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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23474E4C51FF274C377DE7.docx  · Web view왜 인터넷 역사를 봐야 하는가?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터넷도 계획과 우연, 성취와 좌절, 성의와 탐욕이

1 왜 인터넷 역사를 봐야 하는가?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터넷도 계획과 우연, 성취와 좌절, 성의와 탐욕이 뒤엉켜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다만, 그 방향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는 역사를 봄으로써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사회적 도구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이런 도구에 대한 통제는 카약 조종과 훨씬 더 비슷해졌다. 기술적 환경에 크게 좌우되는 물길을 따라, 빠르게 떠밀려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구들의 확산에 대해 약간의 통제력은 갖고 있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을 되돌리거나, 멈추거나, 하다못해 홱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가장 큰 도전은 목적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중심을 잃고 않고 몸을 똑바로 세우는 일이다. (셔키)

1.1 인터넷이란 무엇인가?

위키백과는 인터넷을 “TCP/IP 라는 표준 인터넷 프로토콜을 사용하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서로 연결되어 수십억의 사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체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 13) 이 정의에 따르자면 집에 있는 컴퓨터 두 대를 TCP/IP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네트워크 장비로 서로 연결했다고 인터넷은 아니다. 왜? 전지구적인 연결이 아니니까. 또한, 전화망은 전지구적인 네트워크이지만 TCP/IP 프로토콜을 쓰는 것이 아니므로 인터넷이 아니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파피루스와 프로토콜

이 글에서 프로토콜이라고 하면 통신 프로토콜을 줄여서 하는 말이다. 통신 프로토콜이란 컴퓨터 통신에서 서로 어떤 순서로 어떤 내용을 어떤 형태로 주고 받을 지를 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전자 메일 프로토콜의 경우에는

보내는 쪽 받는 쪽“안녕”

“안녕”“이 사람에게 편지 좀 보내려는데”

“그래”“보내는 사람은 이 사람이고”

“응”“편지 내용 보낸다”

“응. 다 보내고 끝이라고 얘기해” “어쩌고 저쩌고 끝”

“알았어 전해줄게”

대략 이런 식으로 주고 받기로 미리 정해져 있다. 원래 프로토콜은 (많은 서양 말이 다 그렇듯이)그리스에서 온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을 하였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자꾸 펼쳐보면 문서가 쉽게 망가지므로 두루마리 겉에 종이를 붙이고 여기에 문서 날짜 등을 적어 두었다. 그래서 굳이 펴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책을 철한 쪽에 책 제목을 인쇄해서 책꽂이에 쭉 꽂힌 상태에서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책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던 것이 외교 문서에서 조약의 초안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정식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미리 정한 절차(흔히 의전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로 현재는 쓰이고 있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TCP/IP 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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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는 인터넷 프로토콜(Internet Protocol)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여기서 인터넷이란 인터+넷(inter+net) 즉, “여러 네트워크를 서로 연결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1층에 주방이 있고 2층에 방이 있는 식당에 갔는데 방에 앉은 사람들끼리 메뉴를 정할 때에는 그냥 서로 소리로 얘기하면 된다. 하지만 정해진 메뉴를 1층에 전달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인터폰에 대고 얘기를 해야 된다. 같은 방에 있는 손님들이 하나의 네트워크이고 주방의 직원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라고 할 때 이 둘을 연결하기 위해서 인터폰을 쓴다는 규약(즉 프로토콜)이 곧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규약인 것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즉, IP 가 있기 때문에 내 책상 위의 컴퓨터가 우리 동네 인터넷 사업자 네트워크를 거쳐서 네이버나 다음까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편지를 부칠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보내는 데이터가 갈 목적지를 적어서 보내야 하는데 목적지를 숫자로 표시한 것을 (예를 들어, 192.168.0.1 이런 식으로 점으로 구분한 네 칸짜리 숫자로 표시한 것을) IP 주소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터넷 프로토콜만 지키면 인터넷에 연결된 어떤 컴퓨터끼리도 통신을 할 수 있다.

그럼 TCP 는 뭐냐? TCP 는 전송 조절 프로토콜(Transmission Control Protocol)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인터넷 프로토콜만 있어도 통신은 이뤄지지만 (1) 내가 보낸 것을 상대방이 받았는지 확인하고, (2) 가는 길에 정체 구간이 있으면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주는 등 더 원활한 통신을 돕는 “추가” 규약이다. 따라서, 거의 대다수의 인터넷 통신은 TCP 와 IP 를 같이 쓰므로 그냥 TCP/IP 라고 부르고 있다.

요즘은 컴퓨터 네트워크라고 하면 으레 인터넷을 일컫는 것이고 인터넷이 아닌 네트워크를 따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말 조차도 의미가 없어졌다.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네트워크가 인터넷이니까.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음악을 다운로드 받고 동영상을 감상한다고 했을 때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끼리의 연결 그것을 싸잡아 인터넷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럼 과거에도 그랬나?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컴퓨터 통신이라고 하면 하이텔(계속 이름이 바뀌었는데 시기에 따라 케텔, 코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코털은 아니고.), 천리안, 나우누리 등 일명 PC 통신을 의미했다. PC 통신은 인터넷 프로토콜(즉, TCP/IP)를 쓰는 것도 아니고 전지구적 네트워크도 아니므로 당연히 인터넷은 아니다.

1.2 인터넷의 제 1 원칙 – 가장자리에 권력을!

앞서 PC 통신은 사용하는 기술면에서 그리고 규모의 면에서 인터넷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썰렁한 차이 말고 (일반 사용자 측면에서) 진짜로 인터넷과 PC 통신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PC 통신에서는 PC 통신사(예를 들어, 하이텔)의 컴퓨터에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이 있고 사용자들은 자기의 컴퓨터에서 이 게시판에 접속하여 글을 올리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뉴스 서비스라고 생각해보면 (PC 통신 시절에 뉴스 기사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불확실한데 있다 치고) 신문사가 게시판에 뉴스 기사를 올리고 독자는 그 게시판에 접속하여 읽은 식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독자가 자신의 컴퓨터로 신문사의 (홈 페이지를 담당하는)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여 기사를 볼 수 있다. 즉, PC 통신에서는 PC 통신회사가 세상의 중심인 반면에 인터넷에서는 중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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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PC 통신과 인터넷의 비교(1)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어떤 신문사의 기사를 제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독자의 접속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이 PC 통신사에 달려 있는 것인 반면 인터넷에서는 어느 신문사의 홈 페이지에 접속할 지는 내가 정하면 된다. 유일한 통제는 어떤 신문사가 스스로 홈페이지를 닫아서 서비스를 안 하는 경우뿐이다.

그림 2 PC 통신과 인터넷의 비교(2)

그렇게 본다면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신문 기사를 나름 선별해서 제공하는 것은 PC 통신 방식에 아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뉴스를 제공하거나 찾아 가는) 권한이 네트워크의 가장자리에 있는 서비스 제공자의 컴퓨터와 서비스 사용자의 컴퓨터에 속한다는 것 즉, “가장자리에 권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인터넷의 중요한 특징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이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그런 서비스를 어떤 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제공할 것인가도 가장자리에서 결정한다. 예를 들어, 웹 서비스와 전자메일과 (온갖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때 흔히 쓰는) 토렌트는 서로 완전히 다른 프로토콜을 쓴다. 무슨 프로그램을 깔아서 무슨 프로토콜을 통해서 어떤 서비스를 쓸 것인가 (또는 공급할 것인가) 조차도 가장자리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한편, 전화망과 같은 네트워크에서는 이러한 결정이 중심부 즉, 전화 서비스 제공자인 전화사업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전화사업자가 시외전화 기능을 추가해주면 시외전화가 되는 것이고 3 자 통화를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이용한 컴퓨터 통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재미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는 반면 전화는 100년이 넘도록 거의 변화가 없다. 중앙이 권력을 독점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은 비단 정치,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1.3 왜 인터넷 역사를 얘기하는가?

저는 민주주의를 전길남 박사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전응휘 – 인용 체크)

흔히 얘기하듯이 역사를 보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그럼 하고 많은 역사 왜 굳이 인터넷 역사인가? 인터넷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터넷이 성립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이해하게 되고 이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또는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래는 구글의 공공정책팀에서 일하는 Betsy Masiello(이 이름은 어떻게 읽는 걸까요?)의 얘기다.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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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목은 뭔가를 어떻게 만들까가 아니라 어떤 생각해야 할까를 가르치는 과목이다. 그 부산물로서 뭔가가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산물 일뿐이다. 정보가 어떻게 교환되고 처리되는 기제를 살펴보는 것이 곧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의 통치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Masiello)

Alan Kay ran the lab at Xerox PARC where we got the desktop interface, so things like windows and icons, command menus. He also invented object-oriented programming and lots of other things. His goal, and I quote, was to 'amplify human reach, and bring new ways of thinking to a faltering civilization that desperately needed it.' Isn't that great? His approach was through children. He believed that if children became fluent in thinking in the medium of the computer, meaning if programming was a form of basic literacy like reading and writing, then they'd become adults with new forms of critical thought, and new ways of understanding the world. And we'd have this more enlightened society, similar to the difference that literacy brought to society. (Inventing on Principle, Bret Victor [email protected], Presented at CUSEC 2012, 녹취 https://github.com/ezyang/cusec2012-victor/blob/master/transcript.md)

1.4 왜 “한국” 인터넷 역사를 얘기하는가?

아마 정부에서 떠들어서 그런 모양인데 다들 우리나라를 “정보통신 강국”이라고들 한다. 물론, 인터넷 보급률이나 정보통신 관련 제품의 제조와 수출 실적 숫자를 들여다보면 전혀 얼토당토않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초창기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과실의 단맛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이해해야 그 자리가 맞는 자리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 수 있을 텐데 막상 그 과정과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되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복원이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인가? 권력의 횡포, 제도의 폭력, 사회관계의 억압 밑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의 그 침묵의 언어를 번역해 내는 작업이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인가? 갈등과 고뇌, 시련과 고통, 죽음과 배반의 시대는 있었으되 그 시대의 경험은 우리의 척박한 기억력, 그 심오한 망각의 늪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서사란 종족의 기억이고 그 기억의 보존을 위한 첫번째 장치이다. 서사를 통해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지 않은 민족 치고 자랑할 만한 문화를 일군 민족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를 기록해 온 민족이면서 기억과 반성의 능력은 천박하기 짝이 없고, 서사에서 역사를 증발시키고 기억을 잡아 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논리에 휘둘리기까지 한다. (도정일, 1994)

이런 생각에서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의 역사를 전길남 교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얘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인터넷 역사를 풀어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전길남 교수와 그의 대학원생들이 80~90년대에 수행한 연구는 한국의 기술 지평에 헤어나올 수 없고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Fariva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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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0년 이전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의 흐름

2.1 아르파넷 계획이 나오기까지

1962년 8월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J. C. R. 릭라이더는 은하 네트워크 (Galactic Network) 라는 생각을 정리한 몇 개의 메모를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원하는 프로그램과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네트워크를 상상한 것이다. (Barry M. Leiner) 왜냐하면 이 당시 이미 컴퓨터를 활용하여 연구를 많이 하고 있었지만 컴퓨터를 쓰려면 컴퓨터가 있는 곳까지 꼭 가야 했고 따라서 어떤 학교에 좋은 컴퓨터가 있어도 또는 거기에 좋은 자료가 많이 있어도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리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컴퓨터가 있는 시설을 대개 전산 센터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건물은 학교에서 가운데 (즉, 센터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학의 대가인 윌리엄 미첼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나는 1960년대에 예일 대학에 있었는데 그 때의 컴퓨터는 무척 크고, 비싸고 또한 몹시 귀했다. 그래서 전산 센터는 희귀한 자원이 있는 핵심 지점의 역할을 했다. 옛날 마을에서 공동 우물과 같은 역할인 셈이다. 컴퓨터를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 무거운 펀치 카드 박스를 들고 멀리 걸어 다니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Mitchell, 2005)

공동 우물에서 물통을 머리에 이고 갈 수 있는 공간에 마을이 형성되듯 중앙의 컴퓨터는 공간 활용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컴퓨터 네트워크의 발전 특히 무선 네트워크 + 휴대용 컴퓨터의 발전은 (최소한 정보 활용에 있어서는) 지리적인 민주화를 이루었다.

다시, 인터넷 얘기로 돌아와서 같은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레너드 클라인락은 기존의 회로 교환 방식이 아니라 패킷 (packet, 보낼 자료를 적절한 크기로 나눈 덩어리) 교환 방식을 다룬 최초의 논문을 1961년에 발표한다. 릭라이더에게서는 지구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를 그리고 클라인락에게서는 패킷 교환 방식으로 컴퓨터 간의 네트워크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었던 같은 학교의 연구원 로렌스 G. 로버트는 1966년 말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에1 가서 패킷 교환 방식으로 지구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아르파넷(ARPANET) 계획을 수립하여 1967년에 내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시기에 영국의 국립물리연구소(NPL, National Physical Laboratory)의 도널드 데이비스와 로저 스캔틀베리는 물론이고 랜드 연구소(RAND)의 폴 바란도 같은 생각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폴 바란은 미국 공군의 요청으로 생존 통신 기술을2 연구한 결과로서 패킷 통신 기술을 1961년 여름에 미공군에 제공한 바 있다. 말하자면 패킷 네트워크 연구는 딱 적절한 때가 이른 셈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현재까지 쓰고 있는 패킷이라는 용어도 아르파넷이 아니라 영국 국립물리연구소에서 쓰던 용어를 따온 것이다. (Barry M. Leiner) (Pac13)

흔히 미국방성이 아르파넷 연구에 투자한 이유가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하여 안전한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낭설이 있지만 이는 랜드 연구소의 폴 바란의 연구와 아르파넷을 혼동한 것으로 보이며 사실은 굳이 핵 공격이 없어도 당시의 네트워크에서는 중간의 중계 장비가 곧잘 고장이 나서 통신이 끊어 질 수 있었으므로 네트워크의 일부가 망가지더라도 계속 통신이 가능한 패킷 교환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다. (ARP13)

너무 친절한 양우씨: 회선 교환 기술과 패킷 교환 기술

1 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미국 국방부의 기관으로서 국방 관련 신기술 개발을 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아르파(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였기 때문에 거기서 제안한 네트워크의 이름은 아르파넷이 된다. 1971년에 DARPA 로 바꾸었다가 1993년에 도로 ARPA 가 되었다가 1996년부터는 다시 DARPA 로 부르고 있다. 변덕이 무슨 팥죽도 아니고 이게 뭐지?2 일부 회선이 끊어지는 등의 상황이 벌어져도 계속 통신할 수 있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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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전화기를 만들어 본 적이 있나요? 종이 컵의 바닥에 실을 고정 시키고 실의 반대편도 다른 종이 컵의 바닥에 고정 시킨 다음 한 사람은 컵 아귀를 귀에 대고 다른 한 사람은 컵에다 말을 하면 소리가 전달되는 놀이다. 물론 실이 팽팽해야 제대로 전달된다. (인터넷 전화가 아니라면) 집 전화기도 마찬가지다. 차이점이 있다면 실의 진동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 신호로 전달한다는 점 그리고 말하는 곳과 듣는 곳을 쌍으로 만들어서 말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점만 다르다.

그럼 여기서 의문. 그런 식으로 선이 연결되어 있다면 한 쌍의 전화기는 통화가 되겠지만 또 다른 집하고는 어떻게 통화하나? 그래서 (요즘 어린이들은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전화교환양이3 필요하다. 전화교환양은 전화국에 앉아서 일한다. 각 가정의 전화기는 전화교환양의 전화기와 (실 전화기처럼)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집에서 전화기를 들면 전화교환양과 바로 연결된다. 그 상태에서 “순돌네랑 연결해주세요”라고 하면 전화교환양은 내 집 전화기 선과 순돌네 전화기 선을 전선으로 연결해준다. 그럼 내 전화기와 순돌네 전화기가 직접 연결된 상태가 되고 통화가 가능한 것이다.

딴 집과 통화하고 싶다면 (전화교환양에게 부탁해서) 또 딴 집으로 선의 연결 상태를 바꾸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회선을 바꾸는 연결하는 것이므로 회선 교환 방식이라고 부른다. 물론 요즘은 말로 상대방을 얘기하는 대신 숫자판을 누르고 전화국에는 전화교환양 대신 숫자판 눌리는 소리를 듣고 회선을 교환해주는 장치 즉, 전자교환기가 있을 뿐 원리상으로는 똑같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가 순돌네랑 통화하고 있을 때 내 전화기 ↔ 전화국 ↔ 순돌네 전화기 사이에는 하나의 회선처럼 연결된 상태이며 이 회선을 통해서는 “오직 내 통화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춘자-장소팔 커플이(이 분들을 모르는 젊은 독자를 위해서라면 속사포 래퍼 아웃사이더 같은 사람 둘이)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회선은 많은 시간을 놀고 있을 것이다. 앞의 예에서는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서 나와 순돌네가 같은 전화국에 연결되어 있다고 (즉, 한 동네에 산다고) 가정했지만 만약 멀리 떨어져 있다면 전화국과 전화국 사이의 회선도 우리의 통화를 위해 “전용으로” 할당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낭비를 피해서 하나의 회선을 공유할 수는 없을까? 그게 바로 패킷 교환 개념이다.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은 나만 미끄럼을 타는 것이 회선 교환 방식이라면 착한 아이들처럼 번갈아 가면서 미끄럼을 타는 것이 패킷 교환 방식이다. 그래서 미끄럼틀 하나만 있어도 여러 아이가 모두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딱 타고 싶을 때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패킷 교환 방식의 단점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파일을 내려 받을 때 지금 받아도 되고 10분의 1 초 뒤에 받아도 되지만 말을 그런 식으로 지연시켜서 전송한다면 아마 짜증 나서 통화가 안될 것이다. 따라서, 패킷 교환 방식은 굳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보낼 필요가 없는 컴퓨터 통신에 적합하고 회선 교환 방식은 실시간으로 보내야 하는 음성 통화에 적당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차이는 지금으로선 큰 의미가 없다.)

패킷 교환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하나의 회선을 공유하여 회선의 활용도가 높아진다는 것이지만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통신을 하고 있는 양 당사자를 단 하나의 회선으로 연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시 미끄럼틀로 설명해보자. 이번에는 더 멋진 미끄럼틀이다. 한번에 쑥 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3단이라 한번 내려가고 갈아타고 또 내려가고 갈아타고 또 내려가면 땅에 도착하는 식이다.

(인터넷에서 무단으로 가져온 이미지. 이렇게 여러 단인데 중간에 옆 줄로 옮겨 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3 전화교환원. 특정 직업을 비하하거나 성차별적인 용어로 들릴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버스안내양, 전화교환양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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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3단 미끄럼틀이 두 개가 나란히 있다고 하자. 아이도 두 명이다. 회선 교환 방식은 아이 한 명씩 미끄럼틀 하나씩을 찜 해놓고 탄다. 둘 다 행복하다. 하지만 두 미끄럼틀 중 하나의 둘째 단이 망가졌다면 위에서 타고 내려오다가 중간에 멈춰서 더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게 된다. (말하자면, 회선이 끊겨서 통화가 안 되는 상황) 전체 미끄럼 중 1/6 이 망가졌는데 아이들 중 절반은 절망에 빠진다. 한편 패킷 교환 방식이었다면 위에서 내려 갈 때 두 칸 중 아무거나 타고 내려가서 갈아 탈 때 두 개중 아무거나 갈아타는 식으로 내려간다. 따라서 아까와 같은 문제가 있더라도 해당 구간에서만 한 쪽으로 몰아서 타고 내려가면 된다. 우연히 두 아이가 하필이면 망가진 구간에서 만나면 지체되는 문제는 생기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문제가 없다.

2.2 최초의 인터넷 메시지 전달

1968년 8월에는 아르파넷의 구조와 세부 사항이 정리되고 이를 구현할 핵심 장비 즉, 패킷 형태로 데이터를 먼 곳과 주고 받을 장비인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를 만들 곳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프랭크 하트가 이끄는 BBN(Bolt Beranek and Newman)사가 낙찰을 받아 IMP 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IMP 를 1969년 9월에 패킷 스위칭 연구에 앞장을 섰던 클라인락이 있던 UCLA 대학에 (그 사이에 학교를 옮김) 처음으로 설치함으로써 UCLA 대학은 IMP 를 설치한 최초의 아르파넷 노드(node)가 된다.4 둘째 노드는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에 있던 더글라스 엥겔바트의 인간 지성 확장(Augmentation of Human Intellect) 프로젝트에서 맡게 되었다.5 이 둘째 노드는 한

4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노드란 통신이 이뤄지는 양끝 즉, 앞의 실 전화기의 경우 각각의 컵을 의미하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통신 데이터를 받아서 안쪽에 전달하거나 안쪽의 여러 얘기를 모아 외부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장치 즉, 앞의 2층 음식점 시나리오에서 인터폰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5 더글라스 엥겔바트의 업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 글 전체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컴퓨터 마우스가 그의 발명품이다. 하지만 그가 마우스 특허에 대하여 사용료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어쩌면 더 대단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1968년 12월 9 일에 보여준 기술 시연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모든 시연의 원조”(The Mother of All Demos)라고 불리고 있다. 이 행사에서 보여준 것은 컴퓨터 마우스, 영상 회의, 원격 회의, 하이퍼텍스트/하이퍼미디어(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웹의 원조 기술), 워드 프로세싱,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이 한 문서를 협력해가며 편집하는 기술, 동적 링크 기술(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모르겠지만 현재의 DLL 개념) 등이다. 대략 30~40년쯤 앞선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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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만에 첫째 노드와 연결되었고 최초의 아르파넷 메시지는 1969년 10월 29 일에 전송되었다. 처음 보낸 메시지는 상대방 컴퓨터에 접속하기 위해서 로그인(login)이라고 보냈는데 lo 까지만 전송되고 장비가 죽어버려 처음 메시지는 lo 가 되고 말았다. (Barry M. Leiner) (ARP13)

2.3 다양한 네트워크의 공존 시대

아르파넷은 지금의 인터넷으로 이어져 흔히들 들어보았겠지만 그 외에도 1960~1970년대에는 Merit Network, Mark I network, Tymnet, CYCLADES, Telenet, X.25, BITNET 등 여러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은 각기 독자적인 프로토콜을 사용하였다. 또한 당시 널리 사용되던 유닉스6 컴퓨터에는 파일을 쉽게 배포할 목적으로 UUCP 라는 프로그램이 탑재되었는데 1979년에 듀크 대학의 톰 트러스콧과 짐 엘리스가 이 기능을 활용하여 이웃 대학과 연결하여 메일과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네트워크 뉴스(netnews 또는 뉴스 그룹 news group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직렬회선(serial line), 전용선, X.25, 아르파넷 중 어느 것을 쓰더라도 연결이 가능하여 그 사용자가 크게 늘어나 1981년에 (즉, 2년 만에) 550 개 사이트, 1984년에는 940 사이트로 늘어났으며 나중에는 UUCPnet 이라고 불렸다. (His13) 이제는 컴퓨터 네트워크라고 하면 인터넷만 생각하지만 그 때는 여러 기술이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2.4 CSNET 의 등장

한편, 아르파넷에는 아무 학교나 기관이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재정이나 권한 문제로 아르파넷에 연결할 수 없는 대학들이 컨소시엄을 형성하여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1981년부터 세 학교를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CSNET(Computer Science Network) 이라고 불렀는데 아르파넷과는 달리 연결하기가 까다롭지가 않아서 CSNET 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1년 만에 24 개, 1984년에는 84 개로 늘어났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CSNET 은 NSFNet 으로 계승 발전하고 이것이 결국 현재 우리가 얘기하는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CSN13) 그러고 보면 아르파넷이 아니라 CSNET 이 인터넷의 원조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초창기 외국과의 연결에서도 아르파넷은 NATO 회원국 중 일부로 제한되고 있는 반면 CSNET 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헉! 스포일러! 뒤에 보시겠지만 우리나라 인터넷이 CSNET 으로 결국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등과 연결되었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CSNET 초창기의 가장 뜨거운 논쟁은?

CSNET 이 아직 계획 단계였던 어느 날 (아마 1980년쯤) CSNET 개발 계획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 미국 국립과학재단, 몇몇 대학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아침 9시에 시작한 회의는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아르파넷이 갖고 있는 “진보된” 기능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봤자 상업적인 효용은 무척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을 모든 참석자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헛돈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후 3시쯤에 이 프로젝트의 검토를 맡았던 데이브 파버 교수의 대학원생 데이브 크라커는 전화를 이용하는 전자 메일 중계는 어떤가 하고 제안을 했다. 참석자들은 그 제안에 찬성하며 개발하는데 얼마쯤 걸릴지 물었는데 데이브 크라커는 하루쯤이라고 “합리적인” 답변을 하였다. 물론 실제 개발에는 훨씬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 결과로 만들어진 메일 자동 중계 프로그램인 MMDF 와 이를 지원하는 기관들의

라이브로 보여준 대단한 시연이었다고 한다. (The13)6 유닉스(Unix)는 운영체제(OS, operating system) 중 하나이다. 그럼 운영체제는 뭐냐?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이라면 전화기 자체는 하드웨어이고 거기서 사용자가 사용하는 것은 응용 프로그램(속칭, 앱)이며 응용 프로그램이 그 전화기에서 돌아가게 양쪽을 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구글(Google)사의 안드로이드(Android)라고 하는 운영체제이다. 집에 있는 개인용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면, 컴퓨터 자체는 하드웨어이고 거기에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의 운영체제인 윈도(Windows)가 돌아가고 있고 그 위에서 게임이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응용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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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인 폰넷(Phonenet)은 CSNET 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인터넷이 앞으로 어느 정도의 널리 쓰이고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지 당시의 연구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엄청나게 규모가 커졌음에도 불구고 여전히 잘 동작하는 인터넷은 참으로 잘 설계하고 잘 운영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구한 날 도로를 파헤치는 우리의 행태를 보면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하는 습관은 좀 배웠으면 한다. (The131)

2.5 뉴스그룹 – 야한 사진부터 우주 통신까지

요즘은 인터넷이라고 하면 당연히 웹을 생각한다. “야 그거 인터넷 들어가서 찾아보면 나와”라고 했을 때 그 인터넷은 웹을 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웹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인터넷은 있었으니 그때는 뭘 썼을까? 물론 멀리 있는 컴퓨터에 접속해서 계산 프로그램을 돌리는 등 재미없어 보이는 것 말고도 메일을 주고 받는다거나 (요즘의 게시판처럼) 서로 의견을 올리고 댓글을 주고 받는다거나 심지어는 음란물을 공유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중에서 뉴스그룹은 이름에서 짐작하듯 아마 새로운 (기술) 뉴스를 공유하려는 것으로 시작되어 분야별로 분류되어 운영되었는데 일부 뉴스그룹은 각종 흐뭇한 자료로 넘쳐나곤 했다. 초창기 인터넷 사용자라면 alt. binaries.multimedia.erotica 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앞서 설명한대로 뉴스그룹은 UUCP 기반으로 동작하므로 인터넷에서도 접속할 수 있고 인터넷이 아니라도 접속할 수 있었다.)

뉴스그룹의 동작 방식이 재미난 점이 있어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뉴스그룹에 글을 올리려면 내가 접속할 수 있는 (예를 들어, 우리 학교의) 뉴스그룹 서버에 접속해서 글을 올리면 된다. 거꾸로 최신 뉴스를 볼 때도 같은 서버에 접속해서 받아 보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전 세계 모든 사용자가 같은 뉴스그룹 서버에 접속하지 않는 한 뉴스가 공유될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뉴스그룹 서버는 자기에게 사람들이 올려준 뉴스를 모아두었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 뉴스 서버에게 전달한다. 물론 그 때 상대가 갖고 있는 뉴스 중 내가 아직 안 받은 것이 있다면 받아 온다. (이런 방식을 이 분야 전공자들은 “저장했다 전달하기” store-and-forward 라고 부른다) 흡사 소문이 번지듯이 또는 전염병이 퍼져 나가듯이 시간을 두고 뉴스는 전파된다. 반면에,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게시판은 (예를 들어, 다음 아고라 게시판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같은 곳에 접속해서 올리고 올린 것을 바로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저장했다 전달하기”라는 것이 필요 없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선 뉴스그룹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게 무슨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전세계 모든 사용자가 다 접속해도 될 정도로 빵빵한 컴퓨터와 접속 회선을 갖추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접속의 형태에 있다. 지금은 인터넷이라고 하면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접속 비용이 워낙 비싸서 (시내전화마저 분당 30 원씩 뚝뚝 돈이 떨어지던 것 기억하는가?) 가끔 필요할 때 연결하고 보낼 것 보내고 받을 것 받고 바로 끊어야 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사용자들은 자기 학교의 서버에 접속해서 글을 올리고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글이 다른 서버로 전송되고 남들이 올린 글을 받아 보는 것은 학교 서버가 다음 번에 이웃 서버와 접속해서 받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학교 서버는 최소한의 통신비로 연결될 수 있는 이웃 학교 서버에게만 전송하므로 (결과적으로 뉴스가) 지구 반대편까지 전송되긴 하지만 굳이 국제전화 요금을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어디선가 한번은 국경을 넘긴 넘어야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최소한의 접속 비용으로 전지구적인 정보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때 널리 유행했던 모뎀 기반의 게시판 서비스(흔히 BBS, bulletin board system 라고 부르던 것)를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한 파이도넷(FidoNet)이라는 것도 엄청난 규모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는 특히, 통신 요금이 비싼 후진국에서 상당히 오래 사용되었다.

이제는 접속 요금이 (유선 인터넷이 경우) 거의 공짜에 가까워져서 “저장했다 전달하기” 방식이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전자 메일의 전송에 사용되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는 더 늘어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다른 별에 있는 친구와 통신을 하려면 지금의 인터넷 방식 즉, 서로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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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까지 가려면 (서로 멀리 있을 때는) 빛의 속도로 가도 20분이 넘게 걸린다. 그러니 중간에 누가 받아 두었다 전달해줘야 되지 않겠는가?

2.6 유닉스 – 인터넷의 근간이 된 운영체제

유닉스(UNIX)는 1969년, 켄 톰슨을 주축으로 하는 AT&T 의 벨 연구소 연구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멀티 태스킹(여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함)과 멀티 유저(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사용함) 운영체제로, 1960년대 멀틱스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아 개발되었다. 유닉스가 큰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습성을 잘 반영한 점과 UUCP 와 같이 네트워크 기능이 잘 지원되어 개발된 프로그램이나 관련 정보를 쉽게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한국의 컴퓨터 및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환경에도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다. 참고로 1980년대 초반 미국 각 대학 컴퓨터공학과의 90% 이상이 유닉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음은 유닉스의 초기 역사를 (SimsonGarfinkel, 2003) 에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유닉스의 뿌리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AT&T, 하니웰, 제네럴 일렉트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은 정보 기기를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멀틱스(MULTICS)였는데 국방성의 고등연구계획국(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받았으며 연구는 대부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이뤄졌다. 멀틱스는 고속 프로세서, 기억장치, 통신 장치를 레고 블록처럼 조립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컴퓨터의 일부분만 수리를 위하여 끌 수 있고 일년 내내 24시간 계속 운영할 수 있으며 블록을 덧붙여서 성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게다가 군대 보안을 고려하여 설계하였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공격은 물론이고 내부 사용자들에 의한 공격조차 버텨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이런 보안 수준은 요즘의 컴퓨터 시스템도 대부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척 보기에도 너무 욕심이 큰 프로젝트였다. 1969년에 이르러 프로젝트는 일정에 많이 뒤쳐지고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이랑 지리적으로도 먼 AT&T 는 벌써 프로젝트에서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그 때,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AT&T 의 켄 톰슨은 멀틱스의 개념을 혼자서 더 파볼 생각으로 쓰지 않던 PDP-7(DEC 사의 엄청 인기 있었던 컴퓨터 이름) 기계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여기에 데니스 리치가 참여하고 피터 뉴먼이 유닉스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이름은 멀틱스의 멀티(여럿)을 유니(하나)로 바꾼 말장난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포기 못한 (이후로도 멀틱스 연구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멀틱스가 여러 가지를 다 잘하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유닉스는 한 가지 즉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만 잘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안 기능은 다 버렸다. 이렇게 범위를 좁혔기 때문에 유닉스는 멀틱스보다 먼저 가동될 수 있었다.

유닉스에는 도구(tool)이라고 불리는 한 가지 기능만 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것을 조합해서 복잡한 일을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문서에서 단어만 빼내는 도구(strings), 단어를 정렬하는 도구(sort), 같은 단어가 있으면 하나만 남기는 도구(uniq), 줄의 수를 세는 도구(wc)를 결합하면 어떤 문서에서 쓰인 고유한 단어의 수를 세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다. 또한 소스 코드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개발자들이 기존의 도구를 개선하거나 추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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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켄 톰슨(앉은 이)과 데니스 리치(선 이)가 PDP-11 앞에 서있다. 1972년 사진7

1973년에 데니스 리치가 새로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인 C 를 이용하여 켄 톰슨은 유닉스의 거의 대부분을 새로 작성하였다. C 언어로 짠 프로그램은 (다른 고급 언어와 마찬가지로) 다른 컴퓨터로 옮겨서 컴파일(작성한 프로그램의 원시자료를 컴퓨터가 알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일)만 다시 하면 동작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컴퓨터에 유닉스를 이식하는 것이 무척 쉬웠다. 법적인 제약 때문에 AT&T 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광고, 마케팅, 지원할 수 없었지만 유닉스에 대한 수요는 늘어만 갔다. 1977년에 500 개 이상의 기관에서 유닉스를 운영하였고 그 중 125 개는 대학이었다. 미국 외의 10개국의 나라에서도 유닉스를 사용하였다.

버클리대학의 대학원생이던 빌 조이와 척 헤일리는 단지 유닉스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많은 부분을 고치기 시작했다. 1978년에 빌 조이는 각종 프로그램과 수정된 유닉스 시스템을 모아서 BSD(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라고 이름을 붙이고 30 카피를 우편 요금(아직 인터넷이 없던 시대니까!) 포함 50달러에 팔았다. 그 후 고등연구계획국의 지원에 힘입어 BSD 유닉스는 AT&T의 원본보다 훨씬 뛰어난 운영체제가 되었다. 여러 장점이 있지만 제일 결정적인 것은 BSD 4.2 에 포함된 근거리 통신망(LAN, local area network) 기능이었다. 그래서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는 연구기관과 대학에서 매우 유명한 운영체제가 되었다.

2.7 한국에서의 유닉스는?

한편, 한국에서도 유닉스는 인터넷 역사의 초기부터 그 이후 정부 주도의 정보화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지금 길가는 사람 붙들고 유닉스가 뭐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머리 말리는 기계 만드는 회사라고 답하겠지만 말이다. 한국 정부가 정보화를 주도하던 1980년에 중반에는 대형 컴퓨터 쪽으로는 단연 IBM 사가 그리고 개인용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대세였다. 하지만 이들

7 (출처: 데니스 리치의 홈 페이지 http://cm.bell-labs.com/cm/cs/who/dmr/picture.html) 맨 오른쪽 캐비닛 옆의 모니터처럼 생긴 것은 VT01A storage-tube display 와 그에 연결된 작은 키보드. 맨 오른쪽 캐비닛은 PDP-11/20 main CPU 캐비닛. 책상의 윗면이 절반쯤 가리고 있는 칸이 Operator console 로서 여러 개의 스위치가 붙어 있는데 맨 왼쪽의 열쇠 구멍이 전원을 켜고 끄는 스위치고 그 오른쪽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스위치부터 주소와 데이터를 입력할 수 있는 – 스위치 하나가 한 비트를 0/1 로 바꾸는 – 스위치 이다. 두번째 캐비넷은 paper reader 가 가운데 달려 있는 PDP-11/45 CPU 캐비닛. 세번째, 네번째 캐비넷은 테이프 드라이브. 다섯번째는 /usr 파티션을 담고 있는 디스크 드라이브 캐비닛, 그 옆은 / 와 swap 파티션을 담은 디스크 드라이브. 앞으로 보이는 것은 Teletype 33 터미널 두 대.) : 좀 더 친절하게 풀어서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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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은 원천 코드를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속을 알 수 없고 우리가 내부 기술을 배우려고 방법이 없었다. 한편, 유닉스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라이선스 비용만 치르면 원천 코드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장 대세는 아니라도 미래를 위해서라도 유닉스에 도전할 가치가 있었던 것 이다. 당시 *** (당시 직책 확인) 였던 이용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행정 전산화 작업을 하던 1980년대 초ㆍ중반 우리나라 정부에서 가장 많이 쓴 컴퓨터는 IBM 이었다. IBM 의 운영체제는 (중략) 자체가 고가였을 뿐 아니라 운영체제에 물려 돌아가는 단말기와 주변 장치, 프린터 등도 일반 제품보다 비쌌다. 물론 선택의 자유도 거의 없었다. 반면 공개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내용 전체를 알 수 있는데다 이용자가 필요한 부분을 고칠 수 있다. 전세계 수많은 작은 기업들이 이 표준에 맞춰 경쟁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고 값도 싸다. 그러나 우리가 행정 전산화 작업을 준비하던 84년에는 ‘장차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 널리 쓰이고 있는 제대로 된 운영체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공개 소프트웨어인 유닉스를 OS 로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길남 박사가 큰 역할을 했다. 전 박사는 실제 유닉스를 써보고 그에 관한 많은 문헌을 조사했다. 그는 내게 “현재는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이 있고 불편하지만 장차 전세계가 유닉스 쪽으로 움직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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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DN 이전 시대

3.1 1980년까지 한국 과학 기술의 상황

우리 정부가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60년대 초반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1960년 초반, 우리나라 국민 소득은 아프리카 최하위국과 비슷한 수준인 100달러 이하였고, 매년 봄 복사꽃 필 즈음이 되면 보릿고개를 견디지 못한 아사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국가 재건에 필요한 외화를 확보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유네스코는 후진국들을 돕기 위한 사업으로 과학문헌센터 설립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가난을 극복하려면 과학기술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1962년 1월 1 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한 부서로 과학문헌센터가 설치된다. 그리고 세 달 뒤인 3월에는 기관의 명칭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ISTI 의 전신)로 바꾸고 실질적인 정보수집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과학기술정보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과학기술정보센터에서 일본ㆍ프랑스ㆍ인도 등의 과학기술정보기관에서 발간된 출판물을 참고해서 만든 `과학기술문헌목록집'과 `외국특허목록집'은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국내 최초로 선진국 과학기술정보 및 특허를 수록한 책자로서 대부분 원자재나 일본의 기술을 모방해 생산하는 수준이었던 국내 기업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정보였다. (박영서, 2012)

그 이후로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가 설립되고 1967년 3월에는 정부 기구로서 과학기술처가 신설되었다.8 1969년에는 위에서 얘기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를 지원하는 법적 근거인 과학기술정보센터 육성법이 제정된다. 1971년에는 한국과학원(KAIS,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이 1976년에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TRI)가, 1977년에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 Korea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정부는 연구 기관을 설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을 만들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능한 과학자들의 귀국을 권유했다. (한국의 ‘두뇌유출’ 변화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역할, 2006) 을 인용하여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할 것.

이 프로그램으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과학자 중에 이용태 박사가 있었는데 1974년 미국에서 이용태와 처음 만난 전길남 박사는 그의 권유로 아내의 박사과정이 끝난 1979년에 한국에 '귀국'한다.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태어난 전길남 박사에게 이 귀국은 그저 공부하러 외국 갔다 돌아온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전길남 박사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네트워크 연구그룹을 구성하는 한편,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하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서울대에서의 컴퓨터 네트워킹 강의는 이후 한국 인터넷을 만드는 준비가 된 셈이다. (Farivar,2011)

하지만 급작스럽게 박정희 시대가 끝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으며 과학기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하나 둘씩 출범하기 시작한 출연연구소는 정부의 기초과학 또는 기반기술 확보라는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79년경에는 16 개가 활동 중이었다. 그러나 80년 말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16 개의 연구소를 9 개로 통폐합 해버렸다.

8 과학기술처가 과학기술부로 개편된 것은 30년도 더 지난 1998년의 일이다. 요즘, 이름에 “창조”가 들어간 부서로 바뀐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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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폐합된 후 살아남은 9 개 연구소는 KIST,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 한국전기기술연구소(KIET) 등이었다. 이 가운데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고 통폐합의 칼날이 가해지지 않은 유일한 곳은 KIET 였다.

이 가운데 KETRI 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와 통합한 것이었다. KTRI 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KIET 와 함께 76년 말 출범한 전자산업 분야 전문 3 대 출연연구소로서 한때 트로이카 연구소로 불렸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3 공화국이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 등 3분야를 전자산업의 간성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 아래 출범시킨 의욕적인 연구소였다.

85년 KETRI 가 남아 있던 KIET 를 흡수 통합한 다음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부문을 분리해낸 것이 오늘날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이다. (서현진)

이 와중에 전길남의 귀국을 주선했던 이용태는 전길남에게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시스템부서를 맡게 하고 떠나 1980년 7월 삼보 컴퓨터를 설립한다. 삼보 컴퓨터는 나중에 한국 최초의 상용컴퓨터 생산자가 된다. (Farivar, 2011)

너무 친절한 양우씨: 한국 최초의 컴퓨터 개발 이야기

1972년 4월, 7.4 남북공동성명을 앞두고 정부는 통신비밀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청와대는 외국 정보기관의 도청을 차단할 수 있는 사설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는지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검토 의뢰한다. 검토 결과는 미니 컴퓨터를 사설전자교환기 시스템 제어용으로 붙이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노바팀이라는 비밀 개발팀을 구성하여 1972년 6월부터 개발에 착수하였는데 완료 시한은 이듬해 3월이었다. 당시로서 가장 널리 쓰이던 컴퓨터는 DEC 사의 PDP 시리즈였지만 물건을 들여 오는 데만 몇 달이 걸리던 시절이라 일단 구할 수 있는 미국 DG 사의 노바 01 을 이용하여 개발을 시작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해놓고 보니 노바 01 로는 원하는 기능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컴퓨터를 부랴부랴 개발하기 시작한다. 노바 01 을 개선한 형태로 설계해서 만들어낸 컴퓨터는 세종 1호. 이를 이용하여 원하는 사설전자교환기를 만들었지만 청와대는 성능이 검증되지 않았다며 돈도 주지 않고 계약을 파기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기왕에 개발된 거 버릴 수는 없으니 상용화를 진행한다. 미국(영국이라고 되어 있는 자료도 있음. 확인 필요) GTE 사가 이 컴퓨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삼성그룹과 삼성 GTE 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회사는 나중에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한국 인터넷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SSM-16 이라는 컴퓨터를 만들게 된다. (김중태, 2009)

한편 한국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하여는 흔히 삼보컴퓨터가 1981년에 내놓은 SE-8001 로 알려져 있으나 1977년 7월 금성전기(현재는 LG 전자, LG 산전 등으로 분산됨)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 개발한 GSCOM-80A 이다. 이 제품은 경험부족으로 상업화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서현진, 1996)

너무 친절한 양우씨: 한국 벤처의 시작 – 이용태

연구소 통폐합 과정에서 다소 급작스럽게 연구소를 떠나게 된 이용태 박사는 정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벤처 기업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한 사람에게 천만 원씩 열 사람을 모으면 1 억이고 이 정도면 회사 하나는 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3년 안에 세운 회사가 소형 컴퓨터를 생산하는 삼보컴퓨터, 컴퓨터를 판매하는 엘렉스,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한국소프트웨어연구소, 기술을 개발하는 큐닉스, 컴퓨터 이용자/기술자를 양성하는 코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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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였다. 왕년에 컴퓨터 좀 썼던 사람들이라면 삼보, 엘렉스, 큐닉스 등은 익숙할 것이다. 그 중에서 삼보컴퓨터는 청계천에 있던 백창기라는 사람의 가게를 인수하여 만든 것이다. 백창기씨는 청계천에서 비디오 게임기(아마 동네 오락실용 게임기를 말하는 듯)를 조립해서 팔았는데 일본 샤프사의 소형 컴퓨터를 베껴서 만들어 이용태 박사를 찾아가 사업성 논의를 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삼보컴퓨터가 만들어졌다. (이용태, 2004)

삼보컴퓨터, 엘렉스, 큐닉스가 주도를 해나가고 있을 때 청계천 컴퓨터 상가에는 조립 PC 1 세대로 불리는 가게가 등장한다. 이들은 주로 애플 II 복제품을 팔았다. 유명한 곳으로는 희망전자, 홍익컴퓨터, 로얄컴퓨터, 에이스컴퓨터, 골든벨, 한국마이컴, 브레인컴퓨터, 석영전자 등이 있다. 이에 자극 받아 가전 3 사 즉, 금성사(현재의 LG 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가 뛰어들게 되어 소형 컴퓨터가 산업으로서 기반을 갖추게 된다. (서현진, 1995) (서현진, 1996)

3.2 프로젝트 시작되다 - PET (^^) 프로젝트

전길남 박사는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연구 개발을 맡고 있었다.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 이렇게 세 분야가 전자산업의 기둥이 된다고 정부는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컴퓨터 개발은 무척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아르파넷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UCLA 에서 공부를 한 전길남 박사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보고 어떻게든 이를 연구 프로젝트의 일부로 진행하려고 하였다.

1980년 9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보고서에서 전길남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에 뿐 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서 컴퓨터 네트워크 기능을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파일을 전송하거나 전자 메시지를 교환하게 하면 연구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역설했다. 당시로서는 컴퓨터 네트워크는 학술 연구의 대상일 뿐 아직 연구나 업무에 활용 수준은 아니라 반응은 냉담했다. 어떤 명백한 상업적, 산업적 가치도 없는데 정부가 투자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를 빨리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일까지 하는 것은 프로젝트를 지연시킬 수 있으므로 거부되었다. (Farivar, 2011)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다. 1981년에 승인된 컴퓨터 연구 개발 과제 제안서의 일부로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과제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물론 전체 프로젝트에서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 부분 예산은 채 5%도 되지 않았다. (Farivar, 2011)

이 프로젝트로 구축할 네트워크의 이름은 소프트웨어 개발 네트워크(Software Development Network, 이하 SDN)였는데 이름은 그 네트워크의 역할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길남이 1981년 9월 30 일 작성한 SDN 소개 문서에는9 역할과 구축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또는 컴퓨터 개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컴퓨터 네트워크가 요구된다. 소프트웨어 개발 네트워크(SDN)은 다음과 같은 역할에 사용된다.

메모(문서) 교환

프로그램(원시 코드 및 목적 코드) 교환

컴퓨터 자원 공유

데이터베이스 접속

시스템 시험

9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제목은 “Software Developemnt Network(SDN) – Preliminary” 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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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 환경에서의 학습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자체 컴퓨터로 구축될 수 있으며, 미국 국립과학재단과 위스콘신 대학, BBN 사가 개발한 미국 대학들의 컴퓨터 과학 네트워크인 CSNET 과 유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Chon, 1981)

이러한 SDN 의 목적은 초기 아르파넷의 목적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르파넷도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ARPA, 아르파)의 지원을 받는 여러 회사나 학교의 연구자들이 아르파가 제공하는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새로 개발된 소프트웨어나 그 외 연구 결과를 빠르게 그리고 널리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ARP13)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네트워크의 연구자들은 (정부 관료나 다른 연구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네트워크가 구체적으로 어떤 유용성이 있는지도 아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앞서 CSNET 의 얘기에도 나왔듯이 상업적인 가치에 대하여는 뚜렷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4 1983년에 작성된 SDN 관련 프로젝트의 보고서 (SDN 태동기의 국내외 인터넷 환경 및구축 상황, 2012)]

3.3 라우터를 만들어야 되는데…

앞서 여러 번 얘기했듯이 당시로서는 여러 가지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이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여러 컴퓨터를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네트워크 기술을 동시에 지원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표준 컴퓨터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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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부터 시작되어 국제표준화기구(ISO)10와 국제전기통신연합(ITU)11 이 OSI(개발형 시스템 간 상호 접속)을 내놓고 있는 시점이었다. 한편, 유닉스 컴퓨터를 서로 연결한 UUCP 네트워크가 전세계로 번져나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표준을 따르자면 OSI 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UUCP 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하여 전길남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UUCP 나 OSI 같은 다른 네트워크 프로토콜도 고려했으나, 기반 프로토콜로 TCP/IP 를 선택하였다. 이는 컴퓨터 개발 과제에서 기반으로 하고 있는 UNIX 운영체제와 TCP/IP 가 조화를 잘 이루고, 여러 면에서 오픈 소스의 개방형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뭔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록 OSI 가 표준으로 제안되었지만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아 당장은 써먹을 수가 없고 UUCP 는 일반적인 프로토콜이라기 보다는 일부 응용 서비스만을 지원하는 반면에 TCP/IP 는 아르파넷을 통하여 검증된 네트워크 기술이라는 점이 고려되지 않았을까 필자는 상상하고 있다. 확인 필요)

TCP/IP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첫 단계부터 쉽지가 않았다. 패킷 교환 네트워크의 핵심은 서로 다른 노드 사이에서 전송되는 패킷을 목적지까지 중계해주는 장비 즉, 라우터인데 당시로서는 이것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르파넷 쪽에서는 BBN 사에서 제작하여 공급하는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를 사용하였지만 당시 IMP 는 미국과 노르웨이, 영국과 같은 NATO 국가 외에는 구매조차 허가되지 않았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IMP 를 라우터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라우터의 초기 역사를 설명한 위키피디아 자료에 의하면 IMP 는 게이트웨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 고양우, data networking in BBN 내용 확인할 것) 그런 상황에서 적성국가인 북한과 휴전 상태인 한국에 그런 장비를 내어줄 리가 만무하였다. 아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전길남 교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기술이나 표준은 RFC 라는 문서를 통해 다 오픈되어 있었지만 노드, 지금은 라우터라고 불리는 장비가 필요했는데 이 장비를 미국에서 가져올 수 없었죠. 그건 미국하고 군사동맹을 맺은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 정도 밖에 없었고, 우리는 아예 이전될 수도 없었죠.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공산국가 바로 옆이니까 불안한거지. 우리에게 기술을 이전해 주었다가는 중국이나 북한, 소련에 가는 거 아니냐 걱정한거죠. 우리가 38 선 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설명해도 이해를 못했죠. 그래서,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죠. (오병일,2005)

게다가 SDN 은 자체적으로 컴퓨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일부이므로 당연히 한국이 자체 개발한 컴퓨터를 이용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SDN 계획서에서도 알 수 있다.

네트워크에 사용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국가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될 컴퓨터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이들이 초기에 제공되지 않으면, 호환성이 있는 제품을 골라야 한다. 우리는 유닉스를 활용할 계획이므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는 UNET 처럼 유닉스와 호환성이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Chon, 1981)

당장 TCP/IP 의 기능을 모두 자체 개발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 일을 할 사람도 딱히 없어서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그래서, 유닉스에서 잘 돌아갈 수 있는 3Com 사의 UNET 이라는 제품을 쓰기로 하였는데 UNET 은 여러 시스템에서 동작시킬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호환성이 좋았기 때문에 KIET 와 서울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PDP11 과 VAX 컴퓨터는 물론, 일부 Xenix 기기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BSD 버전의 TCP/IP 네트워크는

10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11 더 정확히는 국제전기통신연합 전기통신표준화부문 즉, ITU-T(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 - Telecommunication Standardization Secto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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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X 나 PDP-11 과 같은 DEC 사의 컴퓨터에 적합해 다양한 시스템 환경에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UNET 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System DevelopmentNetwork 에 대한 소개, 1982)

참고로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82년 4월에 빌 조이가 구현한 제대로 쓸만한 TCP/IP 가 4.1a 버전의 BSD 유닉스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SDN 프로젝트가 1~2년 더 늦게 시작되었다면 좀 더 편하게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심하게 간단하게 설명한 라우터

영어에서 라우트(route, 루트라고도 더 흔히 읽는다)는 길이라는 뜻이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새 길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코리안 루트”라고 불렀다고 했을 때 그 루트와 같은 단어다. 그러므로 라우터는 길을 찾는 장치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TCP/IP 네트워크는 패킷 교환 네트워크이므로 내 컴퓨터가 보내려는 정보를 쪼개서 작은 조각을 만들고 (이 조각을 패킷이라고 함) 조각을 하나씩 보낸다. 그리고 각 패킷에는 내 컴퓨터와 그 패킷이 가야 할 상대방 컴퓨터의 IP 주소가 씌어 있다. (편지 겉봉투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주소를 쓰는 것과 같다.) 내 컴퓨터에서 이 패킷을 보내면 내 네트워크에 붙어 있는 라우터가 그 패킷을 받는다. 쉽게 말하자면 라우터는 네트워크 연결 카드가 여러 장 달려 있는 컴퓨터다. 라우터는 패킷에 적힌 상대방의 IP 주소를 보고 자기의 여러 네트워크 연결 카드 중 어느 곳으로 그 패킷을 보낼 지 결정하여 전송한다.

아래 그림에서, 순돌컴이가 딴 집의 덕순컴에게 데이터를 보내려 한다고 하자. 순돌컴이 알고 있는 것은 자기 집 컴퓨터는 주소가 1.1.1 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순컴은 우리 집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우리집 라우터(즉, ‘순돌이네 라우터’)에게 패킷을 쏜다. 순돌이네 라우터가 그 패킷을 받으면 우선 상대방 주소를 본다. 그리고 자기가 갖고 있는 표를 살펴본다. 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 1.1.1 로 시작하는 컴퓨터는 네트워크 연결카드 #3 번으로 보내면 된다.* 2.1.1 로 시작하는 컴퓨터는 네트워크 연결 카드 #2 번으로 보내면 된다.* 3.1.1 로 시작하는 컴퓨터는 네트워크 연결 카드 #1 번으로 보내면 된다.

이렇게 주소에 따라 어디로 전달해야 되는 지를 적어둔 표를 라우팅 표(routing table)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2 번 네트워크 카드를 통해 패킷을 전송하면 딴 집 라우터가 받게 되고 그 라우터도 자신이 갖고 있는 라우팅 표를 참조하여 이번에는 자신의 #3 번 네트워크 카드로 전송을 하게 되고 결국은 덕순컴이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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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절한 양우씨: BBN 사와 라우터

아르파넷을 구축할 때 사용한 BBN 사의 IMP 는 라우터의 원조인 셈이다. 하지만, IMP 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개선할 필요가 있어서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지원으로 BBN 사는 라우터를 개발한다. 한편, TCP/IP 네트워크에서 사업 기회의 냄새를 맡은 3Com, 시스코, 프로테온 등 여러 회사가 나서서 라우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에 BBN 사의 개발자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자고 제안했으나 마케팅 부서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버렸다. BBN 사가 그 때 사업에 뛰어들었더라면 아마 오랫동안 네트워크 장비 분야에서 앞서가는 회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Doyle, 2005)

3.4 첫 연결

국내 최초의 원거리 TCP/IP 네트워크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는 전길남 박사가 팀장으로 참여하고 차의영 연구원이 맡아서 진행하며 서울대학교 쪽에서는 정성권(당시 전자계산기공학과 석사과정 학생)과 홍봉희(확인 필요) 등이 일을 맡았다. 네트워크 구축에 사용할 컴퓨터는 디지털사(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DEC)의 PDP 11/44 과 PDP 11/70 이었다. 서울대에 설치되어 있었던 PDP 11/44 의 경우, 시스템 메모리가 512KB, 하드디스크 용량이 20MB 였다.12 여기에 TTY 콘솔과 VT-100 터미널이 직렬 포트로 연결되어 있었다. (안정배)

너무 친절한 양우씨: 가장 많이 팔린 미니 컴퓨터 PDP 와 VAX 를 만든 디지털사

디지털사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컴퓨터 산업을 주름 잡았던 회사며 최고의 히트작은 미니 컴퓨터인 PDP 와 VAX 시리즈였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는 당해낼 수 없어서 1998년에는 당시 잘

12 용량의 변화를 보면 그 때와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된다. 요즘 흔히 쓰는 스마트폰이 메모리가 2GB 이고 저장장치로 쓰는 메모리가 32GB 이니 SDN 에 쓰였던 “장비”에 비하여 메모리는 4천 배, 저장장치는 1,600 배가 더 큰 셈이다. 더 공평하게 비교해 보자면, 당시의 장비에 견줄만한 요즘의 서버급 컴퓨터가 메모리를 128GB쯤 달고 있으니 이는 SDN 초기 장비의 26 만 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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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던 컴퓨터 회사인 컴팩(Compaq)사에 인수된다. 그런데 이 컴팩사마저 2002년에는 휴렛패커드(Hewlett-Packard)사에 인수되었다. (Dig13) 워낙 많은 컴퓨터가 팔렸기 때문에 아직도 과거 장비를 계속 사용하는 곳 (예를 들어, 제조업체 공장) 에는 디지털사의 장비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로서는 지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워낙 세계적으로 많이 팔렸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디지털사의 위상은 대단했다. 디지털사의 제품을 공급했던 동양전산기술(OCE)은 이후 한국 컴퓨터 업계에서 활발히 활약하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TTY 콘솔과 VT-100 터미널 그리고 직렬 포트

TTY(텔레타이프)는 원격 타자기(TeleTYpewriter)에서 온 말이다. 텔레타이프는 타자기처럼 생긴 기계에 전선을 달아서 멀리서 신호를 보내면 글자를 찍어내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요즘은 잘 안 쓰지만 예전에는 텔렉스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예를 들어,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외국 소식은 텔렉스를 통해서 받는다고들 했다. 텔렉스는 텔레타이프 네트워크를 말한다. 말하자면, 전화망에 전화기가 연결되어 있듯이 텔렉스라는 이름의 망에 텔레타이프가 붙어 있어서 외국의 소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전쟁 영화를 보면 타자기 같은 장치에 따닥따닥 글자가 찍혀오면 읽어보면 거기에 명령이라던가 아니면 전쟁 상황이 전달되어 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텔레타이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흔히 쓰는 장치였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할 당시 컴퓨터에 자료나 프로그램을 입력하기 위해서는 보통 펀치카드(빳빳한 종이로 된 카드 한 장에 구멍을 뚫어서 한 줄의 정보를 입력할 수 있게 만든 것)를 사용하였는데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텔레타이프이다. 입력할 내용이 있으면 텔레타이프로 타자를 쳐서 넣고 컴퓨터가 출력할 내용이 있으면 텔레타이프로 인쇄해서 내보내주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텔레타이프는 펀치카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나온 장치라는 점이다. 게다가 입력 속도는 펀치카드에 비하여 엄청 느렸다. 즉, 싼 맛에 쓰는 장비였던 것이다.) (Com13)

그러다가 흑백 모니터를 만드는 기술이 나오면서 타자기와 화면을 결합한 장치로 대체되었고 이는 출력 속도가 빨라서 (따닥따닥 찍는 것 보다는 화면에 글자를 표시하는 속도가 당연히 더 빨랐겠지요) 급격히 펀치카드를 밀어내고 컴퓨터의 대표적인 입출력 장치가 되었다.

이렇게 펀치카드를 대신하여 자료를 입력하고 결과를 받아보는 장치를 컴퓨터 터미널이라고 한다. 터미널이라는 말은 흔히 쓰듯이 여행이 시작하는 곳 또는 끝나는 곳을 의미한다. 컴퓨터에 붙은 화면+키보드를 터미널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컴퓨터에서 전달되어온 정보가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즉, 화면)인 동시에 바깥 세상의 정보가 컴퓨터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곳(즉, 키보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VT100 에서 VT 는 아마 비디오 터미널 즉, 화면 표시장치를 사용하는 컴퓨터 터미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또한 디지털사의 제품으로서 컴퓨터의 직렬 포트에 직렬 회선으로 연결하여 이용하였다. (직렬 포트니 직렬 회선이란 별 거 아니고 보내는 신호와 받는 신호가 달랑 한 줄이라 8 비트 데이터를 보내면 한 줄로 늘어서서 전달되는 방식을 말한다. 보내거나 받는 회선이 여러 줄로 되어 있는 것을 병렬 회선이라고 하는데 과거의 프린터가 병렬 포토, 병렬 회선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직렬로 하더라도 빨리 보내면 되고 직렬이면 케이블도 가늘게 만들 수 있고 해서 요즘은 직렬이 대세이다. 예를 들어, USB 도 universal serial bus 의 줄임 말로서 직렬 방식을 쓰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VT100 은 터미널 화면에서 글자가 깜빡이거나 굵은 글씨, 역상 글씨, 밑줄 글씨 기능을 제공한 최초의 제품이다. (VT113)

PDP 11/44 에는 기본 제공되는 운영 체제인 RSX-11 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성권 등은 여기에 유닉스 버전 7 을 설치하고 거기에 3Com 사의 UNET 소프트웨어를 설치했다. 그런데 도무지 TCP/IP 네트워크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몇 주일 동안 명령어를 바꿔 넣거나 소스를 수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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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해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테스트를 위해 손 댄 프로그램 소스를 인쇄한 종이가 7~8센티미터나 쌓일 정도였다. DEC 11/44 와 유닉스 버전 7 사이의 호환성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둘 사이의 호환성이 증명된 유닉스 버전 7/m 을 구해 설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정성권은 30년 후, 유닉스 버전 7 과 UNET TCP/IP소프트웨어 사이에는 호환성에 문제가 없다는 문서를 발견해 (“너무 친절한 양우씨: 3Com 과 UNET 편에서 인용한 1981년 10월 14일에 발간된 TCP/IP 다이제스트 Volume 1: Issue 2 에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언급이 있음) 당시의 문제의 원인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안정배)

1982년 5월,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PDP 11/70 컴퓨터와 300 여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대학교의 PDP 11/44 컴퓨터가 1200bps(초당 1,200 비트)의 속도로 서로 연결되었다.13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PDP 11/70 에서 UNET 의 가상 터미널 서비스 프로그램인 UVTP 를 사용해서 서울대학교의 PDP 11/44 에 접속해 메시지를 입력하고, 한동안 연결을 유지한 채로 여러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안정배) 일반인들이 인터넷을 써볼 수 있게 된 것이 한국통신, 데이콤, 아이네트 등이 상용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1994년의 일이니 이로부터 꼬박 12년이 걸린 셈이다. (SDN 과 상용 인터넷 서비스는 띠 동갑이다.)

바로 이 교신이 한국 최초의 TCP/IP 원격 연결이며 인터넷의 시작이다. 당시의 연결이나 사용환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지만, 이를 한국 인터넷의 시작으로 보는 까닭은 연결에 사용한 프로토콜이 현재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TCP/IP 프로토콜이었으며 이에 기반하여 FTP, 텔넷 등의 응용 프로토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박현제)

너무 친절한 양우씨: 3Com 사와 UNET 소프트웨어

한국 인터넷의 첫 장면을 열게 해준 3Com 사의 UNET 소프트웨어는 어떤 것일까? 3Com 사는 TCP/IP 를 지원하는 상용 소프트웨어를 최초로 개발한 회사이다. 1980년에 나온 이 회사의 UNET 소프트웨어는 PDP-11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TCP/IP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3Com 사는 TCP/IP 를 지원하는 UNET 보다는 자사의 독자 프로토콜 기반의 제품인 이더시리즈(EtherSeries)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이더시리즈도(EtherSeries)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2004) 이제 3Com 은 세상에서 사라진 회사가 되었지만 컴퓨터 네트워크 카드를 직접 설치해본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인 3c501, 3c503 등이 이 회사가 판매하던 네트워크 카드인 이더링크(EtherLink) 제품을 지원하는 드라이버라는 사실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한편, 1981년 10월 14 일에 배포된 TCP/IP 다이제스트 (아마, 당시 뉴스그룹이나 메일로 주고 받은 TCP/IP 관련 기술 정보 중 쓸모 있는 것을 모아서 배포한 것인 모양 – 사실 여부 확인할 것) 1권 2호 에는 3Com 사의 UNET 소프트웨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한 얘기가 나온다. (TCP13)

SRI 통신과학센터(Telecommunications Sciences Center)에서는 두 대의 11/44(아마 DEC 사의 미니 컴퓨터인 PDP 11/44 를 의미하는 듯 – 고양우)에서 3Com 사의 UNET 소프트웨어 1.5 버전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이는 TCP/IP 다이제스트 최신호에 나온 잘못된 루머와 상반되는 결과이다. 두 기계 모두 표준 V7(벨 연구소에서 1979년도에 내놓은 유닉스 Version 7 을 의미하는 듯 – 고양우)에서 돌아가고 있다. 설치는 매우 순조로우며 어떤 커널 해킹(운영체제의 내부를 뜯어 고치는 일 – 고양우)도 필요 없다. (중략) UNET 은 명백히 PDP 11 상의 가장 빠른 TCP 이다. (이하 생략)

13 요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화 한 편이 대략 1 기가 바이트쯤 되는데 이를 이 속도로 보내면 (산술적으로 보면) 대략 82 일쯤 걸린다. 하지만, 전송 중에는 에러로 재전송하는 경우도 있고 전송을 조절하는 신호 정보도 교환해야 하므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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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0년대 초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의 상황

우리 인터넷의 초기 역사가 어떤 상황에서 시작된 것인지 가늠하려면 이쯤에서 잠시 한국의 인터넷 역사 얘기를 접어두고 그 당시 전세계(사실은 거의 미국)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 섹션의 원고를 완성한 후 이 장은 순서를 재배치할 필요가 있음.)

4.1 1980년 초반의 컴퓨터 네트워크 상황

SDN 프로젝트에서 3Com 사의 UNET 라는 소프트웨어를 써서 TCP/IP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 장면에서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아직 인터넷이 세계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서도 보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인데 TCP/IP 를 구현하는 상용 소프트웨어는 무엇에 쓰려고 만든 것일까?

여기서 잠시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자. 1980년대 초반 기업들은 독자적인 네트워크 기술을 만들고 있었다. 어차피 아르파넷은 국책과제를 하는 학교들이나 연결하는 것이지 일반 기업들이 갖고 있는 컴퓨터를 아르파넷 기술로 연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게다가 컴퓨터를 공급하는 업체들 입장에서도 자기들의 공급하는 컴퓨터와 주변 장치를 가장 잘 연결할 수 있는 나름의 네트워크 기술을 개발해서 추가로 판매하는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당시 컴퓨터 공급자들이 제공했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로 대표적인 것은 제록스의 XNS(Xerox Network Systems),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사의 DECnet, IBM 의 SNA(Systems Network Architecture) 등이었다. (Barry M. Leiner) 당시 컴퓨터 잡지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이들 제품은) IBM, DEC, CDC(Control Data Corporation), 암달사(Amdahl), 버로우사(Burroughs Corporation), 크레이 리서치사(Cray research), 하니웰 메인프레임과 주변 장치로 표준화된 통신 인터페이스 기능을 제공한다. (Bartik, 1982)

아래의 그림은 위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정리한 당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40 가지 네트워크 제품을 비교한 표이다. 요약하자면 당시의 컴퓨터 네트워크는 당연히 LAN – 즉, 우리 회사, 우리 학교, 우리 연구소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한 독자적인 네트워크 – 이며 우리가 갖고 있는 컴퓨터가 어느 회사의 제품이냐에 따라 어느 네트워크 기술을 쓸 것이냐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IBM PC 가 많이 팔리면서 이들을 시장으로 삼아 노벨사(Novell, Inc.)의 넷웨어(Netware)와 사이텍사(Sytek Inc.)의 넷바이오스(NetBIOS)가 나온 것은 그 직후(1883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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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80년대 초반 컴퓨터 네트워크 제품 기능 비교표 (Bartik, 1982)

그런 상황에서 네트워크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들 관점에서 아르파넷의 TCP/IP 는 잘 봐줘야 성가신 부가기능 정도였다. (Barry M. Leiner) 즉, 멀리 있는 서로 다른 기관의 컴퓨터를 연결한다는 것은 아직 먼 얘기 또는 대다수 사람들의 상상력 밖에 있는 기술이었다.

4.2 인터넷 발전의 일등 공신들

여기서는 아르파넷 또는 인터넷을 직접 만든 장본인이 아니면서 어쩌면 인터넷이 널리 퍼지게 하는데 더 큰 공을 세웠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나중에 정리)

메트칼프

그 유명한 알로하넷 을 연구한 사람이다. 박사학위로… ^^

이더넷을 발명했다. Widespread development of LANS, PCs and workstations in the 1980s allowed the nascent Internet to flourish. Ethernet technology, developed by Bob Metcalfe at Xerox PARC in 1973, (PC 와 LAN 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터넷 발전의 기반이 되는데 그 중에 특히 1973년 제록스 파크의 메트칼프가 만든 이더넷 기술이 결정적이다. 이로 인해 이전의 적절한 수의 time sharing 컴퓨터가 연결되는 아르파넷 모델에서 많은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인터넷 모델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A/B/C 클래스 개념) is now probably the dominant network technology in the Internet and PCs and workstations the dominant computers. (Barry M. Leiner)

3Com 을 창업했다. UNET 는 메인이 아니고 주력 상품은 XNS 기반의 EtherSeries.

메트칼프의 법칙은 메트칼프가 만든 거 아님 ^^ Metcalfe's law states that the value of a telecommunications network is proportional to the square of the number of connected users of the system (n2). First formulated in this form by George Gilder in 1993,[1] and attributed to Robert Metcalfe in regard to Ethernet, [http://en.wikipedia.org/wiki/Metcal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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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s_law]

빌 조이

1982년 4월 4.1a BSD [http://oreilly.com/catalog/opensources/book/kirkmck.html]

http://www.historyofcomputercommunications.info/Book/9/9.8_TCP-IP-XNS81-83.html

4.3 아르파넷에서 TCP/IP 로

지금의 인터넷은 TCP/IP 기반이지만 처음의 아르파넷은 NCP 였다.

TCP/IP 가 만들어진 것은 1973년

NCP 를 TCP/IP 로 전환한 것은 1983년 1월 1 일.

(나중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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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DN 시대

5.1 SDN 의 확장

1982년 5월, 국내 최초의 TCP/IP 네트워크 구축 이후 1982년 말에는 먼저 구축된 서울대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에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생이었던) 박현재 등이 노력한 끝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가 보유한 디지털사의 VAX-11(앞서 연결된 PDP-11 을 만든 디지털사의 후속 모델)이 추가되어 SDN 은 세 노드로 확장되었다. 아래 그림은 1982년 말의 네트워크 연결 상태를 보여준다.14 속도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초당 1,200 비트였고 1980년대 말에 가서야 초당 9,600 비트로 향상된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그림 6 그림 1983년 3월에 제출된 “Computer Architecture 개발에 관한 연구”의 최종 보고서에 포함된 SDN 의 구성도 (SDN 태동기의 국내외 인터넷 환경 및 구축 상황, 2012)

이후, SDN 의 관리와 운영을 전길남 교수가 지도하고 있던(체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의 시스템 구조 연구실(System Architecture Lab, SALAB)에서 맡게 됨에 따라 SDN 네트워크 운용 관리 센터가 한국과학기술원으로 옮겨지고 이 VAX-11 이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그 이후로도 SDN 은 계속 확장되어 간다. 1984년에는 8 개, 1985년 3월에는 16 개 기관이 연결되고 1986년 2월에는 21 개의 기관의 50 여대의 컴퓨터가 연결된다. 1986년 1월의 SDN 연결 모습은 다음 그림과 같다. (SDN 동향보고, 1984)(SDN 동향보고 '85 봄, 1985) (SDN 동향보고 '862월, 1986)

14 보오(baud) 는 1 초당 전송할 수 있는 신호의 개수를 말한다. 만약 신호가 0 또는 1 이라면 보오는 초당 보낼 수 있는 이진수 한자리 즉 비트와 같다. 따라서, 1200 보오는 초당 1200 비트를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한 신호에 여러 비트를 보내는 기술도 있으므로 보오와 초당 비트 수(bps, bit per second)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전이중 통신(full duplex)은 보내기와 받기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반이중 통신(half duplex)은 보내는 중에는 받을 수 없고 받는 중에는 보낼 수 없는 것이고 단방향 통신(simplex)는 한쪽으로만 보낼 수 있고 반대쪽으로는 보낼 수 없는 방식을 말한다. 요즘은 어지간한 통신은 다 전이중 통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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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1986년 1월 31 일 기준 SDN 의 구성 (SDN 동향보고 '86 2월, 1986)

1986년 당시, 기관과 기관을 연결하는 데에는 TCP/IP 와 UUCP 가 혼용되었으며 미국의 CSNET 과는 PMDF 라는15 프로그램을 통하여 메일 전송 서비스 즉, 폰넷(Phonenet)에 연결할 수 있었다. TCP/IP를 통해서는 전자 우편, 파일 전송, 가상 터미널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UUCP 를 통해서도 전자 우편과 파일 전송은 물론 유즈넷 뉴스와 원격 터미널 실행(remote terminal execution) 기능이 제공되었다.16 그리고 그 외에도 86년 SDN 동향 보고에는 재미난 자료가 많이 있다. 활용이 필요하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 와 !

15 앞서 “너무 친절한 양우씨: CSNET 초창기의 가장 뜨거운 논쟁은?”에서 설명하였듯이 CSNET이초창기에 제공한 중요 기능 중 하나가 MMDF 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메일 자동 교환 시스템이었다. MMDF 를 설치한 사이트를 폰넷 사이트 그리고 이들을 연결한 네트워크를 폰넷이라고 한다. (이를 구현하는 프로젝트의 이름도 폰넷이라고 한다.) MMDF 를 다른 시스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파스칼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다시 작성한 것을 PMDF 라고 한다.

16 원격 터미널 실행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UUCP 의 경우 멀리 떨어진 상대방 컴퓨터의 명령을 원격으로 실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였는데 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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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P/IP 와 UUCP 의 메일은 서로 다른 주소 방식을 사용했다. UUCP 에서는 상대에게 메일이 전달되기 위한 경로를 표시해서 보냈다. 예를 들어, “foo!bar!tom” 라는 메일 주소가 있다고 하면 일단 이 메일은 foo 라는 컴퓨터로 전송이 되고 이 컴퓨터가 bar 라는 컴퓨터로 메일을 전달해주면 사용자 tom 은 bar 컴퓨터에 접속하여 메일을 받게 된다. 물론 내 컴퓨터가 bar 컴퓨터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bar!tom 이라고 쓰면 된다. 여러 번 얘기하였듯이 UUCP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컴퓨터끼리 서로 늘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상대방의 컴퓨터와 내 컴퓨터가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리를 건너서 연결되는 구조였으므로 이러한 연결 상태를 “사용자가 알아서” 주소에 적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중계를 해주는 컴퓨터들의 이름과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서 느낌표(!)를 사용하였다.

한편, TCP/IP 메일에서는 우리가 친숙하게 알 듯이 “사용자@메일서비스제공자”의 형태로 쓴다. 그래서 같은 컴퓨터의 같은 사용자라고 해도 UUCP 메일로 보낼 때와 TCP/IP 메일로 보낼 때 주소를 다르게 써야 했다. 더 골치 아픈 경우는 “foo!tom@bar” 와 같은 메일 주소다. UUCP 식으로 해석하자면 앞에서부터 읽어나가서 foo 라는 컴퓨터의 tom@bar 라는 사용자라는 뜻이 되고 TCP/IP 식으로 해석하면 @를 중심으로 뚝 잘라서 bar 라는 메일 서비스의 foo!tom 이라는 사용자가 된다. 심지어 이 메일 주소는 이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TCP/IP 메일 방식이 대세가 됨으로써 UUCP 방식의 메일이 더 이상 안 쓰이게 될 때까지 메일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였으며 지금도 유닉스나 리눅스 환경의 메일 서비스 프로그램인 센드메일(sendmail)은 설정하기 까다로운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5.2 해외로 향한 첫 걸음

1980년대 초반에 가장 널리 연결된 컴퓨터 네트워크는 유닉스와 유즈넷의 인기를 등에 업은 UUCP 네트워크였다. 따라서, SDN 도 여기에 연결되어야 해외의 많은 자료도 구할 수 있고 전자 메일도 원활하게 교환할 수 있을 터였다.

1982년 10월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유즈닉스(USENIX) 컨퍼런스 기간 중 북미, 유럽, 그리고 아시아 사이의 UUCP 네트워크 조율을 위한 비공식 회의가 열리고 여기에 전길남이 참석한다. 이어 1983년 1월에는 미국 샌디에고에서 열린 유니컴(UNICOM) 컨퍼런스 기간 중 마크 호튼(Mark Horton)이 조직한 BoF 모임에17 참가한 전길남은 유즈넷 소프트웨어를 구해오게 된다. (AnA) (요약 번역 고양우)

물론 소프트웨어만 있다고 UUCP 네트워크에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연결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마침 유럽과 미국 측 운영자들의 도움으로 SDN 도 UUCP 네트워크에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83년 8월 네덜란드의 MCVAX 라는 컴퓨터를 통해 EUNET 에18 연결을 시초로 그 해 10월 미국의 HPLABS 라는 컴퓨터를 통해 UUCP Net 에 연결 되었고 (박현제)

당시, 늘 연결되어 있는 전용선은 유지비용이 몹시 비싸서 일정한 시간마다 서로 전화를 걸어서 전화선을 통하여 초당 1,200 비트의 속도로 전송하였다. 물론 해외와 연결하여 전화선으로 자료를 받는 것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메일은 하루에 한번 연결해서 쌓아두었던 메일을 왕창 보내고 왕창 받아왔다. 하지만 양이 많은 유즈넷 뉴스그룹은 이렇게 할 수도 없어서 궁여지책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17 Birds of a feather 즉, 같은 무리라는 뜻의 영어에서 온 말로 행사기간 중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는 비공식적인 회의를 지칭한다.18 1982년에 만들어진 유럽의 유닉스 기반 네트워크로서 최초의 국제 UUCP 연결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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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길남은 seismo 의19 운영자였던 릭 애덤스(Rick Adams)과 넷뉴스(newnews) 20 자료를 자기 테이프에 담아 매주 소포로 받기로 협의하였다. 이렇게 받은 자료를 한국과학기술원의 유즈넷 노드인 설악(sorak)에 올리고 이를 전화선 연결을 통하여 한국의 UUCP 네트워크에 전파하였다. 1984년에는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넷(AsiaNet)21에 연결된 다른 나라에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AnA) (요약 번역 고양우)

자기 테이프를 받은 주기가 매주인지에 대하여는 기억이 엇갈리고 있다. 당시 SDN 의 책임자였던 박현제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화료가 비쌌기 때문에 UUCP 메일은 하루 1번, 유즈넷 뉴스그룹의 자료는 한 달에 한 번 자기 테이프로 받아보았다. 나는 네트워크 책임자였기 때문에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추가로 연결해서 직접 받아보기도 했다. (박현제)

당시 SDN 의 연결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림에 나오는 CSNET 과의 연결은 1984년 12월에 마찬가지로 전화선을 이용하여 연결되었다. 접속은 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아르파넷 접속 제한 정책에 의해 파일전송서비스(FTP 서비스) 등은 사용할 수 없었고, 전자 메일과 유즈넷 뉴스 서비스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19 당시 유명한 유즈넷 노드 중 하나로서 지진연구소(Center for Seismic Studies)가 보유한 장비였다.20 유즈넷 (또는 유즈넷 뉴스그룹)과 같은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다.21 1984년 2월 전길남 박사는 마이크로컴퓨터 응용 NUS/유네스코 워크샵(NUS/UNESCO Workshop on Microcomputer Applications)에 참석하여 유럽의 EUNET처럼 아시아 지역을 묶는 UUCP 네트워크인 아시아넷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같은 해에, 한국, 인터네시아,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호주와 일본까지 연결되었다. 홍콩, 대만, 태국은 1980년에 후반에 참여하게 된다. (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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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83 SDN Map – 1983년 전길남이 KAIST 에서 발표한 자료]

너무 친절한 양우씨: 집배원 아저씨가 빠른가 빛이 빠른가?

비록 전화요금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소포로 자료를 테이프에 담아서 보낸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 소포에 담아서 보낸 자기 테이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1980년대 중반에 주로 썼던 테이프는 3M 사에서 나온 150 메가바이트 용량의 테이프였다. 만약 소포 하나에 4 개쯤 담아서 보낸다고 하면 총 용량은 150MB x 4 = 600MB = 600x1000x1000 바이트 = 600,000,000 x 8 비트가 된다. 초당 1,200비트로 보낼 수 있었으니 그 속도로 이 정도 용량을 보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대략 계산해보니 50 일쯤 걸린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소포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컴퓨터 통신보다 소포가 꼭 느린 것은 아니었다. 컴퓨터 통신은 전기 즉, 빛의 속도로 전달이 되고 소포는 사람이나 자동차, 비행기가 이동하는 속도로 가는데 어째서 컴퓨터 통신이 꼭 더 빠르지는 않은 것일까? 이건 밀도의 문제다. 자기테이프에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꽉 채워서 한방에 날리는데 반하여 컴퓨터 통신에서는 한 비트씩 띄엄띄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당 전송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초당 기가 비트(10 억 비트)이상을 보낼 수 있다. 만약 초가 1 기가비트를 보낼 수 있다면 아까 그 소포에 담긴 내용은 5 초 안에 전달할 수 있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seismo 와 UUNET 그리고 릭 애덤스

UUCP 네트워크가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정보가 유통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니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서비스를 운영하는 쪽 (대학교와 연구소들) 에서는 돈이 안 생기는 서비스에 값비싼 컴퓨터와 네트워크 장비를 할당해야 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아예 이것을 상업적으로 지원하는 회사가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지진연구센터(Center for Seismic Studies)에서 UUCP 네트워크를 관리하던 릭 애덤스다. UUNET 통신서비스(UUNET Communications Services)사라는 이름으로 1987년에 시작된 서비스는 무척 성공적이었고 회사 이름을 UUNET 테크놀로지스사로 바꾸었다. 1990년에는 미국 정부의 제약을 받지 않고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상용 인터넷 접속 서비스 사업자가 되었다. (Uun13) 한국의 인터넷 역사에서 릭 애덤스는 최소한 두번은 꼭 언급되어야 한다. 유즈넷 뉴스를 국내로 전송해준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참 뒤에 나오겠지만 한국에서의 최초의 상용 인터넷 접속 사업에서도 그의 이름은 등장한다.

5.3 당시의 네트워크 운영 환경

요즘에야 컴퓨터가 흔해서 개발용과 실제 운영용 컴퓨터를 따로 두고 개발용 환경에서 충분히 개발과 테스트를 거친 후 실제 운영 컴퓨터에 적용하지만 당시로서는 컴퓨터가 귀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1983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시스템 구조 연구실의 석사 학생이었으며 SDN 의 관리를 담당하였던 박현제 박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83년 당시, 전산학과에는 조금 더 큰 기종(VAX-11/780)이 있었고, 전길남 박사님 실험실에 VAX-11/750 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한국과학기술원뿐 아니라 전국을 통틀어 컴퓨터를 보유한 개인 연구실은 전길남 박사님 연구실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현제)

여러 학생이나 연구자들이 연구용으로 써야 할 컴퓨터를 SDN 에 연결하고 네트워크 연구와 실험을 동시에 진행한 것은 본의 아니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의 일화를 소개한다. 기술 용어가 많이 등장해서 읽기가 힘든 분들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컴퓨터를 SDN 연결용 겸 여러 학과의 연구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고 나니 네트워크 쪽에 변경된 부분이 있어 S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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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를 고치고 되나 안되나 확인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해버리니 다른 사람들이 컴퓨터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원성이 자자하였다. 수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하버드 대학에서 이미 이 문제를 해결한 결과물이 있어서 가져다 써서 해결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네트워크 관리 업무를 맡은 것은 1984년 초반이었다. 1984년 말에 새로운 유닉스 운영체제인 4.2BSD 가 출시되어 VAX-11/750 과 VAX-11/780 두 컴퓨터의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 하고 두 컴퓨터를 다시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이들 두 컴퓨터는 프로테온(Proteon)사 제품을 사용하여 서로 토큰 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부로는 시리얼 라인(serial line, sl)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RS232C 를 방식으로 저속(1200~9600bps)으로 다른 컴퓨터와 1:1 로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4.2BSD의 TCP/IP 모듈에는 이 시리얼 라인 드라이버가 장착되지 않아 컴퓨터간의 저속 통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주요 사이트의 인터넷연결이 별도의 DSU 를 사용한 56kbps로 이루어졌으므로 별도의 장비를 쓰지 않는 저속통신은 별로 수요가 없다고 판단했었던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외부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고, 커널 소스 등을 만들며 개발을 시작했다. 커널 프로그램은 테스트할 때마다 재 부팅이 필요했는데 재 부팅은 매회 20~30분씩 소요되는 일이었다. 개발 중이라 자주 재 부팅을 해야 했으니 다른 실험실에서는 난리였다. 당시 전산과나 전자과, 기계과 등에서는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1~2 주일씩 프로그램을 돌리곤 했다. 학생들이 일주일씩 작업하고 있던 것들이 부팅 한 번에 날아가는 상황이었으니 난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인터넷이 연결되느냐 마느냐 하는 큰 문제였다. 반 년 정도 걸려 프로그램을 거의 다 짰는데, 하버드 대학에서 같은 프로그램이 개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쉽기도 하고, 욕심 같아서는 더 개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하버드 에서 만든 PPP 시리얼 라인 드라이버를 구해 설치했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먼저 실험을 해보고, 서울대 등에서도 이 드라이버를 사용했다. 드라이버는 이후 Seismo 에서 만든 시리얼 라인 드라이버로 교체했다.

덕분에 1985년에는 인터넷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PPP 시리얼라인 드라이버는 당시 내가 만들던 것과 같은 스타일의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 뉴스그룹 등에 이러한 이슈를 제기했을 때, 아무도 대답이 없길래 우리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같은 이슈가 있었던 것이다. (박현제)

너무 친절한 양우씨: 토큰 링과 이더넷

토큰 링은 근거리 통신망(랜, LAN, local area network) 즉 한 공간의 컴퓨터끼리 서로 컴퓨터 통신할 때 쓰는 방식 중 하나로서 이더넷(Ethernet)과 경쟁하였다. 지금은 거의 이더넷만 쓰인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토큰 링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서 자기 왼쪽 사람에게서 얘기를 듣고 오른쪽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한편 이더넷 방식은 그냥 할 말이 있으면 다 들리게 고함을 치는 방식이다. 만약 동시에 고함을 친다면 소리가 뒤섞여서 전달이 안 된다. 차근차근 전달되므로 내 얘기가 어떤 속도로 전달될 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토큰 링과는 달리 이더넷에서는 운이 나쁘면 하필이면 내가 얘기하려고만 하면 누군가 떠들고 있어서 계속 입 닫고 있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케이블로 연결할 수 있도록 이더넷 방식이 개선되면서 (집에서 컴퓨터를 인터넷에 연결할 때 쓰는 바로 그 케이블 방식을 말함) 급격히 대세가 이더넷으로 기울어 지금은 토큰 링을 쓰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5.4 IP 주소의 할당 그러나 연결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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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N 을 통한 기관간의 연결 그리고 UUCP 를 통한 해외 자료의 배포로 물꼬가 트이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갈증을 불러오고 있었다.

이메일에 의존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유즈넷 뉴스그룹에는 간혹 “이 정보는 FTP 로 가져갈 수 있다”고 적힌 정보가 올라오기도 했다. 뉴스그룹으로 올리기엔 부담스러운 것들도 있으니까. 이럴 때마다 어떻게든 인터넷을 연결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박현제)

즉, TCP/IP 기반의 인터넷 망으로 해외까지 연결이 되어야 해외의 자료 중 FTP 에 올라가 있는 자료를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을 전화망으로 한다는 것은 비용 때문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얼마나 통신 요금이 비쌌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스몰토크(Smalltalk)22 가상 머신이 개발되어 나왔다. 당시 등장한 획기적인 윈도우,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의 원천기술이었다. 그 때, 골드버그23에게 이메일을 보내 스몰토크 가상기계의 오브젝트 코드(object code)을 다운로드했다. 그게 10MB 였는데, 생각 없이 HPLABS 에 다이얼 업 24 모뎀으로 걸어 다운로드했더니, 다음 날 전박사님이 누가 통신료를 이렇게 많이 썼냐고 부르시더라. 그 때, SDN 프로젝트 1년 예산이 2~3천만원 할 때였는데, 하룻밤에 국제전화료가 300 만원이 나온 것이다. 물론 통신료는 연구비에서 지불했다. 장사나 게임 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 이후 관리를 위해 패킷마다 쿼터를 만드는 등의 회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한선영)

이런 와중에 희소식이 있었다. 1984년 7월에 데이콤이 X.25 기반의 공중 데이터 통신망인 DACOM-Net 를 개통한 것이었다. 비록 TCP/IP 와는 다른 네트워크 기술이지만 전화 회선보다 싸면서 더 고속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길은 열린 것이다.

이 시기에 외국과의 연결은 모두 다이얼 업 방식이었다. 통신료가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약간 저렴한 X.29 PAD 25방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 때문에 UUCP 소스를 들여다보면서 국내에서 사용하는 PAD 방식과 상호 신호를 맞추기 위해 고생했다. 결국 PAD 로 바꿔서 외국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박현제)

다시 말해, 더 이상 전화망을 쓰지 않고 데이콤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UUCP 연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CSNET 도 연결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PAD 를 이용한 터미널 수준의 연결이지 IP 네트워크로서의 연결은 아니었다. 물론 X.25 에서 IP 통신이 가능하게 해주는 “IP over X.25”를 사용한다면 전용선이 없어도 미국과 싸게 그리고 더 고속으로 연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IP 주소가 필요했다.

IP 주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유즈넷 뉴스 등을 뒤져서 1986년 6~7월 경에 IP 주소를 신청하는 방법을 찾아서 신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에는 IP 주소가 (수용할 수 있는 컴퓨터의 수에 따라) A, B, C 클래스로 나뉘어 있었는데, 여러 번 고민하다가 B 클래스 IP 주소를 신청했다. 당시 보통은 200 대 정도를 연결할 수 있는 C 클래스를 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잘 설명해서 6 만대까지 연결할 수 있는 B

22 스몰토크는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거의 매일 보는 창 모양의 화면 인터페이스 방식은 물론이고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프로그래밍 방식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OOP, Object Oriented Programming)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요즘 개발자가 쓰는 방식으로 쓰게 만든 최초의 시스템이다. 당시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던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소 (Xerox PARC, Palo Alto Research Center, 흔히 제록스 파크라고 부름) 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다.23 Adele Goldberg, 스몰토크의 창시자 중 하나이며 (80년대에 전산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책) “SMALLTALK-80”의 저자이다.24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 연결하는 방식

25 X.25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터미널을 연결하는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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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를 신청했다. 8월에 IP 주소가 승인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박현제)

막상 이 일을 추진했던 박현제 본인도 (당시에는) 몰랐을 수도 있는데 이 때가 마침 딱 적절한 시기였다.

아르파넷 프로젝트를 통하여 1985년부터는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26을 그리고 1986년부터는 IP 주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할당 작업은 IANA(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를 통해서 이뤄졌다. (AnA) 에서 발취하여 번역

일이 잘 풀리는가 싶었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화 연결의 경우에는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연결을 하고 (즉, 전화를 걸고) 전화를 거는 쪽에서 요금을 내는 것이지만 X.25 네트워크의 경우에는 양 당사자가 네트워크 쪽으로 연결을 해야 했고 양쪽이 요금을 내야 했다. 우리야 낼 의지가 있었지만 문제는 상대편이었다.

인터넷이 연결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콜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 우리가 콜을 하면, 상대 쪽에서 허용해주어야 연결이 되는데, 우리의 패킷을 받겠다고 허용해줄 수 있는 곳이 없으니 연결이 될 수가 없었다. 누가 걸었는지, 어떻게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CSNET 을 연결할 준비만 갖춰놓고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전박사님이 열심히 알아 보셨다면 사용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돈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하는 것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박현제)

그리하여, IP 주소도 받고 기술적인 준비는 다 끝내놓고도 해외 인터넷과의 본격적인 연결은 새로운 계기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기록되지 않아도 될 뒷이야기: 누구 맘대로 IP 주소는 신청한거야?

아래 내용은 나중에 정리하자

IP 주소를 신청한 사람의 자격은 SDN network manager 박현제 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개인자격이 아니니까! 이 일은 재미있는 기억입니다.

그때 누가 특별히 이 일에 관심을 갖거나 기대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질러버렸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한번 해보았어요. 어떻게 하든 간에 IP 로 미국에 연결을 해야겠는데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찾은 방법이었고 그래서 추진을 했지요. 그런데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 때 전박사님은 여름 휴가를 갔었던 때로 기억하는데, 그냥 매니저 자격으로 추진을 하였던 것이지요. 나 혼자 한 것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전박사님이 존 포스텔하고 따로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도 NIC 내부에 이 신청으로 debate 가 있었는데 그 일 관련해서 포스텔과 전박사님이 의견을 나누신 것 같아요!

나름 재미있었던 시도였었습니다. 나는 B class 를 신청하려고 justify 하려고 고민 많이 했었는데 한참 나중에 어떤 사람은 왜 A class 로 하지 않았냐고 책망하던데 #$&$&@*!!! [박현제의 원고 코멘트. 그런데 이런 거 공개해도 될라나]

26 우리는 주소를 적을 때 큰 것부터 작은 것 순서로 즉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라고 적지만 미국사람들은 반대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적는다. 이런 방식은 컴퓨터의 이름에 붙이기 위한 도메인 이름 규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뒤로 갈수록 더 큰 쪽이다. 예를 들어, 한국(kr)의 학교(ac) 중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산학과(cs) 도메인은 cs.kaist.ac.kr 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맨 뒤에 오는 것을 최상위 도메인이라고 부르는데 최상위 도메인에는 이 예에서와 같이 국가 (코드)로 만든 것과 그렇지 않고 아무 것에나 붙인 것이 있다. 앞엣것을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ccTLD, country code top level domain)이라고 부르고 뒤를 일반 최상위 도메인 (gTLD, generic top level domain)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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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콤 창업 이야기 (아래의 내용을 정리해서 쓸 것 – 고양우)

아래 내용은 나중에 정리하자

이용태 박사의 증언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409/h2004092117442021930.htm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409/h2004092218274621930.htm

[대한민국 IT 사 100 - 데이터통신의 시작과 4 대 대형 PC 통신망] 에버노트에 올려 둠.

5.5 국산 컴퓨터로 네트워크를

1980년대 초반 우리 정부는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를 중심으로 전자 산업을 육성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요즘도 소위 “국책 과제”의 형태로 많은 연구를 하지만 당시에도 정부가 투자하여 컴퓨터 등을 개발하고 있었다.

1982년 과학기술처의 과제로 삼성반도체통신과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방승양 박사팀은 총 22 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하여 SSM-16 (삼성 슈퍼 마이크로컴퓨터 16)을 개발하였다. 같은 시기에 금성사27 중앙연구소도 방승양 박사팀과 함께 총 10 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하여 GMC-5010 (금성 마이티 컴퓨터 5010) 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처 과제로 개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에 10 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연구개발비 규모는 단일 프로젝트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SSM-16 은 (당시로서는 최신이었던) 모토롤러 680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유닉스 시스템 버전 7 을 국내 최초로 소스코드를 라이선스 받아서 자체로 이식하여 탑재한 반면 GMC-5010 은 인텔의 80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CP/M 과 PC-DOS 를 탑재하였다. (The History of Micro Computer System Development (SSM-16),2012) (서현진, 1996) 말하자면 삼성 것은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서버이고 금성 것은 개인용 컴퓨터를 지향한 것이다.28

SDN 연구자들은 그 동안 PDP-11 과 VAX-11 에 탑재하였던 TCP/IP 소프트웨어를 이 SSM-16 에 탑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국산 컴퓨터를 이용한 라우터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서 1982년 SDN 연구제안서에서 예측한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자체 컴퓨터로 구축될 수 있으며” 라는 목표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안정배의 원고에는 그 이후로 SSM 을 갖고 있는 기관들이 연결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건 레퍼런스가 무엇인지? 레퍼런스가 확보되면 여기에 추가할 것 – 고양우)

5.6 도메인 이름의 도입

1983년에 도메인 이름 시스템(DNS, domain name system)이 개발되고 미국 정부와의 계약에 의하여 국가 최상위 도메인(ccTLD)을 각국의 관리자에게 위임하는 역할은 존 포스텔이 (그리고 나중에는 IANA 라는 기구가) 맡았다.29 이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국가가 별로 없어서

27 1958년 설립된 전자 회사로서 1995년에 LG 전자와 LG 전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나중에 LG전선은 LG 그룹에서 분리되면서 LS 전선이 되었다.28 SSM-16 은 그 후 삼성그룹이 중형 컴퓨터 개발을 전략분야로 꼽은 데 힘입어 SSM-32 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제품수명이 연장됐으나 GMC-5010 은 판매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단종됐다. (서현진, 1996)29 초창기의 IANA 는 존 포스텔이 혼자 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존 포스텔의 역할이 상당 기간 동안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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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최상위 도메인의 수요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국가 최상위 도메인을 요청하는 쪽도 국가 기관이 아니라 인터넷을 연구하는 대학이나 연구기관들이었다. 1993년까지는 국가 최상위 도메인은 선착순으로 위임되었다. 위임을 받기 위한 조건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예컨대, 관리자가 요청하는 국가 영토 안에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순진하고 허술하게) 관리하였지만 인터넷이 상업적으로 허용되기 전까지는 (즉, 1991년까지는) 아무런 분쟁도 없었다. (Mueller, 2004) (Yu, 2003)

최초의 국가 최상위 도메인은 미국(.us)으로서 1985년 3월에 위임되었다. 이어 7월에는 영국(.uk) 그리고 10월에는 이스라엘(.il)이 위임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호주(.au 3월), 뉴질랜드(.nz 4월), 일본(.jp 8월), 프랑스(.fr 9월), 스웨덴(.se 9월), 한국(.kr 9월), 독일(.de 11월)이 위임되었다.(1999) 여기서 위임했다는 말의 의미를 잠시 살펴보자. 국가 최상위 도메인에서 사용하는 국가 코드 자체는 정치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30 국제 표준 기구(ISO)의 국가 코드표인 ISO 3166-1 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 국가 최상위 도메인은 처음부터 표에 있는 모든 나라의 것이 다 만들어진 셈이다. 다만 쓸 준비가 된 나라에게 쓸 수 있도록 등록해서 위임해주는 절차가 필요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국가 최상위 도메인의 위임 순서는 한편으로는 당시 각 국가의 인터넷 준비 수준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전길남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인터넷에서도 국가도메인을 허용하자고 얘기가 되었고, UK 를 쓰고 있던 영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바로 KR 을 사용하기 시작했죠. 물론 국가도메인 이름은 거의 한꺼번에 만들어졌지만, 국가도메인 이용을 인정하는 절차는 인터넷을 잘하는 국가부터 시작되었던 거죠. (오병일, 2005)

하지만 .kr 이 부여되기 전에도 이미 도메인 이름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SDN 에서는 도메인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86년에는 SDN 의 도메인 이름으로 sdn, bongwha, asia 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kaist 를 쓰기도 하고 edu.kr이라고 쓰기도 하다가 결국 1986년에 ac.kr 로 확정하여 학교 기관들은 이 아래로 이름을 붙이기로 하였다. (SDN 동향보고 '86 2월, 1986) (박현제)

국가 도메인인 kr 아래로 ac.kr / co.kr / … 등으로 2단계를 정하고 그 아래로 3단계로 컴퓨터를 등록하는 등의 규격은 1987년에 설계되었다. (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어야 함) 한참 뒤의 일이지만 1990년에 .kr 도메인 네임 서버로 한국과학기술원의 kum.kaist.ac.kr 과 pugak.kaist.ac.kr 라는 컴퓨터를 등록하여 .kr 을 도메인 네임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에게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5.7 인터넷에서의 한글 처리

컴퓨터가 자료를 다루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기록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글자나 말 소리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장미”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글자 또는 그 소리가 원래 그런 뜻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세익스피어가 줄리엣의 입을 빌어 얘기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름이라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장미라고 부르고 있는 저 꽃의 이름이 아무리 바뀌어도 향기로운 꽃 향기에는 변함이 없어요.

숫자건 글자건 그림이건 모두 어떤 약속에 따라 “바꾸어 표현하고” (이를 코드로 바꾼다고 하여 부호화, 코딩 coding 또는 인코딩 encoding 이라고 한다) 이렇게 “코드로” 표현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숫자/글자/그림으로 “해석하여” (이를 코드를 푼다고 하여 복호화 또는 디코딩 decoding 이라고 한다) 보여 줌으로써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키보드로 입력한 글자가 화면에 표시되고

30 예를 들어, 우리 나라의 헌법에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데 북한에 ccTLD 를 할당할 것인가 말 것인가? 팔레스타인이나 동티모르는 언제부터 나라로 인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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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 저장되며 다른 사람에게 보내서 그 사람이 열었을 때도 같은 글씨가 나오게 하는 이런 과정이 모두 코드에 대한 약속이 있고 이를 따르기 때문이다.

여러 대의 컴퓨터가 있어도 서로 자료를 주고 받을 일이 없다면 컴퓨터 각자가 코드를 정해서 쓰면 될 뿐 그 코드가 서로 같을 필요는 없다. (경주 두메 산골인 내 고향에서는 닭튀김을 “켄터키 치킨”이 아니라 “제트기 치킨”이라고 불렀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의 활용이 늘어나면서 코드를 통일할 필요성은 자연히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정부 표준 한글 코드는 1974년 과기처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해 만든 것인데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한 탓인지 여러 문제들이 드러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그 와중에 컴퓨터 업체마다 다른 코드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1980년 12월 29 일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문교부, 내무부, 총무처 등 6 개 부처를 비롯 업계, 학계 등이 모여 컴퓨터 표준화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결과물은 1982년 1월 과기처에 공식으로 제출됐고 같은 해 5월 KS 표준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새로운 코드 표준은 이런 저런 안을 짜깁기하여 복수 표준으로 (즉, 이거 쓰고 싶으시면 이거 쓰시고 저거 쓰고 싶으시면 저거 쓰세요) 제시한 것으로 74년판 보다 더 처절한 실패작이었고 널리 쓰이지도 않았다.31 (서현진)

그 때까지 난립하던 코드를 정리한 것 이외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이 표준의 문제의 해결하기 위하여 개정 작업을 진행하여 국제 규격(ISO 2022)을 그대로 만족시키는 2 바이트 완성형 시안을 표준 시안으로 선정하였다. 이 시안에 대하여 의견을 수집한 결과 정보 교환용 부호로 2 바이트 완성형 부호32를 규정하고 2 바이트 조합형33과 7 비트 부호의 권장안을 추가시킨 안을 최종 시안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1987년 8월 31 일 KS C 5601 정보 교환용 부호로 개정되었다.34 (강석, 1990) 이 표준 코드는 처음으로 널리 쓰이는 표준 코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정보 교환을 위해서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기관에 납품하는 컴퓨터에는 반드시 이 표준을 따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계를 잠시 되돌려 1980년대 초반 SDN 의 상황을 알아보자.

1983년 KAIST 에서 4.1BSD 에서 제공하는 메일 시스템의 확장판으로 한글 이메일에 관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1985년에 한글 이메일 프로그램과 한글 에디터인 hvi 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SDN 에서는 한글을 사용하여 이메일을 전송하고 수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한글 기능은 필요한데 시스템에서 제공하지는 않으니 이런 식으로 각 기관마다 개발해서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SDN 을 통하여 여러 기관의 컴퓨터를 연결해놓고 보니 따로 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문제가 나타났다. 아래는 1986년의 논문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현재 SDN 에서 기관 대 기관 사이에 한글 사용하여 통신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은 SDN에서 단일의 한글 표준안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현제, 1986)

한글 코드 자체에 대한 표준은 물론이고 응용 프로그램 내부에서 한글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하여도

31 이 일과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사실상의 표준인 유니코드(Unicode)에도 한글은 여러 코드 체계가 복수 표준으로 들어있다. 요즘에야 컴퓨터가 워낙 처리 능력이 뛰어나서 복수 표준이라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최선은 아니라고 본다.32 널리 쓰이는 한글 글자를 가나다 순으로 늘어놓고 각 글자에 2 바이트 코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문, 숫자를 표현하는데 쓰는 아스키(ASCII) 코드와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33 한글 한 글자를 2 바이트에 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초성, 중성, 종성 각각에 코드를 부여하고 이를 “조합해서” 2 바이트의 코드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한 글자의 구성 성분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34 이 코드는 1992년에 다시 개정되는데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앞을 5601-1987 뒤를 5601-1992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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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은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각 기관의 소프트웨어는 나름의 코드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SDN에서도 한글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표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하여 SDN 내부에 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는 뉴스 그룹인 sdn.hangul 을 통하여 논의를 계속하면서 표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1987년에 개정된 한글 코드가 널리 쓰이게 됨으로써 최소한 한글 코드 표준에 대한 고민은 해소되었다. 물론 응용 프로그램에서의 한글 처리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전자 메일의 국제적인 교환에서의 한글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숙제는 1993년에서야 결실을 보게 된다.

5.8 PCCS – 최초의 전지구적 인터넷 컨퍼런스를 개최하다

1985년에는 한국 그리고 아시아 인터넷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10월에 개최된 태평양 컴퓨터 통신 심포지엄(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 Symposium 이하 PCCS)이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북미, 유럽에서 300 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모든 것의 시작”35라고 할 정도로 이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5.8.1 배경과 준비 과정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이 점점 관심을 끌게 되면서 연구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학술행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행사는 미국 아니면 유럽에서만 열리고 있었다. 아시아의 연구자들은 아시아에서도 이런 행사가 열리길 바라고 있었는데 마침 1984년 2월에 마이크로컴퓨터 응용 NUS/유네스코 워크샵(NUS/UNESCO Workshop on Microcomputer Applications)에서 논의가 진전되어 아시아 국가들의 UUCP 네트워크인 아시아넷(AsiaNet)을 만드는 한편 인터넷 관련 컨퍼런스를 갖기로 했는데 한국이 첫째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AnA)

이 행사에는 아시아 지역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문가들을 초빙하기로 하였는데 그 초빙 대상자들은 (1) 유즈닉스(USENIX) 등 유닉스 관련 컨퍼런스 강연자들 (2) 미국의 교육연구망인 CSNET 프로젝트 관련자들 (3) EARN36 관계자들 (4) 아시아넷 관계자들 그리고 (5) IEEE Computer Society 와 Communication Society 회원들 등이었다. (AnA) 미국 쪽으로는 IEEE 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던 김광회 교수가37 일본 쪽으로는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막 한양대로 온 박용진 교수 맡아서 도와주었다. 그 결과 CSNET 을 만든 로렌스 랜드웨버(Lawrence Landweber), 데이비드 파버(David Farber) 등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한 전문가들이 초청됐고, 해외에서만도 120~130 명 정도가 참여했다. 특이한 점은, 이들 중 몇 사람만 참석사례비로 200~300 달러를 지급했을 뿐 대부분이 자비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큰 관심을 끈 행사라는 증거가 될 수 있겠다. 해외 참가자들은 주로 일본과 미국이 많았고 유럽, 싱가포르, 호주, 캐나다, 대만, 홍콩, 중국 등지에서도 참석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주최를 했는데, 예산은 사무국운영지원비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참석자들을 지원하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선영)

행사의 준비에는 UUCP 네트워크를 이용한 메일이 큰 역할을 했다. 외국인이 100 명 넘게 참가하는

35 이 행사의 참석자였던 일본의 준 무라이 교수가 행사를 준비했던 한선영에게 2012년(? -- 확인필요)에 한 얘기

36 BITNET 은 미국의 대학간 네트워크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이때 유럽의 네트워크를 EARN 이라고 한다.37 실시간 컴퓨팅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1988년에는 IEEE Fellow 가 되었고 1998년에는 IEEE Computer Society 의 기술성취상(Technical Achievement Award)를 수상하였다. 또한 2005년에는 한국인 한국인 최초로 IEEE 의 ‘쓰토무 가나이상’을 받았다. 1983년 박찬모 전 포스텍 총장과 함께 ‘재미 한인 정보과학기술자협회’를 창립했고 2004년 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임베디드 아카데미’ 우수상, 2007년 KBS 해외동포상 등의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2011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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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주최하면서 논문 모집 공고, 사람들 연락, 숙박 예약 등을 전자 메일로 처리하게 되니 그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한선영) 하지만, 해외 컨퍼런스에 가보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에 이런 행사를 주최한다는 것은 그냥 머릿속으로 헤아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당시 PCCS 준비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모두 분담했는데, 나는 튜토리얼38을 맡았다. 1985년 10월에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 여름에 정철과 내가 미국에 나가게 됐다. 나는 유즈닉스라는 컨퍼런스에 갔는데, 그 목적은 컨퍼런스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단적으로, BoF 세션을 전박사님 말고는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내가 보고 와서 이렇게 합디다 하면서 준비했다. 당시 그렇게 외국에 나가서 보고 하는 일은 굉장히 예외적이었다. (허진호)

5.8.2 행사장에서도 인터넷이?

이렇게 큰 인터넷 행사를 한국에서 치르게 된 것은 다들 한국이 인터넷 분야에서 그만큼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따라서, 뭔가 앞서가고 있는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행사장에 국산 라우터인 SSM-16 을 설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김건중 상무를 통해 SSM-16 슈퍼미니컴퓨터를 구했는데 TCP/IP 가 탑재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이동만 박사가 TCP/IP 소프트웨어를 구해 탑재를 해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시스템을 개최장소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 설치하고, 레이저프린터를 비롯한 단말기 몇 대를 설치했다. 카페처럼 차려놓았더니 외국사람들이 아주 붐볐다. 컨퍼런스에서 전자 메일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아마 미국인들도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와서 자기 나라에서 쓰던 전자 메일을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선영)

이에 대하여 참가자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은 안 되었지만) 당시의 상황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표현한 기사를 읽어보자.

1985년 10월 19 일 토요일 오후. Jennings 박사는 워싱턴 D.C.에 있는 미 과학 재단(NSF)의 자기 사무실에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이제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주에 한국의 서울에서 있을 컴퓨터 통신관계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참이다. 책상 위의 서류뭉치를 깨끗이 정리한 그는 마지막으로 책상 옆의 터미널 앞에 앉는다. 자신에게 온 전자 우편을 정리하면서, 그 사이에 도착한 2 개의 내용에 답장을 보낸다. 정리가 끝난 뒤, 자신에게 도착하는 전자 우편을 다음 일주일간 있을 곳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그의 머리 속엔 아직 며칠 전 Purdue 대학의 프로젝트 신청 건이 남아 있다. 그로부터 24시간 후, Jennings 박사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호텔로 향한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그는 샤워를 하고 바로 회의장으로 내려가 본다. 그 곳엔 미리 도착한 몇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회의장 한 구석에 설치된 터미널 앞엔 누군가가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는 터미널 앞에 앉아, 이번 국제회의의 사무국과 미리 연락하여 배정받은 자신의 계정으로 온 전자우편을 확인한다. 벌써 10 여 개의 내용이 도착하여 있다. 그 중에 Purdue 대학의 프로젝트 건은, 오면서 정리한 내용으로 결론을 지어 회답을 보낸다. 몇 가지는 그 자리에서 회답을 보내고, 몇 가지는 파일로 저장하고 그 내용을 바로 옆에 설치된 프린터로 인쇄한다. 이제까지 여러 번 국제회의에 참석해 보았지만, 회의장에서 자신에게 온 전자 우편의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시설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이번 회의가 세밀하게 조직되었고 부드럽게 운영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홀가분한 기분으로 호텔 방으로 돌아간다. (전길남, 1886)

물론 요즘에야 대부분의 행사에서 무선 인터넷을 제공하고 참가자들은 으레 자신의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인터넷을 즐기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지만 198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대단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38 원래는 대학에서 (수업과는 달리) 극소수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지만 행사에서의 튜토리얼은 그 행사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는 별도의 세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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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 행사 내용과 성과 그리고 이후의 영향

5 일간 열린 행사에서 심사를 통과한 108 개의 논문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가 발표되었다. (당시 행사 자료집에 보면 데이터그램 개념을 만든 Louis Pouzin 이 쓴 논문도 있다. – 고양우) 그 외에도 4 개의 튜토리얼, 2 개의 기조 연설 등이 있었다. 행사 기간 중에는 컴퓨터 네트워크 미국-아시아 합동 워크샵(US-Asia Joint Workshop on Computer Networks)이 열렸는데 유럽의 EARN 과 DFN 쪽에서도 참석하여 발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지구적 워크샵이 되었다. (앞서 마이크로컴퓨터 응용 NUS/유네스코 워크샵에서 결성되었던) 아시아넷 회의도 열렸는데 여기서 JWCC(Joint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s)를 이듬해부터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 행사는 1990년대 아이코인(ICOIN)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국측 참가자들은 1986년 겨울에 SDN 워크샵을 열기로 했으며 이는 이름이 동계 컴퓨터 통신 워크샵(WCCW, Winter Computer Communications Workshop)으로 바뀌었다가 1990년대에 다시 하계 컴퓨터 통신 워크샵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AnA)

미국과 유럽만의 컴퓨터 네트워크 컨퍼런스 시대에서 아시아까지 참가하는 전지구적 컨퍼런스의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행사를 통해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는 그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표준이야 문서로 만들지만, 실제 운영은 인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진짜 할 마음이 있는가 자국의 연구 네트워크를 해외와 연결시킬 의지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PCCS 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폭제였다. 들러리나 서고, 참석도 안하고 그런 사람에게 백본39 연결해주고 그러지 않는다. (한선영)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위상도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PCCS 덕분에 정부에 가서도 할 말이 생겼다. 미국도 NSF 에서 엄청난 후원을 해주는데 우리 정부에서도 컴퓨터 네트워크에 지원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일본인들도 배우러 오는 걸 보고 나니까 체신부 관리들도 귀를 기울였다. (한선영)

5.9 SDN 의 의미

과연 SDN 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 때 시작했건 몇 년 더 늦게 시작했건 뭐가 달라졌을까? 우리가 했건 몇 년 기다려서 그냥 남의 장비 사와서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이에 대하여 당시 ***를 맡고 있었던 경상현의 얘기를 들어보자. (좀 더 의미 부연 하는 얘기를 쓸까? 말까? 아예 이 섹션을 뺄까?)

경상현: 내 생각에는 그 SDN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상징성 있게 굉장히 빨리 세상 어디보다도, 미국 빼놓고는 어디보다도 먼저 TCP/IP 라는 당시에 나왔을 때는 정말 몇 년도 되지 않은 걸 이용을 해 가지고 각각 다른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기술을 우리가 한번 구현을 해 보고 실제로 실행에 옮겨봤다. 그러고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길러지고 사람들이 그거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리고 그 눈을 뜨고. ‘이게 어떤 거로구나.’ 미국에서 하고 있는 아르파넷에 대해서도 당연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그 자체야 뭐 대단한 것 아니지만 그런 비전을 그런 걸 딱 볼 수 있게 만들었지. 그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닌데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거기서부터 파급돼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가만히 보면 지금까지 끌어오는 거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전부 다, 비즈니스 쪽으로도 가고 뭐 정책 쪽으로 가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준비가 돼 가지고 그래도 제일 세계에서 아마 빠른 축에,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하도록 인터넷이라는 게 민간인들도 쓸 수 있고 사업도 하고 장사도 할 수 있게

39 넓은 의미로는 네트워크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을 의미하며 기간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좁은 의미로는 인터넷에서 더 이상 상위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ISP)에게 의존하지 않고 상호 교환만 하는 최종의 교환망을 가리킨다. (게임 용어로 표현하자면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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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그러니까 불쑥 불쑥 나오는데 우리도 뒤지지 않게,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게, 그 미국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는 조금 아무래도 몇 발자국 뒤져서 하는지 모르지마는 그렇게 할 수 있게 지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는 그게 있으니까 그렇죠. (경상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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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ANA 망 시대

6.1 미국하고 바로 연결하자

앞서 IP 주소의 할당 그러나 연결의 좌절 장에서도 다루었듯이 1980년대 후반에는 X.25 라는 패킷 데이터 망을 통하여 연결을 할 수 있는 준비까지는 되어 있었다. 다만, 상호 연결을 위해서는 연결을 받아줄 상대가 있어야 했고 그 연결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 것이냐가 숙제로 남아 있었다. 한편 연결을 받아줘야 할 미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접속이 까다로운 아르파넷을 대신하여 CSNET 이 발족하고 날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 국립과학재단(NSF)는 그들이 지원하고 있는 여러 슈퍼컴퓨팅 센터의 자원을 학술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역시 그 시대 네트워크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희소한 자원인 컴퓨터를 널리 활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1985년부터 일을 추진한 결과 1986년에는 NSFNET 라는 네트워크를 탄생시킨다. CSNET 이 NSFNET 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NSFNET 과 해외의 TCP/IP 기반 연구망을 직접 IP 네트워크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89년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와 아시아 특히 호주, 일본, 한국의 연구망이 협력하여 PACCOM(Pacific COMMnications networking) 프로젝트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1991년 미국 국립과학재단과 미국 에너지부(DOE)가 자금 후원 기구로 참여하며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지원 체계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Nat13)(AnA)(Awa)

겉으로 보면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당시, SDN 을 맡고 있던 박현제의 얘기를 들어보자.

1987년쯤, 전길남 박사님이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과의 전용선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할 예정인데, 한국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했으니 한 번 책임지고 해 보라고 하셨다. 마침, 1988년 시드니에서 열리는 회의에 하와이 대학 책임자가 오니 협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드니로 가서 당시 하와이 대학 책임자였던 닐슨 토번(Nielson Torben)과 만났다. 그는 터프한 분위기의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는데, 얘기를 좀 하자고 줄곧 쫓아다녀도 시간을 내주지 않더니 회의일정이 끝날 무렵에야 한국도 참가하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해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준 무라이 교수와 전길남 교수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다.40 이 내용이 미국쪽 책임자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박현제)

그래서 한국과 하와이 사이에 56Kbps 전용선으로 연결하게 되었는데 비용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런데 황당했던 게 미국측이 회선 비용의 절반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의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양쪽이 비용을 절반씩 내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회선 비용을 반씩 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미국 측은 막무가내였다. CSNET 도 비용문제 때문에 이용하지 못했는데41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과 전용선을 설치해 얻을 이익이 전혀 없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1997년 초고속 인터넷을 구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현제)

그 때 전용선 설치하면 비용만 1 억 5천 만원이 필요했다. 학교의 한 연구실에서 부담하기에 회선 비용은 너무나 큰 금액이다. 그래서 한국통신, 데이콤, 시스템공학센터, 전자통신연구소, 삼성, 엘지, 에너지 연구소 등이 분담해서 내기로 했다. 대학 연구소들은 예산이 많지 않으니 이름만 참가 명단에 이름만 올리기도 했다. SDN 에 연결되어 있는 기관들과 TCP/IP 를 사용하는 국가 기간전산망인 국가과학기술연구망(KREONET)과 교육전산망(KREN)이 42 힘을 합친 것이다. 문제는 SDN, 40 자료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정황상 PACCOM 프로젝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준 무라이 교수가 많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41 앞의 IP 주소의 할당 그러나 연결의 좌절 장에서 언급한 일을 가리키는 듯.42 정부는 공공기관의 업무능률을 제고하고 정보산업을 육성하고자 1982년 12월 5 대 국가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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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ONET, KREN 모두 정부의 지원으로 구축, 운영되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KREONET 이나 KREN 은 국가 기간전산망인데 비공인 연구망(즉, SDN)에 돈을 내고 SDN 을 통해 해외로 연결한다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로 HANA 라는 컨소시엄을 만들게 되었다. (박현제)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989년 3월에는 SDN/HANA 망이 만들어지고 1990년 6월 1 일에는 결국 한국과학기술원의 썬(Sun) 워크스테이션이43 청량리 전화국을 경유하여 인공위성 송수신 센터인 금산지국을 거쳐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하와이대학과 전용선으로 연결되게 된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당시 이 일을 보도한 기사(그림 8 1990년 6월 4 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의 정황과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학술 연구 컴퓨터 네트워크로는 그림 9 에서 볼 수 있듯이 PACCOM 프로젝트를 통하여 미국의 인터넷과 연결된 SDN/HANA 네트워크와 독자적인 네트워크인 교육전산망(KREN) 그리고 서울대학교가 IBM 사와 공동으로 IBM 컴퓨터의 네트워크인 비트넷에 연결한 네트워크가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상용 서비스로서 데이콤의 데이콤네트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SDN/HANA 망이 미국과 전용선으로 연결 됨으로써 국내에서 인터넷에 연결된 해외 기관으로 싼 가격과 빠른 속도로 연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사용자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개인적으로는 82년의 SDN 구축보다 90년의 HANA 망 구축이 더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사실 80년대 초에는 뭐가 뭔지 몰랐다. 연결했더니 "떴네?" 하다가 비가 왕창 와서 컴퓨터를 못 쓰게 되어서 두어 달 아무것도 못하다가 다시 "붙이자" 해서 다시 붙였던 것이 당시의 기억이다. 네트워크라고 해도 전자 메일 겨우 다닥다닥 했던 정도. 반면, HANA 망 구축은 우리 또래에겐 훨씬 의미 있고, 개인적으로도 간절히 바라던 사건이었다. 당시의 메시지 송신 후 답변을 받기까지에는 이쪽에서 통화료가 가장 싼 저녁 시간에 보내면 저쪽에서 받아보고 답신을 보내는 걸 고려할 때 이틀이 꼬박 걸리는 일이었는데, 이게 HANA 망 개통 이후에는 보내면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니까. (박현제)

산업에 대한 정보화 사업 기본 방침을 확정 발표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등장한 다섯 개의 네트워크(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전산망, 보안전산망)를 5 대 국가기간전산망이라고 한다. 이를 총괄 조정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전산망조정위원회를 설치(이후 정보통신부로 이관)하여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주도하였다. (박은우, 2006) 이 중의 하나인 교육연구전산망은 1988년 12월 (당시)문교부가 지원하는 교육전산망(KREN, Korean Education Network)과 (당시)과학기술부가 지원한 국가과학기술연구망(KREONET, Korea Research Environment Open Network)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43 미국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사에서 만든 상당한 인기를 누린 컴퓨터의 이름.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BSD 유닉스를 만든 빌 조이도 이 회사의 창업자 중 한 명이다. (진짜 초기 멤버는 아니지만 창업 직후에 참여한다.) 앞서 SDN 구축에 사용되었던 PDP/11 이나 VAX/11 은 미니컴퓨터 급이고 그 보다 작은 급의 컴퓨터를 마이크로컴퓨터라고 했는데 마이크로컴퓨터 중에 좋은 것은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부른다. 요즘 식으로 얘기해보자면, 마이크로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PC)고 미니 컴퓨터는 서버급 컴퓨터이며 워크스테이션은 그 사이에 있는 폼나는 개인용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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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1990년 6월 4 일 동아일보 기사44

4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무단 복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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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1992년 1월 한국의 학술 연구 네트워크의 연결 상태 (Computer Networks forKorean Academic and Research Communities, 1991)

1991년 8월 8 일 PACCOM 워크샵이 하와이에서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한국이 미국과의 전용선을 추가하는데 있어 발생하는 라우팅 문제(즉, 네트워크 데이터를 어느 길로 잘 보낼 것이냐 하는 문제)가 토론되었으며 여기서 NSI(NASA Internet, 미국 항공우주국 인터넷)의 백본에 해저 케이블로 바로 붙이기로 하였다. (박현제, 1991) 이렇게 함으로써 회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1992년 6월 회선을 NASA Ames 의 해저케이블로 변경하였다.

그럼 이렇게 구축된 SDN/HANA 망은 어떤 일에 주로 활용되었을까? 그림 10 는 1993년에 SDN/HANA 망의 해외 통신량을 응용 프로그램 별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다. 당연히 파일을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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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FTP 를 사용하는데 가장 많이 쓰였다. 메일도 많이 사용하였지만 그 때는 자료를 보낼 일이 있을 때 요즘처럼 메일에 첨부해서 보내지 않고 FTP 에서 다운로드 받도록 하였으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해외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여 작업을 하는 텔넷은 그 다음 순위이다. 그 다음은 아키(archie) 서비스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원하는 파일이 FTP 어디에 들어 있는지 찾아주는 서비스로서 검색 서비스의 원조에 해당한다. 이 표만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점은 인터넷의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직통선이 열렸던 첫 해인 1991년의 해외 통신량은 9,123,399 킬로 바이트 즉, 대략 9 기가 바이트쯤이었다. (변희수, 1992) 그러던 것이 2년 만에 335 기가 바이트로 300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림 10 1993년 응용 프로그램 별로 구분한 HANA 망의 해외 통신량 (변희수, 1994)

이렇게 사용이 늘어나니 학교의 연구실에서 계속 지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네트워크 운영은 한국통신이 맡게 된다. HANA 망의 구축 이후 SDN 은 그 이전의 국내망을 지칭하고 해외의 인터넷과 연결된 망은 HANA 라고 부르다가 SDN 의 의미가 점점 없어지게 되여 1993년에는 더 이상 SD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SDN 은 한국 인터넷의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은퇴하게 된 것이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한 학생을 자퇴의 수렁에서 구출한 HANA 망

HANA 망의 역사와 직접 관련된 얘기는 아니지만 HANA 망과 연결된 (지금으로 봐서는) 재미난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나중에 한글 전자 메일 표준을 만들어낸 당시 과학기술대학교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원) 의 학생이었던 최우형씨의 일화이다.

1988년이었다. 당시 개인용 컴퓨터를 보급하던 정보문화센터에서 내가 다니던 수원소재 기숙학교였던 경기과학고등학교에 모뎀, 컴퓨터, 데이콤 X.25 네트워크 접속 계정을 지급했다. 정보문화센터가 제공한 X.25 네트워크를 사용하게 되면서 유닉스 기계를 서로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인터넷이라 불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때 정보문화센터가 지급한 데이콤 X.25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계정은 당시에는 데이콤의 유닉스 중형 컴퓨터에서 운영되는 전자 메일 서비스에 접속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급되었는데, 이 계정은 X.25 로 연결된 곳이라면 전세계 어디로나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컴퓨터에 X.25 를 통해 접속한 후 거기에서 다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많은 시스템들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공짜라고 생각했다.

과학고등학교에서 2년을 보내고 1990년 봄 대전 소재의 기숙학교인 과학기술대학교에 진학해서는 고교 때보다 훨씬 큰 자유를 누리며 인터넷을 이용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모뎀으로 접속할 필요 없이 당시 학교의 중형 컴퓨터들은 국내 인터넷에 늘 접속되어 있었다는 것과 이 컴퓨터들은 해외의 시스템들과 전자 메일을 직접 주고받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대학교에서 전자 메일 계정을 받자마자 고등학교 때 수집되어있던 정보를 활용해 각종 관심분야에 대한 유즈넷 FAQ 45 등을 전자 메일로 받아 다운로드 해서 읽었다. 당시에는 할당된 디스크 용량이 작아서

45 FAQ(frequently asked questions) 는 “자주 묻는 질문”이라는 뜻. 요즘도 흔히 보는 일이지만 어디 게시판이나 메일링 리스트에서도 꼭 이미 수도 없이 물어보고 답을 한 질문을 또 올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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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전자 메일을 프린트하고 지워야 했는데 디스크 용량은 제한이 있었던데 반해 프린트 비용은 물론 종이도 공짜였다.46

그 해 봄, 어느 날 기숙사 방에서 수업 빼먹고 이걸 읽고 있었는데 전산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전산센터 담당직원이 “학생, 우리 학교의 국제 전자 메일을 쓰는데, 이게 혹시 유료인 것을 알았나?"고 묻는 것이었다. “몰랐다"고 대답했더니 “그 동안 사용량에 1 바이트당 10 원의 요금을 적용하니 거의 500 만원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학비가 공짜인데, 첫 학기에 500 만원을 통신료로 써버린 것이다. 이 전화통화 이후에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본 다음 일반 대입절차를 거쳐 다른 학교에 가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때는 전길남교수님의 연구팀이 따로 연구비를 확보해 하와이로 가는 56Kbps 전용선을 통해 한국의 인터넷이 국제인터넷과 바로 연결되는 체제로 전환되는 시기였고, 덕분에 더 이상 1 바이트당 10 원이라는 요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무사히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최우형, 2012)

6.2 HANA 망 운영 이야기

그냥 회선만 연결해둔다고 인터넷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일일이 챙겨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당시 HANA 망 운영을 담당하였던 박현재와 박태화의 얘기를 중심으로 풀어 나가보자. 우선 통신 비용이 비싸므로 이를 잘 배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전에는 한국과학기술원의 실험실에서 SDN 통신에 필요한 전화비를 부담했는데 1988년에는 이미 몇 천 만원씩 전화비가 나와서 실험실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각 기관별로 건 전화(즉, 네트워크를 접속한 기록)를 다 세고, 이에 맞춰 계산서를 만들어 분배하는 일이 네트워크를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술적인 관리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박현제)

그리고 회선이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가끔 전용선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통신에서 우리를 위해 비교적 상태가 좋은 선을 연결해뒀는데, 다른 곳에서 특별한 일이 있어 요청하면 우리에게 할당한 좋은 선을 그쪽의 후줄근한 선과 바꿔주는 식으로 운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연결이 잘 안되면 우리가 아우성을 치고, 그러면 할 수 없이 다시 좋은 선을 되돌려 연결해주는 식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문제가 생기면, "또 바꿨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모뎀도 무척 많았다. 전용선 모뎀도 있었고, 다이얼 업 모뎀도 있었다. 어디서 전화가 안 된다고 연락 오면, 모뎀이 쭉 놓인 연구실 한 켠에 가서 불빛 쳐다보는 식이었다. 이런 관리업무가 전산실에서 주로 하던 일이었다. (박현제)

메일 관리는 나중에 인터넷 접속 사업을 하게 되는 허진호가 담당을 했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메일 설정은 까다롭다. 요즘은 특히, 스팸 때문에 더 복잡해진 셈이다.)

사람들이 있다. 이런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하는 것도 몹시 따분한 일일 뿐만 아니라 초창기 인터넷에서는 이런 질문이 쌓여 있는 저장공간도 가격이 비쌌고 이런 쓸데 없는 질문까지 메일이나 게시판에서 보는 것은 통신비용도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모아서 정답을 정리해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FAQ 를 처음 만든 것은 미항공우주국의 메일링 리스트였지만 “현실적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하긴, FAQ 를 구해서 읽어보면 된다는 것을 알 정도로 예의가 있다면 그런 질문을 올리지도 않을 테니까. (FAQ13)46 극히 개인적인 추억: 과학기술대학은 인쇄가 공짜였다네. 한편 1980년대 말 서울대학교 전산실의 경우에는 디지털사의 VAX/11-750 을 학생들 실습용으로 제공했는데 파일 저장 공간, CPU 사용시간은 물론이고 인쇄에도 일정한 한도가 있어 이걸 넘으면 돈을 따로 내야 했다. (돈을 내지 않아도 특별한 불이익은 없었다. 다만 졸업장을 찾으러 학과 사무실에 가보면 본인의 졸업장에 청구서가 붙어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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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허진호가 담당한 전자 메일 설정도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었다. (지금은 메일이라고 하면 인터넷 메일 하나뿐 이지만 그 때는) 비트넷, UUCP 등 루트(즉, 전달해야 할 대상 시스템)도 많았고, 각 경우마다 설정이 모두 달랐다. 예를 들면, UUCP 로 보내야 하는 경우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지 않게 경로를 우리가 일일이 설정해줘야 했다. 우선 메일이 들어오면, 이 메일을 로컬로 뿌릴지 (즉, 우리 시스템의 사용자에게 전달하면 끝인지), 다른 연구기관으로 보낼지 판단해서 처리해야 했다. 경로도 일일이 지정해줘야 해서 복잡했다. 여전히 실험상태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큰 문제가 된 적은 없었지만 한 번씩 경로가 바뀔 때마다 센드메일(지금도 널리 쓰이는 제일 유명한 메일 전송 프로그램) 설정을 다시 해줘야 해서 실수도 잦았다. (박현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이들이 곧 운영자인 동시에 사용자였으므로 서로 친하게 지냈다.

당시 Hana/SDN 의 규모는 가입기관을 다 합쳐도 30 개 정도에 불과했다. 대전 지역의 연구소와 서울의 기업 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 네트워크 담당자들이 서로 다 알았다. 3 개월 정도에 한번씩 모여 돼지갈비에 소주를 마시는 모임도 했다. 당시로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붐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네트워크가 재미있어서 했던 거니까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었다. 즉 네트워크 운영자, 엔지니어, 사용자 그룹이 어느 정도 중첩되는 시기였다. (박태하)

그림 9 에 나와 있는 1992년의 네트워크 연결 그림을 보면 시스코사에서 나온 라우터로 원격지 연결이 바뀌어 있지만 그 직전까지는 일반 컴퓨터를 활용하여 원격지 연결을 하였다.

당시에는 라우터가 없었기 때문에,47 일반적인 워크스테이션의 직렬 포트에 SLIP 또는 PPP를48 이용하여 원거리 통신망 구간을49 연결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이를 게이트웨이라고 불렀다. 예컨데 1990년에 미국과 교신할 때에는 썬 3 워크스테이션에서50 SunOS 커널에51 SLIP 장치 드라이버를52 설치하여 연결되었다. (박태하)

47 시스코 사가 라우터를 시장에 내놓은 것이 1986년이니 라우터가 없었다기 보다는 가격이 비싸거나 물건을 들여오기가 어려웠거나 또는 아직 덜 검증되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48 SLIP(Serial Line Internet Protocol) 는 직렬 포트나 모뎀을 이용하여 인터넷 프로토콜(IP)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이며 이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 PPP(Point-to-Point Protocol)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가정에 인터넷이 보급되었을 때는 PPP 를 이용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였다.49 원거리 통신망(왠, WAN, wide area network)은 근거리 통신망(랜, LAN, local area network)와 대비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같은 사무실 안의 컴퓨터는 서로 근거리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근거리 통신망이 게이트웨이 또는 라우터라는 장비를 통하여 멀리 있는 다른 사무실과 연결된다고 하면 멀리 연결되는 구간을 원거리 통신망이라고 한다.50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사의 컴퓨터

51 SunOS 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사의 컴퓨터에 맞춰 BSD 유닉스를 개발한 것을 말한다. (애당초 BSD 유닉스를 만들었던 빌 조이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사의 창업자로 동참했다.) 그리고 커널이란 운영체제의 핵심 부분을 지칭한다. 특히, 장치를 조종하는 기능(즉, 장치 드라이버)을 추가/변경 하기 위해서는 커널의 수정이 필요하였다. (요즘은 운영체제 기술도 발전하여 커널의 수정은 필요하지 않다.)52 특정 장치를 조종하는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마우스를 쓰려면 마우스 장치 드라이버를 설치해야 하고 키보드를 쓰려면 키보드 장치 드라이버를 설치해야 한다. 요즘의 운영체제에서는 해당 장치를 연결하면 자동으로 장치 드라이버가 설치되도록 되어 있어서(이를 플러그-앤-플레이라고 한다) 사용자가 장치 드라이버를 설치해야 하거나 심지어는 운영체제의 커널을 수정해야 할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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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도메인 이름 시스템이 널리 사용되기 전 까지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 이름과 그들의 IP 주소를 정리한 파일(파일 이름이 hosts.txt 이며 요즘의 윈도나 리눅스에서도 여전히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을 주기적으로 배포해야 했다.

최초 국제회선이 개통된 후에도, 상당기간은 주기적으로 hosts.txt 파일을 30 여 개 네트워크 관리자들에게 보내 각 기관에 업데이트하는 식이었다. 도메인 이름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박태하)

또한 값비싼 통신비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은 네트워크 운영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유즈넷 서버들 간의 경로를 관리하여 전송량을 최소화하는 것도 네트워크 관리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전자 메일도 비용 때문에 하와이와 연결된 이후에도 한동안 UUCP 또는 X.25 로 전송되었다. UUCP 는 다이얼 업 모뎀으로, 주기적으로 하루에 한번씩, 특히 국제전화요금이 저렴한 심야 시간대에 자동으로 연결하여 저장된 메일을 송수신하는 방식으로 동작하였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전자 메일이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배달될 수는 없었다. 전자 메일 구성도 현재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말이 인터넷이지 당시에는 UUCP, X.25, 비트넷 등 여러 네트워크에서 메일이 오고 갔으며, 통신요금도 다 달랐기 때문에, 설정을 일일이 해줘야 했다. 예컨대 한국에 있는 사람이 미국 대학에 메일을 보내는데, 그 대학에 연결된 네트워크가 비트넷이라면 서울대의 비트넷을 경유하여, 미국의 비트넷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일단 국제구간의 X.25 를 통하여 미국으로 보낸 후에, 그곳에서 비트넷으로 전송한다면 국제통신요금이 왕창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시 데이콤에서 운영하던 국제 X.25 회선은 통신료가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이 회선을 통해 메일을 받을 수 있는 이용자는 교수님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박태하)

6.3 사용자들 이야기

SDN 시대까지는 무척 제한된 사용자들만 특히 SDN 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만 SDN 또는 인터넷을 쓰는 시대였다면 HANA 망 시대에 와서는 (꼭 HANA 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에 대한 평가를 넣어야 할 듯 – 고양우) 일반 사용자들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3.1 키즈 - 최초의 인터넷 기반 BBS

왕년에 인터넷 깨나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키즈(KIDS, Korea ISDN Data Service)라는 게시판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일반 사용자들 사이에서 컴퓨터 통신이라면 당연히 PC 통신망 그 중에서도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가53 1986년 9월에 시작한 천리안과 한국경제신문사가 1988년 9월에 시작한 케텔(나중에는 하이텔로 이름을 바꿈) 양대 산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사용자의 컴퓨터가 모뎀을 통해서 그 회사의 컴퓨터로 바로 접속하는 방식으로서 인터넷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 인터넷 기반의 비상업적 게시판 서비스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키즈다.

1991년 4월 한국통신의 연구원이었던 조산구는 ISDN 의54 응용 서비스 중 하나로서 게시판 서비스를 개발하는데 그것이 키즈의 시작이다.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고 게시판에서의 발언과 글이 보호받고 인정되는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사용자가 늘어나 1994년에는 3200 여명 1996년에는 6400 여명이 되고 동시 접속자 수도 1996년에 250 명이 넘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에서 처음으로 한글 서비스가 되는 게시판이라 해외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회원 중 해외에 있는

53 나중에 데이콤(DACOM)이 되었다가 엘지데이콤이 되었다가 현재는 엘지유플러스가 되었다.54 ISDN 은 Inte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서 기존의 전화망을 통해서 음성 통화는 물론이고 컴퓨터 통신과 같은 데이터 통신도 되게 하자는 전화회사들의 차세대 전략이었다. ISDN 이 없어도 모뎀을 이용하면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전송하는 데이터를 억지로 음성으로 바꿔서 보내고 상대방이 받아서 다시 음성을 데이터로 바꾸는 것이므로 효율성에서는 많이 떨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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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30%에 이를 정도였다. 회원의 대다수는 학생들이고 회사원도 30% 정도가 되었다. (시민연대, 1996)

회원들 중에 학생들이 많은 것이 좀 의아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학교의 학생들이거나 일부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회사원이 회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일반인들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즈는 학교들 특히 기숙 학교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사용자의 경험담이다.

키즈가 유지된 데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과기대, 포항공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종일 접속할 수 있었으니까. 기숙사 건물마다 터미널 실이 있어서 FAST5 55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포항공대, 과기대의 모든 기숙사실과 강의실도 24시간 개방되어 있었다. 종합대학들 중에는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같이 초기 HANA 망에 연결된 여대의 대학원 학생들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남초 현상이 심한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여대 게시판은 늘 인기를 끌었다. 키즈에는 학교별 게시판과 주제별 게시판이 있어서 파벌싸움을 하기도 했다. 현재의 디씨인사이드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유저나 관심 있는 사람들만 참여하는 작은 커뮤니티였다. 외국의 유학생들도 키즈의 주요 사용자 계층 중 하나였다. 주로 미국에 있던 학생들이 많이 사용했는데, 24시간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집에서 전화 모뎀으로 접속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최우형, 2012)

현재 키즈넷은 kids.kornet.net 이라는 주소를 통하여 웹으로 접속 가능하다. 한편, 두번째로 만들어진 인터넷 BBS 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학내 커뮤니티인 아라(ara.kaist.ac.kr)이다.

6.3.2 한글 전자메일 표준 개발과 보급

앞서 5.7 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1980년대는 컴퓨터의 보급에 따라 여러 한글 코드 체계가 난립하던 시기였으며 1987년에 한글 표준 코드가 KS C 5601-1987 로 개정되고 행정전산망용 컴퓨터 등 정부에 납품되는 컴퓨터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쓰게 함으로써 좋건 싫건 간에 표준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하지만 표준이 만들어진다고 갑자기 기존의 모든 시스템을 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한참 동안은 기존의 코드 체계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시스템 마다 한글 코드가 다른데 한글로 메일을 보낸다면 같은 시스템을 쓰는 사람들끼리가 아니고서는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우리 나라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알파벳만으로 언어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침, 일본에서는 일본 글자를56 인터넷 전자 메일에서 나타내는 표준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글 코드 표준이 자리를 잡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조할 수 있는 예시가 있는 상황 그리고 여기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더해 짐으로써 한글 메일도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55 컴퓨터 터미널 제품의 이름으로 한글 입출력이 가능하고 생긴 것도 날씬하여 인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56 여기서 일본 글자란 일본의 가나 문자와 일본에서 쓰는 한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글과 말을 혼동한다. 당신과 내가 주고 받는 말은 우리 말(한국어)이고 이 말을 대개 한글로 쓴다. 우리 말을 영문 알파벳으로 써도 되고 (“SARANGHAE”) 영어를 한글로 써도 (“아이 엠 어 보이”) 된다. 다만 그렇게 하면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거나 불편하니까 영어는 라틴 알파벳으로 한국어는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단어를 라틴 알파벳으로 써도 되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나 일본어는 한자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사정이 좀 복잡하다. 즉, 한국어의 표기를 위해서는 한글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한자가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어로 전자 메일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한글, (한국에서 쓰는)한자, 알파벳과 숫자와 기호가 필요하다. 통상 한글 전자 메일이라고들 말을 하지만 실은 (한자도 쓸 수 있으므로) 한국어 글자 전자 메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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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인터넷으로 전자 메일을 사용하던 시기였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와 연결되어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신기했다. 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2학년(1991년) 가을학기에 전길남 박사님의 개방형 시스템이라는 과목 수업을 들었다. 그 과목의 기말 프로젝트로 한글 전자 메일57 교환 포맷 표준을 만들고 시험적 구현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한글 메일 표준을 먼저 정해서 구현한 사람이 없어서 과목 수료요건도 마칠 겸 표준을 만들고 시험구현을 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의 WIDE 라는 프로젝트 그룹에서는 국제 표준 규격의 틀을 따르는 일본어 전자 메일 표준을 마무리하는 단계였는데 이를 많이 차용했다 (일본어 전자 메일 표준은 RFC 1468 로 한국어 전자 메일 표준보다 6 개월 빨리 마무리되었다) 과목의 수료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시작해 1 차 구현과 보급을 완료했지만, 이를 표준화 하는 절차를 거쳐 문서화하여 발표하고 마무리 짓는 데는 2년의 시간이 더 걸려 1993년 말에 최종문서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인터넷 표준은 누가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써야 한다. 그래서 보급을 했었다. 당시의 전자 메일 커뮤니티라는 게 다 알만한 작은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기관들의 담당자들에게 제안했고, 과기대와 카이스트에 제안했다. 당시, 인터넷 사용자는 대부분 카이스트 학생, 교수들이었지만, 이 시기에 대학들이 비트넷을 버리고 인터넷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포항공대 등의 대학원생들도 인터넷을 사용했다. 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는 전산학과 대학원을 제외하면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 문화는 PC 통신이었고, 인터넷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특화된 공대학생, 대학원생, 교수들이었다. (최우형, 2012)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표준이 RFC 1557 이며 제목은 “Korean Character Encoding for Internet Messages (인터넷 메시지를 위한 한국어 글자 인코딩)” 이다. 메일을 볼 때는 메일의 내용만 보기 때문에 보통의 사용자들은 볼 기회가 없겠지만 메일의 원문58 을 보면 지금도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게 이 표준을 통해 한국어 글자를 보내는 방식으로 정해진 것이며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다. (아주 최근에는 온갖 나라 글자를 한가지로 다 표현하는 유니코드의 UTF-8 방식이 서서히 대세가 되고 있긴 하다.)

그림 11 한국어 메일에서 한국어임을 나타내는 표시 방법

하지만 한국어를 메일에 실어 보낼 수 있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한국어를 잘 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이후에 인터넷이 일반에 널리 보급되면서 나타난 문제 중의 하나가 자기의 이름, 자기 회사 이름이 아니라 이것을 영어로 바꾼 이름으로 웹 사이트 주소도 정하고 메일 주소도 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메일의 내용 부분에 한글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과 달리 이들 새로운 문제는 통신 프로토콜 자체를 수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웹 사이트의 주소 즉, 도메인 이름에서 한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표준은59 2003년 3월에나 나왔고 한글을 메일 주소에 쓸 수 있게

57 앞의 각주에서도 설명하였듯이 한글 전자 메일은 한국어 글자 전자 메일을 알아듣기 쉽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표준을 만든 최우형씨도 한국어/한글을 혼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표준 문서에서도 혼용하였다.)58 실제로 메일 시스템이 주고 받은 내용. 이 원문 중 보낸 사람, 받은 사람, 제목, 본문 등 일부 내용만을 대개의 메일 프로그램에서는 보여준다. 대개의 메일 프로그램에는 원문 보기 기능이 있으니 시간 날 때 한번쯤 눌러보면 메일이 진짜 어떻게 전송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처음 볼 때는 무슨 암호처럼 보여서 당황스럽겠지만…)59 이 표준은 문서 RFC 3490 "Internationalizing Domain Names in Applications (IDNA)" (응용 프로그램에서 도메인 이름을 국제화하기) 라는 문서로 정의되었으며 2010년에 개정판인 RFC 5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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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표준은60 2007년 7월에 나왔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RFC – 인터넷 표준 문서 이야기

RFC 의 의미는 뭔가.

RFC 를 제정하는 과정.

한국 사람들이 참여한 RFC 는 어떤 것이 있는가.

6.3.3몰래 만든(?) 최초의 웹 사이트

사람들이 흔히 인터넷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웹 (더 길게 얘기하면 지구 규모의 웹, world wide web, WWW) 을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초창기에는 인터넷이 파일의 전송, 전자 메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1989년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 the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에서 일하던 팀 버너스 리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하이퍼텍스트는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거미집처럼61 연결하고 접근하게 해서 사용자가 마음대로 훑어볼 수 있는62 방법이다. 방대한 종류의 정보(보고서, 기록,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문서, 도움말)를 하나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볼 수 있게 한다. 이미 우리 연구소가 갖고 있는 서버를 엮어서 만들 수 있도록 한다. (Tim Berners-Lee, 1990)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당시에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는 수십 개 나라의 연구원들이 협력하여 입자가속기 등을 다루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쏟아지는 문서를 효율적을 활용하는 것은 큰 골칫거리였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웹 개념을 제안한 것이다. 물론 그가 홀연히 이런 생각을 해낸 것은 아니고 하이퍼텍스트는 이미 애플 매킨토시 등에서 하이퍼카드(HyperCard)라는 응용 프로그램으로 제공하고 있었으며 그 개념은 앞서 아르파넷 최초 노드 중 하나였던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의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데모로 보여줬던 것이다.

물론 좋은 제안이긴 했지만 웹이 곧바로 널리 퍼진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쉽게 찾아서 받아볼 수 있는 기술로서 이미 아키(archie), 고퍼(gopher), 웨이즈(WAIS) 등이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993년 1월에 그림을 지원하는 브라우저인 모자익(Mosaic)이 나옴으로써 급격히 대세는 웹으로 기울게 된다. 모자익을 내놓은 곳은 미국 국립 수퍼컴퓨터 활용센터(NCSA)63 였는데 대학원생 신분으로 여기서 일하던 마크 앤드리슨이 개발한 것이다. 그는 직후에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즈사를 세우고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넷스케이프 네이게이터라는 웹 브라우저를 1994년에 내놓는다. 모자익을 처음 본 인터넷 사용자들은 그림까지 예쁘게 뜨는 웹 사이트를 보면서 몹시 큰 충격과 영감을 얻는다.

1993년 겨울에 인공지능 연구센터에 전길남 박사님 연구실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연구센터의 소장은 조정완 박사님이었고, 전박사님은 참여교수였다.) 당시 고퍼가 제일 유명했고, 웨이즈(WAIS), 그리고 웹도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 때 모자이크가 처음 나왔는데, 설치해서 보니까 고퍼보다 훨씬 좋았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림도

으로 개정되었다.60 이 표준은 문서 RFC 4962 “Overview and Framework for Internationalized Email” (국제화 전자 메일의 개요와 틀) 이라는 문서로 정의되었으며 2012년 2월에 RFC 6530 으로 개정되었다.61 “거미집”은 영어 web 의 번역이다. 여기에서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말이 나왔다.62 “훑어보다”는 영어 browse 의 번역이다. 여기에서 브라우저라는 말이 나왔다.63 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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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이 됐다. 이런 게 된단 말야!

웹 서버를 설치하고 코딩을 배우며 이것저것 시도했다.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웹사이트를 직접 만들어 써보려고 했다. 근데 웹사이트를 만들려고 보니 콘텐츠가 하나도 없었다. 카이스트나 인공지능연구센터를 영어로 소개할 수도 없고. 그 때 한국관광공사에서 나온 ‘Welcome to Korea’라는 책자의 한글판을 보게 됐고 그것의 영문판이 있을 거다 생각해서 관광공사에 전화해 서 구했다. 모두 스캔을 해 광학문자인식(OCR)을 통해 글을 추출하고 이미지도 떠서 그 책 전체를 올렸다. ‘Welcome to Korea’라는 페이지를 만들고, 영문으로 된 카이스트 소개나 인공지능연구센터 소개문을 한 두 장 구할 수 있어서 그것도 올렸다. 이제 공지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당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하고 NCSA라는 모자이크 만든 곳에서 웹의 디렉토리를64 운영하고 있었는데, W3C 디렉토리가 가장 큰 것이어서 우선 거기에 등록을 했다. 한국에 이런 페이지가 있다고. 작업을 한 것은 1993년 겨울이고 디렉토리 등록은 1994년 1~2월 경의 일이다. (김병학, 2012)

당시 모습 그대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과거 인터넷 사이트를 보존하고 있는 archive.org 에 1996년 12월 12 일자 기준 해당 페이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림 12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지능연구센터의 한국 소개 웹 사이트 (Rep13)

요즘의 현란한 페이지에 비하면 심심하기 짝이 없지만 막상 둘러보면 내용은 꽤 재미있다. 실제로 누가 찾아와서 봤을까? 웹 사이트가 많던 시절도 아니고 아직 외국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미지의 나라이므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끔 메일을 받았는데, 한 번은 외국에 있는 한국 사람이 전자 메일을 보내서, 잘못된 문자를 지적해 주었다. 광학문자인식을 통해 문자를 올린 것이니까 한국의 원(₩)자가 다 깨진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미국 사람이 안동소주를 사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그때는 안동소주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김병학, 2012)

재미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재미있어서 그냥 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한 연구소 그리고 한 학교의 홈 페이지을 임의로 만든 사건이었다.

연구소의 웹사이트였지만, 내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만들고 운영한 것이었다. 교수님들이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처음에는 cair.kaist.ac.kr 로도 등록되었지만, www.kaist.ac.kr로도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학교 전체 웹사이트이기도 했던 것이다(사실 이에 접속하는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니까...). 나중에 웹에 관심이 커지면서 www.kaist.ac.kr 은 학교에서 관리했다. (김병학, 2012)

64 어떤 사이트가 있는 지 정리해 놓은 것.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켜 사업화한 것이 야후(Yahoo)사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전 세계 웹 사이트가 몇 개 없었으므로 전세계 모든 웹 사이트를 수작업으로 등록해서 정리해두면 사용자들이 이 곳에 접속하여 “오늘 뭐 새로 생긴 사이트 없나”하면서 찾아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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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 해킹

해킹 얘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롭다. 해킹이라는 것이 속성상 은밀한 것이므로 시중에 나도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당사자들만 알기 때문이다.

(해킹을 주로 한 학생들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허가되지 않은 것을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해커 친구들에게서 "슈퍼컴퓨터(시스템공학연구소)에 들어갔었다.", "관리자권한을 취득했다.", "미국의 어떤 시스템에 관리자권한을 취득했다.", "하이텔 공짜 계정을 획득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와의 해킹전쟁 루머를 사실 믿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은 무관심했고, 학교 차원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제재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기사와 과거의 추억담은 어느 정도씩 과장되게 마련이다. (최우형, 2012)

그런 한계를 일단 접어두고 사람들의 얘기를 중심으로 당시의 해킹 모습을 살펴본다. 해킹의 출발은 대개 엉뚱한 제약에서 출발한다. 당시에는 컴퓨터의 자원이 비쌌기 때문에 저장 공간이나 컴퓨터 가동시간에 제약이 있었는데 허용된 사용 용량을 넘기면 아예 접속이 안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해킹이라고도 하긴 민망한 짓을 했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 그 수법을 관리자들이 알아내서 막으면 또 다른 수법을 쓰고 또 막고 또 다른 방법을 찾고.65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딴 곳에서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1988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원의 일반적인 연구실에서는 SUN3 워크스테이션66 한 두 대에 터미널을 여러 개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걸 10-20 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과에는 VAX/11-780 이67 있었다. 메인 메모리 1MB 에 냉장고만한 700MB 짜리 “대용량”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KAIST 전체가 이 용량을 나눠 쓴 것이다. 전산과 학생들에게 1MB씩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가끔 숙제를 하다보면 1MB 를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때는 해킹을 해서 용량을 늘리고 싶은 동기가 생긴다. (박태하)

예나 지금이나 게임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데 게임을 계속 즐기기 위해서 해킹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게임을 많이 했다. 제일 많이 하던 게 텍스트 머드의68 일종인 핵(Hack)이다. 핵에선 D 를 용(Dragon)이라고 했는데, 이걸 계속 하다 보면 D 가 진짜 용으로 보일 만큼 재미있다. 해킹하던 학생들이 서버를 해킹해 이런 게임을 몰래 숨겨놓고 플레이했다. 나도 석사과정 때는 해킹해서 숨겨놓는 처지였지만 (나중에) 매니저가 되니 이걸 찾아서 지우는 역할이 된 것이다. (박태하)

지금과는 좀 다른 형태지만 피싱(phishing)도 있었다. 피싱이란 전자 메일이나 웹 사이트 등을 통해서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인 것처럼 속여(예를 들어, 가짜 은행 사이트를 만들어놓고 접속을 유도하여 비밀번호를 가로채는 것) 사용자가 갖고 있는 비밀 정보를 빼내는 것을 말한다. 그 때는 여러 사용자가 터미널을 번갈아 쓰는 식이었으므로 터미널을 다 쓰고 일어서면서 피싱 프로그램을 돌려놓는 것이다. 피싱 프로그램은 정상적인 컴퓨터 로그인 화면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다음 사용자가 진짜 로그인 화면인 줄 알고 로그인을 하기 위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이걸 받아서 파일에 기록해놓는

65 1985~1987년에 말 서울대학교 전산실에서 일하셨던 분들께 뒤늦게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66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사의 컴퓨터 이름

67 디지털사의 컴퓨터 이름

68 머드(MUD, multi user dungeon)는 여러 사용자가 가상 세계에서 모험을 하는 형식의 텍스트 기반의 게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나중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리니지와 같은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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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다. 이렇게 해서 남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내 계정으로 접속이 안될 때 대신 쓰는 경우도 있었다.69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컴퓨터 사용자들이 워낙 제한적이어서 해킹을 할 만한 사람도 뻔해서 굳이 잡아내려면 잡아낼 수 있지만 그 때는 컴퓨터를 해킹한다고 무슨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관리자 입장에서는 알면서도 방치한 측면도 있다.

이 시기에는 인터넷의 사용자 및 관리자가 서로 아는 사람들이었고, 주로 해킹을 하던 학생들도 비교적 순박해서 지금처럼 악의적인 해킹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초기에는 해킹이란 게 시스템 문제를 찾아서 남몰래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많았다. 뭔가 해보다가 자기가 불편하니까 고쳐놓는 식으로. 또, 해킹 많이 하던 사람들은 항상 전자계산소 주변에서 지내다 보니 관리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해킹하다 걸려도 약간 야단치고 모른 척하는 식이었다.

관리자 입장에서 해커를 잡는 게 쉬운 편이었다. 네트워크 및 컴퓨터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단말기의 숫자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해커들이 뭔가 하고 있으면 관리자들은 비교적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대덕의 과기대 학생들의 경우, 터미널 번호를 보면 전산실인지, 또는 기숙사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릉 계산소에서 해커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과기대 전산실에 전화를 해서 잡아내는 식이었다. (박태하)

해킹을 시도하면 컴퓨터의 관리자 콘솔에 이러한 정보가 뜨게 되는데 관리자가 그 화면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해커들은 화면을 지우는 명령을 보내거나 빈 줄을 여러 줄 보내서 화면이 스크롤 되어 버리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콘솔들 중에 상당수는 텔레타이프 형식이었다. 즉, 화면이 아니라 화면에 나가는 내용이 다 인쇄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화면을 지우건 말건 기록은 종이에 착착 찍혀 나오고 있었다.

6.3.5 기업에서도 인터넷을 쓰기 시작함

1991년부터 1993년 사이에 한국 인터넷에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기업들이 서서히 인터넷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1년 SDN 을 통하여 해외와 연결한 기록을 보면 기존의 학교나 연구 기관들 이외에도 삼성, 두인전자70, 금성, 삼보, 대우, 솔빛미디어71 등의 이름이 보인다. 한편 1993년의 기록에는 연주시스템, 핸디소프트72, 오픈테크73, 큐닉스컴퓨터74, 나눔정보75, 휴먼컴퓨터76, 하이퍼컴퓨터, 한국컴퓨터, 동양 SHL (변희수, 1992) (변희수, 1994)

69 내가 이런 얘기를 왜 알고 있지?70 1990년에 설립되어 1992년에 TV 수신카드 (컴퓨터에서 TV 를 볼 수 있게 하는 카드)를 내놓아 큰 인기를 끌었으나 IMF 사태에 부도가 났다.71 1991년에 설립되었으며 SDN/HANA 망의 관리자였던 박현제 박사가 당시 대표이사로 있었다.72 1991년에 설립된 소프트웨어 개발, 판매 회사이다. 73 1992년에 설립된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 공급 업체이다. 74 이용태 박사가 설립한 초기 벤처 기업 중 하나로서 1981년 설립되었으며 1985년에는 다우 기수를 스핀오프 시키는 등 초기 벤처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96년에는 매출 1300 억의 중견기업이 되었으나 1997년에 부도를 맞게 되었다.75 아마 나눔기술이 아닌가 싶다. 나눔기술은 정보와기술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 설립된 소프트웨어 회사다.76 1989년에 설립된 한국어 탁상출판 전문업체이다. 엄청난 기술력과 좋은 제품을 내놓았지만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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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망을 일반 기업에는 그냥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연구망”이므로 기업의 연구소가 가입하는 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허진호) 이것은 인터넷이 그냥 학술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업적으로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아주 분명한 신호였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반은 상업적인 인터넷 서비스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얘기를 다음 장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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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용 ISP

7.1 왜 아무도 ISP 를 안 하지?

이전에는 일부 학교와 연구기관에서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일부 기업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조차도 몰랐겠지만 컴퓨터를 이미 상당히 쓰고 있는 기업에서 조차도 인터넷은 큰 흥미거리는 아니었다. 초기 인터넷의 가장 중요한 응용 프로그램이 전자 메일인데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메일 주소가 없는데 내가 전자 메일을 쓴다고 한들 누구에게 메일을 보내겠는가? 요즘 상황으로 빗대어 얘기하자면 카카오톡에 가입했는데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SDN 에 가입된 학교나 연구소를 거친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은 사람들 그리고 해외에서 이미 인터넷을 사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있었으므로 서서히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인터넷을 맨 처음 시작한 미국의 경우에는 (우리에게 유즈넷 자료를 자기 테이프에 담아 보내 주었던) 릭 애덤스가 인터넷 접속을 제공하는 UUNET 사를 1987년에 세우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 internet service provider)가 되었다. 얼마 뒤에는 창업자가 자기 집의 차를 팔아서 회사를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PSInet 사가 1989년에 설립되었다. 이들 회사는 1991년에 상호 접속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이로써 상업적인 인터넷 접속 서비스 시대가 본격화 된 셈이다. (PSI13) 즉, 연구기관들의 네트워크로 시작해서 일반 기업들도 사용하는 네트워크로 한 차례 변모한 다음, 그 다음 단계로서 네트워크 자체가 “사업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던 것이다. 이때, SDN 에서 메일을 비롯하여 관리 역할을 한 적 있었던 허진호 박사는 삼보컴퓨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993년쯤 나는, 왜 한국통신77에서 (인터넷 접속) 상용 서비스를 안 하지? 라고 생각했다. 딴 것은 몰라도 전자 메일의 중요성, 특히 기업들에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이를 제공하려면 상용 서비스가 필요하지만 한국통신이 하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993년 말인가 1994년 초쯤에 그것을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한국통신의 상무였던 송주영 박사가 주도했다. 그런데 4월, 5월이 지나도 안 나왔다. 1994년 3월 정도에 “아! 이걸 가지고 사업을 해봐야겠다” 결정을 하고, 제일 처음 한 것이 4월에 있었던 INET 컨퍼런스에 참가한 것이었다. 이는 PCCS 의 후신으로 1991년부터 시작한 연차 국제회의다. 그 해에 체코 프라하에서 행사가 열렸고 거기에 갔다. 이유는 인터넷 접속 사업을 시작하려면 PSInet 과 UUNET 의 경험을 먼저 들어봐야겠다 생각했고, 그 회의에 UUNET 을 창업한 릭 애덤스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허진호)

세상 참 좁다. PCCS 의 후신으로 만들어진 컨퍼런스에서 SDN 에 테이프를 보내주던 릭 애덤스를 만나 상의를 하고… 어쨌든, 5년쯤 일찍 인터넷 접속 사업을 시작했던 릭 애덤스는 어떤 충고를 들려줬을까?

첫번째가 개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다이얼모뎀 랙을78 한 열 개 정도 사놓고 전화번호 할당 받아서 일반인들한테 10 불, 20 불 받으면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들이 워낙 많았다. 이전에 BBS(즉, PC 통신 – 고양우)하던 방식이 인터넷에 적용돼서 나타난 것이었다. 5천 불, 만 불만 있으면 창업하기도 쉬었고. 금방 수익이 나니까 이렇게 소규모로 하는 것들이 수천 개 생겼는데, 1990년대 초반에 다 없어졌다. 그 수천 개 중에 PSInet 과 UUNET 이 살아남은 것은 기업 대상 사업을 했고, 몇 천만 불 가량의 벤처 펀딩을 받았기

77 한국통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법에 따라 1981년에 체신부에서 독립하여 전신, 전화, 공중 전기 통신 사업을 맡는 정부투자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한국전기통신공사이며 현재는 ㈜케이티로 이름이 바뀌었다.78 랙(rack): 모뎀과 같은 장비의 수가 많으면 이를 놓을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쇠로 만든 틀(이를 랙이라고 부른다)에 장비를 층층이 쌓아 (실은 열이 빠질 수 있게 사이 사이가 살짝 벌어지게) 고정시킨다. 키 큰 랙에는 얇은 장비는 대략 40 개까지도 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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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허진호)

개인 대상 사업과 기업 대상 사업은 뭐가 다르기 때문인가 추가로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그 당시 개인들에게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의 대표는 PC 통신 (또는 BBS) 였다. 이는 PC 통신사업자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전화선을 많이 확보하고 거기에 모뎀을 다 연결해놓으면 각 가정의 개인용 컴퓨터에서도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해서 모뎀과 전화선을 통하여 각 가정의 컴퓨터가 PC 통신 사업자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게시판도 둘러보고 메시지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구조였다. 여기에서 PC 통신 기능을 빼버리고 인터넷으로 접속할 수 있도록 기능만 추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큰 투자 없이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고 각 개인도 모뎀만 있고 집에 전화만 가입되어 있으면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편, 기업의 대상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는 이렇게 전화 기반의 접속이 아니라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인터넷를 사용하려는 회사 사이에 별도의 회선을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곧바로 연결이 되는 방식이다. 대개는 전화선과 모뎀을 이용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많은 데이터를 잘 보낼 수 있었으므로 회사에서는 회선 하나를 가입해놓고 회사 내의 컴퓨터가 다 그 회선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지금도 회사에서 사용하는 인터넷은 대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왜 개인 대상 사업을 부정적을 보았을까? 릭 애덤스를 다시 만나서 상세한 얘기를 들어보면 좋겠지만… 대신 필자의 경험에 비춰보면79 대략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그 시장은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므로 (“5천 불, 만 불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으므로) 경쟁이 치열해서 큰 수익을 내기 힘들다. 둘째, 관리 비용이 많이 든다. 지금은 소액 결재 서비스가 활성화 되어 있어서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그 때는 집으로 지로 용지를 보내서 사용자가 그 용지를 들고 은행에 가서 돈을 내는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주소가 틀려서 안 가는 경우, 받고도 안내는 경우 등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그 다음 달에는 연체 금액과 연체 이자를 계산해서 다시 지로를 발행해야 하고 그 외에도 중간에 가입한 사람도 있고 중간에 해지한 사람도 있어서 일할 계산을 해야 하기도 하고 특별 행사 기간에 가입해서 할인해줘야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온갖 경우를 다 따져서 지로 용지를 인쇄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인데다 이를 우편으로 발송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개인 사용자들의 경우 쓰는 법이 미숙하거나 컴퓨터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지원하는 콜 센터 운영 비용도 적지 않았다. 반면, 기업 대상 서비스는 영업에 부담은 있겠지만 일단 계약이 성사되면 그 이후 운영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익을 내기 쉬운 상황이었다.

7.2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릭 애덤스의 충고로 방향도 잡았겠다 사업을 벌이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 앞에는 크게 두 개의 문제가 놓여있었다. 첫째는 당장 안정화가 될 때까지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의 법적인 지위 문제였다. 첫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기업 대상으로 하려면 초기 투자가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개별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출이며 성장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기업 대상 사업을 주로 하면서도 일단 초기의 매출이 있어야 하니까 개인 대상 사업도 일단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 (허진호)

즉, 충고대로만 갈 수는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개인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한다고 한 들 개인에게 광고해서 가입을 시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미 컴퓨터 통신을 하고 있는 사용자들을 인터넷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가 마케팅 할 수 없으니 그것은 나우콤이80 맡고 나우콤 회원 대상으로 인터넷 서비스

79 1990년대 후반에 난립했던 여러 인터넷 접속 사업자 중 한 곳에서 일한 적이 있다.80 1994년 4월에 창업하여 5월부터 종합 PC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1994년 10월에 서비스 상용화와 함께 나우누리(나와 우리의 누리 즉, 세상이라는 뜻)라는 서비스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상용 PC 통신망 가운데 가장 먼저 14,400 bps 속도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최근에 나우콤은 아프리카티비(afreecaTV)라는 인터넷 개인 방송 서비스와 디지털 미디어 커뮤니티인 피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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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하는 방식으로 제휴를 하려고 했다. 제휴를 제안하러 회사 법인 설립을 8월에 하자마자 아는 사람 없이 바로 찾아갔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문용식 당시 이사였다. 내용도 별도 없이 파워포인트로 해서 간단하게 제안했는데, 이 양반이 듣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했다. (허진호)

둘째의 사업자 법적 지위 문제는 좀 더 까다로운 문제였다. 왜냐하면 사업 자체를 상당히 지연시킬 수도 있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설립하고 사업자 면허를 등록해야 어떻게 할 지 고민이 됐다. 당시 들은 얘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준 무라이 교수의 제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를 설립했는데, 그게 IIJ 다.81 그 친구들도 INET 컨퍼런스에서 만났는데, 그 때 들은 얘기가 IIJ 가 일본 정부로부터 사업자 면허를 받는 데 2년 걸렸다는 것이다. 왜? 아무리 뒤져봐도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 사업자 허가 항목이 없길래 정부에 문의를 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 때부터 정부가 공부를 하면서 인터넷 서비스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는 데 2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 동안 IIJ 는 인터넷 서비스를 못하고 UUCP 전자 메일 서비스만 했다.82 (허진호)

우리 정부도 일본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상황일 테니 향후 몇 년은 사업을 못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통신과 데이콤에서도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 그래서 과감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정통부(당시에는 아마 체신부?)에 얘기하면 분명히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다. 그래서 나는 안 물어보기로 하고, 관련 법령을 다 뒤져봤다. 우리는 딱 두 종류가 있다: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그 차이는 딱 하나: 기간통신사업자는 광케이블, 동축케이블 등의 인프라를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서비스를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부가통신사업자가 된다. '우리는 인프라 없지? 그럼, 우리는 부가통신사업자네' 하면서 부가통신사업자로 신청했다. 정부에 아무 얘기 안하고, 부가통신사업자 허가 신청해서 허가 받고 바로 사업을 해버렸다. 정부가 이 사업이 뭔지 이해를 하기 전에 서비스를 먼저 시작한 거다. 만약 우리도 IIJ 와 똑같은 절차를 거쳤으면 2년은커녕 훨씬 더 걸렸을 것이다. (허진호)

결국 ㈜아이네트기술은 나우콤과 협력하여 1994년 11월 1 일에 누리넷(nuri.net)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1994년 6월에 한국통신이 시작한 KORNET, 같은 해 10월83 데이콤이 시작한 데이콤 인터넷과84 더불어 본격적인 상업 인터넷 서비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KORNET 과 DACOM InterNet 사업 시작 관련 자료도 확보해서 추가해야 되겠다 . – 고양우 당시 상황을 신문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이제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 6월 한국통신이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개시한 데 이어 오는 11월이면 나우콤과 데이콤도 잇달아 상용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우콤과 손잡고 인터넷 접속서비스를 전문적으로

(pdbox)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유명하다.81 Internet Initiative Japan. 1992년 12월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 1993년 7월에는 UUCP 접속 서비스를 같은 해 11월에는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일본 최초로 제공하였다.82 IIJ 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1994년 2월에 특별제 2 종전기통신사업자(特別第二種電気通信事業者)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1992년부터 시작해서 따지면 햇수로 2년이 걸린 것이다. 아마 일본 정부를 나름 법 제도를 정비해서 새로 만들어낸 것은 “특별제 2 종”인 모양이다.83 자료에 따라서는 11월이라고도 한다.84 대개는 보라넷(BORANet)이라고 불리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데이콤 인터넷이라고 부르다가 1996년 2월에 사내 공모를 통하여 “광범하게(Broad) 이용되는(Open) 가장 빠른(Rapid) 인터넷 서비스(Access)”의 머릿글자를 따서 보라넷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지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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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해주는 아이네트기술과 같은 회사까지 생겨 열기를 더욱 북돋우고 있다. (중략)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받기 위한 절차는 간단하다. 나우콤과 데이콤은 각각 나우누리, 천리안 등 PC통신의 특정 메뉴로 들어가서 온라인으로 서비스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다만 한국통신은 전화나 우편으로 직접 가입의사를 밝혀야 한다. 개인사용자의 경우 한국통신이 매월 4만원의 정액을 받는 반면 데이콤은 분당 30 원씩 종량제로 받는다. 나우콤은 두가지 방식을 혼용해 월 30시간까지는 3 만원을 받고 그 이상은 분당요금을 산정해 청구한다. 따라서 사용자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적당한 서비스를 택하면 경제적인 비용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1994)

당시와 비교에서 물가는 대략 두 배가 올랐는데 인터넷 이용 요금은 (엄청나게 빨라진 속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수준이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우리의 인터넷 상용화가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HANA 망을 통하여 미국과 연결된 것이 1990년이고 일부 기업이 HANA 망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92년~1993년인데 그리고는 바로 상업화된 인터넷 서비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이는 아마 한편으로는 뭐든지 빨리 해치우는 우리 특유의 기질이 작용한 측면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SDN 시절부터 인터넷을 경험하고 단련된 기술 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7.3 선택의 결과는?

이미 기간 통신사업자로서 인터넷이건 뭐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제약이 없었던 한국통신이나 데이콤과는 달리 새로운 통신사업자로서 면허를 받아야 했던 아이네트기술이 부가통신사업자라는 진출 통로를 개척한 것은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일본에서의 선례와 같이 아이네트가 정부에 “인터넷 서비스를 하려는데 면허를 뭘 신청해야 하나요?”라고 문의를 했더라면 누리넷 서비스 자체가 몇 년을 지체되었거나 아예 면허를 받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랬더라면 아마 한국에서는 인터넷 서비스 사업도 기존의 전화 사업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망 기반을 갖출 수 있는 기간통신사업자들만 할 수 있는 사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가통신사업자를 통로가 일단 열려버리니 너도 나도 이 사업에 뛰어 들었다. 삼성, 현대, 엘지와 같은 대기업까지 뛰어들어 2004년에는 30 여 개 업체가 사업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많은 업체가 뛰어든 만큼 경쟁이 치열해서 이용자들은 싼 요금으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널리 퍼져나가는 인터넷에 기반한 새로운 사업들 특히, 포털이나 인터넷 게임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개별 기업들은 지나친 경쟁으로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하였고 나중에 다시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는 망을 갖추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들 중심으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4 공정한 경쟁은 가능했을까?

앞서 자체 기반을 갖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이나 데이콤과는 별개로 부가통신사업자로서 여러 업체가 인터넷 서비스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고 했는데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기간통신사업자와 부가통신사업자간에 벌어진 경쟁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한다.

7.4.1 IX 구축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한 곳에만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인터넷 접속을 제공하는 곳이 여러 곳이 되면 이들 사이에 연결을 해줘야 한다. 예컨대, 견우는 한국통신 KORNET 에 가입되어 있고 직녀는 누리넷에 가입되어 있다면 KORNET 과 누리넷 사이에 연결이 있어야 이 둘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끼리를 서로 연결하는 것은 인터넷 연동(internet exchange, 이하 IX)라고 부른다. 초기 IX 는 인터넷이 제일 먼저 확산된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89년 미 국방성 아르파 네트워크가 연방과학재단의 NSFNET 네트워크로 변화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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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네트워크를 서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공적자금이 지원되었다. 이 공적자금으로 동부 연방인터넷 연동센터와 서부 인터넷연동센터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바로 인터넷 연동서비스의 시작이다. 이때만 해도 인터넷 연동서비스는 무정산 직접접속 방식 뿐이었다. 90년대 초부터 인터넷의 상업화를 논의하면서, NSFNET 은 단계적으로 백본의 기능을 당시 IBM, MCI 와 Merit Network 의 합자회사였던 ANS 로 넘기기 시작했다. ANS 가 상호접속료를 협약에 따른 유료화로 바꾸자, 이에 반발한 사업자들이 일종의 연합체와 같은 CIX(Commercial Internet Exchange)를 설립하여 무정산 다자간 직접접속 방식을 확립했다. 한편 이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1992년에는 대도시에서 광케이블 백본을 설치한 사업자들이 MFS 를 만들었는데 워싱턴 지역에서는 MAE 를, 산호세와 LA 에서는 MAE-West를, 텍사스 달라스에서는 MAE-Central 을 세우게 된다. (전응휘)

우리나라의 경우 SDN 과 교육전산망(KREN), 연구망(KREONET)이 서로 연동되어야 했으므로 최초의 IX 는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그 역할을 하였다. (아래의 ANC 회의록에서 따온 부분 정리할 것) 당시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였던 학술전산망협의회에서85 논의되었는데 기록으로 남아있는 초기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ANC, 1992)

- KIX 구현을 위한 topology 는 크게 서울-대덕을 하나의 ring 으로 하는 방법과 서울과 대덕 두 개의 ring 으로 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박현제)

- ring 형태의 topology 는 망관리가 어려울 수 있으므로 star topology 도 고려해야 한다 (최양희)

- KIX 는 매우 추상화된 형태이므로 실제 구현을 위해서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1단계는 현재 링크들을 T1 으로 upgrade 하고, 2단계는 95년(?) 경에 지원되는 SMDS 의 이용, 3단계는 2000년대의 Giga bit network 등이다 (최양희)

- 필요성이 인정되면 KT 가 해외 링크 밑 서울-FIX 의 T1 회선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허문행)

- KIX 와 backbone 의 개념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KIX 는 공유되는 것이다(전길남)

“국내외 여건을 감안할 때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1992년 7월 11 일에 개최된 제 8 차 ANC 회의록 (ANC, 1992))고 지적하며 한국의 KIX 로 다음과 같은 구성을 1992년 4월 16 일에 개최된 제 7 차 ANC 회의에서 제시하였다.

그림 13 KIX 구성에 대한 ANC 의 초기 밑그림 (ANC, 1992)

이를 좀 더 구체화하여 다음과 같은 형태로 “과도기”적으로 운영하자고 그 다음 번 ANC 회의에서 제안하였다. (이렇게 운영을 한 것인지 다른 추가 제안이 있었는지 등은 더 자료를 확인할 것).

85 ANC. ANC 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9.2 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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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학술전상망협의회에서 제시한 1992년 당시 KIX 구상 (ANC, 1992)

그러다가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서 이를 운영하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한국전산원(NCA)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1994년 10월 한국전산원과 아이네트 사이에 처음 연동되었고, 1995년 1~2월경에 데이콤이, 1995년 4월경에 한국통신이 연동된다. 당시 정보통신부는 KIX 설립에 대해 아무런 정책이 없었으나, 이에 필요한 재원은 정보통신부가 정보화촉진기금을 한국전산원에 배정한 초고속국가망사업 예산의 범위 내에서 한국전산원의 재량에 의해 지출되었다. (오익균) 인터뷰 녹취 자료 확인할 것. 이렇게 하여 연결된 당시 한국의 인터넷 모습은 그림 15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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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1995년 말 국내 인터넷 연결 현황 (한국인터넷정보센터의 자료) (전응휘)

하지만 여전히 *** 문제가 있어서 ( 뭐가 문제였을까요 ?) 한국 사용자가 이웃의 한국 웹 사이트로 접속하려고 해도 해외를 거쳐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이에 KIX 를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림 16 IX 문제를 다룬 동아일보 1996년 7월 25 일자 기사

그러다가 1996년 10월에 정보통신부가 세운 정책에 따라 한국전산원은 비영리공공망의 연동만 담당하고 상용 인터넷간의 연동은 민간 자율로 하기로 하였다. 이에,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던 기간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각각 KT-IX(Korea Telecom Internet eXchange)와 DIX(Dacom Internet eXchange)를 만들고 이들 IX 가 서로 연결하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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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KIX 의 역할은 1996년 말 이후 점차로 약화되었다.

그림 17 1999년 이전 인터넷 서비스끼리의 상호 연동 모습 (손영태, 2002)

그림을 봐서 알 수 있듯이 기간 통신 사업자들의 시장 주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부가통신사업자들은 기간 통신 사업자의 IX 에 요금을 내고 접속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인터넷의 최종적인 연동을 담당하는 미국 쪽을 우회하면 된다. 하지만 한미간의 회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비싼 상황이었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인 동시에 IX 이므로 다른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와 한편으로는 연동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 업체이므로 IX 를 중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 등을 놓고 다른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던 중 1998년에 KT-IX가 중계접속료를 인상하려고 한 것을 계기로 당시 아이네트를 비롯한 15 개 사업자가86 별도로 1998년 한국 인터넷 연동 협의회를 구성하고 KINX(Korea Internet Neutral eXchange)라는 이름의 IX를 구성하게 된다. 심지어는 한국통신과 데이콤에도 여기에 참여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데이콤은 IX 를 자기들 시설에 두는 조건으로 참여하겠다는 답을 보내기도 하였다. (전응휘) (박기석, 1999) 하지만 일이 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당시, KINX 의 형성을 주도했던 허진호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세 가지가87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 우리가 한국통신과 데이콤에 IX 피어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 피어링이란 동등한 위치에서 비용 정산 없이 서로 트래픽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그 둘은 기간통신사업자니까 자기들끼리는 피어링을 하는데, 너는 기간통신사업자 아니니까 “돈 내고 들어와” 한 것이고, 그에 열 받아서 아예 별도의 IX 를 만들어버렸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을 제외한 모든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는 여기에 붙어라, 우리는 미국식으로 해서 비용을 n분의 1 로 분담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트래픽을 주고 받는 피어링을 하겠다. 그게 KINX 다. 아이네트가 주도했지만 시작할 때부터 별도 법인으로 만들었다. 아이네트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회원의 하나로 들어가기로 하고, 위원회를 두어 그 결정에 따르는 것으로 하자 했기 때문이다.

KINX 를 만들고 그 차원에서 한국통신과 데이콤과 협상했다. 너네도 IX 고 우리도 IX 다. 우리는 20-30 개의 ISP 가 있다. 그런데도 안 받아들여줘서 전산원에서 하는 KIX 하고만 연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결국 한국통신과 연동이 되기는 했는데, 그 전에는 아이네트 가입자가 한국통신 가입자에게 연결되려면 해외에 나갔다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허진호)

그래서 연결된 모양은 그림 18 와 같다. 한국통신이나 데이콤 입장에서도 나름 이유는 있었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자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이 값비싼 국제회선을 쓸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한 셈이라 아쉬운 점이 있다. 86 자료에 따라서는 16 개 사업자라고도 한다.87 당시 서로 연결되어 있는 IX 즉, KIX, KT-IX, DIX 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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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KINX 가 추가된 이후의 연동 모습(KINX 는 KIX 하고만 연결되어 있다)

초기부터 뒤틀린 상호 연동은 오늘에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네트워크 사이의 연동 방식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비용의 분담 문제는 물론이고 접속에 있어서의 안정성(예를 들어, 우회 경로를 설정하는 방식)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는 컨텐츠 사업자, 포털, 각종 응용 서비스 제공자들과 네트워크 서비스 제공자들 즉,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나 이동통신사업자들 사이의 바람직한 역할 배분과 올바른 접속 정책 그리고 공평한 비용 분담의 틀을 왜곡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망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치열한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7.4.2 사용자 접속 구간

앞 장에서는 사용자가 인터넷을 통하여 컨텐츠를 보내거나 받을 때 이를 중계해주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가 다른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와 어떤 식으로 서로 연결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고 이 장에서는 사용자와 그 사용자가 가입되어 있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 사이의 연결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얘기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한국통신의 경우 전화 사업을 위해서 전화국과 각 가정 사이에 이미 구리선을88 깔아 놓은 상태다. 이 회선의 양쪽에 한국통신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달고 인터넷 서비스를 가정의 사용자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다른 사업자가 그 사용자에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사업자마다 필요하다고 회선을 설치하게 된다면 국가적으로 보면 엄청난 중복 과다 투자가 발생한다. 게다가 회선 설치라는 초기 비용이 너무 높아서 새로운 사업자가 시장에 들어올 수 없고 따라서 경쟁이 거의 없어져서 기존의 사업자가 사실상 독점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새로운 사업자가 기존의 사업자(위의 예에서는 한국통신)의 회선을 빌려서 사용자에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에도 회선을 그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통신이 이미 양쪽에 장비를 붙여놓고 그 장비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신규 사업자가 사서 판매하게 하면 신규 사업자는 자기 나름의 다른 접속 기술을 도입할 기회조차 없어져 버린다.89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사업자가

88 요즘을 기준으로 얘기하지만 광 케이블을 깔아 놓은 상태다.89 설명이 좀 까다로운데 비유하여 설명을 해보자. 큰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농사를 지어 보고 싶어서 밭의 일부를 빌리는데 그냥 일부를 떼서 준다면 내가 심고 싶은 거 심고 내 나름의 농사비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고구마를 심어 놓고 특정 비료랑 곡괭이만 쓰게 한다면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고작 더 열심히 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수확할 것인가 정도 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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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설치해놓은 네트워크 회선을 새로 진입하려는 사업자에게 “날 것으로” 제공하는 가입자 접속 회선의 “언번들링” 정책은 미국의 경우 1996년 개정 통신법에 의하여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2002년에 가서야 도입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부가통신사업자들이 기간통신사업자들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전에 부가통신사업자로서 인터넷 접속 사업을 하였던 허진호 박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아이네트는 KT 나 데이콤처럼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니어서 회선을 사와야 했는데, 즉 기간통신사업자가 회선을 사는 가격으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까지! 미국과 한국의 기간통신사업자 규제에 대한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한국은 이러저러한 역무의 기간통신사업자가 몇 개 필요하다고 공지하고 여기저기서 신청하면 자격을 갖춘 곳들을 선정하는 미인대회 방식이다. 그러고 나면 다른 곳들은 기간통신사업자가 될 수 없다. 반대로 미국은 일정 요건을 갖추고 신청해서 통과되면 누구나 기간통신사업자가 될 수 있다. 기간통신사업자가 되면 광케이블을 기간통신사업자 원가로 살 수가 있다. 그것도 다크 파이버로90 살 수가 있다. 우리는 다크 파이버를 살 수 없으니까 케이블 양쪽에 한국통신이 붙인 장비에서부터 일종의 부가 회선을 사는 꼴이다. 결국 우리는 부가통신사업자로서 원가를 다 부담하면서 서비스를 했던 셈이다.

한국통신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간통신사업 부서와 부가통신사업 부서 간 회계 분리가 돼야 한다. 그래야 공정경쟁이 될 수 있다. 내 기억으로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다. 한국통신이나 데이콤과 같은 조건이 아닌 데도 그 사업을 한 것인데.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다. 만약 처음에 알았다면 안 했을 것 같다. (허진호)

(지금의 경쟁 구도에 대해서 좀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자료를 써야 하나… -- 고양우)

7.5 014XY 시대 그리고 플렉스와 X2

1990년대 초반에는 PC 통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1994년에 이르러 여러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생겨나면서 컴퓨터를 통하여 통신을 하는 사용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가정에서 인터넷이나 PC통신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기존의 전화선을 이용하는 모뎀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이 방식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전화요금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1990년에 PC 통신이나 인터넷 접속 서비스의 월 이용 요금은 대략 1 만원 정도였는데 “이와는 별도로” 이들 서비스에 접속하려면 전화 접속 요금을 전화 회사 즉, 한국통신에 내야 했다. 당시 시내통화 요금은 3분(180 초)에 그리고 저녁 9시 이후와 공휴일에는 약간 더 싸서 258 초에 30 원씩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두 시간씩 접속하면 한 달에 통화요금만 4 만원 정도 나왔다. 한 달에 10 만원이라는 요금 폭탄으로 집에서 꾸중 들었다는 얘기들을 하고 했다.

여기에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 것인 014XY 번호다. 이는 데이터통신 전용 전화회선에 붙인 번호로서 회사마다 고유의 번호가 할당되었다. 예를 들어, 하이텔은 01410, 천리안은 01420, 현대의 신비로는 01431, 삼성의 유니텔은 01433, 아이네트는 01438 등의 번호가 부여되었고 사용자들은 이 번호로 접속을 하면 전화 요금이 할인이 되었다. 1994년 3월부터는 주간에 258 초당 야간에 268초당 30 원이 되었고 1997년 4월부터는 부분정액제가 도입되어 밤 11시부터 아침 8시에 무제한 쓰는 것이 월 2 만원이 되었다. 이제 잠들기 전에 다운로드를 시작해놓고 밤새 좋은 자료를 받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 것이다. (김정태)

것이다. 뒤의 경우처럼 밭을 그냥 주지 않고 특정한 방향을 결정해서 주는 것을 “역어서 판다”(번들 bundle)고 하고 앞의 경우처럼 맘대로 하라고 주는 것을 “풀어서 판다”(언번들 unbundle)고 한다. 90 dark fibre(또는 dark fiber). 원래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광케이블이라는 뜻이다. 광 케이블의 경우 데이터를 보내지 않는 상태에는 빛이 없으니 어둡게 보여서 다크 파이버라 부른다. 하지만, 보통은 장비를 물리지 않은 그냥 설치된 그대로의 광 케이블을 다른 사업자에게 제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언번들”된 광 케이블이라는 뜻이다. 광 케이블 대신 구리 회선인 경우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는 구리(드라이 카퍼, dry coppe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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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접속 속도에서는 꾸준한 개선이 있었다. 아주 초기에는 2,400 비트/초(2.4Kbps)의 모뎀도 있었지만 1990년에 중반에는 28.8K 또는 33.6K 모뎀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모뎀을 달아도 전화 회선의 품질이 좋지 않으면 그 속도를 다 써먹지는 못하였다.) 요즘 가정에 들어오는 인터넷 회선은 광랜 제품의 경우 50Mbps 즉, 50,000Kbps쯤 되니 대략 1,500 배쯤 느리다고 생각하면 된다. 요즘 2~3분에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동영상을 다운받으려면 그 시대에는 대략 이틀쯤 걸렸을 것이라고 봐야 된다. 물론 그 사이에는 전화는 계속 먹통 상태라 부모님이 방치할 리가 없었겠지만. 아직 휴대폰이 보급되지 않아 집 전화를 모든 가족이 같이 쓰던 시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통화만 길게 해도 눈치 보이는데 이틀씩 전화선을 붙들고 있으면 큰 일 났겠지요.

그러던 중 충격적인 신기술이 등장하였다. 56Kbps 로 다운로드가 되는 모뎀이 나온 것이다. 당시, 모뎀 기술의 양대 산맥이었던 유에스로보틱스(US Robotics)사와 락웰(Rockwell)사에서 1996년 말 동시에 이 기술을 발표하고 1997년 초부터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유에스로보틱스사의 기술은 X2라고 불렸고 락웰사의 기술은 플렉스(Flex)라고 불렸는데 불행히도 이 둘은 호환성이 없었다. 게다가 사용자의 PC 에 그 모뎀을 달기만 하면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하는 상대방 즉,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의 모뎀과 짝이 맞아야 이 기능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의 고객 상담 센터에는 왜 모뎀을 업그레이드 했는데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지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X2 를 지원하는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부분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이유는 정말 큰 놈이 곧이어 나타나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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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고속 인터넷

8.1 두루넷의 등장

(1993년 전길남 등의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 검토하여 반영할 것)

좀 동떨어진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의 초고속 인터넷을 얘기하려면 우선 유선방송과 한국전력 얘기부터 해야 한다. 우선 유선방송 얘기부터. 우리나라의 종합유선방송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선거공약으로 등장하여 1991년 7월에 시범방송 개시하였다. 1991년 12월에는 종합유선방송법 제정하고 실제 사업을 할 사업자는 1993~1994년에 걸쳐 지정하였으며 본 방송은 1995년 3월에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 인터넷과 관련이 있는 것은 전송망 사업자(NO, network operator)로서 한국통신, 한국전력 그리고 데이콤이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류춘열, 1996)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기간통신사업자로서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니 전송망 사업자로 선정된 것이 자연스럽지만 한국전력은 왜 끼게 된 것일까? 한국전력은 전기를 공급하기 위하여 고압송전선을 전국에 설치하였는데 전력망을 관리하기 위한 통신, 통제용으로 통신망이 필요하여 전력선에서 발생하는 잡음의 영향을 덜 받는 광케이블을 같이 설치하였다. 1979년 부산의 토성동과 서면 사이에 광통신방식을 실험하여 성공한 후 전국적으로 설치하여 1995년 말에는 총 길이 8 만 2천 Km 의 광케이블을 설치하였다. (한국전력공사) 이 광케이블을 발판으로 한국전력은 종합유선방속의 전송망 사업자로서 네트워크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전송망 사업자로서 각 가정에 유선방송을 위한 회선을 연결하고 이를 다시 한국전력의 광케이블망에 연결하니 한국통신과 맞먹는 엄청난 네트워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기왕에 네트워크가 확보되었으니 한국전력은 이 참에 컴퓨터 네트워크 사업에도 뛰어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위협을 느끼고 있던 한국통신은 물론이고 데이터 통신 네트워크는 자기들의 관할이라고 생각하던 정보통신부도 반대하고 나서게 되었다. 이에 한국전력의 통신선로를 사용하는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타협안이 나오고 이에 따라 두루넷이라는 회사가 설립된다.

한전(한국전력)은 두루넷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주식 소유를 10%로 한정했다. 나머지 90%는 100 개의 민간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기로 했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경영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전은 9.9% 주식을 소유하는 회사를 하나 지정해 운영을 맡기기로 했다.

1996년 봄의 어느 날 한전으로부터 내게 연락이 왔다. 두루넷 운영 주체를 삼보에 맡긴다고 했다. 나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먼저 어떤 이유로 삼보를 택했는지 물어보았다. 한전 쪽에서도 많은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우선 두루넷의 운영을 재벌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중견기업 여러 개를 놓고 적임자를 선정했다고 했다. 삼보가 정보기술에 전념하는 전문 기업체이고 내가 최초의 데이터통신사업을91 전개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사업성이 있을 것인가? 기존의 전화 모뎀으로 인터넷이나 PC 통신을 잘 쓰고 있는데 굳이 새로운 서비스가 시장에서 먹힐 것인가? 그 당시 미국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미국에서도 1996년에 시작된 앳홈(@Home)이라는 케이블 모뎀92을 이용한 고속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월 50달러 정액제로 제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속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시내전화요금이 정액제였기 때문에 속도가 빠른 것 외에는 큰 장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요금이 정액제가 아닌 한국에서는 케이블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정액제로 제공한다면 괜찮을 것이라는 의견을 전길남 박사는 이용태 박사에게 전했다. 이 장면에서 빠른 속도는 그 덤에 불과한 것이었다. (Farivar, 2011) 두루넷은 1996년에 창업하여 1997년 7월 인터넷 전용선을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터넷 사업의 돛을 올린 후 1998년 7월에는

91 정부가 데이콤을 설립하여 처음 사장을 맡긴 사람이 이용태 박사였다.92 유선방송을 위한 케이블에 모뎀을 달아서 데이터 통신을 하게 해주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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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 10Mbps 의 초고속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월 4 만원대의 정액제로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8.2 ISDN 이냐 DSL 이냐

내 기억 속에서는 전화 모뎀의 시대에서 바로 초고속 인터넷으로 넘어간 것 같은데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1993년 말부터 종합정보통신망(Inte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ISDN)이 상용화되어 이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자.

그림 19 ISDN 의 본격적이 서비스 개시를 소개한 1993년 12월 23 일자 매일경제신문의 기사

ISDN 의 특징은 기존의 전화 모뎀과는 달리 속도가 두 배 이상(128Kbps) 빠르고 컴퓨터 통신을 하는 동안에도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요금은 두 배가 된다.)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우선 가입비가 20 만원으로 비싼 편이었다. 하긴 당시 전화 가입비가 25 만원이었으므로 아주 비싸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화 모뎀을 쓰면 추가 가입비가 필요 없는데 ISDN 을 쓰려면 가입을 따로 해야 하니 부담이었다. 게다가 전화 가입비와는 달리 ISDN 가입비는 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가입비는 10만원으로 싸졌다.) 월 이용요금은 기본료 5천원이고 통화 요금(즉, 통신에 연결하거나 전화를 거는 동안 부과되는 요금)은 전화 요금과 같았다. 그리고 전화기도 기존이 전화기가 아니라 ISDN 전용 전화기를 구매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어지간한 집에서는 설치하기 힘들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지만 그 때야 PC 통신이란 애들이 노는 것 정도로 인식되었으니까. 따라서, 한국통신의 야심찬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용자 수는 크게 늘지 않아 1997년 말에 (본격 서비스 시작 후 4년이 지났건만) ISDN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1 만 8천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마도 내 기억에 ISDN 시대는 아예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김수병, 1997)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ISDN 이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비동기전송방식(asynchronous transfer mode, 이하 ATM) 네트워크를 구축 하는 등 정부와 한국통신은 기존의 전화망 중심 발전 전략을 이어나갔다. 더구나 IMF 사태라는 비상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과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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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서 이는 추진되었다.

한국 정부 역사상 가장 큰 국가 프로젝트인 초고속정보통신망(Korea Information Infrastructure, KII) 구축 사업이 마스터플랜 수립과 함께 1995년에 착수되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첫 단계로 80 개 도시에 비동기 전송 방식(ATM) 시험 네트워크가 건설되었고, 두번째 단계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국적인 ATM 네트워크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광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주요 도시에 위치해 있던 인터넷 기간망의 대역폭이 622Mbps 로 향상되었으며, 국제 회선도 290Mbps 로 향상되었다. 2000년까지 국내 144 개 지역에 대용량 고속 광통신망이 건설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2012)

너무 친절한 양우씨: ISDN, ATM 과 IP 네트워크

ISDN 은 Inte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풀어보자면 통합된 서비스를 해주는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의미다. 구리선을 이용하여 전세계를 다 뒤덮어서 전화망을 설치했는데 갑자기 컴퓨터끼리 네트워크를 하고 싶다는 둥 음성을 디지털로 보내면 음질이 더 좋다는 둥 새로운 요구가 등장하자 기존의 회선 교환 방식의 전화망에 이들 서비스를 통합해서 보낼 수 있는 기술을 추가로 만들어낸 것이 ISDN 이다. ISDN 이 되게 하려면 일단 교환기도 (당시로서는) 최신식의 전전자 교환기로 바꾸어야 하고 ISDN 가입자 회선을 받아주기 위한 추가 장치(ISDN 가입자 모듈)도 추가로 설치해야 했다.

ISDN 의 다음 단계로 전화회사들이 준비한 것은 ATM 이었다. 이 기술은 음성 통화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특히 비디오 전송까지 지원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ATM에서는 네 가지의 서비스 품질(QoS, quality of service)를 지원할 수 있었다. 음성통화나 화상통화같이 일정한 전송속도가 유지되는 것 (CBR, constant bit rate), 음악이나 영화 방송처럼 압축된 정보를 보내기 때문에 전송속도가 들쭉날쭉 한 것 (VBR, variable bit rate), 최소한의 전송속도만 보장되면 되는 것 (ABR, available bit rate), 그리고 파일 전송처럼 그냥 최선을 다해 보내주기만 하면 되는 것 (UBR, unspecified bit rate) 이렇게 네 가지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네트워크 쪽에서 응용 프로그램의 특성을 고려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 네트워크에서는 단말기(즉, 전화기)가 무슨 기능이 되는지가 네트워크 쪽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전화국이 음성통화를 지원하면 내 전화기가 음성통화가 되는 것이고 전화국이 다자간 통화나 영상 통화나 영화 감상을 지원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 전화기에서 (또는 전화망에 연결된 내 컴퓨터에서) 해당 기능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이 방식의 장점은 이렇게 네트워크에서 지정한 기능은 잘 동작하는 반면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려면 전화국의 네트워크 전체를 다 바꿔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IP 네트워크는 그저 패킷이 흐르게만 할 뿐 그 패킷을 가지고 어떤 기능이 되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서비스를 쉽게 추가할 수 있게 되고 장비도 더 간단해진다. 그냥 대충 만든 것 같은 IP 네트워크가 잘 설계된 전화국의 ISDN 과 ATM 을 밀어낸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bellheads vs. netheads 인용해서 내용 더 보강할 것)

한국통신이 우직하게 ATM 중심의 발전 전략을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두루넷이 갑자기 케이블 모뎀을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가지고 치고 나온 것이다. 물론 전화사업자들에게 케이블 모뎀과 대적할 수 있는 카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 가입자 선로(digital subscriber loop 또는 digital subscriber line, 이하 DSL) 기술이 있었다.

ISDN 과 DSL 둘 다 전화망에서 컴퓨터 통신을 지원하는 기술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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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고 있다. 가입자의 컴퓨터가 인터넷으로 접속한다고 하면 ISDN 은 가입자의 컴퓨터에서 보내오는 데이터를 일단 전화국의 교환기에서 받은 다음 이를 인터넷 접속을 담당하는 장치로 보내준다. 따라서, 교환기 자체가 이 기능을 지원하도록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하고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교환기의 부담도 커졌다. 음성통화가 전화망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서비스인데 교환기는 엉뚱한 일로 힘을 빼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한편, DSL 을 이용하면 컴퓨터가 보내오는 데이터와 음성 통화는 스플리터라는 장치에 의하여 분리되므로 교환기는 음성 통화만 받게 된다. 한편 데이터는 DSLAM(DSL access multiplexer)로 전달되고 여기서 인터넷 접속을 담당하는 장치로 보내게 된다. ISDN 은 전화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정면 승부 방식이라면 DSL 은 데이터를 전화망 밖으로 분리하는 우회 방식인 셈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전화망을 발전 시키고 싶어하는 전화사업자들에게 DSL 은 그리 내키지 않는 방향이었다. 게다가 DSLAM 장비도 (아직 널리 보급된 것이 아니라) 가격이 비쌌다. (하정수)

그림 20 DSL 의 연결 방식 (ASt)

8.3 하나로 통신의 등장과 본격 경쟁 시대

그러던 중 묘한 일이 생겼다. 1997년 통신 분야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 통신 사업자를 왕창 늘리게 된다. 이동통신회사는 5 개로 늘어났다.93 국제전화 사업자는 한국통신, 데이콤에 온세통신이 추가되고 시내전화 사업자는 한국통신 외에 하나로 통신에 추가되었다. 한국전력은 여유통신회선 임대 등을 목적으로 1997년 9월에 하나로 통신이 설립될 때 지분 투자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한국전력은 자기들의 회선으로 컴퓨터 통신 사업을 할 회사를 두루넷과 하나로 통신 이렇게 둘씩이나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 하여, 2000년 1월에 한국전력은 자회사로 파워콤을 설립함으로써 데이터 통신 사업 진출에 대한 꿈을 계속 이어간다.94

(하나로 관련하여 “김창곤”의 인터뷰 내용을 확인할 것)

후발 주자로 시내전화사업에 뛰어든 하나로 통신은 절대 강자인 한국통신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에 해외의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던 중 ADSL 을95 선택하게 된다. 당시 하나로 통신의 사장이었던 신윤식은 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이거다 싶었어요. ADSL 를 무기로 KT(한국통신)가 하지 못하던 인터넷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93 당초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 두 업체가 있었는데 한국통신프리텔, LG텔레콤, 한솔 PCS 가 추가되었다. 이 다섯 업체 중 SK텔레콤은 신세기통신을 통합하여 현재의 SK텔레콤이 되었고 LG텔레콤은 몇 번의 인수, 합병을 거쳐 현재 LGU+가 되고 한솔 PCS 를 인수한 한국통신프리텔은 KT 로 합병되어 사라졌다. 둘이 다섯이 되었다가 도로 셋으로 줄어든 셈이다.94 한국전력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어쨌든 한국전력은 한국 인터넷 역사에서 불쑥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95 Asymmetric DSL. 양방향 전송 속도가 다른 DSL 기술. 대개 사용자들이 내보내는 데이터에 비하여 받는 데이터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받는 쪽 전송 속도를 더 높게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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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상용화였어요. 사실 ADSL 은 통신업체 입장에서 보면 수지가 안 맞는 사업이었어요. ADSL 모뎀은 유럽의 알카텔이란 회사에서만 생산했는데 무려 60만원에 육박했고, 가입자당 3 만원대의 서비스 비용을 받아서는 수지가 안 맞았죠. 기술파트를 제외한 영업, 기획 쪽에서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요. (디지털타임스,2010)

1999년 4월 1 일 하나로 통신은 ADSL 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이 많으니 그걸 계속 업그레이드 하여 ISDN, ATM 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한국통신과는 달리 어차피 처음부터 투자해야 하니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데 더 적극적이었던 두루넷과 하나로 통신은 케이블 모뎀과 ADSL 이라는 신기술로 치고 나간 것이다. 한국통신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ADSL 로 초고속 인터넷 접속 사업에 뛰어들어 1999년 12월부터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전화 모뎀을 쓰는 집과는 달리 PC 방은 전용선을 썼기 때문에 훨씬 인터넷 접속이 빨라서 많은 아이들이 PC 방에 몰려들었는데 집에서도 PC 방처럼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되니 부모들로서는 오히려 안심이라 선뜻 지갑을 열었던 것이다. (디지털타임스, 2010) 이렇게 3파전으로 전개되자 처음 월 4~5 만원 선의 접속 요금이 2 만 5천원 선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 우리나라가 초고속 인터넷 접속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가 된 것은 다들 아는 얘기다.

케이블 모뎀과 ADSL 을 사용한 초고속 서비스 업체들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인터넷과 부가서비스의 품질은 향상되고 요금은 저렴해지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이용료는 세계 최저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 사용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2001년 말,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된 가구 수는 780 만 가구를 초과해 전체 가구의 50%를 넘어섰다. 인터넷 사용 인구는 1999년 1천만 명, 2002년에는 2천 6 백만 명으로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이러한 놀라운 성과에 힘입어 1999년 11월 두루넷은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되었고 전성기 때에는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를 앞지르기까지 하였다. (이용태, 2004) 하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강력한 마케팅을 앞세운 한국통신은 역전을 하여 1 위로 치고 올라온다. 이 와중에 정부는 한국전력이 데이터 통신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하여 손을 떼게 한다. 두루넷은 한국전력의 회선을 사용하려고 만들 회사인데 하는 수 없이 자체적으로 통신 선로 설치를 해야 했으며 그 빚을 갚지 못하여 파산한다. 이들 세 회사의 초기 경쟁은 우리나라가 세계 제 1 의 초고속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갖는 국가가 되게 하였다. (Farivar, 2011)

너무 친절한 양우씨: 박현제 박사가 생각하는 인터넷 대중화의 핵심 포인트: 속도가 아니라 always on

당시 네오위즈가 원 클릭으로 부상했던 것 처럼 연결 자체가 대중화의 걸림돌이었다.

특히 집에서 쓰는 건 너무 어렵다. 카이스트에서 랜 사용하던 것처럼 언제나 인터넷을 access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두루넷의 초고속인터넷을 구축하면서 LAN 과 같이 alaways-on 서비스가 되면서 대중화의 실마리가 풀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뒤에 구축한 KT 의 ADSL 기반 초고속망 서비스는 여전히 전화를 걸듯 사용 전에 연결하는 방식을 채택했었다가 1~2년 후에 지금과 같이 always-on 방식으로 바뀌었다. [박현제 – 인터뷰]

결국 모바일/스마트폰의 핵심이 이거 아닌가? – 고양우

나중에 더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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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콜럼부스의 달걀 – 아이네트와 두루넷의 의미

우리나라가 유난히 빨리 초고속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널리 퍼진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기동성이라던가 아파트와 같이 사람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어서 회선 보급하기가 쉽다던가 인터넷이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엄마들 덕분이라던가. 여기서는 이 글에서 언급한 업체들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고속 인터넷 접속을 널리 보급하게 된 것은 한국통신이 유난히 빨리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일본만 하더라도 ISDN 이 제법 잘 되었기 때문에 계속 거기에 매달려 있는 바람에 초고속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데는 지체가 되고 말았다. (허진호)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통신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앞으로 네트워크는 ATM 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회사(현대전자)에서도 관련 부서에서는 따로 시간을 내서 ATM 공부하는 세미나를 진행하면서96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통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계속 ISDN/ATM 에만 붙들고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두루넷이 초고속 인터넷 접속을 시작해버린 것이다. 그럼 두루넷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었을까? 애초에 두루넷은 기업을 대상으로 전용선을 팔려고 했지 일반 사용자 대상의 접속 서비스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개인 상대의 접속 서비스는 기업 상대의 전용선 서비스에 비하여 수익구조가 나빴기 때문에 뛰어들기를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통신, 데이콤 이외의 아이네트와 같은 제 3 의 업체가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선례가 없었다면, 두루넷이 사업을 시작 안 했을 것 같다. 왜냐면, 당시 두루넷이 최초에 설립됐을 때, 전용회선 서비스를 역무로 받아서 기간통신사업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실 사업으로서의 가능성이 너무 낮아서 다른 길을 찾았는데, 아이네트가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까, - 내 기억에 1997년에 우리 매출이 80 이나 90 억 되었을 것이다 - 저런 조그만 회사도 매출이 100 억 정도 나오는데, 두루넷도 해볼만하지 않겠니 하면서. (허진호)

아이네트가 두루넷을 접속 시장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두루넷은 한국통신을 초고속 인터넷 접속 시장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두루넷이 가정을 대상으로 한 브로드밴드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한국통신이 DSL 서비스를 시작하는 게 한 1년 이상 늦춰졌을 것이다. 왜냐면, 그 때까지 한국통신은 브로드밴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두루넷이 케이블 서비스를 1998년에 선보이고 나서, 어이쿠야 이거 뭐야 하면서 1년 정도 후에 서비스를 내놓았다.

당시 한국통신은 ISDN, 그리고 그 다음으로 ATM 으로 진화하는 게 사업 전략이었다. 1994년 전후에 나온 당시 유행한, 정부의 정보 고속도로 사업계획을 보면, 총 예산이 20 조였고, 모든 가정마다 ATM 을 까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는 맞는 얘기였다, 왜냐면 당시 ISDN이 중심이었고 그게 진화하면 자연스럽게 ATM 으로 가는 것이었다. IP 기반의 네트워크가 아니고. 정통부도 KT 도 그렇고, 정보화 고속도로는, 즉 광대역은 ATM 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고, 1998년까지도 그랬다. 왜냐면 그 계획 전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두루넷이 케이블 모뎀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한국통신은 그 뒤로도 한 참을 ATM 으로 가고 있었을 거다. 일본이 ISDN 이 너무 잘 돼서 브로드밴드로 넘어가는 게 늦어졌듯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통신사업자들이 DSL 과 케이블 모뎀이 확산되기 전까지 포기를 못했다. 포기할 수 없는 게 거의 10년 동안 연구개발로 들어간 게 몇 조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부에서 포기하자는 얘기를 아무도 못했다. 그 당시 네트워크 일하던 사람들이 다 ATM 공부했다.

96 그 때 공부하는 중에 누군가가 ATM 이 “아따 모르겠구먼”의 줄임 말이라고 해서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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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바뀐다더라 하면서... 그런 데 그게 사라져버렸다. (허진호)

8.5 초기 ISP 에게 컨텐츠의 의미

박현제 박사의 인터뷰와 내 기억을 종합해서 정리할 것

8.6 TIOE 에서 따온 내용 정리할 것들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정보는 인터넷 보급에 힘을 쓴다. 1995년의 "KII 한국 정보 기반"(이름 확인할 것 -- 고양우)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 2년된 "정보화 촉진 ** 령" 을 지속한다. (내용 확인 필요 -- 고양우) KII 는 정부 측의 백본 네트워크를 확장함으로써 결국에는 대중에게 더 많이 더 빠른 접근을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TIOE)

1997년 중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정부는 아파트에 회선을 연결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서 "사이버 ** 인증제도" (이름 확인 필요 -- 고양우) 를 시행하는데 여기서는 건물의 네트워크 용량에 따라 1~3 등급을 부여하였다. 많은 인구가 아파트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이 정책은 많은 사람에게 빨리 브로드밴드 접속을 제공하게 하였다. (아마 김영삼 정부의 정책인 듯 -- 고양우) 1997년 취임 연설에서 김대중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컴퓨터를 잘 쓰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정확한 워딩 확인할 것 -- 고양우) (TIOE)

김대중 정부의 인터넷 관련 정부 정책으로는 1999년의 "사이버 코리아 21" (정확한 명칭 확인 필요 -- 고양우) 와 2000년의 "천만 인터넷 교육" (정확한 명칭 확인 필요 -- 고양우) 이 있다. 앞엣 것은 한국의 전자정부 서비스, 디지털 리터러시, 전자상거래를 더 확장하려는 것이고 뒤엣 것은 주로 주부들에게 인터넷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캠페인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강의를 하는 교육 기관에 보조금을 줘서 교육비를 인하하게도 했다.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인터넷을 쓰게 하려면 가정경제를 쥐고 있는 엄마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2월에 내각에 첫번째 전자메일을 보냈다. (TI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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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터넷 조율

9.1 전사

1990년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인터넷 관련 운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은 SDN 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인터넷이 점차 보급되어가면서 SDN 의 운영 경험도 이곳 저곳으로 퍼져나가고 자연스레 운영자들 사이의 교류가 생겨났다. 박현제 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데이콤, 금성전선, 삼성반도체통신 등과는 연간 3-5000 만원의 프로젝트 비를 지원받고, 직원이 반년~1년씩 카이스트에 파견 나와 일하면서 (네트워크) 관리하는 법을 배워가는 방식으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돌아가서 자기 기관에 돌아가 자기 기관에서 관리 일을 하는 식이었다. 한국통신에서는 직원이 파견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KT 에는 카이스트 졸업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주축으로 나중에 코넷(KORNET )이 만들어졌고, 카이스트 네트워크 정보 센터의97 직원이었던 조혜순 씨가 데이콤에 취직해, 카이스트에 1년 가량 파견 나왔다 돌아간 데이콤의 오익균 씨와 데이콤 인터넷을 만들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련 업계 사람들이 관계를 맺게 되고, 시스템 돌아가는 것도 알게 되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협조관계를 유지해나갔다. (박현제)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SDN 의 운영을 맡고 있던 한국과학기술원의 시스템 구조 연구실(SALAB)은 자연스럽게 인터넷 기술의 중심에 서서 조율을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운영에 대한 조율과정에서 갈등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오히려 위계가 분명했다고 할까? 모든 연결은 SALAB 에서 나갔고, 상당 기간 우리가 돈을 내며 SDN 을 넓히려고 도와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자세로 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주고 있다는 인식을 받으면서 일했다 웬만한 것은 우리가 테스트하고, 공지하는 방식이었으니까 기술적으로도 앞서 있었고. (박현제)

9.2 학술전산망협의회(ANC)

9.2.1 ANC 의 구성

하지만 인터넷이 점점 커져나감에 따라 국내 인터넷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관장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이를 맡을 조직으로서 대학과 연구소를 주축으로 하는 학술전산망협의회(Academic Network Council, 이하 ANC)가 1991년 7월에 구성되었다.98 네트워크 운영을 위해서 운영자들끼리 공식, 비공식적으로 가졌던 회의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박현제) (한국정보법학회, 2012) 1991년 8월 8 일에 정리된 ANC 소개 문서에서는 ANC 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ANC, 1991)

학술 전산망 심의회에는 조정 위원회(ANC Steering Committee)와 SG-INET 등 두 위원회가 있다. 전자는 책임자들의 위원회로서 국내의 3 개 학술 전산망의99 대표들과 필요한 위원들이 참여한다. 후자는 기술적인 조정을 위한 것으로, 각 전산망의 대표들을

97 NIC, network information center98 처음 구성 시기를 놓고는 1988년이라는 자료도 있지만 회의록 등을 보면 1991년 이후 자료가

대부분이다. 이름도 한번 바뀌었는데 1991년의 소개 자료에는 학술전산망심의회라고 하고 있고 1992년 12월 15 일에 작성된 제 11 차 ANC 개최 안내 문서에서도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하지만 1993년 1월 4 일에 작성된 제 12 차 ANC 개최 안내 문서에서는 학술전산망협의회로 표기하고 있고 그 이후의 문서에서도 같은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1992년 말쯤에 이름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99 HANA/SDN 과 교육전산망(KREN, 대개 “교육망”이라 줄여 부름)과 국가과학기술연구망(KREONET, Korea Research Environment Open Network, 대개 “연구망”이라 줄여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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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한 실무자들의 모임이다. 학술 전산망 심의회의 활동 범위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 네이밍 및 어드레싱의 조정100

- 관련 프로젝트들의 조정 - 해외 전산망과의 연결 조정 - CCIRN 의101 한국 대표 - 국내의 인터넷 소사이어티102 활동

그리고 당시 위원회의 명단은 전길남(의장), 김병천(부의장, HANA/SDN), 최양희(부의장, KREN), 변옥환(부의장, KREONet), 박현제(SG-INET 의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초 ANC 산하에 실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서 TG-INET 이라고 있었는데 1991년에는 교육망, 연구망,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충남대학교, 전산원, 데이콤, 한국통신 등의 망 운영 실무진들이 참여하여 재구성하고 이름을 SG-INET 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SG 는 서브 그룹(sub group)의 줄임 말로서 인터넷을 담당하는 INET 외에도 여러 그룹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SG 는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SG-INET 의 운영은 초기에는 박현제가 맡았다가 박태하가 이어갔다. (박태하) SG-INET 아래로 분과 위원회를 두었는데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에 붙이는 이름을 담당하는) 네이밍, (네트워크에서 패킷의 전달 문제를 다루는) 라우팅, (전자 메일 등 인터넷 활용에서의 한글 문제를 다루는) 한글, (보안 문제를 다루는) 보안 분과 위원회가 있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9.2.2 ANC 의 활동

네트워크의 조율

여러 네트워크 사이의 통신의 흐름을 서로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하여 인터넷 연동(IX, internet exchange)이 필요한데 한국에서 최초의 IX 는 KIX 라고 불리는 것이었으며 나중에 한국전산원으로 역할을 넘길 때까지 KIX 의 구성을 제안하고 운영하는 것을 ANC 가 맡았다. 한국에서의 IX 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이 글의 7.4.1 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 외에도 ANC 에서 다룬 네트워크 조율 이슈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 외에도 네트워크 운영상 필요한 조율은 ANC 에서 이뤄지기도 했겠지만 운영상의 문제는 대개 실무적인 문제이므로 이들 문제는 ANC 의 주요 논의 대상에서 점차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던

100 어드레싱은 IP 주소, 네이밍은 도메인 이름 체계와 X.500 의 이름 체계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도메인 이름 체계는 일반 사용자들도 전자 메일 주소나 웹 사이트 주소를 표시하게 위해서 많이 쓰니까 익숙하지만 X.500 은 그렇지 않다. X.500 은 디렉토리(즉, 사람이나 조직의 이름, 전자 메일 주소 등을 찾아볼 수 있는 서비스)로서 ITU 표준에서 정의한 이름 체계인데 TCP/IP 네트워크에서 이를 접근할 수 있는 기술로 개발된 LDAP(lightweight directory access protocol) 덕분에 일부 필요한 곳에서 (예를 들어, 회사의 전사 주소록 기능을 이것으로 구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활용되고 있다.101 CCIRN(Coordinating Committee for Intercontinental Research Networking)은 1980년대 당시 연구 네트워크 운영에 관련된 이슈를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으로서 특히, 대륙간 연결(즉, 처음에는 미국과 유럽의 연결)이 중요한 과제였다. 첫 모임은 1988년에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과 제네바 대학의 공동 주최로 열렸다. (Martin, 2012) 인터넷의 확장에 따라 당연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의 연결도 다루게 된다. CCIRN 에서는 대륙 별로 최대 7 명까지 대표를 파견하도록 하였는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대표 7 명을 선정하는 것이 쉽지 않아 이를 담당하는 별개의 위원회를 두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APNG(아시아 태평양 네트워킹 그룹, Asia Pacific Networking Group)로 불리는 APCCIRN 의 시작이다. (시게끼)102 인터넷 관련 표준, 교육, 정책 등을 주도하기 위해 1992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130 개 이상의 기관과 5 만 5천명을 넘는 개인 회원을 둔 기구가 되었다. 인터넷의 표준과 관련하여서는 IETF, IAB를 비롯한 인터넷 표준 기구를 지원하고 정책의 측면에서는 인터넷의 핵심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부, 국제기구, 민간기구 등과 협력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가버넌스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기구이다. (Int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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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보인다.

도메인 이름 공간에 대한 논의

한국 국가코드 도메인인 .kr 이 1986년에 할당되고 2단계가 1987년에 정의된 이후 인터넷 사용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점차 도메인 이름 공간의 유지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1991년 7월 당시 .kr 이하의 2단계 도메인으로는 학교/학술 단체를 위한 ac.kr, 연구 기관을 위한 re.kr, 기업 연구소를 위한 co.kr, 그리고 정부 기구를 위한 go.kr 이 있었다. (박태하, 1991) 주목할 점은 co.kr 이 그냥 기업이 아니라 “기업 연구소”(기록이 영어로 남아 있는데 “company research institute”로 표기하고 있다)로 되어 있는 점이다. 당시로서는 인터넷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였기 때문에 당연히 기업에서도 연구소에서 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업 연구소도 연구소이므로 re.kr 은 왜 안 되는가? 또는 기업의 연구소가 아닌 곳에서 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고 이런 것도 아마 ANC 에서 논의되었을 것이다.

앞서 ANC 의 구성에서도 언급되었듯이 ANC 에는 세 네트워크 – HANA/SDN, 교육망, 연구망 – 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ac.kr 은 주로 교육망에 속한 곳들이 그리고 re.kr 이나 go.kr 은 연구망에 속한 곳들이 사용하였으므로 1991년 10월에는 이들의 운영을 교육망과 연구망의 망 운영 센터로103 위임하고 HANA/SDN 은 .kr 과 co.kr 만 맡는 제안이 제출되었다. 물론 2단계 도메인 아래로 3단계 도메인을 등록하는 경우 (예를 들어, ac.kr 아래로 카이스트가 kaist.ac.kr 을 등록하였다면) 그 운영을 해당 기관 (앞의 예에서, 카이스트) 에 위임하는 권한까지 각 네트워크의 망 운영 센터가 갖도록 하였다. (SG-INET, 1991) (시행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그렇게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1992년에 이르러서는 2단계 도메인으로 비영리법인이나 민간단체를 위한 or.kr 과 네트워크 관리를 담당하는 곳을 위한 nm.kr 이104 추가되었다. 또한 각 2단계 도메인에 등록 가능한 곳의 범위를 좀 더 명확히 하였는데 특히, co.kr 은 “기업/부설연구소”로 함으로써 부설 연구소가 아니라 기업 자체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태하/최우형, 1992)이렇게 도메인 이름 공간을 정리하는 것 외에도 등록할 수 있는 이름의 범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기관에서 도메인 이름을 등록 신청하면서 그 기관의 영문 표기와 다른 것을 요청하는 경우 이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는 한글로 된 기관 이름을 영문으로 변경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충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도 ANC 가 기준을 정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었다.

1994년에 이르러 도메인 이름의 등록 창구는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으로 일원화 되는데 이러한 결정도 ANC 의 몫이었다.

네트워크 보안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실제 논의는 ANC 산하의 SG-INET 에 속한 보안 분과 위원회에서105 다루고 ANC 에서는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회의록을 보면 보안 문제를 요즘처럼 반사회적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92년 12월 17 일에 개최된 제 11 차 ANC 회의의 회의록에서는 “보안 침해 행위자의 형사 고발 조치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교로부터 침투한 경우 해당 학교의 교수를 통해 먼저 경고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ANC, 1992)

표준화 활동

국제 동향 특히 표준의 흐름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각 네트워크와 주요 기관에서 IETF 와 같은 국제 표준화 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한편 한글 전자메일과 관련하여 IETF 를 통한 표준화 작업이 이뤄지도록 SG-INET 의 한글 분과 위원회를 지원하였다.103 NOC, network operation center104 nm.kr 은 1997년 제 4 차 NIC-Committee (nic-committee 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겠다) 회의의 결정에 따라 ne.kr 로 대체되고 2000년 2월 이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NIC-Committee, 1997)105 Security working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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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SG-INET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ANC 아래로 SG-INET 이 외의 실무 그룹은 생겨나지 않았으며 SG-INET 자체도 참가자가 거의 늘지 않는 상태로 유지되었다. 급기야 1993년 2월 25 일에 개최된 제 12 차 ANC 회의록에는 “SG-INET 활동의 참여가 크게 부족하다”는 얘기가 등장하고 같은 해 4월 15 일의 제 13 차 ANC 회의에서는 참여를 늘이기 위한 여러 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인터넷이 상용화하여 인터넷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가 늘어남에 따라 SG-INET 은 오히려 역할을 잃고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용화 된 이후에는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므로 기술 교류를 꺼리게 되었고 기술 정보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SG-INET 과 같은 곳에 와서 자기 회사의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서는 점차 장비가 고도화 되면서 네트워크 운영에서 조율이 필요했던 부분이 점차 단순해지고 자동화 되면서 굳이 만나서 협의하고 공유할 필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박태하)

하지만,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 된 뒤에도 계속 더 발전된 인터넷 기술을 만들어내고 도입하고 확산하기 위해서 그리고 각 기업의 이익은 물론이고 한국 인터넷 기업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기술을 공유하고 운영을 조율하는 노력은 계속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9.2.4 ANC 에서 KNC 로

내용보다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는 ANC처럼 필요에 의하여 관련된 사람들끼리 모인 모임은 유지되기도 어렵고 역할을 하기도 어렵다. 지금도 그렇고 ANC 가 막 생겨나던 1990년대 초반도 그랬다.

ANC 에서도 이런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공식기구로 만들기 위한 논의는 비교적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992년에 개최된 ANC 의 회의록에 따르면 (1) 정부의 전산망 조정위원회 산하에 있는 전산원의 산하 단체로 등록하는 방안과 (2) 교육연구망의 산하 소위원회가 되는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후자의 방안은 기술적인 측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적절한 반면 점차 인터넷이 상업화하여 교육연구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는 경우 혼동의 소지가 있으므로 전자가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양쪽 모두를 추진해야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ANC, 1992) (ANC, 1992)

그러던 중 1994년이 되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생겨나고 각종 국가기간전산망까지 포함하는 조정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ANC 를 전산원 산하로 두고 한국전산망협의회(KNC, Korea Networking Council)로 개편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1994년 4월 14 일에 개최된 제 17 차 ANC 회의에서는 ANC 를 전산원 산하의 등록 기관으로 만드는 것을 의결함과 동시에 “전산망 간의 조율과 망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기구로서 KNC 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ANC, 1994) KNC 는 학술망은 물론이고 인터넷 접속 사업자, PC 통신, 국가기간망을 포괄하여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KNC 운영 세칙(안)에 따르면 KNC 의 목적은 “국내 전산망 조직간의 운영 및 관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국내 인터넷 관련 범국가적인 이용활성화와 전산망간 상호 연동 및 조정 역할을 수행하여 전산망의 기술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송관호, 1994) 그리고 KNC 의 사무국은 KRNIC 사무국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하였다. (ANC, 1994)

너무 친절한 양우씨: 시스템 설계의 근본 원리 – 작동기제와 정책의 분리

왜 ANC/KNC/NNC 와 KRNIC 은 분리되어 있는가? 단순한 역할의 분리가 아니라 좁게는 전산 시스템 넓게는 임의의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원리가 숨어 있다.

원칙을 세우는 문제와 기제를 구현하는 문제는 다르다. 기제를 너무 고려하면 원칙이 훼손된다. 따라서, 기제를 넘어서서 원칙을 세우고 이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구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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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는 직원들만 들어가게 하자”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카드 키를 직원들에게만 나눠준다”는 기제를 선택한다. 물론, 카드 키를 직원 아닌 사람에게 줘버릴 수 있으므로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기제가 원칙을 100% 실현할 수 없다고 원칙을 기제에 맞춰서는 안된다.

내 생각에는 근대국가의 3권 분립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http://en.m.wikipedia.org/wiki/Separation_of_mechanism_and_policy

9.3 한국망정보센터(KRNIC)

앞의 ANC 에 대한 얘기에서 다루었듯이 네트워크에 대한 정책과 조정의 역할은 ANC 가 맡아서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정책을 실제로 적용하고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주소의 할당, 도메인 이름의 등록,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배포 등 실무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서 전담하게 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러한 필요를 1992년 당시 문서를 통해 확인해보자.

세계적으로 인터넷의 규모 및 사용자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인터넷은 사용자간의 통신 수단 및 중요한 정보의 원천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터넷은 사용자를 포함한 다양한 정보 자원이 전체 네트워크에 산재되어 있는 정보 사회의 기반 구조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망정보센터(NIC)이다. 이들 망정보센터들은 네트워크 단위뿐 아니라 국가별, 대륙별로 연결되어 광범위한 정보의 제공 및 조정을 담당하는 추세에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정규적으로 네트워크 정보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을 외국의 NIC 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네트워크 운영에 관련된 부분의 국내 네트워크 간의 조정 및 Internet NIC 로의106 접촉은 ANC 및 SG-INET 에서 하고 있으나 이러한 작업의 수행을 전담하는 인원의 부재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예: IP 주소 할당, 라우팅 등), 이러한 작업을 중립 기관인 KNIC 를107 중심으로 하여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KNIC 의 기능이 활성화 되면 북미나 유럽과 같은 수준의 아시아 지역 NIC 를 구축하는데 주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박태하, 1992)

그리고 KNIC 의 기능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ANC 산하에 두는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

106 처음 NIC 의 역할은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있던 SRI 가 맡고 있었으나 1990년 GSI(Government Systems, Inc)가 그 역할을 이어 받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DDN-NIC(Defense Data Network Network Information Center)라고 불렀다. 1993년에 NSF 가 새로운 NIC 체계를 만들면서 InterNIC 으로 이름이 바뀐다. 따라서, 1992년에는 인터넷 NIC 또는 DDN-NIC 등의 용어가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07 한국 네트워크 정보 센터를 KNIC 으로 할까 KRNIC 으로 할까 고민이 있었는데 이 일을 맡았던 박태하의 설명에 의하면 "나중에 쿠웨이트가 NIC 을 만들 수 있으니 KNIC 은 안되겠다"고 하는 전길남 박사의 의견에 따라 KRNIC 이 되었다고 한다. (박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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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KNIC 의 정의 (박태하, 1992)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KRNIC 은 처음에는 (즉, 1993년 4월부터)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운영하였으나 점차 이를 전담하여 맡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길 준비를 하였다. 1993년 10월 7 일에 작성된 “KRNIC 운영 계획”에서는 3단계로 발전 시켜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선 1단계로서는 ANC 의장의 직속으로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운영하고 2단계로는 관련 기관에서 프로젝트 형태로 지원을 받고 안정적인 운영과 독립조직으로서의 운영에 대비하여 전담 인력을 둔다. 그리고 그 다음의 3단계에서는 독자적인 재원과 전담인력으로 구성된 독립조직으로서의 KRNIC 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박태하, 1993) (2단계로 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3단계로의 이행은 예상 외로 빨리 이뤄졌는데 1994년 1월 14 일에 개최된 제 16 차 ANC 회의에서 KRNIC 을 전산원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의결하였으며 전산원에서의 이전 후 KRNIC 서비스 운영은 1994년 9월 15 일부터 시작되었다. (ANC, 1994)

하지만 KRNIC 으로 이전된 것은 운영에 대한 사항이지 중요한 사안의 결정이나 표준에 대한 것은 ANC 와 SG-INET 이 맡고 KRNIC 의 운영 실무만을 전산원이 맡는 구조였다. 1994년에 작성된 “KRNIC 운영 방안 (1994-1996) (DRAFT)” 문서에서는 “단기적으로 1995년 말까지 운영 부분은 전산원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도록” 하는 한편 미래를 대비하여 “KRNIC 의 운영에 대한 관련 기관에 의한 공동 결정 기구”와 “관련 그룹의 기술적인 지원, 표준화문서의 발간 등을 위한 조직의 정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송관호/박태하, 1994)

너무 친절한 양우씨: 네트워크 정보 센터 NIC 의 탄생

(이 장은 위키백과 중 internic 항목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int) )

앞서 얘기한 것 처럼 아르파넷의 두번째 노드는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에 있던 더글러스 엥겔바트의 연구실에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최초의 네트워크 정보 센터(network information center, NIC)의 역할을 했다.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세상에 NIC 가 하나뿐이었으므로 NIC 라고 하면 SRI 가 맡고 있는 그 NIC 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였다. 하지만 나중에 여기 저기에 NIC 가 생기면서 NIC 는 일반 명사로 인터넷 정보를 배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

실제 인터넷 주소와 포트 번호를 배분하는 역할은 존 포스텔이 맡고 있었으며 그 역할을 IANA(The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존 포스텔이 혼자 다 했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관리자의 역할을 했다. (1998년 급작스럽게 죽을 때까지 그는 IANA 의 관리자인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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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C 편집자의108 역할을 계속하였다.) IANA 의 배분 결과를 인터넷 전체에 배포하는 역할은 NIC 가 맡았다.

예컨대, 새로운 컴퓨터를 인터넷에 연결하고 싶으면 컴퓨터의 관리자가 NIC 관리자의 메일 주소([email protected])로 메일을 보내서 요청을 하게 되고 NIC 관리자는 IP 주소를 알려준다. 또한, 새로 추가된 컴퓨터의 이름과 IP 주소를 HOSTS.TXT 파일에 추가하고 아르파넷의 모든 네트워크 관리자들에게 보내준다. 이 파일 덕분에 상대방 컴퓨터의 주소를 몰라도 그 이름만으로 접속할 수 있었다. 109

인터넷에 연결된 네트워크가 늘어나고 국제화됨에 따라 한 곳에서 집중 관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IAB(Internet Activities Board)는110 1990년에 이 역할의 분산을 제안하였고 미국방정보국(Defense Information Systems Agency, DISA)는 SRI 맡고 있던 DDN-NIC 의 관리를 GSI(Government Systems, Inc)에 맡겼고 GSI 는 작은 사기업인 네트워크 솔루션즈사에 하청을 주었다.111

미국 국립 과학 재단(NSF)은 주소 할당을 관리할 기구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인터닉(이하 InterNIC)이다. 미국 국립 과학 재단은 서로 다른 세 곳과 InterNIC 의 운영을 위한 계약을 맺는데 네트워크 솔루션즈사는 등록 서비스, AT&T 는 디렉토리와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제너럴 어타믹스사(General Atomics)는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9.4 KNC 그리고 그 이후

1994년 11월에 작성된 한국망정보센타(KRNIC) 운영규칙(안)을 보면 “본 센터의 예산심의 등 중요사항은 한국전산망협의회(KNC)에서 결정” 하도록 되어 있어서 KNC 로 바뀐 이후에도 정책/표준 결정 및 감독 기구로서의 KNC 와 이에 기반한 운영 기구로서의 KRNIC 의 역할 분담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관호, 1994)

그 무렵 KNC 의 중요한 결정 사항은 주로 IP 주소 블록이나 도메인 이름의 할당 방식 등 이었다. 예를 들어, go.kr 은 중앙정부기관만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 1994년 11월 24 일에 개최된 제 20 차 KNC 회의에서 이뤄진 것이다. (최문실, 1994)

21 차 회의에서는 CERT-Korea 구성을 논의. (각 망에서 1 명이상을 참여시켜 advisory group 을 만들고 여기서 한국 인터넷의 보안을 논의하고 KNC 아래에 두되 SG-INET 에 보고하는 구조.) 실제 활동으로 이어졌나?108 RFC 는 인터넷의 표준을 담은 문서를 말하며 RFC 편집자(RFC Editor)는 제출된 표준 문서 초안을 검토하여 표준 문서로서 문제가 없는 지 확인하여 수정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말한다. 표준 문서는 표현에 애매한 부분도 없어야 하고 기존의 표준과 충돌을 일으켜서도 안되므로 이런 점을 꼼꼼히 따져주는 역할을 한다.109 점차 컴퓨터 수가 너무 많아져서 이런 식으로는 관리할 수 없게 되어 이 과정을 자동화한 것이 요즘 널리 사용하는 도메인 이름 체계(domain name system, DNS)다. 하지만, 여전히 HOSTS.TXT 파일도 쓸 수 있다.110 인터넷 기술과 엔지니어링의 관리 감독을 담당하는 위원회. 이름이 계속 바뀌었는데 1979년 처음 만들어질 때는 ICCB(Internet Configuration Control Board), 1984년에는 IAB(Internet Advisory Board), 1986년에는 또 다른 IAB(Internet Activities Board) 그리고 1992년에는 또 다른 IAM(Internet Architecture Board)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터넷 기술에 관한 한 제일 유명한 사람들의 모임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111 그 이후로 여전히 이 회사 (네트워크 솔루션즈사) 는 주요 최상위 도메인(특히, .com)에서의 등록을 독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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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차 회의에서 발표된 SG-INET 회의록(SG-INET-95-164)에 따르면 go.kr 에 대하여는 총무처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역 도메인(지리 도메인?)도 second level 로 추가한다. Personal user name 은 단기적으로 네트워크 사업자의 하부에 등록하도록 (특정 네트워크를 이용하니까) 하고 장기적으로는 지역 도메인 아래에 등록하도록 한다. CERT-KR 등의 얘기가 있었음.

1995년 12월 18 일의 25 차 회의록을 보면 CERT-KR 이 PGP Key server 운영 활성화, ISP 대상 운영에서 End user 대상까지 확대, Security 사고 25건 (국내 13건, 국외 12건) 접수 등을 했다고 나옴. 활동을 하긴 한 듯. CERT-KR 의 외연을 확대하여 IR-Forum (incident response) 구성. 26차 회의록을 보면 FIRST(Forum of Incident Response Security Team) 가입 추진 (실제 가입함?).

25 차 회의록에 지역도메인은 총무처의 의견을 받아 이를 수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얘기가 나옴.

26 차 회의에서는 정보통신부 (정보망과)에서 제출한 안건을 다루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o 한국 전산망협의회 법인화 필요성 여부

o 인터넷 관련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개발 사업지원

o NC 에 대한 정책방향 (JAVA, 인트라네트, Network-Centric Computing 포함)

o 국내 전국 고속접속점 확충 및 회선 고속화

o 해외회선 확충 및 회선 고속화

o 정부의 전산망 번호 및 접속점 계획

o 중소 ISP 에 대한 지원 방안

o 인터넷 요금구조 연구

o 인터넷 관련 연구지원

24 차 회의에서 결의된 대로 지역 도메인을 시행하기로 하여 1996년 3월 28 일에 .kr 아래에 다음과 같은 2단계 지역 도메인을 만들었음. seoul pusan taegu inchon kwangju taejon kyonggi kangwon chungbuk chungnam kyongnam kyongbuk chonbuk chonnam cheju (나중에???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이 바뀌면서 현재와 같이 바뀌게 됨. 예, pusan -> busan)

1996년 4월 19 일 27 차 회의에서 KNC 법인화 추진 위원회 결성을 승인. (법인화 목표 시기는 6월)

KIX 의 구성과 운영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음.

CERT-KR 은 NETSEC-Korea ‘96 에서 BoF 를 진행함.

이전 1991 1993 1994 1997 1998정책/표준

없음 ANC ANC KNC NIC-Committee NNC운영/정보 제공 KRNIC인터넷 산업 없음 KNC KRIA ?계기 ISP 의 성장 인터넷 산업의 가시화 ICANN 의 등장

1994: ANC -> K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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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ANC 는 1994년에 들어서 한국전산망협의회(Korea Newtork Council, KNC)로, 1998년에 인터넷주소위원회(Number and Name Committee, NNC)로 변화되면서, 인터넷 정책을 수립하고 제안하는 민간 기구로서의 활동이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1995?: www-kr

WWW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보급하는 연구자들의 모임인 www-kr 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하여 국내에 WWW 의 보급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참여의 일환으로, 1995년에 개최된 인터넷 관련 권위있는 국제 학술대회인 INET 의 자료집이 국내 기술진에 의해 세계 최초로 WWW 기술을 이용하여 구축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1998: KNC -> NNC

그 후 ANC 는 1994년에 들어서 한국전산망협의회(Korea Newtork Council, KNC)로, 1998년에 인터넷주소위원회(Number and Name Committee, NNC)로 변화되면서, 인터넷 정책을 수립하고 제안하는 민간 기구로서의 활동이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2004년에 시행된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에 따라 정부에서 기획하는 인터넷 주소 자원 관련 정책을 심의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인터넷주소심의위원회’가 정통부 산하에 구성되어,인터넷 조율 기능이 민간 기구에서 정부 주도 기구로 이전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1999.6: KRNIC 독립법인

1999년 6월에 KRNIC 이라는 독립된 법인이 만들어지면서 국내 망 정보 관리 기능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에 근거하여 2004년에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설립되면서, KRNIC 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산하 국내 인터넷 주소 자원 관리 담당 부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국정보법학회, 2012)

2004: 인터넷주소원에 관한 법률 / 한국인터넷진흥원

9.4.1 KNC

ANC 에서 KNC 로 바뀐 게 1994년 10월 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인터넷은 academic 한 것 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인터넷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KNC 로 확대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학술망의 책임자 모임이라기보다 네트워크 운영 기관들의 협의체로 변해갔다.

92년부터 Hana/SDN 망의 관리를 KAIST 전자계산소에서 KT 연구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전박사님께서는 KT 가 관리하면 통신비에 대한 부담없이 비교적 네트워크 용량을 확대할 수 있고, KT 가 국내에서 가장 큰 통신업체니까 인터넷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Hana/SDN 의 운영은 KAIST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이하게도 정부의 펀드가 아닌 네트워크 연결 기관들의 회비로 운영이 되었다. 당시 약 50 여개로 기억되는 기관들이 회비 또는 통신비를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었으나, 특히 고객의 국제 통신비를 감당하기에는 안정적인 재원 또는 네트워크 용량의 확보가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DNS 에서는 한때 교육망과 연구망에서 각각 ac.kr 및 re.kr 에 대한 관리 권한을 가져가겠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다. 이런 논의는 전체 네트워크 관리 관점에서 접근해야 되는데, co.kr, ac.kr, re.kr 이 각각 다른 기관에 의해 행정적, 기술적으로 나뉘어 관리되면, 결국 KRNIC 업무 및 DNS 운영이 파편화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결국 기술적인 이슈를 포함한 권한에 대한 결정을 조정하는 기구가 필요했고, 각 네트워크의 책임자가 참여하는 ANC 및 KNC 가 이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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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라는 게 원래 여러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동작하는 것이라서, 각 연결 기관의 입장을 고려한 공정한 정책 및 조정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누가 관리할 것인지, 비용을 누가 댈 것인지 조율하는 게 중요했다. 전박사님은 네트워크 당사자들간에 조정이 안되면, 결국 정부가 관리권한을 가져갈 것이라며 우려하셨다. 전길남 박사님은 인터넷 거버넌스를 초기부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뭔가가 만들어지면 정부에서 자기 산하기구로 만들고 규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터넷 발전에 맞지 않는 방향이므로, 초기부터 체계적인 거버넌스 조직의 구성에 고려를 많이 하셨다. [박태하 – 인터뷰]

9.4.2 정부의 개입

한국 및 일본의 주도로 매년 열리던 인터넷 관련 컨퍼런스인 JWCC 에서 NIC 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한국과 일본에 NIC 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 92년이다. 92년 10월, KNIC 이란 이름으로 사전 테스트 서비스가 실시되었고, 93년 4월 KRNIC 으로 명칭을 확정해 공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KRNIC 의 사무국은 KAIST 내에 위치했으며, 1994년 1년간 DACOM의 프로젝트 펀드 지원을 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다.

93년, 정통부에서 KRNIC 에 관한 공문을 받았다. 당시 정통부의 의문은 "인터넷이라는 게 있고,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이걸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전박사님이 한다"고 대답하면, "무슨 자격으로 KAIST 가 그 역할을 하느냐"고 되묻고, "미국에서도 그렇게 한다. 인터넷은 연구자 및 관련 커뮤니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형식이고, 전세계적으로는 IANA 에 책임자 이름이 등록된다"라고 답하는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 나서 정통부에서 KRNIC 업무를 KAIST에서 해주십사 부탁한다는 요지의 공문이 왔다. 이미 KRNIC 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정통부에서는 정부기관이 명확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구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KRNIC 의 명함이 아직 있다 ^^)

이후 94년 9월, KRNIC 사무국을 KAIST 에서 한국전산원 (NCA)으로 옮기기로 하고, 2 명의 전산원 직원이 KAIST 로 파견나와 8월 한 달간 KRNIC 업무를 인계받았다. NIC 이 정책적으로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가 DNS 를 돌리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IP 주소가 그 무렵에 굉장히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호스트의 개수도 굉장히 많아졌다. 원래는 NIC 에서 이것들을 모두 트랙했다.

NIC 의 역할은 등록(registration), 데이터베이스화(database service), 통계(information service) 세가지로, 실제로는 미국의 Jon Postel 이 했던 것처럼 1, 2 명이 operation 을 맡는 형태로 운영된다. 등록업무는 IP 주소를 할당하는 것이고,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은 그 정보를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통계는 트래픽, 호스트 개수에 대한 통계를 보유하는 것이다.

호스트가 많아지다보니 DNS 에 할당할 규칙이 필요했다. NIC 에서 규칙을 문서로 만들고, SG-INET 에서 이걸 논의하고, KNC 에서 이를 허가하는 수순이었다. 94년에 광운대와 강원대가 서로 KWU 를 쓰겠다고 의견 충돌이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대학교 이름은 full name 으로 쓰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ANC-92-037 참고)

조금 지나자 sex.co.kr 같은 도메인네임을 신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과도한 규제 같지만, 그때 당시에는 인터넷이 국가를 위해 좋은 망이 되어야 하는데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악성코드가 유포되고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도메인 이름이 "망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면 안된다"는 식의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kr 도메인이름등록 세부원칙) 당시는 아직 RFC-KR 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공식 문서로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규칙이 바뀌는 과정은 항상 SG-INET 에서 논의하고 KNC에서 허가하는 방식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외부 이용자의 항의나 문제는 거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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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었다.

호스트 개수가 늘어나는 추이를 DB 화한 파일도 전산원으로 이관할 때 전달했다. 이 추이를 자동으로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가 스크립트로 만들기도 했다. NIC 기능이 전산원으로 이감할 때, 전산부서(김원 현 KISA 인터넷진흥본부장이 당시 전산부장)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과장급 실무자와 나, 최우형 (후에 조민경)이 이전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런 파일은 너무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문서라서 지우거나 새로운 포맷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다. [박태하-인터뷰]

9.5 RFC-KR

1998년 10월, 국내 인터넷 관련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국내 인터넷 관련 정보들의 오류를 최소화하고 합의를 추구할 목적으로 RFC-KR 결성. IETF RFC 관리 방법과 유사.

2003년까지 56 개의 문서 발행(rfc-kr.nic.or.kr)

도메인 네임, 2단계 도메인, IPv6, 공공도메인, 한글 도메인 등의 표준 제정

10 정리

10.1 초기의 도전 정신은 어디로 갔나?

너무 친절한 양우씨: 박현제 박사의 키워드: 글로벌라이제이션/추진력/휴먼 네트워크에 대하여

우리의 인터넷 개발에 있어서 중요했던 게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자꾸 말로 주장하지 않고 그냥 시도해버리는 추진력, 그리고 모든 것을 개방했던 것 등이 지금도 유효한 철학이다. 이 점이 인터넷이 가진 힘이기도 하고.

컴퓨터 네트웍은 곧 휴먼 네트웍이란 말은 말 그대로 사실이다. 당시에는 노드끼리 서로 전화를 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MCVAX 나 릭 애덤스가 매니저로 있던 Seismo 등이 컴퓨터 네트웍이자 휴먼 네트웍이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ACCOM 프로젝트 구성 때의 Torben 이 보인 태도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은 그저 일본 옆에 있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97년, 초고속 인터넷 기술제휴를 위해 미국의 @Home 사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했다. 한국과 기술제휴를 "하겠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분위기였고, 일본 하고 나서 "생각해보겠다" 정도.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기술력 수준에 대해서 견주어 볼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일본 보다 먼저 배운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AsiaNet 역시 외국(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거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PACCOM 하면서 일본 정도만 신경쓰는 정도. 그래서 PACCOM 비용도 우리가 모두 지불해야 했고. [박현제 – 인터뷰]

10.2 한국은 인터넷 후진국이다

너무 친절한 양우씨: 한국은 인터넷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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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까지 한국에서 버티다가 미국으로 왔다. 내가 경험한 한국의 통신업계와 정책당국은 통신마피아라고 불릴 정도로 의사결정이 너무 위계적이었다. 정부의 정책자문회의같은데 가면 국가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이익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무엇이 정통부와 KT 등 통신사들에 이익을 가져다 주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느꼈다. 한국에서 계속 양심을 지키며 인터넷 인프라분야 전문가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생각해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인 91년에 결심을 하고 인터넷 인프라분야 일을 시작해서 2006년에 도피를 한 셈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응용이 어떻게 다른지 전기에 비유해서 설명해보겠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전기나 당연히 늘 공급되고 요금만 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체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국가단위의 전력생산, 송전, 배전과 관련 고도의 전문적 업무들이 빈틈없이 돌아가야 한다. 특정한 경우에는 사용자들도 이 인프라에 대해서 인지하고 잠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작년의 전국규모 순환정전, 갑작스런 전기요금 인상, 발전소, 변전소, 송전탑, 폐기물처리장 등 기반시설의 설치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거나 사용자로서 접속하는데 인터넷 인프라와 관련된 일들은 대개 전기 인프라가 그러하듯 관심 밖의 일이다.

전기 인프라에 관해서는 주기적으로 갈등도 표출되고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일을 해온 당사자들이 존재하지만 인터넷 인프라에 그에 해당하는 인력풀은 매우 제한적이며 담당주무부처와 대형통신사의 입장에 편향되게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사실 인터넷은 통신사와 아무런 관계없이 만들어진 영역이고 전통적으로 전화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통신사가 이후에 흡수한 영역이다.

빠른 기술적 변화가 일어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며 따라가기도 힘든 분야에 기술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의 주요정책결정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되는 한국적인 경향을 생각하면 이 분야가 얼마나 심각하게 방치되고 있는지 짐작가능하다. .

예를 들어 2003년, 1.25 대란(http://en.wikipedia.org/wiki/SQL_Slammer) 당시 전세계에서 한 전체 국가 단위로 인터넷이 완벽하게 마비된 곳은 한국밖에 없다. 정부차원의 대책위가 있었는데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 나고 말았다. 2004년 말까지 참여연대의 피해자 배상 소송도 있었고, 나는 자원봉사로 이 소송의 기술자문을 맡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재판변론과정에서 주요논점을 어떻게 가져가야하는지에 대한 법률적 의미이해가 부족했고 반면 상태방은 일방적 정보우위 속에 업계 2 위 로펌인 태평양을 통해 많은 자원을 투자해 소송에서 이기지 못했다 . 1 심 재판부의 판단은 당시 상황은 디도스 웜에 의한 불가항력 때문이라 ISP 가 사전에 어떤 추가 장치를 취했어도 같은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기에 사용자에게 아무런 배상책임이 없다는 결과였다..

국가단위의 전면적 장애가 있었다는 3국에선 찾아보기 힘튼 최악의 상황이 한국에서만 있었던 최악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적절한 전문인력이 없고 운영을 잘 못한 것 때문이었다. K 등 통신사가 이런 일로 배상책임을 지게되면 앞으로는 사전에 이런 문제를 막을 수 있도록 적절한 투자를 하는데 경종을 울리게 될 것이라 믿고 참여했는데, 결국 무의미하게 끝나고 말았다. 작년 연말에 일어난 선관위 디도스 테러사건도 큰 맥락에서는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한국에서 망중립성 문제가 3국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소비자 후생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 기초하고 있다.

[최우형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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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추가 검토가 필요한 자료들

인터뷰 이진광 -- 조선 닷컴 (자료 있음) 김창곤 -- 정통부 차관 신명기 -- 에트리 오익균 이수연 이철수 이해진 정성권 (녹음 상태 나쁨) 허문행

회의록 SG-INET 회의록 KNC NIC committee

전길남 아시아 인터넷 원고 (특히, 05a, 06) 문화/해커

Early Computing’s Long, Strange Trip Do we owe it all to the hippies? We ouw it all to the hippes 페이스북 구글 애플을 키운 건 대항문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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