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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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몇 년간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서울처럼 변화무쌍한 도시가 전 세계에 없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예외도 있다. 서울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풍경을 간직한 공간들을 찾아가보았다. 사진 김주형 기자 · 장성배 기자 시간이 멈춘 곳으로 떠나는 여행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자리한 성우이용원은 시대극 촬영 을 위한 세트장의 일부처럼 다가왔다. 주인 이남열(65) 씨 는 “태풍 사라호가 강타했을 때(1959) 초가지붕이 날아가 슬레이트로 바 꾼 것 외에는 처음 지을 때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돌계단을 올라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나무문을 열고 성우이용원 안으로 들 어서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옛날 이 발 의자 석 대와 타일로 마감한 세면대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었다. 세면 대 위에는 샴푸가 아닌 비누와 사과식초가 놓여져 있고 연탄난로 위에는 양철통이 올라가 있었다. 7남매 중 다섯째인 이 씨는 1971년 이용사 면허증을 교부받았다. 부친으 로부터 성우이용원을 물려받은 것은 그보다 이전인 1965년이다. 아버지 가 중학생 아들의 이름으로 사업자 명의를 바꿔 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직접 아들에게 이발 기술을 가르쳤다. “드라이부터 먼저 배웠습니다. 3년 동안 드라이 하고 숫돌에 연장 갈고 나 서 가위 잡았습니다. 이발 기술 전수를 위해 무조건 3~4일에 한 번씩은 아 버지 머리를 깎아야 했습니다. 면도까지 꼭꼭 했는데 조금만 잘못 해도 혼 나곤 했습니다. 아버지도 괜찮으셨지만 지금 제 이발 기술이 그때보다 두 배 이상은 나은 것 같습니다.” 성우이용원은 1920년대 문을 열었다. 일본인에게 이발 기술을 배운 아버 지가 취업했던 이발소의 주인이 바로 이남열 씨의 외할아버지다. 아버지는 장인에게 물려받은 이발소의 이름을 성우이용원으로 바꾸었다. 공덕동이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였던 시절 성우이용원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 City Exploration 201406 169 적댔다고 한다. 특히 명절을 앞두고는 애어른 할 것 없이 마을 남자들 이 이발소 앞에 길게 줄을 서곤 했다. 종업원이 많을 때는 다섯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씨가 처음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한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게 많다. 이발 요금은 80원에서 1만 원으로 올랐다. 한 사람 머리를 깎는데 소 요되는 시간도 1시간에서 30분 이내로 줄었다. 물가가 뛰어 타산을 맞추기 어려워져 머리를 깎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 즘은 하루에 많이 깎을 경우 25명이라고 한다. 성우이용원 3대 째 주인은 앞으로 10년 이상 너끈하게 이발소를 지 켜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술, 담배는 물론 네 발 달린 짐승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저처럼 깎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속성으로 배운 인 스턴트 이발을 합니다. 기술 전수요? 이발을 제대로 하려면 8가지 기 술을 배워야 합니다. 하루 이틀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10년 은 붙잡고 가르쳐야 하는데 누가 견디겠습니까?” 서울 도심에 이런 이발소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 손 에 이끌려 이발소를 다니던 30년 전 코흘리개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박제가 된 풍경, 성우이용원 1 뜨거운 양철통에 솔을 문지르면 면도 거품의 입자가 고와진다. 2 머리 감기기는 이 씨가 배운 8가지 이발 기술 중 가장 쉬운 축에 든다.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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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박제가 된 풍경, 성우이용원img.yonhapnews.co.kr/basic/svc/14_images/201406_CityExploration.pdf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였던 시절 성우이용원은 언제나

외국에 몇 년간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서울처럼 변화무쌍한 도시가 전 세계에 없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예외도 있다. 서울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풍경을 간직한 공간들을 찾아가보았다.

사진 김주형 기자 · 글 장성배 기자

시간이 멈춘 곳으로 떠나는 여행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자리한 성우이용원은 시대극 촬영

을 위한 세트장의 일부처럼 다가왔다. 주인 이남열(65) 씨

는 “태풍 사라호가 강타했을 때(1959) 초가지붕이 날아가 슬레이트로 바

꾼 것 외에는 처음 지을 때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돌계단을 올라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나무문을 열고 성우이용원 안으로 들

어서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옛날 이

발 의자 석 대와 타일로 마감한 세면대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었다. 세면

대 위에는 샴푸가 아닌 비누와 사과식초가 놓여져 있고 연탄난로 위에는

양철통이 올라가 있었다.

7남매 중 다섯째인 이 씨는 1971년 이용사 면허증을 교부받았다. 부친으

로부터 성우이용원을 물려받은 것은 그보다 이전인 1965년이다. 아버지

가 중학생 아들의 이름으로 사업자 명의를 바꿔 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직접 아들에게 이발 기술을 가르쳤다.

“드라이부터 먼저 배웠습니다. 3년 동안 드라이 하고 숫돌에 연장 갈고 나

서 가위 잡았습니다. 이발 기술 전수를 위해 무조건 3~4일에 한 번씩은 아

버지 머리를 깎아야 했습니다. 면도까지 꼭꼭 했는데 조금만 잘못 해도 혼

나곤 했습니다. 아버지도 괜찮으셨지만 지금 제 이발 기술이 그때보다 두

배 이상은 나은 것 같습니다.”

성우이용원은 1920년대 문을 열었다. 일본인에게 이발 기술을 배운 아버

지가 취업했던 이발소의 주인이 바로 이남열 씨의 외할아버지다. 아버지는

장인에게 물려받은 이발소의 이름을 성우이용원으로 바꾸었다. 공덕동이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였던 시절 성우이용원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

City Exploration

201406 169

적댔다고 한다. 특히 명절을 앞두고는 애어른 할 것 없이 마을 남자들

이 이발소 앞에 길게 줄을 서곤 했다. 종업원이 많을 때는 다섯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씨가 처음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한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게 많다.

이발 요금은 80원에서 1만 원으로 올랐다. 한 사람 머리를 깎는데 소

요되는 시간도 1시간에서 30분 이내로 줄었다. 물가가 뛰어 타산을

맞추기 어려워져 머리를 깎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

즘은 하루에 많이 깎을 경우 25명이라고 한다.

성우이용원 3대 째 주인은 앞으로 10년 이상 너끈하게 이발소를 지

켜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술, 담배는

물론 네 발 달린 짐승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저처럼 깎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속성으로 배운 인

스턴트 이발을 합니다. 기술 전수요? 이발을 제대로 하려면 8가지 기

술을 배워야 합니다. 하루 이틀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10년

은 붙잡고 가르쳐야 하는데 누가 견디겠습니까?”

서울 도심에 이런 이발소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 손

에 이끌려 이발소를 다니던 30년 전 코흘리개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박제가 된 풍경, 성우이용원

1 뜨거운 양철통에 솔을 문지르면 면도 거품의 입자가 고와진다.

2 머리 감기기는 이 씨가 배운 8가지 이발 기술 중 가장 쉬운 축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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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 박제가 된 풍경, 성우이용원img.yonhapnews.co.kr/basic/svc/14_images/201406_CityExploration.pdf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였던 시절 성우이용원은 언제나

불광대장간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 대은초등학교 인근에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자리에서만 40년 넘게 이어진 ‘망치 교향곡’이다.

세월을 두드리는 장인(匠人), 불광대장간

박경원(77) 씨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군이다. 6·25 때 경

기도 신갈로 피란을 내려왔다. 휴전이 됐지만 격전지였던

고향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도 산하도 모두 초토화됐다.

서울에서 새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피란민 소년은 학교를 다니며 대장간

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이 끝나면 먹을 것을 받아

배고픔을 해결했다. 그렇게 시작한 대장간 일은 평생의 끼니를 책임져주었

다. 아들 상범(46) 씨도 군 전역 후 아버지와 함께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불광대장간 부자 대장장이가 만들어내는 물건은 부지기수다. 일반적인 농

기구부터 미장공, 목수 등이 쓰는 연장까지 100가지가 넘는다. 약재상에

서 쓰는 작두, 석수장이가 돌을 깰 때 쓰는 도구도 만든다.

“요즘 제일 많이 나가는 건 약초 캐는 분들이 쓰는 호미, 괭이입니다. 텃밭 가

꾸고 주말농장 하시는 분들도 풀을 제거할 때 쓰는 도구를 많이 사갑니다.”

캠핑 인구가 늘면서 야외에서 숙박할 때 필요한 도구를 찾는 손님도 많아

졌다. 텐트를 고정하는 팩을 박거나 뽑을 때 사용하는 장도리 망치부터

잡목을 쳐내고 통나무를 쪼갤 때 쓰는 날이 긴 도끼까지 다양한 캠핑용

도구가 판매된다.

불광대장간의 연장은 건축 인부들 사이에서 이른바 명품으로 통한다. 지

난 5월 13일 하루 일을 접고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미장공 A씨는 흙손 6개

를 한 번에 구입했다.

“10년 넘게 불광대장간만 이용합니다. 여기 물건이 제일 좋으니까요. 쇠가

다릅니다. 다른 데서 파는 것은 잘 망가지고 날이 오래 못 갑니다. 제가 아

는 목수들도 다들 이곳에서 연장을 사갑니다.”

쇠로 만드는 물건의 품질은 재료와 메질이 관건이다. 일단 좋은 쇠를 써야

한다. 불광대장간은 중국산 저가 쇠를 취급하지 않는다. 포스코, 현대제철

에서 나오는 쇠를 1차 가공한 재료를 사다가 쓴다고 한다. 화덕에 벌겋게

달군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드려 용도에 따라 모양을 잡는 메질 과정

또한 중요하다. 대장장이 경력이 도합 90년에 육박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탁월한 기술과 호흡으로 튼튼하고 쓰기에 편리한 물건을 빚어낸다. 호미

하나를 구입하면 2~3년은 충분히 쓴다고 한다. 부자 대장장이의 남다른

자부심은 거의 모든 생산품에 ‘불광’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는 것으로 이어

졌다.

명성도 얻고 수요도 많아졌지만 불광대장간에서 하루에 만들어내는 물건

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아들 대장장이는 “공장처럼 물건을

막 찍어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업량을 구체적으로 계량화해 하루에 몇 개 만든다, 라는 게 없습니다.

부자지간이라 인건비에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오늘 힘들면 내일 하면 되

니까요.”

대장간에서 일을 도우며 끼니를 해결하던 소년은 어느새 백발의 장인이 되었다. 박경원 대장장이는 “쇠 녹이고 철물을 만드니 규모만 다를 뿐 포항제철(포스코)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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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대장간에선 쇠로 만든 거의 모든 소품 도구를 구할 수 있다. 그

야말로 철물 백화점이다. 물건은 직접 방문해 구입하거나 전화(02-

353-8543)로 주문해 택배로 받을 수 있다.

Page 3: 박제가 된 풍경, 성우이용원img.yonhapnews.co.kr/basic/svc/14_images/201406_CityExploration.pdf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였던 시절 성우이용원은 언제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데 반세기가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킨 다방이 하나 있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건너편에 자리한 학림다방이다.

소극장 운동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서울 중구 저동 삼일로창고극장 입구에서 의미심장한 문구를 하나

만났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서울 대학로 터줏대감, 학림다방

한국 연극사의 증언자, 삼일로창고극장

학림다방은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에서 가깝

다. 간판 아래 좁은 입구에 시인 황동일이 쓴 헌사가 자리해

있다. “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쯤 어디에서간 서성거리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헌사를 천천히 다 읽고 나무계단을 오르면

1956년 문을 연 고색창연한 다방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난 5월 12일 10여 년 만에 찾아간 학림다방은 예전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간판부터 내부 구조, 분위기까지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

다. 학창시절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동창을 10년 만에 만난 기분이었

다. 천장 조명 시설 일부와 벽면을 장식한 소품들, 메뉴에 올라 온 음

료 이름과 가격은 새로웠다. 크림치즈 케이크(오렌지 잼, 블루베리 잼)

는 가장 최근에 추가된 메뉴로 보였다.

학림다방의 이름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예술대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 문리대 축제인 ‘학림제’에서 유래했다. 김지하, 이청준, 김승옥, 전

혜린 등 서울대 문리대 출신 문인들이 젊은 날을 반추하는 글을 보면

학림다방이 자주 언급된다. 대학로에 공연장이 우후죽순 생기고 한국

문화예술위원회가 들어선 이후에는 문화계 인사들의 모임 공간으로

바뀌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으로 생애를 보낸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장도 단골로 알려져 있다.

학림다방을 찾는 이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폭이 넓다. 특

히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학림다방에서 촬영되면서 젊은층의 발길

이 늘었다. 남자 주인공 도민준이 앉았던 창가 자리는 배우 김수현을

사랑하는 국내외 팬들에게 성지(聖地)로 통한다.

1987년부터 학림다방을 지켜온 이충렬 사장은 커피 맛에 대한 자부심

이 남다르다. 메뉴판에 ‘학림의 모든 커피는 학림에서 직접 로스팅한

학림 블랜드로 만들어집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학림 커피는 원두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서울 청계천에서 삼일대로를 따라 남산1호터널 방향으로

오르면 명동성당 사거리가 나타난다. 사거리를 지나 100

m가량 언덕길을 더 올라가면 도로 오른편에 작은 극장 간판을 하나 볼

수 있다. ‘1975 삼일로창고극장’이다. ‘1975’는 주택을 소극장으로 개

조해 문을 연 년도를 의미한다.

삼일로창고극장이 걸어온 길은 우리나라 소극장 역사와 궤를 같이 한

다. 한국 소극장의 효시는 1958년 서울 을지로 입구에 문공부가 마련

한 객석 300석의 원각사다. 그러나 원각사는 존속 기간이 짧았다.

1969년에는 프랑스 유학파인 극단 자유 대표 이병복 씨와 김정옥 씨가

‘까페 떼아뜨르’를 열었다. 삼일로창고극장은 1975년 방태수 대표가 개

관한 ‘에저또창고극장’을 모태로 한다. 개관 이후 젊은 연극인들 중심으

로 실험적인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지만 경영이 어려워 1년 만에 문을 닫

아야 했다. 이것을 연출가 이원경 씨가 백병원 유석진 박사의 도움을 받

아 인수해 삼일로창고극장으로 개명했다.

삼일로창고극장은 까페 떼아뜨르, 실험극장 등과 함께 한국 소극장 운

동을 이끌었다.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흥행 신화를 이어갔고

‘유리 동물원’, ‘세일즈맨의 죽음’ 등을 선보이며 소극장 연극의 산실 역

할을 했다. 오태석, 김도훈, 강영걸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과 추

송웅, 강계식, 이호재, 김금지, 명계남, 유인촌 등 연기자들이 삼일로창

고극장을 무대로 활동했다. 배우 추송웅은 1983년 삼일로창고극장을

인수해 ‘떼아뜨루 추’로 극장명을 바꾸기도 했다.

소극장은 1980년대 초반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급증했다. 서울에만 수

십 개의 소극장이 새로 생겨났다. 하지만 몇몇 소극장을 제외한 대다수

가 ‘새로운 연극 창조를 위한 실험정신과 연극의 예술성 확립’이라는 본

래 취지에서 벗어나 상업 연극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삼일로창고극장은 관객들이 명동 일대를 떠나 대학로 상업 연극으로 우

르르 몰려간 이후에도 꿋꿋하게 소극장 운동의 정신을 지켜냈다. 하지

만 객석 점유율이 갈수록 떨어져 재정난으로 인해 폐관과 재개관을 반

복해야 했다. 2003년 극장을 인수한 연극, 뮤지컬 작곡가 정대경 대표

가 사재 수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운영난은 계속됐다. 최근 수년 동안

은 태광산업의 도움으로 극장 명맥을 이어왔다. 삼일로창고극장을 찾

아가 연극 한 편을 본다면 이는 소극장 운동의 불씨를 살리는 일이 된

다. 예술로부터 받는 위로는 덤이다. 6월에는 무료 공연인 ‘그녀들만 아

는 공소시효’가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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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과 구분된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긴다. 낡은 소파에 몸을 맡긴 채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시며 클

래식을 들을 수 있다. 주방 옆에는 LP 1천여 장이 보관돼 있다.

서울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은 지난 5월

5~25일 남아프리카공화국 극작가 아돌

푸가드의 ‘아일랜드’를 공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