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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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속에서 바로 선다!” 趙甲濟·柳錫春·趙佑石·趙成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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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10 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11 세계사적

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속에서 바로 선다!”

趙甲濟·柳錫春·趙佑石·趙成豪

Page 2: “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10 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11 세계사적

7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차 / 례

제 1 강연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李承晩·트루먼·朴正熙의 位相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9

제 2 강연

한국인은 이들을 어떻게 기리고 있나(이승만 동상 受難史를 중심으로)

趙成豪·조갑제닷컴 기자

29

제 3 강연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 의식조사

柳錫春·연세대학교 교수

67

제 4 강연

어디에 동상을 세울 것인가

趙佑石·KBS 이사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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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1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李承晩·트루먼·朴正熙의 位相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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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李承晩, 트루먼, 朴正熙의 位相

: 세 恩人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바로 선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李承晩의 反共자유민주주의 建國, 트루먼의 미군 파병 결단, 朴正熙의 조국 근대화가 없었더라면

韓民族은 지금 김정은의 노예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자유·복지는 이 세 분 덕분

이다. 이승만, 트루먼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이 공모한 기습 남침에 맞섬으로써 한국을 자유세계

의 교두보로 지켜내고, 對蘇포위망을 완성, 결국 공산전체주의 체제를 무너뜨려 인류를 구했다. 박

정희는 세계 最貧國을 富國强兵의 나라로 키워 후발 개도국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세 분은 가히 世

界史的 대인물이다. 세 분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살아남아 행복해진 이들의 도덕적 의무이자 세계

에 대한 우리의 자랑이고 후세에 대한 교육이다.”

한국 現代史는 인류 최고의 업적

1945년 이후의 대한민국 現代史(현대사)를 우리는 ‘피·땀·눈물로 이룬 세계사의 金字塔(금

자탑)’이라 부른다. 이 금자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한국전의

屍山血海(시산혈해) 속에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월남전을 종군 취재, 미국 정부에 대한 비

판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은 전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탐은 《가장 추운 겨울》이란

제목의 著書(저서)에서 한국의 戰後(전후) 발전은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과 일본의 근대

화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오바마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한국전쟁은 무승부가 아니고 승리한 전쟁이며, 冷戰(냉

전)에서 자유진영이 이긴 것은 한반도에서 韓美軍(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한 덕분이다”고 자랑한다. 한국전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영

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습을 받은 국군이 버티고,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군

이 참전하고, 다른 유엔 회원국들이 가세하고, 자유진영이 결속한 덕분에 스탈린·모택동·김

일성이 합작한 비열한 침략전쟁은 역효과를 불렀다.

한국이 살고, 대만이 지켜졌으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고, 서독이 재무장하였으며,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트루먼은 미국의 국방비를 세 배로 늘려 본

격적인 對蘇(대소) 군비경쟁에 들어갔고 그 40년 뒤 소련이 무너졌다. 對蘇포위망을 완성시킨

계기가 김일성의 기습남침이었으니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은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것이다. 韓

美軍을 비롯한 수백만의 자유민이 한반도에서 흘린 피가 수십억 人類(인류)에 자유와 번영을

선물한 셈이다.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희생을 기억하고 은인들과

대화하며 감사하는 매개체가 동상이다.

세계시민의 공동 작품

역사에 남고 동상으로 기억되는 대인물은 전쟁이나 혁명의 무대를 통하여 등장하는 경우

가 많다. 李承晩, 트루먼, 朴正熙가 세계적 인물이 된 데도 한국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

였다. 이승만, 트루먼은 세계적 전쟁의 兩大 지도자였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이 한국과 미국만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인권 수호를 위한 거룩한 싸움이란 확신

을 처음부터 공유하였다.

한국전을 통하여 성장한 국군과 장교단이 朴正熙(박정희) 장군의 지휘 하에 1961년 5월16

일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아 근대화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경제발전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

의 근대화는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었고, 중국, 말레이시아 등 後發(후발) 국가들

이 따라 배우는 모범 사례가 되었다. 韓國戰의 승리가 수십억 인류를 안전하게 만들었듯이

가난과 戰亂(전란)을 극복한 한국의 근대화 모델도 수많은 인류를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피로 이룬 韓國戰 승리, 땀으로 성공한 산업화, 눈물로 세운 민주화, 그야말로 한국의 현대

제 1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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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사는 피·땀·눈물의 세계사적 금자탑이다. 피, 땀, 눈물엔 그러나 서열이 있을 것이다. 피>땀>

눈물이 아닐까? 이 금자탑은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만든 것이요, 트루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의 결정적 도움이 있었으니 세계시민들의 공동작품이기도 하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이 객관적 사실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뽑아내야 마땅하다. 한민족

의 세 恩人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의 동상, 거리 이름, 그리고 얼굴이 들어간 화폐가 나와야

국가의 정체성이 구체화될 것이다. 광화문 광장이나 용산 전쟁기념관에 세 분의 동상을 세워

야 우리는 ‘世界史의 금자탑’을 국내외에 자랑하고 後世(후세)를 자랑스러운 국민으로 교육할

수 있다. 좋은 일을 해놓고도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세 恩人의

노고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한국인은 당당한 주인의식을 가진 자유민이어야지 열등감이나

분열의식, 또는 사대주의에 찌든 머슴일 순 없는 것이다.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 동상을 세우

는 날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신이 세계 속에서 바로 서는 날이다.

20세기의 12대 지도자

몇 년 전 점심 식사 시간에 재미있는 토론이 있었다. 한 기업인이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세계적 인물들을 12명 골라 그들의 사진을 담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라고 하

였다. 예술가, 군인에 이어 내년 달력은 정치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20, 21세기에 한정

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한 12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同席(동석)한 4명 사이

에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共同善(공동선)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

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체 게바라, 毛澤東(모택동) 같은 독재자나 혁명

가들은 탈락된다. 이들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기준으론 그 지도자가 통치했던 나라가 큰 나라이거나 선진국이어야 한다는 데

일치하였다.

3. 세 번째 기준으로는 그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은 뒤 그의 정치적 유산(이념, 제도, 노

선 등)이 계승되어 그로 해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고슬라비아

를 공산국가 중 가장 먼저 개방시켰고, 스탈린과 맞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티토는 이 기준에

걸려 탈락했다. 그의 死後(사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內戰(내전)과 대학살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티토의 노선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의 成敗(성패)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4. 네 번째 기준으론 建國(건국), 獨立(독립), 전쟁, 中興(중흥)의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평화 시의 지도자보다는 아무래도 亂世(난세)의 지도자가 돋보인다.

정치적 결과물을 먼저 살펴 본 다음 그 주인공들을 선정하기로 하였다. 정치에선 動機(동

기)보단 결과이다. 문학이나 사회운동에선 動機가 중요할지 모르나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

로 평가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 미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먼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4選을 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주도했다. 해리 트루먼. 그는 東西 냉전에서 자유

세계가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놓았고 전략의 기본 방향을 잘 잡았다. 원폭 투하, NATO 창설,

마셜플랜 추진, 트루먼독트린, 한국전 참전 등 큼직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로널드 레이건.

그는 소련 공산제국을 해체로 몰고 간 인물이다. 총 한 방 안 쏘고 惡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 영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홀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맞

서 자유세계의 보루를 지켜냈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성공시킨 마가렛 대

처 여사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

● 프랑스에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대통령이다.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6주 만에 프랑

스가 항복하자 망명정부를 세워 저항을 계속했고, 그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땐 프랑

스가 勝戰國(승전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위기에 처

하여 그를 다시 불러내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여 5공화국을 10년간 통치하면서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제도적으로 종식시켰다. 오늘의 프랑스는 드골이 중흥시킨 나라이다.

● 독일에선? 戰後(전후)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던 아데나워, 또는 독일통일의 기관차 콜 수

상 중 한 명이면 오케이!

● 일본에선? 戰後 일본을 親서방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킨 일본 중흥의 기수 요시다 시게

루 총리 이외의 인물이 있을 수 없다.

● 중국에선? 모택동은 魔王(마왕)이니 젖혀놓는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혁 개방의 흐름을 만

든 鄧小平(등소평)일 수밖에 없다.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급성장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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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회주의적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혼합한 鄧小平 노선의 승리이다.

● 머지않아 세계최대 인구국이 될 인도는?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

면 인도 독립과 建國의 지도자 네루이다. 가난하고 복잡한 인도를 그래도 민주주의가 기능하

는 나라로 만들어 끌고 간 공로는 대단하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 여사 암살, 그의 아들 암살,

종교분쟁 등등 소란스럽기는 해도 민주주의식으로 굴러간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다.

● 동남아에선? 월남의 지도자 胡志明(호지명)을 거론한 이도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가였

다는 점에서 失格(실격)되었다. 더구나 통일된 월남은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자본주

의를 향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수하르토를 꼽을 순 없

다. 부패한 독재자였고 지금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모범적이지 않다.

● 南美(남미)에선? 달력에 넣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세계 5

대 富國(부국)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으로 망친 페론을 넣을 수도 없다. 칠레가

가장 잘 나가는 나라이지만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곤란하다. 공산 혁명가 카스트로

나 선동가 차베스를 모범으로 삼을 순 없다.

● 아프리카에선? 한 사람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

정을 맺어 중동의 불씨 하나를 껐다. 그 代價(대가)는 암살이었다. 그런 점에선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다트를 이은 무바라크가 30년을 지배하였지

만, 이집트는 민주화도, 산업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아랍의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

다. 독재를 오래 했으면 경제라도 발전시켜야 할 것 아닌가?

●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있다. 남아프리카는 흑인 통치로 넘어간 후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 이 부분에서 세계 1등이다. 그럼에도 만델라의 도덕적 지도력이 白人(백인) 지배를 큰

유혈사태 없이 끝장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 이스라엘? 단연 건국의 아버지 밴 구리온이다. 문제는 아랍 세력과 저렇게 싸우는 이스

라엘 지도자를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 대만? 본토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건너온 蔣介石(장개석)과 그 후계자들이 모범적인 산업

화, 민주화를 이룬 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모택동에게 져서 본토를 빼앗긴 인물을

師表(사표)로 내세울 순 없다.

● 이슬람圈(권)의 대표 선수는 누구인가. 터키공화국을 거의 혼자서 세운 케말 파샤(아타 투

르크)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

키 제국은 해체되고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케말 파샤 장군이 군대를 모으고 그리스

를 밀어내고 오늘의 터키를 세웠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을 했다. 政

敎(정교)분리, 여성 참정권 허용, 문자개혁 등. 터키 군부는 이런 케말 파샤의 노선을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지만 최근 이슬람 세력의 견제를 받아 약화되고 政情(정정)도 불안해졌다.

● 한국에서도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한국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이므로 당

연히 대표인물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20세기에 국민국가로 출범한 여러 나라들 중 한국

이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선 異論(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만든

지도자가 12명 안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발전모델은 후진국과 開途國(개

도국)의 참고서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독립과 건국의 李承晩인가,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인

가? 두 사람은 거의 同級(동급)이다.

●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는? 한 사람이 추천했다. 토론을 해보니 탈락으로 결론이 났

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의 규모가 작다. 민주화도 안 되어 있다. 한국처럼 후진국과

개도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보편성이 떨어진다.

●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누가 대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닌, 스탈린은 자격

박탈이니 고르바초프가 남았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惡(악)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고 달력에 넣어 지

도력의 모범으로 기려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고르바초프에게 상을 줄 사람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 내가 멋대로 달력에 넣을 세계적 지도자 12명을 결정한다면 이렇다. 李承晩, 프랭클린 루

스벨트, 처칠,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두 명이 모자란다.

아무래도 이 달력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한 명을 더한다. 朴正熙! 그래도 한 명이 모자

란다. 미국에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한다. 한국을 두 번 살린 트루먼! 내가 너무 情(정)에 약한

것일까?

한국전의 재인식에서 출발해야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더타임스>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앤드루 새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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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英聯邦(영연방) 글로스터大隊(대대)의 決死抗戰(결사항전)을 다룬 《마지막 한 발》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51년 4월 하순 중공군의 대공세로 포위당한 영연방軍의 영웅적 전투(설마

리 전투)를 취재하며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상당수는 전란 중의 한국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

책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새롭고, 용감한 나라 한국을 발견한 것이다. 유엔군이 흘린 피값은 미국의 돈으로

보증되고 한국인의 땀으로 상환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기술이전에 특혜를 받은 데다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고, 유일한 자원이자 발전의 지렛대인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세

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올림픽을 열기 전해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민주화까지 이뤘

다. 오늘의 한국이 누리는 생활수준과 개인의 자유는 유럽의 중급 정도가 된다.〉

2001년 글로스터 대대 전투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참전자 일행은 전쟁기념관을 찾

았다가 깜짝 놀랐다. 의장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 환영 행사에 잘

못 온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했다고 한다. 한 참전자는 “한국이 이런 나라가 되다니, 하느님,

맙소사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허리띠가 고장 나서 상점에 들어갔더니 주

인은 새 허리띠를 주면서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웠잖아요. 작은 선물입니다.”

새먼 기자는 ‘zero to hero’란 표현을 쓰면서 한국처럼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그야말로 제

로 상태에서 일어나 영웅적 나라를 만든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성공 사례라고

주장했다. 헨리 울프스라는 영국군 참전자는 이 책(《마지막 한 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본다면 자유가 공짜가 아니란 말이 맞다. 반세기가 흘러서 뒤

돌아보니 ‘잊혀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 프레스턴 벨 씨는 著者(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의 공통점이 뭘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거예

요. 50년 전 나는 내 생명의 1년을 주었습니다.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요. 나는 한국

인들이 내가 준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였

을 때 그들의 감사를 받고는, 그리고 그들이 만든 완전히 새롭고 멋진, 유쾌한, 평등하고, 야

심만만하며, 번영하는 새 나라를 만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고

맙다고 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이는 당신들입니다.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새먼 기자는 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저서를 끝냈다.

트루먼, 韓國戰 계기로 對蘇 포위망 완성

미국 국방부가 발간한 《전쟁의 시련(1950~19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이 책에는 미국이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가 담겨 있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

할을 했다고 주장할 만하다. 세계를 두 武裝(무장) 진영으로 나눈 점,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정

치적 군사적 대결,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막는 데 있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의 증대, 유럽

과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장기 주둔, 거대해진 미국의 軍産(군산)복합체-이런 현상들은 한국

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강화되었다. 전쟁기간(1950~1953)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지도자의 역할을 완벽히 떠맡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NATO 盟邦(맹방)들을 지키는

데 최고의 우선순위를 뒀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在庫(재고)에 대응해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평화 時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아

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사주한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역이용, 소련을 봉쇄

하는 전략을 완성하고 본격적으로 군비경쟁을 시작한다.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미국은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한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게 되었다. NATO의 地上軍(지상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한 서독과는 달

리 일본은 헌법의 제약으로 소규모 자위대만 보유, 방위비를 절약하고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

는데 이 덕분에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일본이 산업 대국으로 浮上(부상)하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 때 한반도에서 싸우는 韓美(한미) 군대에 대한 보급 및 정비 기지로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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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덕분이다. 한국전은 NATO와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세 배나 늘리게 했다.

한국전은 미국이 汎세계적 규모의 동맹과 군사원조 정책을 완성하고 지속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서 미국 국방부는 정책 수립의 주요 참여자가 되었으며 세계인들은 펜타곤을 미국 군사

력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1953~1954년 미국 방위비(원자력 에너지 및 기타 非국방부 예

산 포함)는 연방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력은 두 배로 늘었으며, 한반도에서 벌

어진 전쟁에 대한 관심으로 국민들은 무기한에 걸쳐 평화 시에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요약하면,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경제부흥, 서독의 재무장, NATO 강화, 한미동

맹, 미군 倍增(배증), 해외주둔 강화 노선으로 對蘇(대소) 봉쇄망을 완성, 그 40년 뒤 소련을

무너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누가 영웅인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

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

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

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誤判(오판)과 文民(문민) 대통령에 대한 抗命(항명)과 해임으로 종

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白善燁

(백선엽),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敵(적)의 전략을 흩뜨려 버린 金鐘五(김종오) 6사단장이 높

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이

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좌익들의 선동과 전쟁 중 피해를 본 이

들의 반감, 그리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학자들의 無知(무지) 등이 결합된 때문이다.

한국군과 이승만은 북한 김일성의 기습을 받고도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를 무릅쓰고 총

력전에 의한 결사항전을 이어 나갔다. 한국군은 후퇴는 했지만 항복하진 않았다. 부대 단위

의 항복이 없었다(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이 와해되었다).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전쟁 지도를 했다.

그는 6월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

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

(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

경력자회의 지시(22:00이후)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

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

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

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

리 敵(적)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

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

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종말에선 善이 惡을 이긴다”

이승만은 6월25일 오전 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대사에게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

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전쟁기간 한국은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全 국민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았던 낙동강 전선

에서 더욱 그랬다.〉(남정옥 박사)

기습을 받은 한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1940년의 프랑스군처럼 抗戰(항전) 의지를 포기하

고 무너졌더라면 미군이 한국에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트루

먼과 함께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한국전의 두 영웅이다.

이승만이 서둘러 서울을 떠난 점은 그가 포로가 되면 한국군의 저항이 불가능해진다는 점

을 고려하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후퇴하는 군과 민간인들이 渡江(도강)하기 전에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은 군의 실책이었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 없는, 전쟁에선 흔히 있는 실

수일 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 전 국방장관은 미군 파병을 이렇게 정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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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1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였다.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理想(이상)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

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

했다. 트루먼의 파병 결정에 대해 여러 가지 학문적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근본에 깔려

있었던 것은 그의 선한 마음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건국 선포일 연설의 첫마디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

야 할 것입니다. 비록 민주주의가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비열한 기습 남침에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서 이긴 것이다.

이승만·트루먼, 국가이익을 넘어선 세계적 보편 가치 구현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9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貴國(귀국)의 병사들

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해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

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면서 〈본인은 우리의 大義(대의)

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

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라고 예언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선과 악

의 대결로 보고, 〈이 전쟁은 남북한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절대다수 韓民族(한

민족)의 대결이다〉고 정의했다.

한국전 관련 외교 문서를 읽다가 보면 공산진영 지도자들은 술수만 논하는데 자유진영 지

도자들은 大義를 항상 따지는 것이 대조적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겨울 맥아더의 오판

으로 중공군의 개입이 이뤄지고 그들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총퇴각하면서 이산가족의 비극,

흥남철수, 그리고 서울이 다시 함락되는 위기를 만났을 때 다시 한 번 한국을 구한 사람이다.

맥아더와 영국이 한국 포기론을 꺼냈을 때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

면서 이를 거부, 리지웨이의 반격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휴전 회담 때 반공포로 처리 문제

가 쟁점이 되자 자유의사를 무시한 무조건 송환을 거부한 이도 트루먼이다. 이로써 휴전 회

담이 2년을 끌었고 이 기간 미군 戰死者는 2만을 넘었다. 트루먼은 한국인 반공포로를 위하

여 自國의 젊은이를 희생시킨 것이다. 국가이익보다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인권을 더 소

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이승만이 이런 미군 전사자에 대하여 “그들은 미국인으로 죽었지만 동

시에 세계시민으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국전이 구현

한 고귀한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최하위권)이

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

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

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

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

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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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

2800달러로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

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

(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

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

가로 나타났다. 소득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하위)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

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

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

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

거이기도 하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年 평균 GDP(국

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전두환)—盧

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

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

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

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

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

지한 소득비중은 약 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

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도 똑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

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남미식)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부자)나라가 아니면 民主(민주)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

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

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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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

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

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 56%의 사망률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았던 李承晩 정부 시절에 왜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은(李 대통령은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했다), 세종대왕에게 왜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부자나라로 만들고 민

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

리다.

양식 있는 학자들은 박정희나 이승만을 독재자라 부르지 않는다.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경

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자

유 지향적 권위주의적 지도자’, 즉 ‘Liberal Authoritarian’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승

만은 6·25전쟁 중에도 국회를 해산하지도 선거를 중단하지도 언론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민

주주의를 시작한 지 3년째인 나라가 이 정도 하였다면 잘 한 것 아닌가? 朴正熙는 5·16과 10

월 유신으로 두 차례 憲政(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사후에 선거를 통하여 그 조치에 대한

追認(추인)을 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朴正熙를 싫어하다가 존경하게 된 카터 선거 참모의 고백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

의 건국의 성공모델을 만든 분이고 朴 대통령은 제도정비와 경제발전을 통해서 민주주의 국

가가 작동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분이다.

민주주의는 외양이고 그 속은 안전, 복지, 자유이다. 朴 대통령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

제를 발전시켜 안전과 복지를 확보했으므로 3분의 2 민주주의를 이룬 것이다. 안전과 복지가

확보되면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게 된다. 朴 정권에 대항해서 그 자유를 요구했던 소위 민주

화 세력은 3분의 1 민주주의를 한 셈이다.

朴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는 외국인의 평가를 나의 견해로 삼아 대신 소

개한다. 윌리엄 H. 오버홀트가 1990년대에 쓴 《중국의 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반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저자

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개도국)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

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

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

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모택동)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

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

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 씨와는 자주 논쟁

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 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식으로 성공한 산업화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

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

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

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

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주한)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

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

게 오버홀트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

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이라고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最惠國(최혜국) 대우를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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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先行(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

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

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

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

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포퓰리즘을 거부한 게 성공의 요인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

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

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

有化(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

(Populist Barrier)라고 이름 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

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

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敵對(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

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外資(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

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朴 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

터 동시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

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퀴노 대

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

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 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

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

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

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

도 했다. 오버홀트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등소평)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

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한 미국의 박정희 연구가는 세미나에서 한국의 편향된 학자들이 자신의 발표를 비판하자

이렇게 말하였다.

“저를 비난하지 마세요. 저는 팩트(fact)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굳이 공격하려면 팩트

를 공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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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인은 이들을 어떻게 기리고 있나 (이승만 동상 受難史를 중심으로)

趙成豪·조갑제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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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이들을 어떻게 기리고 있나

이승만 동상 受難史를 중심으로

趙成豪·조갑제닷컴 기자

제 2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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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 의식조사

柳錫春·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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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트루먼·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 의식조사

: 현대사 교육 문제

柳錫春·연세대학교 교수

1. 머리말

이승만·트루먼·박정희 3인의 동상건립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趙甲濟 기자(조갑제닷컴 대

표)는 다음과 같이 갈파한다. “이승만의 反共 자유민주주의 건국, 트루먼의 美軍 파병 결단,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복지와 안전은 없다. 세 위

인들은 한국을 자유세계의 방파제로 삼아 공산전체주의 체제를 무너뜨렸으니, 가히 인류의

공존공영에 이바지 한 세계사적 대인물이다. 세 분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살아남아 행복해

진 이들의 후세에 대한 교육적 의무이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랑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식을 국민들은 얼마나 공유하고 있을까? 특히, 건국과 전쟁 그리고

부국의 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는 이러한 인식에 과연 얼마나 동의하고 있을

까? 이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고

자 한다. 趙甲濟 기자의 주장은 대한민국 현대사는 물론 세계사의 전개에 의해 100% 뒷받침

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 집단이 이와

같은 주장에 과연 얼마나 동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별

개 문제다.

제 3 강연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젊은이들이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이라는 세 사람이 중심

이 되어 펼쳐나간 자랑스러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공부할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공부시키기는커녕 일부에서는 현대사를 악의적으로 폄훼하여 젊은이

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부정적 인식까지도 확산시키고 있다. 그

리고 이러한 경향은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가 과연 얼마나 심각한지 설문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현대사 특히 앞의 세 인물의 업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우리 대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대학생 표본을 통해 구체적으로 조사했다. 설문조사의 대상

이 된 대학생 표본은 총 313명이다. 이들은 연세대 116명(37.1%), 인천대 109명(34.8%), 한림

대 51명(16.3%), 서울과학기술대 37명(11.8%)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사는 2016년 2학기 강의가 갓 시작된 9월5일부터 9월9일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학교 강의실에서 교수 및 수강생들의 동의를 얻어 강의에 출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

사를 실시했다. 전공분야, 남녀, 학년 등의 구성이 골고루 분포되도록 노력하였다. 강의실에

서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누어 주고 응답자 스스로가 기입하도록 한 후 30분 후에 설문지

를 수거하였다. 분석은 SPSS를 이용하였다.

표본 구성(응답자 분포)

대학교 강의과목 소계 계 (%)

연세대학교

발전사회학 31

116 (37.1)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 29

동아시아의 대안적 근대성 56

인천대학교

국제비즈니스개론 46

109 (34.8)한국의 개발경험과 국제개발협력 38

중국경제론 25

한림대학교 정부부패론, 비교정치론 51 51 (16.3)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복지사회론 37 37 (11.8)

합계 313 3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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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학생 조사결과

2.1.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

설문은 우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응답자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은?”이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0%에 가까운

184명이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이라고 답했다(58.8%). 이에 반해 ‘1919년 4월 상해임시정

부 건립’이라고 답한 사람은 98명이었고(31.3%), ‘1919년 3·1운동’이라고 답한 사람도 15명이

었다(4.8%). 건국이 언제인지 ‘모르겠다’는 응답도 16명이나 되었다(5.1%).

(1) 응답자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은?

① 1919년 3·1운동 15명 (4.8%)

②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건립 98명 (31.3%)

③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184명 (58.8%)

④ 모르겠다 16명 (5.1%)

합계 313명 (100%)

국가를 구성하는 3대 요소 즉 영토, 국민, 주권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음은 물론 외국의

승인도 얻지 못한 ‘상해임시정부 건립’을 건국이라고 보는 응답이 30%대를 넘고 있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최근 ‘1919년 건국설’을 집중적으로 유포시키고 있는 집단의 현대사 왜곡 노력이

대학생들 사이에 상당히 퍼져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2.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사실

다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들의 평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이승만 대통

령에 대한 다음 진술 중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총 12가지의 평가를

제시하고 동의하는 항목 모두에 복수로 응답하도록 했다. 12가지 응답 중 처음 6가지는 부

정적인 평가, 그리고 나머지 6가지는 긍정적인 평가다. 응답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2)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다음 진술 중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복수 응답)

① 미군정의 꼭두각시 99개 (31.6%)

② 정읍 발언으로 분단을 고착시킨 원흉 70개 (22.4%)

③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무력화하여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 163개 (52.1%)

④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 131개 (41.9%)

⑤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236개 (75.4%)

⑥ 4·19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독재자 130개 (41.5%)

부정적인 응답 소계 (복수응답) 829개 (264.9%)

⑦ 미주의 항일운동은 물론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독립투사 58개 (18.5%)

⑧ 좌파 및 북한정권의 방해를 물리치고 UN의 지지를 통해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110개 (35.1%)

⑨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지도자 48개 (15.3%)

⑩ 6·25 남침전쟁을 막아내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끈 안보 대통령 65개 (20.8%)

⑪ 교육을 보급하여 경제발전의 씨앗을 뿌린 대통령 49개 (15.7%)

⑫ 국민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하야한 용기 있는 지도자 19개 (6.1%)

긍정적인 응답 소계 (복수응답) 349개 (111.5%)

전체 합계 (복수응답) 1,178개 (376.4%)

%는 313명 기준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12개의 진술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결과 총 1178개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응답의 분포를 313명을 기준으로 비율을 구한 결과가 위의 표이다. 대

략 응답자 한 사람 당 평균 3.7개의 복수응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376.5%). 이 표를 보

면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를 압도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부정적인 평가

의 합은 829개로 응답자 한 사람 당 부정적인 응답을 약 2.6개 선택했다(264.9%). 긍정적인

평가의 합은 349개로 응답자 한 사람 당 긍정적인 응답을 약 1.1개 선택했다(111.5%). 그러므

로 부정적인 응답이 긍정적인 응답보다 약 2.5배 많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부정적인 응답 6개를 중심으로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자. 부정적인 응답 가운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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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높은 동의를 받은 응답은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으로 313명

기준으로 75.4%가 동의했다. 이어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무력화하여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

이 52.1%,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 및 ‘4·19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독재자’가 각각 41.9% 및 41.5%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미군정의 꼭두각시’가 31.6%, ‘정

읍 발언으로 분단을 고착시킨 원흉’이 22.4%의 동의를 얻었다.

다음, 긍정적인 응답 6개를 중심으로 결과를 살펴보자. 긍정적인 응답 가운데 가장 높은

동의를 받은 응답은 이승만이 ‘좌파 및 북한정권의 방해를 물리치고 UN의 지지를 통해 대한

민국을 건국한 대통령’으로 313명 기준으로 35.1%의 동의를 얻었다. 이어서 ‘6·25 남침전쟁

을 막아내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끈 안보 대통령’이 20.8%, ‘미주의 항일운동은 물론 상

해임시정부를 이끈 독립투사’가 18.5%, ‘교육을 보급하여 경제발전의 씨앗을 뿌린 대통령’이

15.7%,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지도자’가 15.3%, ‘국민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하야한

용기 있는 지도자’가 6.1%의 동의를 각각 얻었다.

이와 같은 응답 결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추가로 실시하였

다. 12개의 진술 가운데 처음 6개 즉 1)부터 6)까지는 부정적인 의견이고, 나머지 6개 즉 7)

부터 12)까지는 긍정적인 의견이다. 응답자가 부정적인 의견 하나에 동의하면 -1을 그리고

긍정적인 의견 하나에 동의하면 +1 의 값을 주어 응답자 각자가 복수로 응답한 결과를 모두

합했다. 그렇게 하면 특정한 응답자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정도는 어떤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특정한 응답자가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 6개에 모두 동의하고 부정적인 진

술 6개에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는 +6점을 갖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 -6점을 갖게

된다. 만약 부정적인 응답에 두 번 동의하고 (-2), 긍정적인 응답에 한 번 동의하면 (+1) 그

응답자는 그 결과를 모두 합해 결국 -1의 값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만들어진 척도는 가장 부정적인 값 -6부터, 긍정과 부정이 균현을 이룬 중

립적인 값 0, 그리고 가장 긍정적인 값 +6 사이의 값을 갖게 된다. 이를 정리한 결과가 다음

의 표와 그래프이다.

점수 -6 -5 -4 -3 -2 -1 0 1 2 3 4 5 6 계

빈도 11 12 28 47 80 47 43 14 14 10 4 0 3 313

100

80

60

40

20

0-6

11 12

28

47 47 43

14 14 104

0 3

80

-5 -4 -3 -2 -1 0 1 2 3 4 5 6

(평균: -1.53, 표준편차: 2.21, 최소값: -6, 최대값: +6)

이 척도의 분포를 보여주는 막대그래프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방향에 치우쳐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2점이 가장 많은 80명이고, -1점과 -3점이 각각 47명으

로 다음으로 많다. 그리고 0점 즉 긍정과 부정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가 다음으로 많아 43

명이다. 나머지 상대적으로 빈도가 적은 경우들도 부정적인 - 값을 가진 경우가 많다. 따라

서 설문조사 결과는 대학생들 사이에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평가인가? 예컨대, 이승만에 대한 부

정적 평가 가운데 가장 높은 75.4%의 동의를 받은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의 경우를 따져보자. 3·15 부정선거의 총체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이 져야 한

다는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15 선거에서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이 무투표로 당선된 사실을 아는 대학생은 얼마나 될까?

당시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유세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경쟁자

없이 무투표 당선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3·15 부정선거는 집권여당의 부통령 후보 이

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였다. 그런데 설문에 응한 대학생들은 이승만을 ‘3·15 부

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조사 결과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주장이 너무도 사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 동의를 많이 받은 부정적인 평가 또한 같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예컨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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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이 ‘미군정의 꼭두각시’라는 진술 역시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진술이다. 해

방이 되어 남한에 들어 온 미군정은 소련과 협의하여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이 신탁통치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미군정은 이승만을 따돌리고 여운형·김규식

등을 파트너로 삼아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1946년 내내 반공을 주장한 이승만은 미군정으

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이승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심지어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고위층 인사들에게 자신의 입

장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1947년 3월 공산주

의와의 대결 즉 ‘냉전’을 선언하면서부터 이승만의 입지는 비로소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므

로 신탁통치 및 左右(좌우)합작을 추진하던 美 군정장관 하지와 엄청난 갈등을 빚은 이승만

을 ‘미군정의 꼭두각시’라고 보는 대학생들의 인식은 정말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황

당한 인식이다. 다시 한 번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

여준다.

같은 문제는 다른 부정적인 의견에서도 반복된다. ‘정읍 발언으로 분단을 고착시킨 원흉’

은 북한이 당시 이미 사실상 정부를 구축하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는 객관

적이지 못한 평가이다.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 이전인 1946년 2월 이미 북한은 사실상의

국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으며, 이어서 3월에는 정식 국가가 출범한 이후에

나 가능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므로 분단의 고착은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하였기 때

문이 아니라, 북한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먼저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역사적 사

실에 부합한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무력화하여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이라는 비난 또한 당시 이승만 대

통령이 처한 입장을 입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의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

통령 입장에서는 당시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한 친일파를 정리하는 문제보다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부상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

제였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간 사람’이라는 비난 또한 마찬가지다. 기습 남침으

로 서울이 함락되어 대통령이 거처하고 집무하는 경무대가 敵(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판인

데,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거기에 남아 敵의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통령이 무사히 후퇴한 덕분에 우리는 나중에 반격을 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통일을 향해

북한에까지 진격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왜 외면하는가?

‘4·19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독재자’라는 비난 또한 마찬가지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발발에 대한 정치적 및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위대에 대한 발포는 당시 내

무장관 최인규의 독단적 판단이라는 사법당국의 재판결과에 따라 이승만은 법적 책임을 면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하야했다. 도대체 세상의 어떤 독재자가 국민이 물

러나란다고 물러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독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오히려

‘국민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하야한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2.3.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사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들의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방식으로

문항을 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다음 진술 중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이라

는 질문에 총 12가지의 평가를 제시하고 동의하는 항목 모두에 복수로 응답하도록 했다. 12

가지 응답 중 처음 6가지는 부정적인 평가, 그리고 나머지 6가지는 긍정적인 평가이다. 응답

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3)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다음 진술 중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복수 응답-필수)

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 129개 (41.2%)

②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이비 정치인 46개 (14.7%)

③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여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사람 148개 (47.3%)

④ 정경유착으로 재벌을 살찌우고 노동자를 착취한 독재자 140개 (44.7%)

⑤ 반공을 국시로 삼아 인권을 억압하고 유신을 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한 독재자 232개 (74.1%)

⑥ 여대생을 술자리로 부르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 81개 (25.9%)

부정적인 응답 소계 (복수응답) 776개 (247.9%)

⑦ 수출주도 경제발전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하고 중산층을 양산한 부국 대통령 200개 (63.9%)

⑧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은 물론 도시와 공장의 근로의욕을 북돋운 인물 169개 (54.0%)

⑨ 서독·월남·중동 진출을 통해 국력을 일으킨 대통령 108개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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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7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⑩ 김일성과의 남북대결을 역전시키고 자주국방을 이룩한 안보 대통령 58개 (18.5%)

⑪ 산림녹화 및 환경보존 등의 정책을 추진하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한 대통령

48개 (15.3%)

⑫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며 방위산업을 일으킨 과학 대통령 44개 (14.1%)

긍정적인 응답 소계 (복수응답) 627개 (200.3%)

합계 (복수응답) 1,403개 (448.2%)

%는 313명 기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12개의 진술에 313명이 중복응답을 한 결과 총 1,403개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응답의 분포를 313명을 기준으로 비율을 구한 결과가 위의 표이다.

대략 응답자 한 사람 당 평균 4.5개의 복수응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448.2%). 이 표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보다 우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하여 현저히 약하다. 부정적인 평가의 합은

776개로 응답자 한 사람 당 부정적인 응답을 약 2.5개 선택했다(247.9%). 긍정적인 평가의

합은 627개로 응답자 한 사람 당 약 2.0개를 선택했다(200.3%). 그러므로 부정적인 응답이

긍정적인 응답보다 약 1.2배 많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2.5배에 비하면, 박정희의 1.2배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우선, 부정적인 응답 6개를 중심으로 결과를 살펴보자. 부정적인 응답 가운데 가장 높은

동의를 받은 응답은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로 삼아 인권을 억압하고 유신을 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한 독재자’라는 응답으로 313명 기준으로 74.1%가 동의했다. 다음으로는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여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사람’이 47.3%, ‘정경유착으로 재벌을

살찌우고 노동자를 착취한 독재자’가 44.7%,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가

41.2%의 동의를 각각 받았다. 여기에 더해 ‘여대생을 술자리로 부르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25.9%,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이비 정치인’이 14.7%의 동

의를 얻었다.

다음에는, 긍정적인 응답 6개를 중심으로 결과를 살펴보자. 긍정적인 응답 가운데 가장

높은 동의를 받은 응답은 ‘수출주도 경제발전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하고 중산층을 양산한

부국 대통령’로 313명을 기준으로 63.9%의 동의를 받았다. 이어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

촌은 물론 도시와 공장의 근로의욕을 북돋운 인물’이 54.0%, ‘서독·월남·중동 진출을 통해

국력을 일으킨 대통령’이 34.5% 의 동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김일성과의 남북대결을 역전

시키고 자주국방을 이룩한 안보 대통령’이 18.5%, ‘산림녹화 및 환경보존 등의 정책을 추진하

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한 대통령’이 15.3%,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며 방

위산업을 일으킨 과학 대통령’이 14.1%의 동의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응답 결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앞에서 제시한 이승만과 같은 방법으로

분석을 추가로 실시하였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경우도 이렇게 만들어진 척도는

가장 부정적인 값 -6부터, 긍정과 부정이 균현을 이룬 중립적인 값 0, 그리고 가장 긍정적인

값 +6 사이의 값을 갖게 된다. 이를 정리한 결과가 다음의 표와 그래프이다.

점수 -6 -5 -4 -3 -2 -1 0 1 2 3 4 5 6 계

빈도 2 9 16 28 48 57 62 34 24 16 10 3 4 313

80

60

40

20

0-6

29

1628

5762

3424

1610

3 4

48

-5 -4 -3 -2 -1 0 1 2 3 4 5 6

(평균: -0.48, 표준편차: 2.29, 최소값: -6, 최대값: +6)

이 척도의 분포를 보여주는 막대그래프 역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다

소 치우쳐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래프는 우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와 부정적인 평가가 균형을 이루는 0점의 빈도가 가장 많아 62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부정적인 평가인 -1점이 57명 그리고 -2점이 48명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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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79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터는 긍정과 부정이 대충 균형을 이루면서 분포한다. 예컨대 +1점이 34명으로 그 다음 순서

를 차지한 하고, 이어서는 -3점이 28명, 그리고 다시 +2점이 24명 등과 같이 교차하면서 분

포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대학생들 사이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이승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가운데, 부정적인 평가가 다소 우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하는 평가인가? 예컨대 박정희

에 대한 부정적 평가 가운데 가장 높은 74.1%의 동의를 얻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인권을 억

압하고 유신을 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한 독재자’의 경우를 따져보자.

우선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대결에 대비하여 총력체제인 유신을 단행한 일은 국가의 운

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당시 전개되던

국제환경의 변화 즉 닉슨독트린으로 인한 주한미군의 철수 및 미국과 中共의 수교에 따른 대

만의 고립과 월남의 패망 등과 같은 변수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침입한 1.21 무장공비 사건

과 美軍 군함 푸에블로호를 북한이 납치하고 미군 정찰기 EC-121를 북한이 격추시키는 등과

같은 안보불안이 대통령에게 유신과 같은 비상체제를 推動(추동)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택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가를

객관적으로 따져 보는 작업을 마쳐야만 답을 구할 수 있다.1) 첫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에 대

한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유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에 유신을 단행했어야만 했다. 셋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

에 대한 인식이 비록 올바른 것이라 해도 여전히 유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과연 이 세 가

지 대안적 판단 가운데 무엇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인가?

이 글은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글이 아니다. 다만 이 글은 10월 유신

나아가서 인권탄압이나 장기집권과 같은 쟁점이 매우 논쟁적인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응답한 대학생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설문의 응답을 선택했을

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응답자인 대학생들은 성장하면서 노출된 교

육과정은 물론 언론이나 인터넷 환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요된 단순하고 사려 깊지 못한

평가를 별 생각 없이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0월 유신이라는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쟁

점을 입체적으로 접근하며 심사숙고한 결과로 이러한 응답이 나온 것이 아닐 것이란 추론

이다.

나머지 동의를 많이 받은 부정적인 평가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예컨대, 박정희

가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여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사람’이라는 응답 역

시 역사적인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응답이다. 왜냐하면 정신대/위안부 문제는 김영삼

정부 들어오면서부터 문제가 제기된 쟁점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

하던 시기에는 정신대/위안부 당사자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문제

로 인식되지도 않은 쟁점을 근거로 박정희의 외교를 굴욕외교라고 치부하는 일은 정말이지

反역사적인 인식이다.

또한 ‘정경유착으로 재벌을 살찌우고 노동자를 착취한 독재자’라는 응답도 동일한 문제를

드러낸다. 당시 정치는 경제가 정치논리 즉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제를 정치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는 역할을 제공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오늘날 학계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면서 오히려 둘 사이엔 협조적인 시너지

가 나타날 수 있었다. 나아가서, 박정희 시대는 노동자를 착취한 시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

동자는 물론이고 농민까지도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층의 상승이동 사다리가 활짝 열

려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는 기업과 노동자가 ‘동반성장’ 하던 시대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라는 응답 역시 식민지 시대에 군인이 되기

위해 일본의 군사학교를 다닌 것을 두고 친일파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판단이 우세

하다. 동일하게 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개석은 물론 지청천을 두고 누구도 그들이 친일파였다

고 비난하지 않는다. 박정희에게만 낙인을 찍고 있다.

나아가서 보통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여대생을 술자리로 부르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정희는 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청렴하여 서거 후 단 한 푼의 부정한 돈도 발견되지 않은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이비 정치인’이라는 평가와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영호남 농촌의 지지로 도시의 지지를 받던 윤보선 후보를 선거에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대통령이다. ‘여촌야도(與村野都)’가 당시 선거의 일반적인 구도였다.1) 이춘근, 2016, 10월 “유신의 국제정치학적 해석” 박정희연구회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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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사실

(4)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진술 중 응답자가 보기에 맞는 것은? (복수 응답-필수)

① 2차 대전의 승전국 동맹 공산국가 소련을 향해 1947년 3월 ‘냉전’을 선언한 대통령 107개 (34.2%)

②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을 참전시킨 대통령 110개 (35.1%)

③ 6·25 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자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경계한 대통령 65개 (20.8%)

④ 6·25 전쟁이 끝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대통령 89개 (28.4%)

⑤ 모르겠다. 131개 (41.9%)

합계 (복수응답) 502개 (160.4%)

%는 313명 기준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관한 5개의 진술에 313명이 중복응답을 한 결과 총 502개의 응답

이 확인되었다. 이 응답의 분포를 313명을 기준으로 비율을 구한 결과가 위의 표이다. 이 가

운데 ‘모르겠다’를 제외한 4개의 응답 가운데 역사적 사실과 맞는 것은 1), 2), 3)의 응답이다.

이 세 개의 응답 가운데 한 가지라도 맞는 응답에 동의한 학생을 모두 합하면 응답자 313명의

90.1% 를 차지한다. 그러나 맞는 응답을 모두 고른 즉 1), 2), 3)에 모두 동의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4)의 응답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응답이다. 왜냐하면 ‘6·25 전쟁이

끝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응답에 동

의한 학생이 전체 응답자의 28.4%에 이르고 있다. 또한 특기할 사항은 ‘모르겠다’를 선택한 학

생이 전체의 41.9%나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응답의 분포는 앞에서 지적한 ‘역사교육이 문

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응답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5.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에 대한 종합적 평가

(5)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종합적 평가 가운데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① 공은 별로 없고 과가 절대적이다 54명 (17.3%)

② 공보다 과가 많다 133명 (42.5%)

③ 공과 과가 반반이다 69명 (22.0%)

④ 과보다 공이 많다 24명 (7.7%)

⑤ 과는 별로 없고 공이 절대적이다 5명 (1.6%)

⑥ 모르겠다 27명 (8.6%)

⑦ 무응답 1명 (0.3%)

합계 313명 (100%)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부정적인 응답 즉 ‘공은 별로 없고 과가 절대적이다’

가 54명으로 17.3%, 그리고 ‘공보다 과가 많다’가 133명으로 42.5%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 두 범주를 합한 부정적인 평가의 합계는 187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59.8%에 이른다. 반면

에 긍정적인 응답 즉 ‘과보다 공이 많다’는 24명으로 7.7%, 그리고 ‘과는 별로 없고 공이 절대

적이다’는 5명으로 1.6%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 두 범주를 합한 긍정적인 평가의 합계는

29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9.3%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평

가가 압도적이다. 한편, ‘공과 과가 반반’이라는 중립적인 응답은 69명으로 전체의 22.0%를

차지했다.

(6)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종합적 평가 가운데 응답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① 공은 별로 없고 과가 절대적이다 20명 (6.4%)

② 공보다 과가 많다 75명 (24.0%)

③ 공과 과가 반반이다 129명 (41.2%)

④ 과보다 공이 많다 66명 (21.1%)

⑤ 과는 별로 없고 공이 절대적이다 10명 (3.2%)

⑥ 모르겠다 12명 (3.8%)

⑦ 무응답 1명 (0.3%)

합계 313명 (100%)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부정적인 응답 즉 ‘공은 별로 없고 과가 절대적이다’

가 20명으로 6.4%, 그리고 ‘공보다 과가 많다’가 75명으로 24.0%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

두 범주를 합한 부정적인 평가의 합계는 95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30.4%를 차지한다.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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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83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에 긍정적인 응답 즉 ‘과보다 공이 많다’는 66명으로 21.1%, 그리고 ‘과는 별로 없고 공이 절

대적이다’는 10명으로 3.2%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 두 범주를 합한 긍정적인 평가의 합계

는 76명으로 24.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응답이

긍정적인 응답보다 조금 많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학생들 사이

에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결과이다. 한

편,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공과 과가 반반’이라는 응답이 129명 즉 전체의 41.2%로 가장 많

은 학생들이 이 응답에 동의하고 있는 모습도 흥미로운 결과이다.

(7)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한 일을 응답자가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① 공은 별로 없고 과가 절대적이다 10명 (3.2%)

② 공보다 과가 많다 27명 (8.6%)

③ 공과 과가 반반이다 63명 (20.2%)

④ 과보다 공이 많다 25명 (8.0%)

⑤ 과는 별로 없고 공이 절대적이다 7명 (2.2%)

⑥ 모르겠다 177명 (56.5%)

⑦ 무응답 4명 (1.3%)

합계 313명 (100%)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한 일에 대한 종합적 평가에서는 ‘모르겠다’는 응답이 177

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절반을 넘었다(56.5%). 또한 긍정과 부정 어느 쪽이건 합해서 10% 내외

의 응답을 보일 뿐이다. 이 결과는 대학생들이 전반적으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란 인물을 잘

모를뿐더러 그가 대한민국에 제공한 업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응답자의 의견 형성 시기와 영향을 미친 집단

(8) 이번 설문조사에서 밝힌 본인의 의견이 형성된 시기는?

① 대학생이 되어서 141명 (45.0%)

②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124명 (39.6%)

③ 중학교 재학시절에 15명 (4.8%)

④ 초등학교 재학시절에 3명 (1.0%)

⑤ 모르겠다 30명 (9.6%)

⑥ 무응답 4명 (1.3%)

합계 (일부 복수응답) 317명 (101.3%, 313명 기준)

응답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경우를 모두 포함해 응답한 전체 숫자는 317명이었다.

이 가운데 ‘대학생이 되어서’라고 응답한 사람은 총 141명인데, 이를 313명 기준으로 비율

을 구하면 45.0%이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라고 응답한 사람은 총 124명인데, 마찬가지 방

법으로 비율을 구하면 39.6%이다. 따라서 응답한 대학생들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대학 진학 후 혹은 그 직전인 고등학생 시절에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학교 재학시절

에’라고 응답한 사람은 15명으로 4.8%,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3명으

로 1.0%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르겠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30명으로 9.6%이고, 문항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4명으로 1.3%를 차지했다.

(9) 이번 설문조사에서 밝힌 본의의 의견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집단은?

① 부모 형제 등 가족 36명 (11.5%)

② 중고교 시절의 교사 75명 (24.0%)

③ 대학생이 된 후 수강한 과목의 교수 47명 (15.0%)

④ 가까운 친구들 19명 (6.1%)

⑤ 신문과 방송 등 매스미디어의 보도 64명 (20.4%)

⑥ 인터넷 매체를 통한 정보 94명 (30.0%)

⑦ 관련된 주제에 관한 독자적 연구 (문헌연구 등) 33명 (10.5%)

⑧ 모르겠다 39명 (12.5%)

합계 (일부 복수응답) 407명 (130.03%, 313명 기준)

응답자는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경우를 포함해 응답자 전체 숫자는 407명이었다.

이 가운데 대학생들의 의견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우는 ‘인터넷 매체를 통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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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로 94명(30.0%)이고, 그에 이어 ‘중고교 시절의 교사’가 75명(24.0%), ‘신문과 방송 등 매스

미디어의 보도’가 64명(20.4%)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대학생이 되어 수강한 과목의 교수’가

47명(15.0%), ‘부모 형제 등 가족’이 36명(11.5%), ‘관련된 주제에 대한 독자적 연구’가 33명

(10.5%) 등의 순서였다. 가장 영향을 작게 미친 집단은 ‘가까운 친구들’로 19명(6.1%)이었다.

‘모르겠다’는 응답도 39명(12.5%)이나 되었다.

이러한 응답의 결과는 앞에서 이승만, 박정희, 트루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문제를 항목

별로 깊이 있게 검토할 때 지적한 문제 즉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지적이

사실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다. 역사교육과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환경이 대학생들의 현대

사 인식을 부정적으로 유도하고 있음을 이 설문결과가 명백히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터넷’(30.0%), ‘교사’(24.0%), ‘매스미디어’(20.4%) 라는 세 가지 소스의

영향력을 합치면 무려 74.4%라는 영향력을 이 세 항목이 행사하고 있다. 이는 ‘부모 형제 등

가족’이 미치는 영향 11.5%보다 무려 일곱 배에 가까운 영향력이다.

4. 맺는말

대학생 3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의 젊은이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살펴 본 건국·호국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부국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대학생들의 평가가 이를 확인해 준다. 또한 우리나라를 6·25 전쟁에서 구해준 동맹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예 잘 알지 못하고 있음도 드러났다.

유라시아 대륙이 온통 공산주의로 붉게 물들 때 한반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

가를 온갖 역경을 뚫고 세우고 또한 6·25 남침전쟁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을

우리 대학생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그가 말년에 실수를 하였다고는 하지

만, 그 실수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에게 제공한 공로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대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

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들의 평가가 이

승만 대통령보다는 다소 우호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부정적인 경향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천년 가난을 물리치고 경제를 건설하여 마침내는 북한을 압도하는 국력

을 일궈내며 민족중흥을 실현하였다. 물질적은 번영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자극으로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대통령이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 또한 잘못

이 없는 완벽한 지도자는 아니지만, 그의 기여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모

범적인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거쳐 이제는 선진국 문턱까지 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 또한 젊은 대학생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고

있다.

무엇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이런 의식을 갖게 만들었는가? 이 조사 결과는 바로 ‘교육이 문

제고, 언론이 문제’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에 대한 부정

적 인식을 심어준 환경이 바로 ‘인터넷’, ‘교사’ 그리고 ‘매스미디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

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입력되는 시기가 ‘대학생이 되어서’와 그

바로 前 단계인 ‘고등학교 재학시절’이라는 사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줄기차게 문제가 제기되어 온 ‘교육과 언론’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법원에 의해 ‘法外(법외)노조’라는 판결을 받은

전교조의 활동을 제거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고등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도덕한 국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현대사 교과서를 적절히 수정하여 있는 그대로의 역사 즉 자랑스러운 현대사를 배

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매스미디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무차

별적으로 대한민국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악의적인 여론이 퍼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감시해

야 한다.

돌이켜 보면 ‘효순·미선 사건’은 물론이고 ‘광우병 사태’ 그리고 ‘천안함 爆沈(폭침)’ 등이 바

로 이러한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경우다. 다시는 이런 근거 없는 대한민국 폄훼가 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젊은 세대의 영혼을 갈아먹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

여야 한다.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한 정부는 물론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각각의 가정에서 젊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부모가 소통하며 확인하여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가와 가정이 힘을 합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다. 물론 ‘교육’이나 ‘언론’ 그리고 ‘인터넷’이 이를 비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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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7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도 만들어야 한다. 全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다음 세대가 이어갈 수 있도

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 세 사람의 동상이 건립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록: 설문의 배경설명과 응답자의 인구사회적 배경

(10) 응답자의 성별은?

① 남자 169명 (54.0%)

② 여자 144명 (46.0%)

합계 313명 (100%)

(11) 남자인 경우 군복무 여부는?

① 미필 41명 (24.2%)

② 군필 120명 (71.0%)

③ 면제 6명 (3.6%)

④ 무응답 2명 (1.2%)

합계 남자 169명 (100%)

(12) 응답자의 학년은?

① 1학년 44명 (14.1%)

② 2학년 75명 (24.0%)

③ 3학년 99명 (31.6%)

④ 4학년 93명 (29.7%)

⑤ 무응답 2명 (0.6%)

합계 313명 (100%)

(13) 응답자의 학번은?

① 16학번 43명 (13.7%)

② 15학번 44명 (14.1%)

③ 14학번 47명 (15.1%)

④ 13학번 69명 (22.0%)

⑤ 12학번 53명 (16.9%)

⑥ 11학번 29명 (9.3%)

⑦ 10학번 혹은 그 이전 28명 (8.9%)

합계 313명 (100%)

(14) 응답자의 전공계열은?

① 자연과학계열 21명 (6.7%)

② 인문사회과학계열 285명 (91.0%)

③ 예체능계열 4명 (1.3%)

④ 무응답 3명 (1.0%)

합계 313명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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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디에 동상을 세울 것인가

趙佑石·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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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91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어디에 동상을 세울 것인가?

: “위인을 기억하는 국민은 위대해진다”

趙佑石·KBS 이사

인류사에 보편성을 갖는 大人物

오늘 강연회에서 나온 메시지는 명백하다. 李承晩(이승만)·트루먼·朴正熙(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결정적 인물이자 20세기 세계사의 물꼬를 바꾼 정치지도자라는 것, 뒤늦은 지금

이라도 세 분 동상을 세워 기리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원론

차원의 명제가 아니다. 세 분의 동상 건립은 국가정체성이 흔들려온 대한민국을 역사의 초석

에 올려 세우는 훌륭한 방법이며, 현대사를 일상의 삶 속에 체감하면서 우리 자신을 민주시

민으로 훈련하는 요긴한 방식이라는 합의가 중요하다.

이번 기회에 재확인해보자. 무엇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建國(건국)의 지도자이며, 미국 대

통령 트루먼은 6·25전쟁 당시 이 나라를 도와준 護國(호국)의 恩人(은인)이다. 그리고 한강

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는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산업화 모델을 창출해낸 富國(부국)의 지도자

가 맞다. 대한민국 정통사관을 배격하는 일부 무리를 제외하고 균형감각을 가진 시민의식을

가진 이라면 이 점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 세 명의 위인은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만든

그랜드 디자이너로 손색이 없다.

재확인하지만 그들의 공헌은 대한민국의 울타리를 넘어서며, 인류사에 보편성을 갖는다.

제 4 강연20세기 수십억 인류에 자유민주주의를 확산시켜 자유와 번영을 선물한 공로 덕분이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1963년 시인 프로스트 추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와 사회란 스스로 기념하고 기억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위인 세 분의 동상을 추진해온 동상건립추진모임(동건추)은 이 말을 좀 더 압축했다.

“위인을 기억하는 국민은 위대해진다.”

公共공간에 세워야

오늘 강연회는 이런 사회적 논의를 열기 위한 첫 작업으로 의미 있는데, 이번 발제는 이 동

상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리 밝혀두지만 조형물로서의 동상 3基(기)의 제작을

맡은 작가는 현대조각가 김영원(69) 전 홍익대 미대 교수이며, 일정상으로는 2017년 봄까지

세 동상이 완성 가능하다. 이후 언제라도 公共(공공)공간에 건립될 준비를 마친다는 뜻인데,

바람직하기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이 나란히 세워지는 것이 합당하

다. 그 이전까지 건립 장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긴요하다.

본 발제문은 그 논의를 위한 실마리이다. 동상 3基가 세워질 위치 중 가장 소망스러운 공

간을 상정해보고, 그게 짧은 시일 내 이뤄질 수 없는 구조라면 차선의 방안도 검토해볼 생

각이다. 우선 장소 검토에 앞서 이 동상들의 크기와 대표성 문제를 적절히 고려해야 한다.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은 사이즈가 4.2m이며, 이 정도는 대형 사이즈에 속한다. 여기

에 비슷한 높이의 좌대까지 갖춰 특정장소에 올려 세워질 경우 총 8m 내외가 될 것으로 추

정된다.

때문에 세 동상은 한적하고 작은 공원이나 小道路(소도로) 주변 등과는 어울릴 수는 없

으며, 서울을 포함한 주요도시의 公共공간이나 간선도로 그리고 대형건물 옆의 너른 공간

에 세워지는 게 합당하다. 이들 동상 3기와 함께 거론될 수 있는 기왕의 동상도 대상이 제

한되어 있다. 일단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은 높이 6.5m(좌대 10m)이며, 그 뒤편의 세

종대왕 동상은 높이 6.2m(좌대 4.2m)다. 참고로 서울남산의 백범 김구 동상은 높이 4m에

이른다.

이번에 제작된 동상 3기의 사이즈만 고려대상이 아니다. 세 분의 이름 자체가 전국적이며,

세계사적 차원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접근 가능한 공간, 최적의 공공장소 등에 세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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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합리적이다. 동상 제작이 정부나 지자체가 주도한 게 아니라 순전히 민간의 주도로 이뤄졌

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 이 자리가 다양한 견해 제시와 함께 탄력적 합의를 위해

머리를 마주하는 첫 계기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국가상징 거리 광화문 광장 건립案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을 세울 최적지는 단연 서울 광화문 광장이다. 이 점 논란의

여지가 없다. 2009년 탄생한 광화문 광장은 국가상징 거리라는 개념으로 출발했고, 국민 인

식 속에도 그렇다. 안타깝게도 전 서울시장 오세훈의 작품인 이 광장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고 있다. “광화문 광장이 담으려는 국가정체성이 의문시된다” “광화문 광장에서 대한민국

의 오늘은 실종되어버리고 없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나?” 등의 비판

이다.

광화문 광장은 무엇 때문에 이런 비판을 듣게 되는 것일까. 우선 이순신 동상 뒤에 세종대

왕 동상이 들어서면서 국가상징 거리가 조선왕조 시대로 회귀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본래부터 염두에 뒀다는 六曹(육조)거리 복원 등의 개념도 그러한데, 구상 단계부터 광장이

대한민국의 오늘을 드러내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공산세력에 맞서 大韓(대한)

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이들에 대한 감사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한 지도자

에 대한 敬意(경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한민국과 무관한 광화문 광장, 우리 시대와 동떨어진 광화문 광장은 무얼 뜻할까? 이 나

라의 기이하고 뒤틀린 정치문화 구조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 강연자는 예전부터 대한민국을

‘未生(미생)국가’로 분류해왔다. 헌법 제4조가 명문화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북한의 핵 위

협을 포함한 국내외 위협 속에 위험천만한 상황이라 ‘完生(완생)국가’에서 아직 멀다는 뜻이다.

국내정치만 해도 여당 새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가치집단-이념집단에서 크게

멀며, 야당 둘은 1980년대식의 운동권 정당에 머물러 있다. 이 땅의 언론 역시 심하게 망가져

있다. 이런 구조에서 국가와 사회가 깨질 듯 말 듯 항구적 위기를 반복하는데, 그 결과 대한

민국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미생국가다. 국민의식은 더 문제다. 이 땅의 국민들에게 자유민주

주의란 공짜이며, 경제번영이란 당연히 자기 몫이고, 국가안보-체제수호쯤이야 미군에게 하

도급을 준 영역이다.

이런 미생국가 한국 땅에서 安保(안보)를 말하면 수구꼴통의 냉전주의자로 분류되며, 평화

와 공존 따위를 들먹여야 개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애국을 말하는 사람은 숫제 팔불

출로 분류된다. 이런 헛소리가 상식으로 통하는 현실에서 국가상징 거리 광화문 광장이 껍데

기뿐이라는 게 우연일 리 없다. 이에 대한 비판도 아주 없지 않지만, 있다 해도 사회적 동력

을 얻기가 힘들다.

金文洙(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여러 차례 광화문 광장의 정체성 상실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므로 광화문 광장에 이

승만·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 언론인 孫世一(손세일) 씨도 “광

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심장이기 때문에 동상은 현대 한국의 상징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

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국가정체성 혼란은 광화문 광장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지폐 인물, 공항

과 주요 도로 이름 등에도 여지없다. 대한민국 화폐의 인물은 이율곡, 신사임당, 이퇴계, 이

순신, 세종대왕 등 모두가 조선시대 사람들이며 거리 이름에도 세종로, 퇴계로 등이 사용되

고 있다.

우린 양복에 넥타이 매고 살면서도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튼 근대 이전 사람으로 사는 셈이

다. 이런 구조는 분명 잘못이다. 우리의 곁에 대한민국의 영웅들이 가까이 다가와야 하며, 이

를 통해 자연스럽게 現代史(현대사)와 말을 건넬 수 있게 해야 옳은데, 이런 작업이야말로 너

른 의미의 사회적 교육이다. 동시에 치유의 뜻도 담는다. 21세기를 살면서, 19세기 이전을 생

각하는 거대한 정신병리학적인 認知(인지)부조화의 구조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런 방식의 광화문 광장 구성은 세계 주요도시와 비교해 봐도 보편성이 결여

돼 있다. 런던-뉴욕-파리-베이징 등 세계 주요 국가 수도의 상징도로만 살펴봐도 이게 쉽게

드러난다. 서울은 너무도 이질적인 도시로 남아있다는 뜻인데, 우선 英美(영미)식 국제 질서

를 만들어낸 영국 런던과 맞비교를 해보자. 런던의 경우 국가상징 거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서 시작해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1㎞ 정도의 화이트홀 거리인데, 이 거리의 시작은 웨스

트민스터 사원 옆의 윈스턴 처칠의 동상이다.

나치 독일의 손에서 현대 영국을 구출해낸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을 영국인들은 전진 배

치한 것이다. 처칠 동상을 뒤로 한 트라팔가 광장에는 재무부, 외교부, 다우닝街, 국방부 등

이 몰려 있는데 여기에 넬슨 동상을 세우는 걸 영국인들은 잊지 않았다. 1805년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의 연합함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한 것이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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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은 국가상징 거리 화이트홀의 시작과 끝을 처칠-넬슨으로 각각 마무리한 것인데, 그

만큼 런던은 동시대성을 담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로 視線(시선)을 옮겨 보자. 워싱턴의 국가상징 거리는 두 개이다.

두 개의 상징거리는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

르고, 다른 하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백악관에 이른다.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르는

넓은 길은 항공우주박물관, 허시혼미술관, 자연사박물관 등 20세기 제국 미국을 느낄 수 있

지만,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공간은 무엇보다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리는 워싱

턴기념탑이다.

그와 별도로 링컨기념관은 규모와 위치로 경외감을 자아낸다. 그런 링컨은 자동차, 지폐 등

에 이름과 얼굴을 빌려주고 있다. 미국인은 하루도 링컨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없지만, 기념관

뒤편 포토맥 강변에는 제퍼슨기념관, 루스벨트기념관, 케네디센터 등이 두루 위치해 있어 오

늘의 미국을 만든 영웅들과 함께 숨 쉬게 만들었다. 애국심이 과연 어떻게 형성되는지, 시민

의식은 무얼 말해주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런 구조는 프랑스 파리라고 해서 예외일 리 없다. 상식이지만 그곳의 샹젤리제 거리는 국

가상징 거리인데, 서울에 국가상징 거리 조성을 추진하는 우리 정부도 그곳을 벤치마킹한 것

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그곳에서 배운 건 없다.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를 살펴보면, 개선문 둘레는 샤를 드골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드골의 동상이 서 있다.

드골은 개선문 앞에서 1945년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이 만나

기 직전에 조금 작은 크기의 클레망소 광장이 있다. 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장

관과 수상으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즉 샹젤리제 거리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20세기까지의 프랑스 역사

를 압축했다.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시절,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파리 해방이

동상, 거리 이름, 지하철 驛舍(역사) 이름 등으로 남아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런 구조는 영미 국가는 물론 중국의 베이징도 닮은꼴인데, 그곳의 국가상징 거리는 장안

대가(長安大街)다. 인민대회당, 天安門(천안문), 자금성, 마오쩌둥(毛澤東) 기념당이 몰려있는

그곳에 어떤 관광객이라도 안내되는 곳이 천안문 광장이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입구

의 마오쩌둥 초상화다. 천안문 광장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코스인 자금성 옛 황실 궁

전을 보려면 마오 초상화 밑을 통과해야 한다. 사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사람은 청나라 황제 강희제이지만 중국은 그의 동상을 광장에 세우지 않았다는 걸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강희제와 오늘의 중국은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오의 거대한 초상화를 배치해 청조시대와 분명한 구분을 짓고 있다. 즉

마오는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상식이지만 국가상징 거리는 그 국가의 탄생 역

사, 전몰·희생자에 대한 감사, 국가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미래비전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을 세우는 작업은 현대국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

성을 완비해줄 득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을 이 공간에 세우는 작

업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크다.

광화문 광장 이외의 공간-남산·전쟁기념관 등

광화문 광장이 最適(최적)의 장소이며, 현재까지 미생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완비시

켜줄 훌륭한 카드라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3기가 이곳에 세워질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그리 높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합의 부족

때문이다. 反대한민국 세력이 당장 들고 일어날 것이고, “지금의 광화문 광장이 좋다”며 억지

를 부릴 수도 있다.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곁에 백범 김구 동상을 세우자는 절충안도

나올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友軍(우군)도 부족하다. 이념집단에서 먼 여당 새누리가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

우며, 1980년대 운동권 정당에 머물러 있는 야당 둘에 대한 기대도 難望(난망)이다. 위선적

리버럴리스트로 전락한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현실

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어떤 국민과 사회세력이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건립이라는 사안에 합당한 관심을 표할 것인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단 통일을 전후해 예기키 않은 정치사회적 변수가 등장할 경우를 한번

예상할 수 있다. 이때 통일한국을 상징하는 국가상징 거리인 광화문 광장의 재정비 차원에서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3基 조성문제 등이 재등장할 텐데, 이 경우는 공사가 커져서 기

존의 이순신-세종대왕 동상을 포함한 全面(전면) 재배치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

거나 오늘의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면 광화문 광장 외에 나머지 동상건립 후보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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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7李承晩·트루먼·朴正熙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도 거론해봄직하다.

발제자는 광화문 광장 외에 제2의 후보지로 서울 강북지역 4곳, 강남지역 2곳 안을 동시에

제시해볼까 한다. 강북지역은 서울시청 광장, 남대문 주변, 서울 남산, 용산 전쟁기념관 등 4

곳이며, 강남지역은 테헤란로, 코엑스 앞 등 2곳이다. 선정 기준은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

상 3基가 갖는 역사적 무게에 더해 그걸 수용할 수 있는 해당 지역의 대표성과 주변공간의

확보 문제, 그리고 시민들의 접근성과 동상 건립 이후 교육적 효과다.

각각의 장소에 대한 짧은 소견을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서울시청 광장은 광화문 광장과

지근거리여서 노출도가 높은데다가 수도 서울의 상징 공간이다. 적절히 공간이 넓어 동상 3

기를 나란히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와 함께 남대문 주변도 동시에 검토해볼 수

있는데, 그곳은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시청 광장 등에 크게 밀리지 않는 서울의 중심이라는

점, 국보1호의 상징성을 업고 들어간다는 점이 장점이다. 단 주변공간의 분위기가 좀 산만하

며,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동상과 접촉하기보다는 지나가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게 아쉬움으

로 남는다.

함께 생각해볼만한 공간이 서울 남산이다. 유력한 동상 건립지역 후보지의 한 곳이 여기인

데,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남산은 서울시민들이 나들이하는 최고의 장소로 꼽히던 곳이

었지만, 지금은 또 달라졌다. 그럼에도 애국가에도 등장하며 여전히 서울의 상징으로 남아있

는 공간이다. 기왕에 이곳에 건립되어있는 김구-안중근-김유신 동상 등과 함께 새로 세워질

동상 3기가 적절한 조화를 이룰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

서울시청 광장, 남대문 주변, 서울 남산 등에 못지않은 동상건립 후보지가 용산의 전쟁기

념관이다. 전쟁의 기억을 통해 평화를 기원하는 이 전시관은 우선 공간이 밀도가 높다. 11만

3265평방미터의 대지에 9000여 점의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어 시민들이 현대사를 체험하며

관람하는 공간이다. 전시 공간 전면 리모델링에 성공한 3년 전후부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

령 등 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해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문화 관련

체험 공간 제1위(기존의 만년 1위로 군림하던 공간인 경복궁을 2위로 밀어냈음)로 성큼 떠오

른 점도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호국-애국의 코드로 무장된 이 전시관은 군 장병과 학생들을 위한 교육공간

으로 인기가 높기 때문에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이 놓일 경우 훌륭한 조화를 이룰 것으

로 기대된다. 또 하나 이 공간의 장점은 조금 전 언급한 남대문 옆과 달리 주변공간의 분위기

가 산만하지 않다는 점이다. 즉 시선과 관심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남대문

옆과 달리 시민들이 동상과 접촉하면서 일체감을 형성하기에 좋다는 뜻이다. 큰 사회적 논란

을 일으키지 않은 채 국방장관이나 전쟁기념관장만 결심해도 동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서울 강남의 경우 테헤란로와 코엑스 앞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동상 건립 후보지다. 테헤

란로의 경우 강남지역의 대표성이 있고 널찍한 주변이 강점이다.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역 사

거리에서 삼성동-삼성교의 구간에 이르는 이 도로는 길이 4km에 너비는 50m이라서 시야가

넓다. 강남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왕복10차선 간선도로다운 이 공간은 역삼동·대치동·삼

성동으로 이어지면서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3기가 갖는 역사적 무게를 잘 떠받혀줄 것

으로 예상된다.

동시에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종합전시관 코엑스 앞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코엑스는

삼성역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국제행사를 많이 개최해 유명세가 높다. 고층 빌딩과 저

층 쇼핑몰의 조화를 이루고 모던한 이미지를 주고 있는 이곳은 2007년 제2회 강남구 아름다

운 건축물로 선정되었는데, 코엑스가 한국무역협회 소속 건물이라는 것도 고려 요소의 하나

다. 동상 3기 중에는 수출입국의 대명사인 박정희가 들어있기 때문에 매칭도 좋다.

맺음말: 통일 후 북한에도 세우자

강연자는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건립의 후보지로 국가상징 거리인 광화문 광장을 최

우선으로 상정하고, 동시에 제2후보지로 서울 강북지역 4곳, 강남지역 2곳 안을 동시에 제시

해봤다. 강북지역은 서울시청 광장, 남대문 주변, 서울 남산, 용산 전쟁기념관 등 4곳이며, 강

남지역은 테헤란로, 코엑스 앞 등 2곳이다. 선정 기준은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3基가

갖는 역사적 무게에 더해 그걸 수용할 수 있는 해당 지역의 대표성과 주변공간의 확보 문제,

그리고 시민들의 접근성과 동상 건립 이후 교육적 효과를 감안했다.

동시에 고려할 대목은 현대미술에서 동상의 경우 처음에 제작한 단 1점만이 아니라 같은

작품을 추가로 찍어낸 6점 내지 12점까지 오리지널 작품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단 1점만이

오리지널로 인정받는 平面繪畵(평면회화)와 다른 점인데, 그렇다면 광화문 광장을 포함한 강

북 4곳, 강남 2곳은 어느 한 곳이 선정될 경우 다른 곳에는 동상을 못 세우게 된다는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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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거꾸로다. 한 곳에 자리 잡은 뒤 시민의 눈에 친숙해진 이후 다른 곳에 얼마든지 추

가 건립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니 그래야 정상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른 장소 속에서 또 다른 매칭을 보이고 그곳만

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국가상징 거리인 광화문 광장에 먼

저 건립된 이후 제2후보지에 추가로 건립되는 게 일단 명분에 맞으며, 이번 사안의 중요성에

비춰서도 옳다. 하지만 한국 사회 특유의 예상되는 논란을 피해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서울

남산 등에 일단 건립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그 뒤 더 많은 사회적 동의를 거친 다음 광화

문 광장에 추가 건립하는 것도 탄력적인 일 추진 방식의 하나다.

서울에 한정된 얘기만은 아니다. 광화문 광장을 최우선으로 하고, 제2후보지로 서울 강북

지역 4곳, 강남지역 2곳 안을 제시해봤지만, 건립과정에서 다른 地自體(지자체)에서 자발적으

로 건립을 요청할 경우 추가 설립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또 다른 상황 발생도 예상할

수 있다. 통일 이후 김일성-김정일 동상 수천, 수만 기로 뒤덮여 있는 북한에서 이승만·트루

먼·박정희 동상 건립에 대한 또 다른 요청이 들어올 수 있다. 아직은 때가 좀 이른 예측이지

만, 그게 이승만·트루먼·박정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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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 발족 기념 강연회 자료집

지은이│趙甲濟·柳錫春·趙佑石·趙成豪

펴낸이│趙甲濟

펴낸곳│조갑제닷컴

초판 2쇄│2016년 10월11일

주소│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길36 용비어천가 1423호

전화│02-722-9411~3

팩스│02-722-9414

이메일│[email protected]

홈페이지│chogabje.com

등록번호│2005년 12월2일(제300-2005-202호)

본 책은 비매품이며, 파손된 책은 교환해 드립니다.

“대한민국 恩人들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도 세계 속에서 바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