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225 스스로 강아지 똥이 되어 꽃을 피운 천사 1973년 〈무명저고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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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권정생 225 스스로 강아지 똥이 되어 꽃을 피운 천사 1973년 〈무명저고리와 엄마〉라는 작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원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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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아름다운 작품만큼이나 아름답게 살았던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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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탑리 외딴 오두막집에는 오도카니 마음의 탑 쌓아올리는 외톨이가 살고 있다. 이 먼지바람 부는 지상에서 온갖 먼지 떨구어내며, 외따로, 이 마을 들머리의 전탑처럼 고고하게 동심 일궈 갈고 닦는 홀아비가 살고 있다.바람 불고 비 내려도, 눈발이 흩뿌려도, 그는 오로지 맑은 마음밭을 일궈 가꾼다. 오랜 지병 앓으면서도 홀로 아픔을 넘어, 슬프도록 아름다운 동화보다도 동화 같은 나라를 꿈꾸며 오솔길을 튼다. 밤낮 그 길을 홀로 걸어간다.이태수, <권정생, 또는 조탑리 외딴 오두막집>에서

1937 일본 도쿄에서 태어남, 어릴 적 이름은 ‘경수’

1946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귀국

1953 전쟁으로 초등학교 뒤늦게 졸업, 학비 마련을 위해 부산으로 감.

1956 늑막염과 폐결핵에 걸림.

1957 안동으로 돌아옴.

1966 콩팥 하나와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음.

1968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종지기 생활 시작함.

1969 동화 《강아지 똥》이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당선

1973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81 《몽실 언니》 연재 시작, 1984년 단행본으로 출간

1987 대구경북민족문학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 가입

1996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출간

2005 유언장 작성, 인세를 어린이를 위해 써 줄 것을 당부

2007 별세

권정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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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은 어떤 사람인가?’ 이 물음에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은 ‘《강아지 똥》, 《몽실 언니》 같

은 작품을 쓴 한국 아동문학의 최고 작가’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지금도 대한민국 어린이에게 희망, 위로, 힘을 주

고 있다. 어른들도 그의 작품을 읽으며 울기도 하고 빙그레 웃기도 하면서 감동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꼭 보태야 할 설명이 있다. ‘작품만큼이나 사람 그 자체가 아름다웠던 작가’

라는 설명이다. 작가 권정생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이다.

시련 또 시련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빈민가 헌

옷 장수 집의 뒷방이었다. 권정생의 아버지는 청소부로 일했다. 집은 늘 가난했다. 그래도 아버

지가 청소부여서 좋은 게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쓰레기더미에서 헌책을 발견하면 집에 가져

와 모아두었다가 내다 팔았다. 그 중에는 《이솝 이야기》 등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동화책이

있었다. 어린 권정생은 그 책을 보면서 글을 익혔다. 아직 체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조

금씩 알게 되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누나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성경 속 예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권정생은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수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알게 된 후 정생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권정생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자신과 한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권정생 가족은 1946년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권정생의

인생에 이런저런 시련이 시작되었다. 한 번의 시련이 아니라 마치 신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

는 듯한 모진 시련이 연이어 들이닥쳤다.

혹독한 가난의 시련이 찾아왔다. 귀국선을 탈 때 가족은 일본 당국의 검문을 받았다. 이때

부모님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겼다. 결국 빈털터리로 고국에 돌아왔다. 당장 살 집이 없어서

가족은 흩어져야 했다. 아버지는 안동으로 가서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되었다.

권정생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갔다.

권정생 가족은 청송에서 1년여 살면서 여섯 번 이사하였다. 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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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약초를 캐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겨울엔 자루 하나를 메고 동냥을 나가

서 먹을 것을 구해 왔다. 귀리 가루로 만

든 죽을 먹으며 굶주림을 모면하였다.

1947년이 되어서야 가족은 안동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권정생은

안동을 자기의 고향이라고 여겼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초등학교에 다

녔다. 우리글로 된 책을 읽는 것이 즐거

웠지만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가난한 형편은 졸업 때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권정생을 중학교에 보내려고 어머니가 행상을 해서 모은 돈은

화폐 가치가 떨어져 있으나 마나 한 돈이 되었다. 결국 1953년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

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고구마 장사, 담배 장사를 했다. 장사로

모은 돈으로 닭을 사서 길렀다. 그런데 전염병으로 애지중지 키운 닭이 모두 죽고 말았다.

16살의 소년 권정생은 안동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재봉틀 수리점에 취직해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았다. 일이 끝나면 중고 서점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보냈다. 헌 포장지에 시와 소설을

쓰기도 했다.

다시 또 시련이 찾아왔다. 그것은 권정생에게 죽을 때까지 고통을 준 시련이었다. 결핵이 발

병한 것이다. 지금이야 결핵이 무서운 병도 아니지만 195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목숨

을 앗아간 무서운 병이었다. 기침이 나고 숨이 차고 가슴이 아팠다. 가난한 타향살인지라 그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957년 권정생은 병든 몸으로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돌아온 권정생은 가족에게 죄를 지은 듯이 미안했다. 읍내 가게에서 일도 하고

고구마 장수도 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결핵 때문에 예전처럼 일하는 게 불가능했다. 돈이

없으니 병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증세는 심해져 결핵균이 폐에서 신장과 방광으로 퍼졌

다. 숨이 차고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육체가 더 망가졌다. 옆구리와 아랫배에도 통증이 밀려

왔다.

고통에 시달리던 그에게 마음의 평안을 준 것은 동네 교회였다. 1963년 권정생은 교회 주일

권정생이 신던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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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교회, 성경책 그리고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의 안식처이자 벗

이 되었다. 1964년 병구완을 해 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아버지

와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된 남동생에게 짐이 되기 싫어 그는 성경책을 보따리에 넣고 집을 나왔

다. 4개월 동안 대구, 김천 등지를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였다. 이 때문에 병은 더 악화되어 결

핵균이 고환으로 전이가 되었다.

1966년 그는 결핵균이 번진 신장 한 개와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 직

후 이런 말을 하였다.

“약을 잘 먹으면 앞으로 2년은 더 살 수 있겠어.”

장갑을 끼지 않는 종지기 아저씨

시한부 선고를 들은 권정생은 38킬로그램의 야윈 몸을 이끌고 퇴원하였다. 동생이 결혼을 해

분가를 한 후인 1967년 그는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교회의 문간방으로 거처를 옮겨 교

회 종지기 생활을 시작하였다. 시한부 인생, 고독, 가난 …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는 좌절과 역

경으로 둘러싸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에 머리를 누일 수 있고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다. 그는 1982년 교회 뒤 언덕에 흙집을 지어

이사할 때까지 16년을 산 그 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예배당 토담집은 겨울은 춥고 여름에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에는 귀에 동상이 걸렸다

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이 무렵 권정생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의사는 내가 살 날이 얼마 안 된다 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아이들을 위한 글 몇 개라도 남기고 싶다.’

이 생각을 한 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때 쓴 작품이 동시 〈강아지 똥〉이었다.

이듬해 같은 작품을 동화로 고쳤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주인공 강아지 똥은 어느 날 민들레로부터 고운 꽃을 피우는 데

자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강아지 똥은 자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기꺼이 거름이 된다. 강아지 똥의 희생으로 민들레는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는 이 동화로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자신의 글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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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은 글쓰기에 대한 의욕을 키워 주었다. 상금 1만 원은 새끼 염소 한 쌍과 쌀 한 말을 구

입하는 데 썼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소중하고 쓸모가 있

음을 그려 낸 이 작품은 꾸준히 독자의 호응을 얻어 훗날 100만 부가 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

가 되었다.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영화와 발레로도 만들어졌다.

의사가 시한부로 설정한 1968년이 지나갔다. 여전히 육체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살아남았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글쓰기에 대한 의욕은 더 커졌다.

글을 쓰는 이외의 시간엔 교회와 동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교회 아이들을 위해 인형

극을 상영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자기가 읽는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기꺼이 그들의 말동무

도 되어 주었다. 글을 모르는 마을 사람을 위해 편지를 읽어 주거나 써 주는 일도 하였다.

종지기라는 본분에도 충실하였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종을 치는 시간을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라고 여겼다. 겨울에도 그는 장갑을 끼지 않고 종을 쳤다. 어느 교인이 목장갑을

주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맨손으로 종을 쳐야 종소리도 멀리 퍼져 나가는 것 같고 또 하나님

에게 향하는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권정생이 키우던 강아지 뺑덕이(왼쪽). 권정생과 강아지 두데기. 그는 뺑덕이와 두데기, 두 마리 강아지를 벗삼아 살았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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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강아지 똥이 되어 꽃을 피운 천사

1973년 〈무명저고리와 엄마〉라는 작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원고지 50매의 이

동화는 아픈 몸을 이끌고 3년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쳐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었다. 당선 후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강아지 똥》을 읽고 감동을 받아 지은이를 보러 왔다는 사람은 바

로 유명한 아동 문학가 이오덕이었다. 이오덕은 권정생이 가진 순수함과 재능을 알아보았다.

이때부터 그는 권정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적극 나섰다.

그럼에도 세상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고 시골에 사는 무명작가에게 문을 잘 열어 주지

않았다. 많은 작품을 썼지만 발표할 지면은 많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끼니

대부분을 냄비에 죽을 끓여 해결했다. 1975년 〈금복이네 자두나무〉라는 작품으로 제1회 한국

아동문학상을 받아 시상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양복 한 벌 없었던 그는 검정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글쓰기는 그의 정신을 늘 깨어 있게 해 주었으나 그의 병까지 치료해 주진 못했다. 이틀 열

심히 글을 쓰면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끙끙 앓아야 했다. 글을 쓰다 통증이 몰려오면 엎드린

채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무리를 하면 각혈을 했고, 열흘 넘게 몸이 아파 글 한 줄

을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았던 이오덕은 ‘다른 사람은 잉크로 글을 쓰지만

권정생은 피를 찍어서 글을 쓴다.’고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아무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직 살아 있음을, 글을 쓸 수 있음

을,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 사는 동물, 꽃, 벌레를 볼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늘 온화하고 겸손했던 그였지만, 문학적 신념과 작가로서의 자존심은 대

쪽 같았다. 1974년 그의 첫 동화책인 《강아지 똥》이 나오기 전 출판사는 제목을 바꿀 것을 요

청했다. ‘똥’이 들어간 책 이름이 관행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동문학은 진솔해야 한다

고 생각했던 그는 고집스레 그 제목을 지켰다.

1981년 그는 대표작 중 하나인 《몽실 언니》 연재를 시작했다. 시골 조그만 교회의 목사 부탁

을 받고 교회 청년 회지에 실은 작품이었다. 1990년 MBC에서 이 작품을 36부작 드라마로 만

든 후 권정생은 대한민국 독자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도 스테디셀러가 되어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유명해지고 또 아동 문학가로서의 위상이 높아진 후에도 그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좁

은 흙담집에서 살며 한 달 생활비가 다른 사람의 일주일치 반찬값 정도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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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거리

권정생이 <강아지 똥>을 통해 전하려는 교훈을 그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권정생을 평생 괴롭힌 것은 ‘결핵’이라는 병이다. 결핵에 걸린 사람은 피를 토하는 고통과 무기력에 시달리기 때문에 정

상적으로 일을 하기가 어렵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그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한 그의 상황은 강아지 똥과 비슷하다. 그러나 강아지 똥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를 피우고, 세상에 희망이라는 것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 즉 교회의 종지기로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세

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었다.

아이들이 집에 와서 책을 빌려 가는 건 좋아했지만 도시에서 기자들이 오면 몸을 피했다. ‘왜

시골에 사는가?’ 같은 세속적인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에 그는 전신 결핵에 만성신부전증까지 생겨 과거처럼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평화, 자연, 공존, 통일 등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어 줄 여러 이슈에 지속적

인 관심을 기울였다. 종종 이런 이슈에 대한 생각을 《녹색평론》 같은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2004년 몽실 언니가 연극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는 원작료를 받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 이름

이 아닌 극단 이름으로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을 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당시 북한에선 용

천역 폭발 사고로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2005년 더 이상 글쓰기가 힘들어졌을 때 그는 미리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에서 그는

‘내가 쓴 책들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인세를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

다.’고 적고 그가 믿는 목사, 신부, 변호사 세 사람에게 그동안 자신이 안 쓰고 모은 재산과 인

세의 관리를 맡겼다. 그로부터 2년 후, 민들레를 피워 낸 강아지 똥처럼 자기 몸과 재능을 거

름으로 바쳐 이 세상에 수많은 꽃을 피어나게 한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은 눈을 감았다.

김인기

권정생의 삶과 문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재단법인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http://www.kcfc.or.kr)을 방문하면 좋다. 이 *

재단은 권정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설립되었다. 권정생이 남긴 유산으로 공부방도서지원, 북한어린이돕기, 창작기금지원 등의 사업

을 벌이고 있다. 권정생의 인생을 다룬 단행본들도 시중에 나와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일화는 이원준이 지은 청소년용 도서 《동화나

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 권정생》(도서출판 보보스)과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의 기록을 참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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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이 살던 집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는 권정생이

머물던 집이 있다. 흙담 위에 양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작은 집에는 잘 키운 개나리

나무와 그 아래 개집 하나, 화장실 한 칸, 수

도꼭지 하나가 전부다. 자연과 함께 소박하

게 살아온 그의 모습에 절로 숙연해진다.

일직교회

생가에서 5분 남짓 걸으면 권정생이 종지기

로 있었던 일직교회가 나온다. ‘새벽 종소리

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

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종탑 앞 나무팻

말에 적힌 글귀로 선생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권정생이 살았던 고장 안동의 체험학습 추천 코스

조탑동오층전탑

권정생이 살던 집에서 멀지 않

은 곳에 보물 제57호 오층전탑

이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

품으로 감실 좌우에 새겨진 인

왕상이 귀엽고 친근한 인상이

다. 작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선조의 예술성에 놀

라고, 세월의 무게에도 무너지

지 않고 여전히 우뚝 솟아 있는

선조들의 내공에 다시 한번 놀

란다.

하회마을

하회는 물이 마을을 감싸고 흘

러 붙여진 이름이다. 1984년 마

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유네

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민속마을이다. 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과 서애 류성

룡의 종택인 ‘충효당’을 중심으

로 살펴보자. 여전히 자손들이

살고 있으니 예의를 갖추고 관

람해야 한다.

국제탈춤페스티벌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

회별신굿탈놀이가 1997년부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로 거듭

나 해마다 명성을 더해가고 있

다. 매년 9월-10월에 열리는 이

축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

계 여러 나라의 참여로 세계적

인 탈춤과 문화공연이 함께 펼

쳐진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이름처럼 산이 병

풍을 두른 듯 화산을 뒤로하고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 만대루

를 지나 입교당 마루에 앉아 보

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손에

잡힐 듯한 산과 산 그림자를 머

금은 낙동강이 수묵화처럼 펼

쳐진다. 자연을 그대로 취한 모

습이 절묘하다.

조탑동오층전탑

병산서원

국제탈춤페스티벌

권정생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

하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