런 큰 틀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에 비해 도시나

노동, 복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가

비어있는 대목이 많죠. 이런 주제들을 일정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본

소득 같은 대안을 더 고민해볼 수 있을 텐데, 아직

은 출발 단계입니다.

장 : 말씀이 나와서 질문을 드리자면, ‘녹색경

제동맹’이라는 개념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녹

색당 당직선거에서는 많은 얘기가 오고갔겠지만,

<미래에서 온 편지> 독자들 중에는 처음 접하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아서요.

한 : 노동당 당원이기도 한 김현우 씨가 조만간

낼 《정의로운 전환》(가제)이라는 책을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이런 겁니다. 60~70

년대 미국 노동운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토니

마조치의 말을 인용하자면, 노동자들은 지금 ‘독

성경제’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녹색경제’에서 자신의 삶도 지키고 환경도 보존

하며 지역공동체도 보호하는 노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은 지금의 많은 일자리 자체

가 환경적인 지속가능성, 더 나아가면 사회적인

정의, 이런 것들과 얼마나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봐야 해요. 예컨대 분쟁지역에 공급되

는 각종 무기를 누가 생산하느냐, 또 지금 당장 쟁

점이 돼 있는 핵발전소에 누가 고용돼 있느냐, 물

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생존문

제를 위해 싸움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일자리도 바꾸고 어디에서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산업구조에서 일을 할 것인가 까지도 고민해야 해

요. 이런 맥락에서, 기존 체제가 ‘회색경제’, ‘독

성경제’라면 우리는 ‘녹색경제’를 얘기하는 것이

고. 이것은 단순히 환경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

회적 정의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녹색경제’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이

게 너무 포괄적인 면이 있기는 하죠. 일단 에너지

문제로 보면, 핵발전이라든지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에너지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대부분이 거대한 중앙집중 방식이고 고용도 실은

그리 크지 않죠. 노동유연화가 심해서 일자리 간

격차가 크기도 하고요. 이런 시스템을 지역분산적

인 재생에너지 체제로, 에너지효율성을 높이는 쪽

으로 바꿔 나가면서 해당 산업에 고용돼 있는 노

동자들이나 그 산업의 기반 역할을 하는 지역공동

체가 ‘녹색경제’를 추진하고자 하는 녹색당을 지

지하는 그룹이 되도록 만드는 전략, 그게 ‘녹색경

제동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 : 화석 에너지 중심 체제를 다른 어떤 에너

지 체제로 전환하는 게 과연 현실적일 수 있겠는

가, 이렇게 회의를 표하시는 분들도 의외로 많거

든요. 이에 대해 한 번 반론을 펼쳐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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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1: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39

요?

한 : 가장 쟁점이 되는 게 실현가능성 문제겠

죠. 실현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골라보면, 에너지수요가 계속 증가하는데 그

것을 다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는 반문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에너지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면,

이것을 화석연료나 핵발전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 환상인 것 아니냐고요. 석유정점(oil

peak)이 목전에 있고, 당장 눈앞의 고유가도 단순

히 자본의 투기로만 폭등한 게 아니라 석유정점이

라 불리는 공급 부족 추세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에너지공급시스템으로 소비를 유지할 수 있을 거

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실은 환상인 거죠. 이것

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개

인의 차원에서 본다면, 개개인의 무력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는 이 에너지문제를

달리 어찌할 수 없다는, 계속 소비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져서 더 많은 전력을 사용

하는 가전기기들을 무기력하게 늘려가고 있는 현

실 말이에요. 집값이 비싸지니까 시외로 나가야

되고 시외로 나가니까 더 많은 기름을 사용하면서

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런 무기력함 말입니

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단지 정치권력을 바꾸

는 걸로 볼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삶의 전반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

다. 이렇게 고민을 한다면 또 다른 차원의 답이 있

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경제성 문제인

데요. 재생에너지는 비싸다는 이야기죠. 재생에너

지가 비싼 건 맞는데, 사실 그것은 상대적인 가격

평가에요. 더 이상 ‘값싼’에너지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까 고유가도 얘기했지만, 석유 값도

계속 올라가고 있어요. 그동안 값싼 에너지라고

얘기했던 석유도 그렇고 원자력 발전도 그래요.

실은 엄청난 에너지 보조금들을 깔고 있어서 겉보

기에 낮게 보이는 것뿐이지 그런 보조금을 제거하

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환경적 비용들을 제대로

반영한다면 더 이상 ‘값싼’에너지라는 건 불가능

합니다. 오히려 비싼 에너지의 시대가 올 것을 대

비해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맞

지요. 이렇게 본다면, 재생에너지는 결코 다른 것

보다 비싼 게 아니라 가장 적절한 에너지 가격을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단지 정치권력을

바꾸는 걸로 볼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Page 4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가질 수 있는 자원이라는 것이죠. 궁극적으로는

지금 같은 방식의 에너지시스템을 계속 유지할 수

가 없습니다. 물론 어찌어찌 연장은 할 수 있겠지

만, 연장 자체가 이전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계속

누군가의 돈과 희생을 요구하는 시스템이에요. 그

점에서 불의한 사회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

고요. 이걸 똑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장 : 최근에는 에너지전환론에 대한 반론근거

로 미국의 셰일가스와 캐나다의 타르샌드가 회자

되고 있지요. 그런 게 계속 발굴되기 때문에 고유

가나 석유정점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들이

대두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 : 겉만 보면 셰일가스 때문에 에너지비용이

많이 떨어지고 있죠. 그런데 그 원리를 들여다보

면 녹색당이나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바를 뒤

엎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대규모 중앙

집중적 에너지공급시스템의 유지는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모순된다는 명제에 대해 새로운 해

결책을 제시해주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현

실에서 기존 시스템을 통해 권력을 확보하는 세력

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이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셰

일가스 개발 같은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죠. 하지

만 이 과정에서 유발되는 각종 비용, 사회적/환경

적/정치적 비용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셰일가스 개발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셰일가스를 개발하는

데 엄청난 양의 물과 화학제품을 사용하기 때문입

니다. 그 과정에서 물의 고갈이나 지하수 오염 같

은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죠. 또 무엇보다도 그

렇게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해

당 지역사회가 완전히 파탄난다는 것이지요.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70년대부터 관찰됐던 ‘에너지

붐타운’이라는 현상입니다. 셰일가스 개발 과정에

서도 이러한 지역의 희생이 나타나고 있지요. 셰

일가스뿐 아니라 캐나다의 타르샌드 역시 문제는

채굴비용이 증가하고 있다는 거예요. 과거에는 지

질구조에서 화석연료를 캐내는 데 들어가는 에너

지가 대단히 적었어요. 구멍만 뚫으면 그 압력으

로 다 솟아올랐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거기다 타

르샌드나 셰일가스의 경우는 그런 식으로 추출되

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을 분쇄하고 가공을 한

번 해서 다시 뽑아 올리는 건데, 그 과정 자체가 다

열역학적으로 보면 에너지 투입을 요구하고 있어

요. 문제는 1이라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에너지

를 몇이나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1이라는 에너

지를 얻기 위해 거의 1에 가까운 에너지를 쓰는 식

이에요. 한 마디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죠. 그

점에서 여전히 ‘화석에너지 고갈 위기’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 : 결국은 이게 다 기후변화 문제랑 연관이

있을 텐데요. 기후변화 같은 쟁점이야말로 녹색당

이 현실 정치세력으로서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일 테죠. 최근 미국에서는 기후변화와 관련한

대규모시위도 있었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

지 이게 대중적인 정치쟁점으로까지는 부상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에 대해서 혹시 구상이나 포부

가 있는지요?

한 : 고민이 있죠. 탈핵에너지전환과 기후변화

에 대한 문제의식은 서로 상당히 겹치면서도 미묘

하게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요. 어쨌든 그 충돌 지

점을 잘 해결하면서 탈핵에너지전환 자체가 기후

변화에 부응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재생에

40

Page 4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41

너지를 늘리고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것 자체가 이

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일이니까요. 당장의 문제

로는, 현재 추진 중인 ‘배출권거래제’라고 불리는

시장주의적 방식의 온실가스감축 정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온실

가스감축을 위한 제도설계를 해나가면 앞으로 십

몇 년을 쭉 끌고 가야 할 텐데, 배출권거래제 자체

가 표류하는 상황에서 그걸 계속 믿고 가야 하는

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데 환경단체들 일부는

배출권거래제를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유력

한 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배출권거

래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정부를 공격하면서

배출권거래제가 상당히 유의미한 정책인 것처럼

이야기해요. 그건 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

다. 저는 배출권거래제와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고 생각합니다. 기본소득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탄소배출부담에 기반을 둔 시민 배당(Cap &

Dividend)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도 있고요(편집

자주 : 탄소세를 재원으로 하는 일종의 보편적 시민기

본소득 방안). 이런 대안에 대해서도 적극 연구하고

연계시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인데, 아직은 이

런 논의가 모두 변방에 머물러 있죠. 공론화시켜

야 한다는 과제가 있어요.

장 :‘녹색경제동맹’이라는 전략 등을 얘기할

때, 결국엔 성장의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할 텐데

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해야 일자리가

생기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상황에서 피할 수 없

는 쟁점이잖아요.

한 : 저도 고민이 많이 됩니다.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정상상태 경

제’(편집자주 : 제로성장 상태이면서 주로 내적인 성숙

에 집중하는 사회) 논의도 더 연구해 봐야하고요.

어떻게 보면 성장이라는 건, GDP가 계속 늘어나

야 사회가 돌아간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생각과

수식 속에 존재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지속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최소한의

사회적 수요 이상의 욕구들을 꼭 물질적인 차원에

서 다 채워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죠. 제가

이번에 제기한 녹색경쟁동맹 전략은 에너지수요

나 폐기물 배출량 등이 경제성장과 탈동조화될 수

있다는(편집자주:에너지수요나 폐기물 배출량을 늘리

지 않으면서도 질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생태적 근대

화 이론에 우선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어서 당장은

성장론과 근본적으로 부딪히지는 않아요. 하지만

더 근본적인 고민이 계속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장 : 또 하나 뜨거운 쟁점이, 아까 말씀하셨던

기본소득인데요. 노동당 안에서는 기본소득을 놓

고 찬반이 확연히 나뉘어 있거든요. 녹색당 정책

위원장이라는 당직을 떠나서 일단 개인적으로는

기본소득 대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 :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

고 있지만 아직 연구와 고민이 부족합니다. 빠른

시간 안에 우선 공부부터 해야 하고요. 당 정책위

원장으로서는 어쨌든 이번에 당선된 하승수 위원

장이 기본소득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공동운영

위원장에 당선됐기 때문에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다만 녹색당 안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 의견들도 표출이 됐기 때문에 당내 공

론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적인 긍정론

부터 신중론, 반대론까지 포괄하는 열린 토론이

필요해요.

Page 4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장 : 정책위원장이란 역할의 주요한 과제 중 하

나가 그런 식으로 당에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나

누어질 때 그걸 토론해서 합을 만들어가는 일일

텐데요. 기존 진보정당에서는 굉장히 닫힌 당내

정파 구도 때문에 그게 쉽지 않았죠. 과거 진보정

당들과는 구별되는 녹색당만의 당내 이견 조정 방

식에 대해 구상한 바가 있습니까?

한 : 글쎄요, 갑자기 기존 수준을 뛰어넘는 뭔

가가 있을까 싶기는 합니다. 다만 녹색당만이 가

진, 지역에 기반을 두고 풀뿌리에 바탕을 둔다는

강한 원칙들이 그런 논의 과정을 규정할 것입니

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정책 조정이라든지 이견

조정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지만, 또 조정이 된

다면 그것은 상당히 힘을 갖고 또 의미 있는, 그리

고 또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만들어지지 않았던 정

책적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장

지금 영덕과 영양면의 대규모 풍력발전소를 둘러

싸고 당내 이견들이 상당히 있어요. 기업 주도의

대규모 풍력발전소 자체를 반대한다는 데는 공감

을 하더라도 그럼 풍력발전소 일반에 대해서 우리

가 반대할 거냐는 얘기와 여러 다른 의견들이 뒤

섞여 있지요. 아직은 풀기 쉽지 않은 이 논의가 정

책 이견을 조정하는 첫 번째 시험 무대가 될 것 같

습니다.

장 : 아, 중요한 쟁점이네요, 풍력발전…. 당내

의 이견 조정을 넘어서 이제는 당 외부 세력들과

의 대화나 협력 혹은 합작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

다. 진보정당들과의 연대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짚고 싶은 게, 어쨌든 녹색당도 야권이잖아

요. 야권으로 분류되죠. 진보정당들의 가장 어려

운 문제가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굉장히 퇴행적

이지만 현실적으로 거대한 야당의 존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인데요. 녹색당도 이 문제에

서 결코 예외는 아닐 것 같거든요. 특히 구 민주당

세력이 진보정당의 복지 의제만 차용해간 게 아니

라 유력 대권 주자인 문재인 의원의 경우는 이미

탈핵에 대해 일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고 또 다

른 유력 주자인 박원순 시장은 그의 경력으로 보

거나 시민사회운동 내의 지지를 봤을 때 녹색당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녹색당은

어떻게 독자적인 대안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유지

할 것인지, 혹은 연대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라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한 : 진짜 어려운 질문이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녹색당 당원들은 타세력과의 다양한 연대는 가능

하지만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녹색당의 대오를 유

지하고 정체성을 강화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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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5: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특집 미래가 있다면, 녹색 43

의원과 박원순 시장은 큰 고민거리입니다. 경쟁

상대인데 어떤 측면에서는 선수를 뺏겼다고 느낄

만한 것도 상당히 있어서 고민이 많아요. 그래서

저의 전략은 그 사람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화

를 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정치적 경쟁자로 바라보

면서 우리 녹색당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다는

것입니다.

장 : 구 민주당 세력뿐만 아니라 다른 진보정당

들과의 관계도 쟁점일 텐데요. 녹색당 당직선거에

서의 쟁점이 ‘녹색당이 보다 적극적인 정치 행위

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이제 진보정당들과

의 관계에서도 이전보다는 더 적극적인 태도를 기

대하거나 전망해볼 수 있는 건가요?

한 : 저는 이번 선거를 치르는 동안 굳이 녹색

당의 ‘제2의 창당’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녹색당

밖에 포진하는 녹색세력/녹색정치세력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 새롭게 참여함으로써 녹색당이 다

시 한 번 창당되는 방식으로 그 내연을 넓혀야 한

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 그 녹색정치

세력이 누구냐? 가깝게는 기존 진보정당 내에서

녹색당과 같은 뜻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그룹들을

지칭합니다. 더 나아가면 새정치민주연합 내에도

일부 그런 흐름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요. 또한 정

치세력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실상의

정치세력인 시민사회나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

에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도 있죠. 지금껏 풀뿌

리를 얘기하면서도 충분히 포괄하지 못했던 이런

세력들까지 포함해 녹색당이 재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진보정당들은 중요

한 협력파트너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고민이 있

어요. 간혹 녹색당을 ‘진보정당들’ 중 하나로 분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녹색당을 ‘진보정당’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를 전제로 서로 같은 게 뭐고

차이가 뭔지를 더 건설적으로 논의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그동안 진보정당들이 사회주의적인 전통

아래서 견지해온 평등과 연대를 제대로 평가할 수

도 있을 것이고, 녹색당이 제시하는 지속가능성이

라든지 탈성장주의의 문제의식도 제대로 토론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것들에 공감하는 세력이라

면 녹색당은 언제든지 같이 하자고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장 : 제 식으로 정리해보자면, ‘모두 다 진보정

당들’이라는 식으로 퉁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

록동맹’이라는 식으로 서로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

서 연대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는 말씀인 거죠?

한 : 네, 그런 표현이라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장 : 혹시 노동당과 당장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을 생각해보신 게 있습니까?

한 : 그건 이전부터 얘기를 좀 했던 건데, 저는

제가 아까 말했던 ‘녹색경제’라고 불릴 만한 영역

에서 노동자 조직화 문제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지금 재생에너지 산업이

상당히 확대되고 있는데 재생에너지 산업의 노동

자를 조직하고 있는 노조는 없거든요. 상당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기도 하고요. 이 세력들이 성

장한다면, ‘녹색경제’를 추진해 나갈 실질적 대중

적 힘과 기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

서 분명 녹색당과 노동당이 같이 할 수 있는 지점

이 있습니다.

장 : 또 하나, 정치개혁 의제도 있지요….

Page 46: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한 : 물론입니다. 정치개혁 의제 중 비례대표제

확대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했던 얘기니까,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고요.

장 : 내각제라든가 연방제 같은 정치개혁 의제

에 대해서는 녹색당의 입장이 확정된 게 있나요?

한 : 아직은 당내에서 논의하는 단계입니다.

장 : 그런 주제들을 노동당과 처음부터 함께 토

론하면서 공동의 안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

까요.

한 :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지금 비

례대표제에 대한 포럼을 통해서 연대가 실제 이뤄

지고 있기도 하고요.

장 : 그 연장선에서 노동당 당원 혹은 <미래에

서 온 편지> 독자들께 당부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한 : 글쎄요, 제가 조언을 드릴만한 것이… (웃

음)

장 : 노동당 당원들 중에는 당명을 ‘녹색사회

당’으로 바꿔야 한다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만

큼 녹색당과 뭔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이

존재하거든요.

한 : 아, 그런 분들은 적극 환영하고, 만나서 함

께 대화를 나누길 기대합니다. 사실 저는 노동당

조차도 어떤 점에서는 항상 현실론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지금의 산업 체제에 갇혀서 먹

고사는 문제, 일자리, 이런 것을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만 풀려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자주 해

요. 그런 걸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다면, 녹색당과

노동당이 만나서 함께 할 이야기나 일이 상당히

많아질 것 같네요.

최백순 : 의외로 ‘녹색’에 관련된 책들이 최근

범람하고 있지요. 그래서 오히려 딱 집어서 보기

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노동당 당원이나 <미래에

서 온 편지> 독자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한 : 가장 좋은 책은 최백순 동지가 쓰신 《미래

가 있다면 녹색》이죠. 농담이 아니라, 독일 녹색당

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녹색당이 무엇인지를 대

략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입문서입니다. 이 책과

함께 두 권 더 추천한다면,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은 녹색당에 중요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시

는 분이기 때문에 이 분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녹색당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

해요. 김종철 선생님이 <녹색평론> 1호부터 쓰셨

던 권두언을 모은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면 녹색당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또 한 권은 저도

생각을 크게 의지하는 책인데요. 팀 잭슨의 《성장

없는 번영》이라는 책입니다. 영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에서 추진했던 같은 이름의 프로젝트

보고서를 압축해서 낸 책인데, ‘녹색’을 현실 정책

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저서입니

다. 과거의 성장주의와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탈

성장’이나 ‘반성장’같이 아주 급진적인 생각도 아

닌, 그 사이에 해당하는 시각을 제시하죠. 이런 책

들을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44

Page 47: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45

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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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놀이가 된 공놀이

윤현식정책위원회 의장

민중들의 집단유희에서 출발해

상류계급의 스포츠로 변신했다

가 다시 노동자들의 오락으로

전환되고 끝내 자본에 장악된

축구의 역사는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만큼이나 극적

이다.

기획/스포츠, 상품이 되다

“이 축구나 하는 놈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는 “이 축구나 하는

놈아(You base footballer)!”라는 대사가 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

자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정도가 되겠다. 최근 한국의 상황을 빗

대자면 “이 댓글이나 다는 녀석” 정도일까.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하고

많은 표현 중에 왜 하필 이런 말을 욕설이랍시고 집어넣었을까?

셰익스피어가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16세기에 축구는 영국 민중

의 오락거리였다. 잘 알려져 있듯, 당시의 축구라는 건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공을 몰고 들어가는 일종의 점령게임이었다. 공 하나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길이어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모든 주민이 뛰어나

와 각축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물경 천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나

와 아비규환을 벌인 일도 종종 있다. 이 와중에 규칙이랄 것도 따로 없

어서 치고 박는 건 예사였고, 코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건 다반사

였다. 13~14세기에는 이 공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사로 단검을 소

지했다고 한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악명 높은 영국

훌리건의 뿌리는 이렇게 깊다.

셰익스피어보다 한 세기 전의 영국 시인인 알렉산더 버클레이가 축

구를 “억센 촌뜨기들의 겨울놀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시골뜨기

들에게 축구는 한 겨울의 여가활동인 동시에 넘치는 정열을 발산하는

공간이었고, 동네 간에 자존심을 건 한 판 전쟁이었다. 혈기왕성한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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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47

년들은 틈만 나면 상대방에 대한 분석과 전술구상을 하고, 일단 시합이 개시되면 ‘연장질’을 마다 않는 투

지를 불태웠다. 이렇다보니 그저 머릿속에 축구만 생각하는 동네 왈짜들에 대한 못마땅함이 “이 축구나

하는 놈아!”라는 욕설로 이어질 만하다.

하긴 이렇게 축구에 환장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썩 좋은 건 아니다. 그 자신이 아스널의 팬이자

축구광인 영국 소설가 닉 혼비는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

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

외롭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라며 자조적으로 읊조릴 정도다. 공공연히 ‘축구팬들은 인간 취급 받

을 자격이 없다’고 떠벌리던 마가렛 대처는 1985년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 참사 당시 축구 때

문에 훌리건이 생겼다고 비판했다. 원정을 간 리버풀 팬들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대처의 발

언은 축구를 하층민의 교양 없는 오락거리로 치부하는 상류계급의 인식이 20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대처가 강력한 신자유주의적·신보수주의적 정책을 펴면서 탄광노동자와 항만노동자들의 생

존을 위협했을 때 그 여파를 몸으로 겪어야 했던 리버풀의 사람들은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급기야 리버

풀FC의 응원단은 “We’re gonna have a party when Maggie Thatcher dies(마가렛 대처가 죽는 날, 우

리는 파티를 열거야)”라는 응원가를 만들어 불렀다(유튜브 검색하면 나온다).

어쨌든 축구는 민중이 중심이 된 하층계급의 문화였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규칙도 예의도 없이 떼

거지로 몰려나와 소란을 떨어대는 이 난장판이 탐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세의 왕실이 축구를 “무익한

스포츠” 혹은 “사악한 운동”으로 규정한 것이 뜬금없어 보이진 않는다. 상류계급은 축구 이외에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각종 문화적 프로그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교양을 갖추고, 어느 정도 재정을 동원하면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고고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상류층의 눈에 축구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아수라장으

로 보였을 것이다. 부르디외를 원용한다면, 축구를 하느냐 아니면 고상한 취미생활을 하느냐로 철저한 계

급적 분할이 확인되는 문화적 ‘구별짓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상류층의 입장에서 축구는 “싸움과 말다툼,

불화, 살인, 피를 부르는 원인”에 지나

지 않았다. 물론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벌이는 음모와 암살과 전쟁과 학살에 대

해서는 이런 식의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 같잖은 천것들의 광란을 지배층이

마냥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았다. 영국

왕실은 14~16세기 약 300년에 걸쳐 축

구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19세기까지도 대로에서 축구를 금지하는 법을 둘 정도였다. 축구에 미친 사

람들에 대한 통제는 동서의 구분을 불문한다. 그 형식은 달랐지만 중국에서도 축구에 대한 제재가 있었

다. 명나라의 시조인 주원장은 축구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를 어기면 발을 잘라버렸다. 지배계급

은 소요사태의 예방과 유사시를 대비한 궁술연마 등을 축구금지의 이유로 내걸었다. 당시 축구가 가진 폭

상류층에게 축구는“싸움과 말다툼, 불화, 살인,

피를 부르는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이 벌이는 음모와 암살과 전쟁과

학살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평가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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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성이나 비문명적 성격은 이러한 지배계급의 축구금지 정책에 훌륭한 빌미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조차 축구가 가진 순기능을 아예 무시하진 못했다. 지배계급이 하층민에게 가지는

적대감과 멸시와는 별개로, 폭압과 착취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민중들에게 축구는 일정하게 숨통을 틔워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젠틀멘의 스포츠에서 다시 노동자의 운동으로

‘축구의 종주국’ 하면 영국을 꼽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다. 물론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발을 이용해 공

을 가지고 노는 운동이 영국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유형의 놀이는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 더 나가, 우루과이의 좌파 지식인인 에두아르노 갈레아노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 1500년경에 중앙아메

리카와 아마존 지역에 축구가 성행했다고 한다. 최근 중국은 원래 축구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는 주장

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동북공정에 버금가는 축구공정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축구종가의 명성은 현대 축

구의 틀이 영국에서 출발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장난을 친다.

민중들의 천박한 오락으로 치부했던 축구를 신사계급이 돌연 자신들의 유희로 편입시킨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 신흥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이 영국의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퍼블릭 스쿨’에 속속 입

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민들의 오락이었던 축구문화가 상류층들에게 유입된다. 학교는 건전한

정서의 함양과 건강한 신체의 유지를 명목으로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양성화했다. 이 퍼블릭 스쿨의 졸업

생들이 다시 대학으로 진학했고 축구 역시 함께 퍼져나갔다. 당시 축구는, 마치 한국의 동네마다 고스톱

규칙이 다른 것처럼 출신 퍼블릭 스쿨마다 규칙이 달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일

정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케임브리지 룰(Cambridge Rule)’이다. 그리고 이 규칙이 발단이 되어

퍼블릭 스쿨 출신의 클럽대표들이 모여 영국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ion)가 태동한다. 결국 19세

기로 들어서면서 축구는 젠틀맨의 스포츠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초기 FA는 신흥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된 상류층 신사계급들의 클럽이 주축을 이뤘다. 예컨대 1857년

최초의 클럽으로 등록한 셰필드 FC는 회원 29명 중 11명이 공장주 또는 공장주의 아들이었다. 또한 신사

계급은 하층계급의 직업적 참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이들에게 아마추어란 신사(gentleman)를 강조하

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축구를 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즉 규칙을 갖춘 스포츠로서의 축구는 상류계급들의 사교의 장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기

회였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최초의 FA컵 경기가 벌어졌던 1871~72년 시즌부터 1881~82년 시즌까지 장

장 10년간의 우승팀이 모두 상류층 신사계급의 클럽들이었다. 즉 케임브리지 룰이 만들어진 1848년 이후

약 30여 년 간 근대 축구의 주류는 지배계급의 엘리트들이었고 민중의 팀들은 일정하게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클럽들이 무수하게 결성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촌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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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49

수십, 수백 명이 달려들어 벌어졌던 떼거리 축구(mob football)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

면서 자연히 와해되었다. 오히려 수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이 도시와 공장에서 여가를 확보하기 위한 투

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규칙을 갖춘 축구가 오락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8년부터 노동

자 축구팀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19세기 말에 160만이 넘는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축구클럽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82년 당시 영국 축구협회에는 이

미 1천개 이상의 클럽이 등록되어 있었고 이 중에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축구클럽이 셀 수도 없이 산개

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지성이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다. 랭커셔 정류장과 요커셔 철

도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결성한 뉴턴 히스 FC가 맨유의 전신이다. 베르캄푸와 앙리가 주가를 올렸던 아

스날은 런던 남동부 울위치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만든 팀이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런던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도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들이 모여 결성한 팀으로

는 토트넘 핫스퍼를 들 수 있다. 18세기 영국 최고의 무역항으로 항만노동자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리버풀에서는 노동자들의 지지와 성원 속에 리버풀 FC가 흥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노동자들의 축구클럽은 마침내 젠틀맨의 전유물이었던 FA컵을 가져가고 말았

다. 1882~83시즌 FA컵에서 ‘블랙번 올림픽 FC’는 북부지역클럽 최초로, 그리고 노동자가 주축이 된 클

럽으로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주

장이었던 워버튼은 우승컵을 치켜들고 이렇

게 외쳤다. “이 컵은 두 번 다시 런던으로 돌

아가지 않을 것이다.” 섬유공장 노동자와 금

속공장 노동자, 함석공, 술집 주인 등으로 구

성되었던 이 팀의 우승은 축구가 노동자들의

운동이 되었음을 상징했다. 노동자들의 자주

성과 이에 근거한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블랙번 로버스의 앰블럼에는 장미와 함께 ‘Arte et Labore’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기술

그리고 노동’이라는 의미다(‘예술과 열정’이라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틴어 본연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은퇴했지만 세계적 명장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글래스고의 조선소

노동자였고 그곳의 노조간부였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 때 습득한 사회주

의적 가치들이 자랑스럽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축구의 새로운 지배계급, 자본

한 경기장에서 자본가와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건 노동자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시간과 재정이 남아돌아 원할 때는 언제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노동자들

“이 컵은 두 번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섬유공장 노동자와 금속공

장 노동자, 함석공, 술집 주인 등이 모인

블랙번 올림픽 FC의 우승은 축구가 노동

자의 운동이 되었음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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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주일 내내 매일 12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기에 연습을 하기가 어려웠다.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공을

참으로써 임금을 받는 프로축구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급격하게 늘어난 관객들은 한편으로

는 축구경기를 활성화하는 요소가 되

었지만,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수익

창출의 계기가 되었다. 클럽을 소유하

고 경기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자본가는 울타리를 치고 입장

료를 받기 시작했다. 지역 관중의 유치

에 경기의 승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

용하면서 체계적인 선수관리가 시작되었다. 애초 아마추어리즘의 순결성에 목을 맸던 FA는 돈이 오가는

것에 강력하게 대응했으나 물밑으로 금전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 골칫덩어리로 등장했다.

가난한 노동계급의 선수들은 급료를 받으며 경기를 뛰고자 했으나 자본가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

았다. 입장료 수입이 얼마인지와는 별개로, 자본가들은 주급 상한선을 정하고 선수들을 공공연히 착취했

다. 그럼에도 음성적인 수당지급이 성행했고 많은 구단들이 FA에 벌금을 물어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선

수들이 클럽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게 막았다. 이러한 현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1902년에 들어와 본격적인 선수노조 결성이 이루어지지만 1960년대까지도 임금상한선은 유

지되었다. 구단의 자금보유능력이 곧 실력이 되고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는 요즘

이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스폰서가 달려들고 중계료로 떼돈을 벌 수 있는 메이저급 리

그 선수들의 이면에는 형편없는 연봉에 시달리거나 아예 돈이라는 걸 만져보지도 못하는 하위리그 선수

들이 즐비하다. 선수들에 대한 불이익은 심심찮게 뉴스거리가 된다. 2006년 월드컵에서 토고 대표팀은

임금정산을 요구하며 본선경기 보이콧을 선언했을 정도다. 스페인축구 선수노조는 2010월드컵이 있기

전 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선수들도 동참했다. 하위리그 선수들의

상습적인 임금체불이 주요한 문제였다. 하긴 최고연봉의 선수들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기라성 같은 선수들에 대한 스폰서들의 강압 또한 계속된다. 예를 들어 1998년 월드컵에서 외계인 제1호

로 칭해졌던 호나우두는 나이키의 등쌀에 밀려 무릎부상임에도 출전해야 했다. 이 여파로 호나우두는 3

년이라는 시간을 몸조리에 보내야 했고 이후에도 전성기의 실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구단 또는 스폰서에 의해 선수에게 돌아가는 불이익을 세간의 화제로 만든 건 단연 ‘축구의 신(이건 전

적으로 필자의 견해다)’ 마라도나다. 이탈리아의 명감독 아리고 사키가 “그라운드에 선 그 자체가 혁명”이

라고 칭송했던 마라도나가 “왜 축구선수에게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포효했을 때, 축구를 돈

벌이로 전락시켰던 자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1998년 월드컵 와중에 코카인 복용 혐의를 들어 그

를 그라운드 밖으로 추방시켰다. 공 하나에 세계가 열광하고 계산조차 어려운 초고액 스타 선수들의 연봉

이 화제가 된다.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가 경기장을 비추고 선수들의 몸짓 하나에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관객은

수익창출의 계기였다. 클럽을 소유하고, 경기장

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자본가는 울

타리를 치고 입장료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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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51

모습이 연일 중계방송과 스포츠 뉴스를 통해 보여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추문으로 얼룩진 FIFA의 커

넥션이 있고, 초국적 자본들의 돈벌이로 전락한 구단을 둘러싼 팬들의 갈등이 있으며, 허기를 참아가며

공을 차는 가난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있다. 마라도나의 물음에는 아직 세계 어디에서도 납득할만한 답

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민중들의 집단유희에서 출발해 상류계급의 스포츠로 변신했다가 다시 노동자들의 오락으로 전환되고

끝내 자본에 장악된 축구의 역사는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만큼이나 극적이다. 근대의 축구는 그

자체로 자본이 되어갔고 오늘날 자본은 마침내 축구를 온전하게 상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축구는 자본

과 상품이라는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대중의 열기, 자발성, 역동성, 그리고

투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에야 축구는 축구다워진다. 그 언제인지 모를 옛날 옛적, 어떤 사람들이 처

음으로 공을 굴리고 발로 차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축구의 매력이 여기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원시

로부터 이어진 전통에서 자본에 종속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민중의 유희로서 축구를 즐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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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멈춰선 메이저리그

최백순기관지 편집위원

한국 프로야구는 재벌들이 비

용을 대고 ‘이윤 대신에 성적’

을 요구하는 시스템이 정착한

지 오래다. ‘우승 청부사’라고

불리는 김응룡 감독조차 성적

을 내지 못하면 아웃이다.

기획/스포츠, 상품이 되다

9개 구단 팬 일동. 올해 한국 프로야구의 댓글놀이에 MVP를 준다

면 수상 후보에 오를 단어다. 시대를 풍미했던 명감독들이 이끄는 팀

들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는커녕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한화의 김응룡 감독이 최하위를 달리

며 대패를 하는 날이면, ‘김응룡 감독 종신 감독 추천, 9개 구단 팬 일

동.’ 이런 식이다. 물론 이런 댓글놀이는 롯데 김시진 감독도 단골손님

이었고, 기아의 선동렬 감독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SK의 이만

수 감독과 두산의 송일수 감독도 포함되었다. 요컨대 4강에서 멀어지

고 있는 팀의 감독들에 대한 다른 팀 팬들의 비아냥이었다. 구단이 투

자한 만큼 성적이 나와야 하는 것은 프로야구의 오래된 정석이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재벌들이 비용을 대고 ‘이윤 대신에 성적’을 요구하

는 시스템이 정착한 지 오래다. ‘우승 청부사’라고 불리는 김응룡 감독

조차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아웃이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던 김시진 감

독은 프런트와 팬들에게 ‘이지메’를 당해 스스로 하차했다. 자본이 장

악한 스포츠는 이윤 대신에 성적이 필수다. 그래야 우승이라는 이름을

통해 기업의 마케팅 비용이라도 남으니까.

비운의 구단, 몬트리올 엑스포스

메이저리그는 곧 ‘미국의 프로야구’를 의미한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렇게 이해한다. LA 다저스처럼 ‘미쿡’의 도시에 연고지를 둔 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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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53

이 야구를 해야 하니까. 한국 프로야구 팀에 동경 올빼미들 같은 팀이 포함되어 있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법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메이저리그에는 캐나다의 도시를 연고지로 둔 두 개의 팀이 포함되어 있다. 토

론토 블루제이스와 바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다.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대표적인 스몰마켓 팀이다. 선수 연

봉 총액이 아주 작은 팀이라는 뜻이다. 몸값이 비싼 선수가 없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

히 무리였다. 그런 몬트리올에게 창단 25년 만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최초의 도미니카 출신 메이저리거인 펠리페 알루 감독은 자신의 야구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몸값이 싼

유망주를 집중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1994년, 거짓말처럼 드라마가 시작됐다. 몬트리올이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선두를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구장인 올림픽 스타디움은 연일 팬들로 가득 차 글자 그대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LA 다저스에서 트레이드를 해 온 유망주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탈삼진 선두를 질

주했고, 또 다른 에이스 켄 힐은 최다승 선두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팬들을 더 즐겁게 한 것은 공격의

핵이 모리세스 알루라는 점이었다. 감독의 아들이었다. 초유의 시청률을 올리던 이 드라마는 올스타전이

다가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올림픽 스타디움에 내리기 시작했다.

이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선수노조는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구단들이 들이민 샐러리 캡

(salary cap)의 도입 안 때문에 선수노조가 폭발했다. 선수들의 연봉이 계속해서 오르고 자유계약선수(FA)

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자 구단들이 ‘연봉총액 상한제’를 주장한 것이다. 팀의 연봉총액 상한선을

정해 놓으면 FA자격을 획득한 선수의 몸값이 내려가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아무리 좋

은 성적을 올려도 내년 연봉이 가파르게 오르는 것은 기존 선수들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구단들은 부

자 구단과 가난한 구단의 전력 평준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선수노조 입장에서는 명백한 임금삭감이었

다. 게다가 그것이 제도로 명문화된다는 것은 더

동의할 수 없었다. 운명의 7월 28일, 선수노조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초유의 일

이었다.

구단과 선수노조의 협상은 한 치의 양보도 없

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시계 바늘은 계속해서

움직였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다가와도 파업은 멈추지 않았다. 몬트리올의 올림픽 스타디움에 눈발이 날

리고 그렇게 1994년이 저물었다. 25년 만에 찾아온 기회가 예기치 않은 복병으로 인해 허공으로 날아가

는 것을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그냥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비와 입장료 수입이 사라지자 그렇

지 않아도 스몰마켓 팀인 몬트리올은 곧바로 재정 위기에 빠졌다. 스타 선수들이 차례로 다른 팀으로 팔

려 나갔다. 알루 감독은 자신의 아들이 떠나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이후 십 년간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하

위권을 맴돌며 동네북 신세를 전전하다 워싱턴 내셔널스로 매각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당시 선수들의 이후 행적을 따라가 보자. 페드로 마르티네즈. 메이저리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두 차례의 사이영 상을 수상하는 등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괴물 투수로 성장했

운명의 7월 28일, 선수노조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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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펠리페 알루 감독의 아들인 모리세스 알루는 플로리다 말리스로 떠나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톱타자인 마퀴스 그리솜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이듬해 월드시리즈 우승 경기에서 활

약했다. 뉴욕 양키스로 떠난 마무리 투수 존 웨틀랜드는 96년 월드시리즈 우승과 MVP를 거머쥐었다.

마빈 밀러와 13일의 파업

2011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마빈 밀러(Marvin Miller)는 한 표 차이로 헌액되지 못했다.

언론들은 투표 결과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듬해 11월, 마빈 밀러는 생전에 명예의 전당

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헌사가 이어졌

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레드 스미스는 “베이브 루스 다음으로 메이저리그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유명한 스포츠 캐스터 레드 바버는 “야구사에서 베이브 루스, 재

키 로빈슨보다 중요한 인물”이라며 메이저리그 역사의 맨 앞자리에 그를 호명했다.

1966년 마빈 밀러가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위원장 출마를 선언하고 선거운동을 시작하자 구단들은 공

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노조위원장에 누가 출마를 하던 사측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명

백한 노동법 위반이지만 구단들은 개의치 않았다. 구단 입장에서는 그가 그만큼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이

다. 선거운동을 위해 스프링캠프를 방문하면 감독과 코치들이 기습적으로 연습 장소를 변경하는가 하면

아예 대놓고 선수들과의 접촉을 막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심지어 구단들은 일부 선수들을 부추겨 반대 성

명서를 발표하는 일도 불사했다. 사측이 불법적으로 개입해 ‘노노 대결’을 조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뉴욕대에서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마빈 밀러는 학문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현장을 선택했

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하며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그는 “현장이라는 고향”을

선택했다. 군수노조에서 노조활동가를 시작한 이후 자동차노조에 진출해 두각을 나타냈다. 마침내 철강

노조에 스카우트된 마빈 밀러는 협상대표를 맡아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본가

들의 공공의 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인생의 절정기인 오십을 앞두고 메이저

리그 선수노조위원장을 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구단주들이 경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철강노조 때에 비해 그의 연봉은 90퍼센트 가까이 깎였기 때문에 돈과는 무관한 선택이었다.

그동안 선수노조는 이름만 노조

였을 뿐 사실상 노사협의회 수준이

나 마찬가지였다. 선수노조를 이끌

게 된 마빈 밀러는 선수들이 “선수

는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먼저 주력했다. 선수가 노

마빈 밀러는 선수들이 “선수는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먼저 주력했다. 선수가 노동자라

는 의식으로 뭉칠 때 선수노조가 진정한 노조가 될

수 있다는 상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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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55

동자라는 의식으로 뭉칠 때 선수노조가 진정한 노조가 될 수 있다는 상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늬만 노

동조합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구단주들과 협상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선수들이 노조를 중심으

로 단결하자 마빈 밀러는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으면 노동법위반으로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구

단주들을 압박했다. 1968년 선수노조와 구단들은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을 체결했다. 프로 스포

츠를 통틀어 사상 최초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최저연봉 1만 달러가 훈장처럼 따라왔다.

백년 만에 무너뜨린 보류조항

1970년 커트 플러드 트레이드 거부 사건은 팬들도 구단의 조치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세인트루이스 카

디널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인 커트 플러드를 갑자기 구단에서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해 버린 것이다. 커

트 플러드와 팬들 모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트레이드를 거부할 어떠한 방법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보

류조항(reserve clause)때문이었다. 모든 계약은 1년 단위로 진행되며 시즌이 끝나면 선수는 반드시 소속

팀하고만 계약을 해야 했다. 구단에서 내년연봉계약서를 내놓으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선수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선수가 쓸 수 있는 카드라고는 언론에 대고 구단을 비난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구단주는

선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마빈 밀러는 독과점금지법

(antitrust) 위반에 기대를 걸었지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커트 플러드는 은퇴의 길을 선택했다. 백년의

장벽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1972년 4월 5일, 전미 어느 구장에서도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열리지 않았다. 마빈 밀러와 선수노조가

파업 당시 기자회견 중인 마빈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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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총파업을 단행한 것이다. 유례없는 선수노조의 기습에 구단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은 13

일간 계속되었다. TV에는 경기 모습 대신에 마빈 밀러의 얼굴과 목소리를 내보내야만 했다. 백발에 잘 다

듬은 콧수염의 마빈 밀러는 방금 전에 끝난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시청자들이 믿을 정도였다. 그는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팬들에게 파업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구단주들의 협조로 신속하게 경기가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수노조는 이때를 계기로 연봉조정제도를 획득했다. 그동안과 달리 구단이 내민 연봉

에 선수가 동의하지 않으면 메이저리그 사

무국에 조정 신청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제도가 “작지만 치밀하게 거대한 틈을 비

집고 들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

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

다.

1974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부동의

에이스는, 취미가 메기낚시였기 때문에 캣피쉬(Catfish)라고 불린 제임스 헌터(James A. Hunter)였다. 이

해에도 캣피쉬는 아메리칸리그 방어율 1위와 사이영(Denton True Young) 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캣피쉬의 연봉은 10만 달러였는데 5만 달러는 즉시 지급하고 나머지 5만 달러는 그의 연금보험에

넣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즌이 끝나자 구단주가 오리발을 내밀었다. 연금보험으로 지급하기로

한 5만 달러를 주지 않고 입을 씻어 버린 것이다. 마빈 밀러는 이 사건을 조정위원회로 끌고 갔다. 조정위

원회는 구단주가 5만 달러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약이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캣피쉬는 메이

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자유계약선수(Free Agent) 신분을 취득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승이라면 구

단의 부도도 불사하는 뉴욕 양키스가 5년에 375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이밀며 캣피쉬를 데려

가 버렸다. 보류 조항이 무력화된 것이다. 결국 구단들은 선수노조와 한 팀에서 풀타임(Full time)으로 6년

간 뛴 선수는 자유계약선수(Free Agent) 자격을 획득한다는 조항을 명문화하면서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빈 밀러는,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필요할 때는 파업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해

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메이저리그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이후 두 차례의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주

로 선수들의 안전을 위한 구장의 규제방침이나 연금제도의 강화 등을 도입하는데 주력했다. 뉴욕 양키스

로 간 캣피쉬는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지만 당뇨병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 메기 잡이를 하며 평범한 여생을 보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의 현주소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를 꼽으라면 많은 팬들아 주저 없이 최동원 선수를 선택할 것이다. 조

마빈 밀러는,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중심

으로 단결하고 필요할 때는 파업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메이저리그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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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 57

금은 샌님 같은 인상이지만 다이내믹한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속구에 매료되지 않을 야구팬들은

없을 것이다. 경남상고 시절에는 당대 최강으로 평가 받던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팬들

을 열광케 했다. 다음 상대인 선리상고에게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해 17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전

무후무한 금자탑을 쌓았다.

최동원 선수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81년 대륙칸컵 대회에 출전했을 때였다. 캐나다에

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최동원은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관계자들

을 놀라게 했다. 최우수선수상도 최동원에게 돌아갔다. 캐나다의 토론토를 연고지로 하는 블루제이스가

최동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60만 달러를 제시하자 최동원도 흔

쾌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비록 연고지가 캐나다의 토론토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

한 것이다. 하지만 병역문제 등으로 인해 최초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최동원은 1984년, 또 다른 전설을 남겼다. 삼성과 한국시

리즈에서 만나, 7차전 중에 무려 4승을 올리며 롯데에게 우승컵을 안긴 것이다. 최동원에게 ‘무쇠팔’이

라는 닉네임을 선사한 이 경기는 지금도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회자된다. 이후 최동원

의 선수 생활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런 최동원에게 운명처럼 하나의 사건이 다가왔다.

1988년, 선동열에 이어 해태타이거즈의 제2선발 역할을 맡고 있던 김대현 선수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

했다. 선두를 질주하던 해태의 선수들도 충격이었지만 다른 팀 선수들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선수들의 예기치 않은 사고들이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로 인해 젊어서 은퇴한 선수들은 변변

한 직업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최동원은 다른 팀 고참 선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연금

이나 복지 그리고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연봉 등을 개선하기 위한 선수협의회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구단주들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급기야 롯데의 에이스인 최동원과 삼성의 에이스인 김시진을 맞바

꿔 버리는 극약처방을 단행했다. 선수협의회는 제대로 된 모임 한번 갖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버렸다. 최

동원은 삼성에서 적응하는 데 실패하고 스스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12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겨우 선수협의회가 설립됐다. 하지만 여전히 상조회 수준을 넘지 못하

고 있다. 2005년에는 손민한 선수를 중심으로 노조를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구단주들이 팀을 없애 버리

겠다는 극한 발언도 불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때만 되면 선수협의회는 선수들의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도화해 줄 것을 구단에 요구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

들에게 왜 연금이 필요하가라는 질문에 마빈 밀러는 “(은퇴 이후)선수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

다”고 답변했다.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이상 뛴 선수라면 만 60세가 넘으면 노후가 제법 보장될 만큼 높은

연금을 지급받는다. 17년간 선수로 활약한 박찬호 선수는 1년에 3억 가까이 연금이 지급될 정도니까. 이

제는 서른 살도 훌쩍 넘은 한국 프로야구에게 마빈 밀러는 언제쯤이나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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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9

“현실에 투항하지 않는 곧은 대안정당과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

고 이 미친 세상에 함께 저항할 이들이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알게 되자마자 단박에 입당원서를 팩스로 보냈어요.”

인터뷰·정리·사진 : 한민성청년학생위원회 집행위원장

어느 활동가의 탄생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2

세월호 활동가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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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세월호유가족방송 416TV에서 활동 중인 최승원이라고 합니다. 유족은 아니지만 아

픔을 함께하는 단원고등학교 졸업생으로서, 참사 초기에 현장에 내려가 유족 분들과 그 답답한 고통과 울

분을 함께 느끼며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페이지로 현장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렸어요. 그 경험으로

416TV에도 함께하게 되었죠.

함께 일하는 유가족 분들도 그렇지만 저는 정말 살아오면서 DSLR 카메라 한번 잡아본 적 없고, 송출

이나 방송, 편집 관련한 일을 해보거나 배운 적도 없어요. 하지만 유가족 분들과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

이 부족해서, 부족하나마 일손을 보태고 있습니다. 덕분에 돕겠다고 가서는 오히려 배워가면서 폐만 끼치

고 있지요. 비참하게 사랑하는 사

람을 잃어 항상 고통스럽고 힘이

부칠 텐데도, 일이 어렵고 힘들수

록 굳건한 결의를 놓치지 않는 가

족 분들에게 경외를 느끼고 있습

니다.

그리고, 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현재

416TV 일이 바빠서 신경을 못 쓰

고 있지만 항상 고향이고 집이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1년 고

등학교 2학년 겨울에 전신인 진

보신당에 입당한 이래 쭉 제 인생

에서 함께하고 있죠.

아, 청소년위원회 활동을 하시

는군요. 그렇다면 입당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2011년, 제가 단원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였죠. 한창 학생인권조

례가 떠오를 무렵이었습니다. 머

리를 빡빡 밀고 복장도 정해진 대

로 각 잡고, 교사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촬영중인 최승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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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1

게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것이었죠. 학생도 사람이고,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당연

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님 말씀대로 나중에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나서야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다

니고 입시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권리주체로서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그러다보니 학교에 대해 반감이 들고, 나아가 제도교육에 대한 반감이 들었습니다. 왜 다 똑같이 살아

야 할까, 왜 사회가 멋대로 정한 사람을 평가하

는 단 한가지의 방식의 틀에 자신을 맞춰가야

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수

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생각했고, 사

유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

만 한국에서의 제도권 교육이 그 가능성을 차

단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죠.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몸살을 앓을 정도였죠.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내가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그러다 진보신당에 청소년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아직 이 세상에 저항하는 청소

년들이 있구나. 명백히 잘못된 세상에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청소년들이 있고, 그런 청소년들의 활동을 지

원하는 정당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습니다. 무력감에서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죠. 현실에 투항하지 않

는 곧은 대안정당과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이 미친 세상에 함께 저항할 이들이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알게 되자마자 그 당시 활동하고 있던 청소년 YMCA사무실에서 단박에 입당원

서를 팩스로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와, 청소년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입당. 대단하군요.

거듭 생각하지만, 청소년으로서 정치를 배워가며 뜻 맞는 일을 함께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벅

찬 일이고, 그 무엇보다 큰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은 주위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

을 가지고 사회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제도교육을 받는 청소년의 주요 동선

이 학교, 학원, 집, 이렇다 보니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너무나 적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한계는 너무나 큽

니다. 사회적 제약은 또 어떻고요. 지옥 같은 입시경쟁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벌벌 떨어야 하고, 그러한 것

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미성숙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서 법적으로나 사회적 인식으로나 옴짝달싹 못하

게 하죠.

오늘날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특히 자신의 또래들과)내 삶과 정치의 주인이 되어 진지하게 정치를 논의

하며 같이 책을 읽고, 학습하고, 어떤 투쟁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무엇이 맞는지 뜨겁게 토론하고, 다

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어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값진 결과들을 가지고 함께 현장에 나가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

러보면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죠.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내가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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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경험을 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가 그 창구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불합리한 구조를 인식하고 불안해하는 청소

년들이 마음껏 사람을 만나고, 학습하고,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입시와

학생인권 문제가 단순히 ‘학교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구조적 문제임을, 체제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

어요. 저부터도 진보신당이 없었다면, 진보신당에 청소년위원회가 없었다면, 세월호 참사처럼 같이 견디

기 어려운 비참한 사건을 겪었을 때 어떤 진입장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위원회를 항상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에선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셧다운제 반대 행동, 청소년 노동인권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또 카페 운영팀에서 신입당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활동을 했습니다. 청소년위원회가 있음으로써 청소년 신입 당원들의 진입장벽이 쑥 내려

간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더해 그들이 빠르게 흡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니까요.

여기서 어떻게 해야 ‘옛날 운동권의’ 권위적인 문화를 닮지 않을지, 어떻게 더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사실 청소년위원회에서는 뚜렷한 활동을 했다기보다는 활동가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쌓았던 것 같습

니다. 이 사회의 모순이, 어떤 한 정당이나 대통령 한 사람의 사유나 능력,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과 자본주의가 왜 문제의 핵심이고 변혁의 대상인지, 이 사회에는

어떤 소수자가 있고 그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며 고민해 볼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위원회를 통해 다양한 투쟁현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이 고민하고 연대하면서 경험도 쌓이고

운동에 대한 생각도 정리되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도와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있

었던 데에도 청소년위원회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아주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단원고등학교에서 미운정과 고운정을

나눴던 선생님들과 후배들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어요. 유가족 분들과 활동에 나서기까지 아주 많은 고

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다른 청소년활동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입시교육 위주의 학교생활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

었어요. 오히려 처음에 말씀드렸던 두발규제문제, 체벌문제 등 때문에 반감이 더 컸었죠. 그럼에도 사고

소식을 듣고, 뭐랄까 굉장히 무겁게 가슴이 쿵 내려앉더군요. 수업을 듣고, 축제를 준비하고, 말다툼을 하

고, 혼나고, 상담실에서 입시상담을 하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했던 후배들, 그리고 함께하던 선생

님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가라앉은 거잖아요.

경쟁과 이윤을 강요하는 이 세상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어른들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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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3

으면 다 잘 될 거라고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어요. 그렇게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결

국은 다른 ‘시시하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저항할 수 없었던 사람들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아, 결국 우리 모두는 이 돈만 아는 세상의, 이 돈에 미친 체제의 희생자에 불과했구나’라는 무서운 깨달

음을 얻게 되었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언론보도를 보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

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잖아요. “전원구조” 오보 말이에요. 제가 현장에서

소식을 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그 오보 때문이었어요. 기쁜 나머지 바로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페이지1)에 공유했었거든요. 오보를 전파해서 적잖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겠구나 하는 책

임감이 무겁게 느껴졌어요. 앞으로는 직접 보고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 앞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다 잘 될 거라고 가르쳤던 선생

님들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어요. 결국 ‘우리 모두는 이 돈만 아는

세상의 희생자에 불과했구나’라는 무서운 깨달음을 얻었죠.”

1)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dan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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섰던 것 같아요.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페이지는 언제 만드셨어요?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요.

원래는 학교에서 잊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거나 학교 내 소소한 이야기들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고등학

교 2학년 때 만들었던 페이지였어요. 졸업하고서는 잊고 지내다가, 세월호 참사 당일에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어서 기사를 공유한 것이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죠.

현장에 내려가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고, 언론과 구조당국에 대한 가족 분들의 불신이 극에 달

해 있어서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습니다. 가족 분들의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은 없고, 책임을 면

피할 생각 밖에 없는 사람들이 똑같은 브리핑만 반복하고 있었어요. 배가 몇 백 척, 잠수사가 몇 백 명, 항

공기가 몇 백 기 투입됐다면서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 보도했던 연합뉴스 기자를 이상호 기자가 욕했던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잖아요. 그거 현장에서 들으면 정말 미치거든요. 그것도 매번. 구조는

뒷전이고 숫자놀음으로 상부에 보고하는 데만 급급한 구조당국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 분들의 마음이

대체 어땠겠어요? 그런 상황들을 반드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진도의 상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실시간으로 업로드하고. 현장에 부족한 구호물자들이 무엇인

지 자원봉사센터에 물어봐서 구독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요청하기도 했어요. 해경의 브리핑과 가족 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을 추모하는 사진 앞에 선 최승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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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65

들의 질의와 항의를 요약해 공유하고, 현장의 의혹을 풀어줄만한 좋은 기사들을 추려서 소개하기도 하고,

정부와 재난구조당국의 잘못들을 집어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죠. 그러다보니 구독자가 거의 15만 가까

이 되더라고요. 사실 그것도 언론이 제 할 일을 못해서 받은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도에서 나온 이후에는, 현장에서 같이 자원봉사 하던 사람들을 모아 <세월호 자원봉사자들이 제안하

는 침묵행진>을 기획하기도 했지요. .

그러다가 5월경에 일베 회원들이 학교에 단체로 항의전화를 해서, 이후에는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을

중단했어요. 그분들의 말은 “세월호 참사를 정

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애도

만 하고 끝내야지 왜 정치적으로 물들이려고

하느냐, 네가 인간이냐, 그런 비난이었죠. 저

는 그렇거든요. 애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인간

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문제

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똑같은 참

사와 고통이 반복될 테니까요. 그 모든 과정이 정치적이잖아요? 제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업로드 종료를

공지하며 호소했듯이 정치적이지 말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또다시 사

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부터 416TV에 이르기까지 계속 세월호 관련 활동들을 해오

셨잖아요? 하면서 느낀 점이 있나요?

가장 많이 느낀 것은 한국의 경직된 정치관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경계였어요.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님도 그렇잖아요. 정의당원이라는 이유로 “자식 팔아서 정치한다”

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았죠. 사실 저도 그걸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페이스북 프로필을 바꾸

고, 공개범위설정을 바꾸고…. 왜 내가 내 존재를 숨겨야 하는 것일까 생각했죠.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 중

단 이후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그리고 서울을 오가며 유가족들과 함께하다가 요즘에는 세월호유가족방송

416TV에서 유가족 분들을 도와 언론이 전하지 않는, 정말 알려야 할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촬영

일정에 따라 전국을 오가야 하고 낮밤이 따로 없어서 일이 힘들어요. 하지만 보수 세력들의 말도 안 되는

공격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유가족 분들을 보며 계속 함께하고 있습

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에요.

세월호도 그렇지만 노동당 당원 분들도 정말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에 참

여했던 청소년, 청년당원들도 있었고, 정진우 부대표가 있었던 <만민공동회>도 있었지요. ‘가만히 있으

라’는 세월호 투쟁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고, 만민공동회는 세월호 사고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박

근혜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자본주의체제의 탐욕이 만들어낸 예정된 비극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어요.

정치적이지 말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

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

으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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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동을 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대와 행동을 이어가고 있죠. 대표단을 비롯해서 단식에

동참하며 광화문을 지키던 당원들도 참 많았죠. 그 모든 당원들이 ‘당’의 이름으로 모인 건 아니지만, 예

술가, 청년, 청소년, 대학생, 심지어 ‘데모당’을 하시는 노동당 동지들까지, 노동당 당원들은 행동이 필요

할 때는 행동으로, 연대가 필요할 때는 연대로써 항상 옆에 있었어요. 지금처럼 보수 양당체제가 야합으

로 어떻게든 세월호 참사를 덮으려고 할 때, 노동당마저 없었으면 정말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었을까. 하

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노동당 당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세월호 참사를 청소년기에 겪은 ‘포스트 세월호 세대’는 분명 세월호 참사 이전의 세대와 다를 것이라

고,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체제가 내리는 부당한 명령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요. 제게 ‘진보신당’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노동당이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이 싸우자”고 말이에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노란 리본 앞에 선 최승원 활동가

Page 69: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노동르포 67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⑨

기타가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1⃞

: 노동이 문화를 만나다

Page 70: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68

“생산자와 소비자의 아름다운 연대,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동등한 연대,

국경을 넘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연대”

콜트콜텍 투쟁의 기록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싸움이 앞서 말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내가 이들에게 끌린 이유도,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다른 모습 때

문이었다. 광우병소고기 수입 문제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미국산

소고기 운송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해서 박수를 받았다. 국가의 시책으로 수입물품이 늘어

나면 물류와 운송노동자들은 그만큼 일거리가 많아진다. 소비자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4대강사업으로 강이 파헤쳐지면 건설노동자들은 호황을 맞게

된다. 개발사업을 중단하라는 주민의 요구는 건설노동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생산자’,

‘소비자’,‘노동자’,‘주민’,‘시민’. 노동하는 인간 안에는 이렇게 많은 정체성이 있고, 때로

는 서로의 이익이 충돌한다.

생산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노동자가 싸울 때, 소비자인 대중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 ‘○○제품 불매운동’이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는 캠페인은 주로 소

비자운동 차원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노사 간의 문제가 더 이상 노사만의 문제가

아닐 때, 싸움은 기업의 담장 밖을 넘게 된다. 예전에 이랜드 불매운동이 그랬고, 지금도 진

행 중인 삼성제품 불매나 코오롱 불매운동이 그렇다. 나도 삼성제품은 쓰지 않으려 노력한

다.

콜트콜텍 노동자들도 지금 ‘콜트악기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물론 반향은 크지 않다.

기타라는 제품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소비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⑨

기타가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1⃞

: 노동이 문화를 만나다

이선옥기록 노동자

노동르포

Page 71: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노동르포 69

점 때문에 콜트악기 불매운동은

다른 특별함을 갖는다. 이들이 생

산하는 제품인 ‘기타’라는 악기가

많은 문화예술인을 움직였기 때문

이다. 기타를 직접 연주하는 뮤지

션이 선언하는 “No Cort!”는 우리

가 일상소비재를 불매 선언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결의 파장을 낳는

다. 콜트악기의 노동탄압 사례를

모른 채, 콜텍문화재단이 주최한

공연무대에 섰던 뮤지션들이 있

다.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

들이다. 이들은 뒤늦게 콜트회사

가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에게 저

지른 일을 알게 되었고, 노동자들

에게 미안하다며 다시 무대에 섰

다. 이들은 기타라는 악기만이 가

질 수 있는 특별한 소비자의 힘을

보여줬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

장 아름답게 만나는 현장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무대가 가

능했던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아름다운

연대,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동

등한 연대, 국경을 넘은 노동자들

의 진정한 연대”, 콜트콜텍 투쟁이

가진 이 특별함에 공통분모로 들

어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문화예술 활동가라 부르기도 하고 예술노동자라 불리기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빼놓고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8년 투쟁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싸움의 구석구석, 구비마다 이들은

콜트콜텍 노동자와 함께 했고 지금은 이 싸움이 자기 싸움이기도 한 사람들이다. 노동과 문화가 아름답게

만난 사례로, 나는 콜트콜텍 투쟁을 꼽는다.

콜트악기 불매운동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릴레이 사진 서명(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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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건넨 한 마디

“2007년 기륭전자 투쟁이 한창일 때였어요. 여름 지나 가을쯤인데 용역들이랑 날마다 치고받고 싸웠

어요. 그 날은 문화연대가 투쟁문화제 사회를 보기로 한 날이어서 제가 사회를 보고 공장 근처 슈퍼에서

맥주를 한 잔 하는데, 송경동 시인이 넌지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타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한 번 와

보지 않겠냐고. 제가 일하는 문화연대가 노동현장에 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기타 노동자 얘기는 처음

들었어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기타 노동자?’ 뭔가 다른 느낌에 끌렸어요. 악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을 만

난 건 처음이었는데 느낌이 이상하게 달랐어요.”(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

시인이 건넨 한 마디가 7년 투쟁을 같이 하게 된 시작이 되었다. 문화연대는 문화운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였고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도 많이 연대를 했다.

독재정권 시절 문화예술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나 민족미술협의회같은 조직을 만들어 저항했다. 최

근 박근혜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광주비엔날레 전시가 철회된 홍성담 화백 같은 이가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다. 공단이 있는 지역에서는 노동문학회가 조직되고, 현장의 이야기가

시와 소설과 르포로 활발하게 기록되었다. 꽃다지처럼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들의 공연에 수천 명이

몰려들어 공연과 투쟁이 몰아일체가 되는 일도 많았다.

이제 한 세대가 저물고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문화예술운동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다. 단순하게 비유하

자면, 독재정권 시절 문화예술인은 노동자의 농성장에 함께 연좌를 했다면, 지금은 농성문화를 어떻게

‘문화적으로’ 만들어볼까 고민한다. 문화연대는 그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문화로 연대하는 활동을 계속

모색하는 단체다.

코스콤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의도에서 오랫동안 농성을 벌일 때에도 이들은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농

성장 만들기를 시도했다. 진보성을 가졌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민중미술 쪽 예술가는 아닌 작가들과 작업

을 했다. 그 때 버스를 타고 여의도 코스콤 농성장을 지날 때면 알록달록한 천들이 농성장 둘레에 가득 널

려 있어서 꼭 성황당 같았던 기억이 난다. 보통의 농성장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내게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기륭과 코스콤 투쟁에 연대하기 전에도 이들은 노동자 투쟁에 연대한 경험이 많다. 문화연대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예술행동으로 노동운동과 연대하는 실험도 계속 해왔다. 경

험이 쌓이면서 노하우가 생겼고 사회참여 활동을 고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네트워크도 늘었다. 한–미

FTA투쟁 같은 큰 사회운동이 벌어질 때면 이들은 그 네트워크를 활용해 함께 참여할 문화예술인들을 조

직했다. 한창 그런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을 때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접한 것이다.

“콜트콜텍 이야기를 듣고 문화연대 내부에서도 함께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사

람이 있으면 하는 분위기라(웃음)얘기하니까 음악노동자들 이야기라서 다들 좋다고 했어요. 처음에 송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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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71

동 시인과 함께 인천공장에서 하는 회의에 갔는데 ‘쟤는 뭐냐’ 하는 표정으로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문화연대라는 조직은 당연히 모르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가 막 이 싸움을 시작한 시기인데(웃음)그 때

는 다 끝나는 분위기였어요. 지친 상태에서 돌파구를 못 찾고 있었어요. 연대하는 단위는 아무도 없고 콜

트콜텍 양 지회랑, 두 지회가 소속된 금속노조 충청과 인천 지부만이 어둡고 텅 빈 공장에서 회의를 하더

라고요.

평소에 함께 활동하던 이윤엽 작가(판화), 노순택(사진가), 연영석(가수)들에게 제안을 해서 다 같이 인천

과 대전 공장을 갔어요. 다 예술가들이라 흔쾌히 동의해서 갔는데 그 방문이 큰 계기가 됐어요.”(이원재)

문화예술인들과 활동가들이 무리지어 콜텍 대전 공장에 갔다. 공장은 고요했다. 창문이 없다던 공장에

는 실제로 창문이 없었고, 깜깜했다.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나온 완제품과 완성을 기다리는 반제품들은

아직 공장 안에 그대로였다. 어수선하긴 했지만 공장은 멀쩡했다. 단지 그 안에서 기계를 돌리던 사람들

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판매대에 놓여 구매한 소비자를 기쁘게 하는 상품이 아닌, 생산자의 노동으로 만

들어져 다시 노동자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산물로서의 기타를 처음 만났다. 삶이 파괴된 자리에 놓여있는

기타는 더 이상 상품일 수 없었다. 사진가는 공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시인은 이 광경을 시

로 썼다. 가수는 무대에 올라 박영호 사장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불렀다. 문화예술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쫓겨난 악기 노동자들이 일하던 공장에 다녀온 노순택 사진가는 어느 기고 글에 이렇게 썼다.

“세상의 기타쟁이들은, 이 사연 알까? 그대들의 도구는, 설운 눈물에 젖었다” 동료 문화예술인들의 이

런 요청에, 자신의 도구가 설운 눈물에 젖었다는 걸 알게 된 ‘기타쟁이’들도 공명하기 시작했다. 뮤지션들

이 하나 둘 기타노동자들 곁으로 왔다.

노순택 사진가가 찍은 콜텍 공장의 사진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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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번듯한 문화제를 한 번 하고 싶어요”

노동자들은 이 광경이 낯설었다. 기타를 만들 줄만 알았지 내가 만든 기타가 누구에게 팔려 어떻게 소

비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은 문화예술인들의 연대가 고마우면서도 신기했다. 자신들이 만든 ‘기

타’라는 악기가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묻는 문화

노동자에게 이들은 소박한 바람을 하나 전했다.

“우리도 다른 사업장처럼 번듯한 문화제를 한 번 하고 싶어요.”

노동계 안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업장이라 연대도 적었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큰 사업

장에서는 투쟁의 양념 같은 문화제가 이들에게는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절실한 바람이었다. 이 바람을 전

해들은 문화예술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함께 콜트콜텍투쟁문화제를 준비했다. 연영석, 소히 등의 뮤지션

들이 흔쾌히 동참했다. 제법 큰 무대를 만들어 청계광장에서 문화제를 열었고 성공리에 마쳤다. 누구보다

도 악기노동자들이 기뻐했다. 기타를 연주하는 뮤지션과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는 이렇게 만났다.

청계광장 문화제가 끝난 후 문화노동자들은 이 연대를 계속 이어가길 바랐다. 기타노동자 이야기는 어

떤 투쟁보다 뮤지션들의 공감을 단박에 끌어냈다. 내친 김에 2008년 홍대 클럽 ‘빵’에서 닷새 동안 날마

다 콘서트를 했다. 클럽 빵의 주인 김영등 씨 역시 문화활동가다. 5일 동안의 무대에 홍대에서 활동하는

클럽 빵에서 열린 수요문화제에 함께한 뮤지션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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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73

인디밴드들이 날마다 4~5팀씩 출연했다. 꽤 알려진 팀들도 있었는데 흔쾌히 무대에 섰다. 반전평화 운동

이나 다른 많은 집회에 출연섭외를 해봤지만 이때만큼 자발적으로 무대에 서 준 기억이 흔치 않다. 뮤지

션들은 하나같이 악기노동자라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인은 날마다 무대에 함께 올라 시를 낭

송했고, 사진가는 이런 장면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다. 이들의 활동을 영상으로 담는 영상노동자도 나타

났다. 악기 만드는 노동자들은 난생 처음으로 마치 세례를 입듯 온갖 문화예술이 주는 감동을 경험했다.

평생 예술이란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기타만 보면 징글징글하다”고 했던 노동자들에게, 기타가 내가

만드는 제품이 아닌 ‘악기’로 새롭게 다가왔다.

이처럼 악기노동자와 문화예술인들은 서로를 통해 삶의 다른 결을 발견했다. 내가 사용하는 예술의 도

구는 결국 세상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내가 만든 제품이 누군가의 도구로 쓰여 다른 이의

삶에 큰 감동을 준다는 것, 그 행복한 접점을 찾은 것이다.

뮤지션은 무대에 올라 “악기 만드는 노동자가 불행하면 이 악기를 연주하는 나도 행복할 수 없다”며 노

동자들의 복직을 촉구했고, 노동자는 그 무대를 보며 “내가 만든 기타가 나를 위해 연주하는 걸 태어나 처

음 들었다”며 울었다.

수 년 동안 이렇게 만나오면서 악기노동자들은 직접 연주를 하고, 연기를 하는 문화예술인이라는 정체

성을 하나 더 얹게 되었고, 문화예술인들은 작가라는 타이틀에 더해 문화예술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

게 되었다.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지 않은 문화예술이란 태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고, 노동자성을 가진다고

해서 작가성이 무너지는 일도 아니었다. 예술과 노동에 그어진 구분선을 넘는 일 또한 이들은 문화예술로

표현했다.

농성장은 문화예술노동자들이 함께 기거하는 ‘집’이자 작품의 전시장이 되었고, 공장철거반대투쟁은

포크레인에 맞서 보디페인팅을 실현하는 행위예술의 현장이 되었다. 상상에서나 가능했던 공장락페스티

발도 열렸다. 노동자와 예술가라는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예술 같은’ 투쟁이 들어섰다. 이를 부러워하

는 다른 사업장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암담했던 콜트콜텍 투쟁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면서 새로운 돌

파구를 찾았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0년 일본후지락페스티벌 원정투쟁을 갔을 때 일본의 활동가들에게 콜텍악기 장석천 해고자가 말

했다.

“박도영, 정소연(원정단으로 함께 온 문화연대 활동가) 같은 문화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우린 정말 이 싸움

을 못 했을 겁니다. 정말 암담했어요. 우리는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지만 아무것도 몰랐고, 문화운동

을 하는 분들을 통해 뮤지션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자본을 압박하는 방법도 알게 됐고, 이번 후지락

페스티벌 초청도 이런 과정으로 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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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의 이원재 활동가는 말한다.

“콜트콜텍 투쟁은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저희를 움직인 데는 문화예술 운

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악기노동자라는 것이 크게 작용을 했어요. 우리가 특히 음악과 문화예술인들의 권

리문제로 많이 싸우는데 악기노동자들도 우리는 문화노동자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우리가 해야 하고

잘 할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요.”

새로운 투쟁, 미완의 성공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이야기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

과 기타를 치는 사람들의 연대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자신이 만든 생산물에서 소

외된 노동자들의 현실과, 이들을 다시 생산물의 주인으로 설 수 있게 한 소비자의 아름다운 연대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싸움이다.

이른바 중심운동으로 취급 받는 노동운동과 주변부 운동으로 인식되었던 문화운동이 동등하게 만났고

아름답게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악기를 만드는 생산자라면, 뮤지션들은 기타를 구매하는 소비자다. 이들을 연결해 준 것은

문화운동가라고 불리는 문화예술 활동가들이다. 이 활동가들은 문화노동자라는 말을 많이 쓴다. 나 역시

도 콜트콜텍 투쟁현장에 다니면서 문화노동자라는 단어를 자주 들었다. 문화와 노동자라는 조합은 다른

현장에서는 잘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콜트콜텍 문화제에는 “저도 노래하는 노동자입니다“라고 읊조리듯

말하는 뮤지션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자신의 노동자성을 자각한 예술인들과, 노동을 예술보다 폄하하는 문화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이

투쟁에 모두 모여 있다. 열정의 강도가 다른 연대 현장과는 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자신의 예술

이 단순히 액세서리처럼 도구화되지 않는 현장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콜트콜텍 투쟁은 다른 어

떤 현장보다 새롭고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계급적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모든 예술은 노동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니.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이 투쟁에는 여전히 남은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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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75

정상은 경기 용인 당원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진보정당을 평가해 보자’모임 후기

쟁점토론

‘진보정당을 평가해 보자’(이하 진정해)는 선거의 결과를 떠나 우리의 진보정당운동이 전

체 사회운동 속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어떤 유의미한 것들을 남겼는지를 평범한

당원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 계속 참가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노동당의 당

원이지만, 정당운동에 관심이 많은 비당원 활동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운동(노

동과 당 운동을 제외한)의 시각에서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좋은 의견을 많이 주셨다.

진정해는 지금까지 네 번을 모였고 오는 9월 12일에 다섯 번째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지

금까지는 참가자들의 생각을 교환하면서 우리가 같이 바라봐야 하는 곳을 정하는 데 주력하

기로 했다. 이런 모임은 전문집단의 모임과는 달리 어떤 이론적인 성과를 낼 수도, 엄정하게

학문적인 평가를 제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자리만 된다면, 그리고 이런 조그마한 실천이 당내의 성찰적

인 토론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작은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0. 진보정당운동, 악순환의 늪에 빠지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은 조직운동이라고 불린다. 물론 이것이 적당한 이름은

아니지만, 조직운동부문에는 ‘정파’나 ‘의견그룹’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사회변화의 첫 번

째 주체를 자처해왔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현대사회는 갖

가지 이름의 ‘조직’으로 덮여 있다. 한편에서는 보수지식인들이 개인주의를 찬양하고 개인

의 자기실현 없이는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

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집합적 권력(힘)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완성시킨 수많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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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에서부터 보수정당 내부의 계파들과 지역의 통반장협의회까지, 이 사회는 조직화 되어 있다. 이는 사회

를 변화시키는 힘이 언제나 개인보다는 조직에 있었음을 반증한다(이런 의미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의

측면에서 볼 때 개인주의는 대단히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정당은 대표적인 정치조직이다. 협상권력으로

서의 정당은 그 내부에서 다양한 가치와 조직력이 작동하는 사회변혁의 최전선에 있는 가장 역동적인 운

동부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협상권력으로서의 진보정당운동의 의미를 우리부터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데 하물며 대중들은 어떻겠는가?

지금의 진보정당운동의 최대 문제는 무엇보다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이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진보정당이 살아남기 위하여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대중의 이탈이 모든 것의 원인

이자 결과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다시 소모적인 선거일정을 따라가야 하고, 당원들을 돌아볼 여유

조차 가지지 못한다. 선거를 건너뛰면 당이 끝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일정을 따르고, 국

가보조금을 타기 위해 과도한 선거전략을 제출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이다.

1. 과연 평가가 가능할까?

추공 : 진보정당이 분열되면서 어느 누구도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대선 때는 노

동자 후보 둘이 동시에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노동당 내부에서는 통합-독자논의가 다시 시작

되고 있다. 선거를 어떻게 치르는가? 혹은 진보재편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가는 사실 과거의 진보정당

의 평가 속에서 얘기되어야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평가를 해왔는지 의심스럽다.

‘진보정당을 평가해 보자’4차 모임 (사진제공 : 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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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77

윤현식 : 추공님은 평가가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진보신당이 처음 생겼을 때 진

보정치 10년간의 평가를 했고, 2012년 4월 총선 후에도 평가를 했다. 아마 이 평가가 내가 기억하는 한에

서는 진보정당운동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평가일 것이다. 평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진보

정당활동가들이 정당정치나 활동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평가

를 하더라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지, 또 어떤 문제의식으로 하는지가 중요한데 여기서 과연 적절한

평가가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박수교 : 단발성의 소회들을 교환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없다. 또 어떤 사람을 불러 인터뷰를 하더라도

문제의 틀이 없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이 된다.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못

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진보정당이라는 내부 환경 안에서 진보의 가치를 따져보고, 그것으로

묶을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서윤 : 평가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해결방안은 요원하다. 정당운동은 조직운동이다. 조직

안에서 위계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난다. 완전한 평등은 포기하더라도,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의 의사소통

방법론의 개발이 핵심인 것 같다. 개발된 방법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2. 진보정당 제대로 하고 있나?

진정해 모임을 아직 몇 번 갖지 못해 의견들을 충분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간에 오고간 의견들을 모아

보면, 지금의 진보정당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외부적으로는 ‘대중과의 분리’이고 내부적으로는 ‘선수(핵

심활동가)와 일반 당원과의 분리’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앤드류 김 : 한국이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모든 정당이 대중과 멀리 있는

듯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학 내에 정당 동아리도 있고 재단도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한국

에는 개신교 신자가 대단히 많은데, 그들에게 대중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은 이

념적인 핵심을 먼저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미선 : 대중들은 이념을 이야기하면 떠난다. 자신과 관련된 정책과 이슈에 관심이 있다. 대중에게는 이

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좌파가 지향하는 이념과 정책을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무상

의료운동과 같은 것을 개발해야 한다.

윤성희 : 우리동네 곱창집주인도 하는 구의원을, 뛰어난 우리는 왜 못하는가? 곱창집주인은 20년 장사

Page 80: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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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며 지역현안을 다 안다. 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인 활동 없이 당 이름만 내걸고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은

노동당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왠지 싸늘해진다. 수없이 많은 선거들의 반복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듯하다.

선거를 하면서 소진되어 가고, 조직도 사람도 전부 잃어간다. 이런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선수들은 선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당원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사실 ‘대중과의 분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초창기부터 문제시

되어 왔다. 정당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파업을 최근에는 본 적

이 없다. 파업을 하면 ‘시민의 발목을 잡는’ 따위의 기사를 써 대는 언론이나 정부의 선전이 수십 년이나

계속되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정당운동에 대한 불신을 여지없이 드

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집회 현장에서는 강기갑 의원을 제외하곤 어떤 당 대표도 마이크를 잡을 수가 없

었다. 이는 2002년 미선·효선이 사건 때도 이미 있었던 현상이다. 대중들이 진보정당을 신뢰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보는 것이

다. 이는 단순히 진보가 무능하다거

나 정치는 누가 해도 비슷하다든가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적대감이다.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효과와 지금

의 종북 공세는 사실 맥을 같이 한다.

시민들은 북한을 사회주의 사회로 생

각하고, 진보정당들이 시대에 뒤떨어

진 환상에 젖어 여전히 사회주의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다. 더 심각한 것은 진보적인 대중들

과 시민운동 또한 진보정당운동을

‘제도정치’로 규정하고, 제도정치를

통해서는 사회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

다고 단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

보정당운동은 고립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왜 만들어졌을까? 참가자들

은 하나같이 진보정당이 전혀 대중적

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보정당을 향한 대중의 불신은

일차적으로는 대중에게 보여줄 만한‘진보정당운동을 평가해 보자’ 모임 홍보 웹자보(일부) (제공 : 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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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79

정치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위기에는 ‘이론의 결핍’이 한몫을 하고 있다. 특히 진보

정당운동의 이념과 의미를 생산해 주는 우호적인 지식인 집단이 없다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진보정당에 가입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활동가들이 이웃을 만나도 사실 할 말이

없다. 진보정당은 대중을 상대로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하는

지, 왜 당원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무수한 할 말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그런 면에서 충분하지

못했다.

3. 진보정당에 대중노선은 존재하는가?

배정학 : 2006년에 민노당에서 지방정치 교육을 한 적이 있다. 교육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시 민노당에

지역정치의 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실천을 많이 했지만, 실제로는 중앙정치에서의 내용을 지역으로

투하하는 식이었다. 현재는 다양한 자발적인 지역운동을 실천해야 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정체성이나 강

령을 가지고 지역사업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주거와 최소한의 안정(확실치 않

음)문제에 대한 당의 전략이 없었다. 난 여기서 그런 이론이 나왔으면 한다.

미선 : 대중에 대한 접근 방법이 너무나 서툴다. 이념을 먼저 들이대면 대중들이 동참할까?

이고은 :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이 사람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진보정당

운동이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들에게 접근하고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어떤 결연한 행동을 미리

정해놓고 지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파악하고 다양한 방법을 열어놓아야 한다.

추공 : 지금의 진보정당은 전형적인 이념정당이다. 여기서 대중노선이 작동하는지가 의문이다. 패권주

의는 대중노선과 대중정당문화를 만들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즉 대중정당노선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결코 내용은 만들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진보정당은 확대된 정파나 운동 단체와 다르지 않았다. 정파에 소

속된 사람들은 그 차이를 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패권주의가 진보정당 정파들의 일상적인 모

습이었다. 다시 말해서, PD는 NL을 패권주의라고 말하지만 PD또한 여기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의 진보정당은 대중노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강령이나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당에서 생산하는 이

데올로기가 사회단체나 이념적 정파와 다르지 않다. 진보정당은 대중정당이라는 이 믿음은 사실상 일종

의 허구가 아닐까? 노동당에 대중노선이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중노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

엇보다도 여러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혹은 믿음)와 그게 걸맞은 제도적 장치가 존재해야 한다.

즉 다양한 입장들이 경합할 수 있는 ‘민주적 합의’가 가치의 중심에 존재해야 한다.

Page 8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80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서구 정당의 역사와는 달리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는 일천하다. 우리는

아직 대중노선을 제도적 장치로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이는 결국 우리 운동 전반에서 갈등을 조정하지 못

하는 미숙함으로 드러난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를 어떤 정파나 세력의 선의에 기대 해결하려 했다면, 이

제는 당내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이

전환을 ‘민주적 합의’라고 부르자. 민주적 합의는 정파나 의견그룹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와

소통구조이며, 이 민주적 합의를 중심으로 대중노선은 이론화 될 수 있다. 모든 저항적 대중조직에서는

민주적 합의가 필요하다. 특히 민주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조직은 민주적 합

의를 다른 모든 가치와 동등하게 위치시켜

야 한다. 민주적인 소통구조를 만들 수 없

는 대중조직은 필연적으로 우경화된다.

우리는 진보정당의 분열이 대중노선,

특히 대중조직과 정파 간의 관계를 이론화

할 수 없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2008년과 2011년, 자주파와 평등파가 분열한 원인에는 정파나 의견그룹들이 민주적인 합의를 만들어 가

지 못했던 정치력의 한계뿐만 아니라 내용 없는 진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레이서 : 분열의 이유는 노선의 갈등이 아니다. 욕심과 패권의 문제로 보인다.

윤현식 : 현재 노동당의 문제는 정파들끼리의 정치는 있는데 당원을 향한 정치가 없다는 점이다.

추공 : 진보정당운동은 대중노선을 표방하는 정당운동이다. 그런데 이 대중노선의 정체가 애매모호하

다. 노동당의 경우만 해도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고 있지만 현실은 대중정당과 정파, 단체가 엄밀하게 구

별되지 못하고 있다.

대중노선은 좋은 정파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중조직 내부에는 정파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민주적

합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파벌들이 대중노선을 이해하고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정파들이

있는 것이다. 비민주적인 정파조직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조장한다. 이것이 패권주의로 나타난다. 패권주

의에 대한 섬세한 정의가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패권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곳이 동부연합

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패권주의는 NL-PD라는 정파구도 아래, 내용 없는 대중노선의 필연적인

산물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정파를 대표해 대중조직에 참가하는 자가 비주체적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회의에서의 발언을

민주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조직은

민주적 합의를 다른 모든 가치와 동등하게 위

치시켜야 한다. 민주적인 소통구조를 만들 수

없는 대중조직은 필연적으로 우경화된다.

Page 8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쟁점토론 81

자주 번복했고 정파의 ‘파견자’는 신뢰를 잃기 일쑤였다. 특히 대중조직 외부에 정파의 골간조직이 있는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권위적인 권력중심이 있는 조직에서는 조직의 결정이 곧 조직원의 ‘일반의지’이므

로 쉽게 번복될 수 없다. 때문에 정당 내부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파견자와의 실질적인 협의가 한계를 가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달자이므로, (사실상)토론과 협의는 하되 결정은 그의 몫이 아니며, 토론과 협의

의 장소에 있지 않은 정파의 실력자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파의 파견자는 정파의 뜻을 단

순히 전달하는 자여서는 곤란하다. 대표자는 정파의 의지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정당에 관한 한 대부분

을 결정하는 ‘위임 받은 자’여야 한다. 정파는 정당문제에 관한 한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현장에 있는

활동가를 우선적으로 믿고 그의 그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정치적 유연성과 ‘현장 우선주의’를 작동해

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노선은 정파 내부의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우리의 진보정당은 어떤가? 우리

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정파의 후진성이지 않은가?

5. 운동이론 없이는 운동도 없다

평가를 하는 이유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진보정당운동에서 반복되는 이 실수가

대중정당 내부의 후진적인 정파시스템에서 재생산된다고 결론 내렸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정파는

민주주의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수세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정당이 필요로 하는 ‘민주적 합

의’를 지켜나갈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대중노선의 부재와 후진적인 정파문제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것들은 끝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운동이론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는 이론은 학자들로부터 상품으로써 생산되는 이론과는 다르다.

만약 노동당 내부에서 이런 문제들을 직시하고 새로운 운동이론의 개발과 함께 공개정파운동을 통한 당

원정치를 재발견한다면, 우리의 위기는 기회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진정해는 어쩌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을 일정 부분 달성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정해 때문은 아닐

지라도 당내 논쟁이 이미 시작되었고, 3지대에 새로운 당을 건설하자는 의견과 노동당에 남아서 진보정

당을 건설하자는 의견이 나와 있다. 정의당과 합치자는 말도 무성하게 오간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이

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이론을 제대로 제시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다. 외롭다고 해서 쉽게 옛 애인에

게 전화 걸어서는 안 된다. 왜 헤어져야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 아픈 경험만 기다리고 있

을 것이다.

Page 8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연이은 세입 실적 감소

세금이 안 걷히고 있다. 아래 표는 국회 예·결산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2년간의 세입 예

산과 실제 실적을 정리한 것이다.

2012년에는 총수입을 343.5조 원으로 예상하고 그 중 국세 수입을 205.8조 원으로 잡

았으나, 실제 걷힌 수입은 총수입 341.8조원, 국세 수입 203.0조 원으로 각각 1.7조 원, 2.8

조 원이 적게 걷혔다.

2013년에는 이 격차가 더 커졌다. 예산 상 총수입이 360.8조 원이었으나 실제로는 예상

보다 8.9조 원이 적은 351.9조 원이 걷혔다. 국세 수입만 따지면, 실제 세입 실적이 201.9조

원으로 예산 210.4조 원에 비해 8.5조 원이 덜 걷혔다.

2013년의 경우는 상반기에 이미 세수 실적이 저조할 것을 예상하여 추경을 통해 당초

372.6조 원(세수 216.4조 원)이었던 본예산 수입을 11.8조 원(세수 6조 원) 삭감한 것이었다.

본예산을 기준으로 따지면 20.7조 원(세수 14.5조원)이 ‘펑크’난 셈이다.

직접세로 증세하라

홍원표정책실장

정책포럼

82

2012 2013

예산 실적세수 예산

실적세수오차

오차 본예산 추경 본예산대비 추경대비

총수입 343.5 341.8 -1.7 372.6 360.8 351.9 -20.7 -8.9

국세 수입 205.8 203.0 -2.8 216.4 210.4 201.9 -14.5 -8.5

국세 외 수입 137.7 138.8 1.1 156.2 150.4 149.9 -6.3 -0.5

<표1> 2012~2013년 세입 예산 및 세수 실적 비교 (자료 : 국회 예·결산 각 년도 자료)

Page 85: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정책포럼 83

세수 감소는 올해도 지속될 전망이다. 기획재정부가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해 1~7월까

지 국세 징수 실적은 124.4조 원으로 예산(216조 5000억 원)대비 징수 진도율이 57.5%에 그치고 있다. 이

는 지난 2011~2013년 평균 징수 진도비 63.3%에 비해 5.8% 포인트 낮은 수준으로, 3년 평균 진도비를

적용하면 세수 규모가 12.6조 원이나 적게 걷힌 것이다. 작년 세수 실적이 추경예산 대비 8.5조 원 적자인

것을 감안하면 올해 세입 부족분은 최소 10조 원, 최대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국세 수입

대비 5~10%에 달하는 수준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미 1~4월 세수 실적(34.4%, 2013년 36.5%)보고를 통해 올 해 최대 10조 원의 세수 부

족을 예상했지만, 이를 통상적인 불용액(쓰지 않은 예산) 규모 내에서 감당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국회가 통과시킨 예산을 의도적으로(?)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부족분을 해소하겠다는 뜻이다.

세수 부진의 원인 : 경제 구조 불균형과 부자 감세

세수 실적만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제출하는 국가재정운용계획 전망치도 해마다 수십조씩 뚝뚝 떨어

졌다. 국가재정운용계획은 국가재정법에 따라 정부가 매년 5년 치의 재정 전망 및 운용 계획을 작성해 국

회에 제출하는 것이다. 아래 표는 최근 4년간 정부가 제출한 국가재정운용계획 상의 재정 총량 전망치인

데, 2015년 전망치의 경우 2011년과 2012년 계획에서는 415조 원으로 전망했으나, 2013년에는 392조 원

으로, 2014년에는 382조 원으로 재차 하향 조정되었다.

국가의 재정 수입은 경기 변동에 따라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경기 변동에 따른 수정은 응

구분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연평균

2011총수입 314.4 343.5 375.7 395.8 415.3

~2015증가율 (8.1) (9.3) (9.4) (5.3) (4.9) 7.2

조세수입 187.6 205.8 224.2 242.6 262.3

2012총수입 343.5 372.6 396.1 415.2 439.1

~2016증가율 (9.3) (8.5) (6.2) (4.8) (5.7) 6.3

조세수입 205.8 216.4 238.9 259.1 280.4

2013총수입 360.8 369.3 392.1 413.2 438.3

~2017증가율 (5.0) (2.4) (6.2) (5.4) (6.1) 4.1

조세수입 210.4 216.5 234.5 252.5 270.7

2014총수입 369.3 382.7 404.6 428.1 450.8

~2018증가율 (-0.9) (3.6) (5.7) (5.8) (5.3) 5.1

조세수입 216.5 221.5 238.1 254.1 272.3

<표2> 2011년 이후 국가재정운용계획 재정 총량 수입 부문 추이 비교

Page 86: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84

당 매해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2011년 이후 국내 기업의 수익성이 다소 저하했고, 지속적인 가계소득

증가율 감소는 내수 부진으로 이어져 세수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근 세수 전망 오차와 재정운용계획 전망의 변동이 유래 없이 커

진 데는 정부의 현실성 없는 낙관적인 성장률 전망이 크게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아가, 세수가 부진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균등한 경제 구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3

년 총수입 결산 분석> 보고서에서 수출-내수 간 불균형, 제조업-서비스업 간 불균형, 노동소득과 기업소

득의 불균형이 세수 여건을 악화시킨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수출 부문은 경제성장의 국세 탄성치1)가 낮아 수출 의존도가 심화될수록 경제 성장이 세수 증가로 이

어지기 힘들다. 또한 제조업 부문은 서비스업 부문에 비해 실효세율이 낮아 제조업-서비스업 불균형이

법인세 감소 심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업소득이 가계소득으로 이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가

계소득 증가세 둔화는 민간 소비 부진 및 내수 부진으로 이어져 소득세와 부가가치세 세수 감소를 초래하

는 반면, 기업소득 증대에 따른 세수 증가는 지속적인 법인세율 인하로 인해 가계소득 감소에 따른 세수

감소를 보완하지 못하고 있다.

세수 부족의 세 번째 원인은 비과세·감면이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

절 각종 비과세와 감면 제도를 통해 부자 감세가 이루어졌다. 박근혜 정부는 대대적인 복지 확대 공약을

내걸고 재원 확보 방안으로 과도한 비과세·감면 제도 정비를 제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일몰이 도래

1) 탄성치는 변수 간 변동률의 비율을 말한다. 경제성장의 국세 탄성치가 낮다는 말은 성장률 증가가 세입 증가율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년 대비 국세 수입 실적. 법인세와 양도소득세는 줄었고,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는 늘었다.(사진 : YTN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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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85

했던 각종 비과세·감면 제도 중 예정대로 일몰되지 않고 추가 연장된 비과세·감면 금액이 97%에 달한

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2012~2013년 비과세·감면 정비를 통해 확보하려 했던 목표치 금액은 15.3조

원이었던 반면 실제 정비 규모는 고작 3.9조 원으로 당초 계획의 26% 수준에 그쳤다.

증세는 안 되고, 담배세 지방세는 된다?

세수가 기대만큼 증가하지 않고 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예산을 ‘확장적’으로 제출했다. 2015

년 지출 예산은 올해 대비 20조 원 가량 늘어나고 SOC예산과 복지, 일자리, 창조 경제 예산이 확대 편성

되었다.

이렇게 세수 증가 없이 예산을 확장해서 편성하면 예산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국가 채무

증가라는 부담으로 돌아온다. <2014~2018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은 2014년 국가 채무 규모를 499.5조 원

으로 전망했으나, 이미 2014년 7월말 기준 중앙정부의 채무가 전 달에 비해 8.6조 원 늘어난 503조 원을

기록했다. 또한 향후 국가 채무 규모는 2015년 570.1조 원, 2016년 615.5조 원, 2017년 659.4조 원, 2018

년 691.6조 원 수준으로 예상된다. 이는 GDP대비 35% 수준으로,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 수립한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 20%대 정책 목표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

정부는 이러한 추이에 대해 ‘축소균형 위험에서 확대균형으로 도약하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재정을 확

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장의 적자를 의식해 돈을 아끼면 경기 침체가 심화돼 수입 감소의 악순환

(축소균형)에 빠지는 반면, 적자를 감소하더라도 돈을 풀면 경제가 살고 수입이 늘어 균형(확대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제 불균형을 조정하지 않으면 경제 성장에 따른 세수

증가 속도가 지출 증가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국가재정운용은 축소균형 위험을 피

해 확대‘불균형’으로 다다를 위험이 크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복지 수준

은 아직도 한참 뒤쳐져 있는 반면, 정부 재

정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현재의 예

산을 더 이상 줄여 쓰기도 어려울뿐더러,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복지 수요 확대가

강력한 지출 증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

다. 현 정부가 제출한 예산보다 더 확장적

인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수입을 늘리는 것이다.

증세는 없을 것이라는 단언과 ‘줄푸세’로 상징되는 감세 정책에도 불구하고 최근 박근혜 정부는 담배

세와 지방세, 자동차세 인상을 단행하고 있다. 정부는 담배세 인상이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고육책이라

고 하지만, 사실은 세수 확보가 목표라는 것은 이미 전 국민이 다 안다. 전근대적 인두세인 지방세를 21세

경제 불균형을 조정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에

따른 세수증가 속도가 지출증가 속도를 따라

가기 어렵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국가재정

운용은 축소균형 위험을 피해 확대‘불균형’

으로 다다를 위험이 크다.

Page 88: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86

기에 인상하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대해서도 박근혜 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오래된 요구라고 떠넘기

지만, 동시에 2015년 예산에서 보육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그 부담도 함께 지방교육청으로 떠넘겼다. 심

지어는 세수가 부족하다는 대통령 발언 이후 교통 단속이 급증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줄푸세 정부조차 증

세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민 증세, 꼼수 증세에 나서는 꼴이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인상하라

노동당은 증세 없이는 복지 확대가 불가능하다고 진즉부터 주장해 왔다. 2014년 예산 처리를 앞둔 1년

전 본지 정책포럼에서는 ‘선 적자 후 증세’를 주장하기도 했다(<미래에서 온 편지> 2013년 11월호). 긴축 균

형 재정을 원칙으로 했던 최근 예산 정책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입 감소에 따른 적자 증가는 증세의 필요성

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증세냐 감세냐가 아니라 어떤 증세인가의 문제이며, 세수 증대 환경

을 조성하기 위한 경제 구조 개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증세와 관련해서, 간접세 중심의 증세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법인세와 소득세 등의 직접세 중심의

증세는 경제활동 유인을 떨어트려 결국 세원 축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 중심의 증세

가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 한국의 간접세율이 낮은 편이기도 하고, 소득에 직접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증세 저항도 적다.

하지만 이미 한국은 간접세 비율이 전체 조세 수입의 50%에 육박한다. 소득세와 법인세율의 지속적인

감소로 인해 직접세 비율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간접세는 소득재분배 기능이 약하다

9월 22일 방송된 jtbc《뉴스룸》의 설문 조사결과.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61%가 가능하지 않다고 대답했다.(사진 : jtbc 뉴스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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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87

는 점이다. 한국의 시장 소득 불균형은 해외 주요국에 비해 크게 높은 편이 아니지만, 조세 및 재분배 정책

이후의 소득 불균형은 압도적으로 높다. 조세정책의 재분배 효과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세 중심의

증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법인세 인상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기업의 수익 구조가 악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

서는 기업의 소득이 가계의 소득을 훨씬 앞서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한국경제의 가계와 기업 간

소득성장 불균형 문제>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기업 소득은 두 배 증가한 데 반해 가계 소득은 4분의1 수

준으로 급락하였다. 여전히 기업은 한국에서 가장 큰 담세 능력을 가진 집단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법인세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뿐만 아니라 각종 비과세·감면 조치로

실효세율은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법인세의 감소는 세원의 축소뿐만 아니라 사내유보금

확대의 유인으로도 작용한다. 3대 세습이 가능할 정도로 지배 구조가 집중된 상황에서 기업에 쌓여 있는

돈은 사실상 대주주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돈이란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세에 비해 한참 낮은 법

인세는 대주주가 세금을 내지 않고 언제든지 유용할 수 있는 현금을 기업에 적립하게 만든다. 실제로 최

근 재벌 자녀가 하루 저녁에 수천만 원의 법인 카드를 유용한 사례가 보도된 적도 있다. 법인세의 인상이

필요하다.

소득세 역시 인상해야 한다. 현행 소득세 최고세율(과표 3억 원 이상)인 38%는 소득양극화 해소 및 재분

배 효과가 약하다. 최고세율 과표 구간 역시 고소득층의 소득 증가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문제가 있다. 최

고세율 과표 구간을 신설하고 해당 구간에 대한 최고세율을 높여야 한다.

최근의 재정 상태는 증세가 더 이상 좌파들만의 이념적 주장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시급하게 다뤄야

하는 현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편

복지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직

접세 증세에 대한 국민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권과 노동계, 시

민사회가 나서서 직접세 증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제 증세는 더 이상 좌파들만의 이념적 주장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시급하게 다뤄야 하는 현

실이다. 보편 복지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직접세 증세에 대한 국민 동의를 얻어야 한다.

Page 90: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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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시간

지역에서현장에서

2014년 4월 16일 ~ 10월 6일,사진으로 보는

노동당 고양파주당협의 세월호 기록

4월16일. 모든 선거운동을 중단하라

2014년 지방선거에서 노동당 고양파주당협은 5개

선거구에 도의원 후보를 각각 출마시켜 진보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2014년 4월16일, 선

거운동을 하고 있던 모든 후보와 선운동원은 선거캠프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뉴스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은 사무실에 도착해 충격적인 사고소식에 할 말을 잃었다.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고양파주당협의 모든 선거

캠프는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논의 끝에 모든 선거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세월호 사태 해결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4월28일. 가만히 있지 않겠다

연일 이어지는 사고 소식과 어이없는 정부의 대

처를 보면서 시민들은 분노했다. 단 한명도 구조

하지 못하는 국가의 재난시스템에 의문을 품었

고 “이게 국가인가?”, “이게 국민을 위해 존재하

는 정부인가”하는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고양

파주당협은 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세월호 진

상규명과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해 고양파주당협

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실천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4월28일, 박근혜정권 퇴진 구

호를 들고 화정역 광장에서 ‘돈보다 사람이 먼저

인 세상 만드는 시민발언대’를 시작했다.

김성윤고양파주당협 연대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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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89

많은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

고,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목소

리가 시민발언대로 모여들었다. 분노에 찬 시민들의 목소

리는 더욱 커져갔고, 하나가 되었갔다. 화정역 광장에서,

고양파주당협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화정역 광장 책상 하나를 놓고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시민발

언대를 진행했다. 다섯 살 아이부터 일흔을 넘긴 어르신까지,‘구하

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노란 리본과 작은 대자보에 남겼다. 고양

파주당협 당원들은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썼지만, 함께 눈물 흘리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시민발언대와 함께 촛불문화제를 시작

했다. 매일 저녁마다 문화공연을 하고

영상을 상영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했

다.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종이학을 접

어, 서명용지와 함께 2천여마리의 종

이학을 안산의 유가족대책위에 전달하

기도 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화정역 광장 주

변에 대자보와 노란 리본을 걸기 시작

했다. 서명인원이 하루에 800명을 넘

어서기도 했다.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과 무능한 정부를 향한 분

노의 글들이 화정역 광장을 노랗게 물

들여 갔다.

Page 9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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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5일. 4월16일을 기억하라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갔다. 그사이 화정역 광장의 노

란 리본과 대자보가 철거되기도 했지

만, 고양파주당협은 세월호를 잊지

않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을 위해 노력을 계속 해왔다.

세월호 사고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

은 때에 SNS를 통해 모인 고양시민

들과 함께 거리에 노란 현수막을 걸

었다. 노동당이 건 200여 개의 현수

막이 훼손되는 등 사건사고가 많아,

TV와 인터넷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

다. 지금은 현수막을 훼손한 범인을

잡아 검찰수사가 진행 중이다.

노동당 고양파주 당협은 앞으로도 매주 금요

일 저녁에 화정역 광장에서 시민발언대를 진

행할 예정이다. 세월호 문제뿐만 아니라 밀양,

강정, 부자감세, 의료민영화 등 각종 사회문제

를 알리는 시민발언대를 이어갈 생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4년 10월6일 현재, 아직도 7살배기 권

혁규 어린이를 포함한 10명의 실종자가

진도 앞바다 깊은 물속에 수장되어있다.

절대 잊기 않기!기억하기!행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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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통신 91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 지났

다. 영국에서 이론전산 분야로 학위를 마친 후 지중해 연안도시 몽펠리에에서 박사 후 연구

원 신분으로 프랑스 생활을 시작했다. 거주 초반 우연찮게 지원했던 프랑스 국립과학연구

원(CNRS,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파리 9

대학인 Dauphine에 소속되어 있다.

프랑스의 연구소 조직은 보통 대학과 연구소가 결합된 형태이다. 소속 연구원, 지원금,

행정직 인력 등이 두 조직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대학의 교육기능과 연구에 좀 더 중심을

둔 연구소의 기능을 동시에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국, 미국, 한국 같은

나라들에서는 기초연구의 대부분이 대학/교수들에게 맡겨진다. 이와 다르게 상당수 유럽

국가들은 연구에 특화된 연구소 조직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대학과 연구소를 결합해 운영

한다. 각 모델의 특징과 장단점, 그리고 그런 모델이 채용된 배경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

다. 다만 경험과 지식이 짧아 이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어려우니, 이 글에서는

필자가 익히 경험하고 수도 없이 고민해본 주제에 대해 쓰려고 한다.

정답이 아니라도 괜찮아

유럽에 와서 연구자로서의 발걸음을 뗀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 점이다. 사실 처음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할 때에는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다른

더 많은 연구자에게 학문의 즐거움과 자유를! 유럽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기

김은정유럽 당원

구라파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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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공동연구였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는 전산학에서 쓰는 기초적인 이론을 만드는 일을 한다. 수학에 가깝다. 흔히들 수

학은 골방에서 혼자 이론을 연구하는 괴팍한(?) 수학자의 작업 결과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곳

에서 본 연구는 대부분이 2~4명의 공동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수학은 오해 없는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

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의사소통하기가 비교적 쉽고, 따로 실험장비가 필요하지 않고 건강한 두뇌

와 종이, 연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동성이 무한대에 가까운 연구 분야이다. 이

런 이유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사람들과 공동연구가 가능한 것이 이 분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공동연구의 현장이, 잘 정리된 ‘정리(Theorem)’를 말하고 이해하면 되는, 정돈된 사고의 결

과물이 오가는 곳이 아니라는 거다. 현장은 ‘카오스’에 가깝다. 이미 증명이 끝난 정리를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증명이 될지 안 될지조차 알 수 없는 명제(?)를 말한다. 때로는 증명가능한 명제를 동료가 말할 수도

있지만(보통 ‘관찰(observ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 관찰이 이 연구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많은 경

우, 연구를 통해 도달(증명)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명제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목적지 자체를 여행

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 셈이다. 혼돈과 불확실함은 혼자 연구하든 함께 연구하든 겪어내고 넘어야 하는

산이다. 공동연구는 여러 사람의 사고를 말로 풀어내어 모아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연구’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연구가 무질서한 우리의 관찰·지식·논리·상상력 안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게다가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무질서로 가득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7

년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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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통신 93

이 시간은 나를 형성해 온 교육에 대해서 반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확실한 것, 정답, 하

다못해 답의 형태라도 띄는 것을 말하도록 훈련받는다. 무언가를 입 밖으로 내려면, 특히 그것이 여러 사

람 앞이라면 맞는 것, 옳은 것, 적어도 가치 있는 것을 말해야 한다. 질문은 나의 무지를 드러내고 타인의

시간을 뺏는 것이다. 틀린 답을 말하는 건 ‘쪽팔리는’ 일이다. 거기에다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고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말이나 질문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답이

있는 질문만을 하고 정답만을 말하게 된다. 과제는 과정이 아닌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고, 답이 이미

있는 문제에 대해 정답을 가장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찾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을 교육의 핵심이라

고 믿는다.

하지만 (공동)연구는, 정답은 고사하고 말해질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한 수많은 아이디어/

관찰들을 말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때로는 맞추려는 그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 어지러이 놓인 의미를 알 수 없는 퍼즐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더듬더듬, 겨우 한 조각씩, 끈

기 있게 퍼즐을 완성해간다. 이 모든 과정은 불확실함을 참아내고, 심지어 즐기지 않으면 감내하기 어렵

다. 나와 타인의 불확실함을, 무의미함을, 얼핏 실패와 무지로 여겨질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함

께’ 금맥을 찾아가는 여정을 만들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조직 문화

한편,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말하는 데에는 내 아이디어가 바보 같은 소리로 치부되지 않을 거라는 신

뢰가 꼭 필요하다. 나는 동등하게 존중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상사의 질

문에 똑 부러지는 답을 말하지 못하면 문책당하는 분위기. 사회생활을 해본 한국 어른들은 누구나 알 것

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토론은 자유로운 탐색의 시간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질문으로부터 나를 방어해야

하는 전투의 시간이 된다. 이런 시각으로 공동연구를 바라볼 때, 불확실함 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을 찾

아가는 협업의 정신을 과연 구현할 수 있을까. 눈앞에 놓인 아이디어의 허점과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들

어야 하는데, 상사의 눈치를 보고 지도교수의 눈치를 보면서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공동연구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으로 마주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 문

밖에서는 네가 나의 상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동등한 개인으로 말하고 듣는다.

이런 시각이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면면히 이어지는 동양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방식으로 적합할는지는 모

르겠지만, 적어도 과학을 하는 데에는 필수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쪽팔림’이라는 단어 지우기

한국에서 공부할 때에는, 교수들이 다른 교수들과 공동연구는 고사하고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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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별로 본 적이 없다. 유럽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 하나가 공동연구가 매우 빈번하

고 다양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활발한 연구자들일수록 더욱 다양한 공동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를 지니

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짐작하건데 ‘쪽팔리다’는 생각을 가지는지 아닌지

의 여부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앞서 지적했던, 정답에 대한 강박이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만들어내

고, 자신의 실력(얼마나 빨리 많은 정답을 만드는지)을 남과 비교하는 기제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정답이거

나 가치 있다고 확인되지 않은 생각을 타인 앞에 - 특히 만만한 상대가 아닌 타인 - 드러내는 일은 ‘쪽팔

리다’는 우리의 관념 속에서 교류와 협동은 요원한 일이다. 한편, 내 생각을 드러냈다 그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면 ‘아, 모르는 걸 배웠구나’라고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 ‘쪽팔림’은 장애물이 아니다.

물론 이런 문화적 차이만이 활발한 공동연구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기초연구도 돈이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전산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분야이다. 이런 분야는 실험 장비를 꼭 사용해

야하는 다른 분야에 비해 돈이 훨씬 덜 든다. 사람과 컴퓨터, 종이나 칠판 정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들

이 대부분이다. 컴퓨터도 보통의 노트북이면 충분하다. 기왕에 최신형에 사양까지 확실히 갖추면 금상첨

화겠지만.

그런데 이런 기초연구에도 돈이 든다. 왜? 이것과 관련해서는 최근 국제적인 공동연구가 증대되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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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 열린 ‘노벨과학상을 향한 기초연구의 나아갈 길’ 포럼 (사진 :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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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통신 95

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연구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다양하고 새로운 시각, 최근의 연구결과, 훌

륭한 연구자들과의 접촉 및 토의 등은 연구자 개개인의 성장을 촉진하고 새롭고 심도 깊은 연구를 만들어

내는 데 핵심적인 자극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자극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내가 최고의 연구그

룹에 속해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런 자극을 항상 주변에서 구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모

든 연구자들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못한다. 결국 지역과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 세미나, 학회 등을 통해

동료 연구자들이나 최신 연구 성과들과 만나고, 나아가 다양한 공동연구를 통해 자신의 환경을 뛰어넘기

를 모색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 모두 돈이 든다는 거다. 실험 분야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액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초연구, 특히 이론 분야에 대해 지원이 빈약하다는 볼멘소리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학계에

서든 들을 수 있는 불만이다.1) 특히 경제위기 이후로 일부 전략 분야를 제외하고는 연구 지원이 상당히 줄

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연구자 개인이나 팀에게

가는 직접적인 지원금 말고도, 다양한 세미나 주최, 강연자 섭외를 위한 지원, 연구자 초청을 위한 경비 지

원, 중소 규모 워크샵 개최를 위한 저렴한 기반 시설 등이 다양한 측면에서 기초연구의 재정적 부분을 보

살피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은 아직 배울 점이 더 많아 보인다. 기초연구의 중요성은 대부분의 정

치인들과 납세자들이 공통으로 합의하는 부분으로 보이는데 반해 그 물질적 기반에 대한 투자는 매우 열

악한 편이다.2) 지금까지 유럽에서 연구자로서 살면서 본 공동연구에 대한 잡설들을 풀어보았다. 과학, 그

중에서도 전산에 쓰이는 기초연구라는 매우 특수한 분야에서의 경험이 한국사회의 더 큰 맥락에서 어떤

시사점을 가질는지는 사실 필자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몇 년 겪으면서, 또 유럽에

서 연구자로 일하면서, 이런 특수한 분야에도 그 사회의 특징이나 지향하는 바가 꽤 잘 드러난다는 사실

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게는, 한국에서보다 지금 이곳에서의 연구생활이 훨씬 재미있다. 한국에서도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학문의 즐거움과 자유가 공유되길 바란다.

1) 이와 관련해서 전체 연구지원비의 70% 가까운 돈이 생물·생리·의학 등의 통칭 생의학 분야에 지원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미국 상황이다. 물론 나라와 시기마다 지원 방식이나 규모에는 큰 차이가 있다.

2) 물론 기초연구, 나아가 과학 전반에 지금 같은 지원금을 주는 것이 적절한지는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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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작전’이라는 거짓말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을 때, 미군은 즉각 2만 명이 넘는 군인들과 원자력항공모함

등을 투입해 자위대와 함께 재해지역의 구조와 지원 활동에 나섰다. ‘친구 작전(Operation

Tomodachi)’이라 불리는, 바로 그 공동작전이다.

CBIRF(시버프) 대원 150명의 파견은 특히 화제가 되었다. CBIRF(시버프)는, 핵과 같은

대량 파괴 무기나 방사성물질로 만들어진 ‘오염된 폭탄’을 사용한 대미 테러 공격이 있을

때 피해자 구출, 구명 의료, 오염 제거 작업 등을 하는 해병대 특수전문부대다. 이런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부대를 미군이

동맹국 일본의 원전사고라는

미증유의 비상사태에 대응해

일본으로 파견한 것이다. 미

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뷰리서

치가 사고 이후 4월부터 5월

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

면, 이 작전 이후 미국에 대한

일본의 호감도가 85%로 상승

했고, 이는 조사 대상 국가 중

임경화 대학 비정규직 연구자, 서울 금천 당원

다시,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 되는가?미·일 핵 동맹의 덫

동아시아시민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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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민운동사 97

최고, 전년(2010년) 조사 결과인 66%보

다는 20% 가까이 증가한 수치였다. 이

수치만 보면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라는

시련이 일본을 최대의 친미국가로 만들

었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미군이 후

쿠시마 원전사고 수습에 주체적이고 능

동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3월 15일은

1호기, 3호기에 이어 4호기까지 수소

폭발이 일어나 도쿄전력마저 철수 방침을 타진했던 때였다. 동맹국을 치명적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일

본마저도 한때 사고 수습을 포기하려 했던 재해지역에 미군이 과감히 뛰어든 것이다. 이것만 보면 미국은

말 그대로 일본의 ‘혈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탈원전 운동 일각에

서 반미 여론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왜일까?

미·일 동맹의 비대칭성 : 다시, ‘속국’ 논쟁으로

우선 그들은 ‘친구 작전’ 자체가 동맹인 일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원

전사고가 CBIRF(시버프)에게 둘도 없는 군사훈련 기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군기지 축소·이전 문제를

후쿠시마 사고 현장에 파견된 미군이 구호물자를 보급하고, 현장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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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고 있던 미국이 주일 미군 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일 군사 협력의 심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

다는 것이다. 하지만 탈원전 운동 세력들이 반발하게 된 보다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의 원전

산업 자체가 미·일 원자력협정과 같은 각종 조약에 의해서 관리되어 왔고, 따라서 원전사고 자체가 미국

과 무관한 사건이 아님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부터 시작되는, 핵을 둘러싼 미·일의 밀착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53년에 소련이 원폭을 보유하자, 미국은 그때까지의 핵 독점 체제를 포기하고, 서방 측 동맹국들에

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우며 원전을 제공하고 결속을 다지는 원자력 외교를 본격 가동시켰다. 일본도

그 대상 국가였다. 일본은 이미 정권 차

원에서 오키나와에 미군의 전술 핵을 배

치·저장하고 미군 핵 탑재 함선의 일본

기항을 용인함으로써, 미군의 ‘핵 우산’

에 국방의 근간을 뒀다. 또 한편으론 적

극적으로 원전을 도입함으로써 패전 이

후 미군 점령기에 금지 당했던 원자력/핵

개발을 속개해 명실상부한 독립국임을

어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의 핵 도입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어 비키니에서도 피폭의 참담한 경

험을 했던 민중들의 강력한 반핵·반미 감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국과 일본은 ‘핵 밀약’을 맺

어 군사 이용을 위한 핵의 도입을 비밀리에 수행하는 한편, 핵의 힘을 절실히 느낀 주민들에게 핵의 평화

이용을 강조하며 원전 산업을 도입함으로써 핵에 대한 알레르기를 없애고자 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원전 산업은 미국의 지도 아래 일본에 무난히 도입되고 왕성하게 육성되어 왔다. 미

·일 안전보장조약이나 미·일 지위협정 등과 마찬가지로 미·일 핵 동맹도 미국의 명령에 따른다는 전

제 아래 일본에 일정한 자유가 부여되는 구조였다. 이는 일본이 핵보유국 이외에 유일하게 재처리 기술을

인정받은, 독특한 지위에 놓인 국가라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1977년 미국은, 사용한 핵연료로부터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 기술, 즉 핵연료 사이클을 일본에 승인한다. 이 기술은 핵무기 제조 기술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반발이 계속되었지만, 결국엔 승인되어 일본을 오늘날과 같은 플루토

늄 대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으로의 원전 수출로 미국이 얻는 이익은 그 외에도 막대했다. 미국은 핵무기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 공장을 필요 이상으로 증축했는데, 일본의 원전 개발을 통해 원전 건설뿐 아니라 농축우라늄 판매까

지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원전 산업이 공해문제 때문에 70년대를 기점으로 쇠퇴하자, 미

국은 일본에 원전 증설을 추진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시점에 지진 대국 일본이 무려 54기나 되는 원전

을 가동하고 있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것이다. 공해산업의 위험을 일본에 떠맡기며 이익을 취하는 구

조는, 후진국으로 공해산업을 이전해 환경 비용을 외부화하는 선진국들의 모습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미국에서의 원전사업이 공해문제로 쇠퇴하

자, 미국은 일본에 원전을 증설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시점에 일본이 무려 54기나 되는 원

전을 가동하고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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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민운동사 99

그런 한편 일본도 이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비대칭적이라 할지라도, 미국과의 동

맹 관계 아래에서 원전 가동과 재처리 공장 가동 등을 통해 잠재적 핵보유국의 꿈을 키울 수 있었고, 패권

국으로의 욕망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석 에너지에 의존하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 저탄소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재생 가능 에너지와 원자력발전의 비율을 늘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지

구온난화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자력 기술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킨 원자력 선진국 일본이 고도

로 발달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해외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선전해 왔다.

바로 이렇게 이 둘의 욕망이 만나, 지금의 미·일 원자력의 종속 구조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호주의 일본학 연구자 개번 매코맥은 이와 같은 대미 관계를 추구하는 일본을

‘종속국가’1)로 정의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일본을, 식민지나 피정복 지역, 혹은 신식민지와 구별하여

“국민국가의 주권과 독립이 상정되어 식민지도 괴뢰국가도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자국의 이익보다 ‘타국

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국가”로 보았다. 이 ‘종속국가’ 논의는 3.11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던 대미 추종 노

선으로까지 옮겨갔다. 탈원전 운동을 전개하는 시민운동 세력들이, 이와 같은 비대칭적 미·일 핵 동맹을

파기하지 않는 한 원전 재가동이나 핵연료 사이클을 멈추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은, 1988년 발

효되어 2018년에 만기를 맞이하는 미·일 원자력협정의 파기를 목표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일 핵 동맹은 탈원전 사회 실현을 가로막는 결정타?

그런데 정말, 미·일 핵 동맹이 일본의 탈원전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일까?

비대칭적 동맹 관계에 안주하며 다량의 전기를 사용하고, 공해산업을 개발도상국에 수출해 이익을 얻

으려 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잠재적)핵무기 보유국이 되고자 하는 패권의식이 존재하는 한, 미·일 핵 동

맹은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탈원전 사회의 꿈은, 에너지 공급 체계의 과감한 전환과 에너지 절약

등을 통해 원자력 의존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주민들의 의지를 통해 달성될 것이다. 그래야만 미국의 원전

재가동 압력이나 원자력 마피아들의 원전 추진 의지에 굴복하지 않고 맞설 수 있지 않을까.

1) 《종속국가 일본》 ClientState: Japan in theAmericanEmbrace (2007)

Page 10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집을 나와 전철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늘 같은 상황을 맞닥뜨린다. 어쩌면 있

는 사거리에서마다 신호에 딱 딱 걸리는지, 자전거를 타고 가며 중간에 제친 보행자와 늘

횡단보도 앞에서 만나게 된다. 주말에 집 근처 도서관이라도 갈라치면 양손에 아이들을 꼭

붙잡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요즘엔 횡단보도가 숫제 자동차진입로로 바뀐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인도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안심'하라고 말 할 수가 없다. 그건 횡단보도에서도 마

찬가지다. 아이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이렇다.

“자동차에 탄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아. 그러니 자동차를 보면 우

선 너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 횡단보도에서도 마찬가지

야. 여기서 차에 치이면 네가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피해는 너만 보는 거야. 그러니 꼭 먼저

건너지 말고 다른 사람이 건너면 따라 건너.”

도저히 자동차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파란불일 때에도 자동차

는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가고, 보행자는 꼭 주위를 확인하고 길을 건너야 할까. 왜 자동차

는 중간에 멈춤 없이 직진할 수 있는데, 자전거는 모든 교차로마다 멈춰 서야 할까. 이런 불

만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꺼내놓았더니, 다들 우리나라 자동차 문화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

며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것이 굳이 우리나라의 독특한 시민성

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동차와 보행자 사이에 도로에서의 서열을 정해주는 도로체계 자

말로만 ‘보행친화도시’, 미안하지만 보행자를 위한도로는 없다김상철서울시당 사무처장

빨간도시교통이야기

100

Page 10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101

체가 문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보행자가 우선하는 교통체계를 갖고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인도에 있는 자동차에 대해,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치는 자동차에 대해 충분히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개공지로 개방된 공간을 버젓이 자기 주차장으로 쓰는 건물주의 몰상식한 태

도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로체계는 기본적으로 ‘자동차'가 절대 갑이다.

보행자의 섬이 되는 교통섬

늘 걸어다는 처지이기 때문에 도로, 특히 보행로의 구조를 유심히 보게 된다. 특히 사거리 교차로에 설

치된 횡단보도 구조에 눈이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로 환승하거나 버스정류장을 찾아 길

을 나설 때면 언제나 주요 도로의 보행로를 걷게 되고, 그때마다 늘 마주치는 것이 교차로이기 때문이다.

도시교통과 관련된 교과서를 보면, 모든 교차로 시설은 일차적으로 차량의 흐름, 즉 도류의 원활함을 기

본으로 해 설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네 개의 방향에서 진행하는 차량의 흐름을 가장 효과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데 교차로 시설, 특히 신호체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교차로에 구조물을 추가로 설치해 우회전 흐름과 직진 흐름을 분리하는 일이

눈에 띈다. 도로에서 차선 등을 분리하기 위해 설치하는 구조물을 ‘교통섬(traffic island)’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교차로 시설의 기본이 자동차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도류에 있음에도 교통섬의 설치 이유

는 하나같이 ‘보행자의 안전보장’이 제일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우회전 전용차로를 보장해주면서 보행자

의 안전도 보장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교통섬. 이 주장이 정말 사실일까?

Page 10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102

위의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교통섬 방식의 교차로 모습이다. 각 방향의 차량 중 우회전 차량은 별도의

신호가 없어도 보도와 교통섬 사이의 길, 그러니까 (1)로 지나갈 수 있다. 보행자들은 보통 (2)의 위치에서

보행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도면만 보면, 차량의 흐름을 원활히 하면서도 보행자를 섬 구조물에 보호할

수 있으니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유리한 구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그렇지

않다. 차량운전자 입장에서는 별도의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분명 이익이다. 게다가 보행자

가 정면의 가시범위에 있기 때문에 보행자에 대한 주의를 덜 해도 된다. 그렇다면 보행자 입장에서 보자.

우선 보행자는 우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가기 위해 기존에는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지만 이제

는 네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예를 들어 (2)에 위치한 보행자가 우측 상단으로 보행

자신호를 받아 이동한다고 해보자. 이 보행

자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직선 차량의 옆

을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 (1)의 위치

에서 우회전하는 차량을 피해 또 한 번 횡단

보도를 건너야 한다. 즉, 보행자 입장에서 교

통섬은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오

히려 도로 위에서 보행자들을 가둬놓는 곳에

가깝다. 게다가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가로수 등도 없기 때문에 여름철엔 그야말로 땡볕에

그냥 방치된다.

혹자는 각 교차로 모퉁이에 있다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면 그 때 교통섬으로 이동하고, 그 다음 한 번

에 건너편으로 건널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보행자 입장에서는 애초에 교통섬으로 횡단할 때

에도 우회전 차량을 살피며 건너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교통사고의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교통

섬 방식의 교차로는 합정역 사거리에도 있고, 광화문 사거리에도 있다. 내가 사는 부천은 도로의 구분 없

이 거의 모든 교차로가 공사만 하면 이런 교통섬 방식의 교차로로 바뀌고 있다.

보행로 우선의 도로 체계를 만들려면

현행법령에서 보행로, 즉 보도는 도로의 부속물로 취급된다. 우선 <도로법> 제54조에서는 “도로관리

청은 보행자의 안전과 차량의 원활한 통행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도로에 보도를 설치하고 관리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기준은 시행령으로 넘긴다. 그런데 <도로법> 시행령에는

보도에 대한 규정이 없다. 그러니까 도로를 설치하면 의무적으로 보행자를 위한 보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규정 같은 것이 없는 셈이다. 실제 <도로법> 상에서는 ‘보도’가 도로의 하나로 정해져 있지만,

앞의 54조 규정 외에 보도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내용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횡단보도는 어떨까? 횡단보

도에 대한 규정은 <도로법>이 아니라 <도로교통법>에 나와 있다. 제10조(도로의 횡단) 조항을 보면, “지방

보행자 입장에서 교통섬은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도로 위에 보행자들을

가둬놓는 곳에 가깝다. 가로수도 없어서 여

름철엔 그야말로 땡볕에 그냥 방치된다.

Page 105: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103

경찰청장은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있으며 “보행자는 모든 차의

바로 앞이나 뒤로 횡단하여서는 아니되며”, “횡단보도가 설치되어 있지 아니한 도로에서는 가장 짧은 거

리로 횡단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곤, 없다. <도로법>에 보도 설치의 의무가 없듯이 <도로교통법>에는 근처에 육교나 지하도로가 있

으면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없다는 규정만 있을 뿐, 횡단보도 내에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하거나 보행교통

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에 대한 규정은 전무하다. 앞서 잠깐 말한 출·퇴근길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나는 (1)의 송내역을 가기 위해 (2)에서 출발

한다. 통상 가장 빠른 방법은 (2)의 앞에서 버스

를 타는 것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자전거를 교통

수단으로 삼기로 했다. (2)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교차로의 좌회전 신호를 제외하곤 정지신호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이 (1)까지 갈 수 있다. 하지

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는 (1)까지의 모든 교차

로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부천은 겉으

로 보기엔 자전거도로가 잘되어 있는 곳이어서 보도

내에 자전거도로가 있다)대부분 세 차례의 교통신

호 교체가 이루어져야 횡단보도 신호를 받을 수

있다. 왜 버스는 좌회전 신호 한번에 (1)까지 갈

수 있는 반면, 자전거는 그렇지 못한가.

그것은 신호체계 때문이다. 상·하·좌·우

교차로에서는 네 개의 직진 노선을 중심으로 교

통신호체계가 만들어진다. 대부분 직선 주행 위

주다. 그리고 각 교차로마다 횡단보도가 네 개씩

놓여있는데, 문제는 횡단보도의 신호 교체시간

과 차량의 주행신호를 짤 때 차량 신호를 중심으

로 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짠 것처럼 (2)에

서 (1)까지 올 때 늘 (3)에서 (2)로 건너오는 횡단

보도 신호를 만나게 되고, 그것이 끝나면 직선

횡단보도 신호가 나온다. 아무래도 차량 신호의 관점에서는 횡단보도 신호보다는 (1)의 시점에서 직선 주

행을 고려한 신호체계를 우선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보행자들은 이 이동 경로에서 못해도 세 개, 많으

면 네다섯 개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통행신호 시간을 산술적으로

잡다보니, 자동차는 직선 주행 중인데도 우측 방면 직선 횡단보도는 계속 빨간불로 유지되기도 한다.

Page 106: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104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십자형 횡단보도 설치다. 그러면 마주보는 인도의 보행자

가 불필요하게 두세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완벽한 대안은 없다. 더구나 십자형

횡단보도는, 기본적으로 보행자 우선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무단횡단’이라는 논란에 금세 휩싸

인다. 실제로 부산대 앞 대학생들의 무단횡단 실태를 보도한 매체는 그 원인으로 ‘십자형 보행신호’를 들

었다(《국제신문》 2012년 4월 8일자). 좌회전 신호일 때 차량이 움직이지 않는 횡단보도로 무단횡단을 한다

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그런데 사실,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을 때 그냥 지나치는 차량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최근 3년간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

람이 무려 1,234명에 달하고 횡단보도 주변에서 발생한 무단횡단 사망자 수보다는 2.6배가 높다는 통계

가 나와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차와 사람이 부딪히는 교통사고 중 39%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일어

났다. 이것이 우리나라 도로의 현실이다(〈자동차가 횡단하는 횡단보도?〉, 《오마이뉴스》 2014년 5월 8일).

앞서서 말한, 적색신호일 때 우회선을 허용하는 체계는 한국에만 있는 신기한 체계다. 교통신호에 대

한 국제협약인 비엔나협약(1968)과도 다르다. 게다가 횡단보도의 보행신호 중 녹색 점멸신호가 녹색신호

보다 긴 것도 한국의 특징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보행자 중 76% 이상이 점멸신호가

불안감을 준다고 응답했다(<보행자 점멸신호

점열시점 조정방안>, 서울경찰청, 2010). 그런

데도 짧으면 4초, 길어야 7초 정도의 녹색

신호를 주는 것이 한국 보행신호의 규정이

다. 나머진 보행 길이 대비 초당 1.2 미터를

산술적으로 계산한 점멸신호를 준다. 그러

다보니 신호가 바뀌자마자 신호등이 깜박이는 곳이 많고, 보행자와 자동차가 신호를 오독하고 엉키는 것

은 물론, 자동차 신호는 바뀌지도 않았는데 횡단보도 신호는 끝나고 만다.

그렇다면 보행자 중심의 도로는 어떻게 가능할까. 기본적으로 운전자에 대해 ‘자동차를 탄 보행자’라

는 관점을 갖고 법령구조를 바꿔야 한다. 횡단보도 역시 보행자가 배타적인 권리를 지닌 곳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주요 도로 외에는 횡단보도의 신호를 보행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가 마련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주요 도로에 대한 정책을 경찰청이 아니라 지방정부

가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 경찰은 보행자 보호에 걸맞는 기구가 아니다. 보행자의 눈높이가 정책에 개입

할 수 있는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말로만 보행친화도시라고 떠들어 봤자 소용없다. 정작 우리의 도로는

여전히 자동차의 것이다.

한국의 횡단보도는 녹색점멸신호가 녹색

신호보다 길다. 짧으면 4초, 길어야 7초

정도의 녹색신호를 주는 것이 보행신호의

규정이다. 그러다보니 자동차 신호가 바

뀌지도 전에 보행신호는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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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로보는한국언론

‘업계 1위’신문도 굴복시키는 삼성의 힘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가끔 권력에 도전하고, 권력과 맞서 싸우는 언론도 있다. 하지만 호기롭게 칼을 빼

들었던 언론도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업계 1위’ 삼성과 ‘업계 1위’ 전자신문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7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자신문은 지난 3월 17일 21면에 <출

시 코앞 갤럭시S5, 카메라 렌즈 수율 잡기에 안간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

다. 전자신문은 이 기사에서 “삼성전자 갤럭시S5의 카메라 렌즈 수율이 20~30%

에 불과해 출시 예정인 갤럭시S5의 생산에 차질이 생길 공산이 크고 출시 계획을

미뤄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108

3월 17일자 전자신문 21면

Page 111: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6개월의 싸움, 정정보도 예문까지 정해주는 삼성전자

갤럭시S5 출시를 앞두고 나온 이 기사에 삼성전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삼성전자는 기사의 내용

이 사실과 다르다며 정정보도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1면 중앙3단’에 정정보도 예문까지 정해줬

다. “전자신문은 사실과 다른 내용의 기사로 갤럭시S5 출시를 앞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관련 협력사는

물론 독자분들께 피해를 입히게 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전자신문은 이 같은 태도에 발끈했는지 삼성전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후속기사까지

쏟아냈다. 전자신문 3월 28일 19면 기사 <심기 불편하다고 ‘사실’이 ‘소설’됩니까>가 대표 사례다.

“‘기자들이 소설을 쓴다’, ‘사실무근이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최근 삼성전자 경영

진들이 기자들과 만나서 하는 쓴 소리다. 가끔씩 터무니없는 루머성 기사로 마음 고생하는 심정은 이

해한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불편한 내용을 다룬다고 싸잡아 언론을 깎아 내리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다.” 삼성전자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소송으로 대응했다. 언론중재위원회도 거치지 않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해당 기

사를 쓴 이형수 기자와 전자신문을 상대로 3억 400만 원을 걸었다.

전자신문도 가만있지 않았다. 전자신문은 4월 7일 ‘알립니다’에서 “자사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썼다고 해당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억대 소송을 거는 행위는 충분히 ‘언론 길

들이기’로 비춰질 만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전자신문과 삼성전자의 전면전에 언론계

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과연 삼성전자와

전면전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

자신문의 보도 직전인 3월 6일 디지털타임스

는 “삼성전자가 갤럭시S5 130만대를 전량폐

기했다”고 보도했다가 정정보도 요청을 받아

기사를 삭제하고 다음날 1면에 정정보도를 게재했다. 물론 ‘팩트’가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

사로 인해 해당 기자, 부장, 편집국장까지 줄줄이 징계를 받았다. 삼성 관련된 오보가 아니었어도 이

렇게 줄줄이 징계를 받았을까? 이런 상황이었기에 전자신문의 싸움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어진 광고 중단… 결국 고개 숙인 전자신문

정정보도 요구와 소송, 다음은 광고 중단이었다. 3월 27일 이후 전자신문에는 단 하나의 삼성 광고

삶과 문화 109

전자신문과 삼성전자의 전면전에 언론

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과연 삼성

전자와 전면전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Page 112: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도 실리지 않았다. 삼성전자 계열사와 협력사 등이 잇따라 전자신문 구독을 중단했다. 당연히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싸움은 전자신문의 패배로 끝났

다. 전자신문은 지난 9월 26일 ‘알립니

다’를 통해 “갤럭시S5에 적용된 카메라

렌즈의 수율은 보도 시점 당시 양산을

시작하는 데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고,

이에 따라 갤럭시S5 생산도 당초 계획대로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실상 오보임을 인정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오보 인정을 기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사를 쓴 이형수 기자는 오보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기자들은 기수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기자의 동기인 21기 기자들은 성명을 통해 “삼성전

자의 부당한 언론 압박에 맞서 싸우자는 대의를 외치며 후배들의 결속을 요구한 편집국장은 오보를

인정하는 수준의 합의문을 결과로 내놓았다.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무엇을 위해 삼성전자와 싸웠고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물었다.

전자신문 입장에서 얻은 것은 있다. 삼성전자는 전자신문과 이형수 기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3

억 4000만원 소송을 취하했다. 하지만 기자 당사자도 인정할 수 없는 ‘오보 인정’으로 인해 전자신문

의 신뢰도는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쪽팔린’ 상황.

더욱 ‘쪽팔린’ 것은 삼성에게 고개 숙인 전자신문의 칼이 내부 구성원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신문 인사총무팀은 성명서를 쓴 기자들에게 취업규칙 위반이라며 ‘인사위원회 회부 방침’을 밝

혔다. 회사의 허가 없이 인쇄물 또는 전단의 배포, 첩부와 집회, 연설 시위 등의 행위를 했다는 이유다.

110

정정보도 요구와 소송, 다음은 광고 중단이

었다. 3월 27일 이후 전자신문에는 단 하나

의 삼성 광고도 실리지 않았다.

삼성전자 블로그 ‘삼성 투모로우’ 갈무리

Page 113: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언론에게 ‘광고’는 무엇인가

전자신문 사태는 언론에게 ‘광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삼성그룹 광고가 끊긴 6개월은

마치 ‘서울의 봄’ 같은 해방기

였다. 전자신문은 4월부터 삼

성전자 관련 기획기사들을 집

중적으로 쏟아냈다. “연봉

50% 성과 잔치할 때 협력사는

마른 수건만 짰다”, “하루 판매

량 7000대가 대박이라고?”,

“삼성전자, 비판 받아들일 때 진정한 발전 가능”, “제조 생태계 벼랑 내모는 ‘삼성 스마트폰’”, “삼성,

협력사에 횡포 그만둬야 각계 질타” 다른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 기간 동안 전자신문에는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와 반올림 이야기,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의

파업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도 내보냈고 후계구도

를 집중분석하는 기사도 있었다. “웃는 낯의 이 젊은 상속자는 한국의 희망이자, 동시에 최대 골칫거

리다”는 블룸버그 기사까지 인용해서 보도했다.

아마 삼성은 다시 전자신문에 대한 광고를 재개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해방기간 동안 보여줬던 기

사는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자신문 보도가 진짜 오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었던 오보 여부가 여러 가지 유·무형의 압박으로 인해 ‘자진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

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전자신문과의 전쟁 중에 공식 블로그 ‘삼성 투모로우’를 통해 전자신문을 비판했다.

“진정한 언론은 정정보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사를 무기화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삼성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진정한 1등 기업은 비판 보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광고를 무기화하지 않습니다.”

삶과 문화 111

광고가 끊긴 6개월은 마치 ‘서울의 봄’ 같은 해방기

였다. 전자신문은 4월부터 삼성전자 관련 기획기사

를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백혈병 문제와 반올림, 삼

성전자서비스노동조합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Page 114: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 11)

112

박정근은 사진가이자 음악기획자이다. 조광사진관의 주인장이고, 십대 시절부터 마니아 취향의 록 음

악을 제작해온 사람이다. 또한 그는 노동당의 당원이다. 사회당에 입당한 후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을

통해 노동당의 당원으로 당적을 이어왔다. 6·4지방선거 때에는 여러 후보자들의 선거홍보물 사진촬영

을 맡기도 했다.

또한 박정근은 유명인사이다. ‘우리민족끼리’의 내용들을 리트윗했다가,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며 국

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화제를 뿌렸다. ‘한국적 상황’이 낳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2012년 초에

구속된 후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 그리고 2014년 8월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박정근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례적으로 이번에는 문답 형식의 글을 싣는다. 성실한 말들을 육성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철거 잔해들을 갖고 놀던 변두리소년, 비주류 음악과 낡은 사진기와 함께

나도원 : 성장한 동네와 부모님, 특히 사진관을 운영하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청소년 시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중요하겠죠”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박정근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사진제공 : 박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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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3

절의 학교생활과 관심사도 궁금합

니다.

박정근 : 서울에서 나고 자랐습

니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아주 어

렸을 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개발

이 막 시작될 무렵의 길음뉴타운

근처, 정확히는 정릉과 돈암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고가도로가 없어지는 모습도 보고, 집들이 서

서히 철거되는 모습도 많이 봤던 것 같네요. 갖고 놀던 것들도 철거 이후의 잔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도 그렇게 철거가 예정된 집 중 하나였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서 광진구 근처로

이사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냈고, 지금은 강동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운영하는 사진관은 사대문

안에 있지만, 따져보면 단 한 번도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활동적인 분이어서 젊어서는 스포츠사진을 주로 찍고 다니셨어요. 사진관을 운영하

셨어도 밖에서 찍는 사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놀러간 곳이 굉장히 많아요. 없는 살림에 스

키, 수상스키, 승마, 이것저것 시켜보려고 하셨지만 워낙 제 반응이 시큰둥한 탓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서부터는 별로 강요를 안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운동은 잘 안 해도 밖에 나돌아 다니는 건 좋아한다는 걸

아버지가 아셔서, 이젠 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바뀐 거죠.

어렸을 땐 조용했지만 좀 겉도는 편이었어요. 남들 안 하는 게임하고. 조용히 어디 나가고. 고집은 센

편이라 한 번 꽂힌 건 계속 파는 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게임이랑 인터넷이었죠. 학교생활은 별 어려

움이 없었어요.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싸우러 돌아다니거나 이런 건 없었어요. 너무 조용한 편도 아니었

고, 적당히 말도 안 듣고, 웃긴 구석이 있는 친구라고 여겼는지 자연스럽게 지냈죠. 록/메탈 음악을 좋아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게임을 어느 정도 하는 편이어서요. 중·고등학교 때

는 게임 잘하는 애들이 아무래도 인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도원 : 음악에는 언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고등학생 시절부터 인디레이블들 중에서도 비주류라

할 수 있는 ‘비싼트로피 레코드’를 운영하셨지요.

박정근 : 원래 이문세 같은 가요를 좋아했어요. 메탈리카(Metallica)나 메가데스(Megadeth)정도의 메탈

밴드 음악을 가끔 듣긴 했지만, 모르는 음악까지 찾아 듣던 편은 아니었어요. 이때쯤에 ‘밤섬해적단’의 권

용만이 만화를 그리고 있었어요. 삼류만화라고, 연습장에 끄적끄적 그리는 만화였죠. 거기에 메탈밴드들

이 조금 나와요. 카니발 콥스(Cannibal Corpse)였나, 이런 것들을 직접 찾아보기엔 인터넷만한 게 없었죠.

그렇게 조금 더 강한 음악을 파고들다보니 나중엔 같은 반 여자애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음반을

생일선물로 주고, 인터넷에서 음악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만들어진 것이 ‘비싼트로피 레코드’

였어요.

개발이 막 시작될 무렵의 길음뉴타운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고가도로가 없어지고, 집들이 서

서히 철거되는 모습도 많이 봤어요. 따져보면 단 한

번도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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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원 : 그러면 사진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박정근 : ‘비싼트로피’에 한창 열심이었는데, 왼쪽 다리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오래 입원했어요. 레

이블을 접게 되었죠. 큰 수술도 몇 번 하고 장애판정을 받았어요. 병실에 누워서 스무 살을 맞았고, 고3일

때도 대학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었는데, 몸져누워있으니 살 길이 막막하긴 하겠다 싶더라고요. 어머니가

‘요즘 사회복지사가 괜찮다더라’ 하셔서 양호실에서 대충 수능 쳐서 나온 점수로 서울의 2년제 사회복지

과에 들어갔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1년 다니고 때려치웠어요.

그때 마침 일본에서 살고 계시는 고모가 저희 집에 잠깐 묵게 되었는데,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 하시

기에 ‘그냥 장롱에 있는 남는 카메라 한 대 주시라’ 해서 받은 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었어요. 마

침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시니 조명

이며 카메라며 삼각대며 없는 게 없

었죠. 덕분에 사진을 금방 익히게

되었고, 레이소다라는 사진 홈페이

지에 이것저것 올리다보니 또 이 사

람 저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렇게

먹고살 길을 사진으로 정하자 했어

요. 집에서 꽤 반대를 하시다가 제가 고집을 부리니 이렇게 살게 놔두셨고, 한동안 이 스튜디오 저 스튜디

오 다니면서 일을 꽤 많이 배웠습니다.

이력서에 쓸 게 많아질 때 쯤 아버지가 이제 사진관에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전까지 다

닌 광고스튜디오에 사진관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몇 달 쉬는 동안 만난 게 바로 두리반이에요.

두리반을 찾고 트위터를 즐기던 청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시킨 국가

나도원 : 자립음악생산조합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지금은 그들과 조광사진관 겸 자립본

부라는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요.

박정근 : 자립음악생산조합은 두리반에서 만나게 되었고, 마침 당시 구성원들 대부분이 제가 오래 알던

친구들 또는 이미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사람들이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처음엔 레이블을 운

영했던 박정근보다는 사진 찍는 박정근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들이 공연을 하거나 사진이 필요할 때 함께

할 때가 많았죠.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재판이나 선고가 있으면 항상

SNS의 공식계정에 공지를 올려주었어요.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면서 제작자/기획자로서도 조합과 만날 기

회가 많아졌고,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조합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서로 만날 시간

이 많아졌고, 음반제작지원도 조합 차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서로의 고민도 대충은 알고 있었죠.

그러던 중 사진관을 옮기게 되었는데, 발품을 팔다가 혼자 쓰기엔 좀 넓다 싶은 공간을 만나서 파트너

일본에서 살고 계시는 고모가 저희 집에 잠깐 묵게

되었는데,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 하시기에 ‘그냥

장롱에 있는 남는 카메라 한 대 주시라’ 해서 받은

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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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떠올리다보니 마침 자립음악생산

조합 역시 공연장이나 사무공간이 필

요했던 상황이어서 지금처럼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어요. 개업식 때 사람이

미어터져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짜파

게티를 하도 많이 끓이는 바람에 화장

실에서 그 잔해를 제가 치워야했던 거

랑, 다들 서툴렀던지라 한창 공사할 때

조합원들이랑 저랑 신나 냄새를 엄청

맡아가면서 장판바닥에 남은 본드를

지웠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나도원 : 강동구 암사동에서 조광

사진관의 가업을 잇자마자 구속되셨

는데, 가족의 걱정이 심했겠습니다.

박정근 : 어머니나 아버지나 이런

일을 주위에서 본 적도 없었고, 주위에

운동권이나 수감된 적이 있는 친척들

도 전혀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죠. 삼청

교육대 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하셨대요. 눈앞에 딱 보이는 압수수색 영장에 떡하니 국가보안법 위반이

라고 쓰여 있으니 어머니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시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트위터에 먼저 말한 덕에 두리반에서, 명동에서, 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가게로 찾아와줬고, (불행한 일이

지만)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거나 겪은 적이 있던 친구들이 부모님에게 설명을 굉장히

잘 해줬어요. 일단은 두 분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 지나 저를 애지중

지해주셨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땐 정말 힘든 가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구속이 되자,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제가 일찍 석방이 되길 바라시는 마음에 제게 재판부에 반성문을

써서 보내보아라 등의 말씀을 하셨어요. 부모님들은 정말 모르니까요. 변호사 두 분께서 제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부모님에게 잘 설명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재판을 진행하면서 두 분 역시 이 사건을 이해하시

게 되었고, 제가 그동안 했던 일들, 가령 두리반에서의 활동이나 레이블 활동도 이해를 하시게 되었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물론 그렇다고 부모님이 이전에는 제가 하는 일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조광사진관과 자립본부의 개업식을 알리는 포스터 (사진 : 조광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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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원 : 그렇게 보안사범이 되었다

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40일이나 구

치소 생활을 하셨고요.

박정근 : 이것저것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많이 쌓여있었어요. 일단은 시

간이 지나길 기다렸죠. 술은 술대로 늘

고 걱정은 걱정대로 늘고. 내가 어려운

걸 친구들도 알고 있으니 이해 해줬지

만, 지금 생각해보면 민폐였던 것도 한

둘이 아니고. 물론 지금은 많이 괜찮아

졌어요. 술도 약도 안 먹고. 아직도 약

먹느냐 물어보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약은 구치소에서 끊었어요. 나름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술도 좀 줄여

보고 해서 지금은 사건 진행될 때보다

살도 좀 빠졌고요. 다만,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을 전부 이 송사에 쏟아 부

은 꼴이잖아요. 이 때가 중요한 때인

것 같은데, 이런 큰 일이 끝나고 나니 실은 허무감을 굉장히 많이 느껴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

지?’ 이런 고민이요. 저도 그렇고 이런 공안 관련된 사건의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들, 이 오랜 시간을 쏟

아 부었지만 결과가 좋든 나쁘든 결국에 남는 커다란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친구가 없어서 시작한 당 활동? 연대와 사진으로!

나도원 : 당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실래요?

박정근 : 간단해요. 친구가 없어서 하게 된 거예요. 원래는 사회당에 입당했고, 그 때에는 ‘두리반’에

있었죠. 강의도 많았고, 농담도 많았고, 사건도 많았고, 무엇보다 진보정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까 자연스레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도 꽤 많았어요. 물론 두리반 이전

에도 집회에 가끔 나가긴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요. 별로 당 활동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없었고. 강령을

천천히 읽어보고 입당했습니다. 사회당 시절엔 포이동에 자주 갔어요. 포이동은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

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애당초 관심이 많았던 곳이었는데 기회가 닿아서 자주 오가곤 했어요. 한

6차 공판이 끝난 후 재판자료를 들고 나오는 박정근 씨(사진 : 노동당 서울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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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공업 희망버스 같은 노동자

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당에 입당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쪽이었

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구속이

되고 석방이 된 날 사회당과 진

보신당이 통합을 했죠.

나도원 : 6·4지방선거 때에

노동당 후보들의 사진들을 찍어

주셨습니다.

박정근 : 생각보다 많은 사람

들이 지역활동을 오랫동안 열심

히 하고 있었다는 걸 많이 느꼈

어요. 증명사진 찍을 때를 빼면,

이렇게 조명 놓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힐 일이 흔치 않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조금 더 시간이 많

았다면 좀 더 신경 써서 찍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각자 활동하시는 분야에 어울리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걸 사진가가 잘 끌어냈는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성심성의껏 찍어보고 싶습니다. 구태의연한 선거포스터랑은 좀 다른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

각을 많이 했어요. 기술만 좋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입니다.

박정근은 최근 발표된 ‘단편선과 선원들’의 《동물》(2014)의 산파이자 음반에 담긴 멤버들의 사진들을

찍은 장본인이다(자립음악가 단편선 또한 당원이다). 보기에 따라선 기괴한 사진들인데, 비가 쏟아지고 날은

어둡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매끄러운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생각과 달리 거친 사진들이 나왔지만 반응은 오히려 괜찮다. 그는 이 음반에 대하여 “굉장

히 섬세하고 또렷한 음악”이자 “좋은 작업자들이 모여 만든 결과물”이라며 자랑 겸 칭찬을 이어갔다.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6회

박정근 당원 편 듣기

http://www.podbbang.com/ch/1858

최근에 앨범 《동물》을 발표한 단편선과 선원들 (사진 : 박정근)

박정근 당원의 인터뷰 전문은 노동당

<정치신문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laborparty.kr/14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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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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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양솔규기획조정실 국장

당원모임을 하면 어린 영유아를 데리고 오는 당원들이 가끔 계시다. 얼마 전에도 어느 당원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원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맑은 눈망울이 얼마나 깊은지, 인형 같은 속눈썹이 얼마

나 예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친화적인 사

회를 물려주는 것은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거 못지않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 다음 세대가

자기 삶과 사회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마침 창작과비평 출판사에서 창비아동문고 발간을 시작했고, 이 문고를 통해 국가주의에 찌든 위인

전이나 틀에 박힌 남녀성역할과 계급차별적인 사고, 농촌에 대한 차별적 사고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

었다.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나 이오덕 선생의 《개구리 울던 마을》 같은 동화가 바로 그것이다. 2014

년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책을 권해 줄까?

《무지개 욕심 괴물》 김규정 글·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3월 / 12,000원

탈핵 세대를 위한 준비!

이 책은 부산 광안리에 살고 있는 저자가 자신의 아이와 이 땅의 아

이들을 위해 쓰고 그린 탈핵 이야기이다. 주인공 라울이 ‘욕심 발전

소’(핵 발전소)에서 나온 ‘욕심 괴물’(방사능)과 싸우는 이야기를 그렸

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 이 괴물과 라울

의 한판 승부는 어떻게 될까? 이 책의 뒷부분에는 동화를 읽은 아이

들에게 엄마 아빠가 부연설명을 할 수 있도록 짧은 탈핵 관련 문답

이 달려 있다. 짧은 그림책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은 물론 유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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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9

《당신은 어느 편이죠?》 조지 엘라 라이온 글, 크리스토퍼 카디낼 그림 / 고인돌 / 2013년12월 / 13,000원

정의를 위해 싸우는 아빠와 엄마!

이 책은 1931년 미국 켄터키 주의 할란 카운티에서 벌어진 광산노동

자들의 투쟁 실화를 담고 있다. 탄광회사의 탐욕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아빠를 해하기 위해 회사가 고용한 총잡이들이 집으로 몰려

와 총을 난사한다. 이에 엄마인 플로렌스 리스는 민요에 가사를 붙

여 저항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후 전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에서 불리게 된다. 이 유명한 노래는, 유튜브에서 검색(which side

are you on?)해보면 피트 시거의 음성, 그리고 플로렌스 리스의 실

제 음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아빠 샘 리스와 노랫말을 지은 엄마

플로렌스 리스는 이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올해 1월 작고한 가수 피

트 시거(PeteSeeger)와 함께 테네시 주에서 교육센터 활동도 했다.

이 그림책의 그림은 멕시코 출신의 만화가이자 벽화가 크리스토퍼

카디낼이 맡았다. 벽화가 출신답게 판화풍의 시원시원한 그림이 감

동을 더한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비유해 놨다. 《한국탈핵》으로 유명한 김

익중 교수가 감수를 했다.

《생쥐와 산》 안토니오 그람시 글, 마르코 로젠제티 그림 / 계수나무 / 2013년6월 / 11,000원

옥중에서 보내는 사랑노래!

이 동화책의 저자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이

다. 이 동화는 사실 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모은 책, 《감옥에서

보낸 편지》(2000년, 민음사)에 원 글이 번역(1931년 6월1일자 편지)되

어 있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삼림벌채로 황폐화된 산을 쥐가 복

구하는 과정을 그렸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그람시의 고향인 이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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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도 옆 사르디니아 섬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용은

심오하지 않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

다. 대신, 보다 풍부한 부모들의 해설이 덧붙여져야 할 것 같다. 난

관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도 있

고,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릴 수도 있겠다. 이 글은

푸쉬킨에 빠져들며 문학적 재능을 보이고 있는 아들 델리오를 위해

그람시가 쓴 이야기를 토대로 했다. 그러나 그림책의 반은 그림이

다. 마르코 로젠제티의 파스텔톤의 그림은 아름답고 평온하다.

《흑설공주 이야기》 바바라 G. 워커 /뜨인돌 / 2002년8월 / 7,500원

세상의 모든 딸, 아니 아들들을 위한 반전동화!

이 책의 저자 바바라 G. 워커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공주가 결혼하여 잘 살았다더라’는 동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동화들은 겉모습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결국 여성을 외모

로만 평가하는 등,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내재화하게 만든다. 이 책

은 우리가 그동안 자라면서 익숙하게 들어왔던 동화를 ‘여성의 시

각’으로 새로 꾸몄다. 예를 들어 〈흑설공주〉는 계모와 흑설공주를

대립적 관계로 두지 않고 ‘헌터 경’에 맞선 우정 어린 관계로 그린

다. 또한 〈막내 인어공주〉에서는 또 다른 공주를 등장시켜 자기 삶

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공주의 상을 제시한다. 이 반전동화 시리즈

는 《흑설공주 이야기2》로 이어지며, 보다 저학년들을 위해 《어린이

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1, 2》로도 나와 있다. 이 책은 초등학교 고

학년이나 중학생들이 읽기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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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21

■ 더 읽을만한 책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 이진경·신지영/ 그린비/ 2012년8월 /20,000원

•《일본 노동운동의 새로운 도전》 / 기노시타 다케오 / 2011년7월 / 15,000원 / 이 책의 5장과 6장

에는 프리터를 중심으로 기업횡단적, 개인가입 유니온 건설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프레카리아트》 / 아마미야 가린 / 미지북스 / 2011년7월 / 15,000원

•《분배의 재구성》 / 브루스 액커만 외 / 나눔의집 / 2010년 2월 / 18,000원 / 이 책은 기본소득에

대한 논쟁과 분석을 다루고 있다.

《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 백남호 글·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1월 / 10,000원

일하는 엄마 아빠를 감싸주는 따뜻한 그림책!

어릴 적 길에서 만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부끄러워 도망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엄마와 아빠처럼 살지 않아야 된다고 입술

굳게 깨물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세상의 많은 동화와 드라마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평범한 일하는 사람들을 하찮게 그린다. 하지만

막상 우리 옆에 있는 미용사가 없다면, 짜장면 배달이 안 된다면, 아

무도 배추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가을전어를 잡는 어부가 없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이 책은 평범하게 ‘일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그린다. 총 16가지

일을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과 함께, 그와 관련된 물건들을 설명하

고, 거기에 더해 그 직업과 관련해 엄마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과

제를 내준다. 예를 들면, 과일가게를 하는 엄마 아빠의 일을 소개하

면서 수박화채 만들기나 과일주스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이다.

이 그림책은 우리 엄마 아빠를 세상의 예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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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ie, Nikita, Gloria, Roxanne, Layla…. 이 이름들의 공통점으로 무엇이 떠오르나요? 고개만 갸

우뚱하게 된다면 좀 더 힌트를 주겠습니다. 희야, 스잔, 경아, 옥경이…. 이제 모두 아셨으리라. 특정인을

노래한 곡명이고, 곡명 자체가 노래 속 주인공의 이름임을. 공교롭게도 예를 든 노래의 제목이 모두 여자

이름입니다. 그리고 곡의 색깔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좀

더 시야를 좁혀 보면, 민중가요에도 특정한 사람을 노래한 노래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제목인 노래

는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민중가요 속 주인공은 대부분이 남자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

린 이들입니다. 이쯤이면 오늘 소개할 노래가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임을 짐작하셨으리라.

나도 모르게 부르던 노래

서두를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건, 이 노래를 꼭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첫말을 꺼내

기도 전에 제풀에 마음이 저리기 때문입니다. 5월의 어느 날, 어떤 사진 한 장을 본 순간부터 쭉 나도 모르

게 이 노래를 중얼거렸고, 그 날 이후 가장 소개하고 싶어진 노래입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한 장

의 사진을. 10대 남학생들이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단체 사진. 그다지 특별할 것

도 없는 그 사진을 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슬픔을 느꼈던 이유는, 그

사진이 그들 중 단 두 명만이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단원고 어느 반 학생들의 단체사진이었기 때문입

니다.

그 무렵 택시를 탔다가 “죽은 학생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있었을 수도 있고 대통령이 나왔을 수도 있는

데…”라며 애석해 하는 택시기사의 말에 확 짜증을 내고 내려버린 일이 있습니다.

이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들이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업적 때문이 아니라, 보통의 삶을 잃어버린 그 자

체가 안타까운 건데…. 공부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짜증 낼 수도 없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픈 가슴을 부

여잡으며 울부짖을 수도 없고, 스펙을 쌓기 위해 얼굴이 노래질 때까지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공부할 기

노 래 의 꿈

조성만민정연 문화기획자,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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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23

회도 없고, 취업을 위해 수십 군데 이력서를 내야하는 좌절을 맛보지도 못하게 된 그들. 그들이 잃어버린

삶은 그다지 찬란하거나 달콤하지 않은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론 불안하고, 지루한 삶에 지치기도

하고, 그러다 작은 기쁨에 삶의 목적을 찾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미래가 비루할 게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오롯이 살아 냈어야 할 삶이었습니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분노에 나도 모르게 부르

게 된 노래…. 〈조성만〉입니다.

<조성만〉은 발표 직후부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주 들을 수 없던 노래입니다. 앞서 말한, 그

사라진 평범한 삶을 그대로 노래하는 이 노래만 떠올리면 가슴이 저미는 듯 먹먹함이 가득 차오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5월부터 소개하고 싶었지만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

고 행동하여 세상을 바꾸자는 마음을 담아 꽃다지가 진행하고 있는 ‘꽃다지 거리콘서트 <침묵은 똥이

다!>’의 세 번째 공연을 안산에서 치르고 돌아오던 길에서 비로소 더는 미루지 말고 노래 〈조성만〉을 소개

하자는 결심이 섰습니다.

살아서 사랑하기를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30분.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한 청년이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 밝혀내라. 남북 올림픽 공동참여하자”는 구호를 외치

며 할복 투신했습니다. 그가 당시 서울대 휴학생이던 조성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988년을 굴렁쇠소년의 꿈으로 상징되는 서울올림픽으로 기억하겠지요. 그러나 1988

년의 실제 모습은 텔레비전 화면에 남아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올림픽 때

문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 스러져가는 집을 감추기 위한 담벼락이 설치되었습니

다. 그리고 또, 스스로 목숨을 내던질 수밖에 없던 청춘이 있었습니다.

故 조성만과 명동성당 청년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정윤경은 1999년에 발표한 솔로 1집 음반

《TemporaryxxxFiles》에 그를 기억하며 만든 노래를 실었습니다. 이 노래에는 추모곡 특유의 장엄함이

나 엄숙함이 없습니다. 잔잔한 쓰리 핑거링 기타의 선율에 얹힌 정윤경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합니다.

선배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며 느꼈을 암담함도, 애절함도 표현하려 하지 않습니다. 분노 어린 절규를

설령 그들의 미래가 비루할 게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오롯이 살아 냈어야 할 삶이었습니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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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으로 지를 만도 한데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불렀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노래. 그래서 듣는 이는 오히려 더욱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슬퍼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감정을 노래에 실을 수 있도록 하는 정윤경 음악의 미학이 잘 드러난 노래 중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원고를 핑계 삼아 노래를 만들고 부른 정윤경 씨에게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

히 듣고 싶었습니다. 슬픈 질문을 하겠다고 미리부터 엄포를 놓았지만, ‘조성만’ 이름 석 자가 나오자마자

그의 낯빛이 변해버렸습니다. 더는 묻기가 힘들었습니다. 언젠가 SNS에 노래 〈조성만〉을 올렸을 때, 밤

새 술잔을 기울이며 울었다던 그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했다는 자책은 이미 늦어버린 순간. 후회

가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놓인 소주잔만 멍하니 내려다봤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후에야 그

는 명동성당 청년회 시절의 이야기, 장례식 때문에 주교단과 싸운 이야기, 조성만의 죽음 이후 명동성당

측이 청년회 활동과 공간을 막으려 했던 이야기…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자료집을 만들어 다른 이의 이름

으로 발표했던 사연 등을 두서없이 꺼내놓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이 사람이 이래서 〈또 친구에게〉 같은 노래를 만들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저 빌딩에 불을 지를까. 아니면 저 자동차 유릴 깨볼까. 아니면 술에 취한

채로 헤매다 아무하고나 싸움박질이나 해볼까. 아니면 세종로 큰길가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다 미칠까.

아니면 벌거벗은 채로 헤매다 아무렇게나 웃음거리나 돼볼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노랫말 속의 행동을 거의 다 해봤다는 정윤경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감독이 미치셨군

요~”라고 눙치며 대꾸했는데, 가까운 사람을 예기치 않게 잃어본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과

행동을 조성만을 어렵게 이야기하던 그 날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 때문이다》. 조성만 평전의 제목입니다. 1988년 뜨겁던 여름 날, 평전의 제목처럼 조성만은 세상

을 너무나 사랑해서 스스로 떠났을 겁니다. 2014년 봄의 끝자락에 떠난, 벚나무 아래의 소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채 모르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 목숨이 아까워, 여전히 살아남은 나는 조성만을 열사라 부

르지 못하겠습니다. 벚나무 아래의 소년들이 평생 잊히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사랑 때문일 겁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목숨이 사랑의 증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목숨을 타의에 의

해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아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싸워

야겠지요.

지금 살아있는 우리, 목숨이 사랑의 증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아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싸워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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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25

조성만

정윤경 작사·작곡·노래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늙어가는 게 인생이라는데

그댄 그 고운 청춘의 노래 채 부르기 전에 다신 못 올 곳으로

그 푸른 계절에 떠났지 미친 세상 모진 바람 안고

그대 떠났어도 세월은 멈출 생각 없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흘러만 갔고

갈라진 건 갈라진 채로 비틀어진 건 더 비틀어진 채로

여기까지 왔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대 너무 서러워 마요 어차피 인생이 그런 걸

떠나간 사람 지나간 일일랑 그저 세월에 묻혀 가는 걸

대한문에서 열린 꽃다지 거리콘서트 <침묵은 똥이다>의 공연 모습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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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보자> 개봉을 계기로 희대의 과학 사기극인 황우석 사태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2005년의 그

엄청난 소동으로부터 벌써 9년이다. “국가적 영웅”에서 “추악한 사기꾼”으로 몰락한 황우석 씨는 요즘 왕

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0년 황우석의 수암생명공학연구원 기공식에는 국회의원 등 수천 명이 몰려들

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2004년 <사이언스>의 속보는 황우석 사태라는 롤러코스터의 출발신호였다. 세

계 학계가 놀랄만한 뉴스였으되 대한민국의 열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우석이라는 이름은 누구도 건

드릴 수 없는 성역이자 신드롬이었다. 그 분의 핵치환 기술은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국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민족적 우월성의 상징이 되었다. 황우석의 성과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었고, 여러 측면에

서 문제제기가 흘러나왔지만 곧바로 어마어마한 비난과 협박에 직면했다. ‘사소한 트집으로 국민적 영웅

의 발목을 잡지 마라’, ‘차세대 성장동력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논리였다.

여기엔 소위 진보개혁세력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마이뉴스>의 대표적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던 유창선

씨는 2005년 12월 5일 ‘황우석 몰아세운 일그러진 진보주의’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황 교수 지키기

에 나서는 것은 주류언론이고, 황우석이라는 ‘우상’을 ‘이성’으로 깨뜨리는 것은 비주류 언론이라는 식의

발상. 그 같은 발상이 지속되는 한 주류언론과 비주류언론의 위치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비감한

예감마저 들었다.”

유시민 씨는 2005년 12월 7일 전남대학교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PD수첩 프로듀서가 황우석 교수

를 검증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내가 가서 검증하는 것과 똑같다. 기자나 나나 생명공학에 대

해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보건복지위원을 2년이나 했기 때문에 좀 안다. PD수첩이 부당

한 방식으로 과학자를 조지니까 방송국이 흔들흔들하고, 광고 끊어지고 난리 아니냐.”

PD수첩의 강압취재 문제 직후 민주노동당 인터넷매체 <판갈이넷>에 올라온 기사의 제목과 부제는 충

격적이었다. ‘MBC사태, 취재윤리가 아니라 숭미간첩죄가 본질’, ‘숭미-친유대금융자본 반국가 매판세

력을 일망타진하라’ 김어준 씨는 이미 황우석의 논문조작이 명백해진 시점에 이르러서도 집요하게 음모

론을 제기했다. <딴지일보> 2006년 2월 28일 글 ‘새튼의 특허에는 음모가 있다’에서 그는 단언한다. “새

튼의 특허와 그로 인한 어마어마한 이권, 그리고 그 이권을 새튼에게 돌아가게 하고 그 반대급부로 이권

의 일부를 공유하거나 관련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동조, 협조한 세력이 존재한다.”

9년 전 황우석 사태를 취재하면서 가장 뼈아팠던 부분은 (요즘 말로)‘진보의 국뽕’이었다. 성장만능주

의 앞에 진보와 보수도, 좌파도 우파도 없었다. 더 많아지고, 더 커지고,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맹목적 욕망

앞에서 비판적 이성과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던 목소리는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과

연 9년 전 그 때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박권일『88만원 세대』 공동저자

‘진보 국뽕’의 추억편지를접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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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인간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똑같은 참사와 고통이 반복될 테니까

요. … 정치적이지 말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또다시 사랑하는 사

람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청년 활동가 최승원 인터뷰전문은 58~66쪽

<청년 진보정치 열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 한민성 노동당 청년학생위원회 집행위원장

“어느 활동가의 탄생 ”세월호 활동가 최승원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교 열 양솔규 오정심 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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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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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있다면, 녹색기획 ■스포츠, 상품이 되다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2014. 1

1미래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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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호 20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