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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연구총서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김수중·조남호·천병돈 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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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학연구총서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김수중·조남호·천병돈 공편

  • 머리말

    ‘진리’를 우리말로 ‘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반대를 ‘거짓’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을 찾아보아도 아직까지

    ‘거짓’에 대한 어원만 밝혀져 있다. ‘거짓’의 어원은 ‘거죽’이며 이는 지

    금 우리가 사용하는 ‘가죽’과 뿌리가 같다고 한다. 즉 그것은 ‘겉에 드

    러난 부분’, 곧 껍데기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참’의 어원을 추측

    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가득)차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참’은

    ‘차다’의 명사형인 것이다. 껍데기 형식만 남은 것이 ‘거짓’이고, 알맹

    이 내용이 꽉 찬 것이 ‘참’인 것이다.1) 이쯤 되면 민족시인 신동엽의

    싯귀가 떠오를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핵심이니, 그것은 “인간의 진실을

    추구하여 형해화되는 껍데기를 끝없이 극복하려는 정신”인 것이다.

    양명학의 출발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명대(明代)에 형성된 양

    명학은 형식과 허위성에 빠진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나왔다. 송대에

    발생한 주자학은 원대(元代)에 과거시험의 텍스트가 되면서 관학으로

    서 자리 잡게 되었고, 결국 관변의 통치철학으로 교조화 되어 갔다.

    1) ‘김수중교수의 철학산책’, 2004년 7월26일자에 좀 더 자세한 내

    용이 있음.

  •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양명학은 도학 본래의 생동성을 회복하고자

    나온 ‘도학(道學)혁신운동’이었다.

    조선 중기 양명학을 수용한 초기 인물인 장유(張維; 1587-1638)도

    위와 같은 양명학의 정신을 꿰뚫고 있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주자학은 이 땅에 들어와 200여년이 지나면서 장유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형식화되어 당파 싸움의 명분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장유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의 학술은 다양하다. 정학(正學)이 있는가 하

    면 선학(禪學)과 단학(丹學)이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가 하면 육씨

    (陸氏;象山)를 배우기도 하는 등 학문의 길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

    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식 무식을 막론하고 책을 끼고 다

    니며 글을 읽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정주(程朱)만을 칭송할 뿐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중국에는

    학자가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학자가 없기 때문에 그러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의 사상 풍토는 장유가 예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 이황이 양명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후 어

    느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양명학을 주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명대

    에 유행하던 양명학의 기본 저술들은 큰 시차 없이 조선에 유입되고

    있었다.

    ‘가난한 시대’에도 용감한 지식인들은 나오는 법이다. 정제두(鄭齊

    斗; 1649-1736, 호 霞谷)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최고의 양명학

    자이다. 그는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기울어져가는 가운을 통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곡의 개인적인 삶은 불우하고 불행하였다. 41

    세 되던 해에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처음

    으로 취임한 실직인 평택 현감을 사임하고 대리문초(對吏問招)까지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안산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 후로 60세까지

  • 20년 동안을 그는 안산에서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61세 이후로 그는

    강화에 가서 둔세하며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양명학에 천착하여

    ‘강화학파’의 토대를 놓게 된다.

    하곡은 당시 학자들이 판에 밖은 듯이 정주학적 틀 안에서 안이하

    게 학문하는 태도를 비난하여, “오늘날 학문을 말하는 사람들은 주자

    를 배우는 게 아니라 거짓 주자를 배우고 있으며, 아니 거짓 주자가

    아니라 겉으로 전해들은 주자이다. 그들의 의도는 주자란 이름을 끼

    고서 위세를 부려 개인 이익을 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주

    체적인 입장에서 당시까지 전개된 중국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

    고, 아울러 조선 주자학적 성과를 종합하는 큰 틀을 제시하였다.

    주자학의 교리체계가 좀 더 분명하고 교조적이라면, 주제성을 중시

    하는 양명학의 성격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제자들로 이어지는 양명학의 전개는 다양한 방면으로 전개되

    어 문학 역사 등의 여러 분야까지 연결된다. 따라서 하곡 이후 다방

    면으로 전개되는 조선 양명학파, 즉 강화학파의 넓은 프리즘은 우리

    의 경우라고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양명학의 본질은 진정성을 추구하

    는 태도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지 정해진 교리를 묵수하는 데 있지 않

    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성격상 관료들 보다는 아웃사이더에게 더 잘 어울린다.

    강화학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관학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현대에

    있어서도 양명학은 주류 철학으로서 보다는 ‘이단’으로 취급되는 듯하

    다. 그러나 양명학을 철저하게 이해할 때만 조선시대의 전체적인 사

    상사적 윤곽이 그려질 수 있다. 양명학에 대한 복권이야말로 우리에

    게 주어진 사상사적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양명학에 대한 연구에는 연구자들의 땀과 눈

    물이 배어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와 저작을 한 곳에 모

  • 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앞으로 전개될 본격

    적인 연구를 위한 작은 핸드북에 불과하다. 짧은 기간의 작업이라 빠

    진 부분이나 오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민족문화추진회

    (현 한국고전번역원)의 엄청난 해제작업, 박연수교수와 송석준교수의

    기초적 정리 작업, 그리고 심경호교수의 정보제공이 없었다면 이 책

    의 출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리 자료의 이용을 흔쾌히 허락을 해

    주신 연구자들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원시 자료를 복사해

    준 국립중앙도서관, 경희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성균관대

    학교 존경각, 대전대학교 도서관, 배재대학교 도서관 관계자분들께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끝으로 이 프로젝트를 마련해주신 인천학연

    구원과 실무자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편자를 대표해서 김수중이 쓰다.

  • 차 례

    Ⅰ. ‘강화학파’

    1. 강화학파에 대하여 ······································································· 11

    2. ‘하곡학파’의 문헌 해제 필요성 ···················································· 20

    3. 문헌 해제 방법 ············································································ 23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해제

    1. 하곡집(霞谷集) ········································································· 252. 저촌유고(樗村遺稿) ·································································· 453. 관양집(冠陽集) ········································································· 514. 선고(先藁) ················································································ 605. 두남집(斗南集) ········································································· 646. 원교집(圓嶠集) ········································································· 707. 이참봉집(李參奉集) ·································································· 778. 완구유집(宛丘遺集) ·································································· 829.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8910. 신재집(信齋集)』 ······································································ 9511. 초원유고(椒園遺藁) ······························································· 10112. 주영편(晝永編) ······································································ 10613. 석천유고(石泉遺稿) ······························································· 10914. 시차고(詩次故) ······································································ 11615. 역차고(易次故) ······································································ 12216. 서차고(書次故) ······································································ 12717. 대연유고(岱淵遺藁) ······························································· 13418. 사기집(沙磯集) ······································································ 137

  • 19. 백운문초(白雲文抄) ······························································· 14320. 심대윤전집 ············································································ 14821. 소호당집(韶濩堂集) ······························································· 16122. 명미당집(明美堂集) ······························································· 18023. 당의통략(黨議通略)(광문회발간(光文會發刊)) ····················· 18824. 독역수기(讀易隨記) ······························································· 18925. 경재집(耕齋集) ······································································ 19226. 계명의숙취지서(啓明義塾趣旨書) ·········································· 19927. 난곡존고(蘭谷存稿) ······························································· 20228.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 ················································· 209

    Ⅲ. 연구 저서 요약

    1. 당의통략 ················································································· 2172. 한국양명학연구 ······································································· 2223.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 ························································· 2244. 한국의 양명학 ········································································ 2285.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1) ···················································· 2316. 한국 근대유교 개혁운동사』 ···················································· 2397. 강화학 최후의 광경 ································································ 2418. 성리학과 양명학 ····································································· 2449.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 ···················································· 24810.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3) ·················································· 25211. 한국유학사상사 Ⅲ-조선후기편(상) ······································· 25512. 양명학자 정제두의 철학사상 ················································ 25713. 동아시아의 양명학 ································································ 25914. 동양정치사상한국양명사상의 전개 ···································· 26115. 양명학의 이해 - 양명학과 한국양명학 ································· 26516.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4) ·················································· 269

  • 17. 다산과 석천의 경학논쟁 ······················································· 27518. 왕양명과 양명학』 ·································································· 27818. 한국의 상산학(象山學)과 양명학 ·········································· 28120. 하곡 정제두 ·········································································· 28621. 이건창 문학연구 ··································································· 28721. 원교 이광사 문집 ································································· 28822.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 원교·창암 유묵 ··················· 29023. 하곡 정제두의 사상』 ···························································· 293

    Ⅳ. 박사학위 논문 요약

    █ 하곡 정제두 ··············································································· 299█ 강화학파 및 한국양명학 ···························································· 335█ 원교 이광사 ··············································································· 345█ 심대윤(沈大允) ··········································································· 367█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 370█ 영재 이건창 ··············································································· 387█ 위당(爲堂) 정인보 ····································································· 390

    Ⅲ. 강화학파 연구 저서 및 논문 목록

    1. 저서류 ························································································ 397

    2. 강화학인별 분류 - 일반논문·학위논문 ····································· 399

    3. 강화학파 - 일반 ········································································· 426

    4. 한국 양명학 ················································································ 428

    찾아보기 ··································································································· 436

  • 정제두(鄭際斗. 1649-1736)의 친필로 자신의 심경을 적은 글이다.

    “서적을 우연히 한가롭고 조용할 때에 즐기니, 책을 펼치면 얻는 바가 있어

    문득 기뻐하여 먹는 것도 잊게 된다. 수목의 가지가 엇갈려 수풀을 이루고 철

    따라 우는 새소리 변하는 것을 보고 또한 흔연히 기뻐하였도다.”(지본묵서,

    24.0×11.4㎝)

  • Ⅰ. ‘강화학파’

    1. 강화학파에 대하여

    양명학이 조선에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능화는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과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최초의 양

    명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오종일은 1521년 이전 왕양명이 생존했을

    때 이미 전습록(傳習錄)』초간본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연보에 「변왕양명수인전록(辨王陽明守仁傳錄)」이 있고, 십청원(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의 십청헌집(十淸軒集)에 「우화눌재(又和訥齋)」라는 시(詩)에 ‘양명노자치심지학(陽明老子治心學)’이란 글을 근거로 1521(중종16)년 이전에 양명학이 전래되었다고 오종익은

    보고 있다.

    하지만 윤남한은 양명학의 형성을 1528(중종말)에서 1533(명종초),

    정주학이 심학화(心學化)화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초

    기 양명학 수용과정에서 이요가 선조에게 양명학을 찬양하자, 선조도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유성룡의 양명학 배척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조 때에는 양명학을 수용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퇴계(退溪)

    의 「전습록변(傳習錄辨)」 이후에 양명학은 ‘이단사설’로 배척당했다고 한다.

    정인보는 양명학연론에서 조선의 양명학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 1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말했다.

    조선에는 양명학파가 없었다. 조선에서 양명학은 마치 무슨 이단 사

    설(邪說)처럼 내몰려 양명학과 관련된 책이 책상 위에만 놓여 있어도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한두 학자가 비록 양명

    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밖으로 그것을 드러내

    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양명학파가 없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지는 않

    다. 조선에는 주자학파뿐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누구를 막론하고 주자

    학을 받들어야만 입신양명의 길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조선에는 주

    자학이 전부였기 때문에 따로 주자학파라는 이름마저 없었다.

    그러나 학문이 입신양명의 수단이 되면 ‘텅 빔[虛]’과 ‘거짓[假]’의 폐

    단이 생기기 쉽다. 하지만 어떠한 학문이 입신양명은커녕 온 세상에서

    배척을 받는 표적임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 이 학문이 옳기 때문에

    나 혼자라도 이것을 공부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조금의 거짓도 없

    는 순수한 학문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에는 없었다고

    한 양명학파가 실제로는 가장 귀중한 존재가 아니겠는가.1)

    그러면서 정인보는 조선의 양명학자를 세 부류로 구분했다.2) 이 세

    1) 정인보, 양명학연론(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2004), 125-126쪽.2) 첫째, 뚜렷한 저작이 있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이나 글 가운데 분명한 증

    거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 하더라도 양명학파로 분류하기에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최명길(崔鳴吉, 호 지천(遲川), 1586-1647)과 장유(張維, 호

    계곡(谿谷), 1587-1638) 그리고 정제두(鄭齊斗, 호 하곡(霞谷), 1649-1736)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 겉으로는 양명학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을 주

    장한 사람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광사(李匡師), 이영익(李令

    翊), 이충익(李忠翊) 등이다.

    셋째, 양명학을 언급하지 않고 또 실제로 주자학을 추앙하였지만, 주장의 핵

    심적 정신을 보면 두 말할 필요 없는 양명학자.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홍

  • Ⅰ. ‘강화학파’ 13

    부류 중 하곡(霞谷)만이 양명학에 대한 전문 저서를 남겼다. 하곡은

    만년(61세-88세 서거까지)에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

    서 저술을 남겼다. 하곡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아들 정후일(鄭厚一)

    과 그의 문인(門人)인 이광명(李匡明), 이광사(李匡師), 이광신(李匡

    臣), 심육(沈錥), 윤순(尹淳), 이진병(李震炳), 정준일(鄭俊一), 송덕연(宋德淵), 최상복(崔尙復), 이선협(李善協), 신대우(申大羽), 이광려(李

    匡呂), 성이관(成以觀), 오세태(吳世泰), 이선학(李善學), 김택수(金澤

    洙) 등이 있었다. 이후 이들의 학문은 가학(家學)으로 전승된다. 하곡

    의 아들 정후일의 학문은 사위인 이광명과 그의 고손(高孫)인 정문승

    (鄭文升), 정기석(鄭箕錫), 정원하(鄭元夏) 등으로 이어졌으며, 신대우

    의 심학(心學)은 그의 아들인 신작(申綽), 신현(申絢)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하곡학의 가장 큰 줄기는 역시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

    派) 가문인 이광신, 이광려, 이광사, 이광명이다.3) 이들의 학문 전승을

    대용(洪大容, 호 담헌(湛軒), 1731-1783)이다. 정인보 저, 홍원식 해설, 양명학 연론(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4), 126-168쪽 참고.

    3) 덕천군파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恭靖王子 德天君 厚生―五代 惟侃-景奭景稷-長英-集成-眞卿-匡祚

    後英-翼成-聞道-匡運

    德成-眞源-系匡尹

    眞淳-匡說

    眞洙-匡尹出

    匡呂

    正英-晩成-系眞儒-匡翼-系承孝-勉信

    大成-眞儒出

    眞儉-匡泰

    匡濟

    匡震(夭折)

    匡鼎

    匡師-肯翊-勉耆-述遠

    令翊-系勉愚-發遠

  • 14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다시 살펴보면, 이광려는 정동유(鄭東愈)로, 이광사는 그의 아들인 이

    긍익(李肯翊)과 이영익(李令翊)으로, 이광명은 양아들인 이충익(李忠翊)

    과 이면백(李勉伯), 이시원(李是遠), 이지원(李止遠)으로 이어졌다. 이

    시원의 심학은 다시 이상학(李象學), 이건창(李建昌), 이건승(李建昇)에

    게, 이지원의 학문은 이건방(李建芳), 정인보로, 정인보의 학문은 다시

    제자인 민영규(閔泳珪) 홍이섭(洪以燮)으로 이어졌다.4) 이렇게 하곡을

    眞休-匡臣-敬翊-勉行

    勉衡

    眞伋-匡彦-榮翊-勉訥-會遠

    匡贊-良翊-勉通

    系勉季

    匡顯-文翊

    忠翊出

    弘翊

    匡敏-天翊-勉始-系眞遠

    勉治

    匡謹-雲翊-勉履-章遠

    明翊

    眞偉-匡明-系忠翊-勉伯-是遠-象學-建昌

    建昇

    止遠-象夒-系建芳喜遠-象曼-建芳

    4) 강화학파의 학맥 계보도는 다음과 같다.

    霞谷-鄭厚一(子)-鄭文承(高孫)-鄭基錫(6대손)-鄭元夏(7대손)李匡明(손자)-李忠翊-李勉伯-李是遠-李象學-李建昌

    李建昇

    李止遠-李建芳-鄭寅普-閔泳珪

    洪以燮

    黃玹

    李匡師-李令翊

    李肯翊(子)(연려실기술)-李勉伯(海東惇史)-이시원(國朝文獻)-이건창(黨議通略)

    李匡臣

    李匡呂-鄭東愈

    金澤秀

  • Ⅰ. ‘강화학파’ 15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

    학’, ‘강화하곡학파’ 등 여러 가지 명칭을 붙여서 부른다.

    사실 강화라는 지역을 통해 하곡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문을 규정한

    사람은 정인보의 제자 민영규이다. 민영규는 “강화학이 반드시 양명학

    의 묵수자로서 일색을 이루어야 할 이유는 없다.……강화학의 성장이

    정하곡의 양명학에서 발단을 이룬 것이긴 하지만, 하나의 율법의 외

    형적인 묵수가 어떠한 새로운 생명도 거기서 약속되지는 않는다.……

    이건창과 정원하, 홍승원은 모두 강화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분들이

    지만,……내가 그것을 양명학이라 부르지 않고 강화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찾아야 했던 데엔 오는 변화를 적극 평가하고 싶었기 때문이

    다.”라고 했다.5) 민영규의 논지를 근거로 할 때, 민영규 이전에는 하

    곡의 사상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발흥한 학문 전체를, 하곡의 사상

    이 양명학 중심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양명학’이라고 암묵적으로 통용

    申大羽(孫壻)-申綽

    申絢

    沈錥尹淳(하곡의 아우 鄭齊泰의 사위)-李匡師(書體)

    李震炳(遁谷)

    鄭俊一

    宋德淵

    崔尙復

    李善學

    李善協

    成以觀

    吳世泰

    유준기, 한국근대유교개혁운동사(증보판)(서울; 아세아문화사, 1999), 288- 289쪽 참고.

    5) 민영규, 「위당 정인보 선생의 행장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실학 원시」, 동방학지』13집, 1972. 재인용, 최재목, 「강화양명학파 연구의 방향과 과제」, 양명학』12호, 2004. 8, 57쪽.

  • 16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된 것 같다. 민영규에 의해 하곡학에 대한 ‘강화학’이라는 새로운 개

    념 규정이 제시된 후, 적지 않은 학자들이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유명종은 ‘강화학파의 양명학’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강화학파의 양

    명학’의 특징을 “그들이 전수한 양명학은 심학(心學)이다. 따라서 심학

    에는 시문(詩文)이 있고, 정(情)이 있고, 의(意)가 있으며, 사(史)가 있

    고, 문예서화(文藝書畵)가 있다.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함께하는 혼일

    한 심신의 학문, 곧 치양지학(致良知學)이란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동정[眞誠惻怛]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음(正音) 사학(史學) 서예(書藝) 시문(詩文)으로 삶의 참뜻을 symbolic하게 드러내려 하였

    고, 겸해서 실학(實學)과 제휴하여 이미 비인간화된 사회에 대하여 도

    전 혹은 개혁의 시도를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참으로 깨친 양지는

    다시 민족의 주체성 천명에 얼을 미친다.”라고 말하면서, 이광신, 이

    광사, 이광려, 이긍익, 이영익, 신대우, 이충익, 정동유, 신작, 정문승,

    정기석, 이시원, 이상학, 이건창, 이건승, 김택영, 이건방 등의 사상을

    서술했다.6) 이처럼 유명종은 그들이 비록 정음(훈민정음학 연구) 사

    학 서예 시문 등 여러 방면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을 하나로 꿰뚫는

    것은 여전히 양명의 심학 즉 양명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유명종 역

    시 ‘강화학파’라고 했다.

    유준기 역시 ‘강화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강화학파를 조정으

    로부터 소외된 소론(少論)에 속하면서 심신(心身)의 학으로서 양명학

    의 치양지(致良知)를 목표로 하는 유학자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강화학은 권력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발견을 위한 학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역사학, 정음(正音), 서화(書畵), 실학 등에서 새롭고 창

    조적인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한말(韓末)의 위기적 국면을 당하여 그

    6) 유명종, 성리학과 양명학(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차례 부분 참고.

  • Ⅰ. ‘강화학파’ 17

    들은 절조(節操)있는 생애로 일관하면서 역사서, 애국시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고고한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것은 양지(良知)의 자

    기실현이었다고 주장했다.7)

    정량완, 심경호는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이라는 강화학파 전문서적을 출간했다. 이 책은 강화학파를 연구하는데 시금석이 될 정도

    로 자세하게 강화학파 인물들을 강화학파의 문집을 바탕으로 서술하

    고 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량완, 심경호는 ‘강화학파’라

    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경호는 하곡에 의해 형성된 강화학은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하여 국어학과 국사학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고 한

    다. 강화학파는 한결같이 정주학(程朱學)을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받아들였

    다고 한다. 강화학은 양명학을 기조로 하되, 허학을 배격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고증학을 수용하였고, 실학자 정약용의 사공(事功)의 학문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강화학은 실심(實心) 곧 자기의 진실한 마음

    에서 인간에 대한 주체적 인식에 도달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나갈 것

    을 주장하였다고 하며, 강화학의 지적 고뇌는 바로 허가(虛假)를 배격

    하고 진실무위의 인간형을 수립하는데 있었다고 한다.8) 그래서 심경

    호는 그들의 학문을 넓은 의미의 실학과 구분하여 ‘실심실학(實心實

    學)’이라고 불렀다.9)

    최재목은 ‘강화양명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하곡학’이라고 하면 하곡 정제두가 만년에 강화도

    7) 유준기, 한국 근대유교 개혁운동사(서울; 삼문, 1994). 8) 심경호, 「강화학의 허가비판론(虛假批判論)」(대동한문학』14집, 대동한문학회,

    2001, 6), 68쪽. 재인용, 박연수, 「강화 하곡학파의 실심(實心) 실학(實學)」(양명학』16호, 한국양명학회, 2006. 7), 124쪽.

    9) 심경호, 「강화학파의 가학(假學) 비판」(양명학』13호, 2005년 2월), 247쪽 머리말.

  • 18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하곡 지역에 거주하면서까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이룩한 학문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하곡의 양명학’이라 하면 하곡의 학문 내용 가운데

    양명학적 경향을 지닌 학문 내용을 말한다. ‘강화학’이란 ‘하곡의 양명

    학’과 ‘하곡학’ 그리고 하곡이란 인물에 의해 강화도라는 지역을 구심

    점으로 해서 전개되는 그 후학의 학문 전개(양명학 포함) 전체를 포

    괄한다. 이 속에는 앞서 소개한 강화학파의 인물들의10) 다양한 학문

    내용이 전부 포함된다.”11)

    박연수는 ‘강화하곡학파’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즉 강

    화도 지역을 구심점으로 하고, 학문 분야는 다양하지만 하곡 정제두

    의 양명학을 근본사상으로 삼으며, 하곡으로부터 시작하여 혈연과 학

    연(學緣)으로 이어지는 하곡의 문인들을 지칭한다.12)

    이외에 다른 여러 가지 개념 규정이 있을 수 있지만, 위에 열거한

    내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위에 열거한 견해가 많은 것 같

    지만, ‘강화학파’와 ‘강화양명학(혹은 ‘강화 하곡학’)’둘로 나눌 수 있다.

    즉 민영규·유준기·심경호는 ‘강화학파’로, 유명종·박연수·최재목은

    ‘강화양명학(혹은 ‘강화 하곡학’)’이라고 했다. 민영규는 ‘강화학파’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로 ‘오는 변화’를 적

    극적으로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오는 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이 없다. 다만 그의 주장을 근거로 할 때,

    ‘오는 변화’란 아마도 하곡학이 묵수적으로 양명학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영

    10) 주2)의 유준기가 규정한 강화학파 인물들을 말함.

    11) 최재목, 「강화 양명학파 연구의 방향과 과제」(양명학』12호, 한국양명학회, 2004. 8), 57쪽.

    12) 박연수, 「강화 하곡학파의 實心 實學」(양명학』16호, 한국양명학회, 2006. 7), 121쪽.

  • Ⅰ. ‘강화학파’ 19

    규는 하곡학을 특별히 ‘강화학파’라고 했다.

    민영규 이후 유준기, 심경호 등도 ‘강화학파’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

    나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유준기는 강화학파의 핵심을 ‘심신(心

    身)’의 학으로서 양명학의 치양지를 목표로 하는 유학자’라고 규정하

    고, 심경호 또한 ‘강화학은 양명학을 기조’로 한다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면 강화의 하곡학이 학문적으로 여러 분야로 전개되어 나아갔지

    만, 기조가 되는 사상은 ‘양명학’이라는 것이다. 사실 민영규 역시 강

    화의 하곡학이 양명학을 기조로 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강화의 하곡학이 양명학을 무비판적으로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따라서 ‘강화학파’나 ‘강화양명학(혹은 ‘강화

    하곡학’)’은 명칭은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양명학회는 2004년부터 강화군 지원을 받아 정제두 학술을 국

    제학계에 알리고 함께 연구하기 위하여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양명학회는 하곡 정제두 학술사상에 관한 전반적인 검토와 연구

    방향을 깊이 토론하였다. 따라서 한국 양명학은 하곡 정제두가 조선

    학계의 학술적 성취를 계승하고 또한 중국 양명학을 수용하여 조선학

    계에 뿌리를 내린 ‘학술’이며, 또한 조선 근대 내지 현재까지 학맥이

    전승되었기 때문에 ‘학파’가 성립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해 한

    국 양명학은 하곡 정제두가 조선학계의 ‘격물물격’ 논변을 계승하였고

    그 위에서 다시 왕양명을 비롯하여 양명 후학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자 하였다. 특히 왕양명의 양지(良知)와 왕간의 격물(格物)을

    융회하여 대학의 지지선(止至善)에 귀납시켰고 지지선을 ‘실학’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중국 양명학과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

    서 조선 양명학을 ‘하곡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하곡학의

    실심실학(實心實學)이 여러 분야로 확대 발전하였으며 조선 말기에

  • 20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써 이건승은 ‘실사실업(實事實業)’을 일

    으켜 세계 제1등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근대화 정신을 제시하였다. 하

    곡학의 이와 같은 학맥 전승에 근거하여 ‘하곡학파’가 성립하였다. 따

    라서 한국양명학회는 종래에 ‘강화학파’ 또는 ‘강화 양명학파’라는 명

    칭을 ‘하곡학’과 ‘하곡학파’로 고쳐 부르기로 한다.

    하곡학과 하곡학파는 한국 양명학에 머무는 학술이 아니고 동아시

    아 학계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연구하여야 하며 다시 세계화를 지향하

    여야한다. 따라서 한국양명학회 회원들은 하곡학과 하곡학파의 연구

    가 조선시기 학술을 되찾아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미래 목표를 지향

    하는 학술이 되어야한다고 주창하였다.

    2. ‘하곡학파’의 문헌 해제 필요성

    강화학이 형성되고 발전하였던 과정과 사회적 공헌을 말하면, 조선

    중기에 정제두가 양명학을 평생 연구하여 주자학과 다른 독립된 학술

    체계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강화도에 거주하며 학자들을 양성하여 강

    화학이 형성되었다. 강화학 학맥은 전승되고 발전하면서 조선 양명학

    과 실학 그리고 항일독립운동과 근대화운동 나아가 현대 한국양명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21세기는 황해시대이며 황해 해역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각국들이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해시대에 한국은 서해안지역에 집중하여 개발하

    고 발전시켜야 하며 따라서 강화학은 한국이 황해를 무대로 삼는 새

    로운 학술적 지향과 가치를 준비하는 기초로 삼아야한다.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부터 양자강 유역에서 급속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기초와

  • Ⅰ. ‘강화학파’ 21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새롭게 사회를 개혁하려는 가치관과 개

    방적인 태도를 지향하였다. 강화학은 조선 후기에 민족적 자주의식을

    자각하고 사회개혁을 추구하여 실학 전개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양명학을 사상적 기초로 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강화학은 황해시대를 맞아 동아시아 각국이 학술적 공동기

    초로 삼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 강화학에 관한 모든 학술적 연구

    성과들을 정리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다.

    학술적인 방면에서 강화학의 정리는 매우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강화학파와 강화학인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학과 예술 방

    면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강화학파에 대한 연

    구는 강화학과 강화학인, 그리고 강화 양명학이 재차 거론되기 시작

    하여 2004년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한국양명학회’

    주관으로 개최된 제1회 ‘강화 양명학 국제학술대회’는 ‘강화학파’를 국

    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2005년 타이완의 타이완다쉐[臺灣

    大學]에서 출판된 한국강화양명학연구논집(韓國江華陽明學硏究論集)은 외국학자가 강화양명학을 연구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강화학 연구는 여전히 열악하다. 이렇게

    된 까닭을 김교빈의 주장으로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첫째는 연구 여건의 문제, 둘째는 연구 대상이 갖고 있는 문제, 첫 번

    째 문제는 한국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강화학파에 대한 내용이다. 연구 대상의 핵심인 하곡 정

    제두와 그 후학들의 학문은 지역적으로는 주자학 위세에 눌려 강화도

    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학문의 전수 범위도 하곡의 집안과 그와 교

    류하던 몇 집안의 가학(家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하곡 이후로

    는 학문 내용에 있어서도 거의 양명학을 표방하지 못하고 고증학, 경

    학, 역사학 등에 몰두하거나 시문(詩文)을 짓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

  • 2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3) 이처럼 하곡의 강화학파는 가학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학문의 내용 또한 그 범위가 넓은 관계로 하나로 집약되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최근에는 강화학보다는 하곡학이라는 개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

    다. 중국 양명학은 왕기와 나여방 이계(二溪)를 정점으로 발전한 뒤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급격하게 침체되었다. 그런데 하곡 정제두는

    당시 조선학계의 수준 높은 주자학 기초 위에서 나왔던 여러 비판들

    을 무릅쓰고 왕양명의 양지학과 양명 후학들의 학술종지들을 선별하

    여 수용하였고, 나아가 직접 체험공부를 통하여 ‘하곡학’이라는 한국양

    명학을 건립하여 토착화시켰으며 오늘날까지 오랜 학맥을 계승하였

    다. 이는 정제두 하곡학의 학술적 위치가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의

    양명학 지평에서 조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제두 하곡학 자체에

    관한 연구와 함께 이를 한국 양명학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경북 안동’하면 ‘퇴계학’을 떠올리듯, ‘인천 강화’하면 ‘하

    곡학’이라는 문화적 유산이 마련되어야 한다.

    강화학이든 하곡학이든 이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기존의 연

    구 성과를 분석 정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문인들의

    자료들이 아직도 체계적인 교감을 거치지 않은 원자료 상태가 많다.

    원자료에 대한 정본(定本)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정본 작업에

    앞서 우선 이들 자료의 목록을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

    이 없을 때 ‘강화학’에 대한 연구는 중복되고, 이로 인해 ‘강화학’ 연구

    는 답보상태에 머물고 만다.

    이러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하곡 정제두와 그의 문인 및

    이들의 사상을 이은 강화학파에 대한 1차 문헌을 해제하고, 1차 문헌

    13) 한국사상사연구회 편저, 조선 유학의 학파들(서울, 예문서원, 1996), 442 -443쪽 참고.

  • Ⅰ. ‘강화학파’ 23

    에 대한 연구 성과(석사·박사 논문 포함)를 정리 요약하는데 목적을

    둔다.

    아울러 이 연구 자료는 장차 강화학파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게 기존의 연구 성과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나아가 연구방향을 설정

    하는데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문헌 해제 방법

    첫째, 강화학파에 대한 문헌해제가 주목적이다. 따라서 한국 양명

    학자에 대한 문헌은 제외한다.

    둘째, 문집은 오늘날 출판되는 책과 달리 기본적으로 문·사학·철

    학 등 다양한 분야가 ‘문집’이라는 하나의 문헌 속에 함께 실려 있다.

    따라서 문집 해제를 학문 분야 별로 나누어 서술하게 되면, 문집이

    분야별로 분산되어 문집 전체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야기한다. 여기서

    는 기본적으로 하곡집을 정점으로, 하곡 후학의 문집을 분류 편의상 문집 저자의 출생 연대를 기준으로 하고자 한다.

    셋째, 본 연구의 주요 목적은 문헌 해제와 자료수집에 있다. 따라

    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자의 출생·관직 등은 자세히 언급하

    지 않는다.

    넷째, 문헌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를 밝히지만, 한국문집총간을 통해 출판된 문헌은 생략하기도 한다.

    다섯째, 출판된 전문 서적 역시 문헌 해제 순서와 같은 순서로 나

    열한다.

    여섯째, 일반 논문 및 학위논문 역시 문헌 해제 순서와 같은 순서

    로 나열한다.

  • 24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일곱째, 학위논문은 박사논문에 한정하며, 논문의 요약문을 첨부한

    다.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1. 하곡집(霞谷集)1) 저자

    정제두(鄭齊斗). 1649(인조27)-1736(영조12). 자 사앙(士仰), 호 하곡

    (霞谷). 본관 연일(迎日), 포은 정몽주의 11세 손(孫), 시호 문강(文康).

    2)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소장도서번호: 古3648-文70-22).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이하 ‘총간’이라 칭함) 160집. 하곡전집, 여강출판사, 1978.하곡집, 윤남한역, 대양서적, 1975.하곡집, 성낙훈 등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편찬

    현존하는 저자의 문집은 규장각의 11책 본과 8책 본, 국립중앙도서

    관의 반환문화재인 22책 본,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의 11책 본 등

    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다음 네 종류.

    가. 22책 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하곡의 5대손 정문승(鄭文升)

    필사본.

  • 26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나. 11책 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하곡의 7세손 정계섭(鄭啓

    燮) 필사본.

    다. 10책 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라. 8책 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가장 간단한 필사본.

    마. 11책 본. 성균관대학교 소장. 규장각 소장본과 내용이 같은 전

    사본(傳寫本).

    정문승이 편찬한 22책본은 반환문화재인 국립중앙도서관본이다. 다

    만 영인저본 중 권21이 빠져서 목록에 따라 11책 본 규장각장본(古

    3428-326)으로 보충하였다. 또 권4의 제18~19판과 권12의 제3~18판은

    착간(錯簡)되어, 내용에 따라 바로잡았고, 권21의 「월행도(月行圖)」와 「기형경천도도각행분배지도(機衡經天度道各行分排之圖)」는 글씨가 작아 축소영인하지 않고 1면에 1판씩 세로로 편집하였다.

    정문승이 편찬한 22책 본의 명칭은 하곡선생문집(霞谷先生文集)이다. 권두(卷頭)에는 22권의 전체 목록과 정문승이 1856년경 본집을

    편찬할 때 지은 「발(跋)」이 실려 있다. 권1~9가 정집(正集)이고, 권10~11이 부집(附集)이며, 권12~19는 내집(內集)이고, 권20~22가 외집

    (外集)인데, 목록에서만 구분되어 있고, 본문 내에서는 작은 제목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14)

    4) 구성과 내용

    하곡집(霞谷集)霞谷集跋

    14) 한국문집총간해제4(이하 한국문집총간은 ‘총간’이라 하고, 한국문집총간해제는 ‘총간해제’라고 한다. 김성애 해제, 273-282쪽. 민족문화추진회. 윤남한 選, 국역하곡집(민족문화추진회간) 참고.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27

    跋(鄭文升)

    卷一

    書(一)

    上宋尤齋問目(총5편)

    答尹明齋書(총10편)

    上朴南溪書(총13편)

    上金相國書

    答閔相國書

    上閔判書書

    答尹相國書

    答徐聘君書

    上禮曹判書書

    書(二)

    與閔彥暉書(총5편)答閔誠齋書(총2편)

    卷二

    書(三)

    答閔彥暉書(총14편)答崔汝和書(총25편)

    與崔汝和論親民書

    與崔汝和問目(총3편)

    答崔汝和論論孟類編書

    書(四)

    答朴大叔論天命圖書

    與朴大叔書

    答朴大叔大學陽明說疑義問目

  • 28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重答朴大叔問目

    答李君輔書(총5편)

    答李君輔問目

    與李同甫書(총9편)

    答鄭景由書(총4편)

    答鄭景由問目

    答鄭景由別紙(총3편)

    卷三

    書(五)

    答李伯祥書(총2편)

    答金直卿

    論花潭集後書書

    答權絿書

    與金汝和書(총5편)

    與申相公書

    與閔判書書

    答李景益書(총4편)

    與鄭明府書

    答李季章書(총2편)

    答閔相國書

    答崔汝久書

    與尹行敎書(총2편)

    答尹行敎書

    與趙留守書

    答李久叔書

    與某相公書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29

    與某相公書(第二書)

    與某相國書

    答某書

    與某書

    答李國彥書答金慶恩書

    答金慶恩別紙

    答沈和甫書(총3편)

    答尹伯修書(총2편)

    答尹仲和書

    答尹仲和書

    答趙穉晦書

    答趙君錫書(총2편)

    答李炳然書(총6편)

    答朴子龍書(총3편)

    答閔汝猷書(총12편)

    與閔汝猷汝仁書

    答閔孝昌書

    答李栢齡書(총4편)

    答李栢齡別紙(총9편)

    答李栢齡別紙(再答)

    答李栢齡別紙

    答朴舒漢書

    書(六)

    答金生澤秀書

    答李匡世別紙

  • 30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答金生晥書

    答沈斗俊書

    答李衍慶別紙

    答具宅奎書

    答崔仲楫書

    答崔仲楫別紙(총3편)

    答橫溪宗人書(총6편)

    與宗人葵陽書

    答永川諸宗人書(총3편)

    答宗人鄭鎤書(총2편)答龍仁宗人書

    答宗人書

    答栢山書院院儒書

    答忠烈書院院儒書

    答臨皐書院院儒書

    答人書

    答人別紙

    與季氏書(총16편)

    答兒厚一書

    答兒書(총13편)

    從子順一書

    答從子書(총7편)

    答從子俊一書

    答從孫志式書

    答李婿成徵書答李婿書(총4편)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31

    卷四

    疏(一)

    辭書筵官疏

    辭書筵官疏(再疏)

    辭掌令疏

    辭掌令疏(再疏)

    辭掌令疏(三疏)

    辭掌令疏

    辭掌令疏(再疏)

    辭掌令疏(三疏)

    辭執義疏

    辭執義疏(再疏)

    辭執義疏

    辭執義疏(再疏)

    辭戶曹參議疏

    辭戶曹參議疏(再疏)

    辭戶曹參議疏(三疏)

    辭戶曹參議疏(四疏)

    辭江原監司疏

    辭江原監司疏(再疏)

    辭江原監司疏(三疏)

    辭左尹疏

    別諭後辭敦召疏

    辭大司憲疏

    辭贊善疏

    辭吏曹參判兼任贊善疏

  • 3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辭吏曹參判兼任贊善疏(再疏)

    仍任後辭疏

    仍任後辭疏(再疏)

    仍任後辭疏(三疏)

    仍任後辭疏(四疏)

    回對

    辭召命及贊善疏

    辭贊善兼任國子疏

    書啓(총9편)

    辭召命疏

    過因山後上疏

    辭吏曹參判疏

    辭贊善疏

    辭命召疏

    回啓

    辭大司憲疏

    辭大司憲疏(再疏)

    辭資憲及諸職疏

    疏批傳諭後回對

    辭右參贊疏

    回對(총5편)

    辭右參贊疏(再疏)

    批答回對

    辭右參贊疏(三疏)

    聞賊變疏

    遣史官命召回對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33

    登筵退出後宣諭回對

    詣闕下辭召命疏

    辭特賜食物疏

    陳賀仍告歸疏

    請收偕來史官疏

    傳諭回對

    回啓

    辭歸筵對時手敎

    辭參贊諸職疏

    承候疏

    批答傳諭回對

    陳慰仍辭召命疏

    辭都憲疏

    辭都憲召命疏

    書啓

    回啓

    卷五

    疏(二)

    辭大司憲疏

    回對(총15편)

    辭兼職疏

    逆變後陳慰疏

    史官傳諭後書啓

    辭御醫隨往之命․仍陳戒疏應旨書啓

    辭周急疏

  • 34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謝周急疏

    辭知中樞疏

    辭右贊成初疏

    辭右贊成疏(再疏)

    書啓

    辭右贊成疏(三疏)

    辭右贊成疏(四疏)

    辭食物題給命疏

    辭贊成疏

    辭輔養官召命疏

    辭贊成祭酒疏

    書啓

    辭賜糧饌及擇給公廨疏辭贊成輔養官疏 辭贊成輔養官疏(再疏)

    王世子冊禮時貳師辭免疏

    冊禮後辭職仍陳戒疏

    辭周急崇祿疏

    獻議

    端懿嬪喪視事燕居服色議對

    端懿嬪喪服制議對

    辭對朝晡哭臨受杖議回啓朝官燕居帶議對

    新授職人追服當否議對

    辭對練帶議回啓

    辭對明陵誌文事議

    嬪宮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35

    議號議對

    服制儀節議對

    香室祝辭議對

    大妃殿服制議對

    永徽殿告文屬稱議對

    庚子服制追議

    啓聖祠拜禮議對

    辭對宗廟移安儀議回啓

    辭對四賢祠合享議回啓

    孝章世子喪․兩殿服制議對葬前私家祭行否議

    葬前朔望參議對

    殯宮祭禮議對

    卒哭前後服色議對

    錢貨便否議對

    魂宮練後享官服色議對

    逆女夫及父緣坐律議對

    德宗室祝辭屬稱議對

    德宗室屬稱議復對

    長陵遷奉議對

    進講冊子議對

    遷陵儀注議對

    視學時所講冊子及講官員數議對

    辭對祭服議回啓

    卷六

    祭文

  • 36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祭李兄平仲文 祭伯從侄文 祭姑夫權承旨文 祭李某文 祭姨兄

    沈公之文 祭宗簿 直長李公文 祭從姪直長文 祭南溪朴先生文

    祭閔誠齋文 祭鄭安山尙樸文 祭李 監司 ○○文 祭妹兄閔判書

    文 祭洪永川禹相文 祭朴芝浦文 祭李參判文 祭內從 弟李君聖

    諧文 祭江華某山文 祭崔艮齋文 柏山書院兩丁祝文 李平仲哀

    墓表

    監察公墓表 檢閱公墓表 贈判書公墓表 博士公墓表 贈貞敬夫

    人昌原黃氏墓表 忠貞公墓表 從兄寅平尉鄭公墓表 徵士黃公墓

    表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沈公墓表 將仕郞永禧殿參奉李公

    墓表

    墓碣

    贈贊成公墓碣

    墓誌

    德天壙誌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李公墓誌誌銘

    外王母贈貞敬夫人李氏墓誌銘

    通川郡守春坡李先生墓誌銘

    綾南君具公墓誌銘

    行狀

    先考妣行狀伯父贈贊成公行狀

    遺事

    姊氏貞夫人遺事 卷七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37

    詩 총26수

    挽辭

    挽某 挽某 挽朴校理士安 挽尹都事復元 挽尹正言 挽林綾州文

    甫丈 挽宋參判質夫 挽再從韓生永期 挽李參判景益 挽明村羅

    掌令良佐 奉哭東山尹相國 挽趙相公 挽某相公 挽西山啖薺齋

    趙士行 肅宗大王挽辭 挽申校理靖夏 李同甫大夫人挽 挽尹溫

    陽丈 挽李生夏實 挽李左相 挽李海州丈 挽李淳昌君晦 挽閒閒

    堂金 挽朴芝浦 挽吳丹陽遂一 挽林長城 挽許生爀 挽金參奉

    挽朴高城 挽李參判子文 挽權承旨 挽吳相國 挽姨兄絅菴申相

    公 挽李判書 挽趙懷德紀之 挽李淸道 挽某 挽權同知 挽楊江

    尹判書幼獜 挽李龜川 哭明齋先生 挽李奉事 挽李生錫九 挽崔明谷相公 挽趙大憲 挽鄭敎官 挽權生尙璞 景宗大王挽 挽李東

    萊士深 挽姜參奉 挽金參奉 挽李大諫 挽橫溪宗人 挽原州鄭生

    挽某 挽靜觀齋移葬 挽西門李正 宣懿王大妃挽辭 挽士谷李參

    奉 挽鄭安山尙璞 挽某 挽某台 挽橫溪宗人 挽尼山尹參奉 挽

    金主簿敬明

    石室書院會遊詩序

    送李仲輔謫靈巖序

    送柳公之江界府序

    送李聖益歸連山序

    府學行鄕飮酒禮序

    蕩春臺記

    名兒說

  • 38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忠貞公史館遺稿跋

    雜著

    雜著

    雜著

    論君后喪士庶民喪祭說

    遺敎

    壬戌遺敎

    家法

    家法

    凡例(鄭氏 世譜)

    鄭氏世譜三修凡例

    卷八

    學辯

    存言(上)

    卷九

    存言(中)

    存言(下)

    卷十

    年譜(申綽이 완성)

    行狀

    墓表

    卷十一

    遺事

    遺事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39

    遺事

    誄文誄文誄文

    祭文 총13편

    門人語錄

    門人語錄

    紀鄭先生淮陽治事

    紀鄭先生淮陽治事 江華邑誌

    薦擧疏

    玉堂請留疏

    玉堂請勘悖儒疏

    玉堂請留箚

    請設書院儒疏

    請設書院儒疏(再疏)

    備忘

    諸臣筵奏

    卷十二

    中庸說

    中庸(一) 中庸(二) 中庸(三) 中庸(四) 中庸(五) 中庸(六) 中庸

    兩截圖 中庸雜解

    卷十三

    大學說

    大學序引 大學(一) 大學(二) 大學(三) 大學(四) 大學(五) 大

    學(六) 大學經 文二截圖 (大學) 讀大學 大學古本 大學說

  • 40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卷十四

    論語說

    論語

    孟子說(上)

    浩然章圖 浩然章上解(一) 浩然章中解 浩然章下解

    卷十五

    孟子說(下)

    浩然章解(二)

    浩然章解(三)

    浩然章解(四)

    浩然章解(五)

    浩然章雜解

    四端章解

    四端章雜解

    生之謂性章解

    告子雜解

    天下之言性章解

    集大成解

    鍾鼓苑

    囿好勇好貨解諸章雜解

    孟子說

    卷十六

    詩箚錄

    詩箚錄

    書箚錄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41

    說命

    武成

    君陳

    洛誥

    洪範

    皇極正解

    皇極正解(又解)

    皇極正解(又解)

    皇極正解(又解)

    五行五事解

    春秋箚錄

    春秋箚錄

    書解

    定性書解

    通書解

    詩誦

    詩誦

    心體頌

    卷十七

    經學集錄(上編)

    天之道

    道之用

    道之體

    性之德

    性之道

  • 4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達道達德

    經學集錄(中編)

    性命一理

    物我一性

    事物止一

    一貫大小

    本末一理

    博約爲仁

    大中時中

    經學集錄(下編之上)

    知能

    知行

    精一

    明誠

    經學集錄(下編之中)

    誠道合

    忠恕

    修己安人

    經學集錄(下編之下)

    仁一體

    卷十八

    心經集義卷之一·經上

    論語堯曰章

    大禹謨人心道心章

    全體爲仁之學凡二章

    論語顏淵問仁章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43

    敬怠義欲凡二章

    禮丹書章

    易坤六二敬以直內章

    主敬愼致至誠凡四章

    大雅上帝臨女章

    易乾之象天行健章

    中庸詩云維天之命章

    心經集義卷之二·經下

    格物致知一節

    誠意一節

    正心一節

    修身一節

    卷十九

    經儀跋[申大羽]

    經儀

    通言 容貌 視 坐 立 步趨 拜揖 言語 衣服 飮食 授受 相見

    升車 居處 少者儀 從宜 雜記 追輯

    紀年

    唐虞紀年

    年表

    自周武王至成康年表

    紀年

    夫子紀年

    紀世

    思孟紀世

  • 44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卷二十

    河洛易象

    河洛易象

    目錄

    河洛易象目錄

    卷二十一

    通攷

    璇元經學通攷

    朞三百說

    天地方位里度說

    七曜右行說

    潮汐說

    卷二十二

    箚錄

    箚錄(一)

    箚錄(二)

    箚錄(三)

    箚錄(四)

    箚錄(五)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45

    2. 저촌유고(樗村遺稿)1) 저자

    심육(沈錥). 1685(숙종11)-1753(영조29). 자 화보(和甫), 언해(彥和). 호 지지재(知止齋) 또는 저촌(樗村), 저헌(樗軒).

    하곡의 문인으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

    (肅宗) 때의 명신 심유(沈濡)의 손자이고, 심수현(沈壽賢)의 아들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강학(講學)과 유람으로 보냈다. 특히 영조 때 영의정

    까지 올랐던 부친 심수현을 따라 의주(義州), 관동(關東), 영남(嶺南)

    등지는 물론 중국 이엔징[燕京]까지 다녀오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이

    때 지은 시, 일기 등이 유고로 남아 있다. 심수현은 하곡과 이종숙 관

    계다. 그래서 심육은 하곡에게서 글을 배웠고, 그 기록이 진강문답(鎭江問答)에 남아 있다. 짧은 기간의 벼슬이었지만 대사헌까지 올랐고, 하곡이 세상을 떠난 후 정후일과 백하(白下) 윤순(尹淳), 둔곡(遁

    谷) 이진병(李震炳)과 함께 하곡 저서 편집의 주역이 되었다. 「하곡행장」과 하곡의 유사(遺事), 하곡의 제문을 지었다. 저촌은 이진병과 가장 많은 편지 왕래를 했다. 현재 전하는 그의 문집은 1938년에 등사

    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필사본 하나뿐이다.

    2) 소장처

    서울대 규장각 소장(소장도서번호: 古3428-437).

    정계섭(鄭啓燮) 1938년 필사, 이건방 소장본을 저본으로 함.

    민족문화추진회, 총간』207-208집.

    3) 편찬

    등사기(謄寫記)에 의하면, 당시 경성(京城)의 이건방(李建芳)이 소장

  • 46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하고 있던 사본을 1938년 2월~7월경에 등사하여 정계섭(鄭啓燮)이 교

    정했다. 권20, 22, 29에는 1938년 2월에 등사했다는 등사 기록이, 권

    31, 34, 36, 38, 46, 47에는 같은 해 7월에 등사했다는 등사 기록이

    각 권 말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슷한 필체로 필사되어 규장각

    (古3428-326)에 소장되어 있는 정제두의 하곡집의 경우, 1935년에 정제두의 7대손인 정계섭의 주도로 정리 등사한 본을 당시 경성제국

    대학 일본인 교수 高橋亨이 빌려서, 다시 한 본을 등사하여 이것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한 것이 현재 규장각에 전하게 된 것이

    다. 본집의 경우 교정자가 정계섭이라는 연관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같은 과정을 거쳐 등사 보관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원본 소장자인 이건방은 정제두의 문인이자 손자사위인 이광명(李

    匡明)의 6대손으로, 저자 사후 이광명이나 그 후손들이 저자의 유고를

    정리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한 친구나 후배들의 문집이 대부분 간략하거나 전하지 않고, 저

    자의 후손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실제 편찬 과정은 알기

    어렵다.15)

    4) 구성과 내용

    47권 18책으로 구성. 맨 앞에 총목록이 있고, 권별 목록이 따로 있

    으며, 서발(序跋)은 없다.

    저촌유고(樗村遺稿)卷之一

    15) 총간해제5, 민족문화추진회. 金炅希 해제 참고. 윤남한, 「謄寫記, 霞谷學의 文獻的 硏究」. 윤남한, 朝鮮時代의 陽明學硏究(서울, 집문당, 1982). 신용하, 「奎章閣圖書의 변천 과정에 대한 一硏究」, 奎章閣5.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47

    詩(江湖錄一. 총99首) 詩(江湖錄二. 총87首)

    卷之二

    詩(江湖錄二. 총123首)

    卷之三

    詩(關西錄一. 총46首. 관서(關西) 유람할 때와 의주(義州) 생활

    중에 지은 시문집)

    卷之四

    詩(關西錄二. 총78首)

    卷之五

    詩(關東錄 총91首. 江陵 등 관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시문집)

    卷之六

    詩(散草 총51首. 영남, 충청도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시문집)

    詩(燕行錄 총58首. 燕京에 다녀올 때 지은 시문집)

    詩(총60首. 樗村에서 지은 시)

    卷之七

    詩(권6에 이어지는 시. 총55首)

    卷之八

    詩(총80首. 報恩, 知禮, 月城, 靑松, 鎭川 등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

    卷之九

    詩(총20首. 권8에 이어지는 시)

    卷之十

    詩(총114首. 安陰, 昌原, 晉州, 金山 등을 유람하고 지은 시)

    卷之十一

    詩(총168首. 대체로 安城에 기거하면서 지은 시)16)

    16) 卷11부터 1745(61세)~죽을 때(1753)까지의 시(詩)가 시대 순으로 실려 있다.

  • 48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卷之十二

    詩(총57首. 권11과 같음)

    卷之十三

    詩(총61首. 권11과 같음)

    卷之十四

    詩(총56首. 권11과 같음)

    卷之十五

    詩(총188首. 권11과 같음)

    卷之十六

    詩(총60首. 특히 報恩, 淸州 등지를 다녀올 때 지은 시문집)

    卷之十七

    詩(총27首. 이진병(李震炳)과의 차우니(次韻詩) 및 안부를 묻는

    서신과 함께 보낸 시문집)

    卷之十八

    詩(총48首. 이진병과의 차운시 29수와 기타 시)

    卷之十九

    詩(총66題. 이진병과의 차운시 29제(題)와 기타 시)

    卷之二十

    詩(이진병과 차운시 포함 총111首)

    卷之二十一

    詩(총197首. 이기(理氣), 심통성정(心統性情) 등 성리학적 주제의

    시가 많다)

    卷之二十二

    詩(총184首. 이이룬수(理一分殊), 태극도(太極圖) 등의 시가 있다)

    卷之二十三

    詩(총212首)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49

    卷之二十四

    詩(총51首)

    卷之二十五

    書(스승 하곡 등에게 보내는 편지 및 답장 70편)

    卷之二十六

    書(대부분 안부 편지 31편)

    卷之二十七

    書(이진병에게 보내는 편지 40편)

    卷之二十八

    書(이석여(李錫予), 양생(良甥)에게 보낸 답장 89편)

    卷之二十九

    書(오성등(吳聖登), 유경원(柳景愿)에게 보낸 편지와 구자순(具子

    順)에게 보낸 답장 편지 64편)

    卷之三十

    書(이진병)에게 보낸 편지 18편)

    卷之三十一

    書(이진병에게 보낸 편지 14편)

    卷之三十二

    書(심군택(沈君澤), 조비경(趙飛卿) 등에게 보낸 편지 및 답장 48편)

    卷之三十三

    書(李景活(毅敬), 韓誠之(思喆) 등에게 보낸 편지 37편)

    卷之三十四

    書(李晦甫, 趙震彬 등에게 보낸 편지 및 답장 28편)

    卷之三十五

    雜著(이기(理氣), 격물(格物),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 성리학

    주제를 간단히 적은 글. 15편)

  • 50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卷之三十六

    雜著(답글 9편)

    卷之三十七

    雜著(연대 未詳의 일기)

    卷之三十八

    雜著(戊午년 일기. 壬寅(1722)년 하곡과의 문답을 정리한 鎭江問答)

    卷之三十九

    雜著(일기, 灣館錄. 庚寅(1710)년 의주로 간 뒤부터 서울로 돌아

    올 때까지)

    卷之四十

    雜著(일기, 灣館錄. 권39와 같음)

    卷之四十一

    雜著(楓嶽錄. 癸巳(1713)년 일기, 금강산을 유람하고 남긴 글)

    卷之四十二

    序(4편) 說(閒雲洞說 1편) 論(成德論 1편) 祭文(34편)

    卷之四十三

    墓碣銘(10편)

    卷之四十四

    遺事(霞谷 외 4편)

    卷之四十五

    墓表(7편)

    卷之四十六

    墓誌銘(6편)

    卷之四十七

    簡牘(편지 61편)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51

    3. 관양집(冠陽集)1) 저자

    이광덕(李匡德). 1690(숙종16)-1748(영조24). 자 성뢰(聖賴), 호 관

    양(冠陽), 존재(尊齋).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현손이자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이며

    조경명(趙景命)의 사위. 문형(文衡)을 역임할 정도로 문학적 명성도

    있었으나 유문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건창

    이 지은 관양공사략(冠陽公事畧)(명미당집(明美堂集)卷18)은 미완성고인 이시원이 쓴 「대제학관양이공행장(大提學冠陽李公行狀)」(사기집(沙磯集)』책(冊)5)과 내용과 구성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건창이 조부 이시원의 글을 바탕으로 다시 구성한 듯하다.

    행장에 의하면, 저자가 1739년 동지부사로 이엔징[燕京]에 갔을 때

    중국인들이 저자의 시를 보고 “기풍이 온순하고 문장이 아름다워 마

    치 새벽녘 연꽃이 바람에 웃는 것 같다.”고 평하면서 함께 읊은 시를

    간행하여 탐주집(探珠集)이라 제목을 지어 저자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탐주집은 전하지 않는다.

    2)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奎12449).

    민족문화추진회, 총간』209집.

    3) 편찬 과정

    이 필사본은 필사 경위와 시기를 알 수 없는 사본으로 그 편집과

    교정 상태를 보아 아직 편차를 완료하지 못한 미정고본(未定稿本)으

    로 보인다. 본집의 권1에는 ‘관양시집(冠陽詩集)’으로 권수제(卷首題)

  • 5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가 달려 있고, ‘완산이광덕저(完山李匡德著)’라고 작자가 표시되어 있

    는데, 그 다음부터는 ‘관양집(冠陽集)’으로만 되어 있고, 시와 상소 이

    후는 작품의 편수에 관계없이 문체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

    다. 이 외에 본문 중의 교감(校勘) 사항과 오자의 교정, 빠진 문장이

    있는 소차(疏箚)와 시(詩)가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나 내용이 중복되

    는 시가 실려 있는 점 등을 살펴볼 때 본집은 저자의 유문을 수습하

    여 문체별로 정리한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저자 집안이 소론의 명문

    으로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문집이 많았지만 대부분 필사본으로만 전

    해올 뿐 간행된 문집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본집도 간

    행을 염두에 두고 정리한 것이기 보다는 집안에 보관해 두기 위해 유

    문을 수습 정리한 수준인 듯하다.17)

    4) 구성과 내용

    본집은 19권 4책의 필사본으로, 권1~2는 시(詩), 권3~19는 문(文)으

    로 구성되어 있다. 서발(序跋)이나 부록, 목차 등은 실려 있지 않다.

    권1~2에는 약 400수의 시가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는 연대순으로 배

    열한 듯하지만 권2의 후반부에는 연도가 뒤섞인 부분이 있고, 또 권2

    의 「방신사앙직려(訪申士昻直廬)」의 경우 같은 시가 권말에 반복해서 기재되어 있다. 대체로 권1의 「봉화정생혜치운(奉和鄭生惠雉韻)」(1703)에서 권2의 「요화종숙(潦和宗叔)」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정리된 시고(詩稿)이고, 이후는 편차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 즉 1728년 완영(完

    營)에 있을 때의 시, 상원시(上元詩)(1709년), 경종에 대한 만시(挽詩),

    결구(缺句)가 있는 시 등 앞에서 정리하고 남은 시들을 대강 추려서 뒤

    에 붙여 놓은 듯하다. 세밀한 주는 대부분 다른 판본과 대조한 교감 사

    17) 「事畧」(李建昌 撰, 明美堂集』卷18)을 근거로 김성애가 해제함.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53

    항과 오자의 교정, 위치의 변동 등을 표시한 편자주이고, 저자가 주를

    붙인 듯한 내용도 가끔 보인다. 내용은 부친에게 차운한 시, 해서(海

    西)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시, 이엔징[燕京]에 사신으로 오가며 지은 시

    등이다.

    권3~6은 상소 45편이다. 본집 중 가장 정리가 잘된 부분으로 오자

    의 교정이나 교감을 본 흔적이 눈에 띈다.

    권3~5에는 1723년 윤용(尹容)의 파직을 환수할 것을 청한 상소부터

    1748년 「어용수개진하후고환소(御容修改陳賀後告還疏)」까지 41편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권6은 부친이나 다른 사람 대신 지은 소 4편

    이 실려 있다. 대부분이 사직소이지만 권4의 「인대신차사리조좌랑소(因大臣箚辭吏曹佐郞疏)」는 조지빈(趙趾彬)의 삼전(三銓) 의망 문제로 조태억(趙泰億)과 논란을 벌여 올린 사직 상소이고, 「인리량신소사번임소(因李亮臣疏辭藩任疏)」 이하는 무신난(戊申亂)과 관계되었다는 이양신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내용이다. 권6의 「논임징하소(論任徵夏疏)」(1726)는 경종의 병을 발표하여 영조의 세제대리(世弟代理)가 정당했음

    을 밝히도록 청한 임징하를 논척하면서 이후로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일을 논할 때 선왕을 논하지 못하도록 율령으로 제정하자고 강력하게

    제기한 내용으로 저자의 당론(黨論)을 살필 수 있는 소이다. 위의 상

    소들을 통해 저자가 영조 초기 소론 중 완론(緩論)으로 조현명(趙顯

    命), 송인명(宋寅明) 등과 함께 탕평책을 지지하였으나 무신란 이후

    조정의 진출을 그만두고 칩거하다가 다시 준론(峻論)으로 바뀌는 과

    정을 엿볼 수 있다. 권6의 부친을 대신해 지은 「진민폐소(陳民弊疏)」는 모곡(耗穀), 군정, 수령의 폐단 등 백성의 질곡에 대해 자세히 언

    급한 것인데 끝부분에 결문이 있다.

    권7~8은 응제문(應製文)으로 옥책문(玉冊文)(1), 교서(敎書)(2), 치

    제문(致祭文)(1), 전문(箋文)(2)이다. 문체별로 분류하여 2권으로 나누

  • 54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었지만 전체가 7판 정도 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다. 대왕대비의 존

    호를 올리는 옥책문, 경상 감사와 황해 감사에 대한 교서, 신익하(申

    翊夏)에 대한 치제문이 권7에 실려 있고, 정조전문(正朝箋文)과 숙종

    40주년 진하전문(陳賀箋文) 2편이 권8에 수록되어 있는데 권8은 본래

    권7이었던 글씨를 고친 흔적이 뚜렷하다.

    권9는 서계(書啓) 3편으로 저자가 전라도 어사와 관찰사를 지낼 때

    올린 글이다. 특히 호남 어사로 올린 별단은 800여 자에 달하는 장문

    으로 이두가 간간이 섞여 있다. 「논건지산절수계(論乾止山折受啓)」는 영조의 처사에 반대해 노여움을 샀지만 저자의 강직한 성격을 드러낸

    글이다.

    권10은 공사(拱辭)(2)이다. 1727년 출사에 불응하여 올린 공사와

    1741년 아우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의 일에 연관되어 하옥

    되고 이에 연루되어 고문 받을 때 바친 공사이다. 이로 인해 저자와

    아우는 각각 해남(海南)과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권11~12는 시장(諡狀)(3), 묘도문(墓道文)(8)이다.

    권13은 제문(祭文)(12)으로 대부분 종형(從兄), 백부(伯父), 부인과

    누이, 장인 조경명(趙景命), 고모 등 가족들에 대한 글이다.

    권14는 편지(22)이다. 부친과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장 앞에

    실려 있으며 특히 1741년 이후 동생 이광의와 각기 흑산도와 해남으

    로 유배되었을 때 주고받은 편지가 많이 실려 있다. 서로 안부를 묻

    고 독서를 권하는 내용인데 군데군데 내용이 빠진 부분은 주(註)로

    표시되어 있다. 1741년에 계제(季弟)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자의 탕평

    론이 잘 나타나 있고, 1734년의 「답이군경서(答李君敬書)」는 북방 관방의 형세와 대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조풍원서(與趙豐原書)」는 1741년 아우 이광의(李匡誼)의 일로 국문을 받을 당시 김복택과 관련

    되어 나온 복침(復寢)이란 문자의 출처와 의미에 관한 일로 조현명(趙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55

    顯命)에게 문의한 내용이다.

    권15~18은 서(序)(6), 기(記)(3), 론(論)(2), 뢰(誄)(2)로 문체별로 분권되어 있다. 권15에는 의학서적인 「청낭묘결(靑囊妙訣)」과 이탁영(李擢英)이 임진란 때의 일을 기록한 「정만록(征蠻錄)」에 대한 서, 이증효(李曾孝)에게 독서를 권하는 글과 그림과 화첩에 대한 서 등이 있

    다. 권16에는 「취향기(醉鄉記)」와 부친을 대신해 지은 「승저정기(勝滁亭記)」, 오도경(吳道卿)의 당호인 광헌(廣軒)에 대해 지은 기문 등이 실려 있다. 권17은 「오자서론(伍子胥論)」과 「관중여기인론(管仲如其仁論)」 2편인데 후자는 마지막에 결구가 있어 문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뇌사(誄辭)는 변자장(邊子長)과 조달명(趙達命)에 대한 글이다.

    권19는 잡저(雜著)(11)이다. 지방 수령의 칠사(七事)에 대해 쓴 「칠사명(七事銘)」, 구택규(具宅奎)의 화상찬과 서첩, 화첩에 대한 제발이 있고, 호남의 아전인 정차삼(鄭次三)·박태화(朴泰和), 호랑이를 잡은

    함경도의 기인, 서흥(瑞興)의 김정삼(金廷三) 등에 대한 일화를 적은

    전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사침(謝枕)」은 의인화한 목침(木枕)을 소재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태도를 반성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제목

    이 빠진 채 글의 일부만 실려 있는 글이 한 편 있는데, 자신의 문장이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내용이다.18)

    관양집(冠陽集)冠陽詩集卷之一

    冠陽集卷之二

    18) 총간해제5』133-138쪽 김성애 해제 참고.

  • 56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冠陽集卷之三

    䟽講還收尹容罷職之命䟽因備局草記辭司書䟽辭副校理䟽請査掌膳婢箚

    辭副校理䟽辭持平․兼陳所懷䟽辭修撰䟽辭修撰疏

    辭修撰疏

    辭副校理兼陳所懷疏

    冠陽集卷之四

    辭館職·因陳私懇疏 辭副校理疏 因大臣箚․辭吏曹佐郞䟽因大臣箚·辭吏曹佐郞䟽(再䟽) 因湖南兩邑守令拿問事․陳本道事宜䟽 因湖南兩邑守令拿問事․陳本道事宜䟽(再疏) 因按囚之命陳病待罪䟽 因李亮臣疏辭藩任疏 因李亮臣疏辭藩任疏(再疏) 因李亮臣疏 辭藩任疏(三疏) 因李亮臣疏辭藩任疏(四疏) 因李亮臣疏

    辭藩任疏(五疏) 因李亮臣疏辭 藩任疏(六䟽) 因李亮臣疏辭藩任疏(七䟽) 因趙趾彬疏辭藩任疏 陳情辭藩任疏

    冠陽集卷之五

    䟽辭刑曹參議疏 辭監賑御史疏 辭江華留守疏 辭江華留守䟽 辭江華留守䟽(再䟽) 辭大司憲疏 辭戶曹參判疏 辭刑曹參判疏 遞職後告還疏 辭文衡疏 辭同義禁疏 因沈繡啓辭伸辨疏 辭左尹疏 玉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57

    冊文製進後告還疏 御容修改陳賀後告還疏

    冠陽集卷之六

    辭大司諫疏

    陳民弊疏

    論任徵夏疏

    論良役變通疏

    冠陽集卷之七

    應製文

    大王大妃殿上尊號玉冊文

    敎慶尙監司

    敎黃海監司

    統制使申翊夏致祭文

    冠陽集卷之八

    正朝箋文 四十年陳賀賀箋

    冠陽集卷之九

    南御史書啓別單

    監賑御史書啓

    論乾止山折受啓

    冠陽集卷之十

    拱辭

    丁未拱辭

    辛酉拱辭

    冠陽集卷之十一

  • 58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謚狀

    義州判官崔公謚狀

    贈判書朴公朴謚狀

    贈參判朴公謚狀

    冠陽集卷之十二

    墓文

    贈左贊成朴公墓碣銘 貞敬夫人慶州李氏墓碣 監察李公墓碣 平昌

    郡守尹公墓碣 成均進士尹公墓表 牧使李公墓表 從侄墓文 再從

    弟縣監墓文

    冠陽集卷之十三

    祭文

    祭從伯兄文 祭伯父文 祭尹氏妹墓文 祭亡室墓文 祭外舅趙大司

    諫公文 祭姑母淑人文 祭堂伯兄遷葬文 祭曺義興文 祈雨祭文 祭

    四山積骸文 開城府進香文 祭朴必淸文

    冠陽集卷之十四

    上判書公書 寄仲弟書 寄舍弟謫中 寄舍弟謫中 寄謫中 寄謫中

    寄謫中 寄謫中 寄謫中 寄謫中 寄季弟書 與崔季綏書 與右相書

    答李君敬書 與朴成甫書 與箕 伯趙君敬書 與○○○○○ 與張貢

    生書 與進士江南凌君 答南正言渭老書 與趙豊 原書 與李判官

    冠陽集卷之十五

    靑囊妙訣序 李判書畵像序 征蠻錄後序 勸從侄曾孝讀古文百選序

    奉送嘉陵先生反 官燕歧序 蒼崖子畫帖序冠陽集卷之十六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59

    醉鄕記

    勝滁亭記廣軒記

    冠陽集卷之十七

    伍子胥論

    管仲如其仁論

    冠陽集卷之十八

    誄邊君子長誄趙君達命誄

    冠陽集卷之十九

    雜著

    七事銘

    具參判畵像贊

    題李君書帖

    題沈君畵葡萄帖

    廣慈庵新建勸善文

    記鄭次

    三朴泰和事

    咸鏡異人傳

    駁仲弟責奴文

    謝枕

    瑞興貢生金廷三

    (缺題)

  • 60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4. 선고(先藁)

    1) 저자

    이광신(李匡臣). 1700(숙종26)-1744(영조20). 자 용직(用直), 호 항

    재(恒齋). 전주이씨 덕천군파. 조부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

    아버지는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알려진 이대성의 셋째 아들 이진휴

    (李眞休). 하곡의 아들 정후일(鄭厚一)과 이광사, 이광명 등과 같이 하

    곡의 직전제자로써 초기 강화학파에 해당된다.

    항재는 어린 나이(8세)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문

    장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문인이 되기보다는 성현의 학

    문을 지향하게 되었다. 강화에 들어가 하곡을 만난 뒤 양명집(陽明集)

    을 읽으면서 주자학과의 변별을 꾀하였다. 이후 진솔하고 합리적인

    학문자세로 수양에 힘썼다. 또 제자양성에 있어서는 조그만 허물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대인관계에서는 진실한 모습을 보였다.

    항재 본인은 일찍 부모를 여윈 외아들로 외로운 신세였지만, 종형

    제들과 서로 사우(師友)가 되어 즐겁게 생활한 듯하다. 그리고 부인

    광주(廣州) 변씨(邊氏)가 가정 경제를 도맡아 잘 꾸려나가 의식 걱정

    없이 지냈다. 그러나 45세에 병에 걸려 열흘 만에 죽어 고양(高揚)땅

    에 묻히고 말았다.19)

    2) 소장처

    3책 4권. 문중본, 한국학중앙연구원.

    19) 참고문헌: 심경호, 「항재이광신론」(진단학보』84, 진단학회), 1997. 서경숙, 「항재 이광신의 이기론」(양명학』6호, 한국양명학회), 2001. 서경숙, 「초기 강화학파 항재 이광신의 심성론」(한국철학논집』13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03.

  • Ⅱ. 하곡과 강화학파 문헌 해제 61

    3) 편찬

    서문이나 발문(跋文)이 없어서 편찬과정을 알 수 없다.

    4) 구성과 내용

    선고(先藁)1冊

    書 答道甫書

    與道甫書

    答閔士相書

    與趙飛卿書

    與飛卿書

    答趙飛卿書

    答崔敬伯載興書

    答尹稺繩書 與尹稺繩書 答尹稺繩書 又答稺繩書 上趙侍直

    與道甫

    呈飛卿

    呈士相

    復飛卿

    示安齋

    寄敬孝

    上飛卿

  • 62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上月巖

    復安齋

    復聖任哀

    與李飬正 呈杜署

    答郭喪人子施別紙

    答○○○

    賀韓稺和 上竹西

    呈尹稺繩 答朴僉正子中

    祭文 祭叔母文 祭仲父判書公文 祭伯父澤軒公文 祭伯母文 祭族父

    觀察公文 祭仲父仲母遷葬文 祭姑母文 祭霞谷鄭先生文 祭季

    行文 祭朴判書 祭外姑兪氏文 祭鄭富平文 祭閔士相文 祭趙

    飛卿文 哭趙飛卿文 祭戚泛叔沈公文 哭趙飛卿文 哭趙飛卿文

    哭趙飛卿文 祭趙飛卿文 祭沈樵叟文 祭菊圃姜公文 祭杜谷大姑母文 祭姑母夫崔公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