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충북지역의 고려분묘 조사 현황 Ⅲ. 충북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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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 정 * Ⅰ. 머리말 Ⅱ. 충북지역의 고려분묘 조사 현황 1. 고려분묘 조사 현황 2. 고려분묘 출토 부장품 현황 Ⅲ.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1.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 유적과 부장품 현황 2.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Ⅳ.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과 정치적 동향 Ⅴ. 맺음말 *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조사3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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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수 정*

    Ⅰ. 머리말

    Ⅱ. 충북지역의 고려분묘 조사 현황 1. 고려분묘 조사 현황

    2. 고려분묘 출토 부장품 현황

    Ⅲ.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1.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 유적과 부장품 현황 2.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Ⅳ.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과 정치적 동향

    Ⅴ. 맺음말

    *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조사3팀 연구원

  • ‖ 국문요약 ‖

    이 글의 목적은 그동안 충북지역에서 조사된 고려분묘 현황을 파악하고,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

    양상을 통한 피장자와 분묘 조영집단의 정치적인 동향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충북

    지역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석곽묘와 토광묘의 발굴 성과를 모아 부장품의 현황을 파악하였다. 10

    세기 전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로 본 고려 전기에는 초기청자인 해무리굽청자완과 청자접시, 도기

    편병이 부장된다. 이같은 공반 유물은 충주와 단양 및 보은 등의 석곽묘에서 주로 확인되며, 청주

    ⋅음성 등의 분묘에서는 소량 출토된다. 분묘 조영과 부장양상은 지역마다 계통이 서로 다른 분묘 조영집단의 존재를 반영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문헌자료를 근거로 분묘가 조사된 지역에는 당시 유

    력한 토착세력이 향촌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고려 개국을 전후한 시기에 이

    들이 태조 왕건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었던 정치적 향방과 관련하여 분묘 부장양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주제어 : 고려 전기 분묘, 충북지역, 석곽묘, 토광묘, 부장양상, 해무리굽청자완, 토착세력, 호족, 충주

    유씨, 공직, 청주김씨

  • Ⅰ. 머리말

    충북지역은 예로부터 교통⋅군사⋅정치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삼국시대부터 끊임없는 각축장이었다.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 후 충주와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지배의 거점인 소경이 설

    치되었다. 충주는 루암리⋅하구암리유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진출에 따른 석실묘 및 석곽묘 전통이 잘 남아있다. 그러나 청주의 경우 백제세력이 오랜 기간 잔존하

    여 충북지역 중 신라에 의해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신봉동 백제고분군으로

    대표되는 토광묘 전통이 다른 지역보다 두드러져 석곽묘는 용담동유적 등 통일신라시대 이후

    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된다.1)

    또한 충주와 청주는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호서지방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연이은 대규모 구제발굴을 통해 삼국시대의 다양한 고분은 물론이거니와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분묘군의 조사성과가 축적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고려시대 분묘 및 부장품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두 지역은 고려분묘 연구에 기준이 되는 지역으로 널리 인식되

    기에 이르렀다.

    최근까지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분묘에 관한 조사 성과를 보면 묘제는 주로 석곽묘와 토광묘

    로 한정되며, 내부에 자기와 도기 및 금속류 등 다종⋅다양한 유물이 부장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이 지역의 고려시대 분묘에 관한 연구경향도 석곽묘와 토광묘를 중심으로 구

    조적 변천과정을 살피거나 부장품의 시기별 변화상과 그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었다.2) 기존 연

    1) 최병현, 2009, 「중원의 신라고분」, 중원의 고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96쪽.2) 高晟永, 2003, 「高麗 석곽묘와 토광묘 연구-混在分布遺蹟을 中心으로-」,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고현수, 2004, 「남한지역 고려 고분의 부장품 매장방법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남진주, 2007, 「충청지역 고려고분 부장품의 양식」, 고려시대 분묘출토 청자유물 특별전, 강진 청자박물관 ; 박미욱, 2006, 「고려 토광묘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申勝撤, 2011, 「忠北地域 高麗~朝鮮初期 土壙墓 考察」, 公州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 양미옥, 2005, 「충청지역의 고려시대 무덤 연구」, 한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이상희, 2005, 「고려 분묘 출토 녹청자의 편년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李修晶, 2009, 「忠北地域 高麗古墳 硏究」, 崇實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 李承一, 2002, 「高麗墓 出土 中國錢에 대한 硏究」, 東亞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 이종민, 2007, 「高麗 墳墓 出土 陶磁 硏究-소비방식의 관점에서-」, 湖西史學 46, 湖西史學會 ; 이희인, 2003, 「중부지방 고려시대 고분 연구-석곽묘와 토광묘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2003, 「中部地方 高麗墳墓의 類型과 階層」, 韓國上古史學報 45, 韓國上古史學會 ; 조재경, 2001, 「충북지방의 고려묘」, 호서지방의 중세고고학 4, 호서고고학회 ; 朱英民, 2004, 「高麗時代 墳墓 硏究-陶器編年을 中心으로-」, 新羅大學校 碩士學位論文 ; 2010, 「고려분묘 출토 도기의 성격-분묘출토 자기, 동기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도기 학술회의,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 한정희, 2010, 「高麗墳墓 出土 陶器의 特徵-도기와 자기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도기 학술회의,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 玄文弼, 2005, 「高麗時代 古墳 出土 靑磁硏究」, 東國大學校 碩士學位論文 ; 黃恩景, 2010, 「고려시대 양광도지역 분묘 연구」, 慶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 황정욱, 2001, 「고려시대 석곽묘 연구-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단국대학

  • 구를 통해 고려분묘는 중기 이후 토광묘가 급증하여 후기로 가면서 점차 석곽묘가 쇠퇴하는 모

    습을 보인다. 또한 부장품은 전기에 해무리굽완으로 대표되는 기본적인 부장조합을 이루어 중

    기에 다양한 유물이 후장(厚葬)되다가 후기로 가면서 부장품의 형식변화와 함께 박장(薄葬)화

    된다. 이런 특징은 충주나 단양 등 충북의 북부지역의 분묘군에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청주의

    경우 고려 중기 이후가 되면 대단위 분묘군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지나, 고려 전기 분묘는 충

    주 일원과 달리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청주보다는 그 외곽지역인 청원과 보은에서 고

    려 전기의 분묘가 주로 보고된 실정이다.

    이처럼 충주와 청원 및 보은에서 고려 전기 분묘가 다수 조사되는 것과 달리 청주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분묘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 현상에 의문을 가지

    게 되었다. 따라서 석곽묘와 토광묘가 주를 이루는 충북지역 고려분묘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고

    려분묘 성과가 다수 축적됨에 따라 이를 개괄하는 한편, 부장품이 출토된 분묘유적을 충주일원

    과 청주일원으로 구분하여 두 지역간 부장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간단히 살피겠다.3) 그리

    고 고려 전기 분묘와 부장품을 선별하여 이들이 확인된 지역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통한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며 이 시기 분묘 조영집단과 피장자의 정치적 동향을 밝히고자 한다.

    Ⅱ. 충북지역의 고려분묘 조사 현황

    1. 고려분묘 조사 현황

    충북지역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출토된 분묘는 40개소, 총 389기가 확인되어4) 석곽묘 127

    기, 토광묘 262기로 토광묘가 석곽묘보다 2배 정도 많았다. 지역별로는 충주일원에서 164기,

    청주일원에서 225기가 조사되었는데, 분묘 유형별 구성비율로 보아 충주일원은 석곽묘 비중이

    높고, 청주일원은 토광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참조).

    충주일원에서 분묘가 가장 많이 출토된 유적은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과 충주 호암동유

    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3) 고려시대에 충주와 청주는 호서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로 당시 충주는 지금의 단양⋅괴산⋅음성⋅제천 등이 속하였고, 청주는 지금의 옥천⋅청원⋅보은(회인)⋅증평⋅진천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충주일원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청주일원은 금강을 중심으로 분묘가 확인되므로 본고에서 두 지역간

    고려 분묘의 부장양상에 관한 특징을 파악하기 위하여 충주일원과 청주일원으로 구분하여 개괄적인 설명

    을 하고자 한다.

    4) 본고 작성 후 발간된 청주 율량동유적은 제외하였다(中央文化財硏究院, 2011, 淸州 栗陽洞遺蹟Ⅰ~Ⅲ).

  • 적, 영평리⋅본리 새터골Ⅱ유적 등으로 대부분 석곽묘가 주를 이루나, 호암동유적은 토광묘

  • 가 다수 확인되었다. 청주일원은 청주 용암유적⋅봉명동유적, 청원 만수리분묘유적⋅마산리유적, 보은 부수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며, 청주 용암(금천동⋅용정동)유적은 100기가 넘는 고려시대 토광묘가 조사되어 충북지역

    내 단일분묘군 중 최대 규모를 나타낸다.

  • 2. 고려분묘 출토 부장품 현황

    충북지역 고려 분묘 389기에서 출토된 유물

    은 자기류⋅도기류, 금속류 및 기타 등 약 1,500여 점이다. 이중에서 시기별 변화가 관찰

    되는 유물인 자기류와 도기류 및 금속류를 선

    별한 결과 총 1,492점 중 금속류가 64%, 자기

    류가 28%, 도기류가 8% 순이었다. 특히 청주

    일원의 부장품에서 금속류 비중이 높게 나타나

    는 원인은 출토된 금속류에서 동전의 비중이

    43%를 차지할 만큼 다량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두 지역의 분묘를 유형별로 구분하였을 때에도 충주일원은 석곽묘가 토광묘보다 부장량이

    많고, 청주일원은 토광묘의 부장품 수량이 석곽묘보다 월등히 많다.

  • Ⅲ.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충북지역의 고려분묘 출토 부장품에 관해서는 주영민, 양미옥, 이종민, 남진주 등에 의해 진

    행된 바 있다.5) 이들에 따르면 대체로 11세기 후반 경을 기준으로 고려 전기와 중기를 구분하

    고, 원간섭기로 접어드는 13세기 후반부터 고려 후기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따라서 본고의

    중심시기가 되는 고려 전기는 고려 성립기인 10세기 전반부터 11세기 중반경으로 설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충북지역 고려분묘 부장품 중 시기변화를 반영하는 유물은 자기류의 완⋅발⋅접시⋅병과 도기병, 금속류인 청동발 및 접시, 철제가위, 가랑비녀이다. 이 외에 동전과 동경 등 기타 공반유

    물은 형식변화가 관찰되지 않더라도 시기에 따라 매납품목에 추가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이

    중 고려 전기 분묘 부장품은 해무리굽청자완을 중심으로 청자접시와 도기편병(자기병도 소량

    확인)이 조합을 이루고, 청동기명인 청동완과 발이 자기류와 상호보완 관계를 보이며, ‘ㄷ’자형

    으로 단순하게 제작된 가랑비녀가 구성을 이룬다.

    1.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 유적과 부장품 현황

    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모두 12개소로 석곽묘 33기, 토

    광묘 7기 등 모두 40기가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단양의 하방리고분군⋅현곡리 고려고분군, 충주의 영평리Ⅱ유적⋅하구암리유적, 음성 유촌리유적, 청주 명암동유적, 청원 만수리분묘⋅학소리유적, 보은 부수리고분군 등을 들 수 있다.

    충주는 본리⋅영평리⋅완오리유적, 하구암리유적 등이 있다. 이중 고려분묘가 가장 많이 조사된 영평리유적은 고려 전기부터 중기에 걸쳐 석곽묘 13기와 토광묘 4기가 조사되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분묘는 모두 11기로 석곽묘 9기와 토광묘 2기가 있다. 부장품은 해무리굽청자

    완 또는 발과 청자접시⋅병, 도기편병⋅소병 및 완, 청동완과 가랑비녀 등 22점이 출토되었다. 하구암리유적은 고려 전기부터 중기에 해당되는 석곽묘 5기가 조사되었고, 고려 전기에 조

    성된 석곽묘는 2기이다. 해무리굽청자발과 청자접시⋅청자(소)병, 도기(소)병⋅도기완과 함께 청동발과 접시가 공반되었다.

    5) 양미옥, 2005, 앞의 글, 83~117쪽 ; 李修晶, 2009, 앞의 글, 29~47쪽 ; 李鍾玟, 2007, 앞의 글, 14~16

    쪽⋅19쪽⋅31쪽 ; 주영민, 2004, 앞의 글, 56~104쪽 ; 黃恩景, 2010, 앞의 글, 48~71쪽⋅132쪽.

  • 단양은 현곡리유적과 하방리고분군이 있다. 현곡리유적의 경우 고려 전기부터 후기에 해당

    하는 석곽묘가 조성된 곳으로 석곽묘가 25기와 토광묘 3기가 조사되었다. 이중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석곽묘는 5호 석곽묘와 5호 토광묘가 있다.7) 출토된 유물은 주로 해무리굽완을 중심

    6)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2008, 丹陽 玄谷里 高麗古墳群 ; 中央文化財硏究院, 2008, 陰城 柳村里⋅道晴里⋅覺悔里遺蹟 ; 2009, 忠州 本里⋅永平里⋅完五里遺蹟 ; 2010, 忠州 下九岩里遺蹟 ; 忠州博物館, 1997, 丹陽 下坊里古墳群 發掘調査 報告書.

    7) 토광묘 5호는 내부에 할석이 조악하게 축석되어 있으므로 필자는 본고에서 5호 토광묘를 석곽묘로 분류

    하겠다.

  • 으로 한 자기소병이 공반되며, 충북지역의 고려 전기 분묘유적에서는 유일하게 청자잔탁 등 8

    점이 출토되었다.

    청주는 명암동(Ⅰ)유적과 가경3지구유적 등이 있고, 특히 명암동(Ⅰ)유적은 고려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토광묘 3기가 조사되었다. 이중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은 10호 토광묘가 유일

    하며, 내부 바닥에서 청자접시와 토기소병이 공반되었다.

  • 청원은 마산리유적⋅만수리분묘유적⋅오창 학소리유적 등, 다른 지역에 비하여 석곽묘와

    토광묘가 혼재되어 조성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오창 학소리유적은 고려 전기부터 중기

    에 이르는 석곽묘 2기와 토광묘 7기가 조사된

    곳으로,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유구는 석곽묘

    2기와 토광묘 1기이다. 부장품은 해무리굽청

    자완과 토기편병 및 가랑비녀가 조합을 보이

    며 17점이 출토되었다.8)

    보은 부수리고분군은 석곽묘 12기와 토광묘 1기 등 모두 13기의 고려분묘가 조사된 유적

    이다. 29점이 출토된 매납유물은 대부분 해무리굽청자완과 도기편병이 조합을 이루고, 청자접

    시와 도기소병 및 가랑비녀 등이 추가로 매납되는 점으로 보아 중심 조영시기는 고려 전기로

    판단된다. 부장품 중 중기에 해당하는 유물의 출토빈도가 급격히 낮아지므로 고려 중기 이후부

    터 분묘 조성이 줄어든다.

    분묘 조성이 두드러진 지역은 충주와 보은으로 석곽묘의 조성비율이 월등히 높게 나타났지

    8) 국립청주박물관, 2000, 淸州明岩洞遺蹟(Ⅰ) ; 中央文化財硏究院, 2004, 報恩 富壽里古墳群 ; 2005, 淸原 大栗里⋅馬山里⋅楓井里遺蹟 ; 2007, 淸原 萬水里 墳墓遺蹟 ; 中原文化財硏究院, 2008, 五倉 鶴巢里⋅場垈里遺蹟 ; 韓國文化財保護財團, 2000, 淸州 龍岩遺蹟 ; 忠北大學校博物館, 2002, 淸州 佳景3地區遺蹟.

  • 만, 청원과 청주는 토광묘와 석

    곽묘의 조성비율에서 큰 차이

    가 없다. 이를 통하여 단양, 충

    주 및 보은은 석곽묘 조성집단

    이 이 지역의 토광묘 조성집단

    보다 초기청자 등의 부장품을

    매납할 정도로 사회적인 위상

    을 갖추었음을 고려할 수 있다.

    충주⋅보은⋅단양⋅청원은 토광묘 조성집단보다 석곽묘 조성집단이 분묘 조성비에서 좀 더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미루

    어보아 석곽묘 조성집단이 초기청자 등의 부장품을 매납할 정도로 보다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반면 청주⋅음성의 경우는 분묘 조성이 미미하므로 타지역보다 당시 위세를 갖춘 집단의 존재가 미약하였거나, 부장품을 매납하기 어려웠던 상황

    으로 이해할 수 있다.

  • 2.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 부장품은 103점으로 자기류가 50점(49%), 도기류 31점(30%), 금

    속류는 17점(21%)이다. 먼저 지역별로 고려 전기 분묘 출토 부장품의 출토현황은 충주(33점),

    청원(23점), 단양(13점), 청주(3점), 음성(2점) 순으로 집계되어 석곽묘 조성유적 위주로 유물

    이 다수 매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묘 유형별로 출토 유물 수량을 비교할 때에도 동일

    하게 나타난다. 부장품은 충주⋅보은의 석곽묘에서 29점, 청원의 석곽묘에서 18점, 단양의 석곽묘에서 13점 등이 출토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이 시기 부장품 중 재질별로 구분하여 출토 수량을 파악하면 분묘 유형에 상관없이

    대부분 자기류-도기류-금속류 순으로 출토되나, 단양에서는 금속류가 도기류보다 높게 나타

    났다.

    청주⋅음성의 경우 분묘 충주일원과 청주일원으로 구분하여 분묘 유형에 따른 부장품을 재질별로 살펴보면 두 지역의 석곽묘에서 부장품 중 자기류가 우위를 차지하며, 충주일원의 토광

    묘는 부장품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세부 기종별 출토 양상은 완-접시-병 등의 순서로 확인되고, 도기류는 (편)병-소병-완 등으

    로 나타났으며, 금속류는 가랑비녀 이외에 청동기명이 고르게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조합양상

    은 고려 중기 이후 다양해지는 부장품목과는 달리 기명에 한하여 기본적인 조합을 이루며 비교

    적 단조로운 편이다.

    자기류는 대부분 청자 위주로 매납되며, 이 시기 분묘 중 백자 및 수입자기가 확인된 유적은

    없었다. 자기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완은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완, 퇴화해무리굽

  • 등의 형태가 확인된다.9) 반면, 충주 영평리Ⅱ유적 4호 석곽묘⋅13호 토광묘나 청원 만수리분묘유적 Ⅲ-D-7호 석곽묘는 도기완이 매납되어 자기완을 대신하기도 한다. 고려 중기 이후가

    되면 도기완은 자기발로 대체되어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10)

    해무리굽완과 공반되는 자기접시 역시 석곽묘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드물게는 충주 하구암

    리 44호 석곽묘처럼 청자발과 청자접시가 청동기명과 공반되는 예도 있다. 자기완과 자기접시

    의 형태는 초기청자요지로 잘 알려진 시흥 방산대요나 강진 용운리청자요지 등에서 제작된 초

    기청자와 거의 유사하다.

    자기병은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 5호 토광묘와 청원 마산리 15호 토광묘를 제외하고는 충

    주 영평리Ⅱ유적 22호 석곽묘, 하구암리 33호 석곽묘와 청원 만수리분묘 Ⅲ-D-2호 석곽묘,

    보은 부수리고분군 8호⋅13호 석곽묘처럼 대부분 석곽묘에 매납된다. 외반구연의 편병이 많으며, 구연이 깨진 채 출토된다. 자기병과 도기병이 동시에 매납된 경우는 흔치 않다.11) 특히 도

    9) 굽 분류는 이종민의 안을 따랐다(李鍾玟, 2002, 韓國의 初期靑磁 硏究, 弘益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63쪽, 참조). 선해무리굽은 청원 만수리분묘유적 Ⅲ-D-2호 석곽묘에서, 한국식해무리굽

    완은 충주 영평리Ⅱ유적 22호 석곽묘⋅하구암리 44호 석곽묘,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 5호 석곽묘, 보은 부수리고분군 5호⋅6호⋅21호⋅24호 석곽묘 등에서, 퇴화해무리굽완은 단양 하방리고분군 6호 석곽묘 등 주로 석곽묘에서 출토된다. 토광묘에서는 출토된 것은 충주 영평리Ⅱ유적 9호 토광묘(한국식해무리굽완)

    가 유일하다.

    10) 남진주와 이종민은 고려 중기의 다양한 자기발과 청동발에 대하여 상호 보완관계로 보았는데, 고려 전기

    에 이미 관찰되는 현상으로 보인다.(李鍾玟, 2007, 앞의 글, 11쪽 ; 남진주, 2007, 106쪽).

    11) 충주 하구암리 33호 석곽묘와 청원 만수리 Ⅲ-D-2호 석곽묘와 보은 부수리 8호 석곽묘이다.

  • 기(소)병 중에서 동체 외벽을 돌려깎아 기면을 다듬은 깎기수법이 관찰되기도 한다. 약 20%에

    가까운 출토 비율을 나타내는 도기병은 자기병보다 저렴하고 구입이 쉬워 분묘 매납품으로 선

    호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12)

    금속기명은 청동제 완과 발, 접시 등 소량만 확인되어 구체적인 설명은 어렵지만, 소형의 자

    기기명을 대신하여 도기병과 조합을 보인다. 이 외에 청동숟가락은 병부 끝이 완만하고, ‘S’형

    으로 굴곡이 심한 측면형태를 가지며 매납이 시작된다. 또한 머리 장신구인 가랑비녀도 이 시

    기부터 부장품으로 포함되는데, 금속유물 중 가장 많이 출토된 가랑비녀는 가는 동사(銅絲)를

    ‘ㄷ’자형으로 구부려 제작하여 두부 단면이 초승달형태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여자 가채의 장

    신구로 알려지나 단양 현곡리유적의 경우 피장자가 남자로 분석된 석곽묘에서 피장자의 머리

    쪽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남자도 상투와 관련하여 가랑비녀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해석된

    다. 이로써 고려시대가 되면서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두발 형태가 유행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3)

    위와 같이 충북지역의 고려 전기 분묘 부장품은 해무리굽청자완을 표지(標識)로 하는 자기접

    시와 도기(편)병 또는 자기병이 기본 조합을 이루며, 완은 도기나 청동제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는 이전시기인 통일신라시대 부장전통인 대부합과 도기소병으로 단순한 박장조합에서 고려

    시대가 되면서 해무리굽청자완으로 바뀌고, 토기병은 도기편병이나 자기병으로 전환되기 시작

    한다. 접시가 새롭게 부장품으로 추가되며, 이 외에도 청동숟가락과 ‘ㄷ’자형의 가랑비녀가 새

    롭게 매납되는 특징을 가진다. 이와 같은 유물은 충주⋅보은⋅단양⋅청원 등의 석곽묘에서 수적 우세를 보여주고 있어 당시 이들 유적이 조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유력 집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부장품 중에 과대와 같이 피장자의 위계를 반영해주는 위세품의 존

    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Ⅳ. 충북지역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과 정치적 동향

    고려 전기 분묘의 부장양상을 통한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려건국 이전 충북지역

    의 정치적인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라가 지방에 김헌창의 난을 필두로 지방에 대

    한 통치력이 무력화되자 중앙 지배력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무력과 경제력을 갖춘 소위 ‘호족’

    12) 한정희, 2010, 앞의 글, 50쪽.

    13) 李惠瓊, 2005, 「가랑비녀(釵)에 관한 소고」, 錦江考古2, 충청문화재연구원, 104~106쪽.

  • 이 각처에 등장하게 된다.14) 장군(將軍)⋅성주(城主)⋅적수(賊帥)15) 등으로 문헌에 기록된 이들은 당시 신라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독자적 행정조직을 운영하며 토착민을 지배하였다.16) 그

    리고 궁예와 견훤, 왕건의 대립구도에 따라 향방을 달리하다가 점차 왕건세력이 우세해짐에 따

    라 그에게 귀부(歸附)하기에 이른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이들의 이탈방지와 왕실 세력기반 강화를 위한 관직부여와 혼인(근친

    혼)정책, 사성정책(賜姓政策) 등의 유화적인 화합정책을 실시하고, 동시에 사심관제도(事審官制

    度)나 기인제도(其人制度) 등의 견제책을 펼친다. 또한 군현설치⋅읍명개정 등의 지방제도의 골격을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후 왕권강화정책은 광종의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 등 제반 개

    혁정치를 통해 성종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 확립의 기초를 다진다.

    성종은 향리직(鄕吏織) 개편을 통해 이전의 상대등(上大等)⋅대등(大登)체제를 호장(戶長)⋅부호장(富戶長)으로 바꾸고 향리직의 최고인 호장에 대해 중앙관리와 동일한 우대를 하였다.

    향리직은 호장까지 오를 수 있는 집안이 제한되어 몇몇 가문에게 세습되었으며, 차별적인 법제

    를 통해 중앙진출이 보장되었다.17) 한편 개성부(開城府)⋅3경제(京制)⋅10도제(道制)⋅절도사제(節度使制)로 지방을 운영하여 도(道)-주(州)-현(縣)을 상하관계로 편제하였다.

    이후 현종은 지방을 4도호⋅8목⋅56지주군사⋅28진당⋅20현령으로 개편하며, 향리정원제 등을 만들고, 이후 덕종을 거쳐 문종(1046~1083)은 관제를 고쳐 백관의 반차를 정하고 녹봉

    제도를 재정비하게 되면서 향리의 9단계 승진규정을 마련한다. 이로써 고려 11세기 후반 이후

    인 문종대부터 왕권의 안정에 따른 귀족문화와 학문의 발달, 북송과의 활발한 문화교류 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18)

    고려 전기의 석곽묘가 가장 많이 확인되었던 충주는 신라의 5소경 중 지리⋅군사적 요충지로, 중원소경이 자리하였던 곳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900년경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충주⋅청주⋅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청길(淸吉)과 신훤(莘萱)세력을 평정할 때, 유긍달(劉兢達)

    14) 최근영, 1992, 통일신라시대의 지방세력 연구, 신서원, 101~109쪽. 15) 高麗史⋅三國史記 등의 사료에서 적수(賊帥)로 기록된 것은 주로 견훤이나 궁예에게 귀부한 자들에

    대한 칭호로 알려진다(申虎澈 , 1995, 「신라말 고려초 歸附豪族의 정치적 성격」, 충북사학 8, 충북대학교 사학회, 18쪽).

    16) 호족의 행정조직은 대체로 상대등(上大等)⋅대등(大等) 아래 호부(戶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세 부서로 나뉘어 편제되어 있었고, 실무 부서는 시랑(侍郞)⋅경(卿)-낭중(郎中)-원외랑(員外郞)-사(史)의 직위체계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전국적인 직제개편이 이루어지며 점차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논리에 따라 ‘향리’화된다(鄭淸柱, 1995, 「新羅末⋅高麗初 支配勢力의 社會的 性格-後三國 建國者와 豪族-」, 역사학연구 9, 호남사학회).

    17) 강은경, 2002, 高麗時代 戶長層 硏究, 혜안, 155~166쪽.18) 박경자, 2001, 고려시대 향리연구, 국학자료원, 147~159쪽 ; 박운용, 2008, 고려시대사, 일지사,

    50~57쪽.

  • 과 유권열(劉權說) 등 충주의 강성한 호족세력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이로써 유긍달의 딸은

    태조의 셋째 후비(神明順成王太后)로 책봉되고, 긍달은 태사(太師)와 내사령(內史令)까지 올랐

    다. 태조와 신명태후 사이의 6남 2녀 중 태자 태(泰)와 고려 제3대 왕 정종(定宗, 923~949),

    제4대 왕 광종(光宗, 949~975)이 되어, 경종(景宗, 975~981) 대까지 충주유씨는 왕족⋅귀족가문을 형성하여 대대로 척리(戚里)가 된다.19) 또한 유권열은 태조가 당에서 귀국한 법경국사

    (法鏡大師) 현휘(玄暉)를 국사로 우대하고 정토사 주지로 모시자, 943년경에 를 주도적으로 세웠다고 전한다.20) 이 탑비에는 고려로부터 수여받은 3품 이하 6품

    까지의 지방 대호족과 관련된 관계(官階)와 신라 17관등 중 비교적 상위에 해당하는 관등이 적

    혀 있다.21)

    충주에서 고려시대 전기의 분묘가 조성된 곳은 본리 새터골Ⅰ유적⋅영평리Ⅱ유적, 하구암리

    19) 나아가 신명태후와 정덕왕후 류씨(貞德王后 柳氏)는 자녀들은 서로 근친혼을 이루어 가족적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시켰다. 왕건은 이처럼 각 지역 호족들의 딸인 후비 소생 자녀들끼리 중첩 결혼을 통해 가족적

    유대관계를 형성하였고, 이들 세력들을 왕실 주변에 묶어 두어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高麗史 卷八十八 列傳 ; 국사편찬위원회, 2003, 한국사 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12, 41~42쪽 ; 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四 忠州牧 人物條).

    20) 최근영, 1992, 앞의 책, 117~118쪽.

    21) 박경자, 2001, 앞의 책, 30~46쪽.

  • 유적 등이 대표적이며, 해무리굽청자완과 도기편병이 부장조합을 이루며 주로 석곽묘에서 출

    토되고 있다. 당시 초기청자를 분묘에 부장할 정도의 위세를 가진 집단은 이 일대의 유력 세력

    은 충주유씨가 대표적이므로 이 시기의 분묘 유적은 충주유씨와 관련지을 수 있다. 22)

    남한강 수계에 위치한 단양 현곡리 고려 고분군의 석곽묘에 양질의 해무리굽청자완과 자기

    병이 공반되고, 잔탁 등 고급 기명이 매납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 일원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지

    녔던 토착세력의 분묘군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연구된 고려 전기 단양지역의

    유력집단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는 실정이다.23)

    한편, 청주는 백제의 세력이 오랫동안 존속하여 신라가 충북지역에서 가장 늦게 진출해서 서

    원소경을 설치한 곳이다.24) 궁예가 ‘청주인호 일천을 철원(새도읍)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

    과25) 관련하여 적어도 900년 경부터는 청주가 궁예의 세력 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주호족들은 고려건국 초 친궁예세력이 왕건에게 대한 모반을 자주 일으켜 개국공신에 의해

    대부분 제거되고26) 재경 친왕건세력도 개국공신과 대립하여 중용되기 어려웠다.27)

    태조와 관련되었던 청주의 대표적인 호족은 청주김씨와 청주한씨 등 모두 태조에게 귀순하

    거나 협력하여 일찍부터 중앙에 진출한 가문이다.28) 이 중 청주김씨는 상경출사한 김근겸(金

    勤謙)29), 김긍율(金兢律) 등이 있는데 김긍율의 2녀는 제2대 왕 혜종(惠宗, 943~945)과 제3

    대 왕 정종의 비가 된다.30) 그리고 고려 제4대 왕인 광종(光宗, 949~975) 즉위 후 왕권강화

    22) 최근영, 1992, 앞의 책, 108쪽, 인용하여 편집하였다.

    23) 현재로서 문헌에 남은 단양의 유력 집단은 단산현(丹山縣)의 장(張)⋅지(池)⋅이(李)⋅우(禹)씨, 영춘현(永春縣)의 조(趙)⋅윤(尹)⋅정(鄭)⋅진(秦)씨 등이 있다. 이 일대의 호장(戶長)으로 잘 알려진 단양 우씨 일가와 관련짓기도 하나, 이들은 고려 전기에 상경출사한 예는 알려지지 않고, 고려 후기에 들어서 명종

    (明宗) 때 장원급제를 하는 이공로(李公老)가 첫 재경관인이 된다. 이 외에 단양 우씨는 지역 호장을 세

    습하다가 13세기 후반에 들어 고려 말까지 당대의 대표적인 세족가문으로 자리잡는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四 丹陽郡 姓氏條⋅未春縣 姓氏條 ;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2008, 앞의 책, 27~28쪽 ; 李益柱, 1998, 「고려시대 남한강 상류지역의 지방세력」, 박물관휘보 9,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35~47쪽).

    24) 신라가 피정복민의 지배자들을 회유⋅감독하기 위한 곳이었다는 견해도 있다(林炳泰, 1976,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 歷史學會).

    25) 三國史記 卷五十, 弓裔傳.26) 청주영군장군 견금 귀부 후 청주 반란사건, 순군리 임춘길 모반사건, 환선길 모반사건, 이흔암 모반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개국공신은 대부분 이러한 사건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자들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五, 淸州牧 風俗條 ; 趙翼來, 1993, 「高麗初 淸州豪族勢力의 在地形態-高麗社會로의 轉化過程을 中心으로」, 北岳史論 3, 北岳史學會, 147~174쪽 ; 申虎澈, 1993, 「後三國 建國勢力과 淸州 地方勢力」, 호서문화연구 11,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75~80쪽 ; 1999, 「弓裔와 王建과 淸州豪族-高麗 建國期 淸州豪族의 정치적 성격-」, 中原文化論叢 2⋅3,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69~90쪽).

    27) 申虎澈, 1999, 위의 글, 84~88쪽.

    28) 박경자, 2001, 앞의 책, 63~87쪽.

    29) 김근겸은 상경출사하여 태조대 수사도삼중대광(守司徒三重大匡)을 지내고, 그 아들 충량(忠良)이 문하시

    중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주로 문반직을 두루 거치면서 중앙 관계에서 활동하다가 족세가 약화되는 것으

    로 알려진다(박경자, 2001, 앞의 책, 77~79쪽).

  • 및 개혁정책을 실시하며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이용하면서부터 비로소 법상종과 관련 깊었

    던 청주김씨 가문이 고려 사회에 재편되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31)

    청주지역은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분묘 중 석곽묘는 현재까지 조사되지 않았다. 이는 김헌창

    의 난32)과 같이 반신라적, 친궁예적 성격이 강하여 철원으로 이주되거나, 모반을 통해 제거되

    는 등 일련의 사건과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석곽묘 조성집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

    시기에 해당되는 토광묘는 명암동유적에서 소수 조사되어 앞서 말한 청주김씨와 관련된 가문

    중에서도 토착세력으로 남은 청주김씨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청주 명암동과 금천동

    일원에 분포하는 토광묘군이 청주김씨의 족분(族墳)으로 여긴 선행연구와도 견해가 일부 같

    다.33)

    고고학적 결과만으로 보았을 때, 청주보다는 오히려 그 외곽인 청원군 일대에서 고려 전기

    분묘가 조사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청원 만수리유적과 오창 학소리유적 등의 석곽묘에서 출

    토된 부장품은 초기청자를 포함하는 공반유물로 청주에서 조사된 이 시기 토광묘의 부장양상

    보다 양적인 측면에서 우세하다. 따라서 지금의 청원 오창⋅오송 일대에도 고려 전기 석곽묘를 조영하여 초기청자를 매납했던 유력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원 일대의

    고려 전기 유력집단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미진하다.

    한편 보은 부수리고분군이 조사된 회인(懷仁)은 본래 백제 미곡(未谷)현이었다가 신라 경덕

    30)

    혜종 정종

    義和王后 林氏 鎭州人 文義王后 朴氏 昇州人後廣州院‘人 王氏 廣州人

    文成王后 朴氏 昇州人淸州院‘人 淸州人

    淸州南院‘人 金氏 淸州人宮人 哀伊主 慶州人

    31) 명 중 중앙과 비슷한 전병부경⋅전사창 등과 학원경⋅학원낭중과 같은 관직명이 확인되어 당간이 설치된 963년(광종 13)까지는 적어도 청주의 중심 토착세력으로서 자치조직을 운영하였

    음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趙翼來, 1993, 앞의 글, 160~172쪽 ; 金守泰, 1997, 「新羅末⋅高麗前期 淸州金氏와 法相宗」, 中原文化論叢 1,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8~20쪽 ; 박경자, 2001, 앞의 책, 57~87쪽 ; 하일식, 2010,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사회와 지방세력-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63~67쪽).

    32) 청주도독과 서원경의 사신 등이 관련된 김헌창의 난(822)을 통해 보더라도 당시 청주에 반신라적 세력

    이 성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趙翼來, 1993, 앞의 글, 147~148쪽 ; 하일식, 2010, 앞의 책, 56~62

    쪽).

    33) 명암⋅금천동 일대에 대규모로 조성되는 고려중기의 토광묘군에 대한 고고학적 양상과 고려 중기부터 가문의 세력이 약해지는 상황과 일치되지 않는 부분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황은경은 이 일대 토광묘

    에서 청동소도가 출토되는 점과 당시 잉여생산물을 비축할 수 있는 계층이 군인층 이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신세력과 관련된 집단으로 보고, 청주 일대의 토착세력이던 경대승으로 대표되는 청주경씨 등을

    꼽았다(都文善, 2009, 「淸州地域 高麗時代 土壙墓 受容背景과 造營勢力」, 中央考古硏究 5, 中央文化財硏究院, 13~19쪽. 黃恩景, 2010, 앞의 글, 128~129쪽).

  • 왕때 매곡(昧谷)으로 고쳐져 연산군(지금의 문의)의 영현으로 삼고, 고려 태조 23년 회인현이

    되었다. 이곳은 보은에서 청주를 최단거리로 통할 수 있는 피반령이 있어 매우 험준하고 폐쇄

    적인 지형에 매곡산성34)과 호점산성35) 등이 인접하고 있고, 왕건이 견훤과 각축을 벌이던 중

    ⋅북부의 접경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곳 토착세력으로 잘 알려진 성주(城主) 공직(龔直)은 918년을 전후하여 견훤에 귀부하였

    다가 932년 자식의 죽음을 무릅쓰고 왕건에게 재귀부한다.36) 이 일은 같은 해에 왕건이 문의

    를 정벌한 이후 934년에 30여 성이 스스로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다. 이에 왕건은 그에게 관직과 녹읍을 주며, 아들을 중앙귀족과 혼인시키는 등 여러 혜택을 부

    여하였으나37) 공직은 왕건에게 귀부한지 4년 만에 죽게 된다. 이후 후손에 관한 기록은 더 이

    상 발견되지 않게 되는데, 공(龔)씨가 이 지역의 토성(土姓)으로 남지 않는 것을 보면 고려 건

    국 이후 곧바로 족세가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8)

    해무리굽청자완과 도기편병이 공반되는 고려 전기 석곽묘가 조사된 보은 부수리유적은 고려

    중기가 되면서 분묘 조영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나타내므로, 공직일가와 관련된 기록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초기청자를 매납할 정도의 유력한 토착세력으로 잘 알려진 부수리고분군의

    석곽묘는 당시 매곡성주이었던 공직일가의 분묘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이 고려 전기 분묘유적에서 출토된 초기청자와 일련의 공반유물을 통해서 피장자와

    분묘 조영집단을 파악해 보았다. 그 결과 충주 본리 새터골Ⅰ유적과 영평리Ⅱ유적 및 하구암리

    유적 등에서 조사된 석곽묘는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충주유씨와 관련지었고, 보은 부수리고분

    군의 고려석곽묘는 매곡성주 공직일가의 분묘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청주의 경우 가경3지구유

    적과 명암동유적에서 고려 전기 토광묘가 소수 확인되어 당시 이 지역의 유력집단으로 등장하

    였던 청주김씨와 조심스럽게 연결지을 수 있었다. 한편 청원 만수리분묘유적과 오창 학소리유

    적, 그리고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 등의 석곽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해무리굽청자완과 조합유

    물을 통해서도 당시 유력한 토착세력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분묘 조영집단을

    파악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34)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1998, 報恩 昧谷山城 地表調査 報告書. 35)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1998, 「매곡산성주변의 옛성터들」, 위의 책, 111~118쪽.36) 高麗史 卷九十二 龔直列傳 : 龔直 燕山昧谷人. 自幼有勇略 新羅末 爲本邑將軍. 時方亂離 遂事百濟 爲

    甄萱腹心 以長子直達次子金舒及一女 質于百濟 ; 高麗史 卷二 太祖 十五年 六月 : 六月 丙寅 百濟將軍龔直來降.

    37) 申虎澈, 2003, 「新羅末 高麗初 昧谷縣(懷仁)將軍 龔直-地方 豪族 존재양태의 일단-」, 後三國時代 豪族硏究, 도서출판 개신, 423~431쪽.

    38) 高麗史 卷二 世家二 太祖 二十二年 三月條 : 九十二(己亥) 二十二年 春三月 戊辰 佐丞 龔直卒 ; 李樹健, 1984, 「高麗前期 支配勢力과 土姓」, 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 252~253쪽.

  • Ⅴ. 맺음말

    고려시대 분묘 조사 성과 증대로 유구 분석과 부장품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

    라 충북지역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분묘 자료를 모아 조사 성과를 정리하는 계기로 삼고, 고려

    전기의 분묘 부장양상을 통해 피장자 또는 분묘 조영집단의 정치적 동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려 전기의 분묘 부장품은 해무리굽청자완을 표지로 청자접시와 도기편병이 조합을 이루어

    매납되고, 이 외에 청동가랑비녀와 청동숟가락이 새롭게 부장품에 추가되었다. 일부에 한정되

    어 자기기명은 도기나 청동기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또한 충북의 분묘 유형별 조성 수량은 개별지역마다 차이를 보여 충주⋅보은⋅청원⋅단양 등은 주로 석곽묘 중심으로 분묘가 조영되며, 그 외의 지역은 토광묘나 석곽묘가 극히 적은 수

    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분묘 부장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충주⋅보은⋅단양⋅청원 등에서 조사된 석곽묘에서 출토된 부장품의 수량이 박장이기는 하나, 그 외 지역의 토광묘 출토품보다 많았다.

    이렇게 충주⋅단양⋅보은 등에서 초기청자가 매납되는 석곽묘가 다수 확인되는 점과 청주⋅음성 등은 분묘조성과 매납활동이 극히 저조한 현상에 주목하여 문헌자료를 통해 당시 이들 지

    역의 피장자 및 분묘 조영세력으로 추정되는 유력집단에 관해 살펴보았다. 신라의 지방 통제가

    약화되던 틈을 타 9세기경부터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유력한 토착세력이 형성되는데,

    이때 ‘성주⋅장군⋅척수’ 등으로 기록되어 소위 호족으로 불리는 토착세력이 존속되었던 지역이 바로 고려 전기 분묘가 조사된 곳과 일치됨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왕건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 건국 이후 왕족이나 귀족 등으로 편입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근거지에 남아 토착민에 대한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였다. 따라서 고려

    전기에 향촌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던 호족이 조성한 분묘로 이해되며, 계통이 서로 다른 석곽

    묘 채용집단과 토광묘 채용집단이 공존하되 석곽묘 채용집단이 보다 경제적 또는 정치적인 우

    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충주 본리새터골⋅영평리⋅하구암리 등의 석곽묘는 고려 개국과 동시에 중앙귀족으로 편재된 충주유씨와 연관되고, 보은 부수리고분군

    의 석곽묘는 매곡성주 공직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았다.

    청주 명암동유적 등의 토광묘는 고려 초 왕비를 배출한 청주김씨 등과 연결지을 수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분묘 조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은 고려 건국기를 전후해 친궁예세

    력의 모반 등으로 유력집단이 다수 제거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으로 판단하였다.

    지금까지 고려 전기 분묘 부장품의 부장양상을 통해 피장자 및 조영집단의 정치적인 동향을

  • 살펴보았다. 분묘 조영집단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명확한 고고학적 자료를 증명하지 못한 채 문

    헌기록만을 토대로 필자의 사견과 억측이 다소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추후 충북지역의 고려

    전기 분묘에서 묘지명이나 위세품 등과 같은 발굴 성과가 확보되면 보완할 것을 기약하며 마무

    리하고자 한다.

    접수일 2012.2.2 심사일 2012.2.16 게재확정일 2012.3.5

  • ‖ 참고문헌 ‖

    高麗史三國史記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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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Abstract ‖

    The Aspects of Tombs in Chungbuk area in the early Goryeo

    Dynasty and the Political Tendency

    Lee, Soo Jung (Gyeore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This article aims to figure out political tendency relations between the buried and

    tomb-building group through the burial accessories in early Goryeo Dynasty. For it, I first

    collected results from already excavated and researched pit tombs and stone lined tombs

    in Chungbuk area and investigated the grave goods.

    In the early Goryeo Dynasty from the early 10th Century to the middle 11th Century,

    the halo shaped foot bowl, dish and flat side bottle made of the early Goryeo celadon

    were usually buried. These associated artifacts were mainly discovered in stone line

    tombs in Chungju, Cheongwon and Boeun. They were also excavated in pit tombs in

    Cheongju.

    The burieds of these tombs were the powerful indigenous forces and played important

    role for establishing Goryeo Dynasty. Also they were figured as the groups who ruled

    their own country society.

    Key words : Early Goryo Dynasty, tombs, pit tombs, stone lined tombs, burial accessaries, The

    Early Goryo celadon, the halo shaped foot celadon bowl, flat side bottle, powerful in-

    digenous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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