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 대자연의 품에서 쇠잔해진 심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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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은 넓고 그윽하다. 한눈에 담을 수 없고, 단번에 경험할 수 없다. 재촉하듯 빠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깨달음을 준다. ‘지리산권 방문의 해’를 맞이해 웅숭깊은 매력을 간직한 곳들을 찾아다녔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남원과 함양, 곡성에서 여유로운 며칠을 보냈다. 사진 박창기 기자 · 박상현 기자 지리산권 대자연의 품에서 쇠잔해진 심신을 달래다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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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지리산권 대자연의 품에서 쇠잔해진 심신을 달래다img.yonhapnews.co.kr/basic/svc/14_images/201406_Special.pdf · 2003년 소실돼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은 넓고 그윽하다. 한눈에 담을 수 없고, 단번에 경험할 수 없다. 재촉하듯

빠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깨달음을 준다. ‘지리산권 방문의 해’를 맞이해 웅숭깊은 매력을

간직한 곳들을 찾아다녔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남원과 함양, 곡성에서 여유로운 며칠을 보냈다.

사진 박창기 기자 · 글 박상현 기자

지리산권 대자연의 품에서 쇠잔해진 심신을 달래다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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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 있는 광활

한 산이다. 지리산권에 속하는 시와 군이 7

개에 이른다. 단순히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당일치기 등산은 물론 이틀이나 사흘 동안

주능선을 타는 종주가 가능하다. 서쪽의 노

고단부터 동쪽의 천왕봉까지 고산준령이 이

어지는데, 체력과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

면 산행이 쉽지 않다.

하지만 지리산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종주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봉우리 하나를

목표로 한나절 동안 다녀와도 웅대함을 느

낄 수 있다. 그중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남원 바래봉이다. 높이가 1천165m

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비해 낮고, 급

경사 구간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늦봄

과 초여름에는 진한 분홍빛을 뽐내는 철쭉

꽃이 흐드러져 장관을 이룬다.

바래봉 등산은 전북 남원 운봉읍 지리산허

브밸리에서 시작된다. 지리산허브밸리는 남

원시가 조성한 관광지로 지리산에서 자생하

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지리산허브밸리를

벗어나면 완만한 임도가 펼쳐진다. 왼쪽으로

는 목장 같은 초지 너머로 평야와 촌락이 있

는 분지가 보인다. 바래봉까지는 분지를 등

지고 오르막을 계속 걸어야 한다.

바래봉 철쭉은 4월 하순부터 고도에 따라 순

차적으로 꽃망울을 터뜨린다. 봉우리 주변은

5월 하순은 돼야 피어난다. 절정이 열흘을 넘

기기 어려운 보통의 꽃 여행지와 달리 한 달

남짓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

사실 바래봉이 철쭉으로 유명해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초목이 매우 무

성했는데, 1970년대 면양 목장이 들어서면

서 식생이 변했다고 한다. 양들이 독성이 있

는 철쭉만 제외하고 풀을 뜯어 먹은 결과, 철

쭉이 도드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폐쇄돼

있던 등산로가 1990년대 개방되면서 입소문

이 났고 지금은 최고의 철쭉 명소로 자리매김

했다. 철쭉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평일에도 등

산객이 북적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바래봉 정상 표지와 철쭉꽃.

철쭉꽃은 하나씩 따로 봐도,

묶어서 같이 봐도 매혹적이다.

도시에서 눈은 피로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햇빛을 반사하는 유리, 칙칙한 회색

콘크리트뿐이다. 하지만 지리산은 언제나 곱고 따스한 빛을 발산한다.진분홍빛과 초록빛으로 물든 땅

色바래봉 & 서어나무 숲

지리산 바래봉에서는 봄마다 분홍빛 물결이 일렁인다.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꽃기운이 정상에 미치면

봄이 비로소 마무리된다. 그 현장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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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은 바래봉 정상과 팔랑치로 향하는 능선에 가장 많다. 비탈을 따라 양옆에 철쭉나무가

호위하듯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바래봉 정상에서는 서 있기도 힘든 강풍을 맞으면서도

꽃을 내보이는 철쭉의 생명력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모양새가 무척 고혹적인 철쭉은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꽃이다. 다섯 갈래로 벌어진

꽃송이 사이에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는 듯한 암술과 수술이 있다. 꽃잎의 색깔은 주로 진

한 분홍색이지만, 가끔 연한 분홍빛을 띠기도 한다. 발랄하고 선명한 진분홍색과 우아하고

청초한 연분홍색이 조화를 이루며 산을 채색한다.

바래봉의 철쭉 철을 놓쳤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경남 산청의 세석평전은 해발 1천

600m로 6월에 철쭉이 핀다. 이곳의 철쭉도 ‘지리산 10경’에 포함될 만큼 아름답다.

신비로운 마을 숲 속으로

지리산허브밸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의 행정마을에는 서어나무 숲이

있다. 180여 년 전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으

면서 숲이 만들어졌다. 현재는 높이가 20m에 달하는 노거수들이 군락

을 이뤄 상당히 볼만하다. 지난 2000년에는 ‘아름다운 마을 숲’ 경연에

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서어나무 숲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다. 그 덕분에 숲 속

을 거닐면 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고, 오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의 서

어나무는 흥미롭게도 둥치가 맞닿아 있는 연리지(連理枝)가 유독 많다.

서어나무는 자작나무과 낙엽 교목이지만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와는 생

김새가 다르다. 훨씬 크고 줄기가 굵다. 또 서어나무는 적당한 습도와

온도를 가진 토양에서 안정된 삼림을 형성하는 ‘극상림’으로 알려져 있

다. 인간 사회에 비유하면,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라 할 수 있다. 여름

에 녹음을 선사하는 서어나무는 가을이 되면 붉으면서도 노란 단풍이

들어서 색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은 주민을 위한 공간이지만 여행자도 한적하게 휴

식을 취할 수 있다. 자그마한 정자와 평상에 앉아 맑은 공기를 호흡하

고, 푸른 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행정마을 서어나무는 모두 거목이다.

운봉읍 서어나무 숲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연상시킨다. 평탄한 대지에 나무들이

높이 솟아 있다.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식재한 서어나무가 성장해 아름다운 숲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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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지안재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를 상징한다. 강 상류의 감입곡류천처럼 길이

휘돌아 나 있다. 지안재를 통과해 오르막을 가면 오도재에 닿는다.

조망 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커다란 홍예 두 개 위에 누각이 있는

지리산 제일문(第一門)과 지리산을 노래한 시가 새겨진 시비, 익살스러

운 표정의 장승이 들어서 있다.

오도재까지 심하게 굽이도는 도로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지안재

다. 함양과 남원을 잇는 국도에서 빠져나와 차로 5분 남짓 이동하면 다

다르는 오도재의 초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도재’로 잘못 알고

있지만, 실제 명칭은 지안재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히기도 했던 지안재는 주변에 수목이

없어서 풍광이 시원스럽다. 주변에 특출한 볼거리는 없지만, 자전거 동

호인과 사진 애호가들이 자주 들른다. 자그마한 전망대에 오르면 유려

한 곡선을 그리는 길을 내려다볼 수 있다.

고요한 정자에서 즐기는 음풍농월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은 함양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구다. 조선시대 많은 관료와 학자를 배출한 안동에 필적한 만한 고장

이 함양이었다. 함양을 여행하면서 유서 깊은 서원과 고택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함양의 선비 문화는 화림동(花林洞)계곡의 정자에도 깃들어 있다. 못과

정자가 8개씩 있다는 뜻의 ‘팔담팔정’(八潭八亭)이란 말이 전해올 정도

로 계곡 처처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화림동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의 지류로 기이한 바위와 소나무가 많아 풍경이 수려하다. 함양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계곡의 절경을 조금 더 낭만적으로 보기 위해 정자

를 지었을 듯싶다.

경남 함양 마천면은 전형적인 산골이다. 천왕봉이 어디서나 보이고, 해발 1천m가 넘는 봉우리

가 즐비하다. 함양읍에서 면소재지로 가려면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의 오목한 능선을 가로질러

야 한다. 예부터 다양한 산물이 운반되고 행인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인 높이 733m의 오도재다.

‘오도(悟道)’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로 조선시대에 김종직, 김일손,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

은 많은 유학자와 승려들이 넘어 다녔다고 전한다.

오도재로 향하는 길은 지금도 험난하다. 구절양장의 오르막을 5㎞ 정도 달려야 겨우 닿는다.

옷깃을 세우게 할 만큼 강한 바람이 부는 정상부에는 웅장한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남원과 인접한 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모두 품고 있는 곳이다. 지세가 험하고

평지가 많지 않지만, 곳곳에 절경이 숨어 있다.굽이도는 길에도끝은 있더이다

線오도재 & 화림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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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화림동계곡의 정

자가 호남과 대비되는 특성을 지닌다고 밝혔다. 그는 “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흔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

주는데,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

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의 일부나 배경이 되지 않고, 자신

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이야기다.

화림동계곡의 정자가 지닌 이러한 특성은 선비문화 탐방로를

거닐면서 찾아볼 수 있다. 선비문화 탐방로는 거연정(居然亭)

에서 오리숲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거연정부터 동호정

(東湖亭)이나 농월정(弄月亭)까지 걸으면 충분하다.

탐방로의 출발점인 거연정은 계곡의 기슭이 아니라 한가운데

입지한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야만 정자에 다다른다. 일반적

인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평면적이라면, 사방이 계곡인 거

연정은 입체적이다. ‘자연에 거한다’는 뜻에 공감이 된다.

정여창이 유영하던 곳에 세워졌다는 군자정(君子亭)을 살펴

보고 계곡을 건너면 잘 정비된 산책로인 선비문화 탐방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우거진 길은 인적

이 드물어 조용하고 한가롭다. 화림동계곡의 세 번째 정자인

영귀정(詠歸亭)은 위치가 호남의 정자와 흡사하다.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장소에 숨어 있다.

동호정은 거연정과 함께 가장 이름난 정자다. 임진왜란 때 선

조를 업고 피난을 갔던 장만리의 후손이 1890년대 그를 기리

며 세웠다. 정자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제외하면 유

다르지 않지만, 앞에 있는 널찍한 암석이 특이하다. ‘차일암’이

라 불리는 이 바위에서 옛 선비들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화림동계곡 정자의 백미였던 ‘농월정’이

2003년 소실돼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자 터에서 장쾌한

소리를 내는 계수를 감상할 수 있다.

Place2

Place4

Place7

Place5

Place6

Place3

Place1

선비문화 탐방관

안의중학교

호성마을

월림마을

동호정다곡교

영귀정군자정

거연정

황암사

경모정

농월정

구로정점풍교

오리숲

남천정

서하면

안의면

❶❷

선비문화탐방관 영귀정 다곡교 동호정 호성마을 남천정 황암사 농월정

0.4㎞ 0.5㎞ 1.1㎞ 1.0㎞ 0.7㎞ 1.3㎞ 1.0㎞

농월정 월림마을 구로정 점풍교 오리숲1.3㎞ 1.0㎞ 1.1㎞ 0.7㎞

2구간 : 총 거리 4.1㎞

1구간 : 총 거리 6.0㎞

전시서의 5대손이 정여창을 추모하며 1802년 ‘군

자가 머무르는 정자’라는 뜻으로 세웠다. 건물은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군자정이 위치한 봉전

마을은 정여창의 처가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군자정

영귀정

경모정

농월정

동호정

구로정

거연정

화림재 전시서의 7대손인 전재학, 전민진이 1872

년 건립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누각으로 지

붕에 겹처마가 있다. 현재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

서 내부를 살펴볼 수 없다.

근자에 세워진 정자로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정자 바로 옆에는 조경이 잘 된 정원이 있

으나 사유지여서 들어갈 수 없다.

조선 영조 때 정자가 자리한 호성마을로 이사 온 배상매를

추앙하며 1978년 건축됐다. 배상매는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

경의 후손이다.

장만리는 동호정 근처의 황산마을 태생이다. 동호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이며 화림동계곡의 정자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노인 9명이 뜻을 모아 세운 정자라고

전해진다. 방문하는 이가 많지 않고

표지판도 없다.조선 중기의 학자로 파직된 뒤 귀향한 박명부가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1899년 마지막

중수가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를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은 소실 전 모습이다.

사진 / 함양군청 제공

▶함양 화림동계곡 선비문화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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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화림동계곡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나마 머물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신발을 벗고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면 나무 기둥 사이로 진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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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태워 혼신의 역작을 남기다

1990년대 최고의 대하소설로 꼽히는 ‘혼불’은 소설가 최명

희가 평생을 공들여 쓴 작품이다. 1981년 한 신문의 장편

소설 공모에 당선돼 세상에 알려졌고, 1988년부터 1995년

까지 월간지에 후속편이 실렸다. 연재를 마친 뒤 1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정 작업을 거친 끝에 비로소 10권짜리 대

하소설로 출간됐다. 그는 혼불을 집필하면서 고등학교 교

사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에만 매달렸다.

1947년 전주에서 출생한 최명희의 본적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다. 혼불의 무대이자 혼불문학관이 세워진 자리로

그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그는 큰집 이야기를 바

탕으로 20세기 초반 기울어져 가는 양반가의 모습을 그렸

다.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의 종부(宗婦) 3대의 생활이 큰 줄

거리를 이루고, 치열하게 생을 부지하면서 양반 계층을 향

해 갈등을 유발하는 하층민도 등장한다.

혼불이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내용이 탄탄할 뿐만 아

니라 당시 남원 사람들의 삶과 언어를 소상하게 글로 녹여

냈기 때문이다. 혼례와 장례 풍경, 복식과 음식, 풍속과 문

화가 정교하게 묘사됐고, 지금은 생경하게 느껴지는 단어

들이 많이 사용됐다. 그는 작가이자 기록자였고, 또 역사가

였던 셈이다. 최명희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 아버

지, 그리고 그 윗대로 이어지는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

로 살았는가를 캐고 싶었다”고 말했다. ‘혼불’이라는 제목

도 민족의 핵심이 되는 혼과 불꽃이 되는 정신을 의미한다.

노적봉 아래에 자리한 혼불문학관은 한옥 두 채로 구성돼

있다. 문학관에는 생애를 알려주는 연표와 육필 원고가 전

시돼 있고, 작업실이 재현돼 있다. 여러 글을 통해 “손가락

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던

작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혼불의 중요한 장면 10

개를 표현한 디오라마도 있다.

1 저마다의 소원이 적힌 호박

돌. 2 옛 서도역. 3 혼불문학

관 전경. 4 문학관에 전시된 최

명희의 육필 원고.

때로는 짧은 글귀가 진한 감동과 깊은 여운을 선물하기도 한다.

산세에 둘러싸인 남원 혼불문학관과 곡성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에서는

강인하면서도 서정적인 문학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한 줄의 글에서 얻는 희망의 빛

文혼불문학관 &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최명희에게 혼불은 해결해야 할 숙제이자 필생의 과업이었다. 그는 혼불에 대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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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건물인 꽃심관은 체험 공간과 사무실을 겸한다. 문

학관을 찾았던 사람들이 보내준 책을 자유롭게 읽고, 호박

돌과 목판에 소원 쓰기나 엽서 쓰기를 해 볼 수 있다. 서도

리는 닭이 병아리를 부화하는 듯한 지세로 예부터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혼불 문학 기행은 비단 문학관에만 그치지 않는다. 마을 자

체가 혼불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매안 이씨의 종부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그려진 원뜸 종가는 문학관에서 도보로

5분이면 닿는다. 솟을대문이 인상적인 저택인데, 2007년

화재가 발생해 안채가 소실됐다.

평화로운 옛 서도역도 혼불과 관계가 있는 명소다. 1932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2002년 새로운 역사가 건립되면서 헐

릴 뻔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남았다. 혼불에서는 3대 종부인

효원이 혼례를 마치고 신행을 올 때 내렸던 곳으로 나온다.

최근 새롭게 꾸며진 역사 내부는 다녀간 사람들의 낙서로

가득하다. 역 앞에는 ‘숭어리 들름터’라는 깨끗한 건물이 있

는데, 식사와 차를 판매한다. 예약하면 마을에서 재배한 작

물로 지은 푸짐한 시골 밥상과 마주할 수 있다.

조태일은 곡성이 낳은 진솔한 시인이었다. 태안사

옆에는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곡성으로 돌아온 저항시인

조태일은 1941년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사찰에

서 보냈다. 태안사는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

강 인근의 봉두산 아래에 위치한다. 산줄기

가운데 명당자리에 들어앉은 형국으로 과거

에는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 때 격전이 일어나면서 일주문과 능

파각을 제외한 전각이 모두 허물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보성강은 수탈 물자를 나르는

통로였다. 강을 둘러싼 산에서 벌목한 나무

와 평야에서 수확한 양곡을 앗아갔다. 곡성

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독립운동

도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본 사람들은 곡성에

보성과 장성을 묶어 ‘삼성’(三城)이라 칭하며

기질이 나쁜 지역으로 평하기도 했다.

이 땅에 흐르는 저항 정신은 조태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학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을 일생의 좌표로 삼고, 독립운동가인

조병하를 스승으로 여겼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등단한 조태일은 시 전문 잡지인 ‘시인’(詩

人)을 창간하고, 암울한 정치 상황에 맞서는

많은 작품을 썼다. ‘시인’ 지는 비록 1년 만에

폐간됐지만 김지하, 김준태, 양성우 같은 시

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시심은 말년에

접어들면서 한결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민주

화가 이뤄지면서 대항할 상대가 사라졌기 때

문이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조

태일 시문학 기념관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닮

은 그의 굴곡진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유품 2천여 점과 복원된 집무실이 있으며, 해

방 이후 발간된 시집 3천여 권이 전시돼 있

다. 또 고유의 수생식물이 자라는 작은 연못

과 문학도를 위한 창작실도 마련돼 있다.

1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의 내부.

2 산속에 자리한 기념관. 3 기념

관에서는 조태일의 유품을 볼 수

있다. 4 기념관 입구의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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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남원, 함양, 곡성은 남원을 중심으로

여행하는 것이 좋다. 남원이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인구가 많아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남원에서 곡성과 함양까지는

자동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다.

일두 고택

일두는 정여창의 호다. 함양에서 태어난 그는 김종직

에게서 학문을 배워 관가에 진출했으나, 무오사화가

일어나 유배되고 6년 뒤 숨을 거뒀다. 일두 고택은 정

여창이 사망한 뒤 후손들이 지은 가옥으로 지곡면 개

평마을에 위치한다. 큼직한 안채와 사랑채, 가묘와 별

당 등 건물 12동이 있다.

섬진강 기차마을

기차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증기기관차나 레일바이크를 타고 섬진강변의 경

치를 감상하고, 객차를 개조한 펜션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 평균 시속 30~40㎞로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기차마을과 가정역을 하루 3~5회 오간다. 기차마을

주변에는 장미꽃이 만발하는 공원, 섬진강에 서식하

는 곤충을 전시한 천적곤충관, 음악 분수, 치즈 체험

학교 등이 있다.

반구정 습지

2006년 내셔널트러스트는 보존 가치가 높지만 훼손

위험이 큰 ‘꼭 지켜야 할 유산’ 12곳을 선정했다. 반구

정 습지는 이때 영덕 도천숲, 남해 갈대 군락지 등과

함께 꼽혔다. 소의 뿔을 닮은 우각호로 골풀, 마름,

부들, 달뿌리풀 등의 수생식물과 참개구리, 청개구리,

무당개구리 등의 양서류가 살아가고 있다. 또 고추좀

잠자리, 노란실잠자리, 밀잠자리 등 다양한 잠자리도

관찰할 수 있다.

수성당(壽星堂)

본래 서당으로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로 건축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정면 5칸, 측면 1칸에 팔작지붕을 이

고 있다. 대들보는 굴곡이 심한 나무를 그대로 쓴 점

이 특징이다. 방에는 온돌,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

다. 마당에는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전라남도문

화재자료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노인정으로 이용되고

있다.

칠선계곡

지리산에서 가장 이름난 계곡으로 설악산 천불동계

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3대 계곡’으로 일컬어진

다. 천왕봉에서 마천면까지 18㎞에 걸쳐 흐르며, 폭

포 7개와 소 33개를 포함한다. 선녀 일곱 명이 노닐었

다는 선녀탕을 비롯해 옥녀탕, 비선담 등이 있다. 탐방

예약을 해야 산을 오를 수 있다.

국악의 성지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긴 음악인 국악을 지키고 계

승하기 위해 2007년 개관했다. 남원은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이자 동편

제 판소리를 확립한 명창 송흥록이 태어난 곳이다.

송흥록 생가와 국악 전시 체험관, 야외 공연장, 국

악인 묘역 등이 있다. 예약하면 국악기를 제작하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운봉읍에서 함양으로 향하

는 길에 자리한다.

춘향테마파크

광한루원 반대편에 위치한 관광지로 임권택 감독

의 ‘춘향뎐’과 KBS TV 드라마 ‘쾌걸춘향’이 촬영됐

다. 분수와 종합상품관이 있는 만남의 장, 사랑을

약속하는 맹약의 장, 영화 세트장으로 쓰였던 사

랑과 이별의 장, 춘향의 옥중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시련의 장,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 등

으로 나뉜다. 남원 향토박물관과 항공우주 천문대,

국립민속국악원 등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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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서울 경회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4대 누각으로 꼽히는 광한루(廣寒樓)를 둘러싼 정원이다.

광한루는 15세기 초반 남원으로 유배를 왔던 황희가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세웠으나, 이후 중건되면서 명

칭도 바뀌었다.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에서 물을 끌어와 만든 호수와 홍예가 아름다운 오작교가 인

상적이다. 10월 11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8시에는 수상 무대에서 ‘광한루연가 춘향’이 상연된다. 오전 8

시부터 오후 8시까지 개장한다.

남원

함양 상림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해 조성했다고 전하는 공원이다. 우리나

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으로 꼽히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아이들의

생태학습 장소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채로운 식물이 자란다. 상림은 사계

절 수려하지만, 특히 여름 풍광이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다.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함화루(咸化樓)와 화수

정(花樹亭) 같은 누각과 정자도 있다.

함양

곡성

지리산권 여행 정보

지리산권의 여행 정보는 ‘지리산 둘레보고’ 웹사이트

(www.jirisantour.com)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웹사

이트에는 7개 시 · 군을 17개 권역으로 나눈 뒤 권역별

로 명소가 소개돼 있다. 장수는 논개 사당과 방화동 가

족 휴양촌, 구례는 화엄사와 피아골, 산청은 동의보감

촌과 남사예담촌, 하동은 악양권과 화개권 등으로 구

분된다. 각각의 권역을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수립할

수 있다. 또 음식과 쇼핑, 숙박, 축제, 이야기 여행, 등

산로, 둘레길 정보 등도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함양

함양의 별미는 흑돼지다. 지리산에서 기르는 흑

돼지는 육질이 쫄깃하고 맛이 담백하다. 함양읍

과 마천면, 유림면 등에 삼겹살 구이와 김치찌개

등을 파는 식당이 모여 있다. 또 함양은 소고기

도 맛이 좋은 편이다. 백숙이나 오리 요리도 쉽게

먹어볼 수 있다.

곡성

곡성과 구례에는 참게탕을 잘하는 식당이 많다.

참게탕은 섬진강에서 잡은 참게와 호박, 시래기,

대파 등을 넣고 끓인 매운탕으로 구수하면서도

시원하다. 은어도 곡성에서 내세우는 식자재다.

주로 구이나 튀김으로 먹는다.

남원

남원을 대표하는 음식은 미꾸라지를 넣은 추어

탕이다. ‘남원 추어탕’이 전국 각지에서 상호로 사

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남원에는 섬진강에 합류

하는 강이 많아 예부터 미꾸라지가 흔했다고 한

다. 광한루원 주변에 추어탕을 내는 식당이 몰려

있다. 또 남원에서는 지리산에서 얻은 산나물을

활용한 산채 정식, 산채 비빔밥도 맛볼 수 있다.

FOOD

곡성군청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남원시청

지리산허브밸리

바래봉

오도재

함양군청지안재

화림동계곡

혼불문학관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

사진 / 지리산권 관광개발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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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지리산권 관광개발조합 제공 사진 / 지리산권 관광개발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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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지리산권 관광개발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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