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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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마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 보이스아이 바코드입니다 www.cha.go.kr 하나 / 우리 춤, 맺고 푸는 긴장과 이완의 아름다움 둘/정 을 나누는 음식, 비빔밥 셋 / K-pop, 그 다중적 정체성의 속살 한국 문화의 세계화 ❶ 소박함 속의 야성 우리가 함께해요 vol.86 2012 / 01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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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우측마크는시각장애인을위한음성변환보이스아이바코드입니다

wwwchagokr

하나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둘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셋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한국문화의세계화❶

소박함속의야성

우리가함께해요vol86 2012 01 January

19세기에한국을다녀간많은외국인들은한국인의모습에서때묻지아니하고소박한모습을보았다

하지만그소박함속에는강인한생명력이깊게자리하고있다

우리민족의소박한문화속에는큰울림을주는정중동靜中動의맥이흐르고있다

신명과역동성파격과일탈로표현되는한국적인감흥은세계어디에서도찾아볼수없는우리민족만의아름다움이다

소박함속의야성

한 국 문 화 의 세 계 화 ❶

bull2012 개편사항

2012년 새해를 맞아 문화재 사랑이 새롭게 변화합니다

문화재 사랑이 2004년 창간호를 기점으로 2012년 1월 통권 86호를 맞이했습니다 2008년lsquo대한민국커뮤니케이션대상 편집대상rsquo에 이어 2009년lsquo국제

비지니스대상 Finalist(최우수상)rsquo 2010년lsquoSTEVIE Award Winner(대상)수상rsquo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습니다 한결같은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힘입어 문화재 사랑은 국내 유일무이한 문화재 전문지로서 더욱 풍부한 콘텐츠로 보답할 수 있게 노력하겠

습니다 임진년(壬辰年) 흑룡의 해 희망찬 새해가 되길 기원하며 2012년 lt문화재 사랑gt에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bull개편 기본 방향

- lt문화재 사랑gt의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문화재 정보를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 고품질 고품격 소식지가 되기 위해 콘텐츠와 디자인 기획의 고급화를 지향했습니다

- 전문성과 흥미성에 모두 충실한 보존가치 있는 문화재 전문지를 지향했습니다

- 보이스아이와 QR코드를 통해 독자와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노력했습니다

bull기획middot편집 총 6개의 신규 콘텐츠 추가 신설

- 명승지로 떠나는 여행 전국 각지에 있는 명승지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소개

- 세계유산의 발자취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 조망

- 생활 속 문화재 감정 골동품의 가치를 쉽고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방법 제시

- 생동하는 문화재현장 문화재가 어떻게 보존middot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 문화재 사랑과 만나다 독자들에게 직접 원고를 받는 코너로 매월 제시되는 여행 콘셉트에 해당하는 독자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를 게재

- 우리나라 국보 여행 우리나라 국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는 만화로 전달

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_소박함과야성

❶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 김미숙

❷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 예종석

❸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 박애경

명사와의만남과사색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 박세란

명승지로떠나는여행

따오기한마리흰날개활짝펴날아오르는섬백령도 | 김학범

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월동준비제1호연탄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 정연수

문화재돋보기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소지所志 | 정제규

세계유산의발자취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이탈리아피사와두오모광장 | 고형욱

생활속문화재감정

오감을동원하여진품을찾아내다 | 이상문

예인의맥을잇다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 백수지

생동하는문화재현장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 류호철

문화재사랑을만나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우리들의행복한시간 | 박세란

우리나라국보여행

국보란무엇일까요 | 유환석

함께하는문화재청

❶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 박정섭이재순

❷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 박세란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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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6 2012 01 January

C O N T E N T S

발행일 2012년 1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문화재청

편집대변인실

총괄기획신용환 류소명 이철규 김지현

편집위원이종희 안호 황경순 오춘영 장영기 김성도 임병천 임은경 박정은

주소 302-701 대전광역시서구청사로 189 문화재청대변인실

전화 (042)481-4673

팩스 (042)481-4679

홈페이지 wwwchagokr

기획middot디자인middot제작(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cokr

| 본지에 실린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 본지에게재된글이나교육자료를문화재청의허락없이무단복사 전재하는것을금합니다

| 문화재사랑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웹진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임진년새해가밝아오고곧설이다가오면우리의마음은풍요로워진다온나라가설축제에휩싸여

추위도잊는다이는우리만의아름다움에젖어들수있기때문이다여기저기서풍악소리가울리며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가족과 친지들과의 귀한 만남이 더욱 소중한 때이다 세시풍속 중에 가장

큰 설 명절을 앞두고 흥겨움의 대명사가 되는 춤과 노래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즐겁고 신명이 나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소리가 절로 난다 이는 우리의 몸이 신명이 나면 저절로

움직여지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이lsquo절로rsquo라는 정서는 바로 한국춤의 특성이 되는lsquo정중동靜中動rsquo과

lsquo동중정動中靜rsquo의본질에서부터비롯된다

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글middot김미숙경상대학교민속무용학과교수 사진middot문화재청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❶ 소박함속의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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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몸에깃든신명의몸짓

middot

우리의춤은중국이나일본과도다르며서양춤과는말할것도없이판이하

다우리춤은흥겨움에빠져들어몸이자유자재로움직이다가신명이정점

에오르면[動] 자신도모르는무아지경에빠져한순간정지되듯이멈추었다

가[靜] 더큰최고경지의움직임[動]이뒤따르기때문이다또한우리의춤은

춤동작의형태와형태가이어지는춤이아니라선과선이연결되는춤인까

닭이다

정중동은lsquo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rsquo을 나

타내며동중정은lsquo겉으로강하게대치하고있는듯하지만속으로는끊임없

이 조화를 추구rsquo하고 있다 춤은 움직임 자체가 표현전달의 수단이다 그래

서움직임의질質과양量은몸짓표현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몸짓의질

은긴장과이완이혼합되어정지된상태를나타내는lsquo정적靜的 움직임rsquo과춤

폭이크고변화가많은lsquo동적動的 움직임rsquo의조화로부터결정된다또이러한

정적움직임과동적움직임을드러내기위한내적현상과외적현상의조화

를이루는lsquo중적中的 움직임rsquo이빠질수없는것이다중적인춤동작은정靜도

아니고동動도아니지만정과동을화합시키기도하고또는대립시키기도하

는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중적인 춤사위는

lsquo어르는사위rsquo로서맺고靜 푸는動 감정을조절해주므로동적동작과정적동

작을생성시키는역할을한다

움직임의긴장을극대화하는맺힘의정靜어르는춤사위로서의중中푸는춤

사위로서의동動을달리생각하자면한국춤의성격은동적인것아니면정적

인것이라는극단에치우치지않고정과동이교차하고동시에동적인움직

임속에정적인상태가내포되고반대로정적인움직임속에동적인상태가

내포되어있음을알수있다그래서정중동은움직임[動]정지됨[靜]의의미보

다는lsquo움직이는 듯 마는 듯rsquolsquo서 있는 듯 마는 듯rsquo혹은lsquo움직일 듯 말 듯rsquo

lsquo서있는듯움직이는듯rsquo등춤기법의행동하는양상을이른다즉멈춤안

에움직임이있고움직임안에멈춤이있어하나의움직임안에정과동이융

합되어있고나아가서는마음속에서lsquo절로rsquo일어나는감정이되는것이다

정중동과동중정이내포된우리춤사위

middot

한국춤이면lsquo정중동rsquo과lsquo동중동rsquo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재呈才는 정재대로 정중동의 멋이 멈

춘듯이움직이며흐르고있는유장미를내재하고있고민속춤은민속춤

01 중요무형문화재제27호승무승무는달고어르고맺고푸는리듬의

섬세한표현과중춤이갖는춤사위의오묘함이조화된매우우수한춤

으로 인간의기쁨과슬픔을높은차원에서극복하고승화시킨이지적

인춤이라할수있다 02 중요무형문화재제68호밀양백중놀이의범

부춤밀양백중놀이는바쁜농사일을끝내고고된일을해오던머슴들

이음력7월15일경용날을선택하여지주들로부터하루휴가를얻어흥

겹게노는놀이를말한다범부춤은두사람이번갈아가면서장고잽이

앞에서재주를보인다

05

02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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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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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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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09

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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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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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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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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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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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22

23

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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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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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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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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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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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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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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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19세기에한국을다녀간많은외국인들은한국인의모습에서때묻지아니하고소박한모습을보았다

하지만그소박함속에는강인한생명력이깊게자리하고있다

우리민족의소박한문화속에는큰울림을주는정중동靜中動의맥이흐르고있다

신명과역동성파격과일탈로표현되는한국적인감흥은세계어디에서도찾아볼수없는우리민족만의아름다움이다

소박함속의야성

한 국 문 화 의 세 계 화 ❶

bull2012 개편사항

2012년 새해를 맞아 문화재 사랑이 새롭게 변화합니다

문화재 사랑이 2004년 창간호를 기점으로 2012년 1월 통권 86호를 맞이했습니다 2008년lsquo대한민국커뮤니케이션대상 편집대상rsquo에 이어 2009년lsquo국제

비지니스대상 Finalist(최우수상)rsquo 2010년lsquoSTEVIE Award Winner(대상)수상rsquo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습니다 한결같은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힘입어 문화재 사랑은 국내 유일무이한 문화재 전문지로서 더욱 풍부한 콘텐츠로 보답할 수 있게 노력하겠

습니다 임진년(壬辰年) 흑룡의 해 희망찬 새해가 되길 기원하며 2012년 lt문화재 사랑gt에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bull개편 기본 방향

- lt문화재 사랑gt의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문화재 정보를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 고품질 고품격 소식지가 되기 위해 콘텐츠와 디자인 기획의 고급화를 지향했습니다

- 전문성과 흥미성에 모두 충실한 보존가치 있는 문화재 전문지를 지향했습니다

- 보이스아이와 QR코드를 통해 독자와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노력했습니다

bull기획middot편집 총 6개의 신규 콘텐츠 추가 신설

- 명승지로 떠나는 여행 전국 각지에 있는 명승지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소개

- 세계유산의 발자취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 조망

- 생활 속 문화재 감정 골동품의 가치를 쉽고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방법 제시

- 생동하는 문화재현장 문화재가 어떻게 보존middot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 문화재 사랑과 만나다 독자들에게 직접 원고를 받는 코너로 매월 제시되는 여행 콘셉트에 해당하는 독자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를 게재

- 우리나라 국보 여행 우리나라 국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는 만화로 전달

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_소박함과야성

❶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 김미숙

❷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 예종석

❸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 박애경

명사와의만남과사색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 박세란

명승지로떠나는여행

따오기한마리흰날개활짝펴날아오르는섬백령도 | 김학범

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월동준비제1호연탄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 정연수

문화재돋보기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소지所志 | 정제규

세계유산의발자취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이탈리아피사와두오모광장 | 고형욱

생활속문화재감정

오감을동원하여진품을찾아내다 | 이상문

예인의맥을잇다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 백수지

생동하는문화재현장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 류호철

문화재사랑을만나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우리들의행복한시간 | 박세란

우리나라국보여행

국보란무엇일까요 | 유환석

함께하는문화재청

❶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 박정섭이재순

❷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 박세란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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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6 2012 01 January

C O N T E N T S

발행일 2012년 1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문화재청

편집대변인실

총괄기획신용환 류소명 이철규 김지현

편집위원이종희 안호 황경순 오춘영 장영기 김성도 임병천 임은경 박정은

주소 302-701 대전광역시서구청사로 189 문화재청대변인실

전화 (042)481-4673

팩스 (042)481-4679

홈페이지 wwwchagokr

기획middot디자인middot제작(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cokr

| 본지에 실린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 본지에게재된글이나교육자료를문화재청의허락없이무단복사 전재하는것을금합니다

| 문화재사랑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웹진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임진년새해가밝아오고곧설이다가오면우리의마음은풍요로워진다온나라가설축제에휩싸여

추위도잊는다이는우리만의아름다움에젖어들수있기때문이다여기저기서풍악소리가울리며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가족과 친지들과의 귀한 만남이 더욱 소중한 때이다 세시풍속 중에 가장

큰 설 명절을 앞두고 흥겨움의 대명사가 되는 춤과 노래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즐겁고 신명이 나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소리가 절로 난다 이는 우리의 몸이 신명이 나면 저절로

움직여지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이lsquo절로rsquo라는 정서는 바로 한국춤의 특성이 되는lsquo정중동靜中動rsquo과

lsquo동중정動中靜rsquo의본질에서부터비롯된다

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글middot김미숙경상대학교민속무용학과교수 사진middot문화재청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❶ 소박함속의야성

04

01

우리몸에깃든신명의몸짓

middot

우리의춤은중국이나일본과도다르며서양춤과는말할것도없이판이하

다우리춤은흥겨움에빠져들어몸이자유자재로움직이다가신명이정점

에오르면[動] 자신도모르는무아지경에빠져한순간정지되듯이멈추었다

가[靜] 더큰최고경지의움직임[動]이뒤따르기때문이다또한우리의춤은

춤동작의형태와형태가이어지는춤이아니라선과선이연결되는춤인까

닭이다

정중동은lsquo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rsquo을 나

타내며동중정은lsquo겉으로강하게대치하고있는듯하지만속으로는끊임없

이 조화를 추구rsquo하고 있다 춤은 움직임 자체가 표현전달의 수단이다 그래

서움직임의질質과양量은몸짓표현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몸짓의질

은긴장과이완이혼합되어정지된상태를나타내는lsquo정적靜的 움직임rsquo과춤

폭이크고변화가많은lsquo동적動的 움직임rsquo의조화로부터결정된다또이러한

정적움직임과동적움직임을드러내기위한내적현상과외적현상의조화

를이루는lsquo중적中的 움직임rsquo이빠질수없는것이다중적인춤동작은정靜도

아니고동動도아니지만정과동을화합시키기도하고또는대립시키기도하

는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중적인 춤사위는

lsquo어르는사위rsquo로서맺고靜 푸는動 감정을조절해주므로동적동작과정적동

작을생성시키는역할을한다

움직임의긴장을극대화하는맺힘의정靜어르는춤사위로서의중中푸는춤

사위로서의동動을달리생각하자면한국춤의성격은동적인것아니면정적

인것이라는극단에치우치지않고정과동이교차하고동시에동적인움직

임속에정적인상태가내포되고반대로정적인움직임속에동적인상태가

내포되어있음을알수있다그래서정중동은움직임[動]정지됨[靜]의의미보

다는lsquo움직이는 듯 마는 듯rsquolsquo서 있는 듯 마는 듯rsquo혹은lsquo움직일 듯 말 듯rsquo

lsquo서있는듯움직이는듯rsquo등춤기법의행동하는양상을이른다즉멈춤안

에움직임이있고움직임안에멈춤이있어하나의움직임안에정과동이융

합되어있고나아가서는마음속에서lsquo절로rsquo일어나는감정이되는것이다

정중동과동중정이내포된우리춤사위

middot

한국춤이면lsquo정중동rsquo과lsquo동중동rsquo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재呈才는 정재대로 정중동의 멋이 멈

춘듯이움직이며흐르고있는유장미를내재하고있고민속춤은민속춤

01 중요무형문화재제27호승무승무는달고어르고맺고푸는리듬의

섬세한표현과중춤이갖는춤사위의오묘함이조화된매우우수한춤

으로 인간의기쁨과슬픔을높은차원에서극복하고승화시킨이지적

인춤이라할수있다 02 중요무형문화재제68호밀양백중놀이의범

부춤밀양백중놀이는바쁜농사일을끝내고고된일을해오던머슴들

이음력7월15일경용날을선택하여지주들로부터하루휴가를얻어흥

겹게노는놀이를말한다범부춤은두사람이번갈아가면서장고잽이

앞에서재주를보인다

05

02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06

03

04

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07

05

06

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09

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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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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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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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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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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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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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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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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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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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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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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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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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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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_소박함과야성

❶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 김미숙

❷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 예종석

❸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 박애경

명사와의만남과사색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 박세란

명승지로떠나는여행

따오기한마리흰날개활짝펴날아오르는섬백령도 | 김학범

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월동준비제1호연탄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 정연수

문화재돋보기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소지所志 | 정제규

세계유산의발자취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이탈리아피사와두오모광장 | 고형욱

생활속문화재감정

오감을동원하여진품을찾아내다 | 이상문

예인의맥을잇다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 백수지

생동하는문화재현장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 류호철

문화재사랑을만나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우리들의행복한시간 | 박세란

우리나라국보여행

국보란무엇일까요 | 유환석

함께하는문화재청

❶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 박정섭이재순

❷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 박세란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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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6 2012 01 January

C O N T E N T S

발행일 2012년 1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문화재청

편집대변인실

총괄기획신용환 류소명 이철규 김지현

편집위원이종희 안호 황경순 오춘영 장영기 김성도 임병천 임은경 박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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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새해가밝아오고곧설이다가오면우리의마음은풍요로워진다온나라가설축제에휩싸여

추위도잊는다이는우리만의아름다움에젖어들수있기때문이다여기저기서풍악소리가울리며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가족과 친지들과의 귀한 만남이 더욱 소중한 때이다 세시풍속 중에 가장

큰 설 명절을 앞두고 흥겨움의 대명사가 되는 춤과 노래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즐겁고 신명이 나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소리가 절로 난다 이는 우리의 몸이 신명이 나면 저절로

움직여지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이lsquo절로rsquo라는 정서는 바로 한국춤의 특성이 되는lsquo정중동靜中動rsquo과

lsquo동중정動中靜rsquo의본질에서부터비롯된다

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글middot김미숙경상대학교민속무용학과교수 사진middot문화재청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❶ 소박함속의야성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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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몸에깃든신명의몸짓

middot

우리의춤은중국이나일본과도다르며서양춤과는말할것도없이판이하

다우리춤은흥겨움에빠져들어몸이자유자재로움직이다가신명이정점

에오르면[動] 자신도모르는무아지경에빠져한순간정지되듯이멈추었다

가[靜] 더큰최고경지의움직임[動]이뒤따르기때문이다또한우리의춤은

춤동작의형태와형태가이어지는춤이아니라선과선이연결되는춤인까

닭이다

정중동은lsquo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rsquo을 나

타내며동중정은lsquo겉으로강하게대치하고있는듯하지만속으로는끊임없

이 조화를 추구rsquo하고 있다 춤은 움직임 자체가 표현전달의 수단이다 그래

서움직임의질質과양量은몸짓표현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몸짓의질

은긴장과이완이혼합되어정지된상태를나타내는lsquo정적靜的 움직임rsquo과춤

폭이크고변화가많은lsquo동적動的 움직임rsquo의조화로부터결정된다또이러한

정적움직임과동적움직임을드러내기위한내적현상과외적현상의조화

를이루는lsquo중적中的 움직임rsquo이빠질수없는것이다중적인춤동작은정靜도

아니고동動도아니지만정과동을화합시키기도하고또는대립시키기도하

는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중적인 춤사위는

lsquo어르는사위rsquo로서맺고靜 푸는動 감정을조절해주므로동적동작과정적동

작을생성시키는역할을한다

움직임의긴장을극대화하는맺힘의정靜어르는춤사위로서의중中푸는춤

사위로서의동動을달리생각하자면한국춤의성격은동적인것아니면정적

인것이라는극단에치우치지않고정과동이교차하고동시에동적인움직

임속에정적인상태가내포되고반대로정적인움직임속에동적인상태가

내포되어있음을알수있다그래서정중동은움직임[動]정지됨[靜]의의미보

다는lsquo움직이는 듯 마는 듯rsquolsquo서 있는 듯 마는 듯rsquo혹은lsquo움직일 듯 말 듯rsquo

lsquo서있는듯움직이는듯rsquo등춤기법의행동하는양상을이른다즉멈춤안

에움직임이있고움직임안에멈춤이있어하나의움직임안에정과동이융

합되어있고나아가서는마음속에서lsquo절로rsquo일어나는감정이되는것이다

정중동과동중정이내포된우리춤사위

middot

한국춤이면lsquo정중동rsquo과lsquo동중동rsquo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재呈才는 정재대로 정중동의 멋이 멈

춘듯이움직이며흐르고있는유장미를내재하고있고민속춤은민속춤

01 중요무형문화재제27호승무승무는달고어르고맺고푸는리듬의

섬세한표현과중춤이갖는춤사위의오묘함이조화된매우우수한춤

으로 인간의기쁨과슬픔을높은차원에서극복하고승화시킨이지적

인춤이라할수있다 02 중요무형문화재제68호밀양백중놀이의범

부춤밀양백중놀이는바쁜농사일을끝내고고된일을해오던머슴들

이음력7월15일경용날을선택하여지주들로부터하루휴가를얻어흥

겹게노는놀이를말한다범부춤은두사람이번갈아가면서장고잽이

앞에서재주를보인다

05

02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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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4

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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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09

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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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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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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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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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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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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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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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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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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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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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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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임진년새해가밝아오고곧설이다가오면우리의마음은풍요로워진다온나라가설축제에휩싸여

추위도잊는다이는우리만의아름다움에젖어들수있기때문이다여기저기서풍악소리가울리며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가족과 친지들과의 귀한 만남이 더욱 소중한 때이다 세시풍속 중에 가장

큰 설 명절을 앞두고 흥겨움의 대명사가 되는 춤과 노래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즐겁고 신명이 나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소리가 절로 난다 이는 우리의 몸이 신명이 나면 저절로

움직여지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이lsquo절로rsquo라는 정서는 바로 한국춤의 특성이 되는lsquo정중동靜中動rsquo과

lsquo동중정動中靜rsquo의본질에서부터비롯된다

우리춤맺고푸는긴장과이완의아름다움

글middot김미숙경상대학교민속무용학과교수 사진middot문화재청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❶ 소박함속의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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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우리몸에깃든신명의몸짓

middot

우리의춤은중국이나일본과도다르며서양춤과는말할것도없이판이하

다우리춤은흥겨움에빠져들어몸이자유자재로움직이다가신명이정점

에오르면[動] 자신도모르는무아지경에빠져한순간정지되듯이멈추었다

가[靜] 더큰최고경지의움직임[動]이뒤따르기때문이다또한우리의춤은

춤동작의형태와형태가이어지는춤이아니라선과선이연결되는춤인까

닭이다

정중동은lsquo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rsquo을 나

타내며동중정은lsquo겉으로강하게대치하고있는듯하지만속으로는끊임없

이 조화를 추구rsquo하고 있다 춤은 움직임 자체가 표현전달의 수단이다 그래

서움직임의질質과양量은몸짓표현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몸짓의질

은긴장과이완이혼합되어정지된상태를나타내는lsquo정적靜的 움직임rsquo과춤

폭이크고변화가많은lsquo동적動的 움직임rsquo의조화로부터결정된다또이러한

정적움직임과동적움직임을드러내기위한내적현상과외적현상의조화

를이루는lsquo중적中的 움직임rsquo이빠질수없는것이다중적인춤동작은정靜도

아니고동動도아니지만정과동을화합시키기도하고또는대립시키기도하

는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중적인 춤사위는

lsquo어르는사위rsquo로서맺고靜 푸는動 감정을조절해주므로동적동작과정적동

작을생성시키는역할을한다

움직임의긴장을극대화하는맺힘의정靜어르는춤사위로서의중中푸는춤

사위로서의동動을달리생각하자면한국춤의성격은동적인것아니면정적

인것이라는극단에치우치지않고정과동이교차하고동시에동적인움직

임속에정적인상태가내포되고반대로정적인움직임속에동적인상태가

내포되어있음을알수있다그래서정중동은움직임[動]정지됨[靜]의의미보

다는lsquo움직이는 듯 마는 듯rsquolsquo서 있는 듯 마는 듯rsquo혹은lsquo움직일 듯 말 듯rsquo

lsquo서있는듯움직이는듯rsquo등춤기법의행동하는양상을이른다즉멈춤안

에움직임이있고움직임안에멈춤이있어하나의움직임안에정과동이융

합되어있고나아가서는마음속에서lsquo절로rsquo일어나는감정이되는것이다

정중동과동중정이내포된우리춤사위

middot

한국춤이면lsquo정중동rsquo과lsquo동중동rsquo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재呈才는 정재대로 정중동의 멋이 멈

춘듯이움직이며흐르고있는유장미를내재하고있고민속춤은민속춤

01 중요무형문화재제27호승무승무는달고어르고맺고푸는리듬의

섬세한표현과중춤이갖는춤사위의오묘함이조화된매우우수한춤

으로 인간의기쁨과슬픔을높은차원에서극복하고승화시킨이지적

인춤이라할수있다 02 중요무형문화재제68호밀양백중놀이의범

부춤밀양백중놀이는바쁜농사일을끝내고고된일을해오던머슴들

이음력7월15일경용날을선택하여지주들로부터하루휴가를얻어흥

겹게노는놀이를말한다범부춤은두사람이번갈아가면서장고잽이

앞에서재주를보인다

05

02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06

03

04

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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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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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19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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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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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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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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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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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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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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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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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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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5: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우리몸에깃든신명의몸짓

middot

우리의춤은중국이나일본과도다르며서양춤과는말할것도없이판이하

다우리춤은흥겨움에빠져들어몸이자유자재로움직이다가신명이정점

에오르면[動] 자신도모르는무아지경에빠져한순간정지되듯이멈추었다

가[靜] 더큰최고경지의움직임[動]이뒤따르기때문이다또한우리의춤은

춤동작의형태와형태가이어지는춤이아니라선과선이연결되는춤인까

닭이다

정중동은lsquo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부단히 움직임rsquo을 나

타내며동중정은lsquo겉으로강하게대치하고있는듯하지만속으로는끊임없

이 조화를 추구rsquo하고 있다 춤은 움직임 자체가 표현전달의 수단이다 그래

서움직임의질質과양量은몸짓표현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몸짓의질

은긴장과이완이혼합되어정지된상태를나타내는lsquo정적靜的 움직임rsquo과춤

폭이크고변화가많은lsquo동적動的 움직임rsquo의조화로부터결정된다또이러한

정적움직임과동적움직임을드러내기위한내적현상과외적현상의조화

를이루는lsquo중적中的 움직임rsquo이빠질수없는것이다중적인춤동작은정靜도

아니고동動도아니지만정과동을화합시키기도하고또는대립시키기도하

는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중적인 춤사위는

lsquo어르는사위rsquo로서맺고靜 푸는動 감정을조절해주므로동적동작과정적동

작을생성시키는역할을한다

움직임의긴장을극대화하는맺힘의정靜어르는춤사위로서의중中푸는춤

사위로서의동動을달리생각하자면한국춤의성격은동적인것아니면정적

인것이라는극단에치우치지않고정과동이교차하고동시에동적인움직

임속에정적인상태가내포되고반대로정적인움직임속에동적인상태가

내포되어있음을알수있다그래서정중동은움직임[動]정지됨[靜]의의미보

다는lsquo움직이는 듯 마는 듯rsquolsquo서 있는 듯 마는 듯rsquo혹은lsquo움직일 듯 말 듯rsquo

lsquo서있는듯움직이는듯rsquo등춤기법의행동하는양상을이른다즉멈춤안

에움직임이있고움직임안에멈춤이있어하나의움직임안에정과동이융

합되어있고나아가서는마음속에서lsquo절로rsquo일어나는감정이되는것이다

정중동과동중정이내포된우리춤사위

middot

한국춤이면lsquo정중동rsquo과lsquo동중동rsquo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재呈才는 정재대로 정중동의 멋이 멈

춘듯이움직이며흐르고있는유장미를내재하고있고민속춤은민속춤

01 중요무형문화재제27호승무승무는달고어르고맺고푸는리듬의

섬세한표현과중춤이갖는춤사위의오묘함이조화된매우우수한춤

으로 인간의기쁨과슬픔을높은차원에서극복하고승화시킨이지적

인춤이라할수있다 02 중요무형문화재제68호밀양백중놀이의범

부춤밀양백중놀이는바쁜농사일을끝내고고된일을해오던머슴들

이음력7월15일경용날을선택하여지주들로부터하루휴가를얻어흥

겹게노는놀이를말한다범부춤은두사람이번갈아가면서장고잽이

앞에서재주를보인다

05

02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06

03

04

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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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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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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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19

03

05

04

06

18

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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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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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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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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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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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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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6: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대로즉흥성을띠고정중동과동중동을드러내고있다

특히 영남의 덧배기춤에서 배김사위는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배김

장단이 들려오면 누구나가 약속을 한 듯이 허튼춤으로써의 긴장이

고조되어공중으로뛰어오르듯이춤추며땅을향해배겨주는정적

동작으로맺는다이광경은가히숨이막히는아름다움으로출렁이

며다음동적동작으로가기전어깨춤이나어깻짓으로어루며중적

동작을완성하고있다이후어루기의중적동작과맞물려풀어서[動]

다음춤가락의대목으로진행된다

영남의 춤이라면 성별 차이 없이 덧배기춤과 배김사위가 드러나지

않는춤이없다동래수영야류를비롯하여고성통영진주오광대

진주한량무진주삼천포농악동래학춤부산농악함안농악밀양

백중놀이의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에서 정중동의 배김

사위를 배제한 춤은 없다 특히 밀양백중놀이의 양반춤과 범부춤

병신춤은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돋보이는 춤이다 범부춤은 장고재

비와의대무對舞에서배김사위를하며정중동의멋을한껏발휘하고

병신춤은 제각기 불구의 모습으로 배김사위를 할 때면 관중석에서

는배를잡고웃음을멈추지못한다

근대 민속학자의 대가였던 송석하 선생은 경상도 배김사위의 형태

가 서부경남(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과 동부경남(동래야류와 동래학춤 수영야류)

밀양지역(북춤병신춤등)의다름이독특한아름다움으로드러난다고했

다이는정적동작의형태가지역마다다르고중적동작인정지된

춤사위가 제각각이며 푸는 동작으로서의 동적 동작도 그 지역마다

색다르게나타나기때문이다

이는영남춤뿐만이아니라한국의탈춤전반에서도각과장별로멋

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봉산이나 강령탈춤의 노장과장이나

말뚝이춤에서lsquo정지하듯이 멈춘 듯하다rsquo라는 것은 신명나는 춤으

로이어지는대목에서볼수있다이러한특징은농악의개인장기

춤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채상모놀음을 하는 경우에

정중동middot동중동의 동작은 자반뒤집기나 한발 차고 돌기 등에서 연

이어지는동작소로드러난다

또불교의식무용인나비춤과법고춤바라춤역시정중동으로힘찬

역동성을 한층 표출해 내고 있다 예컨대 나비춤에 있어 사방요신

의 정적 동작은 동적 동작과 연이어지며 중적 동작이 두 동작을 잘

이어주고있다법고춤역시너울너울가사를휘날리며점잖게춤추

다가 북울림으로 넘기기 전에는 역동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정중동의아름다움을드러내는것이다

03 중요무형문화재제7호고성오광대lsquo오광대rsquo란다섯광대또는다섯마당으로이루

어진놀이라는뜻에서비롯된이름이라고도하고오행설(五行說)에서유래된오(五)에

서온것이라고도하는데오행설의견이유력하다전에는정월대보름을중심으로행

해졌으나현재는봄가을에오락적인놀이로공연되고있다 04 중요무형문화재제18

호동래야류말뚝이춤동래야류는정월대보름저녁에벌어졌는데그해농사를점치

거나풍년을기원하는의미로행해졌다고한다 굿거리장단에맞춰추는덧뵈기(탈놀

이)춤이주를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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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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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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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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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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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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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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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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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22

23

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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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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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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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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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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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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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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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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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7: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파격성과일탈 한국춤의아름다움

middot

무대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민속춤으로서 살풀이나 승무 태평무

등에서도 한 장단 안에 움직임의 동작이 변화하기 보다는 두 장단

이나 세 장단을 제자리에서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춘 듯 움직

인다 이렇게 여백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살풀이 수건이나 승무

의장삼이용솟음쳐몰아치는춤사위로진입하는모습은긴장과이

완을통해보는이의감정을최고의경지로이끈다

이처럼한국춤은정적요소만으로또한동적요소만으로도이루어

질수없다lsquo정rsquo혹은lsquo동rsquo으로만이루어진다면예술로서의일탈을

이루는멋스러움이나신명등한국춤의미적특성인알갱이가없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춤이 되었을 것이다 정과 동의 순환과 변형

그리고 통합을 필요로 하고 이를 실현시켜주는 요인이lsquo중中rsquo이다

중은정과동을알맞게조화시켜주고각각의성질이자연스럽게하

나의흐름으로통합되도록하는기능을수행한다한국춤에서내면

적흐름이밖으로드러난정으로서동을함축하면lsquo정중동rsquo을이루

고동으로서정을함축하면lsquo동중동rsquo을이룬다춤동작의구조에서

살펴보면lsquo정rsquo은감정을맺는동작이고lsquo중rsquo은감정을어루는동작

이며lsquo동rsquo은감정을푸는동작이다이런측면에서보면lsquo정중동rsquo은

맺는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마음을 모은 것이고 푼다는 것은 맺힌

응어리를풀어내서흥겨운신명에젖는역동성을드높이는것이다

이와같이한국춤은끝없이움직이면서정지된것처럼보이는자연

의모습을표현하는것으로결국우리의정서인lsquo절로rsquo되는감성과

같이몸과마음이하나됨을추구한다이것은바로한국예술의부

분적독자성이서로어우러져조화를이루며한국춤의미적특성이

되는자연과인간의합일이며한국전통문화의지긋한내면과그

파격성그리고일탈을지닌한국춤의미적아름다움이다

05 중요무형문화재제50호영산재나비춤영산재는영혼이불교를믿고의지함으로써극락왕

생하게하는의식으로나비춤은부처의공덕을찬양하기위한의식중하나이다 06 중요무형

문화재 제11-1호진주삼천포농악자반뒤집기모두가흰색바지와저고리의농악복에삼색띠를

두르고 채상모를쓴채연주하는데개인놀이가비교적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군사놀이인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특이하다빠른가락을모는경우가많아힘

차고가락이다채로워흥겹다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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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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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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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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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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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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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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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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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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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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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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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8: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섞음과공식共食은한국인의식생활을설명하는주요한키워드이다우리선조들은음식을섞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히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혼합해서 먹었다 예를 들어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한국의 국민음식이다 국수에 고기

다진것과묵미나리숙주나물따위를넣고양념하여비벼먹는골동면이나신선로에여러가지

어육과 채소 석이버섯 호두 은행 황밤 실백 따위를 넣고 장국을 부어 끓여 먹는 열구자탕

또한섞는음식의좋은예이다채썬청포묵에녹두싹미나리물쑥등갖은야채와달걀지단

김 등을 버무려 먹는 탕평채도 섞어먹는 음식의 다른 예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이면 밥도

쌀보리콩조기장등다섯가지곡식을섞어서오곡밥을지어먹을정도였다외국에도섞어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비빔밥

글middot예종석한양대학교경영학부교수음식문화평론가 사진middot한국학중앙연구원전주시청두피디아포토박스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❷ 소박함속의야성

08

01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09

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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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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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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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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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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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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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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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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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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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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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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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9: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섞음과공식共食의문화

middot

음식을 덜어서 먹지 않고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공식의 관습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이다 서양 사람

들은 한국 사람들이 찌개 같은 음식을 각자의 수저를 담가가며 같

이 먹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을

함께먹는것은정情을나누는것이며그것이바로lsquo나rsquo보다lsquo우리rsquo

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정서이자 문화다 언론인 이규태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식구 혹은 식솔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한솥

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으며 공식의 문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lsquo정rsquo의 정서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문화이다 공식의 절정은 제사음식

을 나눠먹는 음복이라 할 수 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과 음식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것은 귀신과 사람이 나눠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경지로 살아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

고유대관계를강화하는절차이다이러한lsquo섞음과공식의식문화rsquo

정점에 비빔밥이 있다 밥에다 오방색의 갖가지 나물과 지단 은

행 잣 밤 등을 얹어서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은 섞어서 함

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다 같이 먹으면서 타인과의 경

계를 쉽게 허물 수 있는 비빔밥 역시 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감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한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서 lt시의전서是議全書gt로 처음으로 한글로

lsquo부 밥rsquo한자로는lsquo골동반(汨董飯또는骨董飯)rsquo이라표기하고있다여

기서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골동반

은비빔밥과같은의미라할수있다

우리의골동반 중국의골동반

middot

lt시의전서gt는골동반의조리법을ldquo밥을정히짓고고기는재워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

겨서부숴놓는다밥에모든재료를다섞고깨소금기름을많이넣

어비벼서그릇에담는다위에는잡탕거리처럼계란을부쳐서골패

짝 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01 전주비빔밥전문업체lt고궁gt의비빔밥전주비빔밥은밥에여러가지나물류

와콩나물육회를얹어먹는다 02 우리나라사람들은이렇게동그란상에둘러

모여앉아함께식사를하며정(情)을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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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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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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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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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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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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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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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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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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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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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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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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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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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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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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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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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0: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상에장국은잡탕국으로해서쓴다rdquo라고기록하고있다중국에도골동반이있다그래서일부에서는비빔밥이중국에

서유래했다는주장도한다옛중국문헌인lt자학집요字學集要gt에는골동반짓는법을ldquo어육등여러가지것을미리쌀

속에 넣어서 찐다rdquo고 했고 중국 명나라 때의 lt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gt이란 책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에도ldquo강남(양자강) 사람들은반유반盤遊飯이란음식을잘만든다젓포회구운고기등을밥속에

집어넣는것으로이것은곧밥의골동이다rdquo라는설명이나온다이런기록으로미루어볼때우리와중국의골동반사

이에는lsquo재료를섞어서짓는밥rsquo과lsquo지은밥을여러재료와비벼먹는음식rsquo의차이가있으므로이둘은이름만같지결

코같은음식이라고할수는없다

주장이분분한비빔밥의유래

middot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바쁜 농번

기에 농사일을 하면서 간편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탄생

한것이라는농번기음식설제사음식을큰그릇에넣고

비벼나눠먹은것에서비롯되었다는음복설어느임금

이 전쟁 때문에 몸을 피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없어 밥에 나물 몇 가지를 넣고 비벼 올린 것이

기원이라는 몽진음식설 궁에서 임금이 간식으로 먹던

음식이라 해서 궁중음식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

은 음식을 없애기 위해 비벼먹은 것이 내력이라는 묵은

음식처리설 동학혁명군이 전장에서 그릇이 충분치 않

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비벼먹은 것이 시작이라

는 동학혁명설 등이 그것이다 식품사학자 故 이성우교

수는 이중에서 음복설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

로부터 내려오는 산신제나 동제洞祭 등은 집에서 먼 곳

에서 지내 식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릇 하나에 제사음식을 고루 섞어 비벼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빔밥이 비상시나 전쟁

때의음식단체급식용음식나아가서대중식당용일품

요리로발전하게되었다는것이다이런정황으로볼때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 19세기 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된 일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19세기 말의 요리서에 처음으

로이름을올린것은그즈음에야비로소격식을갖추게

되어양반도먹는의젓한요리의반열에든것이라는짐

작도 해볼 수 있다 서민들이 남은 음식을 비벼먹던 것

을요리라할수는없었을테니말이다

0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순조

(純祖) 때의학자홍석모(洪錫謨)가지

은세시풍속서로한국고대의연중행

사와 풍습을 설명했다 04 비빔밥은

전국어디서나즐겨먹는음식일뿐더

러각지역의특산물이재료로사용되

기때문에지역별로특색있게발전되

었다

10

03

04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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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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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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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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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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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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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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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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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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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지역별로다양한비빔밥의내용

middot

기원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우리의 비빔밥은 지역별로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음식 중 비빔밥만큼 여러 지명을

이름에붙인음식도없을것이다일반에알려진이름만해도흔히3대비빔밥으로꼽는전주비빔밥진주비빔밥해주비빔밥이

있고그외에안동비빔밥(헛제사밥)통영비빔밥함양육회비빔밥개성차례비빔밥평양비빔밥평안도닭비빔밥함평육회비빔밥

거제멍게젓갈비빔밥마산비빔밥등도유명하다한국의3대비빔밥만이라도간략하게살펴보자

전주비빔밥 호암문일평은전주비빔밥을평양냉면 개성탕반과함께조선의 3대음식으로치켜세운바있다

전주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인 콩나물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식은 소머리를 푹 곤 국물에

밥을짓고뜸을들일때콩나물을넣어같이익힌뒤쇠고기 시금치 쑥갓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표고버섯 등 갖은 재료를 넣고 3년 이상 묵힌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콩나물국을 곁들이

는것도조선시대부터내려온전통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질박하고 담백하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며 시금치 속잎 고사

리나물과도라지에다쇠고기를채로썰어깨소금마늘참기름등으로양념한육회가올라가는것

이특징이다 진주비빔밥은놋그릇에흰밥과갖가지고명을담은후고추장을얹는데 그조화로운

모습이아름답다고해서화반花飯이라불린다곁들여먹는국물은선지국을주로쓴다

해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은해주교반이라는별칭으로유명하다 김장김치를잘게썰어솥에돼지기름을두

르고펴놓은위에 쌀을안치고밥을지어양념간장에비벼먹는다 여기에가늘게찢은닭고기와연하고살찐콩나

물을얹어함께비비며장국물이나무국을곁들인다 짠지밥이라고도하는데짠지는김치를뜻한다 해주수양산에서나는고사리와황해

도특산인김을구워서부스러뜨려섞는것이특징이다남북분단으로제대로된해주비빔밥을맛볼수없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

영양학적으로도뛰어난비빔밥

middot

우리는이렇듯지역마다특색이있고맛이다른훌륭한비빔밥문화를갖고있다비빔밥은겉모습도아름답지만영양학적으로

도뛰어난음식이다곡물과고기류의산성과나물류의알칼리성영양소가균형있게조화를이루고있는비

빔밥은섬유소와비타민이풍부하고콜레스테롤이적은건강식이다최근방한했던미국뉴트리라

이트건강연구소(NHI)의소장인샘렌보그박사는ldquo에너지로사용하기위한탄수화물과유기농

야채에서얻을수있는무기질단백질등의섭취가모두가능하기때문에세계의수많은영

양학자들이비빔밥을완전한한끼의영양식으로꼽는다rdquo고했을정도이다이런전통적

인비빔밥의문화가서서히사라지고있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다양하게비벼서함께

나눠먹는비빔밥의문화를복원하고지키는것은우리후손들의조상에대한최소한의책

임이아닐까

11

05 각종나물들우리는비빔밥에맛과향이순하면서본연의맛을잃지않는나물들을주로

비빔밥에넣어먹었다 06 안동비빔밥(헛제사밥) 안동헛제삿밥은제상에올렸던나물과탕

채를간장에비벼먹는음식으로옛선비들의밤참거리로진주헛제삿밥과쌍을이루던허드

레음식이다 선비들이밤늦도록글을읽다보면배는고프고 밤늦게음식을만들게되면

그냄새가이웃에풍겨폐를끼치게된다고생각해서실제로는제사를지내지않고제사를

지냈다며이웃사람들을불러모아함께나눠먹은음식이헛제삿밥의유래이다

06

05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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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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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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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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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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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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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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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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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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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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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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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2: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2000년대이후한국대중문화계에서가장주목할만한현상으로는단연lsquo한류KoreanWaversquo현상을

꼽을수있을것이다한국에서만들어진대중문화가국경을넘어아시아지역에서소비되는현상을

지칭하는lsquo한류rsquo는10여년의세월을거치며한국을대표하는문화아이콘이되었다초기한류현상을

이끌고이를지속가능한흐름으로공고히한주역은단연K-pop이라할수있다

K-pop그다중적정체성의속살

글middot박애경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과 사진middot연합콘텐츠특집 한국문화의세계화❸ 소박함속의야성

12

01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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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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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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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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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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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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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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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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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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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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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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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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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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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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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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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3: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글로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의확장과인기는여러모로의미심장하다우선대중문화에관

한 한 수용하고 이식하고 모방하기만 했던 한국이 타국에lsquo메이드 인

코리아rsquo문화를전파한다는점에서많은주목과관심을받아왔다시야

를외부로넓혀보면K-pop열풍은문화가국경을넘어소비되는글로

벌리즘의 한 단면인 동시에 대중음악계를 확고하게 주도하고 있던

영middot미 헤게모니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와 유투브

등새로운매체의등장과성장은K-pop의주요한물적기반이되었다

외국인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K-pop 스타 오디션은 글로벌 팝으

로부상한K-pop의위상을선명하게보여주는듯보인다문화의전파

와 수용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이나 의미를 거세한 채 K-pop 열풍의

단면만을제시한다거나그이면에담긴과장이나거품을우려하는시

선도분명존재하지만lsquo한국대중음악의전지구적수용rsquo이라는현상은

분명존재하고있다고할수있다

아이돌팝으로서의K-pop

middot

K-pop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음악은lsquo가요rsquo라는 말로 불려졌다 가요는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

유하는동양적전통안에서파생되었는데대개는민간에기원을두는

01 인천문학경기장에서열린국내최대규모K-pop음악축

제2011 인천한류관광콘서트(INCHEON KOREANMUSIC

WAVE2011)에관람온외국인한류팬 02 2011인천한류관

광콘서트는아시아를넘어유럽 중동등세계에불고있는

K-pop열풍의위상을통해음악도시인천을세계에널리알

리기위한축제로자리매김하고있다

브라질공연무대

13

02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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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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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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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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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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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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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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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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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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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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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4: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노래를광범위하게일컫는말이다이것이문화산업과미디어의발달로대중사회를기

반으로한대중가요로자리잡으면서가요에는암암리에lsquo한국내에서생산되고통용

되며 한국적 취향과 관행을 준수하는rsquo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까지 소비되는 현재에도 K-pop이라는 명명보다는 가

요라는말이훨씬일상생활에서빈번하게친숙하게사용되고있다요컨대가요와K-

pop 사이에는 미묘한lsquo차이rsquo와lsquo경계rsquo가 발생한다 이는 K-pop이lsquo한국에서 만들어

진rsquo혹은lsquo한국에서 발신한rsquo대중음악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팝

으로특화된일부의한국대중음악을지칭한다는의미로도해석할수있다

분명한것은가요라는말에서K-pop으로의전환은일국내에서통용되던대중음악이

지구화시대에부응하여장르적증식혹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요컨대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전환(혹은 세대 교체)과 함께 부상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전환혹은교체의실체는무엇일까이질문에답하기위해K-pop의시원을

더듬어볼필요가있다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K-pop이란 명명이 등장한 것은 보아의 일본 진출 이후로

보는것이일반적이다보아의음악이J-pop이라는명명을일찍이사용하고있던일본

에수용되면서일본내에서lsquo보아류rsquo의대중음악은K-pop으로명명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현재K-pop의주종은주지하다시피걸그룹과보이밴드를전면에내세운댄스

음악이다그리고이러한음악은대중음악계에서lsquo아이돌팝rsquo으로분류되고있다아이

돌팝의시작은1990년대초반서태지의부상에서찾는것이일반적이다서태지는등

장과동시에lsquo신세대논쟁rsquo을불러일으키면서대중음악계의판도를바꾸었다서태지

와 함께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변에 불과했던 10대와 20대 팬덤의 우위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랩과댄스를기본질료로하는그룹음악이주류대중음악계를

평정한것도lsquo서태지이후rsquo에뚜렷하게나타난현상이다

K-pop의 시작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K-pop의 현재를 고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기때문이다서태지와아이들의예에서알수있듯이K-pop이란형성기

에서부터동시대트렌드의충실한수용젊은세대의열광적지지와치밀한기획노래

와퍼포먼스의결합이라는일종의lsquo관례rsquo를만들면서대중음악계를장악해왔다댄스

음악이가진글로벌콘텐츠로서의가능성을확인하고해외시장을탐색한것은국내시

장을평정한이후의일이다

이대목에서K-pop이가진잠재성을되짚어보자K-pop은시장을움직이는10대와

20대수용자를겨냥하여스타를발굴하고육성하고관리하는이른바lsquo스타시스템rsquo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K-pop의 힘은 상당 부분 스타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룹이라는 형태는 멤버 각각이 특징적 캐릭터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하나

의동일한대상으로수렴된다는강점을가지고있다또한멤버형태의lsquo떼창rsquo과lsquo군무rsquo

는청중의반응을이끌어내거나청중과의일체감을조성하는데에도탁월한효과를발

휘한다 아이돌 팝으로 자리잡은 K-pop의 인기의 심층에는 이렇듯 사라진 공동체 문

화에대한향수와집단적흥에대한기억이자리하고있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해외

에서부는K-pop열풍은아이돌팝이가진확장성을보여주는것이라고도볼수있다

03 큐브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인비스트포미닛지나

등이참여한브라질상파울루시에서유나이티드큐브

콘서트인브라질공연무대

14

03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16

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18

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1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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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22

23

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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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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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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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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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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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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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5: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혼종의힘

middot

K-pop은따지고보면명명에서부터모순적이다K-pop은한국에서한국적시

스템에의해생산된산물인만큼음악의양식이나수용의범위에상관없이한국

이라는국적을암암리에부여받는다그런데팝이란영middot미의대중음악을광범

위하게아우르는용어인동시에대중음악의보편적문법과동의어이기도하다

K-pop의 지정학적() 위치는 음악에도 반영된다 랩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

니카 등 동 시대 팝 음악의 유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멜로디나인상적인후크를절정부에배치하는것이다lsquo나는가수다rsquo에서증명

된lsquo고음으로 내지르는rsquo창법의 선호도 여전하다 때로는 슈퍼주니어의 lt미인

아gt처럼한국적가락이나추임새를활용하기도한다여기에탁월한댄스를더

하여 음악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K-pop 안에는 고음과 바

이브레이션이 자아내는 정서의 극적 표출과 떼창 군무 랩이 어우러진 퍼포먼

스의 동적 신명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의 음악 안에 많은 요소를 섞고 퍼포먼

스를 추가하다 보니 보컬과 래퍼 댄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K-pop의 한

특징이라할수있다

K-pop이 가진 혼종성은 종종lsquo무국적성rsquo이나lsquo창작력의 부재rsquo라는 말로 비판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음악이lsquo혼종rsquo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면 그리고 혼종이 결과적으로 대중음악의 풍부화에 기여한 역사를 목격했다

면lsquo혼종rsquo자체에 대해 터부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혼종의 결과인

것이다 잡종음악의 운명을 태생적으로 지닌 K-pop의 미래는 이러한 혼종을

lsquo음악적풍부화에사용하느냐아니면진부한패턴의반복에그치느냐rsquo에달

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04 SM엔터테인먼트소속가수들이미국

뉴욕 맨해튼 매디슨스퀘어가든 공연을

앞두고있어현지팬들이한국가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05 두바이 인근 지역의

한류팬70여명이두바이자빌파크에서

K-pop공연을두바이에서보게해달라

는 목적의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06

영국석간lsquo런던이브닝스탠다드rsquo에실린

K-pop열풍에대한기사

15

0605

04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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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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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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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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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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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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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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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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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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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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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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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6: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시간과역사가깃든땅강화도에서꽃핀시인의문장

전등밝히는전깃줄은땅속으로묻고

저전봇대와전깃줄에

나팔꽃메꽃등꽃박꽃helliphellip올렸으면

꽃향기꽃빛나비날갯짓벌소리

집집으로이어지며피어나는

꽃봇대꽃줄을만들었으면

함민복lt꽃봇대gt

활자를통해전해지는강화의숨결

시간과 역사의 땅 강화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고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완연한 겨

울의 중심에 선 강화의 풍경은 그래서 사뭇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강화도 시인

으로이름나있는함민복시인을만나함께작은선착장에가한참을걸으며이야기

를 나눴다 추위에 단단하게 얼어 있는 개펄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풍경 곳곳에

살찐새들이날개를펼쳤다강화의첫인상은날카로웠지만걸음을걷는사이부단

히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자연 속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만남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

하게마음속에각인되기시작했다

ldquo우리나라 역사에서 강화도를 뺀다면 그 격동의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강화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죠 도읍을 강

화도로옮긴적이있었고팔만대장경이조판된곳이며개화기의중심지이기도했어

요제생각에강화도는그중에서도특히활자와인연이깊다고생각해요저는강화

도의오랜역사속에서살아숨쉬는활자에서원천적인문장의활력을느껴요rdquo

함민복시인이강화도에뿌리를내린것도십여년이훌쩍넘었다본래고향은충청

북도이지만 문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강화다처음엔10년을잡고왔다하지만어느새그시간이훌쩍넘어이제는이곳이

그에게제2의고향이되었다유수한시간의역사가있는곳이기에강화는시인으로

부터태동하는문장들에너른바탕이된다

ldquo강화에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담았어요 전통과 현대라는 것

이 막대그래프처럼 따로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러 온 것들이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오면서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

치는것이죠rdquo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엄지민명사와의만남과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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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얀눈쌓인개펄에서있는함민복시인이개펄에는바람이

있고새가있고생명을품고있는개흙이있다이모든것이시

인에게는시적영감을안겨준다 자연에는이렇듯 창조의힘이

서려있다

함민복시인과강화도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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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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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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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22

23

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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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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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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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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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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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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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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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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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7: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01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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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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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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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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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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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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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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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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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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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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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8: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상상력이새롭게전하는이야기

함민복 시인은 작년 11월 새 책 두 권을 냈다 하나는 일간지에 연재했던 시 해설 칼럼

을 모아 만든『절하고 싶다』이고 하나는 시화집『꽃봇대』다 이『꽃봇대』는 시와 카툰

의결합으로이룬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ldquo시의언어와그림의언어는서로달라요시는말하고자하는것에대해서에둘러이야

기하고그림은반대로직접적으로보여주죠그래서더욱재미있고즐거운작업이었어

요내가직접적으로하지못하는말을그림이이야기해줬거든요rdquo

문학또한우리인류에게있어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는문화이다그형태나시각

은 시대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우리네 정서

와사회상을관통한다본래의기조는변함없다그렇다면궁금해지는것이하나있다

문학의소재나주제에있어문화재는어떤상징성을가지고있을까

ldquo언젠가어느문학지에서기획해발행된책을한권보았습니다여러시인들이우리나

라의 국보로 시를 썼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강화도의 보문사로 시를 썼고요 문화

재를시로담아내면서든생각이문화재의역사적근원적전통적인것에무한한상상

력을 더해 더욱 풍요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보문사에 눈썹바위가 있

다이게여기에왜있을까어떤의미를가지고있을까하는생각을하면서상상력을

함민복시인은강화도시인으로유명하다 1996년강화도에둥

지를트고바닷사람이되었다어머니의품과같이이세상의생

명을품고있는개펄의lsquo말랑말랑한힘rsquo을사람들에게선사한다

지금도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을 공부하면서 쉼 없이 시작詩作활

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우울氏의 一日』『모든 경계엔

꽃이핀다』『길들은다일가친척이다』『꽃봇대』『절하고싶다』

등이있다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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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함민복시인의시와그림 03 시인에게바닷바람은그저바닷

바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문장으로 탄생한다

04단단하게언개펄위를나는새 05 06 사적제225호강화초

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구축한요새이다함민복시인은강화의역사와자연문

화재에큰관심이있다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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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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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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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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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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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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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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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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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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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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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19: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저 전설이나 역사로 끝날 법한 이야기가 새

로운생명력을지니게돼요즉우리는이러한문학적상상력을통

해문화재를인간적으로바라보고해석할수있게되는것이죠rdquo

문화재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역

사의바탕위에우리가그릴수있는그림은무한하다우리가고유

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여기에있는것이아닐까

ldquo강화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집약적인 역사가 있어요 특히 이곳은

모든 것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종교 학문 스포츠 등

이강화를거쳐들어왔어요특히구한말때서구문명과만날수있

는 첫 문이었죠 지금까지도 강화의 역사와 자연을 시에 녹여왔지

만앞으로도이땅의이야기들을계속노래할생각이에요rdquo

인천과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이어져 있다 육지와 섬을

잇고있는이다리는현재사회와문화의연결점이기도하다강화에

게있어함민복시인또한다리와같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아닐까

라는생각이든다그의문장에서꽃피는강화는새롭고도아름답다

시인의문장강화를꽃피우다

조선말강화를노래한강화선비가있었다화남고재형이그다그

는 강화를 노래한 시를 모아『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책에담긴256수의시는강화의역사와자연마을사람을그렸다

ldquo강화 나들길이라고 있어요 나들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의『심도

기행』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은 강화의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시로옮긴것인데이제는화남고재형선생이노래한풍경은거의

변했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니까요 저는 이제『심도기

행』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에요 지금 보

이는풍경을담아내려고요rdquo

개펄을 지척에 두고 바닷바람 맞으며 이루어진 오늘의 인터뷰는

함민복의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적 근

원을 오롯하게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것이 더욱 새롭게 발돋움할

수있는바탕이라는것을깨닫게했다시인의문장은강화를깨우

고강화를꽃피운다그리고그노래에는우리전통의얼굴과현대

의얼굴이모두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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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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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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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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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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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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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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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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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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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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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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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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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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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0: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18

글middot사진middot김학범한경대학교조경학과교수명승지로떠나는여행

QR코드를 스캔하면 백령도 두무진을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01 명승제8호옹진백령도두무진백령도는서해의가장북쪽에있으며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다이백령도의북서쪽에

있는포구가두무진인데ldquo뾰족한바위들이많아생긴모양이장군머리와같은형상을이루고있다rdquo하여붙여진이름이다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21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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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02

03

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24

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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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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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천태만상을 이룬 아름다운 경승

지가 많다 백령도 두무진은 이러한 해안 경승지 중에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절승이다 두무진은lsquo서해의 해금강rsquo이라 불린다 바닷가에 우뚝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의모습이마치금강산의만물상과같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두무진의독특한해안경관

옹진군의서북단끝자락에위치하고있는두무진은백령도북서쪽약4의해안선

을따라늘어선높이50~100m의거대한바위와절벽으로구성되어있는해식지형

이다 두무진은 오랜 기간의 지질작용과 파도의 침식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해안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두무진에는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이한바위들이솟아있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

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늘어서장관을연출하고있다옛날배를타고이곳을지

나던사람들은두무진의비경에잠시세상을잊게되고속세의오니를깨끗이씻어

낸것처럼맑고푸른바닷물의아름다운풍경에깊이도취했다고한다두무진기암

괴석의아름다운모습은홍도의기암과태종대의단애를합쳐놓은것과같은절경으

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두무진의 바위들을 보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그의 저서

《백령도지》에서ls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squo이라고극찬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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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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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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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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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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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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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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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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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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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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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2: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두무진의지질과암석

두무진의 지질구조는 마치 시루떡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층의 시루떡

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지층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써 두무진은 변산반도

의 채석강 부산의 태종대 등과 같은 지형처럼 퇴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

다 두무진은 약 10억 년 전 원생대에 해빈海濱환경에서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사암이 지각운동에 의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해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지층이 다시

상승하여 지표면으로 노출된 후에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지속

적인 침식과 풍화를 받아 깎여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 바로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바다에서퇴적작용이진행될때깊은바다에서는아주고운점토질입자

가쌓이게되고바닷가에서는보다굵은모래성분의입자가퇴적된다두

무진의 지층은 하층의 퇴적물이 상층의 퇴적물보다 더 미세한 입자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은 하층은 깊은 바다에서 퇴적이 이루어졌고 상층은 바

닷가의해빈환경에서퇴적이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다퇴적층에는

높이 4~5m 간격으로 암석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

수면의 변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진의규암층은층리가거의수평을이루고있다층리의발달형태로보

아 퇴적 이후에는 심한 변형작용이 없었던 지질구조로서 이러한 퇴적구

조를잘보존하고있는두무진의지층은당시의퇴적환경을잘관찰할수

있는학술적가치가매우큰곳이기도하다

lsquo두무진rsquo의 명칭은lsquo뾰족한 바위rsquo들이 많아 그 생김새가 마치 머리에 난

머리털 같다고 하여lsquo두모진頭毛鎭rsquo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다시lsquo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rsquo고 해서 두무

진이라개칭하였다는전설이전해내려오고있다또한이곳을산림이울

창한 곳이라 하여 두모진頭毛津이라고 하였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의 병참

기지가생긴후로두무진頭武津으로바뀌었다고도한다

푸른바다위로솟은기암괴석

오늘날 두무진의 행정지명은 백령면 연화蓮花리다 연화리를 상징하는 연

꽃은 심청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옹진군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효

녀 심청에 관한 전설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황해도 황주 장

산곶 백령도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장산곶 방향

의백령도앞바다에는심청이빠졌다고하는인당수가있고심청이용궁

에서타고떠내려왔다는곳이바로두무진이위치한연화리다이곳에는

연꽃이 걸려 있었다는 연봉蓮峯바위도 있다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우 황홀하다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황해바다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다석양의노을을받은두무진의기암괴석또한붉은색으로변한다

경인고속도로rarr인항로 좌회전 1kmrarr연안부두쪽 우회전rarr

연안동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청권경상권 경부고속도로rarr신갈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

군자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호남권 서해안고속도로rarr안산JCrarr영동고속도로진입rarr군자

TGrarr서창JCrarr제2경인고속도로진입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수도권

❶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좌회전)rarr(구)백주년기념탑(직진)

❷제2경인고속도로rarr고속도로종점(직진)

제2경인고속도로종점기준 (구)백주년기념탑(직진)rarr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rarr인천연안여객터미널rarr백령도행 여객선

백령도두무진여행정보

백령도 가는길

홈폐이지 wwwbaengnyeongdocom

백령면사무소 TEL 032-836-1771

백령도 여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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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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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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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25

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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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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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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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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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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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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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3: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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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3 옹진백령도두무진의기암괴석두무진은수억년동안파도에의해서이루어진병

풍같이깎아지른듯한해안절벽과가지각색의기암괴석이솟아있다 30〜40m높이암벽

에는해국(海菊)이분포하고 해안에는염색식물인도깨비고비middot갯방풍middot땅채송화middot갯질

경이가자라고있다또큰바위틈에서범부채(붓꽃과의다년초)가자라고있는것이특이

하다코끼리바위장군바위신선대선대암형제바위등온갖모양의바위가바다를향해

늘어서있어홍도의기암과부산태종대를합쳐놓은듯하다조선광해군때이대기는『백

령지』에서선대바위를보고ldquo늙은신의마지막작품rdquo이라고극찬했다한다두무진은서해

의해금강이라불리울정도로아름다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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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적색의 돌기둥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두무진의 낙조는

정말장관이라하지않을수없다

두무진이 위치한 백령도는 하늘에서 보면 한 마리의 새가 북

쪽 장산곶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시대에 섬 모

양이 마치 고니와 같다고 해서 혹은 고니가 떼를 지어 바다를

메웠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고 한다 백령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특히 서해안

방어에 큰 역할을 한 요충지다 고려시대 초기인 1018년(현종

9년)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 섬에는ldquo백령수군진白翎水軍鎭rdquo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던 곳으로써 현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진촌鎭村인데 바로 수군진에서 유

래한것이다

백령도는 북위 37deg52prime 동경 124deg53prime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

로서우리나라에서14번째로큰섬이며휴전선의바로아래남

한의가장끝에위치하고있는서해의서북단종착점이다백령

도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나 떨어져 있는데 반해 북

한의 장산곶으로부터는 17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이

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한 군사상의 여건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

이어려워오히려자연환경이잘보존되어온섬이기도하다

백령도에는국가지정명승인두무진외에도다수의자연유산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사

곶 사빈(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천연비행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곳으로써 한국

전쟁 때에는 천연비행장으로 활용된 곳이다 남포리에 위치한

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은 5~20의 잔자갈이 길이 800m 폭

30m의 해안에 보석으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고 진촌리 감람

암포획 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는 지구 내부의 온도나 압

력 등 심부 지구 환경을 밝힐 수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남포리

습곡구조(천연기념물 제507호)는 한반도의 지각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백령도에는 이

와같은특이한가치를지니고있는자연유산이잘보존되고있

으며또한소수만남아멸종위기에처해있는점박이물범(천연기

념물제331호)이서식하고있는국내유일의섬이기도하다

1992년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해 해가 가

면서 외지인들의 입도가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절경의 두무진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보물과도같은섬백령도가더이상훼손되지않도록국가는

물론온국민의관심과노력이필요한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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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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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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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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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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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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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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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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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4: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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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연수탄전문화연구소장『탄광촌풍속이야기』(북코리아2010)저자 사진middot대한석탄공사태백석탄박물관근대의풍경백년의기억

그옛날우리에게가장소중한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연탄파동이란말이생길만큼연탄은우리에게없어서는안될존재였다겨울한파에다수송문제로생겨난1966~1967

년중동전쟁으로석유파동이몰고온1973~1974년이상한파로인한1977년이란의국내혼란과이슬람혁명으로제2차석유파

동이몰고온1978~1980년은연탄파동이일어난때이다

1966년10월연탄파동때는서울시내동장들이시청에몰려가항의했으며ldquo연탄이귀해돈을주고도살수없으며연탄은부르

는게값rdquo이라는기사가언론마다대서특필되었다급기야대통령이직접긴급회의를주관하면서ldquo장관직을내놓을각오로조속한

시일안에필요량의연탄공급계획을실천하라rdquo는지시를내렸다석탄수송을원활하게하려고산악을뚫고태백선middot영동선등의

철도가생겨났으며통행금지가있던시절에연탄운반종사자들에게는야간통행증이배포되었다방송사에서는공모전1등상품

으로연탄을내놓아폭발적반응을얻기도했다

연탄공장에서연탄이오는날은만사를제쳐놓고배달차량을기다렸다lsquo연탄오는날rsquo은생일보다더강조되었다1970년대의연

탄배달차량은딸딸이로불리던삼륜화물차가주류를이뤘다마을공터에연탄을부리면남자는지게에10〜20장을져날랐고

여자는고무대야에대여섯장씩이고날랐다어린아이들은한두장씩손에안고날랐으며조금큰아이들은궤짝에연탄을싣고

는밀고당기면서날랐다남편이출근하고없을때가잦았으므로연탄나르기는대체로아내나아이들의몫이었다 1970년대후

반들어서는두장세장을한꺼번에들어올리는연탄집게가철물점에등장했다

월동준비제1호연탄

연탄불처럼타오르던한국의산업시대

연탄은 근대 이래로 1960~1980년대의 한국을 풍미하였던 산업

문화의 산물이다 1988년 전국 340개 탄광에서 생산한 무연탄

100가 연탄제조에 사용될 만큼 연탄은 국민연료로 사랑받았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부잣집에서나 땔 수 있는 연탄이 금세 대중화

되면서1980년대우리나라연탄사용가구는전체의78나되었다

대표적 탄광촌인 태백시는 지금도 40정도의 가구가 연탄 난방을

사용하고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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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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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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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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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5: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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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에는연탄이가장소중한연료였으니조심조심다뤘다연탄창고에연탄을쌓다

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한장한장씩찍어낸것이다

일상을지핀연탄의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다니는모습은겨울철의일상적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

부들은지하천미터에서채탄하고있다석탄은산업발전의에너지원으로한강의기적을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ldquo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rdquo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

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lsquo아궁이rsquo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

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01 25공탄사진현재22공탄이대중적으로사

용되며 일부남부지역에서25공탄을쓴다 화

순지역무연탄을쓰던남부지역에서는화력을

높이기 위해 연탄구멍을 더 많이 뚫었다 02

태백시 철암동의 철암역두 선탄시설 현재도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사용되며

2002년5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

재제21호로지정되었다 03 연탄공장에서제

조된연탄을트럭에싣는장면 04 탄광막장

을향해출근하는 1960년대장성광업소광부

들의모습 1970년대후반광업소내에중앙목

욕탕이설립되기전까지광부들은작업복차림

으로출퇴근했다(『대한석탄공사50년회보』)

03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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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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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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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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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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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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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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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6: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26

있게한것은오직연탄덕분이다

연탄이귀하게쓰이던1950〜1970년대탄광촌의철길에는낡은화차에서떨어지는탄을주우려고몰려든사람들로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

는데lsquo배꼽에낀탄가루를모아연탄을찍었더니한겨울을따뜻하게보냈다rsquo라는유행어가나온것도그무렵이다

연탄불을갈때는기술이필요하다밥하는시간에맞춰연탄불의화력을조절하는것이라든가새벽에일어나는시간에맞춰연

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가는시간을놓치지않으려고화덕을들여다보느라밤잠을설치기일쑤였다

연탄과관련한금기행위도있다lsquo남편이출근하기전에는연탄불을빌려주지않는다rsquo거나lsquo새댁(주부)이연탄불을꺼트리면집안

이 망한다rsquo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했다불을꺼트려이웃집에밑불을얻으러갈때는새연탄을한장들고가는것이예의였다불이붙은연탄을가져

오면서새연탄을그자리에얹어놓았다

불을갈다보면밑에있던연탄까지붙어서딸려나오곤한다달라붙은연탄두장을바닥에눕혀놓고가운데를연탄집게로쳐서

떼어내는데불붙은연탄까지깨트려낭패를겪곤한다꺼낸연탄을넣을때는불이붙은아래의연탄과위의새연탄구멍을서

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

에는고개를안돌리고도연탄구멍을잘맞출수있도록한연탄집게가발명됐다는소식이신문광고란에등장했다집게중간쯤

에투명하게처리한차단막을단연탄집게는lsquo유독가스및먼지흡입차단방지기rsquo란거창한이름을걸고판매되었다

05 태백시장성동의장성이중교(二重橋금천이중교) 1936년남한최대탄광인

장성광업소개광당시건설되었다다리위쪽으로는탄차가아래쪽으로는사람과

자동차가다녔다 2004년8월문화재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111호로지정되

었다 06 철암역두선탄시설의겨울풍경 07 (구)사북동원탄좌를활용한사북석

탄유물보존관 이곳에서해마다 7~8월경이면사북석탄문화제가열린다 동원탄

좌는1980년4월사북항쟁발생지로도유명하다 08 석탄가루를제조틀속에넣

고나무망치로쳐서만드는수타식연탄제조장면 1970년대만해도마을을돌아

다니며제조비를받고연탄을찍는기술자들이많았다(태백석탄박물관)

05

06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27

07

08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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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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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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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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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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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7: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

다추운날집에왔을때온기도필요하거니와더중요한것은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1970년대에는해마다수백명의사람이연탄가스중독으로죽어갔

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

스에서는lsquo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rsquo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

다특히흐린날이나비오는날연탄가스중독사고가자주발생했다

연탄은연탄가스외에도연탄재처리가골칫거리였다생활쓰레기가운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농가가늘었다제한몸을불살라방구들을데우고난마

지막재마저활용하는연탄은숭고하리만큼활용도가높았다

매운추위를이기는힘연탄불

1989년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석탄이사양화길을걸으면서석탄은

남아돌았다재고탄으로북한주민을돕자는의견이국회에서제기되었

고2003년lsquo금강산연탄보내기rsquo사업을필두로해마다연탄을지원하

고있다연탄은남북화해의불꽃으로도기능하고있다

이제연탄은문화축제현장에등장해한국근대생활문화의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

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

탄역도대회연탄높이쌓기연탄들고릴레이경주조개탄만들기미

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나르기연탄이고빨리달리기연탄오래들기왕연탄빨리꾸미

기수타식연탄찍기등이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lsquo아기공룡 둘리rsquo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lsquo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rsquo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개조한연탄화덕위에음식을익혀먹는일은연탄을때던시

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

는것은연탄에대한향수를못잊어서일것이다연탄은수능시험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lsquo확 붙어라rsquo라는 의미

를담은연탄모양의엿과자액세서리가출시됐다또정답을잘집으

라는의미에서연탄집게모양의제품도등장했다

한장의연탄에는수백미터의지하막장에서흘린광부의검은땀이녹

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나누던정담들은가난하고매서운겨울을이기는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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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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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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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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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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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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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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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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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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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8: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28

글middot사진middot정제규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사진middot여주향토사료관문화재돋보기

옛사람들은많은이야기를남겨놓았다

돌에도금속에도그리고종이위에도

그들이사는이야기를담았다

소지는옛문서가운데

인간의삶과갈등을보여주는

이야기를담고있는대표적인유물이다

위로는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노비에이르기까지

다양한사람들이주인공이며

내용은살아가며겪어야하는

크고작은일이었다

이문서들은누가작성하였는가에따라

발괄〔白活〕이라고도불렸고등장等狀단자單子

원정原情상서上書의송議送등이라고도불렸다

간절한하소연을담은옛문서

소지所志

01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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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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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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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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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29: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29

개인의억울한하소연을담은발괄〔白活〕

소지류에 해당하는 옛 문서 가운데lsquo발괄rsquo이 있다 발괄이

란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관아에 하소연한다는 뜻의

이두吏讀 1) 표현이다 현재도lsquo비대발괄rsquo이라 하여lsquo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간절히 청하여 빌다rsquo라는 의미로 사

용하고 있고lsquo개 소 발괄 누가 알아주나犬牛白活 有誰存察rsquo라고

하여lsquo조리없이지껄이는말rsquo이라는뜻으로도쓰이니억울

한 사정을 알리는 것이 간절하고 급하여 조리 없이 떠드는

말과같음을나타낸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유서필지儒胥必知』2) 에 발괄은 일반 백

성이 좋은 산소를 찾기 위해 벌이는 다툼(산송山訟) 빚을 갚

지못하여벌어지는다툼(채송債訟)사람을꾀어끌어가벌어

지는 다툼(인물초인人物招引) 사람을 때려 생긴 다툼(구타毆打)

국가에대한의무였던군역에관련된다툼(탈군역 ) 등과

같은일로관에청원을올릴경우에사용되었다고하였다

어느 정축년의 해 정월에 조생원댁의 노비 복쇠는 여주목

사에게 청원하였다 흉년이 크게 들어 모두가 재난을 당하

였을 때에 우리 상전上典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세금을 면하고 혜택을 입었으나 우리 상전이 제외

되었는데 잘 살펴 혜택주기를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이에

대해여주목사는흘림체의글씨로lsquo분배하여나누어주라俵給

向事rsquo라고처분하고관인을찍었다주인인조생원을대신하

여 관에 호소한 사정을 사또〔使道〕께서 알아준 것이다 이같

이 소지의 한 부분에 문서를 받은 수령이 직접 살펴본 뒤에

내리는 판결문을 뎨김〔題音〕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거주

했던 지역의 수령에게 받은 처분이 뎨김이라면 보다 높은

관직인 관찰사에게 받은 처분은 제사라고 불렸다 이렇게

처분이 적힌 소지는 다시 청원자에게 돌려주고 증거 자료

로서보관하도록한것이다

01 나주유학임지원등문중사람들이김가라는사람이몰래매장했

던일에대해고을사또에게호소하는단자 02 조생원댁의노비복쇠

가여주목사에게호소하는발괄

1) 이두란신라때부터한자(漢字)의음과뜻을빌려우리말을적던표기법이다한문

을국어어순에따라배열하고이에토를붙인것으로고려와조선시대의문서들

에그흔적이많이나타나고있다

2)관청과민간에서널리사용되었던이서체문장(吏胥體文章)곧이두(吏讀)로쓰여진

공문서식(公文書式)을정리한책

02

30

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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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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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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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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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0: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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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士大夫가직접올린소지단자單子와상서上書

사대부가친히관사官司에올리는청원서는단자또는상서라고불렸다 문서를쓰

는 방식은 발괄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내용은 산송 또는 충忠과 효열孝烈등의 뛰

어난행실을기리기위하여정려旌閭를베풀어달라는것이대부분이었다

현대에는 조상의 묘를 만들고 모시는 일과 군신君臣middot부자父子middot부부夫婦의 삼강三綱

에 근본을 둔 행실을 기리는 행위가 많이 잊혀져 있으나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했

던조선사회에서는이러한것들이가장기본적이고중요한문제로인식되었다그

래서 노비가 대신하여 호소하던 소지와는 다르게 사대부들이 직접 나서서 청원하

였던것이다

한편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써 올리기

도하였는데이를등장等狀이라고하였다나아가자신이사는고을의수령에게소

장을 올렸으나 해결되지 못한 경우에 각도의관찰사가정무를보던감영監營에다

시청원서를올렸으니이를의송議送이라하였다

어느 임술년의 정월에 전 현령을 지냈던 홍순원洪舜元 등 여러 사대부들이 경기도

관찰사에게글을올렸다당시남양부서면에자리한선산에이규장李奎章이라는이

가 멋대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남양부사에게 제출되었던 상서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에 남양홍씨 문중의

28명이 참여하여 이 의송을 작성한 것이다 관찰사는 제사를 통하여 다른 집안의

분산墳山 가까이에 멋대로 투장偸葬 3)하는 것이 놀랍다고 하며 범인을 잡아다 공의

에따라처벌하고남양부사가이를해결하지않았다고하니관官을옮겨서사건을

처리하라고 판결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엄정하고자 했던 법집행의 일면을 엿볼

수있는대목이다

손가락과손바닥으로자신을증명하다

소지에등장하는노비들은모두가주인을대

신하고있다이름도다양했으니돌쇠복돌

복남 귀복 만복 임술 등 한 번쯤은 들어본

호칭이다

배비안댁의 묘를 관리하는 노비 복동이 주

인을 대신하여 청원하였다 상전의 묘가 읍

내 추동에 있는데 지동면에 거주하는 윤생

원이라는 이가 자신의 부친 묘를 상전의 선

산 가까이 함부로 조성하였으니 이를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이 소지에는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종이 위에 써내려간 유려한

필체가 아니라 소지라는 제목 밑에 그려진

우물정자 모양의 그림〔井〕이다 그 안에는 좌

촌左寸이라 적혀 있다 이는 글을 쓰지 못하

는 복동이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왼손

가락을 종이 위에 대고 그 크기를 그린 것이

다 이렇듯 옛 문서에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

해 손 그림을 그려낸 것이 많으니 손가락을

그린것을수촌手寸이라하였고손바닥을그

린것을수장手掌이라하였다

0303 문서에찍혀있는암행어사의마패도장03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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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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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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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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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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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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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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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31

04조선시대의마패관원이공적인일로지방에출장을

가는경우역마(驛馬)를이용할수있도록상서원(尙瑞院)

에서발급해주는패 05 신분을증명했던손가락그림

수촌(手寸)과손바닥그림수장(手掌) 06 암행어사의직

함과수결

04

05 06

암행어사의마패인馬牌印

소지류의옛문서에서는또하나의특별한사실을찾을수있다

바로조선시대에왕의특명으로지방군현에비밀리에파견되었

던암행어사暗行御史의판결이보인다는사실이다암행어사는수

령의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를 판단하고〔得失을 따지다〕 백성

의고통이나어려움을살피는데〔疾苦를살피다〕목적을두어자연스

럽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소지류의 문서에 많

이나타나는것이다

암행어사는 관가에 행차하여 공문서를 검열하고 창고를 조사

하였다만일불법적인사실이발견되면수령의관인과병부兵符

를 압수하고 창고에lsquo봉고封庫rsquo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

해 창고 문을 봉하는 것이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

하고억울한사연을담은소지를접수하고판결처분하여억울

함을풀어주기도하였다

이때 어사가 접수하고 처분한 문서에 마패 도장이 찍히는 것이

다곧암행어사라는직함과그수결手決4)이들어있는문서는많

은 수난을 거쳐 그 억울함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인 것

이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

고있다그가운데소지류는특히갈등과바람願의현장을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

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중요하다그러한태도가인간사다툼의시작과끝을전

하는소지류고문서를대하는옳은태도일것이다

3) 남의산이나묏자리에몰래자기집안의묘를쓰는일

4)관직에있는사람이나양반들이사용하였던자신만의표시로직함아래에자필로썼다현대의사

인(sign)과비슷하다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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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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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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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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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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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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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2: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피사는전세계여행자들이

오로지탑하나를보기위해서찾아가는도시다

원래대성당의부속종탑으로건축되었으나

현재의명성을놓고보면거꾸로종탑이

대성당을거느리고있다고해도과언은아니다

하느님에보다가까워지려는종교적열망때문에

대부분의유명한종탑은높이로유명하지만

피사의사탑은높이가아니라다른탑에서는

결코느낄수없는위태로운기울어짐으로인해명성을얻었다

탑을세운땅의지반침하로인해우리는세상어디서도볼수없는

불가사의한사탑을만나게되는것이다

01 토스카나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사의 사탑 02 화려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밀라노의 두오모 03 토스카나 전원 풍경 사이

프러스나무들은 토스카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04 지반 침식으로 인해 기울

어진피사의사탑을만나는것은여행의경이로움이다 05 피사대성당입구

하늘을향한뜨거운염원이서린곳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글middot고형욱여행칼럼니스트 사진middot이미지투데이세계유산의발자취

32

01 02 03

이탈리아피사의사탑과두오모광장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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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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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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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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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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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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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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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3: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33

이탈리아

04 05

이탈리아피사의사탑을찾는사람들

피사가 속해 있는 토스카나는 곡창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대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

시들이 이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중소도시들이 토스카나 전역을 고루 발전시켰다

중앙에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가 있고 남쪽에는 중세의 고도 시에나가 있다 동남쪽으로는 영화 lt인생은

아름다워gt를찍은아레초가있고북서쪽에는미켈란젤로가조각을만들기위해대리석을채취하던카라라와오페라

lt나비부인gt의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 루카가 있다 피사는 피렌체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따라 가다

가 티레니아 해협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가량 걸리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비

행기로도접근할수있는도시이다

피사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에트루리아 문명이 존재했다 중세에는 막강한 해군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베네치

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3대 해군이었다 그러나 점차 강성해지던 피렌체에

흡수되면서 피사는 역사의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던 피사 항구는 아르노 강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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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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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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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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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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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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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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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4: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물길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해양 도시로서의 면모

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현재의 피사는 무척이나 왜

소해보인다

피사는인구가10만명이채되지않는도시다중세의성곽이도시곳곳에

남아 있고 기차역에서 길을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탈리아 통일

의 영웅 가리발디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더많아보인다그많은관광객들이피사를찾는이유는단하

나사탑때문이다

이탈리아를대표하는기적의공간

이탈리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들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

당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등이

각각의 도시를 상징한다 두오모는 중세의 대성당을 뜻하는 말이다 피

사도막강한해군과상업력을바탕으로도시의권세를알리기위해대성

당을 지었다 1064년부터 수백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와더불어대성당을둘러싸고세례당과종탑이들어서기시작했다종

탑은 원래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나 건축사상 유래가

없는기울어짐때문에대성당보다도더유명해지게된다

남쪽의토질이부드러워서전세계에서가장유명한지반침하가이루어

지기시작했다공사도중에기울어진것을발견했지만기울기를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탑이 완성되기까지는 세 번의 공사기간에 걸쳐 177년

이 소요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부터 기울어진 상태로 800년이라는 시

간을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다 지반 침하라는 원인이 밝혀지기는 했지

만 사람들은 이를 기적처럼 받아들인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탑의 붕괴

를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건물의 안전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다 사탑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건축

학적시도들이이루어졌다

이런 특이한 역사를 거치면서 피사의 사탑은 콜로세

움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볼거

리가 되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로지 사탑 하

나를 보기 위해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외진 소도시

까지찾아오는것이다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도 불린

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자신

의 소설에서lsquo기적의 광장rsquo이라고 쓰면서 많은 이들

이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

현처럼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구

성된 대성당 광장에 가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적

처럼 느껴질 것이다 웅장한 두오모와 세례당 기울

어진 사탑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섦과 경이로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계획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떻게 800년 동안 기울어진 상태로 하나

의건축물이존재할수있단말인가

피사의 도시 구조는 로마나 밀라노 피렌체 등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도시는 대성당이 도시의 중심에 자

리 잡고 있다 그러나 피사의 대성당 광장은 드물게

06 07

이탈리아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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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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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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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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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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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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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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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5: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 방벽으로 보호받

는 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도

시들 중에서 이처럼 기차역과 광장이 떨어져 있거나 광

장 자체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두오모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피사

중심가 전체를 지나치게 된다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가

슴설레는산책길이되는것이다

사탑까지 가는 거리가 꽤 먼 탓에 걷다가 길을 물어보려

치면 모든 피사 사람들은 사탑 쪽을 가리켜준다 피사에

온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곳은 100 사탑일 것이 빤하리

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을 찾아가는 여

행자들은 굳이 피사의 사탑이라는 표현까지 쓸 필요도 없

다 물어보려는 제스처만 취해도 벌써 모든 사람들이 도

시의북쪽을손가락으로가리키기때문이다

피렌체에서 피사는 기차나 버스로 갈 수 있다 교통편은

넉넉한 편이다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는 산들바람이 분다 토스카나의 경

치를 이루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올리브나무 포도나

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미항 제노

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

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옥빛 티레니아 해협에 빠져들

것만같다

역에서 내려 아르노 강을 건너면 도시로 진입한다 도시

자체는 고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도심을 따라 걷다 보

면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도시

의 규모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재래시장에

서는 물건 값을 깎기 위한 흥정이 진행 중이다 떠들썩한

이탈리아다운풍경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도시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 왼

쪽으로 꺾어지면 주로 흑인인 행상들이 물건들을 보여준

다 짝퉁 고급시계에 사진과 엽서들 각종 기념품들이 그

들이 주로 파는 상품들이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멀리

사탑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보면 왼쪽을 향해 위태위태

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탑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

연히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잠시 멈춰 서서 놀라게 만든

다 사진으로 가이드북으로 수 없이 봐온 풍경이지만 막

상 사탑을 실제로 접했을 때 단눈치오가 표현한 대로 기

적이라는게존재하는구나하는생각이든다

중세의시간이머무르는광장의풍경

언제나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탑 입장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한여름의 햇살은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대기를 관통해서 사람들에게 쏟아진다 눈이

부시다 시원한 젤라토의 달콤함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탑의 안전

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준수된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다 전회 입장객이 다 내려온 다음에야 다

음 순서 입장객들이 올라간다 사탑의 계단은 모두 207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지 계단은 반들거리고 중앙은 움푹 파여 있

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다는 전설(실제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

칙실험은이곳에서행해지지않았다) 때문에오르는발걸음은더욱설렌다

사탑의 높이는 5586미터다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탑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그렇게 높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피사 시내 전체가 발아

래 놓인다 거대한 대성당 아름다운 세례당 마치 중세로 돌아온 듯

하다거대한숲과들판들이초록으로도시를감싼다여행자들은기

울어진탑위에서잠시세상의경이로움과아름다움을느끼게된다그

것이야말로여행이주는자그마한기적의순간일것이다

06 피사 대성당 이 사진처럼 뒤에 보이는 피사의 사탑은 부속 종탑

이었지만 성당보다 종탑이 더 유명해지고 말았다 07 사탑 위에서

내려다 본 대성당과 피사 시내 전경 08 관광객들은 두 팔을 뻗고

사탑이쓰러지지않도록막는모습으로기념사진을찍곤한다

35

08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36

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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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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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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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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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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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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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6: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글middot이상문KBS진품명품감정위원명지대학교사회교육원교수 사진middotlt재미있는골동이야기gt2007도서출판선생활속문화재감정

01 골동을살피고있는사람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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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품 진부감정이란

보통어려운것이아니다

자칫 잘못 감정하면 국가

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손실될수있고개인적으

로는 재산에 막대한 손해

를끼칠수도있으며남의

생명까지도 위협 당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가짜

라고 판정하는 것은 금물

이며lsquo가품이란 무엇인

가rsquo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동원하여

진품을찾아내다

01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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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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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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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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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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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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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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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7: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문화재감정오감을동원하라

40여년동안미술품감정결과를지켜보

다보니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숫하게 보아왔다 정말 귀중한

문화재가 가짜로 감정된 사실도 숫했고

형편없는 가짜가 진품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박물관에서는

가격감정으로 인해 비싸졌다는 문제로

시비가 일어 법정논쟁까지 가는 것을 보

았다 또 진품이라고 해서 국보로 지정

되었다가 나중에 수사기관의 조사로

진실이 밝혀져 언론에 보도되었던 사건

도있다

가품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감정이 왜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연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계가 몇 종류 나와 있다 대표

적인 것으로 탄소측정기와 연대를 구분

하는 방사선측정기가 있다 탄소측정기

는 탄소 14(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5740년

만큼 반씩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여 해당

고미술품이 몇 년이 되었는가를 아는 것

이다 5740년만큼 반씩 줄어 든다고 하

여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한다 하지만

화공약품과 X-레이 투시기를 사용하면

현대작품의 탄소 14를 인공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몇 백 년의 유물로 둔갑

시킬 수 있어 이러한 기계는 가짜를 만

드는사람들에게무용지물이될수있다

그렇다면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

간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정하는 방법이

제일 정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눈으

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

고 혀로 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방

법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 연

구를하면감정을정확하게할수있다

정확한판단이유물의가치를발현해낸다

감정을 할 때에는 냉정해야 한다 그 유

물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절대 해

서는 안 된다 국보로 지정했던 별황자

총통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는 이유

로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국보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 유

물의 보관자나 소유자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할 때에는 귀를 꼭 막아

야 한다lsquo누가 얼마를 보는데 안 팔았

다rsquolsquo몇 년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달라

는 것을 안 주었다rsquolsquo누가 국보급이라

고 하더라rsquo라는 이야기를 믿으면 유물

의 진위여부를 가리거나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에큰걸림돌이된다

감정하는 법은 도자기 그림 민속품 금

속 그 무엇이든 기본은 동일하다 가짜

는 옛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때를 묻히거

나 취색을 하거나 광택을 죽이거나 흙

을 묻힌다 그렇기에 지저분하게 때가

많이 묻은 흔적이 보이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진

품 도자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때나 흙

이묻어있지않다

진품과 가품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

쩌면 진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가품

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유산

들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고향집 다락에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처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발굴

하고 무수히 많은 가품 속에서 진품을

가려내고그가치를찾는것그것은우리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책임이

아닐까

02 일본책표지에실린조선백자다 일본인들은가마

에서요변으로생긴것도인간이만들수없는신의조

화로하나의예술로평가하지만우리나라의관점으로

보았을땐예술품으로인정하지않는다

04 가짜분청사기 고기그림의아가미옆지느러미의

꾸불꾸불 내려온 선이 속도가 없고 정교하지 못하여

지저분한느낌이든다

05 오원장승업은본시글씨를잘쓰지못해심전안중

식화가나몽인정학교가대신써준화제가많으나자

기호나이름만은주로본인이직접쓰는것이원칙이

었다그러나이글씨는누구의것인지알수없으며낙

관또한오원이사용했던것이아니라 알려지지않은

것이며인주나전각도의심이가므로가짜로분류한다

03 가짜불상불두의크기와좌대크기가조화를이루

지않고몸전체에비해머리가너무크다그외에도

이것이가짜라는것을증명하는이유가아주많다

37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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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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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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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8: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글middot백수지 사진middot엄지민예인의맥脈을잇다

01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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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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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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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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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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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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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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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39: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농악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풍물middot두레middot풍장middot굿이라고도한다우리나라6대농악중하나인임실필봉농악任實

筆峰農樂은호남좌도농악에속하는것으로오랜시간동안필봉마을에서아주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실필봉농악의 특징은 꽹과리 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가락이

힘차고단체의화합과단결을중시한다는것이다임실필봉농악의양진환전수교육

조교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형님인 양진성 보유자와 함께 임실

필봉농악이마을문화와함께탄탄히성장할수있는발판을만들고있다

푸진굿푸진삶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임실필봉농악을lsquo풍물굿rsquo이라 일컫는다lsquo농악rsquo은 악樂만 강조되

어있지만lsquo풍물rsquo은그안에음악과노래춤놀이연극적요소까지모두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전통사회의대표적마을문화인풍물굿사람과사람이공동체를이루어가

며그안에서행했던어울림의가락은여전히우리네삶에깊게자리하고있다

ldquo필봉마을은현재까지300년이넘게이어져오고있어요 1988년당시저희아버님이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굿판이 성행했죠 임실필봉농악

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임실필봉농악이 마을굿으로

서의정통성을인정받아지금에이르게되었습니다rdquo

양진환전수교육조교의삶에는풍물굿의푸진가락이선연히녹아있다풍물굿과의인연

은할아버지때까지거슬러올라간다목수이자상쇠(두레패나농악대따위에서꽹과리를치면서전체를

지휘하는사람)였던할아버지의영향을받아그것이대대로전승된것이다

ldquo어렸을때부터가락을배웠어요사실이렇게대대로전해져내려오다보면가락이내몸

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하죠 어린

제자가명인이되기까지는피가중요한것이아니고그집안에서어떻게커왔느냐에따라

다르다고요 풍물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님의 가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푸진가락으로우리네삶을노래하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양진환전수교육조교

39

01 2월 4일정월대보름굿을앞두

고 단원들에게 전수교육을 하며

장구를 치고 있는 양진환 전수교

육조교 그와 단원들이 만들어낸

가락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을지니고있다 02 북북은꾸밈

새가 간단해 그 역사가 오래되고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

다곳과쓰임에따라서여러가지

종류가전해져내려오는데풍물굿

의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03 징놋쇠로전이없는대야같이

만들어 울의 한쪽에 두개의 구멍

을내어끈을꿰고채를쳐서소리

를낸다

02

03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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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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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0: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잘몰랐지만하나하나배워나가며내몸에오롯하게녹아

있다는것을알게되었어요어린시절계속해서들어왔던

아버님의소리를제가재현해보고자많은노력을했지요rdquo

임실필봉농악의 신조는lsquo푸진 굿 푸진 삶rsquo이다 뭐든지

푸지게살고푸지게일하고굿도푸지게치고삶도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양순용 보유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지향했던 농경사회의 본연적 성정에서

나온것이아닐까

굿판의미소

임실필봉농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

재 위치까지 이르게 한 故 양순용 보유자의 삶은 지독했

다그당시의마을문화는전통이라는개념이지금처럼자

리 잡혀 있지 않았고 문화를 지킨다는 것 또한 그러했는

데 그는 굉장한 고집과 열정으로 오늘날 임실필봉농악이

마을문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다졌다 양

진환 전수교육조교도 이제 풍물굿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이넘었다

ldquo스무 살 때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굿판에서

봤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아버지가 굿을 치고 있는

모습에서 굿판의 미소를 봤죠 그렇게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일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죠lsquo나도 한 번 저 미소가

무엇인지알아봐야겠다미소를지어봐야겠다rsquo고요rdquo

임실필봉농악 행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정월대보름굿인

데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소요된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푸진 가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겨

울추위에얼어붙은논바닥에서그판이벌어지기도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ldquo1박 2일 굿을 치다보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해서 움직이다보니 탈진상태가 와요

쉬는시간이면몸이죽은듯늘어지죠하지만다시꽹과리

소리가들려오면몸이자동적으로흥을타요그정도까지

가면 몸이 붕붕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죠 굉장히 좋

아요rdquo

굿판은 누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수있다누구나친구가될수있다임실필봉농악의총

단원수는 75명이고 정월대보름굿의 경우 단원 모두가 참

여한다 일반적인 굿판은 40~50명이 정원이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하나의가락을타고상쇠의지휘아래어우

러진다

ldquo그들이다잘치기만하고다잘생겼으면볼게뭐가있겠

습니까 그 안에는 정말 잘 치는 사람 정말 못 치는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적당한 사람이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끼가 응축되어 만났을 때 정말 좋은 문화

가만들어지는것입니다rdquo

가락과노래놀이가어우러진한마당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있다 양진환 전

수교육조교의 삶 속에도 풍물굿에도 우리가 지켜가야 할

공동체적 성정과 열정이 오롯하게 빛난다 전통문화를 지

켜나가는것이삶의행복이라여기고풍물굿의푸진가락

속에진정한가치를두는양진환전수교육조교현재임실

필봉농악의 상쇠로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양진성 보유자

와 양진환 전수교육조교의 이러한 열정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위한초석이다

ldquo임실필봉농악의 가치라고 하면 마을굿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농악은 대체로 시 단위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풍

물굿은 여전히 마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더욱성장발전시키기위해서는마을자체를지켜

나가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60가구가 살던 마을이 이젠

22가구만남았고그중에대다수가연로한어르신들이에

요 오 년 후만 내다봐도 암담한 현실이죠 그래서 굿판을

좋아하는사람들이들어와살수있는환경을만들려는시

도를몇년전부터하고있어요rdquo

양진환 전수교육조교는 사람이 부족한 보존회의 현실 한

가운데에 있다 굿판을 즐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

은그리녹록치않다하지만양진환전수교육조교는임실

필봉농악이 근본적인 성장을 하여 보존회가 자리를 잡고

나서의미래를꿈꾼다

ldquo정말 편하게 굿을 쳐보고 싶어요 그때 굿판의 미소를 볼

수있지않을까요rdquo

40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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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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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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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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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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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04 가락 악보 05 부들상모

전라도의 좌도굿에서 쓰는 상

모의 하나다 06꽹과리를 칠

때에는 한 손에 쇠채를 쥐고

쳐서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손

은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

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

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을

조절한다 07징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두 감

싸서멀리울려퍼지게한다

04

05

06

07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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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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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2: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궁궐에 색色을 입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4시에는 퇴장 의식만 진행) 취타대吹打隊가

군악軍樂을연주하며광화문안쪽으로들어오고수문장守門將을위시한수문

군守門軍이그뒤를따라대오隊伍를맞춘다조선의법궁法宮 경복궁의광화문

光化門에서 근엄하게 펼쳐지는 수문장 교대 의식 조선 전기 수문장 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연간(15세기)을 배경으로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

군들의근무형식을오늘에옮겨놓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은 왕과 왕실 및 조정의 안전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수문장 제도는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궁중기록화 등을 토대로 2002년부터 재현해온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건축물만이남은정적인공간궁궐이해를거듭할수록생동감과입체

감을입으며살아나고있다

수문장 궁성문과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다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을 정해 교대로

수위守衛하도록되어있었으나경비를보다강화하고자별도의군사를두어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 안위와 권위를 수호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 궁궐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오늘날재현되어궁궐에색色을입히고있다대한제국이후잠들었던궁궐이조금씩제모습을찾아가고있는것이다

수문장교대의식잠들었던궁궐을깨우다

글middot류호철안양대학교교양대학교수 사진middot김병구생동하는문화재현장

42

01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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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3: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책임을 맡긴 것이 수문장 제도이다 예종 1년(1469)에 시작되어 성종 16년(1485)『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됨으로써 법제화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신부(信符 궁궐을 드나들 때 사용한 출입증)를 제시하지 않거나 남의 신부를 빌려서 궁궐

을 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궁궐 문을 닫거나 야간 근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수문장

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고 국문鞠問을 당하기도 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수斬首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밤낮으로 궁성문의 개폐開閉와 출입자의 관리middot감독 등을 수행하였다 인원은 대체로 문마다 수문장 1명 종사

관 1명 수문군 20여 명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 대에 수문장은 서반(무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왕이 임명하여 근무

를 섰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광해군 13년(1621)에는lsquo수문장청守門將廳rsquo이라는 종

6품의 관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2년(1863)에 반포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으나 고종 31년(1894) 근대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문장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문장 교대 의식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다

수문군들은각자의직위에따라철릭(天翼무관이입던웃옷과아래옷이연결된겉옷)과방령方領 등을입고창槍middot검劍middot대도大刀middot활弓middot방패防牌 등으

로 무장하고 있다 초엄(初嚴 첫 번째 북소리)이 울리면 수문장과 그를 따르는 수문군이 행진하여 광화문에 이른다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이

북소리에이끌려모여든다이엄二嚴이울리면교대할수문군이광화문밖으로이동한후당직수문장과교대수문장간에군호(軍號신분

식별을 위해 쓰던 암호나 신호)를 맞춰보고 수문장패守門將牌로써 신분을 확인한다 수문장이 서로 군례軍禮를 나누는 것으로 신분 확인 절차가 끝

나면수문군들이임무를교대한다마지막으로삼엄三嚴이울리면근무를끝낸수문군이퇴장하는것으로의식이마무리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심장부인 궁궐 그 문을 숙위宿衛하던 수문장의 교대 의식이 잠들었던 궁궐을 깨우고 있다 교대를 알리는 북소리는

궁궐문화의일면을우리에게펼쳐주는소통의소리이다

01 비어있던 궁궐에 문화가 채워져 살아있는 궁궐로

거듭나고있다 02 흥례문(2001년)과광화문(2010년)

이복원되어수문장교대의식(2002년~현재)또한본

래자리에서재현할수있게되었다 03 군악을연주하

는취타대 04 교대를위해광화문밖으로나오고있는

수문군

43

02 04

03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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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4: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우연이일구어낸우리들의소중한여정

lt문화재 사랑gt의 10월은 굉장히 분주했다 12월 초 lt문화재 사랑gt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lsquo문화유산탐방rsquo의준비와진행이시작됐기때문이다프로그램구성부터진행상황의세세한

부분까지즐겁고행복한여행을만들기위한여정은그렇게출발했다

이번문화유산탐방은소식지11월호를통해공지가나가독자엽서로신청을받았다200여

명이넘는신청자가여행을희망했고그중에서무작위추첨으로30명의여행단이구성되었

다우연으로만난우리들의여정은마음한켠따뜻한추억으로남을인연을선사했다

2011년12월8일대전역앞에세워진버스에약간긴장된표정의독자들이한명두명자리

를채웠다어색한기운이감돈것도잠시오늘의여행지인경북고령을향해버스가출발하

자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한 사

람당 2분을 채 넘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사

연을들을수있었다

문화재를통한만남여행의기록

첫째날일정은보물제605호고령장기리암각화로시작해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전

시관지산동고분으로이어졌다그야말로대가야의역사를관통하는큰흐름이다또한이

번 여행에서 고령 문화관광해설사 이용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역사와 문화재를 아우르는 전

반적인이야기를아주재미있게들을수있었다

해가 일찍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녹이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고령 개실마을로 이동했다

대가야의문명이깃든땅에서보낸

우리들의행복한시간

2011년12월8일9일이틀간우리들의여행은꿈만같았다일면식도없는사람들

30여명이모여문화재라는주제를가지고여행을떠난다는것이쉬운일이아닐

진데모두가한마음한뜻으로즐거운시간을보냈다그래서우리의만남을필연

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모양이다 겨울바람 속에서 마음이 한껏 따뜻했던

여행그여정을지면에옮긴다

0201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최재만문화재사랑과만나다

lt문화재사랑gt

독자들과떠난가야탐방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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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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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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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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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5: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각자배정된방에짝꿍과함께들어가짐을풀고완전히어둠이깔린개실마을식당으로

다시모였다마을어르신들이마련해주신식사로배를채운후에는정영만보유자의제

자들이펼치는남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제82-라호)을볼수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까만 구름이

하늘을뒤덮은겨울밤이었지만말갛게빛나는웃음이그밤을따뜻하게채웠다새로운

인연속에는많은이야기가숨어있다독자들은한결밝아진표정으로아침을맞았다

여행속만남이남긴따뜻한소회所懷

멀고 먼 청산도에서 참석한 김성호씨는ldquo이곳에 와서 처음 안 것들이 많아요 해인사 와

서팔만대장경을직접보니마음이숙연해지고우리나라에세계유산이있다는것이굉장

히뿌듯했습니다모르는사람들이모여이틀을보내며마음과마음이통했던여행이었어

요우리문화재를더사랑하고다시생각할수있는계기가되어정말기쁩니다rdquo라는이

야기를남겼다모든일정을끝내고대전으로돌아오는길에첫눈이펑펑내렸다마치이

여행의무사안녕과깊은추억을축복하기라도하는듯소담스러운눈이었다

01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

장경이모셔져있다 02lt문화재사랑gt의힘은바로많은독

자들의사랑과관심이다 2011년문화유산탐방은독자들과

함께 해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03중요무형문화재 제82-

라호남해안별신굿마을의평안과장수를기원하며어민들

이고기를많이잡을수있기를비는굿으로남해안의통영

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문화유산탐방

에서는일정상실내에서볼수밖에없었지만흔히볼수없

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정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04합천해인사의아침풍경 051박 2일간문화유산탐방에

참여한독자들은즐거움과추억을가슴에안았다 06문화

유산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며 정을 쌓았던

고령개실마을풍경

03 04

05

06

45

lsquo문화재사랑과만나다rsquo코너는앞으로독자여러분들의문화재탐방기가실리게됩니다

문화재탐방의콘셉트는매월변경되며 양식에맞는원고와사진을보내주세요

2월호콘셉트 lsquo전통의맛을따라떠난식도락여행rsquo

원고양 A4용지기준반장(10point)

사진 해당여행관련사진 10매

보내실곳 문화재청대변인실김지현(freeri28koreakr)

원고마감일 1월 31일까지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46

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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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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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6: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글middot그림middot유환석우리나라국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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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꼬꼬마

학부생 ㅎㅎ

쳇 뭐야

누리야~ 나야

문열어줘

밖에 엄청 추워

마루선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대학원 때문에 바쁘다더니

방학기념으로 왔지

대학원생도 쉴 땐 쉬어야해

내가 놀아줘서 고맙지

그러게 사극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현실감도 있고

재밌더라구~네가 웬 일로 사극이야

시트콤 매니아면서

드라마 보니 세종대왕이

새삼 너무 멋진거 있지

역시 한글의 위대함이란

이그~

그런데 너 훈민정음 창제일이

언제인지는 알아

선배 이래봬도

나 국문학과 학생이거든

한글 무지 사랑해~ 아

근데

그건 그렇고 선배 이 드라마 알아

와 나 사극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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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49

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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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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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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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7

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7: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47

우와~ 그럼 전국 방방곡곡

모두 가보겠네

좋았어

이녀석 공부 좀 해야겠구나

국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

안되겠다 너 방학동안

나랑lsquo국보여행rsquo하면서

공부 좀 하자 국보 여행

숭례문 정도

그래 누리야 집에만 있느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

내가 코스짜고

가이드도 해줄게 어때

내가 우리나라

다 꿰고 있는거 알아 몰라

나만 믿어~

누리와 마루의

우리나라 국보 여행

다음 편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그~ 이럴줄 알았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잘 알아야지

국보는 말야

한글이

국보야

보물이야

선배는

역사공부 하니까

알지

그럼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야

근데 너

국보가

뭔지는 알아

글쎄

국보가 국보지

뭐야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지정한 거야

그렇구나~

국보 국보 말만 많이 들었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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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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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8: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문화재청(청장김찬)은조선왕조도서가100여년만에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1차)를 지난 12월 13

일 종묘 정전에서 12월 16일 강원도 오대산사고와 월정사

에서환수고유제(2차)와국민환영대회를개최하였다

종묘에서 진행된 환수 고유제告由祭 1)는 이봉행렬移封行列 2)과

대국민경과보고고유제집전등의순으로진행되었다환

수 도서 중 상징적 의미가 큰「대례의궤大禮儀軌」를 실은 채

여彩輿3)가국군의장대의호위를받으며종묘정전에다다르

고 봉헌관이 봉안대에 안치하면서 이봉행렬이 마무리되었

고 이봉행렬이 끝난 후 조선 시대 궁중 성악인 정가正歌 방

식으로 환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서 최광식 문화체육

관광부장관등주요내빈의기념사와축사를거쳐조선왕조

도서의귀환을알리는고유제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고유제는종묘제례보존회주관으로영신례(신을모시는절차) rarr

전폐례(향을올리는절차) rarr작헌례(헌관이술을올리는절차) rarr철변두

(제사음식을물리는절차) rarr송신례(신을보내는절차) rarr망료례(축문을태

우는 절차) 순으로 이어졌고 일무(일무전승자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종

묘제례악(종묘제례악보존회)이 동시에 진행되어 고유제의 품격

을더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대례의궤」는 다시 채여에 실어 행렬단의

인도에따라정전을나서국립고궁박물관으로이송되었다

한편문화재청은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강원도청과공

동으로12월16일강원도오대산사고와월정사에서조선왕

조도서 환수 고유제(2차)와 국민환영대회를 개최하였다 오

대산사고앞에서열리는환수고유제는강원도부지사가헌

관으로 참여하였고 월정사에서 열리는 국민환영대회에는

강원도민 정념 스님 등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관계자

강원 지역 정middot관계 인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관계

자가참여하여조선왕조도서의환수를축하하였다

글middot사진middot박정섭국외문화재팀이재순궁능문화재과함께하는문화재청❶

48

조선왕조도서고국귀환을아뢰다

1) 중대(重大)한일을치르고자할때나치른뒤에그까닭을사당(祠堂)이나신명에게고하는

제사(祭祀)

2)중요한의물(儀物)을봉안한가마를모시는행렬

3)조선시대왕실의식때귀중품을실어옮기던가마형식의도구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대한지적공사는lsquo지적제도와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선도

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기위해최선의노력을다하고있다

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은개방하지않으므로그날을이용하여틈틈이기술봉사

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

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이협약rsquo을체결하고문화재의정확한기록보존과보호를위한활동을시작했다

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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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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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7

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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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49: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글middot박세란 사진middot대한지적공사함께하는문화재청❷

첨단기술로문화재의가치를꽃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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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글로벌 기업rsquo을 모토로 국가와 국민에게 보다 신

속middot정확한 서비스 다양하고 편리한 지적정보를 제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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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적공사는 3차원 정밀측량과 관련된 다양한 노하

우를 바탕으로 문화재를 mm단위의 정밀한 3차원 측량

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middot관리 및 활용에 필요한 기본 정

보를 취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2011년 문화재에 대한 안전모니터 및 문화재 주변 환경

정화활동문화재3차원정밀측량및지적관련기술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작년 한 해 동안 126건(1583명)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및 근정전과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한 3차

원정밀측량기술봉사를실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평상시에 일반에 공개되고 매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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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환으로 3차원 정밀측량을 실시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3월~7월)이 소요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목

조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첨단측량장비인 지상라이다를

이용하여근정전내부와외부를정밀측량하는데많은어

려움이있었다하지만삼각산을배경으로펼쳐진근정전

의아름다움을만끽할수있는즐거운시간이었다

또한문화재에대한3차원정밀측량및지적측량기술지

원은 물론 전국에 분포된 대한지적공사의 200여 기관이

분기별 1회 이상 자발적으로 내 고장 문화재의 한 문화

재한지킴이활동을더욱활발하게진행할예정이며전

국방방곡곡을누비는3800여명임직원이문화재안전

모니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활동이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실천을 통해 깨우치고 문화재

의 소중함을 되새겨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되살리는 일

임으로 앞으로 많은 참여문화 확산과 활동에 적극 동참

하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재의 참의미를 되살리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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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직원의문화의식과소양을제고하는중요한시간이

되고있다

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호)는 정부를 대신해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으로lsquo실력middot진화middot품격middot소통rsquo이라는 경영

방침으로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지적제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는 2011년 2월lsquo한 문화재 한 지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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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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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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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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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7

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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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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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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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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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50: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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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퍼즐

김미숙_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죽음 또 다른 삶」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당이나 제사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승과 저승의 공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름다운 공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봉흠_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떠나간 그 분을 애달프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추모하는 제사」를 읽으며 나 자

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의 유래라든가 제사 예법과 상차림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

추 밤 감 배의 상차림 유래 제상 진설의 방위는 신위를 중심으로 해야 혼란이 없고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올

바른 예법이라는 글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이현정_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우주를 읽는 생활 속 과학 윤도」를 통해 윤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

습니다 풍수가들이 자세를 잡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사용되었던 윤도는 조

선시대에서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까지 발달하였다니 윤도가 참 유용하게 쓰였던 일상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우

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음양오행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윤도가 광복 이후 미신으로 치부되어 지금은 그 명

맥만 유지되고 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윤도 속에 흐르는 선조들의 지혜와 사상을 잘 알릴 수 있도록 윤도를 체계적

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김수민_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1동「세계의 고도를 가다 -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습

니다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치기도 했지만 사라져버

린 문화유산도 떠올랐습니다 또 현재 이스탄불의 문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개발에 대해서 많

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순자_ 경남 진주시 상평동 164-4「예인의 숨결을 찾아서」를 평소에 즐겨 읽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느질

로 예술인의 경지에 오른 침선장 구혜자 보유자님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네요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

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물자가 풍부하고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요 한 땀 한 땀 정성과 인내로 살아온 선생

의 삶을 엿보고 저 자신을 다시금 추스를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화재사랑은여러분의소중한의견에귀를기울입니다

독자퍼즐middot독자의소리

독자의소리

lt문화재 사랑gt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lt문화재 사랑gt을 읽고 느낀 점이나 편집실에 바라는lsquo독자

의 말씀rsquo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향후

lt문화재사랑gt편집에반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50

독자여러분의참여를기다립니다

가로열쇠

1 조용한가운데어떠한움직임이있다는단어 우리전통

춤의 고유한 사상이기도 하다

3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

5 독립운동가(1879~1910)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7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

9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10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

르는 말

12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13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

으로 믿음

14 엽전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종이나 헝겊에 싼 다음

나머지 부분을 먼지떨이처럼 여러 갈래로 늘인 장난

감을 차며 노는 놀이의 명칭

16 인천광역시에 속한 섬으로 우리나라 5위의 큰 섬이

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18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세로열쇠

2 김유정이 지은 단편 소설 지주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해학을 가미하여 서술한 작품

이다 1936년에 발표하였다 4월쯤 따뜻한 지방의

해안지역에서 피는 나무의 꽃이기도 하다

4 말과에딸린짐승의등에얹어서사람이타기편리하게

만든 물건

6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임진왜란때불탄것을고종4년(1867)에대원군

이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 선덕 여왕 15년(646)에

자장 법사가 세웠다

11 예전에 청원이 있을 때에 관아에 내던 서면

12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15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 또는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세는 단위

16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17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스마트폰을 통해서도문화재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정신에내재되어있는야성몸짓은

창의적인힘과고유의정서를지니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은면면히이어져오고있는우리것의세계화를위해

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Page 51: 한국문화의세계화 소박함속의야성 · 먹는음식이아주없는것은아니지만우리처럼이렇게가지가지로흔히해먹지는않는다. 정情을나누는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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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바로세우고현대에맞게계승하여

우리의문화가더욱성장할수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