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과 허왕옥

2
김수로왕과 허황옥은 어떻게 대화했을까? 가락국 수로왕이 아유타국 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어떻게 대화를 나누었을까? 인도어였을까? 가락 국어였을까? 아니면 제3 의 언어였을까? 두 사람 사이 에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 살던 토착인들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지지 않 았으므로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서기 42 년에 김해 구지봉에서 발견된 금빛 알에서 아기가 10 여일 만에 자라 키가 9 척이 되었다. 당시 1 22.3 ㎝이므로, 2 미터쯤 된다. 그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사람이 알 속에서 나올 수도 없고, 10 만에 성인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수로왕은 전 설상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사람에게 시집온 여 인이 멀리 인도 아유타국 공주라고 삼국유사에 기록 되어 있으니,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임에 틀 림없다. 한(漢)나라와의 인연 한국사의 여러 고대국가 시조들은 탄생 과정이 대부 분 설화로 기술되고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 서 날아온 말이 두고 간 알에서 태어났고, 신라 김씨 의 조상인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금빛 상자( ) 서 나온 사람이다. 이들은 왜 정상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인류학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 두 이민자로 해석한다. 태생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방인을 통치자로 옹립하는 것이다. 수로왕은 김씨이고 인류 최초의 김씨는 김일제( ) 이다. 반고( 班固) 의 한서( 漢書) 에 의하면 김일제 는 전한 무제( 武帝) ( 서기전 121 )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휴도왕( 休屠王) 의 아들이다. 김씨 성은 무제가 일제에게 사성( 賜姓) 한 것이다. 휴도 왕이 제천금인( 祭天金人), 즉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 사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나라에 온 김일제는 기마민족 출신답게 말을 잘 길러서 한나 라의 소원이었던 기마군단을 만들었다. 그 공로로 김 일제는 무제의 측근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투후( , 城의 주인) 의 봉작까지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5 에 걸쳐 한나라에서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전한 말에 일어난 왕망( 王莽) 의 쿠데타 사건은 김씨 일족에게 재 앙이 되었다. 김씨 족과 왕망은 인척 관계였다. 서기 23 , 왕망이 죽었다. 이후 후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광무제( 光武帝) 는 왕씨와 김씨 일족을 모두 척결 하였다. 그래서 한나라에 살던 김씨 족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로부터 20 년쯤 지나 한국 역사에 김 씨 성이 등장하였다. 이것이 우연일까? 김수로는 태어난 지 10 일 만에 키 9 척으로 자랐다니까 성인으로 나타난 사람을 뜻한 . 만일 수로왕이 한나라에 살던 김일제의 후손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미스터리가 쉽게 풀린다. 이 가정은 문정창( 文正昌) 씨가 자신의 책《가야사( 加耶史) 》에서 처음 제기했지만 아직 뚜렷 한 연구 성과는 없다. 수로왕보다 훗날에 신라의 왕이 된 문무왕은 그의 비석에 투후의 후손( 侯之胤) 이라 고 밝혔다. 문무왕은 김알지의 후손인 김춘추( 太宗武 �王) 와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 가야국 허황옥과 인도 문화

Upload: won-jo-kang

Post on 19-Dec-2015

11 views

Category:

Documents


1 download

DESCRIPTION

가야

TRANSCRIPT

Page 1: 김수로왕과 허왕옥

32 Chindia Journal 2011. 3.

김수로왕과허황옥은어떻게 화했을까?

가락국 수로왕이 아유타국 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어떻게 화를 나누었을까? 인도어 을까? 가락

국어 을까? 아니면 제3의 언어 을까? 두 사람 사이

에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

살던 토착인들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지지 않

았으므로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서기 42년에 김해 구지봉에서 발견된 금빛 알에서

아기가 10여일 만에 자라 키가 9척이 되었다. 당시 1척

은 22.3㎝이므로, 2미터쯤 된다. 그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사람이 알 속에서 나올 수도 없고, 10일

만에 성인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수로왕은 전

설상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사람에게 시집온 여

인이 멀리 인도 아유타국 공주라고 삼국유사에 기록

되어 있으니,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임에 틀

림없다.

한(漢)나라와의인연

한국사의 여러 고 국가 시조들은 탄생 과정이 부

분 설화로 기술되고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

서 날아온 말이 두고 간 알에서 태어났고, 신라 김씨

의 조상인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금빛 상자(櫃)에

서 나온 사람이다. 이들은 왜 정상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인류학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

두 이민자로 해석한다. 태생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방인을 통치자로 옹립하는 것이다.

수로왕은 김씨이고 인류 최초의 김씨는 김일제(�

日 )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의하면 김일제

는 전한 무제(武帝) 때(서기전 121년)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이다.

김씨 성은 무제가 일제에게 사성(賜姓)한 것이다. 휴도

왕이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

사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하 다. 한나라에

온 김일제는 기마민족 출신답게 말을 잘 길러서 한나

라의 소원이었던 기마군단을 만들었다. 그 공로로 김

일제는 무제의 측근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투후( 侯,

城의 주인)의 봉작까지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5

에 걸쳐 한나라에서 화를 누렸다. 그러나 전한 말에

일어난 왕망(王莽)의 쿠데타 사건은 김씨 일족에게 재

앙이 되었다. 김씨 족과 왕망은 인척 관계 다.

서기 23년, 왕망이 죽었다. 이후 후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광무제(光武帝)는 왕씨와 김씨 일족을 모두 척결

하 다. 그래서 한나라에 살던 김씨 족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나 한국 역사에 김

씨 성이 등장하 다.

이것이 우연일까? 김수로는 태어난 지 10일 만에 키

가 9척으로 자랐다니까 성인으로 나타난 사람을 뜻한

다. 만일 수로왕이 한나라에 살던 김일제의 후손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미스터리가

쉽게 풀린다. 이 가정은 문정창(文正昌) 씨가 자신의

책《가야사(加耶史)》에서 처음 제기했지만 아직 뚜렷

한 연구 성과는 없다. 수로왕보다 훗날에 신라의 왕이

된 문무왕은 그의 비석에 투후의 후손( 侯之胤)이라

고 밝혔다. 문무왕은 김알지의 후손인 김춘추(太宗武

�王)와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

가야국허황옥과인도 ③문화

Page 2: 김수로왕과 허왕옥

2011. 3. Chindia Journal 33

IND

IA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가락 김씨와 신라 김

씨의 피를 합친 인물이 바로 문무왕이다. 그런 사람이

투후 즉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신의 혈통을 말한 것

이다.

여기서 씨족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김수

로가 김일제의 후손들과 관련이 없다면 김씨 성을 따

를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락국의국제교류통로보여주는쌍어

앞서 말한 투성( 城)은 한국과 가까운 산둥성에 있

다. 그곳에는 아직도 김씨 성의 인구가 상당수 살고 있

다. 어쩌면 김수로는 1세기까지 한나라에 살던 김씨

족들의 후손일 수 있고 그렇다면 김수로는 가락국 언

어보다 한나라 언어(漢語)가 더 쉬웠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수로의 부인이 된 허황옥은 인도

출신이지만 중국 한나라 시 에 보주(사천성 안악현)

에서 태어서 16세까지 살다 가락국으로 시집 온 사람

이다. 그러니 이 여인도 한어에 능통했을 것이다. 그래

서 그 두 사람의 공통어는 한어이고, 처음 만났을 때에

도 한어로 화했을 것이다.

인도 출신 허황옥이 한국에 도착해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인 연구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다. 2천 년 전에 왕족끼리 한 국제결혼이

라는 점에서다. 그 두 사람은 전설상의

인물들이 아니고 실존 인물들이다. 수로

왕은 흉노의 후손인 김씨들의 후손들과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로 보이고, 허황옥

은 인도계 인물로 인도와 중국 사이를 연

결하는 차마고도(車馬古道)를 통해 교역

하던 상인집단과 함께 황해를 건너 한반

도에 도착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결혼은 흉노계와 인도계의 결합으로 한

국인에게 복잡한 유전인자를 제공한 사

건이 된다.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도 가락국이 있던 김해 지방에

서 한나라 때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발견되고 있으

며, 경남 다호리(茶戶里)에서는 한나라 때 칠기와 각종

문방구가 다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다. 칠기는 중국에

서도 사천성 일 가 명산지이다. 보주는 사천성에 있

다. 이때 가락국의 주요 수출품은 철이었고 수입품은

옷감과 보석류 다. 이들의 유창한 한어는 국제무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가락국과 무역하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쌍어를

신앙의 상징으로 하는 사유세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쌍어문이 지중해 지방에서부터 이란, 인도, 남

중국, 한국, 일본에 걸쳐 무수하게 남아 있다. 가락국

에 쌍어신앙은 인도, 남중국, 한국을 드나들던 상단의

일행이었던 허황옥과 그 일행이 가락국에 전파한 것으

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 뒤에는 이렇게 많은 고

사의 비 이 숨어 있다.

김 병 모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허황옥 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의 저자

전세계각지에서나타나는쌍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