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이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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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민생활 고고 아프리카(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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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이민가는 분들을 위한 생생한 라이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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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이집트 이민기

이집트 이민생활

고고 아프리카(중동)

Page 2: 이집트 이민기

소개글

고생하지 않으면 추억이 되지 않는다. 따라올 수 있을 만큼만 따라하면 된다를 성실히 증명해드립니다.

Page 3: 이집트 이민기

1

2

3

목차

11. 이집트 개요

2a. 이집트의 지리/기후

2b. 이집트의 사회/문화/정치/종교

3c. 이집트의 경제/ 그외

52. 소설같은 여행기

6입국한 날 그 첫날

13둘쨋날 카이로

22셋째날 룩소르

25넷째날 아스완 아부심벨

31다섯째날 아스완

35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36카이로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법

37이집트인들에게 TIP이란

38숙소는 현실적으로 구하라

39본토에서 시나이반도로 가는 법

Page 4: 이집트 이민기

11. 이집트 개요

Page 5: 이집트 이민기

a. 이집트의 지리/기후

이집트의 지리/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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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30도 북위23도. 동북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하는 국가로 지중해와 홍해를 끼고 있다. 가자지구와 리비아 사이에

위치.

이집트의 총 면적은 1백만 1450평방킬로미터.한반도의 약 5배, 뉴멕시코의 3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거나 경작이 가능한 면적은 34,000평방킬로미터, 총면적의 약3%에 불과하다.

이집트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알렉산드리아 일대를 제외하고는 건조한 사막성 기후이며, 카이로 등 본토

의 대부분의 지역 연평균 강우량은 40mm 이내이다.

겨울에는 ‘함신’이라고 불리우는 모래폭풍이 비정기적으로 50일 가량 본토에 불어닥친다. 함신의 위력은 항공기의 이

착륙을 지연시킬 수도 있을 정도이다.

b. 이집트의 사회/문화/정치/종교

1. 이집트 개요 ㆍ 2

Page 6: 이집트 이민기

이집트의 정치/사회/인문(종교,교육)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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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1922년2월28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공화국이며, 1952년7월23일 군부에 의해 주도된 혁명으

로1953년6월 18일 마침내 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29개 지방행정자치구역으로 이루어진 지방분권국가이나

역대와 현재 대통령들의 장기간의 독재정치로 중앙정부에게서 완전히 독립했다고는 볼 수 없다.

군역 – 18세~30세 사이의 남자는 12개월~36개월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인구 – 8천47만 명 (2010년7월 통계)

종교 – 무슬림 90%. 콥틱교 9%, 기타 크리스찬 1%

교육 – 유치부2년,초등교6년,중등교3년,고등교3년,대학

c. 이집트의 경제/ 그외

ㄱ.이집트의 경제(환율)

경제성장률 4.7% (*참고자료 - 2009년도 CIA 보고서)

실업률 9.4%

일인당 GDP U$5900 (*참고자료 - 2009년도 CIA 보고서) GNP $3000 (2010)

주농업생산물 – 면화,쌀,옥수수,밀,콩,과일,채소,물소,양,염소,가금류

주산업생산물(품목) – 직물,여행관련물(업),가공식품,금속,시멘트, 건축관련물(업)

환율 U$1 = 5.4이집션파운드(2010년4월), U$1 = 5.7이집션파운드 (2010년12월)

ㄴ.그외

비자 – 미화$15, 이집트 내 국제공항에서 혹은 국경에서 입국시 받을 수 있다

*입국일 기준 여권 만기일은 정확히 6개월이상 남아있어야 하며, 이스라엘을 출입한 비자스탬프가 찍혀있는 여권의

경우는 이집트 입국이 거부된다

3ㆍ 1. 이집트 개요

Page 7: 이집트 이민기

1. 이집트 개요 ㆍ 4

Page 8: 이집트 이민기

2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9: 이집트 이민기

입국한 날 그 첫날

공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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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이용한 항공편은 오전에 도착하는 카타르항공이었다.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항공편들 중에서 아랍 에미리트는 오

후에 , 대한항공은 밤에 그리고 올림픽항공은 새벽에 도착을 한다. 오전에 도착한만큼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

해하며 기뻐했다. 나는 공항에서 팀을 맞이하였다. 얼마나 주고받은 이멜이 많았던지 실제로 대면하기로는 처음인 J는 왠걸 전

혀 낯설지가 않았을 정도였다. 아주 오랜 친구를 간만에 만난 느낌이랄까.

하지만 팀원 중에 큰 트렁크를 분실한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부득이하게 공항에서 꽤 오랫동안 체류해야했다. 체크해본 결

과 유럽행 항공기에 잘못 실렸다고 했다. 카이로 타운의 우리들의 숙소로 정한 호텔을 입국신고서에 기록하고나서 이집트 담

당책임자인 나와 트렁크를 분실한 팀원은 함께 공항 내 해당항공사 사무실로 쫓아가 항의를 하고,분실물 신고서를 작성하고,

공항 폴리스에 여차저차의 이유들로 리포트를 제출하러 뛰어다녀야 했다. 한 번에 간단히 되는 일도 절대로 없고 새로운 ‘관계

자’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야하는 이상한 나라이지만, 지금 내 곁의 팀원에게 그런 말을 해주어도 위로가 안될줄

알기에 나는 우리들의 항의가 제대로 이 공항관계자들을 움직여주기만을 내심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일 초가 일 분이 되고

십 분이 되었을때 나는 손에 땀을 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팀원들은 워낙 여행을 많이 다녀본 이들이라 그런

지 ‘그럴수도 있지. 이게 첨이 아니야’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어주던지.. 대박이다, 진짜 굉장

한 사람들이군. 만만디로는 중국도 이길 아프리카에서 잔뼈가 굵은 나였기에 왠만한 일에는 감탄도 하지 않는데, 이번 팀은 완

전 내 스타일이 분명하다. 얏호- 멋쟁이들. 이번 투어 굉장히 재밌어질 것만 같은데..? 마침내 우리들을 실은 차량이 공항을 벗

어났을때 나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6

Page 10: 이집트 이민기

동굴교회

2 동굴교회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진입하는 길은 공항부터 아주 잘 포장된 도로 덕분에 씽씽…달려야 마땅했으나 교통체증이라는 고질

병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다. 말 그대로 씽씽이었으면 20분이면 도착했을 카이로의 다운타운까지 무려 50분이 소요되었다.

7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11: 이집트 이민기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아까운 시간이 바로 요 이동시간들이다. 풍경을 보는 것도 왠만해야지..하지만 감수할 밖에. 여긴 이집트

니까 말이다. 공항에서 카이로의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 초입은 Heliopolis 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이로는 Greater Cairo

라고 부르며 다섯 개의 커다란 지역구로 나뉜다. Heliopolis는 그 다섯 구역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면서 가장 큰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군사지역으로 공군본부, 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 육군병원, 군 전용 스포팅클럽들, 군 전용 축구경기장, 카

이로 국제전시장, 카이로 국제 축구장 등이 있어서 함부로 ‘대놓고 촬영을 할 수 없다’. 관광버스가 지나가는 공항로 좌우로 현

대식의 아름다운 도시 전경 중간에 군사시설들이 있고, 정복 사복 형사들 경찰들 헌병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쫘아악 깔려있으

며, 담장마다 간격을 두고 ‘NO PHOTO, NO PARKING, NO WALIKING’ (사진촬영금지, 근처 주차금지, 근처 도보횡단 금

지)이라는 붉은 싸인보드가 붙어있다. 뭐 이쯤이야…하겠지만 정작 군인들보다 무서운 건 사복형사들. 걸리면 우리를 어찌 하

겠느냐만, 일정에 차질이 걸릴 정도로 붙들어둘 것이고 촬영한 카메라는 압수당하며 돌려받을 날은 요원해지기에 이집트 여행

을 아주 자알 하려면 ‘경찰이 하지 말라는 짓만 안하면 된다’라고 나는 내내 앵무새처럼 떠들어댔다.<?xml:namespace pref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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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다운타운은 너무나 복잡하다. 카이로가 멕시코시티와 북경 다음으로 손꼽힐만큼 인구 2천 만에 육박하는 거대도시임

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어느새 점심때가 다가왔지만 이대로 요기를 하러 가기에는 우리는 무언가 아쉬웠다. 공항에서 그토록

오래 잡혀있지만 않았어도..

“이럴때 딱 갈만한 곳이 하나 있긴한데..”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트렁크 분실사건-으로 잃어버린 무언가를 어떻게해서든 채워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입을 열었다. 어

차피 예정했던 싯타델을 보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했다. 팀원들은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싯타델은 다음 카이로 투어로 예정한

날에 보기로 하고 오늘은 싯타델을 그대로 지나쳐 맞은편 언덕 위의 쓰레기마을로 차를 돌렸다. 모캇담언덕 중턱에 자리잡은

쓰레기마을은 콥틱교도들의 부락으로 그 언덕 위에는 역사적인 콥틱교회들이 어떤 것은 병풍처럼 또 어떤 것은 무덤처럼 은밀

하게 들어서 있다.

이슬람이 들어온 7세기 이전 이 땅은 콥틱교도들의 나라였다. 한 시대를 당당하게 풍미했던 고대 카톨릭교도들인 그들은 이집

트의 토속신앙과 버무려져 민심을 송두리째 끌어안는데에 성공을 했다. 그들은 일찌감치 로만카톨릭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당당히 자신들의 믿음의 길을 걸었다. 지금도 이집트의 콥틱교도들은 전체 인구의 9%정도에 이르며 이집트의 국경일 중 절

반은 콥틱교도들의 기념일이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신도의 숫자야 어찌되었든 또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

하든 콥틱교는 명색이 이집트의 제2종교이다. 이집트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방문할 곳으로 우리는 그들의 정착지인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쓰레기마을에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에어컨차량에 실려가는 중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밖으로부터 스

멀스멀 밀려들어오는 온갖 퀘퀘한 냄새들을 참아야했다. 마치 부락전체가 난지도를 연상케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쓰레기로 넘

쳐나는 고불고불한 골목길들을 한참 지나서야 언덕 위 동굴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시계는 오후 12시를 절반쯤 넘어서

고 있었다. 이윽고 ‘ST MARC CHURCH’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보였다. 게이트의 지킴이로 보이는 반백의 중년남자가 샌드위

치를 한 입 물다말고 우리들의 차를 세웠다. 표정은 없었고 눈빛은 날카로운 남자였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8

Page 12: 이집트 이민기

“15. 남한사람” (하마스따샤라. 꼬리아 게누비아)

내가 말했다. 이집트의 어디에서나 관광경찰이나 유적지 가드들을 만나면 이와 같은 보고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는 밖에서 차

창 안을 휘이 대강 훑어보더니 내가 말한대로 출입자 일지에 기입을 하고는 게이트를 통과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언덕 위에 들

어선 우리 팀원들은 조금 전 지나왔던 게이트 바깥의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감탄을 금치못했다.

거대한 산정을 깎아 그곳에 그토록 무수한 성화들을 그리고 그곳에 은밀한 교회들을 곶감 감추듯이 지어놓았을줄은 아무도 예

상하지 못한듯했다. 기대이상의 반응이었다. 팀원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차량 밖으로 뛰어나갔다. 깎아지른 언덕의 정

면을 조금 비껴 반지하식의 거대한 오라토리움이 만들어져있다. 그리고 그 무대 저 안쪽 깊숙히 예배당(기도실)과 좌우로 성상

들이 마련되어있다. 왠만한 교회의 부흥회 정도는 거뜬히 치르고도 남을만한 규모였다. 언덕이라기에는 다소 크고 산이라기에

는 터무니 없이 작은 이 일대를 그렇게 깊숙히 파놓고도 오랜동안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옛날의 콥틱교도들은 건축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교회들을 지하 혹은 반지하로 지은 까닭은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박해

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집트의 토속신앙 -800만이 넘는 우상들-보다도 정작 같은 크리스찬인 콥틱교도들을 잔인하

게 사냥했다. 웅장한 오라토리움을 안쪽까지 내려가 보고난 뒤 백 개도 넘어보이는 층계를 숨차게 다시 올라오는 우리에게 한

노인이 지나가면서 나즈막한 음성으로 “할렐루야”했다. 이집트에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현지인의 입에서 나오는 “할렐루

야”는 나도 처음이었다. 오라토리움을 나와 오른쪽으로 한참을 더 길이 나있다. 숨을 고르며 걷다보니 언뜻 보아도 작고 초라

하여 이곳이 정말 교회일까싶은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동굴교회라는 간판이 소심하게 보였다. 그리고 교회입구 앞의

동굴 벽에 –교회가 동굴자체였으므로- 그동안 이곳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개중에는 한국인의

낙서로 보여서 팀원 중 몇몇은 ‘나라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너무하다. 남의 나라 기념장소에 낙서가 왠말이냐’는 반응을 보

였다. 내 말이..

드디어 들어선 동굴교회는 지하로 뚫린 오라토리움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연단이 전부였다. 하지만 천정으로 시선을

돌리면 ‘어떻게 이렇게 넓은 공간을 뚫었는데도 무너지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에 나는 또다시 버릇처럼 정신을 빼앗겨버리고 말

았다. 어떤 팀원은 예배자들의 곁에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성화들만 골라서 사진 찍기에 바빴고 재단에 향

을 꽂는 이, 아예 작정하고 디카로 다큐멘타리를 찍는 이도 있었다. 입구를 다시 힘겹게 되짚어 나오자 bawab (*저자주석- 건

물을 청소하는 관리인을 이렇게 부름) 이 우리를 향해 가만히 손짓을 했다. 방문객이라고는 마침 우리들뿐이라 딴엔 용기를 낸

것같았다. 팀원들은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뭔가 보여주고 싶은 모양. 따라가보죠”

그가 허리춤에 있던 열쇠로 문을 열어준 곳은 아주 오래된 –정말로 오래된 – 기도실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와 별반 차이가 없었

지만 ‘아주 오래되었다’는 남다른 가치가 있었다. 그 비밀의 방을 들여다보는데에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에게 특별한 체험을 선사해준 그 bawab의 손에 약간의 달러를 사례로 쥐어주었다. 일반적인 패키지 상품으로 동굴교회의 방

문시간은 30-40분 정도였지만 제어가 없는 우리들은 무려 한 시간이 넘도록 아직도 동굴교회 –정확히 말하면 모캇담 언덕 정

상의 교회들-를 다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내려갑시다. 4시가 되기 전에 피라밋은 봐야죠”

9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13: 이집트 이민기

동굴교회가 워낙 언덕 정상에 위치한 터라 언덕을 내려와서 싯타델 앞의 도로를 수백 미터 되돌아 기자로 진입하는 동안 우리

는 시간을 아낄 요량으로 쓰레기마을 수퍼에서 구입한 스넥과 음료수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위생을 고려하여 차마 그 마을에

서 ‘완전밀봉이 되지 않은’ 샌드위치들을 구입할 수는 없었다.

기자의 피라밋과 스핑크스

3 기자의 피라밋<?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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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착한 첫날이고 운반할 짐도 적지 않은 터인지라 부득이 온종일 렌트카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열 몇 시간

을 좁은 항공기 내에서 운신도 못하고 있던 터라 팀원들 모두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용차량이 아니었다면 여독이 풀리지

않은채로 계속 누적되어 이집트 투어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 쓰러질 것이다. J가 물었다.

“피라밋은 한참 가야하나요?”

얼른 쉬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피라밋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살짝 의심이 갔지만 그 지친 표정을 보고 나는 차마 농담

을 건네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쓰레기마을을 내려와 이슬라믹 카이로의 외곽로를 지날 때까지 차창 밖에 펼쳐진

거대한 죽은 자들의 도시의 전경에 모두들 시선이 사로잡혀 교통체증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우리를 실은

차량이 이슬라믹 카이로에서 나일강 다리 너머의 기자에 도착할 즈음 해는 이미 서쪽을 향해 줄달음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피라밋. 제1피라밋이라고도 하며 쿠푸왕의 피라밋이라고도 불리운다. 기자를 비롯하여 전 이집트를 통틀어 가장 큰 피라밋

이다. 이 피라밋이 건설된 시기는 기원전 26세기로 가늠되어지고 있다. 높이 147미터, 가로세로 230M*230M 바닥이 정사

면체인 삼각뿔의 모양을 하고 있다. 기울기는 53도. 가까이서 보아도 상당히 가파르다. 그 귀하다는 고대 아스완 채석장의 화

강암으로 외장을 덮었고 사암과 규암이 섞인 내장석은 이 거구의 건축물의 꽤 견고한 뼈와 살이 되었다. 기자의 모든 피라밋의

방향은 북쪽. 당시 고대 이집트제국의 신앙의 중심이 북극성에서 태양으로 옮겨질 무렵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쪽을 향

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나는 일행에게 피라밋을 등반하지 말것을 단단히 주의주었다. 실제로 피라밋 좌우로 낙타를 탄 관광경찰들이 총을 들고 경비

를 서고 있다. 낙상의 사고가 빈번하고 유적의 훼손정도가 심해지자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피라밋의 등반은 금지되었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10

Page 14: 이집트 이민기

기자의 피라밋은 모두 9개이지만 규모가 큰 피라밋은 세 개뿐이다. 대피라밋을 제외하고 제2,제3피라밋은 교대로 내부관람이

허가된다. 올해는 제2피라밋의 안식기라서 제3피라밋의 내부를 입장 관람할 수 있다. 각 피라밋 내부관람료 별도.

제2피라밋인 카프라왕의 피라밋을 지나 제3피라밋이며 멘카우라왕의 피라밋이기도한 작은 피라밋 옆을 지나면 언덕 위까지

뻗은 길이 나있다. 이 길을 도보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차 전용도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기에 걷다보면 차량과 마차들을 피해가느라 어느새 도로 바로 옆의 사막으로 밀려나있는 자신을 발

견하게 될 것이다. 이 언덕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이유는 일명 <파노라마>라고 불리울만큼 기자의 광활한 사막과 눈에 익은

피라밋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각을 잡아 제1,2,3피라밋들을 한 앵글에 담기에 고심하는 표정들이 재밌

었다. 우리 일행도 파노라마에 내리자마자 손에 손에 디카를 들고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피라밋 파노라마에서 얼마간의 자유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피라밋지구가 폐장하기 전에 스핑크스를 보아야했으므로 부랴부랴

차량에 다시 올랐다. 일사분란하게 제시간에 맞춰 모여주는 팀원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기자의 스핑크스. 기원전 27세기에 지어진 고대건축물이다. 머리는 파라오의 형상을 몸통은 사자의 것을 본떠 조각되었다. 머

리가 사람인 것은 지혜를, 몸은 사자의 용맹함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조각 하나를 기획해도 대단히 생각을 많이 했던 것이 분

명하다. 스핑크스의 머리끝에서 앞발까지의 높이는 20미터, 몸통의 길이는 50미터 정도이다.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오랜 세월

의 모래폭풍에도 끄떡하지 않은 이유는 자재가 상할 염려가 없는 건조한 기후와 단단한 암반을 기반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기

자의 스핑크스는 피라밋의 수호신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신으로 숭상을 받았는데 스핑크스 바로 곁의 신전(일명 계곡신전이

라고 부름)은 바로 스핑크스를 모시는 제사의 전이었다. 또한 고대에는 신전 앞까지 나일강이 차있어서 제사에 올릴 공물들을

보우트로 날랐던 자리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무리 유적지 방문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4시가 좀 넘었을뿐이다. 우리는 오후5시까지만 차량을 쓰

기로 예약을 했기 때문에 우선 호텔 체크인을 하고 자유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호텔은 되도록 타운에서 가까운 곳을 잡았지

만, 워낙 이집트가 위생관리에 대한 인식도 철저하지 않을뿐더러 –위생이나 환경까지 시선이 가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이기 때

문일테지만 – 특히 카이로에는 너무나 많은 숙박업소들이 몰려있어서 서로 가격 경쟁에 치중하느라 내부관리에 소홀한 점이

없지 않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고 우리들의 시선에 호텔수준을 맞추어달라는 요구는 일찌감치 배제한 터였기에 호텔에 대

한 불안함은 없었다. 팀원들 모두 장기 자유투어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었다. 유스호스텔도 괜찮다고 하는 누군가의 말에

언젠가 유스호스텔에 혼쭐이 난적이 있는 나는 “호텔로 합시다, 호텔로. 별이 세 개만 붙었다가 달랑거려도 호텔로 갑시다” 하

며 우겼다.

11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15: 이집트 이민기

카이로의 첫날밤

4 카이로의 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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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기엔 이른데 어디 갈까요?”

일정상의 방문지를 콩 볶듯이 뛰어다니고도 하늘에 해가 아직 걸려있자 팀원들은 모두 내 얼굴만 살폈다. 이럴땐 현지에 산다

는 사실이 뿌듯하다. “오케이. 일단 나갑시다”

샤워도 했겠다. 오후 5시가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차량을 이미 보낸 뒤였으므로 5-6명씩 김밥 눌러담듯이 꾹꾹 채워

택시 다섯 대에 올랐다. 호텔의 환전소에서 각자 이집션파운드화를 얼마간 환전해둔 뒤였다.

“이집트 택시 이렇게 한 번 타봤으니 앞으로는 자제합시다-“

택시비를 내나 여행사 차량을 주문하나 이렇게 인원이 많을때에는 별로 절약도 되지 않고 다리품에 시간도 축이 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층체험투어>이므로 우리는 이런 현지의 교통편도 종류별로 겪을 참이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다시 기자의 스핑크스 앞이었다. 저녁에는 시간대별로 언어별로 <빛과 소리쑈> 공연을 한다. 그렇게 무수

한 한국인 여행자들이 다녀갔건만 한국어공연은 아직 없다. 우리보다 혹은 우리만큼 영어가 익숙치 않은 일본인 여행자들을 위

해서는 이미 일본어상영시간이 생겼고 중국어도 생겼다. 우리는 너무 ‘편한 것, 아는 것’만 하려고 든다는 절감. 아쉬웠다. 아무

튼 긴 줄을 서서 입장시간을 기다렸고, 공연장 앞이 워낙 허허벌판 –아니 사막 – 이라 해가 떨어지면 체감온도가 적잖게 떨어진

다.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자켓이나 긴팔셔츠들을 저마다 끌러 걸치기 시작했다. <빛과 소리쑈>는 고대 파라오시대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사운드가 워낙 머리가 띵할 정도로 울리기 때문에 바로 옆사람이 하는 말도 들을 수 없다. 집중하는 수 밖에. 어

렵지 않은 영어로 아주 천천히 공연하므로 감상이 어렵지 않으며, 관람객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입장료는 100파운드

(2010년12월 현재가)

한 시간 남짓의 쇼가 끝난 후 우리는 스핑크스 게이트에서 조금 걸어나와 근처의 현지식 식당에 들어갔다. 다진 쇠고기를 양념

한 뒤 쏘세지처럼 뭉쳐서 그릴에 구워낸 케밥과, 현지에서는 ‘갈리말리’라고 부르는 오징어튀김, 그리고 역시 그릴에 구운 치킨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12

Page 16: 이집트 이민기

을 각자 기호대로 볶음밥과 함께 시켰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현지식이라고 불리우지만 지중해식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집

트는 인도와 달리 음식에 매우 짙은 향신료를 쓰지 않으며 고추소스 역시 현지인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 입맛에

거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 먹었으니 걸읍시다”

이만한 숫자에 이만한 기운에 넘쳐나는 것은 자신감뿐. 우리는 기자의 그 복잡한 인도를 여유롭게 걸으며 피라밋 주변의 오염

된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얼마나 사람들에 부대꼈는지 우리들의 숙소인 호텔까지는 무려 30분이 넘게 걸렸다. 팀원들은 다

리가 아픈줄도 모르는 표정들이었다.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발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긴 잠에 곯아떨어졌다. 카이로의 첫날밤

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둘쨋날 카이로

13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17: 이집트 이민기

1

카이로의 왠만한 호텔에는 풀장이 갖추어져있다. 모래폭풍을 끌어안고 사는 사막의 한 가운데에 이 대도시의 시민들은 물을 그

리워하는 것이 틀림없어보인다. 바로 지척에 나일강을 두고도 말이다. 카이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도한 나일강은 그러나 몸

을 담그기에는 그 수질의 오염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지 이미 오래. 이집트정부에서도 제발 나일강에서 수영하지 말라고 경고

를 할 정도다. 모닝콜에서 아침식사시간을 포함하여 투어출발로 예정된 시각까지는 무려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아직

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팀원들 상당수는 먼지 많은 호텔주변보다는 리조트식으로 꾸며진 호텔 내부를 어슬렁 거닐거나 풀장

에서 몸을 풀었다. 종려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선탠을 할만큼 해가 높아진 것도 아니었는데 북부유럽 어디쯤에서 온것이 틀림없

는 백인여행자들의 반라의 모습에 행여 기가 질세라 아직도 새벽의 냉기가 남아 있는 벤치에 드러누운 팀원도 있었

다.<?xml:namespace prefix = o /><?xml:namespace prefix = o />

“오늘은 간단한 배낭 하나만 둘러메고 나오세요”

오늘도 하루종일 현지체험투어를 할 예정이었기에 나는 리조트식 호텔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팀원들을 찾아내어서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었는지 재확인을 해두었다. 현지체험투어를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준비사항은 복장과 미네랄 워터이다. 복

장은 될수록 편안하게, 얇은 긴 팔 남방셔츠나 자켓은 일교차가 심한 이집트에서는 필수품목으로 허리에 두르던지 아무튼 꼭

챙겨두어야하며, 수돗물에서 석회가 나오는 지질적인 특성상 미네랄 워터는 말 그대로 생명수나 다름없다. 사막에서의 물 한

모금이 얼마나 소중한가. 사막 아닌 사막 카이로에서 가장 흔한 것은 물이요 가장 귀한 것도 물(음료수)이다. 그 다음으로 갖추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14

Page 18: 이집트 이민기

어야할 것은 모자, 긴 머플러, 선글라스 등 자외선 및 바람막이용품들이다. 굳이 무슬림이 아니어도 긴 머플러로 눈 코 입을 가

린채 다니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만큼 모래와 먼지가 섞인 바람은 마치 회오리처럼 사방에서 휘몰아친다. 사막성 기후는 여기

에 가세하여 모자로 덮혀지지 않은 여행자들의 정수리를 집중가열한다. 쓰러지지 않고 견뎌낼 장사가 없다. 긴 머플러에 챙이

긴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언뜻 중무장한 강도단처럼 호텔 로비에 시간 맞춰 짜잔 나타난 우리들은 그런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

거렸다.

2 카이로 고고학박물관

15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19: 이집트 이민기

2 카이로 고고학박물관

“버스가 어때요?”

“메트로를 타고 가죠. 빠르다던데”<?xml:namespace prefix = o /><?xml:namespace prefix = o /><?xml:name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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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기야 하지만 바깥 풍경을 못보니..”

“거리풍경이야 이제부터 종일 매일 볼텐데요 뭐. 제발 먼지 좀 그만 마십시다”

우리는 저마다 목적지까지 이동할 교통수단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애초에 어디로 가겠다,는 스케줄만 짜두었던 터인지라 소

소한 사항들은 팀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대다수가 먼지 많고 차량의 노후화가 걱정할 수준인 시내버스보

다 메트로를 선호하였다. 우리는 가까운 메트로역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도보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다른 장소라면

몰라도 우리의 숙소가 있는 기자지역에는 우리같은 외국인 여행자들로 연중 득실거리기 때문에 우리같은 다수의 외국인들이

우루루 거리에 나온다고 하여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만 기자의 거리는 그 어느 지역보다 공기의 오염도가 심각한 수

준인지라 여행 시작부터 우리는 목에 둘렀던 긴 머플러로 호흡기를 가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콜록.

카이로의 메트로는 3차선까지 있으며 모두 Mubarak station에서 만난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사람들은 이 역에서 내려 버

스나 다른 노선의 메트로로 갈아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자철을 타고 Mubarak station에서 하차하였다. 같은 역이라고

하여도 카이로의 어떤 전철역은 지상과 지하의 역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지나칠 수가 있다.

Mubarak station의 지상은 그 유명한 Ramses이다. Mubarak은 이집트를 30년째 장기 통치하고 있는 현직 대통령의 이름

이며, Ramses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 중 하나였으며, 또한 가장 뛰어난 왕 중 하나였다. Ramses 처럼 되고 싶

어하는 현직 대통령의 바램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증거가 바로 이 역이 아닐까 한다. 지상의Ramses station 으로 굳이 올라가

지 않고 ,지하의 Mubarak station에서 Helwan방향의 표지를 따라 움직인 우리는 시내에서 각자 구입한 카이로 지도책을 들

고 있었다. 팀원들은 저마다 우리가 지나왔던 길과 승하차한 메트로역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이 지도책은 팀원

들 자신에게나 우리처럼 카이로를 심층체험투어하고자하는 카페의 회원들에게 장차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Sadat station 으로 이동했다. 워낙 지하도 내의 표지가 많아서 막상 Sadat에서 내려도 어디로 갈지 막막해지기 마련

이지만, 티켓 출구마다 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쫘악 깔려있으니 누구에게든 물어보면 길을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이집션들은

외국인에게 상당히 친절하며 왠만한 사립학교를 나온 중산층 이상의 현지인이 영어 혹은 그리스어 혹은 불어를 구사하는 모습

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 계급이 가장 낮은 일반교통경찰들은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Sadat station 위로 나오면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이 바로 코 앞에 보인다. 워낙 security의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설령 택시를

탔더라도 내려서 검문을 통과한뒤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정원을 제외한 박물관 본관으로는 카메라를 반입할 수 없으므

로, 정원에서 마음껏 사진촬영을 마친 뒤 카메라는 박물관 입구 안쪽에 설치된 보관대에 맡겨둔다. 우리는 약 2 시간 뒤에 정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16

Page 20: 이집트 이민기

원에 있는 작은 연못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본관 앞에서 흩어졌다. 저마다 보고자하는 유물이 있었을 터이므로 이 방법은 상당

히 우리 자신들을 만족시켰다. 나는 J와 함께 이층의 투탄카멘 유물전시실과, 별도로 입장권을 사야하는 로열미이라룸을 방문

하였다. 우리는 고대 파라오들의 생활과 역사를 궁금해하고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읽었던 책들을 머릿속에

서 꺼내어 마치 고대의 파라오들이 살아돌아온양 혹은 우리가 마치 그 시대를 리포트하는양 신이 나서 떠들어대었다.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은 사실 두 시간 가지고는 관람이 어림도 없을만큼 그 규모가 상당히 엄청나다. 하지만 고대의 인간의 역

사에 관심이 없는 여행자라면 단 십 분도 지겨울 수 있다. 박물관 안에는 파라오 람쎄스2세가 남겨놓은 거대한 스텔라 (*저자

주석- 당대의 사건들을 기록해둔 석비를 말함)와 이집트 전역에서 발견 혹은 발굴된 그의 동상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천여

년 훨씬 이전에 이땅을 통치하였던 고왕국의 파라오들의 유물들까지 바로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 멋지지 않은가. 신

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오천 년 이전의 옛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남긴 문명의 흔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이 속

삭이는 얘기를 엿들을 수 있는 것이다. J는 나 못지 않게 로열미이라룸이며 벽화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집트는 인류 문

명의 발상지이다. 이집트를 여행하기 위한 준비로 최소한 한 두 권의 고대사는 읽어두는 것이 이 땅 나일계곡에 살았던 옛사람

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17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21: 이집트 이민기

3 이슬라믹 카이로

3 이슬라믹 카이로

사실 이슬라믹 카이로지구에는 하루를 전부 투자해도 부족함이 있지만, 우리는 저녁에 야간열차를 타야했으므로 메트로로 움

직일 수 있는 반경 내에서 되도록 알찬 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와midan Tahrir (미단 따흐리

르)를 건너 Chanpoleon st (샹폴레옹 스트릿) 을 따라서 midan Talat Harb (미단 딸랏하르브)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간 뒤

Talat Harb거리에 도착하면서부터 갑자기 펼쳐지는 아름다운 고풍스런 건물들에 나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

다. Midan Talat Harb 에 연결된 다섯 개의 스트릿 중에서도 카이로 금융의 중심지 Kasr el nil st (카스르 엘 닐 스트릿)가 가

장 아름답다. 우리는 그 거리를 따라서 ataba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Ataba는 카이로 최대의 시장이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그 부근의 모스크들이지 시장이 아니므로 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박물관투어를 마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18

Page 22: 이집트 이민기

친 상태이므로 다리가 상당히 아플수도 있다. 다행히 kasr el nil st은 일방도로이므로 택시를 타고 다리를 건너도 된다. 우리는

극기훈련을 자처한 팀원들의 의지로 왠만한 거리는 차량 대신 다리품을 팔기로 하였다. Ataba와 다리가 보이는 직전에 샛길

이 있어 나는 팀원들을 이끌고 그길을 지나갔다. 본격적인 시장통에 들어선 우리들의 눈 앞에는 무려 천 년의 역사를 지닌

Azhara mosque (아즈하라 모스크)가 서있었다. 기도시간을 제외하고는 여행자들에게도 개방이 된 착한 모스크이므로 입구

에서 신발을 벗든지 반환용 발싸개를 받아서 신발째 신던지하고,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여행자의 경우 역시 반환용 몸싸개-

통으로 뒤집어 쓰게 되어있어서 달리 설명할 말이 없슴-를 지급받은 뒤 모스크 경내를 둘러보고 나온다. 때가 때인만큼 우리는

시장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손에 들고 다녔다.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xml:namespace prefix =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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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hara mosque 바로 건너편에 저 유명한 Khan el kalili Bazaar –보통 칼릴리라고 부름-가 있지만 우리는 열차역으로 이동하

기 전에 Citadel을 반드시 보아야했으므로 부랴부랴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해야했다. 우리는 모스크 앞의 시장 안으로 들어가

면 Juwahila gate (주와힐라문)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서 모르는 현지인들도 많은 그 문을 지나 좁은 길 위

로 계속 올라갔다. 이슬라믹 카이로의 지도가 머릿속에 있지 않고서는 지도책만 보고는 따라가기 힘든 길이긴하지만 우리팀에

는 현지를 잘 아는 내가 있으므로 길을 잃을 걱정보다는 오후4시 이집트 관광지 폐장시간 전에 무사히 Citadel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 앞섰다.

“택시면 한 방인데”

누군가 중얼거렸고, 이미 택시를 탈 수 없는 좁고 인적 드문 거리에 들어선 우리는 피식웃었다. 맞는 말이긴 했으니까. 게다가

이 인원이면 택시 대 여섯 대를 잡아야하는데.. 누구는 타고 누구는 걸으란 말이냐는 불평이 분명이 나올것이다. 문젯거리는 애

초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도 걸어서 말할 기운도 없었고. 그 좁은 거리에는 Blue mosque도 있었지

만, 워낙 형편없게 터키의 Blue mosque를 흉내내다 그쳐서 끔찍한 몰골이다. 카이로에 가뜩이나 빵빵한 모스크가 많은 터에

우리들의 눈도 모스크 보는 수준이 높아져서(?) 조악한 Blue mosque는 패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큰 길을 따라 또 엄청나

게 걸었다. 이제와서 택시를 타기에도 아까운 거리. 그래, 이제 실컷 열차 안에서 다리 뻗고 쉴 수 있을테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자,고 우리는 서로를 독려했다.

Citadel은 12세기에 이집트로 진격해온 십자군들에 대적하기 위하여 지어진 거대한 요새이다. 언덕 위 하나를 다 차지할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이며, 말처럼 언덕 위에 있으므로 그 입구까지는 내내 오르막길이다. 가뜩이나 오늘 지금까지 걸은 거리가

총10킬로는 족히 되는 탓에 여기저기서 일행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내어놓으라는

명분을 내세워 굳이 이집트땅을 밟았다. 왠만한 마을 규모의 Citadel 안에는 두 개의 모스크가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고 유

명한 것이 Mohamed Ali mosque 이다. 이스탄불의 Sophia 성당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이 사원은 19세기 오스만 투르

크제국이 파견한 알바니아계 총독 Mohamed Ali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있어 더욱 유명하다. 신을 모시는

사원에 인간의 유해가 안치되어있는 것이 처음엔 의아했었지만 Ali총독은 이집트를 근대화의 길에 올려놓은 공로가 있는 인물

이므로 비록 외국인이지만 묵인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19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23: 이집트 이민기

Citadel에서는 Mohamed Ali mosque와 군사박물관이 가장 볼만하다. 군사박물관에서 신기한 것은 일단 들어갔던 입구로

는 절대로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는 것. 만들어진 길을 따라 다리가 아프던 말던 시간에 쫓기던 말던 ‘기어이’ 출국까지 가야만

한다. 이건 관람이 아니라 행군 수준이다. 군사박물관 내에서는 북한의 화가가 그린 전투화가 신기했다.

4 야간침대열차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20

Page 24: 이집트 이민기

4 야간침대열차

Citadel에서 Giza station까지 가려면 메트로가 있는 곳까지 되짚어 걸어가야 한다. 다들 으앜,하는 표정. 다행히 Citadel 앞

의 도로는 시내로 가게 방향이 나있어서 아무 시내버스나 잡아타고 다리 아래 시장까지 갔다. 인원이 많아서 이럴때에는 차라

리 시내버스가 편하다. 다리 아래의 현지시장에서 메트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는 메트로를 타고 기자철과 조인하는

지점까지 이동하여, 다시 기자철로 갈아탔다. 메트로로 이동을 하니 기자는 한결 가까운 곳처럼 느껴진 것은 나만의 감상이었

을까. 외국인 여행자들은 모두 기자역에서 열차를 타도록 규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예매해두었던 – 팀이 카이로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예매해두었다 – 침대열차표를 재확인한뒤 부근의 식당에 앉았다. 열차는 오후 8시 반,9시 반짜리가 있다.

열차식으로 저녁이 나오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때까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현지식을 거하게(?)

먹으면서 열차가 도착하기 30분 전까지 수다를 떨었다. 이집트음식은 향료를 지나치게 많이 넣지 않아 우리 입맛에 크게 거스

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누군가 고추장을 가져왔다며 꺼내놓았다. 이집트에는 고추장은 없지만 고춧기름이나 고춧가루는 현

지인들의 기호식품이므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고추장이 준비되어있지 않다고 해도 입맛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

다. 김치나 라면은 현지식당에서는 삼가하는 것이 예의이다. 물론 오픈된 식당이라면 괜찮겠지만 에어컨디셔너가 작동하는 실

내 식다에서는 절대로 금해야한다. 우리 나라에 찾아온 외국인들이 우리가 이용하는 식당에서 자신들의 짙은 향신료가 섞인 음

식을 꺼내놓고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타인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저사람이라면, 이 나라가 내 나라라면’이라고

한번쯤 생각해보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다.<?xml:namespace prefix = o /><?xml:namespace prefix = o />

열차에 오르자마자 우리는 내일 모닝콜 시각을 확인한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객실로 삽시간에 흩어졌다. 아마도 어젯

밤처럼 모두 순식간에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야간침대열차의 객실은 상당히 좁아서 이층침대와 담요가 구비되어있으며 정말

로 손바닥만한 개인세면대가 설치되어있다. 화장실은 공동사용인데 열차 한 동마다 한두 개뿐이며 그다지 청결하지 않다. 열차

는 달리는 밤새 내내 몹시 건조하여 담요를 푹 뒤집어쓰고 자는 것이 피부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가만, 내가 파스를 어디에 두

었더라…

<작가 아미라 리> 2010년12월25일 탈고.

21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25: 이집트 이민기

셋째날 룩소르

1

룩소르에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한참 늦어진 오전 8시 20분. 카이로-룩소르간 통상 9시간 주파였던 것을 생각하면 무려 두 시

간 남짓이나 연착을 했다. 이집트에서 결코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행여 룩소르발 항공편이라도 예약이 되어있는 여

행자라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 일행은 이집트여행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출국시각까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움직여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집트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팀원들 모두 이해한다는 분위기. 어느새 이집트를 실감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무러나

그저 마음 속으로 ‘인샬라~’를 되뇌이며 참을밖에.

룩소르 열차역에서 코르니쉬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 하루 워낙 우리가 다리품을 팔아야하는 거리의 양

이 엄청난 관계로 시장통쪽으로 조금만 내려가서 시내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우리 숫자가 숫자인지라 현지인들도 이 많은 외국

인들이 자기들과 함께 시내버스에 끼어타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들이다. 우리는 팀을 쪼개어서 시내버스 세 대까지 현

지인들틈에 끼워앉혔다. ‘Khaleed ebn el waleed st’에서 모두 하차하니 코르니쉬가 코 앞이다. 여기서부터는 나일강변을 따라

조금만 걸어내려가서 일반보우트를 타야한다. 말이 보우트지 크기가 결코 적지 않다. 우리는 외국인이라 현지인들의 더블가격을

내라는 말에도 흔쾌히 오케이. 오전 나일강 위의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보우트는 유유하게 나일강의 서안을 향해 나아갔다.

룩소르는 인구500만 남짓의 준산업화도시이며 나일강 유역의 평야를 끼고 있는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관광지이기 이전에 남부

에서는 아스완주 다음으로 상당히 큰 농업지역인 Qina 주에 속한 작은 지방도시에 불과하다. Qina주는 빈곤층의 비율이 상대적

으로 많은 이집트에서 빈민들의 주식인 옥수수와 사탕수수를 주로 생산하며, 특히 사탕수수는 전이집트 생산량의 무려1/4를 생

산하고 있다.

2 나일강 서안

일반여행객이라면 기본적인 코스가 있다. 워낙 룩소르의 나일 서안지대가 방대하여 하룻만에 입구만 훑기도 어려우므로 그나마

가장 유명한 장소들 몇을 정하여 돌게되는데 ‘왕들의 계곡’과 ‘데이르 엘 바하리’, ‘멤논의 거상’이 그것이다. 나일 서안에 정박한

보우트에서 내리면 여행자들을 향한 택시의 호객행위가 보통 극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너무나 낡았고 택시라기엔 약간 큼직하여

왠만한 유럽인 장정들도 일곱 여덟은 꾹꾹 태울 수가 있다. 우리도 팀을 셋으로 나누어 택시를 잡았고 흥정을 하였다. 이집트 어

딜 가나 택시는 흥정부터 해야한다. 카이로 등 대도시에는 미터요금제가 실시되는 택시가 있긴하지만, 시골은 역시 흥정이다. 대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22

Page 26: 이집트 이민기

개 세 곳을 기본으로 택시요금 흥정이 시작된다. 우리는 앞서 예정한 세 곳을 꼽고 흥정을 마쳤다. 택시요금은 예정된 관광지를

모두 돈 다음 처음 승차했던 보우트 정박지에 내려준 다음에야 지불하게 되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만일 택시기사의 태도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면 얼마간의 팁을 더 얹어주어도 좋다. 대개의 택시기사들은 흥정한 요금보다 나중에 받게되는 팁에 더 관심

을 둔다.

피라밋이 건설되던 시대에 이집트는 거석문화가 한창 꽃 피웠었고, 인간보다는 신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성들

은 신을 하늘처럼 모셨으며 신의 제사장인 파라오는 목숨을 다해 섬겼다. 피라밋 건설의 부역에 동원이 되었어도 그들은 자신들

이 신성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피라밋의 도굴이 극성해지자 더 이상 피라밋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신왕국의 사제들은

피라밋 건설을 중단하고 대신 계곡 깊은 곳에 파라오의 유해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룩소르를 방문

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를 나눠 실은 다섯 대의 택시는 이윽고 나일강 서안의 첫방문지인 왕가의 계곡에 닿았다. 주차장 앞의 검문소에서부터 이집

트 특유의 ‘검색대’가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가방과 카메라를 x-ray 위에 넣고, 행여 테러라도 일으킬까싶어 모든 여행자들을

‘테러바이러스 보균자’로 취급하는 관광경찰들의 눈총을 감수하며 검문을 통과하였다. 검문소에서 왕가의 계곡 게이트까지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이집트 현지에서 맞닥뜨리는 신기한(?) 것들은 하나라도 더 체험하고자 우리

는 게이트 안쪽에 서있는 ‘taftaf’(코끼리열차)에 몸을 실었다. 왕들의 계곡 게이트에서는 일일이 카메라가 있는지 확인을 하기때

문에 정문 안에서 단체 사진 한 장 찰칵 찍고는 큰 카메라들은 카메라보관소에 맡겨야했다. 아무튼 무덤 안과 박물관 안은 촬영

이 금지되어있으니 들고 다녀봐야 짐만 된다.

왕가의 계곡에서 여행자들에게 관람을 개방하는 무덤은 한정이 되어있다. 교대로 안식년을 주기 때문인데 그때마다 방문지가 달

라질 것이므로 미리 예정하지 않고 가는 것이 낫다. 단 투탄카멘의 무덤 만은 별도로 티켓을 팔고 있으며 연중 개방을 하고 있

다. 또한 왕가의 계곡 티켓 한 장으로 무덤 세 곳까지 입장이 가능하며 방문하는 무덤마다 입구에서 티켓을 검사하고 있으니 절

대로 버리지 않고 챙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행여 티켓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서로를 챙겨주며 무덤들을 돌아다녔다. 어느 것

은 박해를 피해 무덤 안으로 숨어들어 생활했던 옛기독교인들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또 어느 무덤에는 화려한 벽화와 웅장한 스

케일로 무덤의 주인인 당대의 파라오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무덤은 각 시대별로 내부구조가

다르니 관심 있는 사람은 눈여겨보아도 좋을 것이다.

왕가의 계곡 다음으로 우리는 데이르 엘 바하리로 갔다. 흔히 ‘핫쳅수트여왕의 장제전’이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신전이다. 신전이

라기보다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고대 이집트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핫쳅수트를 한 눈에 느

낄 수 있는 장소이다. 3층으로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테라스며 계단이며, 산의 한 쪽을 완전히 깎아내어 건설했다는 사실에는 입

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산 반대편은 역대 파라오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이 아닌가 말이다. 수십 명의 파라오들이 묻혀있

는 반대쪽에 혼자만의 신전을 지은 여왕의 기백이 놀랍지 않은가.

다음으로 우리가 방문한 곳은 파라오 아멘호텝3세의 모습을  본뜬 거대한 석상 두 개가 평야지대에 우뚝 서있는 

멤논의 거상이다.굳이 입장료를 끊을 것도 없이 석상이 서있는 곳이 허허벌판- 실은 복원공사가 한창인 아

멘호텝신전의 입구- 이므로 누구나 가까이에 접근하여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감시인이 있으니 석상에 손을 대는 일은 삼가하도록

23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27: 이집트 이민기

한다. 아멘호텝3세는 그 출중한 미모가 이미 역사책에도 기록이 되어있을 정도인지라 오늘날로 치자면 세계적인 배우만큼의 명

성을 드높이고 있다. 스스로도 자신이 미남임을 너무나도 잘 파악한 이 파라오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석상들을 어지간히도 많이

만들어내어 이집트 어디를 파도 그의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이다. 실제로 그의 석상을 바라보노라면 매끈한 눈매며 오똑

한 콧날이며 단정하게 닫힌 입술이며,

‘미남은 미남이야’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높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의 석상들 –게다가 무수한 모래폭풍에 거의 망가진-을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보며 그의 미모에 대한 품평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석상의 양다리 옆에 서있는 작은 여인상들이 있는데 오

른쪽에 있는 여인은 모후이며, 왼쪽에 서있는 여인은 그의 아내이다. 우리가 마주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은 당대에 세워진 것이

고 오른쪽의 석상은 그 천 년 후인 기원전4세기에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4세기에 이 땅은 그리스인들의 통

치하에 있었으며,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의 석상이 뜬금없이 ‘멤논의 거상’이라 이름 붙여진 것도 그리스 역사가 일조를 했다.

저 유명한 지중해 패권다툼의 전쟁사 트로이를 기억할 것이다.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이었던 아가멤논장군은 여

신 오로라의 아들이었다 –고대인들은 아무튼 평범한 출생을 인정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아들이 전쟁 중 실종된 것을 알지 못

한 여신은 아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세상을 헤맨다. 고대인들에게 세상이란 지중해와 아프리카가 전부였던 관계로, 이집트

에 이르른 여신의 울음이 공명처럼 울려퍼져 당시 그리스인들의 귀에는 ‘멤논아-멤논아-‘로 들렸다는 것이다. 남의 석상에 자기

들식 이름을 갖다붙이고 ‘나는 그렇게 들었다’고 우기는 고대 그리스 통치자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하다. 침략자들이란.

택시는 우리를 보트선착장에 내려주었다. 시간도 잘 맞춰주었고 팁도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았고 호객행위도 하지 않은 기사들을

만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우리는 기분좋게 서로 약정한 택시요금을 지불했고, 이집트의 문화중 하나인 팁도 흔쾌히 얹어주

었다.

3 나일강 동안

나일강 동안으로 넘어온 것은 어느새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각. 밥도 먹어야하고 카르낙 대신전도 가야하기에 강변도로를 따라 즐

비하게 서있는 현지식당 중 하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실은 우리 회사에서 이미 예약을 한 식당이기도 하다. 룩소르처럼 방대

한 지역에 시간은 빠듯할 경우 적당한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다른 외국인 여행

자들 뒤로 긴 줄을 서서 뷔페를 양껏 먹은 우리들, 나의 권유에 따라 미네랄 워터가 아니면 소다수(탄산음료)를 골라 주문을 했

다. 왠만한 현지식당에서는 소다수가 차라리 낫다. 미네랄 워터는 온종일 손에서 놓질 않으니 말이다.

식당에서 카르낙신전까지는 20-30분 정도 걸어야했다. 워낙 길치인 내가 길을 잘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확 사라지는 순간이기

도 하였지만, 기특하게도 물어물어 우리는 카르낙 앞에 도착하였다. 멀긴 멀었다. 카르낙신전의 유명세가 높아지자 입구부터 주

위 전부를 단장하는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졌다. 그렇잖아도 갈때마다 뭔가를 복원하고 있어 공부하느라 머리가 따라가기도 버거

운데 자꾸만 공사를 벌이니 늘 다니던 길도 버벅거리기 시작한 나, 공연히 일행에 미안해졌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24

Page 28: 이집트 이민기

“또 뭘 복원했나봐요”

다른 건 다 느린데 고고학자들만은 참 발 빠르게 움직이는 나라. 아무래도 관광지수입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가장 큰 부

분을 차지하는 관광대국이므로 정부에서 집중 지원을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카르낙대신전은 이름 그대로 ‘대’신전이다. 하나의 신전이 아니라 입구에서 현재 발굴이 완료된 반대쪽 끝 벽까지의 직경만해도

1.6킬로이다. 그러니 좌우로 얼마나 넓은 콤플렉스일지는 가늠하고도 남을 것이다. 무려 1700여 년간이나 역대의 파라오들이

신전을 바쳐온 곳이다. 신전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콤플렉스를 이룬 것이다. 신성한 연못이라는 사제들이 제사의식을 행하던

장소만해도 두 곳. 지금은 연못의 물이 썩은듯 악취도 나지만 나일강과 이어지는 물밑 통로는 분명히 있어보인다. –사실 그게 더

염려스러웠다. 나일강에 이 썩은 물이 흘러들어가다니.

카르낙대신전에는 알렉산더대왕의 흔적과, 나폴레옹의 흔적이 남아있다. 역대 파라오들의 역사가 그 안에 가만히 서있어도 중얼

중얼 어디선가 들려오는 곳이 바로 이 신전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신전 광장 안을 가득 채운 여행자들의 리더가 설명하는 소리

가 사방에서 각 나라의 언어로 들려오니 말이다.

오후4시, 신전은 이제 폐장할 시각이다. 호루라기를 불며 여행자들을 밖으로 나가라고 종용하는 관광경찰들의 모습은 이제 친근

할 정도가 되었다. 저녁6시에 카르낙 대신전에서는 <빛과 소리쑈>를 펼친다. 물론 입장료를 별도로 판매하며 각 나라의 언어로

공연을 하니 시간표를 잘 보고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어 공연은 여전히 간판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룩

소르 신전까지 걸어간 다음, 밖에서도 충분히 보이는 신전 안에 굳이 들어가지 않고 외곽도로를 거닐었다. 아스완으로 오늘 넘어

가야 하므로 솔직히 마음이 바빴다.

룩소르에서 아스완까지 열차는 기본 3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워낙 연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므로 밤 늦게 도착할 것을

고려하여 다들 스넥류나 인근 프랜차이즈점에서 햄버거를 구입하여 탑승했다. 열차티켓을 끊고도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렸지

만, 이제 이집트에서 이 정도의 기다림은 일도 아닌 일이 되었다….우리에게는.

아스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랴부랴 택시 다섯 대를 잡는 것. 밤길이라 걸어서 호텔을 찾아갈 수도 없었

다. 시즌이라 호텔은 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미리 회사를 통해 예약을 해둔 상태인지라 무사히 입실을 하였다. 내일 새벽

아부심벨로 가기 위해 프런트에 미리 모닝콜과 아침도시락을 부탁했다. 온종일 쉬지도 못한 우리 팀원들은 새벽 3시 기상이라는

소리에 부랴부랴 룸으로 사라져버렸다. 오늘 밤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본것이 너무 많아 다 기억할 수 없겠다던 J의 말에 고개

를 끄덕이며 우리는 굿나잇 인사를 했다.

넷째날 아스완 아부심벨

25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29: 이집트 이민기

1

경찰차 콘보이의 소집시간은 새벽 4시. 우리는 3시부터 기상하여 손끝에 찬물 적셔 눈가만 콕콕 찍으며 세수도 하는둥 마는

둥 호텔 로비에 쌓인 지난 밤 우리가 주문해두었던 도시락들을 각자 챙겨들고 버스에 올랐다. 각 호텔에서 아부심벨로 가기 위

한 관광차량들의 여행자 픽업이 끝나고 경찰의 검문장소에 모인 것은 새벽 4시가 거의 가까웠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수백 대

는 족히 되어보이는 대형 중형 소형 승합차에 승용차까지 바퀴 네 개 이상의 차종들은 전부 모아놓은 듯했다. 경찰은 정각이 되

자 바리게이트를 쳐서 지각한 차량들을 돌려보냈다. 차량과 그 안의 탑승객들 숫자에 놀랐는지 일일이 검문하여 기록으로 남겨

야하는 관광경찰들은 표정이 냉랭했다. 바리게이트 너머의 차량들이 아무리 클락션을 눌러대고 운전사들이 뛰어나와 사정

을 해도 소용없었다. 버스 안에서 네다보던 여행자들은 ‘저럴 수도 있구나..’ 혀를 내둘렀다.

“아부심벨까지 세 시간이면 날아갈꺼예요. 주무시던지 식사하시고요-“

너무 이른 시각이라 다들 밥맛이 없다며 눈을 감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아부심벨행 차량들이 칠흙같

은 어둠의 고속도로를 –그것도 대낮에 네 시간너머 걸리던 거리를 – 정말도 날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

백 대의 차량에 속도위반딱지를 떼는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검문을 마칠때까지, 말하자면 번호판 몇 번의 차량에 어느 국적

의 여행자들이 몇 명씩 승차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적어야했던 경찰들은 더 이상의 아침노동을 원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아부심벨에 도착했슴을 알려주듯 차창 밖에서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지평선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할 것

도 없이 우리는 기지개를 켰고, 아름다운 공예품들로 넘쳐나는 긴 아케이드를 지나 티켓판매소에 닿았다. 우리는 자유여행

이 규칙이었으므로 아부심벨측에서 요구하는 영어가이드를 고용하지 않았다. 티켓을 들고 보안검색대를 지나자마자 팀원들

은 저마다 신이 나서 이렇게 외치며 달려나갔다.

“그럼 두 시간 뒤에 주차장에서!!”

“구경 잘 하셔요-“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26

Page 30: 이집트 이민기

2 왕의 무덤이 계곡으로 간 까닭

앞서도 언급하였거니와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에 이집트는 신들의 나라였다. 사람들은 신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했고 신

들의 보호로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신들을 위하여 신전축조에 동원되는 것을 당연하거나 축복이라고 여

겼다. 애초에 신들의 제사장이었던 파라오들은 이미 신들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고, 선택을 받은

자들이기에 당연히 신들이 내린 ‘아주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되었다. 땅 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 특별한 축복을 ‘내세에서의 삶’

즉 부활이라고 믿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 지금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파라

오들이 절대적인 숭앙을 받았던 데에는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들도 파라오도 도도히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신들의 선택받은 자인 파라오들이 절대적인 존재였던 고왕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고대 이집트는 제1 중

간기를 거치게 된다. 어쩌면 자연스럽게 파라오들의 힘이 미약해지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40여 개의 놈(*저자주 - Nome, 부

족국가)들은 통일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신들을 숭앙하기는 하였으되 파라오가 아닌 부족자치의 시절로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이 중간기는 머지 않아 상이집트 (*저자주 -이집트 남부)의 한 부족에 혜성같이 나타난 강력한 부족장에 의해 끝이 나고

이집트는 재통일을 맞이하며 중왕국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미 무소불위의 파라오도 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

히 경험한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신과 파라오에의 헌신만이 아닌 ‘자신들을 사랑하는 법’을 찾기 시작하였다.다름아닌 부활

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 미이라는 오롯이 파라오와 왕족들만의 몫이었으나 중왕국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

들이 자신들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고자 하였다. 몸이 썩으면 부활은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백성들

의 자각이 저변에 확대되기 시작한 즈음인 중왕국의 시대에 고대 이집트는 화려한 파라오들이 중심이 되던 신전과 무덤은 차치

하고 보았을때 단순하지만 서민적인 문화가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훗날 고대 이집트예술의 르네상스였던 알 마르나

紀 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하지만 민중의 힘은 여전히 미약하여 이 시대의 서민문화는 르네상스라고 명명짓기에는 그 활

약이 그다지 괄목할정도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외세의 침략으로 겪게되는 제2 중간기를 거친 뒤 고대 이집트인들은 방어와 관용보다 부국강병하여 공격도 서슴지 않는

인간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했을때 세상은 그저 신들의 피조물들의 역사였고 인간은 그 일부에 지나

지 않았다. 인간이 누군가를 공격하며 힘과 영역을 키우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상은 ‘모든 피조물들’이 아닌 오직 ‘인간의 역사’만

이 남게 되었다.

27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31: 이집트 이민기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의 역사를 쓰기 위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새로운 통일을 이끌어내었다. 바로 역사적으로 가장 걸출한 파

라오와 영웅들의 시대였던 신왕국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느 고대의 왕국들 중에서도 유독 신왕국시대에 ‘정

복왕’이라는 기록이 쏟아지고 있슴에 주목해야 한다. 저 유명한 세티1세(*저자주 – 왕들의 계곡에 가장 큰 규모의 무덤을 남겼

다)로부터 람쎄스2세, 아멘호텝2세, 투트모스2세, 핫쳅수트여왕, 람쎄스3세 등 고대 이집트 역사상 내로라하는 이 파라오들은

모두 정복왕들이었으며 이들이 당당히 버티고 있던 시대가 바로 신왕국시대였다.

3 아부심벨

람쎄스2세 이름 하나 끌어내려고 서론이 너무 길었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약 300여 킬로미터 지점에 아부심벨은 위치한다.

수단과의 접경지역이며 아스완과는 또 다른 자치주이다. 때문에 아스완에서 아부심벨을 향하는 모든 차량과 여행자들은 아스

완 주경찰의 검문을 받아야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콘보이는 바로 이 주경찰을 의미한다.

아부심벨, 고대 이집트제국 당시에는 누비안 영역의 심장부이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삭막하고 광활한 사막만이 끝없이 펼쳐

져있을뿐이다. 간혹 더운 지평선 아래에 신기루가 나타나긴하지만.

기원전 13세기 제국이 영웅들의 나라였던 시대에 이 땅에는 ‘왕으로서 준비된 자’가 태어났다. 굳이 힘을 써 나라를 키울 필요

가 없이 그저 부왕으로부터 왕좌를 물려받고 부왕을 비롯한 왕조의 조상들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자기 페이스대로 걸어가기

만 하면될만큼 그가 왕으로서 무난하게 재위기간을 버틸 수 있을 모든 조건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완벽하게 마련되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준비된 왕은 호기심이 많았던 것같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뭔가를 자꾸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자신의 전신상을 비롯하여 무수한 신전을 세워 건축왕으로 이름을 드높였고, 이웃의 적도 동지도 딱히 아니었던 또다른

제국 힛타이트와 인류최초로 국제협약을 이끌어낼만큼 외교수완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수백 명의 자식을 둘만큼 정력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실제로 룩소르 신전 벽에 남아 있는 ‘그를 축복하기 위하여 매우 길게 늘어선 그의 자식들’의 벽화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28

Page 32: 이집트 이민기

1813년 이집트 남부를 여행하던 스위스 출신의 한 여행자가 우연히 4개의 석상의 상단부분을 발견하면서 아부심벨은 20세기

에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커다란 절벽을 깎아서 안에 지성소를 비롯한 공납물품 창고들까지 골고루 갖춘 제대로된 신전이었

고, 가장 안쪽의 지성소에서 입구까지의 66미터 거리가 일직선에 놓이도록 설계되었으며, 특히 연중 2회 하지와 동짓날에는

신전 앞 수평선에 솟아오르는 일출의 강력한 빛이 지성소 안에 바로 꽂히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계산되어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300여 년 전에 말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우리가 흔히 ‘태양의 기적’이라 부르는 바로 그 시기 바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

다.

“다음엔 우리도 그날 와야겠어요”

옆에 있던 J가 태양의 기적을 목격하지 못한 아쉬움에 중얼거렸다.

아스완의 기존 댐들이 우기에 쏟아지는 강물의 양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게되면서 하이댐건설이 기획되었다. 그 결과 아스완

과 그 주변의 적지 않은 고대의 유적들이 수몰위기에 빠졌으나 댐은 이집트 국민들을 살리기 위한 초석이었으므로 이집트정부

는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가난한 나라가 가진 인류의 보물들은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지켜

주기로 하였다. 1963년부터 시작된 수몰위기 유적들의 이전 프로젝트는 5년 뒤인 1968년에야 완성이 되어, 비로소 자칫 역

사책에만 남게될뻔했던 아부심벨도 원래의 자리에서 정확히 64미터 위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20세기의 인

류는 아부심벨에서 일어난 ‘태양의 기적’을 다시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를 ‘현인류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아부심벨은 파라오 람쎄스2세가 제국의 신들을 위해 바친 거대한 암굴신전이다. 내부로는 카메라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아쉽지

만 워낙 거대한 벽화와 석상들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서운할 사이도 없을 것이다. 아부심벨 내부의 벽화 중 입구에서 왼쪽에 펼

쳐진 벽화는 왕이 사랑하는 아들들을 데리고 전쟁을 나가는 장면이다. 요즘처럼 행여나 자식이 다칠세라 호호 불며 키우는 재

벌들과는 그릇부터가 다른 인물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왕자들을 전쟁의 맨 앞에 세우는 왕이라니 말이다. 영웅호걸이란 이런

인물을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신전 입구의 왼쪽에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들을 저장해두는 방들이 연결되어있는데 그간 얼마나 강물이 들고 났는지 벽이며 천

정의 벽화들은 거의 손상되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왕은 아부심벨의 바로 곁에 소박한 신전 하나를 더 세웠는데 아부심벨의 웅장함과 비교가 안될정도로 확실히 소박하고 여성적

인 신전이다. 그의 비였던 ‘네파르타리-메리엔 무트’(*저자주 – ‘무트신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 네파르타리’라는 뜻)를 위하여

지어진 이 신전은 흔히 ‘하토르소신전’이라고도 불리운다. 네페르-는 아름답다는 의미. 왕비 네파르타리는 이집트 고대사에서

도 손꼽히는 미인으로 유명하다.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도 말이다.

29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33: 이집트 이민기

우리는 아부심벨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도대체 저걸 정말 잘라서 옮겼을까’를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싶어

안달을 내었다. 정말이지 출발 콘보이시간까지의 두 시간 관람이 너무나 아쉽고 짧게만 느껴질뿐이었다.

4 하이댐

아부심벨에서 돌아올 때는 대낮이었으므로 차량이 전속력으로 달리지 못했다. 규정속도로 무려 4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서야

우리는 아스완에 닿았다. 오후 1시가 지나고 있었다. 호텔에서 싸준 조식도시락은 아부심벨에 도착해 먹었고 점심식사를 해결

해야했지만 우리들의 뇌리에 박아둔‘오후 4시 폐장’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모든 움직임은 ‘폐장시간 전에 관람

을 마쳐야한다’에 집중되어 오후 4시 이후의 긴 시간들이 가져다주는 여유로움과는 반대로 우리들의 오전은 우습지도 않게 총

총 바빠야했다.

하이댐의 건설에는 1960년부터 1972년까지 총 12년이 소요되었다. 제방의 길이만 3.6킬로에 이르며 댐의 높이는 111미터,

폭은 980미터나 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댐의 건설로 생겨난 세계최대의 인공호수인 낫세르호수는 그 둘레의 길이

만해도 500킬로에 달한다. 하이댐의 건설로 이집트는 경작지가 무려 30%나 증가되었고, 국가 총 전력수급량이 2배나 증가하

여 오늘날 이집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하이댐으로인한 수력발전량의 1/3은 접경지

역이며 나일강의 상류이기도한 수단에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댐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나일강 상류지역의 국가들이 최근

뭐라도 달라고 요구를 하는 바람에 나일강 주변국들과 이집트와의 물의 분쟁은 –그것이 물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이 되어

지고는 있지만 – 좀체로 적당한 해결안을 도출시키지 못한채 부유하고 있다.

이집트의 대통령이며 당시 아랍세계의 영웅이었던 나쎄르대통령이 조국 이집트를 홍수의 피해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의

초석으로 하이댐의 건설을 계획했을때 국제사회는 이집트의 원조요청을 거절하였다. ‘시나이 재난’과 맞물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미 이집트에 단단히 빈정이 상한 상태였다. 이틈에 러시아가 이집트에게 손을 내밀며 접근을 했고, 시나

이전쟁을 거쳐 수에즈운하를 탈환하기까지 이집트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당시 이집트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낡은 러

시아제가 전부였다.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비롯 시나이반도를 되찾자 하이댐 축조를 위한 국제사회의 원조는 긍정적으로 검

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기존의 올드댐보다 11미터 규모가 큰 하이댐이 완성되었을때 세상은 이를 가리켜 ‘굶주림에

대항하는 장벽’이라고 불렀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30

Page 34: 이집트 이민기

그리고 그 사람, 가난한 조국을 일으키고자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맨주먹으로 시나이전쟁을 치르면서도 결코 열강의 압력

에 굴하지 않았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쎄르가 일찌기 예견하였듯이 “하이댐은 이집트를 현대화의 길에 올려놓은” 주역이 되었

다.

당신이 만약 이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굳이 그 머언 하이댐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당신에게는

그저 ‘조금 큰 댐’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날 아스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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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만으로 아스완을 다 둘러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우리는 하루를 더 체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스완이라면 뭐니뭐니해

도 아름다운 필레섬이 발목을 잡는다. 우리는 별도로 펠루카를 타는 대신에 보우트를 타고 필레섬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이목

구비가 약간 동그스름한 것으로 보나 짙은 피부색으로보나 누비안인들이 틀림없어 보이는 보우트맨은 열 대 여섯 살 정도의 소

년과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그의 동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의젓한 자기 사업?을 하고 있는 두 형제가 보기에 결코 나쁘지 않았

다. 보우트 안을 대강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형제가 보우트 위에서 생활하고 있슴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낡은

31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35: 이집트 이민기

담요와 두어 벌의 갈라베야(*저자주 – 머리 위부터 통째로 넣어 입는 긴 현지옷) 가 눈에 띄었다. 보우트는 한 십여 분쯤 강 위

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눈 앞에는 푸릇한 나무들 틈사이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고대의 신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

다. 보우트가 섬에 정박하자 우리는 보우트맨 형제의 얼굴들을 기억해두고 섬에 올랐다. 우리는 아직 그 형제들에게 지불한 것

이 아무것도 없었다. 신전관람을 마친 뒤 그들이 나타나 우리를 처음 보우트를 탔던 곳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나서야 보우트

이용비를 내는 것이 현지의 룰이기 때문이다.

2. 필레신전

필레섬은 본래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필락,비게 그리고 아길키아. 그러던 것이 아스완 하이댐으로 인근 유적지들의

이전되었을 때 필레도 이 프로젝트의 구명을 받아 지금과 같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필락과 비게섬의 유적들은 모두 지금의 아

길키아섬으로 옮겨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고하는 폭은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비게섬은 오시리스신이 잠이 든 장소라 믿었

고, 아길키아섬은 이시스여신(*저자주- 신 중의 신 오시리스의 아내)에게 바쳐진 섬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섬 안의 짓다만 정

자에는 ‘파라오의 침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신전 본체와는 별도로 mammisi라 하여 ‘탄생의 집’으로 삼았다. 마치 이야깃

속의 인물들과 배경들이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것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당시 이집션들에게는 연중 한 번꼴로 반드시 필

레섬을 순례하고자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느 이집트의 신전들과는 달리 필레는 그레꼬로만기에 지어진 신전들이다. 필레의 신

전들이 마치 오늘날 생일케잌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미기에 지

어졌고, 6세기에는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도주해온 크리스찬들의 예배소이기도 하다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폐쇄를 해버

리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의 성지였던 필레의 폐쇄는 고대 이집트의 문자인 히에로클리프 (*저자주-신관문자. 고

대 이집트어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문자였다)사용의 단절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후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베일 뒤에 가려버리고 말았다. 고고학계는 저 프랑스에서 한 똘똘한 아이가 태어나 이집트의 고대 상형문자들을 전부 해독할

때까지 이집트 고대사에 관한한 증명되지 않은 이론과 추측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필레는 프톨레미기의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들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곳이다. 섬 자체는 큰 편이 아니지만 우리를 열주

실로 인도하는 넓은 country yard(*저자주 – 신전의 마당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는 당당한 고대인들의 배포를 느끼게 한

다. ‘아무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듯한. 필레신전의 관람포인트는 그레꼬로만기의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과거 크리스찬들의

집터 –매우 아기자기한 규모로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터처럼 느껴진다 – 그리고 높은 천정과 사방 벽들에 가득한 벽화들이 전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32

Page 36: 이집트 이민기

3

필레섬 안을 마음껏 돌아다닌 후 우리는 시내로 돌아와 야간침대열차시각까지 아스완 최대의 향신료시장을 방문하였다. 코르

니쉬라고 흔히 얘기하는 강변도로에서 시장까지는 걷기에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제법 폭이 넓은 아스완지역의

나일강 위 크고 작은 섬들과, 한적하게 떠다니는 펠루카들 그리고 강 너머의 작고 허름한 누비안마을들을 건네다보며 한껏 여

행자다운 여유를 즐겼다. 누비안박물관과 엘리판틴섬,키치너섬, 미완성 오벨리스크, 아스완박물관, 아가 칸 모슬렘 등 아스완

에도 유적지들이 가득하지만 오후 한 나절 정도는 오늘날 현지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보는데에 쓰고 싶었다. 우리는 긴 갈

라베야(*저자주- 남부이집트 의 남자들이 주로 입는 긴 원피스)를 서로 몸에 대어보기도 했고, 한 팀원은 교회에서 성탄절 연

극을 할때 필요하겠다며 열 몇 벌씩이나 구입하기도 하였다. 향신료시장에서 신기한 것은 향이 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설령

그것이 음식이거나 표백제이거나간에 – 한 상점의 진열대에 혹은 수레 위에 한꺼번에 전시가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향

신료시장에서 뭔가 –파우더로 된 물품-를 살때에는 그것이 식용인지 아닌지 대단히 주의를 해야한다. 파란색은 표백제이며 노

란색은 현지음식에 자주 쓰이는 Kamun -Cumin이라고도 함- 이나 카레이다. 오싹하지 않은가?

야간침대열차는 다음날 아침 우리를 카이로에 내려줄 것이다. 이후로는 팀원 각자가 자유투어를 하기로 하였으며 출국항공편

이 다른 누군가는 먼저 떠나야하고 또 누군가는 개인적인 볼일이 카이로에 남아있다고까지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작

별을 하게 된다. 이집트에서 모두 함께 모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싶어 J의 제의로 우리 일행은 야간침대열차의 각자

의 객실 문을 열고 –워낙 좁다 – 역시 좁은 복도까지 차지하고는 파티를 열었다. 우리가 차지한 열차의 객실수만해도 열 개가 넘

으므로 그 면적의 복도는 전부 우리차지였다. 유레일을 타도 이런 낭만이 느껴질까. 차창 밖으로 지나는 한적한 풍경은 곧 어둠

속에 가리워져 버렸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 산이었다면 벌써 몇 개의 능선은 돌고도 남았을만

큼의 거리를 우리는 발품으로 소화했다. 낙오자가 없어 다행이었고 모두가 건강한 추억을 가질 수 있어 기뻤다. 우리는 이제 겨

우 이집트의 삼 분의 일 정도만 보았지만 외려 샅샅이 찾아가지 않은 까닭에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즐거우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빙그레 웃는 사람 등 저마다 표현도 달랐다. 나는 다시 물었다.

33ㆍ 2. 소설같은 여행기

Page 37: 이집트 이민기

“또 오실 겁니까?”

그제서야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카이로에 도착하면 나는 이들 중 일부만을 데리고 이

여행의 끝까지 함께 하게될 것이다. <끝>

<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카페북이라서 외려 즐거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정이

허락하면 추후 더 올리도록하겠습니다.>

2. 소설같은 여행기 ㆍ 34

Page 38: 이집트 이민기

3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Page 39: 이집트 이민기

카이로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법

TIP

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ㆍ 36

Page 40: 이집트 이민기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법;<?xml:namespace prefix = o />

제1터미날에 시외버스터미날이 있다. 공항 셔틀버스로 제1터미날까지 이동하여 공항 밖으로 나가는 버스를 탄다. 카이로 각

방면으로 가는 버스들이니 ‘기자’를 외치던지 ‘람쎄스’를 외치도록 한다. 이집트인들은 상당히 친절하므로 버스를 골라타는 일

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항버스 2파운드~1파운드.

람쎄스역에서 기자의 피라밋으로 이동하는 법;

기자까지의 직행을 찾지 못한다면 람쎄스열차역에서 지하도로 내려가 메트로를 이용한다. 기자철을 타고 기자역에서 내린다.

기자역 앞의 도로가 기자에서 가장 큰 ‘쉐라 알 하람’이다. 그 도로의 맨 끝에 피라밋이 있다. ‘피라밋’을 외치면 대개의 미니 버

스들이 세워준다. 거리가 가까우므로 50피아스타~1파운드면 된다. 기자역에서 피라밋까지 택시로는 아무리 가까워도 기본급

이 있어 3~10파운드는 줘야한다. 교통체증에 항상 몸살을 앓는 도로임을 감안할것.

이집트인들에게 TIP이란

이집트는 우리나라와 여행문화가 판이하게 다르다.

37ㆍ 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Page 41: 이집트 이민기

거의 모든 여행업 종사자들은 노동의 댓가로 팁을 요구하며, 이는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다.

대개는 그룹당 얼마식으로 책정되기 때문에 개인이 직불하는 것보다 단체의 경우 개인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운전기사 도시 일일 $10~$20 (차종별로), 장거리 일일 +$10~20(차종별로) 가산

공항/열차역/항구 입출국 에스코트 직원 도시의 경우 회당$5~$10 (개인,단체 구분), 먼 시외인 항구의 경우 회당 $20

한국어가이드 도시 일일$50~60, 장거리 일일 $60 이상

영어가이드 도시 일일$20, 장거리 일일 $30~

베두윈지프기사 1박2일 사막사파리시 지프당 $20, 2박3일 혹은 3박4일 사막사파리시 지프당 +$15/일일 증가

식당테이블 4인1테이블 기준 1끼당 $1

호텔룸클린 룸당/박당 $1

나일 크루즈 룸당/박당 $3* 크루즈 날수

야간침대열차 룸당/박당 $1

그외 포터비 등이 필요하다.

<끝>

숙소는 현실적으로 구하라

TIP 카이로의 호텔: (택스 25.5% + 서비스료 불포함)<?xml:namespace prefix = o />

6-7성급도 있지만 젖혀두자.

5성급 룸당 $250 선, 때로는 $150/룸당 선에서도 구할 수 있다.

4성급 룸당 $100~ 70 선. 가격이 낮을수록 위생상태나 비품컨디션은 떨어진다.

3성급 룸당 $65~$75 선. 같은 성급에도 수준차이와 가격차이가 있다. 어느쪽이나 우리에겐 '그저 누울수만 있

으면..'수준.

별 없는 말로만 호텔급 (무허가) 일인당 $20 ~15 선

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ㆍ 38

Page 42: 이집트 이민기

싼곳은 위생이나 비품이 형편없고, 4성급이라고 해도 우리 맘에 들기는 요원해보인다. 하지만 어린이가 포함된 가족팀의 경

우 최소한 4성급은 되어야한다.

싸고 좋은 곳? 이집트에서?...포기하라. 그런 곳이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이집트는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기대치를

낮추면 항상 즐거움이 따라올 것이다.

본토에서 시나이반도로 가는 법

1. 카이로에서 시나이반도로 가는 법

카이로 시내의 Toorgman이라는 지역에 이집트 거의 모든 지방 큰 도시로 가는

시회버스들이 몰려있다. 대형버스부터 미니 승합차인 오토비스까지 다양하므로

골라 타도록 한다. 대형버스는 좌석이 편안하며 오토비스는 꽉꽉 눌러타는 총알버스이다.

카이로-시나이반도는 직행이 없으므로, 시나이반도 입구인 Suez에서 목적지에 맞게

차를 갈아타야 한다.

예) 카이로-다합갈때, 카이로- 수에즈/ 수에즈 -다합식이다

2. 헐가다에서 시나이반도로 가는 법

1) 헐가다 - 수에즈 -다합까지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39ㆍ 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Page 43: 이집트 이민기

2) 헐가다에서 훼리를 타고 샴엘셰잌으로 넘어간다. 다합으로 가고자한다면

샴엘셰잌에서 다합까지 버스를 이용한다.

3. 카이로에서 시와로 가는 법

1)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로 이동 by 버스나 열차

-> 알렉산드리아에서 마스르 마뚜와 경유 시와까지 버스로 이동

2) 카이로 - 바하리야 오아시스로 이동

-> 오아시스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와로 이동

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ㆍ 40

Page 44: 이집트 이민기

색인

6공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10기자의 피라밋과 스핑크스

25넷째날 아스완 아부심벨

31다섯째날 아스완

7동굴교회

13둘쨋날 카이로

39본토에서 시나이반도로 가는 법

22셋째날 룩소르

38숙소는 현실적으로 구하라

37이집트인들에게 TIP이란

6입국한 날 그 첫날

36카이로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법

12카이로의 첫날밤

A

2a. 이집트의 지리/기후

B

2b. 이집트의 사회/문화/정치/종교

C

3c. 이집트의 경제/ 그외

0~9

141

221

261

311

11. 이집트 개요

222 나일강 서안

272 왕의 무덤이 계곡으로 간 까닭

152 카이로 고고학박물관

52. 소설같은 여행기

322. 필레신전

333

243 나일강 동안

283 아부심벨

183 이슬라믹 카이로

353. 한 번이라도 도움될 여행의 팁

204 야간침대열차

304 하이댐

Page 45: 이집트 이민기

이집트 이민생활

카페

고고 아프리카(중동)

http://cafe.naver.com/gotoafrica

감수

알맨(hunkyu77)

참여저자

서주선생(20inshallah)

발행일

2012.01.07 14:59:33

No. book98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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