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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시공간 구조 1. 자연 모방, 현실의 재현 리얼리티-세계성-경계 자연--저절로 그러함, 세계 2. 세계의 고전들이 보여주는 세계상 <논어>--<주역>의 괘상 2. 1. <사기>--본기, 표, 서, 세가, 열전 자금성--북극성이 머무는 곳. 우주의 중심. “세계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이다. 정치의 힘만이 세계를 정리해준다. 정치를 떠맡은 자 가 세계를 떠맡는다. <사기>에서 말하는 정치라는 의미는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곧 세 계를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역사의 동력이며 세계의 동력이 되는 자가 정치적 인간이다. <사기>의 주역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인간이다. 정치적 인간은 또한 세계의 중심이 되며, 그래서 12본기가 이루어졌다. 정치적 인간은 분열하는 집단을 이룬다. 그래서 세가가 이루 어졌다. 정치적 인간은 실은 독립된 개인이다. 그래서 70열전이 만들어졌다.” --다게다 다 이준의 <사마천과 함께 하는 역사여행>에서 2. 2. <신곡>--100개의 칸토스--지옥-연옥-천국. 신을 중심으로 한 체계 2. 3. <土地>--빅뱅 이후 전개된 우주의 역사. 한국인의 세계관 “태허(太虛)는 무형(無形)하니, 기(氣)의 본체다.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객형 (客形)일 뿐이다.--장재(張載) 3. <탁류>의 시공간 구조 채만식은 자신의 주장르인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단막극, 평론 등 다양한 장르 에서 활동을 펼쳤다. 이 사실은 채만식이 다루어지는 소재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 로 크로노토프를 조작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 에 나타난 크로노토프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여러 장르의 특질을 고려해 야 하며 장르들 사이의 연관관계도 파악해야 한다. 「제향날」이라든가 「심봉사」같은 희 곡 작품을 단 장편소설과 관련지어 검토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가장 공력을 들인 장르가 소설임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의 크로노토프에 대한 검토 를 중심으로 채만식 문학의 크로노토프를 고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송하춘은 1930년대 중엽에 창작된 「인테리와 빈대떡」, 「레디 메이드 인생」, 「명일」 을 작가 고유의 ‘역사와 현실을 보는 겹시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 관점은 「명일」이 작가의 주요 소설을 관통하는 독자적인 플롯의 대응형태와 시공간 구조 를 나타내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와 현실, 시간과 공 간이 내적으로 연관을 지으면서 융합하는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1930년에 발표 된 「산동이」를 먼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서 「산동이」는 채만식이 역사와 현실,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소설 속에 역어내는지 살필 수 있는 비밀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작품이다. 익히 알다시피 「산동이」는 염상섭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은 작품이다. 처 음에는 공공기관을 폭파하는 테러가 묘사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이 제시되고 있어 사 회적인 문제를 다룰 것처럼 해놓고는 뒷이야기에서는 그런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잣집 하인인 산동이의 개인사에 얽힌 일들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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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시공간 구조

    1. 자연 모방, 현실의 재현

    리얼리티-세계성-경계

    자연--저절로 그러함, 세계

    2. 세계의 고전들이 보여주는 세계상

    --의 괘상

    2. 1.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자금성--북극성이 머무는 곳. 우주의 중심.

    “세계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이다. 정치의 힘만이 세계를 정리해준다. 정치를 떠맡은 자

    가 세계를 떠맡는다. 에서 말하는 정치라는 의미는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곧 세

    계를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역사의 동력이며 세계의 동력이 되는 자가 정치적 인간이다.

    의 주역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인간이다. 정치적 인간은 또한 세계의 중심이 되며,

    그래서 12본기가 이루어졌다. 정치적 인간은 분열하는 집단을 이룬다. 그래서 세가가 이루

    어졌다. 정치적 인간은 실은 독립된 개인이다. 그래서 70열전이 만들어졌다.” --다게다 다

    이준의 에서

    2. 2. --100개의 칸토스--지옥-연옥-천국. 신을 중심으로 한 체계

    2. 3. --빅뱅 이후 전개된 우주의 역사. 한국인의 세계관

    “태허(太虛)는 무형(無形)하니, 기(氣)의 본체다.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객형

    (客形)일 뿐이다.--장재(張載)

    3. 의 시공간 구조

    채만식은 자신의 주장르인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단막극, 평론 등 다양한 장르

    에서 활동을 펼쳤다. 이 사실은 채만식이 다루어지는 소재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

    로 크로노토프를 조작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

    에 나타난 크로노토프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여러 장르의 특질을 고려해

    야 하며 장르들 사이의 연관관계도 파악해야 한다. 「제향날」이라든가 「심봉사」같은 희

    곡 작품을 단 ‧ 장편소설과 관련지어 검토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가장 공력을 들인 장르가 소설임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의 크로노토프에 대한 검토

    를 중심으로 채만식 문학의 크로노토프를 고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송하춘은 1930년대 중엽에 창작된 「인테리와 빈대떡」, 「레디 메이드 인생」, 「명일」

    을 작가 고유의 ‘역사와 현실을 보는 겹시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

    관점은 「명일」이 작가의 주요 소설을 관통하는 독자적인 플롯의 대응형태와 시공간 구조

    를 나타내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와 현실, 시간과 공

    간이 내적으로 연관을 지으면서 융합하는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1930년에 발표

    된 「산동이」를 먼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서 「산동이」는 채만식이 역사와

    현실,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소설 속에 역어내는지 살필 수 있는 비밀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작품이다. 익히 알다시피 「산동이」는 염상섭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은 작품이다. 처

    음에는 공공기관을 폭파하는 테러가 묘사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이 제시되고 있어 사

    회적인 문제를 다룰 것처럼 해놓고는 뒷이야기에서는 그런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잣집 하인인 산동이의 개인사에 얽힌 일들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 바로 이렇게 겉모습과 속 이야기가 전혀 다른 양상을 ‘양두구육’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이

    에 대해 채만식은 하인 노릇을 하던 산동이가 옥섬이의 수난과 죽음에서 깨달음을 얻고 사

    회적으로 각성된 인간으로 바뀌어가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더라면 소설이 발표나 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반박했다. 검열을 의식해 작품의 표현 기법과 수위를 조절했

    으므로 평론가라면 마땅히 작품의 이면을 살펴야 했다는 관점이다. 이 주장은 일응 수긍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당시 논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하

    튼 이렇게 작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산동이」는 작품 구조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두 개

    의 절로 나뉘어 있는 소설은 1절에서는 자세한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폭탄테러와 총격전

    의 양상을 폭파음과 총소리, 사람들의 당황한 모습, 신문의 보도 등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모자이크처럼 묘사하고 있어 그것이 어떤 사건이고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전후의 사정

    을 알 수 없게 표현하고 있다. 그 장면은 겨우 한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으로서 독자에겐

    폭탄 터지는 소리와 신문보도, 총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만 제

    시된다. 검열에서 잘린 까닭에 더 짧아졌다고 하는 그 짧은 제시에 이어지는 2절은 그 사건

    을 일으킨 주인공 산동이가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하인노릇을 하고 자라 하녀인 옥섬이와

    좋아지내다 옥섬이가 주인영감한테 강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집을 떠난 사건을 사실적으

    로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한 부분은 몽타주나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하여 모더니즘적 방법

    에 의해 제시되고 다른 한 부분은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이니 평론가들이 좋은 먹이

    를 발견한 것처럼 달려들었던 사정은 보지 않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형태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판을 쏟은 문학인들에게 반론을 전개하면서 개진한 내

    용을 참고하면 채만식의 의도는 하인 노릇을 하던 산동이가 일정한 계기로 인해 사회적 존

    재로서 자신에 대한 각성을 하고 거듭 남으로써 식민지 기구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주인 영감에게 복수를 하는 사건을 형상화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짧게 처리

    된 모자이크 부분의 일부가 검열에서 삭제된 데다 1절과 2절의 연결 관계도 충분히 제시되

    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도가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점에서 「산동

    이」는 일종의 실패작처럼 되었으나 작가가 자기 소설 고유의 크로노토프를 창안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산동이」에서 소설의 1절은 일종의 사회적 공간이다. 어떤 비밀 단체의 임무를 떠맡은

    청년이 식민기구를 폭파하고 옛날 자기가 모시던 부잣집 주인 영감을 살해한다. 청년은 할

    빈에서 도보로 서울에 잠입해 폭파 임무를 마치고 일본경찰에게 쫓김을 당하면서도 안동 아

    방궁 주인을 살해하고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에는 일경들에게 호령을 하고 장렬하게 숨진

    것으로 표현된다.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장면은 폭발현장의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과 총격

    전의 과정이 의성음과 같은 단편적인 낱말들로 표시되는 데다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

    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시간이 이야기에 가져다주는 종심이 거의 없다. 하나의 넓은 사회

    적 공간, 피 튀기는 장면의 제시가 거의 전부인 셈이다. 이에 비해 2절은 왜 그 청년이 살

    던 집을 뛰쳐나가 비밀단체에 가입했는지 그 동기를 상세히 그려 보여준다. 거기에는 한 사

    람의 살아온 이력, 전기적 삶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 그 두 개의 장면이 지닌 크로노토

    프를 도표로 제시하면 하나가 넓은 공간을 표상하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선분적인 형태로

    진행된다. 그것은 간단하게 0→ 로 표시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역사와 현실이 각기 장을 달리하여 있는 것이 작가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산동이」의 크로

    노토프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논쟁을 거친 후 채만식은 이 크로노토프를 자신의 여러

    작품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여 이용하게 된다. 『탁류』나 『여인전기』, 「소년은 자란

  • 다」등 주요 작품에는 대부분 시간과 공간, 역사와 현실을 분리하여 제시하는 이 방법이 다

    채롭게 구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공간과 시간 또는 역사화 현실이 분리되는 구

    조는 채만식의 작품이 역사와 현실을 동시에 포착하는 겹시각이란 관점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에 작가 특유의 비법이 숨어 있다. 그 비법은 「명일」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플롯의 대응형태, 그리고 역사와 현실을 분리하는 방법을 한 데

    결합하여 분리된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효과를 자아내게끔 고안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채만식은 「산동이」이후 역사와 현실, 시간과 공간을 통합하

    는 방법에 대하여 매우 깊이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고심의 성과가 작품으로 나

    타나기 시작한 것이 송하춘이 지적한 「인테리와 빈대떡」, 「레디 메이드 인생」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1934년에 발표되었으니 「산동이」와 대략 4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채만식은 시간과 공간, 역사와 현실을 종합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 양상이

    잘 드러나는 것은 단막극인 「인테리와 빈대떡」보다 「레디 메이드 인생」이다.

    「레디 메이드 인생」은 그 당시 단편소설로서는 조금 긴 편인 150매 분량의 작품이다.

    송하춘이 분석한 것처럼 이 소설은 대원군→P→아들로 이어지는 수직 축과 친구→P→창녀

    가 구성하는 수평 축이 교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인테리와 빈대떡」에 비해서 역사

    적 인식의 깊이가 갖추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펼치는 사회적 활동의 공간이 넓어

    져 있을 뿐 아니라 대원군에서 아들에 이르는 시간 축도 비교적 풍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

    다. 그런데 이 작품의 크로노토프에서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소설 전체가 지식인

    아버지의 실직과 어린 아들의 취업이라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다. 물론 이 작품에서 어린 아들의 역할, 행동은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어린 아들의 독자적

    인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이 지식인 주인공의 실직상황이 지닌 모순을 뚜렷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되었다는 인상을 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어린 아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작가가 노린 아이러니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직장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식민지 현실에서 누구나 맞닥뜨리는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작가는 그 실직문제를 현실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로서

    형상화한다. 작가가 자신의 실직 문제에 뜬금없이 대원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가느다란 시간

    축에 부피를 붙이는 일이다. 「산동이」에서 따로따로 분리되었던 역사와 현실이 이런 방식

    으로 작품에 통합된다. 하지만 그 통합은 주인공과 어린 아들의 대비보다 효율적이지 못하

    다. 대원군과 지식인의 관계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비가 소설에서는 훨씬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레디 메이드 인생」보다 2년 뒤에 창작된 「명일」에서 작가가 이 아버

    지와 아들의 대비 구조를 명확하게 한 것은 그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명일」은 채만식의 말마따나 작가에게 ‘중난(重難)스런’ 작품이다. 의욕을 가지고 창작

    을 하려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시급하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쓴다고 해도

    검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대로 할 말을 할 수가 없다. 작가는 문학이 남아 일대의

    쾌사(快事)라는 하는 친구의 말에 대해 “제 쓰고 싶은 대로 쓰지를 못해 내종(內腫)이 들어

    도?”, “규방의 아녀자의 소일거리나 만들고 있어도?”, “소학교의 괘도감도 못 되는 인체 생

    리도를 그림 대신 문자로 그리고 앉았어도?”1)라고 잇달아서 반문한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채만식에게는 이미 생생한 체험이 있다. 검열을 의식해 「산동이」와 같이 모더니즘 수법을

    사용한 소설을 지으면 평론가들의 입담거리나 되기 십상이고, 「레디 메이드 인생」과 같은

    작품을 써놓으면 검열에서 삭제되기 일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가?

    1) 채만식, 「자작안내」, 『청색지』5집, 1939. 5.

  • 채만식은 “문학이 적으나마 인류 역사를 밀고 나가는 한 개의 힘일진대 한인(閑人)의 소장

    (消長)거리나 아녀자의 완롱물(玩弄物)에 그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목이 부러져도 주장

    을 하는 자”라고 스스로의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다. 그 입장에서 채만식은 자신의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것이고, 그 모색의 결과가 「명일」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레디

    메이드 인생」의 발전이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 발전의 구체적 내용은 「레디 메이드

    인생」에서 싹을 보이기 시작한 플롯의 대응형태를 명확한 형상으로 지어낸 일이다. 교육을

    받고도 실업자가 된 아비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아홉 살짜리 아들이 공장에 취직을 하는

    대비가 미약하나마 「레디 메이드 인생」이 지닌 플롯의 대응형태였다. 이 대응형태는 작품

    의 아이러니를 창조하기 위한 수법의 하나로서 기능한다. 이에 비해 「명일」의 대응형태는

    주어진 굶주림의 현실에 대한 아비와 아들의 서로 다른 반응, 곧 행동의 선택과 실천을 보

    여준다. 두 작품의 차이는 「레디 메이드 인생」이 아이러니적 효과를 위해서 아들의 공장

    취업을 도입하는 데 반해서 「명일」에서는 동일한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선택과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플롯의 대응형태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두 소설의 차이점은 전자가 일종의

    모순대당에 입각한 플롯의 대응형태라고 하면 후자는 반대대당에 입각한 플롯의 대응형태를

    창조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실직과 취업은 어느 하나로 통합이 될

    수 없는 모순적 관계에 있다. 이에 비해 아비의 소극적 행동과 아들의 적극적 행동은 언제

    든 하나로 합쳐질 수 있고 국면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가질 수 있다. 채만식이 「레디 메이

    드 인생」의 발전이 「명일」이라고 한 것은 이 차이를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

    을 작가의 행동이라고 보는 채만식의 관점에서 작품 속의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펼치는가를

    보여주는 데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채만식은 현재의 궁핍한 현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행

    동하는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검열의 벽을 넘어서는 일을 필요로 했다.

    아비와 아들의 대비를 통해 사안에 대한 서로 다른 선택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그 검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아비와 아들은 서로 다른

    행동을 하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은 한 주체의 행동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이 사실

    을 채만식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명일」속에는 주인공 범수가 아내를 곰곰이 뜯어보

    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서 진행되는 범수의 생각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범수는 입때까지 안해의 지금 얼굴에 그전 얼굴을 상상해서 스크린의 이중노출(二重露

    出)처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묘사는 사건의 진행 속에 자연스럽게 도입되고 있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심상하게

    여기고 지나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중노출’의 한자를 병기하여 뜻을 분명

    하게 하고 있다. 채만식이 작품에 한자를 병기하는 경우 독자는 언제나 그 의미를 곱새겨야

    한다. 거기에는 일종의 강조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전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을 겹

    쳐서 보는 장면, 물끄러미 대상을 관조하면서 몽상하여 하나의 통일된 상을 만들어내는 대

    목은 1940년에 창작된 「냉동어」에도 나온다. 그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장면이 플롯의 대

    응형태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도입한 「명일」에 등장한다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

    니다. 그것은 작가가 작품의 기본 축을 이루는 두 개의 장면을 독자가 겹쳐서 읽기를 바란

    다는 하나의 증표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장면에서 진행된 동일한 상황

    에 대한 서로 다른 행동을 겹쳐 읽음으로써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해당한다. 여기서

  • 아비의 행동이 현실에 추수하는 성격의 것임에 반해서 아들의 행동은 현실을 혁파하는 성격

    을 지닌다는 사실을 음미해야 한다. 아비와 아들의 행동을 겹쳐서 읽으면 이제 하나의 주체

    가 된 주인공은 현실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는 언제든

    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그 상황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러

    한 미래에 대한 감각을 바흐친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했다. 게리 솔 모슨은

    자신의 책에서 ‘현재성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소설적 감각은 바흐친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

    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환기하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설은 ‘만약의 것’에 대해 상상할 것을 요구하며, 그래서 소설가들은 때때로 ‘만약의 것’

    을 소재로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주인공이 숙명이나 상황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개인은 그의 숙명보다 크거나 그의 조건보

    다 작다. 그는 한꺼번에 서기, 지주, 상인, 약혼자, 질투심 많은 연인, 아버지 등이 될 수 없

    다.’ 중심 인물은 외부와 긴장 관계에 있는 내부, 즉 주관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자신을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외부에서 묘사될 수 없다.(여기에서 바흐친은 에서 논의된 ‘자신을 지각하는 의식’의 딜레마를 전개한다.)

    인물의 깊숙한 내부에는 잠재력이 존재하는데 이런 잠재력이 소설에 의해서 가시화될 수 있

    는 것은 오로지 ‘미결정적 현재와의(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미래와의) 접촉구역’이나 시간에

    대한 소설의 새로운 감각 때문이다. 모든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과 실현되지 않은 요구’를

    통해 파악되는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의 본래 됨됨이가 아니라 그의 가능한 상태이며,

    부분적으로는 미래를 재료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즉 ‘미래가 존재하는데, 이 미래는 불가

    피하게 개인에게 의존하고 개인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2)

    인용문을 이해하는 데는 ‘현재성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소설적 감각’이 중요한 이유가

    “예술적 ‧ 이데올로기적 의식에서 시간과 세계가 처음으로 역사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가까운 현재성과 미래에 대한 감각은 “처음에는

    여전히 불명료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시간과 세계가 생성으로서, 즉 실제 미래로의 부단한

    운동으로서 전개”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명일」에서 작가는 지

    식인 아버지인 범수의 상황에 대한 대응만을 묘사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은 「레디 메이

    드 인생」이 주인공 P의 행동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두 아

    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가

    까운 미래에는 가능한 행동이다. 채만식은 두 아들의 행동을 통해서 가능한 미래를 소설적

    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게리 솔 모슨은 이 여러 가능한 미래가 소설에서만 파악되는

    것으로서 그로 인해 “소설에서는 인식이 언제나 진정한 문제가 되며, 그래서 소설은 심각할

    정도로 인식론적인 장르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채만식이 영화의 이중노출 기법을 생각

    하면서 아비와 아들의 행동을 대비적으로 보여준 데는 이러한 현실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론

    적인 관점이 내재한다. 그가 이 소설적으로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는 방법을 『탁류』,

    『여인전기』, 「소년은 자란다」와 같은 작품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은 작

    가의 이러한 창작기법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면 이와 같이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는 「명일」의 크로노토프가 지닌 특성은 무엇인가. 원고지 240매 분량의 이

    중편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은 유기적으로 교직되어 있다. 우선 주인공 범수의 행동은 과거의

    2) 게리 솔 모슨 외, 앞의 책, 714-715쪽.

  • 행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식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도 실직자가 된 내력이 아내와

    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고, 거리를 배회하며 맞닥뜨리는 여러 사안들을 통해 사회현실의 여

    러 가지 모습이 조명된다. 이와 같은 시공간 구조화 방식은 아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후반에

    서도 반복된다. 「레디 메이드 인생」처럼 아들의 취업이 하나의 상징처럼 추상적으로 도입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행동거지를 통해 가족들이 굶주리는 상황의 여러 면모가 소개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 상황에서 행해지는 두 아들의 행동이 지니는 구체적 의미가 드러난다. 거

    기에는 공간적 밀도와 시간적 부피가 갖추어져 있어서 독립된 장면으로서 자격을 획득하고

    있다. 「명일」이 지닌 크로노토프의 성격은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고자 작가가 창안한 것이

    다. 그 시공간 구조는 곧바로 이어서 창작된 『탁류』에 좀 더 심화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

    어서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채만식의 문학이 지닌 크로노토프의 고유한 특성을 좀 더 분명

    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탁류』는 채만식의 문학 전체 가운데서도 소설의 통일기법이 가장 다채롭게 구사된 작

    품이다. 이 소설의 기본 형태를 간략하게 도시하면 0→0 구조다. 이 구조는 「산동이」의

    0→ 의 구조와 「명일」의 0—0 의 구조를 결합한 형태이다. 「산동이」에서는 현재의 사

    건, 현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소설의 맨 앞에 제시되고 그 현실이 어떻게 해서 만들

    어져 있는가 하는 역사의 과정을 주인공의 전기적 사실을 통해 하나의 시간적 흐름으로 묘

    사함으로써 제시한다. 이에 비해서 「명일」의 구조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주인공 범수가

    행하는 소극적 행동의 장면과 동일한 상황에 대한 아들의 적극적 행동을 제시하는 장면이

    병치되어 있다. 그 두 개의 장면을 연결하는 선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한

    개의 점으로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일」의 크로노토프 중간에 나타나는

    선분은 두 개의 장면이 하나의 작품 속에 결합되어 있다는 표시를 하는 것으로서만 의의가

    있다. 이에 비해서 산동이의 과거 삶을 나타내는 → 는 그 속에 시간의 흐름이 들어 있고,

    그 시간 속에서 행위가 펼쳐지는 것인 만큼 크로노토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탁류』의

    통일기법이 다채롭다는 것은 작가가 여러 기법 가운데서도 「명일」과 같은 플롯의 대응형

    태와 현재적 사건의 생성을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산동이」의 시공간 구조화

    방식을 결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분신의 기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탁

    류』를 이해하는 데서 플롯의 대응형태란 개념을 아는 사람은 첫 대목의 정주사가 멱살을

    잡혀 봉변을 당하는 장면과 마지막에 송희가 장형보에게 발목을 잡혀 거꾸로 들려 있는 장

    면이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평론가나 문학연구

    자,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 두 개의 장면을 잇는 초봉이의 남성 편력 과정이 정주사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에서 「명일」의 아버지

    와 아들을 겹쳐서 읽는 방법에 대한 채만식의 ‘이중노출’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언급했고, 그

    렇게 겹쳐 읽을 경우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곧 두 세대의

    인물은 ‘현재성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소설적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로서 설정되어 있

    다는 인식이다. 이 관점을 적용하는 경우 『탁류』의 정주사와 송희는 하나의 주체가 되는

    데, 초봉이는 그 주체가 처해 있는 현실을 생성한 역사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존재가 된다. 정주사의 딸인 초봉이가 정주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만들어낸 장본인

    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주사-초봉이-송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하나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산동이」에서 안동 아방궁 영감에게 충실한 노복 노릇을 하던 주인공이 새롭게 사회적

    존재로 거듭 남으로써 식민기구를 폭파하고 옛날의 상전을 살해하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

  • 과 똑같은 시공간 구조가 『탁류』에도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산동이」에서는 여러 사건

    을 겪으면서 단일 인물 주인공에게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임에

    반해 『탁류』에서는 정주사-초봉이-송희로 이어지는 세대의 전승 속에서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탁류』가 「명일」의 발전된 형태라는 점도 손쉽

    게 파악할 수 있다. 채만식이 자신의 소설에서 플롯의 대응형태를 창조하여 주인공을 두 세

    대의 인물로 분리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마 능동적 행동을 펼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가까

    운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사고실험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명일」의 아들

    은 적극적 행동을 펼침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가지지는 못한다. 이에 비

    해 『탁류』에는 마지막 장에 ‘서곡(序曲)’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 초봉이는 남승재로부

    터 명일의 언약을 받는다. 「명일」의 주인공은 “좌우간 내일(明日)이란 건 없으니까”하는

    소리만을 반복하는데 비해서 『탁류』의 주인공은 남승재가 마지못해서 해주는 그 명일에의

    언약을 당연한 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남승재가 조선민족의 부정적인 모습인 고태수와 표

    리의 관계를 이루는 분신으로서 조선민족의 긍정성, 또는 건강성을 나타내는 알레고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미는 명약관화하다. 조선 민족 앞에 놓인 가능한 미래의 꿈을 꾸고 그

    실현을 대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이해의 관건은 정주사의 이야기로 대표되는

    전반부와 초봉이의 남성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중반부의 이야기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파

    악하는가에 달려 있다. 기왕에 당대의 평론가들이나 현재의 문학연구자들에게 작품의 전반

    부는 좋은데 후반부는 통속 드라마라는 견해는 일종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소설의 통일

    성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견해는 당연하다. 정주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반부

    에서는 사실주의 소설과 다를 바 없는 묘사가 행해지고 있어서 그 묘사 속에 역사와 현실은

    긴밀하게 결합되고 있다. 송하춘은 그 양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탁류』는 그 시대의 빈곤과 무지를 비판적 성찰로써 파악하면서, 그것들을 시대와 역

    사 속에 조명함으로써 탄력 있는 인물을 창조하였다. 그 결과 ‘봉건체제의 해체에 따라 식

    민지로 전락하는 과정과 식민지하에서 조선 사람이 어떻게 몰락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의 탁류’가 되기도 하고, 때로 ‘식민지시대의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을 그

    리고 있다’는 그것은 ‘현실의 탁류’가 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탁류’라는 제목의 함축적 의미

    는 크다.”3)

    송하춘은 자신의 글 속에 역사학자 홍이섭이 『탁류』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문구를 인용

    하고 있다. 송하춘의 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탁류』의 전반부는 ‘역사의 탁류’가 되기에

    도 손색이 없고, ‘현실의 탁류’가 되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크로노토프가 시간적 계

    기와 공간적 계기의 내적 연관을 통해 밀도 있는 융합을 이루고 있다. 이에 반해서 작품의

    중반부와 후반부는 이른바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그런 이유로 홍

    이섭은 「채만식의 탁류」라는 글에서 “흔히 『탁류』를 속되다고 얘기한다”는 말로부터 자

    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다면 왜 『탁류』의 중반 이후는 속된 이야기처럼 되고 말았

    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알레고리 작품은 추상적 관념을 대리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작품의 의미를 조직하기 때문에 그 표현이 리얼리즘 소설과 같이 상황과 행동이 유기적 관

    계를 맺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알레고리에서 형상과 의미는 자의적인 관계로 맺어

    3) 송하춘, 앞의 책, 70쪽.

  • 지므로 형상의 유기성이 관건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

    기될 수도 있다. 예컨대 한수영은 『탁류』가 풍부한 디테일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한다. 일종의 세태소설로서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는 셈인데, 이 지적은 세부사실에만 집중

    하고 작품의 전체적 통일성을 놓친 탓에 인식의 방향이 어긋나 있다. 왜냐하면 『탁류』가

    풍부한 디테일을 제시하는 것은 알레고리 문학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지 사실주의 기율을 지

    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루 아는 사실로서 알레고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것을 풍부하게 갖추는 일이 필요한데 『탁류』의 디테일은 바로 그 용도로 마련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에 깔고 보면 초봉이가 고태수와 결혼하고 남편이 맞

    아죽는 사이에 장형보에게 겁탈을 당하고 박제호에게 몸을 맡겼다가 마침내 장형보의 여자

    로 인수되는 이야기가 조선의 근대 초기 역사의 알레고리적 표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곧 초봉이의 아버지 정주사가 뭇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미두장 앞마당

    은 조선민족의 알레고리 초봉이가 만들어 놓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서 현재의 현실이 된

    다. 여기서 역사와 현실은 하나로 겹쳐진다. 그것은 「산동이」로부터 「레디 메이드 인

    생」을 거쳐 「명일」을 경유한 오랜 역정의 최종 도달점이다. 그러나 『탁류』의 크로노토

    프를 검토하는 데서 빠트릴 없는 마지막 장 ‘서곡’을 이야기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탁류』는 초봉이의 이야기를 길게 하나의 흐름으로 전개하다가 그녀가 장형보의 여자가

    되기로 협약하고 계약서를 쓴 장면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이야기의 흐름을 뚝 끊어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군산이라는 도시의 넓은 공간으로 화면을 옮겨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초봉

    이의 남성편력을 통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역사를 충분히 서술했으므로 이제 다시

    정주사가 망신을 당하는 첫 장면, 현실의 장면으로 돌아간다는 작가의 신호다. 한말의 풍운

    이라는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조선의 현실에 카메라의 초점

    을 맞추는 것이다. 이 후반부의 이야기는 정주사가 주인공인 첫 장면의 후일담과 같은 형태

    로 전개된다. 그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는 어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지지부진한 사건들로 점철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지지부진한 이야기

    의 핵심은 계봉이와 남승재가 각기 새로운 생활을 설계하면서 초봉이를 찾아오는 일이다.

    그들은 고태수나 초봉이처럼 정사의 현장에서 비명횡사하지도 않고 남의 손에 질질 끌려 다

    니는 소극적 삶을 살지도 않을 계획이 있고 실천력이 있다. 그러한 긍정적 인물들이 초봉이

    를 찾아왔을 때 우리의 가련한 주인공은 장형보라는 흉측스러운 괴물을 무자비하게 때려 죽

    여 놓고 숨을 돌리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이다. 채만

    식은 『여인전기』에서 시어머니 박씨부인이 ‘불여의(不如意)’를 되뇌다가 운명하는 시각을

    대체로 1936-1937년 어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이 중국대륙에서 승승장구한다는 보

    도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채만식은 이 시점에서 일본이 패망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고 『여인전기』를 창작했으며, 그보다 7년 전에 창작된『탁류』에서도 그와 똑같은 관점

    에서 묘사를 이끌고 있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조선의 자주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고 조선 사

    람에게도 새로운 삶이 기약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한 미래이다. 채만식은 바로 그 가능한

    미래를 『탁류』의 남승재와 계봉이를 통해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초봉이는 비록 자신이

    헌여자가 되었다고 해도 남승재를 계봉이에게 양도할 생각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계봉

    이와 남승재는 서로 간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결코 하나로 결합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계봉이는 초봉이의 긍정성을 나타내는 알레고리적 인물이고, 남승재는 고태수의 긍정성을

    나타내는 알레고리적 인물이다. 그처럼 알레고리를 위해 의인화된 추상적 관념들은 어떤 조

    건에서도 몸과 마음을 합칠 수 없다. 따라서 비록 몸은 망쳐지고 딸까지 딸린 헌여자지만

  • 남승재가 결합할 수 있는 실체적 존재는 초봉이 뿐이다. 그 점에서 남승재와 초봉이의 명일

    의 언약은 조선 민족이 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 작가는 이 대목에 ‘서곡

    (序曲)’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 이름은 1942년에 발표되는 『아름다운 새벽』의 제

    목과 같이 조선 민족의 현재성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채만식의 소설적 감각, 역사현실에 대

    한 인식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탁류』가 발표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

    고 조선민족에게는 그 여명의 시간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식민지의 질곡과 억

    압이 가장 극도에 이른 시점에서 채만식은 또 한 번 그 가까운 미래를 소설적 현실로 보여

    주어야 했다. 그 작업의 결실이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항일문학의 보배 『여인전

    기』다.

    『여인전기』 역시 역사와 현실을 겹시각으로 보는 관점에서 창작되었다. 이 소설의 시공

    간 구조가 『탁류』와 다른 점은 현실과 역사가 액자 소설의 형태 속에 표현되고 있다는 점

    이다. 그 액자의 구체적 형태는 더러운 조개껍데기 속에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가 들어 있

    는 진주조개의 모습이다. 『여인전기』가 왜 그와 같은 형상을 짓는지 그 연유를 살펴보면,

    소설에서 맨 첫 부분과 맨 끝 부분은 현실의 공간이다. 그에 비해서 주인공 진주의 회상으

    로 제시되는 20여 년의 시집살이는 역사의 공간이다. 주인공이 살았던 과거의 삶은 「산동

    이」의 과거 삶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흐름이 주도하여 선분형태로 형상화된다. 주인공이 사

    회적 활동을 하거나 공적인 관계를 어떻게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시

    집에서 쫓겨난 뒤 서울에서 남편을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난의 시

    간을 보낸 생활이 일직선으로 이야기된다. 그에 비해서 첫 대목과 마지막 장면은 그 수난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현재다. 바꾸어 말해서 『탁류』가 정주사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그

    현재적 삶이 어떻게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서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

    인전기』도 현재적 사건이 먼저 제시되고 그것을 만들어낸 역사가 나중에 술회되는 형태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현재적 사건의 주인공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탁류』에서는

    정주사라는 구세대가 주인공인데 반해서 『여인전기』의 첫 장면에서 사건을 이끄는 인물은

    진주의 딸 문주와 그의 상대역이 되는 추영산의 아들이다. 이것은 『탁류』에서 정주사의

    현재를 가져온 역사의 주인공을 정주사의 딸인 초봉이로 삼은, 거꾸로 되어 있는 시간적 순

    서를 바로잡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의미가 단순히 뒤바뀐 시간적 질서를 원래대

    로 되찾은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진주는 서울에서 다시 남편을 상봉하지 않았더라면

    추영산을 자신의 인생의 반려로 삼을 생각이었다. 운명적으로 남편을 다시 만났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지속했지만 추영산에 대한 미련은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탁류』에

    서 초봉이가 남승재를 자신의 반려로 생각하여 명일의 언약을 받아내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주인공이 바뀌었다는 것은 가능한 미래를 소설적

    형상 속에서 상상해보는 일에 해당한다. 『탁류』와 비교해서 말하면 초봉이는 장형보를 살

    해한 죄로 감옥에 가야했다. 남승재와 짝을 이루어 살아가는 행복한 삶은 아직 그녀에게 허

    용되지 않는 가능한 미래다. 그에 반해서 『여인전기』에서는 시어머니가 죽으면서 집안 살

    림을 책임지는 권한을 상징하는 열쇠 꾸러미를 주인공 임진주에게 넘겨준다. 일본제국주의

    를 상징하는 시어머니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주의 딸인 문주가 남승재의 변형인 추영산의 아들과 함께 미래의 삶을 개

    척해가는 일은 단순히 꿈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해방 후에 창작된 작가의 유고 「소년은 자란다」에서 부모를 잃은

    영호 남매가 자신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영위해 가야 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사실을 고

  • 려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탁류』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죄로 감옥에 가야

    했지만 『여인전기』에서는 열쇠를 물려받고 가능한 미래를 설계해 보는 단계에 이르렀으

    며,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가는 모습을 보여주

    는 것이다. 이 비교를 통해서 채만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항시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가 아

    니라 역사 현실의 총체성, 민족 현실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이 사실로 확인된다. 그만큼

    깊이 현실을 투시하고 있었으며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는 역사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되는 반론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주인공의 아들 철이 군대에

    가 있다는 설정과 일본인 이복동생을 보면서 “핏줄은 할 수 없는 것이야!”라고 뇌까리는 양

    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신체제론이나 내선일체론의 표현이

    아니냐 하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질문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간단히 답하면

    그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작품의 전체상을 진주조개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 진

    주의 빛나는 수난의 삶이 조개껍데기의 더러운 모습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 조개껍데기

    를 구성하는 부분은 현재적 사건이다. 그 현재적 사건 속에는 군대에서 열심히 싸우는 아들

    과 일본군 중좌의 이복동생이 들어 있는가하면 추영산의 아들과 문주를 통해 불원간에 펼쳐

    질 가능한 미래가 함께 들어 있다. 작가는 그 가능한 미래가 현실의 질곡 속에서 구체적으

    로 싹을 틔우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 사실을 떠나지 않으면

    서도 역사적 현실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현실인식이다.

    「소년은 자란다」는 「산동이」로부터 「레디 메이드 인생」, 「명일」의 실험을 거쳐

    『탁류』, 『여인전기』에서 활짝 개화한 채만식 특유의 크로노토프 조직 방식이 마지막으

    로 구현된 작품이다. 이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민족에게 주어진 문제는 가능한

    미래를 현실 속에 실현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며 시행착오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 문제를 소설화하는 데서도 채만식은 역사와 현실을 겹시각으로 포착

    하는 예전의 방법을 구사했다. 『탁류』나 『여인전기』와 같이 먼저 현재적 상황을 제시하

    고 과거의 역사를 보여준 다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이다. 그러나 현

    재-과거-미래의 시간적 관계가 반복적으로 구조화되고 있어 동일한 유형처럼 보이는 이와

    같은 크로노토프 구성방식은 세 소설에서 확연하게 차이를 보인다. 『탁류』를 리얼리즘 소

    설로 보는 시각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정주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현재적

    사건의 층이 매우 두껍고 튼실하다. 따라서 현재-과거-미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3:2:2 정도

    의 비율을 갖는다. 이에 비해서 액자 소설의 형태를 지니는 『여인전기』는 2:4:1 정도의

    비율로 구성된다. 이러한 양태가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1:3:3 정도의 비율로 바뀐다. 바

    꾸어 말해서 「소년은 자란다」에서 첫 장면은 현재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 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중심적인 이야기는 과거의 역사와 어린 오누이의 가능한 미래의 삶을 형상화하

    는 데 바쳐진다. 이 소설에서 과거의 역사는 주인공 영호의 부모가 만주로 이주한 때로부터

    어리숙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남매와 헤어지는 시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 부분의 이야

    기는 『탁류』의 초봉이 이야기처럼 알레고리적 구조를 갖는다. 다 같이 고향을 잃어버린

    오윤서 부부가 근대적 각성과 민족적 자각을 가지지 못한 상태를 알레고리로 보여준다면 오

    선생의 구금과 아버지의 실종은 삶의 지표를 잃은 일에 해당한다. 영호 남매를 낳은 어머니

    조선은 외세에 윤간을 당하여 죽어버렸고, 생활을 지탱해줄 아버지는 실종되어 버렸다. 여

    기에다 지금까지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었던 오선생 또한 남북의 이념 대립의 희생물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영호 남매는 “고향과 같은 국지적 장소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하고 있는

    장소의 정체성”이 상실된 ‘일종의 비공간’으로서 역에서 방황하면서 내일의 삶을 기획하지

  • 않을 수 없다. 그들 오누이는 아직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갖추어져 있기 않기에 여관

    집과 단속곳의 집에 나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호는 인질이 된 영자와 함께 살

    림을 합쳐서 자립하려는 꿈을 놓지 않고, 그 일을 위해 ‘훌륭한 사람의 세계’가 결코 훌륭하

    지 못하다는 현실인식을 해나간다. 영호 남매가 나아가야 할 길을 채만식은 ‘민주적 민족주

    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여기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 뜻일 것이며 ‘민주

    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향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년은 자란다」는 가능한 미래를 향한 부단한 운동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거

    기에서 주체의 행동에 의한 상황의 변화와 그 상황의 변화에 의한 주체의 변화가 맞물리는

    역사적 성장의 크로노토프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채만식의 문학에서 「산동이」-「레디 메이드 인생」-「명일」-『탁류』-『여인전기』-

    「소년은 자란다」로 이어지고 발전되는 시공간 구조화 방식은 일제 말기 작가의 항일의식

    을 표현하는 유력한 방법이 된다. 그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작품의 통일성을 구축하며 역사

    와 현실의 이중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작품의 통일은 역사와 현실을 겹쳐서 볼 수

    있게 하는 크로노토프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진실과 허위,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이중성이란

    조건에서 주체의 운동 방향이 세워진다. 이와 같은 크로노토프의 양상은 여기에서 미처 다

    루지 못한 작품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채만식은 생애 내내 다양한 문

    학적 실험을 했던 작가답게 역사적 성장의 크로노토프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장편소설

    『태평천하』와 희곡 「심봉사」를 보면 형상화의 방법이 판소리의 ‘판의 구조’를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광대가 아니리와 창을 통해 여러 사건을 도입하면서 이야

    기를 끌어가는 예술장르가 판소리라고 한다면 이 두 작품에서는 윤직원과 심봉사가 광대 역

    할을 한다. 여기에는 흔히 「심청전」의 패러디라고 하는 『탁류』도 포함될 수 있다. 세

    작품에서는 다 같이 남성 주인공이 홀로 전면에 내세워져 있고 그들이 여러 사건을 주도해

    나간다. 광대가 이 사람의 역할, 저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이 문제를 본

    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현재로서는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차후의 과제로 남겨놓

    지만 채만식의 일제 말기 소설에는 역사적 성장의 크로노토프와 현저히 다른 성격의 크로노

    토프도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냉동어」와 『아름다운 새벽』이며 해방 후 작품으로는

    「낙조」가 거기에 포함된다. 「냉동어」와 『아름다운 새벽』에도 채만식 류의 역사적 성

    장의 크로노토프의 특색인 다음 세대를 나타내는 아들과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다음 세

    대들은 「레디 메이드 인생」의 아들처럼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기는 하지만 소설 내에서 어

    떤 행동도 펼치지 않는다. 따라서 「냉동어」와 『아름다운 새벽』에서는 신‧ 구세대의 세대 교체라는 시간적 계기에 의해서 조성되는 크로노토프의 종심이 미약하다. 이 현상은 두

    작품이 역사보다는 현실의 공간에서 빚어지는 주체의 선택과 행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먼저 「냉동어」에서 소설의 중심 갈등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형식

    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겉보기에 주인공 문대영은 일본인 스미코와 동경으로 갈 것인

    지 가지 않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스미코는 작가의 분신이다. 그

    녀는 시세에 영합하여 현실적 이익을 취하고 싶은 주인공 내심의 욕망이 독자적인 존재로

    구체화한 인물이다. 스미코가 분신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당연히 그 반대편에는 그와 상반되

    는 성격의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그 인물이 방금 딸을 출산한 아내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고민거리인 상태에서 묘사되는 사건들은 비록 시간적 관계와 공간적 관

    계를 가진다고 해도 추상적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예컨대 주인공이 보신각이나 흰옷,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대하여 정감을 가지는 것은 아내와 딸을 선택하는 데 관련되는 사항이며,

  • 스미코와의 육감적인 접촉은 시세를 추수하는 데서 얻어지는 현실적 이득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양상은 『아름다운 새벽』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주인공 임준이 맞닥뜨린 상황은

    아내 서씨와 오나미, 용순이 있는 현실이다. 그 세 여자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소설적 흥미를 유발하는 문제인 까닭에 작품에서 묘사되는 사건들은 그 선택의 참조사

    항으로서만 의의를 지닌다. 아내 서씨는 조선의 전통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는 풍

    부한 시간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서씨에 대한 묘사 속에는 시간적 부피가 갖추어지지 않

    는다. 그녀는 어머니 강씨 부인이 선택한 여자로 전통적 미덕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만이 인

    상적으로 부조된다. 이에 비해서 오나미에 대한 묘사는 그녀의 근대적 면모를 강조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개성 있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만이 강조된다.

    용순의 존재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작가가 여기에서 분신의 기법을 쓰고 있다는 사

    실을 고려해야 한다. 한말의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풍운을 고태수와 박제호, 장형보라는 알

    레고리적 인물을 설정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과 방불하게 채만식은 일본제국주의를 나타내는

    용순의 존재를 그녀의 아버지 박재근과 어머니 용복어머니, 그리고 용순의 세 인물로 분화

    시켜 놓고 있다. 용복어머니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한 사실을 알레고리적으로 나

    타내며, 박재근은 농장의 관리를 맡는다는 점에서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역사를 상

    징한다. 아내 서씨가 죽은 다음에 용순이 어름어름하는 사이에 주인공의 법적인 배우자가

    되는 것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나타내는 것이면서 대일협력의 길을 가리킨다. 『아름다운

    새벽』이 일상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주인공의 행동과 상

    황의 변화를 유기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추상성에 떨어지는 것은 세 여자로 상징되는 선택

    지만이 전면화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크로노토프가 현재적 사건들이 조성하는 공간적 표

    상을 부각시키는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은 그와 관련된다.

    4.바흐친의 크로노토프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임마누엘 칸트는 선험적 감성론을 제기했다.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

    은 인간의 근원적 표상으로 모든 경험적 인식의 근저에 놓여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받

    아들여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필연적이고 아프리오리한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경험에 선행하는 감성의 순수한 직관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똑같이 감성의 직관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계기적이고 동시적인 내

    적 질서에 따라 현상을 규정하는 것임에 반해 공간은 상하, 좌우, 전후와 같은 외적 질서에

    따라 현상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간이 외감의 형식인데 비해 시간은 내감의 형식

    이라는 견해이다.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성찰이 지닌 특질은 그것들이 감성의 형식으

    로서 우리의 주관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사실은 미하일 바흐친이 「소설 속의 시간과

    크로노토프의 형식」을 작성할 때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점이다. 바흐친은 자신의 논문 각

    주를 통해 “칸트는「선험적 감성론」에서 공간과 시간이 기초적 지각과 표상을 비롯한 모든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형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이러한 형식들이 인식작용 속

    에서 갖는 중요성에 대한 칸트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우리는 칸트와는 달리 이것

    들이 ‘선험적’인 형식이 아니라 직접적 현실의 형식이라고 본다.”4)고 밝히고 있다. 이 견해

    4) 미하일 바흐친, 「소설 속의 시간과 크로노토프의 형식」,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88. 261쪽.

  • 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실재성의 형식으로 본다는 데 핵심이 있다. 실재를

    구성하는 기본 성분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위상을 실재성의 바탕 위에 정립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구체적인 예술적 인식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석하고 종합하기 위

    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바흐친이 이러한 자신의 인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론하는 것

    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이다. ‘크로노토프’라는 용어가 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비유

    적으로 빌려온 것이지만 공간과 시간이 맺는 불가분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문

    에 도입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크로노토프’를 “문학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

    간 사이의 내적 연관”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하며, 그것을 문학의 형식적 구성범주로 이해한

    다는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학예술 속의 크로노토프에서는 공간적 지표와 시간적 지표가 용의주도하게 짜여진 구

    체적 전체로서 융합된다. 말하자면 시간은 부피가 생기고 살이 붙어 예술적으로 가시화되

    고, 공간 또한 시간과 플롯과 역사의 움직임들로 채워지고 그러한 움직임들에 대해 반응하

    게 된다. 이러한 두 지표들 간의 융합과 축의 교차가 예술적 크로노토프를 특징짓는 것이

    다.”5)

    바흐친에게 크로노토프는 문학의 장르가 지닌 특정한 사유양식과 관련된다. 문학의 장르

    는 작가가 다른 데서 발견된 내용을 단순히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장르의 성립 자체가 그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이 말은 작품에 표현된 현실이란 것이 시간적 관계와

    공간적 관계의 내적 연관을 통해 실재를 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란 인식을 함축한다.

    인용문은 바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시간에 부피가 생기고 살이 붙는다는 것은 인물의

    행동과 사건의 진행이 구체화되는 양상을 나타내며 공간이 시간과 플롯, 역사의 움직임들로

    채워진다는 것은 그것이 빈 장소가 아니라 행동과 사건과 사물들로 인해서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인식이다. 바흐친은 크로노토프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서사문학에서 시공간 구조가

    가장 밀도 있고 구체적인 관계들을 갖추어 입체성을 지니게 된다고 본다. 바흐친이 이렇게

    크로노토프를 중시하게 된 것은 행위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발전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행

    위는 특정한 맥락에서 수행되는데, 그 행위와 상황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방식이 장르마다

    다르고, 그 장르에 고유한 경험의 이해방식은 “사건과 행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

    는 특수한 형식 창조적 이데올로기”6)가 되기 때문이다. 미하일 바흐친이 선험적 감성 형식

    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칸트의 견해를 일정하게 수용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

    리에 더 많이 기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직접적인 현실의 형식으로 간주하는 인식과 관련

    된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로 융합되

    어 있고 그 자체로 다양한 층위를 지니는 것으로서 행위와 사건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토

    대가 된다’는 것은 배경적 요소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행위와 사건의 틀을 짓는 근본요인이

    된다는 개념을 함축한다. 서사문학의 플롯을 검토하는 데서 크로노토프 분석이 가지는 중요

    성에 대하여 게리 솔 모슨과 캐릴 에머슨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바흐친이 이해하는 서사는 행위가능성을 개념화하는 특정한 방식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

    는 마치 각각의 장르가 특정한 장(場)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이때 장은 특수한 사건을 독

    5) 바흐친, 앞의 글, 261쪽.

    6) 게리 솔 모슨 ‧ 캐릴 에머슨, 『바흐친의 산문학』, 오문석 외 옮김, 책세상, 2006. 622쪽.

  • 창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할지라도 그 사건의 변수들을 결정해준다. 장을 연구한다는 것은

    크로노토프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수한 사건의 연쇄뿐만 아니라 크로노토프까지도

    설명할 수 없다면, 주어진 작품의 특수한 플롯에 대한 연구는 작품의 풍부함을 다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7)

    바흐친의 말대로 크로노토프는 소설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사건들을 조직하는 중

    심이다. 그 사건들이 우리의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기호형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

    지 않을 수 없고 그 시공간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고서 플롯의 양

    상을 확인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흐친은 고대소설부터 근세의 소설

    까지 서사문학 속의 크로노토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분석은 주인공의

    이미지에 발전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두 가지로 크게 나뉘고 그 속에 하위 유형을 구

    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주인공의 성장이 없는 소설에는 고대의 여행소설, 시련

    소설, 전기소설의 세 유형이 있고 성장소설에는 근세의 목가적인 형태와 교양소설, 교훈적

    교육소설, 역사적 성장소설 등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바흐친은 그 유형들이 지닌 크로노

    토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데, 예를 들어 시련소설인 그리스 로망스는 주인공의 행위가

    ‘공간을 가로지르는 강요된 움직임’이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추상적인 시공간 속에서 주인

    공이 끊임없이 시련을 견디는 이야기가 플롯을 지배하는 이념이 되고 있으며, 일상생활과

    모험의 시간을 두 축으로 하여 진행되는 성장 없는 여행소설 유형은 구원의 플롯과 일상의

    파편들이 수직으로 교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두 번째 유형은 수평과 수직의 이야기

    가 교차하는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채만식의 크로노토프를 고찰하려는 우리의 현재 작

    업에 많은 시사를 줄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바흐친은 이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크

    로노토프를 단테의 『신곡』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속에서도 찾아낸다. 하지만 바흐친

    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크로노토프의 하위 유형은 인물이 “세계와 더불어 성장하고 세계 자

    체의 역사적 성장을 반영”하는 형태이다. 『톰 존스』와 괴테의 교양소설을 사례로 들어 설

    명하고 있는 이 유형에서 주인공은 세계와 더불어 성장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변화와 사회

    의 변화는 변증법적 관계로 맞물리게 된다. 이것은 세계를 생성으로 파악하는 관점과 이어

    지는 것으로서 바흐친은 이 관점을 역사적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형태인 리얼리즘 소설에 대

    한 설명뿐만 아니라 서사시와 소설의 구분에도 적용한다. 서사시의 “예술적 표상은 영원한

    모습의 표상”인 데 반해서 소설은 현재성으로 체험되는 역사적 시공간을 자신의 장으로 한

    다. 현재성은 그것이 현재인 만큼 아직 미결정성을 지니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게리 솔 모슨 등은 현재성과 소설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재성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소설적 감각은, 그것이 괴테의 것이든 도스토예프스키의

    것이든 바흐친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하다. 그로 인해 ‘예술적 ‧ 이데올로기적 의식에서 시간과 세계가 처음으로 역사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여전히 불

    명료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시간과 세계가 생성으로서, 즉 실제 미래로의 부단한 운동으로

    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톨스토이가 이런 의미의 소설적 잠재력을 가장 잘 발전시킨

    작가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변화를 점진적인 생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각각의 순간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그 순간을 근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어떤 것으로 채우려 하지도 않았

    다. … 톨스토이는 지속, 즉 시간의 확장을 사랑한다.’ 괴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가 알

    7) 게리 솔 모슨, 앞의 책, 629쪽.

  • 고 있었던 것-그들이 장르의 형식 창조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업함으로써 알게 되었던 것

    -은, 미래가 열려 있지 않다면, 그리고 현재가 실제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전개되어야 할

    혹은 아직 전개되지 않은 다양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실제적인 역사성의 감각도 있

    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8)

    소설은 서사시처럼 영원한 세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종결이 이루어지지 않

    은 현재를 다룬다. 그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연결되어 있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서 현행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역사적 성장소설 유형은 세계를 정태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생성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주인공과 현실의 역사적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이 크로노

    토프 유형에서 시간과 공간은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시간은 특정한 공간과의 상호관계

    를 결여할 수 없으며 공간은 역사적 시간을 그 속에 담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

    다. 여기서 자연히 역사적 성장소설의 상상력에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감각이 생겨난다. 생

    성하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미래의 행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것을 제약하는 조건

    들은 어떤 것들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적 제약 속에서 미래의 행동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이와 같은 크로노토프적 상상력은 일제 말기 채만식의 소설이 지닌 특성

    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채만식의 소설에서 현실은 항시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서 이

    해되며 미래의 행동은 그 역사 현실의 토대 위에서 검토된다.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끊

    임없이 현실을 바꾸고자하는 사고 실험을 했던 것은 그에 말미암는다. 사고 실험은 그 자체

    가 현실의 토대 위에서 행동의 가능성을 모색한 미래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채

    만식의 사고실험이 지닌 미래의 감각, 크로노토프적 성격은 2절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크로노토프가 어떻게 작품의 통일성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가를 파악하는 일이 선결과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하일 바흐친이 1937-1938년에

    작성한 자신의 논문에 1973년에 이르러서 뒤늦게 덧붙인 결론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문학작품이 실제 현실과의 관계에서 지니는 예술적 통일성은 그 작품의 크로노토프에 의

    해 규정된다. 따라서 한 작품의 크로노토프는 항상 그 안에 예술적 크로노토프 전체로부터

    오직 추상적 분석에 의해서만 분리될 수 있는 가치평가적 측면을 지닌다. 문학과 예술에서

    시간적 ‧ 공간적 규정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늘 정서와 가치로 채색된다. 물론 추상적인 사고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실체로 생각하며, 또 시간과 공간을 그들에게 부가

    되어 있는 감정과 가치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살아있는 예술적 인

    식은(이러한 인식도 물론 사고를 포함하나 이는 추상적 사고와는 다르다) 그러한 구분을 하

    지 않으며 그러한 분리를 허용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예술적 인식은 크로노토프를 총체적으

    로 그리고 온전히 포착해낸다. 예술과 문학은 다양한 정도의 크로노토프적 가치로 침윤되어

    있다. 예술작품의 모든 모티프, 모든 개별적 측면들은 가치를 담지한다.”9)

    바흐친은 글의 첫머리에서 예술적 통일성이 크로노토프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살아있는 예술적 인식은 시간과 공간의 융합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에 의해 성립한다고 설명

    한다. 그는 그 설명에 이어 예술과 문학이 ‘다양한 정도와 범위의 크로노토프적 가치로 침

    윤되어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작품에 여러 가지 성격의 크로노토프가

    8) 게리 솔 모슨, 앞의 책, 713쪽.

    9) 미하일 바흐친, 앞의 책, 450쪽.

  •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바흐친이 인용문 다음에 곧바로 지금까지 다

    룬 크로노토프들 외에 몇 가지 주요한 크로노토프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은 기존의 논의

    를 보완하는 의미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작품의 통일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 시

    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컨대 만남의 크로노토프에서는 시간적 요소가 지배하면서

    길의 모티프가 통일성을 조성하는 매개가 되며, 17세기 영국의 고딕소설에서는 ‘성(城)’이

    그러한 역할을 맡는다. 또한 스탕달과 발자크의 소설에서는 응접실과 살롱의 공간이 새롭게

    등장하여 작품의 구심점을 이루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는 지방 소도시가 행동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에 비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는 ‘문턱의 크로노토프’가 등장하

    여 인생의 위기와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이 크로노토프에서는 시간이 본질적으로 순간적인

    것이어서 “중대한 결정의 순간들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한 신비적 ‧ 사육제적 시간의 크로노토프의 일부가 된다.” 그런 반면에 톨스토이의 소설에서는 기본 크로노토프가 전기적

    시간이어서 서사의 공간 속을 유유히 흘러간다. 이와 같이 작품의 통일성을 조성하는 데 주

    도적 역할을 하는 장들을 시사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제시한 끝에 바흐친은 크로노토프가 사

    건을 조직하는 중심으로서 모든 이야기의 마디가 맺어지고 풀어지는 곳이므로 이야기의 의

    미는 크로노토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요약한다. 곧 크로노토프는 사건의 재현에서 결

    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데 사건을 묘사하고 재현하기 위해서는 “윤곽이 잘 그려진 공간의 영

    역 내에서 발생하는 시간적 지표들의 밀도와 구체성이 특별히 증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크로노토프는 공간 안에서 시간을 객관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면

    서, 구체적인 재현의 중심이자 동시에 소설 전체에 실체를 부여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소설

    의 모든 추상적 요소들은 크로노토프의 인력권에 끌려 들어가고 그것을 통해 피와 살이 붙

    으며, 예술의 형상화 능력에 참여한다.”고 결론짓는다. 크로노토프가 소설적 재현에서 지니

    는 의미는 그 역할에서 비롯된다는 견해이다.

    이상의 바흐친의 이론에 대한 간략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크로노토프가 작품의 통일성을

    이루는데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일정한 개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길이라든지 성, 살

    롱, 문턱 등의 장면이 사건 전개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여타의 요소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며, 소설 전체에 ‘실체를 부여하는 힘’은 그로부터 생겨난다는 인식이다. 실제로 소설작품

    을 읽고 나서 대부분의 독자가 기억하는 것은 작품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그 인상적인 장면

    들이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사

    건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될 수 있다. 그렇게 변형이 이루어지는 경우 작품에는

    서술의 깊이에 따른 종심이 생겨난다. 그것은 플롯의 시작-중간-끝이란 완결의 구조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괴테의 소설과 같이 과거-현재-미래가 내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이루어지

    는 ‘시간의 충만함’에서 연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소설이 특수한 시공간에서 제기되는 문제

    들, 상황에 대한 주체의 대응을 재현하는 형식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채만식의 문학을 검

    토하는 경우 작품의 시공간 구조를 플롯의 대응형태와 결부지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

    이다. 채만식은 현재성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 상황에 대해서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서로 다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그려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인물이 “세계와 더불어 성장하고

    세계 자체의 역사적 성장을 반영”하는 역사적 성장형식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리 솔

    모슨은 이런 유형의 크로노토프에서 미래가 작품의 구심력이 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바흐친이 말하는 ‘미래’는 우선 순전히 사적이고 전기적인 견지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미

  • 래고, 다음으로 유토피아적이거나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구체적 미래다. 이

    유형의 소설은 미래-개인의 실질적인 결정이 내려지는 영토-를 ‘근접한 발전구역’으로 이해

    한다. 이 미래는 최고로 중요한 것이어서, 이 유형의 소설은 다른 모든 문학형식들이 이전

    에 부여했던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미래에 부여한다. 인물들이 이런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것처럼, 새로운 성격과 정체성이 세계와 더불어 성장하고 또 세계의 성장을 만들어낸다. 이

    유형의 소설은 시간착오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착오와 인격의 관계도 알고 있다. 말

    하자면 이 소설은 인물 유형이 왜 시대에서 시대로, 문화에서 문화로 반복될 수 없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 이 점이 가장 중요할 텐데, 이 유형의 소

    설에서는 ‘현실과 인간 잠재력의 문제, 자유와 필연의 문제, 그리고 창조적 주도권의 문제가

    최고도로 제기된다.’ 바흐친의 전 생애에 걸친 관심사 중의 하나가 창조성과 잠재력이 실현

    될 수 있는 세계모델에 관한 상상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실현되어야 할 창조력은

    ‘제곱근을 구하는 것’ 이상이어야만 하고, 새로운 것은 과거의 기계적이거나 필연적인 결과

    물에 불과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만 하고,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수동적 매개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유’, ‘주도권’, ‘인간

    적 잠재력’ 등을 알고 있는 역사적 성장 소설의 크로노토프는 바흐친에게 바로 그런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의 모델이 되었다.”10)

    채만식의 소설에서는 항상 역사적 현실의 총체성이 관건적인 문제가 된다. 장편소설의 경

    우에 작가는 특히 역사 현실의 총체성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을 플롯의 대응형태를 통해 대

    비적으로 보여준다. 이 대비는 얼핏 정태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현실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서로 다른 대응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그것을 역사적 과정의 진행과

    결부시켜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대비 작업을 통해 작가는 역사 현실의 총체성에 대한 미래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곧 지금의 현실이 지닌 총체성과 함께 그것이 극복된 미래의

    모습을 아들 세대의 현실에 대한 대응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채만식의 일제 말기 소설에

    세대 교체의 모티프가 유난히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일찍이 채만식 소

    설의 세대 모티프에 주목한 방민호는 채만식의 소설에 세대 모티프가 ‘매우 빈번하고도 지

    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당대 조선의 역사적 가능성을 묻는 문

    학적 방식이었음’을 지적한다.11)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세대 모티프를 지닌 작품을 세 가

    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고찰한다. ① 구세대의 몰락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 ② 신 ‧ 구 세대교체를 통한 역사적 구원에의 기대를 드러낸 작품 ③ 세 세대 이상의 누적을 통해 역사를

    초월한 전망에 접근하고 있는 작품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12) 이와 같은 구분

    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능하고 가치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지만 작품의 통일을 기하는 기법

    으로서 시공간 구조화 방식을 검토하려는 우리의 입장에 그 보다 좀 더 보탬이 되는 접근

    방식은 작가가 역사와 현실을 겹시각을 통해 동시에 파악하고 있다고 본 송하춘의 관점이

    다.

    5. 문학의 통일성--『문학의 통일성 이론』에 대한 소개

    10) 게리 솔 모슨 외, 앞의 책, 692-693쪽.

    11) 방민호, 『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소명출판, 2001. 231-244쪽.

    12) 방민호, 앞의 책, 242쪽.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말의 본디 뜻이 제작학이다.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이란 학

    문의 3분류 가운데 제작학의 본보기로 저술된 것이 『시학』인 셈이다. 이 『시학』에서 저

    자가 가장 중점을 두는 사항이 플롯의 통일이론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플롯은 작

    품에 동원되는 사물과 사건과 행위를 적절하게 배열하고 배치하여 전체의 사상(事象)이 다

    양한 요소를 품으면서도 일관된 줄거리를 이루게 하는 구성의 방식과 표리의 관계를 이룬

    다. 동양의 대표적인 문학이론서인 유협의 『문심조룡』에서 창작론의 맨 마지막에 배치되

    어 있는 ‘부회(附會)’가 “작품의 모든 요소들을 통일시키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마련

    하고, 포함시켜야 할 것과 제외시켜야 할 것을 결정함에 그 조건을 명확히 하며, 작품의 서

    로 이질적인 여러 부분들을 조화시키는”13) 조직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실과 견주어 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구성과 플롯의 개념이 혼동되어서는 문학이론으로서는 결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시문학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4분법을 주장하는

    제라르 주네트의 관점이 시사하듯이 플롯은 단순히 사건의 안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

    품에서 통일되는 것, 표현되는 것이 본질적으로 행동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통일성 이론의 선구자에 대한 기왕의 논의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론적 차착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할 수 있다.

    일반에게 알려지기로는 통일성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화된다. 그러

    나 통일성 개념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서양의 학자들은 그 이론적 선편을 쥔 사람은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먼저 작품의 통일성에 대하여 말했고 그의 관점이 아리스

    토텔레스의 그것보다 개념적으로 올바르다는 견해다. 예컨대 말콤 히스는 플라톤이 『파이

    드로스』에서 “모든 연설은 마치 생명체와 같이 유기적인 짜임새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 몸

    을 갖추고 있어서, 머리가 없거나 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중간과 마지막이 있고 그것들이

    서로에 대해서나 전체에 대해서 적절한 관계 속에 있도록 쓰여 있어야 한다”14)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고대 그리스의 통일이론으로부터 후대의 이론사까지 검토한 지오르다노

    오르시니에 의해서도 지지받는다. 오르시니가 주목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분석

    한 비극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에서만, 다시 말해서 플롯이나 미토스에서만 유기성을 찾았

    고, 모든 부분들을 단일한 전체로 통합하는 데 유기성을 적용하지 않았”15)다는 점이다. 오

    르시니가 지적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여섯 가지 요소를

    말했는데 그 요소들 전체의 통일을 말하지 않고 플롯의 통일만 말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에 들어 있는 모

    든 요소들이 통일되어야 제 이름에 부합하는 통일인 것이지 플롯의 통일만 이야기한다는 것

    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통

    일 이론을 비판한 논자들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것은 플롯, 다시 말해서 행동의 표

    현을 다른 요소들과 무관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의 형상화

    는 시간과 공간을 구체화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다른 요소들의 통일을 말하지 않

    았기 때문에 이론에 하자가 발생한다는 견해는 그 다른 요소들이 행동의 구성요소로 기능하

    지 않으면 자연의 생성변화하는 과정을 모방하는 작품의 창작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동작, 즉 생성

    의 과정”을 모방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월터 J. 베이트의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

    13) 유협, 『문심조룡』, 최동호 옮김, 민음사, 1994, 495쪽.

    14) Malcolm Heath. Unity in Greek Poetics, Oxpord Univ. Press, 2002, p.40.15) G. N. Giordano Orsini, Unity in Ancient and Later Poetics, Southern Illinois Univ. Press, 1975, p.40.

  • 스의 상이한 실재관 뿐만 아니라 플롯의 통일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주목한 바와 같이 예술이 플라톤의 이상세계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생성’하는 세계인 구체적 세계에 보다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

    는 인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동작, 즉 ‘생성’의 과정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하는 실재였던 것이다. 더욱이 예술은 자연의 동작의 이러한 물질 면에만 한정되어 있

    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나타나는 보편적인 형식을 추출하여 강조한다. 예술은 아리

    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 같은 복사나 모사가 아니라, 이러한 자연의 생

    생한 과정의 모사로서, 그의 잠재적인 형식을 완성하고 강조하는 것이다.”16)

    베이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플롯의 통일과 플라톤의 유기체설을 대립시키고 있다. 바꿔

    말해서 행동의 통일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철학적 입장에서 통일성을 말한 것이

    고 플라톤은 실체론적 입장에서 글의 형식적 완성을 말하는 일종의 표현법에 대한 논의라는

    견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견해의 차이는 동양의 문학이론과 서양의 문학이론이

    갈라지는 대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문학자 장파가 말한 바 있듯이 실체론적

    입장에 서 있는 서양의 문학이론에서는 형식이 강조되어왔고 동양에서는 조비의 ‘문기론(文

    氣論)’에서 구체화하기 시작한 생성철학적 관점이 문학이론의 근간을 형성했다. 예컨대 근세

    서양의 3일치 법칙이나 기존의 통일이론이 포괄하지 못한 부분을 새로이 이론 영역에 포함

    한 관심의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