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과 허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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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Chindia Journal 2011. 3.
김수로왕과허황옥은어떻게 화했을까?
가락국 수로왕이 아유타국 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어떻게 화를 나누었을까? 인도어 을까? 가락
국어 을까? 아니면 제3의 언어 을까? 두 사람 사이
에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
살던 토착인들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지지 않
았으므로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서기 42년에 김해 구지봉에서 발견된 금빛 알에서
아기가 10여일 만에 자라 키가 9척이 되었다. 당시 1척
은 22.3㎝이므로, 2미터쯤 된다. 그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사람이 알 속에서 나올 수도 없고, 10일
만에 성인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수로왕은 전
설상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사람에게 시집온 여
인이 멀리 인도 아유타국 공주라고 삼국유사에 기록
되어 있으니,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임에 틀
림없다.
한(漢)나라와의인연
한국사의 여러 고 국가 시조들은 탄생 과정이 부
분 설화로 기술되고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
서 날아온 말이 두고 간 알에서 태어났고, 신라 김씨
의 조상인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금빛 상자(櫃)에
서 나온 사람이다. 이들은 왜 정상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인류학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
두 이민자로 해석한다. 태생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방인을 통치자로 옹립하는 것이다.
수로왕은 김씨이고 인류 최초의 김씨는 김일제(�
日 )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의하면 김일제
는 전한 무제(武帝) 때(서기전 121년)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이다.
김씨 성은 무제가 일제에게 사성(賜姓)한 것이다. 휴도
왕이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
사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하 다. 한나라에
온 김일제는 기마민족 출신답게 말을 잘 길러서 한나
라의 소원이었던 기마군단을 만들었다. 그 공로로 김
일제는 무제의 측근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투후( 侯,
城의 주인)의 봉작까지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5
에 걸쳐 한나라에서 화를 누렸다. 그러나 전한 말에
일어난 왕망(王莽)의 쿠데타 사건은 김씨 일족에게 재
앙이 되었다. 김씨 족과 왕망은 인척 관계 다.
서기 23년, 왕망이 죽었다. 이후 후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광무제(光武帝)는 왕씨와 김씨 일족을 모두 척결
하 다. 그래서 한나라에 살던 김씨 족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나 한국 역사에 김
씨 성이 등장하 다.
이것이 우연일까? 김수로는 태어난 지 10일 만에 키
가 9척으로 자랐다니까 성인으로 나타난 사람을 뜻한
다. 만일 수로왕이 한나라에 살던 김일제의 후손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미스터리가
쉽게 풀린다. 이 가정은 문정창(文正昌) 씨가 자신의
책《가야사(加耶史)》에서 처음 제기했지만 아직 뚜렷
한 연구 성과는 없다. 수로왕보다 훗날에 신라의 왕이
된 문무왕은 그의 비석에 투후의 후손( 侯之胤)이라
고 밝혔다. 문무왕은 김알지의 후손인 김춘추(太宗武
�王)와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
가야국허황옥과인도 ③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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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가락 김씨와 신라 김
씨의 피를 합친 인물이 바로 문무왕이다. 그런 사람이
투후 즉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신의 혈통을 말한 것
이다.
여기서 씨족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김수
로가 김일제의 후손들과 관련이 없다면 김씨 성을 따
를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락국의국제교류통로보여주는쌍어
앞서 말한 투성( 城)은 한국과 가까운 산둥성에 있
다. 그곳에는 아직도 김씨 성의 인구가 상당수 살고 있
다. 어쩌면 김수로는 1세기까지 한나라에 살던 김씨
족들의 후손일 수 있고 그렇다면 김수로는 가락국 언
어보다 한나라 언어(漢語)가 더 쉬웠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수로의 부인이 된 허황옥은 인도
출신이지만 중국 한나라 시 에 보주(사천성 안악현)
에서 태어서 16세까지 살다 가락국으로 시집 온 사람
이다. 그러니 이 여인도 한어에 능통했을 것이다. 그래
서 그 두 사람의 공통어는 한어이고, 처음 만났을 때에
도 한어로 화했을 것이다.
인도 출신 허황옥이 한국에 도착해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인 연구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다. 2천 년 전에 왕족끼리 한 국제결혼이
라는 점에서다. 그 두 사람은 전설상의
인물들이 아니고 실존 인물들이다. 수로
왕은 흉노의 후손인 김씨들의 후손들과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로 보이고, 허황옥
은 인도계 인물로 인도와 중국 사이를 연
결하는 차마고도(車馬古道)를 통해 교역
하던 상인집단과 함께 황해를 건너 한반
도에 도착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결혼은 흉노계와 인도계의 결합으로 한
국인에게 복잡한 유전인자를 제공한 사
건이 된다.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도 가락국이 있던 김해 지방에
서 한나라 때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발견되고 있으
며, 경남 다호리(茶戶里)에서는 한나라 때 칠기와 각종
문방구가 다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다. 칠기는 중국에
서도 사천성 일 가 명산지이다. 보주는 사천성에 있
다. 이때 가락국의 주요 수출품은 철이었고 수입품은
옷감과 보석류 다. 이들의 유창한 한어는 국제무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가락국과 무역하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쌍어를
신앙의 상징으로 하는 사유세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쌍어문이 지중해 지방에서부터 이란, 인도, 남
중국, 한국, 일본에 걸쳐 무수하게 남아 있다. 가락국
에 쌍어신앙은 인도, 남중국, 한국을 드나들던 상단의
일행이었던 허황옥과 그 일행이 가락국에 전파한 것으
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 뒤에는 이렇게 많은 고
사의 비 이 숨어 있다.
김 병 모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허황옥 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의 저자
전세계각지에서나타나는쌍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