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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의 구조

기독교강요 I / IV

강의자: 송 다니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유럽 세미너리. 2010년 가을학기.

Version 1.0

Simplitutio: Institutio (made) Simple!

본 정리록의 특징:

· 본문 이해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은 표현들은 직역을 피하고 간단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긴 단락은 짧게 요약했다.

· 중요한 부분은 최대한 의미를 살려서 의역하였다. 괄호 부분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추가한 부분이다.

· 충분히 이해가 되는 곳에서는 중복되는 설명을 생략했다.

· 독자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당시 칼빈시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현대신학과 현대교회에 연결하여 기독교강요가 현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다루었다.

· 본 정리록은 Otto Weber의 독일어 번역을 토대로 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중엽에 번역된 것으로 불어, 영어 번역보다 훨씬 현대어로 번역되었으므로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불어와 영어 번역본은 직역이 많아서 대체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 라틴어는 여러 가지 번역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성이 있는 것은 원문과 불어와 영어 번역을 각주에 첨부하였다. 불어가 중요한 이유는 칼빈의 모국어라서 그가 이해하는 바를 불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정리록은 심플리투치오(간단한 기독교강요)라고 한다.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심플리투치오를 읽는 것이 이해가 훨씬 빠르도록 구성하였다. 이것을 공개하는 이유는 독자가 기독교강요를 쉽게 접근하여, 종교개혁 신학의 이해를 돕고자하는 데에 있다. 먼저 심플리투치오를 읽고 다시 기독교강요 번역서를 읽으면 기독교강요를 두번 읽는 것보다 이해가 더 잘 될 것으로 희망한다.

혹시 독자가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한다거나,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필자에게 연락을 해 주면 감사하게 생각하며 반영을 하겠다. 필자는 독자의 도움으로 심플리투치오를 계속 보완해나갈 것이다.

기본적인 것: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강요만큼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많지 않다. 이 책은 개혁신학(장로교)에서는 불멸의 교과서이다. 정통 개혁신학은 칼빈 이후로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을 보았으나, 칼빈을 기본적으로 떠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를 전부 공부하여 숙지하게 된다면 신앙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며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게 된다.

신학 서적, 신앙 서적에 기독교강요는 자주 인용된다. 기독교강요를 알고 있으면 쉽게 인용문을 확인하고, 혹은 문맥에서 올바른 인용이 되었는지, 혹은 올바로 해석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할지라고, 칼빈의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으면, 들은 것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면, 그의 신학이 머리에 정리가 되어서 좋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만큼 튼튼한 학문적 훈련을 바탕으로 사고를 많이 하고 (그들은 전부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열정적으로 삶 전체를 바쳐 신학 연구를 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글에는 깊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고민이 묻어난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이들의 글을 대해야 한다.

기독교강요는 원래 신교의 믿음이 이단이 아니고 성경적이라는 것을 변증 하려는 목적과, 신자들을 위해 기독교의 근본되는 가르침을 간단하게 서술하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칼빈 자신도 조국 프랑스로부터 박해를 받아 쫓겨나서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다녔으며, 고국에서 수많은 신자(위그노)들이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는 박해의 원흉인 프랑소와 왕에게 긴 헌사와 함께 헌정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차차로 기독교강요를 증보하였다.

이번 학기는 제1권 신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한 학기 동안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기독교강요 신론을 매스터하고자 한다. 예습, 복습을 잘하고 2차 자료들을 많이 읽을 것. 수업을 잘 따라오면 그간 성경이나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사고하는 훈련을 통하여 생각이 깊어진다.

최근에 발간된 독일어로 된 칼빈 입문서로는:

1) Johannes Calvins Theologie – Eine Einfuehrung. Georg Plasger. V&R

2) Johannes Calvin. Leben und Werk des Reformators. Christoph Strohm.

플라스거는 지겐 대학교수로서 독일에서 흔하지 않은 칼빈 연구가의 한 사람이다. 위에 소개된 책은 칼빈 신학 입문서로서 매우 좋다. 가끔 등장하는 성서비평적인 입장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의 조직신학적인 입장은 건전한 편이다. 그가 주축이 되어서 운영되는http://www.reformiert-online.net/ 은 매우 유익하다. 단지 성서비평적인 내용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쉬트롬 교수는 하이델베르크의 교회사 교수로서 훌륭한 강의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며, 칼빈 연구가로서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나름대로 새로운 각도로 칼빈의 생애와 신학을 잘 정리함.

두 권 모두 읽기가 어렵지 않고 책값도 저렴하다(10-15유로)

인터넷에서 내려받아서 볼 수 있는 자료:

간단하고 명료하게 (한글로) 작성된 기독교강요 입문서로서는 개혁 아카데미 원장 장관섭 교수의 글이 있다. http://shoppingm.tv/happy/ („메인 메뉴“의 „개혁주의 신학“에)

독일어로 된 것으로서는 Diener-Wyss가 쓴 것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필자가 학생들에게 메일로 보내 준다.

기독교강요의 원제: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강요를 라틴어, 영어, 불어로 볼 수 있는 곳: http://www.kirs.kr/opera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독일어판: http://www.calvin-institutio.de

한국판 무료: . 이것은 아직 필자가 읽어보지 않았다. www.aspire7.org/english/picture/기독교강요1559한글판.hwp

한국판은 번역 시에 주로 영어를 참조했기 때문에 불명확한 부분은 독자가 직접 라틴어를 참조해야 하고, 혹은 독일어를 참조하면 좋다. 독일어가 영어보다 학술어로는 훨씬 정확하다.

칼빈 공부를 위해서는 한국에 도움이 되는 웹사이트가 무수하게 많다. 참고: http://calvinschool.net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80장(章)이다. 각 권, 장마다 제목이 붙어 있다. 각 장은 다시 작은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따라서 기독교강요를 인용할 때에는 페이지로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II,3,2(2권 3장 2항).

독일 칼빈 신학자 Otto Weber가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항 마다 전부 소제목을 달았다. 이 소제목은 기독교강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이 소제목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번역본에도 붙어 있다. 본 강의에서 이 소제목을 모두 소개하며 번역은 강의자가 주로 Otto Weber의 독일어 번역을 한국어로 번역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라틴어, 영어 불어를 참조하였다.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생명의 말씀사“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출판된 것 등이 있다. 생명의 말씀사 판에는 소제목이 붙어 있어서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번역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 유익한 주석이 많고 인용구절의 출처를 자세하게 표기한 것이 장점이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판은 필자가 읽어보지 않아서 평가를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다른 번역판들이 있으나 필자가 읽어본 바가 없다.

2009년 고영민 박사(백석문화대학 총장)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번역을 했다기보다는, 원본과 번역서를 비교해서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어 박사가 아닌 한 기독교강요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없을 것이다. 고전어의 문장은 해석의 가능성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오역의 위험을 면치 못한다.

고전어 학위를 가지고 신학을 공부한 분이 기독교강요를 라틴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기독교강요를 훨씬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요령

일단 분량이 방대하다. 독일어 판은 1000쪽이 되고, 한국 판은 2000쪽이나 된다. 모두 4권 80장(章)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첫권인 신론을 잘 공부하면 나머지는 무난하게 공부를 할 수 있다.

신론은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5부분으로 나누어 진다(칼빈이 나눈 것이 아니다). 이렇게 5부분을 나누어서 공부하면 신론이 끝난다.

정통 개혁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신론은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이다.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강요 1권 13-18장에서 다룬다. 1-12장에서는 기본적이고 서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기독교 강요는 한 문장이라도 쉽게 지나갈 수 없다. 집중해서 읽고, 필요하면 반복해서 읽으며, 멈추어 깊이 묵상해야 한다.

() 표시는 보통 필자가 설명을 하기 위해 덧붙인 경우이며, 또한 의견은 각주를 사용하였고, 긴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자 안에 설명을 했다. 긴 배경 지식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기독교강요 보조자료“ 파일을 만들어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끝으로 존 맥닐의 기독교강요의 서문을 인용한다:

칼빈의 걸작품들을, 그것이 저자의 정신이 정교하게 조합된 교의학적 논리구조로 합성된 일종의 효과적인 공장과 같다는 선이해를 가지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곧장 자신의 가정이 도전당하고 박살 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식별력이 있는 독자는 칼빈의 작품 속에는 그의 지성만이 아니라 그의 영적이고 감정적인 전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 칼빈은 전문적인 신학자라기보다는 조리있는 사고를 하는 천재성을 소유했으며, 자신의 신앙에 관련된 것들을 저술해 내려는 충동에 순응한, 진지한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신학대전이 아니라 경건대전으로 명명했다. 그의 정신적 에너지의 비밀은 바로 그의 경건에 있었다. 그것의 열매는 그의 경건을 대략적으로 묘사한 그의 신학이다. 그의 과제는 이 책의 원제목인 „경건과 구원교리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의 총체“였다.

한눈에 보는 칼빈의 인생

1509:

1509,7,10 놔용에서 출생 (Noyon, Picardie). Jean Cauvin.

1523 – 1528:파리에서 College de la Marche, Kollegium Montaigu 에서 공부함. 콜레기움 몽떼귀는 당시의 명문대. 스콜라 철학(신학)대학. 에라스무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공부한 곳.

1528 – 1533: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당시의 명문대 오를레앙에서 법학공부. 이 사이에 당시의 관습대로 파리와 부르쥬에서도 공부함.

1533:

subita conversio (갑작스러운 회심)

1533:

니콜라스 콥 (Nicolas Cop) 사건. 콥이 만성절(11월 1일)에 스콜라 철학의 본거지인 소르본느 대학의 학장 취임사에서 혁명적 연설을 함. 칼빈이 연설문 작성에 기여함. 내용은 „궤변신학을 벗어나서 개혁신학으로 가자!“ 콥과 칼빈은 체포를 피하고자 급히 도주함.

1533 – 1534: 앙굴렘(Angoulême)에 있는 친구 띠에(Louis du Tillet) 집으로 피신함. 신학연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여 기독교강요 1판의 초안을 작성함. 친구들에게 이것을 낭독함.

1534 – 1535:4월부터 여러 도시를 돌아다님. 먼저 신교도의 피난처인 네락(Nerac)에 가서 불란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파버 스타풀렌시스(Faber Stapulensis)를 만남. 5월에 고향으로 가서 봉록포기 신청. 1535년 1월에 인쇄업으로 유명한 바젤에 도착.

1534:

벽보사건. 1534,10,17에 가톨릭 미사를 비판하는 벽보사건으로 전 프랑스에 신교도 핍박이 시작됨. 프랑소와 1세가 이 사건을 국왕 존엄 훼손죄로 받아들임.

1536:

1536년 3월 기독교강요 1판 발행.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머리말에 프랑소와 왕에게 프랑스 신교도들을 변호함.

1536 – 1538:제네바 체류.

하루만 묶어 가려고 했으나 그곳에서 개혁을 하고 있던 Guillaumme Farel에게 거의 강제로 붙들림. 1535의 시의회 결정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교가 된 곳. 따라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곳.

1536:

교회법(„Article“)과 교리문답서 작성. 1537초에 시의회에 교회법 제출. 엄격한 법으로 인해 불만자가 많았으나 시의회에서 교회법을 인준함. 교회법에 포함된 신앙신조에는 모든 시민과 거주민이 맹세를 하도록 함. 반대에 부딪힘. 1538년 2월 선거에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시의회에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파렐과 그를 시에서 추방함.

1538 – 1541:스트라스부르크 체류.

이곳은 부쩌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하는 독일 지역. 칼빈은 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종교개혁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됨.

1539:

기독교강요 2판 발행(6장에서 17장으로 대폭 증보. 완결판은 80장으로).

1540:

Idelette de Bure와 결혼.

1540/1541: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종교회의에 참가하여 독일 종교개혁자들을 사귐.

1541 – 1564:제네바에서 2차 사역 .

1541:

시의회의 초청으로 오랫동안 주저한 뒤에 자기 의사에 반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제네바로 다시 돌아감. „나는 나의 심정(heart)을 주님께 희생제물로 드립니다(파렐에게 보낸 편지)“

1541:

시의회에서 지정한 6명과 함께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함: 4직임과 2기관.

4직임: 목사, 장로, 교사, 집사.

2기관: 가르침의 문제를 담당하는 목사회와 교회를 다스리며 치리하는 콘시스토리움. 이곳에서는 시 전체의 예절과 규칙을 감시함. 시의회에 고발을 할 수는 있으나, 재판권은 없다.

1542:

제네바 교리문답.

1549:

아내 Idelette de Bure 병사.

1549:

Consensus Tigurinus. 쮜리히의 불링어와 성찬식 문제에 합의를 봄.

1553:

세르베투스의 사형.

1555:

시의회 선거를 기점으로 비로소 교회가 시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됨. 제네바의 교회 정치가 칼빈이 의도하던 바대로 이루어짐. 그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시의회 동의없이 공식적인 죄인에게 성찬을 거부할 수가 없었음.

1559:

Institutio 최종판(5판), 제네바 아카데미(academia) 설립. 칼빈이 50세 생일 선물로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함.

1564:

55세로 병사.

제1권 목차

창조주로서 하나님 인식 (De Cognitione Dei Creatoris)

[하나님 인식과 자기인식]

제1장: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3장: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제4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와 사악함에 의해 질식되고 부패하였다.

제5장: 우주 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된다.

[성경의 권위]

제6장: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인도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제7장: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성적인 증거가 있다.

제9장: 성경을 무시하고 단지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는 열광주의자들은 경건의 모든 기초를 파괴한다.

[우상숭배]

제10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참 하나님을 모든 이방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제11장: 하나님을 가시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죄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제12장: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위해 우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제13장: 성경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창조 시로부터 알 수 있도록 가르친다.

[창조와 섭리]

제14장: 성경은 창조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참 하나님과 모든 거짓 신들을 분명한 특징들을 통해 구별한다.

제15장: 인간의 창조: 인간 정신의 능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인간 본성의 원초적 순결.

제16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며, 섭리로써 모든 작은 부분까지 다스리신다.

제17장: 이 섭리의 가르침을 잘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할 수 있다.

제18장: 하나님께서는 불신자의 행위도 사용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그들의 생각을 바꾸신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비난을 받을 수가 없다.

I.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식 (1-18)

De cognitione Dei creatoris / 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Qui est de cognoistee Dieu/ Von der Erkenntnis Gottes als des Schöpfers.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

이 단원의 중요성: 신인식의 문제는 인류의 시작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논의되는 주제이다. 이 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자연신학과 자연신학의 한계를 다루며, 과연 성경의 계시가 없는 신인식이 가능한가를 다룬다. 더 나아가서 간접적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도 매우 시사성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며, 종교 다원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한번 검토해본다.

I,1: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I,1,1 자신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지혜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 하나님과 인간 중에 누구를 먼저 알아야 하는가? 이것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되면서 증가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되고, 자신을 알면 다시 하나님을 그만큼 더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지식을 근거로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이렇게 순환되면서 인식이 계속해서 커진다.

그림:

SHAPE

-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1. 은사(축복):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기“(행17:28) 때문에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다.

·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우리의 은사도 하나님 안에서 나왔다.

· 우리가 받은 은사(생명뿐만이 아니라 햇볕과 비, 먹는 것, 입는 것 등)는 모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생각하면 자연히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2. 인간의 비참함.

· 우리의 비참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담의 범죄에서 왔다.

· 비참함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무지, 허영심, 연약함, 배고픔, 둘째로 타락과 부패. 이것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추함이 드러난다.

· 우리가 이 연약함을 깨달을 때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혜, 진정한 능력, 덕, 넘치는 선함과 넘치는 의.

-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을 깨달을 때만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산다.

I,1,2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 인간은 본래 교만하고 위선적이다. 죄에 대해서 눈이 어두워서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때만이 자신의 무지와 죄가 드러난다. 그전에는 자신도 쓸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차로 지나쳐서 자신이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 인간은 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산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완전한 의와 완전한 지혜와 덕을 요구하신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자신의 부족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된다.

I,1,3 하나님의 존엄 앞에 선 인간

- 신자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떨며 땅에 엎어진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존엄 앞에 서야만이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깨닫는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면:

·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죽어야 한다“ (삿13:12; 사6:5)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38장)

·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18:27)

-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순환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지식을 먼저 다루고 다음에 후자를 다루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2장부터는 하나님 인식을 먼저 다룬다.

I,1에서 칼빈이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교만, 위선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확고한 출발점이다. 그는 더욱이 늘 스콜라 신학자(인간의 자유의지)와 인문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인문주의는 인간의 사고 중심을 인간이 차지한다. 인문주의는 인간을 발견한 시대이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을 강조한다. 따라서 르네상스에 조각과 그림에는 인간의 나체가 많다. 따라서 칼빈은 인문(인본)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한다. 즉 르네상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반면, 칼빈은 인간의 무능력, 추함, 교만, 위선을 강조한다. 이것은 21세기까지 계속되는 두 사상의 싸움이다.

Humanism은 또한 그리스 철학을 부활시켰다. 우리가 소크라테스 복음이라고 하는 것, 즉 „인간은 선을 알기만 하면 선 자체를 위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지성인들의 사이에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특히 루터가 로마서 7장에서 발견한 복음, 즉 „죄에 빠져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과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격렬하게 공격함으로써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피코의 „인간 존엄성에 대하여“에서 발췌 번역.

„너는(아담) 모든 제한에서 벗어나서 너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너의 성품을 스스로 빚어 나가라. 나(하나님)는 네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모든 세상을 다 볼 수 있도록 너를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놓았다. 네가 조각가처럼 너 자신을 네가 원하는 대로, 너 자신의 능력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짓지 않았다. 따라서 너는 짐승으로까지 타락할 수도 있고, 너의 의지에 따라, 위로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거듭날 수가 있다“

I,2: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I,2,1 하나님 인식이란 하나님을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 하나님 인식이란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 인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건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 없이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로 깨달을 수가 없다. 즉 하나님 인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다. 전자는 일반 계시의 범주에 속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구속주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룬다.

-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무한한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그것을 다스리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주실뿐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기대해야 하며, 그분에게서만 찾아야 하며 모든 것을 그분의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경건심을 갖게 되고, 종교는 여기에서 싺튼다.

- 경건심이란 사랑과 복합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는 결단코 하나님께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자신을 넘겨드리지 못할 것이다.

I,2,2 하나님 인식은 사고 유희가 아니다

- 따라서 하나님 존재와 본질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사고 유희에 불과하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맞게 살 수 있는가이다.

-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합당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께만 모든 감사를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 인식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하나님 뜻에 맞게 살기위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올바른 기도를 할 수도 없다)

-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창조주의 마땅한 권리에 순응하여 그분의 명령에 복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이 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행실과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것을 알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신뢰와 확신을 하나님께 두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성이 인간의 지각을 가로막아서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 한다.

- 경건한 마음은 어떤 신을 꿈꾸어서 만들어 내지 않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한 분이며 진정한 하나님께로만 돌린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 그리고 나타내시는 그대로 믿는 것에 만족한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러나 단지 소수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두려워한다. 도처에 허식적으로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드물다.

- 정리: 하나님 인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뜻의 순종에 귀착해야 한다. 이것이 경건(두려움과 사랑)이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여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한다.

I,3: 하나님에 대한 지식(하나님 인식)은 인간 안에 본성적으로 심겨져 있다.

I,3,1 이러한 자연적 은사의 본질

- 인간 정신이 타고난 본능에 의해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심판 시에) 하나님을 몰랐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자신의 신성을 알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시듯이 이 깨달음을 항상 새롭게 해 주신다. 이것은 나중에 심판의 근거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종교의 씨앗 (semen religionis): 아무리 무지하고 야만적인 종족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우상숭배가 이것을 증명한다.

- 정리: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신존재증명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I,3,2 종교는 인간의 자의적인 발명품이 아니다

칼빈이 20세기에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면 그는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하나 칼 막스의 예를 들었을 것이다. 고대 로만 그레코 문화에서나 칼빈의 시대에도 매우 소수이지만 무신론자는 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칼 막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자들이 사람을 정부에 예속시키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이 없다면, 사람이 종교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칼빈은 매우 현명한 반론을 제기한다.

-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어렴풋하게나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 이것의 증거로서 그는 양심을 든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양심은 항상 불안하다.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 놓이는 경우는 술에 취해서 잠이 들 경우인데, 그나마 꿈속에서 고통을 당한다.

I,3,3 실제적인 무신론은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의 마음에 파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 디아고라스와 그의 동료들의 무신론: 그들은 인류가 수백 년간 믿어왔던 모든 것을 희롱하였다.

- 칼빈의 반론: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절망에서 나오는 쓰디쓴 웃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 양심이라는 벌레가 매우 고통스럽게 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 키케로의 낙관론: 세상은 발전하고 종교는 시간이 갈수록 완성된다.

- 칼빈의 반론: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멸하고 하나님 경배를 부패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 결과는 인간에게 신 의식이 점점 더 커진다. 따라서 신 의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필요가 없고 애써서 습득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의 예: 영혼의 최고의 행복(summum animae bonum: 영혼의 최고선)은 하나님과 비슷해지는 것이라고 함.

I,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지와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되고 부패하였다.

(이전 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본성에 심겨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가? 이 지식은 인간의 무지로 질식되고 부패함)

I,4,1 미신

-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다.

-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경험이 증거한다(논리적인 증명이 필요 없다).

- 이 씨앗을 간직하고 키우는 사람은 10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 하다. 그러나 이것을 열매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 모두가 멸망할 운명에 처해있다.

- 모든 불신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 미신에 빠지는 사람.

·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

- 의도적이 아니라 무지로 말미암아 미신에 빠지는 사람은 죄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교만한 허영과 완고함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도 죄가 있다.

- 그들의 허영과 교만은 그들이 하나님을 더 이상 깊이 찾지 못하도록 한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영된 사고 유희에 빠진다.

- 그래서 하나님이 자연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오만하게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 따라서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도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 롬1:22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자연계시의 한계.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계시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 불신자의 심판: 그들의 불신을 변명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어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신자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더욱 경배하도록 한다.

· 또 한 가지를 든다면,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약간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서 국가의 법과 질서를 지켜서 인류가 쉽게 멸망하지 않도록.

I,4,2 하나님에게서 의식적으로 돌아섬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이 말씀은 인간이 자연의 빛(자연계시)을 끄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I,4,3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신으로 빠지는데, I,4,1에서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와 I,4,2에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두 가지 경우를 보았다.

- 미신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경우인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미신을 정당화시키는가?

- 대답: 자신의 신앙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이유: 진정한 신앙생활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되어 있는가? 말씀에, 그리고 율법에. 율법에 우리가 살아야 할 지침이 나타남.

- 종교적 열심의 문제를 주제로 토론해 볼 것.

- 락탄티우스: 진리를 따르지 않는 종교는 올바른 종교가 아니다.

I,4,4 위선

- 위선자의 정의: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 결과는 넘치는 종교생활.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말씀을 매우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

-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 스타티우스: 두려움은 세상에서 먼저 신들을 만들었다.

-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벌하기 위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심판대가 사라지기를 갈망한다.

- 그들의 진퇴양난(어떻게 해서 위선이 생기는가?):

· 심정적으로는 심판을 해야 하는 하나님과 싸운다. 즉 마음으로는 지옥이 없다고 한다.

· 머리로서는 심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심판을 두려워한다.

그 결과 자신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자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시키며,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저촉하게 된다.

- 이러한 사고는 필연적으로 위선을 낳는다: 겉으로는 종교인 생활을 하고 내부적으로는 성령의 훈육(Zucht)을 순종하지 않고 육의 음성에 따라 산다. 이러한 위선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고 있으면서도(Sein),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Schein).

-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 전 생애에 걸쳐서 „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 거룩한 삶과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그러나 위선자의 삶은:

· 거의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대담하게 반역하고, 헌금(열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한다.

· 무가치한 의식들을 만들어내어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한다.

- 마음에 새겨진 종교의 씨앗은 이러한 사람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 그들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떤다.

· 그러나 절망에 빠지게 되면, 이 절망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하고,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된다.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억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위선이다.

I,5: 우주 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된다.

- 전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무지와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되고 부패되었다고 했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I,5,1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자신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 자연계시의 위력: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 하나님은

a)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었을뿐만 아니라

b) 우주의 전 창조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 세상의 정교한 질서는 우리에게는 거울과 같으며, 이 거울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천체는 모든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같다. 이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며,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증거한다. 따라서 아무도 자신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I,5,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밝히 드러난다.

- 과학을 탐구하면 할수록 하나님 지혜의 비밀이 더 드러난다.

- 갈렌(BC2세기의 해부학자)이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탁월하게 조사하였다. 칼빈의 학문에 대한 긍정이 여기에도 보인다: 신자는 열심히 과학을 탐구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다.

I,5,3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다.

- 한 옛 학자가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밝게 나타나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며“ (시8:4)

- 바울은 장님도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내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깨닫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행17:27)

- 하나님을 알기 위해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이 단지 자기 성찰만 하면 되는데, 이러한 시도조차도 안 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

- 사도 바울이 인용한 아라투스(Aratus)의 말: „우리가 그의 소생이다“(행17:28). 이렇게 이교의 시인들도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러한 탁월성을 부여했으므로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의 문제: 바로 이러한 인간의 탁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그러나 그들은 칼빈이 앞에서 강조한 자기인식(죄)에는 도달하지 못함. 여기에 죄를 가볍게 보려는 그들의 의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인간을 지옥과 연옥의 교리를 통한 협박으로 인간의 양심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실제로 사람을 교회의 종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성인들이 고전을 연구하며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한 시도는 이해할 만 하다 .

I,5,4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인간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몸소 입고 있는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한다.

- 이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신성의 표시를 본인이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깨닫기 마련인데, 이것을 부인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 마음속에 비치는 분명한 하나님 인식을 땅에 묻어버린다.

- 이러한 인간의 탁월성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에 사용하는 사람(특히 철학자)을 비판함:

·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키는 스토아학파들: 범신론.

·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 학파

BC 300년, 제논. 전쟁으로 말미암아 폴리스 제도가 불안해질 때 나옴(알렉산더 대제).

범신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에테르(Aither)라고 하는 원불(Urfeuer)로 부터 나와서 생성됨(기독교와 같은 창조주가 없음. 유물론적 요소가 있다). 모든 물질(휠레)에 신적인 이성(Logos)이 들어감(beseelt). 따라서 신은 우주 밖에 초월해 있지 않고 사물에 내재하고 있다.

인과성, 운명, 섭리의 철학: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정확한 인과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자유의지와 책임의 사상이 후세대에서 발전함.

그리고 윤리학도 있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로고스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다.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훈련,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영혼의 평온을 통해 지혜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며 또한 이성적이고 신적인 세계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stoische Gelassenehit라는 말이 나옴.

운명 사상과 윤리학은 서로 모순된다. 절대적인 운명 사상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필요가 없다.

세계 동포 사상. Cosmopolitan. 폴리스를 벗어나 전 세계인을 생각함.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자와 비슷한 시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시작됨. 이 세 학파의 공통점은 개인의 행복, 혹은 영혼의 안식(Seelenheil)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어로는 오이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라고 함. 이 세 학파는 행복을 얻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세상에서 이 기쁨(Lust)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함. 내세를 부정함. 죽음과 함께 영혼도 멸한다. 그러나 Lust 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서 Hedonismus를 택하지 않음. 인간의 욕심의 충돌은 오히려 기쁨을 줄어들게 함. 영혼의 평안을 침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거나 극복한다: 이러한 것은 정욕, 두려움, 고통 등에서 올 수 있다. 그들은 매일, 가능하면 매 순간을 즐기며 삶의 기쁨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즐거움을 방해하는 요소는 두려움인데, 그것은 신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그는 신이 없으므로 인간사에 간여하거나 인간에게 분노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당시 그리스 신의 문제).

칼빈이 열정적으로 고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르네상스를 통해 고대 철학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비판하였다(Pico della Mirandola, Francois Rabelais…)

I,5,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

- 인간에게는 탁월한 영혼의 능력이 있다(영혼의 신성): 추리력, 기억력, 발명능력…

- 인간에게는 영혼불멸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이 신적 존재이면서도 자신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능력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어찌 심판자가 심판을 안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감시하시고 통치하지 않겠는가?

1)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모든 것을 창안해냈다고 생각하는 경우.

2) 하나님이 아닌 것을 어떠한 우주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경우(스토아 비판):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비밀스러운 혼 주입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 악하고 독신적이다. 이들은 다음의 버질의 시를 좋아한다:

최초에 한 영(Logos, Weltseele)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beseelen).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이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대양 밑의 생선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

스토아의 범신론이 어떻게 자연과 신을 동일시 하는가를 알 수 있다.

I,5,6 창조주는 자신이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신적인 능력을 관찰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을 경배하며 그분께 기도하도록 만물을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성의 흔적인 놀랄만한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주신 창조주를 잊는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거대한 우주를 지탱하시며,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소진하시며, 불꽃으로 대기를 태우신다.

- 따라서 이것은 신자나 불신자가 모두 하나님의 윤곽을 깨닫게 하며, 그분의 권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도록 한다.

I,5,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 지금까지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은 인류를 다스릴 때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섭리(I,16-18에서 섭리론을 자세히 다룬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방법을 통하여 인자와 은혜를 베푸신다.

-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를 두신다. 하나님은 매일 분명한 표적을 통해서 경건한 자에게는 자비하심을, 불경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느끼도록 하신다. 그들의 죄악을 명백하게 처벌하신다.

- 또한 경건한 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 그러면 사악한 자가 벌을 받지 않고 경건한 자가 불행을 당하고 핍박까지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형벌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불행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칼빈이 여기에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악인을 심판하시고 선한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변함이 없다.

I,5,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생활을 지배한다

- 하나님은 인간사가 잘 돌아가도록 배려를 하신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길로 인도하시며,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 또한 악한 자들을 벌하신다.

-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표시이다. 특히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준다. 경건한 자들은 여기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근거를 알게되고, 불경한 자들은 입을 다물게 된다. 인간은 극장(Theatrum)에 앉아서 하나님이 펼치시는 파노라마를 구경하는 자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보고 믿음으로 들어오는 자는 거의 없다.

-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모든 것을 최선으로 이끄시며 모든 것을 최상으로 다스리신다.

I,5,9 우리는 하나님을 사변을 통하여 찾을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연구해야 한다.

- 하나님을 아는 데에서 생각의 유희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 고찰한 것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하심을 쉽게 알 수 있다.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받아들여서 우리 안에 머무르고 열매를 맺어야 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권능을 통해서 계시하시며, 우리는 그 권능을 우리 안에서 느끼며 그분의 선물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한층 더 깊은 감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자처럼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사변으로 기울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눈을 돌려야 한다.

- 어거스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와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무리 연구를 해 보아도 이것은 공허한 사변으로 끝난다. 이것을 칸트가 밝혀냄: 하나님의 존재를 연구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영역 밖이다. 그러나 칸트는 성경의 계시를 부인함. 기독교는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 칼빈은 6장부터 이것을 밝힘.

I,5,10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자연과 인간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자극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켜주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와 엄격함은 단지 서곡에 불과하며, 이것은 내세에서 완성된다. 경건한 자가 능욕을 당하고 악한 자가 행복하게 사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 어거스틴: „만약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신국론I,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 현세에서도 상을 주시고 벌을 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죄과에 대해 공정하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므로, 내세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하신다.

- 모든 하나님의 작품에서 마치 그림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나가고 진정하고 완전한 행복을 찾도록 초대되고 자극된다. 즉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우리에게 그분의 의와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증명하셨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계시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더 깊이 탐구해서 하나님을 알아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I,5,1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신과 영원한 왕국을 매우 명백하게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분명한 증거에 대하여 항상 눈이 어두워서, 이것들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 우주의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를 보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가장 신중한 플라톤까지도 (신적인 이데아의 영향이 미치는) 우주가 둥근 구형이라는 생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탁월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적인 사람도 방황하고 비틀거리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

I,5,1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미신과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

- 따라서 온 세상을 덮고 가득 채우는 오류의 진창이 여기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해력은 미궁과 같아서 국민마다 나름대로의 오류에 빠지고, 각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었다. 무지와 흑암에다가 뻔뻔함과 경솔함이 결합하여 하나님 대신에 각기 우상이나 유령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여러 철학자의 문제: 스토아, 애굽의 신비주의 신학, 에피쿠로스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유: 이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저없이 추론하였다. …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I,5,13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 순수한 하나님 경배(religio)를 날조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좇는 자는 모두 필연적으로 여기에 빠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우상 숭배자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을 배신한 자라고 선언하신다.

- 바울은 에베소 사람이 복음을 통해 참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한다(엡2:12-13)

- 소크라테스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아폴로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

I,5,14 인간은 스스로 올바른 하나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주 전체가 등불을 켜서 창조주를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은, 이렇게 보이는 것들에 의해 잘 계시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내적인 계시를 통해 조명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인식의 수단이다!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는 길은 믿음뿐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

- 따라서 자연계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역할을 한다.

I,5,15 우리의 무능이 문제이다

- 우리가 본래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능력이 없을지라도 이 무능력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변명할 수가 없다.

- 왜냐하면 우리 양심이 항상 우리의 (하나님을 찾는 데에서의) 게으름과 배은망덕을 고소하기 때문이다.

- 3가지의 변명과 그 변명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 우리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말 못하는 피조물이 매우 큰 목소리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 우리는 볼 눈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너무 분명하게 보여주시므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이 볼 수 있었다.

· 우리는 정신 박약이다: 이성이 없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할 것이다.

- 그에게 심겨진 하나님 지식의 씨앗이 열매맺지 못하고 곧 죽는 것은 인간의 잘못에 기인한다.

-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증거만으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관찰을 통해 하나님 지식을 얻자마자 진정한 하나님을 떠나고 머리로 지어낸 꿈과 환상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며,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다른 곳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 정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피조물)에 계시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아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인간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계속 순환되면서 인식이 깊어진다.

인간을 안다는 말은 르네상스의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의 비참함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계시로는 하나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20세기의 Emil Brunner와 Karl Barth의 논쟁.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가능한가? Karl Rahn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스토아 철학. 범신론: 만물은 신의 연장이다. 인격적인 신을 부정함. 오늘날의 보편적인 신관.

종교비판이 불가능한 이유는?: semen religionis때문에.

19세기의 종교비판(Religionskritik): Ludwig Feuerbach, Bruno Bauer, Karl Marx…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스도보다 하나님이 더 강조된 인상. 따라서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고 경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김. 과학의 발전과 같은 적극적인 세계관.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한다.

루터에게는 죄인의 칭의가 중요하다. 이로써 그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성경의 권위]

본 단락을 공부한 후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서비평이란 왜 불가능한 것인가를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자세히 공부를 원하는 사람은 필자의 번역, 에타 린네만의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와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구약 학자나 신약 학자에게 통용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129쪽. 부흥과 개혁사.

제6장: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인도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I,6,1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뿐이다

- 하늘에서나 땅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취는 광채는, 인간으로 하여금 배은망덕의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을 같은 죄책 아래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 자신의 임재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인간의 무능력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자 자신의 말씀의 빛을 주셨다. 자연계시의 문제는 구속주를 뚜렷하게 계시하지 못한다.

- 그런데 이 특권을 하나님께서 더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위해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이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울타리(말씀의 계시) 안에 넣으시고 보호를 하셨다.

- 노인에게 아무리 좋은 책을 주어도 읽지 못하기 때문에(자연계시를 통하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 읽을 수 있도록 안경을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안경(성경)을 주신 것이다 .

-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구속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특별한 계시는 필요불가결하다.

I,6,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는데, 이들은 이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가르침이 그들 마음속에 새겨졌다.

- 이 가르침이 자손 대대로 남겨질 수 있게 되고자 공적인 기록이 되게 하셨다: 모세가 족장의 이야기와 율법을 기록함. 그래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후에 선지자들이 율법을 해석하도록 하셨다. (선지자들의 임무는 예언을 하는 것보다는,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다!)

-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 주력하셨다.(율법 수여와 율법의 적용)

- 성경의 두 종류의 가르침.

·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믿음과 회개를 가르친다 성경의 주된 가르침.

·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과 거짓된 일군의 우상들이 혼동되지 않도록, 명백한 특징과 표시로써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세상을 통치하시는지를 잘 묘사한다.(칼빈에게 중요한 점)

루터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세웠다면, 칼빈은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졌다. 루터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고, 칼빈에게는 하나님 영광이 중신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신론이 중심이 됨.

-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찬란한 사역을 보지만, 더 깊은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인간이 참된 종교의 빛을 받으려면 마땅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르침으로 시작을 해야 하며,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참되고 구원을 주는 교리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단순히 느끼는 것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큰 차이이다. 후자는 매우 구체적이다.

-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시고자 하는 것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인식(cognitio)의 시작이 된다. 순종이 인식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칼빈은 말씀에의 순종을 강조함.

I,6,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진다

- 인간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과,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향 때문에 문자로 된 말씀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말씀을 사용하셨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빠르게 전진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목적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6:16) 하나님의 광채는, 우리가 말씀의 끈으로 인도받지 못하면 우리는 미궁에서 허우적거린다.

-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말씀)이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오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은 든든한 말씀의 끈으로 인도를 받아야 하며, 말씀은 머리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와야 한다.

I,6,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8). 자연계시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율법, 교훈, 계명이라는 말로 율법이 상당히 강조됨. 율법이 왜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율법안에 계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섬겼다고 생각해도 이것은 허사이다. 창조의 계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정확하게 계시할 수 없으므로 꼭 성경이 필요하다. 교회 밖(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간은 타종교의 신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선행이나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선행과 사랑을 하는 방식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규정을 해 놓으셨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없다.

제7장: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전 장에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특별계시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 성경 66권은 누가 결정을 하였는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I,7,1 성경의 권위는 교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성경이 먼저인가 교회가 먼저인가의 문제.

성경은 누가 결정했나?

1. „교회가 결정했다“: 이것은 가톨릭의 주장. 정경 66권 외에도 다수의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킴. 성경 외에도 전통을 성경만큼 중요시 한다.

2.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교회가 확정했다: 신교의 주장.

-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칼빈의 반증.

·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성경)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그 판단에 의존할 수도 없다.

· 우리의 신앙이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권위에 의존할 수 없다. (실제로 외경의 내용은 정경보다 훨씬 권위가 떨어진다)

I,7,2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설립되었다.

- 사도 바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2:20)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이므로,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 이 가르침은 성경이 됨.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도 형성되었다.

I,7,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 없다.

- 이들은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세운다: „나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감동됨이 없이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이 말은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들에게 한 것으로서, 사람이 전후 문맥을 보지 않고 이 말을 기만적으로 인용을 한다.

- 어거스틴 말의 의미:

· 교회의 권위는 출발점의 역할을 한다: 내가 믿음에 대해 전혀 모를 때는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복음을 확실한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전혀 모를 때에는 먼저 사람의 말을 들어야하지 않는가?

· 따라서 어거스틴은 여기에서 경건한 자의 신앙이나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증언이 불신자들을 이러한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복음의 확실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 따라서 그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판단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미암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고,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는 인도자가 된다.

교회가 성경을 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교회가 성경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있으며 또한 감시를 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 개혁해나가는 교회이다“

I,7,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 3가지 중요한점:

· 우리는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

·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성경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최고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의 비밀스러운 증거를 통하여 성령의 내적 증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I,5.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하여 감동과 권유를 받아 성경을 아주 고상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데까지 이를 수가 있다(딤전3:15). 그리고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신령함, 교훈의 효험, 문체의 웅장함, 모든 부분의 내용상의 일치성, 내용 전체의 목표(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을 밝혀 주는 충분한 내용 전개, 이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점들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인 완전성 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입증해 주는 논증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

- 그렇다면 객관적인 증거는 없는가?

·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파렴치하게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한, 성경의 교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명백한 표시를 하게 된다. 이것은 수없이 많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 그리고 곧 성경의 모든 책들이 모든 다른 자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맑은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높은 위엄이 즉시 우리의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가 뻔뻔스럽게 저항을 못하게 하고 순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논쟁을 통해 성경이 믿을만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어리석다.

- 불신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가르쳤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가 모든 증명을 훨씬 능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신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인 쳐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 (Erleuchtung)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의심을 제거할 수 없다.

기독교 변증의 경계선: 기독교 변증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를 믿도록 설복하는 시도가 아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일이다. 변증은 단지 기독교의 믿음이 불합리한 것이 아니며, 높은 정신과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변증의 시도는 성령의 역사를 가릴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의 문제점은?

- 성경에는 신화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불트만, 역사비평신학).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기사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그 기사를 제거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1)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2) 창조 이야기는 고대 바빌론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부정합.

-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다(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I,7,5 성경의 자증(自證)성

- 내적으로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자는 성경(의 진정성)을 고수한다.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한다. 따라서 성경을 증거와 (불완전한)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또한 성경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통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성경을 확증시켜야만 성경이 우리를 올바로, 그리고 진지하게 감동시킨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한다. 성경 자체의 존엄성(객관성)과 성령의 증거(주관성),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믿게 한다.

- 따라서 성경은 비록 사람이 기록을 하였지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은 이 사실에 종속시켜야 한다.

- 우리는 말씀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엄이 살아서 역사 하시므로, 이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힘이 우리의 지식과 의지를 동원하여 말씀의 순종으로 불을 지피게 하며, 이 능력은 인간의 모든 의지와 지식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하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설복하시고 역사 하시는 힘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회개하여 삶을 바꾸어 나간다. 성경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처방할 약이 없다.

-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인 치시는 신앙만이 올바른 신앙이다(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다“(사54:13). 이것은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에게 주신 약속이다. 하나님은 구별해 낸 선민에게만 이러한 특권을 주신다.

- 우리가 세상에 신자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그 반대로 „하나님의 비밀은 그것이 주어진 자 외에는 아무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마13:11참조)는 말씀에 유념하자.

이러한 생각들이 예정론과 연결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됨. 따라서 신자는 무리해서 성경을 변증할 필요가 없다. 억지로 사람을 믿게 할 필요도 없고,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성경을 변증하는 자는 말씀 자체의 능력을 믿고 말씀으로 변증할 것. 세속 사람이 비웃은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성적인 증거가 있다.

(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성령의 증거하는 주관성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성경 자체의 존엄성도 중요하며, 인간이 만든 문서 중에서 성경과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I,8,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인간의 모든 판단보다 높고 강력하지 않은 한, 성경의 권위를 논증으로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확신에서 찾는다든가(가톨릭), 혹은 어떤 다른 방편으로 이 권위를 보장시키려는 시도는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초가 놓여있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체 남아있을 것이다.

-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설복당하여 읽으면 깊은 비밀이 열리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무한히 감탄하게 된다.

· 우리가 성경에서 다른 책들과는 다른 독특성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존엄성을 받아들이며 읽는다면, 우리 마음에서 확신하지 못하던 구절들이 이해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질서 있고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는지.

· 가르침이 인간적인 것이 전혀 없고 그 기원이 항상 하나님이라는 것.

·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있다.

· 그 외에도 많다.

- 성경의 특징은 표현된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용의 숭고함에 있다.

· 천국의 숭고한 비밀이 인간의 비천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 만약 성경이 놀라운 웅변으로 장식되어 있다면, 불신자들은 성경의 능력은 단지 웅변의 힘에 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이 세련되지 못하고 거친 표현의 단순성이 변론가들의 모든 기교보다도 더 큰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아름다운 수식적 표현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한 말: „신앙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2:5)에 있다.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 한 것이다.

· 진리는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는 스스로 자증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

- 성경 자체의 자증 능력에 대해서

· 데모스테네스, 키케로, 소크라테스, 플라톤등과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하고, 감동을 준다.

·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당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내용이 살아있고 당신의 마음속 깊이 뚫고 들어오며, 우리의 골수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조금 전에 읽은 이 변론가나 철학자들의 능력이 성경을 통해 받은 깊은 인상들에 의해 거의 사라진다.

· 즉,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말씀은 인간의 모든 재능을 능가한다.

I,8,2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내용이다

- 성경의 다양한 표현 방식

· 선지자들 중 어떤 이들의 문체는 매우 섬세하고 우아하며 화려하기까지 해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 그러나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아, 스가랴의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는 조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그럼에도 내가 먼저 말했던 성령의 위엄을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훌륭한 수사법도 이용을 하시며, 시골적인 목자의 표현도 이용하신다.

- 성경의 내용에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 이것은 선지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누구 하나라도 인간의 지혜를 훨씬 넘어서지 않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맛이 없다고(무미건조하다고) 하는 사람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경을 읽으며 이러한 것을 수없이 체험해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수없이 감탄하고,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확고하게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I,8,3 성경은 매우 오래전에 쓰였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부들도 많이 다룸.

- 다른 모든 저작자들보다 훨씬 앞선 모세는 자신의 가르침(창세기)은 긴 전승을 통해 받은 것이므로 성경이 나이에서 다른 책보다 훨씬 뛰어나다.

I,8,4 모세의 예가 보여주는 성경의 진실성

- 칼빈이 제시한 4가지 증거:

· 칼빈은 요세푸스의 „아피온에게 대항하여“(Against Apion)를 언급함: 요세푸스도 이 책에서 모세 율법은 이교의 법률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며, 더 공의롭고 인도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여러 백성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 모세가 자기 조상 레위의 악행을 기술함으로써 자기 지파에 영원한 오점을 남겼다: 창49:5-6.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고, 자기 지파 사람으로부터 심한 미움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 또한 자기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사악한 불평을 기록하였다(민12:1). 그는 성령의 명령에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