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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1)

    朴 現 圭 (順天鄕大)

    Ⅰ. 서 론

    Ⅱ. 房山 穀積山과 고려인의 불

    사 활동

    Ⅲ. 穀積山 般若禪寺의 제반 모

    Ⅳ. 조선승 適休의 월경과 조선

    조정의 대책

    Ⅴ. 조선승 適休의 穀積山 般若

    禪寺 창건

    Ⅵ. 결 론

    Ⅰ. 서 론

    현 중국 수도 북경에는 옛 한국인이 사찰을 세우거나 불사 활동을

    전개한 유적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원나라 때 南城의 興福寺,1) 彰

    義門 바깥의 大報恩光敎寺,2) 湛露坊의 髙麗大聖慶禅寺,3) 金城坊의 法

    王寺,4) 宛平 池水村의 金孫彌陀寺5) 通州 張家灣의 高麗寺6) 등은 대도

    (북경)와 그 주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세웠던 사찰이다. 大天源延聖

    * 順天鄕大學校 學術硏究 支援論文.

    1) 益齋亂藁 권4, 大都南城興福寺偈 .2) 稼亭先生文集 권2, 京師報恩光敎寺記 .3) 人天眼目 重修人天眼目後序 . 髙麗大聖慶禅寺는 보물 703호 藏乘法數를각판한 湛露坊 壽慶寺와 동일한 사찰임.

    4) 稼亭先生文集 권4, 大都天台法王寺記 .5) 稼亭先生文集 권2, 京師金孫彌陀寺記 .6) 日下舊聞考 권110, 京畿通州三 중 通州志.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36寺는 고려승 順菴義旋, 大崇恩福元寺는 海圓, 廣濟寺는 懶翁이 각각 주

    석했던 곳이다. 永寧寺는 太古普愚가 설법했고, 石佛寺는 충선왕이 머

    리를 깎은 곳이다. 명나라 때에 들어와서도 조선인들은 북경에서 불교

    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조선 출신 태감 鄭同이 香山 洪光寺를 세

    웠다.7)

    필자는 일전에 房山 石經山 華嚴洞에서 고려 승 慧月이 보수한 경

    판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8) 혜월이 경판을 보수할 때 대공덕자로 나선

    고려인들이 있었다. 고려인들은 석경산과 가까운 穀積山에 불사에 나

    서 사찰을 중건하였다. 곡적산은 많은 불교 유적들이 있어 북경불교계

    에서 성지로 꼽고 있다. 그 후 조선인이 다시 곡적산에 출현하여 불교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결론부터 도출하자면, 조선 숭유억불정책에 반

    발한 승 適休가 명나라로 들어가서 곡적산에 정착하며 般若禪寺를 세

    웠다.

    최근 북경 학계에 조선 적휴의 불사 활동을 담은 勅賜般若禪寺之

    記 비석이 보고되었다. 房山 지역연구가 楊亦武가 곡적산 유적지를

    조사하다가 勅賜般若禪寺之記 의 비문을 살펴보고 조선승 적휴가 반

    야선사를 세웠다는 사실을 밝혔다.9) 또 북경사를 연구하는 舒曉峰이

    곡적산과 고려승의 관계를 분석하는 자리에서 양역무가 기술한 勅賜

    般若禪寺之記 를 근거로 조선승 적휴가 반야선사를 세웠다고 했다.10)

    다만 이들은 적휴에 대한 인물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 고려인이 없

    는 곡적산에 조선승 적휴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궁금하

    게 여겼다. 한편 한국 학계에서 적휴를 포함하여 조선 승려들이 월경

    7) 朴現圭, 조선 출신 鄭同이 세운 北京 香山 洪光寺와 유람 작품 감상 (中國語文學 41, 嶺南中國語文學會, 2003.6), pp.81-98.

    8) 朴現圭, 高麗 慧月이 보수한 房山 石經山石經 답사기 (東北亞文化硏究 6,동북아시아 문화학회, 2004.4), pp.5-28.

    9) 楊亦武, 穀積山諸寺 (房山歷史文物硏究, 北京: 奧林匹克出版社, 1999.11),pp.233-252.

    10) 舒曉峰, 高麗僧人與元代穀積山靈巖寺 (史苑擷萃: 纪念北京史研究会成立三十周年文集, 北京: 北京史硏究會, 2011), pp.55-64.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37한 사건과 사적,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분석한 적이 있었다.11) 아쉽게

    도 적휴가 북경에 들어와 곡적산 반야선사를 창건했던 사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한중 양국의 선행 연구들을 모아 종합적으로 살펴보

    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승 적휴를 중심으로 월경 행적과 조선

    조정의 반응, 곡적산 반야선사의 창건과 현존 모습 등 제반 사항을 분

    석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곡적산에서 일어났던 한국 불교와의 관계

    와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고려 승려와 단월들이 활동했던 사

    찰과 유적, 그리고 기록도 함께 서술한다.12)

    Ⅱ. 房山 穀積山과 고려인의 불사 활동

    방산은 현 북경 서남쪽 외곽지에 소재한 區級 행정구획이다. 동쪽에

    는 널찍한 華北平原이 펼쳐져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太行山 지류에

    속하는 산들이 있다. 인류가 방산에 들어와 산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

    다. 周口店 龍骨山에서 4-5십만 년 전에 불을 사용한 北京猿人이라고

    불리는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연나라 때 방산 지역에 中都縣이 처음

    설치되었고, 서한 때에 동쪽을 분할하여 良鄕縣이 설치되었다. 금나라

    때 萬寧縣, 奉先縣 등으로 바뀌었고, 치소에 房山鎭을 두었다. 원나라

    때 승격하여 방산현이 되었다. 1958년에 현이 폐지되고 양향현과 합병

    해서 북경시에 소속된 區가 되었다.

    방산 북쪽에는 31개 행정촌과 2개 社區를 관할하는 靑龍湖鎭이 있

    11) 曺永祿, 重開山記 -泰安州普照禪寺重開山第一代雲公滿空禪師塔碑銘記 (東國史學 29, 東國史學會, 1995), pp.229-234; 徐仁範, 조선시대 승려들의 압록강 越境事件 (韓國思想과 文化 54, 韓國思想文化學會, 2010), pp.227-258.

    12) 현지답사는 두 차례 이루어졌다. 한 번은 2013년 10월 30일에 강릉 MBC 제

    작편성부장 朴泰三 일행과 함께 했고, 또 한 번은 동년 12월 22일에 현지 관리

    인 王忠과 함께 했다.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38다. 지명은 관할 지역에 소재한 청룡호에서 따왔다. 청룡호진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北車營村이 있다.13) 북거영촌에서 북쪽으로 바라

    보면 저 멀리 곡식을 쌓은 모습을 한 산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곡

    적산이다. 곡적산은 해발 711m이며, 西山 지구 大房山山脈에 속해 있

    다. 산 정상 부분이 마치 곡식을 쌓아놓은 형상에서 이름을 따왔다. 현

    행정구획으로 방산구와 門頭溝區 사이에 속해 있고, 방산 시내에서

    13km 정도 떨어져있다.

    북경시불교협회는 곡적산을 북경불교성지로 손꼽고 있다. 이곳은 풍

    광이 아름답고, 불적이 깃든 곳으로 알려져 불자들이 수련하기 좋은

    장소로 알려졌다. 오대 때 사찰이 처음 세워진 이래 많은 불자들이 곡

    적산에 찾아와 사찰을 세우고 불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곡적산

    곳곳에 사찰, 보탑, 석비, 석굴 등 불교 사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2013년에 北京市文物局에서 거금을 들어 곡적산 일대를 정비하는 작업

    을 펼쳤다.

    현 곡적산의 중심 사찰은 靈鷲禪寺이다. 영취선사는 고려인이 중수

    한 靈巖禪寺의 후신이다. 1981년 10월 1일에 방산현에서 영취선사와

    곡적산 각종 사적을 第一批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14) 돌계단 끝

    13) 북거영촌은 良鄕에서 19㎞, 또 坨里에서 6㎞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서북쪽으

    로 11㎞ 가면 河北鎭에 도착한다. 지하철 蘇庄驛에서 房36路를 타고 1.5시간

    정도 가면 북거영촌에 도달할 수 있다. 북경 시내에서 G4(원 京石高速)나 6環

    을 타고 王佐橋 출구에서 나와 S328을 이용하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북거영

    촌 마을 입구에 ‘北車營村’이라는 패방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 이곳에 생산된

    白梨(배)가 황궁에 진상되었고, 오늘날에도 백리, 살구, 감 등 여러 과수가 재

    배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전체 호수는 1,279호이고, 인구는 3,006명이다.

    전체 가구 중 2/3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4) 곡적산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북경 도심지와 그다지 멀지 않지만, 주변이

    온통 산악지대라 교통이 불편하여 불자 또는 등산객 외에 찾아오는 이들이 드

    물다. 북거영촌의 촌락 북쪽에는 곡적산으로 연결되는 산길이 있다. 고불고불

    하게 난 산길을 따라 걸어가면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에 빠지기 쉽다.

    다만 곡적산 곳곳에 건자재의 원료로 삼는 채석장이 펼쳐져 있고, 채석장을 드

    나드는 덤프트럭이 자주 지나가 사뭇 볼썽사납다. 8km 정도 걸어가면 산간에

    커다란 뜰이 펼쳐지는데, 그 입구 왼편에 새로 축조한 돌계단이 보인다. 이곳

    이 바로 靈鷲禪寺이다.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39에 산문이 있고, 산문 상단에 석물 ‘菩提場’이 상감되어 있다. 산문 안

    쪽에 채전이 있고, 그 안쪽이 천왕전이다. 천왕전에는 미륵불상이 놓여

    있고, 본전으로 들어가는 안쪽 통로의 상단에는 석물 ‘靈鷲禪寺’가 상

    감되어 있다. 본전 상단에는 석물 ‘普光明殿’이 상감되어 있다. 본전에

    는 석가불 3존상을 모셨다. 정면 벽면의 좌우에 파낸 커다란 홈에 각

    각 아난상과 가섭상을 모셨고, 좌우 측면의 하단에 파낸 커다란 홈에

    각각 18나한상을 모셨다. 벽면 사방에는 조그만 홈이 빼곡하게 나 있

    는데, 여기에 천불상을 모셨다. 본전 좌우에는 부속 건물이 있다. 東配

    殿의 상단에는 석물 ‘僧□□殿’이 상감되어 있다. 西配殿은 오래 전에

    허물어졌다가, 2003년 보수작업 때 다시 세웠다.

    사찰 곳곳에는 사찰의 중건 역사를 담은 비석들이 남아 있다. 산문

    안쪽의 왼편 뜰에 당간 지주가 있고, 그 뒤편에 1439년(명 정통 4)에

    如庵居士가 세운 勅賜靈鷲禪寺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 명 정통

    연간에 영취선사를 세우고 英宗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내역이 기술되어

    있다. 본전 앞뜰의 동편문 앞에 1440년(정통 5)에 沙門行壽가 세운 勅

    賜靈鷲禪寺興建記 비석이 있다. 비문 부분이 오랜 풍파에 심하게 마

    멸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勅賜靈鷲禪寺記 과 비슷

    하다.

    본전 뒤뜰에 비석 2기가 있다. 우측 비석은 1081년(요 大康 7)에 세

    운 大遼析津府良鄕縣張君於穀積山院讀藏經之記 이고, 좌측 비석은

    1350년(원 至正 10)에 세운 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碑 이다. 大

    遼析津府良鄕縣張君於穀積山院讀藏經之記 에는 1078년(대강 4)에 良鄕

    張文絢과 부인 田씨가 많은 전답을 내어 穀積山院에서 契丹大藏經독송 대회를 연 사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926-930년

    (당 천성 연간)에 곡적산에 사찰이 처음 들어섰으나 훗날 훼멸되었고,

    요나라 때 곡적선원을 세웠다. 대강 연간에 주지 懷本이 불법을 널리

    알리자, 주변의 많은 신도들이 모여 들어 사찰이 한때 흥성했다.

    이 이후 세월이 흘러가고 조대가 바뀌면서 사찰이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여 건물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원말에 이르러 大都(북경)에 거주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40하는 고려인들이 나서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중건하고, 사찰 명칭을 영

    암선사로 바꾸었다. 여기에 관한 기록은 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

    碑 에 자세히 나와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50.0㎝이다. 이것을 세분하면 비신이 159.0㎝,

    이수가 74.5㎝, 노출된 좌대가 16.5㎝이다. 가로는 93.0㎝이고, 두께는

    13.8㎝이다. 귀부의 전체 길이는 188.1cm이고, 지면에 노출된 좌대의

    높이는 16.5cm이다. 이수부에는 좌우측에 반룡 두 마리가 여의주를 잡

    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 상단부 일부가 파손되었다. 비액에는

    篆字로 ‘大元勅賜靈巖寺碑’라고 새겨져 있다. 전자 1자의 크기는 7.0 X

    8.0cm이다. 비문은 翰林侍講中奉大夫知制誥同脩國史臣 李好文이 짓고,

    글씨는 翰林學士承旨榮祿大夫知制誥兼脩國史知經筵事臣 許有任이 쓰

    고, 전액은 翰林學士承旨榮祿大夫知制誥兼脩國史知經筵事臣 張起巖이

    썼다. 비석을 세우는 역사의 감독자는 大府監太卿 朱完者帖木兒이다.

    아래에 비문의 내용을 고려인의 사적을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1346

    년(원 지정 6)에 中貴人 張氏가 현몽에 따라 곡적산을 찾아보니 사찰

    이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資政院使 高龍普에

    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고룡보가 대단월로 자칭하고 중건 역사에 나섰

    다. 毘盧殿, 羅漢殿, 선방, 객방, 종각, 주방 등 여러 건물들을 새로 세

    우고, 또 물을 기르기 위해 105척이나 되는 우물을 팠다. 이듬해에 중

    건 역사를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원 至正帝가 靈巖禪寺라는 사액을

    보내고, 고려 승 天湛에게 妙德長老라는 존호를 주며 승려들을 이끌어

    가게 했다.15)

    15) 李好文, 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碑 : “又二百有餘歲, 棟宇存者十不三四,

    支柱旁倚, 訟唄閴然. 有張氏者, 中貴人也. 自言夢至玆山, 見諸佛像悉委草莽. 旦

    往視之, 果與夢協, 爲之愴然. 白其事榮祿大夫資政院使高龍普, 龍普曰: 嘻, 信如

    是耶? 吾其爲大壇越乎? ······乃至正六年夏五月出已帑庀事, 戒工晝作夜, 惟凡黯

    闇者新之, 腐折者易之, 其加於舊者曰毘盧殿, 曰羅漢殿, 曰禪室, 曰賓次, 曰鐘閣,

    曰齋廚. 井一, 鑿石深百有五尺. 於是雲飛山涌, 金碧晃耀, 非昔日之靈巖矣. 明年

    春三月十五日寺成, 設華嚴大會, 燃燈十萬, 飯僧千人. 以落之初寺惟僧一人守之,

    至是集者殆滿百數. 天子聞之, 制以高麗僧天湛爲海印圓明通數妙德長老大師, 以統

    其衆. 師容儀淸朗, 執行修潔, 學者咸尊禮之.”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41대단월 高龍普는 일명 龍鳳이고, 고려 煤場 사람이다.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고려 출신 奇氏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았

    다. 資政院使로 있으면서 원 내궁의 비호를 받으며 권력을 휘둘렀고,

    또한 친원파와 더불어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 했다. 1347년(충목왕 3)에

    어사로부터 국정을 전횡한다는 명목으로 실각 당했다. 1362년(공민왕

    11)에 공민왕이 보낸 鄭之祥에 의해 주살 당했다.

    고룡보는 대도 일대의 불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大元勅賜上

    萬穀積山靈巖禪寺碑 에서 보듯이 대단월로 자칭하며 황실의 안녕과 번

    성을 위해 영암선사의 불사 공덕에 나섰다고 했다. 또 곡적산과 머지

    않는 곳에 소재한 石經山 雷音洞 석굴과 석경을 보수하는데 많은 금전

    을 시주했다. 1341년(고려 충혜왕복위 2)에 고려승 혜월이 석경산에 들

    렸다가 뇌음동 석굴과 석경이 훼손된 것을 근심하자, 고려인 高龍卜

    (高龍普), 申黨住(申當住)가 대공덕자로 나서면서 조정 대신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석문을 보수하고 석경 5점을 보각했다. 고려인들이 뇌음

    동을 보수한 사적은 원 賈志道의 重修華嚴堂經本記 에 자세히 적혀있

    다.16)

    감독자 朱完者帖木兒(朱完澤帖木兒, 朱完之帖木兒)는 고려인들이 영

    암선사를 중건하기 2년 전에 곡적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1344

    년(지정 4)에 곡적산을 찾아 천연동굴로 조성된 석실을 방문하고 백옥

    으로 만든 석가불, 협시불, 16나한상 등 불상을 안치했다. 이듬해 金鼎

    住가 나서서 방장이 머물 수 있도록 동굴을 파서 석실로 꾸몄다. 대도

    에 머물고 있던 고려 李穀이 이들의 요청으로 조성 과정을 담은 기문

    을 작성했다.17) 또 1343년(지정 3)에 고려 출신 趙芬, 신당주 등이 내

    16) 賈志道, 重修華嚴堂經本記 : “至正改元夏四月, 有高麗國僧名慧月者, 因禮文殊

    大士於五臺, 衲衣錫杖, 幽然脫俗. 路經房山縣西鄕里東峯古梵刹, 名曰小西天華嚴

    堂. ······ 惜其將來浸泯靜琬之功, 而安能復其初, 以斯感發化緣之念, 志堅而心篤.

    幸□□政院使資德大夫龍卜高公, 匠作院使大夫黨住申公, 慧月拜禮, 詳陳其事. 公

    等允其言, 興大功德, 德布施淨財千餘緡, 命慧月施勞菫工, 修石戶經本, 不月餘而

    俱□□得.” 최근 석경산 골짜기에서 重修華嚴堂經本記 잔석이 발견되었다.

    또 뇌음동 동굴 안에는 혜월의 사적을 기술한 표지석을 따로 세워져 있다.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42놓은 거금과 토지로 天台法王寺를 낙성했다. 이때 朱完者帖木兒는 朴

    瑣魯兀大와 함께 長明燈을 세울 비용을 내놓았다.18) 현존 문헌에서 朱

    完者帖木兒가 고려 출신이라는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 고려 출신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인이 영암선사를 중창할 때 만든 현존 유적으로 1346년(원 지정

    6) 때 착공된 우물과 중건 사적을 담은 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

    碑 가 있다. 사찰 東便門 바깥쪽에 우물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또 영암선사 동쪽 봉우리에 고려 廣州 출신 朴瑣魯兀

    大가 세운 석탑이 있었다. 朴瑣魯兀大는 충선왕 때 원 내관으로 들어

    가서 儀鸞局大使 등을 거쳐 同知大都路北怯怜口諸色民匠都摠管府事가

    되었다. 노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몇 년 전에 얻은 사리를 내놓고 장인

    을 불러 곡적산에 석탑을 세웠다. 浮屠의 법에 따라 석탑에 감실이 조

    성해놓고, 그 속에 사리를 안치해놓았다. 감실 외형은 팔각으로 만들

    고, 여러 부처의 형상을 새겨놓았다.19) 또 충숙왕 시기에 자신이 젊었

    을 때 놀았던 고향 광주의 神福寺를 재건하여 돌아가신 부친 朴堅과

    모친 張氏의 명복을 기리는 원찰로 삼았다.20)

    영암선사에 머물렀던 승려들은 모두 고려 출신이었다.21) 1354년(공

    민왕 3)에 無學自初가 영암선사에 머물고 있던 懶翁慧勤을 찾았다. 이

    들은 한동안 영암선사에 머물면서 불도 정진에 나섰다.22) 아쉽게도 고

    려인이 중건한 영암선사가 채 1백년이 지나지 않아 철저히 황폐화되었

    다. 기록 부족으로 영암선사가 황폐화된 원인을 알 수 없으나, 혹 명

    건국 초 徐達이 이끄는 군대가 원 대도(북경)에 진입한 다음 도성을

    17) 李穀, 稼亭先生文集 권4, 大都糓積山新作羅漢石室記 .18) 李穀, 稼亭先生文集 권4, 大都天台法王寺記 .19) 稼亭先生文集 권3, 京師糓積山靈巖寺石塔記 .20) 稼亭先生文集 권3, 大元高麗國廣州神福禪寺重興記 .21) 稼亭先生文集 권16, 題西山靈巖寺 자주: “寺僧皆鄕人.”22) 卞季良, 檜岩寺妙嚴尊者無學大師碑 : “此年甲午正月, 到法泉寺參懶翁, ― 遊

    歷五臺, 再見懶翁於西山靈巖寺, 留數載. 其在定也, 至有當食而不知者, 翁見之曰:

    汝却死了耶.”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43철저히 훼멸시킨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23) 1436년(명 정통 1)에

    眞空이 곡적산을 지나가다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어 劉普虛, 白覺志,

    王德正과 함께 불사 중건 역사에 나섰다. 1439년(정통 4)에 역사 작업

    을 마쳤고, 명 조정으로부터 靈鷲禪寺라는 사액을 받았다.24) 영취선사

    는 옛 영암선사의 자리에서 약간 앞쪽으로 옮겨지었다.

    Ⅲ. 穀積山 般若禪寺의 제반 모습

    명대에 들어와서도 곡적산은 한국 불교와 계속 인연을 맺었다. 뒤에

    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조선승 적휴가 곡적산에 들어와 恩禮超然居士

    의 도움을 받아 般若禪寺를 창건했다. 반야선사는 영취선사로부터 북

    쪽으로 1.3km 정도 떨어져 있다. 영취선사 북쪽에 산골짜기를 따라 축

    대로 쌓아 만든 평지가 펼쳐져 있다. 첫 번째 축대가 있는 장소가 옛

    圓通寺 자리이다. 원통사는 명 姚彪가 주도한 사찰이며, 1447년(명 경

    태 5)에 착공되어 1454년(정통 12)에 완공되었다. 현재 관세음보살을

    모신 圓通殿과 명 어비 2기만 남아 있다. 원통전 뒤편 북서쪽에 높은

    봉우리가 보이고, 그 봉우리 위에 9층으로 된 탑이 보인다. 이 탑이 반

    야선사 壽塔이다. 이 일대가 반야선사의 유적지이다.

    반야선사 수탑 옆에는 1443년(명 정통 13) 8월에 주지 本之가 사찰

    을 창건하게 된 역사 과정과 사찰 모습을 담아놓은 敕賜般若禪寺之記

    가 세워져 있다. 이 비문 가운데 창건 당시에 세웠던 건물과 배열, 불

    23) 舒曉峰이 曺兢燮의 巖棲先生文集, 許愈의 后山先生文集을 인용하며 원말시기에 영암선사가 훼멸된 모습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曺兢燮과 許

    愈는 조선말에 활동한 사람이다. 이들이 말한 영암사는 합천 영암사로 곡적산

    영암선사와 무관하다. 舒曉峰, 高麗僧人與元代穀積山靈巖寺 , p.62.

    24) 行壽, 勅賜靈鷲禪寺興建記 : “遂欲居是山, 視之殿堂門廡頹然就毁, ······ 陳公

    行過玆山, 愛其淸勝, 遂大興土石之營, 腐替乃就□陶磚伐石, 琢輳成堂, 圖示永世.

    ······ 而佐成其事者, 則劉普虛, 白覺志, 王德正也.”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44상과 장경, 동굴과 우물 등 제반 모습을 적어놓은 부분을 옮겨본다.

    光大殿, 殿內奉彌陀聖像, 壁繪三十三祖. 殿之左右設祖堂・伽藍・廚庫・□□・雲堂俱備. 東西列鐘鼓二樓, 轉角廂廊俱備矣. 光大殿前天王殿, 外圖金剛墻, 中爲圓通殿, 殿內奉觀音聖像, 繪十八羅漢, 左爲雨華室, 右爲正受

    堂, 二□轉角立□左□之室. 東之山岩, 香水竹林泉畔, 建臥雲軒, 以爲方丈.

    西之山岩建慈雲洞, 洞內奉觀音石像一尊, 洞之前竪六角寶藏殿, 殿內奉毘盧

    像. □室彩繪司龍天女, 置四大部經. 後靠懸崖, 立宣明殿, 殿內奉釋迦□, □

    安大藏菩薩. 藏經殿之左右岩, 承恩・布應二堂. 寺之後, 大山之嶺----, 寺之西南, 感應敢□泉, 盈流不竭. 寺之南石井一眼, 通深三十三, □淸香美, 春

    夏常溢. 寺之東南建藥師殿. 壽塔一座, 祭明賢□. 其塔之陽建大字般若心經

    一所, 殿門外建碑一座, 高□尺□寸.25)

    光大殿에 아미타불상을 받들고, 벽에는 33조사를 그려놓았다. 본전 좌

    우에 조사당, 가람전, 주방, □□, 운당을 모두 마련했다. 동쪽과 서쪽에

    종루와 고루를 배열하고, 轉角과 행랑을 모두 마련했다. 광대전 앞은 天

    王殿이다. 바깥에 금강벽을 그려놓고, 안에 원통전을 만들었다. 전각 내에

    관음성상을 받들고, 18나한도를 그려놓았다. 좌측은 雨華室이고, 우측이

    正受堂이다. 두 轉角에 □□하고, 좌측은 □□室이다. 동쪽 산 암반의 香

    水竹林泉 가에 臥雲軒을 짓고, 방장의 거처로 삼았다. 서쪽 산 암반에 慈

    雲洞을 파서 동굴 안에 관음석상 1기를 받들었다. 동굴 앞에 六角寶藏殿

    을 세우고, 그 안에 비로상을 받들었다. □□실에 채색으로 司龍天女를

    그려놓고, 사대경전을 안치했다. 뒤쪽 절벽이 있는 곳에 宣明殿을 세우고,

    전각 안에 석가불을 모시고, 大藏菩薩을 □□했다. 장경전 좌우 바위에

    承恩, 布應 두 당을 세웠다. 사찰 뒤쪽 커다란 산봉우리에 -----. 사찰

    서남쪽에 感應敢□泉이 있는데, 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사찰 남쪽

    에 한 石井이 있는데, 깊이가 33척이다. 맑고 향기롭고, 봄여름 내내 가득

    찬다. 사찰 동남쪽에 藥師殿과 壽搭 1기를 세우고, □□ 명현을 제사지낸

    다. 그 탑의 남쪽에 大字般若心經殿을 세웠고, 전각 바깥에 비석 1기를

    세우니, 높이가 □척 □촌이다.

    이 기록을 중심으로 삼아 반야선사의 유적들을 살펴본다. 반야선사

    수탑은 봉우리 정상에 세워져 있다. 팔각 누각 형식이며, 누각 모서리

    마다 풍경을 달아놓아 ‘鈴檔塔’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원래 9층이

    었는데, 1970년대 무너져 기단부와 탑신 2층만 남았다. 2013년에 북경

    시문물국에서 9층으로 복원했다. 석질은 한백옥이다. 탑신 일층의 남북

    25) 楊亦武, 房山歷史文物硏究, pp.250-251.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45쪽에는 아치 형태로 된 출입구가 있고, 안쪽에서 상단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층 이상 매 층마다 팔면에 모두 바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나 있다.

    탑 앞쪽에는 방형 모습을 한 비석 1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칙사

    반야선사지기 이다. 높이가 175.5cm이고, 너비가 75.6cm이며, 두께가

    7.8cm이다. 비석 전면을 보면, 육안으로 전자로 새긴 비액 ‘般若寺記’라

    는 글자를 알아볼 수 있으나, 소자로 된 비문은 오랜 풍파로 심하게

    마멸되어 글자 윤곽조차도 확인하기 힘들다. 후면 비면 부분은 상대적

    으로 덜 마멸되어 상당수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 비음기 말미에 “正

    統十三年八月吉日 本山住持沙門本之”라는 입비연도와 성명이 보인다.

    반야선사수탑에서 서편을 바라보면 계곡을 따라 축대가 겹겹이 쌓

    아져 있다. 이곳이 바로 예전에 반야선사 본전과 부속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오늘날에도 이 일대를 둘려보면 예전에 사용했던 기와, 석재

    등 일부 잔재물을 확인할 수 있다. 본전터 남쪽에는 깊이가 33척인 石

    井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우물로 사용하고 있다. 관리원 왕충의 말에

    의하면 물의 양이 사철 내내 일정하다고 했다.

    본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왼편에 암석으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그 아래가 六角寶殿이 있었던 곳이다. 육각보전

    뒤편의 암반에 사찰 창건 당시에 조성된 慈雲洞(일명 月靈洞)이 보인

    다. 동굴 안쪽 서벽에는 漢白玉을 사용하여 형태로 만든 불단이 있다. 원형 테두리의 지름은 153㎝이다. 빗면 사각형 상단의 길이는 97

    ㎝, 하단의 길이는 128.5㎝이고, 높이는 9.6㎝이다.

    또 자운동에서 계곡을 따라 조그만 올라가면 석벽 아래에 동굴 2개

    가 동서로 나란히 나있다. 이 동굴 2개가 옛 반야선사의 承恩堂과 布

    應堂임이 분명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동굴이 어떤 당인지는 알 수 없

    다. 서편 동굴의 깊이가 대략 5m이고, 너비가 10m이다. 동굴 안쪽에

    한백옥으로 된 석물 1기가 놓여있다. 길이는 122.2cm이고, 폭은

    49.2cm이며, 두께는 12.8cm다. 해서체로 ‘戒定惠’라고 새겨져 있고, 그

    좌측에 소자로 ‘光祿大夫柱國都總雲閑居書’라고 새겨져 있다. 이 석물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46은 원래 동굴 안쪽에 상감된 편액이다. 동편 동굴의 깊이가 대략 10m

    이고, 너비가 5m이다. 이곳에 화로 형태의 흙벽이 있고, 그을음 자국

    이 남아 예전에 승려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동굴 뒤편에는

    또 하나의 조그만 동굴이 있는데, 앞쪽이 탁 튀여 있어 산 전체를 바

    라보는 전경이 아주 좋다.

    동굴 앞 쪽이 선명전과 장경전의 유지이다. 또 남쪽으로 난 골짜기

    입구에도 동굴 1개가 있다. 이것도 반야선사를 창건할 때 만들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골짜기 입구에 소재한 좌측 산줄기에 香水竹林泉이라

    불리는 샘이 하나 있다. 그 옆이 옛 臥雲軒 자리이다. 동남쪽에는 얼마

    전에 폐가된 농가 1채가 있는데, 이곳이 약사전의 유지이다. 농가 마당

    에는 옛 반야선사에서 사용된 석재와 조각의 잔재물이 놓여있다.

    이밖에 양역무의 기록과 사진을 따르면 반야선사에서 사용했던 여

    러 석물이 있었다. 자운동 불단 안에는 한백옥으로 된 관세음보살상이

    놓여 있었다. 또 동굴 안에 예전에 동굴 문미로 사용된 석물이 있었는

    데, 그곳에 해서체로 ‘慈雲洞’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또 10여 년 전에

    한 농부가 본전 터에서 발견한 移嵩山祖庭大少林寺宗派之圖 라는 석

    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석물은 사찰 창건 당시인 1448년(정통 13) 8

    월에 조성되었다. 한백옥으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상단에 해서체

    대자로 “移嵩山祖庭大少林寺宗派之圖”라고 적혀 있고, 하단에 해서체

    소자로 원 중엽에 숭산 소림사에서 활동한 福慧부터 이어지는 선종의

    법맥을 적어놓았다. 즉, 福慧 - 了本 - 周洪 - 道慶 - 淸淨 - 湛寂 -

    德行 - 妙體 - 心朗 - 性明 - 衷正 - 謹憨 - 雪庭 - 引汝의 순이다.

    필자의 이번 답사에 관리원 왕충과 함께 했지만, 아쉽게도 현 소재지

    가 불분명하여 비석을 확인하지 못했다.

    Ⅳ. 조선승 適休의 월경과 조선 조정의 대책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471421년(세종 3)에 조선 승려들이 월경하여 명나라로 탈출하는 사건

    이 일어났다. 이해 1월 16일 평안도 妙香山 內院寺에 거주하는 승 適

    休가 信休, 信淡, 惠禪, 洪迪,26) 海丕, 信然, 洪惠, 信雲 등 8명과 함께

    명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산골짜기를 따라 북쪽 압록강으로 향해 떠났

    다. 3월 14일에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에 들어갔다. 적

    휴 등 승려 9명들이 요동을 관장하는 요동도사에게 자신들이 월경하게

    된 사유를 담은 소장을 올렸다. 이들이 올린 소장의 요점을 정리해보

    면 다음과 같다.

    자신(적휴 등)들은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옮겨 다닌 승려이

    다. 초근과 나무껍질을 먹으며 불도를 부지런히 닦았고, 이제 성제의

    성은을 입어 같은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 3월 14일에 天門이 열려 뗏

    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도착하니, 신령한 학을 타고 허공에

    서 내려오고, 큰 바다에 빠졌다가 향기 나는 배를 만난 것과 같아 몹

    시 기뻤다. 가지고 온 금전은 없으나, 법보인 定光如來 사리 2개, 본국

    왕사 懶翁和尙 사리 1개가 있으니 이를 바친다. 부디 황제에게 아뢰어

    불법을 펼 수 있도록 바란다.27)

    먼저 적휴라는 인물부터 살펴본다. 적휴의 본명은 李中貞이고, 경상

    도 합천군의 아전이었다. 스승 處愚로부터 출가하여 적휴라는 법명으

    로 승적에 올랐다. 적휴의 친형도 승려인 점으로 보아 집안이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훗날 적휴가 묘향산 내원사에 들어갔고, 이

    때 여러 명의 제자를 거느렸다. 1421년(세종 3)에 여러 승려들을 이끌

    고 월경하여 요동으로 들어갔다. 이번 월경 사건으로 의금부에 붙잡힌

    적휴의 제자는 信行, 信琦인데, 이들의 법명에 모두 ‘信’자가 들어가 있

    다. 적휴와 함께 월경한 승려 가운데 법명에 ‘信’자가 들어간 4명(信休,

    信淡, 信然, 信雲)은 적휴의 제자일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적휴 등이 월경한 사실을 파악한 조선 조정은 이 사안을 매

    26) 세종실록 3년 6월 17일(무신)조 예부의 啓에는 洪迪을 洪適이라고 기술되었음.

    27) 세종실록 3년 5월 19일(경진)조.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48우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하게 관련 조치를 취했다. 우선 해당 부

    처로 하여금 월경 과정을 조사하여 주모자 적휴와 관련된 사람들을 붙

    잡아오게 했다. 이때 적휴의 당형 尙强(剛), 妹壻 李克, 師僧 處愚, 제

    자 信行, 信琦 등이 잇달아 붙잡혀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의금부는 이

    들을 문초하여 월경 사정과 사전 인식 여부를 알아보았다. 나중에 이

    들이 적휴가 월경한 것에 대해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방면

    되었다.28)

    조선 조정은 명나라로부터 적휴 등을 본국으로 쇄환하기 위해 외교

    적 해결 방안을 강구했다. 6월 17일에 예조가 요동으로 도망친 적휴

    등을 되돌려달라고 명나라에 소청하는 계를 올리는 방안을 올리자, 세

    종은 이를 윤허했다.29) 또 6월 29일에 세종과 상왕 태종이 柳廷顯, 朴

    訔, 李原, 卞季良, 趙末生, 尹淮, 金益精, 權蹈, 郭存中, 曺崇德 등과 함

    께 水亭에서 모여 정사를 논할 때 도망친 적휴 등을 명나라에 요청하

    여 본국으로 추쇄하는 사안을 의논했다.30)

    이 해 7월 2일에 주문사 曹崇德이 적휴 등 승려의 쇄환을 위해 주본

    을 가지고 명나라 북경을 향해 떠났다. 아래에 주본에 적힌 적휴 등의

    죄상을 적어본다. 적휴는 본국 호적에 실린 아전이며 부역을 피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승적에 올린 범법자이다. 적휴와 함께 월경한

    승려들은 범법자 적휴가 유인해서 도망친 자들이다. 본국 범죄자와 추

    종자를 본국으로 쇄환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이다.31)

    주본에 적힌 적휴 등 승려들을 쇄환해야 한다는 요점은 오늘날 국

    제협정서인 범죄인인도협정과 유사하다. 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

    자가 외국으로 도망친 경우 본국의 관계 기관에서 도망친 외국 국가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면, 그 외국 국가는 범죄자를 체포하여 추방시

    28) 세종실록 3년 6월 18일(기유)조.29) 세종실록 3년 6월 17일(무신)조.30) 춘정속집 권2 연보 3년 신축년 6월조 및 권4 부록: 세종실록 3년 6월29일(경신)조.

    31) 세종실록 3년 7월 2일(임술)조.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49킨다.

    그러나 주본에 적힌 적휴 등의 죄상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조선 조

    정에서 陜川郡事 裵契의 보고에 따라 적휴가 승적에 올리는 일이 발각

    되었다고 말했으나, 그 내막에는 적휴를 쇄환시켜야 한다는 조선 조정

    의 입장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합천군사 배설이 조정의 명을 받아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입장을 고려하여 적휴가 승적을 몰

    래 올렸다는 내용을 과대 포장해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적휴는 훗날 곡적산에 들어가 사찰을 세울 정도로 불교에 대한 신

    념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설령 적휴가 승적을 몰래 올렸다고 하더

    라도, 이 일 때문에 월경이라는 중대한 결심을 내릴 정도는 아니다. 관

    청에서 승적을 몰래 올린 자에 대한 처벌 수준은 통상 해당 승려를 환

    속시키고, 심한 경우라도 태형이나 단기 옥살이에 그친다. 반면에 월경

    을 주도하는 자에게는 최고 극형이라는 엄중한 처벌이 내려진다. 뒤에

    서 언급하겠지만 중국 풍광을 주유할 목적으로 월경했다가 자진 귀국

    한 승 海禪에 대한 처벌 수준을 논하는 자리에서 형조는 극형에 처해

    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32)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휴가

    처벌을 피하여 월경을 결심하였다고 하더라도,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

    이 편한데, 굳이 다른 승려들을 이끌고 가야할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다른 승려들은 주본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특이한 죄목이 없는 단

    순 추종자들이다. 이들이 특별한 죄도 없는데, 적휴를 따라 월경할 필

    요가 있었을까?

    이날 사간원은 적휴 등의 월경 사건으로 승려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억제하는 강력한 억불정책을 펼치기를 바라는 소를 올렸다. 그 요지를

    적어본다. 이번 월경 사건은 적휴의 경우처럼 승려들이 자유롭게 이동

    하고 사사로이 붕당을 맺은 데에서 나왔다. 앞으로도 적휴와 같은 경

    우가 계속 나타나면 그 폐단이 점차 커지게 된다. 이동이 자유로운 승

    려들이 국경을 마음껏 드나들면, 범죄자들도 승려로 변장하게 되니 폐

    32) 태종실록 6년 6월 14일(임신)조.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50단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승려들을 經濟六典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관리 감독한다. 해당 관원에서 모든 승려를 조사 등록시켜 자유롭

    게 이주하지 못하게 한다. 이주할 때는 色掌僧人의 통솔 아래 해당 관

    원에 통보하여 이주 거리, 기일 등을 적은 통행장을 받게 한다. 사간원

    의 소장을 본 세종은 이러한 조치가 너무 엄격하거나 시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윤허하지 않았다.

    적휴 등이 요동도사에게 올린 소장에는 불도를 닦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조선에서 강력하게 펼쳐진 억불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적휴 등의 소장을 본 조선

    조정의 논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적휴 등이 명나라에 들어간 것은

    본국에서 불법이 높지 않기에 명나라에 의지하여 도를 행하고자 한 것

    이라고 여겼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쓰러뜨린 조선조는 새 왕조를 이끌어 갈 사상

    적 이념이 필요했다. 고려 말부터 크게 타락하여 많은 폐해상이 드러

    난 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상 체계를 구축한 성리학을 국가통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건국 초기만 하더라도 억불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이성계 자신도 불교 신도였고, 무학자초가 천도사업에 공헌하는 등 불

    교와 친밀한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태종 때에 들어와서 불교 정책이 크게 변했다. 사찰과 승려에게 주

    어진 각종 혜택을 철폐하고, 전국 242개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을 혁파

    시키는 등 강력한 억불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이후부터 조선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불교계가 한 두 차례 부흥할 계기를 맞이하기는 하였지

    만, 전반적으로 숭유억불이라는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심한 타격을 받

    고 제대로 된 위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에 반해 명나라는 불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홍무제(주원장)는 승려 출신으로 숭불 정책을 펼쳤다. 뒤이어

    정권 장악에 성공한 영락제(주체)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 자주 불

    사를 일으켰다. 남경 소재 臺輔, 靈谷寺, 天界寺 등 사찰을 중수하고,

    釋迦耶協 등 천하의 고승들을 모아 강독 활동을 전개했다. 또 사신들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51을 조선으로 보내어 한반도 소재 불상이나 사리를 구해오게 했다.33)

    1406년(영락 4)에 조선 출신 태감 黃儼, 奇原 등을 한반도에 보내어 제

    주도 法華寺의 삼존불상을 수도 남경으로 가져와 大報恩寺에 안치했

    다.34) 1407년(영락 5)에 黃儼, 奇原 등을 사리를 구해주기를 바란다는

    칙서를 조선에 보냈다. 이때 조선 조정이 보내준 사리의 숫자가 이성

    계가 보낸 303개를 포함해서 모두 8백 개나 되었다.35)

    조선에서 억불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된 초기에 일부 승려들이 불교

    가 한반도에 더 이상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명나라로 몰래

    잠입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하였다. 조선 승려들이 조정의 억불정

    책에 반발하여 월경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펼친 것은 이번 적휴 등이

    처음 아니었다. 1417년(태종 17)에 조선 승려가 몰래 월경하여 요동으

    로 들어간 사건이 발생했다. 요동으로부터 사건을 이첩 받은 禮部郎中

    은 조선 승려가 본국에서 죄를 범하고 도망친 것이라고 여기고 조선으

    로 환송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영락제는 주청에 따르지 않고 일단 사

    찰에 머물게 하였다.36) 깊은 佛緣을 맺고 있는 영락제가 불법을 찾아

    자국에 들어온 조선 승려들을 환송시키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雲公滿空禪師가 여러 승려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북경

    에 들어갔다. 이 해에 천추사 申槪가 통사 편에 보낸 보고에서 본국

    승려 11명이 몰래 京師(북경)에 들어가 영락제를 알현했고, 영락제가

    이들에게 金陵(남경) 天住寺(天界寺의 오기)로 보내 머물도록 했다.37)

    신개가 말한 본국 승려들은 泰安州普照禪寺重開山第一代雲公滿空禪師

    塔碑銘記 (이하 雲公滿空禪師塔碑 로 약칭함)에 기술된 雲公滿空禪師

    와 그 일행 승려이다.

    33) 朴現圭, 제주도 法華寺 三尊佛像과 南京 大報恩寺의 관계 (中國史硏究,58, 中國史學會, 2009.2), pp.129-154.

    34) 태종실록 6년 4월 19일(기묘), 7월 16일(계묘)조 등.35) 태종실록 7년 5월 14일(정묘), 18일(신미), 20일(계유), 6월 6일(무자)조.36) 태종실록 17년 윤5월 9일(갑자)조.37) 태종실록 17년 7월 4일(정사)조.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52雲公滿空禪師塔碑 는 1521년(명 정덕 16)에 산동 泰山 서남쪽 산기

    슭의 普照禪寺 경내에 세워진 비석이다. 높이가 190cm이고, 너비가

    78cm이다. 근자에 高柄翊, 朴泰根 등에 의해 비문의 실체가 알려져서

    국내외 학계와 불교계의 주목을 받았다.38) 아래에 비문에 적힌 운공만

    공선사의 일대기를 약술해본다.

    운공만공선사는 승려 몇 명과 함께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으로 와

    서 영락제의 환대를 받아 남경 天界寺로 보내져 주좌가 되었다. 1428

    년(선덕 3)에 운공만공선사가 칙령에 의해 천하의 조사들을 찾아 예불

    하였다. 泰山에 이르러 고찰을 찾아보다가 竹林寺를 건립하고, 폐허화

    된 普照禪寺를 다시 일으켰다. 이후 20여 년 동안 주석하고 불법을 널

    리 전파하며 사찰을 크게 일으켰다. 1463년(천순 7)에 보조선사에서 75

    세의 일기로 입적했다.39)

    이와 경우가 좀 다르지만 조선 승려의 월경 사건이 더 있었다. 1406

    년(태종 6)에 成州 승海禪이 咸州에서 승 戒月이 중국 풍토가 좋다는

    말을 듣고 함께 東北面을 거쳐 요동으로 월경하였다. 얼마 후 북경으

    38) 西海건너간 朝鮮僧 ······ 明 朝野서 추앙 (한국일보 1989년 5월 2일자;“고려승 滿空” 普照寺안내판에 환호 , 한국일보 1989년 5월 9일자).

    39) 泰安州普照禪寺重開山第一代雲公滿空禪師塔碑銘記 원비문: “泰山之前, 州治

    西北, 有古刹曰普照禪寺, 自唐宋以來有寺焉. 屢經兵火之燹, 基址猶存也. 永樂間,

    粵高麗僧雲公滿空禪師等數僧, 航海而來, 達於京師, 欽奉聖旨, 勅賜金襴袈裟, 及

    送光祿寺筵宴, 遣官送赴南京天界寺住坐, 宣德三年亦欽奉聖恩, 著禮部各給圖牒壹

    道, 勅令天下參方禮祖. 禪師因登泰山訪古刹, 始建竹林寺壹所, 殿宇聖像俱以完成,

    復覩普照禪刹頹零旣久, 乏人興作, 禪師遂駐錫, 禁足二十餘歲, 以無爲之化, 俾四

    方宰官長者捐資舍賄, 鼎建佛殿・山門・僧堂. 伽藍煥然一新, 宇內莊嚴, 紺像金碧交輝. 僧徒弟子及湖海禪衲依法者, 何止數千也. 名公钜卿信向, 以師禮待之. 天順

    七年閏七月初二日, 勝果以畢, 雲公囑弟子洪道・洪因等, 諦聽吾偈: 吾年七十五,萬物悉歸土, 光明照十方, 無今亦無古, 偈畢, 坐脫而逝, 三昧火自焚. 洪因睹師色

    身, 五色瑞氣盈滿其空, 舍利堅固百有餘顆. 念師有出世之恩, 無以報孝, 發心建塔

    樹碑, 徵予爲記. 固辭之再四, 故述禪師始終之由, 以記歲月雲耳. 扁舟航海兮觀光

    之美, 聖恩賜度兮五湖皆知, 參方禮祖兮爲斯道也. 登壇受戒兮紹佛階級, 建立法幢

    兮宣揚正化. 禁足坐禪兮導引愚迷. 宰臣信向兮道德彌高. 鬼神欽仰兮戒月孤巍, 雙

    履西歸兮世緣一盡. 坐脫立亡兮去來無疑. 闍維焚化兮三昧自顯. 五色祥光兮瑞色霏

    霏, 留傳萬古兮燈燈相續. 弟子發心兮建塔鐫碑. 師資之理兮出世爲最. 表示後昆兮

    孝義爲奇. 大明正德十六年歲在辛巳秋菊九月旦日.”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53로 들어간 역관 康邦祐가 귀국하는 길에 해선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유인하였다. 해선이 다시 귀국하자, 東北面都巡問使 朴信이 체포

    하여 서울로 압송시켰다. 형조는 해선을 무단 월경한 죄를 물어 극형

    에 처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으나, 태종은 혜선이 자진 귀국한 점

    을 정상 참작하여 태형 1백대를 때리고, 乃而浦 船軍으로 충군시켰

    다.40)

    이와 같이 조선 승려들이 잇달아 월경하여 명나라로 들어가자, 조선

    조정은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조선 조정이 적휴 사건을 논하는

    자리에 세종과 태종, 중신들이 모두 참석했고, 사간원은 승려의 이동을

    제한시키고자 재발 방지책을 내놓았다. 태종 때 최소한 두 차례 조선

    승려들이 월경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에는 사건에 대해 특별한

    방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계속 발생되자,

    조정에서는 사태가 엄중하다고 여기고 강력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조

    선 조정이 적휴 등을 쇄환하기 위해 주문사 조승덕을 명나라로 파견하

    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불교계에 승려들이 월경했다는 풍문이 나돌았을 것으로 추측

    된다. 명나라를 다녀온 사절단이나 국경 관계자들에 의해 승려들의 월

    경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나왔을 것이고, 불교계에서도 이

    러한 풍문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특히 적휴 등이 거주한 묘향산 내원

    사는 평안도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 중의 하나이고, 또한 요동으로 통

    하는 길목에 소재하기 때문에 승려들의 월경사건에 대한 풍문을 접할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적휴 등이 월경을 결심하게 된 과정에 4년 전, 두 차례 발생한 월경

    사건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알 수 없지

    만, 여러 정황상 적휴 등이 최소한 월경에 대한 풍문을 들었을 가능성

    이 다분하다. 명나라로 월경하는 중대한 결심을 할 때, 통상 사전에 명

    나라에서 자신들을 받아줄 수 있다는 상당한 정보나 굳은 믿음이 있어

    40) 태종실록 6년 2월 4일(을축), 5월 23일(임자), 6월 14일(임신)조.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54야 한다. 명나라는 불법 월경한 일반 조선 백성들을 다시 조선으로 추

    방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조선 승려인 경우는 운공만공 등처럼 명 사

    찰에서 수련할 수 있는 특별 조치를 취해주었다. 적휴 등이 불교 교단

    에 나도는 운공만공 등의 월경 사건을 사전에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휴 등은 월경할 때 명나라가 자신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보물, 즉 법보 定光如來 사리 2개, 고려왕사 懶翁慧

    勤 사리 1개 등을 가지고 갔다. 불사리와 고승 사리는 일전에 명 영락

    제가 조선 출신 태감을 한반도에 보내어 구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성종 연간에 조선 승려의 월경 사건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승 志

    淸의 속성은 金이고, 아산 출신이다. 부모 사후에 승 義通에 수양되어

    불문에 귀의했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지리산에서 10여 년 거처했

    다. 1470년(성종 1)에 평안도 碧潼郡 陁羅介山寺로 옮겼다가 곧이어 월

    경하여 요동 지역의 藥山寺, 薄羅里 龍潭寺 등지에 거주하였다. 1471년

    (성종 2)에 司譯院正 崔有江이 승 지청이 요동 지역에서 詩僧으로 활

    동하는 소문을 듣고,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뢨다.41) 승 지청의 월경 건에

    관해 조선 조정은 매우 신속하게 처리했다. 이 사실을 안 이튿날 요동

    도사에게 이자하여 승 지청의 동향과 추쇄에 나섰다.42)

    이때 요동도사는 영락 연간과 달리 조선 측에다 적극적으로 협조적

    으로 임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락제는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

    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여러 호불 조치를 행하거나 월경한 조선 승려에

    게 우대 조치를 취해졌다. 성화 연간에 이르러 요동 지역은 이미 안정

    화가 되었고, 또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정례화 되어 조선 측에서 요

    청한 자국민 추쇄 건을 즉각적으로 들어주었다. 요동도사는 승 지청의

    소재지를 파악하여 체포했고, 또한 조선으로 압송시켰다.43) 의금부는

    승 지청을 추국한 뒤에 요동 잠입 죄가 곧장 사형에 처하고 그의 직계

    부모, 조부모와 형제를 모두 2천리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며 강경 조치

    41) 성종실록 2년 4월 20일(임술)조.42) 성종실록 2년 4월 21일(계해)조.43) 성종실록 2년 6월 2일(계해)조.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55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성종은 天變을 들어 극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

    고을의 종으로 영속시켰다.44)

    Ⅴ. 조선승 適休의 穀積山 般若禪寺 창건

    1421년(세종 3) 3월 14일에 적휴를 포함한 조선 승려들이 국경인 압

    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요동도사를 적휴 등을

    遼陽으로 이송한 다음 월경 사정을 문초했을 것이다. 명 조정은 요동

    도사의 보고를 들은 다음 적휴 등을 북경으로 이송시켰다. 일정상 5월

    말경에 적휴 등은 명 차관의 호송 아래 요양을 떠나 북경으로 향했고,

    6월 6일에 山海衛(현 진황도)에서 영락제의 탄신을 경축하기 위해 북

    경에 갔다가 귀국하는 聖節使 尹子當 일행과 조우했다. 7월 2일 조선

    조정은 월경한 적휴 등을 쇄환하기 위해 주문사 조승덕을 명나라로 보

    냈다. 이 이후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 문헌에는 더 이상 적휴 등 사건을 다루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27년이 지난 1448년(정통 13)에 세워진 勅賜般若禪寺之記

    에 적휴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비문 가운데 적휴 부분만 옮겨본다.

    朝鮮僧適休遠涉□□上國, 遊履此山, 心境相契, 指此而笑, 堪爲廬□. 臨風

    會恩禮超然居士, 遍布明聖, 同修梵刹.

    조선승 적휴가 멀리 □□을 건너 상국에 와서 이 산을 밟아 유력하였

    다. 심경이 서로 통하여 이곳을 가리키고 웃으며 가히 □□ 집을 지을 만

    하다. 바람결에 恩禮超然居士를 만나 밝은 성덕을 널리 알리고자 함께 사

    찰을 세웠다.

    적휴가 북경에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여러 사실을 알려준다. 영락제

    가 이번 월경 사건을 앞서 운공만공선사의 경우와 동일한 조치를 취해

    주었다. 적휴 등에게 중국을 찾아온 구법승으로 여기고 체류 허가를

    44) 성종실록 2년 6월 22일(계해), 12월 12일(기묘)조.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56내려 주었다. 반면에 조선 조정이 주문사 조승덕을 보내며 적휴 등을

    본국으로 쇄환해주기를 바라는 강력한 요청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이후 적휴의 행적은 운공만공선사와 비슷하게 전개되지 않았을

    까 한다. 운공만공선사는 영락제가 마련해준 사찰에서 한동안 머물다

    가 훗날 불적과 고승들을 친견하기 위해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다. 적

    휴도 사찰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하루

    는 방산 곡적산에 들어와 보니 이곳이 부처의 기운이 왕성하게 흐른다

    고 여기고 사찰을 세우고 주석할 마음을 가졌다. 때마침 심신이 깊은

    거사를 만나 함께 반야선사를 세웠다. 그리고 운공만공선사는 중국에

    서 입적했고, 적휴도 중국에서 입적했다. 나려 시대에는 고승들이 중국

    대륙에서 구법 행각을 끝내고 한반도로 돌아가 고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지만, 운공만공선사나 적휴는 환영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월경

    이라는 불법을 저지른 중대 범죄자로 처벌받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귀국할 의사를 아예 접고 중국에서 불도 수행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명 영락제 때 적휴를 비롯한 조선 출신이 잇달아 월경을 하여 사찰

    을 세웠지만, 불도 수행과 포교 활동이 해당 지역에 국한되어 그 영향

    력은 미미한 편이다. 중국 불교사를 살펴보면 신라 김교각, 무상, 원측

    등이 펼친 불교 사상과 역경 작업은 대륙 전역에 미칠 정도로 명성을

    크게 날렸지만, 조선 적휴, 만공 등은 책자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

    다. 게다가 적휴가 세운 반야선사가 훗날 제대로 보수 작업이 이루어

    지지 않아 각종 건물들이 모두 훼멸되는 불행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장차 해외 불교사를 살펴보는데 있어 반야선사가 조선 승려가 북경에

    서 세운 마지막 사찰이라는 의미 또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또 현존

    하는 반야선사탑이 북경시문물국에서 새로 보수할 정도로 불교 성지

    곡적산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Ⅵ. 결론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57

    한중문화교류사를 돌이켜보면 불교 교류가 매우 활발하고 이채로운

    꽃을 피웠다. 예전에 불법을 구해보고자하는 신념으로 바다를 건너 중

    국 대륙을 들어간 한국 승려들이 많았고, 또한 중국 대륙 곳곳에서 이

    들이 남긴 족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언급한 穀積山 般若禪

    寺도 한국 승려가 세운 사찰이다.

    곡적산은 북경 외곽지 房山에 소재한다. 이곳은 북경불교협회가 불

    교 성지로 꼽고 있고, 한국 불교와 인연이 깊다. 1346년(원 지정 6)에

    고려인 資政院使 高龍普가 中貴人 張氏로부터 穀積山院이 많이 훼손되

    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월로 나서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중건 역사에

    나섰다. 이듬해에 원 至正帝가 靈巖禪寺라는 사액을 보내고, 고려 승

    天湛에게 妙德長老라는 존호를 주며 사찰을 이끌어가게 했다. 그 후

    懶翁慧勤, 無學自初 등 비롯한 고려 승려들이 머물렀다. 명대에 들어와

    서 靈鷲禪寺로 바뀌었다. 오늘날 본전 뒤편에는 고려인들이 사찰을 중

    건한 내력이 담아놓은 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碑 가 세워져 있

    다.

    명대에 들어와서 곡적산은 한국 불교와 인연이 계속 이어졌다. 1448

    년(명 정통 13)에 곡적산에 들어온 조선승 適休가 이곳을 불적이 깃든

    장소라 여기고, 恩禮超然居士의 도움을 받아 반야선사를 세웠다. 오늘

    날 반야선사 壽塔(일명 鈴檔塔) 옆에는 적휴가 사찰을 창건한 사적을

    담아놓은 勅賜般若禪寺之記 가 세워져 있다. 적휴는 원래 평안도 妙

    香山 內院寺에 거처한 승려였다. 1421년(세종 3)에 승려 8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그의 행적이 한동안 사라졌다가 칙사반야선사지기 에 다시 출현하였

    다.

    고려 때 불교를 국교로 삼을 정도로 불법국토를 창출하였지만, 조선

    이 건국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춘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신앙

    환경이 급변했다. 조선 조정은 승려들이 도성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

    시키고 산속으로 내치는 억불정책을 펼쳤다. 건국 초기에 잇단 억불정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58책에 발발한 일부 승려들은 불교가 한반도에 더 이상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불교를 숭상하는 명나라로 몰래 잠입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1417년(조선 태종 17)에 조선 승려와 雲公滿空禪師 등 두 차례, 1421

    년(세종 3)에 적휴 등 한 차례, 조선 승려들이 잇달아 월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조정은 월경한 자국 승려들을 송환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명 영락제는 월경한 조선 승려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자국 사찰에

    서 불도를 수련할 수 있도록 특별 조치를 취해주었다. 조선승 적휴의

    사적은 전반적으로 운공만공선사의 사적과 흡사하다. 운공만공선사는

    월경한 이후 남경 天界寺에 머물다가, 1428년(선덕 3) 泰山에 들어와

    竹林寺를 새로 건립하고, 폐허화된 普照禪寺를 다시 일으켰다. 운공만

    공선사를 뒤이어 명나라로 월경한 적휴는 한동안 사찰에서 머물다가,

    1448년(명 正統 13) 곡적산에 들어와 반야선사를 세웠다.

    勅賜般若禪寺之記 에 기술된 창건 당시의 반야선사 모습을 보면,

    넓은 지역에 여러 불전을 세우고 동굴을 파서 불상을 안치했고, 또한

    壽塔을 세우고 장경을 보관하는 등 꽤나 커다란 규모를 갖추었다. 아

    쉽게도 훗날 황폐화가 되었다. 오늘날 반야선사 유지에서 옛 모습을

    보여주는 수탑, 慈雲洞, 비석, 석물, 와편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반야선

    사는 조선 승려가 중국에 세운 마지막 사찰이었다. 앞으로 한중 양국

    의 관련 기관에서 곡적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빠른 시일 아래

    정밀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見野見室: 癸巳乾月初一]

    李穀 著, 稼亭先生文集 (韓國文集叢刊 책3, 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88)楊亦武 著, 房山歷史文物硏究 (北京: 奧林匹克出版社, 1999)齊心 主編, 北京元代史迹圖志 (北京: 北京燕山出版社, 2009)舒曉峰 著, 高麗僧人與元代穀積山靈巖寺 (史苑擷萃: 纪念北京史研究会成立三十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59周年文集, 北京: 北京史硏究會, 2011)

    朴現圭 著, 高麗 慧月이 보수한 房山 石經山石經 답사기 (東北亞文化硏究 6,동북아시아 문화학회, 2004)

    徐仁範 著, 조선시대 승려들의 압록강 越境事件 (韓國思想과 文化 54, 韓國思想文化學會, 2010)

  • 中國史硏究 第92輯 (2014.10)160(Abstract)

    Korean Monk Jeokhyu’s Crossing the Border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Temple of

    Banruo at Guji Mountain in Beijing

    Park, Hyun Kyu

    The article is a writing which analyzes the process and the

    general aspects that Korean monk Jeokhyu crossed the border of

    Ming China, entered into Beijing, and established Temple of Banruo.

    Guji Mountain located at Fangshan in the outskirts of Beijing is

    a sacred place of Buddhism which has a deep connection with

    Korean Buddhism. Koreans who lived in Beijing and sponsors

    repaired on alarge scale a collapsed temple in 1346 and received the

    title of Lingyanchansi. Korean monks conmented until the end of

    Yuan dynasty. The connection between the mountain and Korean

    Buddhism continued. Jeokhyu entered into Guji Mountain in 1443

    and established together with Enlichaoranjushi Temple Banruo in a

    large scale. There is a tombstone called “The Record of Temple

    Banruo” which describes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the

    temple by Jeokhyu and the general aspects beside a pagoda in the

    temple. Unfortunately, the temple was destroyed later because of

    landfall. However, things such as pagoda, stonework, cave, and

    Buddhist statue remain.

    The process and trace that Jeokhyu crossed the border and

  • 조선 승 適休의 越境과 北京 穀積山 般若禪寺의 창건 (朴現圭) 161established the temple were similar with that of

    Ungongmangongseonsa. Some monks reputed the goverment' policy

    and took an extreme measure to go beyond the border of Ming

    China as Chosen goverment carried out a policy in which Buddhism

    was oppressed in the earlier period of Chosen dynasty. There

    occured twice incidents in which Korean monks including

    Ungongmangongseonsa crossed the border in 1417. Jeokhyu lived at

    Nawonsi in Myohyang Mountain together with eight monks crossed

    Aprok River and entered into Ming China. As the incidents that

    monks crossed the border occured continually, the court of Chosen

    considered it shaked the root of the state and decided to send an

    envoy to Ming. However, Emperor Yongle took an action to receive

    Korean monks and let them cultivate Buddhist doctrines because he

    has a deep connection with Korean Buddhism.

    주제어: 승 적휴, 곡적산, 반야선사, 영암선사, 영취선원, 불교, 월경, 고려, 조선

    關鍵詞: 僧適休, 穀積山, 般若禪寺, 靈巖禪寺, 靈鷲禪院, 佛敎, 越境, 高麗, 朝鮮

    Keywords: Monk Jeokhyu(適休), Guji Mountain(穀積山), Temple of Banruo(般若

    禪寺), Temple of Lingyan(靈巖禪寺), Buddhism(佛敎), Across the border,

    Goryeo(高麗), Joseon(朝鮮).

    (원고접수: 2014년 6월 27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4년 8월 8일, 수정원

    고 접수: 8월 9일, 게재 확정: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