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 dgi.re.kr · 1) 이 논문에서 분석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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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Vol.13. No.2 2014. 10. pp.87~99 8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북후정(北亭) 위치에 관한 고찰 1) 임 경 희 * A Study on the Venue of Bukhujung Kyunghee Lim 국문 요약 이 논문은 지금까지 대구시민회관 부근에 있었다고 잘못 알려져 온 북후정의 실제 위치를 확인하고 그 경위를 규명했다. 북후정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최초로 군민대회 가 개최된 역사적 장소이다. 유생과 상인층이 주도하던 국채보상운동은 이날의 군민대회를 거치면서 범 국민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북후정은 광문사, 수창사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대 표적 장소로 평가·기록된다. 북후정은 원래 대구읍성의 서쪽 문 밖에 존재했던 관아 건물(公廨)로 읍북루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료에 따르면 북후정은 경상감영에서 서쪽으로 2리 또는 3리쯤 되는 곳, 옛 서문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고지도나 사진들을 통해 간단히 확인된다. 그렇지만 관련 기관·단체들은 지 금껏 1차 자료를 확인하는 대신 일부 연구자의 잘못된 논문에 의지해 “북문 밖 북후정” 이란 입장을 견 지했다. 이 때문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엉뚱한 장소에 건립되었고 시민들에게도 그동안 잘못된 사실 을 홍보해 왔다. 늦었지만 잘못 기록된 전시물의 내용 등을 수정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주제어 : 대구, 북후정,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서문시장 Abstract This study identifies the real venue of Bukhujung and how it was misunderstood that it was located near the present venue of Daegu Citizen Hall. Bukhujung was a historic site where the first Daegu Residents’ Convention was held during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hich got a good start in Daegu, 1907. Confucian scholars and the merchant class led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hich became the nationwide racial movement going through the Daegu Residents’ Convention. Therefore, Bukhujung was appreciated and recorded as a monumental-representative venue for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long with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Lecturer,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 Diplomacy, Yeungnam University),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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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Vol.13. No.2 2014. 10. pp.87~99

    8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1)임 경 희*

    A Study on the Venue of Bukhujung

    Kyunghee Lim

    국문요약

    이 논문은 지금까지 대구시민회관 부근에 있었다고 잘못 알려져 온 북후정의 실제 위치를 확인하고

    그 경위를 규명했다. 북후정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최초로 군민대회

    가 개최된 역사적 장소이다. 유생과 상인층이 주도하던 국채보상운동은 이날의 군민대회를 거치면서 범

    국민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북후정은 광문사, 수창사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대

    표적 장소로 평가·기록된다.

    북후정은 원래 대구읍성의 서쪽 문 밖에 존재했던 관아 건물(公廨)로 읍북루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료에 따르면 북후정은 경상감영에서 서쪽으로 2리 또는 3리쯤 되는 곳, 옛 서문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고지도나 사진들을 통해 간단히 확인된다. 그렇지만 관련 기관·단체들은 지

    금껏 1차 자료를 확인하는 대신 일부 연구자의 잘못된 논문에 의지해 “북문 밖 북후정” 이란 입장을 견

    지했다. 이 때문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엉뚱한 장소에 건립되었고 시민들에게도 그동안 잘못된 사실

    을 홍보해 왔다. 늦었지만 잘못 기록된 전시물의 내용 등을 수정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주제어 : 대구, 북후정,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서문시장

    Abstract

    This study identifies the real venue of Bukhujung and how it was misunderstood that it was

    located near the present venue of Daegu Citizen Hall. Bukhujung was a historic site where the

    first Daegu Residents’ Convention was held during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hich got a good start in Daegu, 1907. Confucian scholars and the merchant class led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hich became the nationwide racial movement going

    through the Daegu Residents’ Convention. Therefore, Bukhujung was appreciated and recorded

    as a monumental-representative venue for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long with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Lecturer,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 Diplomacy, Yeungnam University), E-mail:

    [email protected]

  • 88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Kwang-Moon Sa and Su-Chang Sa. Bukhujung was called as Eupbukroo which was a

    government office building located outside of the west gate of Daegu Fortress (Daegu

    Eupseong). According to historical sources, Bukhujung lied between two-Ri and three-Ri from

    the west of Kyungsang Provincial Office, and stood in front of the entrance of the past Seomun

    Market. These facts can be simply proved by the ancient maps and/or pictures. However, some

    related organizations and institutes have, so far, relied on some flawed arguments without

    searching for primary sources, and have kept their opinion for “Bukhujung outside of the north

    gate.” Accordingly, a monument to the memory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as

    elected in the other place due to the misunderstanding, and the citizens, meanwhile, promoted

    the misconception. It is needed to identify the right venue of Bukhujung and restore it, and to

    hurry the operation to remedy the wrongly recorded exhibits.

    KeyWords : Daegu, Bukhujung,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Residents’ Convention,

    Seomun Market

    Ⅰ.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1번지, 대구시민회관 남서쪽 모퉁이에는 남녀노소가 엽전을 들고 서 있

    는 모습을 형상화한 ‘국채보상운동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1997년 7월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기념

    하여 대구상공회의소가 대구시민회관 광장에 건립했던 것인데 2013년 11월 시민회관을 현재의 모습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1백여 미터 서쪽인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왜 국채보상운동기념

    비가 이곳에 서 있을까?

    가로 230㎝, 세로 280㎝, 높이 420㎝ 크기의 이 조형물을 시민회관 광장에 세우던 때 국채보상운동기념

    회는 이곳이 “북후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므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는 1907년 2월 21일의 대구군

    민대회 모습을 여기에 재현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을 소개하는 자료들은 대부분

    북후정의 위치를 현재의 대구시민회관 부근(대구광역시, 1995: 903-4), 현 시민회관(강준만, 2007: 283),

    북문 밖(김종욱, 2000: 292) 등으로 표기한다. 각종 신문과 방송 기사들도 지금껏 ‘북후정의 위치가 시민회

    관 앞’이란 사실(?)을 의심 없이 보도해 왔다. 이런 왜곡은 필자가 이미 신문칼럼(임경희, 2011b) 등을 통

    해 몇 차례 지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10월 개관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의 전시자료에서 까지 시

    정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특정한 시기 특정한 국가 또는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가 한 사회의 정치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된다. 더욱이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강점기 경제주권회복운동으로 대구에서

    배태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며 지역민들이 대구의 대표적 자랑거리로 꼽고 있는 만큼 이 운동이 구체

    화한 장소로서의 북후정 터가 가지는 가치는 자못 크다(이대현, 2014: 13). 그렇지만 관련 기관에서는 엉뚱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8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한 곳에 역사적 상징물을 건립함으로써 지금껏 역사적 사실을 시민들에게 잘못 알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 논문은 이런 현실 속에서 북후정이 원래 서문 밖에 있었음을 밝히고 동시에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된 경위를 규명하려 한다. 그리고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범국민적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민중의 자

    발적 집회장소, 북후정이 가지는 의의를 다시 되새기려 한다.

    2. 연구방법

    이 연구는 옛 북후정 터를 고증하고, 어떤 경위로 옛 터에 관한 정보가 왜곡되었는가를 추적함으로써

    ‘있었던 사실’을 ‘있었던 대로’ 규명하려 한다. 따라서 연구방법은 문헌조사와 분석이 중심이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사용되는 자료는 북후정의 위치가 표기된 고지도들이다. 그런 다음 「자인총쇄록」, 「대구읍

    지」, 「대한자강회 월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관련 사료들을 통해 북후정의 위치를 재

    확인한다. 사실 1800년대에 제작된 고지도들에 따르면 북후정은 서문 밖에 버젓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찬찬히 일차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어떻게 북후정의 위치를 “북문 밖” “현재의 시민회관자리” 등

    으로 표기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하여튼 이 논문은 이후 국채보상운동 등을 연구한 자료를 통

    해 서문 밖에 서 있었던 북후정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잘못 표기되는 지를 찾을 것이다.1) 이와 함께

    1900년대 서문시장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함께 찍힌, 북후정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을 함께 제시한다.

    추후 북후정의 실제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참고자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Ⅱ. 국채보상운동에서 북후정이 가지는 의의

    1907년 대구에서 발단되어 전국적으로 확산·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이 시기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는 운동이며 역사적으로도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1907

    년은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해’라고 볼 수 있으며 국채보상운동은 독자적으로 계몽운동의 한 자리를 확고

    하게 위치 짓게 되었다(조항래, 2007; 149).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는 제1차 한일협약을 전후하여 일본의 차관공세가 격렬해지던 때부터 있어 왔다.

    그렇지만 이 일이 범국민적 애국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은 음력 1906년 12월 16일(양력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丘廣文社)가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는 특별

    회가 개최된 자리에서 서상돈(徐相燉)이 국채보상취지서를 발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斷烟償債問題(著者 南嵩山人 張志淵): 事固有出於不意고 世固有未易測度者로다. 國債之關係ㅣ

    1) 이 논문에서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선행연구는 대구광역시가 국채보상운동 92주년을 맞아 발간한 「국채보상운동논문

    선집」(1999)에 수록된 김도형, 박영규, 박용옥, 이상근, 신재홍, 조항래 등의 논문 12편이다. 분석대상을 이렇게 한정한

    것은 이 논문의 주요 목적이 북후정의 올바른 위치를 찾고, 그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북후정의 위치가 현재 알려진 것

    처럼 잘못 전해졌는가를 밝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껏 국채보상운동을 연구한 주요 논문들에서 북후정의 위치가

    언급되는 것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대한자강회 월보」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인용하거나 논지를 전개하

    는 때에 집중된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북후정, 또는 북후정의 위치를 취급하는 부분을 찾는 일은 이들 주요

    논문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 90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絶大而爲來頭危亡之伏火緜을 爲人民者ㅣ 何由推知야 新春新月第一頭에 斷烟償債問題가 忽然如冬

    至子夜에 一聲陽雷가 轟然震驚야 劈破千萬人聾耳니 此其今年爲始야 我國家復陽之幾微乎져

    余從達句來人야 詳聞其發起之狀況矣라. 先記其大槪於左노니….(「대한자강회월보」 , 1907: 1)

    이날 서상돈(徐相燉)은 “국채 일천삼백만 원을 지금 국고금으로는 갚지 못할 것이니 우리 2천만 동포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한 명당 매월 이십 전씩만 모은다면 능히 그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국채보상취지

    서를 발포(發布)했고, 그 자리에서 당장 이천여 원이 모금되었다. 이 소식이 1907년(광무11년) 음력 1월

    4일(양력 2월 16일) 「제국신문」 잡보 란에 게재되자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대구 광문사 회 회명을 대동광문회 라 칭 일노 음력 랍월십육일에 특별회를 열고 무를 필

    후에 회원 셔상돈 씨가 동의기를 국일쳔삼만원을 갑지 못면 쟝토디라도 허급 거신

    지금 국고금으로 갑지 못 지라. 우리 이쳔만 동포가 담를 셕달만 고 그 금을 삭 명하

    이십젼식만 슈합면 그 빗을 갑흘터인데 혹 말기를 우리나라 인죵이 강단과 열심이 업셔일제이

    담 키 극난다 나 그럿치 안은 거슨 우리가 츙의를 슈상던 바라 엇지 힘안이 드 담 셕달

    이야 못을 자 어 잇스며 셜혹 사마다 못더도 일원으로 쳔원지 사이 만을지니 무

    엇을 근심리오 나부터 팔원을 노라대 만장이 일치야 셔상돈 씨의 동의가 가타난지라 광

    문샤쟝 김광졔씨가 말기를 이 일은 개왈가라 니 무론 모고 실시난 거시 귀인측 당장에

    실시노라 고 연쥭과 초갑을 업시고 삼삭담갑 륙십젼과 돈 십원을 니 졔인이 다 회장의 결

    심을 찬상며 담 은 쟈 무슈고 각각 츌의야 당장에 이쳔여원에 달얏고 그 회쟝은 박령

    씨로 츄션되야 각군에 등텹얏난 일본 헌병도 그 회샤에 와셔 실을 탐지고 그러이 엿넉다더

    라.(「대한자강회월보」, 1907: 58~59)

    국채보상취지서의 발기인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燉),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 부회장 김광제, 회원 장상철(張相轍), 강영주(姜永周), 심정섭(沈廷燮), 김우근(金遇根),

    서병오(徐丙五), 윤하선(尹夏璿), 정재덕(鄭在悳), 이종정(李鍾楨), 길영수(吉永洙), 이우열(李遇烈), 강신

    규(姜信圭), 정규옥(鄭圭鈺), 추교정(秋敎廷) 등이었다.

    그리고 음력 1월 9일(양력 2월 21일), 대동광문회는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열었고 남녀노소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신사 박정동(朴晶東)이 “담배를 피우는 1천 2백 만이 석 달 동안 단연하여 한 사람이 1원

    씩만 모은다면 가히 국채를 깊을 수 있다”고 연설하니 모인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분발하여 그

    자리에서 당장 수백 원이 모금되었다.

    陰曆 正月之九日에 達句城內外一鄕有志紳士 徐相敦 諸氏等 累百人이 大會於北堠亭上니 人民會

    者男女老小 凡數萬名이라. 於是에 紳士 朴晶東 氏가 首登演壇야 以國債問題로 一場痛論曰 現今我

    政府歲入이 只不過一千四百餘萬元而己라. 以此充用於歲出에도 恒患不敷커던 有何羸餘야 可以辦償

    此鉅額國債乎아. 限期過而債主督則畢竟은 疆土를 莫保矣리니 吾輩人民은 將於何寄住而生活乎아 然

    則此國債之償還을 不得不吾輩人民이 各目爲擔任義務야 務圖淸帳이 可也라. 雖然이나 吾輩以何術

    而辦此鉅額乎아 不食則飢고 不衣則寒니 不可斷棄衣食而措辦也오 亡屋則無住니 家屋도 亦不可

    賣也오 必也以吾輩의 日用無益之烟草를 限三月斷棄고 以其消耗之費額으로 各自取聚야 計全國人

    口에 除婦孺不吸者야 以一千二百萬算定야 人一一圓이면 則 一千二百萬圓也니 何償債之足憂歟아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9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於是에 滿場一致로 拍手喝釆고 各自解囊出金에 齊聲鼓義者ㅣ紛粉然如潮湧雨驟라. 紳土之老

    者少者笠者髻者와 婦女之靑者紅者와 酒婆茶媼와 乞兒之鼓躄者와 庖肆之屠牛者와 挾冊之童子와 打毬

    之小兒者流가 慷慨涕泣에 奮發義勇야 當下收合之錢이 至累百十元이라 니 人心之感發이 固至斯

    耶아.(「대한자강회월보」 , 1907: 1~2)

    이날의 군민대회에는 신분과 나이, 빈부를 초월한 남녀노소가 모였고 시장의 영세상인, 백정, 걸인, 기

    생, 부녀자, 어린아이들까지 의기가 복받쳐 원통해하면서 돈을 내놓아 그 자리에서 수백 원을 모았다. 김

    윤란(金允蘭)2)은 백 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했다. 당시 대구민의소는 의연금들에 대해 국채담보 영수증을

    발행했는데 그날 김윤란이 받았던 영수증(광무11년 2월 21일자 발행)이 1982년 9월 6일 손자 김용(金溶)

    씨의 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기사, 1982) 이틀 뒤인 2월 23일 여성들도 남일동 패물부인회를 결성해 참

    여했고 3월 9일에는 서문 밖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 3월말까지 27개의 국채보상소가 경향 각지에 설립되는 등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갔다(조항래, 2007:

    64).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이 비록 일제의 탄압 때문에 좌절하기는 했지만, 북후정은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서 최초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항일경제운동이 시작된 장소, 신분과 빈부를 초월한 구국의 민의가 처음

    결집된 장소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광문사 및 수창사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의 중

    심에 대구가 있음을 알리는 대표적 유적이기 때문이다.

    Ⅲ. 북후정 위치에 관한 기록 검토

    1. 사료에 나타난 북후정의 위치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가진 북후정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1888년 자인 현감으로 부임하

    던 오홍묵(吳宖默)은 대구로 들어오는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다시 10리를 가니 금호강이 비 끝에 물이 불어났으므로 옷을 걷고 건넜다. 여기가 대구 경계이

    다. 큰 버드나무가 꽉 들어서 있는 곳에 간간이 주점이 있다. 여기에서 영남 감영과의 거리가 10리였

    다. … 함께 대구부에 들어가는데 3리 못 미쳐 달성이 길 오른 편에 있다. 둘레가 944척이요, 높이가

    4척인데 성 위에는 거목들이 하늘에 가지런하였다. 옛날 구계(龜溪) 서(徐)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라

    고 하였다. 다시 2리를 남겨두고 북후정(北堠亭)이 있는데 이곳이 곧 서문시장이었다. 들어가서 몇

    걸음 되는 곳에 돌다리가 있고 그 단비(短碑)에는 달서교(達西橋)라고 새겨져 있었다.…”(오홍묵,

    1888)

    북후정이 경상감영과 2리(약 8백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달서문 밖, 서문시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3) 그리고 이 위치는 의 서문시장 모습으로 확인된다.

    2) 김윤란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대동광문회의 회원이었으며 김병순(金炳淳)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3) 「대구부읍지」, 「대구읍지」는 북후정과 감영과의 거리를 부(府) 서쪽 3리(약 1천 2백미터)로 적고 있다.

  • 92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서문시장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서 있는 북후정의 모습(왼쪽 중앙 〇부분. 정성길 씨 소장 자료)

    북후정의 위치가 달서문 밖이라는 것은 아래의 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즉 지도의 왼쪽

    중앙부분, 읍성의 서쪽 문과 달성 사이를 보면 북후정(北堠亭)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북후정은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인 에서는 읍북정(挹北亭),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또 다른 지도인

    에서는 읍북루(挹北樓)로 표기된다. 순조 32년 편찬된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는 북후정

    이 경상감영 공해(公廨)이며 읍북루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는 점을 표기해 두고 있다.4)

    “挹北樓 在府西3里, 一名 北堠亭”(한국학문헌연구소, 1982)

    1832년경의 대구부와 읍성(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자료)

    4) 영조43~44년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대구읍지」에는 읍북루를 궁실(宮室) 조(條)에 포함시켰으며 「대구부읍지」와는

    달리 “挹北樓 在府西3里”라고만 기록해 두고 있다.(김택규·박대현, 1997) 왜 “一名 北堠亭”임을 표기하지 않았나 하는 부

    분에 대해서는 추후 보완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9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대구부 지승 18세기 후반(규장각 소장자료) 대구부 광여도 19세기 전반(규장각 소장자료)

    2. 북후정 위치의 왜곡 과정

    북후정이 대구읍성의 서쪽 문 밖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처럼 사료들을 통해 간단히 확인된다. 그런데

    왜 대구상공회의소는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대구시민회관 앞 광장에 건립하고,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관

    련 자료들은 지금껏 북후정의 위치를 현재의 대구시민회관 자리로 표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관련

    사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구태여 위치를 왜곡하게 된 경위를 찾으려 한다면 당시 군민대회 광경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대구광역시, 2007a: 85)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하

    고 있다.

    “大邱西門外壽昌社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公函이如左敬啓者禁烟儧償事로民議僉同하야本會를陰曆

    本年正月初九日에郡下北후亭下에大開하고趣旨書를랑讀則滿場人民이揮涕문淚하고所持烟竹을一齊落

    下하고義金爭先捐出하는데當初開會定規가 婦女兒童은毋論義金矣러니…”(밑줄은 필자가 표시)

  • 94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대한매일신보」잡보(대구광역시, 2007a: 85)

    그런데 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국한문을 혼용한 기사는 북후정을 표기하면서 ‘후’의 자모

    를 한글로 표기한다. 랑독(朗讀) 등 다른 단어들도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쓰고 있다. 왜일까? 그 답은 당시

    신문의 제작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당시 신문들은 지금처럼 기자가 자신의 컴퓨터를 통해 기사를

    작성하고 이를 바로 편집하게 하는 대신 작성해 온 원고를 문선부로 보내고. 이를 토대로 문선공들이 주

    조된 활자들을 뽑아 지면을 채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북후정에 사용된 후(堠)와 같은 복잡한

    자모는 기존 활자를 깎아서 만들어 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인쇄시간에 쫓기게 되면 이

    런 자모는 한글로 표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드물게는 기사를 쓰면서 기자가 한자를 흘려 쓰는 바람에

    알아볼 수 없었거나 아예 원고를 그렇게 작성해서 넘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후 이 기사를

    인용한 논문들은 이를 北후亭(김도형, 1999: 306; 박영규, 1999: 335)이라고 그대로 표기하거나 北堠亭(박

    용옥, 1999: 118, 이상근, 1999b: 240), 北後亭(신재홍, 1999: 111, 이상근, 1999: 205; 조항래, 1999: 149) 으로

    고쳐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5) 그런데 같은 기사를 근거로 하여 당시 상황을 기술한 「대구시사」 제1권

    (통사)은 이를 北後亭으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시민회관 부근’이라는 설명을 부가한다.

    이 운동의 발기인은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大東廣文會 회장 朴海齡. 회원 金允蘭.

    張相轍 등 10여명으로서 2월21일 그들은 대구민의소(斷煙會)를 설립하고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民議所 창립 회합 장소 즉석에서만도 500원이란 성금이 모아졌다고 한다. 이어서 민의소는 北後亭(현

    재의 대구시민회관 부근)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3월9일 대구 서문 밖 壽昌

    社에 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였다. 이 때 국민대회가 일본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고 연설자가

    체포되기도 하였다(밑줄은 필자가 표시. 대구광역시, 1995: 903-4).

    5) 여기에서 인용하는 논문들은 각각 1968년(박용옥), 1978년(신재홍), 1990년(이상근a), 1993년(조항래), 1995년(이상근b),

    1997년(김도형, 박영규)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대구광역시가 국채보상운동 92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에 출간한 「국채보

    상운동논문 선집」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논문을 함께 게재한 이 책을 텍스트로 삼아 분석했으므로 논문의

    발표연도를 1999년으로 적는다.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9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거기에다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간행한 「국채보상운동논문 선집」에 실린 한 논문은 1907년

    3월 29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서문 밖 북후정”을 “북문 밖 북후정”으로 표기하는

    중대한 착오를 범하고 만다.6)

    청도 사는 朴秉善씨가 대구읍에 와서 머물다가 북문밖 북후정에서 鄭雲甲씨 자친 徐씨와 徐丙奎씨 부인 鄭씨 등

    일곱 부인이 은패물을 의연하고 연단에서 계독한 순국문 一本을 본사에 錄送하였더라(밑줄은 필자가 표시. 박영규,

    1999b: 336),

    그렇지만 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의 신문기사는 “淸道居는朴秉善氏가 大邱邑에 來留다가

    西門外北堠亭下에서 鄭雲甲氏慈親…”이라고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성신문」잡보(대구광역시, 2007b: 85)

    이런 과정에서 존재하지도 않은 “북문 밖 북후정”을 찾으려는 헛수고가 이어졌고 급기야 대구시사 편

    찬실은 2004년 북후정이 “대구 역 부근 칠성바위 가운데 단을 높이 쌓아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교양 대구설화」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의 첫 집회를 음력 정월 초아흐렛날(양력 2월12일)에 북문 밖 칠성리의 북후정에서

    열었다. 그곳은 지금의 대구역전 시민회관에 서 있는 일대로서 당시 대구사람들은 칠성바위 가운데

    단을 높이 쌓아 지어놓은 이 북후정을 곧잘 모임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밑줄은 필자가 표시. 박

    영규c, 2004).

    뿐만 아니라 대구광역시는 현재 관광안내를 위한 인터넷 카페에 “북후정은 칠성바위 바로 옆에 있었

    으며 의북정(依北亭)과 동일한 정자”라는 터무니없는 내용까지 기술해 두고 있다.

    칠성바위: 대구 지하철역 북문 출입구 소공원에 있음(1998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칠성바위는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들 바위 와 같이 아기 못 낳는

    사람이 치성을 드리면 효과가 있다는 민간대상물로 바뀌었다, 칠성바위의 내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

    6) 이 논문은 박영규가 「중악지」 제7호(1997)에 발표한 “국채보상운동 발기과정에 관한 고찰 -구한말 대구의 계몽·자강운

    동을 중심으로-”를 수정·보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97년 발표한 논문에서 해당 부분은 ‘북문 밖 북후정’이 아니

    라 ‘대구성 밖 북후정’으로 표기되어 있다.

  • 96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다.

    조선시대 1795년(정조 19년)에서 3년간 경상도감사 이태영(李泰永)이란 사람이 재직했다. 그에게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북두칠성이 북문 밖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난 이 감사는 비록 꿈이지만 별이 떨어진 북문 밖을 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커다란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이 감사는 필시 좋은 징조일 것으로 생각하고 7개의 바위에 7아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동쪽에서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

    準), 의장(儀章), 의라(義拏)의 순으로 적었다. 그런대 7아들이 장성하면서 얼굴이나 성품이 자기이

    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가는 것 이였다.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새겨진 아들은

    무관이 되었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새겨진 아들은 문관으로 출세했다. 그리고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새긴 아들은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하고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뒤에 이의두의 후손이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와서 선조의 기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해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또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워 의북정(依北停)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이

    있은 뒤 주변에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빌었다고 한다. 북후정은 시민회관자리에 있었

    으며 칠성바위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의북정과 북후정이 동일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위치상

    으로 동일한 정자임이 틀림없다.

    달서문 밖 서문시장 입구에 서 있었던 북후정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읍성의 북문 밖, 지금의 대구시

    민회관 자리에 존재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착오를 근거로 하여 “1907년 2월21일 대구시내

    북후정(현 시민회관)에서 수천 명이 모인 군민대회가 열렸다(강준만, 2007: 283).” “1907년 2월21일 옛 북

    후정 터인 지금의 대구시민회관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다(기자칼럼, 2014).”라는 식의 오

    기(誤記)가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다.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 마련된 국채보상운동자료관, 국채보상

    운동기념공원 안에 건립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물에서도 이런 잘못은 여전하다.

    3. 북후정의 위치 추정

    국채보상운동이 구체화한 장소라는 점에서 북후정 터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따라서 서문

    밖, 원래의 위치를 찾고 이를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북후정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근거 사료가 “달성이 길 오른 편에 있다.… 다시 2리를 남겨두고 북후정이 있는데 이곳이 곧 서문시장이

    다”라는 기록(오홍묵, 1888)과 의 사진, 몇 장의 지도가 고작이다. 일단 과 을

    통해 대강의 위치를 추정해 보기로 한다.

    은 이 촬영되던 시기의 대구 지도이다. 서문시장은 지도의 왼쪽 중앙, 달성과 읍성

    사이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큰 장(大市)으로 표기된 부분이다. 따라서 북후정의 위치는 지도

    속 큰 장의 북쪽 끝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서문시장이 위치한 곳은 지도 아래쪽 천왕당지 부분이다. 시장

    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9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1905년경 대구 지도(대구광역시 중구, 1998: 616)

    은 1912년 10월 7일 발표된 ‘조선총독부 훈령9호’에 의해 대구의 ‘시구개정(市區改正)사업’이

    진행된 후에 제작된 지도이다. 과 대조해 보면 북후정의 위치는 서문시장의 끝부분과 시장북로

    가 만나는 지점, 지도 위의 파란 색 부분 일대로 추정된다.7) 정확한 지점을 획정하는 일은 과

    , 1911년 제작된 ‘대구부대구면시가지도’, 이를 바탕으로 1929년 작성된 대구광역시 중구청 소장

    지적도와 현장을 다각적으로 대조하는 후속 작업을 거쳐야 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8)

    1918년 대구 지도(대구향토역사관 소장자료)

    7) 북후정의 위치 고증과 관련한 세미나가 지난 9월 22일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이명식 대

    구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 필자의 논문 보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다. 감사드린다.

    8)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하면 북후정의 실제 위치가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북로 1-1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이날 세미나에서

    제기되었다.

  • 98 임 경 희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Ⅳ. 결 론

    지금까지 대구시민회관 부근에 있었다고 잘못 알려져 온 북후정의 실제 위치를 확인하고 위치가 잘못

    알려지게 된 경위를 추적했다. 북후정이 대구읍성의 서쪽 문 밖에 존재했던 관아 건물이란 사실은 이처럼

    고지도나 사진, 「자인총쇄록」, 「대구부읍지」 등 사료들을 통해 간단히 확인된다. 그렇지만 관련 기관·

    단체들은 지금껏 1차 자료를 확인하는 대신 「대구시사」 제1권(통사)의 내용을 근거로 ‘북후정(현재의

    시민회관)’이란 오기를 그대로 인용해 왔고, 이 위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지역을 대표할만한 중요한 역사적 상징물이 당초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난 곳에 재현되는 일은

    곳곳에서 드물지 않게 확인되는 현상이다.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 들은 형태까지 변형된 상태로 복원되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이유는 1906년 조선통감부가 설

    치되면서부터 일제가 조직적으로 전국의 성곽이나 관아 시설들을 파괴해 온데다 6.25전쟁, 1960년대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훼손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또한 1962년 이래 지방문화재의 보존이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맡겨지면서 드러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일제는 특히 각 지역 성곽들을 포함한 관

    아시설들을 항일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이의 파괴에 전력을 기울였다(임경희, 2011: 60~71). 북후정도 이

    런 과정을 거치며 옛 모습을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며,9) 이 때문에 현재와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된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일제의 탄압 때문에 좌절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경제침탈에 맞서 최초로 전개된

    범국민적 경제주권회복운동이며 그 중심에 대구가 있었다는 사실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북후정

    은 이 운동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장소, 신분과 빈부를 초월한 구국의 민의가 최초로 결집된 장소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늦었지만 북후정의 올바른 위치를 찾아 복원하고, 그동안 잘못 기록했던 표지판

    이나 전시물 등의 수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역사적 소이

    를 되새기고 대구의 정신을 되짚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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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9) 북후정에 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영남지역의 지지(地誌), 「교남지(嶠南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리고 이후 출간된 지지(地誌)에서도 북후정 관련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북후정은 국채보상운동 이후

    한동안 존재하다가 일제가 ‘시구개정(市區改正)사업’을 벌이던 와중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 북후정(北堠亭) 위치에 관한 고찰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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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논문접수일:2014. 08. 28, 심사완료일:2014. 10. 13, 최종원고:2014.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