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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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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464-816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Tel. 031-777-7500 Fax. 031-748-2801 www.ggnhss.or.kr

    정가 : 2,000원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 한 산 성

    CONTENTS

    04 남한산성 소개글

    05 남한산성의 가치

    06 남한산성의 역사

    10 남한산성 지도

    11 지정문화재 현황

    12 남한산성

    14 본성과 외성

    15 성곽에 구축된 각종 시설물들

    16 남한산성 행궁

    18 수어장대

    20 숭렬전

    22 청량당

    23 현절사

    24 침괘정

    25 연무관

    26 지수당·장경사

    27 망월사지·개원사지

    28 이야기가 있는 남한산성 길

    30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남한산성의 심볼마크인 ‘역사어울림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의 성돌에 새겨진

    자연(산).역사(성곽).문화(기와)의 참 아름다운 어울림을 표현한 것이다.

    남한산성을 이루는 하나의 성돌이면서 동시에 남한산성 전체공간을 의미한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켜내면서 생생히 담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참 아름다운 어울림’을 성돌에 새겨진

    산과 성곽과 기와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산위에 남한산성을 쌓고

    산성안에 사람들의 마을과 문화와 문화재가 생겨남을 상징하였다.

    ㅣ 발행일 2010년 4월 10일 ㅣ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ㅣ

    주소 464-816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 전화 031-777-7500 / 팩스 031-748-2801 / 홈페이지 www.ggnhss.or.kr

  • 남한산성은 오랜 세월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하면서 독특한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민족자존과

    호국정신의 성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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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8km이상의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외

    성과 옹성을 제외한 본성의 규모는 둘레가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12만

    6,637㎡이다.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km에 달한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기초로 하여 구축되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을 특

    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성축성기법의 교과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지라 하겠다. 이

    외에도 남한산성 내에는 200여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환경과 더불

    어 산성 내 구석구석이 역사와 설화가 살아있는 탐방로를 구성하고 있다.

    본 안내책자는 남한산성을 찾는 탐방객들이 산성문화유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남한

    산성의 군사행정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제작되었다.

    남한산성은

  • 남한산성의 가치

    남한산성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중첩된 시대에 걸쳐 한강유역 및 수도에 대한

    방어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로서 우리나

    라 전체 역사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한 곳

    11.7km(본성 9km, 외성 2.7km)에 달하는 성곽 자체에 5개 옹성, 4대문 등이 노송군락

    주변 자연경관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특히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정조기의 다양한

    축성기법의 표본이 잘 남아 있는 곳

    남한산성 안에는 조선시대 20여개의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남한행궁이 있

    으며, 국가전란시 부수도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왕(인조)이 실제로 가장 오래 이어한 역

    사적 기록이 있는 곳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이자, 광주 읍치를 관리하는 관아

    (행정)시설이 290여 년간 운영되던 조선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지역이었음

    1624년(인조2년)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 수축을 위하여 관군 이외에 스님들을 동원하였

    는데, 전국 8도에서 파견한 승군이 머물었던 8개 사찰과 중앙지휘사찰인 개원사 등 총 9

    개의 사찰이 운영 되었으며, 축성이후에도 효율적인 산성 방어 등을 위해 270여 년간의 승군

    제도를 운영했던 명실상부한 호국불교의 상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

    병자호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다수의 한시와 고서 및 설화를 비롯하여 이육사, 김훈

    등의 문학작품과 뮤지컬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한 문화예술적 재해석 작업

    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

    가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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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통일신라 대형기와

    남한산성 마을전경 (1910년)

    남한산성 본성

    현재의 개원사

    남한산성 행궁

    뮤지컬 『남한산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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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나당전쟁을 위한 주장성으로 석성 수축(신라 문무 12년, AD 672)

    고려 몽고 2차 침입시 항전(1231년, 이세화의 묘비명)

    병자호란시 항전(조선 인조 14년, 1636~7년)

    한말 항일의병 활동 전개(1896년), 일제시대 항일민족운동 거점 등

    백제 온조왕 왕도설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ㆍ외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하북위례성-하남

    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의 전

    략적인 입지조건과 수차에 걸친 백제의 천도기사로 인해 어느 때부터인가 남한

    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와 직접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병

    자호란 직후인 1638년 남한산성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건립된 것이다.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

    께 모시고 음력 9월 5일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남한산성과 백제문화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사당이다.

    남한산성의

    역사

    [ 남한산성 행궁지 뒤편에서 발견된 백제 유적 ] [ 남한산성 출토 백제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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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통일신라 주장성 축조남한산성의 최초 축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사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 문무왕

    12년(672)조의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步이다.’라는

    기사이다.

    통일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 투쟁에 들어

    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은 당 병력 4만 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 주장성은 이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

    으로, 신라 북쪽 변방을 지키는 방어의 거점이었다. 2007년 발굴조사에서 길

    이가 50m나 되고 벽체두께가 2m, 기와무게가 20kg이나 되는 세계 최대 규

    모의 군창지가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대몽고 항쟁1231년 8월 몽고는 고려를 침공하였다. 1231년 12월 개경을 포위한 몽고군

    은 계속 남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렀다. 이때 남한산성은 몽고군으로부

    터 두 세차례 공격을 받았으나, 광주부사 이세화의 지휘하에 군민이 굳게 단결

    하여 이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광주성에 대한 공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몽고군은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남하하였고 그 후 몽고와 고려조정 간에 화의가

    이루어져 1232년 정월 요동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몽고군이 다시 침입해 왔

    고, 흔히 몽고군의 2차 침입으로 불리는 이때는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군이 남한

    산성을 침공하였다. 당시 몽고군은 모든 전략을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뛰어

    난 전술을 구사한 이세화 앞에선 몽고의 대병력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 남한산성 행궁 하궐지 전경 ]

    [ 통일신라 기와저장소 ]

    [ 남한산성 행궁 뒤편의 고려 건물지 2]

    [ 남한산성 행궁 뒤편의 고려 건물지 1 ]

    [ 몽고군의 전투모습 ]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축성남한산성의 수축논의는 조선초기부터 계속되어 왔으나, 백성이 받을 고충을 생각하여 계속 미루어져 왔다. 본격적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한 때는 이

    괄의 난과 후금의 위협이 거세지자 인조 2년(1624)에 이르러 총융사 이서에게 옛터를 따라 축성할 것을 명하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가 되었고, 여장이 1,940여개, 옹성 3개, 대문이 4개, 암문이 16개, 그리고 군포가 설치되었다. 우물

    80개, 샘 45개가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왕이 거처할 행궁도 함께 축조되었고 객관인 인화관도 함께 지어졌다. 그리고 한흥사와 국청사 등 10개 사찰이

    창건되었으며, 이후 남한산성 내에는 불교문화가 꽃피웠다. 이 같은 시설이 갖추어졌기에 병자호란 당시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13만 대군의 청군에 맞서 47일간 항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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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이후의 남한산성1950년대에 들어 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행

    궁터에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물산을 전시한 경기도 물산진열관이 지

    어졌다. 남한산성을 유지보수하기 위한 별다른 조치는 취해지지 않다가 남한산

    성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75년

    부터 그동안 방치되었던 남한산성 문화재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 정비가 시작되

    면서였다. 1997년까지 성곽 5.1km를 보수하면서 남한산성은 조금씩 제 모

    습을 찾아갔다. 그리고 1974년 광지원리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되고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

    고, 자가용이 보급되면서 남한산성은 볼거리가 있고 찾기 편리한 서울 인근의

    유수한 문화유적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구한말 항일의병과 남한산성경기도 의병들은 1896년 봉기하여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남한산성을 점

    거한 의병진은 광주, 이천, 양근의 의병부대로 구성된 연합의병부대였으며, 그 수

    는 1,600명에 달하였다. 의병들은 삼남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 후

    일본군을 물리치고 고종을 환궁시킬 계획이었으나 중간에 좌절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은 1907년 의병의 근거지로 쓴맛을 본 일본이 산성의 무기를 수거하

    고 화약 현지폭파를 단행하면서 사찰이 불에 타 소실되고, 산성내 많은 시설물

    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3.1운동을 비롯하여

    해방운동을 활발히 펼쳐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터전으로 남아있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1636년 12월 청 태종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이미 청군 선발대가

    도착한 것을 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산성으로의 피난이 워낙 급박하게

    이루어져 미쳐 식량을 운반하지 못하고, 전국 각지에서 구원병들이 일어났으나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궤멸되어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상태

    가 되었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확인한 조정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성밖으로 나가 항복을 하였다. 패전 원인은 조선군은 1만 2천명 정

    도였으나 조선의 10배에 달하는 청의 병력과 군사의 숙련도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청의 군대에 비해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남한산성과 같은 보장지가 있

    었기에, 왕실이 피신하여 47일간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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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군이 사용한 현자총통 ]

    [ 청군이 사용한 홍의포 ]

    [ 일제강점기 수어장대 - 조선고적도보 ]

    [1961년 산성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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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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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문화재

    현황

    구분 지정번호 문화재명 지정 년월일 역할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1963.1.21 성곽

    사적 제480호 남한산성 행궁 2007.6.8 행궁

    구분 지정번호 문화재명 지정 년월일 역할

    유형

    문화재

    제1호 수어장대

    1972.5.4

    군사시설

    제2호 숭렬전

    사당제3호 청량당

    제4호 현절사

    제5호 침괘정 읍치시설

    제6호 연무관 군사시설

    문화재자료제14호 지수당

    1983.9.19원유시설

    제15호 장경사

    사찰기념물

    제111호 망월사지 1988.12.12

    제119호 개원사지 1989.12.29

    국가 지정

    도 지정

  • 남한산성 南漢山城 은 우리나라 산성축성술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남

    한산성의 지리적인 여건을 보고 『여지도서黎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천작지

    성 天作之城’이라 하였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

    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하였다. 『택리지 擇

    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

    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

    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8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남

    한산성은 내부가 넓고 평탄하며, 80여 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

    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여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

    의 병력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구조적으로도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이 갖추어야 할 구비시설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본성 외에 봉암성, 한봉성 등 2개의 외성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가 있다. 원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대를 설치하여 화포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에

    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

    성된 여장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와 숯을 묻어 둔 매탄처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국가사적 제57호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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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

    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성축성기법의 교과

    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최근에는 각종 역사 드라마가 산

    성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

    드는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남한지南漢志』에서는 남한산성의 규모를 본성 성벽의 안 둘레는 6,290

    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군데의 군포, 4군데의 장대가 있

    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둘레를 환산하면, 한 자의 길이가

    20.81cm인 주척으로 안 둘레는 7,854m이고, 바깥둘레는 9,10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벽 외곽 기단

    부를 기준으로 하는 것과 여장 안쪽 기저부를 중심으로 하는 것, 여장

    의 옥개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데 그 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이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다. 여장 옥개중심

    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는 둘

    레가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12만 6,637㎡이다. 부속시설

    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km에 달한다.

  • 본성 남한산성에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제외한 중심성을 본성本城 이라고 한다. 본성의 범위는 대

    체로 신라의 주장성과 인조 대에 수축한 남한산성이 상호

    겹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축조

    는 남문과 북장대를 기준으로,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구분

    하여, 동남성은 축성의 총책임자인 이서의 휘하 장군인 이

    회가 맡았으며, 서북성은 도총섭 벽암대사의 책임 하에 승

    병들이 맡아서 쌓았다.

    해발 497m인 청량산의 외곽을 감싸 안으며 해발 484m

    지점의 등고선을 따라가며 돌아나가다가 북쪽으로 거의 일

    직선상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가 해발 450m지점에서 서문

    을 이룬다. 이 곳에서 다시 56m 정도 올라가 능선을 따라

    돌아가며 24.6m 정도 돌출하여 각루의 형태를 이루고 능

    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는데 남북의 주능선에서 갈라지

    는 지점에 연주봉옹성이 축조되어 있다.

    한봉성 한봉성漢峰成은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의 정상부까지 구축된 외성이다. 이곳은 인조 2년(1624) 본성 축조시에 축성 구간에서 빠진 곳으로서 병자

    호란 이후 숙종 19년(1693) 수어사 오시복이 신축하였다.

    신남성 신남성新南成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검단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격대라고도 하며, 본성과 마주하는 까닭에 대봉이라고도 한다. 돈대

    는 성을 쌓을 여건이 안 되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시설물을 말한다.

    이곳은 남한산성 동쪽의 한봉과 함께 산성의 방어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지점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인들이 이 곳에 호준포와 홍이포를 설치하고 방

    포를 하였는데 포탄이 행궁의 기둥을 맞히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암성 봉암성蜂巖成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을 말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벽이 넓게 조망된다. 병자

    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군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적이 성 내부의 허실을 파

    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공격의 직접적인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이러한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 부윤 윤지선이 4월 1일

    에 축성을 시작하여 40여일 만인 5월 9일에 끝마쳤다. 봉암성에는 모두 4개의

    암문과 2개의 포대 및 치성 등이 구축되어있다.

    옹성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

    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남쪽에 제 1, 2, 3남옹성, 동쪽과 북쪽

    에 연주봉옹성, 장경사신지옹성이 설치되었다.

    본성과외성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 한봉성 ] [ 신남성 ]

    [ 봉암성 ] [ 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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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문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의 기능은 물자를 운반하고 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에서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로 남한산성

    은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매우 많은 성에 속한다. 암문

    은 본성에 11개가 있고, 봉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성문 성문城門은 성을 드나드는 주출입구이다. 성문의 숫자나 위치는 성곽의 입지여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동서남

    북 사면에 하나씩 4대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문(좌익문)은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매우 놓았던 성문의

    하나이다. 북문(전승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

    고, 서문(우익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

    와 함께 통과하여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

    였던 문이다. 남문(지화문)은 4대문 중 유일 하게 현판이 남

    아있는 문이다.

    여장과 치 여장女墻은 체성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

    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포루 포루砲壘 는 포를 쏠 수 있는 공간으로 양난(임진, 병자)이후 조선의 전법전략이 신무기인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개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성축조에도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었으며, 축성기법도 화포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장대 장대將臺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동장대내.외,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5군데가 있었으나 현재

    까지 남아 있는 장대는 서장대(수어장대) 하나뿐이다.

    성곽에 구축된 각종

    시설물들

    [ 암문 ]

    [ 남문 ][ 여장 ] [ 치 ]

    [ 포루 ] [ 장대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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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行宮국가사적 제480호

    남한산성을 쌓은 이후 광주부의 고을을 산성 안으로 옮김으로써 산성의 위상은 확립되었다. 더욱이 남한산성내의 행궁은 인조 갑자년(1624) 산성을

    축성할 때 함께 지어진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다. 행궁은 크게 상궐과 하궐로 구성되어 있고 좌전과 우실, 재

    덕당, 한남루, 인화관 등 모두 70여 동에 달했다고 한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이 73칸 반, 하궐이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행궁은 임금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서 ‘행재소’라고도 한다. 남한산성의 행궁도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나 효종의 능인 영릉에

    참배하기 위하여 인조 2년(1624) 9월 서장대 아래쪽에 세워졌다. 병자호란 때에는 19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인조

    가 머물렀으며, 숙종 임금이나 영조·정조의 영능 전배 길에도 머물렀던 곳으로서 다른 어느 행궁보다도 역사의 흔적이 깊이 남아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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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행궁권역(내행전, 외행전, 한남루)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규모는 정면 7칸에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 건물이다.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양 옆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대청을 제외

    한 3면으로 퇴가 구성되어 있다. 이는 창경궁의 침전인 통명전, 환경전, 경춘

    정과 동일한 평면으로 궁궐 침전의 법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다만 동궐도

    를 보면 창경궁의 침전은 개방된 공간으로 기단주위로 가퇴를 설치하여 수직군

    이 지킬 수 있도록 하였지만 남한산성의 내행전은 담으로 둘러쌓아 부속시설도

    담 밖으로 설치하는 폐쇄적인 구조이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건물로 정당이라고도 하였다. 규모는 정면 7칸에 측면 4

    칸으로 상궐의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면적이 내행전은

    167m인 반면 외행전은 142m으로 약간 작다. 이는 상궐보다 위계를 낮추기

    위함으로 보이는데 공포형식도 외행전은 부리가 없는 물익공으로 하였다.

    한남루는 1789년에 유수 홍억이 행궁입구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운

    2층 누문이다. 원래 궁궐의 제도는 삼문이라 하여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처

    들어가는 것인데 그전에는 대문에 해당하는 외삼문과 중문만이 있던 것이 한남

    루라는 누문을 대문으로 세우며 법도를 완성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행궁내 주요건물의 수가 18동으로 사주문과 협문까지 합하면 33개 동에 이른다. 이러한 행궁내 건물들

    은 건물의 용도별로 행궁권역, 좌전권역, 관아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아권역(좌승당, 일장각, 인화관)좌승당과 일장각은 모두 순조대에 건립한 광주유수의 집무시설로 좌승당은

    1817년 유수 심상규가 정면 6칸, 측면 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고, 일장각은

    좌승당을 세우고 12년 뒤인 1829년에 유수 이지연이 정면 4칸, 전후퇴칸을

    둔 측면 3칸으로 전체 8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이중 좌승당은 앉아서도 싸우

    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심상규가 지은 것인데 좌승당을 건립한 1817

    년은 병자호란이 끝나는 1637년의 3주갑(180년)이 되는 해로 기존 건물을 수

    리하면서 관아 관련 시설물을 건립하였다.

    인화관은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읍치를 옮긴 1624년에 전체 68칸의 규모로 목

    사 유림이 건립한 객사건물이다. 원래 객사는 각 고을 중앙에 세워 전패와 궐패

    를 놓고 매월 음력 초하루날과 보름날에 임금이 있는 궁궐 쪽을 향해서 배례하

    여 서울에 있는 임금에게 충의를 다지는 곳이다. 또한 양 옆에 익헌을 건립하여

    조정에서 내려오는 귀한 손님이 유숙하는 곳이다.

    좌전영역(정전, 영녕전)행궁의 주축은 산세를 따라 동향을 하고 있는 반면 좌전은 제례시설의 예에 따

    라 행궁의 북쪽 산자락 아래에서 남향으로 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인데 전후칸이 퇴칸으로 되어 전체평면 크기는 10칸이다. 좌전이라

    는 명칭 또는 별궁, 별전 등이 논의 되었지만 결국 봉안처가 행궁의 좌측에 위

    치하므로 좌를 붙이되 예의 의미를 지닌 묘를 감추고, 전을 붙여 사용한 것이다.

    좌전은 우실과 함께 남한산성행궁이 일반적인 행궁으로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

    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상징적인 건물이다. 아쉽게도 우실터에는 현

    재 집수시설이 들어서 훼손되어 있는데 차후 계획을 세워 좌전처럼 복원하여

    야 할 것이다.

    [ 좌승당 ]

    [ 복원중인 한남루 전경 ]

    [ 2002년 복원된 내행전 ]

    [ 좌전 전경 ]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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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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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

    각으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내.외), 서, 남, 북의 5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

    이다. 청량산 정산(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

    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 할

    수 있다. 당초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

    으며 남한산성의 수어를 맡았던 수어청(전, 좌, 우, 중, 후

    의 5관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

    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

    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7일간

    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1751)에는 유수 이기진이 왕

    명으로 서장대 위에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

    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

    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 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

    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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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숭렬전崇烈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숭렬전崇烈殿 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시고 음력 9월 5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16년

    (1638)에 지어졌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렬이라고 쓴 현판이 내려졌다. 가장 위쪽에 온조왕을 모신 본전이 있으며 아래쪽으로 이서 장군을 모

    신 부전과 제기와 제사용품을 보관하던 전사청 건물이 있다. 협문 아래쪽으로 교육의 장소인 강당과 정문인 솟을삼문이 있다. 숭렬전은 신분이 다

    른 왕과 신하를 함께 모신 것이 특이한데, 이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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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숭렬전 제향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명망이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

    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숭렬전에서는 매년 음력 9월5

    일에 제향을 올리고, 매월 삭망(매월 1, 15일)에 참봉과 유사가 분향례를 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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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청량당淸凉堂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淸凉堂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사연)가 전해진다. 이회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으로 이회는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때에 동남쪽

    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

    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달

    래게 하였다. 본당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와 이회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

    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 후 새로 만든 것이다.

    청량당 내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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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현절사 제향병자호란 당시 척화의 의리를 내세워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

    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과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가 배향된 현절사에서 매년 9월 10일에 제향을 올린다.

    이 사당은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

    제 등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나라에서는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

    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1693) 봄에 사액되었다.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침괘정枕戈亭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枕戈亭 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

    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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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연무관演武館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연무관演武館 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

    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30㎡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 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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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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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당地水堂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지수당

    장경사

    장경사長慶寺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약 500m 거리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경기

    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장경사는 대웅전과 종무소, 산식각, 종각, 요

    사체 2동, 탑 등으로 구성되어 사찰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10개의 사찰

    모두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적게 참화를 당한 장경사 하

    나만이 당시의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절 뒤에 철쭉이 많고 노

    송 숲에서는 송이가 난다. 진남루 남쪽에는 망대가 있으며 올라가 보면 그윽한

    경치가 여러 절 중에 으뜸이다.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

    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 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

    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1925)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

    여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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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현재의 망월사

    현재의 개원사

    망월사지望月寺址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개원사지開元寺址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성내의 남쪽에 위치하는 사찰로 개원사 일주문 안의 우측에 있는 사찰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사는 인조 2년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했던 본영 사찰로 창건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소실되고 새로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남한산성 10개의 사찰 중 가장 오래 된 고찰로 고려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

    다. 그러나 ‘남한지南漢志’에서 기록하고 있는 옛 모습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

    다. 아마 이 곳도 일제의 무기, 화약 수거령에 예외적인 사찰이 되지 못하고 그

    때의 환란을 피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그 자리에 사찰을 신축하

    여 그 명맥을 잇고 있다.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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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남한산성 탐방로는 도심에서 가장 가깝고 잘 보존된 역사와 자연, 문화가 숨 쉬

    는 곳이다. 남한산성 탐방로 5개 코스를 따라 역사와 함께 소요하는 1코스(생

    명의 길), 2코스(행궁과 함께하는 법도의 길), 3코스(기억과 함께하는 반추의

    길), 4코스(성곽과 함께하는 의지의 길), 5코스(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을 걸으며 시공을 넘나드는 남한산성 이야기와 생명, 법도, 반추, 의지, 미

    학이 함께 있는 길을 걸어보자.

    이야기가 있는 남한산성 길

    연주봉옹성

    암문(5)

    서문

    병암남성신수기비

    어정(형제우물)

    수어장대

    암문(6)

    청량당무망루

    숭렬전

    좌전

    취성암

    영월정

    재덕당한남루 연무관

    북문

    현절사좌승당

    상궐 내행전

    침괘정

    남문

    남한산성 역사관

    제1남옹성제2남옹성

    제3남옹성

    산성종로영춘정

    매바위

    제 1코스 ㅣ 역사와 함께 소요하는 생명의 길

    제 2코스 ㅣ 행궁과 함께하는 법도의 길

    제 3코스 ㅣ 기억과 함께하는 반추의 길

    제 4코스 ㅣ 성곽과 함께하는 의지의 길

    제 5코스 ㅣ 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1 코스/ 역사와 함께 소요하는 생명의 길

    숲이 가진 생명력과 산성 곳곳에 전

    하는 역사를 배우고 느끼는 코스로

    산성종로를 출발하여 침괘정, 영월

    정을 거쳐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이

    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 피톤치드

    가득한 산길을 걸으며 숲의 충만함과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이야기를 만나

    는 길이며 생명이 함께 하는 길이다.

    2 코스/ 행궁과 함께하는 법도의 길

    남한산성 행궁을 소개하고 조선 제16대

    인조 임금의 고뇌와 숙종의 자신감, 영

    조 정조의 문화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행궁이야기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구절을 되새기며 걷는 길이자 백제

    의 시조 온조대왕의 꿈이 함께하는 길이

    다. 남한행궁을 둘러보고 숭렬전을 올

    랐다가 영월정을 지나 산성종로로 돌아

    오는 길이다.

    3 코스/ 기억과 함께하는 반추의 길

    병자년(1636) 전쟁의 기억을 반추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길이다. 기억과

    함께하는 반추의 길에는 비상시를 대비

    해 군사훈련과 무술연마를 하던 연무

    관, 조선 선비의 절개를 돌아보게 하는

    현절사, 터만 남은 동쪽 지휘소 동장대

    지, 성안을 꿰뚫을 수 있는 곳 벌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4 코스/ 성곽과 함께하는 의지의 길남한산성의 절반 거리를 성곽을 따라 걷게 되는 길로 산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길이다. 성곽 둘레를 수놓는 여장과 울창한 나무들이 계절의 아름다움

    을 담아낸다. 남문을 시작으로 천주사지, 수어장대, 병암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길은 탐방로의 전반부에 해당하고, 서문에서 연주봉 옹성을 지나 북문으로 내려

    오는 길은 탐방로의 후반부다.

    5 코스/ 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옹성이 몰려 있는 성곽의 남동쪽 길을 따라 펼쳐진다. 남문에서 시작해 3개

    의 옹성을 차례로 지나 동문을 거쳐 지수당을 들렸다 출발점 산성종로로 가

    는 구간이다. 옹성의 생동감 넘치는 형태와 옹성이 자아내는 예술적 아름다

    움을 누릴 수 있다. 옹성 미학을 따라 가는 길은 다른 산성이 가지지 못한

    남한산성만의 매력이 넘치는 길이다.

    동장대지

    벌봉

    암문(3)

    지수당

    동문

    수구문

    29

    Nam

    hansanseong

  • 30

    Nam

    hansanseong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2009년 3월에 출범하여 남한산성을

    역사.문화와 자연이 조화된 고품격 문화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하여 “역사와 문

    화콘텐츠가 흘러넘치는 명소 만들기, 고증을 바탕으로 한 세계문화유산 만들

    기, 아름다운 자연공원 만들기” 등의 3대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희 사업단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과 고증을 바탕으로 한 문화재 복원 등의

    문화와 전통을 연구.보존 하는데 힘쓰고 다양한 전통문화 향유와 체험프로그램

    을 통한 새로운 지역문화 중심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이 소중한 문화유산과 천혜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고품격 문화유적지

    가 될 수 있도록 세계적 수준의 역사문화.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하여 우리나라

    를 대표하는 역사문화명소로 재창조하고자 합니다.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 한 산 성

    CONTENTS

    04 남한산성 소개글

    05 남한산성의 가치

    06 남한산성의 역사

    10 남한산성 지도

    11 지정문화재 현황

    12 남한산성

    14 본성과 외성

    15 성곽에 구축된 각종 시설물들

    16 남한산성 행궁

    18 수어장대

    20 숭렬전

    22 청량당

    23 현절사

    24 침괘정

    25 연무관

    26 지수당·장경사

    27 망월사지·개원사지

    28 이야기가 있는 남한산성 길

    30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남한산성의 심볼마크인 ‘역사어울림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의 성돌에 새겨진

    자연(산).역사(성곽).문화(기와)의 참 아름다운 어울림을 표현한 것이다.

    남한산성을 이루는 하나의 성돌이면서 동시에 남한산성 전체공간을 의미한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켜내면서 생생히 담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참 아름다운 어울림’을 성돌에 새겨진

    산과 성곽과 기와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산위에 남한산성을 쌓고

    산성안에 사람들의 마을과 문화와 문화재가 생겨남을 상징하였다.

    ㅣ 발행일 2010년 4월 10일 ㅣ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ㅣ

    주소 464-816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 전화 031-777-7500 / 팩스 031-748-2801 / 홈페이지 www.ggnhss.or.kr

  •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남한산성

    464-816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Tel. 031-777-7500 Fax. 031-748-2801 www.ggnhss.or.kr

    정가 : 2,000원

    남한산성 내지.pdf남한산성 표지.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